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98/102)

  병규의 수난시대

  

  “뭐냐, 이게?”

 병규는 벙찐 얼굴이 되었다.

 특재대를 나와 집으로 돌아올 때만 해도 날아갈 것만 같은 기분이었다. 익숙한 골목과 언덕을 지났다.

 처음 그가 기대한 것은 허름한 2층집이었다. 그러나 막상 언덕 너머로 보인 것은 거대한 20층짜리 빌딩이었다.

 “그래, 맞아. 가스펠이 바꿔 줬지.”

 퀴니의 안전을 위해 유럽의 능력자 집단인 가스펠이 그의 집을 밀어 버리고 금속탐지기와 고성등 CCTV로 도배된 첨단빌딩을 지어준 것이다.

 하늘높이 뻗은 20층짜리 빌딩이 자신의 것이라는 생각이 들자 병규는 뿌듯한 마음까지 들었다.

 물론 저 빌딩은 범상한 물건이 아니다.

 겉만 멀쩡하지, 내부를 살파면 지구방위대 사령부나 다름없다.

 옥상의 헬기착륙장.

 빌딩의 앞마당 지하에 매설된 100여 개의 대공미사일.

 정원에 숨겨진 신형 패트리어트 미사일 발사장치.

 외벽에 감춰진 AHED(자기감응유도 방식의 신형 탄약 시스템).

 그야말로 만화에서나 등장하는 비밀기지 수준의 방어 장비들이 아닌가.

 정원의 연못 속에 12단 합체 로봇이 숨겨져 있다는 소문이 허투루 들리지 않을 지경이다.

 그래도 정든 집이다.

 병규는 흥겹게 휘파람을 불며 언덕을 올랐다.

 그런데.

 5년 만에 다시 보게 된 빌딩은 전혀 새로운 면모를 과시하고 있었다.

 “이게 뭐야야야!”

 병규의 비명이 빌딩 주변을 메아리쳤다.

  “그가 도착했다고?”

 병규가 도착했다는 보고를 받은 채드는 서류뭉치를 버려둔 채 1층으로 내려갔다.

 검색대 앞에 우두커니 서 있는 청년을 볼 수 있었다.

 키가 조금 더 커지고, 얼굴 또한 예전과 달리 사내다운 멋이 흐른다. 하지만 채드는 그를 한눈에 알아볼 수 있었다.

 그는 병규를 향해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여, 이게 누군가?”

 하지만 상대의 반응은 그의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병규는 대뜸 눈꼬리부터 뒤튼 것이다.

 “이게 뭐죠?”

 병규는 서로의 코가 닿을 듯이 얼굴을 바짝 들이대며 급한 음성으로 물었다.

 뭔가 켕기는 것이 있는지 채드는 슬쩍 시선을 회피했다. 그러면서도 능숙하게 말머리를 돌렸다.

 “오늘 참 날씨 좋군. 이런 날 자네를 다시 만나니 기쁘기가 한량없네. 허허허.”

 하지만 병규는 그의 화술에 전혀 말려들지 않았다. 그는 웃으며 채드의 손을 맞잡았다.

 아주 꽈악! “저도 반갑군요. 그런데... 왜 빌딩 옆에 공항이 생긴 거죠?”

 그렇다.

 병규가 경악한 것은 바로 이것 때문이다.

 놀랍게도 그의 빌딩 옆에 대형 공항이 생겨 버린 것이다.

 지금도 쉴 새 없이 초대형 비행기들이 긴 활주로를 오르내리고 있었다.

 “험험.”

 채드는 시선을 슬쩍 회피했다.

 하지만 병규는 집요하게 그를 노려보았다. 결국 채드는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험험. 안 계신 동안 이곳을 가스펠의 임시 본부로 사용하고 있었습니다.”

 “호오. 그렇군요.”

 병규는 이해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빈집이었으니 그럴 수도 있다.

 오히려 잘 관리해 줬으니 고마워해야겠지.

 “하지만 공항은 너무 심하군요. 예민한 능력자에게 공항이 얼마나 괴로운 물건인지 모르시는 건 아니겠지요?”

 수십 미터 밖의 낙엽 떨어지는 소리도 선명하게 들을 수 있는 병규다.

