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제 안가는 거지?
‘이곳이 지구.......’
한껏 심호흡을 한 뒤 병규는 저도 모르게 빙그레 웃었다.
그다지 별다를 것도 없는데, 왠지 모르게 마음이 들뜬다. 오랜 타향살이 끝에 고향으로 돌아온 탕아의 심정이랄까.
그저 돌아왔다는 사실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졌다.
“자네... 전과는 많이 달라진 것 같군.”
이운석이 불쑥 말했다.
병규는 입가에 미소를 지으며 대답했다.
“고향으로 돌아오니 즐거워서 그런 것 같아.”
이운석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다.
“아니야. 어째... 사내가 된 것 같다.”
“하하. 너야말로 많이 변했구나. 수염도 제법 난 것 같고.”
이운석은 병규의 배를 힘없이 치며 툴툴거렸다.
“당연하지. 5년이나 지났는데.”
“5년이라.......”
병규의 표정이 착잡해졌다.
그새 5년이 흘렀단다. 아공간을 지나는 동안 또 시간이 변덕을 부린 모양이다.
한편, 병규와 이운석이 즐거운 해후를 나누고 있을 때, 늑대인간들을 부리던 카일은 갑자기 등장한 사람들의 면면을 살피며 고민에 빠졌다.
‘사람이 어떻게 그렇게 빨리 달릴 수 있는 거지?’
방금 병규의 엄청난 스피드에 왈칵 두려움이 인 것이다.
그의 움직임을 떠올리니 등줄기에 식은땀이 줄줄 흘려내린다.
기린은 두려운 수작으로 잡을 수 있었지만, 과연 새롭게 나타난 자들에게도 통할지는 미지수.
‘제길. 예상 빡의 일인걸. 저렇게 우르르 몰려올 줄이야. 어쩌지? 그냥 도망칠까? 아니면.......’
이렇게 많은 능력자들을 한꺼번에 잡아들인다면 분명 큰 상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욕심을 따르기엔 이들의 분위기가 너무 부담스럽다.
슬쩍 봐도 기린과 비교해 전혀 손색없어 보리는 사람들이 아닌가.
그는 상사로부터 들은 특재대 소속 능력자들을 하나하나 떠올렸다. 그 누구도 이들과 부합되는 인물은 없었다.
이상하게 생각하던 그는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손가락을 마주쳤다.
“그렇군. 환영!”
능력자 중에는 환상을 보여주는 능력을 지닌 자도 있다.
“흐흐흐. 이렇게 엄청난 놈들이 한꺼번에 나타난다는 것 자체가 터무니없는 일. 분명 누군가가 내게 환영을 펼친 것일 터.”
카일은 교만해 졌다.
일반적으로 환영과 같은 수비적인 능력자들은 전투능력이 떨어지기 마련이다.
마침 그에겐 늑대인간이 있었다.
인간이라면 환상에 현혹되겠지만, 늑대인간이라면 환상에 가려진 진실을 솎아낼 수 있을 것이다.
두려움이 사라졌다.
그가 부리고 있는 늑대인간들의 힘은 웬만한 능력자들 정도는 가볍게 제압할 수 있을 정도로 강하다. 그런 늑대인간들을 그는 자그마치 30명이나 거느리고 있지 않은가.
그 대단하다던 기린조차 무력화시켰다는 자부심이 그의 배포를 크게 만들었다.
물론 약물을 사용하긴 했지만 말이다.
카일은 인간을 늑대인간으로 변신시켜서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능력을 각성한 지 아직 얼마 되지 않아 부릴 수 있는 늑대인간의 수는 고작 30마리.
하지만 그것만으로도 B급 정도의 능력자들은 쉽게 상대할 수 있었다.
“움... 이상한 사람이네. 샤바.”
카일이 병규의 움직임을 환상이라 치부하며 자만하고 있을 때, 검은 장발을 휘날리는 미소년이 앞으로 나섰다.
‘저, 저런 놈이!’
소년을 본 카일은 괜스레 울컥하는 것을 느꼈다.
생겨도 어떻게 이렇게 잘생길 수가 있는지.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게다가 그의 팔에 매달린 적발의 여자는 또 얼마나 아름다운가.
눈이 부실 지경이다.
“제길. 재수 없는 자식. 네놈을 제일 먼저 죽여 주마.”
카일이 이를 으득 갈며 소리치자. 늑대인간들은 화답하듯 으르릉 울부짖었다.
“오호. 짐승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거야, 샤바?”
샤바는 신기한 듯 눈을 빤짝였다.
백성들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는 그이기에 비슷한 재주를 가진 카일의 능력에 호기심이 생긴 것이다.
하지만 그의 팔에 매달려 있던 마그네트는 카일에 대한 호감이 전혀 없었다. 아니, 오히려 짜증이 확 치밀었다.
“뭐야? 감히 달링에게 한번 해보겠다는 거야?”
그녀는 동물적 감각으로 늑대인간들이 내뿜는 살기를 감지할 수 있었다.
드래곤인 마그네트의 호통.
늑대인간들은 저도 모르게 움찔 놀라며 한 발 물러섰다.
늑대인간은 인간보다는 짐승에 더 가까운 존재다.
짐승인 그들이기에 마그네트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냄새를 맡을 수 있었다.
주춤하는 늑대인간들을 카일이 종용했다.
“고작 계집하나다. 당장 목을 꺾어 버렷!”
그 한마디에 늑대인간들은 전의를 되찾았다. 워낙에 호전적인 종족이라 가능한 일이었다.
“죽여라!”
컹컹!
크르르릉!
주인의 명이 떨어지자, 금세 불안을 떨치며 마그네트에게 덤벼들었다.
무려 30에 이르는 늑대인간들이 한꺼번에 달려드니 검은 살기가 파도처럼 몰아치는 듯했다.
“감히!”
마그네트의 눈이 매섭게 여며졌다.
그녀의 손이 가볍게 좌에서 우로 휙 움직였다.
깨개갱!
캉!
늑대인간들은 보이지 않는 벽에 부딪힌 것처럼 우르르 쓰러졌다.
“어디서 굴러먹다 온 똥개들이 달링과의 데이트를 방해하는 거야!”
마그네트는 두 손을 허리에 척 올리고는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그녀는 샤바와의 즐거운 한때를 방해한 괘씸한 늑대인간들에게 엄벌을 내리기로 결심했다.
아무리 기억을 잃었다지만, 그녀의 본체는 드래곤.
그 엄청난 기운이 개방되자 늑대인간들은 곧바로 꼬리를 말았다. 늑대인간의 포스가 아무리 대단하다 한들, 드래곤에 비할 바는 아니다.
낑낑. 깨갱.
한순간에 늑대인간들은 싸움에 진 개처럼 창고 구석으로 도망치기 바빴다.
“모조리 때려잡아 주마.”
마그네트는 기세를 올리며 늑대인간들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그쯤 해 둬라.”
호랭이가 그녀의 앞을 막아섰다.
마그네트가 화가 나면 무슨 일을 저지를지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도끼눈을 하고 호랭이를 노려보았다.
왜 남의 일에 간섭하느냐는 뜻이다.
그런 마그네트의 머리를 샤바가 통 쥐어박았다.
“호랭이에게 까불지 마라. 샤바.”
“흑흑. 새바님은 저보다 호랭이가 더 좋은 거예요?”
마그네트가 소매를 씹으며 서럽게 울었다. 연인(?)인 자신보다 다른 사내의 편을 드는 낭군(?)이 원망스럽기만 했다.
샤바는 고개를 저었다.
“그건 아니다. 샤바. 하지만 호랭이가 가끔은 옳은 말도 한다. 샤바샤바.”
“아아. 그렇군요. 가끔은 호랭이도 옳은 말을 하는군요. 새겨두겠습니다. 샤바님.”
“그래. 새겨둬라. 샤바.”
샤바가 머리를 쓰다듬어 주며 말하자 마그네트는 금세 초롱초롱한 눈으로 부활했다. 하지만 이번엔 호랭이가 발끈했다.
“뭐라? 옳은 말을 가끔 한다고?!”
속은 부글부글 끓는데, 괜히 시시콜콜 따지는 것 같아 이만 으득 가는 호랭이였다.
“이, 이놈들. 감히 날 무시햇!”
카일은 발악하듯 외치며 늑대인간들을 부추겼다. 비리비리한 여자의 고함 한번에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다니.
공포의 대명사인 늑대인간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수치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명령을 내려도 늑대인간들은 앞발 사이에 고개를 처박은 채 덜덜 떨기만 했다.
그때였다.
“아무래도 버림받은 것 같군.”
으스스한 음성이 그의 귓가에 속삭였다.
