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100/102)

  생명의 나무(1) 

  “이제 오세요?”

 삼신할매와 헤어지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경애가 방긋 웃으며 인사를 건넸다. 

 “어디 갔다 오는 길이야?” 

 “그냥 일자리를 좀 알아보고 다녔어요?”

 대답하는 경애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다. 

 “일거리가 없어?”

 경애는 고개를 흔들었다. 

 “아뇨, 낮에 할 일은 많아요.” 

 “그런데?”

 “밤에 할 일이 없어요. 방학 철이라서 그런지 편의점 알바 일도 다들 꽉 찼네요.”

 경애는 한숨을 포옥 쉬었다. 

 “밤에도 일을 하려고?”

 병규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물었다. 

 그녀가 너무 고생하는 것 같아 걱정이다. 

 하지만 경애는 애써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놀면 뭐 해요? 열심히 돈을 벌어아죠. 그래야 집세도 올려 줄 수 있잖아요.” 

 “집세는 안 줘도 돼.”

 “괜찮아요. 그래도 딴에는 세입자인데 드릴 건 드려야죠. 걱정 말아요, 오빠. 경애는 튼튼한 거 빼면 시체니까요.”

 경애는 소매를 걷어 보이며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하지만 병규는 그녀가 안쓰럽기만 했다. 

 한창 멋을 내고 다닐 나이인데, 일에 파묻혀 살아야 하는 그녀가 딱하다. 

 “자, 맛있는 저녁을 먹고 또 일자리를 찾아볼까.” 

 명랑하게 말한 경애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빌딩 안으로 들어갔다. 

 “병규야, 언제까지 경애를 고생시킬 생각이냐?” 

 어깨에 척 하니 걸쳐 있던 호랭이가 넌지시 말을 건넨다.

 “글쎄요. 어떻게 해 줘야 할지 모르겠군요.”

 그동안 병규는 경애에게 도움을 주려고 노력했다.

 사실 병규의 수입은 결코 작지 않다. 

 딸린 입 하나 정도 해결하는 것은 문제도 아니다. 

 하지만 경애는 받으려 하지 않았다. 

 그녀는 노력해서 얻는 것이 아니면 제아무리 대단한 것이라도 거절했다. 

 병규에게 얹혀살면서도 500원일망정 집세를 꼬박꼬박 챙기고, 설거지와 빨래를 해주는 것으로 부족한 월세를 대신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병규뿐만이 아니라 퀴니도 그녀를 후원하겠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번번이 동정은 받을 수 없다며 거절했다. 

 “남의 도움이 싫다면, 좀 디 쉬운 일을 알아봐 줄 수도 있는 것이 아니겠느냐?” 

 “글쎄요. 저도 생각을 안 해본 건 아니지만 마땅한 일거리가 없네요.”

 “왜 없냐?”

 호랭이가 피식 웃는다. 

 “좋은 생각이라도 있어요?” 

 병규의 얼굴표정이 밝아졌다. 

 이렇게 말할 때의 호랭이는 반드시 좋은 조언을 해주곤 한다. 과연 호랭이는 이번에도 그를 살망시키지 않았다.

 “그녀의 능력을 생각해 봐라. 그녀가 평범한 사람이더냐?”

 “아!”

 병규는 호랭이가 말하는 바를 즉시 알아챘다. 

 그렇다.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는 평범한 인간이 아니다.

 능력자. 

 그것도 꽤 강한 능력자인 것이다. 

 “그래요. 특재대에 그녀를 데려가 봐야겠어요.” 

  쇠뿔도 단숨에 빼랬다고, 병규는 즉시 그녀를 특재대로 데려갔다. 

 “능력자시라고요?” 

 경애를 소개 받은 자영의 눈빛이 범상치 않은 빛을 뿜었다.

 최근 키메라의 압박으로 특재대는 극심한 인원부족 현상을 겪고 있다. 이런 차에 경애라는 능력자가 제 발로 찾아왔으니 버선발로 뛰어가 맞아도 부족할 판이다. 

 “반가워요. 예전에 한 번 뵌 적 있죠?”

 자영은 경애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네. 네.” 

 경애는 어리숙한 모습으로 고개만 숙였다. 

 눈앞의 여자를 어디선가 보았던 것 같기는 한데,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는다. 그보다 그녀는 특재대의 이상한 분위기에 위축되어 있었다. 

 일자리를 소개시켜 준다며 병규가 말할 때만 해도 마냥 기뻤다. 하지만 정작 건물 지하에 숨겨진 비밀 기지로 인도되었을 때는 얼떨떨하기만 했다. 

 “자자. 겁내지 마시고 간단한 테스트를 받아 보시죠.” 

 자영은 경애를 끌고 능력 측정실로 갔다. 

  여러 가지 테스트가 끝나고, 자영이 다시 돌아왔다. 

 “후와. 어떻게 이런 능력자가 지금까지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던 거죠?”

 자영은 혀를 내두르며 경애를 칭찬했다. 

 “그녀의 능력은... 정말이지 놀라워요.”

 연신 ‘wonderful’ 을 외친다. 

 “무지개라고 했나요? 정말 경이로운 능력 이 에요. 원하는 모든 방식으로 운용할 수 있더군요. 안개나 물을 다룰 수 있는 능력자는 여럿 보았지만 그녀처럼 살용적인 능력은 처음이에요.”

 병규는 다소 소란스러운 그녀의 칭잔에 괜히 뿌듯해졌다. 소개시켜 준 사람으로서의 자긍심 같은 것이 있는가 보다. 

 그래도 그녀의 칭찬이 다소 과한 것 같아 슬그머니 물어 보았다.

 “경애의 등급은 어느 정도죠?”

 자영의 대답은 놀라웠다. 

 “지금은 영웅등급이에요. 하지만 그녀의 능력이 깨어난 지 불과 몇 개월밖에 안 된 점을 감안한다면 머잖아 신급으로 진화할 것이 분명해요.”

 병규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그녀의 수호신이 그렇게 대단한가요?” 

 자영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그건 아니에요. 그녀의 수호신인 중명과 귀차는 같은 계열의 불사조보다는 한 단계 아래로 평가되고 있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녀가 중명과 귀차의 화신이기 때문이죠. 알다시피 능력자들은 수호신으로부터 능력을 빌려오는 거에요. 반면 화신은 본신의 능력을 발휘하는 거죠. 능력을 빌려오는 것과 자신이 직접 발휘하는 것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어요.”

 능력자들은 수호신이라는 존재에게서 힘을 빌려 쓴다.

 하지만 경애는 수호신 그 자체다.

 중명과 귀차가 인간으로 환생한 것이기 때문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녀가 서로 다른 속성의 두 수호신의 영혼을 모두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두 개의 수호신이 합쳐졌는데, 하나의 인격만 존재한다니, 정말 놀라워요. 그녀의 독특하고 강력한 능력도 이 때문이죠.”

 “.......”

 “두 신수의 힘이 합쳐지니 굉장한 시너지 효과가 나타나는 것 같아요. 흥미로워요. 솔직히 경애씨의 잠재력은 신급인 불사조를 능가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에요.”

