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명의 새, 그림자와 싸우다
병규가 마왕 데이크란과의 충격적인 대면을 하고 있을 때, 경애는 레종에게서 충격적인 이야기를 듣고 있었다.
“여기가 마계라고요? 지옥과 같은 곳이라고요?”
경애는 상상도 못했다는 듯 호들갑을 떨었다.
“어쩐지 이상하게 생긴 사람이 많다 했어.”
지금까지 다른 세계니 그런가 보다 생각했다. 그래서 돼지와 황소가 두 발로 걸어 다니고, 뱀 머리에 곤충 몸을 한 요상한 생물이 하늘을 펄펄 날아다녀도 마냥 태평하게만 생각했다.
하지만 막상 레종의 이야기를 들으니 상황은 그녀의 상상보다 훨씬 심각한 것이 아닌가. 무엇보다 이곳이 사람을 잡아다 고문하고 잔인하게 죽이는 것을 즐기는 마족들의 땅이라는 것에 두려움을 느꼈다.
납치되어 왔다는 레종의 가련한 사연도 그녀의 마음을 움직이는데 일조했다.
“우리 함께 이곳에서 도망가요, 네? 언니.”
경애는 레종의 두 손을 꼭 잡고 다짐했다. 레종은 바싹 마른 입술로 힘없이 웃었다.
잔ㅇ니한 마족이 우글거리는 마계를 힘없는 여자 둘이서 탈출하기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그녀는 이미 생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하지만 힘없는 자신을 챙기려 하는 그녀의 마음만은 고맙게 느껴졌다.
“가요, 언니.”
이곳이 마계라는 것을 알게 된 후로 경애는 이 탑에 잠시도 머물고 싶지 않았다. 지금까지 아무것도 모른 채 태평하게 살았던 것이 한심스럽게 느껴질 지경이다.
경애는 다리의 힘이 풀린 레종을 끌다시피 하며 길고 긴 복도를 뛰었다.
그동안 리모델링을 한답시고 탑의 이곳저곳을 들쑤시고 다닌 덕에 내부 구조는 빠삭하게 꿰고 있었다.
하지만 얼마 못 가 그녀들은 복도를 가로막은 토돈족들과 마주치고 말았다.
“꾸륵. 찾았다. 이간 여왕.”
“무녀님. 실수다. 끅. 인간 여왕을 돌려줘야 한다.”
“쉐이드님이 화났다. 그분 화나면 무섭다.”
토돈족들은 코를 끅끅거리며 레종을 넘겨줄 것을 요구했다.
‘생각보다 빨리 들켰네.’
경애는 혀를 살짝 내밀었다.
안 들키고 탑을 빠져나갈 생각이었는데, 역시나 지나친 기대였나보다.
레종과 맞잡은 손이 아파 왔다. 긴장한 레종이 그녀의 손을 꼭 잡은 것이다.
“걱정 말아요, 언니.”
경애는 빙긋 웃으며 그녀를 위로했다.
굳이 레종 때문이 아니더라도, 들켰다고 이대로 얌전히 잡혀 줄 생각은 전혀 없었다.
“우린 이곳을 나갈 거야. 다치게 하고 싶지 않으니, 막지 마.”
경애가 두 손을 좌우로 펼치자, 안개 같은 기운이 희끄무레 일어났다.
“무섭다.”
“끄, 끄륵!”
토돈들은 두려워하며 뒷걸음질쳤다.
무녀의 안개가 얼마나 무서운지 이미 몇 번이나 본적이 있었다. 저 안개에 휩싸이면 대단한 능력을지닌 상위마족도 목을 움켜쥔 채 죽어 버렸다.
경애는 이 살인안개를 무지개라고 불렀다. 지금은 살인밖에 할 줄 모르는 살인안개지만, 언젠가 안개 속에서 예쁜 무지개가 펼쳐지길 바라는 마음에서였다.
경애는 한 손으론 레종의 손을 잡고, 다른 한 손으론 무지개를 조종하며 토돈들의 포위를 뚫었다. 그러나 채 몇 걸음 가기도 전, 사이한 기운이 주위를 뒤덮었다.
“쿠후후. 무녀님, 어딜 그리 급하게 가시는 겁니까?” 창가의 그림자에서 쉐이드가 쓱 일어났다.
“흡.”
쉐이드를 본 레종은 흠칫 놀라며 어깨를 움츠렸다.
덜덜. 본능적으로 몸이 떨려 왔다.
그녀를 마계로 납치해 온 것이 바로 쉐이드. 그리고 오는 내내, 말로 표현 못할 온갖 방법으로 그녀의 정신을 황폐하게 만들었다.
“음. 시꺼먼 아저씨네.”
편견 없이 사람으 대하는 경애도 쉐이드만큼은 꺼림칙했다.
“이런, 이런. 무녀님, 이러시면 정말이지 곤란합니다. 아무리 당신이라도, 그녀를 데려갈 순 없어요. 그녀는 특별감시대상이거든요.”
쉐이드는 과장되게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어 보였다. 그 입가에 맺힌 사악한 미소.
그 미소를 본 순간, 경애는 쉐이드가 마음에 들지 않았던 이유를 깨달았다.
가식.
쉐이드의 몸짓과 대사는 모두 가식이다.
배우의 연극과 다를 바 없는 거짓.
