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95/102)

 일이 좀 있었네

 쿠르릉

 하늘이 울었다. 며칠 동안 쏟아지던 폭우가 차츰 물러갔다.

 병규는 레종을 안은 채 계속 그 자리를 지켰다.

 어느덧 그를 뒤덮었던 사악한 기운은 물러나고, 차츰 본래의 모습을 되찾았다. 뿔이 사라지고, 날개로 몸 안으로 갈무리되었다. 일주일이 지났을 때, 그는 완전한 인간의 신체로 변했다.

 “왜, 죽었소?”

 병규는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조용히 물었다.

 그의 물음은 데이실과 레종, 두 여인 모두에게 묻는 것이었다.

 “왜 마왕의 권능으로 되살아나지 않는 것이오?”

 그의 음성이 슬픔으로 떨렸다.

 그녀의 사인은 목의 검상으로 인한 과다출혈.

 비록 치명적인 상처이긴 하나, 마왕의 능력이면 삽시간에 치유될 수 있는 정도다. 하지만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그녀는 따뜻한 표정 그대로 저세상으로 떠났다.

 “왜 부활하지 않소?”

 마왕의 능력이면 능히 죽음에서 부활할 수 있다. 마왕의 권능이란 그런 것이다. 끈질긴 생명력을 자랑하는 마족이 아니던가.

 그런 마족들의 왕이 고작 목에 입은 상처 정도로 죽다니. 말도 안되는 소리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영원히 돌아올 수 없는 길을 걸었다. 말하자면 자살을 한 셈이다.

 그의 가슴에 치유될 수 없는 상처를 남기고.

 “이렇게 내 가슴을 찢어 놓고도 웃으라고 하다니. 당신은 너무 잔인하오.”

 아무리 불러도 그녀는 대답이 없었다.

 “제발. 대답해 주구려.”

 슬픔이 목에 겨워 그는 진저리를 쳤다.

 차갑게 식은 그녀의 육신이 너무 처량하기만 했다.

 “병규야.”

 누군가의 그의 어깨를 짚었다.

 호랭이었다.

 “그만 보내 주자꾸나.”

 병규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항상 호랭이의 말을 따랐지만, 이번만큼은 따를 수 없었다.

 꼭 그녀에게 듣고 싶은 말이 있다. 대답을 듣기 전에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하지만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에그의 다짐은 크게 흔들렸다.

 “이제 됐어.”

 작고 따뜻한 손길이 그의 목을 감싸 안았다. 퀴니였다.

 그녀의 옆으로 경애가 다가왔따. 그는 눈물이 그렁한 눈으로 병규에게 사정했다.

 “오빠, 그만 언니들을 보내주자. 응? 제발.”

 퀴니와 경애의 흐느낌에 병규는 깊은 한숨을 쉬었다.

 애써 그녀들의 얼굴을 외면했다.

 얼굴을 보면 굳은 다짐미 무너질까 두려웠다.

 호래이가 그의 옆에 털썩 앉았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참 맑구나,”

 병규 역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먹구름이 가신 하늘은 시릴 정도로 파란 물이 들어 있었다. 오랜 만에 보는 푸른 하늘에 병규는 가슴이 아릿하게 아파 왔다.

 호랭이가 말을 이었다.

 “지랄같이 쏟아지더니, 아무래도 이렇게 푸른 하늘을 보여 주려고 그랬나 보다. 그렇지?”

 호랭이의 물음에 병규는 저도 모르게 고개를 끄덕였따.

 “아프냐?”

 호랭이가 물었다.

 병규는 이미 죽은 그녀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그래.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겠지. 하지만 말이다. 그것이 연이라는 것이다.”

 호랭이의 잔잔한 음성이 이어졌다.

 “연일나 바로 그런 것이지. 원치 않는 만남이 있으면, 간절히 바라도 이루어지지 않는 만남 역시 있는 법이다.”

 원치 않는 만남. 병규는 과거를 떠올렸다.

 발칸.