 그런 그에게 항공기가 이륙할 때마다 생기는 소음과 진동은 천둥벼락에 대지진을 합친 것 만큼이다. 시끄러운 굉음인 것이다.

 “그것은 알고 있습니다만, 본부운용이 필요한 물자조달과 신속한 요원급파를 위해 불가피하게 공항이 필요하게 되었지요.”

 “불가피?”

 채드의 설명에 병규는 기도 안 찬다는 반응을 보였다.

 “왜 하필 집 옆이냐고요. 좀 떨어진 곳에 자리를 구해도 되는 것 아닙니까. 그리고 빌딩 뒤쪽에 갑자기 큰 강이 생겼던데, 그건 또 무슨 용도죠? 설마........”

 병규의 얼굴이 굳어졌다.

 “당신들 정말로 수로를 판 겁니까? 항공모함을 불러오려고?”

 푸욱!

 정곡을 제대로 찔렀다.

 채드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병규는 어이가 없어졌다.

 “허. 당신들 정말 퀴니의 말 때문에 수로를 판 겁니까!! 그런 거예요?”

 “그, 그것이 사실 수로는 당신이 떠나기 전, 그러니까... 총수님이 아직 계실 때 시작된 것이라. 어쩔수가........”

 “그게 말이 돼요? 고작 중학생 꼬맹이가 원한다고 국토의 절반을 쪼개는 대공사를 번인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아니, 대체 이곳에 항공모함을 끌어와서 무슨 쓸모가 있다는 거예요!”

 항공모함에 공항까지 들어선 병규네 빌딩은 이미 대한민국 딸이 아니다.

 이른다 퀴니 자치국의 탄생인 것이다.

 과연 이 공사를 정부로부터 어떻게 인가 받았는지 의문이다.

 그만큼 가스펠은 총수의 명령이라면 막무가내가 되어 버리는 집단이다.

 병규가 불같이 분노하자 채드는 난처한 입장이 되었다.

 “꼬, 꼭 불편한 것만은 아닐 겁니다. 협조해 주는 대가로 병규씨 앞으로 민간 항공기와 쿠루즈 선박을 무상으로 제공할 생각입니다.”

 병규의 얼굴이 더더욱 험악해졌다.

 “그 유지비는 어떻게 감당하란 말입니까!”

 “무, 물론 유지비는 가스펠에서 부담하겠.........”

 당황한 채드가 빠르게 말을 이어나갈 때다.

 돌연 험악한 인상이던 병규의 얼굴이 손님을 맞는 백화점 점원처럼 상냥하게 변했다. 심지어 그는 채드를 향해 허리까지 꾸벅 숙이기까지 했다. 

 “아이고. 잘하셨습니다. 공항이든 운하든 필요하시다면 만드셔야지요. 앞으로도 맘껏 이용해 주십시오. 아하하. 그런데 항공기와 선박의 인수절차는 어떻게 되는 거죠?”

 “.......”

 채드는 할 말을 잃었다.

 못 본 사이 병규는 가슴이 철렁할 정도로 영악하게 변해 있었다.

  집으로 돌아온 병규는 현대의 생활에 금방 적응했다.

 5년 만이라 많은 것이 어색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쉽게 익숙해졌다.

 물론 문제가 전혀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갑작스러운 실종으로 모든 것이 엉클어져 있었다.

 그는 5년간이나 실종된 상태였기 때문에 학교는 중퇴로 처리되었고, 법적으로는 사망한 상태였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소소한 문제들이 발생했다.

 하지만 대부분 쉽게 해결할 수 있었다.

 특재대의 도움이 컸다.

 권력지관에 상당한 영향력이 있는 특재대는 순식간에 그를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았다.

 복귀한 지 불과 하루 만에 주민증과 따지도 않은 운전면허증, 그리고 특재대의 신분증이 발급되었다.

 하지만 모든 일이 술술 풀린 것은 아니다. 의외의 일들이 그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특히나 그를 난감하게 만든 원흉은 다름 아닌 퀴니였다.

 첫날 저녁, 퀴니는 당당하게 이불 보따리를 챙겨들고 병규의 방으로 들어왔다.

 염소와 양으로 도배된 노란 잠옷을 입고 뽀얀 베개를 챙겨 든 채, 떡 하니 쳐들어온 그녀를 보고 병규는 자지러질듯이 놀랐다.

 “뭐, 뭐냐?”

