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84/102)

  절망과 타락의 조우

  절망의 탑 14층.

  마계의 절대자, 마왕 데이크란의 자식 9명이 한자리에 모였다.

  9인의 타락한 왕들.

  마계를 주름잡는 지배자들이지만, 오늘의 분위기는 칙칙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미천한 마물들이 반란을 일으켰기 때문일까? 아니다. 고작 그 정도의 일로 이렇게 우중충한 분위기가 형성될 리 없다.

  설사 마물 수만 마리가 한꺼번에 달려든다고 해도 이들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을 긴장시킨 것은 단 한 명.

  “그가 온단 말인가? 마왕 벨로로폰이?”

  심연에서 우러나오는 것 같은 묵직한 음성으로 쉬버가 물었다.

  그림자로 가득 뒤덮인 쉐이드가 고개를 끄덕였다.

  “정리하면 그렇게 되는 셈이지요.”

  “크크. 그를 막으라고? 그의 앞마당과 같은 절망의 탑에서? 미친소리!”

  “마왕 벨로로폰이 어떤 존재인지 잊어버린 것인가? 설사 사라진 마황이라고 해도 그와는 정면승부를 피했을 것이다.”

  공포와 전율이 일행을 휩쓸었다.

  벨로로폰을 떠올릴 때면 언제나 몸이 부들부들 떨린다. 잊으려해도 피와 절망이 아득하게 밀려드는 것이다.

  그가 마계에 군림하고 있을 때, 마계는 지옥이었다. 피와 비명으로 가득한 죽음의 세계였다.

  지옥의 왕들이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이 공포에 떠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확실히 그가 과거의 힘을 가지고 있다면 절대적으로 무리겠지요.”

  쉐이드의 한마디로 일행의 분위기가 다시 차분해졌다.

  “...... 설마 그가 힘을 잃어버리기라도 했단 말인가?”

  “쿠후후. 바로 그렇습니다. 벨로로폰은 더 이상 마왕이 아닙니다. 기억을 잃어버렸거든요. 물론 그렇다고 능력마저 완전히 없어진 것은 아닙니다만, 지금은 과거와 비교해서 고작......”

  쉐이드는 엄지와 검지를 조금 벌려 보였다.

  “이 정도 능력에 불과하죠. 쿠후후.”

  “호오.”

  “그렇단 말인가?”

  짧은 경탄성이 주위에서 흘러나왔다.

  마왕의 최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쉐이드가 하는 말이다. 정보의 정확성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크크크.”

  “흐흐흐흐. 그거 재미있게 되었군.”

  쉐이드의 미소가 전염되듯 다른 왕들에게 옮아갔다.

  공포에 떨던 왕들은 어느새 잔혹한 웃음을 되찾았다. 이들은 마계의 왕들. 천성적으로 강한 자와 겨루는 것을 즐겼다. 만약 벨로로폰을 꺾을 수 있다면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명예를 거머쥐게 되는 것이다.

  “좋아. 그를 무너트려 주지. 그의 심장을 뽑고, 그의 뇌수를 마시겠노라.”

  “크크. 네놈에게 그런 사치를 누리게 할 성싶은가. 벨로로폰을 주일 사람은 바로 나다.”

  왕들은 서로 자신이 벨로로폰을 죽일 거라며 아우성을 쳤다.

  이때 쉐이드가 나서며 조용히 그러나 힘 있는 목소리로 소리쳤다.

  “한 가지. 데이크란님께서 그를 보고 싶어 하십니다. 그를 쓰러트리는 것은 상관없지만, 절대로 산 채로 끌고 오셔야 합니다.”

  왕들은 불만인 듯 노골적으로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쉐이드는 이들이 결코 데이크란의 명을 거역하지 못할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그럼 저는... 술래잡기 놀이를 해야 할 것 같아서 이만....... 쿠후후.”

  음침한 괴소와 함께 쉐이드가 사라졌다.

  그는 그림자. 나타났다 사라졌음에도 그 어떤 자취도 남지 않았다. 마치 처음부터 그곳에 없었던 것처럼 모든 것이 자연스러웠다. 그것이 오히려 묘한 부조화를 느끼게 만들었다.

  잠시 어색한 침묵이 일었다.

  “흠흠.”

  일행 중 유난히 머리가 큰 왕이 헛기침과 함께 입을 열었다.

  “다들 잘 들었겠지만, 지금의 절망의 군주는 보잘것없이 약하다고 한다. 중간계에서 그와 대적해 보았던 디바울과 컨퓨전도 그의 힘이 예전과 다르다고 말했었지.”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냐?”  일행 중 가장 키가 큰 거한, 쉬버가 종을 두드리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간단해. 허약해진 그를 잡는 일에 굳이 우리 모두가 나설 필요는 없을 것이란 말이지.”

