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94/102)

 당신의 멋쩍은 웃음이 좋았어요

 “크워어어어어!!”

 파멸의 창을 퉁겨 낸 마왕이 길게 울부짖었다.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안전한 곳. 레종은 전율스런 마왕의 외침에 어깨를 떨며 울었다.

 힘이 없기에 구경만 해야 했던 그녀는 하염없이 신에게 빌었다. 모두가 무사하길. 그리고 제발 그를 돌려달라고.

 하지만 신은 대답이 없었다.

 오직 마왕의 득의에 찬 웃음소리만이 들려울 뿐이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

 무섭다.

 벨로로폰의 힘이.

 그리고 그가 바로 자신이 사랑했던 바로 그 사람이라는 사실이.

 서러웠다.

 아무 힘도 못되는 자신이 원망스러웠다.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그녀의 앞섶은 그녀가 흘린 눈물로 축 젖어 있었다.

 그때였다.

 그녀의 마음속으로 불길한 음성이 들려온 것은.......

 “아직도 그를 사랑하느냐?”

 흠칫!

 레종은 너무도 놀란 나머지 어깨를 움츠렸다.

 “이 목소리.......”

 귀에 익은 음성이다. 결코 반갑지 않은. 두 번 다시 듣고 싶지 않은 자의 목소리.

 “타락의 군주!”

 놀랍게도 절망의 순간 그녀에게 말을 건 것은 사라진 마계의 마왕이었다.

 타락의 군주, 데이크란이 유혹적인 음성으로 다시금 속삭였다.

 “물었다. 아직도 그를 사랑하는가?”

 사랑하느냐는 그녀의 물음에 레종의 두 눈이 초점을 잃었다. 잠시 멍하니 하늘을 올려다보던 그녀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데이크란이 다시 물었다.

 “저렇게 흉악한 모습인데도? 저렇게 잔인한 작자인데도?”

 마왕의 음성에서 분노가 느껴졌다.

 레종은 소매로 눈물을 훔치며 가슴 아픈 미소를 지었다.

 “저런 모습인데도... 제겐 예전의 그 순수했던 얼굴만이 떠오르네요.”

 “저들이 죽으면 다음 네 차례다. 절망의 군주에서 자비란 없다. 연인의 손에 죽게 된 소감이 어떠냐? 후회하지 않느냐?”

 마왕의 음성이 격해졌다.

 “아니요.”

 레종은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았다.

 “멍청한 여자로군.”

 데이크란이 측은하다는 듯이 말했다. 어찌 된 이유에서인지 그녀의 음성에서 분노가 사라져 있었다.

 레종은 힘없이 웃었다.

 “그러게요. 참 이상하네요. 분명 무서운데. 가슴이 터질 듯 두려운데. 그런데... 두려움보다 걱정이 앞서네요.”

 “뭐가 걱정되느냐?”

 “그를 잃을까 봐. 그를 다시는 못 보게 될까 봐. 그게 걱정되네요.”

 “

 주르륵.

 눈물이 다시 흘렀다.

 휘오오오오오오!

 거친 바람이 불었다.

 부옇게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았을 때, 마왕 데이크란이 그림 같은 자태로 그녀 앞에 모습을 드러냈다.

 한줄기 불어온 식풍에 검고 붉은 옷자락이 날개처럼 휘날렸다.

 “좋다. 네가 진심이라면 증명해 보이거라.”

 “......?”

 눈물로 얼룩진 눈으로 데이크란을 올려다보았다.

 “난 벨로로폰의 각성 때 몸에 큰 타격을 입었다. 움직이는 것도 힘들 지경이지. 반대로 너에겐 힘은 없지만 육체가 있다.”

 “지금의 몸은.......”

 “마력으로 형체만을 유지하고 있을 뿐이지.”

 현재 데이크란의 육체는 깨지기 쉬운 유리잔과 같았다.

 영특한 레종은 이내 그녀가 말하고자 하는 바를 이해했다.

 “육체를 빌려 달라는 말인가요? 당신은 제 몸을 이용하련느거로 군요.”

 “다르다. 난 네 몸을 달라고 하는 게 아니다.”

 “그럼?”

 “공유하자는 것이다. 네게 힘을 주겠다. 대신 난 육체를 얻게 되는 것이지.”

 “제가 왜 당신에게 육체를 바쳐야 하나요?”

 “그 힘으로 넌 연인의 만행을 막을 수 있게 될 테니까.”

 “.......”

 레종은 망설였다.

 마왕의 말을 어떻게 신임할 수 있을까.

 큰 도박이다.

 하지만 그녀는 이번 도박에 모든 걸 걸어 보기로 했다.

 벨로로폰의 살의에 젖은 웃음소리와 처잠한 일행의 모습을 더는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아니, 혼자 남는 것이 두려웠다.

 “좋아요. 당신의 말대로 따르도록 하겠어요.”

 레종은 마왕의 계약을 승낙했다.

 거침없는 승낙에 데이크란은 놀란 듯 얼굴색이 변했다. 말이 없던 마왕은 심각한 표정으로 한마디를 덧붙였다.

 “후회하지 않는가? 나와 계약하면 너의 몸과 정신은 사악한 기운에 오염된다. 타락한 종족이 된다는 의미다. 그리고 영원히 신에게 저주 받게 된다.”

 레종은 자조적인 미소를 머금었다.

 “그가 없는 천국이 무슨 의미가 있을까요?”

 “.......”

 데이크란은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녀가 한숨을 쉬며 말했다.

 “너나 나나 참으로 멍청한 여자로구나.”

 의미 모를 말을 내뱉은 데이크란은 레종의 이마에 손을 짚고는 어둠의 계약을 맺았다.

 어둠이 회오리치듯 일어나 둘을 감쌌다.

 “나의 힘이 너의 뜻과 함께할 것이다.”

 마왕의 주문과 함께 레종은 서서히 변해 갔다.

