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없는 통곡이 밤하늘을 차갑게 식히다
중간계.
빛과 어둠이 균형을 이루며 창조와 파괴를 반복하던 세계.
한때, 중간계는 인간이 여타의 종족을 누르고 우위를 차지하던 시가가 있었다.
하지만 이제는 모두 옛말이 되었다.
마족들의 침공이 시작된 이후로 중간계는 더 이상 인간들의 독무대가 아니게 되었다.
마도전쟁이 시작된 지도 어느 덧 3년이 지났다.
한때 절망적인 상황으로까지 몰렸던 연합군은 키메라라는 새로운전력을 보강함에 따라 간신히 전장의 균형을 되찾을 수 있었다.
물론 이렇게까지 전장의 기세를 회복한 데에는 ‘학살자’들이라 불리는 변종 키메라의 활약이 지대했다.
학살자들은 과도한 실험과 개량으로 언제 폭주할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였진만, 현재로썬 마족에게 대항할 수 있는 유일한 무기였다.
한때, 마족들을 앞세워 승승장구하던 바호크는 ‘학살자’ 들에 연패를 거듭한 이후, 별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연합군은 머잖아 마족들을 무리치고, 중간계의 평화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라는 희망에 불타올랐다.
키메라에 대한 실험도 많은 성취가 있어, ‘학살자’ 들의 수도 어느덧 100명이나 되었다.
바야흐로 마족의 침공으로 발발된 마도전쟁은 절정을 넘어 황혼기를 향해 숨 가쁘게 달려가고 있었다.
이이린 왕국 변방의 산 중턱.
최전방에 위치한 이곳의 지휘관 막사 안에선 한창 심각한 이야기가 오가고 있었다.
실제 시휘관 막사에 있는 사람은 최전방 부대의 통솔을 맡은 글로리 공작 하나뿐이다.
나머지 사람들응 마밥사의 수정구를 통해 의견을 나누고 있었다.
심각한 내용의 말이 오가는 듯, 분위기는 한껏 달아올라 있었다. 특히 라파엘국의 하즈 국왕과 칸타타국의 타드 국왕은 치열한 설전을 벌였다.
오히려 연합군의 주축이라고 할 수 있는 아이인 왕국과 신성제국의 대표자는 묵묵히 그들의 의견을 경청하고만 있었다. 아이린 왕국과 신성제국은 각각 여왕과 황제의 부재로 대리자가 출석한 상태였다.
“지금이 바로 적시오. 학살자들을 총동원해서 바호크의 심장부를 급습해야 하오,‘
“급습이라니. 난 생각이 다르오. 자고로 욕심이 크면 손해도 큰법이오. 지금은 과욕을 부릴 때가 아니라 차분히 전황을 짚어보고 내실을 다질 때요.”
“어허. 답답한 소리. 현재 우리 전력이 월등히 앞서는 것이 사실인데, 뭘 더 짚어 본다는 게요? 지루한 장기전으로 소모되는 물자가 얼마나 되는지 알고 싶소?‘
“재정전으로 부담이 되는 것은 사실이오. 하지만 아직 마족들의 수가 얼마나 되는지, 또 놈들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파악되지 않았소. 이렇게 불확실한 상황에서 일시적으로 전황이 좋아젔다고 키메라들을 적의수도에 투입한다는 것은 아무리 생각해도 좋은 계책이 아닌 것 같소.”
“허허. 그렇다면 계속 손놓고 기다리기만 하자는 말이오?”
"얼마 전에도 마몬(Mamon)이라는 중급 마족을 암살하는 임무에 학살자가 셋이나 희생되었소. 만약 바호크에 마몬 이상 가는 마족이 다수 포진해 있을 경우 케메라들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날 것이오. 잊지 마시오. 우리에겐 키메라만이 마족에게 대항할 유일한 수단이라는 것을.“
“미치겠군. 답답해 미치겠소. 정보길드에서도 확인하지 않았소? 마몬은 바호크 내의 마족들 중에서도 최상위 클래스의 실력자라고 말이오. 만약 바호크에 마몬 이상 가는 마족이 있다면 왜 지금까지 잠잠했겠소. 그들의 추악한 본성을 모르오? 여태 마몬보다 강한 마족이 안 나타난 이유는, 바호크에 놈보다 강한 마족이 없기 때문이오,”
“흥. 그거야 당신의 개인적인 추측일 뿐이잖소. 사람의 목숨이 오가는 전장에서 추측성 발언은 자제하는 게 좋은 법이오.”
“커허험. 하즈 국왕. 당신이야말로성격에 문제가 있는 것 같소. 그렇게 소심해서야 원.”
“무엇이? 방금 그 말 진심이오!”
“자자. 그만들 진정하시지요.”
토론이 과열되는 것 같자 글로리 공작이 참견했다. 적을 앞두고 있는 상황에서 같은 편끼리 격렬하게 다투는 것은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일이다. 자칫 왕들 간에 의기가 상하기라도 하는 날이면 향휴 작전수행에 큰 차질이 생길 수도 있다.
“의견이 갈리는 듯하니거수로 결정하도록 하겠습니다.”
글로리 후작이 중재안을 내놓았다.
“좋소.”
“그렇게 합시다.”
진전없이 설전만 반복하고 있던 두 나라의 왕도 동의했다.
이번 결정엔 연합군의 주축이 이루는 여섯 개 나라의 대표와 엘프, 드워프 등 이종족 대표 4인이 참여했다.
“그럼, 바호크 제국의 수도에 키메라 부대를 투입하는 작전에 찬성하시는 분은 손을 들어 주십시오.”
이이린 왕국와 아마스 신성제국을 제외한 네 개 나라의 국왕이 손을 들었고, 드워프 등 두 종족이 찬성의 뜻을 표했다.
“모주 여섯 분께서 찬성하셨습니다. 이로써 이번 작전을 실해하게 되었음을 다시 한번 알려드리겠습니다.”
“허허허. 현명하신 선택이오.”
작전실행을 강력히 주장하던 타드 국왕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흡족함을 드러냈다.
이날의 회의는 그것으로 끝이 났다.
글로리 공작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텅 빈 회의장을 둘러보었다.
마음이 복잡했다.
이번 작전은 다소 급하게 결론을 맺은 바가 없지 않았다. 작전의 위험성을 생각한다면 좀 더 신중한 접근이 필요했다. 하지만 작금의 상화은 그런 여유를 앗아 갔다.
바호크에 의해 발발된 마도 전쟁은 무려 3년을 끌고 있었다.
비록 전쟁의 승기는 이쪽으로 기울었다지만, 연합군은 여러모로 힘든 상황이었다.
오랜 전쟁으로 인해 경제는 피폐해지고, 민생은 불안전해졌다. 젊은이들이 너무 많이 죽었다. 이제는 병사가 모자라 백발이 성성한 노인과 나이 어린 소년들마저 징집할 지경이었다.
모두들 지칠 만도 했다.
다소 무리를 해서라도 전쟁을 마무리 짓고 싶을 것이다.
그들의 곤란함을 뻔히 알고 있는 글로리 공작이지만 이번 결정만은 어쩐지 자꾸만 신경이 쓰였다.
느낌이 좋지 않았다.
물론 ‘학살자’ 들이라 불리는 새로운 키메라들의 성능은 그도 충분히 알고 있다.
전장에서 그들이 마족들은 압도하는 것은 이미 여러차례 직접 목도하기도 했다.
그들이 한꺼번에 투입된다면 제아무리 대단한 바호크 제국이라도 큰 타격을 받을 것이다.
하지만 바호크 제국 내의 사정에 대한 정보가 너무 부족하다.
바호크 제국 내에 펼쳐진 강력한 어둠의 장막은 그 어떤 마법과 첩자의 침입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버호크 제국에 대한 실상은 전혀 외부로 알려지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전장에서 잔뼈가 굵은 글로리 공작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단순히 병력의 수는 문제가 안 된다.
마족.
이 저주 받은 종족의 파악이 급선무다.
바호크에 얼마나 많은 마족들이 있는지, 또 그들의 실력이 어느 정도인지 정확히 알아야 잔전 중의 패해를 최소화할 수 있는 것이다.
마족들은 결토 머릿수로 역량을 파악할 수 없는 존재들.
등급에 따라 그 힘이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한다.
최근 마탑의 연구에 의하면 중급 마족은 하급 마족30 마리보다 강하다고 한다. 하급마족 한 마리를 처치하기 위해 일반 보병 10명이 필요하다고 봤을 때, 중급 마족을 죽이기 위해서는 무려 300명의 보병이 필요하다는 말이 된다.
이것도 최소로 봤을 때다.
고작 중급 마족이 이 정도인데, 과연 상위 마족은 얼마만큼의 힘을 가지고 있을까.
예측조차 불가능한 자경이다.
그나마 다행이람녀 아직까지 상위 마족이 발견된 적이 없다는 점이다.
“후. 쓸데없는 걱정만 늘었군. 나도 이제 그만 전장을 떠날 때가 된 것 같아.”
글로리 공작은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생각해 보면 그는 인생의 대부분을 전장에서 보냈다. 이제는 열정이 시들 만도 했다.
이런 밤이면 술과 친구가 그리워진다.
믿고 의지할 수 있는 듬직한 친구.
그의 뇌리로 젊음 청년의 영상이 떠올랐다.
언제나 궂은일을 도맡아 하던 검은 머리의 순박한 청년.
“녀석은 어떻게 됐는지 모르겠군.”
병규가 레종 여왕을 구한답시고 마계고 떠난 지 벌써 2년이 넘었다. 아직까지 소식이 없는 것을 보면 틀림없이 좋지 않은 일이 생긴것일 터.
“그래도 왠지 녀석이라면 살아 있을 것 같군.”
항상 불가능한 일들을 해냈던 그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기발한 발상으로 문제들은 하나씩 해결해 가는 모습을 볼 때마다 저도 모르게 온몸이 후끈 달아오르곤 했다.
그라면 마계의 마왕이 적이라 해도 어떻게든 이겨 내지 않을까하는 꿈같은 생각이 새삼 들곤 한다.
“허. 정말로 안 되겠군. 너무 감상에 젖었어.”
잠시 상념에 젖어 있던 글로리 공작은 자리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온몸이 뚜둑 소리를 낸다. 그는 손으로 어깨를 주무르며 회의장을 떠났다.
오늘 회의에서 결정된 사항을 보고해야 했다.
회의의 결과는 은밀한 회선을 통해 키메라 연구시설인 ‘키메라의 별’로 전해졌다.
“적의 수도 급습이라.....”
특급으로 전해진 소식을 들은 필라이트는 착잡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대마법사로 칭송받던 그는 현재 ‘키메라의 별’ 수장 직을 수행하고 있었다.
“또 많은 사람이 죽어 가겠군.”
“어쩔 수 없는 희생입니다.”
수정구 너머의 글로리 공작도 괴로운 얼굴이었다.
누구라도 괴롭지 않겠는가. 아무도 원하지 않은 전쟁이다. 갑작스럽게 바호크에 마계의 문이 열렸고. 중간계의 종족들은 살기 위해 그들과 맞서 싸워야 했다.
“알겠네.”
필라이트는 건조한 음성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키메라들의 상태는 어떻습니까?”
“나쁘지는 않네.”
말과는 달리 필라이트의 표정은 그리 밝지 못했다.
키메라들의 상태는 극히 불안정하다. 힘을 높이려고 극단적인 개조를 단행하다 보니 신체의 균형이 무너졌다. 이제는 약물 없이는 제정신을 유지하기조차 힘들 지겨이다.
필라이트는 차라리 잘된 일이라 생각했다.
더는 버티기 힘들다.
단시간 내에 끝을 내지 않는다면 키메라들은 스스로 붕괴될 것이다. 그것이 저주 받은 생명체, 케메라들의 운명이다.
글로리 공장과의 통신이 끝난 필라이트는 수정구를 통해 수행웡을 호출했다.
“디스를 불러 주게.”
