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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ohn Doe
[나도 자존심이 있지 너같은 산 것도 죽은 것도 아닌 후레자식 따위한테 항복할 것 같아?]
"그래, 그러시겠지. 시작은 가볍게 간다."
드레이크가 유천을 금새라도 잡아먹을 듯 강하게 노려보며 외쳤다. 그리고 유천은 당연하다는 듯 고개를 담담하게 끄덕이며 말을 이어갔다. 그러나 가볍다는 말에 맞지 않게 유천의 손가락 위에 나타난 얼음은 결코 가벼워 보이지 않았다.
"프리징 크리스탈."
7서클에 랭크된 고위급 빙계 마법. 결코 가볍다고 볼 수 없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떨리는 드레이크의 눈동자만 보더라도 알 수 있는 대목이었다. 기어이 자신의 다짐마저 돌이키며 드레이크는 크게 외쳤다.
[그만!]
"내가 왜?"
드레이크가 거의 비명을 지르다시피 내지른 고함은 유천의 짧은 반문에 막히고 말았다. 이것은 또 무슨 함정인가, 저 혼자 생각에 빠진 드레이크에게 투명한 얼음 수정을 집어 던지며 유천이 입을 열었다.
"이런이런, 기사단은 적을 무찌르기 전에는 멈추지 않아."
[미친 새끼!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당연하지, 병신아. 넌 이제 뒤졌어."
유천이 손가락을 까딱까딱거리며 혀를 쯧쯧 차면서 말하자, 드레이크가 얼어붙고 있는 제 발등을 뒤로하고 크게 외쳤으나 유천은 고개를 끄덕이며 그에 답했다. 그리고 유천의 손에는 어느새 얼음 알갱이들이 모여 하나의 형상을 만들어가고 있었다.
"Morglay of the glacial(빙하의 대검)."
그리고 그 알갱이들이 모여 덩치를 더 불려갈수록 무력하게도 드레이크의 눈동자는 점점 더 초점을 잃고 흔들릴 뿐이었다. 유천은 그런 드레이크를 내려다보며 한차례 크게 웃고는 드레이크의 상태창을 띄웠다.
[자이언트 인페르노 드레이크]
추정레벨: 572
현재 체력: 18% (상태이상: 출혈, 동상, 느려짐, 혼란, 어지러움, 지능 저하, 빈사)
현재 마력: 0%
적대도: 최상
'어디, 누가 이기나 보자.'
이제 체력도 거의 남지 않은 주제에 자신의 앞에서 똥배짱을 부린 드레이크를 곱게 놔둘 생각이 전혀 없는(사실 처음부터 없었지만) 유천은 속으로 베베 꼬인 속내를 풀어놓으며 팔을 들어 올렸다. 그와 동시에 거대한 대검이 유천의 손 위에서 자리를 잡고 드레이크의 머리를 향하자 드레이크의 눈동자는 이제 거의 사시나무 떨리듯 흔들리기 시작했다.
"시원하겠지?"
[워, 원하는 게 뭐냐!]
그래도 꼴에 목 위에 있는 머리가 장식이 아니란 것인지 유천의 의도를 파악하고 물어오는 드레이크를 보며 유천은 입을 열었다.
"네가, 해줘야 할 일이 있어."
[뭐든 하겠다.]
유천의 말에 당장 고개를 끄덕이며 뭐든 하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는 드레이크를 향해 유천은 입을 열었다. 가벼운 몇마디의 말로 전달 사항을 끝마친 유천은 손에 들고있던 대검을 손을 흔들어 사라지게 하고는 여전히 제 그림자 속에 숨어있던 검둥이를 불렀다.
"따라가. 허튼수작 안 부리나 감시 잘 하고."
그리고는 곧장 제 그림자에서 드레이크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어가는 검둥이를 보며 유천은 주먹을 가볍게 쥐어선 드레이크의 머리를 향해 내밀었다.
[하, 한다고! 왜 또 때리려는 거냐!]
"안 해. 나 안 때려."
