샤바, 혼돈의 힘을 깨우다.
지상에서 벨로로폰이 승리자이자 표효를 날리고 있을 때, 호랭이가 쌓아올린 흙더미 아래에서 샤바가 걱정스런 표정으로 마그네트를 돌보고 있었다.
“괜찮아, 샤바?”
샤바의 물음에 마그네트는 간신히 눈을 떠 그를 보았다.
작다.
고작 자신의 눈동자보다 작은 존재.
그런데 왜일까.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보니 가슴이 쿵 하고 무너진다. 머릿속이 하얗게 변색되고, 목구멍이 알싸해진다.
벨로로폰과의 싸움으로 온몸이 상처투성이였지만, 오히려 샤바의 목에 찍힌 손자국에 더 가슴이 아팠다.
“모를 일이군.”
왜 가슴이 아픈지. 왜 자꾸만 온몸이 떨려 오는지.
알 수 없는 일이다.
마그네트는 고개를 저으며 붓몰 터지듯 올라오는 감정의 복받침에 혼란스러워했다.
만년의 시간을 영위하는 드래곤.
그들은 신의 축복을 받은 것처럼 거의 모든 면에서 완벽하다. 심지어 기억마저도. 이러한 완벽함이 드래곤에겐 저주로 작용한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지고 있기에 인간과 달리 드래곤은 망각이라는 정신작용이 존재하지 않는다.
망각은 결코 괜히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망각 덕분에 인간은 온갖 고통과 슬픔을 잊을 수 있는 것이다.
비록 그 때문에 과거의 실수를 되풀이하는 어리석음을 범한다 해도, 인간에게 망각은 기억만큼이나 삶을 유지하는 데 필수적인 요소임에 틀림이 없다.
하지만 드래곤은 그럴 수 없다.
완벽한 기억력 때문이다.
망각이 없다면 분명 무언가를 배우고 익히는 데는 더없이 좋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반대로 잊고 싶은 기억조차 영원히 기억하고 살아야 한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자가 있다고 가정하자. 어느 날 그는 사랑하는 연이 바위에 깔려 잔인하게 죽는 모습을 보았다.
이제 그는 죽는 날까지, 그날의 기억을 잊을 수 없다. 완벽한 기억력 때문이다.
사랑하는 그녀를 생각할 때마다 바위에 육신이 뭉개지는 끔찍한 영상이 생생하게 떠오르게 될 것이다. 이끔찍한 기억은 살아 있는 내내 그를 괴롭힐 것이다.
완벽한 기억력을 가진 덕에.
드래곤이 바로 이와 같다.
그들은 망각을 가진 인간과 달리 완벽한 존재이다. 이 때문에 인간으로서는 상상도 하지 못할 고통을 감수해야 한다.
그래서 드래곤들은 망각을 대신하여 그들의 정신을 보호할 차선책으로 냉정을 선택했다.
마나로 가득 찬 그들의 드래곤 하트는 얼음보다 차가운 마음을 유지할 수 있게 해 주었다.
드래곤들은 유희를 즐길망정, 진심을 주지 않는다.
유희 동안 사귀는 친구, 애인, 가족들. 모두가 천부적인 배우의 뛰어난 연기쳐럼 거짓된 삶일 뿐이다. 유희가 끝나느 순간 조금의 미련도 없이 돌아선다.
이처럼 드래곤들은 늘 관객의 시선으로 모든 것을 대한다. 그래서 상처를 받지 않는다. 충격도 받지 않는다.
냉정은 드래곤들의 정체성을 유지시키는 최후의 보루라고 할 수 있다.
그런데 마그네트의 냉정이 무너지고 말았다. 드래곤의 정체성이 허물어진 것이다.
그것도 최악이라고 할 수 있는 상대에게.
불의의 사고로 제정신이 아니었을 때 가졌던 감정의 찌꺼기가 정신을 차린 후에도 여전히 남아 그녀를 괴롭혔다.
이로써 마그네트는 드래곤의 본질에 상처를 입었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감정을 버리지 않았다.
