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87/102)

  전율, 벨로로폰의 각성

  처음 시작은 마력의 이동이었다.

  정체되어 있던 마력의 움직임이 어느 순간 넓은 강물처럼 천천히 흐르더니 점차 속도를 빨리하여 급기야 급류처럼 빨려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 양은 실로 방대하기 이를 데 없어 세상에 구멍이 뚫린 것 같은 착각이 일 지경이었다.

  “이, 이게 대체 무슨 이이야!”

  호랭이는 당황하여 소리쳤다.

  마치 마계라는 이름의 항아리 밑바닥에 돌연 커다란 구멍이 생겨, 물처럼 차 있던 마력들이 그리고 콸콸 새어 버리는 것 같은 느낌이랄까.

  마력의 이동이 얼마나 대단했던지, 하늘엔 때 아닌 광풍이 몰아치고, 지상엔 거센 회오리바람 수십 개가 질풍처럼 휘돌았다.

  “위, 위층에서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 게냐?”

  호랭이가 두려운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며 외쳤다.

  이렇게 엄청난 기운을 빨아들이는 것이 만약 개인의 힘이라면 그자야말로 천하무적이 아닌가. 세상천지의 기운 모두를 마음대로 다룰 수 있을 테니 말이다.

  두려워하던 마력의 이동이 한순간 멎었다.

  그제야 호랭이는 안도의 한숨을 돌렸다.

  그러나 그것은 폭풍전야의 고요와 같았다.

  돌연 하늘이 우르릉 진동하며 고막을 찢어 놓을 듯한 굉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살의에 찌든 광폭한 웃음소리.

  그 웃음소리에 실린 들끓는 마성에 절망의 탑 전체가 우르르 뒤흔들렸다.

  “크윽.”

  호랭이는 웃음소리에 실린 가공할 기운에 가슴이 진탕되는 충격을 받았다.

  “큭. 레, 레종은.”

  호랭이는 보통사람인 레종이 이 웃음소리를 견디지 못할 것이라는 사실을 기억해 내고 황급히 고개를 돌렸다.

  다행히도 경애가 그녀를 안은 채 신비스러운 기운을 부리고 있었다. 날개처럼 둥글게 그녀들을 감싼 안개는 웃음소리가 가져온 충격을 어느 정도 상쇄시켜 주었다.

  덕분에 그녀들은 인상을 찡그리는 정도의 충격만 받았을 뿐이었다.

  “아이쿠. 귀가 날아가는 줄 알았네. 누구 목소리가 이렇게 큰 거야. 기차 화통을 삶아 먹었나.”

  경애가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안으며 어지러워했다.

  “네 말대로 단순히 목소리만 큰 것이면 좋겠구나.”

  호랭이는 긴장된 얼굴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방금 전, 그 사악한 웃음소리에 실렸던 가공할 힘을 생각하면 전신의 털이 빳빳하게 곤두설 지경이다.

  전율.

  이런 생소한 감정을 느꼈던 적이 언제였던가.

  호랭이는 마른 침을 삼키며 방금 전 기운의 정체를 파악하는 데 노력했다.

  “어라? 이상한 진동 안 느껴지세요?”  레종을 일으켜 세우던 경애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진동?”  이상한 생각이 든 호랭이는 즉시 정신을 집중했다. 과연 먼 곳에서 교묘한 진동이 파도처럼 밀려오고 있었다. 진동의 세기는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공명하듯 절망의 탑이 웅웅 울리더니, 급기야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심하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안 되겠다. 이러다 탑이 무너지겠어.”

  호랭이는 급히 근두운을 불러 그 위에 타고는 경애와 레종을 부르러 했다. 하지만 그럴 필요가 없었다. 레종을 꼭 안은 경애가 순백의 날개를 펄럭이며 근두운 옆에 둥둥 떠 있었던 것이다.

  “놀랍군.”

  호랭이는 경애의 재주에 헛바람을 질렀다. 하지만 마냥 놀라고만 있을 수는 없었다. 탑의 흔들림이 심상치 않았던 것이다.

  “떨어져라. 최대한 탑에서 떨어져.”

  경애와 레종에게 지시한 호랭이는 근두운을 탄 채 급히 위로 올라갔다. 퀴니와 샤바가 걱정되었다.

  “퀴니야! 샤바야!”  “여기야.”

  둥실 떠다니는 비홀더를 타고 탑 밖으로 나오던 퀴니가 호랭이의 부름에 답했다. 호랭이는 냉큼 그녀에게로 달려갔다.

  “샤바는?”  “여기 있다. 샤바.”

  비홀드의 아래쪽에서 쏙 고개를 쏙 내밀었다. 

  샤바는 재주도 좋게 둥근 공처럼 생긴 비홀더의 아래쪽에 거꾸로 매달려 있었다.

  “무사해서 다행이구나. 아무래도 탑이 무너질 것 같다. 일단 이곳에서 피하자.”

  호랭이는 둘을 이끌고 먼저 간 경애를 쫓았다.

  “여기야, 여기.”

