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명의 새, 호랭이를 만나다
경애가 쉐이드와 일대 격전을 준비하고 있을 즈음, 병규는 뇌쇄적인 아름다움을 풍기는 마왕 데이크란과 충격적인 재회를 가졌다.
“정말로 오랜만이에요, 벨로로폰.”
데이크란이 흐트러진 자세로 말을 건넸다.
나긋나긋한 음성. 묘하게 농염한 분위기를 풍기는 목소리였다.
병규는 홀린 듯 그녀의 앞에 앉았다.
데이크란은 그의 앞에 놓인 빈 술잔에 술을 따랐다.
“드세요.”
그녀의 화사한 웃음에 병규는 현기증이 핑 일어났다.
어느새 손이 술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독이 있을 것이라는 의심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독한 술이었다.
입안에서 불이 난 것 같았다.
하지만 이상하게 익숙했다. 괴로울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의외로 부드럽게목을 타고 넘어갔다.
그가 빈 술잔을 내려좋자 데이크란이 다시 술을 따랐다.
다시 들이키듯 마시고, 이번에는 그가 술병을 들었다.
비스듬히 앉은 데이크란이 고개를 젖히며 술을 마셨다. 머리칼이 파도를 치고, 윤기 흐르는 몸이 관능적인 곡선을 그리며 시선을 당겼다.
병규는 가만 그녀를보고만 있었다.
그는 혼란스러웠다.
왜 그녀의 앞에 앉은 거지?
왜 그녀가 내미는 술을 아무런 거부 없이 받은 것일까.
왜 꿈속의 그녀가 태연하게 내 앞에서 술을 드는 것일까.
“아직 기억이 돌아오지 않은 것 같군요.”
술잔을 내려놓으며 그녀가 말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가 웃었다.
묻어날 것만 같은 아름다운 미소였다.
“그럼 제가 누구인지도 모르시겠네요?”
병규는 고개를 저었다.
그녀는 흥미로운 표정으로 상체를 숙이며 물었다.
“제가 누구죠?”
병규는 머뭇거리지 않고 대답했다.
“마왕. 데이크란.”
곧바로 정답을 맞히자 그녀는 샐쭉한 표정이 되었다. 투정을 불듯 고개를 돌리며 말했다.
“기억을 잃으셨다면서 어떻게 절 아는 거죠? 거짓말이죠? 사실은 기억을 찾은 거죠?”
병규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리곤 탁한 눈동자로 답했다.
“그게...... 나도 잘 모르겠소. 기억은 하나도 없지만, 난 당신을 알고 있소. 당신의 이름과 당신의 과거를.”
“호, 궁금한데요? 제 이름이 뭐죠?” 병규의 눈동자가 더욱 탁해졌다. 과거에 사로잡힌 그가 졸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데이실. 정령왕의 무녀.”
그녀는 피식 웃으며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땡. 틀렸어요. 전 마왕 데이크란이랍니다.”
병규는 그녀의 말이 거짓말임을 직감했다. 그녀는 데이실, 꿈에서 그가 타락시킨 여자다. 그럼에도 그녀가 과거를 거부하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병규를 가만 지켜보던 데이크란은 다시금 그의 빈 술잔에 술을 따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흠. 곤란하네요. 어떻게해야 당신의 기억을 되찾을 수 있을까요? 당신이 기억을 되찾아야, 예전처럼 오붓하게 놀 텐데.”
“모르오. 난..... 사실 당신 때문에 이곳에 온 것이 아니오.”
데이크란은 미간에 살포시 주름을 만들었다. 그 작은 표정 변화에 병규는 가슴이 칼로 베인 듯 아파 왔다.
“그럼, 이곳에 왜 오신 거죠?”
그녀가 물었다. 병규는 솔직하게 말했다.
“레종..... 여왕을 돌려받으러 왔소.”
그의 말에 데이크란은 한순간 차가운 한기를 뿜었다.
그러나 차가운 질투는 한순간에 사그라지고 그녀의 얼굴 위로 다시 봄바람처럼 따뜻한 기류가 흘렀다.
“아, 그녀요? 물론 돌려드리죠. 하지만 그전에 먼저 저와 할 이야기가 있어요.”
“무슨 이야기요?”
병규는 짧게 물었다.
왜인지 마왕인 그녀 앞에서 자꾸만 거만해진다. 기세만으로는 그녀와 비교가 안 디는 상황임에도 말투는 갈수록 무뚝뚝해진다.
일전에 베르키스는 만약 병규가 완전히 각성을 하면 설사 데이크란이 한 명이 아니고 열 명이라 해도 그를 감당하지 못할 것이라 했다. 이 말이 사실인지 확실치는 않지만 지금 당장은 병규가 열 명이 있다 해도 데이크란 한 명을 이길 수 없을 것이 확실했다.
이해가 안 디는 것은 데이크란의 태도다.
그녀는 병규의 거만함을 용인하고 있었다. 아니, 오히려 그가 거만해질수록 좋아하는 것 같았다.
“레종 여왕을 풀어주기 전에 당신은 한 가지를 해야 해요.”
“그게 뭐요?”
데이크란은 매력적으로 웃었다.
“그것은 과거 당신이 이곳을 떠나기 전에 제게 부탁한 것이죠.”
슬며시 일어선 데이크란은 천천히 손가락을 내밀어 그의 이마를 짚었다. 그녀는 손가락을 통해 상대의 기억을 뽑아낼 수도 있고, 반대로 자신의 기억을 상대에게 주입할 수도 있었다.
잠시 병규의 미간을 짚었던 데이크란이 지그시 인상을 찌푸렸다. 그녀는 손가락을 떼며 고개를 흔들었다.
“역시 안 되는군요. 아무리 기억을 잃어버렸어도 내 힘은 당신의 잠재력을 뛰어넘지 못하는 것 같아요. 하는 수 없죠. 불편하더라도 직접 말로 하는 수밖에요.”
그녀의 행동에 병규는 불쑥 호기심이 일었다.
“대체 내가 당신에게 부탁한 것이 무엇이오?”
“아하. 이제 좀 궁금해졌나요? 하긴 궁금할 거예요. 이건 당신에게 아주 중요한 일이거든요. 사실 바로 이것 때문에 당신은 새로운 인생을 시작했으니까요.”
데이크란은 병규에게바싹 상체를 숙이며 고혹적으로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알려 줄게요, 당신의 과거를. 그 속에 지금까지 당신이 지금까지 살아온 치열한 삶의 의미가 숨어 있어요.”
과거 마계엔 한 명의 마황과 세 명의 마왕이 있었다.
마황은 군림하되 통치하진 않으니, 실질적인 마계의 지배자는 세 마왕이라고 할 수 있었다.
이들 세 마왕의 보이지 않는 긴장과 견제 속에 마계는 묘한 평화를 유지했다.
물론 마왕들의 힘이 비등한 것은 아니었다.
미세했지만 다소의 차이가 있었다.
그 힘의 격차는 벨로로폰이 정점이었고, 데이크란이 가장 아래였다.