 자영은 쉬지 않고 경애의 능력에 대해 중얼거렸다.

 평소 냉정하고 지적이던 그녀가 이렇게 흥분한다는 것은 그만큼 경애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반증일 것이다.

 “아아. 이럴 게 아니라 당장 그녀와 계약을 해야겠어요. 어떻게 대우를 해줘야 할까. 신급이니 그에 걸맞은 대우를 해줘야겠지.”

 경애가 의료실에서 돌아오자마자 자영은 대뜸 서류부터 들이밀었다. 그 후로 한참 동안 그녀는 특재대에 가입함으로써 얻을 수 있는 갖가지 혜택들을 설명했다. 

 엄청난 연봉, 세금 혜택, 자유로운 출퇴근, 임무 수행 시 소요되는 모든 경비는 국가가 지원한다. 이외에도 항공기를 포함한 모든 종류의 교통수단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다는 등의 상상도 못할 파격 적인 조건들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정작 그녀의 설명을 꼬박꼬박 챙겨 들은 경애는 얼굴색이 그다지 좋지 않았다. 

 “조건이 마음에 들지 않나요?”

 자영이 조심스레 물었다. 

 경애는 고개를 흔들었다. 

 “조건은 과분할 정도로 좋아요. 오히려 그것 때문에 부담이 되네요. 과연 제가 그 정도로 가치 있는 사람일까요?”

 “맙소사. 당신은 정말로 자신에 대해 모르는군요. 당신의 가치는... 뭐랄까, 측정불가예요. 뭐랄까. 기갑사단의 전체 전투능력과 비교할 수 있다랄까.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대단하죠. 경애씨, 자긍심을 가지세요. 당신은 특별해요. 대접 받을 자격이 충분히 있습니다.”

 자영은 열심히 그녀를 설득했다. 하지만 경애의 표정은 여전히 좋아지지 않았다. 고아였던 그녀는 너무 쉽게 얻는 것은 쉽게 사라진다고 굳게 믿었다. 

 그러나 자영 역시 그리 호락호락한 여자는 아니었다. 협상의 천재답게 그녀는 이내 경애의 약점을 찾아냈다.

 “그런데 경애씨. 우리 특재대가 무슨 일을 하는지 알고 계시나요?”

 “무슨 일을 하는 거죠?” 

 경애가 탐탁치 않은 표정으로 되물었다. 이미 그녀는 특재대에 미련을 버린 참이다. 하지만 이어진 자영의 말에 그녀의 눈동자에 요란한 광채가 일었다. 

 “유감스럽게도 지금 세상엔 지구의 평화를 깨 버리려는 사악한 집단이 있답니다. 어둠의 비밀조직이죠. 우리의 임무는 바로 그들의 야욕으로부터 지구를 구하고, 세 계 의 안전을 지키는 것이에요.”

 “네?”

 경애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정의의 사자가 되어 악을 쳐부순다니. 

 건전소녀 경애에게 이보다 더 큰 유혹은 없었다. 

 “정말인가요?”

 “물론입니다. 제가 거짓말을 할 사람으로 보이나요? 모든 건 사실이에요.”

 “오오. 그렇군요.”

 다음부터는 일사천리였다. 

 경애는 자영이 내미는 계약서에 흔쾌히 서명을 했다. 

 이미 그녀의 눈은 정의감으로 불타고 있었다. 세계평화를 위협하는 악당을 제거하기 위해 당장이라도 달려 나갈 태세다. 

“허.” 

 병규는 세계 평화를 외치고 있는 경애를 보며 고개를 설설 저었다. 

 절대 승낙하지 않을 것 같던 경애가 세계평화라는 한 마디에 홍수에 뚝 무너지듯 우르르 무너지고 말았다.

 자영. 

 역시 협상의 스페셜리스트인 구미호답다. 

 어쩌면 특재대에서 가장 제 역할을 잘 해내고 있는 것이 본부장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드는 병규였다.

 “음?”

 병규는 문득 경애의 계약서를 보고 자신의 처우가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정작 자신의 계약은 예전 것 그대로다.

 처음 계약을 맺을 때만 해도 그는 B급 능력자였다.

 중급 영웅 정도라는 소리다.

 당연히 계약 조건 역시 수준에 맞춘 정도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다. 

 병규가 재계약 이야기를 꺼내자 자영의 안색은 순간 해쓱해졌다. 

 “재, 재계약을 하자고요? 저, 정말로 그걸 원하세요?” 

 그녀는 실연이라도 당한 것처럼 처량한 표정을 지었다. 

 큰 눈에서 당장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만 같다. 

 병규는 흠칫 놀랐다. 

 자신이 그녀에게 무슨 잘못을 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단지 계약을 다시 하자는 말밖에 한 적이 없다. 그런데도 자영은 소박당한 여인네처럼 구슬픈 표정으로 신세한탄을 늘어놓는 것이다. 

 “하아. 요즘 특재대 재정이 얼마나 안 좋은지 병규씨는 모르실 거예요. 물가는 오르고, 기름 값도 치솟고, 키메라는 이리 집적 저리 집적거리고 국회의원 나리들은 서로 멱살 잡느라 능력자들의 처우 개선엔 뒷전이고.......”

 마치 준비된 멘트처럼 가련한 넋두리가 술술 잘도 흘러나온다. 그녀의 연기력이 얼마나 대단한지, 괜스레 눈물이 다 나올 지경이다. 

 하지만 병규는 결코 그녀에게 넘어가지 않았다. 

 문득 자영이 원래 구미호였다는 사실을 깨달은 것이다.

 “그래요? 그렇다면 뭐 어쩔 수 있나요? 이 기회에 다른 곳을 알아보는 수밖에.”

 병규가 찬바람이 휙 일 정도로 몸을 돌렸을 때다. 

 “자암깐!”

 미니스커트 차림임에도 과감하게 책상을 타넘으며 달려 나온 자 영이 그의 어깨를 덥석 잡았다.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십니까. 병. 규. 씨? 옛말에 구미호의 말은 끝까지 들어봐야 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입술이 닿을 정도로 얼굴을 들이대며 말하는 자영에게 병규는 능글맞은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방금 전에 특재대 재정이 쪼들려서 재계약이 힘들다고 하지 않으셨나요?”

 “호호. 무슨 그런 말씀을. 아무리 특재대의 재정이 쪼들린다 한들, 어찌 감히 요원 분들의 대우에 소홀할 수가 있겠습니까. 자자, 그만 진정하시고 자리로 돌아가시지요. 호호호~” 

 그날 병규는 흡족한 내용으로 재계약을 맺었다. 

  재계약을 맺은 지 며칠이 지났다. 

 자영한테서 긴급한 연락이 왔다.

 “일거리가 생겼어요.”

 복귀하고 나서 처음으로 부여된 임무.

 병규는 곧장 오토바이를 타고 특재대로 달려갔다.

 호랭이만이 그와 동행했다.