 야밤에 다 큰 소녀가 이불을 챙겨들고 남정네 방을 찾아왔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당연하다.

 “왜?”

 퀴니는 오히려 병규가 이상하다는 반응이었다.

 “그게 말이다... 퀴니야, 남녀유별이라는 말 혹시 아니? 모른다고? 음... 쉽게 말하자면 남녀 사이엔 아무리 친해도 지켜야 할 것이 있다는 뜻이야.”

 “그게 왜?”

 눈을 동그랗게 뜨며 퀴니가 반문했다.

 “한마디로 퀴니는 나랑 한방에서 지내면 안 된다는 뜻이야. 

 “말도 안 돼.”

 퀴니는 고개를 짤랑짤랑 흔들며 거세게 반항했다.

 절대로 이해 못하겠다는 소리다.

 “전에도 한방에서 지냈잖아. 그런데 왜 지금은 안 된다는 거야?”

 “그때와는 상황이 미묘하게 달라졌잖니.”

 병규는 울상이 되었다.

 당시의 그녀는 꼬맹이였지만, 지금은 제법 커 버렸다.

 같은 방을 쓰기엔 좀 꺼림칙한 면이 있다.

  하지만 이 차이를 설명하기가 힘들다.

  “저, 저기 퀴니야, 그래도 그게 좀 그러니까 말로 설명하기가 좀 미적지근한데 말이다. 하여간 좀 그래. 내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겠니?”

 대체 뭔 소리를 하는 건지 스스로도 모를 지경이다. 당연히 그녀를 설득하는 데도 대실패, 결국 그녀는 병규의 방에 당당하게 입성했다. 

 “뭐, 어쩔 수 없지.”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상황이 조금 난처해지긴 했다. 하지만 워낙에 방이 커서 크게 불편하지는 않을 것이다.

 물론 그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옷을 훌훌 벗는다든지,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갈아입는 것을 목격하는 일이 종종 있긴 했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합의를 볼 수 있었다.

 하지만 병규는 또 다른 난처한 상황에 처하게 되었다.

 “서, 설마 당신도 여기서 살겠다고 말하는 건 아니겠지?”

 “여기서 살 것이다.”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이는 빨간 머리의 아름다운 아가씨를 보고 병규는 한숨을 푸욱 내쉬었다.

 물론 그녀가 병규의 방으로 찾아온 이유는 뻔했다.

 샤바 때문이겠지.

 마그네트는 떡 하니 샤바 옆자리에 자리를 틀고 앉았다.

 병규는 번민에 휩싸였다.

 그 나이 때의 남자에겐 감추고 싶은 비밀이 있는 법. 그런 예민한 나이의 사내 방에 여자가 둘씩이나 쳐들어오다니.

 이렇게 되면 그의 공간은 영영 없어지게 되는 셈이다. 아무리 방이 넓다고 해도 5명의 남녀가 한방을 쓰는 건 좀 많이 불편하다.

 ‘퀴니는 힘들어. 방에서 나가라고 하면 빌딩을 엎어 버릴지도 몰라.’

 결국 차선책으로 선택한 것은 마그네트였다.

 물론 그녀 역시 나가라고 하면 결코 순순히 응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굳이 그녀에게 부탁한 필요는 없다.

 마음을 굳힌 병규는 은근한 목소리로 샤바를 불렀다.

 “다른 방에서 지내라고요, 샤바?”

 “그래, 마그네트 생각도 해야지. 옆방으로 가서 오순도순 지내면 서로 좋지 않겠니?”

 “샤바.”

 병규의 말에 샤바는 돌연 눈물을 글썽였다.

 “주인님. 이제 제가 귀찮아진 거예요, 샤바? 싫어진 거예요. 샤바?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주인님. 샤바샤바.”

 측은함이 울컥 치미는 그런 표정으로 샤바는 애원했다.

 “엥?”

 병규는 황당했다.

 옆방으로 가라는 소리에 이 무슨 삼류 신파극과 같은 반응이란 말인가. 하지만 샤바는 병규의 맘도 모른 채, 버림받기라도 한 듯 서럽게 펑펑 울어 댔다.

 “우와아앙. 절 버리지 마세요. 주인님. 샤바. 엉엉엉.”

 “엥엥?”