녀석은 마음 깊이 내재된 사악함을 매끄러운 웃음으로 가리고 있는 것이다. 경애의 속마음은 쉐이드의 그런 가식적인 마음을 용케 눈치 채고 있었던 것이다.
‘징그러워.’
경애의 눈에 비친 쉐이드는 비린내를 심하게 풍기는 한 마리의 거대한 뱀과 같았다. 더불어 덜덜 떨고 있는 레종의 모습이 가여워 보였다.
괜히 짜증이 치밀어 올랐다.
‘대체 그동안 언니를 얼마나 괴롭혔으면.’
짜증은 곧 증오로 변질되었다.
“후우.”
차분히 숨을 고르며 마음을 진정시킨 경애는 잔잔한 눈동자로 말했다.
“우린 탑에서 나갈 거야. 그러니 비켜 줘.”
“아! 그러신가요?” 쉐이드가 사람 좋은 미소로 빙그레 웃었다.
하지만 표정과 달리 그의 입을 비집고 나온 말은 명백한 거절이었다.
“죄송하지만 그것만은 안 되겠군요.” 예의 바른 행동과 밝은 웃음으로 잔뜩 기대를 갖게 하고선, 일언지하에 거절한다. 그리고 실망하는 상대의 모습을 즐긴다. 그의 독특한 취미였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경애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 정도에 실망을 느끼기엔 그녀가 살아온 인생이 결코 녹록치 않았다.
고아원에 내버려졌을 때에도, 간신히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맨몸으로 사회에 뛰어들었을 때에도, 없는 돈에 간신히 시작한 시장 골목의 좌판을 행상인들의 텃세로 시궁창에서 되찾았을 때에도 그녀는 좌절하지 않았다.
“좋아. 다쳐도 몰라요.”
경애는 자세를 잡으며 당차게 외쳤다.
쉐이드는 비실 웃었다.
그림자의 얼굴에 맺힌 하얀 미소.
외딴길에서 만난 나이프처럼 섬뜩했다.
“이얏!” 경애는 두려움을 몰아내듯 크게 소리치며 손을 쭉 뻗어 냈다. 그녀 주위에 일렁이던 무지개가 양떼구름처럼 우르르 흩어졌다.
쉐이드의 신형이 아래로 푹 꺼졌다. 휘익 몰려간 무지개가 쉐이드가 사라진 자리를 둘러쌌다.
“역시 빠른걸.”
경애는 손가락을 마주치며 아쉬워했다. 그녀가 무지개라는 능력을 각성한 것은 극히 최근의 일이다. 그나마 무지개를 지금처럼 다룰 수 있게 된 기간은 그 보다 짧았다.
“빨리 가요.”
그녀는 급하게 레종을 잡아끌며 무작정 달렸다.
경애는 허둥대며 어쩔 줄 몰라하는 토돈들을 밀쳐내며 계단으로 뛰어내렸다. 경황없는 중에도 그녀는 비교적 밝은 곳으로만 달렸다.
쉐이드는 그림자.
그림자가 진 곳이면 어디든 마음대로 이동할 수 있었다.
두 사람이 막 계단의 입구에 도달했을 때였다.
경애의 그림자에서 쑥 하고 팔 하나가 솟구쳤다.
“앗!”
경애는 짤막한 비명을 지르며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운동신경이 뛰어난 탓에 느닷없이 솟구친 검은 팔을 간신히 피해 낼 수 있었다. 하지만 뒤따르던 레종은 피하지 못하고 그만 발목을 잡히고 말았다.
“떨어져! 징그러운 녀석.”
경애가 소리치자 무지개가 채찍처럼 뻗어 나가 레종의 발목을 잡은 검은 손을 휘감았다.
우르릉.
청둥소리가 울리자 그림자 속엣 솟아난 검은 손이 모래처럼 흩어졌다.
“언니, 어서.” 경애는 레종의 손을 황급히 잡아끌며 둥글게 이어진 계단의 빈 공간으로 풀쩍 뛰어내렸다.
“크으으.”
무지개가 머물던 자리에서 쉐이드가 스르르 일어났다. 그의 얼굴에 장난같이 그려진 표정이 잔뜩 일그러져 있었다.
“설마 내 몸에까지 타격을 줄 수 있을 줄이야.”
무지개에 닿았던 그의 손은 칼로 잘려진 것처럼 깔끔하게 사라지고 없었다.
“이대론 곤란하겠군.”
쉐이드의 시선이 구석으로 향했다.
건물의 그늘진 곳에서 그림자가 주르륵 밀려와 잘려진 곳에 울컹울컹 달라붙더니 곧 새로운 손이 되었다.
“무녀의 그 능력. 생각보다 성가시겠는걸.”
경애의 무지개를 떠올리며 쉐이드는 불쾌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쉐이드의 몸은 그림자라 일반적인 물리타격은 그대로 통과시켜 버린다. 마법에 대한 내성도 강하여 사대 원소를 기반으로 한 마법들에는 아무런 영향을 받지 않았다.
그런데 오늘 그런 법칙이 깨졌다.
경애가 사용하는 살인안개.
마법도 물리력도 아닌 기묘한 그 능력이 그의 신체에 흠을 남긴 것이다. 정체는 모르겠지만, 그 살인안개는 마계의 어두운 기운과는 전혀 상극의 기운을 품고 있었다.
