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계로 향한 키메라들
지옥과 같던 바호크에 비해 아이린 왕성은 지독하게 고요하고 평화로웠다.
공간이동의 후유증우로 잠시 멍하게 있는 동안 나머지 일행들이 속속 나타났다.
모두 열한 명.
참담했다.
무적을 자랑하던 키메라가 전부 투입된 이번 작전에서 살아 돌아온 자는 고작 11명에 불과했다. 그나마 마법상니 필라이트를 제외하면 지옥과 같은 바호크의 수도를 탈출한 키메라는 고작 10명 뿐.
참혹한 결과였다.
“엘프들은?”
마지막으로 귀환한 바인딩에세 디스가 물었다.
“그들은 와이번을 타고 돌아온다고 하더군. 모두가 한꺼번에 오기엔 마나가 모자란 모양이야.”
디스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나이트는 기동성이 뛰어나니 어떻게든 그 지옥에서 살아 돌아올 것이다.
“공작님.”
그는 두 눈동자에 집념을 불길을 가득 담은 채 필라이트를 불렀다. 필라이트는 이미 그럴 줄 알았다는 듯, 고개만을 끄덕였다.
“휴. 따라오게.”
필라이트는 지팡이로 땅을 짚으며 느릿느릿걸음을 옮겼다. 이번일로 그는 십수 년은 늙은 것처럼 걸음걸이에 힘이 없었다. 허리도 구부정했다.
디스는 조급함이 일어나는 것을 참으며 묵묵히 그 뒤를 따랐다. 그런데 사신은 비롯한 나머지 키메라들 역시 조용히 그의 뒤를 따르는 것이 아닌가.
디스가 고개를 돌리자 그들은 씩 하고 선 굵은 미소를 보냈다.
“자네만 영웅이 되겠다는 아집은 버리게.”
“그 마왕이라는 작자를 쳐죽일 수 있다면 나도 감히 한 팔을 돕고 싶다.”
디스는 굳은 표정으로 잠시 생각하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 역시 사연이 많은 자들이다. 오죽하면 키메라가 되면서까지 마족과 싸우러 들었을까.
디스의 묵인 아래 살아남은 키메라들은 모두 필라이트의 뒤를 따랐다.
“이곳일세.”
필라이트가 키메라들을 안내한 곳은 마법사의 탑이었다.
마법사의 성지라 불리는 마탑의 지하엔 wlrmaRK지 단 한 번도 외인의 출입을 허락하지 않은 비밀 연구실이 있었다.
이곳은 극히 제한된 사람들이 극비의 연구를 진행하고 이었다.
필라이트와 키메라들이 지하 연구실에 도착했을 때에도 실험이 한창이었다.
“으음, 왔는가? 그런데 엉뚱한 사람들이 좀 보이는 군.”
비밀실험을 총 관리감독하고 이언 올센이 필라이트를 보고 아는 척을 했다.
“흐음. 괜히 우리의 연구를 견학시켜 주려고 데려온 것은 아닐 테고. 벌써 그날이 온 rps가?”
“그렇게 됐네.”
필라이트의 탄식과 같은 대답에 올센의 얼굴 위로 언뜻 고뇌가 스쳤다.
“이것을 쓰는 날이 영원히 오지 않길 바랐네만.”
“바호크에 마왕이 나타났네.”
“.......!”
올센의 표정이 급변했따.
“그, 그렇다면 어쩔 수 없겠군.”
비밀 실험을 사용하는 것은 극도로 꺼려지지만 마왕이 출현했다면 입장이 다르다.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닌 것이다.
“공작님, 실례가 안 된다면 여기서 하고 잇는 실험이 무엇인지 알려주실 수 있겠습니까?”
답답해진 디스가 조심스럽게 청했다.
“그래. 어차피 이제 곧 알게 될 일이니. 자세히 설명해 주지.”
필라이트가 눈치를 주자 올센은 자리를 피해주었다.
“이곳에서 무슨 실험을 하고 있는지 궁금하다고 했었지?