 새벽녘 창가로 비쳐 드는 여명과 같았던 그녀의 화사한 머릿결은 어느새 차갑고 칙칙한 암흑으로 채색되어 있었다. 혼탁한 눈동자 속엔 온갖 열망과 욕구가 복잡하게 뒤얽힌 채 뜨거운 열망을 토해 냈다.

 어둠이 가시고, 데이크란 모습이 사라졌을 때, 레종은 전혀 다른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반짝 눈을 뜬 레종의 눈동자에는 더 이상 순수함이 남아 있지 않았다. 마왕과 완전히 합쳐진 것이다.

 마왕으로 변한 그녀의 가슴 깊은 곳에서 당황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그것은 힘을 얻는 대가로 육체의 지배권에서 밀려난 레종의 목소리였다.

 ‘당신은... 이제 보니!’

 마왕과 결합한 그녀는 알 수 있었다.

 데이크란은 단순히 레종에게 힘만 빌려 준 것이 아니었다.

 둘의 계약은 일반적인 소환과 그 의미가 완전히 달랐다.

 레종이 마왕에게 육체를 주었듯, 마왕 역시 그녀에게 자신의 영혼을 걸었다.

 만약 레종이 죽는다면, 데이크란 역시 죽게 될 것이다.

 레종이 목숨을 걸었듯, 데이크란도 목숨을 건 것이다.

 ‘왜... 어째서.......’

 레종이 물었다.

 “글세.”

 데이크란은 애매모호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레종은 알 수 있었다. 육체를 공유하게 된 이상 마왕의 생각마저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고마워요.’

 레종은 진심으로 데이크란에게 감사했다.

 “값싼 동정은 받고 싶지 않군. 지금은 강적을 물리치는 것에만 정신을 집중하고 싶다.”

 마침내 래종의 육체를 차지한 데이크란이 일어섰다.

 웅장한 존재감을 구름처럼 이끌며, 마침내 그녀가 나선 것이다.

 “허억! 허억! 허억!”

 거친 숨소리.

 숨이 턱까지 차오르고, 머리가 핑 돈다.

 이렇게 지쳐 본 적이 얼마만이던가.

 마황과 처음 만났을 때, 그리고 아버지인 전대 마왕을 쓰러트렸을 때. 그때를 제외하곤 처음이다.

 설마 이들이 이렇게까지 대단한 힘을 발휘할 줄이야.

 하지만 그들은 쓰러졌고, 그는 두 말로 대지를 밟고 있다.

 “클클클.”

 사악한 웃음이 입가에 감돈다. 그것은 곧 터질 듯한 광소로 변했다.

 “크크크크크크. 크하하하하하하!”

 한동안 미친 듯 웃어젖히던 그는 어느 순간, 갑자기 뚝 하고 웃음을 멈추었다.

 그리곤 차가운 눈으로 주위를 쓸었다.

 백발의 청년이 혼이 빠진 듯한 표정으로 그를 멍하니 쳐다보고 있었다.

 호랭이.

 마지막 순간 그가 보여 준 파괴력은 다른 마왕들의 권능과 견주 어도 전혀 손색이 없을 정도다.

 만약 벨로로폰의 권능이 적의 능력을 강탈하는 것이 아니었다면, 그 권능으로 파멸의 창이 가진 힘의 절반을 빼앗아 자멸하게 만들지 못했다면.......

 제 아무리 그가 대마왕이라도 저 일그러진 대지처럼 처참하게 뭉개지고 말았을 것이다.

 그만큼 목숨을 건 호랭이의 마지막 발악은 대단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한계.”

 벨로로폰은 탈진한 호랭이를 내려다보며 냉소했다.

 모든 능력을 죄다 끌어다 쓴 신선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힘을 잃었다.

 이제 처형의 시간이 도래했다.

 감히 마왕의 뜻에 대항한 반역자들에게 처참하게 복수할 때다.

 “누가 좋을까.”

 벨로로폰은 섬뜩한 눈으로 반역자들을 쓸어 보았다.

 모든 힘을 소진한 짐승 녀석은 천천히 손봐 줘도 되겠고, 기절한 여자는 시시하다.

 그의 눈이 아래로 흘렀다.

 “역시 네가 좋겠지?”

 벨로로폰이 손을 뻗자 그의 그림자 속에서 작은 인영이 딸려 올라왔다.

 샤바였다.

 파멸의 창이 폭발할 때, 샤바는 재빨리 마왕의 그림자 속으로 숨었다. 그래서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그는 죽어 가고 있었다.

 얼굴엔 열꽃이 피고, 고열과 극심한 두통에 시달렸다.

 벨로로폰의 검은 태양에 노출되었기 때문이다. 무시무시한 전염병이 그를 내부에서부터 천천히 잠식해 갔다.

 “이거 가만히 내버려둬도 죽을 것 같군.”

 축 늘어진 샤바의 멱살을 잡으며 벨로로폰은 심드렁하게 말했다.

 꽤나 애먹이던 상대지만 결국은 이겼다. 짜릿하게 긴장 후에는 허무함만이 남을 뿐.

 “헉. 헉. 허헉. 분하다. 샤바.”

 샤바가 숨을 헐떡거렸다.

 오늘 하루 동안 평생 쓴 힘보다 더 많은 능력을 쏟아 부었다. 실신하지 않은 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최선을 다했지만 마왕을 이기지 못했다.

 샤바는 억울했다.

 그는 아직 성장기다. 만약 그가 성체였다면, 그래서 글루토와 같은 환수를 적어도 넷 이상을 한꺼번에 불러들였다면, 어쩌면 결과는 지금과 조금 달라졌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현실은 비참했다.

 “갈려라!”

 벨로로폰이 잔혹한 음성으로 손을 펼치자 중압이 회오리치듯 뻗어 나가 샤바를 감쌌다.

 드그극!

 멧돌에 갈리듯 샤바의 왼쪽 팔이 뭉개졌다.

 “아아아악!”

 샤바는 온몸을 비틀며 찢어지는 비명을 토했다. 너무도 고통스러워 기절조차 할 수 없었다.