가슴은 시리도록 아팠지만 결코 싫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몸을 난도질하는 것 같은 감정의 편린에 전신이 떨려 와도 그보다 더한 감동의 물결이 그녀의 머리를 꽉 채웠기 때문이다.
“폴리모프.”
화아악!
레드 드래곤의 몸에서 빛이 쏟아졌다.
찬란한 서광이 사라졌을 때, 거대한 드래곤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지고 없었다. 대신 가녀린 여자가 샤바의 품에 안겨 있었다.
그의 품에 안기고 싶었던 그녀는 끝내 인간의 모습으로 풀리모프했다.
“샤바님.”
그녀는 따뜻한 표정으로 그의 얼굴을 쓰다듬었다. 짜르르한 전율이 손끝을 스쳤다.
갑자기 졸음이 몰려왔다.
오늘 하루 동안 너무 많은 무리를 했다.
드래곤 하트에 충격이 올 정도로 마나를 극한까지 끌어올렸다.
몸의 부상도 심했다.
이상하게도 마왕에게 입은 상처들은 마법으로 치유가 되지 않았다.
“따뜻하네요.”
몽혼한 눈으로 그들 올려다보던 마그네트는 행복한 얼굴로 의식을 끈을 놓았다.
‘다행이야.’
그를 만날 수 있어서, 그의 품에서 잠들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그녀는 생각했다.
기절한 마그네트를 가마나 내려다보던 샤바는 그녀를 조심스레 바닥에 눕혔다.
벨로로폰과 목숨을 건 사투로 그녀는 육체적으로나 정신적으로 많이 피로했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한계는 있는 법이다.
샤바는 그녀의 머리를 쓸어 주었다.
“잘 자. 샤방.”
그는 마그네트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녀가 제대 브레스를 쏘아 주지 않았다면 벨로로폰의 화염에 많은 백성들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그녀를 돌봐 줘라. 샤바.”
그의 말에 그림잠에서 검은 물결이 좌르르 펼쳐졌다. 백성들은 주위의 흙을 끌어 와 마그네트의 몸을 고치처럼 감싸고 그 위에 자리를 잡았다.
백성들로 보호되고 있는 이상, 웬만한 공역으로는 내부의 마그네트를 상처 입히고 못할 것이다.
마그네트의 안전을 돌본 샤바는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의 얼굴은 전에 없이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마왕 벨로로폰.
감히 주인의 육체를 차지하고, 백성들을 살해했다.
그는 도저히 마왕을 용서할수 없었다.
스르르.
허물어지듯 그의 모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졌다.
“자, 드디어 그대와의 해후로군.”
벨로로폰은 퀴니를 올려다보면 입 꼬리를 말아 올렸다.
처음부터 벨로로폰은 퀴니를 노렸다. 마신의 보호를 받는 마계의 무녀에게 호기심이 동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는 호랭이와 경애의 방해로 뜻을 이루지 못했다.
하지만 두 사람이 쓰러진 지금은 여유롭게 그녀를 대할 수 있게 되었다.
벨로로폰의 기세는 훨씬 거칠어져 있었다.
강적들과의 연이은 싸움에 조금은 지친 기색도 보였다.
“왜 그리 무서워하는 거지? 날 좋아하지 않았던가? 차원을 넘어 서까지 날 찾아올 정도로 말이야.”
퀴니는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눈물로 얼룩질 그녀의 눈동자에 피바다 속에 누운 호랭이와 경애의 모습이 비쳐졌다.
“아니야!”
퀴니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내가 좋아한 것은 당신이 아니라고!”
벨로로폰은 흉측하게 웃었다.
“이것이 바로 나다. 나의 진실한 모습이며, 나의 전부다. 이런 나는 받아들일 수 없다는 것인가? 조속한 사랑이로군. 크크크크.”
“당신이... 당신 따위가 뭘 알아. 이 살인마!”
퀴니는 입술을 꼭 깨물며 주문을 영창했다.
“아쿠아 애로우(Aqua arrow)!"
대기를 떠돌던 수분이 응집하며 물화살을 생성해 냈다. 그 수는 자그마치 수천을 헤아렸다.
벨로로폰은 더 이상 그녀와 마력 대결을 할 생각이 없었다.