  그가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몇몇 왕들이 앞으로 나서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래. 질로우. 다른 왕들은 나설 필요 없어. 나 혼자 처리하도록 하지.”

  “흐흐. 네가 하겠다고? 설마 날 무시하는 건 아니겠지.”   “하찮은 재주를 가진 놈들이 함부로 나서는구나. 벨로로폰은 내가 처리하겠다.”

  맨 먼저 입을열었던 질로우는 눈살을 찌푸렸다.

  마왕의 혈계들은 막강한 무력을 가지고 있지만, 지나치게 호전적인 것이 문제다. 살의가 지나쳐 다른 것은 전혀 상관없다는 식으로 행동하게 되는 경우도 비일비재했다.

  잠깐 사이 왕들끼리의 격론이 한층 심각해졌다. 서로 자신이 벨로로폰을 해치우겠다며 목소리를 높이다가 끝내는 서로를 향해 살기까지 뿜어댔다.

  “자자. 그만들 하시게. 가뜩이나 마물들이 소란을 떨고 있는 판에 우리들끼리 다퉈서 어쩌겠다는 말인가.”

  “그렇다면 네게 다른 수라도 있단 말인가?”

  질로우는 그 큰 머리를 위아래로 끄덕여 보였다.

  “절망의 군주를 사로잡는 일이다. 전설로 남을 테지. 이 자리의 누구도 그 기회를 양보하고 싶지 않을 것이다.”

  “서론이 길다. 어떻게할 건지 빨리 말해!”

  얼친이 안절부절못하며 소리쳤다. 그는 당장이라도 뛰어나가고 싶은 것을 간신히 참고 있었다.

  “공평하게 순서를 정하도록 하지.”

  질로우의 손가락이 펼쳐지자 기묘한 색의 구슬들이 튀어 올라왔다.

  “이것은 인간들의 비명을 집어넣은 ‘비탄의 구슬’이다. 이 중에서 하나를 골라라. 비명소리의 크기로 순서를 정하도록 하지.”

  이번에도 얼친이 시비를 걸었다.

  “그건 좋지 않아 넌 가장 큰 비명이 어는 구슬 속에 들어 있는지 알고 있을 거 아냐. 네놈에게 유리한 조건이다.”

  질로우는 입술을 실룩였다. 하지만 곧 안정을 되찾고 매끄러운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내가 제일 마지막에 남는 것을 선택하도록 하지. 난 어차피 명예엔 관심이 없으니까.”

  “흐흐흐. 명예엔 관심이 없다? 하긴 네놈은 명예보다는 이득을 먼저 따지는 겁쟁이였지.”

  게걸스럽게 웃던 얼친이 손을 쓱 뻗어 구슬을 하나 가져갔다. 요사스런 빛을 내뿜던 구슬이었다. 그가 손가락 사이로 비벼서 구슬을 깨자 찢어지는 비명소리가 터져 나왔다.

  “운이 좋군. 화형당한 여자의 비명이다.”

  “흐흐. 아무래도 내가 첫 번째인 것 같군.”

  기괴한 웃음을 흘린 얼친은 바람소리가 일 정도로 휙 뒤돌아섰다. 그리곤 누가 잡을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서둘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그를 보며 질로우는 차게 웃었다.

  “두려움과 신중함도 구별하지 못하는 무모한 녀석. 그래. 서둘러라. 마음껏 발버둥치렴. 네놈은 벨로로폰의 힘을 측정해 줄 희생양으로 아주 적합해.”

  어둠 속에서 웃고 있는 질로우의 눈빛은 섬뜩하기 그지없었다.

  병규는 마물과 타락한 종족들 간의 치열한 전장 한가운데를 걸었다.

  전장의 치열함과 처절함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광기 때문일까. 아니면 마족이 갖는 숙명 때문일까.

  마물들과 타락한 종족 모두 자신의 죽음은 도외시한 채, 적을 죽이기 위해 날뛰었다. 전장의 모두가 피를 쫓아 죽을 장소를 향해 달리는 쥐떼처럼 우르르 몰려다녔다.

  그런 아수라장을 병규는 산책을 하듯 느긋하게 걸었다.

  치열한 전장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좌우로 쫙 갈라졌다.

  그가 가는 곳이 곧 길이 되었다.

  앞을 가로막는 타락한 종족들은 어디선가 나타난 마물들이 죽음을 무릅쓰고 밀쳐냈고, 간혹 저지선을 뚫고 가까이 다가오는 적은 병규를 보자마자 사시나무 떨듯 떨다가 그에게 밟혔다.