이런 힘의 차이에는 이유가 있었다.
본래 벨로로폰은 전대 마왕의 아들로, 순수한 마족의 능력과 능력복제라는 특이한 재능으로 수많은 마족들 사이에서도 가장 강력한 재능을 타고났다. 그리고 마수들 사이에서 태어난 돌연변이인 마왕 아크데몬은 불사의 능력과 바닥을 모르는 무한한 힘을 가히 벨로로폰과 자웅을 겨룰 만했다.
특이한 것은 바로 데이크란이었다.
그녀는 마계의 존재가 아니었다.
인간.
그것도 인간계에서 가장 신성한 존재인 정령왕의 무녀였다.
그녀의 원래 이름은 데이실이었다.
벨로로폰의 꼬임에 빠진 데이실은 가장 신성한 자리에서 가장 추악한 곳으로 강제로 끌려 내려와 타락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끝내는 사랑한다고 믿었던 벨로로폰에게 버림받고야 말았다.
버려지고 상처받은 데이실은 절망했다.
그리고 그 뒤틀린 원혼에 마신이 강림하였다.
마신은 데이실에게 사악한 숨결을 불어 주고 타락이라는 저주받은 이름을 내려 주었다.
그날로 데이실은 영원히 사라졌다. 오직 마왕 데이크란만 남았을 뿐이다.
차분히 세력을 키워 다시 벨로로폰에게 돌아간 그녀. 벨로로폰은 차게 웃으며 그녀를 받아들였다. 그제야 데이크란은 모든 것이 벨로로폰의 음모였음을 깨달았다.
스스로 가장 밑바닥까지 타락했다고 생각했지만, 벨로로폰이 바란 것은 그 이상이었다. 그녀는 절망 끝에 마신의 숨결을 받고 마왕이 되었고, 그제야 벨로로폰은 흡족하게 웃었던 것이다.
그는 심장이 차가운 사내였던 것이다.
마왕 데이크란.
그렇게 그녀는 마계를 지배하는 세 번째 마왕이 되었다.
그런 중에 큰 일이 터졌다.
절대자로 군림하던 마황이 사라진 것이다. 한동안 이 일로 마계는 벌집을 쑤신 듯 시끄러웠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마계는 안정되었다.
본래부터 마황은 통치엔 관심도 없었다.
그러니 설사 최고의 위치라 해도 마계에 미치는 영향은 그다지 크지 않았다.
절망의 군주, 벨로로폰이 새로운 꿍꿍이를 시작한 것은 바로 이때였다.
세 마왕의 대립과 견제.
이로써 이루어지는 살얼음판과 같은 마계의 평화.
벨로로폰은 늘 이것이 불만이었다.
당시마계엔 세 마왕 말고도 별개로 큰 세력을 형성한 자가 있었다.
마계의 무녀 퀴니.
아직 어린 소녀였던 퀴니는 마계 역사상 처음으로 마신의 보호를 받는 특별한 존재였다. 마왕조차 함부로 할 수 없는 그녀는 일종의 성역과 마찬가지였다.
벨로로폰은 퀴니를 특이하게 생각했다. 그래서 아주 어릴 때부터 그녀를 돌봐 왔다. 물론 순수한 마음에서는 아니었을 것이다. 하지만 퀴니는 벨로로폰의 시커먼 마음을 알지 못하고, 아버지를 따르듯 그를 따랐다. 그런 마음은 시간이 갈수록 다르게 변했다.
문제는 퀴니에게 관심이 있는 것이 벨로로폰만은 아니었다는 데 있었다. 마수들의 지배자, 상실의 군주 아크데몬이 퀴니에게 비상한 관심을 보였다.
더구나 그의 관심은 벨로로폰과 달리 순수했다. 마치 아비가 자식을 돌보듯 퀴니를 어여삐 여겼다.
이런 관계를 신중하게 생각한 벨로로폰은 자신의 몸을 걸고 큰판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일단 계획의 핵심은 퀴니였다.
마신의 무녀인 그녀가 존재하는 한, 마계는 마신의 그늘에서 결코 벗어날 수 없다. 벨로로폰이 원하는 것은 완벽한 혼란, 그런 세상에 마신의 간섭 따위는 불필요한 요소였다.
벨로로폰은 마왕 데이크란을 불러 계획을 말했다.
그녀에게 벨로폰은 은둔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그녀는 깜짝 놀랐다.
“당신이 사라지면 마계엔 피바람이 일 거에요. 마왕이 둘만 남게 되면 반드시 패권을 차지하기 위해 대립하게 될 테니까요.”
그녀의 우려에 벨로로폰은 잔혹하게 웃었다. 그제야 데이크란은 마왕까리 격돌하는 것이야말로 벨로로폰이 진시로 바라는 것이라는 걸 깨달았다. 데이크란은 한숨을 쉬었다.
“하지만 퀴니를 어떻게 할 거죠? 그녀는 마음이 너무 고와요. 만약 마계에 전쟁이 벌어지면 그녀는 마신에게 도움을 청하는 한이 있어도 전쟁을 막으려 들 거예요.”
“그래서 내가 가는 것이다. 내가 사라지면, 그녀는 반드시 날 찾으러 올 것이다. 그러면 마신의 방해도 없을 테지.”
컬컬한 벨로로폰의 말에 데이크란은 전신에 소름이 쫙 돋았다.
“다, 당신. 은둔하겠다는 말은 설마 퀴니를 마계 밖으로 유인하기 위한.......”
벨로로폰은 말없이 웃기만 했다. 하지만 그 흉측한 미소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한 셈이었다.
데이크란이 다시 물었다.
“어디로 갈 거죠?”
마계는 안 된다.
마계는 가장 어두운 구석까지 마신의 눈이 닿는다 .너무 쉽게 발각될 것이다.
중간계?
역시나 완벽한 은신은 불가능하다.
신계나 선계는 마계인이라면 아예 발을 들일 수조차 없는 곳이다.
고민 끝에 최후로 떠올린 곳이 바로 이계였다.
이계를 떠올린 그는 오랜 고심 끝에 어려운 결단을 내렸다.
마침 마황과 드래곤들 간의 결전으로 차원의 결계에 큰 구멍이 생겼다. 이것은 다시없는 절호의 기회다.
그 생각을 말하자 데이크란의 얼굴색이 파랗게 질려 버렸다.
“다, 당신. 미쳤군요. 죽으려는 거예요?”
신의 결계를 넘어 이계로 가는 것. 신조차도 목숨을 걸어야 하는 도박이다. 하물며 아무리 대단하다 하여도 신에 이르지 못한 존재가 감히 도전할 만한 일이 아니다.
하지만 벨로로폰은 뜻을 굽히지 않았다.
그는 유리잔에 비린내를 물씬 풍기는 피를 따라 들고 검은 뇌전이 떨어지는 창가에 앉아 환희 어린 표정을 지었다.
“궁금하지 않니?” 돌연 벨로로폰이 물었다.
“......?” “조용한 이곳이 활활 불타는 모습이 말이야.”
벨로로폰의 입술에 잔혹한 미소가 그려졌다.