“쿠후후. 평범한 방법으로는 안 되겠지?”
쉐이드는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사악한 계략을 꾸몄다. 해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이 밝혀진 이상 신중에 신중을 거듭할 필요가 있었다.
“그나저나 당신들이 문제로군요.”
쉐이드의 고개가 비스듬히 돌아갔다. 그곳엔 쉐이드으 스산한 기운을 느낀 토돈들이 오줌을 지리며 벌벌 떨고 있었다.
토돈들이 경애의 안개에 겁을 집어먹었던 일을 쉐이드는 결코 용서할 수 없었다.
“겁쟁이는 절망의 탑에 어울리지 않습니다. 당신들께 벌로 고통스런 죽음을 내리겠습니다.”
쉐이드가 기괴하게 웃었다.
돌연 그의 그림자가 쭉 늘어나더니 떨고 있는 토돈들의 발밑으로 기어들어갔다.
쭈우욱!
그림자가 밑 없는 늪이 되어 토돈들을 집어삼켰다.
“끄르륵. 요, 용서를.”
“꾸에에에엑.”
“사, 살려 주십시오. 쉐, 쉐이드님.” 토돈들이 비명을 지르며 버둥거렸지만, 늪이 된 그림자는 용서가 없었다. 순식간에 토돈들은 그림자 속에 잠기고 말았다.
“자, 이제 그녀들을 어떻게 사냥할지 고민해야겠군.”
토돈들을 삼킨 쉐이드가 히죽 웃었다.
한편, 쉐이드를 피해 계단 아래로 뛰어내린 경애와 레종은 새로운 위기상황에 직면해 있었다.
고오오.
바람소리가 시끄럽게 귓가를 때린다.
급한 김에 뛰어내렸지만, 탑의 높이는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높았다. 아래를 내려다보니 바닥이 까마득하게만 보였다.
“도와줘, 무지개.”
경애는 눈을 꼭 감은 채 기도하듯 외쳤다.
이 상황에서 믿을 것은 신비한 힘을 가진 무지개뿐이다.
과연 이번에도 무지개는 그녀를 배신하지 않았다.
촤아악.
폭발하듯 솟구친 무지개가 그녀의 등에 뭉치며 거대한 날개로 변했다. 깃털도 없이 구름이 모여 만들어진 허상의 날개였지만 두 여자를 허공을 띄울 만큼의 부유력은 충분히 가지고 있었다.
펄럭 펄럭.
무지개의 차분한 날갯짓과 함께 경애와 레종은 무사히 바닥에 착지할 수 있었다.
뒤늦게 경애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자칫했으면 시집도 못가보고 처녀귀신으로 추락사할 뻔했다.
‘하느님, 부처님, 알라~! 아무튼 절 지켜주셔서 감사합니다.’
경애는 두 손을 꼭 모은 채 불특정 다수의 신에게 감사의 메시지를 보냈다. 그렇게 오두방정을 떨던 그녀는 문득 레종의 안이가 걱정되었다.
“언니!”
휙 하고 고개를 돌려보니 레종은 눈을 꼭 감은 채, 그녀의 허리를 꼭 붙들고 있었다.
‘많이 무서웠을 텐데.’
그런 위기상황에서 비명을 지르지 않은 것만도 용한 일이다.
“이제 괜찮아요, 언니.”
경애가 손을 잡아 주자 벌벌 떨던 레종이 간신히 눈을 뜨며 자리에 펄썩 주저앉았다. 얼마나 용을 섰던지 기운이 쭉 빠져 버렸다.
맹세코, 그녀는 세상에 태어나 지금처럼 무서웠던 적이 없었다. 마족의 공격을 피해 허공에 내동댕이쳐졌을 때엔 눈앞이 아찔하고 머릿속이 텅 비어 버렸을 정도다.
죽는구나 생각하니 모든 것이 공허해졌다. 자칫했으면 경애의 허리를 잡은 손을 풀어 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최악의 순간에 그녀를 살린 것은 머릿속에 번쩍하고 스쳐 간 병규의 얼굴이었다.
단지 스치듯 번뜩인 것임에도 풀려 나가는 경애의 옷자락을 다시 움켜쥐게 하는 힘을 주었다.
두근두근.
심장이 터질듯이 두근거리며 요동쳤다.
죽다 살아난 때문인지, 병규에 대한 그리움 때문인지, 그녀는 잔뜩 혼란스러웠다.
주륵.
이유 없이 눈물이 흘렀다.
‘어디 있어요?’
그저 그가 한없이 보고 싶기만 했다.
지금의 이 모든 상황이 한없이 서럽고 한없이 힘들기만 했다.
단지 그만 옆에 있다면, 그의 얼굴을 볼 수만 있다면 이따위 고난쯤은 웃으며 넘길 수 있을 텐데.
사무치게 그립고, 외로웠다.
“언니.”
다정하게 부르는 소리에 레종은 간신히 정신을 차렸다. 머리를 양 갈래로 딴 소박한 얼굴의 소녀가 그녀를 보며 웃었다.
빙그레 웃는다.
무서웠을 텐데도 소녀는 그녀를 위해 밝게 웃었다.
맞잡은 소녀의 손바닥은 놀랍게도 거칠었다. 소녀가 걸어온 험난한 과거가 그 거친 손바닥에 모두 응집되어 있었다.