  절망의 탑에서 상당히 떨어진 언덕에 자리를 잡은 경애가 그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경애 언니.”

  퀴니가 그녀와의 상봉을 반가워하며 허공을 날듯이 달려가 그녀에게 안겼다.

  “무사하셔서 다행이에요.”

  “헤헤. 퀴니도 잘 있었어? 어디 보자 .토실토실 살이 오른 걸 보니 잘 먹은 모양이네.”

  경애와 퀴니는 병규를 따라 함께 차원의 벽을 넘었다. 그러나 혼돈의 경계를 넘는 동안 그만 헤어지고 말았다. 내내 서로의 행방을 몰라 안타까워하다가 마침내 오늘 재회한 것이다.

  때문에 서로에 대한 반가움이 더할 수밖에 없었다.

  둘이 서로를 껴안고 팔짝팔짝 뛰고 있을 때, 누군가 경애의 소매를 콕콕 당겼다. 고개를 돌려 보니 눈이 돌아 버릴 정도로 아름다운 미소년이 아닌가.

  “윽! 눈부셔.”

  경애는 소년의 현란한 미모에 비틀비틀 뒷걸음쳤다. 샤바는 반갑게 그녀에게 얼굴을 부비며 애교를 떨었다.

  “와아. 사모님도 오신 거예요. 샤바? 정말 오랜만이에요. 샤바.”

  그는 아직도 경애를 병규의 짝으로 오해하고 있었다.

  “어라. 이 현기증 나게 잘생긴 소년은 또 어떻게 날 아는 거지? 이상하게 오늘은 잘생긴 남자만 꼬이네.”

  경애는 샤바를 보며 연신 고개를 갸웃거렸다.

  호랭이는 헤벌쭉 미소를 흘리는 그녀를 보며 샤바의 정체를 말해줘야 할까 고민에 고민을 거듭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쿠구구구구구궁.

  거센 진동이 파도처럼 절망의 탑을 휩쓸었다.

  한차례 크게 휘청인 절망의 성은 끼그으으응 하는 마지막 긴 신음성을 흘리며 모래성이 무너지듯 천천히 허물어져 내렸다. 까마득하게 높은 탑이 무너지는 모습은 정녕 공포스러웠다.

  쿠콰콰콰콰콰콰콰콰콰쾅!!

  괴성이 하늘을 뒤흔들고, 대지는 울부짖었으며, 부옇게 오른 먼지 구름이 하늘을 메운 그름을 뚫고 올라갔다. 폭삭 주저앉은 자리에서 퉁겨 나온 건물 파편은 주위에 막대한 피해를 안겼다.

  최후의 일전을 치르고 있던 마물과 마수, 그리고 타락한 종족들은 절망의 탑이 무너짐에 따라 막대한 타격을 받게 되었다.

  “끝내 무너졌군.”

  호랭이가 허무한 음성으로 말했다.

  “대체 방금 전의 그 진동은 뭐였지?”

  진동의 정체가 무엇이든 간에 막강한 탑을 한순간에 쓰러트릴 정도로 엄청난 파괴력을 가진 것만은 분명했다.

  고오오오오오오~

  탑이 무너져 내린 곳에서 기이한 진동이 울렸다.

  순간 호랭이들은 긴장한 얼굴로 서서히 가라앉고 있는 흙먼지 너머를 집중했다.

  무언가가 있다.

  엄청난 무언가가 폐허가 된 탑의 잔해 속에서 화산처럼 일어나고 있었다.

  “...... 가공스럽군.”

  잔해 속에서 일어난 존재는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엄청난 기세를 발산하고 있었다. 문제는 아직 그 기운이 절정에 이르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런데도 호랭이를 긴장시키기에 충분했다.

  지금도 이럴진대, 만약 절정에 이른다면?

  호랭이는 눈을 질끈 감았다.

  암담이라는 말은 바로 이런 때를 두고 말하는 것이리라.

  “그런데 병규 이 녀석은 대체 어딜 간 거야?”

  호랭이는 병규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애를 태웠다. 그 녀석의 실력이라면 탑이 무너진 정도로는 절대로 죽지 않을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두쿵. 두쿵. 두쿵.

  가슴을 쥐어짜는 듯한 둔직한 소음이 규칙적으로 울려왔다.

  “이게 무슨 소리야?”  소름이 쫙 끼치는 소음에 호랭이는 사색이 되어 소리쳤다.

  눈을 둥글게 뜬 퀴니가 비명처럼 소리쳤다.

  “시, 심장 소리.”

  “뭐야?”  호랭이가 입을 쩍 벌린다.

  “터무니 없는 소리.”

  이 천둥소리처럼 큰 소음이 심장 두근거리는 소리라니. 설사 대지에 커다란 심장이 달려 있다 해도 이처럼 웅장한 고동을 울리지는 못할 것이다.

  “아아... 벨로로폰.”

  퀴니가 두 손을 가스에 모으며 전율했다.

  마계, 그 어둡고 음침한 어둠의 자궁과 같은 세계.

