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들의 머리에 절망을 새겨 주마
“날 무시해?”
메두사의 눈에서 불똥이 튀었다.
그녀는 병규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만약 눈빛만으로 사람을 죽일 수 있다면 병규의 몸은 이미 갈기갈기 찢어지고 말았을 것이다.
감히 신화의 한 페이지를 당당하게 장식하고 있는 메두사를 무시하다니. 그녀는 사악한 뱀의 첫 번째 먹이로 병규를 선택했다.
하지만 그녀의 상대는 따로 있었다.
“주인님을 귀찮게 하지마라. 샤바.”
샤바가 입술을 뾰족하게 내밀며 그녀를 막아섰다.
“네까짓 놈이!”
분노가 인 메두사는 안광을 활활 불태워 올리며 샤바를 손가락질 했다.
“돌이 되어라.”
신화의 메두사는 눈을 마주한 상대를 돌로 변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방금 전, 그녀는 라돈을 돌로 만들어 버리며 자신의 능력을 마음껏 과시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샤바에게는 통하지 않았다.
한동안 말똥말똥 메두사의 눈을 바라보던 샤바는 불만스럽게 한마디를 툭하고 내뱉었다.
“눈동자가 빙글빙글 돌아가서 기분 나쁘다. 샤바.”
“......!”
샤바의 말에 메두사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어, 어떻게.”
너무도 놀란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어 걸음 뒷걸음질쳤다.
실상 상대를 돌로 만드는 그녀의 능력은 일종의 최면이었다. 눈동자를 이용한 강력한 최면술로 상대에게 돌이 되는 최면을 거는 것이다.
최면과 자기암시의 위력은 상상이상으로 강하다.
자기암시에 관한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50년대, 컨테이너 운반선의 냉동 컨테이너에 선원이 갇혔던 일이 있었다.
냉동실 안에는 식량이 충분히 있었다. 하지만 냉동실의 추위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는 최후의 힘을 쏟아 쇳조각으로 냉동실 벽에 일기를 썼다.
죽음의 고통을 꼼꼼하게 기록했다.
냉기로 코와 손발이 얼고, 몸이 마비되는 과정을 자세히 적었다.
배가 목적지에 닿았을 때에야 컨테이너 안의 선원이 발견되었다.
선원은 얼어 죽어 있었다.
하지만 놀라운 사실이 밝혀졌다.
컨테이너는 가동되지 않았다. 실제로 냉동고 안의 온도계 눈금은 섭씨 19도를 가리키고 있었다.
그 선원은 냉동실이 가동되고 있다고 믿었다. 단지 춥다는 상상만으로 죽은 것이다.
이 일화는 최면술과 자기암시의 위력을 극단적으로 보여주는 예라 볼 수 있다.
메두사는 바로 이런 최면을 강력하게 발휘할 수 있었다.
그녀의 강력한 최면술은 그리스의 영웅조차 굴복시킬 정도다.
헌데, 샤바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미, 믿을 수 없어. 어떻게 이럴 수가.”
메두사는 경악을 금치 못했다.
하지만 이것은 당연한 결과였다.
애초에 샤바는 인간이 아니다.
인간을 위한 최면술은 당연히 통하지 않는다.
게다가 원래 그가 살고 있던 환계가 환술에 능한 곳이라 메두사의 최면을 가볍게 무시할 수 있었던 것이다.
“쓸모없는 년.”
화가 머리끝까지 일어난 사내는 메두사를 발로 걷어찼다. 그러고도 모자라 비명을 지르는 그녀를 발로 자근자근 밟았다.
이때 바람이 휙 하고 불더니 사내가 짓밟던 메두사가 사라졌다.
“잔인한 놈이군.”
메두사를 구출한 병규의 표정은 차갑기 그지없었다.
심하게 맞은 메두사는 기절해 있었다.
“크으으윽. 이놈, 감히 끝까지.”
메두사를 빼앗김으로 인해 분노를 풀길이 없어진 사내는 길길이 날뛰었다.