 경애는 아르바이트를 하러 갔고, 퀴니는 학교에 갔다. 샤바는 마그네트에 잡혀 꼼짝달싹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마그네트는 유난히 잠이 많았는데, 잠을 잘 때면 으레 마법으로 샤바를 꼼짝 못하게 만들곤 했다.

 물론 샤바도 혼돈의 능력을 발휘하면 충분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하지만 차마 그러지 못했다. 샤바가 곁에 없으면 잠에서 깬 마그네트가 난동을 부렸기 때문다.

 그래서 샤바는 눈물을 머금고 주인을 보낼 수밖에 없었다.

 “절 잊지 마세요, 주인님. 샤바”

  번화가를 지나 도착한 특재대는 평소와 달리 한산했다.

 “일거리가 있다고요?”

 즉시 대장실의 문을 두드린 병규가 물었다.

 “네. 병규씨가 처리해 주면 고맙겠어요.”

 자영은 언제나처럼 따뜻하게 웃었다.

 “어때요? 이제 좀 새로운 환경에 적응이 되셨나요?”

 “대충은요.”

 집안일도 마무리가 되었고, 이제 슬슬 활동을 재개하려던 참이다.

 “오늘 따라 본부가 많이 한산하네요.”

 입구에서 보안을 점검하는 인원을 빼고는 다른 요원들을 거의 볼 수 없었다. 이 큰 특재대 본부가 텅 비어 버린 것 같다. 

 다들 입원했어요. 

 “네?”

 자영의 대답에 병규는 고개를 호들갑스럽게 놀랐다. 

 능력자들이 죄다 입원하다니. 그가 모르는 새에 큰 싸움이라도 있었던 걸까? 

 병규의 의문을 눈치 챈 자영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설명했다.

 “얼마 전에 이운석군이 가져온 주사제 아시죠?” 

 “능력자의 힘을 제한한다는 그 약 말이냐?”

 병규 대신 호랭이가 물었다. 

 호랭이는 언제나처럼 작은 아기 호랑이 모습으로 병규의 어깨에 축 늘어져 있었다. 

 이 자세가 적잖이 편안한 모양이다. 

 “네. 바로 그 약이요. 어제 의료부에서 치료제가 개발되었어요.” 

 “아. 그래서?” 

 병규의 말에 자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네. 업무가 없는 능력자들은 모두 아침 일찍 백신을 투여 받았어요. 사실 의료부에서 개발한 치료제는 이운석군에게 투여된 주사제 성분을 백 배 정도 희석한 것에 불과해요. 그 치료제 덕분에 다들 축 늘어진 채 끙끙 앓고 있죠.” 

 “일부로 능력을 제한하는 약을 맞았다고요?”

 “홍역 치료제와 같은 원리에요. 능력자들은 일반인보다 강력한 면역기능을 가지고 있어요. 어떤 병이든 걸리면 얼마 지나지 않아 내성이 생기죠.”

 “아. 내성. 그래서 다들 일부로 주사제를 맞은 거군요.”

 “전부는 아니지만 현장에 투입되지 않은 능력자들은 거의 전부 백신을 투여 받았어요.” 

 “그들이 능력을 회복하려면 어느 정도의 시간이 걸리죠?”

 “의료진들의 설명으로는 일주일에서 한 달 정도 갈린다는 것 같아요. 능력자에 따라 치료기간이 달라진다고 하더군요.” 

 자영의 자상한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키메라의 압박은 날이 갈수록 심해지고 있다. 

 이런 상황에서 능력자의 힘을 제한할 수 있는 약물의 등장은 특재대 입장으로선 커다란 위협이 아닐 수 없다. 

 자영의 판단은 옳다. 

 공교롭게도 여유가 없는 상황에서 골치 아픈 사건이 터진 것뿐이다. 그래서 병규에게 임무가 돌아온 갓이다. 

 “이 몸이 해결해야 될 사건이 대체 뭐냐?”

 호랭이가 임무에 대해 물었다. 늘어지게 하풍을 하는 양이 후딱 해치우고 돌아가자는 투다. 

 자영은 고운 이마에 주름을 만들며 한숨 섞인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사건 내용이 정확하게 어떻게 되는지 확실하게 파악되지도 않았어요. 있는 자료라고는 몇 가지 단편적인 정보들뿐이에요.”

 “뭐냐? 설마 확인도 안 된 사건을 조사하라는 건 아니겠지?”

 “그건 아니에요. 정보부에서 보내온 몇 가지 자료를 보면 이번 사건에 키메라가 연관된 것만은 분명한 것 같아요. 다만 표면적으로는 단순한 실종사건이라는 것이 문제죠.” 

 “실종사건 이라. 알겠습니다. 일단 가 보도록 하죠.”

 확실하지 않은 일이라면 현장에서 자세한 정보를 구하면 될 것이다. 이드라센에서 겪은 많은 경험으로 인해 그는 예전의 소극적인 모습과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지금의 병규는 자신감으로 충만해 있었다. 

 “잠깐만요.”

 돌아서는 그를 자영이 붙들었다. 

 “아직 임무의 난이도가 파악되지 않은 상태입니다. 어떤 위험이 도사리고 있는지 알 수 없어요. 그래서 함께 가실 분을 초빙해 두었어요.”

 그녀는 인터폰을 눌러 누군가를 호출했다. 

 “소도님, 잠깐 들어와 주세요.” 

  그의 첫인상을 묻는다면 병규는 웃음소리라고 대답할 것이다 

 “카하하하.”

 문이 열리기도 전에 웃음소리부터 들려왔다. 

 이 웃음소리를 뭐라고 표현할 수 있을까. 

 경박하다? 사악하다? 

 아직 얼굴을 보기 천인데도 소도라는 사람이 결코 평범하지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이유 없이 인상이 자꾸만 일그러진다. 

 단지 웃음소리를 들은 것 때문에 말이다. 

 잠시 후, 중년 사내가 들어왔다. 

 예상과 달리 그는 작은 키에 평범한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을 보는 순간, 병규는 앞으로 평생 동안 그를 잊지 못할 것이란 확신을 가졌다.

 사내의 외모는 특이했다 

 얼핏 보면 잘생긴 듯도 한데, 또 달리 보면 흉악하게 생긴 듯도 했다.

 무엇보다 병규가 놀란 것은 그를 보자마자 불현듯 주먹으로 한 대 때려주고 싶은 마음이 불끈 일어났다는 점이다.

 자영은 이미 그의 마음을 눈치 챈 듯, 또각거리며 다가와 소도를 소개시켜 주었다.

 인사하세요. 중국에서 오신 소도라는 분입니다. 준엽님 의 소개로 오시게 되었어요. 소도씨는 능력자는 아니지만 무공의 대가이십니다.” 

 “네. 처음 뵙겠습니다. 병규라고 합니다.” 

 “그래. 자네가 바로 병규로군. 말은 많이 들어 보았네.”

 소도는 중국 영화의 무인들처럼 손을 마주 잡고 흔들어 보였다.

 놀랍게도 그는 유창한 한국말을 구사했다. 

 생김새도 중국인들보다는 한국인 쪽에 더 가깝게 생겼다. 골격으로 보아 같은 몽골계인 것 같아 보였다. 