 이 돌연한 사태에 병규가 어쩔 줄 몰라 할 때였다.

 “넌 또 왜 샤바를 괴롭히는 거냐?”

 전후사정을 전혀 모르는 호랭이가 샤바를 울리는 병규에게 호통을 날렸다.

 그뿐이면 말도 않는다.

 눈치만 보고 있던 퀴니가 후다닥 달려와 샤바를 덥석 안고는 입술을 삐죽 내미는 것이 아닌가.

 “변기 나빠. 샤바 괴롭히지 마.”

 마그네트 또한 빠지지 않았다.

 그녀는 당장 양손에 화염을 불러일으키며 병규를 협박했다.

 “샤바님을 괴롭히면 네놈의 뼛조각 하나까지 모조리 태워 버리겠다!”

 “엥엥엥?”

 병규의 얼굴이 황당함을 넘어 경악으로 물들어 갔다.

 이때 샤바가 갑자기 그의 바짓가랑이를 붙들고 늘어지며 오열하기 시작했다.

 “주인님, 제발 절 버리지 마세요. 샤바. 제가 그렇게 귀찮으면 책상 밑이나 장롱 밑에 숨어 있을게요. 샤바. 그러니 제발 내치지만 말아 주세요, 샤바샤바.”

 샤바의 행동은 불난 집에 급유 항공기가 추락한 것과 같은 파괴적인 효력을 발휘했다.

 “이노옴!”

 “변기 나빠. 나빠. 나빠.”

 “다~ 죽여 버리겠따아아아아!”

 세 사람의 협박이 극에 이르렀다.

 당장이라도 폭발할 것 같은 기세.

 병규는 화장실로 도망갔다.

 ‘허허. 대체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된 거지?’

 병규는 변기를 붙잡고 허탈한 헛웃음을 삼켰다.

  한바탕 폭풍과 같은 소란이 지나가고, 밤이 되었다.

 이부자리 위에 누운 병규는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꼭 나쁜 것만은 아니구나.”

 병규는 자신의 팔을 베고 잠이 든 퀴니를 보고 빙그레 웃었다. 예전처럼 좁은 방은 아니지만, 이렇게 한방에 호랭이, 샤바, 퀴니가 함께 살게 되니 절로 과거의 행수에 젖게 되는 그였다.

 “그래. 이제야 집으로 돌아온 것 같구나.”

 하지만 병규는 알지 못했다.

 꼭 한방에 살게 되어서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아침이 되었다.

 이불을 둘둘 말은 채 잠자고 있던 병규는 무의식중에 잠이 깼다. 혹시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설마 그 녀석이 울어 대는 건 아니겠지.’

 아침이면 어김없이 울어 대던 그 녀석.

 이미 단순한 가전제품의 영역을 넘어 당당하게 식구의 한 자리를 꿰차고 있는 자명종.

 이계에 가 있는 동안 잊고 있었지만, 집으로 돌아오니 불현듯 자명종에 얽힌 안 좋은 추억이 떠오른다.

 바로 그때였다.

 놀랍게도 혹시나 했던 사태가 실제로 벌어지는 것이 아닌가!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아니나 다를까.

 자명종이 울리자마자 번개같이 일어나는 셋.

 호랭이, 퀴니, 샤바.

 곧 자명종을 줄러싼 박투가 벌어졌다.

 “비켜라!”

 “자명종 줘!”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샤바.”

 “그런데 이거 자명종 쟁탈전인 거냐, 아니면 태그매치인 거냐?”

 “몰라, 암튼 공격!”

 “공격!”

 “환계의 왕자를 얕보지 마라. 샤바.”

 신선, 인간, 환수가 풍차처럼 복잡하게 얽히며 치열하게 다툰다. 

 어찌 보면 미식축구를 연상시키는 놀이다.

 병규는 황당해 하면서도 입가에 희미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아직까지 자명종을 잊지 않은 그들이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든다. 

 아늑한 기분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알지 못했다. 이부자리 한쪽 끝에서 눈을 번뜩이고 있는 빨간 머리 아가씨가 있음을. 

 “호오~.”

  다음날 아침, 병규의 표정은 해쓱해졌다. 

 해가 뜨자 어김없이 자명종이 울었다. 

 어제와 마찬가지로 퀴니, 샤바, 호랭이가 번개같이 일어나 광분하기 시작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괜찮았다. 