 닥치는 대로 사람들을 사냥하던 살인마. 목숨을 걸고 싸웠던 일본의 능력자들. 아마도 그들이 바로 원치 않은 인연일 것이다.

 쉐이드나 필립 공작과 같은 자들도 그런 경우다.

 반면 레종 공주나 글로리 공작, 또 프리즘 용병단의 경우는 좋은 인연의 경우다. 호랭이가 다시 말했다.

 “헤어짐을 두려워 말거라. 지인을 떠나보내느 것을 슬퍼 말거라.”

 “...... 호랭이는 지금까지 몇이나 가까운 분을 보내셨습니까?”

 호랭이는 가만 웃었다.

 “늙는다는 것은 죽음에 익숙해진다는 뜻이기도 하더구나.”

 선도에 이른 지 수백 년. 그동안 정을 준 동족과 인간들이 어디 한둘이랴. 어쩌면 호랭이는 병규가 생각하는 것보다 더 많은 아픔을 겪었을지도 모른다.

 “신선이라는 거. 못해먹을 짓이군요.”

 병규가 비시시 웃었다. 마르고 건조한 미소였다. 마치 억지로 웃는 그런 웃음. 문득 그는 레종의 마지막 말을 기억해 낸 것이다.

 웃어 달라고 했던 말.

 잠깐만 시간을 주세요. 그녀와 작별 인사를 하고 싶습니다.“

 다음날 새벽, 죽은 그녀를 안고 밤새 속삭이던 병규는 마지막으로 그녀의 이마에 긴 입맞춤을 남기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휘청.

 오랜만에 걷는 것이라 어지럽고 힘들었다. 다리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호랭이가 얼른 그를 부축했따.

 “그냥... 제가 하게 해 주십시오.”

 병규는 가만 그의 손을 밀고는 그녀를 등에 업고 비틀비틀 걸었다. 호랭이와 퀴니, 그리고 경애가 그의 뒤를 따라 걸었다.

 그때, 검은 인영이 그의 앞에 나타났다.

 “이제 안 아픈 거예요? 중니님. 샤바?”

 눈을 동그랗게 뜨고 묻는 인영은 다름아닌 샤바였다.

 병규의 입이 쩍하고 벌어졌다. 분명 그는 죽었다. 벨로로폰이 그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벨로로폰의 눈으로 직접 보지 않았던가.

 그런데 지금 그의 눈앞에 선 샤바는 병색이 조금 보이긴 하지만 대체로 멀쩡했다. 뛰어난 내성으로 병을 극복한 것이다. 정말이지 대단한 신체능력이 아닐 수 없다.

 “환영이었다는구나. 마지막 순간에도 이 녀석은 환영으로 마왕을 농락한 게야. 허허허. 대단한 녀석.”

 호랭이의 너털웃음에 병규는 모든 의문을 해소할 수 있었다. 그는 손을뻗어 샤바의 머리를쓰다듬었다. 그리곤 진심을 담아 한마디 말을 남겼다.

 “고맙다.”

 정말로 고마웠다. 살아 있어 줘서.

 지금 그의 마음이 얼마나 기쁜지는 다른 사람은 아무도 알지 못할 것이다. 

 갑자기 전쟁이 끝나 버렸따.

 마오아이 강림했다는 소식에 바짝 긴장하고 있던 연합군의 수뇌부는 돌연 날아든 반가운 보고에 깜짝 놀랐다.

 그들은 혹여 마왕의 함정은 아닐까 전전긍긍했다.

 왕들은 조심스럽게 정찰조를 투입하여 바호크 제국의 상황을 관찰했다. 곧이어 날아든 보고에 수뇌부는 고무될 수밖에 없었다.

 정말로 마족들이 사라진 것이다.

 곧이어 날아든 마탑과 정보조직의 보고 역시 바호크 땅에서 마족의 기척이 전혀 감지되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곧 각국의 왕들은 승리를 자국으로 타전했다.

 온 세상이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하지만 기쁨은 오래가지 못했다. 전쟁의 여파는 상상을 초월했다.