“크아아아! 몰살이다. 다 죽여 주마. 모조리 지옥의 아가리로 집어넣고 말 테다!!”
광폭해진 그가 고함을 치자 공장의 천장이 터져 나가며 돌가루가 사방으로 비산했다.
음식 썩은 냄새처럼 시큼하고 불쾌한 악취가 진동했다.
“좀스런 녀석.” 눈살을 찌푸린 병규가 가볍게 발을 디뎠다.
투웅!
활에서 화살을 쏘아 낼 때의 낮고 탄력 넘치는 소음이 울렸다 싶은 순간, 자욱하게 일어난 먼지가 좌우로 쫙 갈라졌다.
어느새 병규는 사내의 코앞에 서 있었다.
“엇!”
사내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멀리서 볼 때와 달리 직접 경험한 병규의 스피드는 섬전 그 자체다.
퍼억!
병규는 놀라는 사내의 안면에 다짜고짜 통쾌한 주먹을 날렸다.
“크아아아악!”
오우거의 힘을 잔뜩 머금은 그의 괴력에 사내는 비명을 지르며 곤두박질쳤다. 바닥에 얼굴을 그어 대며 미끄러지다 벽에 쿵 하고 부딪혔다.
“너처럼 힘 좀 있다고 제 마음대로 날뛰는 놈들이 이 세상에서 제일 꼴 보기 싫어.”
병규는 지금까지 숱한 악당들을 보았다.
그런 류의 인간들이가지는 한 가지 공통점은 양심이 없다는 것이다. 감정이 건조한 사막처럼 메말라 타인의 고통과 괴로움을 전혀 느끼지 못한다.
차가운 독사와 같은 자들.
“끄으.”
구석에 처박힌 사내가 비실 몸을 일으켰다.
흙과 먼지를 뒤집어쓴 낭패한 몰골.
그러나 수십 미터를 날아간 것치고는 비교적 멀쩡한 모습이다.
“퀴, 퀴네에.”
사내가 말하자 금빛 서기와 함께 황금 투구가 나타났다. 그는 황금 투구인 퀴네에를 머리에 쓰며 이죽거렸다.
“이미 지옥의 아가리는 열렸다.”
스르르.
그의 모습이 얼음이 녹듯 사라졌다.
심지어 그림자조차 보이지 않는다.
오직 음침한 웃음소리만이 들려올 따름이다.
“크크크크크크. 이제 죽음이 임박해 왔노라. 지하세계의 왕인 나 하데스가 지옥의 문을 열었으니, 우매한 자들은 영원토록 용암속을 구르며 후회하리라.”
묵직하게 변한 그의 음성은 귀가 따가울 정도로 공장 내부를 왕왕 울렸다.
“...... 하데스. 지옥의 신이로군.”
하데스(Hades)
지옥의 신과 죽은 자들을 다스리는 그리스 신화 최강의 신중의 하나. 하데스라는 이름은 본래 ‘보이지 않는 자’라는 뜻을 가지고 있기도 하다.
“바로 네 녀석이었구나.”
그는 이한영과 같은 능력자가 어쩌다 적에게 사로잡힌 것일까 궁금하게 생각했다.
그녀는 쇠를 마음대로 부리는 불가사리가 수호신이다.
정면승부로 그녀를 이기기는 매우 힘든 일이다.
조폭들의 우상인 그녀다.
싸움 실력으로는 그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
하지만 하데스라면, 그가 가진 능력이라면 가능하다.
살금살금 도둑고양이처럼 접근하여 방심하고 있는 그녀를 제압할 수 있다.
아니, 그였기에 이한영을 사로잡을 수 있었을 것이다.
병규는 하데스의 짓이라고 확신했다.
분노가 활화산처럼 부글부글 치밀어 오른다.
하데스는 그리스의 신.
당연히 하데스를 수호신으로 둔 사내도 신급의 능력자라는 말이다.
더더욱 까다로운 것은 하데스가 가진 황금 투구다.