  그렇게 병규는 관전자가 되어 전장 속을 거닐었다.

  느린 듯하지만 빠른 움직임. 마치 허공을 부유하듯 움직인 그는 어느새 기괴한 문양의 관문을 넘어 절망의 탑 가까이에 다다랐다.

  탑의 정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회색 갈기를 휘날리는 마족들이 사이한 기운을 풍기는 정문을 지키고 있었다.

  “서라. 여기서부터는 울의 허락 없이 안으로 들어갈 수 없다.”

  목덜미의 갈기가 유난히 짙은 녀석이 근엄한 음성으로 외쳤다.

  윤기 나는 갈기, 온몸을 뒤덮은 털. 그리고 맹수의 상징과도 같은 용맹한 위용.

  영락없이 두 발로 선 사자의 모습을 보는 것 같았다.

  “방해하지 마라. 난 이곳을 지나가야 한다.”

  병규는 굴곡 없는 음성으로 그들에게 경고했다.

  “허허. 방해하지 말라? 그거 유감이군. 우리 임무는 아무도 이곳을 지나지 못하게 하는 것이니 말이야.”

  탑의 정문 책임자인 카란의 음성이 길게 늘어졌다.

  회색 털의 용맹스런 가라다 족의 족장인 그는 검은 머리칼의 병규를 보며 코웃음 쳤다.

  “크흐흐. 가만 보니 이 녀석 인간이잖아.”

  카란이 날카로운 송곳니를 드러내 보이며 웃었다.

  겉으로는 위협하면서도 속으로 카란은 이 허무맹랑한 침입자를 반겼다. 마물들과의 전쟁은 벌써 몇 시간째 계속되고 있지만, 아직 그 누구도 이곳까지 당도하지 못했다. 카란에게 병규는 첫 손님인 셈이다.

  준엄하게 생긴 카란은 실상 상당히 호전적이라는 평을 듣는 자였다. 그리고 실제 그럴 만한 실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괜히 탑의 정문을 지키고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인간 주제에 감히 이 몸에게 비키라고 명령을 내리다니. 가소로운 놈. 네놈의 몸을 산산조각 내 주지.”

  카란으 전신에서 스산한 살기가 일었다.

  병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될 수 있으면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려 했지만, 이젠 어쩔 수 없게 되었다.

  “너희들이 자초한 일이다.”

  말과 함께 병규의 몸이 움직였다.

  콰콰콰콰쾅!

  그가 몸을 움직인 바로 그 순간, 하늘에서 검은 번개가 내리쳤다. 먹물 같은 탁한 뇌전이 세상을 검게 물들였다.

  병규가 움직이고, 검은 뇌전이 대기를 가른 그 순간, 카란 역시 그를 향해 도끼를 휘둘렀다.

  “크하하. 죽어라.”

  카란은 득의의 찬 괴성을 지르며 병규를 맞았다.

  촤아아악!

  그의 도끼가 허공을 인정사정없이 갈랐다.

  그런데...... 없었다.

  분명 정면에서 달려오고 있어야 할 애송이의 모습이, 그의 도끼에 피떡이 되어 나뒹굴어야 할 애송이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

  카란의 눈에 의문이 서렸다.

  그 순간 끼익 하는 소음이 들렸다.

  탑의 정문이 열리는 소리였다.

  ‘설마.’

  카란의 고개가 급히 돌아갔다.

  있었다.

  애송이 녀석이.

  눈앞에서 사라진 녀석은 능청스럽게도 탑의 정문을 열고 있었다.

  “뭣?”  카란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설마 번개가 치던 그 순간, 이미 나를 지나친 것이란 말인가?’

  믿기지 않았다.

  하지만 병규가 그를 스쳐 지나간 것은 사실이었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 탑의 문을 열고 있는 그의 행동이 도저히 설명되지 않기 때문이다.

  끼이이이익!

  무쇠로 만들어진 탑의 문이 열리기 싫다는 듯, 비명을 질렀다. 멍하게 서 있던 카란은 그 순간 번뜩 정신을 차렸다.

  “뭣들 하는 게냐! 놈을 잡아라.”

  그의 외침에 멍하니 서 있던 가라다들이 일제히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상체만.

  가라다들이 병규에게 몸을 돌린 순간, 쩍 하는 소음이 울렸다. 그들의 허리 부근에 날카로운 선이 생겼다. 그 선을 따라 상체가 쩍 하고 갈라졌다.

  털썩.