 가장 큰 피해는 마족들을 끌어들였던 바호크 제국이 입었다.

 대제국이었던 바호크는 국토의 절반이 날아갔으며, 수도는 유성우를 뒤집어 쓴 것처럼 폐허가 되어버렸다. 마계에 오염된 한강은 인간의 접근을 불허했다. 그 후로도 최소 몇십 년간은 불모의 땅으로 남게 되리라.

 연합군의 피해도 결코 작지 않았다.

 전쟁에 소모된 막대한 자금과 물자로 한동안 각국의 왕실은 재정난에 허덕였다. 설상가상으로, 한창 일할 나이의 젊은이들이 전쟁에서 죽는 바람에 인력난까지 겹쳐 각국은 길고 긴 겨울의 시대를 보내야 했다. 전쟁은 끝났지만, 전쟁이 할퀴고 간 상처는 그 후로도 오랫동안 사람들을 괴롭혔다.

 아이린 왕국.

 연합군의 주축으로 마계의 앞잡이였던 바호크 제국의 침공에 맞서 가장 큰 활약을 한 용맹무쌍한 용사들의 나라.

 그러나 아이린 왕국은 모든 연합국들 중에서 가장 큰 타격을 입었다. 레종 여왕이 행방불명되었으며, 많은 기사들과 병사들이 조국의 미래를 위해 목숨을 바쳤다.

 바호크의 심장부를 급습했던 키메라들마저 전멸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비극은 절정에 달았다. 그나마 전쟁이 끝나고 마족들이 중간계에서 사라졌다는 소식이 슬픔 가우네 한 가닥 기쁜 소식이었다.

 전쟁이 끝난 지 어느덧 10일이 지났다.

 아이린 왕성의 분위기는 여느 때보다 뒤숭숭했다. 오늘 역사에 기록될 전쟁의 영웅들이 먼 곳으로 떠나는 날이기 때문이다.

 왕성의 후원엔 10여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비록 모인 사람들의 수는 얼마 되지 않지만, 그들의 면면은 결코 가볍지 않았다.

 대륙 제일의 대마법사로 칭송 받는 필라이트 공작.

 아이린 최강의 검사이자, 정쟁을 승리로 이끈 공훈으로 명예로운 그랜드마스터의 칭호를 받은 글로리 공작.

 엘프들의 수장이자, 드래곤나이트 부대를 총지휘하고 있는 고귀한 하이엘프, 카즈엘.

 용병왕으로 마도전쟁 내내 혁혁한 전과를 세운 제이콥.

 제이콥과 함께 과거 프리즘용병단의 일원이었던 호젤, 고든, 프리먼. 현 대륙의 정세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인사가 죄다 이곳에 모인 것이다. 하지만 비록 그들의 면면은 대단했지만, 대륙을 위기에서 구한 영웅들의 환송치고는 그 이원은 조촐하기만 했다.

 “가는군.”

 제일 먼저 작별 인사를 고한 것은 제이콥이었다.

 “네. 그동안 즐거워씁니다.”

 병규는 찬찬히 웃으며 대답했다.

 “하하. 웃는 게 제법 멋있군. 이젠 좀 사내 티가 나는 거 같아.”

 제이콥은 껄걸 웃었다.

 처음 그와 만났을 때가 떠오른다. 당시의 병규는 청년이라 부르기엔 아직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나 많이 부족했었다.

 외딴 세상에서 홀로 살아가기엔 무언가 불안해 보이는 것이 사실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그는 용병으로 뼈가 굵는 제이콥만큼이나 듬직해졌으며 다담한 웃음을 지을 줄도 아는 당당한 사내가 되었다.

 “이제... 정말 이별이구나.”

 호젤과 고든이 그와 작별을 고했다. 마법사인 프리먼은 샤바의 손을 잡고 자식을 멀리 여행 보내는 아비처럼 부산을 떨었다.

 “짜식, 그곳에 가서라도 날 잊지 마. 알았지?”