 이쯤 되면 친근감이 들만도 하건만, 괜히 주는 것 없이 얄밉다는 생각이 드니 참으로 이상한 일이다. 

 “소도씨는 능력자가 아니시기 때문에 치료제를 맞지 않으셨어요. 게다가 한국에 오신 지 4년 가까이 되셔서 국내 사정에 밝으시니, 임무를 수행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되실 거예요.”

 비로소 소도의 한국말이 유창한 이유를 알 수 있었다. 물론 고작 4년 정도밖에 안 된 소도가 마치 내국인처럼 말이 유창하다는 것이 조금 신기하긴 했지만 말이다. 

 “자. 이제 통성명도 끝난 것 같으니, 작전에 돌입해 볼까요?”

 자영은 간단한 브리핑 내용이 적힌 용지를 병규에게 내밀었다.

 “이곳에 가시면 이미 대기 중인 요원에게서 작전내용을 들으실 수 있을 거예요.” 

  병규는 소도와 함께 일산으로 이동했다. 

 ‘특수임무를 수행하는 요원들이 지하철로 출동이라니 너무한 거 아니야?“

 지하철 구석에 앉은 병규는 투덜거렸다. 

 “캬하하. 운전할 줄 아는 사람이 없으니 어쩔 수 없는 것 아닌가.”

 소도는 비좁은 지하철이 싫지도 않은지 밝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병규는 소도를 힐끔 보았다. 

 그는 뭐가 즐거운지 콧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그 모습이 언뜻 샤바와 비슷해 보였다. 순수함마저 느껴지는 모습. 

 “그런데 왜 아까는 그런 이상한 감정이 들었을까.”

 병규는 불가사의한 물건을 바라보듯 소도를 보았다. 

 여러모로 신기한 사람이다 

 농담을 즐겨했고, 작은 일에도 껄껄거리며 크게 웃었다.

 좌우로 쭉 찢어진 눈이 초승달 모양으로 일그러지며 웃을 때는 눈동자가 아예 보이지도 않았다.

 처음 무공의 고수라는 말을 들었을 때, 그의 움직임을 유심히 살폈다. 무언가 특별한 기상이 풍기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였다.

 하지만 결과는 대실망. 

 그의 움직임은 보통 사람들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호랭이처럼 휘적휘적 힘차게 걷는 젓도 아니고. 이드라센에서 만난 노괴처럼 웅장한 맛이 있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소도의 걸음걸이는 어린아이처럼 가볍고 경쾌했다. 그렇다고 빠른 것도 아니어서,  그저 아이들이 시도 때도 없이 뛸 뿐이었다.

 ‘무공의 고수라더니, 그저 그런 실력인가 보군.’

 호랭이, 노괴와 비교하면 한참 아래로 보였다.

 병규는 소도의 실력에 관심을 끊었다.

 굳이 그의 힘쓸 빌딜 필요도 없다. 무슨 일이든 그가 알아서 다 해결할 테니 말이다. 

 그런 것은 호랭이 역시 마찬가지였다. 

 처음엔 소도를 유심히 살펴보는 것 같더니, 지금은 병규의 어깨 축 늘어 져 도란도란 잠이 들었다. 

 ‘그래도 사람은 참 좋군.’

 그나마 한 가지 마음에 드는 것은 사람이 참 친근하다는 것이다.

 만난 지 이제 고작 한 시간 남짓, 어느새 소도는 이웃집 아저씨처럼 편한 상대가 되었다. 

 첫 대면시의 반감이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친해졌다.

 “소도 아저씨는 결혼을 하셨다고 했죠?” 

 “카하하. 그래. 한참 옛날에 했지. 나중에 기회가 되면 소개시켜 주마. 자랑은 아니지만 내 마누라 사진이는 제법 예쁜 편이라네.”

 병규는 피식 웃었다. 

 마누라 자랑에 여념이 없는 그의 모습을 보니 웃음을 참을 수 없다. 

 소도는 작은 키에 평범한 외모의 소유자다. 

 그런 사람의 처라고 해야 비슷한 수준일 터. 

 침까지 튀겨 가며 마누라 자랑에 열심인 것을 보니 괜스레 마음 이 따뜻해지는 병규였다. 

 지하철을 타고 1시간 30분 남짓. 

 자영이 일러준 곳은 일산 호수공원 근교에 위치한 15층 정도 되 는 빌딩이었다. 

 세계병기박물관. 

 수직으로 건물외벽을 채우고 있는 거대한 팜플렛이 먼저 눈에 들어온다. 

 하지만 팜플렛 아래엔 청원레이크빌이라고 쓰인 작은 현판도 보였다,

 원래는 오피스텔이었을 건물을 박물관으로 개조한 것이다. 

박물관 앞에는 전혀 의외의 사람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 라? 누님?”

 놀랍게도 작전지역에서 기다리고 있을 거라는 요원은 바로 이한영이었다. 

 “어, 어어? 벼, 병규네. 어, 어쩐 일이야. 서, 설마 너도 여기에 볼 일이 있는 거야? 하, 하하. 이거 우, 우연인걸. 아하하하.”

 이한영은 어색한 표정으로 호들갑을 떨었다.

 병규가 올지는 몰랐다는 투. 하지만 연기력이 너무 부족했다. 척 봐도 연기라는 것을 알아챌 수 있을 정도다. 하지만 병규는 웃기만 했다.

 “누님은 그 치료제를 맞지 않았나요?”

 “난 이미 그때 당했거든. 다행히 운석이보다 더 일찍 일어났지.”

 이한영은 팔을 들어 보이며 웃어 보였다.  

 어색한 미소인데도 유난히 밝아 보였다. 

 얼마만의 재회인가. 

 반갑게 손이라도 잡고 크게 웃으며 떠들고 싶은데, 이상하게 생각처럼 되지 않는다. 

 설명 못할 서먹함 때문이다. 

 대범한 이한영도 이런 어색함은 처음이라 불안정한 모습으로 허둥대기만 했다. 

 ”아 소도씨도 계셨군요?“ 

 늦게서야 소도를 발견한 이한영이 방긋 미소 지으며 말했다.

 “쉐쉐. 꾸냥은 갈수록 아름다워지는 것 같소.”

 “후후. 소도씨는 갈수록 아부가 느는걸요?” 

 “카하하. 믿으시오. 당신에 대한 칭찬은 절대로 과찬이 아니니까. 내 부인인 사진이만큼이나 아름답소이다.”

 “어머, 정말요? 혹시 지금 저에게 작업을 거시는 건 아니겠죠? 사진 누님에게 이를 수도 있습니다.” 

 “크∼ 그것만은 제발.” 

 “후후. 여전히 마나님에겐 절대 충성이시군요.”

 “나이가 들수록 마나님 이 무서워집디다.”

 “후후. 그거 좋은 이야기네요.” 

 “어허. 큰일날 소리. 누가 꾸냥을 데려갈지는 몰라도 크게 고생할 것 같소.” 