 “크크크크. 아직 아니야. 아직 끝이 아니다.”

 벨로로폰의 손이 샤바의 다리를 짚었다.

 가가각!

 “끄으으으으으!”

 악다문 샤바의 이빨 사이로 처절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왕은 흡족해했다.

 “크크크. 좋구나. 너의 비명소리는 참으로 아름다운 음악이로다.”

 그의 손이 지휘를 하듯 샤바의 몸을 훑었다. 그에 따라 걸레쪽이 된 샤바의 몸뚱이가 격렬하게 경련을 일으켰다.

 드극! 트드드득. 투걱!

 “아아아아아악!”

 처참한 비명이 하늘을 울렸다.

 “하, 하지 마 !”

 퀴니는 사색이 된 채 소리쳤다.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하지만 뼈와 살이 짓이겨지는 처참한 소음과 샤바의 비명소리는 귀를 막은 손가락 틈을 비집고 들어와 그녀의 고막을 사정없이 유린했다.

 “아아아아. 안 돼!”

 그녀는 끊어질 듯한 복부의 고통도 잊은 채 벨로로폰에게 달려갔다.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애원했다.

 “그만둬. 벨로로폰. 제발. 그만두란 말이야. 우리가 누군지 잊은거야? 따뜻하게 웃던 때로 돌아와 줘. 제발.”

 그녀의 외침은 딱딱한 돌덩이마저 녹일 정도로 간절했다.

 하지만 벨로로폰의 마음은 얼음처럼 차갑게 냉각되어 있었다.

 퀴니는 깨달았다.

 아무리 애원하고 사정해 봐야 허무한 외침에 불과하다는 것을. 하지만 그래도 벨로로폰을 놓지 않았다.

 그를 돌려달라며 울며불며 사정했다.

 “귀찮다.”

 짜증이 인 마왕이 발로 찼다.

 퀴니의 작은 몸이 허공으로 붕 떴다 묵직하게 땅으로 떨어졌다. 아직 어린 그녀에게 얼마나 큰 고통일까.

 하지만 퀴니는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다시금 벨로로폰에게 매달렸다.

 “샤바를, 샤바를 놔줘.”

 “죽고 싶으냐!”

 벨로로폰은 심하게 그녀를 패대기쳤다.

 어깨부터 받가에 쿵 떨어진 그녀는 이번에도 이를 악물며 신음을 참았다.

 웃은 물론이고 고운 얼굴도 흙투성이가 되었다. 어디를 어떻게 다쳤는지, 붉은 피가 곳곳에서 배어 나왔다.

 옷 밖으로 드러난 피부는 멍투성이였다.

 그래도 퀴니는 일어났다. 

 다리를 절며 벨로로폰에게 매달렸다.

 그리고 애원했다.

 “나의 벨로로폰으로 돌아와 줘.”

 “.......”

 계속된 그녀의 요구에 벨로로폰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랐다.

 “......죽여 주지.”

 벨로로폰은 진한 살기를 풍기며 그녀의 목을 잡고 들어 올렸다. 얼마나 그녀의 목을 억세게 움켜쥐었는지 퀴니는 숨조차 제대로 쉴수 없었다.

 그녀는 펑펑 울며 피를 잔뜩 머금은 것처럼 붉은 입술로 마지막 말을 남겼다.

 “사...... 랑해.”

 눈물이 턱 아래로 방울져 떨어졌다.

 그녀의 마지막 울음에 호랭이의 정신이 돌아왔다.

 “망할 자식.”

 호랭이는 한 팔과 두 다리를 못 쓰게 되었다. 바닥을 기다시피하며 벨로로폰에게 다가갔다.

 “이 멍청한 녀석아! 눈을 뜨란 말이다!”

 울컥 한 모금의 피가 입 밖으로 터져 나왔다. 그의 외침은 처참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하지만 이미 굳어 버린 벨로로폰의 마음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손 안에 쥐어진 가녀린 소녀의 목을 비틀며 잔혹한 웃음을 머금었다.

 퀴니는 눈물을 흘리며 웃었다.

 고통스러운 순간임에도 그녀는 환하게 웃었다.

 목이 잠겨 말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입가에 떠도는 말을 말들을 처연한 웃음에 담아 그에게 보냈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녀는 포기하지 않았다.

 “크크. 부질없는 노력이다. 지옥에 가서 후회하거라.”

 벨로로폰은 잔인하게 웃으며 그녀의 목을 꺾었다. 아니, 꺾으려고 했다. 바로 그 순간.......

 “단절.”

 굴절 없는 작아??? 음성이 들렸다.

 힘없이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그 음성에 깃든 권능은 산과 들을 베고, 퀴니의 목을 조르고 있던 마왕의 팔마저 잘라냈다.

 촤악!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벨로로폰은 팔이 허공으로 날았다.

 땅에 떨어진 팔은 갓 잡아 올린 물고기처럼 피를 쏟아 내며 펄떡 펄떡 뛰었다.

 마왕의 팔을 자른 것이 얼마나 날카로웠던지, 잘려진 단면이 놀랍도록 생동감 넘쳤다.

 “단절.”

 다시 한 번 예의 그 음성이 들렸다.

 촤아악!

 서걱.

 이번엔 벨로로폰의 두 다리가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털썩.

 마왕이 무릎을 꿇었다.

 아니, 정확하게는 무릎 꿇려졌다.

 그는 여전히 서 있었지만, 그의 몸뚱이를 든든하게 받쳐 주던 두 다리가 잘려 나가는 바람에 더 이상 서 있을 수 없게 되었다.

 “크으으.”

 뒤늦게 벨로로폰의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지며 신음이 흘러나왔다.

 “그대도 고통을 아는군.”

 안개를 이끌고 나타난 레종이 굴절 없는 음성으로 말했다.

 엄청나다.

 그녀의 전신에서 풍기는 웅장한 존재감에 하늘과 땅이 고개를 조아렸다.