레종은 까칠한 그녀의 손바닥을 쓸며 간신히 힘을 받았다.
지금은 울 때가 아니야.
힘은 못 되더라도, 최소한 짐은 되지 말아야지.
레종은 이를 악물며 후들거리는 다리로 일어섰다.
“다행히 죽지는 않았네요. 우리 꽤 운이 좋은가 봐요. 그렇죠, 언니?”
수다스럽게 묻는 말에 레종은 눈물 젖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가까이서 본 소녀는 참으로 단아하고 고왔다. 좋은 가문에서 태어났으면 눈부시도록 아름다웠을 터인데, 어쩌다 이 험한 마계에까지 흘러 들어왔을까.
괜스레 안타깝게 느껴졌다.
“휴우. 아직 반도 못 왔네.”
창밖을 내려다본 경애는 이맛살을 찌푸렸다.
꽤 많이 내려온 것 같은데, 아직 한참은 더 내려가야 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힘들겠지?” 경애는 창밖을 내려다보며 잠시 고민했다.
탑의 구조는 미로처럼 복잡해서 계단을 통해 일층까지 내려가려면 상당한 고생을 각오해야 한다.
“좋아. 인생 뭐 있어. 한 방이지. 이대로 한 번에 가는 거야.” 결국 그녀는 모험을 결심했다.
한 번 더 무지개를 믿고, 창밖으로 뛰어내리는 것이다.
“가요, 언니.”
경애가 레종의 손을 잡으며 힘차게 말했다. 레종은 부스스 웃었지만, 맞잡은 손엔 땀이 흥건했다.
죽을 만큼 무서울 텐데도, 애써 미소를 보이는 것이다.
“좋아요, 언니. 바로 그 자세에요. 꼭! 꼭! 우리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요. 파이팅! 자자, 따라해 봐요. 화. 이. 팅. ”
“하...... 이팅.” “그게 아니에요. 더 힘차게. 가슴아, 뻥 뚫려라! 화! 이! 팅!”
“화이팅!” “헤헤. 멋져요, 언니.”
힘차게 고함을 지른 레종을 향해 경애는 엄지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레종은 한결 부드러워진 미소로 그녀의 칭찬에 답했다.
힘껏 고함으 질렀더니 가슴이 한결 가벼워진 것 같다.
“그럼, 힘차게 갑니다!”
경애는 레종의 손을 잡고 둥지를 떠나는 아기 새처럼 창밖으로 도약했다. 레종 역시 짐이 되지 않겠다는 생각으로 주저 않고 그녀의 뒤를 따랐다.
바로 그 순간!
경애가 창문을 넘어 탑 밖으로 몸을 던진 그 순간,
“그녀는 갈 수 없습니다. 쿠쿠쿠.” 음울한 웃음소리와 함께 계단의 그림자가 쑥 내려오며 레종을 채갔다.
“악!” 워낙 창졸간에 벌어진 일이라 경애는 그만 레종을 놓치고 말았다.
“언니!” 경애는 창밖으로 떨어지며 처절하게 외쳤다.
휘이잉!
차디찬 바람소리가 귓가를 진동했다. 멍한 눈으로 떨어지던 경애가 오기가 가득한 음성으로 외쳤다.
“무지개!” 촤악.
순백의 날개가 번개처럼 일어나 그녀를 감싸 안았다.
“언니를 구하러 가자.”
경애는 투지를 불태웠다.
그림자 마족, 쉐이드와의 결전은 어쩌면 전혀 승산이 없는 무모한 승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언니를 포기할 수는 없다.
경애는 하늘에서 강림한 천사처럼 순백의 날개를 펄럭이며 레종과 헤어진 창 안으로 힘껏 뛰어들었다.
바람처럼 실내로 들어선 경애는 재빨리 주위를 훑었다.
없었다.
레종도 쉐이드도.
“휴.”
경애는 심호흡을 하며 흥분된 가슴을 진정시켰다.
평소의 그녀는 경박하고 푼수처럼 행동했지만, 정작 지금처럼 긴박한 상황에서는 오히려 이상할 정도로 침착했다.
숨을 고른 그녀는 주위를 자세히 살폈다.
칙칙한 벽, 계단, 더러운 바닥.
별다른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결국 경애는 다시 무지개의 힘에 의지했다.
“부탁이야. 언니를 찾아 줘.”
날개처럼 뭉쳐 있던 무지개가 이슬비처럼 내리며 사막에 부는 모래바람처럼 주위로 흩어졌다. 순간 그녀의 이목이 더 없이 밝아졌다. 구석구석 스며든 안개가 그녀의 머리로 직접 정보를 보내왔기 때문이다.
잠시 무지개를 이용해 주위를 탐색하던 경애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으스스한 음영이 드리워진 통로 저편에서 작은 핏자국이 발견되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되는, 마족의 칙칙하고 어두운 피 색과는 전혀 다른 생기를 가지고 있는 핏자국이었다.
경애는 즉시 발을 박차며 핏자국을 따라나섰다.
지금은 그녀는 레종을 찾기 위해 잠재된 힘을 총동원하고 있었다. 그때, 그녀의 눈빛이 모호하게 변했다. 놀랍게도 그녀의 눈 속에 두 개의 눈동자가 떠올랐다. 마치 뫼비우스의 띠처럼 신비롭게 생긴 눈동자는 그녀가 힘을 쏟으면 쏟을수록 더더욱 찬란한 빛을 발하는 것이었다.