병규였다.
그가 어느새 카일의 배후를 장악한 것이다.
카일은 흠칫 몸을 떨었다.
‘말, 말도 안돼!’
이렇게 가까운 곳까지의 접근을 허용하다니.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는데.......
공포가 엄습해 왔다.
늑대인간을 부릴 수없는 그는 평범한 사람에 불과하다.
‘큰, 큰일 났다.’
긴장으로 얼굴이 온통 땀투성이가 되었다.
카일은 몸을 벌벌 떨면서도 간교한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리며 이 위기에서 빠져나갈 수 있는 방법을 모색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뾰족한 수는 떠오르지 않았다. 오히려 암담한 미래만 떠오르는 것이 아닌가.
자신이 기린에게 한 행동을 돌이켜 볼 때, 몸성히 돌아갈 가능성은 전무. 설사 요행히 이들의 손아귀에서 벗어난다고 해도 조직의 눈은 절대로 피할 수 없다.
조직의 보복을 생각하자 카일은 숨이 턱하고 막혀오는 것을 느꼈다.
조직은 용서를 모른다.
임무에 실패한 능력자들이 어떠한 처벌을 받았는지 몇 번이나 보았다.
궁지에 몰린 쥐는 이성을 잃고 고양이에게 덤벼든다.
결국 카일은 최악의 카드를 선택했다.
품에서 단도를 빼내어 병규의 목을 향해 휘두른 것이다.
“죽어라!”
“얼씨구?”
병규의 입 꼬리가 일그러졌다.
처음 볼 때부터 질이 나쁜 녀석이라는 것은 알았지만, 이렇게 거리낌 없이 칼을 휘두를 정도로 저질일 줄이야.
물론 카일의 단도가 병규에게 상처를 입힐 확률은 개미 눈곱만큼의 확률도 되지 않았다.
병규는 손가락으로 가볍게 그의 단도를 잡았다.
기습 공격이 막히자 카일은 몸을 사시나무처럼 벌벌 떨며 눈동자를 굴렸다.
병규의 검은 눈동자가 카일의 내면을 훑었다.
그는 절세의 대마왕이자, 어둠의 잔혹한 지배자이다.
마음이 사악한 자들의 내면을 꿰뚫어보는 것은 그에겐 식은 죽 먹기나 다름없었다.
카일의 몸에서 어둠을 발견했다.
간교한 자다.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남의 피해는 전혀 아랑곳하지 않을 녀석. 위기 상황에서는 얼마든지 비굴해질 수 있는 녀석.
카일이 어떤 자인지 판단이 서자 병규는 마음이 차갑게 식어 버렸다.
이미 엉망진창으로 당한 기린의 손을 보고 슬그머니 화가 치밀었다.
“뜨거운 맛을 봐야 할 작자로군.”
그는 카일의 손목을 잡고 위로 휙 들어 올렸다.
“히익!”
190센티에 이르는 장신이 풍선처럼 허공에 들려졌다.
병규는 손가락을 꼽아 장난하듯 퉁겼다.
그의 중지가 정확하게 카일의 이마를 딱 하고 때렸다.
장난하듯 손가락으로 때렸다지만, 그는 오우거의 괴력을 복제한 상태, 그 힘은 보통사람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막강했다.
쿠앙!
요란한 폭발음과 함께 카일은 창고구석으로 틀어박혔다. 드럼통 사이를 구르는 그의 두 팔이 괴이한 각도로 꺾여 있었다.
가볍게 날린 손가락질에 두 팔이 모조리 부러진 것이다.
“네가 처리할 거야?”
병규가 게거품을 입에 문 카일을 손가락질하며 이운석에게 물었다. 이운석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그럴 가치도 없는 작자야.”
“그런데 어쩌다 이런 허접한 녀석에게 당하고 있었던 거야?”
이운석의 수호신은 기린.
병규가 이계로 떠나기 전만 해도 강자의 반열에 올라 있던 이운석이다. 잠재력까지 감안한다면 가히 최강이라 불릴 만한 능력자가 바로 그다.
그런데 그런 능력자가 고작 늑대인간이나 부리는 비겁한 자에게 수모를 당하고 있으니 당최 어이가 없는 것이다.
이운석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무언가 깊은 사연을 간직한 표정.
급기야 내뱉은 그의 말은 병규의 머리 속을 새하얗게 비워 놓고 말았다.
“누님이... 한영 누님이 녀석들에게 사로잡혀 있다.”
“맙소사!”
자영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이운석을 이끌고 특재대로 돌아온 호랭이는 놀라는 그녀를 향해 피식 웃어 주었다.
자영.
신선 수련을 한 구미호로, 한국의 능력자 집단인 특재대(특수대책본부)를 이끌고 있는 본부장이다.
“아직 안 잘렸냐? 특재대도 참 인재가 없는 모양이구나.”
괴팍한 호랭이의 입담에도 자영은 벌린 입을 다물지 못했다.
무려 5년 전에 사라졌던 인물들이 소식도 없이 돌연 눈앞에 떡 하니 나타난 것이 아닌가. 아직까지 아공간을 넘어갔던 사람이 다시 돌아온 경우는 전무했다.
그런데 호랭이가 돌아온 것이다.
다른 모든 사람들과 함께.
그녀가 구미호가 아니라 구미호 할머니라고 해도 놀라지 않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인 셈이다.
“도데체 어떻게 된 일이에요? 어떻게 돌아온 거죠? 인간의 모습이라니. 큰 일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촉망 중에도 차를 내오며 자영이 정신없이 물었다.
“우선 운석이 이 녀석부터 좀 처리해 줘라. 홀아비 냄새 나는 놈을 업고 있자니 모양새가 영 시원찮구나.”
호랭이가 여태 부축해 주던 이운석을 소파에 던지듯이 내팽겨 쳤다. 이운석은 ‘어이쿠. 신선이 사람 잡네.’ 하며 엄살을 떨었다.
“무슨 일이죠?”
자영의 표정이 싸늘하게 굳었다.
천하의 기린이 이런 험한 꼴을 당하다니. 심상치 않은 일이 있었음이 분명하다.
“뭐, 어쩌다보니 이렇게 되었습니다.”
이운석이 씁쓸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이 어쩌다 당할 정도의 능력자인가요?”
다른 사람도 아닌 기린이다.
최근 능력을 7할 이상 각성한 기린은 능히 신급 능력자의 반열에 올랐다. 그런 최강의 능력자가 이렇게 형편없이 당하다니.
“이것 때문에.”
이운석은 주사기를 내밀었다.
“이것에 찔리고부터는 전혀 힘을 사용할 수 없었어요.”
심각한 얼굴로 주사기를 들여다보던 자영은 즉시 어딘가로 연락을 취했다. 곧 우주인들이나 뒤집어쓸 만한 복장의 특수전염병대책반이 몰려와 주사기를 회수했다.
“휴. 설마 능력자의 힘을 제한할 수 있는 있는 약물이 있으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어요.”
자영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놀랍다는 뜻을 표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로는, 능력자들은 면역력이 뛰어나 병에도 잘 걸리지 않는다. 설사 큰 병에 걸린다 하더라도 경이적인 회복력으로 금세 낫곤 한다.
그런데 다른 사람도 아닌 이운석의 능력을 제한할 수 있는 약물이라니. 전혀 상상도 못할 물건이 발견된 셈이다.
“주사제에 대해서는 대책반이 치밀한 조사를 진행할 거예요. 그나저나 반갑네요.”
뒤늦게 자영이 호랭이 등에게 인사를 날렸다.
“오지게 빠른 인사로구나.”
호랭이는 콧바람을 날렸지만 얼굴만은 웃었다.
“아무래도 할 말이 많을 것 같군요. 우선 자지를 좀 옮기죠.”
일행을 좌석으로 안내한 자영은 침착을 되찾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 위대하신 호랭이님의 모험담을 들어 볼까요?”
“먼저 이쪽 얘기부터 해줘.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오는 동안 들어보니 알아 꽤 복잡해진 것 같은데?”
“많이... 복잡해졌죠.”
자영의 표정이 조금 어두워졌다.
병규와 그 일행들이 사라진 지 올해로 5년.
세계의 상황은 놀랄 만큼 변해 있었다.
지금껏 데몬게이트의 눈치를 보며 얌전히 있던 중국의 능력자 집단인, 삼룡회가 어느 날 갑자기 범세계적인 능력자 통합기구의 설립을 주창하기 시작했다.
변화의 중심엔 백원신이라는 인물이 있었다.