잠시 후, 노크 소리와 함께 백발의 청년이 들어왔다.
디스.
계속된 개량의 부작용으로 그의 머리는 하얗게 변해 버렸다.
필라이트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이 젊은 창년의 재능이 아까워서다.
디스는 예전과는 확연히 달라졌다.
머리카락은 하얗게 변해 버렸고, 몸은 탄탄한 근육질이 되었으며, 얼굴은 푸른 금속기가 투명하게 흘렸다.
비단 겉모습만 변한 것은 아니다.
웃음 역시 사라졌다. 키메라가 된 이후로 그가 웃는 것을 아직 한번도 본 적이 없다. 지극히 사무적이고 건조한 사람이 되어 버렸다.
하지만 능력만큼은 키메라들 중에서도 발군이다.
과거에 행정업무로 뛰어난 능력을 보였던 그였으나, 지금은 오히려 무력으로 명성을 날렸다.
디스는 키메라 부재의 대장 직을 겸하고 있다.
단순히 그가 귀족들과 친하기 때문만도, 부대을 통솔하고 운용하는 능력이 뛰어나서도 아니다.
실제로 디스는 키메라등 중에서도 가장 강했다.
현재 키메라의 수는 약 1,000여 명네 이른다. 이 중 몬스터 융합으로 강화된 키메라는 300명, 그리고 학살자라 불리는 최종단계의 키메라는 100명 정도 된다.
키메라들의 특수성을 감안한다면 상당한 수라고 할 수 있다.
디스는 이렇듯 방대한 키메라 부대의 단장 직을 맡고 있었다.
‘능력복제술사라고 불린다지? ’
마법사들아 디스를 부르는 별명을 떠올리며 필라이트는 미간을 지그시 모았다.
키메라들 중엔 마법사들 말고, 드레곤인 마그네트가 직접 실함한 실험체들이 있다.
디스 역시 그런 케이스인데, 그중에서도 가장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그는 모든 키메라들 중에서 가장 많은 개량을 받았다.
물론 디스가 스스로 자청한 것이다. 그는 능력이 부족하다고 판단될 때마다 마그네트를 찾아갔고, 그때마다 새로운 육체를 받았다. 하지만 과도한 실험의 반동은 생각보다 극심했다.
디스는 냉철한 이성을 지녀 다른 키메라들처럼 정신이 붕괴되지는 않았다. 엄청난 정신력으로 폭주하려는 이성를 잡아 붙들었다.
하지만 그조차도 육체의 붕괴만은 어쩔 수 없었다.
디스는 과도한 육체 조작으로 위험한 상태이다. 온몸에 암세포가 번지고, 체중은 급격히 줄어들었으며, 신체를 구성하는 조직들이 새카맣게 변색되며 죽어 갔다.
최후의 도박으로 사용한 것이 라이트의 부서진 몸이다.
라이트는 과거 이이린 왕국에 반란을 일으킨 필립 모리스 공작의 장남으로, 이계에서 온 노괴라는 자에게 이상한 실험을 받아 육체가 변형되었다.
‘인고(人蠱)’라는 전혀 생소한 이름의 이 변형 생명체는 키메라와는 판이한게 다른 육체특성을 가기고 있었다. 하지만 신체 능력만큼은 탁월했다.
키메라와 인고의 결합.
개량은 마그네트가 직접 담당했다.
그녀는 인간을 훨씬 뛰어넘는 지식고 마법으로 전혀 다른 소재의 두 인간을 하나고 결합하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물이 지금의 디스다.
큰 도박 끝에 디스는 새로운 능력을 손에 넣었다.
타인의 능력을 흡수할 수 있게 된 것이다. 하지만 완전한 것은 아니라, 타인의 능력을 사용하려면, 반드시 그의 신체가 필요했다.
가령 냉기를 사용하는 마족의 능력이 그의 팔에서 시작되는 것이라면. 다스는 우선 자신의 팔을 떼어 내고 그 마족의 팔을 덧붙여야 한다.
지금 그의 팔다리는 자신의 것이 아나다.
모두 전장에서 얻은 마족의 것으로 대체된 것이다. 심지어, 내장기광의 일부도 본래 자신의 것이 아니다.
‘덕분에 확실히 강해지긴 했지만.’
확연히 변한 디스를 보며 필라이트는 뭐라 말로 설명 못할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지금의디스는 라이트라는 불순물이 잔뜩 섞인 무쇠와 같다. 분명 겉으로 보이는 강도는 단단할지 모르나, 내부적으로는 불순물로 인해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바쁘시지 않다면 무슨 일로 호출하셨는지 알려 주셨으면 합니다. 처리해야 할 서류가 많아서요.”
디스가 서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그는 항상 시간에 쫓기는 듯 보였다.
“자네를 부른 것은 다름이 아니라....”
필라이트는 연합군의 수뇌부가 결정한 사항을 그에게 알렸다.
역시나 디스의 표정은 덤덤했다. 일말의 감정도 내비치지 않았다.
“알겠습니다. 키메라들을 준비시키도록 하죠.”
볼일을 마친 디스는 미련없이 뒤 돌아섰다.
돌아선 디스를 향해 필라이트가 불쑥 말을 꺼냈다.
“후회하지는 않는가?”
디스는 걸음을 멈춘 채 고개만을 조금 돌려 보였다. 필라이트는 회한이 서린 눈으로 그를 보며 말을 이었다.
“난 자네의 옛 모습이 그립넨. 뭐 그렇다고 과거의 자네가 친근했던 성격이었던 것은 아니지만 말일세.”
디스는 잠시 침묵하다 짧은 대답을 던졌다.
“시간은 되돌릴 수 없는 법입니다. 전 후회하지 않습니다.”
그 말을 끝으로 디스는 문밖으로 사라졌다. 필라이트는 두 손을 J깍지 낀 채, 그가 사라진 문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디스에 대해 생각했다.
마그네트는 그를 일컬어 자신의 최대 걸작이라고 했다. 틀린 말은 아니다. 확실히 그는 모든 키메라들 중에서 가장 강한 존재다. 심지어 소드마스터인 글로리 공작도 그를 이길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필라이트는 그가 불안정해 보였다. 디스가 강해지면 강해질수록 그런 불안은 더더욱 커져만 갔다.
“걱정거리가 있는 모양이군.”
갑작스럽게 들려온 음성에 필라이트는 고개를 들었다.
노르스름한 노을이 펼쳐진 창가에 붉은 머리칼의 깜찍한 소녀가 앉아 있었다.
소녀의 미모는 놀랄 만큼 아름다웠다. 하지만 필라이트는 결코 그녀의 미모에 혹하지 않았다.
오히려 온몸늬 신경이 팽팽하게 조여질 만큼 긴장했다.
붉은 머리칼의 소녀는 마법사인 그로서는 도저히 대항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마나를 품고 있었기 때문이다.
“마그네트.”
소녀의 이름은 마그네트였다. 과거 그녀는 마일드의 일곱 사신중의 한 명으로 대륙에서 제일가는 러세신이었다. 하지만 요즘은 마족에 대항하여 손수 키메라 제작기술를 인간에 전파한 레드 드래곤으로 더 알려져 있었다.
“언제 오셨습니까?”
필라니트가 애써 태연한 척하며 말을 걸었다.
마그네트가 말을 걸기 전까지 그녀의 기척을 전혀 읽지 못했다.
“내 걸작이 이 방에 들어왔을 때부터다.”
마그네트는 거리낌 없이 대답했다.
일반적으로 사람이라면 숨어서 남의 이야기를 엿듣게 된 상황에선 일단 그 사실을 숨기려 할 것이다. 상대가 불쾌하게 생각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녀는 달랐다.
인간들의 예의규범에 전혀 구애받지 않았다.
그것은 개미가 만든 행동규칙에 인간들이 따를 필요를 전혀 못 느끼는 것과 마찬가기였다.
“넌 내 걸작이 불만스러운 모양이구나.”
마그네트가 투명한 눈동자로 물었다.
무섭도록 아름다운 눈빛이지만 팔라이트는 심장이 오그라드는 공포를 느꼈다. 하지만 그는 결코 고개를 돌리지 않았다. 두 손으로 무릎을 르스러져라 움켜뒤며 입을 열었다.
“그에게 생긴 변화를 당신이 모를 리 없을 것입니다. ”
발칸의 변화가 어떻다는 거지?“
그녀의 태연스런 물음에 필라이트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서며 외쳤다.
“그를 발칸이라고 부르지 마시오!그의 이름은 디스요.”
“아, 그랬지? 상관없어. 그를 뭐라 부르든 말이야. 중요한 것은, 네가 그를 좋지 않게 생각한다는 거지.”
“난 그럴 미워하는 것이 아니오. 단지, 단지......”
“단지?”
“안타까울 뿐이오.”
필라이트는 고개를 푹 숙였다. 그를 보고 마그네트는 깔깔대고 웃었다.
“하하. 이해할 수 없구나 그의 뭐가 안타까운 거지? 강한 힘이? 새로운 능력이? 아서라. 괜한 시기일 뿐이다. 지금 그의 모습는 그가 가장 바라던 이상적인 형태야.”
드래곤인 그녀가 보기에 인간은 쓸모없는 감정을 너무도 많이 가지거 있는 것 같았다. 그런 감정들이 때론 어리석은 행동를 강요하기도 한다.
인간은 불타는 가옥에 갇힌 한 명의 어링아이를 살리기 우해 수십 명의 장성한 어른이 죽음을 감수하기도 한다. 노동려과 가치를 따져 보면 터무니없는 행동이다.
어처구니없는 것은 그 반대의 일도 비일비재로 벌어진다는 것이다 자신의 자식을 못숨처럼 귀하게 여기면서도 남의 자식, 남의 목숨을 마치 생명이 없는 무기물처럼 아무렇지도 않게 죽이기도 한다.
그녀에게서는 필라이트의 행동도 인간의 어리석은 행동의 연장선상으로 비쳐졌다.
“질투라.”
짤막한 신음성을 흘리며 필라리트는 의자에 털썩 무너졌다, 더 이상 그녀와 말싸움을 나눌 생각은 없다. 어차피 가치관이 틀리니 말이 통할 리 없다.
마그네트와 함께 키메라 연구를 하는 동안 필라이트는 이런 차이를 여러 번 느꼈다.
“그런데 무슨일로 찾아오셨습니까?”
필라이트가 힘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디스가 완성된이후로 마그네트는 한동안 ‘키메라의 별’을 찾지 않았다.
키메라 연구로 도달할 수 있는 정점에 도달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녀가 다시 나타났다.
필라이트는 절대로 이 일이 우연이 아니라고 확신했다. 인간들의 생각과 달리 드래곤들은 절대로 충동적이고 제멋대로인 종족이 아니다.
오히려 지극히 냉철하고 이성적이다.
물론 가끔 유희라는 명목으로 엉뚱한 일을 벌이긴 하지만 그것은 긴긴 삷의 지루함을 덜어 보려는 소꿉장난 같은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필라이트의 생각대로 마그네트는 분명한 목적을 가지고 방문한 것이었다.
“마족들을 처리하기 위해 키메라들은 전장에 전원 투입한다고 들었다.”
필라이트는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번 작전은 철저히 비밀이 지켜졌는데, 어떻게 그녀가 이 일을 알 수 있었을까.
마그네트는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빙그레 웃었다.
“잊었는가, 내가 어떤 존재인지를?”
“그렇군요. 확실히 그렇지요.”
필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곤 주름진 노안을 들어 그녀를 바라보았다.
“그럼 무례하지만 방문하신 목적을 알려 주실 수 있으십니까?”
“이번 작전에 나도 참가하겠다.”
“흐음.”
다소 충격적일 수 있는 선언에 필라이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백염을 쓰다듬었다. 설마 드래곤인 그녀가 참여하겠다고 나설 줄이야.
단순한 호기심? 이유 없는 변덕?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이번에도 그의 생각을 읽은 마그네트가 물어보기도 전에 대답했다.