 호젤이 병규의 손을 잡고 부리나케 흔들며 강요했다.

 “물론이죠. 절대로 호젤을 잊지 않을 거예요.”

 “좋아! 당연히 그렇게 해야지!”

 호젤은 병규의 어깨를 팡팡 소리 나게 두드리며 크게 웃었다. 억지로 눈물을 참는 듯 눈자위가 붉어져 있었다.

 “잘 가게.”

 고든이 병규의 손을 꽐 잡고 짧게 작별인사를 말했다. 그는 백 마디 말을 한 마디로 압축할 줄 아는 사내였다. 병규 역시 짧게 답했다.

 “잘 계세요.”

 씨익. 고든이 선 굵은 미소를 보였다. 병규도 그를 따라 웃었다. 어쩐지 두 사람의 미소가 닮은 듯 보였다.

 프리즘 용병단이 물러나자 이번엔 하이엘프인 카즈엘 차례가 되었다.

 카즈엘은 펑펑 울기만 했다. 병규는 그녀의 마음을 알 수 있었다. 

 함께 가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하이엘프인 그녀는 이곳을 떠날 수 없다. 그녀는 너무 많은 짐을 가녀린 어깨 위에 짊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때로 책임은 인연을 갈라놓기도 한다.

 “울지 마.”

 병규는 그녀의 어깨를 따뜻하게 감싸 주었다.

 카즈엘은 돌엲나 그의 행동에 놀란 듯했지만, 곧 그의 어깨에 자연스럽게 고개를 붇었다.

 병규가 말했다.

 “우리의 인연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추억이 존재하는 한 우리들은 언제라도 다시 만날 수 있어. 서로의 기억 속에서 말이야. 그러니 울지마. 차라리 축복해 주렴.”

 잔잔한 그의 말에 카즈엘은 가만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반짝이는 눈으로 병규를 올려다보며 선언하듯 말했다.

 “바람이 영원한 것처럼. 물이 영원히 흐르는 것처럼. 태양이 영원히 빛나는 것처럼. 숲의 향기가 영원한 것처럼. 난 당신을 잊지 않을 것입니다. 숲의 친구로서 또.......”

 그녀의 마지막 말은 너무도 조용해서 다른 사람들에겐 들리지 않았다. 오직 병규에게만 들렸다.

 “...... 고마워. 네 마음 확실히 받았다.”

 병규는 그녀의 이마에 키스를 했다.

 하이엘프 카즈엘과 가슴 아픈 작별을 나눈 병규는 글로리 공작과 필랄이트 공작을 만났다.

 “잘 가게.”

 글로리 공작은 다소 냉정한 얼굴로 그에게 말했다.

 그는 병규가 레종 여왕을 끝내 구하지 못했다는 것 때문에 화가 난 상태였다. 하지만 그는 애초에 불가항력이었다는 것을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기도 했다. 지금 병규에게 쌀쌀맞게 대하는 것은 자신의 무능에 대한 자책이기도 했다.

 “먼 길이 되겠구나.”

 필라이트가 자상한 얼굴로 병규에게 말했다. 그는 이미 호랭이와 눈물겨운 이별을 나눈 듯 눈시울이 붉어져 있었다.

 병규는 새삼 필라이트가 늙어 보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근심걱정이 많았기 때문이다.

 그는 장고한 연고 끝에 차원의 문을 열 수 있었다. 수천 년 마법사에 한 획을 그을 만한 대단한 연구였다.

 간신히 차원의 문을 여는 데 성공한 필라이트는 충분한 실험을 거칠 여유도 없이 키메라들을 이계로 보냈다.

 당시엔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바호크에 마왕이 강림하고, 그를 막을 수 있는 희망은 이계의 ‘능력자’들뿐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결론부터 말하면, 헛된 노력이 되고 말았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왕은 사라지고 만 것이다.

 병규나 호랭이는 이에 대해 함구했다. 비록 그들이 입을 다물고 있었지만, 예리한 필라이트는 필시 전쟁의 종결이 그들과 깊은 관련이 있을 것이라 짐작했다.