중관관리직에 불과하던 백원신이 돌연 삼룡회의 실권을 잡고는 급격히 세를 불리기 시작한 것이다. 끝내 그는 내부의 반대파를 제거하고, 삼룡회라는 명칭마저 ‘키메라’로 바뀌며 적극적인 세계 공략에 나섰다.
중국은 오랜 역사와 깊은 전설을 간직한 나라인 만큼. 뛰어난 능력자들도 수없이 많았다. 15억의 인구를 바탕으로 한 능력자들이 파도처럼 세계 전역을 휩쓸었다.
세계를 집어삼키기 위한 키메라의 야욕과 자국을 지키기 위한 능력자의 대결이 세계 곳곳에서 벌어졌다.
이를 일컬어 일반인들 모르게 은밀히 벌어지는 전쟁이라는 의미에서 ‘그림자 전쟁’ 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급격히 팽창하는 키메라 조직을 저지하고자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 것은 의외로 데몬게이트였다.
한때, 세계 능력자들을 통합하려는 야욕을 불태웠던 데몬게이트가 오히려 비슷한 목적을 가진 키메라에 서슬 퍼런 칼을 들이댄 것이다.
세계를 영도하는 세기적 사업에 우두머리가 둘이나 있을 필요는 없는 법. 어찌 생각해 보면 키메라와 데몬게이트가 대립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결과이기도 했다.
북미와 남미 지역을 통솔하고 있던 데몬게이트는 키메라의 야욕에 맞서 맹렬히 저항했다. 하지만 키메라의 총수 백원신의 지략은 정녕 놀라웠다.
일반인은 상상도 못할 온갖 계략들로 데몬게이트의 뛰어난 능력자들을 하나씩 꺾고, 마침내 남미에 이어 북미지역까지 차지하게 되었다.
지지기반을 잃은 데몬게이트는 중국과 한국, 일본 등지에 흩어져 게릴라식의 저항을 계속하고 있다.
“허. 중국이 그렇게까지 커지다니. 총수라는 자가 매우 뛰어난 인물인가 보구나.”
호랭이의 물음에 자영은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며 답했다.
“전쟁에 달통한 인물 같았어요.”
“허. 네가 그렇게까지 말할 정도인가?”
자영이 누구인가.
선계에서도 지략이 뛰어난 것으로 유명한 선호다.
그런 그녀가 감탄할 정도라면 정말로 귀신과 같은 능력의 소유자라고 봐야 옳다.
“허허. 정말로 복잡해졌구나. 그럼 키메라라는 조직의 힘은 어느 정도지?”
별 뜻 없이 물어본 말이었으나, 돌아온 대답은 상상을 초월했다.
“세계의 9할 이상이 키메라의 손아귀로 넘어갔어요. 그들의 야욕에 저항하고 있는 곳은 유럽의 영국과 동남아시아의 한국, 일본... 그리고 아프리카와 러시아의 몇몇 지역뿐이에요.”
“무엇이? 그게 정말이냐?”
크게 놀란 호랭이는 저도 모르게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세계의 9할이라니.
이렇게까지 사태가 심각할 줄이야.
세계정복까지 고작 한 걸음이라는 말이 아닌가.
“어처구니가 없구나. 아무리 중국의 힘이 대단하다 해도 다른 나라들이 손놓고 구경만 하고 있었던 것도 아닐 텐데. 선계에서는 사태가 이렇게 심각해질 때까지 방관만 하고 있었느냐?”
“당연히 중요하게 생각했어요. 중요 거점에 직접 신선들을 파견하기까지 했습니다. 하지만 키메라의 치졸한 계략에 말려들어.......”
“흠.”
호랭이는 침음성을 흘렸다.
신선들의 능력은 굉장히 뛰어나지만, 마음이 깨끗하고 순수하다는 것이 문제다.
어린아이와 같은 순수함이 때론 독으로 작용한다.
만약 상대가 인질이라도 잡고 있으면 무력하게 무너지고 말 것이다. 이렇듯 신선은 뛰어난 능력을 지니고 있음에도 의외의 허점을 가지고 있다.
만약 키메라가 이런 약점을 파고든다면 신선들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문제는 그것뿐만이 아니에요.”
덧붙어 자영은 키메라가 마약에 가까운 약물로 능력자들을 회유하고 있다는 설명을 더했다.
가스펠과 데몬게이트에 소속된 많은 능력자들이 이 마약으로 인해 변절해 버렸다. 문제는 이 마약의 성분을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는 것.
“어쩌면 이운석 군이 가져온 주사제가 큰 역할을 해 줄지도 모르겠군요.”
“자영은 주사제에 한 가닥 기대를 했다.
호랭이는 대뜸 한숨을 내쉬었다.
“휴. 답답한 이야기로구나. 아무래도 이곳에서도 힘 좀 써야 할 것 같은걸. 쯧. 어쩌다 가는 곳마다 이런 골치 아픈 일이 생기는지.”
“호호. 그거야 다 호랭이님의 성격 탓이죠. 한때는 폭주 날라리 신선이라고 불리던 때도 있으셨잖아요.”
“쩝. 뭐, 그거야 다 철없을 때의 이야기지.”
“호호호.”
자영은 입을 가린 채 조용히 웃었다.
그들이 그간의 이야기를 들려주며 웃고 있을 때다.
“총수님!!”
돌연 문이 벌컥 열리며 한 사람이 뛰어 들어왔다.
훤칠한 키에 금발머리.
눈에 확 뛸 만한 미모의 청년이었다.
그는 유럽의 능력자 연합, 가스펠의 능력자 채드였다.
퀴니가 귀환했다는 소식을 들은 그는 꽁지가 빠져라 특재대로 달려온 것이다.
“안녕.”
경애와 함께 얌전히 차를 홀짝거리던 퀴니는 손을 가볍게 들어 주었다. 그녀의 온전한 모습에 채드는 눈물을 글썽였다.
오랜만에 다시 본 그녀는 이미 소녀라 불리기엔 너무도 훌쩍 커져 있었다.
오똑한 콧날과 도톰한 입술, 부드럽게 내려가는 턱선 에서 성숙함마저 느껴진다. 하지만 특유의 발랄함과 귀여움은 여전히 남아 있었다.
“오오.”
채드는 가슴이 짜한 감동을 받았다.
“총수님, 총수님, 이게 꿈은 아니겠지요? 총수님. 흑흑. ”
감동한 채드는 어린 아이처럼 훌쩍훌쩍 울었다.
“누가 왔다고?”
“대장아, 가스펠 총수가 왔다는 말이 사실이냐?”
“지크 로리!!”
채드의 뒤를 이어 특재대의 요원들이 범람하는 홍수처럼 실내로 우르르 쏟아져 들어왔더. 그들은 퀴니를 보고 하나같이 감격해 마지않았다.
“정말이구나.”
“하하하. 돌아왔다.”
“만세. 만세.”
퀴니를 보고 광신도들처럼 만세 열창을 부르는 그들. 아저씨들의 주책이란 한도 끝도 없었다.
“소란스러운 사람들이야.”
이런 소란에도 불구하고 퀴니는 한가로운 자태로 차를 홀짝일 뿐이었다.
“후후. 다들 총수님의 귀환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었답니다.”
입을 가린 채 웃던 자영은 문득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빠져 있다는 것을 눈치 챘다.
“그런데 병규씨는 보이지 않는군요.”
그녀의 음성에 걱정이 묻어 나왔다. 혹시 그는 돌아오지 못한 것은 아닐까?
“아, 그 녀석 말이냐?”
호랭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딴 데 볼일이 있어 잠시 갔다. 걱정 마. 곧 올 테니까.”
한적한 시골이었다.
농지를 따라 걸음을 옮기자 음산함을 풍기고 있는 3층 건물이 보였다.
도처에 널려 있는 깨진 유리창과 버려진 자재들이 도산한 공장임을 짐작케 했다.
“이곳인가?”
병규의 눈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이운석의 말을 들은 그는 곧장 이곳으로 달려왔다.
차로도 2시간이 넘게 걸리는 먼 곳 이었지만, 나는 듯이 달린 그는 고작 20여 분 만에 도착할 수 있었다.
삐걱.
부실해 보이는 문을 열었다.
먼지가 가득 앉은 내부.
거미줄이 구름처럼 천장을 장식했다. 한때는 분주하게 돌아갔을 거대한 기계들이 먼지 속에 묻힌 채, 세월의 녹을 묻히고 있었다.
어두운 구석, 부서진 창가로 스며드는 햇살 속에 한 사내가 앉아 있었다.
“어라라. 웬 손님이신가?”
나이프로 손톱을 다듬고 있던 중년 사내가 한쪽 눈자위를 슬쩍 들어 올린다.
갈색의 머리를 뒤로 질끈 묶고 있어 날카로운 인상을 풍기는 자였다.