 이 정도 소란은 이미 적응이 되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늘은 색달랐다. 

 기존의 맴버에 한 명이 새롭게 추가된 것이다. 

 그것도 최악의 종족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달링을 괴롭히지 말란 말이다!”

 치마를 펄럭이며 거침없이 오버헤드킥을 날리는 그녀. 

 마그네트다. 

 드래곤인 그녀가 자명종 배틀에 난입한 것이다. 

 당연히 마그네트는 샤바 펀이었다. 

 자명종과 한 팀이라 불리했던 샤바에게 마그네트의 참전은 크나 큰 전력이 되었다. 

 마그네트는 기억을 잃었지만 드래곤의 힘만은 제약 없이 사용할 수 있었다. 

 오히려 자제력 없이 마음껏 휘둘러서 더 큰 문제를 야기했다. 자명종은 묘한 중독성을 가지고 있어 신선인 호랭이마저도 이때만큼은 미친 황소처럼 날뛰었다. 

 하물며 자제력과는 거리가 먼 드래곤임에야. 

 드래곤의 브레스가 하늘을 가르고, 위험한 도술이 비처럼 쏟아졌다. 여기에 퀴니의 마법과 샤바의 백성들이 성난 해일처럼 몰아쳤다. 

 기상벨 태그매치는 어느새 자명종 배틀로 변질되어 있었다. 천재지변 수준의 전쟁이 아침마다 벌어졌다. 

 “허허 . " 

 병규는 허탈하게 웃었다. 

 집기들이 몽창 날아가고, 창문이 붙어 있던 자리는 휑하니 뚫렸다. 

 “허허허허.”

 천정은 고열로 녹아 버려 위층이 훤히 보였다. 

 “험험.”

 호랭이도 나름 미안하기는 했는가 보다. 

 연신 불편한 헛기침을 하더니 끝내 한다는 소리가.......

 “험험. 거 통풍 한번 시원하게 잘 되는구나. 답답했는데 잘됐다. 험험험.”

 병규는 코웃음을 쳤다. 

 통풍? 

 물론 잘되겠지. 

 하늘이 휑하니 보이고, 창쪽 벽은 통째로 뜯겨 나갔으니. 정말로 통풍 하나만큼은 시원하게 해결된 셈이다. 

“허허허허허허.”

 병규는 그저 웃었다. 허탈하게 . 

 그나마 다행인 것은 부서진 빌딩을 수리하기 위해 피 같은 돈을 쏟아 붓지 않아도 된다는 점이다. 수리비 청구서를 든 채드는 머리를 쥐어뜯고 있을 것이다. 

 왠지 그 점만은 기분이 좋았다. 

 한편, 자명종 배틀의 양상은 마그네트의 난입으로 새로운 전환점을 맞았다. 

 3연속 샤바의 승리. 

 드래곤의 참전이 승부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샤바는 감격했다. 

 그동안 말도 못하는 자명종과 팀을 짜며 연전연패를 거듭하다 처음으로 승리를 한 것이다. 샤바는 앞으로도 쭈욱 승리할 것이라는 기대에 차 있었다. 

 하지만 감격의 눈물을 흘리는 샤바를 퀴니가 으슬한 눈으로 쳐다보고 있음은 아무도 알지 못했다. 

 과연........

  다음날, 어김없이 자명종이 울렸다. 

 전날 병규가 건전지를 빼 놓았지만, 놀랍게도 자명종은 여전히 우렁차게 울어 댔다. 

 퀴니가 마법으로 수작을 부린 것이다. 

“후꾸닭!” 

 자명종 소리가 울리자마자 맨 먼저 호랭이가 벌떡 일어났다. 그는 일어나자마자 자명종에게 호쾌한 2단 옆차기를 날렸다. 

 “자명종군을 괴롭히지 마라. 샤바.” 

 자명종의 그림자에서 쏙 하고 나타난 샤바가 자명종을 뒤로 던졌다. 

 “나이스. 달링~” 

 슬라이딩 캐치로 자명종을 받아 낸 마그네트가 손을 흔들어 보였다. 하지만 그녀의 자만이 틈을 만들었다. 

 “자명종 내놔.”

 앙칼진 음성과 함께 퀴니가 몸을 날렸다. 

 “흥.” 