 “참. 그건... 어떻게 하기로 하셨습니까?”

 병규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떠나기 전날, 병규는 그에게 한 가지 부탁을 했다.

 차원의 문을 없애 달라는 것이 그것이었다.

 “서로 다른 세상이 연결되어 있으면 혼란이 생길 뿐입니다. 마계와 중간계가 연결되었을 때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잘 아시지 않습니까. 할아버지께서 현명한 선택을 하실 것이라 믿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필라이트는 홀가분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네 말이 맞다. 걱정 말거라. 모두 처분했으니 말이야.”

 “큰 결심 하셨군요.”

 “아니, 마땅히 해야 할 일을 했을 뿐이야.”

 필라이트는 담담하게 말했지만, 결코 간단한 일은 아니었다. 일생의 역작을 스스로 없애 버린 셈이니 말이다.

 “어쩌면 그들을 볼 수 있을지도 모르겠군. 혹여 보게 되면 잘 보살펴 주게. 불쌍한 사람들이야.” 

 필라이트가 걱정 가득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이계로 떠난 키메라들을 걱정했다. 병규는 침울한 표정으로 고개만 끄덕였다.

 근느 키메라들의 미래를 알고 있었다. 열 명이 떠났지만 무사히 도착하는 것은 단 한 명뿐. 그나마도 성격이 충격적으로변해 버린다. 디스가 키메라가 되었다는 필라이트의 말을 들었을 때, 그들은 참 많이 놀랐다. 

 더욱더 놀란 것은, 디스가 키메라들 사이에서 발칸으로 불린다는 사실이었고, 더욱이 그가 이계로 갔다는 말에 호랭이??? 낯빛마저 창백해졌었다.

 “그가... 설마 그가 발칸이었단 말인가!”

 어찌 된 이유인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틀어졌다.

 이상하게도 차원을 넘은 디스는 병규가 이드라센으로 오기 훨씬 전의 과거의 지구로 흐럴가게 된다.

 꼬인 것은 시간만이 아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냉철한 지성의 디스는 발칸이라는 희대의 살인마로 변해 버린다.

 호랭이가 놀람을 감추지 못하는 반면, 병규는 담담했다.

 마치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이. 호랭이가 알지 못하는 미래의 일까지도. 마왕의 각성과 죽음을 거친 후 그는 자신에 대해, 그리고 디스에 대해 많은 것을 알게 되었다.

 하지만 차마 그는 피랄이트에게 이 모든 이야기를 전해 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의 안녕을 부탁하는 필라이트의 말에 병규는 그저 알겠노라고만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때 퀴니가 준비가 다 되었음을 알려왔다. 

 다차원의 복잡한 마법진이 화려한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그녀가 만든 마법진은 필라이트가 만든 차원의 문보다 훨씬 안전했다. 이계로 이동할 때의 충격을 상당부분 완화해 줄 것이다.

 병규, 호랭이, 퀴니, 경애, 샤바.

 지구에서 넘어온 모든 인원이 마법진 위에 올랐다. 그리고 또 한 사람. 마그네트가 샤바의 팔에 매달린 채 마법진 위에 턱 하니 자리를 잡았다. 어찌 된 이유인지 마그네트는 다시 기억을 잃었다. 드래곤의 권능을 대부분 잃어버린 채로 마냥 샤바를 따르던 그때로 돌아간 것이다. 처음 그들은 마그네트를 이곳에 두고 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샤바가 조금만 눈에서 멀어져도 마그네트가 어린아이처럼 펑펑 울었기 때문이다.

 일행은 그녀를 데려가는 문제로 오랫동안 고민했다.

 “내가 책임지겠다. 샤바.”

 샤바의 한마디로 일행의 고민은 해결되었다.

 사바라면 믿을 수 있다.