하데스가 쓴 황금투구는 ‘퀴네에’라고 불리는 것으로, 모습뿐만 아니라 존재감 자체를 완전히 지울 수 있게 해주는 특별한 물건이다.
결국 하데스가 스스로 모습을 드러내기 전까진 그를 찾을 수 없다는 뜻.
“흐흐흐. 내 이미 말했지 않은가? 너희들의 죽음이 임박해 왔다고. 이제 지옥문이 열렸으니 죽을 준비나 하거라.”
그의 음침한 음성이 폐공장을 왕왕 울렸다.
“흠. 과연 아무것도 느낄 수 없군.”
주위를 둘러본 병규는 하데스의 말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예민한 그의 눈에도 하데스의 기척은 전혀 포착되지 않는다.
혹시나 그림자는 남지 않았을까 기대했지만 역시나.
과연 신의 보물이라 불릴 만했다.
하지만 병규는 느긋했다.
이쪽 방면에 최고라고 불릴 수 있는 존재가 바로 그의 옆에 있었기 때문이다.
“샤바야?”
“네. 주인님. 샤바.”
병규의 부름에 샤바는 눈을 초롱초롱 빛냈다.
꼭 강아지 같다.
귀여움이 콧속으로 콱 치민다.
자칫했으면 샤바를 껴안을 뻔했다.
병규는 어색한 헛기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험험. 샤바야, 심심한데 숨박꼭질 놀이나 할까?”
“숨박꼭질요, 샤바?”
머리카락 두 가닥이 더듬이처럼 삐죽 솟았다.
놀이라고 하면 뭐든지 즐기는 샤바다. 더구나 주인이 권하는 놀이라면 더더욱 즐겁지 않을까.
“그래. 숨박꼭질. 방금 전에 사라진 녀석 있지? 그 녀석을 찾는 거야. 녀석을 찾으면 머리를 쓰다듬어 주마.”
“오홋. 샤바!”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는 말에 샤바는 뛸 듯이 기뻐했다.
그 순진한 모습에 병규는 양심이 슬쩍 아파 왔지만 애써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숨박꼭질. 숨박꼭질. 샤바~”
샤바는 눈을 크게 뜨고 공장 구석구석을 살폈다.\
신급 능력자라서 그런지 샤바조차 그의 기척을 잡을 수 없었다. 하지만 샤바에겐 남다른 방법이 있었다.
“백성들아, 모두 이리로 모여라. 샤바.”
샤샤샤샤샤샥
온 사방에서 검은 물결이 우르르 몰려들었다.
“히익!”
“헉!”
병규와 하데스의 입에서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벌레들이 새까맣게 몰려들었으니 정신이 제대로 박힌 사람이라면 놀라는 것이 당연하다.
아까운 것은, 하데스의 목소리가 어디에서 들려오는 것인지 파악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지금부터 반상회를 한다. 샤바. 다들 자리 잡고 앉아 봐. 샤바샤바.”
사각사각사각.
백성들이 바닥에 쫙 깔렸다.
워낙에 샤바의 그림자에 숨어 있던 백성의 수가 많아서 바닥을 검게 메우고도 벽과 천장까지 새까맣게 뒤덮었다.
빈 공간 없이 백성들로 가득 채워진 폐공장.
그곳에 하데스의 흔적이 있었다.
기척, 냄새, 소리 모두 지웠지만, 그의 몸이 차지한 공간만은 지울 수 없었다.
텅 빈 공간에 벌레들이 접근하지 못하는 곳이 포착되었다.
50센티 남짓.
아무것도 없는데, 마치 벽에 막힌 것처럼 벌레들이 진입하지 못한다.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역시 샤바야.”
병규는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샤바샤바.”
병규의 손길에 샤바는 기분이 좋은지 고양이처럼 갸르릉 울었다.
“크악. 벌, 벌레가! 떨어져! 떨어지란 말이다!!!”
하데스의 비명소리가 동굴 안에서 소리치는 것처럼 왕왕 울린다. 샤바의 백성들에 둘러싸이니 참기 힘들 만큼 괴로운 것이다.