  그곳으로 마왕의 심장소리가 울려 퍼지고 있었다.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두근.

  벨로로폰의 심장소리는 마물들을 광폭하게 만들고, 마수들의 눈을 뒤집었으며, 타락한 존재들을 미치게 만들었다.

  어느새 멈춰져 있던 싸움이 재개되었다.

  마계의 모든 존재들이 미쳐 날뛰었다.

  서로의 목을 날리고, 팔을 뜯어내고, 머리를 뽀개고 뇌수를 마셨다. 그 참혹한 싸움에 더 이상 종족간의 대결은 존재하지 않았다. 잔혹한 학살과 처절한 죽음만이 남았을 뿐이다.

  마계가. 벨로로폰의 심장소리에 감화된 마계의 모든 존재들이 폭주하고 있었다.

  “마, 마왕의 힘이 이 정도란 말인가.”

  호랭이의 턱이 덜덜 떨렸다.

  신선인 그가 마왕의 힘에 전율하는 것이다.

  “허, 허허허.”

  헛움음이 흘러나왔다.

  현실이 아니다.

  아니, 현실일 수 없다.

  단순히 그의 심장소리 하나만으로 이 큰 세계 전체가 미쳐버리다니! 이거야 말로 신의 권능이 아닌가. 신의 외침과도 같은 위엄이 아닌가.

  크워어어어어어어어!

  탑의 잔해 속에서 재앙처럼 일어난 벨로로폰이 길게 울부짖었다.

  그의 외침이 하늘을 뒤흔들고, 대지를 갈라놓았다.

  그가 한 걸음 내딛자 들끓던 대기가 절망과 절규를 토했다.

  “부...... 부활이다. 드디어 아버지가!”

  “절망...... 그 황홀한...... 파괴의 이름. 하하. 아버지가 부활한 이상, 말살이다. 모든 것이 썩어 들어갈 거야.”

  베르키스를 비롯한 절망의 세 자식들이 그를 향해 무릎 꿇고 경배했다. 그들의 얼굴에 두려움과 환희가 떠올라 있었다.

  “뭣이?”  그들의 말에 호랭이는 사색이 되었다.

  “아버지라고? 저, 저 녀석이! 설마 저 괴물이 병규란 말이냐!”  호랭이는 제정신이 아닌 듯했다.

  그때였다.

  “크크크크!”

  신음과도 같은 괴성이 울려 퍼지며, 호랭이의 그림자가 스멀스멀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림자의 이동을 본 호랭이의 얼굴에 노여움으로 일그러졌다.

  “쉐이드. 네 이놈. 아직 죽지 않고 살아 있었더란 말이냐!”

  혼신을 다한 호랭이의 일격. 신벌과 같은 뇌룡으로 쉐이드는 소멸 직전까지 타격을 입었다. 하지만 죽지 않았다. 간신히 살아남았다. 만약 그의 육체가 그림자가 아닌 다른 무엇이었다면 결코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그렇게 손톱의 반도 안 되는 작은 조각만이 남은 쉐이드는 호랭이의 그림자 속에 숨어 부서진 몸을 재생하고 있었다.

  그림자로 된 육체이기에 회복이 빨랐다. 그의 육체를 구성하는 그림자는 온천지에 널려 있기 때문이다.

  순식간에 본래의 힘을 되찾았다. 다행히 절망의 탑이 무너지는 소란덕분에 호랭이는 쉐이드의 재생을 눈치 채지 못했다.

  그렇게 부활한 쉐이드는 복수를 꿈꾸었다. 그러나 막 그가 일을 벌이려는 순간, 변괴가 일어났다.

  하늘이 울부짖고, 대지가 비명을 토하며 그가 깨어났다. 절망의 군주가 각성한 것이다.

  그의 외침, 그의 심장고동, 미칠 듯한 절망의 기운.

  본래부터 암흑의 기운이 강했던 쉐이드는 즉시 감화되었다.

  절망이 깨어났다. 어찌 미치지 않을 수 있을까.

  쉐이드는 오직 파괴의 본능만을 곧추세우며 곧장 절망의 군주, 벨로로폰에게 달려들었다. 벨로로폰의 힘이 탐났기 때문이다.

  절망의 군주가 가진 가공할 힘은 두렵다. 하지만 그에 대한 두려움 보다 탐욕이 더 컸다.

  쭈우우우욱.

  해질 무렵의 가로등 그림자처럼 길게 늘어진 쉐이드는 금세 벨로로폰에게 접근했다.

  “쿠후후. 절망의 군주, 당신의 그 힘 내가 가지겠소.”

  광소를 뱉으며 쉐이드가 벨로로폰의 발아래를 차지했다.

  잔혹한 어둠.

  쉐이드는 밑바닥이 없는 늪과 같았다.

  모든 것이 잠겨들었다.

  서서히 발아래가 잠겨드는 공포스런 광경.

  마기로 똘똘 뭉친 벨로로폰조차도 쉐이드가 펼친 그림자의 늪 속으로 서서히 빨려 들어갔다.