 드래곤으로 완전 각성했던 마그네트조차 샤바에겐 약한 모습을 보였다. 그리고만약 최악의 상황이 되어 마그네트가 보내릐 거만한 드래곤의 면모를 되찾는다 해도 샤바라면 간단하게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 이유로 일행은 핵폭탄과도 같은 존재인 그녀를 지구로 데려가기로 결정했다. 호랭이는 생각했다.

 ‘과연 그녀가 정말로 기억을 잃은 것일까?’

 의문이다.

 ‘진실이 무엇이든 그게 얼마나 중요할까. 그저 이들이 함께 있음으로 행복할 수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할 뿐이다.’

바퀴벌레와 드레곤이라는 언벨런스한 커플이면 어떤가. 행복하면 그만이지. 신선인 호랭이는 그렇게 생각했다.

 “이제 고향으로 떠나게 되니 홀가분하겠군.”

 마법진이 발동되고 바닥에서 피어 오른 빛 무리에 병규와 그 일행의 모습이 점차 희미해질 때, 필라이트가 물기 어린 음성으로 물었다.

 “아닙니다.”

 병규는 고개를 저었다. 이것으로 모든 것이 끝난 것이 아니다.

 “전 모든 것을 마무리 짓기 위해 돌아가는 것입니다.”

 그는 알고 있었다. 차원의 문을 넘은 디스가 어떻게 변하는지. 발칸이란 이름의 그가 어떤 만행을 저지르는지.

 어떻게 보면 그의 변화는 병규의 전신인 벨로로폰 때문이라고 할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병규 일을 마무리 지으려 한다고 대답한 것이다. 지구로 돌아가서 발칸, 아니 디스를 만나 보고 마지막 결판을 짓기 위해.

 촤아아아아앗! 마법진에서 찬란한 빛의 기둥이 일어났다. 은빛 광채가 별무리처럼 일어나 병규와 일행을 감쌌다.

 병규는 눈을 부릅떴다.

 이드라센의 모습을. 그리고 작별을 아쉬워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조금이라도 더 가슴에 담아 두기 위해.

 “안녕히.......”

 그가 마지막 인사말을 던지는 순간, 마법진에서 빛이 폭발하듯 터져 나왔다. 눈부시게 일어났던 광채가 꺼지듯 사라졌을 때, 그들의 모습은 더 이상 그곳에 남아 있지 않았다.

 8월

 정오의 햇살에 달궈진 프라이팬처럼 땅이 타들어 갔다.

 높은 습도, 후덥지근한 기운.

 그늘에 가만 누워 있어도 짜증이 치밀 정도로 불쾌지수가 높다.

 넥타이를 아무리 풀어도 갑갑함은 해소되지 않는다.

 한여름의 숨 막히는 더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그날, 땀 냄새 나는 사내들이 창고에 모여 있었다. 험악한 흉터와 문신으로 가득 뒤덮인 그들의 벗은 상체가 땀으로 범벅이 되었다. 워낙에 찌는 날씨. 약간의 움직임에도 땀이 줄줄 흐른다.

 사내들의 분위기는 특이했다. 확실히 일반인들과는 달랐다.

 길들여지지 않은 맹수처럼 탁하고 거칠었다.

 건달들? 아니, 그보다는 좀 더 전문가 같은 느낌이 들었다.

 조직폭력배.

 바로 그랬다. 사내들은 바로 조직폭력배였던 것이다.

 “이런. 씨앙 새끼. 사람의 말을 더럽게 안 들어 처먹는구만.”

 그들을 이끌고 있는 사내의 입에서 험악한 말투가 터져 나왔다. 거친 기세와 태도가 결코 좋은 의도로 모여 있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었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그들이 둥글게 모여 있는 중앙에 한 청년이 널브러져 있었다. 이미 험한 일을 당한 듯, 얼굴이 엉망이었다.

 “흐흐.”

 청년을 내려다보며 사내는 흉하게 웃었다. 왼쪽 뺨에 그려진 어설픈 엔젤 문신이 출렁하고 움직인다.

 “크흐흐. 천하의 기린이라도 약에는 장사 없군.”