그가 움직일 때마다 검은 백성들이 우수수 날렸다. 그의 모습이 확연하게 잡혔다.
만약 다른 능력자였으면 기척을 완전히 지우는 하데스의 능력에 상당히 고전했을 것이다.
샤바에게도 감지되지 않을 정도니, 만약 처음부터 기습을 했다면 꽤 힘들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하데스의 오만이 스스로를 망친 것이다.
“오히려 지옥을 보는 건 네놈인 것 같군.”
벌레들 사이를 정신없이 뛰어다니는 하데스를 보며 병규는 웃음을 금치 못했다. 등장시의 강렬한 존재감에 비해 지금의 하데스는 오두방정 떨 듯 요란하기만 하다.
“지루하니 그만 끝내기로 하지.”
가볍게 발을 움직였다.
퉁!
탄력적인 장탄성과 함께 병규와 하데스 간의 공간이 순식간에 단축되었다.
“엇?”
하데스의 눈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신급의 능력자.
당연히 안력도 보통의 능력자들과는 다르다.
그런데 한순간 애송이의 모습이 시야에서 사라졌다.
채 놀람이 가시기도 전.
“어딜 봐?”
나직한 음성이 등 뒤에서 들렸다.
싸악! 소름이 오싹 돋았다.
감히 고개를 돌려 볼 수가 없었다.
“사람이 말을 하면 얼굴을 보는 게 예의잖아?”
상대가 강제로 그의 고개를 뒤로 돌렸다.
과연 그곳에 있었다.
그의 등 뒤.
눈앞에서 사라졌던 병규가 차가운 눈으로 그를 보고 있었다.
“일단 맞고 시작하자.”
병규가 주먹을 들어 크게 휘둘렀다.
단순하기 짝이 없는 공격.
하지만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피할 수 없었다.
퍽!
“컥!”
경쾌한 타격음과 함께 하데스는 피를 토하며 바닥을 굴렀다. 오우거의 힘으로 힘껏 내리친 주먹이다.
온몸의 뼈가 조각조각 부서지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병규는 바닥을 뒹구는 그를 그림자처럼 따라붙으며 도끼로 장작을 패듯, 호쾌하게 일격을 날렸다.
콰득!
듣기 거북한 파음이 아득하게 울렸다.
뼈 몇 개가 맷돌로 간 것처럼 부서졌다.
“케엑!”
하데스의 두 눈이 튀어나올 듯이 돌출되었다.
하늘에서 떨어진 유성처럼 쿠쿵 하는 장쾌한 폭음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이 거북등 모양으로 쪼개졌다.
하데스는 크게 함몰된 밑바닥에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처박혔다.
“이노옴!”
병규는 불같이 화를 냈다.
하데스 위에 올라탄 채 무자비하게 주먹질을 해댔다.
병규가 주먹질을 멈추었을 때, 하데스의 얼굴은 풍선처럼 팅팅 부풀어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하데스는 기가 죽지 않았다.
“크윽. 네가 이긴 것으로 착각하지 말아...라.”
하데스가 손을 들어 올렸다.
피슉!
그의 손바닥에서 폭죽이 치솟았다. 부서진 천장 위로 솟은 폭죽이 허공에서 하얀 포말을 뿜으며 폭발했다.
“이 녀석이 어딜!”
병규는 힘껏 주먹으로 하데스의 턱을 내리쳤다.
퍽!
“케엑!”
거친 파음과 함께 하데스의 안면이 완전히 뭉개졌다.
하지만 이미 터진 폭죽은 어떻게 할 수 없었다.
“귀찮게 되었군.”
병규는 축 늘어진 하데스를 내팽개치며 혀를 찼다.
그의 말처럼 일이 정말 귀찮게 되었다.
요란한 소음과 함께 공장의 문짝이 부서지며 일단의 무리가 안으로 들어왔다.
하나같이 강인한 기세를 풍기는 능력자들.
그들의 그림자가 출렁이며 수호신의 모습을 그린다.