“계집을 찾아왔나?”
병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상대의 태도를 보니 제대로 찾아온 모양이다.
“보아하니 카일 녀석이 실패한 모양이군. 하긴 쓸모없는 녀석이라 기대도 하지 않았지만.”
바지를 툭툭 털고 일어난 녀석은 병규를 향해 비릿하게 웃었다.
“기린, 과연 소문대로 배포가 크군. 함정인 줄 알면서도 찾아오다니.”
“......?”
병규의 얼굴이 기이하게 일그러졌다.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간신히 참고 있는 것이다.
황당하게도 사내는 자신을 기린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후후. 기린 정도면 내 상대로 부족함이 없지. 마침 잘됐군. 실은 나도 너무 따분해서 하품이 나오려던 참이거든.”
사내는 길게 기지개를 펴면서 앞으로 나왔다.
기린, 모든 긴 털 가진 짐승의 왕을 상대한다면서도 전혀 긴장하는 빛이 없다.
그만큼 자신이 있다는 뜻이다.
“참. 혹시나 해서 하는 소린데. 키메라에 가입할 생각은 없는가?”
병규는 말없이 웃었다.
“재미없는 표정이군. 거부의 듯이겠지?”
“.......”
병규 사내가 꽤나 수다스럽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편한 점은 있다.
힘들게 변명할 필요가 없으니 말이다.
“아아. 괜찮아. 괜찮아. 아까도 말했다시피 지루했던 참이니 말이야. 오히려 네가 제의를 거절해서 반가울 지경이야. 자, 그럼 긴말 필요 없이 곧장 본 게임으로 넘어가 볼까?”
단도를 바닥에 툭 던져놓은 사내는 쿵쿵 무거운 발걸음으로 병규에게 걸어왔다. 마치 거대한 바위가 굴러오는 것처럼 둔중한 움직임이었다.
“참. 내가 어떤 능력자인지 말했던가?
그의 발밑이 푹푹 꺼졌다.
“무거운 체중?”
“하하. 재미있는 대답이군.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내 능력은.......”
능청스럽게 말을 하며 사내가 손을 뻗었다.
쉬악!
검은 채찍같은것이 그의 손에서 튀어나왔다.
병규는 가볍게 목을 좌측으로 기울였다.
검은 채찍은 그의 귀밑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어라. 피했네? 적어도 스치기는 할 줄 알았는데.”
사내가 비스듬히 웃었다.
병규는 눈동자만을 돌려 귓가를 스친 물건을 확인했다.
“고작 너의 능력이라는 것이 손을 길게 뻗어 내는 것뿐인가?”
검은 채찍으로 보였던 것의 정체는 실은 사내의 팔이었다.
병규와 사내의 거리는 대략 5미터.
놀랍게도 그 거리를 무시하며 팔이 날아든 것이다.
“고작...이라. 이거 굉장히 자존심 상하는걸?”
사내의 눈이 기이한 빛으로 번들거렸다. 순간 병규는 섬뜩한 살기를 느끼고 몸을 한바퀴 틀었다.
파파팍!
방금 전까지 그가 서 있던 자리에 세 개의 기둥이 박혔다. 병규는 이내 그 기둥들이 그의 나머지 팔과 다리라는 것을 눈치 챘다.
사내는 팔 외의 다른 신체부위 또한 그렇게 늘일 수 있었던 것이다.
“고무인간? 너무 흔한 능력이로군.”
“클클. 고무라고?”
사내는 끌끌대며 웃었다.
“미안하지만 고무보다는 조금 더 쓸 만한 능력이지.”
말과 함께 그의 몸이 둥글게 부풀어 올랐다. 그가 공처럼 솟았을 때, 둥글게 부푼 전신에서 팔이 솟았다.
팔의 개수는 자그마치 100개.
놀라운 것은, 각각의 팔에 눈이 하나씩 붙어 있다는 점이었다.
손바닥 중앙에 자리한 커다란 눈동자.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모습이다.
병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사내의 수호신이 누구인지 한눈에 알아보았다. 아무리 그가 신화에 대해서 잘 모른다고 해도, 헤라클레스와 관련된 신화라면 몇 번인가 읽은 기억이 있다.
“넌 라돈(ladon)이로구나.”
“크흐흐. 그래. 내가 바로 황금사과의 수호자 라돈이다.”
라돈(ladon)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괴물.
헤라클레스가 해결한 12가지 난계에 등장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황금사과를 지키는 괴물로, 머리가 무려 백 개나 된다. 끝내는 헤라클레스에게 죽임을 당하고 헤라에 의해 별자리가 되었다.
사내의 수호신은 바로 그 라돈인 것이다.
“라돈은 유럽의 신화에 등장하는 것으로 아는데, 그렇다면 넌 가스펠 소속인가?”
“원래는 그랬지. 하지만 지금은 아니야.” “변절했다는 소리인가? 흥미로운 이야기군. 그럼 길을 좀 비켜 주겠는가? 에스코트할 여성이 있어서 말이다.”
“크크큭. 유감스럽게도 그렇게는 못하겠다!“
촤아아아아악!
라돈의 팔들이 일제히 병규에게 짓쳐 들었다.
그 속도는 정녕 경이로웠다.
무려 백 개나 되는 팔이다.
그런 팔이 한꺼번에 덤벼드니 폭우가 쏟아지는 것처럼 눈이 어지업다.
더더구나 난감한 것은, 그 백 개의 팔들이 모두 제각각 다른 루트로 공격해 온다는 점이다.
‘눈과 손만 백 개인 것은 아니군.’
신화에 따르면 라돈은 손이 아니라 머리가 백 개인 괴물이다.
‘그렇다면 손처럼 보이는 저것 모두가 머리? 그렇다면 이런 복잡한 움직임도 이해가 되지.’
백 명의 병사가 동시에 채찍을 휘두르고 있는 것처럼 복잡하고 위력적인 라돈의 공격.
촤아아아아악!
검은 채찍들이 허공을 가득 메운다.
전후좌우, 사방 어디를 둘러보아도 피할 곳이 보이지 않았다.
“과연. 공격력은 꽤 뛰어나군. 그렇다면 방어는 어떨까?”
최소의 움직임으로 라돈의 공격을 피하기만 하던 병규가 발을 크게 앞으로 내딛었다.
스스슥.
그의 신형이 미끄러지듯이 앞으로 나아갔다.
“소용없다.”
라돈은 냉소하며 몸을 휘익 돌렸다.
사방으로 뻗어가던 팔들이 그의 몸에 칭칭 감겼다.
퉁!
‘고무공 같군.’
라돈을 향해 주먹을 날렸던 병규의 안색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마치 고무와 같은 라돈의 팔들은 실제로도 놀라운 탄력을 지니고 있었다.
꽤 강하게 때렸는데도 고무공을 때린 것 같은 반동만을 받았을 뿐이다.
공격력만큼 방어력도 괜찮다는 말이다.
순간적인 대응도 뛰어나다.
번개와 같은 그의 움직임을 정확하게 잡아내다니.
백 개의 눈이 장식으로 달린 것은 아닌 것이다.
“크크. 천하의 기린이 고작 이 정도였던가? 정말 별것 아니로구나.”
라돈은 득의의 웃음을 날리며 다시금 팔을 뻗어왔다.
병규는 우두커니 선 채 전신으로 틀어박히는 팔들을 가만 보고만 있었다. 실로 난감한 표정이 그의 얼굴에 그려졌다.
실제로 그는 난감했다.
“내가 욕을 먹는 것은 상관없지만, 나 때문에 친구가 무능력하게 보이는 것은 정말 곤란한걸.”
병규의 눈빛이 변했다.
라돈은 해서는 안 될 말을 했다.
기린을 들먹이면서 비아냥거린 것이다.
처음 병규는 느긋하게 라돈의 실력을 살피려고만 했다.
하지만 이제는 생각이 바뀌었다.
오해이건 아니건, 자신 때문에 기린이 얕잡아보이게 되는 건 사양이다.
“이제 와서 뭘 어쩌겠다는 것이냐? 죽어라!”
라돈의 팔들의 와르르 쏟아졌다.
검은 파도에 해일처럼 병규의 몸뚱이를 덮쳤다.
순간 병규의 작은 몸이 과자처럼 부스러지는 것 같았다.
실제로 라돈의 눈에도 그렇게 보였다.
하지만.
서거걱!
몸서리쳐지는 절삭음.
후두둑 하는 소음과 함께 병규의 몸을 휘감았던 라돈의 팔들이 가을 낙엽 떨어지듯이 바닥에 떨어졌다.
꿈틀꿈틀.