  “그대으 몸뚱이를 모조리 녹여 주겠습니다. 자, 어서 나의 힘이 되어 주십시오. 쿠크크크크.”

  광기에 젖은 쉐이드의 음성은 쇠를 긁는 것처럼 불쾌했다. 벨로로폰의 마성에 최상위 마족인 쉐이드마저 이성을 잃은 것이다.

  “.......”

  잠깐 사이 무릎까지 잠겼다.

  쉐이드는 실체가 없다.

  어둠 그 자체이기 때문이다.

  그 속에서 아무리 발버둥을 쳐 봤자, 헛된 몸부림일 뿐이다.

  스윽.

  굳은 듯 서 있던 벨로로폰의 팔이 처음으로 움직였다

  서서히 머리 위로 들려 부채처럼 펼쳐졌다.

  벨로로폰의 눈동자는 처음과 변함이 없었다.

  붉은 마성으로 들끓는 그 사갈과도 같은 눈동자가 어둠을 살폈다. 그의 몸은 어느새 허리아래까지 그림자 늪에 묻혔다.

  츠아아아아아!.

  벨로로폰의 손끝에서 소름끼치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요수의 발톱?

  아니. 다르다.

  사기로 일렁이던 푸른 귀기 대신, 그의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기운은 지하에서 막 퍼 올린 석유처럼 검은 기름기로 번들거렸다.

  벨로로폰은 검은 발톱으로 그림자를 그어 내렸다.

  촤아아아악!

  모든 공간이 갈라졌다. 아스팔트처럼 부글부글 끓던 그림자가 가죽북처럼 찢겨져 나갔다.

  하지만 잠시일 뿐. 마치 갈라진 물이 합쳐지듯 그림자는 이내 복구되었다.

  이미 그림자는 가슴께를 채워 오고 있었다.

  벨로로폰의 눈썹이 꿈틀 움직였다.

  츠즈즈.

  요수의 발톱이 사라지고 기이한 냉기가 그으 진신에서 구름처럼 흘러나왔다.

  습한 냉기가 어둠의 수면 위로 잔잔한파문을 그렸다.

  쉐이드는 키득거리며 웃었다.

  “쿠흐흐. 뭔가 착각한 것은 아니신지. 전 물이 아닙니다.”

  드드등!

  이번엔 중력이다. 무거운 중력이 그림자를 쥐어짰다. 하지만 작은 파문만을 일으켰을 뿐이다. 

  “헛고생입니다, 벨로로폰. 과거의 마왕이여!”

  쉐이드의 간사한 음성이 마계의 하늘을 쩌렁쩌렁 울렸다.

  쉐이드는 벨로로폰의 턱을 넘어 입까지 채웠고, 종래엔 벨로로폰의 코와 눈을 덮었다. 그리고 끝내 그의 모든 것을 뒤덮어 버렸다.

  “크크크. 아아~ 드디어. 드디어 절망의 힘이 내 것이 되었군.”

  마침내 벨로로폰을 흡수한 쉐이드는 오만한 음성으로 낄낄거렸다.

  절망의 군주를 해치웠다.

  다만 죽인 것만이 아니라 아예 흡수해 버렸다.

  이제 위액으로 음식물을 녹이듯, 절망의 힘을 조금씩 흡수하면 되는 것이다.

  바로 그때였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

  쉐이드의 몸속에서 진득한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웃음소리가 흘러나올 때마다 미끈한 그림자의 표면이 파문으로 일그러졌다. 그것은 그림자 속으로 흡수된 마왕 벨로로폰이 흘리는 웃음이었다.

  “무, 무슨!”

  쉐이드는 당황했다. 그의 몸속으로 잠겨들면 모든 생명은 질식해 죽는다. 그림자가 입, 코, 귀...... 심지어 눈과 피부의 모공까지, 구멍이란 구멍은 전부 스며든다. 그렇게 뱀이 먹이를 잡아먹듯 그림자속으로 흡수하는 것이다.

  그 능력은 마왕 데이크란에게서 직접 하사받은 것으로, 설사 마왕이라 하더라도 자신의 안에 가둘 수만 있으면 흡수할 수 있을 것이라 내심 자신하던 것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벨로로폰은 그의 몸속에 갇힌 상태에서도 질식하지 않았다. 비단 질식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웃음까지 터트린 것이다.

  쉐이드는 섬뜩함을 느꼈다.

  불길한 예감에 전신이 쭈뼛했다. 그리고 그 불길한 예감이 현실로 나타나듯 몸이 가려워지기 시작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육체가 가렵다니. 어처구니없는 말이지는 몰라도 실재로 그랬다.

  “크으으. 무, 무슨?”

  쉐이드는 당황했다. 뭔가가 잘못됐다. 그런데 뭐가 잘못된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그림자로 이루어진 그의 몸뚱이 어딘가에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고, 그 변화는 결코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었다.

  쿠르르르르! 쭈우욱!

  기묘한 소음이 가늘게 울렸다. 마치 배수구에서 물이 새는 것 같은.