그는 마왕이라는 권좌도, 절대의 권력에도 관심이 없었다. 오직 죽음과 절망의 비명소리가 듣고 싶었을 뿐이다. 그것만이 그가 살아온 이유였다.
과거의 이야기가 끝나고 시간은 어느덧 현실로 돌아왔다.
“당신의 계획은 완벽했어요. 과연 당신이 떠난 얼마 후, 퀴니는 당신을 쫓아 이계로 향했죠. 무녀가 사라지자 마신의 간섭은 완전히 배제되었고, 나와 아크데몬은 마계의 패권을 두고 처절한 전쟁을 벌일 수 있었어요.”
데이크란은 감동 받은 눈으로 그렇게 말했다.
“다만...... 한 가지 의외였던 것은, 아크데몬이 당신의 생각과 달리 퀴니를 쫓아 이계로 향했다는 거예요. 덕분에 마계는 생각보다 쉽게 평정이 되고 말았죠. 아쉬운 일이에요.”
인상을 찌푸리던 그녀는 병규를 향해 마지막 말을 남기며 황홀한 미소를 던졌다.
“그래도 역시 당신이에요. 환생한 몸으로 차원을 넘고 중간계를 전쟁의 혼란에 빠트리더니, 이번엔 다시 이곳으로 돌아왔군요. 호호호. 생각하면 할수록 정말이지 대단해요. 마계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그새를 못 참고 마물들을 부추겨 전쟁을 일으키다니. 아아. 창밖에서 들려오는 비명과 죽음의 노래가 들리나요? 기쁘지 않나요? 당신이 바라던 바로 그것이에요.”
쿵!
가슴이 무너졌다.
눈앞이 하얗게 바래고, 온몸에서 힘이 쭉 빠져 버렸다.
병규는 얼이 빠진 듯, 입을 벌린 채 의자 위로 쓰러지듯 허물어졌다. 충격의 파도가 그의 뇌리를 휩쓸고, 육신의 의지력을 앗아 갔다.
데이크란에게서 들은 자신의 과거는 충격 이상이었다.
잔인하다?
아니, 그 정도의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자였다.
그는 순결한 처녀를 타락시키고, 피를 부르는 전쟁을 유흥으로 삼았으며, 고통과 절망을 술잔에 따라 마셨다.
악마.
그야말로 악마가 아닌가.
대체 얼마나 숱한 목숨이 그의 쾌락을 위해 사라졌단 말인가.
한 가닥 남은 병규의 이성은 충격적인 과거에 그만 정신을 놓고 말았다. 이때, 놀라운 변화가 그의 몸속 깊은 곳에서 일어났다. 그가 잠시 정신을 놓은 사이, 금제되어 있던 마성이 서서히 똬리를 틀며 척수를 타고 그의 뇌를 오염시키기 시작한 것이다.
절반쯤 각성되었던 마성은 급격히 세를 확장하며 단숨에 그의 몸을 장악하였다.
“크크크크.”
음침한 괴소가 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뒤이어 축 늘어졌던 그의 몸이 스르르 일어났다.
츠즈즈즈즈즈즈.
마력이 미친 듯이 그의 몸으로 빨려 들었다.
모이고 뭉치고 폭주했다.
순식간에 그의 몸은 검은 기운으로 가득 차 버렸다.
바야흐로 완전한 각성.
호랭이가 우려하던 상황이 현실이 되어 버린 것이다.
“크크크크크크크크크크!!”
마성에 일그러진 웃음소리가 활화산처럼 터져 나왔다.
그의 미친 듯한 괴성을 들으며 데이크란은 사요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녀의 눈가에 맺힌 것은 기쁨보다는 피맺힌 원한이었다.
“자, 이제 당신 차례예요. 벨로로폰, 이제 그대가 절망을 만끽할 차례에요.”
한편 병규가 데이크란과 미묘한 만남을 가지고 있을 그 시각, 경애와 쉐이드의 싸움은 점입가경의 상황으로 접어들고 있었다.
둘의 능력은 비슷하면서도 전혀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었다.
경애가 부리는 무지개는 안개와 같아 자유롭게 형태를 바꿀 수 있고, 물리력 또한 강인해 상당한 파괴력을 자랑했다.
게다가 무지개가 품고 있는 성스러운 속성은 마족에게 있어서 치명적인 위협이라고 할 수 있었다.
그에 반해, 쉐이드는 그 자체가 그림자라,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그림자에 기생하고 자유롭게 부릴 수 있었다. 그림자를 부리는 그의 신기는 이미 경지에 이르러 칼처럼 예리하고, 송곳처럼 뾰족하며, 도끼처럼 파괴적으로 운용할 수 있었다.
이러한 쉐이드의 그림자가 유일하게 침투하지 못하는 그림자는 경애와 레종의 그림자뿐이었다.
경애가 무지개를 활용하여 결사적으로 쉐이드의 침투를 막았기 때문이다. 그녀도 자신의 긂자가 치명적인 허점으로 작용될 수 있다는 것을 직감한 것이다.
둘의 대결은 한마디로 치열했다.
쉐이드는 그림자를 수십 개의 검처럼 쏟아 냈고, 경애는 무지개를 채찍과 해머처럼 운용하며 변칙적인 그림자의 공격을 하나하나 거둬 냈다.
스릉스릉스릉.
바닥이 쩍쩍 갈라지며 그림자들이 불쑥 불쑥 솟구쳤다. 그림자의 기습을 미리 예견하고 있던 경애는 무지개를 날개로 변용해 즉시 허공으로 몸을 띄웠다. 경애가 허공으로 날아오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천정에서도 그림자 칼날이 쏟아졌다.
경애 역시 무지개를 노끈처럼 뒤쪽으로 뻗어 내며 자신과 레종을 휙 하고 끌어당겼다.
촤르륵.
위와 아래에서 내려오고 솟구친 그림자들이 이빨로 가득한 악어의 아가리처럼 콰득 마주쳐졌다.
“받아라.”
간신히 쉐이드의 암습을 피해 낸 경애가 반격에 나섰다. 무지개가 바람에 흩날리는 버들가지처럼 하늘하늘 쉐이드를 휘감아 갔다.
“고작 이 정도로는 무리입니다.”
검은 잉크가 쏟아지는 것처럼, 쉐이드의 육체가 바닥으로 허물어졌다. 무지개는 허무하게 그가 좀 전까지 서 있던 공간을 후려쳤다.
‘이번엔 어디지?’
경애는 초조한 눈으로 주위를 살폈다. 쉐이드는 어디든 그림자가 있는 곳이라면 마음대로 움직일 수 있었다.
전후좌우 상하.
어느 곳에서 공격이 날아올지 모르는 것이다.
집중을 하자 경애의 눈동자가 서늘한 한광을 뿜었다. 이때의 그녀는 기이할 정도로 이목이 밝아 전혀 예상치 못한 기습도 쉽사리 눈치 채곤 했다.
이번에도 그녀의 안력은 놀라운 신기를 발휘했다.