겨우 가볍게 주먹을 내밀었을 뿐인데, 격한 반응을 보이는 드레이크를 보며 유천은 한숨을 내쉬며 주먹을 내리고는 투덜거렸다. 유천이 주먹을 내렸음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경계를 풀지 않는 드레이크의 붉은 눈을 쳐다보며 유천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리곤 입을 열었다.
"때려."
그리고, 여전히 드레이크의 옆에서 자리잡고 있던 골렘이 손을 뻗었다. 경계를 하고 있었다고는 하나 유천 한정이었다. 골렘은 솔직히 있는지도 모를 정도로 얌전히 있었으니 관심 밖의 대상이었다. 그런 대상이 주먹을 꽉 쥔 채 제 머리를 내려치자 골이 울리는 느낌에 드레이크는 한차례 비틀거리기 시작했고, 유천은 키득거리며 던전을 나섰다. 그리곤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중얼거렸다.
"내가 뭐 하려고 여길 왔더라? 뭘 잊고 있는 것 같은데."
-외부에서의 메세지가 들어왔습니다. 확인하시겠습니까?
"어."
[언니 왔어. 난 친구들이랑 놀러가니까 잘 해봐.]
"게임 종료."
머리를 긁적거리며 뭔가를 고민하던 유천은 곧 유정이 보낸 메세지를 보자마자 게임을 종료했다. 유천이 잊은 것은 간단했다. 던전에 들어온 목적은 언데드들을 다루는 데 사용되는 비정상적인 소모량을 알아보기 위해서였으며, 잊은 것은 당연하게도 자신의 말만 듣고서 크리스티나를 보고 있을 발록과 라이헤르였다. 물론 유천은 이 사실을 기억하는 데 꽤 많은 시간을 쓰고야 말았다.
"게임은 잘 했어?"
그리고 캡슐에서 나오자마자 자신의 턱을 타고 흐르는 땀을 닦으며 채린이 말했다. '방은 뭐 이렇게 더운거야?' 손으로 제 얼굴을 향해 부채질을 하며 붉어진 얼굴을 감춘 유천은 곧 뭔가 떠올랐다는 표정과 함께 채린에게 고개를 숙이며 외쳤다.
"아침엔 미안!"
"아, 아니 내가 더 미안하지. 네 침대인데 내가 멋대로 쓴 거잖아."
유천이 고개를 숙일 줄은 몰랐던 것인지 되려 깜짝 놀라서는 손사래를 치며 외치는 채린을 보며 유천은 실소를 머금었다. 역시 여태껏 자신이 만난 사람들과는 다르다라는 것을 알게 해줬다. 사소한 것 하나하나, 너무 작아서 눈치 채기도 힘든 것 하나하나마저 여태 자신이 만나본 사람들과 달라서 너무 좋았다.
"그리고 고마워."
제 정체를 알고도 다른 사람들처럼 달라지지 않아서 고마웠다. 가식적인 웃음과 말로 자신의 환심을 사지 않아서 고마웠다. 자신에게 잘 보여 뭔가를 얻어내려 하지 않는 다는 점이 고마웠다. 자신에게 뭐든 주려하는 헌신적인 모습이 고마웠고, 단지 곁에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응?"
무엇이 고마운 것인지 말도 안하고 무턱대고 고맙다는 유천을 보며 고개를 갸웃한 것도 잠시, 유천이 자신을 껴안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라서는 어버버거리며 팔만 허우적거리는 채린의 얼굴을 보며 유천은 피식 웃었다.
"연기는 그렇게 잘하면서. 사람들은 알아? 누나가 이렇게 숙맥인거?"
귀엽다는 듯 그렇게 말하며 채린의 머리에 손을 감아 제 품으로 끌어안은 유천이 연신 키득였다. 숨이 막히는 듯 채린이 주먹으로 유천의 가슴팍을 주먹으로 내리치기 전까지 유천은 채린을 껴안고 있었다.
"그런데, 나 궁금한 거 하나 있어."