  “히이익!”

  급기야 쉐이드는 비명을 질렀다.

  그의 몸뚱이, 그림자가 조금씩 줄어들고 있었다.

  윤기 넘치던 그림자가 나선의 파문을 그리며 중앙부분을 향해 조금씩 끌려들어 갔다.

  그리고 그 속에서 사라졌던 벨로로폰이 조금씩 모습을 드러냈다. 놀랍게도 그는 그림자를 마시고 있었다. 접시를 들고 스프를 마시듯, 태연하듯 그림자를 마셨다.

  “아, 안 돼. 하지 마!”

  쉐이드는 기겁을 했다. 설마 그림자를 빨아먹는 터무니없는 존재가 있을 줄이야.

  그의 육체인 그림자는 가히 무한한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호랭이의 그 엄청난 공격에도 끝내 살아남지 않았던가. 하지만 지금의 경우는 다르다.

  애초에 벨로로폰은 그와 싸움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육식동물은 초식동물과 싸움을 하지 않는다. 단순히 농락하고 희롱하고 사냥할 뿐이다.

  병규와 쉐이드의 관계가 바로 그랬다.

  마왕은 그를 먹고 있는 것이다. 산 채로.

  “하, 하지 마! 제발!!”

  쉐이드는 절규했다. 비명을 지르며 애원했다.

  하지만 피도 눈물도 없는 벨로로폰은 용서란 단어를 몰랐다.

  크크크크크크크.

  진득한 괴소를 뿌리며 벨로로폰은 말 그대로 쉐이드를 산 채로 잡아먹었다.

  “크아아아아악!”

  처절한 절규를 끝으로 병규는 쉐이드를 작은 조각 하나 남기지 않고 다 마셔 버렸다.

  “마, 말도 안 돼.”

  호랭이는 두 눈을 찢을 듯 뜬 채 말도 안 된다는 소리만 반복했다. 터무니없는 힘이다. 설마 저 질긴 그림자 마인 놈을 마셔 버릴줄이야.

  비단 그는 쉐이드를 마신 것뿐만이 아니었다.

  “클클클클클.”

  진득한 웃음소리와 함께,

  쫘아아아악.

  그의 몸 아래, 그림자가 범람하는 홍수처럼 주위로 쫙 펼쳐졌다. 아니, 그것은 그림자가 아니었다. 지독한 살기를 머금은 암흑이었다. 살렘의 능력은 이미 벨로로폰에게 흡수되어 마왕의 권능으로 변한 것이다.

  그렇게 펼쳐진 암흑은 잔혹했다.

  걸리는 것은 무엇이든 암흑 속으로 끌어들이며 줄줄 녹였다.

  마계의 모든 생물들이 미친 듯이 절규하며 죽어 나갔다.

  퍼퍼퍼퍼펑.

  화려한 폭죽이 터지듯, 괴인이 손을 흔들 때마다 마계의 수많은 생명들이 터져 나갔고,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호수처럼 넓게 퍼진 그의 그림자가 새로운 사냥감들을 끌어들였다.

  지옥과 같은 장면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지옥과 같은 장면이 연속적으로 펼쳐졌다.

  “저게 병규란 말이냐?”

  호랭이는 치를 떨었다.

  몰아치는 검은 기운, 들끓는 살의, 휘날리는 공포.

  그 지옥과도 같은 곳에서 적의를 풀풀 날리는 그 존재는 한 마디로 공포 그 자체였다.

  머리 위에 솟은 여서 개의 날개. 등 뒤에서 펄럭이는 추악한 여섯장의 날개.

  비록 얼굴 생김은 호랭이가 아는 그와 닮았지만, 나머지는 전혀 달랐다.

  “저, 저건! 병규가 아니야. 다만 악마일 뿐이다.”

  호랭이는 고개를 흔들며 그렇게 단정했다.

  저런 괴물이 병규일 리 없다. 저렇게 절망과 저주를 달고 있는 괴물이 그 순진한 병규일 리 업사.

  절대로.

  절대로 말이다.

  호랭이는 그렇게 병규의 변화를 부인했다.

  “그와아아아아아아아아아아!”

  잔해 속에서 걸어 나온 악마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우렁찬 고함을 질렀다. 풀풀 날리던 먼지가 일제히 갈라지며 사방으로 흩어졌고, 땅거죽이 갈라지고, 하늘을 메운 검은 구름이 일시에 소멸되었다.

  몇백 년 만에 처음으로 구름 너머의 하늘이 드러났다.

  하지만 그것은 차라리 보지 않음만 못했다. 구름 너머의 하늘은 마치 잔혹한 마계의 운명을 암시하듯, 처절한 핏빛의 세상이었기 때문이다.

  “왜 울고 있는 거야, 벨로로폰? 뭐가 그리 슬픈 거야?”  퀴니는 괴성을 터트리는 벨로로폰의 모습에 울음을 터트렸다. 그녀는 느낄 수 있었다. 괴성 속에 깃든 그의 슬픔과 아픔을.