왼쪽에서 소름끼치는 기운이 느껴졌다. 경애는 무지개를 이용해 앞으로 신형을 죽 뽑았다.
취아악!
송곳처럼 배배 꼬여진 그림자가 방금 전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사정없이 유린했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녀는 큰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런 아쉽게 됐군요. 이번엔 확실히 성공할 줄 알았는데.”
바닥에서 일어난 쉐이드가 잘려진 경애의 머리카락을 후 불며 기분 나쁘게 웃었다.
경애의 콧잔등에 주름이 잡혔다.
완벽하게 피했다고 생각했는데, 어느 틈에 머리칼이 잘려 나간 것이다. 식은땀이 뺨을 타고 흘렀다.
이대로는 승산이 없다. 그녀는 도박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자, 또 갑니다.”
쉐이드가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그녀를 덮쳐 왔다.
노골적인 농락.
경애는 최대한 적의 수작에 걸려들지 않으려고 노력하며 슬금슬금 뒤로 물러섰다.
‘아래.’
지독한 기운이 발아래에 집중되고 있었다. 음험한 쉐이드는 정면으로 덮치는 척하면서, 실제로는 그녀의 발아래를 노리고 있었다.
물론 경애는 순순히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무지개가 쭉 하고 아래로 뻗어 나갔다. 쉐이드의 암습을 사전에 차단한 것이다. 더불어 일부의 무지개는 화살처럼 쏘아지며 비단천처럼 나폴나폴 날아오는 쉐이드의 본체를 공격했다.
쫘악.
쉐이드의 본체가 좌우로 갈라지며 무지개의 화살을 흘려보냈다. 갈라진 쉐이드의 본체는 물이 그렇듯 스륵 다시 합쳐지더니 기괴한 파문을 이루며 경애의 머리 위로 먹물처럼 쏟아졌다.
경애는 대경실색하며 레종을 안은 채 뒤로 대구루루 굴렀다.
칙 하는 소음과 함께 어깨의 살이 한 줌이나 달아나며 피가 쏟아졌다. 대응이 조금 늦었던 것이다. 하지만 경애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어깨를 당하는 그 위급한 상황에서도 경애는 슬그머니 한 무리의 무지개를 그 자리에 숨겨 두었다. 바로 발밑을 공격하던 그림자 칼날을 사전에 봉쇄했던 바로 그 기운. 그 기운을 경애는 아직 흡수하지 않았다.
쉐이드가 기고만장한 채 그녀가 서 있던 자리를 차지하는 순간, 그 한 줌의 기운은 지뢰처럼 폭발하여 쉐이드를 날려 버릴 것이다.
‘그대로 덮쳐라.’
이 한 수를 위해 경애는 어깨 부상을 감수했다. 그림자 마인을 꺾기 위해서라면 더 한 부상이라도 감내할 작정이었다.
하지만 그녀의 바람과 달리 폭포처럼 쏟아지던 쉐이드의 본체는 허공에 둥실 뜬 채 더 이상 아래로 내려오지 않았다.
‘뭐 해! 빨리 내려오란 말이야.’
초조한 마음에 경애는 속으로 소릴 질렀다.
“호오.”
거미처럼 천정에 거꾸로 매달려 있던 쉐이드의 얼굴에 장난스런 표정이 떠올랐다.
“후후. 설마 이 아래에 숨겨 놓으신 것에 제가 순순히 당하리라고 생각하셨습니까? 순진하시군요.”
그는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마음껏 비아냥거렸다.
“칫!”
일이 틀어졌음을 눈치 챈 경애는 하는 수 없이 함정을 발동시켰다. 지면에 고여 있던 한 줌의 무지개가 창처럼 솟구쳤다. 물론 쉐이드는 신형을 뒤틀며 가볍게 피해 냈다.
“쿠후후. 너무 단순하시군요. 이런 공격......”
펑!
득의의 웃음을 흘리던 쉐이드의 몸뚱이가 느닷없이 들려온 폭음과 함께 두 동강이가 되어 바닥에 떨어졌다.
"크윽. 이, 이것은 좀 전에 화살처럼 날린......“
질퍽이며 바닥에 떨어진 쉐이드가 힘 잃은 촛불처럼 신형을 떨며 신음을 흘렸다.
경애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서며 턱을 들어 보였다.
“흥. 네가 영악하다는 것은 처음부터 알았어. 그래서 함정도 이중으로 설치했지.”
“크으으. 그럼 바닥에 깔려 있던 기운은......”
“물론 너의 시선을 잡아 둘 작정으로 심어 둔 미끼였지. 진짜 공격은 아까 전에 날린 화살. 설마 쏘아 보낸 기운이 부메랑처럼 돌아올 줄은 몰랐겠지?”
“처음부터 이중 함정이었단 말이로군요.”
“맞아. 바로 그런 거야.”
경애는 두 손을 턱 하니 허리에 걸치며 짤랑짤랑 웃었다. 엄청나게 위험하고 공포스러웠던 녀석을 해치웠다고 생각하니 성취감이 하늘을 찌를 것 같았다.
긴장감이 탁 풀리며 입가에 웃음이 돌아왔다.
하지만.
“히히히히히.”
위태롭게 비틀거리던 쉐이드가 비웃음을 흘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그오오오오오!
흩어졌던 어둠이 스르르 뭉치며 악마처럼 울부짖었다.
쉐이드.
반 토막이 난 그의 몸이 천천히 재생되고 있었다.
어두운 그림자가 있는 곳은 모두 그의 영역. 그의 땅.
부서진 몸뚱이쯤은 사방에 널린 그림자를 흡수하며 순식간에 수복되었다. 폐쇄적인 절망의 탑은 쉐이드에게 사기적으로 유리한 홈그라운드였다.
“다, 당신. 속였군.”
“네, 그렇습니다. 쿠후후.”
쉐이드가 길게 읍을 했다.
“전 남을 속이는 것이 취미니까요. 아! 깜짝 놀라는 그 표정도 좋군요. 하지만 너무 무리는 마십시오. 앞으로도 비명을 지를 일은 많을 테니까요.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죠.”
쉐이드의 간교한 말에 경애는 입술을 악물었다.
“흥. 한 번으로 안 된다면 두 번, 세 번, 수십, 수백 번. 네가 없어 질 때까지 계속 때려 주겠어.”
경애가 두 팔을 좌우로 펼치자 무지개가 파도처럼 일어났다.
“이런. 또 같은 공격. 공격 패턴이 너무 단순하군요. 아함~ 지루한걸요. 전 살짝 다른 것으로 보여 드리겠습니다.”
하품을 하던 쉐이드가 장난스럽게 검지를 들어 보였다.
콰르르릉.
돌연 통로가 허물어져 내렸다.
“앗!”
경애는 급히 무지개를 회수하며 자신과 레종의 몸을 둥글게 감쌌다.
쿠콰쾅. 쿠쿠쿵.
건물 파편들이 무지개의 방어벽과 부딪히며 요란한 폭음을 터트렸다. 다행히 무지개는 하늘이 무너지는 것 같은 건물 파편들을 무사히 막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충격을 모두 분산하지는 못했다. 경애와 레종은 붕괴의 충격에 낙엽처럼 쓸렸다.