  가라다들의 상체가 바닥에 떨어졌다. 반면 하체는 여전히 그 자리에 우뚝 서 있었다.

  날카롭게 잘려진 허리의 단면에서 피와 내장이 우수수 쏟아졌다.

  그러나 정작 본인들은 그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했다. 팔을 허우적거리면서 병규를 향해 기어갔다.

  “대체 언제.”

  카란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수하들이 저 지경이 될 때까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는 것이 황당하기만 했다.

  “놈. 결코 용서하지 않겠다.”

  카란이 으르렁거리며 외쳤다.

  “용서?”

  문안으로 들어서던 병규가 고개를 돌리며 비스듬히 웃었다.

  “곧 죽을 너에게 들을 말은 아닌 것 같군.”

  “......?!”

  카란은 불길한 예감을 받았다.

  ‘설마.......’

  그 순간 그의 시야가 빙빙 돌아갔다.

  털썩.

  묵직한 소음이 들렸다.

  그는 바닥에 납작하게 떨어졌다. 그리고 당황한 그의 눈동자 속으로 잘려진 그의 하체가 보였다.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깔끔하게 동강난 그의 하체는 피와 내장을 쏟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이럴 수가.......”

  놀랍게도 그 역시 수하들과 마찬가지로 허리 아래가 두동강 난 것이다.

  너무도 예리하게 잘렸기에 아픈 고통조차 느끼지 못한 것이다.

  “좋은 꿈 꾸게.”

  피가 차오르는 카란의 동공 위로 사라지는 병규의 모습이 비쳤다. 그리고 그것이 그가 마계에서 마지막으로 본 장면이었다.

  가라다족 최고의 용사인 카란이었지만 절망의 군주에 비하면 보잘것없는 존재에 불과했다.

  절망의 탑 내부는 은은하면서 답답한 어둠이 둥지를 틀고 있었다. 

  엄청나게 튼 탑이었지만 정작 내부는 휑해서 지겹도록 넓은 운동장을 연상케 했다.

  그 넓은 공간에 거대한 성게처럼 생긴 녀석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녀석의 전신은 굵고 짧은 가시들로 뒤덮여 있었다. 놈은 손발이 짧은 대신 가시들의 움직임이 매우 예민하고 정교했다.

  “그대가 벨로로폰?”

  놈이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킬킬거렸다.

  “으흐흐. 쉐이드의 말을 반신반의했는데 이거야 원, 정말로 형편 없어졌군. 절망의 군주가 고작 이정도의 존재감이라니. 실망이야.”

  벨로로폰의 겉모습이 변한 것은 상관없다. 원래가 마왕쯤 되는 존재면 모습쯤은 자유롭게 바꿀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벨로로폰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가히 실망스러웠다. 과연 그가 절망의 군주가 맞는지 의문이 들 정도였다.

  병규는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그는 이층으로 올라가는 계단을 발견했다. 키득거리며 웃고 있는 성게 녀석의 등뒤였다.

  “너와 상대할 시간이 없다. 비켜라.”

  “흥. 거만한 것만은 여전하군. 내 이름은 얼친. 타락의 여섯 번째 자식, 기억해 두어라. 널 때려눕힐 위대한 이름이니.”

  말과 함께 얼친은 곧장 몸을 날렸다.

  벨로로폰을 본 순간부터 참을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 참은 것만 해도 용한 일이다.

  얼친은 허공ㅇ서 몸을 둥글게 말더니 강철과 같은 갓로 전신을 보호하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크흐. 죽어라. 절망의 군주.”

  괴기한 웃음을 터트리자 전신의 가시가 몇 배나 길어졌다. 그 모습은 가시가 촘촘하게 박힌 커다란 공을 연상케 했다. 하지만 병규를 향해 쏘아져 오는 그 속도는 가히 번개와 같았다. 인간의 눈으로 쫓을 수 있는 수준이 아니었다.

  하지만 병규는 무섭게 날아드는 얼친을 보면서도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잠깐 사이 얼친이 코앞까지 다가왔다.

  비로소 병규는 미미한 대응을 보였다.

  손으 앞으로 뻗어내어 가볍게 휘저었다. 가벼운 손짓에 막대한 압력이 일었다.

  쿠쿠쿵!

  그의 손끝에서 이어난 압력에 바닥의 석판이 주저앉고 천정을 받치고 있는 기둥이 휘어졌다.

  “크윽!”  얼친은 그대로 바닥에 짜부라졌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아예 바닥을 파고들었다.

  “크윽. 감히!” 

  버럭 괴성을 지르며 얼친이 몸을 일으켰다. 병규가 쏟아 낸 압력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무거웠지만 얼친을 잡아두기엔 역부족이었다.