"뭔데?"
한참의 애정행각이 끝나고, 자신의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운 유천의 머리를 정리해주며 채린이 말을 꺼냈다. 기분좋다는 듯 눈을 감고서 채린의 손길을 느끼다 유천이 조용히 눈을 떠 채린을 응시하며 말했다.
"그 때, 한국에 있었잖아. 거기 있었을 때, 어떻게 지냈었어?"
"궁금해?"
"껄끄러운 거면 안 얘기해줘도 돼."
무척이나 궁금하다는 얼굴 하고서, 그런 말 하면 반칙이잖아. 한차례 속으로 투덜거린 유천은 채린의 질문에 답해주기 위해 그 때 있었던 일 중에 재미있었던 일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아, 맞다. 그때 내가 유니온 회장님 암살하라고 시켜서 한국에 들어왔었던 거였어."
"아, 암살?"
"그 할아버지 살아있잖아. 안 죽었어."
유천은 킬킬거리며 이야기를 이어갔다 이제 겨우 한마디를 듣고서 저렇게 안색이 새하얗게 질릴 거라면 다 듣는 것도 힘들 것이 분명한데, 궁금하다는 표정 자체는 절대 변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여튼, 그래서 위조 신분이랍시고 대학생으로 만들어줬는데, 하필 신입생인거 있지."
"그래서?"
과장된 몸짓과 행동, 그리고 말투는 채린의 궁금증을 자극하는 데 모자람이 없었다. 곧장 들어오는 반응을 보며 유천은 말을 이었다.
"입학식에 가기 전에 밥을 먹고 나가려고 했는데, 그럴 수가 없었어."
"왜?"
"소피아, 걔 요리 진짜 못하거든."
그리고 마지막 유천의 한마디에 채린의 표정이 굳었다. 이윽고 둘이 같이 살았었냐는 질문에, 재수 없는 놈 하나까지 합쳐서 각자 방 하나씩 잡고 썼다는 말을 덧붙이곤 유천은 말을 이었다.
"그래서 밥을 먹으려고 식당에 가서 비빔밥을 주문하고 화장실에 간 사이에 내가 주문한 비빔밥이 나왔었어."
"으음……."
묘하게 일그러진 표정이었지만 이미 신난 표정으로 말을 하고 있는 유천의 말을 끊을 수는 없었는지 조용히 고개만 끄덕이는 채린을 보며 유천은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 놈이 내 밥을 쳐먹고 있는 거야."
"뭐?"
네 밥을 건드렸다고? 믿을 수가 없다는 듯 자신을 쳐다보는 채린을 향해 한차례 웃어보인 유천은 무언가 휘두르는 시늉을 하고서 말을 이었다.
"내 밥이라고 했는데, 자꾸 쳐먹기만 하면서 비키지도 않길래, 뒤늦게 나온 지 밥그릇으로 뒤통수를 후려줬지. 낄낄."
"푸훗, 그게 뭐야~."
그리고 마지막 결론을 들은 채린은 작게 웃으며 유천에게 말했다. 그리고 유천은 그런 채린을 보면서 작게 웃었다. 그리고 채린이 뭔가 생각났다는 듯 유천에게 말을 건넸다.
"맞다. 아까 전에 내가 집에 올라올 때, 아버님이랑 어떤 허름한 옷 입고 있는 아저씨랑 말다툼 벌이고 있던데? 잘 알고 있는 사람 같았어."
"뭐?"
그리고 유천은 믿을 수 없다는 듯한 표정으로 그에 답했다. 평소 자신에게 장난을 많이 치기는 해도, 제 아버지는 다른 사람에겐 언제나 흠 잡힐 구석이 없는 완벽한 사람이었으니 그런 말을 듣고도 믿을 수 없었던 것이었다. 그런 유천을 향해 진짜라며 계속해서 말하는 채린과 믿는다며 고개를 끄덕이는 유천의 실랑이는 한동안 끝이 없었다.
============================ 작품 후기 ============================
졸려서 리리플 생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