하반신이 6개의 뱀 머리와 12개의 문어 다리로 이루어진 쌍둥이 괴물, 스킬라, 캐립디스.
반인반수 사티로스.
백 개의 눈을 가진 아르고스.
반인반마 켄타우로스.
이들과 같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의 힘을 받은 자에서부터 아탈란테, 아아손, 테세우스와 같은 영웅급 능력자들이 대거 나타났다.
그들은 하나같이 눈동자가 정상이 아니었다.
반쯤 풀린 동공, 유난히 흰자위가 많이 보이는 눈자위.
그들 역시 헤라클레스처럼 약에 당한 것이다.
제정신이 아닌 채, 하데스의 명령만을 듣게 된 것이다.
“이거 가스펠은 대체 능력자 관리를 어떻게 하는 거야.”
괜히 가스펠에게 불만을 토로하는 병규였다.
갑자기 나타난 능력자들을 한꺼번에 상대하자니 골치가 딱딱 아파 온다. 그런데 엎친데 덮친 격으로 간신히 지하에 잠재워 둔 괴물마저 지상으로 복귀했다.
“크와아!”
거친 함성과 함께 땅이 갈라졌다.
그 안에서 헤라클레스가 기어 나왔다.
“놀라운 힘이군.”
땅을 통째로 갈라 버리고 올라온 것이다.
“헤라클레스까지 돌아왔다라. 이거 난처한걸.”
병규는 고개를 휘휘 내둘렀다.
설상가상이란 바로 이런 때를 일컫는 말일 것이다.
하지만 그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오히려 웃었다.
“돌아오자마자 제대로 몸을 풀게 생겼군.”
팔을 빙빙 돌리며 앞으로 나선다.
“재미있겠다. 샤바.”
샤바가 슬그머니 그를 따라나섰다.
그가 움직이자 폐창고를 가득 메운 백성들이 소란스럽게 울어 댔다.
차각차각차각.
백성들의 소음이 능력자들을 격발시켰다.
“쿠워어어어!”
“크아아!”
각각의 능력자들이 모든 힘을 쏟아 내며 폭풍과 같은 기세로 달려들었다.
병규와 샤바는 의연한 모습으로 그들을 맞았다.
“오라. 너희의 머릿속에 절망이란 이름을 새겨 주마.”
두두두두두!
한적한 시골 상공에 CH-47(수송헬기) 2대와 타이거헬기 7대가 나타났다.
굉음을 뿜으며 공터에 내린 수송헬기에서 일단의 무리들이 날듯이 내렸다. 이상한 것은 군 헬기에서 내린 사람들의 복장이 군복이 아니라는 것이다.
수송헬기에서 요원들이 내리자 공격헬기가 반파된 폐공장의 주위를 포위하듯 감쌌다.
곧 스피커에서 음성이 흘러나왔다.
“치이이익~ 우리는 가스펠 특수 공작부대다. 폐공장의 변절자들은 즉각 투항하라. 치익~ 다시 한번 반복한다. 우리는 가스펠 특수 공작부대다. 변절자들은 투항하라.”
몇 번의 경고방송이 이어졌다.
그래도 폐공장에서는 아무런 반응도 나오지 않았다.
결국 작전 지휘부는 공장 내부로 능력자들을 투입하기로 결심했다.
특수 공작부대를 인솔하고 있는 영웅급 능력자 지크프리드는 휘하의 요원들을 소집하여 작전내용을 확인했다.
“우리의 임무는 적에게 납치된 인질의 안전한 확보와 변절한 그리스 능력자들의 제압이다.”
지크프리트가 무거운 음성으로 작전내용을 말하자 요원들의 표정이 눈에 띄게 굳었다.
이들은 가스펠이 자랑하는 득수요원들로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능력들을 지녔다.
그러나 지금 그들의 얼굴은 긴장으로 얼룩져 있었다.