  “과연...... 여전히 잡스런 기술들을 익히고 있군.”

  벨로로폰은 상대들의 기술을 흡수하는 능력으로 유명했다. 소년기부터 빛을 발한 그 복제능력은 끝이 없었다. 무제한의 능력복제. 가공스러운 권능이다. 하지만 그런 탓에 일부 마족들에게 시기를 받았다.

  순수하지 못하다는 것이 비난의 이유였다.

  그의 능력은 다양한 특기를 가진 마족들 사이에서도 그 유례를 찾아볼 수 없을 정도로 독특한 것이라, 마왕의 아들이면서도 많은 오해와 질시를 받았다.

  얼친의 비아냥거림엔 이런 사연이 숨어 있었다.

  하지만 병규는 어떠한 반응도 보이지 않았다. 얼친이 그의 압력에서 벗어났음에도 여전히 무심한 눈으로 걸음을 옮길 뿐이었다.

  “이, 이! 감히 날 무싷다니!”

  화가 머리끝까지 인 얼친은 한껏 능력을 개방했다.

  쭈욱!

  가시가 수십 미터나 늘어나며 중앙 홀의 잡기들을 꿰뚫었다. 그의 가시는 가공할 만한 강도와 예리함을 지니고 있었다. 돌로 된 바닥은 물론 굵은 기둥과 화려한 색채로 치장된 천정까지 사정없이 뚫어 버렸다.

  하지만 엄청난 예리함을 과시하던 그의 가시도 병규를 해치지는 못했다.

  병규는 가벼운 동작으로 가시들을 피해 내고, 두 손으로 얼친의 몸뚱이를 거머쥐었다.

  깜짝 놀란 얼친은 몸을 웅크리며 가시를 움직였지만 오우거의 괴력을 가진 병규의 힘을 당해낼 수 없었다.

  “비키라고 경고했었다.”

  병규는 강제로 얼친의 웅크린 몸을 잡아 펴고는 그것으로도 모자라 맨손으로 가시를 뽑아내고, 그 아래의 벌건 피부를 손가락으로 후벼 팠다.

  “크아아악!”

  얼친은 살가죽이 뜯겨져 나가는 고통에 비명을 질렀다. 하지만 한번 피를 본 병규는 두 눈을 붉게 충혈시키며 살육에 집중할 뿐이었다.

  촤아악!

  찌극! 찌지지지직!

  우두둑!

  병규는 맨손으로 얼친의 육체를 강제로 뜯어 발겼다. 그리고 벌어진 내장 속에서 심장을 끄집어내 산산조각 냈다.

  그는 얼친에게 가장 확실한 죽음을 안겨 준 것이다.

  마족을 죽이는 가장 확실한 방법은 머리를 박살내거나, 심장을 부숴 버리는 것이다.

  “.......”

  찢어진 육편조각이 된 얼친을 무심하게 내려다보던 병규는 이층으로 이어지는 계단으로 올랐다.

  그가 걸음을 옮기자 바닥에 흩어진 얼친의 핏물이 주르륵 그의 발밑으로 모여들었다.

  스르르.

  모래가 물을 흡수하듯 그의 발밑으로 핏물이 흡수되어 사라졌다.

  절망의 군주가 지나간 자리, 짙은 혈향만이 남았다.

  “호오. 당신이 벨로로폰? 예상보다 곱상한 얼굴이로군.”

  이층을 지키고 있는 타락의 혈계는 손발이 여섯 개씩 달린 슬랜더라는 자였다. 그 많은 팔이 모조리 낫처럼 구부러져 있었다. 전체적으로 팔이 많이 달린 사마귀를 연상케 했다.

  “당신이 올라온 것을 보니 얼친, 그 바보 녀석은 죽은 모양이군.”

  동료가 죽었음에도 슬랜더는 별다른 표정 변화가 없었다. 설혹 옆집 개가 죽었어도 그보다는 심각한 표정변화를 보였을 것이다.

  “얼친에게서 대충 사정을 들었을 테니, 지루한 상황설명은 필요없겠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난 슬랜더가 여섯 개의 손을 좌우로 펼쳤다.

  츠츠츠.

  단지 낫처럼 구부러진 손을 폈을 뿐인데, 정체되어 있던 공기가 서서히 흐르기 시작했다.

  가만 슬랜더를 보고 있던 병규가 하얗게 웃었다. 화끈한 녀석이다. 그것만은 마음에 들었다.

  “간다. 절망의 군주.”