날개를 활짝 펴며 허공으로 몸을 날렸다.
무섭도록 빠른 스피드.
움직이는가 싶은 순간, 어느새 눈앞이다.
깜짝 놀란 퀴니는 다급히 아쿠아 애로우를 날렸다 하지만 벨로로폰이 더 빨랐다.
“느려.”
퍽!
그의 주먹이 사정없이 퀴니의 배로 틀어박혔다.
“악!”
퀴니는 고통스런 비명을 토해 내며 지상으로 추락했다.
그녀가 떠 있던 곳은 수백 미터 상공. 거꾸로 떨어지는 터라 목숨을 부지하기 어려웠다.
벨로로폰은 태연하게 팔짱을 끼고 그녀의 추락을 구경만 했다. 더 이상 그에게 온정이라는 것이 남아 있지 않았다. 그토록 정들고 아꼈던 퀴니가 죽을 위험인데도 수수방관하고 있는 것이다.
다행히 그녀를 구해 줄 흑기사가 아직 남아 있었다.
재만 날리던 땅속에서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떠올라 그녀를 받았다. 높은 곳에 떨어지는 충격이 상당할 텐데도 그는 깃털을 잡듯 부드럽게 그녀를 받아 냈다.
“샤바?”
퀴니가 파랗게 질린 음성으로 말했다.
“응. 늦어서 미안해. 샤바.”
배가 끊어질 것 같은 고통 중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믿음이 생긴다. 어쩌면 그라면 벨로로폰의 광기를 잠재울 소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용서 못해. 샤바.”
샤바가 벨로로폰을 쏘아보며 외쳤다. 은은한 분노가 그의 음성에 서려 있다.
“흥. 하찮은 벌레 녀석이.”
벨로로폰은 냉소하며 지상으로 내려왔다. 하지만 샤바를 바라보는 그의 표정은 말과는 달리 조금 굳어 있었다.
다르다.
샤바의 기운은 전과 많이 달라졌다.
회색빛으로 탈색된 눈동자.
고작 눈동자 색만 바뀐 듯하다. 하지만 분위기는 전혀 틀려졌다. 날카로워졌다고 할까. 사나워졌다고 할까.
흉흉한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주인님을 내놔. 샤바!”
돌연 샤바가 무섭게 달려들었다.
지금껏 참았던 분노가 한꺼번에 폭발하며 쏘아진 화살처럼 벨로로폰에게 날아갔다.
벨로로폰은 코웃음을 치며 한 손을 내밀었다.
“쉐이드.”
그의 그림자가 쭉 확장되며 사바를 감샀다.
“죽어라!”
음산한 목소리와 함께 그림자에서 가시가 솟구쳤다.
촤아아악!
호랭이와 경애를 위기로 몰았던 바로 그 공격이다. 그러나 샤바에겐 통하지 않았다.
발빝을 꿰뚫을 심산으로 솟구쳐 오른 그림자 가시. 샤바는 오히려 뛰어들 듯 달려들었다.
촤아아악!
맹렬한 파공음이 샤바의 몸을 사정없이 유린하는 듯 보였다. 그러나 착각은 잠시. 놀랍게도 샤바는 마치 잠수하듯 그림자 가시 속으로 잠겨드는 것이었다.
샤바는 원래 그림자 속을 마음대로 움짐일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그것은 타락의 혈계 중의 하나인 쉐이드의 그림자라도 마찬가지였다.
그렇게 사라진 샤바는 대담하게도 벨로로폰의 발 아래에 쏙 얼굴을 드러냈다.
“주인님을 내놔. 샤바.”
그는 벨로로폰의 다리를 걸었다.
“큭.”
휘청.
벨로로폰이 중심을 잃고 휘청거렸다. 당황한 중에도 쉬버의 권능을 불러 지진을 일으켰다.
드크크킁!
거북한 소음과 함께 땅이 흔들리고 갈라졌다.
샤바는 꼼짝 없이 땅속에 갇히는 듯했다. 하지만 그는 다시금 벨로로폰의 그림자 속으로 뛰어들었다.
“.......!”
벨로로폰의 인상이 돌변했다.