바닥에 떨어진 팔들은 벌레처럼 징그럽게 몸서리를 쳤다.
“헉!”
라돈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대, 대체 언제, 어떻게!”
그의 무기인 팔들이 모조리 잘려 나가다니. 무려 백 개의 눈을 가졌지만 전혀 보지 못했다.
라돈의 눈이 밑으로 향했다.
병규의 손끝, 그곳에서 사요한 요기를 내뿜는 칼날이 삐죽 튀어 나와 있었다.
요수의 발톱.
주먹으로는 충격을 줄 수 없는 고무줄같은 손들. 병규는 간단하게 해답을 찾았다.
두드려서 안 된다면 잘라 내면 된다.
그렇게 라돈의 팔들을 모조리 잘라 버렸다.
“많이 아프지는 않은 모양이군.”
잘라 낸 팔에서 피는 나오지 않았다.
라돈의 팔들은 피부의 각질층이 변한 것이라 신경 정도만 연결되어 있을 뿐이다.
라돈은 지금 피부가 한 꺼풀 벗겨진 정도의 타격을 입은 것이다.
“좋아. 거추장스러운 팔들을 제거했으니 본격적으로 진지한 대화를 나눠 볼까?”
단지 한 발짝.
그것뿐이었다.
휘익!
바람이 부는가 싶더니 병규는 라돈의 코앞에 서 있었다.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다.
“흐, 흐익!”
라돈의 입에서 비명이 솟았다.
“엄, 엄청나게 빠르군.”
라돈의 눈동자들이 부들부들 떨었다.
병규는 불룩하게 솟은 그의 몸을 친근하게 툭툭 치며 말했다.
“혹시 이런 말 들어 봤어? 못된 아이에겐 매가 약이다.”
“개소리. 죽어라!”
발악하듯 라돈은 병규를 덮쳤다.
팔이 잘린 곳에서 어느새 새로운 팔들이 돋아나 있었다.
병규는 빙긋 웃으며 검지를 가볍게 세웠다.
“중압!”
두쿠쿠쿵!
무시무시한 압력이 라돈의 팔들을 내리눌렀다. 벌떼처럼 날아들던 라돈의 팔들이 순간 수백 킬로그램의 하중을 받으며 무쇠덩이처럼 바닥에 떨어졌다.
“크, 큭!”
라돈은 바닥에 반쯤 처박힌 채 숨을 헐떡였다.
“이... 이게... 켁켁. 무슨......!”
이게 대체 무슨 능력이냐고 묻고 싶었다.
중력을 이용한 공격이라니.
그가 아는 한 기린은 이런 능력이 없다.
하지만 끝내 라돈은 제대로 물어볼 수 없었다.
말은커녕 가슴을 누르는 막대한 압력 때문에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었던 것이다.
코와 입에서 피가 주르르 흘러나왔다.
몸을 내리누르는 하중을 이겨내려고 발악하는 모습이 꼭 손가락에 눌린 개미의 버둥거림처럼 보인다.
“고생 좀 하시게.”
라돈을 힐끔 내려다본 병규는 터벅터벅 앞으로 걸었다.
1층엔 라돈밖에 없다.
하지만 2층에서는 꽤 강대한 기척들이 느껴졌다.
“또 이런 식인가? 피라미드식으로 올라가며 적을 상대하는 건 좀 지겨운데.”
지금껏 이런 식의 싸움을 셀 수 없을 만큼 경험했다.
한 가지 느낀 점이 있다면, 굳이 한 층 한 층 오르며 힘을 뺄 필요 없이 곧장 최상층으로 올라가는 것이 좋다는 정도.
병규가 한숨을 쉴 때였다.
“지겨운가? 그럴 것 같아 우리가 내려왔네.”
2층으로 통하는 계단으로 몇 명의 사람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모두 4사람.
3남 1녀.
모두 서양인이다.
병규는 차가운 얼굴로 그들을 한차례 훑어보았다.
‘한꺼번에 넷이라.’
능력자를 상대하는 일이다.
어떤 괴이한 능력을 감추고 있을지 모르는 이상 긴장을 늦출 수는 없는 일.
반면 그의 상대는 각자 편안한 곳에 자리를 잡고 앉아 느긋한 태도를 취했다.
“호오. 당신이 그 유명한 기린인가? 듣던 것과는 달리 평이한
인상이군.”
강팍한 인상의 사내가 안경을 닦으며 무심한 태도로 말했다. 그는 힐끔 병규를 본 이후로는 시종일관 안경 닦는 일에만 신경을 집중했다.
안경을 다 닦은 사내는 바닥에 반쯤 파묻힌 채 처절하게 몸을 버둥거리고 있는 라돈을 냉정한 눈으로 내려다봤다.
“저런. 라돈군 어쩌다 그리 되었는가. 괴롭겠군. 잠시 쉬게나.”
사내가 턱짓을 하자, 그의 등에 얼굴을 기대고 있던 아름다운 갈색머리의 여자가 라돈을 향해 싱긋 웃어 보였다.
“아, 안 돼! 하지 마!”
라돈은 그녀의 시선을 피하려고 노력하며 비명을 질렀다.
“먼지가 일어나네. 착한아이. 날 위해 가만 있어줄래?”
갈색 머리여자의 눈에서 붉은 광채가 일렁였다.
미친 듯이 발버둥 치던 라돈의 움직임이 우뚝 멎어버렸다.
“라돈. 뭘 그리 두려워하는 거지?”
차박차박 걸어간 그녀가 라돈의 턱을 애무하듯 만지며 살짝 웃었다.
매혹적인 미소였다.
하지만 정작 라돈은 두려움에 미칠 지경이었다.
땀을 비 오듯 흘렸다.
백 개나 되는 팔들이 사시나무 떨리듯 떨렸다.
“맞아. 그러고 보니 넌 항상 내 눈이 흉측하다고 했었지? 후후.”
그녀의 웃음이 짙어졌다.
순간 그녀의 눈동자에서 보랏빛의 모호한 기운이 맺혔다.
긴 머리카락이 마치 살아있는 것처럼 하늘 하늘 일어났다.
“크이이이!”
라돈은 필사적으로 그녀와 눈을 맞추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결국 그는 그녀의 눈동자를 보고 말았다.
아!
그녀의 눈동자는 흉측하지 않았다.
붉은 보석처럼 영롱한 빛깔을 머금고 있는 눈동자.
빨려 들어갈 것처럼 아름답다.
그녀의 눈동자 속을 헤엄치고 싶다.
허나, 아름다운 그녀의 눈동자는 치명적인 가시를 품고 있었다.
‘해, 해골!!’
그녀의 눈동자가 해골 모양으로 변한다고 느낀 순간, 라돈의 피부가 새파랗게 질려버리더니 경악한 표정 그대로 굳어버렸다.
“후후. 난 당신의 거들먹거리는 태도가 싫었어. 그대로 장식품이 되어 있으라고.”
그녀는 딱딱하게 굳어버린 라돈의 머리를 툭툭 장난스럽게 두드
리며 말했다.
‘고르곤.’
병규는 그녀의 수호신이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마녀, 고르곤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고르곤(Gorgon).
보통 메두사라고 잘 알려진 신화의 괴물이다.
실제로 고르곤은 바다의 신인 포르키스와 그의 누이인 케토 사이에서 태어난 세 자매를 일컫는 말이다.
메두사는 고르곤 자매 중 막내이다.
알려진 대로 그녀는 머리카락이 뱀이고, 눈을 본 상대를 돌로 만드는 능력이 있었다.
이처럼 그리스 로마 신화에는 메두사를 추악한 마녀로 표현했다. 하지만 실제로 메두사의 기원이라고 할 수 있는 메소포타미야 문명에서의 메두사는 과거, 현재, 미래를 관장하는 지혜의 여신이었다.
시간을 관장하던 지혜의 여신이 그리스 신화를 거치며 추악한 용모의 마녀로 변질된 것이다.
이러한 변화는 종교들 간의 신화 속에서 숱하게 찾을 수 있다.
한 종교의 신이 다른 나라에서는 추악하고 잔인한 악마로 표현되는 경우가 많다. 이렇게 변질된 신들은 그 종교가 섬기는 신에게 잔인한 죽음을 당하곤 한다.
세계 각국의 많은 종교들이 이렇듯 신의 위대함을 강조하기 위해서 다른 종교의 신들을 악마로 깔아뭉개는 일을 서슴치 않고 저질렀다.
메두사 역시 이렇게 희생된 경우라고 볼 수 있다.
“후후. 당신도 내 눈이 보고 싶어?”
마녀 메두사가 매혹적인 미소를 보내며 물었다.