 마그네트는 즉시 응수했다. 

 사자가 먹이를 덮치둣 맹렬히 두 손을 휘둘렀다. 

 하지만 퀴니는 온몸을 비틀며 공중 삼회전이라는 놀라운 몸놀림으로 그녀의 공격을 가뿐하게 피해 냈다. 

 육박전에서는 오히려 퀴니가 마그네트보다 한 수 위였다.

 “이젠 내 차례지?”

 날렵한 동작으로 마그네트의 가슴 아래로 파고든 퀴니는 마지 춤 을 추둣 몸을 회전하며 손발을 날렸다. 

 쿵쿵따~ 박자에 맞춰 토마스로 가볍게(?) 시작하더니 숄더스핀, 윈드밀, 나인틴나인티에 이르는 화려한 발차기를 숨 쉴 틈 없이 선보였다. 

 온 사방이 그녀의 발그림자로 뒤덮인 것만 같았다. 

 “앗!”

 깜짝 놀란 마그네트는 그만 자명종을 놓치고 말았다. 

 “내가 잡았다.”

 떨어진 자명종을 호랭이가 재빨리 잡았다. 

 하지만 그가 자명종을 잡은 것은 찰나에 불과했다. 그의 그림자 에서 쏙 하고 나타난 샤바가 발을 붙잡고 늘어진 것이다. 

“나도 잡았다. 샤바.”  

 당연히 달리던 속도를 이기지 못한 호랭이는 콰당 하고 바닥에 엎어졌다. 

 ‘크윽. 비겁한.’

 호랭이의 손에서 굴러 떨어진 자명종이 책상 아래로 데굴데굴 굴러갔다. 

 “이리 나와!” 

 퀴니가 손을 뻗자 화살 모양의 얼음 덩어리가 휙 하고 날아가 책장을 날려 버렸다. 

 콰쾅! 

 폭발음과 함께 나무조각이 비산하며 찌그러진 자명종이 굴러 나왔다.

 병규는 생각했다. 

 참 징그럽게도 튼튼한 자명종이라고. 

 책상은 박살이 났는데, 자명종은 흠집 하나 생기지 않았다. 

 “내가 가질 거야.”

 마그네트가 달려갔다. 

 자명종 쟁탈전에 참여한 지 불과 4일. 짧은 기간임에도 그녀는 누구보다도 몰두하고 있었다. 

 ‘그럴 순 없지.’

 돌연 허공에서 비가 쏟아졌다. 

 아니, 그것은 매직미사일이었다. 

 명중률 100% 를 자랑하는 매직미사일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퀴니가 마그네트를 향해 가차없이 마법을 쏟아 낸 것이다. 

 “감히 누구 앞에서!” 

 마그네트는 당황하기는커녕 콧김을 뿜으며 숨을 한껏 들이켰다. 

 “안돼!” 

 호랭이가 비호처럼 날아들어 막 화염을 토해 내려는 그녀의 턱을 사정없이 올려쳤다. 

 평소의 호랭이라면 절대로 숙녀에게 못할 짓이다. 하지만 지금의 호랭이는 비몽사몽중이라 인정사정이 없었다.

 “꾸엑!”

마그네트의 입에서 뿜어져 나온 화염이 천정을 둥그렇게 녹이며 하늘 높이 솟구쳤다. 어제 급하게 보수한 바로 그 자리였다. 

 호랭이가 마그네트의 공격을 막는 사이 샤바가 재빨리 자명종을 낚아챘다.

 “오늘도 우리가 승리다. 샤바.” 

 샤바가 승리의 노래를 불렀다. 

 마그네트가 온몸으로 퀴니와 호랭이의 접근을 막고 있어, 이대로 승패가 갈리는 것 같았다. 

 바로 그 순간,          

 “나와라!” 

 퀴니가 앙칼진 목소리로 소리쳤다. 

 콰콰쾅! 

 묵직한 폭음과 함께 창문이 달려 있던 벽이 통째로 날아갔다. 깔끔하게 날아간 벽을 통해 괴물이 나타났다. 

 “까드드드드.”

 신장 약 4미터. 

 개구리가 연상되는 지저분한 연녹색의 번들거리는 피부. 

 “스, 스크래그?”

 그것은 스크래그라고 불리는 괴물로, 과거 병규와 호랭이를 고전하게 만들었던 민물트롤이다. 