갑자기 눈앞이 환해지는 것처럼 느껴지며, 먼 곳의 풍경까지 세밀하게 잘 들어온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워낙 급한 상황이라 경애는 자세히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무지개!”
촤악!
레종을 찾기 위해 흩어졌던 무지개가 그녀의 등 뒤에 뭉치며 순백의 날개를 형성했다. 무지개가 형성되는 속도는 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게 빨랐다.
펄럭!
날갯짓을 하기가 무섭게 그녀는 쏘아진 화살처럼 앞으로 날아갔다.
“차라리 죽여.” 쉐이드에게 잡힌 레종은 발버둥을 쳤다. 격렬하게 저항하며 쉐이드에게서 빠져나가려 했지만, 그녀의 미약한 힘으로는 절대 무리였다.
그래서 레종은 대신 자신의 손목을 물었다.
핏물이 떨어졌다.
뚝뚝 떨어지는 핏물을 보며 레종은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이내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소녀가 자신을 버리지 않고 돌아올 것임을 알았다. 소녀 혼자라도 도망쳐 주길 간절히 바랬지만, 그렇지 않을 가능성이 훨씬 더 큰 것이 사실이었다.
비록 만난 시간은 짧지만, 소녀가 순진하고 정 많은 사람이라는 것을 확실히 느낄 수 있었다.
자신이 살아있는 한, 소녀는 이 괴물 같은 마족과 목숨을 걸고 싸우려 들 것이다.
레종은 소녀에게 승산이 전혀 없다고 생각했다.
그만큼 쉐이드가 풍기는 기운은 가공, 그 자체였다.
이대로는 둘이 함께 죽게 된다.
그래서 레종은 자살을 결심했다.
자신이 죽으면 소녀가 살아서 이곳을 빠져나갈 확률이 조금이라도 더 높아질 것이라는 판단에.
이빨에 살갗이 뜯겨 피가 송글송글 맺혔지만, 전혀 고통스럽지 않았다. 어려울 때마다 주저없이 나서던 그를 떠올리며 그녀는 악착같이 자신의 손목을 물었다.
‘저에게 용기를 주세요.’
그녀는 간절히 빌며 모든 힘을 쏟아 쉐이드에게 저항했다.
무슨 이유에선지 쉐이드는 그녀의 행동을 크게 제지하지 않았다. 물론 어느 정도 과한 행동을 막기는 했다. 그녀의 움직임을 솜털 하나까지 모조리 봉쇄할 수 있는 그의 능력을 감안해 볼 때, 지금의 방관은 확실히 수상한 점이 있었다.
무언가 음험한 꿍꿍이가 있는 것이 분명했다.
실제로 쉐이드는 레종의 자살을 은근히 부추기고 있었다.
그는 타락의 왕, 생명을 가진 존재가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것을 신성한 존재가 타락하는 몇 가지 방법 중의 하나다. 그래서 그는 속으로 쾌재를 부르며 레종의 자살을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렇게 간악한 쉐이드조차도 전혀 계산 밖의 변수가 있었다.
콰콰쾅!
돌연 받가이 터져 나갔다.
돌가루가 비산하고 먼지가 좁은 통로를 가득 메웠다. 그 사이로 희뿌연 빛 덩이가 슉 올라왔다.
“헉헉. 찾았다.”
경애였다.
그녀가 기어코 쉐이드와 레종을 찾아낸 것이다.
숨을 헐떡이던 경애의 눈에 레종이 잡혔다.
양팔에 피를 흘리고 있었다.
입술에도 피가 묻어 있었다.
경애를 본 레종은 슬픔과 반가움, 그리고 걱정이 한데 뒤섞인 표정으로 눈물을 뚝뚝 흘렸다.
‘바보. 왜 온 거야.’
출혈 때문인지, 아니면 경애에 대한 안쓰러움 때문인지, 그녀의 안색은 처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창백했다.
참담한 그녀의 표정에 경애는 대뜸 쌍심지를 추켜세웠다.
레종이 자살하려 했다는 생각은 못하고, 쉐이드가 모진 고문을 했다고 착각한 것이다.
“또 당신입니까?”
검은 도화지 위에 흰색 분필로 장난처럼 그려 놓은 것 같은 쉐이드의 얼굴이 심하게 구겨졌다.
“당신은... 조금 성가신 사람이군요.”
지독하게 끈질기다. 도무지 포기를 모르는 것 같다. 스스로 고난을 자초하는 것일까?
그간 만난 인간들 중에 그녀처럼 독특한사람은 드물었다.
도무지 이 가짜 무녀만큼은 무슨 행동을 할지 종잡을 수가 없다. 자신의 그림자마저 조각내 버리는 요상한 기운에, 오늘 처음 만난 사람을 위해 목숨을 거는 무모함까지.
그렇다고 같잖은 기사의 도리를 읊는 성기사와도 달랐다.
지나치게 순진하달까. 막 태어난 요정과 같다고 할까.
마치 이야기 속의 주인공처럼 그녀는 과하게 바르고 성실했다.
그래서 쉐이드의 기분이 더 나빠졌는지도 모른다.
언제나 간악한 웃음이 그려져 있던 그의 얼굴이 경애를 대할 때만큼은 엉킨 실타래처럼 엉망이 되었다.