“네, 숨김없이 모두 말해 주십시오.”
“흐음. 자네들에겐 숨길 필요가 없어. 자네들과도 전혀 무관한 이야기도 아니고.”
필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 앉았다. 눈을 지그시 감고 턱을 쓰다듬으며 곰곰이 생각하더니 어렵게 운을 뗐다.
“가만있어 보자. 어디서부터 설명하면 좋을가. 그래. 먼저 그들에 대한 설명을 해야 할 것 같군. 자네도 알다시피 나와 호랭이 군이 친하게 지냈다는 것은 알고 있겠지? 그래, 우리 두 사람은 마법 연구로 죽이 잘 맞았지.”
이어 필라이트는 호랭이가 얼마나 박학다식하며, 또한 새로운 마법공식 운용에 뛰어난지 설명했다.
호랭이의 마법은 이드라센에서 공식화 된 마법들과는 많은 차이가 있었다. 심지어 마법의 조종이라 불리는 드래곤조차 그의 마법에 대해서는 전혀 아는 바가 없었다.
“난 호랭이의 마법에 대한 의문을 지을 수가 없었네. 대체 그와 같은 마법을 어디에서 얻어 온 것일까. 호랭이 그 친구는 괜한 것을 물어본다며 대답을 얼버무리더군. 하지만 난 끈질기게 독촉을 했고, 끝내 대답을 들었지.”
끈질긴 요구에 마침내 호랭이는 자신이 이계에서 왔음을 밝혔다. 설마 설마하던 필라이트는 큰 충격을 받았다.
이계라니, 전혀 다른 세상에서 왔다니.
이러한 충격은 필라이트를 통해 이야기를ㄹ 듣는 디스 일행도 마찬 가지였다.
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그, 그게 사실입니까?”
침을 튀기며 물어보는 나이프의 물음에 필라이트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심지어 필라이트는 병규와 신성제국의 황제인 샤바 역시 이계인이라는 사실을 밝혔다.
“사실일세. 그들의 놀라운 능력을보지 않았던가. 이색적인 마법에 능한 호랭이. them마스터가 아니면서도 소드마스터보다 월등한 능력을 자랑하는 변기공. 그리고 검은 곤충들을 수족같이 부리는 신성제국의 황제, 역사상 이렇게 신기한 능력자들이 한 번이라도 나타 났던 적이 있었던가?”
“그, 그건 분명히 그렇습니다만.”
아무리 대마법사인 필라이트의 말이라도 쉽게 믿어질 이야기가 아니다. 이계인이라니. 차라리 별나라 왕자님이라는 말이 더 현실감 넘치는 이야기일 것이다.
“자자, 우선 진정하게. 내가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들이 이계인이라는 사실이 아닐세.”
필라이트의 말에 좌중은 애써 흥분을 가라앉힌 채,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들은 직감했다. 필라이트가 하조가 하는 말은 따로 있다는 것을. 과연 그들의 직감은 적중했다.
“내가 진정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는 그들이 이계인이라는 아닐세. 그들의 세상에 있는 ‘능력자’라는 존재들에 대한 것일세.”
필라이트는 조용한 음성으로 ‘지구’라는 세상에 존재하는 ‘능력자’들과 그들의 신비로운 능력에 대해 설명했다. 설명을 듣는 동안 키메라들의 눈이 점점 커지더니 나중엔 화등잔만해졌다.
“쇠를 흡수하고, 하늘을 달리며, 바람을 마음대로 부린다니.”
“마, 마치 마족이나 신족들의 능력 같군.”
키메라들은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 특히나 그런 능력자들이 수천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저도 모르게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다른 키메라들이 흥분하는 사이, 유난히 머리가 뛰어난 디스는 필라이트가 굳이 이런 말을 꺼낸 이유를 생각하고 있었다. 답은 쉽게 얻어졌다.
“서, 설마 필라이트님께선.......”
“끄렇네.”