 “걱정 마세요. 대충 찍어 놓은 사람이 있으니까요.” 

 “호오. 그게 저 청년이었소? 과연 안목이 대단하구려. 오면서 대 화를 나눠 보니 꽤 괜찮은 젊은이인 것 같더군.”

 “아, 아니에요.”

 소도와 이한영은 병규를 흘끔거리며 귓속말을 주고받았다. 그리고 누님과의 해후를 방해받은 병규는 알 수 없는 소외감에 시달렸다. 

 “뭐지? 이 요상한 분위기는?” 

 그리고 또 한 명, 병규에게 묻혀 아예 그녀의 눈에 보이지도 않는 것 같은 호랭이 신선님 .

 “뭐냐? 이 요상한 분위기는?”

  서먹한 만남의 시간이 지나고, 병규는 이한영으로부터 임무에 대한 간략한 설명을 듣게 되었다.

 “아직 정확한 경위는 듣지 못했지만, 이곳에서 의문의 살인사건이 일어났다는 것 같아.”

 “단순한 살인이라면 그렇지.”

 “......?”

 "어제까지 멀쩡하던 사람들이 다음날 아침이 되어 미라처럼 변해서 죽어 버렸다면 분명 문제가 있겠지?"

 “......!”

 미라라면 공포영화에 단골손님으로 등장하는 소재. 하지만 이한영이 말하는 미라는 그런 종류가 아니었다. 전신의 수분이 하나도 남지 않았다는 것이다.

 “더 큰 문제는 최근 이 주변에서 의문의 실종사건이 계속해서 벌어지고 있다는 거야. 불과 일주일 사이에 50여 명의 주민이 실종되었어.”

 “경찰은 뭘 하고 있는 거죠?”

 “물론 총력을 기울여서 수사를 펼치고 있지. 오면서 봤겠지만 백여 명의 전경과 다수의 형사들이 사건 현장을 포위하고 있어. 하지만 아직까지 범인은커녕 사람들이 실종되는 이유조차 파악하지 못한 것 같아.”

 음모의 냄새가 난다.

 이렇게 대량의 경찰 병력이 출동했는데도, 사건이 끊이지 않고 있다는 것은 두 가지를 의미한다.

 범인이 경찰을 두려워하지 않는 다는 것과 경찰의 힘만으로는 범인을 잡을 수 없다는 것.

 “자세한 설명은 이곳 국장에게서 듣자.”

  일행은 박물관의 10층으로 올라갔다.

 외부 인사를 접견하는 넓은 홀은 텅 빈 채 괴이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자리에 앉아 잠시 기다리자, 완고한 인상의 중년인이 나타났다. 한기수라는 이름의 중년인은 이곳 박물관을 책임지고 있는 국장이었다.

 호리호리한 체격의 국장은 가뜩이나 완고한 인상에 딱딱한 표정까지 하고 있어. 처음 만난 사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국장과 함께 비서처럼 보이는 청년 하나와 피처럼 붉은 가사를 온몸에 두른 중년의 승려도 홀 안으로 들어왔다.

 “일본의 법력승이군.”

 승려를 본 호랭이가 한 쪽 눈을 흘겨 뜨며 말했다.

 호랭이는 자신의 말을 필요한 사람에게만 전달할 수 있었다. 지금의 말은 병규와 이한영만 들을 수 있었을 뿐, 국장과 비서는 전혀 듣지 못했다.

 “법력승?”

 “퇴마와 제령을 목적으로 수행하는 승려를 말하는 게다.”

 “쉽게 말하면 요괴 잡는 스님이란 말이군요.”

 병규는 신기한 눈으로 법력승을 주의 깊게 살폈다. 소도와는 다른 면으로 인상 깊은 얼굴이다.

 훤한 대머리만 해도 눈에 확 띄는데, 톱으로 썰어 낸 것 같은 흉터가 얼굴을 사선으로 가리고 있어, 가뜩이나 흉악한 얼굴을 더더욱 흉하게 만들었다.

 괴기한 분위기의 퇴마 영화에나 등장할 법한 인물이랄까.

 사람들을 쭉 둘러본 국장은 병규와 이한영을 발견하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특재대에서 오셨소?”

 이한영이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맞습니다. 자영 본부장님의 호출을 받았습니다.”

 그녀의 당당한 태도에 국장의 뻣뻣함도 다소 누그러들었지만 불만스런 표정은 여전했다.

 “특급 요원들을 불러 달라 했더니 애송이들을 보내 줬군.”

 구시렁거리는 목소리가 분명하게 들린다.

 들으라고 하는 소리다.

 이한영과 병규는 동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소도는 달랐다.

 “뭣이?”

 소도는 당장 소매를 걷고 눈을 부라리며 앞으로 나섰다.

 꼭 동네 불량배와 같은 행동이다. 하지만 건들거리는 행동과 달리 움직임을 가히 빛살처럼 빨랐다.

 움직인다고 싶은 순간 어느새 국장의 코앞에 나타나 주먹을 휘두르고 있었다.

얼마나 빠른지 병규마저 그의 움직임을 제대로 보지 못할 지경이었다.

 “엇!”

 병규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오는 내내 소도를 관찰했다. 하지만 이런 비쾌한 움직임을 보일 줄을 상상도 못했다.

 고수는 움직임 하나에도 현기를 풍기기 마련이다.

 하지만 소도에게선 그 어떤 신묘함도 느끼지 못했다.

 완전히 그에게 속은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다.

 “참으세요.”

 때마침 나선 이한영이 소도를 붙들었다.

 소도는 그녀의 말에 간신히 움직임을 멈추었다. 하지만 여전히 화를 참을 수 없는 듯, 얼굴을 붉히며 씨근덕거렸다.

 보기보다 다혈질인 사람이다.

 소도를 진정시킨 이한영은 이번엔 무표정한 얼굴로 품에서 수첩 하나를 꺼냈다.

 그녀는 수첩을 국장에게 펼쳐 보이며 빙그레 웃었다.

 “애송이라니? 고작 당신 정도의 사람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요.”

 “......!”

 수첩을 본 국장은 표정이 급격히 변했다.

 보잘것없이 보였던 그녀의 직급이 놀랍게도 자신보다 한참이나 위였던 것이다.

 국장은 즉시 허리를 깊숙이 숙이며 사죄를 구했다. 

 “시, 실레했습니다. 미처 알아보지 못하고.”

 땀까지 뻘뻘 흘리는 모습이 적잖이 당황한 모양이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상대는 간단한 말 한마디로 그를 해고시킬 수 있는 직위였기 때문이다.

 “이러실 필요는 없습니다.”

 이한영은 슬쩍 물러나며 그의 절을 피했다.

 아무리 무례한 자라도 나이 많은 사람의 절을 받기는 부담스럽기 마련이다.

 그녀가 수첩을 펼쳐 보였던 것은 국장의 무려한 행동을 징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단순히 비협조적인 사람에게 협조를 요청하는 의미에 불과했다. 국장이 계속 저자세로 나오면 임무수행이 번거로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국장은 결코 안심할 수 없었다.