호랭아니 경애, 그리고 퀴니. 하나같이 독특한 재능으로 그를 곤란에 빠트렸지만, 그중에서 제일은 이 녀석이다.
그림자 속을 마음대로 옮겨 다니는 능력이라니.
상대하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주위를 둘러보았다.
바위, 낮은 둔덕, 먹구름이 지나가면서 생기는 음영.
그림자는 도처에 널렸다.
이 말은 샤바가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는 공간이 도처에 깔렸다는 말과 같다.
심지어 그 자신조차 그림자를 만들고 있지 않은가.
샤바가 어느 곳에서 튀어나올지 전혀 예상할 수 없었다.
환계의 속성은 혼돈. 속성만큼이나 환계의 기운은 독특하기 짝이 없었다.
퍽!
또 한 번의 충격.
그새 다시 나타난 샤바가 그의 허벅지를 후려갈기고 도망쳤다.
하지만 벨로로폰은 오히려 기다렸다는 듯이 신형을 돌려 발 아래로 손을 집어넣었다. 그가 자신의 그림자에서 다시 손을 끄집어냈을 때, 샤바가 낚시에 걸린 물고기처럼 그 손 끝에 걸려 있었다.
“잡았구나. 벌레 녀석.”
“천만에. 샤바.”
샤바가 몸을 뒤틀었다.
그의 전신에서 뭉클 배어 나온 회색의 기운이 미끄러운 기름처럼 변했다.
쑥.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샤바가 그의 소아귀를 빠져나갔다.
“.......”
벨로로폰은 잠시 말을 잃었다.
함정은 실패다.
이런 단순한 함정은 절대로 통하지 않는다.
놈은 멍청한 사냥감이 아니라 노련한 사냥꾼인 것이다.
다행히 벨로로폰에겐 손으로 셀 수 없을 만큼 많은 능력이 있었다. 그는 간단하고 효과는 확실한 미끼로 눈을 돌렸다.
“네놈이 숨을 곳을 모조리 지져 주지.”
여섯 장의 징그러운 날개를 활짝 펼쳐졌다.
하늘을 뒤덮고 있던 먹구름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우르릉 하는 천둥과 함께 구름 사이로 검은 뇌전이 일렁일렁 일어났다.
“울어라. 지옥의 우레여. 저 세상 끝까지 파멸의 연주를 노래하라!”
콰콰쾅!
그가 힘껏 두 손을 떨치자 먹구름 사이를 명멸하던 검은 뇌전이 비처럼 그의 머리 위로 떨어졌다.
일찍이 마계에서 수만 마리의 마족을 한꺼번에 몰살시켰던 뇌전들. 그 죽음의 검은 분노가 반경 수 킬로미터를 공포로 뒤덮였다.
벨로로폰은 주위엔 샤바를 제외하기도 기절한 경애와 부상을 입은 퀴니와 호랭이까지 있었다. 대마왕의 새로운 미끼는 바로 이들이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검은 뇌전에 모두가 희생이 될 위기였다.
“그럴 순 없다. 샤바.”
위기의 순간 샤바가 불쑥 튀어나왔다. 벨로로폰의 근처 둔덕에서 였다.
“기다렸다.”
덫을 놓고 기다리던 벨로로폰이 득의의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으로 그를 가리켰다.
우르릉. 콰콰쾅!
줄기줄기 떨어지던 뇌전들이 크게 울부짖으며 샤바에게로 몸을 돌렸다. 굶주린 맹수처럼 허덕거리며 내리꽂히는 그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작렬하는 번개들을 대체 무슨 수로 막는단 말인가.
어쩔 수 없이 까만 재로 화할 위기. 돌연!
“카오스 큐브(chasos cube). 샤바!”
치키킹!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샤바의 손 위로 정입방체의 상자가 나타났다. 복잡한 문자가 잔뜩 음각된 그 상자는 기괴한 분위를 풍겼다.
바로 예전에 샤바가 갇혀 있던 그 상자였다.
“글루토. 샤바”
철컹.
봉인된 큐브의 덮개가 열려있다. 큐브 안에 갇혀 있던 칙칙한 회색빛 혼돈이 튀어나왔다.