필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의 설명을 들을 당시, 우리 아이린 왕국은 내전상태였지. 레종 여왕님을 필두로 한 왕당파는 반란군의 세력에 비해 상당히 불리한 상황이었지. 그때 난 생각했네. 만약 이 세계의 능력자들이라는존재들을 이곳으로 부를 수 있다면 어떨까. 호랭이와 변기공만으로도 이렇게 엄청난 전력인데, 만약 이런 자들이 수십 명정도만 더 온다면.”
“허.......”
키메라들은 입에서 탄성이 쏟아졌다.
그들은 호랭이와 변기가 얼마나 대단한 능력의 소유자들인지 익히 알고 이었다.
호랭이는 대륙 제일의 마법사라 불리는 필라이트조차 한 수 접어 줄 정도의 마법 능력을 가졌으며, 병규는 them마스터인 살렘과 필립 공작을 단신으로 상대하여 모두 물리쳤을 정도로 대단한 실력을 자랑했다.
신성제국의 황제는 더 말할 필요도 없다. 그가 부리는 곤충이 아니었다면 연합군의 상황은 지금과는 비교도 할수 없을 정도로 암담했을 것이다.
그런데, 이런 능력자가 우글우글거리는 세상이라니.
“만약 그들을 초빙할 수만 있다면 마왕을 물리치는 것도 불가능 한 일은 아닐 것입니다.”
디스는 다소 격양된 목소리로 말했따. 능력자들만 불러올 수 있다면 충분히 드래곤들의 공백을 메울 수 있을 것이다.
“그렇네. 바로 그런 생각이지. 그래서 난 이계로 통하는 차원의 문을 생각한 것이지.”
필라이트의 말에 키메라들은 일제히 시선을 돌렸다.
지하 연구실설의 중앙.
거대한 문이 있었다.
아니, 이것을 문이라고 부를 수 있을까?
문의 형태를 하고 있지만, 정작 열고 닫을 수 있는 문짝은 달려있지 않았다. 신비로운 푸른 광채가 문이 달려 이어야 할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이것이 바로 차원의 문.
파문을 그리고 있는 신비로운 푸른 광채는 바로 이계를 통하는 멀고 험한 통로인 것이다.
“이계로 통하는 문이라니. 마법의 진보라고 할 수 있는 것이군요.”
한때 마법을 연구했던 디스는 차원이동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잘 알고 있었다. 저 고매한 드래곤들조차 아직 성공한 예가 없지 않은가.
마탑의 성과가 정녕 놀랍기만 했다.
사실, 마탑의 지하에 설치된 자원의 문은 한때 퀴니가 마계로 이동할 때 아이린 왕성의 후원에 그렸던 마법진을 기초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것을 기초로 필라이트는 마탑의 마법사들과 함께 차원이동 마법진을 만들어 냈다. 비록 간신히 성공하기는 했지만 차원이동에 대한 지식의 무족으로 이 차원의 문은 불안정한 면이 많았다.
“비밀 연구 끝에 얼마 전에야 저 문을 만들었네. 하지만 아직 불안정한 면이 많네. 차원을 통과할 때 육체에 미치는 압력은 상상을 불허할 지경이지. 지금까지 몇 차례 동물실험을 해 봤지만, 한 번도 성공한 예가 없네.”
필라이트는 미간을 찌푸린 채 힘든 표정을 지었다. 디스는 그의 말과 행동으로 일간의 사정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래서 저희들과 무관하지 않다고 말씀하신 거로군요. 차원이동에 동반되는 압력과 위험을 견뎌 낼 가능성이 있는 존재로.”
“사실일세.”
디스의 말에 필라이트는 스스럼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키메라는 현재 중간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 중 가장 단단한 신체와 질긴 생명력을가지고 있다. 그들이라면 차원을 이동하는 동안 수반되는 위험을 견뎌 낼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워낙에 위험한 일이라, 필라이트는 감히 키메라에게 협조를 요청하지 못했다.
안전성을 확보하는 데에만 주력했다.
하지만 마왕의 출현으로 인해 사정이 완전히 달라졌다.