“아하. 그렇군요. 당신의 안개도 완벽한 것은 아니었군요.”
쉐이드의 그려진 듯한 두 눈이 느낌표 모양으로 변했다. 경애를 공략할 방법을 찾은 것이다.
“자. 자. 기대하십시오. 드디어 악마의 졸개 쉐이드군이 용사파티인 가짜무녀님을 저세상으로 보내 드릴 금단의 비법을 찾아냈습니다.”
의뭉스럽게 말한 쉐이드가 턱을 쓰다듬던 손가락을 툭 펼치자, 그의 발아래 그림자들이 징그러운 벌레처럼 사방으로 흩어졌다. 잠시 후, 절그럭 소리와 함께 탑의 여기저기에 진열되어 있던 각종 무기들이 그림자에 이끌려 왔다.
“후후. 웬 잡동사니냐는 표정이시군요. 아닙니다. 이래 봬도 마계의 장인들이 공들여 만든 명품들이랍니다. 물론 잠시 후면 잡동사니가 되겠지만 말입니다. 그래도 당신을 쓰러트릴 도구로 사용될 운명이니, 모두 영광으로 생각하겠지요. 쿠후후.”
“......?” 경애는 쉐이드가 무슨 수작을 부리는지 몰라 눈살만 찌푸렸다. 하지만 기다림은 결코 길지 않았다.
쉐이드가 그림자를 이용해 병기들을 일일이 허공에 띄우는 순간, 그녀는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호오. 눈치 채신 표정이시군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전 지금부터 이 무기를 당신과 레종 여왕~ 님께 던질 겁니다. 자, 그럼 시작해볼까요?”
말이 끝남과 동시에 온갖 보석으로 치장된 창을 시작으로 각양각색의 무기들이 두 사람을 향해 날아들었다.
일일이 치워버리기엔 수가 너무 많았다. 어쩔 수 없이 경애는 무지개를 둥근 막처럼 펼치며 방어에 전념했다.
“바로 이걸 기다렸지요.”
쉐이드는 그림자들을 부려 병기들을 경애의 무지개 앞에 일렬로 세웠다. 그리곤 망치로 못을 박듯 병기들을 하나씩 순서대로 무지개 안으로 때려 박기 시작했다.
물론 무지개는 내부로 침입한 병기들을 한순간에 바스러트렸다. 하지만 무지개가 병기들을 바스러트리는 시간보다, 병기들이 무지개 속으로 파고드는 시간이 훨씬 짧았다.
꼬리에 꼬리를 물며 파고드는 병기들은 방어벽을 차곡차곡 뚫고서 어느새 경애의 코앞까지 밀려들었다.
“헉헉.”
무지개로 병기들을 걷어 내는 경애는 숨이 턱에 차올랐다. 그러나 전력을 기울여도 병기들의 행렬을 저지할 수 는 없었다.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음에도 어느새 눈앞을 찔러 온다.
죽음이 눈앞까지 밀려왔는데 피할 방법이 없다.
가슴속의 심장은 금방이라도 터질 것처럼 벌렁거렸다.
바로 이때.
희끄무레한 그림자가 그녀를 밀치며 앞으로 나섰다.
푹!
섬뜩한 소음.
“언니!”
경애의 입에서 피맺힌 절규가 터져 나왔다.
그녀를 치고 무지개 안으로 파고든 검을 몸으로 막아낸 것은 다름 아닌 레종이었다.
레종이 처연한 얼굴로 뒤를 돌아보았다.
누물이 그녀의 뺨을 적시고 턱 아래로 방울졌다.
그녀의 등을 뚫고 삐죽 튀어나온 피로 물든 검끝이 흉물스럽게 비틀거리고 있었다.
찌극. 찍.
검끝이 등을 가르며 차츰 밀려나온다.
주륵.
레종의 입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아아...”
경애는 턱을 덜덜 떨며 몸서리를 쳤다.
너무 가혹해.
꿈이라면 제발 깨워 줘.
이건 너무 잔인하잖아.
왜 내 눈에 이런 장면을 보여 주는 거야.
이 빌어먹을 운명의 신아!
경애는 비명을 질렀지만, 목이 멘 그녀의 입술은 끅끅거리는 울음만을 토해 냈을 뿐이다.
“이런 엉뚱한 고기가 걸려들었군요. 하지만 뭐, 괜찮습니다. 누가 먼저가 되든 상관없으니까요. 조금만 기다리시면 됩니다. 제가 사이좋게 보내 드리죠.”
쉐이드가 사이하게 웃었다.
드드드드드.
무지개를 압박하던 무기들의 추진력이 배가되었다.
그 진동에 레종의 등은 더욱 크게 갈라졌다.
옷을 타고 흐르던 피가 이제는 샘물처럼 뿜어져 나왔다.
최후를 실감한 레종이 가만 눈을 감았다.
경애는 어떻게든 그녀를 살리기 위해 코피가 터질 정도로 힘을 쏟았다.
하지만 역부족이었다.
조용히 레종이 눈을 떴다.
그 눈이 말했다.
이제 괜찮다고. 그만 편안하게 해달라고.
“안 돼. 싫어요. 제발.”
경애는 고개를 흔들며 떼를 썼지만, 그녀 스스로도 이게 한계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결국 레종의 서글픈 눈빛에 눈물을 뿌리며 힘을 풀었다.
그리고선 가만 그녀의 몸을 끌어안았다.
레종은 놀라는 듯 눈을 크게 떴지만 곧 따뜻하게 웃었다.
마지막 순간까지 그를 보지 못하는 것은 가슴 아프지만, 착하고 귀여운 소녀와 함께 떠나는 길은 최소한 외롭지는 않을 것이다.
고마워요. 그리고 미안해요.
하늘에서 당신을 지켜볼게요.
사랑하는 그를 떠올리며 레종은 몸에 힘을 뺐다.
스륵.
무지개가 사라졌다.
이제 차가운 무기들이 그녀들의 몸을 꼬치 꿰듯 관통할 것이다. 그리고 슬픈 죽음과 차디찬 두 여자의 시신만이 남게 되겠지.
그러나...
이상하게도 최후의 그때는 오지 않았다.
놀랍게도 집요하게 레종의 가슴을 헤집던 검이 힘을 잃은 채, 파르르 떨고만 있는 것이었다.
의문을 느낀 경애는 급히 앞을 보았다.
“핫!”
그녀의 입에서 짧은 신음성이 흘러나왔따.
쉐이드.
지옥의 악마처럼 히죽거리던 타락의 혈계.
잔인하고 포아갛며 교활한 쉐이드가 지금 누군가으 손에 목을 잡힌 채 발버둥을 치고 있었다.
쉐이드를 거머쥔 손의 그림ㅈ가 분노에 찬 일갈을 날렸다.
“찾았다. 요놈. 역시나 나쁜 짓을 꾸미고 있었구나.”
허리까지 내려오는 백발을 휘날리는 그는 호랭이였다.