병규는 피식하고 웃었다.
아무리 아름다운 여자라도 메두사와 눈을 맞추고 싶은 생각은 없다. 이때 안경 사내가 거창하게 말을 꺼냈다.
“자. 고통스러워하는 동료도 잠시 재워두었고 하니,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비wm니스를 시작해야겠군.”
그는 미리 준비해둔 서류가방에서 서류 한 장을 꺼내들었다.
“계약서다. 기린, 당신이 키메라에 절대로 충성하겠다는 서약이 적혀 있지. 네가 할 일은 단지 이 아래에 서명을 하는 것뿐이야.
그것만으로 우리의 불편한 관계는 부드럽게 해결될 수 있다.”
병규는 뻔뻔하게 서류를 내미는 사내를 물끄러미 쳐다보다 물었다.
“내가 만약 서류에 사인을 하고 딴 생각을 품는다면?”
“후후. 물론 그것에 대한 대비책도 준비되어 있지.”
사내는 서류가방에서 주사기를 꺼냈다.
“당신은 서류에 사인을 하고 이 주사를 한 대만 맞으면 돼. 그러면 잡혀 있는 당신의 누이는 안전하게 풀려날 것이다.”
“…… 그게 무슨 주사지?”
“글쎄. 자세한 것은 나도 잘 모르지만, 윗사람들은 이것을 고(蠱)라고 부르더군.”
“……!”
병규의 표정이 일변했다.
고(蠱).
이드라센에서 만난 노괴라는 자가 사용하던 기이한 주술이다.
노괴는 사실 고대 중국 사람으로 온갖 악독한 술수에 능했다.
고 또한 그러한 술수 중의 하나로, 인간을 마음대로 조종하거나, 치명적인 독으로 사용되는 작은 벌레다.
“후후. 이 주사기가 어떤 성분인지는 잘 모르겠어. 하지만 일단 한 대만 맞으면 고분고분 말을 잘 듣더군. 이들처럼 말이야.”
안경 사내가 주위를 둘러보며 말했다.
“그렇군.”
병규는 대강의 사정을 이해할 수 있었다.
본래 이들은 가스펠에 소속된 능력자이다. 하지만 어쩌다 ‘고’에 중독된 후로부터는 상황이 전혀 달라졌다.
‘고’는 사람의 마음대로 조종하는 능력을 가지고 있다. ‘고’에 중독되면 자신의 의지와는 전혀 상관없이 술사의 뜻에 따르게 된다.
그렇게 키메라는 능력자들을 하나씩 끌어들인 것이다.
물론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다.
단 한명. 안경을 쓴 사내만은 다르다.
그의 속에서 시커먼 욕심이 느껴졌다.
병규는 심연보다 더 어두운 마계의 왕으로써 타인의 사악한 심성을 읽을 수 있었다. 그 힘으로 읽어낸 안경 사내의 속마음은 냄새나는 진창보다 더럽고 지저분했다.
‘그나저나 이거 초장부터 힘 좀 써야겠는걸.’
천하의 기린을 사로잡으려고 파견된 자들이다.
결코 만만한 실력은 아닐 것이다.
“자. 어떡할 텐가? 얌전히 승복할 생각인가?”
“아니.”
병규는 짧고 간결하게 대답했다.
“역시 그렇군.”
안경 사내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서류를 가방에 챙겨 넣고는 한 걸음 물러섰다.
“비즈니스는 여기까지군. 앞으로는 이 친구들과 잘 상담해 보도록.”
여태 잠자코 서 있던 2명의 사내가 앞으로 나섰다.
하나는 자연스러운 곱슬머리의 청년이었는데, 사슴처럼 가늘고
탄력적인 몸을 가지고 있었다.
상당한 미남이었지만, 표정이 없어 생각을 읽을 수 없었다.
반대로 다른 사내는 병규가 한참이나 올려다봐야 할 정도의 거한이었다. 그의 피부는 마치 쇳가루를 바른 것처럼 청동색으로 빛났다.
안경 사내가 친절하게 그들을 소개했다.
“아킬레우스와 헤라클레스일세. 한 번쯤은 들어본 영웅일테지?
후후. 한 번 잘 놀아보게.”
안경 사내가 말을 하자마자 돌연 아킬레우스가 달려들었다.
그 속도는 가히 전광석화.
움직이는가 싶더니 어느새 주먹이 눈앞을 아른거린다.
“!”
놀랄 사이도 없다.
병규는 급히 상체를 뒤로 젖혀 그의 주먹을 피했다. 그러면서도 발을 차올리며 반격을 잊지 않았다.
그러나 어처구니없게도 바람처럼 빠른 그의 발차기는 허공을 가르고 말았다.
균형을 잡고 앞을 보니 아킬레우스는 어느새 본래의 자리로 돌아가 있었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한 표정.
병규 혼자 한 바탕 요란을 떤 격이 되었다.
“허.”
헛웃음이 새어나왔다.
여태 많은 자들과 싸워보았지만 힘이 모자란 경우는 있었어도, 스피드로 밀린 적은 처음이다.
색다른 경험이랄까.
아무튼 당황스러운 상황임에 틀림없었다.
“후후. 혹시 모를까싶어 말해주는 것이네만, 아킬레우스는 인간 중에서 가장 빠른 발을 가졌지. 천마라 불리는 자네와는 좋은 승부가 될 것 같군.”
“…… 그렇군.”
병규는 무감정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휘리릭!
다시 아킬레우스가 움직였다.
그의 몸이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사라지고, 찬란한 금빛 머리칼이 잔상처럼 눈앞으로 쏘아졌다.
파카칵!
번개처럼 달려든 아킬레우스는 무릎, 팔꿈치, 어깨로 이어지는 연환 공격을 퍼부었다. 지독하게 단순한 공격이었지만, 그 만큼 효과적인 공격이기도 했다.
병규의 눈에도 흐릿하게 잔영만 보일 정도로 빠른 공격. 한 순간 병규는 아무런 대응도 못하고 당하는 듯 보였다.
파파팟!
아킬레우스와 병규의 그림자가 일순간 겹쳤다가 떨어졌다.
워낙에 빠른 공방이라 사람들은 숨을 죽인 채 결과를 고대했다.
퍽!
병규의 어깨가 흔들렸다.
아킬레우스에게 일격을 허용한 것이다.
“음.”
병규의 꽉 다문 입술 사이로 가벼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급소를 피했음에도 둔중한 충격이 전해진다.
하지만 병규의 피해는 그것뿐이었다.
오히려 이 정도 피해는 상대에게 치명타를 가하기 위해 약간의 선심을 쓴 것에 불과했다.
우드득! 우득!
괴이한 뼛소리와 함께 아킬레우스가 줄 끊어진 목각인형처럼 쓰러졌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팔 다리 관절은 어느 사이엔가 모조리 빠져 있었다.
“가장 빠른 인간이라고 했나? 그래봐야 인간 중에서지.”
관절이 해체된 채 끙끙 거리는 아킬레우스를 향해 병규가 무감정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그 말 그대로다.
그리스 신화에서 아킬레우스가 아무리 빠르다 해도 기껏해야 인간 중에서 가장 빠를 뿐이다.
병규는 물론이고, 기린이 수호신인 이운석에게도 결코 이기지 못한다.
격이 다르기 때문이다.
병규가 아킬레우스에게서 시선을 뗐을 때다.
‘해가 저물었나?’
병규는 그렇게 생각했다.
갑자기 사위가 어두워졌기 때문이다. 허나 그는 이내 자신의 생각을 수정했다.
해가 진 것이 아니었다.
그림자.
놀랍게도 거대한 그림자가 그를 가리고 있었던 것이다.
“헤라클레스!”
“우와아!”
헤라클레스가 미친 광전사처럼 고함을 지르며 팔을 찍어왔다.
거대한 헤머가 머리를 쪼개오는 것 같다.
“큭!”
병규는 특유의 순발력으로 헤라클레스의 공세에서 간신히 벗어났다. 병규의 코끝을 스친 굵은 팔이 거칠게 바닥을 들이박았다.
쿠쿠쿵!
지진이 일어난 듯한 충격과 함께 콘크리트 바닥이 파도처럼 우르르 일어났다. 강렬한 충격파에 먼지가 풀썩 일고, 공장의 유리창들이 한꺼번에 깨져나갔다.
“엄청난 힘이군.”
헤라클레스의 거력에 병규는 혀를 내둘렀다.
단지 주먹을 가볍게 휘두른 정도에 마치 폭격이라도 맞은 것처럼 공장 전체가 뒤흔들리는 것이다.
이번에도 안경 사내가 친절하게 헤라클레스를 소개했다.