 기린이라고 불린 청년을 윽박지르던 사내, 카일이 입 꼬리를 들어 올리며 실실 쪼갰다.

 “새끼. 벌레처럼 꿈틀거리긴. 이젠 좀 기운이 떨어진 모양이지?”

 거만하게 지껄이던 그의 얼굴이 다음 순간 험악하게 일그러졌다.

 죽은 듯이 누워 있던 이운석이 돌연 먼지를 툭툭 털며 일어났기 때문이다.

 “뭐 이따위 자식이.......”

 카일의 눈에 놀람이 스쳤다.

 무려 30분간이나 죽어라고 팼다.

 보통 사람들 같으면 한 달간은 끙끙 앓았을 부상이다. 아니, 오지게 팼으니 죽어도 몇 번은 죽었을 것이다.

 그런데 놈은 아무 일도 아니라는 듯이 몸을 일으킨 것이다.

 “약발이... 좀 안 받는 녀석이로군.”

 카일은 이를 으득 갈았다.

 “내가 워낙 좀 튼튼한 사람이라서 말야.”

 이운석은 피식하고 웃어 보였다. 진한 모카커피와도 같은 향이 물씬 풍겨 나는 웃음이었다.

 하지만 그의 웃음은 조폭들의 화를 돋우고 말았다.

 “이런 개잡놈의 자식이!”

 조폭들은 불같이 화를 내며 이운석에게 달려들었다. 퍽퍽 하는 둔탁한 소음이 울렸다.

 연장을 한참이나 휘둘렀다. 이운석이 넝마같이 되어 버린 후에야 카일은 연장을 놓고 씩씩 숨을 골랐다.

 카일은 손가락으로 이운석의 뺨을 쿡쿡 찌르며 물었다.

 “자, 이제 말해 봐. 우리와 함께할 텐가? 네가 아무리 대단한 놈이라 해도 이대로 버티긴 힘들 거야. 어때, 그만 고분고분 말을 듣는게?”

 “......싫...다.”

 꿈틀. 카일의 얼굴에 그려진 험악한 상처가 징그럽게 구겨졌다.

 “아무래도 호된 맛을 봐야 정신을 차릴 모양이군.”

 그의 뒷주머니에서 나이프가 나왔고 창고 안으로 스며든 달빛을 받아 나이프는 요사스런 빛을 발했다.

 “잡아!”

 조폭들이 이운석의 무릎을 굻리고, 그의 팔을 땅바닥에 펼쳤다.

 “크크. 말 안 듣는 아이에겐 매가 약이라고 했던가.”

 카일의 나이프가 이운석의 팔목을 스쳤다.

 면도날처럼 예리한 칼날에 피부가 벗겨지며 피가 주륵 흘러나왔다. 이운석의 눈이 부릅떠졌다.

 나이프가 아래로 흘렸다. 팔꿈치를 지나 팔목 그리고 손등까지.

 물이 흐르듯 내려온 나이프가 손등위에서 수직으로 섰다.

 사내는 아무런 거리감 없이 나이프를 쥔 손에 힘을 가했다.

 쿡! 나이프가 이운석의 손등을 뚫고 손바닥 아래로 삐죽 나왔다.

 “.......”

 손등에서부터 일어난 격렬한 통증에 이운석의 상체가 벌벌 떨렸다. 이운석은 끝내 비명을 참았지만, 악 다문 그의 입술에서 가는 핏줄기가 새어 나오는 것만큼은 막을 수 없었다.

 “흐흐. 꽤 독하군. 좋아. 과연 팔목이 잘려도 참는지 두고 보자.”

 사내는 히쭉 웃으며 나이프를 이운석의 팔목에 가져갔다.

 이운석의 두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막, 나이프의 서늘한 한광이 이운석의 팔목을 잘라 내려 할 때였다.

 콰우우우우! 대기의 거친 외침과 함께 검은 공간이 열렸다.

 흉측한 괴물의 눈동자처럼 세로로 쭉 갈라진 공간. 조폭들은 이 괴이한 현상에 크게 놀라며 당황했다.