“있었어.”
경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있었어. 있었다고. 정의의 사자 말야. 위기의 순간 뿅 하고 나타나는 정의의 사자가 있었다고. 언니! 언니! 봐요. 저 사람요. 우릴 구해 주러 왔어요. 기적이 일어났다고요.”
그녀는 너무도 기뻐 레종의 손을 잡고 팔짝 팔짝 뛰었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는 쯧쯧 혀를 찼다.
“무슨 헛소리냐? 하여간 넌 예나 지금이나 엉뚱한 건 여전하구나.”
“에?” 백발의 청년이 자신을 보고 아는 척을 하자 경애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어라? 저 아세요?” “당연하지 내가 왜 널 몰라!”
호랭이는 버럭 성을 냈다.
아무리 오랜만에 봐도 그렇지. 어떻게 가족처럼 지내던 자신을 못 알아볼 수 있는가.
하지만 경애는 더더욱 아리송한 표정이 되었다.
처음 보는 사람이다.
저런 미남이면 절대로 잊어버렸을 리 없을 텐데.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 봐도 그를 어디에서 봤는지 기억나지 않았다.
사실 이것은 경애의 잘못이 아니었다.
경애는 둔갑한 호랭이를 처음 보는 것이기 때문이다.
“레종이 많이 다쳤구나. 빨리 돌봐 주어라. 이놈은 내가 맡도록 하마.”
그 말에 경애는 앗 하고 비명을 지르며 레종을 살폈다. 그러고 보니 살아났다는 생각에 잠깐 레종의 상태를 잊고 있엇다.
레종은 출혈과다와 쇼크로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워낙에 흘린 피가 많아 위험했다.
경애는 무지개로 벽돌을 갈아 곱게 가루로 만든 후, 레종의 가슴에 박힌 검을 조심스럽게 뽑았다.
왈칵 피가 솟구쳤다.
경애는 급히 돌가루를 수북이 뿌려 출혈을 막고 상의 찢어 환부에 감았다.
급한 김에 생각나는 대로 한 응급조치였지만 다행히 치명적인 위기는 넘길 수 있었다.
쉐이드와 호랭이는 무서운 격전을 벌였다.
잠시 호랭이의 손아귀에 잡혀 있던 쉐이드는 그림자를 칼처럼 뿌리면서 간신히 호랭이에게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의 공격은 참으로 다양했다.
그림자를 때로는 비처럼 뿌리고, 때로는 검처럼 베고, 때로는 창처럼 뻗고, 때로는 거대한 철추처럼 휘둘렀다.
호랭이는 갖가지 함정으로 가득 찬 암실에 갇힌 것처럼 숱한 위기를 맞았다. 하지만 그는 위축되기는 커녕 오히려 호기가 솟는지 휘파람을 불며 여유로운 산바람처럼 쉐이드의 공격을 모조리 피해 냈다.
단지 공격을 피할 뿐만 아니라, 간간히 도술을 사용해 불기둥을 불러일으키며 쉐이드에게 깊은 타격을 안겼다. 그러나 쉐이드는 막중한 타격 속에서도 불가사의한 생명력을 계속해서 부활했다.
시간이 흐를수록 호랭이는 마음이 급해졌다.
격전 중 언뜻 본 레종의 상처가 심상치 않았다.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돌이킬 수 없는 상황이 되리라.
마음은 급한데 쉐이드는 쉽게 잡히지 않았다.
과연 타락의 자식들 중 최강이라 불리는 존재.
쉐이드는 다른 혈게들과는 비교도 안 될 만큼 강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그림자라는 그의 능력은 가히 불사신과 같아서 조그만 그림자 조각만 남아도 원래의 몸으로 금세 회복했다. 호랭이는 쉐이드보다 월등히 강했지만 이런 불사능력 때문에 고전을 면치 못했다.
“제기랄 녀석. 그만 죽어라. 파멸의 창!”
호랭이는 욕지기를 쏟아내며 두 손을 머리 위로 올렸다.
받쳐 든 손 위로 장엄한 서기가 깔리더니 장렬한 은빛 광채를 머금은 뇌룡이 꿈틀꿈틀 일어났다.
파멸의 창.
여간해선 쓰지 않는 패도의 극을 달리는 도술이다.
“으으.”
찬란한 뇌룡의 기운에 쉐이드도 두려움을 느꼈다.
그의 얼굴에서 여유가 사라진 지는 이미 오래. 이제는 목숨마저 위태롭다고 느끼고 있었다.
“이 징그럽게 끈질긴 녀석. 마지막이다!!”
호랭이가 두 팔을 휘두르자, 은빛 뇌룡은 한 마리의 광룡이 되어 쉐이드를 콰득 물었다. 워낙에 뇌룡의 크기가 크고 속도가 빨라, 도저히 피할 틈이 없었다.
뇌전으로 이루어진 뇌룡은 그 자체가 이미 하나의 커다란 빛. 그림자인 쉐이드에게는 치명적이었다.
“크아아아아악.”
거대한 에너지에 통째로 노출된 쉐이드는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콰르르릉.
폭주하는 뇢ㄴ의 힘은 돌벽을 가루로 만들고, 대기를 하얗게 불태웠다.
휘이이이이이~
뇌룡이 진간자리는 폐허만이 남았을 뿐이다.
“헉헉. 징한 놈. 이젠 죽었겠지.”
호랭이는 바닥에 누운 채 숨을 헐떡였다.
뇌룡을 부리느라 너무 많은 도력을 소비했다.
“와아.”
경애가 두 눈을 휘둥그래 뜨며 놀랐다.
세상에나! 용이 튀어나오다니.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일이다. 백발 청년의 두 손에서 용이 쏘아진 것도 놀라운 일이지만, 용이 휘젓고 난 후의 폐허는 더더욱 놀라웠다.
단 한 번의 기술에 통로가 통째로 날아갔다.
거대한 절망의 탑의 구조 자체가 변해 버렸을 지경이다.
신기한 것은, 그렇게 강력한 뇌룡의 파괴력이 경애와 레종의 주위를 용케 피해 갔다는 것이다. 마치 넓은 강에 위치한 작은 섬처럼 두 사람이 있는 자리만이 멀쩡했다.
호랭이가 둘을 위해 얼마나 노력을 기울였는지 짐작할 수 있는 대목이다.
“레종은 좀 어떠냐?”
간신히 기력을 회복한 호랭이가 근두운을 불러 타고 경애에게 다가와 물었다.
경애의 표정이 급격히 어두워졌다.
응급처치를 했지만 레종의 상태는 극히 좋지 못했다. 가늘게 맥이 뛰고 있었지만 언제 끊어질지 모르는 상황이다.
상처도 상처지만 출혈이 너무 심했다.
“내가 보마.”
경애를 밀쳐 낸 호랭이는 레종의 손목을 잡고 맥을 짚었다.
“어때요?” 다급한 표정으로 경애가 물었다. 그녀의 눈동자에 걱정과 근심이 가득했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는 실없는 웃음이 픽 새어 나왔다.