 잠깐사이 얼굴은 물론이고 온몸이 식은땀으로 뒤덮였다.

 “무슨 수첩이에요?”

 병규가 이한영의 귀에 속삭이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녀는 가지러운 듯 어깨를 움츠리며 소첩을 보여 주었다.

 “그냥 우리 신분증이야.” 

 수첩은 특재대의 신분을 나타내는 신분증이었다.

 “오올~ 우리 신분증이 그렇게 대단한 거였나요?”

 병규의 순진한 물음에 이한영은 그의 어깨를 탁탁 세게 쳐 주며 호탕하게 말했다.

 “물론.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대단해. 하지만 과용은 금물이다. 우리가 직권을 활용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업무에 관련된 일에만 한정되니까.”

 정부는 특재대에 대단한 권한을 주었다.

 일종의 치외법권과 같은 권한으로 웬만한 사건은 그냥 눈감아 준다.

 언제 폭발할지 모르는 폭탄과 같은 능력자들을 달래기 위한 방침이었을 것이다.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 국회 의사당이나 청와대를 날려 버릴 수 있는 것이 바로 능력자들 아닌가.

 그런 이유로 일반적인 법의 잣대가 능력자들에겐 전혀 통용되지 않았다.

 국장은 그런 사실을 알고 있는 몇 안 되는 인물 중의 하나였다.

 “죄, 죄송합니다. 이렇게 귀한 분들께서 왕림하신 것을 미처 알아 모시지 못했습니다. 마,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그, 그럼 전 바쁜 용무가 있어서 이만. 자세한 사정은 비서에게 물어 보십시오.”

 심상치 않은 분위기를 느낀 국장은 서둘러 자리를 피했다.

 이들과 함께 있어서 좋을 일이 없을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이제 국장은 자신의 방에 틀어박혀 어떻게 하면 실수를 만회할 수 있을까 고민할 것이다.

 어쩌면 사과박스 몇 개가 이한영 앞으로 배달될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때였다.

 비서를 제치고 일본 고대 승려차림의 험악한 인상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거칠고 탁한 음성으로 크게 소리쳐 물었다.

 비서가 그의 말을 통역했다.

 “그대들 중 누가 퇴마사인가?”

 “퇴마사?”

 병규와 이한영은 어리둥절해했다.

 일본인 승려가 왜 갑자기 퇴마사를 찾는지 의문이었기 때문이다.

 “흥.”

 퇴마사는 차가운 콧바람을 뀌었다.

 “족보도 없는 미천한 놈들이었군. 그만 돌아가라. 이 일은 애송이들이 나설 만큼 만만한 것이 아니다.”

 분위기 다시 냉랭해졌다.

 다행히 이번만은 소도도 얌전히 있었다.

 사실 그는 박물관에 전시된 유물들을 정신없이 들여다보고 있었다. 특히 중국 명조 때의 병기들에 각별한 관심을 보였다.

 “히야. 이 녀석이 아직 있었구나. 그리운걸.”

 소도는 알 수 없는 소리를 중얼대며 ‘진룡강신검(眞龍降神劒)’이라고 쓰인 고검(古劍)을 정신없이 들여다보았다. 일본인 승려의 말은 아예 귀에도 들어오지 않는 모양이다.

 소도 대신 발끈하고 나선 것은 이한영이었다.

 아름다운 눈썹이 하늘로 추켜 올라갔다.

 그녀는 힘없는 일반인에게 힘을 과시하는 행동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힘 있는 자에게 무시당하는 것은 전혀 별개의 문제다.

 그것은 명예와 관련된 문제이기 때문이다.

 “까까머리 땡추 주제에 겁도 없이 날뛰는구나.”

 차갑고 날카롭게 그녀가 말했다.

 놀랍게도 그녀는 일본어를 유창하게 구사했다.

 “무엇이!!!!”

 법력승은 목에 걸린 인면주(人面珠)를 풀어 팔에 감고 무쇠로 만든 선정으로 바닥을 찍으며 불같이 분노했다. 

 이한영은 화내지 않았다.

 오히려 빙긋 웃었다.

 마치 눈 속에서 핀 꽃처럼 차가운 한기가 느껴지는 그런 웃음이었다.

 그으으으.

 그녀의 전신에서 회색의 기운이 회오리치듯 올라갔다.

 “으음.”

 이한영의 기세에 눌린 법력승도 선장을 두 손으로 받쳐 들고 힘을 기울였다.

 당장이라도 큰 싸움이 일어날 것만 같은 일촉즉발의 상황.

 “저기 호랭이, 법력승이면 무술도 잘해요?”

 느긋한 얼굴로 두 사람의 기 싸움을 보고 있던 병규가 호랭이에게 물었다.

 “당연하지. 퇴마에 법술만 필요한 것은 아니니까. 아마 웬만한 무도가들 보다 뛰어날걸.”

 “그래요?”

 병규는 신기하다는 듯이 법력승을 보았다.

 하지만 여전히 느긋한 태도였다. 이한영의 실력을 믿고 있기 때문이다.

 이한영의 수호신은 불가사리.

 쇠를 자유자재로 다룰 수 있는 능력을 가졌다.

 법력승이 어떤 능력을 구사할지는 모르지만, 전혀 걱정할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다.

 “여, 이건 또 무슨 일이신가?”

 그때, 홀 안으로 두 사람이 새로 들어왔다.

 한 명은 후줄근한 면바지에 헐렁한 티를 대충 구겨 입은 40대 후반의 중년 사내였고. 다른 하나는 30대 초반 정도로 보이는 다부진 몸매의 소유자였다.

 홀 안으로 터덜터덜 들어오는 두 사내는 험악한 주위 분위기에도 태연자약했다.

 “뭐야, 이거. 사건이 터졌다고 해서 나와 봤더니, 폭력배와 승려의 국적을 초월한 한판대결이었나?”

 무례하게 홀 안으로 들어선 중년 사내는 혀부터 쯧쯧 찼다.

 “누군가 했더니 전 형사님과 조 형사님이셨군요.”

 이한영이 사내들에게 아는 척을 했다.

 익히 아는 관계다.

 그다지 친할 수 없는 관계이기도 했다. 

 이한영은 전국의 폭력배들을 총괄하는 위치였고, 두 사내는 형사라는 신분이었다.

 하지만 견원지간이라고 볼 수 있는 사람들 간의 만남임에도 분위기는 나름대로 좋아 보였다.

 사실 형사들은 이한영에게 호감까지 가지고 있었다.

 그녀가 전국의 폭력조직들을 접수한 이후로 조폭들이 마약, 고리대금과 같은 불법적인 사업에서 대거 손을 땠기 때문이다.

 그래서인지 이한영을 대하는 전 형사의 태도는 지극히 우호적이었다. 게다가 그들은 개인적인 친분까지 있었다.

 “허허. 한동안 안 보이더니, 이런 곳에서 다시 보게 되는군. 그래, 이번엔 또 무슨 일인가? 버릇없는 일본인 승려를 길들이는 중이신가?”

 “후후.”

 이한영은 가볍게 웃으며 살기를 풀었다.