“만약 마계에 좌절의 군주라는 호칭이 있다면 그건 필연코 당신이 받아야 할 것 같군요.”
최소한 쉐이드를 이토록 힘들게 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녀가 평범한 존재가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이번에도 절 막으실 겁니까?” “물론. 언니를 내려 줘.”
“쿠후후. 기억력이 나쁘시군요. 그럴 순 없다고 이미 말씀드렸습니다만.”
“너야말로 머리가 나쁜 거 아냐? 내가 이미 말했지? 날 막으면 다치게 될 거라고.”
“아~ 그랬던가요?”
쉐이드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고개를 갸웃했다. 여전히 과장된 행동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런 말을 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만.”
쉐이드는 그림자를 수직으로 길게 늘여 위에서 경애를 내려다보며 히죽이죽 웃었다.
“할 수만 있다면 해보시죠, 가짜 무녀님.” 경애는 결코 사양하지 않았다.
“원한다면.”
그녀의 눈동자에 모호한 빛이 어렸다.
순간 날개처럼 뭉쳐 있던 무지개가 수십 개의 긴 띠처럼 펼쳐졌다.
본래 무지개의 공격은 연기처럼 스멀스멀 흘러가는 방식이었는데, 이런 공격방식은 범위는 넓은 데 비해, 이동속도가 느린 단점이 있었다. 다수를 상대할 때는 좋을지 몰라도 쉐이드처럼 빠른상대를 잡기엔 역부족인 것이다.
이에 반해 지금의 공격은 마치 제비가 땅을 스치듯, 빠르고 경쾌했다. 무지개를 다루는 경애의 능력이 한층 발전했음을 시사하는 것이었다.
경애으 새로운 능력에 쉐이드는 호기심 어린 표정을 그렸다. 하지만 입가에 매달린 한 줄기 얄미운 미소는 여전했다.
“재미있는 기술입니다만. 그렇게 쉽게 당해 드릴 수는 없지요.”
쉐이드는 슬그머니 뒤로 물러섰다. 느릿하게 움직인 듯했지만 실상은 잔상이 남을 정도로 빠른 움직임이었다. 아직 그는 여유가 있었다. 그러나 채 몇 걸음 물러서기도 전에 여유로웠던 그의 인상이 일그러지고 말았다.
바닥을 뚫고 나온 한 줄기 무지개가 그의 발을 휘감은 때문이다. 영약하게도 경애는 눈에 뻔히 보이는 공격 뒤에 한 줄기 기운을 숨겨서 바닥으로 흘려보냈던 것이다.
방심하던 쉐이드는 어이없이 당하고 말았다.
퍼석.
무지개에 닿은 그의 발이 썩은 나무등걸처럼 부서졌다.
쉐이드는 균형을 잃었고, 그 짧은 틈에 무지개 다발이 레종을 감아 경애에게 안전하게 인도했다.
“언니!”
경애는 그녀를 덥석 안으며 반갑게 맞았다.
레종은 울기만 했다.
달리 자신의 마음을 표현할 길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래 자신감 넘치는 당찬 여성이었지만, 근래 들어 공포스러운 체험을 연달아 겪으며 심신이 약해질 대로 약해진 상태였다.
“크윽. 당신, 끝내!”
쉐이드는 분노했다.
하등한 인간에게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이나 당하다니.
당장 무녀의 목을 비틀어 버리고 싶었다.
“오라! 어둠의 칼.”
주위에 흩뿌려진 어둠이 그에게 빨려 들어가며 칼날처럼 치솟았다.
경애는 사태가 심상치 않음을 느끼고 재빨리 결단을 내렸다.
“언니, 꽉 잡아요. 무지개!”
촤악!
채찍처럼 뻗어간 무지개가 벽을 부쉈다.
무지개는 신통한 능력만큼이나 물리력도 강하여 두꺼운 벽을 당번에 허물어뜨렸다.
휘오오.
검은 구름이 짙게 깔린 마계으 한ㄹ이 보였다.
경애는 레종을 안은 채 번지점프를 하듯 탑 밖으로 곧장 뛰어내렸다.
무지개가 그녀의 등에 날개처럼 뭉치고, 한 가닥 기운은 띠처럼 뻗어 나와 안전띠처럼 벽에 틀어박혔다.
쉬이이익.
순식간에 절반 가까이 내려왔다 아득하게만 보이던 탑의 밑동이 눈에 잡힐 듯 보였다.
하지만 쉐이드는 결코 만만한 상대가 아니었다.
타락의 아홉 자식들 중 수좌를 차지하는 마왕 아래 가장 강력한 존재.
적어도 유난히 어두운 마계에서만큼은 각별한 능력을 과시하는 존재가 바로 그인 것이다.
쿠앙!
묵직한 폭음과 함께 외벽의 일부가 터져 나갔다. 서로를 꼭 껴안은 레종과 경애의 발밑이었다.
뿌연 먼지가 구름처럼 펼쳐지고, 벽이 박살나며 비산한 돌조각이 그 위에 흐릿한 그림자를 그렸다.
츠아악!
그림자 속에서 쉐이드의 시커먼 분신이 불꽃처럼 솟구쳤다.
눈동자가 분열된 이후로 이목이 남달라진 경애는 쉐이드의 공격을 일찌감치 눈치 채고 즉시 무지개를 운용했다.