 벨로로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는 레종의 몸을 지배하고 있는 또 다른 마왕의 그림자를 읽어 낼 수 있었다.

 “데이크란.”

 그가 씹어 삼키듯 물었다.

 “이게 무슨 짓이냐?”

 “글세.......”

 레종의 몸을 지배한 데이크란은 피식 웃었다.

 “여자들의 옹졸한 복수라고 해 두지.”

 “한심한 짓이군.”

 벨로로폰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잘려 나간 두 다리가 보낼의 자리에 달라붙어 있었다.

 츠르륵.

 팔에서 신경이 전선줄처럼 뻗어 나와 잘려진 손을 잡아끌었다. 잠깐 사이 잘려 나간 왼팔마저 완전하게 고쳐졌다.

 무시무시한 재생력이 아닐 수 없었다.

 “도전인가? 알 텐데, 내게 반항하는 것이 얼마나 무모한 행동인지.”

 팔과 다리의 부상을 치유한 벨로로폰이 이죽거리며 말했다.

 “.......”

 데이크란은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보았다. 설마 이렇게 빨리 치유될 줄이야.

 “지금이라면 날 이길 수 있을 것 같은가? 차라리 내가 기억을 잃었을 때를 노리는 것이 현명했을 것이다.

 “그때는 당신이 이렇게 피어 굶주린 모습으로 각성할 줄은 몰랐거든.”

 “날 각성시킨 것은 바로 너다.”

 “그래. 계산 착오였지. 뭐, 약간의 음모를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사실이야. 하지만 모든 게 엉망이 되었어. 당신이 살인마가 되어버리는 바람에 말이야. 지금의 당신, 최악이야.”

 “크크. 최악이라. 마왕에겐 최고의 천사로군. 그런데 과연 네 능력으로 날 이길 수 있을까?”

 “흥.”

 벨로로폰의 말에 데이크란은 차가운 콧소리를 냈다. 그녀는 팔짱을 낀 채 차가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허세 부리지 마. 당신, 많은 지쳤을 텐데. 드래곤과 싸우고 또 그에 버금가는 존재들과 연속적으로 힘든 싸움을 겨뤘어. 지치지 않는 다면 이상한 일이지. 게다가.......”

 그녀의 시선이 이미 기절할 경애와 샤바, 그리고 전투불능이 된 호랭이에게 돌아갔다.

 “유감스럽게도 당신의 정신은 아직 완전히 인간의 틀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 같군.”

 벨로로폰의 눈가에 은은한 분노가 떠올랐다.

 “......무슨 말이지? 내가 완전히 각성하지 못했다는 말인가?”

 “힘은 분명히 각성했어. 아니, 각성 이상이지. 폭주라고 할까? 하지만 정신은 그렇지 않아. 당신에겐 아직 인간이었을 때의 이성이 남아 있는 것 같아.”

 냉정한 목소리로 말한 그녀는 손가락으로 호랭이와 그 일행들을 가리키며 말을 이었다.

 “이들을 죽이지 않은 그 증거다.”

 움찔.

 벨로로폰의 어깨가 휘청였다.

 “그럴 리... 없다.”

 데이크란은 피식 웃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뻗어 그의 얼굴을 가리켰다.

 “그렇다면 지금 그대의 뺨을 흐르는 눈물은 뭐지?”

 “......!”

 벨로로폰은 손으로 얼굴을 쓰다듬었다. 축축한 무언가가 느껴졌다. 눈에서 시작된 그것은 뺨을 타고 턱 아래로 방울져 떨어졌다.

 눈물이었다.

 절망의 군주, 대마왕 벨로로폰이 눈물을 흘리고 있었다.

 그의 의식 깊은 곳에 잠자고 있는 병규의 통곡에 그의 육체가 반응한 것이다.

 “이건... 의외로군.”

 벨로로폰은 이마를 짚으며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인간 나부랭이의 의식이 아직까지 남아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파리처럼 귀찮게 구는 녀석들을 아직 죽이지 않았던 것도 그 영향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죽이지 않은 것이 아니라, 못한 것이다. 한 가닥 남은 이성이 그들의 죽음을 용납지 않은 것이다.

 벨로로폰은 마왕으로서의 기억과 풍모를 완전히 깨달았지만, 병규의 이성만은 완전히 제거하지 못했다. 애초에 불가능한 일이었다.

 병규와 벨로로폰은 같은 존재이기 때문이다. 쉽게 말하면, 마음속의 어둠이 마왕  벨로로폰의 이성이고, 극히 미미한 나머지 부분이 병규의 이성인 셈이다.

 지금까지 강대한 마왕의 권능으로 억눌려 놓았던 병규의 이성이친인들의 위기에 감정의 표면까지 떠오른 것이다.

 “과연 그렇군. 하지만 그렇다고 달라지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벨로로폰은 이내 냉정을 되찾았다.

 이번엔 데이크란의 표정이 조금 변했다.

 약간이라도 혼란스러워할 줄 알았는데.

 ‘과연 절망의 군주.’

 새삼 벨로로폰의 악명이 떠오른다.

 벨로로폰이 많이 지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녀 역시 정상이 아닌 상태.

 잃은 육체를 대신하여 레종의 몸을 빌렸다. 마치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거북하다. 이런 이질감이 그녀의 권능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결국은 같은 조건이란 소리로군. 과연 내가 그를 당해 낼 수 있을까?“

 마침 벨로로폰이 그녀의 의문에 답을 하듯 입을 열었다.

 “내가 많이 지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타락의 군주여, 내가 누구인지 잊지 말라. 나 절망의 군주가 가진 권능을 잊지 말라. 널 타락으로 이끈 것이 누구인지 읹지 말라.”

 “...... 그렇군요. 당신이군요. 절망의 군주, 벨로로폰.”

 그녀는 두 주먹을 굳게 쥐며 마음을 다잡았다.

 새삼 그가 얼마나 대단한 자인지 깨닫게 되었다. 같은 마왕이라고 해도 격이 존재한다. 벨로로폰은 마황조차도 정면대결을 피하던 절세의 대마왕인 것이다.