“그렇게 걱정되냐? 이 녀석이 혼자 납치되어서 걱정을 많이 했더니, 다행히 너와 줄곧 함께 있었던 모양이구나.”
경애는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아니에요. 언니와는 오늘 처음 만났어요.”
“엥? 그런데 왜 이렇게 친한 거야? 설마 한눈에 반했다거나 한 건 아니겠지?”
호랭이가 황당한 표정으로 묻자 경애는 쑥쓰러운 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에헤헤. 어디 사람이 친해지는 데 꼭 시간이 필요한가요? 생면부지라도 마음만 맞으면 금방 친해질 수 있는 거죠.”
호랭이가 묻는 말에 꼬박꼬박 답하던 경애는 문득 생각나 듯, 입술을 뾰족 내밀며 볼멘소리로 구시렁거렸다.
“그런데 절 언제 봤다고 반말이에요? 나보다 나이도 별로 안 많아 보이는데.”
경애의 말에 호랭이는 기가 찼다.
“허. 내가 왜 너와 나이차이가 안 나? 적어도 수백 살은 차이가 나는구먼. 그리고 처음 봤다고? 허허허. 황당하구나. 너 혹시 치매라도 있는 게냐?”
“처음 본 사람보고 처음 봤다고 그러지, 그럼 우리 어디서 만난적 있죠? 하고 물어봐요? 설마, 지금 저에게 작업 거는 거예요? 안돼요. 전 이미 찍어 놓은 남자가 있단 말예요.”
경애는 당장이라도 호랭이가 덮칠 거라 느꼈는지 두 손으로 가슴을 감싸며 주춤 물러섰다.
“미치겠군.”
경애의 엉뚱함에 호랭이는 머리를 벅벅 긁었다. 가끔은 이 꼬마 아가씨가 머리가 모자란 것은 아닌지 의심이 될 지경이다. 그러다 문득 호랭이는 둔갑한 자신의 모습을 경애가 처음 본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이런, 이제 보니 모자란 것은 경액 아니라, 바로 내가 아닌가.”
자신의 머리를 콩 쥐어박은 호랭이는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키며 경애에게 말했다.
“어험. 미안하구나. 둔갑술을 사용한 걸 깜빡 잊었어. 나다. 호랭이. 전혀 못 알아보겠니?”
“에에?”
경애으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정말? 정말? 호랭이야?” 신기한 눈으로 호랭이를 보고 또 보았다. 어지간히 믿기지 않는 모양이다.
하긴 조그만 고양이 같던 호랭이가 갑자기 미끈하게 잘 빠진 미청년이 되어 나타났으니, 놀라는 것도 당연할 것이다.
괜히 무안해진 호랭이는 허허로운 웃음만을 흘렸다. 그러다 경애의 눈을 보게 되었다.
눈 안에 눈동자가 두 개씩 들어가 있었다.
“엇?”
호랭이는 이 기묘한 눈동자에 깜짝 놀라 경애의 얼굴을 두 손으로 붙잡으며 자세히 들여다보았다. 그의 갑작스런 행동에 경애는 어쩔 줄 몰라했다.
“아, 아이참. 아무리 오랜만에 만났어도, 뽀뽀는 곤란해. 게다가 지금은 모습도 변해서 왠지 사람 같단 말야. 쑤, 쑥스럽잖아.”
싫다고 하면서도 입술은 뾰족 내민다.
몸과 마음이 따로 노는 대표적인 케이스라고 할 수 있었다.
“가만있어 봐라, 이것아. 뭔 잡소리가 그리도 많냐?”
경애가 헛소리를 하거나 말거나 호랭이는 그녀의 눈을 자세히 들여다보는 데만 집중했다.
“중명(重明)의 새. 허허. 이제 보니 너 중명의 새의 환생이로구나. 어쩐지 범상치 않다고 했지. 어라? 귀차(鬼車)의 기운도 보이네. 하여간에 너도 평범하진 않구나. 신성한 신수가 잡귀의 능력을 타고났으니. 아무래도 네가 환생한 것은 그 잡귀의 기운을 떨치기 위해서 인 것 같구나.”
경애는 호랭이가 자신의 생각과 달리 구차한 이야기를 늘어놓자 살짝 실망했지만, 곧 중명의 새라는 것에 관심을 기울였다.
“중명의 새? 그게 뭐야?”
“중명의 새란 말이지. 에...... 뭐, 쉽게 말하자면 성스러운 새의 일종이야. 그런데 너 왜 나한테 반말이야? 너랑 나랑 나이차이가 얼마인지 알아?”
호랭이으 윽박지름에 경애는 배시시 웃었다.
“에이참. 우리 사이에 무슨 존대는. 그냥 예전처럼 편하게 말하자.”
“끙. 이런 예의범절을 엉덩이로 배운 녀석 같으니라고. 하여간 요즘 젊은 것들은 싸가지가 없어요, 싸가지가.”
“알았어. 알았어. 존대든 싸가지든 나중에 시간 나면 생각해 볼게. 지금은 언니의 증상부터 말해 줘. 괜찮을 것 같아?”
“허험. 뭐, 꽤 안 좋은 상황이긴 하다만. 내 도술이라면 어떻게든 될 것 같구나.”
어떻게든 될 것 같다는 말에 경애의 표정이 확 살아났다. 마치 활쫙 필 목련꽃처럼 단아하면서도 화사했다. 호랭이는 갑자기 눈이 부시는 것 같았다.
‘이 녀석 이제 보니 꽤.......’
원래 경애는 상당한 미인이었으나, 그동안 워낙 수수하게 다녀서 미모가 빛을 발하지 못했다. 그런데 내내 걱정하던 레종이 괜찮을 거라는 말에 자연 마음이 풀어지면서 깊숙이 숨어 있던 매력이 활짝 살아난 것이다.
그 미모가 얼마나 대단했던지, 신선인 호랭이조차 놀랄 지경이었다.
“뭐야. 왜 그렇게 쳐다보는 거야? 내가 어디 아파 보여? 아픈 건 내가 아니라 언니란 말야. 어서 치료하지 않고 뭐 하는 거야!”
경애가 새초롬하게 눈을 흘겨 뜨며 쏘아대자 호랭이는 헛기침을 삼키며 레종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러면 서도 방금 전에 자칫했으면 신선의 도를 깨트릴 뻔했다는 생각에 식은땀을 흘렸다.
‘휴우. 중명의 새가 미혹의 능력도 가지고 있었나? 이거 위험하군. 위험해. 신선인 내가 이럴진대. 보통 인간들은 방금 전 이 녀석의 얼굴을 보면 어떤 반응을 보일꼬. 무섭구나. 무서워. 아직 다 자라지도 않은 꼬맹이가 이 정도라니. 허허허허.’
한바탕 너털웃음을 터트린 호랭이는 두 손을 모아 레종의 가슴위에 올리며 나직이 도문을 외웠다. 그런데 돌연 경애가 벌떡 일어나더니 발로 그의 뒤통수를 후려 차며 버럭 성을 내는 것이 아닌가.