 형사들의 출현으로 법력승과 이한영 사이의 일촉즉발의 상황도 일시적이나마 해소될 수 있었다.

 “오랜만이네요, 형사님.”

 전 형사를 본 병규가 앞으로 나섬 아는 척을 했다. 그의 눈에 반가움이 가득했다.

 “응?”

 전 형사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병규를 보았다.

 과연 이 청년을 어디서 보았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입에 문 담배를 빙글빙글 돌리며 골몰하던 그는 얼마 후 그에 대한 기억을 떠올리곤 반가운 표정이 되었다.

 병규의 모습은 많이 변해서 가물가물하지만, 다행히 어깨에 매달린 호랭이를 알아볼 수 있었다.

 “이제 보니 너 이 녀석, 발칸 때 만났던 그 어린 녀석이로구나.”

 전 형사는 병규의 머리칼을 마구 엉클어트리며 반가워했다.

 “그동안 어디에 갔었냐?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들었을 때 얼마나 걱정했는지 알아?”

 “헤헤.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되었네요.”

 전 형사를 만난 병규는 고등학생 시절로 돌아가 코밑을 훑으며 쑥스러워했다.

 “그런데 여긴 어쩐 일이냐?”

 “볼일이 있어서 누님과 함께 왔죠.”

 “너... 설마 조폭이 된 거냐?”

 “하하. 그건 아니에요. 누님과는 어쩌다 보니 같은 일에 종사하게 된 것 뿐이죠.”

 병규의 말에 전 형사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설마 능력자였던 거야?”

 “전 형사님이 능력자를 어떻게 아세요?”

 전 형사는 피식 웃었다.

 “예전의 발칸 일을 계기로 어쩌다 이런 일을 전담하는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나저나 놀라운걸. 그때의 꼬맹이가 설마 능력자가 되어 다시 나타나다니 말이야. 하긴, 발칸을 처치할 때의 움직임을 생각하면 오히려 네가 평범한 인간이라는 것이 더 이상하지.”

 전 형사는 뭐가 그리 즐거운지 껄껄 소리 내어 웃어 댔다.

 “흠. 보아하니 이 녀석도 보통 사람은 아니로군.”

 게슴츠레한 눈으로 전 형사를 보던 호랭이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네?”

 병규는 깜짝 놀랐다.

 보통 사람이 아니면 능력자라는 소리일까?

 이때, 전 형사가 호랭이를 보며 히죽 웃었다.

 “허. 이제 보니 호랭이 신선님이시군요. 자영씨에게서 말은 많이 들었습니다.”

 놀랍게도 전 형사는 호랭이를 알아보았다. 자영까지 알고 있다. 능력자이기에 가능한 일이다.

 병규는 화들짝 놀랐지만 호랭이는 태연스럽게 받아들였다.

 “그 녀석이 또 내 얘기를 수다스럽게 조잘거린 모양이군.”

 “인간계에 있는 어떤 신선 어르신들이 계신지 궁금해서 제가 좀 물어봤죠.”

 “쩝. 그놈의 직업정신인 게로군.”

 “하하. 듣던 대로 까칠한 성격이십니다. 그나저나 전에는 몰라 뵙고 무례를 범했던 것 같습니다. 몰라서 그런 거니 용서해 주시죠.”

 전 형사가 입에 문 담배를 빙글 돌리며 너스레를 떨었다.

 “협박이냐, 부탁이냐? 태도가 어째 그 모양이야! 능청스러운 녀석. 뭐, 됐다. 그런 일로 좀스럽게 굴 내가 아니니.”

 “하하. 과연 듣던 대로 호탕하십니다.”

 전 형사는 뭐가 그리 기뿐지 껄껄 대소했다.

 작은 아기 호랑이를 상대로 주절주절 떠드는 모습이 다른 사람들에겐 이상하게 보일만도 하건만, 전 형사는 타인의 시선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전 형사님. 형사님도 능력자셨군요.”

 병규가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그가 능력자라니 더더욱 반갑다.

 “뭐, 어쩌다 보니 일 년 전에 귀찮은 존재를 하나 영입했지.”

 눈으로 들어간 담배 연기가 매워서인지 그의 미간 위로 굵은 주름이 접혔다.

 수호신이 생긴 것이 꼭 좋은 것만은 아닌 모양이다.

 “그런데 수호신이 뭡니까?”

 병규가 호기심 가득한 눈으로 물었다.

 “아아. 별건 아니야. 윌리엄 텔이라고.”

 “윌리엄 텔이면 헉, 설마 그 백발백중의 명사수?”

 윌리엄 텔은 실좀인물이다.

 스위스가 오스트리아의 지배를 받던 시절 총리의 모자에 경의를 표하지 않아 벌을 받게 되었고, 그 벌로 아들의 머리에 사과를 놓고 활로 그 사과를 명중시킨 일화는 유명하다.

 그런데 전 형사의 수호신이 그 윌리엄 텔이라니.

 전 형사는 씩하고 웃어 보이며 허리춤의 총을 툭툭 두드려 보였다.

 “활 대신 난 이놈이다.”

 별거 아니라는 투로 말했지만, 백발백중 명사수가 되었으니 저격능력으로는 최강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허, 절대 앞으로는 되를 짓지 말아야겠네요. 전 형사님에게 걸렸다간 도망갈 틈도 없이 사살될 테니까요.”

 병규의 괜한 농담에 전 형사는 그의 머리를 마구 헝클어 댔다.

 “녀석, 경찰이 무슨 갱이라도 되는 줄 아냐? 아무 때나 총을 쏘게.”

 “전 형사님이라면 충분히 그러실 겁니다.”

 “하하하.”

 “후후. 맞아요. 전 형사님이라면 충분히 가능하죠.”

 조 형사의 말에 사람들은 껄껄 소리 내어 웃었다.

  “대략 모일 분들은 다 모이신 것 같군요.”

 여태 조용히 있던 비서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시끌벅적하던 사람들이 비로소 고개를 돌려 그를 보았다.

 비서는 20대 초중반의 말끔한 차림의 청년으로 날카로운 눈대메 극히 사무적인 표정의 소유자였다.

 ‘어쩐지 낯이 익은걸.’

 병규는 청년을 어디에서 본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딱히 누군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여기 모인 사람들은 대략 얘기를 들어 알겠지만 최근 이 빌딩에서 이상한 일이 생겼습니다.”

 간단한 말로 주의를 환기시킨 비서는 서류를 한 장씩 꺼대 들어 보이며 자세한 설명을 이었다.

 “지난 4일 오전, 14층 복도에서 날카로운 무기에 난자당한 시체 한 구가 발견되었습니다. 피해자는 전날 야간 당직근무를 서고 있던 경비원으로 살해 시간을 새벽 2시경으로 추정됩니다. 당시 CCTV에 녹화된 영상으로 확인한 결과, 당 경비원은 그 시각 무엇을 보고 놀란 듯 복도로 뛰어나갔고, 그 이후 변을 당한 것으로 보입니다.”