“잊었는가? 키메라들은 바로 내가 만든 존재다. 그들의 위대한 전투를 지켜보고 싶은 게 당연한 일이지 않겠느냐.”
필라이트는 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그는 속으로 딴생각을 했다.
그는 알고 있다.
기실 마그네트는 키메라의 생사엔 관심이 없다는 것을. 키메라들중 그녀가 관심이 있는 것은 오직 예전의 동료였던 마일드의 사신들과 최고의 역작으로 평가받는 디스뿐이다.
나머지 키메라들은 마족을 물리치기 위한 도구 정도로만 생각할뿐이다. 연합군의 지도부가 그렇게 생각하는 것처럼.
“후. 허락할 수밖에 없겠군요. 아무도 당신의 결정을 막을 수 없을 테니까요.”
감히 드래곤의 행사를 방해할 수 있을 정도로 간 큰 사람은 없을 것이다.
마그네트는 빙그레 웃었다.
황홀한 미소였다.
그녀가 선 짙은 빨간 입술을 열며 아름다운 음성으로 말했다. 화사한 미모와 어울리지 않는 권태로운 음성이었다.
“잊지 마라. 나 역시 마족들을 이 땅에서 쫓아내고 싶어 한다는 것을.”
마그네트의 참전.
연합군의 지휘부는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드래곤인 그녀가 나서 준다면 대환영이다. 단지 방문자로만 참가한다 해도 그녀의 강력한 힘은 큰 보탬이 될 것이다.
의외의 참가자는 그녀 혼자만이 아니었다.
필라이트가 이번 작전에 참여 의사를 보였다.
마족들이 수도에 광범위하게 펼쳐 놓은 마력봉쇄를 뚫으려면 고서클 마법사의 참여가 불가피했다. 그 일에 필라이트가 자원한 것이다.
마그네트의 참전에 환성을 잘렀던 지도자들은 그의 참가엔 아연 실색했다. 확실히 그는 인간 중에 가장 강한 대마법사다. 하지만 나이가 너무 많았다.
마법사들에게 미치는 그의 영향력을 생각한다면 위험한 작전에 투입되는 것보다 안전하게 ‘키메라의 탑’에서 마법사들을 지휘하는 것이 더 이득인 사람이다.
지도자들은 다채로눈 채널을 통해 자중을 요청했다. 그들은 전쟁터에서 이 위대한 영웅을 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필라이트의 태도는 완강했다.
결국 지더자들은 그의 참가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수뇌부는 일주일 후, 작전을 실행하기고 결정했다.
물론 이 작전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일선의 장교들조차 작전 실행 전날까지 작전사항에 대해 전혀 듣지 못했다.
키메라들은 상인으로 변장한 채, 일주일간 조금씩 ‘타론’ 마을로 이동했다.
‘타론’ 마을은 사람이 거주하고 있는 도시들 중에서 최전방에 가장 가까운 곳이었다. 그리고 바호크의 수도와 불과 하루거리밖에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눈 깜짝할 사이에 일주일이 흘렀다.
‘키메라의 탑’에서 은밀히 이동한 키메라들은 모두 무사히 ‘타론’ 마을에 도착했다.
키메라들은 인근 야산에 자리를 잡고 조용히 작전실행을 기다렸다. 역사에 길이 남을 마족토벌작전이 코앞으로 다가왔다.
“내일이군.”
막사로 찾아온 마그네트가 조용히 말했다.
보고서를 작성하던 디스는 앉은 채로 고개만 끄덕였다.
마그네트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많이 바쁜가?”
이상하게 그녀의 음성이 흔들리고 있었다. 그것은 맹수의 목울림과 비슷한 것이었다.
하지만 이번 역시 디스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보고할 것이 좀 많군요.”
“.....”
마그네트는 잠시 그를 내려다보았다.
그녀의 눈빛이 기이하게 반짝였다. 드래곤인 그녀조차 발칸이라는 이 희대의 키메라가 자진 힘을 모두 파악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녀가 만들어 놓고도 이렇듯 흥미를 보이는 것이다.
“내일이면 이 지긋지긋한 전쟁도 끝이 나겠군.”
그녀가 다시 입을 열었다.
디스가 바쁘다고 말했지만, 그녀는 전혀 신경 쓰지 않았다. 그녀가 생각하기엔 인간은 쓸데없이 번거로운 종족이다.
내일의 전투를 위해 오늘 필요한 행동은 병기의 손질, 충분한 식사, 그리고 충분한 휴식이 전부다.
그런데도 연합군의 지도부는 자신들의 호기심을 총족시키기 위해 그녀의 위대한 걸작에게 쓸데없는 보고서를 요구하는 것이다.
“끝이라.”
열심히 종이 위를 굴러가던 펜이 처음으로 움직임을 멈췄다. 디스는 가만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정말로 이번 작전으로 전쟁이 끝날 것이라 확신하십니까?"
마그네트는 빙긋 웃었다. 그리곤 힘 있는 음성으루 대답했다.
“확신한다.”
무려 천 명에 이르는 키메라 대군이다 그중 삼백은 일반 키메라들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가졌고, 다시 그들 중 백 명은 중급 마족들과 자웅을 겨를 수 있을 정도로 강했다.
이들이라면 인간들의 조잡한 군대은 말할 것도 없고, 설사 마계의 대군이 상대라 해도 전혀 꿀리지 않을 것이다.
키메라들에 대한 그녀의 자부심은 정녕 대단했다.
“당신의 말대로 되었으면 좋겠군요.”
디스는 다시 보고서 작성에 열중했다 하지만 새로운 불청객들이 그의 작업을 방해했다.
불청객들의 존재를 가장 먼저 인식한 것은 마그네트였다.
흥미 가득한 눈으로 디스를 살피던 마그네트가 돌영 천막의 출입구를 향해 말했다.
“왔으면 들어오너라.”
기척도 없이 몇 명의 키메라가 천막 안으로 들어왔다.
크리티컬, 바인딩, 나이프, 사알런스, 카리오스.
마그네트와 부서진 에고소드 혼돈을 포함하여 마일드의 일곱 사신이라 불렸던 에세신들. 한때는 최고의 어세신으로 명성을 날렷지만 지금은 디스아 더붕러 치강의 키메라로 더 유명하다.
천막 안으로 들어선 그들는 마그네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머뭇거렸다.
마그네트가 두 팔을 벌이며 그들을 환영했다.
“오랫만에 모두가 모였군. 아, 혼돈이 빠졌나? 아쉽긴 하지만 칼에 갇혀 있다 해방되었으니 그로서는 차라리 잘된 일인지더 모르지.”
예상외로 마그네트는 그들을 편하게 대했다.
단순한 유희라고는 하나 마그네트는 오갠 시간을 이들과 함께 보냈다. 게다가 이들은 그녀의 첫 키메라라는 가볍지 않은 인연까지 있었다.
비록 드래곤이라는 정체가 드러나긴 했지만 여전히 사신들은 그녀에게 특별한 존재였다.
사신들도 어색하나마 그녀를 받아들였다.
여전히 드래곤에 대한 거부감은 잇었지만, 눈앞에서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는 과거와 전혀 다르지 않았다.
“무슨 볼일이십니까?”
디스가 차가운 표정으로 물었다.
좌중의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한순간에 달라날 정도로 냉막한 태도였다.
사신들은 그의 차가운 태도를 크게 개의치 않았다. 여러 번 겪는터라 익숙해질 대러 익숙해져 있었다.
크리티컬이 지팡이를 두 손으로 짚으며 모두를 대신해 입을 열었다.
“내일이면 바로 작전일 아닌가. 그래서 오늘만큼은 코가 삐뜰어지게 술을 마시는 게 어떤가 해서 말일세. 디스 자네도 가끄믄 편하게 즐겨 보게. 요즘 너무 바쁘게 사는 것 같아서 말일세.”
크리티컬의 은근한 권유에 디스는 생각ㄹ해 볼 가치도 없단는 듯이 고개를 숙이며 다시 일에 열중했다.
“그다지 생각이 없군요. 할 일이 많습니다.”
“쯧쯧.”
크리티컬은 나직하게 혀를 찼다.
최근 디스는 너무 여유가 없어 보인다.
키메라가 된 이후로 자나 깨나 전쟁 생각뿐이다.
“허허. 일도 좋지만 가끔은 좀 쉬도록 하게.‘
크리티컬이 일행과 함께 천막 밖으로 나서며 한마디 던진다. 디스는 알았다는 뜻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마그네트 역시 그들을 따라 나갔다. 오늘 밤은 그녀 역시 과거의 동료들과 편하게 즐길 생각이다.
모두가 사라지고 다시 디스 혼자 남게 되었다.
그리 크지 않은 막사가 갑자기 너무 허전하게 느껴진다.
홀로 남은 디스의 외로움을 달래 주듯, 촛불이 후르르 몸을 떨었다.
지도를 살피던 디스는 문득 감성적인 기분이 되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막사 밖은 어둠이 짙게 깔려 있었다.
별 하나 없는 밤하늘에 푸른 달빛이 잔잔하게 흐른다.
"공주.“
디스는 조용히 사모하는 그녀를 불렀다. 비록 오래전에 여왕의 신분이 된 그녀지만, 아직 그의 마음속에선 공주였다.
그녀를 처음 보았을 때가 떠오른다.
앙증맞은 볼과 빨간 입술. 동그랗고 큰 눈으로 그를 보며 귀엽게 웃던 그모습.
생각해 보면 그녀와 정말 많은 시간을 보낸 것 같다.
소꿉친구로 만아 어른이 될 때까지 함께했다.
그래서 더욱 울분이 솟는지도 모른다.
“어떻게 된 거냐. 병규!”
마족에게 납치된 레종을 구한다며 병규가 떠난 지 어느덧 3년이 지났다. 그동안 그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그리움이 큰 만큼 분노도 컸다.
오직 그와의 약속만을 믿고 기다린 3년의 시간은, 디스의 가슴을 바짝 말라 버리게 만들어다.
“만약 그녀를 구해 오지 못한다면. 난, 난 네 녀석을 절대 용서하지 못할 것이다.
울분을 담아 바위를 후려치자 딱딱한 바위가 삶은 계란처럼 으깨졌다.
안다.
그녀를 구해 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지를.
마계로 납치된 레종을 구하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다.
하지만 그래도 해내야 한다.
약속했으니까.
사나이 대 사나이로.
그의 분하고 원통한 마음을 모두 그에게 전달했다. 그러니 무슨 일이 있어도 그는 그녀를 구해 와야 한다.
디스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푸른 달빛 때문인지 그의 팔은 푸르게 빛나고 있었다. 이름 모를 마족의 몸뚱이에서 뜯어낸 팔이다. 이 팔 덕분에 그는 마력을 오러처럼 뿜어낼 수 있었다.
그가 라이트의 몸을 빌려 완전한 키메라고 재탄생했을 때, 이를 기념하여 이 팔을 그에게 달아 주었다.
그는 이것을 ‘요수의 발톱’ 이라 불렀다.
원래 이 마족에 팔에 깃든 힘은 단순히 마력릉 칼처럼 뽑아낼 수 있는 것이었는데, 마법사들이 소드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와 비슷안 형태로 개량해 주었다.
그것이 지금의 ‘요수의 발톱’ 이다.
“윽!”
갑자기 손끝에서부터 찌르는 듯한 통증이 일었다. 극심한 통증에 디스는 땀을 비 오듯이 흘렸다.
‘흐윽. 흐윽. 점점 후유증이 심해지는군.“
힘을 얻넌 반작용으로 그이 내부는 조금씩 무너지거 있었다. 정확히는 라이트의 육체로 개량을 한 이후다.
그때부터 그의 정신에 이상한 잡음이 섞여 들어왔다 그 잡음은 그에게 끊임없이 광기와 살인을 속상이고 있었다.
그것이 그의 몸을 재생하는 데 사용한 라이트의 의식이라는 것을 최근에야 알게 되었다.