이곳에 숨어 있는 것으로 파악된 능력자들의 이름을 들었을 때, 그들은 비장한 결심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헤라클레스를 위시한 그리스 신화의 대표적인 능력자들이 대거 포진해 있다는 설명 때문이었다.
‘제발 무사해야 할 텐데.’
요원들을 통솔하는 지크프리트는 이를 으득 깨물었다.
인질을 구하기 위해 단독으로 적진에 뛰어든 병규라는 인물이 걱정되었다.
전설적인 능력자들이 대거 포진한 곳에 홀로 뛰어들다니.
미친 짓이다.
‘그런데 왜 채드님은 그런 이상한 명령을 내린 것일까.’
지크프리트는 채드의 명령을 떠올렸다.
채드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말고 변절한 그리스의 능력자들을 제압하라고 했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는 병규에 대해서는 전혀 걱정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인질을 구출하기 위해 무모하게 뛰어든 병규를 구해 내라는 명령대신, 만약 상황이 겉잡을 수 없이 번지거든 즉시 작전구역에서 물러나라는 이상한 지시를 내렸다.
설마 병규라는 인물 때문에 그리스의 능력자들이 폭주라도 한단 말인가?
알 수 없는 지령이다.
하지만 지크프리트는 더 이상 의문을 떠올리지 않았다.
이곳은 작전구역.
임무 달성에만 심혈을 기울인다.
“다들 알고 있겠지? 빠르게 적을 제압한다.”
지크프리트의 말에 요원들의 눈빛이 변했다.
사나운 기세가 모락모락 피어나더니 그들의 어깨 위로 아지랑이가 일어났다.
“돌격!”
때만 기다리고 있던 요원들이 일제히 바람같이 달렸다.
더러는 하늘을 날듯이 솟구치며 붕괴된 천장을 타넘고, 일부는 땅속으로 스며들어 내부로 침입했다.
“이럴 수가.”
여러 루트로 잠입한 요원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적을 제압하고 인질을 확보해야 한다는 애초의 사명은 그만 잊어버리고 말았다.
너무도 충격적인 모습이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지휘자인 지크프리트조차 헛바람을 삼키며 우두커니 서 있었을 정도니, 그들의 놀람이 얼마나 컸는지 익히 짐작할 만할 것이다.
공장 내부는 그야말로 쑥대밭이었다.
마치 산처럼 거대한 거인이 마음대로 날뛰다 사라진 것같은 모습이다. 과연 인간의 능력으로 이런 일이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정도. 하지만 요원들을 놀래게 만든 것은 따로 있었다.
함몰되고 부서진 바닥에 20여 명의 사람들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심한 격전을 치른 듯 온몸이 엉망진창으로 망가져 있다.
팔이나 다리가 부러진 사람은 부지기수고, 온몸에 피멍이 들거나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맞은 사람도 보인다.
“맙소사. 이 사람은 헤라클레스가 아닌가.”
“아, 아킬레우스! 이자도 이곳에 있었군.”
요원들은 긴장을 잊고 어수선해졌다.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는 영웅급 능력자다.
특수요원들을 이끌고 있는 지크프리트에 버금가는 존재.
요원들은 치를 떨었다.
보고된 것보다 엄청난 존재들이 이곳에 있었다.
만약 이들이 온전했더라면 요원들의 피해는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컸을 것이다. 아니, 임무자체가 불가능한 미션이었을 것이다.
“으음.”
지크프리트는 침음성을 삼켰다.
얼굴을 알아보기 힘들 정도로 엉망이 된 사람의 신원을 확인한 후의 반응이다.
뒤늦게 그의 신원을 확인한 요원들은 비명과 같은 경악성을 내질렀다.
“하, 하데스!!”
지옥의 신.
영웅급 능력자 50명에 버금간다는 신급 능력자가 이곳에 누워있는 것이다.
“맙소사, 신급이라니!”
하데스까지 있었다면 이 인원으로는 도저히 공략불가능하다. 아니 전멸을 피할 수 없다.
그런데 신급 능력자인 하데스를 비롯하여 영웅급 능력자 20여 명이 시체처럼 널브러져 있다.