 비서의 딱딱한 말투와 함께 이어진 사건 설명에 주변이 조용해졌다. 산만한 모습이던 소도마저 심각한 얼굴로 그의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두 번째 사건은 이틀 뒤, 이번에도 경비원이었습니다. 야간 순찰을 돌고 있던 경비는 앞서와 같이 시신이 난자당한 채였고, CCTV에 남아있는 영상도 처음 사건과 유사했습니다. 즉, 카메라의 시야 바깥쪽에 일어나는 무언가를 보고 크게 놀라 뛰어나간 뒤 참변을 당한 것입니다.”

 그 사건이라면 병규도 인터넷을 통해 본 적이 있었다.

 ‘제목이 아마 야간 근무자 참변이었지?’

 기사 제목만 휙 보고 무심하게 지나갔는데. 이제 보니 이곳에서 벌어진 사건이었던 모양이다.

 비서의 말이 이어졌다.

 “피해자가 생기자 박물관 측은 사건이 해결될 때까지 야간 당직근무를 금지했습니다. 또 사건이 일어난 14층에 한 해 CCTV 카메라를 세 배로 증설했습니다.”

 말을 마친 비서는 사진이 첨부된 서류를 일행에게 돌렸다.

 “하단부의 시각에 주의해 주십시오.”

 사진의 촬영시각은 7일 새벽 1시 52분. 즉, 어제 새벽에 촬영한 것으로 되어 있었다.

 “앞서 설명 드렸던 것처럼 그제부터 저희 빌딩엔 밤 근무를 금지했습니다. 곧 사진에 찍힌 사람은 무단침입이 되는 것이지요.”

 CCTV 영상을 캡처 한 것으로 보이는 조악한 사진에는 일곱 사람정도의 행렬로 보이는 희끄무레한 것이 찍혀 있었다. 비서의 말대로 야간에 출입을 금했다면, 이들은 무단침입이 되는 셈이다.

 “마치 심령사진 같군.”

 캡처 사진에 찍힌 행렬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이상한 점은 연속 촬영되는 CCTV 영상에서 오직 이 한순간에만 이 정체불명의 사람들이 잡혔다는 것입니다. 갑자기 번쩍하고 카메라 앞에 등장했다가 2, 3초 후엔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사라졌습니다. 저희는 사진에 찍힌 존재가 이번 살인사건과 깊은 관계가 있다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렇게 확신하는 이유는?”

 형사의 직감일까.

 질문을 던지는 전 형사의 두 눈이 예리하게 빛난다.

 “추가 자료가 있습니다.”

 비서는 사람들에게 추가로 세 장의 사진을 넘겼다.

 세 장 중 두 장은 희생자의 생전 모습이었고, 나머지 한 장은 CCTV 영상에 찍힌 의문의 행렬 뒷부분을 확대한 것이었다.

 “이럴 수가.”

 “음.”

 사진을 받아 본 사람들의 입에서 경탄성아 흘러나왔다.

 놀랍게도 희끄무례한 행렬의 맨 끝 두 사람은 이번 사건으로 살해된 희생자들이었다. 특히 희생될 당시의 차림을 그대로 하고 있어 의심을 더욱 증폭시켰다.

 “시치닌미사키(七人ミサキ).”

 법력승이 으르렁거리듯 외쳤다. 그는 사진에 찍힌 의문의 행렬에 대해 무언가 알고 있는 눈치였다.

 “그러니까 이 사진으로 보건데 이번 사건이 심령인지 미스테리 스릴런지 뭔지 하는 그런 류의 것이라 그런 말이오?”

 전 형사가 조금 삐딱한 태도로 물었다.

 그들은 직업상 사진에 찍힌 것이 심령 쪽보다는 누군가의 조작이라는 의심을 먼저 했다.

 하지만 비서의 태도는 확고했다.

 “네. 그렇게 확신하고 있습니다.”

 “허.  무슨 전설의 고향도 아니고.”

 전 형사는 볼 필요도 없다는 듯이 사진을 홱 하고 던져 버렸다. 조 형사가 그걸 받아 들고 앞으로 나섰다.

 “이런 증거물이 있으셨으면 곧바로 연락하셨어야지요.”

 “글쎄요. 과연 그 증거물을 경찰에서 믿어 줄까요?”

 “뭐, 그거야.......”

 비서의 말에 조 형사는 입맛을 다셨다.

 능력자 전담 형사인 자신조차 의심이 들 정도다.

 유령이라니.

 사진 한 장만 보고 덜컥 믿어 주기엔, 과학이란 이름의 마물이 너무 발달해 있는 세상이다.

 “저희에게 보여 주실 자료는 이것뿐입니까?”

 이한영이 비서에게 물었다.

 그녀는 귀신과 같은 자들이 대량으로 찍혀 있는 사진에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런 류의 사건이라면 퇴마사 같은 전문가에게 맡기는 것이 정석이다.

 그녀와 병규가 나선 이유는 단 하나.

 이번 사건이 키메라와 관련이 있다는 제보 때문이다.

 과연 비서는 한 장의 사진을 더 꺼내 보였다.

 “아마도 이것이면 충분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만.”

 무심한 표정으로 사진을 받아 든 이한영의 표정이 일변했다.

 아니, 단순히 표정만 변한 것이 아니다.

 그녀의 주위로 살기가 폭풍처럼 일어났다.

 드드드드드.

 끄그그그긍.

 그녀의 분노에 건물 전체가 흔들리며 비명을 질렀다.

 쇠를 마음대로 다루는 그녀의 능력에 빌딜의 근간을 이루는 철근들이 요동을 치는 것이다.

 “누님.”

 병규가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고개를 돌아본 그녀는 병규의 얼굴을 보고 간신히 진정했다.

 병규는 그녀에게서 사진을 넘겨받았다.

 “이 녀석은.”

 병규의 얼굴 또한 와락 구겨졌다.

 사진에는 눈에 익은 자의 모습이 찍혀 있었다.

 하데스.

 이한영을 납치하고, 이운석에게 수작을 부리려 했던 녀석이다.

 당시 하데스는 병규가 잡아서 가스펠의 특수요원들에게 신원을 넘겨주었다.

 그것이 실수였다.

 아무리 특수요원들이라지만 신급 능력자인 하데스를 잡아두기엔 역부족이었다. 하데스는 헬기로 이송 중 돌연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헌데, 그때 사라졌던 녀석이 놀랍게도 이 빌딩의 CCTV사진에 찍혀 있는 것이다.

 이한영이 왜 그토록 화를 냈는지 알 만하다.

 “어떤가요?”

 비서가 느긋한 음성으로 물었다.

 그는 이미 어떤 대답이 나올지 알고 있다는 듯했다.

 이한영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우리와 무관한 일이 아니군요.”

 최종적으로 병규와 이한영이 합류했다.

 이제 모두가 이 사진의 진위여부를 확인하기로 결정을 내린 셈이다.

 “자, 이제 기다리는 일만 남았군요. 그 사진에 찍힌 것이 정말로 귀신인지 아니면 어떤 놈의 못된 장난인지 조금 후면 확인할 수 있을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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