날개를 이루던 기운이 끈처럼 방충되어 외벽의 이곳저곳에 박히면서, 그네처럼 그녀들을 좌에서 우로 휘익 이동시켰다. 기막힌 반동으로 쉐이드의 공격을 피한 경애는 미리 봐 두었던 창문을 간신히 잡고 무지개를 보자기처럼 펼쳐 레종을 안으로 집어넣고, 자신 역시 그 안으로 뛰어들었다.
좁은 방이었다.
하급 병사들의 숙소로 보였다.
“안개처럼 펼쳐 줘.”
안으로 들어간 경애는 즉시 무지개로 방을 가득 메웠다. 무지개가 쉐이드의 그림자 공격을 효율적으로 막을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쉐이드에 대한 방비를 철저히 한 경애는 급히 레종을 찾았다.
덜덜 떨고 있을 것이라는 생각과 달리, 그녀는 이빨로자신으 치마를 찢고 있었다.
찍 하고 찢어진 치맛단으로 그녀는 경애의 허벅지를 둘둘 감았다. 소동 중에 경애의 허벅지에 작지 않은 상처가 생겼다.
그것을 본 레종은 무작정 치맛단을 찢어 붕대처럼 상처에 감아 준 것이다.
자신의 손목에서는 여전히 피가 떨어지는데요.......
“언니.”
경애는 왈칵 눈물이 솟아 그녀를 안았다.
레종은 그녀에게 안긴 와중에도 상의 팔소매를 찢어 이번엔 자신의 손목에 감았다.
쉐이드에게 잡혔을 때는 죽으려는 생각뿐이었다.
자신이 죽으면 경애라도 살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러나 상황이 변했다.
경애가 필사의 노력으로 자신을 구해 냈다. 결코 그 노력을 헛되이 버릴 수는 없다. 그녀에게 구원받은 목숨, 이젠 어떻게 해서라도 악착같이 살아남을 테다.
그녀는 비관적인 상황에 울기만 하는 철부지 여성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그래서 심한 통증 속에서도 이를 악물며 상처를 돌본 것이다.
전란기를거친 여왕답게 그녀는 지극히 이성적이고 냉철했다.
“언니. 꼭. 꼭. 우리 함께 이곳을 빠져나가요. 꼭요.”
경애가 그녀를 꽉 안은 채 울음을 터트렸다.
입술 꼭 깨문 레종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참으려고 했지만 두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만은 어쩔 수 없었다.
문득, 자신의 인생이 그렇게 불행한 것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반란이 일어나고, 강대국이 침공해 오고, 마계로 납치되고.
매번 힘든 상황이었지만, 그럴 때마다 언제나 좋은 사람들이 그녀 곁에 함께 있었다.
소꿉친구이자 좋은 조언자인 디스, 할아버지 같은 대마법사 필라이트, 가장 불리한 순간에 험ㄹ어져 가는 왕가를 위해 과감히 한 팔을 내밀어 준 글로리 공작, 어느덧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되어 버린 병규.
그리고 생전 처음 본 그녀를 위해 목숨을 걸어 준 경애까지.
고마움을 표할 길 없는 레종은 그래서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핑하고 현기증이 잃었다.
출혈이 너무 심했다. 하지만 그녀는 애써 내색하지 않고, 자상한 표정으로 경애의 등을 어루만져 주었다.
문득 소녀의 어깨가 유난히 작고 여리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직 이렇게 어린데, 아직 부모 밑에서 투정 부릴 나이인데. 그 무서운 마족을 상대로 죽을 각오로 용기를 냈구나.
장하고 대견스러웠다.
“언니. 이제 나갈 거예요.”
경애가 두 손을 꼭 잡으며 말했다. 마음을 다잡고 용기를 내자는 말이었다
레종은 흐미한 미소를 보였다.
“무지개!”
촤악!
들플처럼 안개가 일어났다.
경애가 벽을 가리켰다.
안개는 즉각 반응했다.
거대한 해머처럼 벽을 두드려 부수고, 박살난 파편으로부터 두 여자를 지켰다.
경애는 레종과 자신을 꼭 묶고는, 무지개를 풀어 새끼줄처럼 고아 단단한 벽에 박았다. 글고는 힘껏 벽을 박차고 밖으로 몸을 날렸다.
촤르르륵.
새끼줄처럼 꼬여 있던 무지개가 고무줄처럼 풀리며 두 여자를 안전하고 빠르게 아래로 내려 주었다.
‘좀더 멀리.’
쉐이드의 공격을 의식한 경애는 최대한 탑의 외벽에서 떨어지려 노력했다 그리고 충분한 공간이 확보되자 즉시 안개를 소환하여 새처럼 날았다.
허공이라면 그림자인 쉐이드도 어쩔 수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서였다. 그러나 쉐이드는 치가 떨릴 정도로 영악하고 악착스러웠다.
“크에엑.”
처절한 울부짖음과 함께 허물어진 탑 외벽 틈으로 다서 마리의 토돈들이 날아왔다. 누군가 토돈들을 밖으로 던져 버린 것이다.
허공에서 버둥거리는 토돈들의 몸뚱이는 교묘하게 위아래로 겹쳐져 있어 충분한 그림자가 형성되었다.
“안 되지요. 겨우 그 정도로는 제게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토돈들의 그림자 속에서 불쑥 솟아오른 쉐이드가 키득대며 웃었다.