 “저것은.......!”

 이운석의 두 눈에 광채가 돌았다. 본 적이 있는 것이다. 저 검은 공간이 지금까지 친한 사람 여럿을 삼켰다. 

 “아... 공간!”

 쯔거거거거거걱! 천둥치는 소음이 터졌다. 그 폭발하는 힘에 창고는 당장이라도 무너질 것처럼 출렁였다.

 미친 듯이 울부짖는 공간 속에서 여섯 사람이 걸어 나왔다.

 사람들의 면면을 살펴본 이운석의 눈이 한순간 급격히 커졌다가 점점 정상을 되찾았다. 세 사람은 초면이지만, 나머지 셋은 알던 사람들이다. 반가운 얼굴. 아니, 그러웠던 사람들.

 “어라? 저 녀석. 기린 아냐? 저기서 뭘 하고 있는 거야?”

 탐스러운 백발을 휘날리는 미청년이 그를 보고 엉뚱한 소리를 해댄다. 처음 보는 사람인데 그를 알고 있는 듯했다. 한편, 새롭게 등장한 인물들에게 불안감을 느낀 조폭들은 그들 중 한 명이 이운석을 알아보는 듯하자 이내 분위기를 험악하게 달궜다.

 “이놈들. 한패다. 쳐라!”

 그들은 다짜고짜 아공간에서 나온 사람들에게 달려들었다.

 “무례한 사람들이군.”

 아공간에서 나온 사람들 중 짧은 머리칼의 건장한 체구를 한 청년이 가볍게 손을 들었다.

 콰앙.

 “크윽.”

 “뭐, 뭐야?”

 득달같이 달려들던 조폭들은 보이지 않는 장벽에라도 부딪힌 듯 구러 떨어졌다.

 “저놈. 능력자다. 모두 능력을 해방해!”

 카일이 당황하며 크게 소리쳤다. 그가 푸른빛을 내는 구슬을 들어 올리자 조폭들이 학질 걸린 개처럼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끄으으으으. 진한 신음소리와 함께 조폭들의 몸이 변했다.

 그들의 몸에서 털이 숭숭 나고 안면부가 앞으로 돌출하며 짐승의 모습으로 변했다. 잠깐 사이에 조폭들은 짐승이 되었다.

 “늑대인간(werewolf)!"

 보름달이 뜨면 늑대로 변한다는 수인. 조폭들이 변한 것은 공포 영화의 소재로 흔하게 쓰이는 늑대인간이었다.

 크르르르르.

 늑대인간들은 누런 이를 보이며 살기를 드러냈다. 이미 인간으로서의 이성을 잃어버린 것이다.

 “늑대인간은 달빛이 있어야 변할 수 있다고 들었는데. 저 녀석이 들고 있는 구슬 때문인가?”

 도자기를 감상하는 명인처럼 호랭이는 턱하니 턱을 만지며 중얼거렸다. 성난 짐승 무리가 포위하고 있음에도 털끝만큼도 긴장하는 빛이 보이지 않는다. 사실 창고에 있는 사람들 중 어느 누구도 늑대 인간을 보고 놀라지 않았다. 다소 신기하게 생각할 뿐이었다.

 “잘 있었나?”

 병규가 쓱 앞으로 나서며 이운석에게 물었다.

 우워어어!

 늑대인간들이 발작하듯 그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그들의 성난 발톱이 병규를 갈라놓으련느 순간, 거짓말처럼 그의 모습이 사라졌다. 다시 그가 모습을 드러낸 곳은 이운석의 앞이었다. 순간이동을 한 것처럼 순식간에 벌어진 일어났다.

 “못 본 사이에 많이 상한 것 같군.”

 “흥. 보고도 몰라? 왜 이렇게 늦었어?”

 기린, 이운석이 부스스 몸을 일으키며 투덜거렸다. 

 “미안.”

 병규는 입 꼬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여유 넘치는, 그리고 왠지 모르게 멋있어 보이는 웃음이었다.

 “일이 좀 있었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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