크와아아아!
길게 울부짖은 괴물은 그 큰 입을 벌려 때마침 날아드는 뇌전을 모조리 빨아들였다.
피지지지직!
그 어떤 마법으로 막을 수 없었던 뇌전들이 놀랍게도 회색 괴물에겐 맥도 추지 못했다. 눈부신 섬광이 폭발하듯 터진 후, 대지를 불태우던 뇌전들은 단 한 점도 남김없이 사라졌다.
글루초라는 괴물이 모두 먹어 버린 것이다.
“무슨!”
벨로로폰의 얼굴에 당황의 빛이 떠올랐다. 설마 뇌전을 먹어치우는 괴물이 있을 줄이야.
꺼어어억!
갑자기 들려온 트림 소리.
태연한 괴물의 태도가 가뜩이나 불편한 대마왕의 심기를 어지럽혔다.
꺼어어어어어어어억!
회색 괴물이 거창하게 트림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엄청난 것을 먹고도 아직 부족한 듯 쩝쩝 입맛을 다시는 것이었다.
“잘했다. 글루토. 샤바.”
샤바가 칭찬하자 글루토는 헤벌쭉 웃었다. 불가사의한 식욕에 비해 순진한 표정이었다.
“함꼐 하자. 샤바.”
샤바가 괴물에게 청했다. 괴물은 순순히 응했다.
왕자의 명이다.
설사 그것이 죽으라는 것이라도 절대 거부하지 못하리라.
츠으으으으윽!
글루토가 회색빛 안개로 변해 샤바의 왼쪽 팔에 융화되었다.
괴물과 융화된 피부에 회백색 광택이 흐르고, 그의 두 눈이 더욱 짙은 회색빛으로 변했다.
기이한 융화
광기 어린 눈으로 그를 관찰하던 벨로로폰은 문득 그 큐브를 어디선가 본 적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병규라는 녀석의 기억 속에 상자에 대한 정보가 있었다.
“그 상자. 원래 네가 봉인되어 있었던 물건이군.”
샤바는 무심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맞다. 샤바.”
“크흐흐. 네놈만 갇혀 있던 것이 아니었던가?”
“이 상자는 환계와 연결되어 있는 것이다. 샤바.”
“...... 네놈만큼이나 귀찮은 물건이군.”
“고맙다. 샤바.”
“.......”
순진무구한 샤바는 벨로로폰의 비아냥거림을 칭찬으로 ㄹ들었다.
“끄래. 들은 기억이 있군. 환계. 소환수들의 세상. 정령계와 비슷한 곳이 있다고 말야.”
“....... 샤바.”
“크흐. 융화라. 과연 신기한 기술이군. 하지만 괴물과 융화한다고 얼마나 강해질 수 있을까. 이것도 막아 낼 수 있는지 보자.”
벨로로폰이 숨을 한껏 들이마신 후 힘껏 뱉어 내자 악취를 풍기는 용해액이 밀물처럼 쏟아졌다.
디바울하게서 흡수한 능력이다.
치이익!
그의 용해액은 너무도 지독했다.
닿는 것이면 뭐든 녹여 버렸다.
흙이든 돌이든 용해액에 닿는 즉시 희뿌연 연기와 함께 질질 녹아내렸다.
샤바는 피하지 않았다. 혼돈의 괴물과 융화한 이상 더 이상 피할 이유가 없어졌다.
회색 hlanf 글루토는 환계의 환수로, 모든 환수 중에서도 수위에 드는 실력자였다.
“삼켜라. 샤바!”
그가 왼쪽 팔을 내밀자 입을 쩍 벌린 굴루토가 튀어나갔다. 글루토는 엄청난 먹성의 소유자. 게다가 절대로 먹을 것을 가리지 않았다.
쭈와아아아악!
찢어질 듯 벌어진 글루토의 입은 모든 것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같았다. 대지를 오염시키며 흐르던 용해액이 홍수처럼 괴물의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그 많던 용해액을 빨아들이는 데 걸린 시간은 불과 몇 초에 불과했다.
“이, 이놈이.”