  그래서 울 수 없는 그를 대신하여 그녀가 울고 있는 것이다.

  “머야? 퀴니야, 설마 저게 병규란 말이냐? 너도 그렇게 생각하는거냐!”  호랭이가 퀴니의 멱살을 들어 올리며 고함을 버럭 질렀다. 성난 그의 눈빛이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제발 아니라고 소리쳐!

  저건 악마일 뿐이라고 말하란 말이다.

  하지만 퀴니는 야속하게도 고개를 끄덕였다.

  “병규야. 병규란 말이야. 호랭이는 들리지 않아? 그가 고통스러워하고 있잖아. 그가 울부짖고 있잖아.”

  와락 소리친 퀴니는 와앙 하고 울어 버렸다. 그녀가 이렇게 펑펑 울어 본 것은 난생 처음이었다.

  “말도 안 돼.”

  퀴니를 놓아준 호랭이는 텅 빈 눈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고개를 돌렸다.

  “그아아아아아아아!”  괴물이 다시 고함을 질렀다. 그 음성에 실린 막강한 음파에 마물들이 쓸려 나가고, 마수들의 배가 펑펑 터져 나갔으며, 타락한 종족들이 먼지처럼 분해되어 바람에 날렸다.

  잔혹한 광경이었다.

  아니, 그것은 참혹한 살육의 현장일 뿐이었다.

  너무도 일방적인.

  악마는 단지 고함을 지르고 있을 뿐이고, 마족과 몬스터들은 놀란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달아나다 발에 밟힌 개구리처럼 내장을 터트리며 죽어 나갔다.

  “하하하하.”

  호랭이는 실성한 것처럼 웃었다.

  “하하하. 저것 봐. 저것 보라고. 저건 악마야. 저런 악마가 병규라고? 절대 그럴 리 없어. 절대 그럴 리 없단 말야!”

  호랭이는 거듭 부인했다.

  샤바가 그의 어깨를 잡았다.

  눈물이 얼룩진 얼굴로 고개를돌리자, 샤바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젓는다.

  “주인님. 맞다. 샤바. 아픈 것 같지만, 분명 주인님이다. 샤바.”

  “제길. 나도 저 녀석이 그 멍청한 녀석인 줄 안다고. 하지만 말이야. 믿을 수 없잖아. 그 순진한 녀석이 저렇게 변해 버릴 줄 누가 알았겠어.”

  신선인 호랭이다.

  어떤 일에도 침착을 잃지 않고 냉정을 유지하던 그였다.

  하지만 병규의 변화는 그의 수양을 하루아침에 허물어트렸다.

  세상사, 만물의 모든 이치가 허무하다는 것을 일깨우는 것이 바로 신선의 도다.

  하지만 이것만은 도저히. 악마가 되어 버린 병규의 각성만큼은 도저히 호랭이로서도 공허하게 바라볼 수 없었다.

  “저것이 마왕의 본성입니다.”

  어느새 다가온 베르키스가 침착한 음성으로 말했다. 병규의 각성으로 힘을 되찾은 그는 전과는 비교도 안 되는 힘을 충만해 있었다.

  “본성이라. 허허. 저게 병규의 본성이란 말이냐? 그 순진한 녀석의 본성이 저토록 추악한 것이란 말이냐? 허허허허허.”

  다리에 힘이 풀린 호랭이는 자리에 풀썩 쓰러지고 말았다. 허탈한 한숨만이 입가에 맴돌 뿐이다.

  그의 모습으 힐끔 내려다본 베르키스가 다시금 병규에게로 눈을 돌리며 혼잣말처럼 중얼거렸다.

  “저 모습, 저 기운. 분명 아버지는 각성을 하셨습니다. 하지만 정상은 아니신 것 같군요. 육체는 돌아왔지만, 정신만은 여전히......”

  “뭐라?”  호랭이가 펄쩍 뛰어올랐다.

  “그게 무슨 소리냐? 저 녀석이 지금 제정신이 아니라고? 마왕이라는 존재는 악마와 같은 것이 아니더냐. 피를 갈구하고 닥치는 대로살인을 일삼는 괴물이 아니더냐. 그런데 지금 저 모습이 제정신이 아니라고?”

  “마족이 피를 갈구하는 것은 사실입니다만, 지금으 아버지처럼 무차별로 살인을 즐기는 것은 아닙니다. 엄연히 우리에게도 이성이라는 것이 있으니까요. 게다가 아버지는 마족 중에서도 가장 냉철한 이성을 지닌 존재였습니다.”

  ‘잔인할 정도로’라는 말을 속으로 삼키는 베르키스였다.

  “그래? 그렇단 말이지?”  호랭이의 눈에 생기가 돌아왔다.

  지금의 병규는 제정신이 아니다. 만약 어떤 방법으로든 정신을 차리게 만든다면? 그렇게 할 수만 있다면, 아주 작은 확률일지라도 병규를 예전으로 되돌릴 수 있을지 모른다.

  완전히는 모르지만, 가족을 기억나게 하는 정도라면.