마치 강력한 폭풍이 휩쓸고 간 듯한 모습.
지크프리트를 위시한 요원들은 입을 다물지 못했다.
놀라운 일이다.
지금 여기 누워 있는 능력자들이라면 웬만한 나라 하나는 순식간에 불바다로 만들 수 있는 전력이다.
그런 엄청난 능력자들이 무더기로 쓰러져 있으니 그가 놀라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지크프리트는 황망한 시성으로 한 사내를 보았다.
그리스의 능력자들이 화물선에서 쏟아 낸 생선더미처럼 쓰러져있는 한가운데, 기묘한 분위기를 풍기는 청년이 서 있었다.
병규였다.
“이...... 이걸 정말 당신 혼자서?”
지크프리트가 멍한 얼굴로 물었다.
“귀찮은 날파리 몇을 때려잡은 것뿐입니다.”
병규는 정말로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실제로 그는 등에 업고 있는 이한영에게만 신경을 쓰고 있었다.
“급한 환자가 있소. 당신들이 타고 온 헬기를 빌릴 수 있겠소?”
병규의 물음에 지크프리트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끄덕였다.
“고맙소.”
짧은 말로 감사를 표한 병규는 뒤처리에는 관심이 없는 듯, 이한영을 안고 헬기로 뛰어갔다.
휘이잉~
반파된 폐공장 안으로 휑한 바람이 날아 들어왔다.
“하데스, 헤라클레스, 아킬레우스가 날파리라니.”
지크프리트는 복받쳐 오르는 충격을 주체할 수 없었다.
키메라의 야욕을 번번이 꺾으며 위상을 과시한 동방의 작은 나라. 그동안은 단순히 운이거나 지리적 이점 때문이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는 자신의 생각을 황급히 수정해야 했다.
그리스의 능력자들을 수습하면서 지크프리트는 다시 한번 놀라게 되었다.
많은 능력자들이 쓰러졌음에도 죽은 사람은 한 명도 없었다.
적을 죽이는 것은 어렵지 않다.
그저 상대보다 조금 더 강하면 된다.
하지만 상대를 죽이지 않고 제압해야 한다면 얘기가 전혀 달라진다.
그야말로 압도적인 능력을 가져야 가능하다.
상대가 싸움에 능한 인물이면 난이도는 더욱 올라간다.
“맙소사. 정말로 괴물 같은 자로군.”
지크프리트는 혀를 내두를 수밖에 없었다.
병규는 헬기 조종사를 반 협박하다시피 하여 특재대로 이한영을 수송했다.
이한영은 무사했다.
그녀는 이운석이 맞은 것과 같은 약물에 중독된 상태였다. 다만 투여된 약물의 양이 워낙 과다해서 전신무기력증과 졸음 증상을 겪은 것이다.
이 특수한 약물은 능력자의 능력을 일시적으로 제한하는 효력을 가지고 있었다.
“걱정 말아요. 능력자들은 대단한 존재들이에요. 이런 약 따위는 금방 이겨낼 거에요.”
자영은 이런 말로 병규를 진정시켰다.
아무리 최하급의 능력자라도 병이나 독에 대한 면역기능은 일반인의 몇 배나 된다.
기실 이한영과 이운석에게 투여된 약도 보통 사람이라면 충분히 죽을 정도다.
전신 무기력증.
졸음 현상.
근육신경에 직접 작용해 활동을 억제한다.
일반인이 이 약에 노출되면 뇌사환자처럼 온몸을 움직일 수 없게 한다. 심지어 눈꺼풀조차 깜빡일 수 없게 되고, 결국은 호흡곤란으로 사말하게 된다.
코끼리를 대상으로 한 실험에서도 단 10분 만에 사망이라는 충격적인 결과를 도출했다.
하지만 능력자들은 다르다.
그들의 몸은 약에 노출되자마자 즉각 항체를 형성하여 독성에 대항했다.