벨로로폰의 입가에 경련이 일었다. 극도로 흥분한 증거였다.
“좋아. 어디까지 버티나 두고 보자.”
벨로로폰은 아예 작정을 하고 온갖 기운을 소환했다.
일레긑리 볼트가 꽃가루처럼 날리고, 자욱한 안개와 함께 치명적인 냉기가 바닥에 깔렸다.
그뿐이 아니었다.
쿠쿠쿵!
드래곤인 마그네트마저 거침없이 깔아뭉개던 중압이 샤바의 머리를 내리눌렀다.
마치 자신의 능력을 자랑이라도 하듯이 쏟아낸 온갖 기운들. 폭주하는 에너지의 총량은 가히 무시무시할 정도였다.
아무리 글로토의 먹성이 좋다 해도 이 모든 것을 다 먹어치우는 것은 불가능했다.
“열심히 해 봐라. 샤바.”
영악하게도 샤바는 자신의 그림자 속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언제 불러들였지는 그의 백성들이 다친 사람들까지 모두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였다.
“크와아아아아아아!”
벨로로폰은 길길이 날뛰었다.
화가 치밀어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다.
“이노옴!”
그는 사정없이 마력을 방출했다.
뱃속 깊은 곳에 저장된 근원의 암흑까지 모조리 끌어다 섰다.
덕분에 그의 몸속의 균형이 깨어지며, 애써 잠재운 또 하나의 자아가 깨어날 위험도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콰아아아아아!
시커먼 욕망으로 들끓는 암흑의 힘.
그것은 마치 태양처럼 이글이글 타오르며 허공으로 떠올랐다.
검은 태양의 크기는 집채만 했고, 상상도 할 수 없는 열기를 뿜었다.
대기 중의 수중기가 한순간 증발하며 신기루를 형성했고, 멀쩡한 땅에 불이 일었다.
심지어 그림자까지 부글부글 끓었다.
검은 태양에서 작열하는 열기는 따스한 봄 햇살의 온기와는 화연히 달랐다.
사막의 햇살보다 강렬하고, 이 세상 그 어떤 독보다 치명적이었다. 게다가 온갖 악독한 기운까지 물씬 풍기고 있었다.
살의로 똘똘 뭉친 것 같은 검은 태양의 힘에 환수의 힘까지 빌린 샤바도 더는 버티지 못했다.
“으윽.”
몸을 은신하고 있는 그림자에서 샤바가 기어 나왔다. 그는 병을 앓는 사람처럼 온몸에 붉은 반점이 돌고, 고열에 시달렸다.
“그, 글루토. 샤바.”
최후의 저항으로 왼손을 쳐들었다. 그러나 글루토는 나오지 않았다. 검은 태양의 지독한 열기 앞에 환수 글로토조차 힘을 잃은 것이다.
병을 뿌리는 이 저주 받은 태양은 벨로로폰의 다른 능력들과 달리 순수하게 그의 고유기술이다.
그만큼 강하고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크크. 귀찮은 벌레 녀석. 마침내 네가 잡혔구나.”
벨로로폰이 살기로 충만한 눈동자로 샤바를 내려다보았다. 힘없이 꿈틀대던 샤바는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갈라터진 입술에서 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맞다. 샤바. 겨우 마왕 널 잡았다. 샤바.”
“......?”
벨로로폰은 그가 고열에 시달리는 바람에 헛소리를 한다고 생각했다. 잡은 것은 분명 그인데, 샤바는 엉뚱하게 마왕을 잡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병들어 죽어 가던 샤바의 몸이 펑 하고 사라졌다. 그 자리엔 말라비틀어진 나뭇가지 남아 있었다.
“환영!!”
벨로로폰은 소스라치게 놀랐다.
검은 태양 아래 병들며 죽어 가고 있던 샤바는 본체가 아니라 환영이었던 것이다.
“녀석에게 이런 능력까지 있었단 말인가.”
벨로로폰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단순한 환영이 아니다.
대마왕조차 감쪽같이 속아 넘어갈 정도로 실체와 완벽하게 똑같은 환영인 것이다.