 ‘힘내세요.’

 레종이 간절한 목소리로 그녀를 응원했다.

 데이크란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강직함이 담긴 음성으로 벨로로폰에게 고했다.

 “나 타락의 군주 데이크란이 그대 절망의 군주에게 선안한다. 그대와 나, 다시는 한 하늘 아래 같이 있지 않겠다.”

 그것은 마족끼리 최후의 결전을 다짐하는 선언이었다.

 의외로 벨로로폰은 환하게 웃었다.

 “좋아. 만찬은 여기까지로군. 이제 디저트를 즐길 시간이야.”

 쿠쿠쿵!

 육중한 충격과 함께 대지가 사정없이 뒤흔들렸다.

 크드드드드!

 대지는 갈라진 몸뚱이를 비관하며 비명을 질렀다.

 절망의 군주와 타락의 군주.

 두 마왕의 대결은 그야말로 경천동지할 수준이었다.

 하늘을 붉게 물들고 광대한 대지가 노랗게 타들어 갔다.

 벨로로폰은 고삐 풀린 말처럼 자신의 권능을 마음껏 발산했다.

 지금까지 그는 실로 ㄹ다양한 종족의 능력들을 복제해 왔다.

 발칸의 눈과 발. 그리고 요수의 발톱.

 스크래그의 재생력과 순발력.

 오우거의 힘,

 드래곤의 비늘, 드래곤의 화염.

 냉기, 자력, 가시, 암흑, 일렉트리 볼트, 중압. 개미지옥, 용해액.......

 실로 한 존재가 사용하는 능력이라곤 도저히 볼 수 없는 다채로운 능력들. 당연히 그들 공격들로 다채롭고 현란했다.

 그에 반해, 데이크란 단순하게 느껴질 정도로 간단하고 단조로 웠다.

 심지어 그녀는 단 하나의 능력만을 썼다. 하지만 그 하나의 능력이 그녀에겐 최강의 창이자, 최고의 방패가 되었다.

 그녀의 권능은 단절(斷絶).

 전신에서 뻗어 나간 마력이 절대의 예기를 가진 검이 되어 모든 것을 절삭한다.

 그녀의 권능은 대상을 공간과 시간 양면으로 절단 낸다. 그래서 세상 그 무엇도 절단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단절의 권능은 무자비한 절삭력을 가진 검임과 동시에 최고의 방패이기도 했다.

 요수의 발톱을 간단히 절단 내고, 화염을 갈랐으며, 얼음폭풍을 두 동강 내고, 벼락의 맥을 끊어 놓았다.

 벨로로폰의 모든 공격이 그녀의 권능에 차단되어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또한 그녀의 권능은 거리에 제한이 없었다. 눈이 미치는 모든 곳은 공격반경이 된다.

 차원마저 절단하는 절대무적의 검. 신조차 그녀의 권능 앞에서 허무하게 두 동강 나고 말 것이다.

 이것이 그녀가 가진 권능인 단절의 힘이다.

 “받아라!”

 벨로로폰이 광포한 외침과 함께 화염을 뿜어냈다.

 세상을 덮을 기세로 폭사된 화염이 데이크란을 감싸 버리는 듯했다. 데이크란은 한 손을 내밀어 조용히 뇌까렸다.

 “무도한 적을 베는 칼날이 되어라. 단절!”

 차킹!

 날카로운 검음과 함께 파도처럼 그녀를 뒤덮어 오던 화염이 안개처럼 허무하게 갈라졌다. 화염 줄기를 반으로 가른 그녀의 권능은 그 기세 그대로 벨로로폰을 덮쳤다.

 서걱!

 섬뜩한 절삭음과 함께 벨로로폰의 한쪽 어깨가 날아갔다. 잘려진 팔이 저 멀리 날아갔다.

 잘려나간 상처에서 피가 폭포수처럼 새어 나왔다.

 극심한 부상.

 하지만 데이크란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못했다.

 살점이 나간 부위에서 울컥울컥 살덩이가 밀려나오더니, 순식간에 새로운 팔이 되었다.

 잘려 나간 팔이 다시 재생되는 데까지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

 지금까지 데이크란은 몇 번이나 벨로로폰의 신체를 절단 냈다. 하지만 대마왕의 경이로운 재생능력은 순식간에 상처를 치유했다.

 “이 정도로는 얼미도 없다는 말이가.”

 데이크란의 낯빛이 굳어졌다.

 지금까지의 실험을 통해 수족을 잘라 내는 것만으로는 결코 벨로로폰을 쓰러트릴 수 없음을 깨달았다.

 “너의 머리통을 잘라 내야겠군.”

 데이크란의 두 눈이 차갑게 가라앉았다.

 “크윽. 또 당했군.”

 벨로로폰은 재생된 팔 부위를 만지며 으득 이를 갈았다. 

 부상은 순식간에 치유되었지만, 고통만은 어쩔 도리가 없다.

 팔이 잘려 나갈 때나 다리가 잘려 나갈 때마다 그에 따르는 극심한 고통이 그대로 전달되는 것이다.

 “이곳이 마계였다면.......”

 그는 갑갑함을 느꼈다.

 마왕의 능력이 아무리 대단하다 해도 무한정으로 힘을 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체내에 저장된 마력만으로는 이미 한계에 다다랐다. 

설상가상으로 이곳은 중간계. 마력의 수급조차 원활하지 못한 곳이다. 

 원래 중간계는 마나로 가득 찬 세계라, 마계에 비해 마력의 밀도가 턱없이 낮았다.

 한발 앞서 중간계에 온 마족들이 마력장을 펼쳐 두었기에 그나마 중간계치곤 마력의 분포가 높은 편이긴 했다. 허나 마왕이 소모한느 마력을 지탱하기엔 역시나 턱없이 부족했다.

 “매력적인 힘이군. 크크크.”

 벨로로폰은 데이크란 쳐다보며 흉측하게 웃었다.