“한번 노출된 병과 독에는 더 이상 당하지 않아요. 항체가 형성되기 때문이죠. 비슷한 종류의 독에도 격렬하게 반응하죠. 다만 능력자들의 체내에서 생성되는 항체는 일반인들에게 사용할 수 없어요. 이점이 참 아쉬운 점이죠.”
만약 능력자들의 항체를 일반인들에게 적용할 수 있다면 더 이상 병으로 고통 받는 사람은 없어질 것이다.
병규는 약의 효력이 일시적이라는 말을 듣고서야 안심했다.
아직 누님은 깨어나지 못하고 있지만, 상당히 안정적인 상태라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나저나 너무 오랜만에 재회하는군요.”
자영은 씽긋 웃으며 손을 내밀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녀의 손을 가볍게 맞잡았다.
“대충의 이야기는 호랭이님에게 들었어요. 정말 놀라운 일들을 겪으셨더군요, 그런데 오자마자 너무 큰일을 터트리신 것 같군요.”
“뭐, 어쩌다 보니.”
“영웅급 능력자를 20명이나 해치우는 일이 어쩌다 가능한 일이라면 제대로 마음만 먹으면 세계라도 정복하시겠는데요?”
자영의 짓궂은 농담에 병규는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호랭이는요?”
“의료부서에 잠깐 가셨어요.”
최근 키마라에서 ‘고’라는 벌레로 능력자들을 조종하고 있다는 사실이 밝혀졌다.
호랭이는 이드라센에서 이미 ‘고’를 취급한 경험이 있었다. 그 때문에 의료부서에 상담역으로 행차한 것이다.
“어때요? 새로운 특재대가? 분위기가 좀 달라졌죠?”
“그렇군요. 전에는 좀 차분한 분위기였는데, 지금은 활발하다고 할까, 들떠 있다고 할까. 아무튼 좀 더 활동적으로 변한 것 같군요.”
“그럼요. 이래 봬도 세계를 정복하려는 키메라의 야욕으로부터 대한민국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인걸요. 바쁘게 움직여야지요.”
“하하.”
병규는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런데 안 보이는 분들이 많군요.”
과거에 특재대의 주축을 이루던 많은 요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배기철, 조준엽, 권예란, 김한식, 전경희........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인물만도 10여 명.
그런데 특재대에 온 이후로 아직 한명도 못 만나 봤다. 그렇다고 본부다 텅 비어 있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과거보다 많은 사람들이 활기차게 움직이고 있었다.
하지만 대부분이 생소한 얼굴들이었다.
“임무에 파견되었어요.”
자영의 표정이 밝은 것으로 보아 큰 불상사는 없는 듯하다.
키메라의 침입은 각계 다방면으로 이루어졌다.
정면으로 승부하는 직접 공격은 물론이요, 정신조작과 같은 간접공격도 비일비재로 이루어졌다.
국회의원들에게 수작을 건 것도 몇 번이나 감지되었다.
치열한 암투가 벌어지고 있음에도 일반인들은 전혀 눈치 채지 못하고 있다.
그저 최근 ‘키메라’라는 이름의 다국적기업이 미디어를 통해 자주 언급된다는 정도만 알 뿐이다.
그런 음모들을 사전에 차단하는 것이 특재대의 일이다.
당연히 바쁠 수밖에 없다.
게다가 병규가 기억하고 있는 인물들은 특재대의 초대멤버들로 지금은 중요한 요직을 담당하고 있었다.
본부장인 자영조차 일 년에 몇 번 정도 얼굴을 볼 수 있을 정도다.
“한영씨는 당분간 안정을 취하는 것이 좋을 거예요. 일단은 깁으로 돌아가 쉬세요. 경과를 보고 변화가 있으면 알려드릴게요.”
자영의 권유에 병규는 아쉬운 마음을 뒤로 하기로 했다.
돌아서는 그에게 자영이 한마디를 던졌다.
“돌아와 줘서 기뻐요.”
진심이 느껴지는 말이었다.
병규는 그녀를 향해 빙그레 웃었다.
“저도 기쁘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