손끝의 통증이 시작된 것도 이때부터다.
처음엔 바늘로 찌르는 정도에 불과했던 것이 이제는 식은땀이 흐를 만큼 심해졌다.
디스는 이런 증상에 대해 익히 알고 있었다.
폭주라거 불리는 정신붕괴.
하지만 그의 경우는 다른 키메라들의 정신붕괴와는 차원이 다른 고통을 받았다.
‘인고’로 완성된 라이트는 온갖 살의와 적의가 세포 하나하나에 까지 새겨져 있었다. 그런 사악한 기운이 그의 마음을 조금씩 잠식해 왔다. 적의가 강한 만큼 폭주에 대한 열망도 지독한 마약처럼 견뎌 내기 힘들었다.
아직까지는 정신력으로 버티고 있지만,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시간이 없다. 내 정신이 허물어지기 전에.....”
디스는 최후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고 있었다.
말없이 그의 통곡이 밤하늘을 차갑게 적셨다.
키메라, 다크나이트, 그리고 마족
하늘 꼭대기에 열린 아공간을 통해 중간계고 진입한 벨로로폰은 바호크 제국의 동쪽에 위치한 밀란 시에 모습을 드러냈다.
그가 마계에서 보낸 시간은 불과 한 달. 그 사이 중간계는 이미3년이라는 시간이 흘러 있었다.
아공간.
라일명 차원의 문이라 불리는 이 통로는 워낙 불안정해서 시간의 왜곡이 자주 발생했다. 가령 중간계는 1년이 지난 상태로 차원의 문을 통과했더이, 마계는 고작 일주일이 지난 상태이거나 그 반대의 경우도 비일비재로 생겼다.
3년이라는 시간은 마계와 연결된 바호크 재국을 변모시키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 사이 인구 4천에 이르는 항구도시 밀란은 죽음의 도시로 변해 있었다.
도시 어디에서도 활기를 느낄 수 없었다.
을씨년스럽게 늘어선 건물들의 행렬 어디데도 사람의 모습은 볼 수 없었다. 때때로 멀이서 들려오는 이름 모를 괴물의 울부짖음만이 도시의 정적을 낄 뿐이다.
멀쩡한 사람들은 이미 오래전에 도시를 떠나고, 남은 것은 검게 썩어 들어가는 시체와 거리를 활보하는 미친 승냥이들뿐이다.
벨로로폰은 죽을이 내려앉은 밀란의 모습의 불만을 느꼈다.
생기가 느껴지지 않는 도시 따윈 마계의 그것과 조금도 다를 바 없기 때문이다.
“일어나라, 어둠이여.”
그가 음침하게 외치자 검은 그림자가 커튼처럼 일어났다. 그는 손가락을 뻗으며 그림자에게 명령을 내렸다.
“살아 았는 인간을 찾아라,”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그림자는 무서운 속도로 주위로 펴져 나갔다. 어두운 밤이라 그림자의 움직임엔 아무런 제약이 없었다.
어둡고 습한 안개를 뚫고 산과 들을 넘어 먼 곳까지ㅐ 터진 강물처럼 미끄러져 갔다.
그리고 마침내, 그림자는 사람의 생기를 발견했다.
벨로로폰은 추악한 날개를 일제히 펼치며 하늘로 날아올았다.
밤하늘을 가득 뒤덮은 먹구름을 가르며 그가 도착한 곳은 바호크의 수도, 포른이었다.
포른은 바호크 재국 내에서 유일하게 인간이 거주하고 있는 지역이다 다른 지역은 이미 마족들에 의해 살육이 자행되어 인간의 씨가 말라 버렸다.
하지만 이런 포른 역시 마계의 영향을 받아 서서히 죽음의 도시로 변해 가고 있었다.
먹구름을 이끌고 포른의 상공으로 날아온 벨로로폰은 칙칙한 도시의 분위기에 실망을 느꼈다. 이래서야 그가 원하는 화려한 축제는 불가능에 가깝다.
그가 바란 것은, 막 잡아 올린 연어처럼 파닥파닥 반항하는 인간의 모습이다.
그는 곧장 황궁으로 향했다.
앞을 가로막는 근위기사들은 디바울에세서 흡수한 산성액으로 모조리 녹여 버리고, 거침없이 황궁 안으로 내딛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비싼 대리석 바닥이 모래로 변하고, 화려한 정원의 꽃들은 노랗게 변색되어 시들어 버렀다.
외궁의 홀에서 그는 제법 팔팔한 기사들을 만났다.
그를 막아선 십여 며의 기사들 중 알렌트라는 리믈의 근위기사단자은 them마스터에 근접한 실력다였다.
알렌트는 마적에게 령혼을 찬 대가로 지금의 힘을 얻은 자였다.
“감히 황성에서 무슨 짓이냐!”
차디찬 일갈과 함께 알렌트는 즉각 검은 검을 뽑아 휘둘렀다. 서늘한 검광이 바람을 갈랐다. 하지만 기껏 중급 마족에게 영혼을 팔아 얻은 힘으로는 마계의 지배자를 해칠 수 없었다.
“가서로운 놈.“
흉측하게 웃은 벨로로폰은 미간을 향해 날아드는 검을 가볍게 부숴 버리고, 알렌트를 발가락 끝에서부터 머리끝까지 빨래 짜듯 쭉 짜내 버렸다.
단지 손짓 하나에 기사단장이 말린 육포처럼 죽어 나가자 더는 그의 앞길을 막고자 나서는 이가 없었다.
벨로로폰은 곧장 내성으로 향했다.
“마, 마계의 지배자님께 겨, 경배를.....”
바호크의 황제, 바르만은 벨로로폰을 보자마자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올렸다. 베로로폰에게서 풍기는 강력한 기운에 그는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벌레 같은 놈이군.”
그가 가장 증오하는 유형이 바로 바흐만 황제처럼 비굴한 자다.
한때 바흐만 황제는 대룩을 떨친 무인이자 현왕이었지만, 마족과 계약을 맺은 이후 참담할 정도로 타락해 버렸다. 욕심이 부른 비참한 결과다.
그리고 유감스럽게도 벨로로폰은 무능하고 용렬한 자를 매우 싫어했다.
“쓸모없는 놈. 꺼져라.”
벨로로폰은 용서를 몰랐다. 마력으로 그를 들어 올려 칼로 다지듯 그의 육채를 갈기갈기 찢어발겼다.
“크아아아아!”
대륙을 달리던 위대한 왕이자, 제국을 마계에 바친 가장 어리석은 황제는 그렇게 허무하게 죽엇다. 살아서는 대륙 일통의 원대한 야망을 불태우던 그였으나, 죽어서는 시신조차 제대고 남기지 못했다. 참으로 비참한 말로라 아니할 수 없었다.
“자, 이제 무엇을 한다.?”
황제의 옥좌에 거만하게 걸터앉은 벨로로폰은 손가락을 까딱이며 비릿하게 웃었다. 인간은 상상도 못할 갖가지 흉측한 계략들이 그의 머리 속애 떠롤랐다.
잔혹한 여러 생각들 중에 그는 인간들을 상대로 써먹을 수 있는 적당한 계획를 끄집어냈다.
“유치한 전쟁놀이를 즐겨 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각성한 날을 기념하는 유희로 전쟁보다 더 좋은 유흥거리는 없을 것이다.
“오너라, 비천한 나의 종들아. 내 앞에 무릎 꿇고 명을 받들라.”
그는 마력을 한껏 발산하여 바호크 젼역에 흩어진 마족들을 불러 들였다.
놀란 쥐 떼처럼 우르르 달려온 마족들은 벨로로폰을 보고 공포에 떨며 고개를 조아렸다. 벨로로폰은 손으로 턱을 괸 방망한 자세로 마족들에게 전쟁르 지시했다.
ㅇ마족들은 감히 반항하지 못했다. 마왕의 명령을 이행하기 위해 엉덩이에 불붙은 염소마냥 급하게 뛰어다녔다 불과 며칠 만에 마족들은 바호크의 군사조직을 흡수하고, 전쟁준비를 마쳤다.
그러나 벨로로폰의 군대는 수도인 포른을 떠날 수 없었다.
출군을 앞둔 전날 밤. 야음을 틈타 천여 명의 키메라들이 수도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유난히 안개가 짙게 깔린 밤이다.
마계와 게이트로 연결된 후부터 이런 기분 나쁜 안개가 매일 저녁 바호크 전역을 뒤덫었다.
포른 지역의 주민들은 안개가 사방에 깔리기 전, 일찌감치 집으로 귀가하여 문을 걸어 잠근다.
안개가 낀 밤이면 마족들이 거리를 쏘아다니는 사람들을 납치하여 심장을 꺼내 먹는다는 흉흉한 소문 때문이다.
실제로 어두운 골목에서 심장이 사라진 시신이 발견되기고 했다. 바족들이 드나들게 된 이후로 바호크의 생활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비참해졌다.
인간들은 잔혹한 마족들에 의해 가축으로 전락해 버렸다. 그나마 포른 지역의 주민들은 나았다. 다른 지역은 이미 광포해진 마족들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희생되었기 때문이다.
매일 매일. 끔찍한 나날이 이어졌다.
떠날 사람들은 이미 일찌감치 바호크를 떠났다.
아직까지 마호크에 남아 있는 자들은 차마 고향을 버릴 수 없는 자들이거나, 아니면 떠날 수 없을 만큼 늙고 병든 자들뿐이었다. 남은 자들은 언제 죽을지 모르는 불안에 떨었다.
희망이 사라져 버린 도시.
그것은 도시를 무섭게 뒤덮은 안개만큼이나 암담했다.
헌데, 사람들은 통행이 완전히 끊긴 포른의 밤거리를 일단의 무리가 소리 없이 움직이고 있었다. 그들은 물을 헤치는 물고기처럼 능숙하고 은밀하게 농밀한 어둠을 헤치며 황제가 살고 있는 황성으로 접근했다.
닯빛마저 깊게 잠든 새벽, 마침내 연합군은 기습작전을 시행했다
‘타론’ 마을의 임시 주둔지를 떠난 키메라들은 바호크의 국경선 부근까지 이동했다.
야음을 틈탄 침투작전, 하지만 아직 난관은 넘치도록 많았다.
바호크의 국경 근처엔 중급 마족이 설치한 경계마법이 펼쳐져 있다. 아무리 키메라등릐 움직임이 빠르다 해도 경계마범을 속일 정도는 아니다.
이번 작전의 핵심은 은밀히 적의 황성에 침투하여 바흐만 황제를 사로잡는 것이다. 그러려면 국경선을 들키지 않고 넘어야만 했다.
“일단 대기.”
디스는 키메라들에게 대기를 명했다.
넘실넘실 흐르는 미쓰론 강가에 자리를 잡는다. 워낙에 은신에 능한 키메라들이아 무려 천 명이 움직이는데도 소음이 거의 일지 않았다.
“지휘부에서 약속한 지원이 대체 뭡니까?”
디스가 강가에 않아 휴식을 취하고 있는 필라이트에게 물었다.
직접 작전을 실행하는 그조차 어떤 지원이 오는지 모를 만큼 이번 작전은 보안에 최선을 다했다.
“허허허, 잠시 기다려 보면 알게 될 걸세.”
노마법사는 백태가 낀 하얀 눈으로 웃기만 했다.
강가에 자리를 잡은 얼마 후, 경게병의 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상공! 장체불명의 무리 출현!”
사사사삭!
누가 시키지도 않았건만 키메라들은 수풀 사이로 몸을 숨기며 만약의 사태에 대비했다. 눈부시게 빠른 대응이었다.
디스 역시 나뭇가지 위에 올라 긴장된 눈으로 상공을 바라보았다. 마족들 중에는 하늘을 날 수 있는 자들이 적지 않았다. 상공에서 떨어지는 그들의 마법에 연합군은 많은 피해를 보았다.