  “좋아. 해보자.”

  호랭이는 팔소매를 훌훌 걷어붙였다.

  “강하게 한 대 쥐어박아서 녀석의 정신을 되돌려 주겠어.”

  말투는, 꼭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가능한 것처럼 말한다. 하지만 그것이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것을 여기 있는 모두가 알고 있었다. 지금의 벨로로폰은 그야말로 악마다.

  그 자체가 절망인, 지옥의 군주인 것이다.

  아무리 호랭이가 뛰어난 실력의 신선이라 해도 근처도 못 가서 죽어 버릴 것이다. 하지만호랭이는 이미 마음을 굳혔다.

  설사 죽더라도, 녀석을 한 대 후려칠 생각이다.

  그게 호랭이로서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마지막 선물이었다.

  “나도 살래. 샤바.”

  샤바가 호랭이의 옆에 나란히 섰다.

  “엥? 네가 왜? 주인님. 주인님 하고 만날 따르던 네가 과연 지금의 병규를 때릴 수 있겠냐?”  샤바는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없다. 샤바. 주인님을 때릴 수는 없다. 샤바.”

  “휴우. 됐다. 아서라. 때릴 수도 없는 네가 나서서 뭘 하겠느냐. 그냥 구경이나 하거라.”

  “그건 싫다. 샤바. 난 주인님을 때릴 수는 없지만, 호랭이가 주인님에게 접근할 수 있게 도와줄 수는 있다. 샤바.”

  “...... 죽을 수도 있다.”

  “괜찮다. 샤바. 난 절대 죽지 않는다. 샤바. 주인님은 절대 날 죽일 수 없다. 샤바샤바.”

  “하하. 웃기는구나. 왜 저 악마 같은 녀석이 널 죽일 수 없다는 거냐?”  호랭이의 물음에 샤바는 맑은 미소로 화답했다.

  “세상 어디에서도 나처럼 충성스런 수하는 구할 수 없기 때문이다.”

  “허허허. 그거 명답이구나.”

  호랭이는 샤바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나도 갈래.”

  퀴니가 짤랑거리는 음성으로 나섰다. 그녀는 얼마나 울었는지 눈이 퉁퉁 부어 있었다.

  호랭이는 퀴니를 내려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단호한 음성으로 말했다.

  “넌 안 돼.”

  “왜?”

  퀴니가 뾰루퉁한 음성으로 따졌다. 호랭이는 빙그레 웃었다.

  “넌 너무 어려.”

  퀴니의 얼굴 표정이 쌜쭉해졌다. 그녀는 호랭이를 노려보다 샤바에게 타박타박 걸어갔다.

  “샤바!”

  “왜, 샤바?”

  “내가 어려? 네가 어려?”

  돌연한 질문에 샤바는 고개를 갸웃거리다 대답했다.

  “당연히 내가 많지. 샤바.”

  “내가 어려! 네가 어려!”

  “......? 내가 많다. 샤바.”

  “내가 어려! 네가 어려!!”

  “......?”  퀴니는 계속해서 같은 질문을 던졌다. 눈가에 맺힌 눈물이 주룩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내가 어려!!! 니가 어려!!!”

  “...... 생가해 보니 퀴니가 쪼금 더 많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개미눈곱만큼 드는 것 같기도 하다. 샤바.”

  “..... 고마워.”

  작게 말한 퀴니는 양손으로 눈물 자국을 벅벅 닦아 내곤 다시 호랭이에게 갔다.

  “들었지? 난 샤바보다 나이가 많아. 샤바가 가니 나도 갈 거야.”

  “허허허.”

  호랭이는 안타까운 탄식을 터트렸다. 그는 퀴니의 어깨를 잡고 시선을 낮추며 피가 끓는 음성으로 말했다.

  “안 돼! 그렇게 억지를 써도 안 되는 건 안 돼. 절대로 너 같은 아이를 이런 일에 끌어들일 수는 없어.”

  “...... 정말로 안 돼?”

  퀴니가 죽어가는 목소리로 물었다. 무슨 눈물이 그리 많은지 호수 같은 눈동자로부터 눈물이 쉴 새 없이 펑펑 내렸다.

  호랭이는 가슴이 미어지는 것 같았지만 끝내 고개를 저었다.

  “안 돼.”

  “...... 알았어.”

  퀴니는 발을 돌렸다 .그리곤 다시 샤바에게 갔다.

  “샤바!”

  “.......”

  “내가 더 어려!!!! 네가 더 어려!!!!”

  “......”

  퀴니의 고집은 끝내 샤바도 울리고 말았다. 샤바가 울먹이는 목소리로 자신이 더 어리다고 말하자, 퀴니는 다시 한 번 두 손으로 눈물자국을 지운 후 호랭이를 찾았다.

  “들었지? 난 샤바보다 나이가 많아. 샤바가 가니, 나도 간다. 알았지? 대답해. 알았지! 대답하란 말야. 알았지!!”  “어허허허허허허허.”