  슬랜더는 사마귀처럼 홀쭉한 몸을 쭉 늘이며 순식간에 병규 앞까지 쇄도했다. 얼친처럼 저돌적이진 않았지만 마치 날카로운 칼날이 찔러 들어오는 것처럼 예리했다.

  병규는 슬쩍 좌측으로 이동했다. 하지만 그는 이내 다시 원래의 자리로 돌아와야 했다. 어느새 슬랜더의 잘 벼려진 팔이 그의 앞을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난도질 시간이다.”

  촤아아악!

  그 많은 팔이 기묘한 각도로 움직이며 병규를 몰아세웠다.

  폭풍처럼 정신없이 날아드는 공격들. 병규는 바람에 버들가지가 휘어지듯 작은 움직임으로 쏟아지는 공격을 패해 냈다.

  “빠르군. 하지만 결코 내 공격에서 벗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파파팡!

  슬랜더의 팔에서 푸른 섬광이 튀었다.

  모두 여섯.

  병규는 슬쩍 상체를 뒤로 휘었다.

  파직. 파지직.

  그의 가슴을 스치고 지나간 섬광이 벽에 부딪히며 현란한 불꽃을 난사했다. 뇌전은 벌레처럼 벽을 타고 구불구불 사방으로 퍼졌다.

  “이 정도는 맛보기에 불과해.”

  슬랜더의 가슴 앞에서 챙하고 맞부딪혔다.

  파드드드.

  등에서 솟아난 얇은 날개가 진동하며 요란스런 소음을 뿜어냈다. 그 순간 슬랜더의 팔에서 좀 전과는 비교도 되지 않는 섬광이 화려하게 일었다.

  “가라.”

  슬랜더가 여섯 개의 팔을 활짝 펼치자 온 사방이 푸른 섬광으로 가득 뒤덮였다.

  병규의 미간에 주름이 생겼다.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뻗어오는 섬광들을 피해낼 방법이 없었던 것이다. 

  “어떻게 할 테냐?”  슬랜더가 이죽거리며 물었다.

  하지만 다음 순간 그는 흠칫 놀라고 말았다. 궁지에 몰린 절망의 군주가 키득키득 웃고 있었던 것이다. 그 장난스런 미소에 슬랜더는 저도 모르게 오한이 들었다.

  “고작 이 정도냐? 가소로운 녀석.”

  섬뜩한 음성을 토해 낸 병규가 한 손을 쭉 내밀었다. 느리게 다가오던 섬광들은 병규의 손 끝에 닿자마자 미친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촤아아악! 치지지직!

  날뛰는 섬광들. 병규의 피부 위로 섬광이 송충이 떼처럼 꾸물꾸물 흐르고, 현란한 불꽃이 정신없이 타올랐다.

  하지만 그런 충격 속에서도 병규는 의연한 표정으로 서 있었다.

  “허억!”

  슬랜더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주춤주춤. 저도 모르게 그는 뒷걸음질치고 있었다.

  섬광.

  일렉트릭 볼트라고 불리는 슬랜더의 최대 기술.

  압축된 뇌전의 기운을 품고 있어, 일단 상대에게 적중하면 벼락 수십 개를 한꺼번에 맞는 듯한 위력을 발휘해, 한순간에 적의 몸뚱이를 까만 잿덩이로 만들어 버린다.

  방금 전, 그가 구사한 기술은 그런 일렉트릭 볼트를 최대 파워로 구사한 것이다. 그물처럼 펼쳐진 섬광은 수백, 수천 다발의 벼락을 품고 있어, 조금이라도 상대에게 닿으면 피뢰침이 벼락을 빨아들이듯, 폭풍처럼 적을 함락시킨다.

  그런데, 그런 최강의 기술을 절망의 군주는 가볍게 받아내고 있는 것이다.

  “저, 저것은.”

  슬랜더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푸른 섬광이 병규의 피부를 타고 흐르는 순간, 놀랍게도 병규의 피부가 급격하게 변이되었다. 말랑말랑한 인간의 피부가 일렁일렁 사라지더니, 그 자리에 미끈한 비늘이 촤르르 일어나는 것이다. 그 붉은 비늘은 놀라운 마항력으로 일렉트릭 볼트를 흡수하고 있었다.

  붉은 비늘.

  그것은 레드 드래곤의 능력이었다. 마그네트의 피를 마신 것이 이제야 효력을 드러낸 것이다.

  “맙소사!”

  슬랜더는 진저리를 쳤다. 설마 하니 드래곤의 능력까지 흡수했을 줄이야.

  당황한 그가 진저리를 치는 사이, 병규의 온몸을 뒤덮었던 섬광은 점차 그 힘을 잃어가다, 결국 하얀 불꽃을 터트리며 사라졌다.