 상대하기 힘들면 힘들수록 오히려 데이크란의 권능에 욕심이 일었다.

 가지고 싶다.

 내 것으로 만들고 싶다.

 그녀의 능력을 갈취하고 싶다.

 탐욕이 끊임없이 그를 충동질한다.

 “과연 마왕의 권능도 빼앗을 수 있을까?”

 분명 마왕의 것은 지금까지 그가 흡수한 다른 마족들보다 훨씬 거대할 것이다. 어쩌면 영원히 채울 수 없을 것 같은 그의 뱃속을 조금쯤은 채워 줄 수 있을지도.

 “좋아. 결정했다. 널 내 것으로 만들겠어.”

 호기심과 탐욕이 범벅이 된 눈으로 벨로로폰은 웅대한 권능을 일으켰다.

 “크워어어어어!”

 짐승 같은 울부짖음과 함께 세 개의 능력이 한꺼번에 방출되었다.

 섬광이 재처럼 날리고, 막중한 압력이 데이크란의 머리를 내리눌렀으며,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대지가 우르르 진동했다.

 세상이 뒤집히는 듯한 충격이 그녀를 휩쓸었다.

 데이크란은 의외로 차분했다. 그녀는 두 손을 비스듬히 펼치며 오만한 눈빛으로 권능을 불렀다.

 “단절!”

 쩌거걱!

 허공이 두 동강 나며, 그녀의 머리 위를 눌러오던 압력이 해소되었다. 중압을 해소한 그녀는 이내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파도 위에 비친 햇살과 같은 섬광들이 그녀를 뒤덮었다. 차분히 마력의 충전을 기다리던 그녀는 심호흡과 함께 권능을 펼쳤다.

 “단절!”

 차킹!

 날카로운 소음이 섬광 무리를 갈랐다. 섬광들은 벼락과 같은 힘을 가지고 있었지만, 감히 마왕의 권능을 감당하지 못하고 전구가 박살나듯 퍽퍽 깨져 나갔다.

 “헉헉.”

 데이크란의 입에서 격한 숨소리가 뿜어졌다.

 지금까지 몇 차례나 벨로로폰의 사악한 공격을 막아 냈다.

 과연 그녀의 권능은 절대적이다. 그 어떤 요사스런 공격도 능히 베어 내어 무산시켰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씩 지쳐 가고 있었다.

 피로가 몰려온다.

 입에서 단내가 푹푹 풍길 지경이다.

 그녀의 권능은 절대적인 위력을 지녔지만, 마력의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 또한 있었다.

 게다가 지금 그녀는 남의 몸을 빌려 쓰고 있는 처지.

 아무래도 몸을 움직이는 것이 어색할 수밖에 없다.

 그에 반해 벨로로폰은 강적들과의 연이은 대결 후인데도 아직 팽팽하다.

 “......괴물이군.”

 정말이지 괴물 같은 신체가 아닐 수 없다. 같은 마왕임에도 그녀는 자신의 권능이 벨로로폰에게 밀린다는 것을 느꼈다.

 쿠르르릉!

 굉음과 함께 땅이 우르르 흔들렸다.

 한순간에 벨로로폰이 부린 권능 중 두 가지를 소멸시켰지만 아직 하나가 남아 있다.

 쯔거걱.

 지진과 함께 가뭄에 논 갈라지듯 땅이 쩍쩍 갈라졌다.

 데이크란은 아직 힘을 쓸 수 없었다.

 마력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차분한 표정으로 마력이 보충되길 기다렸지만, 기실 그녀는 긴장으로 피가 마를 지경이었다.

 콰드득!

 급기야 그녀의 발빝이 시바로 갈라졌다. 괴수의 아가리처럼 벌어진 땅이 그녀의 발을 삼켰다.

 데이크란은 끝까지 참았다. 아직 마력이 부족했다.

 벌어진 땅이 서서히 오므려지며 그녀를 옥죄어 왔다. 어느새 그녀는 땅속에 갇힌 채 머리만 밖으로 나온 형국이 되고 말았다.

 정신을 집중하며 마력을 모으고 있을 때, 그녀의 머리 위로 그늘이 졌다.

 벨로로폰,

 그가 날카로운 손톱으로 레종의 얼굴을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아무래도 너의 권능은 한계가 있는 모양이구나. 위력은 강하지만 단발성. 아닌가?”

 데이크란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아주 작은 변화이지만, 벨로로폰은 그 작은 변화를 좋지지 않았다.

 “크크. 좋아. 그 정도 불편쯤은 감소하지. 걱정하지 마. 네 능력은 내가 잘 쓸 테니까.”

 벨로로폰이 손을 뻗었다.

 그의 손끝에서 요수의 발톱이 사요한 기운을 뽐내며 뻗어 나왔다. 그대로 데이크란의 머리를 잘라 낼 기세.

 “이때를 기다렸다.”

 돌연 데이크란이 벼락처럼 외치며 권능을 쏟아 냈다.

 차킹!

 면도날과 같은 날카로운 기세가 벨로로폰을 휘감았다.

 “이쯤이야.”

 벨로로폰은 가볍게 웃으면 몸을 움직였다. 그녀의 반격은 이미 예상했던 바다. 예상하고 있었던 이상, 피하는 것은 식은 죽 먹기.

 하지만 그 순간 예기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내가 널 막겠어!’

 그의 내부에서 거친 외침이 들려왔다. 그리고.......

 두쿵!

 강력한 폭발음과 함께 그의 가슴이 부풀린 풍선처럼 치솟았다.

 “큭!”

 돌연 벨로로폰이 가슴을 움켜잡았다.

 잔뜩 일그러진 그의 얼굴이 극심한 고통을 나타냈다.

 갑작스런 변괴.

 그것은 그의 내부에서 일어난 이질적인 기운들의 충돌 때문이다.

 마나와 마력.

 마그네트에게서 흡수한 피가 끝내 일을 벌인 것이다.