이번만큼은 다행스럽게도 마족이 아니었다.
“와이번. 적이 아니다.”
키메라들 중에서도 눈이 가장 좋은 트리치컬이 나직하게 소리쳤다.
“와이번?”
디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가 묻는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자 필라이트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자네의 생각이 맞을 듯싶군.”
놀랍게도 지휘부는 지원군으로 드래곤나이트를 파견한 것이다.
“설마 드래곤나이트가 지원을 나올 줄은 몰랐습니다.”
디스는 놀란 표정을 숨기지 않았다.
펄럭 펄럭!
웅장한 날갯짓 소음과 함께 백여 마리의 와이번이 강가 모래밭에 착륙했다.
“숲의 평온을 그대에게.”
가장 크고 무섭게 생긴 와이번에게 내린 아름다운 엘프가 디스와 필라이트를 향해 고개를 가볍게 숙였다.
“숲의 평온을 그대에게. 설마 이곳에서 커즈엘님을 뵙게 될 줄은 상상도 못했습니다.
디스의 말에 하이엘프 카즈엘은 입가에 작은 미소를 머금엇다.
“엘프들은 누구보다 전쟁의 종결을 바랍니다. 마족의 심장부를 치는 일에 저희들이 빠질 수는 없지요.”
카즈엘은 자연스런 얼굴로 그렇게 말했다.
“엘프들의 도움에 감사의 말씀 올립니다.
“별말씀을, 숲의 인도를 따른 것일 뿐입니다.”
가볍게 예의치례를 마친 디스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녀를 보았다.
마지만 하이엘프인 그녀는 최근 몇 년 사이 눈부시게 아름다워졌다. 성숙해졌다랄까. 고즈넉하면서도 쓸쓸한 분위기를 물씬 풍기는 그녀의 눈빛은 남자를 사로잡는 매력으로 넘쳤다.
‘그녀 또한 나와 같은 처지로구나.’
디스는 그녀의 눈동다에서 외로움을 느꼈다.
그가 레종 왕녀를 잃었듯. 그녀 또한 병규를 잃었다.
디스는 그리움에 대항하듯 분노의 키메라로 화하여 전장을 뛰어다녔고, 그녀 역시 전쟁의 여신 발키리처럼 드래곤나이트 부대를 이끌며 암흑의 하늘을 누볐다.
마계고 사라진 두 사람의 행방은 디스와 레종의 마음을 황페하게 만들엇다.
“허. 그나저나 드래곤나이트 부대의 위용은 참으로 대단하이.”
필라이트의 조용한 목소리에 디스의 상념이 깨졌다.
“그렇군요.”
디스는 동의하듯 고개를 끄덕였다.
드래곤나이트가 엘프들의 소속으로 변경된 지 이미 2년이 지났다. 원래 병규가 구상한 드래고나이트는 인간 기사가 와이번을 조종하고 동승한 엘프가 마법과 화설로 지원하는 형식이었다. 하지만 지금에 와서는 엘프2명이 조종과 보조를 함께하는 것으로 바뀌었다ㅣ.
인간과 엘프의 조합보다 엘프 2명의 효율이 더 높았기 때문이다.
엘프들은 모든 방면의 무술에 뛰어나고, 마법까지 수준 이상으로 갖추고 있어 인간 기사의 역할을 충분히 해냈다. 더구나 엘프들끼리는 마치 쌍둥이처럼 호흡니 척척 맞아 고속기동과 정교한 호흡이 요구되는 드래곤나이트로서의 역할에 최적합한 존재라 할 수 있었다.
더구나 지존의 조합은 와이번을 조종하는 기사가 불의의 사고로 죽거나 의식불명이 되면 와이번을 통제할 방법이 없어 전투력이 상실되느 데 반해, 엘프들만으로 구성하였을 때에는 설사 한 명이 당한다 해도 다른 한 명의 엘프가 와이번을 조종하여 되어 전투력을 어느 정도 보존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드래곤나이트가 엘프 전용의 부대가 된 이후로 전투력은 3배 이상으로 급등한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었다.
“여러분을 강 건너편으로 안내해 드리겠습니다.”
“기꺼이 따르겠습니다,”
원래 드래곤나이트는 2인이 1조가 되어 안장에 탑승했다. 그런데 오늘은 키메라 수송를 위해 키메라 위에 1명만이 올라탄 상태였다.
와이번은 기수를 제외하고 최대 2명까지의 키메라를 태울 수 있었다.
드래곤나이트 부대는 딱 백 마리의 와이번으로 구성되어 있었으므로 천 명의 키메라들을 옮기려면 무려 10번이나 강을 왔다 갔다 해야 한다.
수고는 물론이고, 시간이 너무 많이 소요되어 비효율적인 전술이다. 다행히 그런 수고를 감수할 필요는 없었다.
일차적으로 와이번을 타고 강을 건넌 키메라들이 바호크의 초소를 소리 없이 쓸어 내는 동안, 필라이트는 마족들이 설치한 경계마법을 해체하였다.
마족들의 경계마법은 외부로부터의 침입에는 예민했지만, 안에서부터의 조작에는 취약했다.
그래도 필라이트는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만전헤 만전을 기했다.
“휴. 끝났군.”
대마법사의 수고를 치하한 디스는 즉시 신호를 보내 강 건너의 키메라들을 불러들였다.
처벅처벅.
800명의 키메라들이 일제히 도강을 시도했다.
긴장된 순간이었다.
만약 일부라도 해제되지 않을 경계마법이 남아 있다면 지금까지의 모든 노력은 수포로 돌아갈 것이다.
다행스럽게도 키메라들이 강을 넘어오는 동안 경계마법은 발동하지 않았다.
“신꼐서 도왔군.”
마력의 움직임을 살피던 필라이트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공작님의 노고 덕분이십니다.”
“아닐세. 모두가 노력한 덕분이지."
이렇듯 드래곤나이트들과 필라이트의 활약으로 일차 난관은 무사히 넘길 수 있었다.
“아쉽게도 저희가 함께할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입니다.”
드래곤나이트 기사단장인 카즈엘이 아쉬운 작별을 고했다.
“어려운 발걸음 하셨습니다. 부디 숲의 안녕이 엘프들과 함께 하길.”
디스가 정중하게 숲의 인사를 건네자 카즈엘은 쓸쓸한 미소를 머금으며 손을 흔들었다.
“꼭 돌아오세요. 이젠 더 이상 제 주위의 사람들이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습니다.”
“엇.”
디스가 작게 놀랐다. 설마 엘프인 그녀가 이런 말을 할 줄이야. 그것도 엘프 중에 가장 고귀하다고 일컬어지는 하이엘프가.
엘프는 순응의 종족.
그래서 죽음조차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그러나 그녀는 죽음이 싫다고 말했다. 주위의 누군가가 사라지는 것을 보고 싶지 않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렇군요.“
디스는 그녀의 마음을 이해했다.
왜 그녀가 이렇게 약해졌는지 알 수 있었다. 전장에서는 피를 뿌리는 발키리로서 활보하는 그녀지만 마음만은 오히려 예전보다 더 어려젔다.
그를 잃었기 때문이다.
디스가 그녀를 잃었듯, 그녀 역시 마음의 일부를 잃어버린 것이다.
“돌아오겠습니다. 꼭.”
디스는 한쪽 무릎을 꿇고 그녀의 손등에 키스를 했다.
“기사는 약속을 지킵니다. 반드시.”
드래곤나이트들과 헤어진 키메라들은 곧장 수도로 향했다.
차가운 밤공기를 헤치며 산과 들을 넘어, 경계초소들을 소리 없이 제거하며 전진, 3시간 후 바호크 수도에 인근한 야산 중턱에 도착했다.
어둠이 내려앉은 바호크의 수도는 검은 적막만이 감돌고 있었다. 한 나라의 수도가 어찌 이렇게 고요할 수 있단 말인가.
과거의 화려함이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었다.
마치 암담한 바호크의 미래를 암시하는 것 같았다.
거리엔 사람들의 그림자도 보이지 않았다.
선봉은 마일드의 사신들이 맡았다.
은밀하게 적의 심장부까지 침투하는 능력은 모든 키메라들 중에서도 그들의 실력이 발군이었다.
먼저 사일런스가 복잡한 주파수의 음파를 쏟아 내어 침투지역 내의 모든 소리를 차단했다.
적막이 주위를 뒤덮었다.
만에 하나 적의 병사가 키메라들을 발견한다 하더라도 결코 동료들에게 알리지 못할 것이다. 그들의 경고는 사일런스의 음파에 완전히 차단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사일런스가 준비를 마치자마자 곧바로 크리티걸들이 행동을 개시
했다.
먼저 나이프가 성문을 지키고 있는 병사들을 단검으로 조용히 암살했다. 그 사이 바인딩이 성벽을 타고 올라가 성루의 궁수들을 목졸라 죽였다.
성문 주변이 정리되자, 카리오스가 깔끔한 검술로 도개교의 사슬을 잘라냈다.
쿠쿠쿵!
육중한 굉음과 함께 성문이 내려왔다. 성문이 열리자마자 낮은 휘파람 소리가 울려 퍼졌다.
삐이이이이익!
“돌진!”
휘파람 소리를 키메라단장들은 일제히 휘하 부대원들을 이끌고 성으로 돌진햇다. 천여 명의 인원이 한꺼번에 움직이는데도 시끄러운 고함이나 소음은 일체 없었다.
성 외곽의 경비를 담당하던 경비병들은 ㅣ메라의 기습에 소리 소문 없이 제거되었다.
성문을 통과한 키메라들은 파죽지세로 외성을 돌파했다.
필라이트를 위시한 마법들이 함정마법들을 제거하고, 사신들이 은신한 기사들을 제거했다.
더러 마족들에게 영혼을 팔고 힘을 얻은 병사들이 키메라에게 대항했지만, 그야말로 작은 저항에 불과했다.
순식간에 키메라들은 외성의 성문을 넘을 수 있었다.
하지만 키메라들의 거침없는 행보도 거기까지가 한계였다.
황성의 내궁 안뜰엔 몇 만에 이르는 대병력이 대기하고 있었다. 그들은 키메라들의 갑작스런 침입에 놀라고 당황한 듯, 어수선한 모습을 보였다.
디스는 마치 기다리고 있는 듯한 바호크 병사들의 모양새를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함정인가?”
허술한 성문의 경비. 그리고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대기하고 있는 적의 대군.
생각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은 오직 하나뿐이다.
사전에 정보가 적에게 새어 나간 것이다.
‘대체 어느 곳에서?’
디스는 변절자가 누구인지 골몰했다.
마탑에서 정보가 샌 것일까? 아님 정보조직? 그도 아니면 지휘부의 누군가가 변절한 것일 수도 있다.
“대체 어디서 기어들어 온 쥐새끼들인가!”
어수선한 바호크 병사들을 헤치고, 검은 갑옷을 입은 건장한 흑기사가 흑마에 올라탄 채 앞으로 나섰다.
바호크가 자랑하는 케르베로스 기사단의 단장, 파먼이었다.
그가 새카맣게 그을려진 검은 투구 밖으로 검붉은 안광을 빛내며 길게 호통을 쳤다.
“어디서 온 쥐새끼들이냐고 물었다!”
키메라들이 바호크의 황성을 급습하던 시기, 바호크의 병사들도 황제의 갑작스런 명으로 황성에 모여들었다.
그들은 황제가 이미 벨로로폰에게 살해된 것도 몰랐다. 다만 마왕에게 정신을 지배당한 흑마법사의 통신만을 믿고, 병사들을 끌어모아 황성으로 온 것이다.
그렇게 출정준비를 마치고, 황제의 명령만을 기다리고 있는 찰나에 키메라들이 난입해 들어온 것이다.
갑작스런 상황. 그러나 바호크의 병사들은 긴장하기는 했으되 두려워하지는 않았다.
워낙에 병력의 차가 컸기 때문이다.
“썩은 냄새가 진동하는군.”