“이런 엉큼한 녀석. 아무리 네가 인간이 되었다고 해도 그렇지. 감히 기절해서 무방비인 언니의 가슴을 함부로 주물떡거리려고 해!!”
강력한 그녀의 일격에 두 바퀴나 데굴데굴 굴러간 호랭이는 정신이 오락가락했다. 간신히 어리어리한 정신을 수습하고, 이 어여쁜 것이 왜 이리 성질일꼬 하고 가만 들어보니, 어처구니없는 오해가 아닌가.
이에 화가 난 호랭이는 도포를 걷고 손을 흔들며 노발대성을 질렀다.
“이런 싸가지를 미역국에 말아 먹은 잡것을 봤나. 내가 언제 이조막막한 아이의 가슴을 주물떡거렸단 말이냐. 치료를 위해서 가슴에 손을 올린 것이 네 눈에는 엉큼하게 보였더란 말이냐? 이런 요망한 것. 엉큼한 것은 내가 아니라 바로 네년이다. 이것아!”
호랭이가 버럭버럭 화를 내자 경애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의심 가득한 눈빛으로 물었다.
“정말이야? 정말로 치료를 위해서 그랬던 거야? 이만큼도 사심이 없었던 거야? 정말로? 정말로 개미 눈곱만큼도 이상한 생각을 안 품었던 거야?” “당연하지. 정말이다. 내가 미쳤나. 어허. 돌아 버리겠네. 넌 날 뭘로 보는 거냐! 이래 봬도 신선이다, 신선. 아! 신선이라구.”
호랭이가 격렬한 어조로 대꾸하자 여태 의심스런 눈으로 보던 경애가 이번엔 입꼬리를 살짝 비틀어 올리며 한심스럽다는 듯이 하는 말.
“호랭이. 설마 어디에 문제 있는 거야? 다 큰 처자를 보고도 아무 생각이 안 나다니. 언제 날 잡아서 병원에 가봐. 하긴 오래 살았다니 문제가 생길 만도 하겠구나. 오호호호.”
빠직!
혼자 고개를 끄덕이며 ‘큰일이야. 가뜩이나 인구가 줄어드는 판에 저 청춘에 고물이라니. 에효. 옛날 같았으면 축구 응원단을 만들어도 부족할 청춘에. 에효. 에효. 에효효효효.’ 라고 말하는 경애의 말에 호랭이는 갑자기 없던 혈압이 치솟아 올랐다.
“무릉의 샘을 줄지니, 육신의 고통과 아픔은 그만 벗어 버리거라.”
호랭이가 레종의 가슴을 짚으며 노랫가락처럼 흥얼거리자, 손바닥에 찬연한 빛이 어렸다. 그 성스러운 기운은 레종의 가슴을 통해 온몸을 휘돌며 어그러지고 괴반한 곳을 바로잡아 주었으며, 죽은 듯 잠자고 있는 신체를 활성화시켜 부족한 것을 채우고, 넘치는 것을 체외로 방출 시켰다.
이렇게 반시간 정도 용을 쓰니 생과 사의 갈림길에서 헤매던 레종이 눈을 뜨고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언니!”
레종이 일어나자 경애가 대뜸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레종은 그녀를 안고 토닥이면서도 어떻게 된 일인지 몰라 어리둥절해 하였다.
분명 자신은 검을 맞고 죽었는데, 깨어나 보니 멀쩡한 것이 아닌가. 혹시 방금 전의 일이 꿈이었나 생각도 해 봤지만 황폐한 주위 풍경이 너무도 낯익었다.
먹구름으로 가득한 하늘, 구름 사이를 명멸하는 검은 뇌전들.
칙칙하고 차가운 바람.
마계가 분명했다.
“내가 어떻게 살아있는 거지?”
레종이 혼란스런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경애는 비록 근가 하는 말을 못 알아들었지만, ‘중명의 새’가 가진 능력으로 그녀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는 눈치 챌 수 있었다.
“호랭이가 죽다 살아난 언니를 살려 줬어요.”
신나게 말을 마친 그녀는 돌연 눈을 게슴츠레 뜨더니 그녀의 귓가에 소곤거렸다.
“엉큼하게 가슴에 손을 대려기에 제가 말렸어요. 다행히 별다른 수작은 안 했으니까 걱정 안 해도 돼요. 물어보니 글쎄 불능이래요, 불능. 저 얼굴에 너무 안됐어요. 그죠? 그죠?”
“에라이. 다 들린다. 이것아. 그리고 내가 언제 불능이라고 했어?”
가만 듣고 있던 호랭이가 경애의 머리를 콩 하고 쥐어박았다. 가볍게 때린 것에도 경애는 죽는다고 비명을 질렀다.
“무슨 엄살이야?”
“엄살 아냐. 봐봐! 혹이 생겼잖아. 무슨 남자가 여자에게 그렇게 인정사정이 없어! 너무해.”
과연 손으로 들어 보인 이마에 작은 혹이 불거져 있었다.
“에라이. 멀쩡한 신선을 불능으로 만든 것에 비하면 약과지 뭘 그래?”
“치이. 너무해. 그냥 농담한 것인데.”
경애가 혹을 쓰다듬으며 훌쩍거리자 호랭이는 쯧쯧 혀를 차댔다. 그 모습을 가만 보고 있던 레종이 곱게 웃으며 시원한 음성으로 호랭이에게 인사를 건넸다.
“이제 보니 호랭이님이시로군요. 이곳에서 다시 뵙게 될 줄은 몰랐습니다.”
“아아. 나에게 고마워할 필요는 없네.”
호랭이는 손사래를 치며 겸손해했다.
잠깐 어색한 공기가 흘렀다.
경애는 레종의 품에 안겨 힐끔힐끔 호랭이를 돌아보며 뭐라 뭐라 속닥이는데, 아무래도 좋은 소리는 아닌 모양이다.
괜히 겸연쩍어진 호랭이는 헛기침만 연발하다 문득 생각난 듯 조용히 말했다.
‘참. 병규, 그 녀석도 나와 함께 왔네.“
“네? 변기님이요?”
“병규 오빠가?”
레종과 경애 두 여자가 동시에 대답했다. 밝은 표정으로 대답한 두 사람은 서로를 돌아보고 나서야 뭔가 문제가 살짝 꼬여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 저기 혹시 언니......”
“변기씨와 아는 사이니?” 이번에도 동시에 말을 주고받은 두 여자. 돌연 어색한 바람이 휘잉 불어왔다.
“에효. 그놈은 여자 복이 있는 건지 없는 건지. 제대로 된 여자는 하나도 없는데, 골치 아픈 인연은 왜 이리 여기저기 넘쳐나는 건지. 쩝.”
호랭이가 머리를 긁적이며 난감해했다.
하지만 비록 두 여자 사이의 우정에 살짝 빗금이 그어지긴 했지만 나름대로 행복한 결말이었다.
이 때, 이 순간만큼은 레종도, 경애도, 호랭이도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착각은 곧이어 들려온 괴현상과 함께 망각의 저편으로 사라지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