 드래곤의 힘은 순수한 마나의 결정. 그것이 중요한 순간 폭발하듯 터지며 벨로로폰의 근간이라고 할 수 있는 마력과 충돌하였다. 극히 짧은 순간이지만, 벨로로폰의 몸이 굳어 버렸다.

 ‘녀, 녀석이.’

 벨로로폰의 얼굴이 사색으로 변했다.

 지금껏 강대한 마력으로 봉인시켜 두었던 녀석이 깨어났다. 그리곤 어떻게 했는지 금제해 둔 드래곤의 마나를 열어 마왕의 마력과 충돌시켰다.

 녀석이.

 병규라는 녀석이.

 테이크란이 때를 기다리고 있었듯, 녀석 또한 이 한순간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이럴 순 없다!”

 그가 괴성을 지르는 순간, 데이크란의 권능이 그의 욱체를 휩쓸었다.

 촤아아악!

 팔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큭!”

 벨로로폰은 신음성을 흘리며 주춤 물러났다. 그의 왼팔은 어깨위까지 깨끗하게 잘려 나갔다. 하지만 끝내 그를 제거하는 데엔 실패했다. 마지막 순간 벨로로폰이 상상을 초월하는 움직임으로 데이크란의 권능을 피해 낸 것이다.

 “크크. 아쉽게 됐군.”

 벨로로폰이 비릿하게 웃었다.

 그의 웃음은 몸 안에 잠든 병규라는 이성에게 보내는 조소이기도했다. 어떻게 해서 드래곤의 마나를 마력과 충돌시켰는지는 모르지만 결국 최후에 웃는 자는 마왕 벨로로폰, 그인 것이다.

 “크흐흐. 마지막 기회였는데, 이젠 틀린 것 같군.”

 벨로로폰의 그림자가 일렁일렁 일어났다. 잘려 나간 팔은 어느새 복구가 되었다.

 “으으.”

 데이크란은 한탄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벨로로폰의 몸이 굳을 때만 해도 승리를 확신 했다. 하지만 이제는 틀려 버렸다.

 마력이 고갈되었다.

 더 이상 벨로로폰을 막을 힘이 없는 것이다.

 “이제 마지막이다.”

 벨로로폰의 그림자가 데이크란의 몸을 단단하게 잡아 붙들었다. 도저히 빠져나갈 수 없게 그물을 친 벨로로폰은 요수의 발톱을 수평으로 휘둘렀다.

 데이크란의 목에서 피가 쏟아졌다.

 “안 돼!”

 작은 그림자가 벨로로폰의 발을 잡고 뒹굴었다. 생각지도 못한 기습에 대마왕은 균형을 잃고 쓰러졌다.

 “이것이!!”

 연이은 방해에 벨로로폰은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는 마지막 행사를 방해한 퀴니의 목을 잡고 허공으로 들었다.

 퀴니는 울먹이며 그를 위해 노래를 불렀다.

 “오빠는... 풍각... 쟁이야. 오빠는... 욕심... 쟁이야.”

 쿵.

 가슴이 울렸다.

 울먹이며 떨리는 그녀의 노래.

 살기를 구름처럼 일으키던 벨로로폰의 몸이 번개라도 맞은 듯, 그대로 굳어 버렸다.

 주르륵.

 차갑게 가라앉은 그의 얼굴에서 눈물이 흘러내렸다.

 마왕의 권능이 한순간이나마 인간의 감성에 억눌리고 말았다. 그것은 정말이지 기적과도 같은 순간이었다.

 “벨로로폰!!”

 땅속에 갇혀 있던 데이크란이 몸을 뽑아 올리며 그의 가슴에 손을 집어넣었다.

 즈걱.

 살 속을 헤집고 들어간 그녀의 손이 검은 심장을 쥐고 나왔다.

 먹물이라도 뒤집어 쓴 듯한 검은 심장은 몸 밖으로 나온 후에도 펄떡펄떡 격하게 뛰었다.

 “커억!”

 벨로로폰의 몸이 격렬하게 진동했다. 흰자위가 덮인 눈이 격렬하게 떨며 데이크란과 자신의 심장을 번갈알 보았다. 제발이라??? 말을 하는 것 같았다.

 데이크란은 쓰게 웃었다.

 “잘 가. 절망의 군주.”

 팍!

 마지막 말과 함꼐 데이크란의 손에서 펄떡펄떡 뛰던 심장이 터져 나갔다. 피가 분수처럼 사방으로 뿜어졌다.

 “크아아악!”

 벨로로폰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그렇게 절망의 군주는 쓰러지고 말았다.

 “하하. 이것으로... 끝이군.”

 절망의 군주를 쓰러트린 데이크란은 호쾌하게 웃었다.

 가슴이 아프다.

 그를 쓰러트렸음에도 전혀 기쁘지 않다.

 “하하하하하하!”

 끊임없이 웃고 있던 그녀의 눈에서 눈물이 주룩 흘러내렸다.

 그러다 돌연 힘없이 쓰러졌다.

 하늘이 빙글빙글 돈다.

 머리가 어지럽다.

 그제야 그녀는 자신의 목이 절반쯤 끊어졌다는 것을 깨달았다.

 요수의 발톱은 그녀의 머리를 잘라 내지 못했지만, 너무도 치며 적인 상처를 남겼다.

 “컥!”

 검붉은 핏물이 그녀의 입 밖으로 토해졌다. 가녀린 몸이 푸들푸들 경련했다.

 그 순간 죽은 듯이 엎어져 있던 벨로로폰의 입에서 찢어지는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안 돼!!”

 놀랍게도 그것은 벨로로폰의 음성이 아니었다. 그보다 따뜻하고 슬픔으로 가득한.

 엉금엉금 기어 온 그는 힘겹게 데으크란을 껴안았다.

 “그대... 돌아왔군.”

 병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턱 아래로 굵은 눈물이 뚝뚝 떨어졌다.

 검은 심장이 파괴되는 순간, 벨로로폰의 이성은 크나큰 충격을 받고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비로소 잠재된 의식 속에서 피눈물을 마시며 지인의 고통을 바라봐야 했던 병규가 의식의 표면으로 나올 수 있었다.