  섬광이 사라지자, 병규의 피부를 대신하던 드래곤의 비늘도 촤르르 피부 속으로 사라졌다.

  "이게 끝이냐?“

  코웃음과 함께 병규가 물었다. 몸이 굳어 버린 슬랜더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긍정으로 받아들인 병규가 그를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이제 내 차례인 것 같군.”

  슬랜더는 온몸을 덜덜 떨었다.

  저벅 저벅 걸어오는 병규의 발걸음 소리가 마치 사신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그때야 슬랜더는 뼈저리게 통감할 수 있었다.

  그의 상대가 누구라는 것을.

  절망의 군주.

  최악의 마왕.

  “절망의 밑바닥까지 굴러 떨어져라!”

  병규의 두 눈이 광기로 일렁였다.

  촤아아악!

  손끝에서 뻗어 나온 요수의 발톱이 길게 울부짖었다.

  저벅 저벅.

  병규는 다시 계단을 오르고 있었다.

  무표정한 얼굴.

  그의 두 손에서 떨어지는 핏방울. 터벅거리며 걷는 그의 두 발이 붉은 족적을 찍어 냈다.

  슬랜저는 잔인하게 죽었다.

  그의 피는 이층 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타락한 종족이건만 핏물만은 의외로 붉었다.

  삼층은 아래층과는 확연하게 달랐다.

  손끝조차 보이지 않는 어둠.

  짙은 어둠이 장막처럼 드리워져 있었다.

  “왔군.”

  어둠이 출렁이며 말했다.

  병규는 복잡한 표정으로 어둠을 보았다. 마르고 갈라진 음성이 그의 입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너도 날 막을 텐가?”

  “.......”

  대답은 없었다. 대신 쭈우욱 대나무가 휘어지는 듯한 팽팽한 소음이 들려왔다.

  활시위를 당기는 소리.

  피잉!

  어둠으 뚫고 바람이 날아왔다.

  병규는 한 걸음 옆으로 옮겼다.

  퍼억!

  방금 전까지 서 있던 곳에 화살이 박혔다. 돌바닥을 뚫고 파르르 떨고 있는 강철 화살을 보며 병규는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엘프의 화살이군. 다크엘프인가?”

  “.......”

  이번 역시 대답 대신화살이 날아들었다.

  피핑!

  한꺼번에 두 개.

  병규는 그림 같은 자태로 몸을 움직였다.

  퍼퍽!

  절묘하게 날아들던 화살들은 다시금 바닥에 박혔다.

  “소용없.......”

  푸욱!

  차게 웃던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어느새 날아든 화살이 그의 허벅지에 박혀 있었다. 기척도 없이 어둠을 틈타 날아든 화살이었다.

  “...... 제법이군.”

  처음으로 병규는 상대를 인정했다. 적어도 상대의 공격을 허용한 것은 처음 있는 일이다.

  “...... 휩.”

  어둠이 출렁이며 대답했다.

  휩.

  3층을 지키고 있는 데이크란의 혈계, 병규의 생각대로 다크엘프였다. 물론 마왕의 힘을 이었기에 그 능력은 일반적인 다크엘프와는 확연히 차별되었다.

  적어도 어둠 속에서는 가장 무서운 암살자가 바로 휩인 것이다.

  “아무래도 술래잡기를 해야 할 것 같군.”

  순간 병규의 신형이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바람처럼 움직였다. 곧 병규와 휩 간의 쫓고 쫓기는 승부가 시작되었다.

  엘프가 숲에서 가장 빠른 종족이듯, 다크엘프 역시 어둠 속에서 그 능력이 십분 발휘된다. 게다가 휩은 그런 다크엘프들 중에서도 최강을 자라하는 실력자였다.

  병규는 휩을 쫓아 바람처럼 탑 안을 휘돌아다녔다. 하지만 끝내 휩을 잡지 못했다. 그동안 다섯 발의 화살이 병규의 팔과 다리에 꼽혔다.

  병규는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들을 보며 입꼬리를 살짝 들어올렸다.

  “고상한 취미로군.”

  충분히 급소를 노릴 수 있었음에도 휩은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듯, 야금야금 그를 공격했다.

  우뚝.

  병규는 더 이상 휩을 쫓지 않았다.

  어둠 속에서 휩을 쫓아다니는 것이 낭비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적어도 이 어둠 속에서는 휩이 그보다 더 빠르다는 것을 인정했다. 마계를 통틀어 음지에서는 쉐이드와 더불어 최강이아라고 일컬어지는 자가 바로 휩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승부를 포기할 병규가 아니었다.