거친 기운을 뿌리며 파먼은 불쾌한 음성으로 그르렁거렸다. 그는 야음을 틈타 황성에 잠입한 이 불청객들의 정체를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대들이 연합군의 키메라들인가!”
우렁찬 그의 외침에 키메라들 중 그 누구도 대답하지 않았다. 파먼은 침묵을 긍정으로 인식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껄걸 호쾌하게 웃었다.
“잘됐군. 안 그래도 그대들과 칼을 맞부딪쳐 보려던 참이다. 이로써 찾아내는 수도를 던 셈이 되었군.”
스릉!
파먼이 말 안장에서 3미르가 넘는 무쇠 창을 꺼내 들었다. 그가 무기를 꺼내 들자 강렬한 투기와 함께 검은 갑옷 사이사이로 불길한기운이 뭉클뭉클 피어났다.
바호크의 케르베르스 기사단장이 한껏 살의를 고취시키고 있을 때, 키메라들을 이끄는 디스는 오히려 머리를 차갑게 식히는 중이었다.
비록 상황이 어려워지긴 했지만 그는 체념하지 않았다. 어차피 이런 상황 역시 그가 설정한 ㅁ녗 가지 가능성 중의 하나다.
문제는 예상보다 키메라들의 희생이 클 것이라는 데 있었다.
상황이 비관적일수록 결정은 빠르게 하는 것이 좋다. 그는 즉시 키메라 무리를 둘로 나눴다.
자신을 포함한 ‘학살자’들은 황제가 있는 내궁으로 향하고, 나머지 900명의 키메라가 이곳에 남아 바호크의 병사들을 막는다.
“난 여기 남겠네.”
크리티걸이 남기를 원했다.
그는 ‘학살자’들 중에서도 가장 강한 십 인에 속하며, 과거 마일드의 일곱 사신으로 암약하던 어세신 무리의 리더였다.
디스는 짧게 고개를 끄덕였다.
크리티걸 같은 자가 나머지 무리들을 이끈다면 안심이다. 그만큼 그는 크리티걸의 판단과 실력을 믿었다.
“최대한 시간을 끌어 주십시오.”
“걱정 말게.”
짧은 대화를 주고받은 디스는 ‘학살자’들을 이끌고 내궁을 향해 달렸다.
“누가 곱게 보내 줄 것 같으냐!”
파먼이 창을 거칠게 휘두르며 외쳤다.
휭휭~ 돌아가는 창 그림자가 더없이 위협적이었다.
“놈들을 쳐죽여라”
“우와아아아!”
“죽여라!”
파먼의 외침에 따라 비로소 대강의 상황을 파악한 병사들이 함성을 지르며 달려 나왔다.
“허허. 유감스럽게도 그렇게는 못 해드리겠네.”
크리티걸이 키메라들을 이끌고 바호크 병사들을 맞았다.
바호크의 병사들과 900명의 키메라 부대가 정면에서 충돌했다.
촤촤창!
쿠쿵!
“아악!”
“사, 살려 줘.”
병장기 부딪하는 소음과 함께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밤하늘을 갈랐다.
“지금일세. 어서 가게.”
앞을 가로막는 병사의 머리를 두 동강 내며 크리티걸이 재촉했다.
“무사하시길.”
디스는 그를 향ㅎ ㅐ짧게 경례하고는 ‘학살자’들과 함께 격전 중인 바호크 병사들의 머리 위를 넘어갔다. 나머지 키메라들은 생사가 오가는 치열하게 전투 중에도 ‘학살자’들을 위해 공간을 확보하는 데 전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내궁으로 진입하기 위해서 또 한 번의 장벽을 넘어야 했다.
“여기서부터는 단 한 걸음도 앞으로 나가지 못한다.”
파먼이 쿵 하고 창을 찍으며 웅장한 기세로 외쳤다. 그의 뒤롤 음산한 기운을 풀풀 날리는 케르베로스 기사단이 병품처럼 늘어섰다.
케르베로스 기사단의 수는 무려 500명이 넘었다.
“우리 바호크의 군대가 우습게 보이는가! 이 안으로 들어가려거든 우리의 시체를 밟아야 할 것이다.”
창으로 연신 바닥을 찍으며 외쳐 대는 파먼의 기세가 짐짓 비장하였다. 그의 힘이 얼마나 셌던지 창이 단단한 대리석 바닥을 뚫고 들어갈 지경이었다.
‘기마대라.’
디스는 인상을 찌푸렸다.
말을 탄 기사들이 높은 곳에서 찔러 대는 창 공격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다. 게다가 케르베로스 기사단은 일반의 기사단과는 확연히 다르다.
케르베로스 기사단은 과거 바호크가 자랑하는 3대 기사단 중 하나였다. 하지만 지금은 마족들에게 영혼을 판 타락한 기사들의 단체로 변질되었다.
비록 기사단의 명예는 잃어버렸지만, 그 대신 영혼을 대가로 힘을 얻었다. 케르베로스 기사단의 위용은 결코 키메라들에게 뒤지지 않았다.
디스는 이를 악물었다.
“하는 수 없지. 전력을 다해 뚫어라!”
케르베로스 기사단이 앞을 가로막은 이상 희생은 불가피하다. 설흑, 대부분의 ‘학살자’들을 잃게 되는 한이 있더라도 바호크의 황제를 잡을 수 있다면 그들의 희생도 헛되지 않을 것이다.
이번 작전의 생명은 신속함이다. 적의 기사단에게 발목을 잡혀 있는 사이 황제는 안전한 곳으로 대피할 것이다. 그전에 어떻게든 바흐만 황제를 잡아야 한다.
디스가 케르베로스 기사단과 전면적을 각오한 바로 그 순간, 아무도 생각지 못한 자원이 떨어졌다.
“뜨거운 열정의 불꽃이여. 타락한 어둠을 불사르고, 저열한 암흑을 거둘지니....... 대지를 불사르는 화염의 폭풍, 파이어 스톰(Fire Storm)!"
화르르르르륵!
창연한 외침과 함꼐 기사단이 밀집한 곳에 돌연 화염 기둥이 치솟았다. 화염기둥은 폭풍처럼 치솟아 오르며 바호크가 자랑하는 흑기사들의 머리 ㅜ이로 시뻘건 불덩이를 우박처럼 떨어트렸다.
“크윽!”
“부, 불이! 내 몸에 불이 붇었다!”
당장 기사들은 동요하며 진형을 흐트러트렸다.
“진정해!자리를 이탈하지 마라!”
파먼이 고성을 지르며 기사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한번 흩어진 진형을 다시 가다듬기는 어려웠다.
고서클 화염마법으로 일순간 혼란이 일어났다.
‘학살자’들로서는 다시 없을 기회였다.
“고속 전진!”
짧게 외친 디스는 바람처럼 몸을 날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하얀 수염을 펄럭이는 노마법사가 지팡이를 꽂은 채 그들을 환송했다.
‘감사합니다, 필라이트님.’
만약 필라이트가 도와주지 않았다면 큰 피해를 보았을 것이다.
“흠.”
파먼의 어두운 ㄴ투구 안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쿵 하고 창끝으로 바닥을 찍으며 분을 삭였다. 그러나 파먼은 ‘학살자’들의 뒤를 쫒지 않았다.
대신 그는 마법으로 그들을 교란한 마법사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제 보니 그대로군.”
파먼은 필라이트를 잘 알고 있었다.
“하아.”
필라이트는 한숨부터 쉬었다.
물론 그 역시 파먼에 대해 잘 알고 있었다.
“어쩌다 자네 같은 사람이 다크나이트가 되었는가.”
“.......”
파먼은 침묵했다.
갑옷 사이로 흘러나오는 퀴퀴한 입김이 그의 착잡한 마음을 짐작케 했다.
파먼은 황제가 마족과 계약을 맺은 당시, 토드란 외무대신과 함께 처형되었다. 마족과의 계약을 반대하며 황제에게 저항했다는 이유였다.
실제로는 두 사랑은 황제의 면전에서 목에 핏대까지 올리며 강력하게 마계와의 연합을 반대했다. 처음엔 그들을 설득해 보려 했던 황제였지만, 결국 마족에 의해 심성이 타락하면서 충신이 그들을 가차없이 처형하고 말았다.
그와 토드란의 목은 황성에 일 년 가까이 효수되었다. 황명을 거역한 관료의 말로를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바호크 왕실의 분위기가 변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헌데, 그렇게 죽은 파먼이 지금 멀쩡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타락한 죽음의 기사. 다크나이트.”
필라이트가 신음과 합ㅁ께 중얼거렸다.
다크나이트.
지옥에서 돌아온 타락한 암흑의 기사. 오직 죽음만을 갈구하는 저주받은 살인귀.
파먼은 다크나이트로 부활한 것이다.
“바흐만 황제의 타락이 도를 넘었구나. 죽은 사람조차 가만 내버려두지 않다니. 통탄한 일이도다.”
필라이트는 두 눈썹을 허공으로 치켜세우며 일갈했다. 명예롭게 죽은 기사를 다크나이트로 부활시키는 것은 흑마법사들조차 꺼리는 사악한 행동이다.
그런데 한때 제국으로 명성을 드높였던 바호크 제국이 금단의 마법으로 죽은 기사들을 되살렸다. 그것도 명예를 위해 죽은 파먼과 같은 기사를 말이다.
대마법사로 존경받는 필라이트는 결코 다크나이트와 같은 사악한 흑마법을 용인할 수 없었다. 다크나이트는 죽은 자를 모독하는 행위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내 그대를 흟으로 돌려놓겠네.”
“기꺼이! 허나 당신의 능력으로 가능할까?”
부우우웅!
웅헌한 외침과 함께 파먼이 돌연 창을 던졌다. 창은 싸늘한 비명을 토하며 필라이트의 미간을 노렸다.
필라이트는 당황하지 않고, 미리 캐스팅해둔 실드를 펼첬다.
카카캉!
실드와 파먼의 창이 부딪히며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창의 위력은 참으로 대단하여, 세 겹으로 두른 실드를 모두 박살재고서야 간신히 바닥에 떨어졌다.
필라이트는 모골이 송연해졌다.
다크나이트의 능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세 겹이나 되는 실드를 박살낼 줄이야. 혹시나 하는 마음에 실드를 중첩으로 시전하지 않았다면 그는 파먼의 창에 꼬치 꿰이듯 죽고 말았을 것이다.
“하하. 역시 명성이 자자한 대마법사!”
호쾌한 웃음과 함께 어느새 달려온 파면이 검을 수명으로 휘둘렀다.
검신에 맺힌 검은 오오라가 불꽃처럼 허공을 내달렸다.
“헛.”
필라이트는 비명을 삼켰다.
워낙에 기습적인 일격이라 피할 구석이 없었다. 심지어 블링크를 시전할 여유도 없었다.
필라이트의 얼굴에 암담함이 떠올랐다.
“늙은이를 너무 괄시하는군.”
허허로운 웃음소리와 함께 볼품없는 지팡이 하나가 파먼의 검 앞에 쓱 하고 나타났다.
크리티걸이었다. 그가 필라이트의 위기에 지팡이를 휘두르며 나선 것이다.
파먼은 가소롭다는 듯 호통을 쳤다.
“고작 나무 막대기 하나로 내 검을 막을 수 이을 것 같으냐!”
“글세. 과연 그럴까?”
지팡이를 휘두른 크리티걸은 의뭉스럽게 웃었다.
파먼의 검과 크리티걸의 지팡이가 마주치려는 순간, 크리티걸의 지팡이가 나뭇가지를 타고 오르는 뱀처럼 교모하게 움직였다.
“꼮 강하다고 이기는 건 아니지.”
크리티걸이 지팡이를 빙글빙글 돌리자 파먼의 날카록운 검은 금세 균형을 잃고 허둥댔다.
“무, 무엇!”
파먼은 당황했다.