 잠시 그를 올려다보던 데이크란은 할딱할딱 숨을 넘기며 말을 건넸다.

 “그...대에게... 소개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그녀의 몸이 잠시 떨리더니 곧 날카롭던 눈초리가 온화하게 변해다.

 “당신.”

 조용한 음성. 그리웠던 목소리다.

 데이크란이 사라지고 레종의 의식이 나타난 것이다.

 병규는 그녀를 꼭 안아 주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목이 잠겨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당신... 심장이 없어졌는데... 괜찮나요?”

 레종이 근심스런 얼굴로 물었다. 죽어 간느 자신의 몸뚱이보다 사랑하는 사람의 안전이 걱정되었는가 보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신의 가슴을 보여 주었다. 놀랍게도 주먹만한 구멍이 뻥 뚫려 있던 가슴이 잠깐 사이 약간의 흉터만을 남기고 완전히 아물어 있었다.

 데이크란이 박살 낸 심장의 폭주하던 마성의 집합체였다. 그것이 파괴됨으로써 병규의 몸을 지배하던 마성 역시 사라지고 말았다.

 “거의 다 나았군요. 대단해요. 사실 조금 전까지 당신의 재생력이 조금 무서웠어요. 하지만 이번만큼은 다행이에요. 당신이 죽지 않았으니. 이제 다시 이상해질 염려는 없겠죠?”

 병규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영원히 사라졌소.”

 “잘됐어요.”

 그녀가 환하게 웃었다.

 병규는 그녀의 웃음에 가슴이 아려 왔다. 그녀의 목에서 계속 피가 흘렀다. 그는 안타까운 마음에 손으로 상처를 감싸 쥐었다. 하지만 출혈은 막을 수가 없었다.

 “잠깐. 데이크란님과 대화하세요. 단 부드럽게 대해 줘야 대요. 데이크란님은 보기보다 부끄럼이 많으시거든요.”

 쑥스럽게 웃으며 레종의 의식이 사라졌다.

 그녀의 눈초리가 다시 날카로워졌다.

 “데이크란.”

 병구가 그녀를 불렀다.

 레종이 현재의 연인이라면 데이크란은 과거의 연인이다. 수초처럼 소담스러운 사람이었으나 마왕의 계략으로 타락의 길을 걷게 된 비극적인 운명의 주인공.

 “바보.”

 데이크란이 힘없이 웃었다.

 “멍청이. 내 이름은... 데이실이야. 데이크란이라는 이름. 당신이 준 그 이름은... 이제 그만 잊을 거야. 그래도 되겠지?”

 병규는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바보같이....... 그래도... 차라리 지금이 훨씬 나은 것 같군. 냉정했던 옛날보다는... 훨씬.......”

 따스하게 웃던 데이실은 차츰 어둠에 먹혀 갔다.

 늪 속에 빠져들 듯, 타는 듯한 붉은 실루엣이 잠기고, 그녀의 가녀리고 유혹적인 육체도 서서히 가라앉는다.

 “당신은... 참 잔혹해. 날 타락시킬 때는... 그렇게 매정하게 굴더니, 마지막 가는 길엔 또... 이렇게 다정하고. 억울해서... 마음대로 죽지도... 못하겠잖아.”

 도발적인 그녀의 두 눈에 눈물이 얼룩졌다.

 다시 한번 그녀는 레종으로 바뀌었다.

 “미안해.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병규는 오열하며 용서를 빌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그녀에게 용서 받을 수 있을까.

 레종은 고개를 저었다.

 그녀의 손이 병규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아니요. 당신이 아니에요, 어차피 전 죽을 운명이었으니까요.”

 병규의 눈이 찢어질 듯 커졌다.

 그녀가 다정하게 웃었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였다.

 “데이실님과 하나가 되었을 때, 우린 이미 죽을 운명이었어요. 설마 내가 마왕으로 살길 바란 건 아니죠?”

 죽을 사람 치고는 너무 다정한 얼굴로 그녀는 말했다.

 병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그는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당신만 살 수 있다면 ... 설사 그대로 마왕이 된다 해도... 기필코!”

 레종은 슬픈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렇지 않아요. 나의 사랑. 누구나 자신의 자리가 있는 버이에요. 난 이것으로 만족해요. 이제야 간신히 당신이 내게 베푼 사랑을 조금이라도 갚을 수 있게 된 것 같아요. 행복해요. 그리고 사랑해요. 당신. 날 위해 울어 줘서 기뻐요. 하지만 날 위해 웃어 주세요. 난 당신의 멋쩍은 듯한 웃음이 좋았어요. 나의 사랑.”

 그 말을 마지막으로 그녀는 낮은 숨을 멈추었다.

 그리곤 다시는 깨어나지 않았다.

 행복한 표정으로 그년느 영원히 잠들었다.

 “우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

 병규는 절규했따.

 구슬프게 울었다.

 자신이 저주스러웠다.

 그렇게 노력했건만 끝내 그녀를 되찾지 못했다. 아니, 자신의 손으로 영원히 암흑의 세계로 떠나보냈다.

 “빌어먹을!!!”

 그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울부짖었다.

 원망스러웠다.

 가혹한 운명을 내린 하늘에 한이 맺혔다.

 이렇게 만들 거라면 처음부터 만나지 못하게 할 것이지. 이렇게 내 손으로 죽게 만들 생각이었으면, 차라리 평생 모른 채로 살아가게 할 것이지.

 안고 있는 그녀의 육신이 차갑게 식어 가는 것이 너무도 원통해서 그는 울고 또 울었따.

 투투툭.

 비가 내렸다.

 한 방울 두 방울 내리던 비는 어느새 폭우가 되어 사위를 휩쓸었다. 세찬 빗소리는 병규의 통곡마저 묻어버렸다.

 하늘은, 그의 한 맺힌 외침을 더 이상 듣고 싶지 않았던가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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