  호랭이는 고개를 돌려 퀴니를 외면하고 말았다.

  안타까운 탄식이 호랭이의 입을 잠식했다.

  그가 끝내 허락을 않자 퀴닌 다시 샤바에게로 차박차박 걸었다. 눈물을 얼마나 흘렸던지 상의가 푹 젖을 정도였다.

  그런 그녀를 경애가 폭 껴안았다.

  “그래. 가자. 나랑 같이 가자. 호랭이가 허락 안 해도 우리 둘이가면 돼.”

  “정말? 나도 가는 거야? 어려도 되는 거야?”

  눈물이 그렁그렁한 물음에 경애는 역시 눈물에 콧물까지 훌쩍였다. 이 작은 소녀의 고집은 사람ㅇ르 감동시키는 뭔가가 있었다.

  “정말이야. 절대로 같이 가. 호랭이가 안 된다고 해도 내가 허락할게.”

  “...... 알았어. 고마워.”

  목소리처럼 작은 퀴니의 음성.

  “어허허허허. 어허허허허허허.”

  호랭이도 끝내 소리 내어 울고 말았다.

  모두가 소리 내어 엉엉 울었다.

  “좋군. 과연 아버지가 가족이라고 말할 정도의 사람들이야. 허허허. 통쾌해. 이렇게 호쾌한 자들과 마지막을 함께할 수 있다면 내 죽어도 한이 없으리.”

  알칸테가 껄껄 웃으며 앞으로 나섰다. 그의 음성은 금속음처럼 듣기 거북했지만 그 의기만큼은 사람을 감동시키기에 충분했다.

  “가족?”

  경애가 눈을 동그랗게 뜨며 물었다.

  알칸테는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처음 아버지가 돌아오신 날, 여러분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 당신들에 대해 말 할 때, 아버지의 눈길은 정말로 따스했습니다. 평생 아버지를 모셨지만 그때만큼 정으로 충만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물었습니다. 그분들이 대체 누구냐고. 누구이기에 아버지께서 이처럼 그리워하냐고. 아버지가 대답하셨습니다.”

  대답은 뒤에서 흘러나왔다.

  “그들은 나의 가족이다. 나의 생명이며, 곧 내가 세상에 존재할 의미이다.”

  아칸이었다. 베르키스와 함께 앞으로 나선 그녀가 아름다운 음성으로 병규의 진심을 전했다.

  찡한 뭔가가 그들 사이를 타고 흘렀다.

  “흑흑.”

  퀴니가 울고 샤바의 눈에 눈물이 송골송골 맺혔다.

  “망할 자식. 엉뚱한 놈들에게 간지러운 소리나 해대고. 정신을 차리면 볼기짝을 후려쳐 줄 테다.”

  호랭이는 욕을 했지만 고개 돌린 그의 눈가에 이슬이 반짝이고 있었다.

  “흑흑. 맞아. 바보 같은 오빠야. 그런 얘기는 직접 하지 궁상맞게 소문은 왜 내는 거야? 바보, 멍충이, 말미잘.”

  잠시 멈췄던 눈물이 다시 흘렀다.

  “좋다. 무모한 녀석들. 가자. 저 멍청한 녀석의 머리통을 한 대 후려갈겨 주러. 하하하하하.”

  호랭이가 통쾌하게 웃으며 앞으로 걸어갔다. 퀴니가 그와 보조를 맞추려 애쓰며 악착같이 옆에 따라붙었고, 샤바와 경애가 그녀의 손을 잡으며 앞을 걸었다.

  “언니. 다녀올게요.”

  문득 생각난 듯 경애가 뒤를 돌아보며 손을 흔들었다.

  하염없이 울고 있던 레종이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아파. 가슴이 아파.’

  일렬로 쭉 늘어선 호랭이와 그 일행들을 보며 레종은 눈물을 흘렸다. 입술을 꼭 깨물었다.

  나서고 싶다. 하지만 그럴 수 없다. 나서 봐야 개죽음만 당할 뿐이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의 발목을 붙잡게 될 것이다.

  그녀는 헛되게 목숨을 버릴 만큼 무모하지 않았다.

  차라리 악착같이 살아서 돌아온 그를 반갑게 맞아 주리라.

  그렇게 다짐했다.

  하지만 결의를 다지는 그들과 함께할 수 없음이 못내 아쉽기만 했다. 가슴이 아플 정도로.

  ‘제발 무사히 돌아와요. 그래서 다 함께 돌아가요.’

  레종은 경건한 표정을 무릎을 꿇고 간절히 신에게 기도했다.

  수백 년 만에 마계의 먹구름이 걷히고, 시뻘건 핏빛 하늘이 모습을 드러낸 그날.

  절망이라 이름 지어진 마왕이 부활했다.

  마계는 혼돈에 빠지고 살육과 비명과 절규가 세상에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날, 절망의 군주 속에 고이 잠든 가족을 일깨우기 위해 네 명의 남녀와 마물의 왕 셋이 무모한 도전을 감행하였다.

  10권 끝, 11권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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