이대론 이드라센이 마족들의 손에 넘어가는 것도 시간문제다.
도박을 하는 심정으로 키메라들을 이계로 보낼 수밖에 없다.
차원을 이동하는 동안 상상도 못할 고통이 키메라들을 괴롭힐 것이며, 이를 극복하고 차원을 넘는다 해도 그곳이 과연 목적한 세상인지 확신할 수 없다.
키메라들로서는 목숨을 건 도박인 셈이다.
그러나 키메라들은 납득했다.
오히려 그들은 이계의 땅을 밟아 볼 수 있다는 사실에 흥분했다. 그에 동반되는 위험은 충분히 감수할 수 있다며 키메라들은 오히려 필라이트를 안심시켰다.
만약 키메라들 중에서 가장 뛰어난 자를 찾는 것이라면, 이미 검증이 끝난 셈이다.
무려 천 명에 이르는 키메라들 중에서 이들만이 지옥과 같은 바호크에서 살아남았다. 이들은 개조에 개조를 거듭한 키메라들 중에서 가장 강한 10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자네들의 뜻을 알겠네. 곧 준비하도록 하지.”
필라이트가 말을 마치고 일어나려고 하자, 디스가 그의 팔을 잡았다. 그는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저희를 이계로 보내는 데 달리 필요한 것이 있습니까?”
“그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자네들에게 작별의 시간을 주어야 하지 않겠는가?”
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습니다. 아니, 그럴 여유가 없습니다. 마그네트님이 무너지시면 마왕은 곧장 이리로 달려올 것입니다. 저희들은 한시라도 빨리 이계로 가야 합니다. 그곳의 능력자들을 설득하려면 또 얼마나 시간이 걸릴지 모르는 일입니다.”
침착하게 필라이틀를 설득한 디스는 애써 밝은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기왕이면 빨리 출발하고 싶군요. 이계의 미인들은 얼마나 아름다울지 가슴이 두근거려서 미칠 지경입니다.”
그의 너스레에 다른 키메라들은 대소를 터트렸다.
“흐흐. 그렇군. 신성제국의 황제를 보면 기대를 안 할 수가 없겠어. 남자인 그가 그 정도인데 여자는 대체 얼마나 아름다울까/”
“허! 너무 기대는 말자고. 변기공 같은 사람도 있지 않은가.”
“무슨 소리. 난 변기공 정도만 되도 감지덕지일세.
“크크크. 하긴 변기공도 우락부락한 얼굴은 아니지.”
“또 모르지 않나. 그 세계는 남자가 곱상하고 여자는 오우거처럼 생겼을지도.”
“푸하하. 그거 정말로 끔찍한 소리로군.”
긴장을 풀려는 의도인지 그들은 다소 괴하게 우스갯소리를 나눴다. 하지만 다들 디스의 의견에 동조한느 것만은 확실했다.
“알겠네.”
필라이트도 차마 그들의 뜻을 어길 수 없었다.
차원의 문은 갖가지 실험을 위해 마나가 가득 충전되어 있는 상태라 언제든지 출발할 수 있는 상태였다.
몇 가지 사항을 점검해 본 필라이튼느 키메라들에게 고갯짓을 했다. 키메라들은 굳은 표정으로 차원의 문 위에 올랐다.
차원의 문은 오우거 두 마리가 팔짱을 끼고도 충분히 통과할 수 있을 정도로 거대했다.
“이거 괜히 긴장되는걸.”
“흐흐. 난장이 녀석이라 간 역시 작은 모양이구나.”
“gpd! 그러는 넌 간덩이가 부어서 온몸을 붕대로 칭칭 동여맸냐?”
나이프와 바인딩이 쓸데없는 소리르 주고받는다.
마법진에서 웅웅거리는 소음이 들려올 때마다 그들의 몸은 무의식적으로 흔들리곤 했다.
아무리 두려움을 모르는 키메라들이라고 해도 긴장이 없었다. 긴장이 높아질수록 크리티컬이 혀를 차며 한마디 했다.