“맙소사.”
경애의 얼굴이 해쓱해졌다.
설마 이런 식으로 접근해 올 줄이야.
쉐이드는 그림자라는 자신의 능력을 놀라울 정도로 다양하게 활용했다. 게다가 잔인했다.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부하들을 희생시킬 정도로. 도무지 틈이 없어 보였다.
“오지 마!”
경애가 외치자 날개를 형성하던 무지개가 화살처럼 날아갔다.
“오우. 꽤나 무섭군요. 하지만 아까와는 다릅니다.”
쉐이드의 팔이 쭉 뻗치며 제일 아래의 토돈을 잡아 방패처럼 앞으로 던졌다.
퍼퍼퍽!
무지개의 화살에 희생된 토돈의 육체가 썩은 고기처럼 바스러졌다.
“너, 너무해.”
경애의 얼굴에서 핏기가 가셨다.
부하를 저런 식으로 희생시키다니.
“그림자가 없는 허공에서는 이렇게 움직일 수 있답니다.”
빙글 웃은 쉐이드가 두 마리의 토돈을 잡아 앞으로 던졌다. 그렇게 앞으로 밀려난 두 마리의 토돈들에게로 옮겨 간 쉐이드는 다시 팔을 뻗어 뒤쳐진 도톤 두 마리를 앞으로 끌어당겼다.
그렇게 교대로 던지고 당기고 하며 겹쳐진 토돈들의 그림자 속으로 옮아간 쉐이드는 어느새 경애의 뒤까지 점령하게 되었다.
“휴우~ 여기까지 오느라 정말 힘들었습니다. 자, 이만 탑으로 돌아가실까요?” 휘아악.
쉐이드는 거침없이 토돈 두 마리를 경애에게 던졌다.
경애는 어쩔 수 없이 토돈들을 부숴 버렸지만, 그 반동에 탑의 외벽까지 밀려나고 말았다.
쿵 하고 외벽에 부딪힐 동안 경애는 온몸이 굳어 버린 듯, 꼼짝하지 못했다.
부르르.
치를 떨었다.
그것은 비단 등을 타고 오르는 외벽의 한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쉐이드의 잔인한 심성에 분노가 인 것이다.
“끄에엑.”
“끄엑.”
최후의토돈 두 마리가 아래로 추락했다. 목적을 달성한 쉐이드가 미련 없이 그들을 버린 것이다. 새가 아닌 이상 이렇게 높은 고도에서 떨어지고도 토돈들이 살아날 가능성은 전무했다.
퍽퍽.
잔인한 소음이 저 아래에서 들려왔다.
짓뭉개진 토돈들의 사체가 아프게 눈을 찔러 왔다. 경애는 입술을 꼭 깨물었다.
스르르.
창턱의 그늘에서 어둠이 뭉클거리더니 쉐이드가 나타났다.
징그럽다.
이제는 그림자만 봐도 토악질을 나올 것 같다.
“이제 제게서 벗어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걸 깨달으셨을 테지요? 놀이는 이쯤 해 두시고, 그만 들어오시지요.”
경애는 표정을 굳히며 무지개를 손처럼 사용해 근처의 창을 통해 안으로 들어갔다.
탑은 어둡고 음습했다.
어둠이 낳은 최악의 괴물, 쉐이드가 기생하는 그림자의 자궁 같은 곳이다.
경애는 레종과 함께 그 지옥 같은 곳으로 돌아오게 되었다.
“쿠후후. 그 표정 참으로 좋군요. 탄식. 비통. 참담. 아아~ 기쁩니다. 아시나요? 인간이 짓는 그런 표정에 전 짜릿한 쾌락을 느낀답니다.”
쉐이드는 두 손으로 몸을 감싸며 부르르 희열에 떨었다.
무섭게 쉐이드를 노려보던 경애는 깊은 숨을 들이켰다.
잠깐 사이 그녀의 굳어 있던 얼굴이 본래의 표정을 되찾았다.
밝은 미소.
쉐이드의 얼굴이 확 구겨졌다.
그녀의 표정변화에서 기분 나쁜 뭔가를 감지한 것이다. 이를 증명이라도 하듯, 경애가 밝은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난 아직 포기할생각이 없어. 언니와의 약속도 지켜야 하고, 만나야 할 사람들도 아직 못 만났거든. 그래서 난... 너와 싸울거야. 이곳에서 끝장을 보자.”
밝은 음성과 달리 그녀가 뱉어 낸 말은 처절함으로 얼룩져 있었다. 누가 죽든 사생결단을 내자는 소리가 아닌가.
세상에 그림자가 없는 곳은 없다. 결국 힘들게 탑에서 탈출한다 해도 쉐이드의 추격에서 벗어날 수 없는 것이다.
그래서 경애는 그와 정면대결을 결심했다.
여기서 쉐이드를 꺾지 못하는 한, 마계에서의 탈출은 불가능한 일이다.
경애의 눈동자가 금색의 신비로운 기운을 뿜어냈다. 무지개가 신기루처럼 펼쳐지며 몽혼한 광채를 뽐냈다.
쉐이드의 그린 듯한 얼굴이 흉하게 일그러졌다.
“하여간 맘에 들지 않는 사람입니다, 당신은. 그 고운 입구멍에서 찢어지는 비명이 새어 나오게 만들어 드리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