대체 이 환계의 왕자라는 녀석의 힘은 어느 정도란 말인가. 도무지 그 끝을 알 수가 없다.
“자, 잡았다. 샤바.”
벨로로폰이 경악하는 사이, 그의 그림자에서 샤바가 불쑥 튀어올라왔다.
병들어 보이는 얼굴. 피부 위로 피어난 불그스름한 열꽃.
검은 태양의 힘에 병이 든 것만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샤바는 이를 악물고 벨로로폰을 등 뒤에서 꽉 끌어안았다.
비록 글루토의 힘을 빌려 벨로로폰을 부찌르는 것에는 실패했지만, 그에겐 아직 최후의 한 수가 남아 있었다.
“나는 약속을 지켰다. 샤바! 이젠 네 차례다. 샤바!!”
샤바가 쥐어짜는 듯한 목소리로 외쳤다.
멀리서 그에게 화답하는 음성이 들려왔다. 그것은 놀랍게도 호랭이의 것이었다.
전혀 생각지도 못한 전사의 귀한!
“오냐. 잘해 주었다.”
샤바가 목숨을 걸고 만들어 낸 기회를 호랭이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그는 지금껏 죽은
듯 누워 힘을 끌어 모았다. 마나고 마력이고 닥치는 대로 빨아들여 스스로 주체하기도 힘들 만큼 거대한 기를 만들었다.
경에가 쓰러지고 퀴니가 피를 토하는 순간에도 그는 이를 악물고 참았다.
바로 이 한순간을 위해.
마침내 때가 되었다.
“모든 부덕한 것을 멸하라. 파멸의 창!”
머리 위로 올린 두 손에서 장엄한 서기와 함께 강렬한 은빛 광채가 꿈틀꿈틀 일어났다.
호랭이의 도술 중에서 가장 강한 파괴력을 자랑하는 것이 바로 파멸의 창이다.
징그럽게 끈질긴 쉐이드조차 한 번에 날려 버린 최강의 뇌룡(雷龍)이 광포한 울음을 터트리며 벨로로폰에게 달려들었다.
콰우우우우우!
두 눈이 멀어 버릴 정도로 눈부신 섬광이 주변을 하얗게 달궜다.
홀애이의 손을 떠난 뇌룡은 섬전이라는 말이 무색할 정도로 빨랐다.
“크으. 이놈들.”
벨로로폰은 진득한 신음성을 흘리며 두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거대한 뇌룡에 비해 그는 너무도 보잘것없어 보였다.
콰아아아아!
뇌룡이 광포한 외침을 토하며 그를 삼켰다.
쿠쿠쿠쿠쿵!
파멸의 진동이 사위를 휩쓸었다.
대지가 뒤흔들리며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이럴 수가.”
머리 위로 들어 올린 호랭이의 두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목숨을 건 샤바의 희생으로 얻어낸 마지막 기회, 그리고 혼신을 다한 최후의 일격이었다.
바호크의 수도 절반이 광분한 뇌룡의 빛 무리에 휩쓸려 사라졌다. 마치 파괴신이 강림한 듯한 처참한 광경.
그런데, 그는 살아 있었다.
“크워어어어어어어!”
대마왕이 칠흑의 어둠을 두르고, 절망의 공포를 토하며 폐허 위에 우뚝 섰다.
“허, 허허허. 허허허허.”
말을 잃은 호랭이는 헛웃음만을 삼켰다.
정말이지 가혹한 신이다.
어찌 세상에 저런 자를 내렸단 말인가.
어쩌면 신은 세상의 파멸을 원한 것인지도 모른다.
“끝이구나.”
호랭이는 허망한 눈으로 힘없이 뇌까렸다.
경애는 기절했고, 샤바는 폭발의 충격에 휩쓸려 사라졌다. 그리고 자신은 모든 힘을 소진했다.
퀴니 혼자 남았다.
하지만 그녀 혼자 뭘 할 수 있을까.
끈난 것이다.
녀석은 끝내 돌아오지 않았다.
마왕을 막지 못했으니 이제 세상의 파멸만이 남았다.
하지만 희망이 모두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신의 안배는 언제나 예기치 못한 곳에서 일어나는 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