“경망 좀 그만 떨고 진지해져 봐라. 원, 시계를 구하겠다고 이계로 가는 놈들이 이렇게 촐싹거려서야. 이계인들이 우릴 보고 실망하면 어쩌라고 그러는 게냐?”
“흥흥.그러는 크리티컬도 좀 전부터 어깨를 흔들고 계시지 않습니까. 그리고 말이야 바른 말이지. 우리 모습이 어디 평범합니까? 사람은 그저 생긴 대로 노는 게 가장 자연스러운 겁니다. 가식? 우린 그런 거 모릅니다. 몰라요. 그런 어려운 것은 디스에게 다 맡기렵니다. 그가 원래 그런 쪽 전문이거든요.”
“험험. 왜 가만있는 절 걸고넘어지시는지. 험험험.”
디스가 불편한 듯 헛기침을 하자 일행은 한바탕 웃음을 터트렸다. 어느새 긴장은 누그러들고 따뜻한 마음만이 그들의 가슴에 남았다.
디스, 크리티걸, 나이프, 바인딩, 카리오스, 사일런스......., 그 외 각자 비극의 삶을 살았던 다섯 명의 키메라들.
모두 10명의 키메라가 이계로 향하기 위해 차원의 문 위에 올랐다.
시계를 구하기 위한 위대한 그들의 발걸음은 참으로 초라했다. 늙은 노마법사 한 명만이 그들을 배웅할 뿐이었다.
“잘 다녀오게.”
필라이트는 두 손으로 지팡이를 짚은 채 번뇌와 갈등으로 복잡해진 얼굴을 보였다. 오히려 키메라들보다 그가 더 근심하는 듯 보였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그는 과연 이것이 잘한 결정인지 고민했다.
“걱정 마십시오.”
디스는 자신감 넘치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를 따라 나머지 키메라들 역시 희미하게 웃었다.
“알겠네.”
킁!
필라이트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었다.
쿠쿠쿵!
묵직한 진동과 함께 마법진이 발동을 시작했다.
두두두두두두두두두두!
심연의 저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오는 규칙적인 소음에 심장이 터질 것처럼 박동했다.
츠아아아아악!
마법진에서 눈부신 빛이 뿜어졌다. 한순간 키메라들의 모습이 빛에 감싸였다.
‘공주.’
디스는 가만 눈을 감았다.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그가 기억하는 레종의 모습은 지금보다 훨씬 어렸을 때, 작고 해맑은 웃음을 머금던 그때의 그녀다.
‘디스.’
조심조심 뒷짐을 지며 다가와 그의 귓가에 작게 속삭이던 그녀. 치기 어린 얼굴.
지금 당장이라도 그의 이름을 부르며 달려올 것만 같다. 하지만 그녀에 대한 추억은 오래가지 않앗다.
분하게도 그의 그녀는 다른 사람을 사랑했다.
한 청년의 모습이 떠올랐다.
수수한 모습에 멍청하게 웃곤 했던 녀석.
하지만 누구보다 열정적이며, 열심이었던 그 녀석.
‘넌 약속했다. 꼭 그녀를 구해 오겠다고. 설사 그녀가 너에게 간다 해도 상관없다. 다만, 다만... 내가 다녀왔을 때, 편안하게 웃고있는 그녀의 모습을 내게 보여다오. 오직 그것만을 너에게 바랄뿐이다. 그것을 위해 난 죽어도 좋다.’
그가 소리 없는 중얼거림으로 다짐했을 때.......
찌거어어어어억!
천둥치는 소음이 지하 연구실을 뒤흔들었다.
그리고 그것으로 끝이었다.
빛이 사라진 차원의 문에 더 이상 키메라들은 없었다.
“부디 잘... 다녀오시게.”
필라이트는 허망한 표정으로 이제는 사라지고 없는 키메라들의 안녕을 빌었다. 그러나 얄궃은 운명의 장난으로 이후, 필라이트와 키메라들은 두 번 다시 재회하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