“후후. 헤비급 복서의 피니쉬 펀치가 1톤의 위력이라고 했던가.
가소롭군. 그의 주먹은 200톤의 충격을 가볍게 넘어가지.”
결코 과장된 말이 아닐 것이다.
‘그나마 헤라클레스의 움직임이 느린 게 다행이군.’
헤라클레스는 육중한 몸을 하고 있었지만, 그의 생각처럼 느리지는 않았다. 일반인 정도의 순발력은 있었다.
다만 병규의 입장에서 느리게 보였다는 것이다.
하지만 이때,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공격이 들어왔다.
휘악!
날카로운 칼바람소리와 함께 등 뒤에서 누군가가 병규의 팔 다리를 휘감았다. 창졸간의 일이라 병규는 어이없이 적에게 잡히고 말았다.
“아킬레우스!”
놀랍게도 그의 몸을 속박한 것은 아킬레우스였다.
방금 전에 팔 다리 관절을 모조리 뽑아 버렸는데, 어찌된 이유에서인지 금방 회복한 것이다.
안경 사내가 손가락을 까딱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아. 사람들의 고정관념은 정말로 무섭군. 아킬레우스 하면 무작정 아킬레스라는 치명적인 급소만을 떠올리지. 반대로 아킬레스를 뺀 나머지 신체가 불사라는 사실은 까맣게 잊어버린단 말이야.”
“!”
그렇다.
보통 아킬레우스하면 치명적인 급소 아킬레스를 떠올린다. 하지만 그리스의 영웅인 아킬레우스는 헤라클레스에 필적할 정도의 영웅이었다.
그는 아킬레스를 제외한 전신이 불사(不死)였고, 그의 발은 인간 중에서 가장 빨랐다.
병규도 이 사실을 깜빡 잊었다.
단순히 아킬레스라는 급소만을 생각한 것이다.
불사의 몸을 가진 아킬레우스에게 탈골쯤은 가벼운 부상 축에도 들지 못한다. 다만 잠시 몸을 못 움직이게 된 것 일뿐.
“크워어어!”
병규가 아킬레우스에게 잡히자 헤라클레스는 성난 곰처럼 울부
짖으며 쿵쿵 걸어왔다.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탄탄한 그의 근육이 육감적으로 흔들렸다.
“자. 이제 어떡하겠는가? 아킬레우스에게 잡힌 몸이니, 헤라클레스의 공격을 도저히 피할 수 없을 테지.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다.
키메라에 들어오는 것이 어떤가?”
안경 사내는 넌지시 물었다.
사갈과도 같은 그의 표정은 이브를 유혹하는 사탄의 그것을 떠올리게 했다.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마치 유혹에 응하는 것처럼.
하지만 정작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온 말은 표정과는 정 반대였다.
“아아. 싫어. 기념품도 없는 행사에는 별 관심이 없어서 말이야. 그리고.......”
말과 함께 병규가 힘들 썼다.
오우거의 괴력이 발휘된 것이다.
강철도 수수깡처럼 부숴 버릴 수 있는 괴력이다. 아킬레우스가 감당할 수 있을 턱이 없었다.
병규는 가볍게 아킬레우스의 결박을 풀고는 반대를 그를 잡아 덜렁 들어 올렸다.
“불사의 몸이라지? 그렇다면 헤라클레스의 힘에도 충분히 견딜수 있겠군.”
“크와아아!”
헤라클레스가 광폭한 외침을 토하며 주먹을 휘둘렀다.
그의 두 눈은 광기로 충혈되었다.
살기로 충만한 그는 상대가 누구이건 상관하지 않고 무작정 주먹을 휘둘렀다.
쾅!
주먹으로 사람의 육신을 때렸다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충격음이 터지며 아킬레우스는 그야말로 곤죽이 되어 버렸다.
“휘유.”
병규는 가볍게 휘파람을 불었다.
주먹질 한 방에 콘크리트 바닥이 1미터 가량이나 푹 파졌다. 대형 폭탄이라도 터진 것 같은 충격이다.
더더구나 놀라운 것은 아킬레우스였다.
자동차 바퀴에 깔린 짐승처럼 곤죽이 되어 버린 아킬레우스는 놀랍게도 서서히 몸이 재생되고 있었다.
과연 불사의 몸이라 불릴 만했다.
“헤라클레스! 멍청한 자식. 지금 누굴 때려눕힌 것이냐!”
줄곧 차분한 분위기를 유지하던 안경 사내도 참지 못하고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며 분통을 터뜨렸다.
“끄으으응.”
헤라클레스는 순박한 눈을 끔뻑이며 초식동물처럼 목을 긁적였다. 왜 이렇게 되었는지 모르겠다는 표정이다.
헤라클레스.
제우스 신의 아들로 에우뤼스테우스의 12가지 노역을 달성함으로써 그리스 최고의 영웅이 되었다.
그는 그리스 최고의 괴력으로도 유명하지만, 반대로 광전사(Berserk)로도 명성을 날렸다.
본래의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완벽한 무인이었으나, 헤라의 저주로 정신착란을 일으켜 자신의 자식을 모조리 죽였으며, 후일 또다시 발광하여 오이칼리아의 왕자 이피토스를 죽이는 실수를 저질렀다.
이렇듯 헤라클레스는 괴물을 물리친 영웅의 면모와 더불어 이성을 상실하고 닥치는 대로 살인을 저지르는 광전사, 버서커로서의 면모도 가지고 있었다.
“멍하니 서서 뭘 하는 거냐! 어서 기린을 때려죽여!”
“그워어!”
안경 사내의 명령에 헤라클레스는 다시금 흉성을 폭발시키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병규는 피하지 않았다.
“좋아. 너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한번 볼까?”
씽긋 미소를 지으며 마주 달려 나간 그는 오우거의 괴력을 일으키며 헤라클레스의 팔을 맞잡았다.
꾸그그그극!
무지막지한 괴력이 서로 충돌했다.
쿠쿵!
엄청난 힘의 충돌로 바닥이 아래로 푹 꺼졌다.
병규와 헤라클레스는 서로의 힘을 이기지 못하고 무릎 밑까지 콘크리트 바닥에 파묻혔다.
“이런... 정말 엄청난걸.”
병규는 헤라클레스에게 밀리는 걸 느꼈다. 과연 괴력의 영웅이라 할 만하다.
“자존심 상하긴 하지만 어쩔 수 없군.”
병규는 손에 힘을 빼어 뒤로 물러났다.
“크워어!”
균형이 무너지자 헤라클레스는 아이처럼 앞으로 엎어졌다.
콰콰콰쾅!
100평이 넘는 공장을 지지하고 있던 육중한 철근들이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엿가락처럼 휘었다.
“엄청나군. 엄청나.”
병규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괴력만큼은 비할 바가 없다.
오우거의 힘으로도 헤라클레스를 감당할 수 없을 지경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전혀 방법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돌연 호승심이 솟아 괜히 힘으로 헤라클레스를 제압하고자 했던 것 뿐이다.
“미안하지만 일정이 바빠서 말야. 당신과는 그만 놀아야 할 것 같아.”
병규는 가볍게 발끝으로 바닥을 찍었다.
우르르르!
땅이 거칠게 흔들리더니, 발끝으로 찍은 바로 앞부분부터 좌우로 쩍 하고 갈라졌다.
마계의 혈계왕 쉬버에게서 복제한 대지를 다루는 능력!
갈라진 땅은 거대한 괴물의 입처럼 헤라클레스를 삼켜 버렸다.
“그워어어!”
헤라클레스는 버둥거리며 땅밖으로 기어 나오려고 애썼다. 하지만 워낙에 땅속 깊은 곳까지 갈라진데다. 지반 아래는 무른 진흙바닥이라 늪이 빠진 것처럼 꼼짝할 수가 없었다.
“자. 제정신이 아닌 그리스의 두 영웅은 해결했고. 이제 자네 차례인 것 같군.”
병규가 팔짱을 낀 채 느긋하게 말을 건넸다.
“너... 넌!”
안경 사내는 병규를 손가락질하며 학질 걸린 개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너... 넌! 기린이 아니구나!”
천마가 비록 신급의 능력자이긴 하지만 헤라클레스와 맞먹는 괴력과 대지를 가르는 능력은 없다.
결국 지금까지 천마로 알고 있던 청년은 전혀 딴사람이라는 말이 되는 것이다.
병규는 빙긋 웃었다.
“그걸 이제야 눈치 채다니. 어지간히 둔한 녀석들이군.”
동양인들이 흑인들을 잘 구별 못하는 것처럼, 서양인도 동양인들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한다.
더구나 병규와 이운석은 나이마저 같았다.