그의 검이 돌연 크리티걸의 지팡이에 빨려 들어가듯이 달라붙었으니 당황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으리라. 파먼은 검을 빼려고 안간 힘을 썻지만 그때마다 크리티걸의 지팡이는 민활하게 움직이며 그의 검을 제어했다.
파먼은 크리티걸의 검술이 자신보다 위라는 걸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지팡이에 달라붙은 검을 포기하고 대신 땅바닥을 구르고 있는 창을 발로 차올리며 맹렬하게 찔렀다.
파앙!
격한 파공음이 허공을 휘저었다.
“허허허. 힘이 넘치는 사람일세.”
가슴을 찔러 오는 창을 슬쩍 피하며 크리티걸은 오히려 역공을 가했다. 빈틈을 귀신같이 찾아간 지팡이가 손과 팔을 타고 어깨를 짚었다.
파앙!
지팡이 끝이 갑옷을 살짝 짚었다 싶은 순간 강철로 만든 파먼의 어깨 견갑이 날아갔다. 놀랍게도 나무 지팡이가 강철 갑옷을 박살낸 것이다.
“흐음.”
파먼은 두어 걸음 거리를 두며 짧은 숨을 쉬었다.
굳은 얼굴로 어깨를 바라보니 부서진 갑옷 아래 검은 피구가 일그러져 있었다.
고작 나무지팡이에 강철로 만든 갑옷이 박살나다니. 직접 눈으로 보고도 믿기 힘든 일이다.
지팡이의 신묘한 위력도 위력이지만, 졍묘한 움직임은 그보다 더 놀라오???다.
파먼은 지금까지 적지 않은 무술들을 경험했다. 하지만 이런 식으로 ㄹ지팡이를 쓰는 사람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한편, 크리티걸 역시 파먼을 보며 표정을 굳혔다.
“확실히 인간은 아니로군.”
그의 지팡이는 견갑을 박살내며 파먼의 어깨에까지 구멍을 만들었다. 정확히 어깨의 신경을 끊어 놓은 일격이었다.
크리티걸은 최초의 키메라로서, 드래곤인 마그네트가 직접 개량을 한 터라 다른 키메라들이 가지지 못한 특수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그의 두 눈은 마치 물속을 꿰뚫어보는 매처럼 인체의 내부를 샅샅이 꿰뚫어볼수 있다. 그 덕분에 그의 일격은 언제나 상대에겡 치명적일 수밖에 없다.
급소만을 노리기 때문이다.
파먼에게 가한 공격 역시 치명적이었다.
정확히 경추에서 팔로 내려가는 신경을 잘라 냈다.
그러나 파먼은 멀쩡하게 팔을 움직였다. 통증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심지어 구멍이 훤하게 뚫린 어깨에서 피조차 새어 나오지 않았다. 그저 골므 같은 검은 액체가 조금 흘러나왔을 뿐이다.
다크나이트.
지옥에서 돌아온 기사.
“허. 색다른 상대로군.”
크리티걸의 노안에서 살기가 일렁였다.
그는 어세신 출신이다.
자연 적을 바라보는 시선 또한 일반인과 다를 수밖에 없었다.
노인의 눈에 비친 다크나이트는 공포의 대상이라기보다는 특이한 ㄴ표적에 불과할 뿐이다. 지금까지 상대하지 못한 색다른 상대.
“과연 내 기술이 자네에게 얼마나 먹힐지 궁금하군.”
“흥!”
파먼은 창으로 땅바닥을 쿵 찍으며 콧바람 소리를 냈다.
호리호리한 노인에게 밀렸다는 사실이 분하기만 하다. 하지만 그것보다 더 그를 흥분시키는 것은, 노인이 구사하는 색다른 검술이었다.
강한 상대와 싸우는 것은 모든 기사가 꿈에서도 바라는 일이 아닌가.
파먼은 다크나이트가 되었음에도 아직 호승심을 버리지 못했다.
“훌륭한 기술. 좋은 승부가 되겠지.”
탁한 음성과 함께 파먼의 신형이 바람을 갈랐다.
“베놈 랜스(Venom lance)!"
먹이를 본 독사처럼 쭉 뻗어 낸 창끝에서 검은 오오라가 진물처럼 뚝뚝 떨어졌다.
“허허. 꽤나 성질이 급한 사람이군.”
크리티걸은 털털하게 웃으며 아슬아슬하게 파먼의 공격을 피해냈다.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의 공격을 효율적으로 흘려 낸 것이다. 그러나 창이 가진 힘은 그의 생각 이상으로 강했다.
쩍!
창이 스쳐 지나간 얼굴의 ???부가 칼에 베인 듯 갈라졌다. 크리티걸은 비틀거리며 몇 걸음 물러섰다.
“이건.......”
손으로 만져본 얼굴의 상처에서 끈적끈적하고 악취를 풍기는 검은 용액이 만져졌다.
“독이군.”
크리티걸의 얼굴이 주름으로 일그러졌다.
단훈시 냄새를 맡는 것만으로도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력한 독이 파먼의 창에 묻어 있었다.
“네놈. 꽤 괜찮은 기사인 줄 알았다니 이렇게 악독할 줄이야. 하긴, 그러니 다크나이트가 되었겠지.”
크리티걸이 노기를 삼키며 중얼거렸다.
파먼은 우두커니 선 채 그의 말을 들었다. 그리곤 시선을 숙이며 괴로운 음성으로 말했다.
“독은....... 내가 원한 능력이 아니다.”
“.......” 무슨 말인지 모르겠군. 설마 어쩔 수 없다는 변명이냐?“
파먼은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다크나이트로 부활했을 때, 신성한 기사의 오오라는 이미 독으로 변질되어 있었다.”
암흑의 힘으로 부활한 ㅁ파먼은 원하지 않은 능력을 가지게 된 것이다.
독.
그의 몸은 한 덩이의 악취를 풍기는 독으롤 이루어져 있었다. 힘을 끌어올리면 찬란한 오오라 대신 사악한 독연이 풍겨져 나왔다.
타락한 육체.
나락으로 떨어진 명예.
수십 년 끝에 이룩한 모든 경지가 한순간에 독으로 변질되었다.
명예를 숭상하는 파먼으로서는 충격적인 변화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후회하지는 않느다. 독이 나의 힘이라면 이 또한 나의 운명. 기사로서의 내 능력 한계까지 최선을 다하겠다. 그것이 기사의 명예요, 자부심.”
킁!
파먼이 창을 찍으며 묵직한 음성을 뇌까란다.
창을 들고 선 모습이 마치 거대한 산악을 품은 듯 웅장했다.
“허허. 그 고귀한 정신만은 높이 살 만하군.”
크리티걸은 지팡이 위에 두 손을 올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나 즐거운 탄식을 흘리면서도 속으로는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마그네트의 실험으로 예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화된 크리티걸이지만, 파먼의 광폭한 힘은 그마저도 무시할 정도로 거칠었다.
“좋아. 다시 한번 겨뤄 보세.”
크리티걸이 지팡이를 짚으며 천천히 앞으로 나섰다.
파먼은 천천히 고개를 끄덕이며 수하가 준비해 온 말 위에 올랐다.
“최선을 다하겠다.”
“허허. 그러는 편이 서로에게 좋겠지.”
비극적인 운명으로 데스나이트가 된 파먼과 운명의 장난으로 ㄹ키메라가 된 크리티걸. 그 두사람의 치열한 다툼이 지금 막 시작되었다.
크리티걸과 파먼이 막 치열한 격돌을 시작한 무렵. 대마법사인ㄴ 필라이트는 키메라들과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바호크 병사들의 머리 위로 온갖 마법을 쏟아 내고 있었다.
대륙 제일의 대마법사라고 호칭이 아깝지 않을 정도로, 그의 마법은 지독하게 화려하고 섬뜩할 만큼 강렬했다.
“신의 진노, 체인 라이트닝!”
“일어나라. 참혹한 노을이여. 파이어 월!”
“피의 칼날, 폭풍의 저주. 윈드 블레이드!”
불과 번개와 폭풍이 한데 뒤섞이며 폭주했다.
“아아악!”
“크악! 눈, 눈이!!”
“키에엑!”
몸이 터져 나가고, 머리가 쪼개지고 폭풍에 말려들어간 팔다리가 믹서기에 갈린 것처럼 잘게 다져졌다.
좁은 장소에서 많은 병사들이 밀집해 있던 터라 자연 피해가 클 수밖에 없었다.
“마법사다. 마법사를 제거하라!”
병사들의 피해가 커지자 파먼과 크리티걸의 대결ㅇ ㅔ넋을 놓고 있던 케르베로스 기사단이 뒤늦게 움직였다.
“돌격! 마법사를 죽여라!”
두두두두두!
흑기사들의 호령에 뼈만 앙상하게 남은 말들이 지면을 박찼다. 힘차게 말을 달리는 그들의 공격 진형은 흡사 굶주린 승냥이 떼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얌전히 대마법사를 잃을 키메라들이 아니었다.
케르베로스 기사단이 말을 달리자마자 병사들과 치열하게 대치하고 있던 키메라 몇이 필라이트의 앞을 가로막았다.
“멈춰라.”
“너희들은 우리가 상대해 주마.”
허겁지겁 달려온 키메라들. 그러나 케르베로스 기사단은 이미 속력이 붙을 대로 붙은 상황이었다. 별다른 수가 없었던 키메라들은 몸을 웅크린 채 방패처럼 감쌌다.
“크흐흐흐. 같이 꼬치를 꿰어 주마!”
흑기사들은 침을 게게 흘리며 더더욱 말을 채찍절했다. 키메라들은 강인한 육체를 믿고 흑기사들의 광포한 창끝을 맴몸으로 막아섰다.
콰콰쾅!
격돌과 함께 흙과 먼지가 치솟았다. 창과 키메라의 맨몸뚱이가 부딪혔는데, 몰랍게도 쇠끼리 마주친 듯한 치찰음이 울렸다.
“크윽!”
필라이트를 둘러싼 키메라 중 두 명이 신음을 흘리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땅바닥으로 쿵 하고 그들은 사지를 벌벌 떨더니 그대로 죽어 버렸다.
“워워.”
“무슨 이런 놈들이.”
키메라들이 자신들의 돌격을 막아 냈다는 사실에 기사들은 경악를 금치 못했다. 전력을 다한 돌격에 고작 키메라 두 명만을 쓰러트렸을 뿐이라니. 게다가 키메라들은 방패도 없는 맴몸이 아니었던가.
키메라들 역시 흑기사들은 새삼스런 눈으로 보았다.
키메라들은 혼자서도 소드익스퍼트 중급 기사 서너 명을 너끈히 상대할 실력이 있었다. 하지만 케르베로스 기사단은 평범한 기사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강했다.
과연 힘을 위해 명예를 버린 가사들이라 할 만했다.
다크나이트들이 타고 있는 말 또한 평범한 말들과는 달랐다.
그들이 탄 말은 죽은 지 오래된 듯, 썩은 내가 진동했다. 심지어 찢겨진 가죽 사이로 허연 뼈와 검게 그을린 내장이 그대로 보이는 말도 있었다.
“퉤! 타락한 기사들. 네놈들은 마족보다 더 더렵다.”
키메라들은 바닥에 침을 뱉으며 다트나이트들을 욕했다.
“흥. 괴물. 너희 eur시 인간은 아니지 않느냐.”
다크나이트들은 경멸을 담아 키메라들을 보았다.
다크나이트 대 키메라.
바호크의 황성에서 서로 제대로 된 상대를 만난 셈이다.
“이놈들!”
“싸구리 말발굽으로 짓이겨 주마.”
흑기사들과 키메라들이 분노를 한껏 담아 격돌했다.
거친 말발굽 소리와 함께 끔직한 비명이 줄을 이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들의 대결은 의외의 난입자로 인해 난전의 양상를 띠게 되었다.
“멸망의 화염이여.”
키메라들의 희생으로 목숨을 부지할 수 있었던 필라이트는 그들의 은혜를 치명적인 화염의 마법으로 보답했다.