 “엥 . 샤바?” 

 샤바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는 이 갑작스러운 난입자를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심했다. 

 왜 이 녀석이 성스러운 자명종 쟁탈전에 난입한 것일까 .

 한두 마리가 아니다. 

 떨어져 나간 창으로 스크래그들이 계속해서 올라왔다. 쒹쒹 들리는 숨소리로 보아 적어도 백 마리는 될 듯했다.

 그때, 퀴니가 토토통 뛰어와 스크래그를 팔을 잡았다.

 “얘, 우리 편.”

 “......!”

 “엇!” 

 참가자들의 입에서 경악이 흘러나왔다. 

 설마 퀴니가 이런 식으로 나올 줄이야. 

 드래곤인 마그네트의 참전으로 상황이 불리해지자 몬스터들을 끌어들인 것이다. 

 참가자들이 퀴니의 폭탄발언과 몬스터의 난입으로 잠시 뒤숭숭해 있던 때다. 

 “쓰읍. 오늘은 또 뭐야, 씨발라마!” 

 참다 참다 못 참은 병규가 괴성을 토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분기탱천하여 고함을 지른 그는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렇게 소란스럽더니 지금은 쥐 죽은 듯이 조용하지 않은가.

 ‘이건 또 웬 그늘?’ 

 병규는 부스스한 눈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악어가죽 같은 것이 눈앞에 쭉 펼쳐져 있다. 

 그리고 머리 위엔 커다란 괴물이 그를 흡족한 눈으로 내려다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어디서 많이 보던 녀석이다. 

 “어라?”

 병규가 헛것이 보인다며 뒤통수를 탁탁 두드렸다. 

 이 비현실적인 상황을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납득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가 어리둥절해 하는 사이, 괴물이 그를 내려다보며 볼을 부풀렸다. 

 까드드드드. 

 “에?” 

 병규가 미처 상황을 파악하기도 전, 돌연 스크래그가 그를 덥석 집어 삼켰다. 

 상당히 배가 고팠던 것인지 머리에서 발끝까지 단숨에 삼켰다.

 “꾸에에에엑!” 

 잠이 덜 깬 병규는 갑작스런 불상사에 어찌 손을 써 볼 생각도 못 하고 비명을 질렀다. 

 “헉!”

 “앗. 샤바!”

 “에?” 

 “호호. 고놈 참 꼴좋게 됐다.” 

 세 사람에게서 동시에 헛바람 소리가 터져 나왔다. 유일하게 마그네트만이 병규의 꼬락서니를 보고 깔깔 웃다가 샤바에게 된통 혼났다. 

 “하아.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 " 

 스크래그의 뱃속에서 간신히 탈출한 병규는 빌eld 옥상에 올라가 한 마리 외로운 늑대처럼 울부짖었다. 

 하지만 그의 불행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그날 저녁 잠자기 직전 문 두드리는 소리가 울렸다. 

 똑똑.

 “채드 녀석인가?”

 부스스한 차림으로 문을 열어 준 병규는 뜨악하며 경악할 수밖에 없었다.

 문밖에는 전혀 의외의 사람이 서 있었다. 

 경애. 

 잠시 잊고 있었지만, 그녀 역시 이 빌딩에 입주해 있었다.

 비록 500원짜리 세입자이긴 했지만 말이다. 

 “헤헤헤.”

 토끼와 당근이 그려진 잠옷과 커다란 500원짜리 동전이 프린팅 된 베개를 손에 든 그녀는 병규를 향해 어색하게 웃었다.

 “저기, 그냥 자려고 했는데, 아침마다 보니 여기가 좀 재미있어 보여서. 그래서… 그게… 헤헤헤.”

 “허허허허허.”

 무슨 말이 필요하랴. 

 병규는 그저 허탈하게 웃었다. 

 내일부터는 4파전 양상이던 자명종 배틀이 5파전으로 확장되리라. 아니, 스크래그들이 대거 참가하게 되었으니 무제한 배틀이 된 셈이다. 

 “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허.” 

 병규의 입에서 인생 다 산 늙은이 같은 웃음이 그치질 않았다.

 “차라리 그냥 곱게 죽여라!!!”

 빌딩 옥상에 오른 그의 입에서 한 맺힌 외침이 터져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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