안경 사내는 꽤나 치밀한 사람이었지만, 설마 친누이가 사로잡힌 상황에서 전혀 엉뚱한 사람이 올 줄은 상상도 못했다.
이 때문에 전혀 터무니없는 오해를 한 것이다.
“감히!”
분노에 부르르 몸을 떨던 안경 사내는 들고 있던 서류를 박박 찢었다. 그리고도 분이 풀리지 않아 안경을 바닥에 내팽겨쳤다.
한참을 씩씩대던 사새는 긴 호흡과 함께 침착을 되찾았다.
냉정을 회복한 그는 언제 화를 냈느냐 싶게 차갑게 가라앉은 눈동자로 병규를 쏘아보았다.
“기린을 대신해서 함정으로 기어 들어오다니 배짱이 좋군. 아킬레우스와 헤라클레스를 쉽게 꺾은 것으로 보아 보통 능력자가 아닌 걸 알겠어. 넌 누구지? 너 같은 능력자가 한국에 있다는 얘기는 금시초문이다.”
“아마 그럴거야. 예전에 잠깐 활동을 하긴 했는데 한동안 개인적인 일이 있어서 어딜 갔다 왔거든.”
“흠. 정체를 말하기 싫은 모양이군. 좋아. 상관없지. 어떤가. 우리 키메라에 들어오는 것이. 자네의 능력을 높이 사서 기린과 동등한... 아니, 그 이상의 대우를 해주지.”
“귀찮은 양반이군. 같은 말을 여러 번 하게 만들지 마.”
“쯧. 시류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하는 자로군. 어리석게 굴지 말라고. 어차피 세계는 우리 키메라의 손아귀에 들어오게 되어 있다. 셰계의 대부분이 이미 우리 수중에 떨어지지 않았는가?”
“아아. 됐어. 너희 키메라가 얼마나 대단한 조직인지는 모르겠지만, 상관없는 일이야. 이런 더러운 수작을 벌이는 조직이라면 내가 이 손으로 깡그리 없애 줄 테니 말이야.”
병규의 말에 사내의 표정에서 간교한 웃음이 떠올랐다.
“어리석군. 언젠가 네 어리석음을 후회하게 될 것이다.”
“후회라면... 지금까지의 경험만으로도 충분해.”
병규의 얼굴에 문득 씁쓸한 표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드라센에서의 일이 떠오른 것이다.
그는 착 가라앉은 눈으로 사내를 보며 말했다.
“이제 네 차례군.”
“흥. 헛소리. 잊었는가? 내게는 인질이 있다는 사실을. 네가 누구인지는 모르겠지만 특재대의 일원인 것은 분명할 터. 인질인 이한영이 다치는 것은 원치 않겠지?”
사내가 야비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병규는 오히려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마치 그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한 태도였다.
“아 그거 말인데. 사실은 벌써 구출했어.”
“뭣이?”
사내가 입을 쩍 벌렸다.
“마, 말도 안 되는 소리. 불가능한 일이다.”
기린을 유인하는 미끼이니 만큼, 상당한 능력자들을 감시자로 붙였다.
“글세, 직접 두 눈으로 확인해 보면 확실해지겠지?”
병규는 손가락을 딱 하고 마주쳤다.
“기다렸어요. 샤바.”
“무, 무슨!”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하데스는 깜짝 놀랐다.
그가 놀라는 순간, 병규의 그림자에서 샤바가 폴짝 뛰어 올라왔다. 그는 여자 한 명을 안고 있었는데, 바로 적에게 납치되었던 이한영이었다.
실상 이한영을 구하기 위해 폐창고를 찾아온 것은 병규 혼자만이 아니었다. 샤바 역시 그를 따라왔다.
병규가 이곳에서 적들의 이목을 끄는 동안 샤바는 공장의 3층에 감금되어 있던 그녀를 구출한 것이다.
인질이 어처구니없이 상대에게 넘어간 것을 확인한 사내는 안색이 돌처럼 딱딱하게 굳어 버렸다.
설마 일이 이런 식으로 흐를 줄이야.
“3층엔 오디세우스와 헥토르가 있었을 텐데?”
“그 이상한 사람들, 샤바? 귀찮게 굴기에 백성들과 잠시 면담을 시켰다. 샤바샤바.”
“......?”
사내는 샤바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그러나 병규는 달랐다. 그는 백성이라는 말을 듣자마자 흠칫 놀라는 것이었다.
샤바가 백성이라고 부르는 것이 무언지 병규는 누구보다 잘 알고있었다.
면담이라.
생각만으로도 끔찍하다.
그는 눈을 감고 속으로 오디세우스와 헥토르의 명복을 빌었다. ‘흡흡흡흡흡흡흡’ 하는 격한 호흡이 귓가에 들리는 것만 같다.
“백성과 면담을 시켜? 모를 소리군. 어쨌든 그녀가 이곳에 있다는 것은 3층의 두 영웅들도 당했다는 소리겠지?”
“그렇다 샤바. 그들을 교화하기 위해서 백성들이 열심히 면담을 하고 있다. 샤바샤바.”
“흥. 쓸모없는 녀석들. 하긴 영웅들의 수준이야 겨우 이 정도지.”
사내의 분위기가 일변했다.
그의 전신에서 먹물과 같은 검은 기운이 솟더니 공장안에 썩은 내가 진동했다.
꺼림칙한 기운이 그의 몸에서 활활 타올랐다.
“애초에 영웅들에게 맡긴 것이 실수다. 처음부터 내가 처리했으면 간단했을 것을.”
웅장한 기세와 더불어 사내는 살기어린 음성을 토해 냈다.
거침없이 헤라클레스와 아킬레우스 같은 영웅즐을 비웃는다.
대단한 자신감.
하지만 사내의 자신감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니었다.
실제로 그는 영웅급의 능력자들은 가볍게 응징할 힘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직접 너희들을 상대해주마.”
웅웅 울리는 음성으로 사내가 외쳤다.
그때, 그의 뒤에 시립해 있던 메두사가 앞으로 나섰다.
“이런 잔챙이들을 상대로 전하께서 힘을 쓰실 필요는 없습니다. 제게 맡기십시오.”
전하라 불린 사내는 그녀를 미심쩍은 눈으로 쳐다보았다.
“아킬레우스와 헤라클레스도 당했다. 네가 과연 저들을 이길 수 있을까?”
“전하, 저의 능력을 잊으셨습니까?”
메두사의 눈이 보라색으로 빛났다.
사내는 슬쩍 시선을 피했다.
그조차도 그녀와 시선을 맞추는 것은 꺼림칙한 일이었다.
“알았다. 네가 처리해라.”
“네.”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난 메두사는 기묘한 미소를 머금은 채 병규와 샤바에게 다가섰다.
“감히 전하를 격동케 한 죄. 돌이 되어 갚아라.”
그녀의 눈이 보라색으로 변질 되었다.
지혜로운 빛을 뽐내던 눈동자가 해골 모양으로 변하고, 긴 머리칼이 살아 있는 뱀처럼 하늘로 솟았다.
신화속의 메두사가 오염된 이 세상에 다시금 현신한 것이다.
하지만 정작 병규는 그녀에게 관심도 없었다.
그는 샤바에게서 넘겨받은 이한영을 보살피느라 여념이 없었다.
“고생이 많으셨군요. 누님.”
5년 만의 재회.
병규는 절로 눈물이 솟았다.
피곤이 묻어 있는 얼굴이었지만,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때 기적처럼 이한영의 눈이 가늘게 떠졌다.
“...... 병... 규?”
바짝 타들어 간 그녀의 입술이 묻는다.
병규는 반가움과 그리움에 왈칵 눈물이 솟았다.
그는 코를 훌쩍이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누님. 접니다.”
“꿈... 아니지?”
이한영이 그의 손을 잡으며 물었다.
불안한 듯 그녀는 가늘게 떨고 있었다.
코끝이 찡해졌다.
병규는 대답 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입을 열었다가는 괜히 울먹일 것 같아서 였다.
“이제... 안가는 거지?”
병규를 잡은 그녀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병규는 습기 어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네.”
그 순간 거짓말처럼 환한 미소가 그녀의 얼굴에 번졌다.
초췌한 얼굴이라고는 도저히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 한 번 의 웃음을 끝으로 그녀는 다시 혼절했다.
사실 그녀가 정신을 차린 것은 대단한 일이다. 그만큼 그녀의 몸에 투여된 약물의 양은 엄청났다.
병규의 체온이, 그이 향기가 그녀를 깊은 잠에서 깨웠으리라.
그렇듯, 병규와 이항영의 재회는 꿈속에서의 만남처럼 감미롭고 안타까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