“분노의 입김으로 일아날지어다!”
콰아아아아!
땅이 갈라지며 불길이 도마뱀의 혓바닥처럼 요사스럽게 솟구쳤다. 키메라들을 헤집고 다니던 흑기사들은 발밑에서 치솟아 오르는 화염에 속수무책으로 당학 수밖에 없었다.
“크아아아!”
“불이. 내 몸에 불이!”
대마법사라는 명성에 걸맞게 짧은 캐스팅에도 불구하고 필라이트의 마법은 상당한 범위를 자랑했다.
히히히히힝!
“제길. 진정해라.”
“틀렸어. 말들이 너무 흥분했다.”
화연마법에 흑기사들이 타고 있던 말들이 난동을 부렸다. 아무리 이미 죽은 몸이라 할지아도, 불을 무서워하는 본성만은 어쩔 수 없었다.
말들의 난동으로 30여 명 가량의 흑기사가 평정을 잃고 중구난방으로 뛰어다녔다.
이처럼 혼잡한 전투양상레서 필라이트의 마법은절대적인 위력을 발휘했다. 노구의 대마법사는 불과 벼락을 차례로 불러 흑기사들과 바홐크 병사들을 쓸어버렸다.
크리티컬 역시동에 번쩍 서에 번쩍하며 파면과 수십 명의 흑시사들을 견제했다.
그의 지팡이 쓰는 법은 참으로 독특했다.
대충 휘두른 것처럼 보이는 일격에 무쇠 갑옷이 계란껍질처람 퍽퍽 부서졌다. 그렇다고 지팡이가 특수한 금속으로 제작된 것도 아니다. 어디서 쉽게 볼 수 있는 평범한 나무였다.
대강 가지를 쳐내고, 물과 옻칠을 한 정도가 손질의 전부다.
그런 엉성한 지팡이로 크리티컬은 강철 갑옷을 과자처럼 쉽게 부수었다. 만약 그의 상대가 저주 받는 흑기사들이 아니었다면, 그의 나무지팡이에 족히 수십 명은 죽었을 것이다.
필라이트와 크리치컬의 눈부신 활약으로 케르베로스 기사단이 기세가 주춤한 사이, 나머지 키메라들은 바호트의 보병들을 빠르게 제압해 나갔다.
애초부터 일반 보병들은 키메라의 상대가 되지 못했다. 그들 간의 전력차는 상상 이상으로 컸다.
전자에 가장 적합한 형태로 개량에 개량을 거듭한 키메라들은 그야말로 살아 있는 병기와 같았다.
키메라들의 피부는 칼도 들어가지 않을 정도로 단단했고, 힘은 오우거에 버금갔으며, 설사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하는 신경차단 능력을 가졌다.
바호크의 병사들은 악을 쓰며 칼을 긋고, 화살을 날려 보았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칼도 들어가지 않는 피부, 오우거에 버금가는괴력. 설사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통증을 느끼지 못한다.
전투에 최적화된 병기인 셈이다.
화살이 빗발치듯 떨어지고, 도검이 불꽃을 튀긴다. 비명소리가 파도소리처럼 줄기차게 들려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숫자에서 불리한 키메라들이 오히려 승기를 가져갔다. 팽팽하게 유지되던 전세가 한순간 둑이 터지듯 우르르 무너져 내렸다.
키메라들은 양떼 우리에 뚸어든 늑대처럼 거침이 없었다. 키메라들이 난동을 부리면 언제나 바호크의 보병들이 꽁지가 빠져라 달아나기 일쑤였다.
그렇게 승기를 잡은 키메라들은 서서히 파먼이 지휘하는 케르베로스 기사단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크으으!”
파먼은 창대에 몸을 의지한 패 신른을 흘렸다.
치열한 젹전을 말해 주듯 그의 갑옷엔 십여 개의 큼직한 상흔이 남아 있었다.
하나 같이 치명적인 급소에 생긴 흔적이었다.
‘패배로군.’
파먼은 고개를 떨구었다.
크리티컬이라는 키메라는 강했다.
그의 생각보다 훨씬.
괴로운 것은 그가 다크나이트의 능력까지 소비하며 최선을 다한 반면, 크리티컬은 키메라의 능력을 전혀 사용하지 않고 순수한 실력망으로 파먼을 상대했다는 것이다.
만약 크리티컬이 전력을 가울였다면 아무리 불사의 몸인 그라 해도 오래전에 쓰러졌을 것이다.
“후후. 이제야 무릎을 꿇다니. 대단하이.”
크리티컬은 여전히 지팡이에 두 팔을 얹은 채 허허롭게 웃었다. 격렬한 싸움이었음에도 그는 여전히 안정된 모습을 유지했다.
자잘한 생채기들과 숨이 좀 거칠어진 정도가 좀 전과 달라진 것의 전부였다.
파먼을 비롯한 십여 명의 다크나이트들을 한꺼번에 상대했으니 지칠 만도 하다. 오히려 큰 부상을 입지 않은 것이 이상할 정도다.
‘그 정도로 강하다는 것이겠지.’
흑기사들을 상대로 크리티컬의 활약은 정녕 눈부셨다.
느리고 여유로운 움직임으로 거센 기사들을 제압하고, 폭풍처럼 몰아치는 기사단의 돌진을 무너트렸으며, 거침없이 몰아치는 파먼의 공격을 시냇물처럼 흘려 냈다.
크리티컬 혼다서 케르베로스 가사단 전체의 발목을 묶어 놓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하지만 이대로 무너질 수는 없지.”
파먼은 녹슨 쇳소리를 내며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휑하게 뚫린 검은 투구에서 다시 한번 투지의 불길이 활활 타올랐다.
목숨이 붙어 있는 한 이 자리를 지킨다.
그것이 지옥에서 돌아온 흑기사가 자신의 소명을 다하는 방법이었다.
파먼은 투레질을 하는 애마의 갈기를 쓰다듬으며 안장 위에 올랐다. 막 그가 지면에 박힌 창을 끄집어냈을 때다.
“죽어라!”
기회를 엿보던 키메라 중의 한 마리가 빈틈을 노리고 파먼에게 달려들었다.
키메라의 공격은 송곳처럼 정확하고 날카로웠다. 초승달처럼 휘어진 곡도가 파먼이 탄 흑마의 목을 정확하게 갈랐다. 말머리가 잘려 나가자 파먼은 가우뚱 중심을 잃었다.
“타락한 기사단장이 떨어졌다.!”
“놈의 목을 쳐라!”
악명 높은 케르베로스 기사단의 단장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주위를 둥글게 포위하고 있던 키메라들이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이놈들!”
창오한 외침과 힘께 파먼이 급히 몸을 바로하고 창을 휘둘렀다. 풍차처럼 돌아가는 창 끝에 키메라들의 단단한 몸뚱이가 썩은 무처럼 잘려 나갔다.
써거거걱!
순식간에 키메라 둘이 죽고, 네 명이 사지가 잘려 전투불능 상태가 되었다.
“으하하하하!”
살의에 고취된 파먼이 크게 웃었다. 웃음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허허. 도무지 미학이라곤 없는 사람이군. 이토록 무식하게 일을 처리하다니.”
토막 난 키메라들의 시신을 내려다보며 노안의 크리티컬은 한숨을 쉬었다.
파먼의 비장한 자세는 마음에 꼭 든다. 죽어서까니 나라를 위해 자신의 일을 꿋꿋이 해 내는 기사의 모습. 기사도가 무엇인지 제대로 보여 주는 인물이 아닌가.
하지만 아무리 멋져 보이는 사내라도 전장에서 만난 적이다. 더 이상 키메라들을 잃을 수는 없는 일. 크리티컬은 지팡이를 짚으며 앞으로 나섰다.
“아무래도 자네는 내가 직접 처리해야겠어.”
키메라를 지휘하는 단자의 지위로 크리티컬이 파먼에게 도전했다. 지금까지 크리티컬은 여러 번에 걸쳐 농락하듯 파먼을 몰아세웠다. 하지만 그중 치명상을 하나도 없었다 지옥에서 돌아온 타락한 기사에게 인간과 같은 약점은 없는 것이다.
파먼은 순수히 응했다.
“좋소. 그대라면 내 최후를 맡겨도 충분할 터. 그러나 결쿠 쉽지 않을 것이오.”
탁한 음성으로 대답한 파먼은 바닥에 뒹구는 검을 주워 창과 함께 각각 양손에 나눠 들었다. 창날과 검신 위로 먹물과 같은 검은 기운이 뭉클뭉클 일어났다.
“오라!”
파먼이 불렀다.
크리티컬은 대답 대신 낯빛을 굳히며 천천히 그에게 다가갔다. 지팡이로 땅을 짚을 때마다 따각따각 소리가 났는데, 그 박자가 놀랍도록 일정했다.
파먼은 양손으로 칼과 창을 나눠 든 채 신중한 자세로 그의 공격을 기다렸다.
츠츠츠츠츠.
두 사람의 타오르는 듯한 살기에 주위의 공기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그렇듯 한껏 고조된 분위기가 막 폴팔하려는 찰나, 대기를 이글이글 달구던 둘의 살기가 일순간에 사라졌다. 아니, 정확하게 말하면 살기의 방향이 바뀌었다고 하는 편이 옳았다.
을씨년스럽게 늘어선 황궁의 성벽 위로 검은 어둠이 내려앉아 이었다.
크리티컬과 파먼은 우두커니 선 채 성벽 위를 응시했다. 그들의 표정은 지금까지와 달리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성벽 위에 늘어서 있는 검은 그림자들. 장식이 아니다. 침울한 달빛에 흔들리고 있는 것은.
“마족.”
크리티컬이 신음처럼 중얼거렸다.
“또 다른 불청객이 있었군.”
성벽 위를 쭉 둘러본 파먼이 무감정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의 음성에 한 줄기 역겨운 감정이 묻어 있었다. 타락한 가시인 그로서도 마족은 결코 달갑지 못한 존재였다.
“함정이었나?”
크리티컬이 파먼을 보며 물었다.
파먼은 고개를 저었다. 그는 건틀레을 으스러져라 움켜쥐며 독기를 흘려 냈다.
“내가 가장 증오하는 것이 바로 마족이다.”
텅 빈 투구 안에서 으스스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과거, 그는 마족을 경계하라며 황제에게 층언을 올렸다가 그 때문에 목이 잘리기까지 한 기사다. 마족을 향한 그의 분노는 처절할 수 밖에 없었다.
파먼을 지그시 바라보던 크리티컬은 흡족한 svywjd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나쁘지 않군. 그럼 우리의 싸움을 잠시 미뤄도 좋을까?”
“물론!”
키메라와 흑기사들 간의 암묵적인 합의가 이루어졌다. 그들은 전열을 정비하고 마족들의 습격에 대비했다.
“크크크크크.”
“키키키키키킥.”
기괴한 웃음소리와 함께 성벽 위에 늘어선 어둠 속에서 누런 이빨들이 기나긴 행렬처럼 나타났다.
웃고 있는 것이다.
마족 놈들이.
파먼은 짜증이 확 일어났다.
“놈들. 처음부터 구경하고 있었구나.”
검투사들의 혈전을 즐기는 로마 군중처럼 마족들은 그들의 싸움을 즐기고 있었던 것이다.
“허허. 잔혹한 놈들이로고.”
필라이트는 허탈하게 웃었다. 그의 음성에는 아득한 절망마저 묻어 있었다. 성벽을 가득 메운 마족들. 그 수는 물경 천 단위를 넘고 있었다.
대체 무슨 수로 저 많은 마족들을 상대한단 말인가.
후드드드드득!
마족들이 일제히 날개를 펼쳤다. 그리곤 하늘을 가득 메운 까마귀 떼처럼 키메라들을 향해 일제히 내리꽂혔다.
전율의 대마왕
말없는 통곡이 밤하늘을 차갑게 식히다
키메라, 다크나이트, 그리고 마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