  뚝뚝.

  병규의 몸에서 떨어진 피가 바닥 이곳저곳을 흥건히 적셨다.

  “그게 좋겠군.”

  살기 어린 미소가 그의 얼굴에 떠올랐다.

  “.......”

  피피피핑!

  화살들이 날아들었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분명 넷. 하지만 기척 없이 날아드는 화살은 그보다 훨씬 많았다. 어디를 노리는지 모르니 피하기 까다로웠다.

  “드래곤 스케일.”

  병규의 피부가 드래곤의 비늘로 뒤덮였다.

  후두두둑!

  바람소리를 내며 나아든 화살들이 붉은 비늘에 맞고 튕겨 나갔다. 하지만 소리 없이 날아든 화살들은 드래곤의 비늘을 비웃기라도 하듯, 진득한 소음을 발하며 그의 몸에 박혔다.

  드래곤의 비늘은 최강의 방어력을 가지고 있지만, 휩의 화살은 그보다 더한 관통력을 자랑했다.

  “으음.”

  급기야 병규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몸에 박힌 화살을 뽑자 피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병규는 신경질적으로 피를 털어냈다.

  “...... 마지막.”

  휩의 굴곡 없는 음성이 들려왔다.

  쏴아아아! 

  화살이 비처럼 쏟아졌다.

  들리는 소리만 이 정도이니, 소리 없이 날아드는 화살은 수를 헤아릴 수도 없을 지경이리라.

  하지만 그때.......

  탁한 눈으로 허공을 쳐다보고 있던 병규가 비릿하게 웃었다.

  “후후후. 걸렸구나.”

  “...... 흡!”

  처음으로 휩의 다급한 음성이 들렸다. 병규를 향해 날아들던 화살들이 돌연 급격하게 방향을 틀었던 것이다. 화살의 새로운 목표는 놀랍게도 화살을 쏜 휩이었다.

  주인을 배신한 화살들은 인정사정이 없었다.

  슈슈슈슈! 피피피피핑! 후두둑! 피피피픽!

  검은 화살이 3층의 벽과 천정에 빼곡이 박혔다. 휩은 바람처럼 빨랐지만 그중 몇 대는 피할 수 없었다.

  “헉. 헉.”

  어둠 속에서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 어떻게.”

  어떻게 화살을 조종했느냐고 휩이 물었다.

  “간단해.”

  병규는 손을 들었다.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의 손끝에서 뚝뚝 떨어지는 핏방울 소리는 어둠 속에서도 선명하게 들렸다.

  “좀 전에 뿌린 피에 자력을 숨겨 두었지. 아주 강력한 자력을.”

  병규에게 자발적으로 피를 준 드래곤인 마그네트는 신비한 힘으로 만들 수 있었다. 그 능력이 병규에게 그대로 전해졌다.

  병규는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을 하나 꺼냈다.

  “적어도 이 화살촉은 금속이잖아?”

  “...... 놀랍군. 하지만 아직 끝나지 않았다."

  무감정한 어조로 중얼거린 휩은 활을 버리고 어둠 속으로 스며들었다.

  무기는 사용할 수 없게 되었지만 아직 암흑에서의 신체 능력은 그가 월등했다.

  “역시 끝을 봐야겠군.”

  병규의 눈이 낮게 가라앉았다.

  굳이 상대를 죽이고 싶은 마음은 없지만, 그렇다고 자신을 죽이려는 상대를 살려 주고 싶을 정도로 자비롭지도 않았다.

  기억은 돌아오지 않았지만, 마계인의 긍지에 대해서는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휩과 같은 자는 죽기 전엔 결코 길을 비켜 주지 않는다.

  죽을 줄 알면서도 불꽃을 향해 날아드는 나방처럼 마지막을 화려하게 불태우는 것이다.

  병규는 그의 소원을 들어주기로 결심했다.

  손가락을 가볍게 마주쳤다.

  딱!

  맑은 음이 파장을 이루며 어둠 속에 넓게 퍼졌다. 그 파장에 휩의 움직임이 걸려들었다. 상당히 가까운 곳, 화살에 맞은 상처가 영향을 미친 듯, 불안정한 움직임이었다.

  촤아악!

  어둠 속으 유영하던 휩이 병규의 등 뒤에 소리 없이 나타났다. 검게 물든 그의 손이 병규의 목줄기를 잡아 갔다.

  그것을 뻔히 느끼면서도 병규는 태연했다. 등 뒤의 공격을 막아낼 그 어떤 방법도 없건만, 오히려 두 눈을 감는 만용을 부렸다.

  찰방.

  마지막순간, 휩의 발이 바닥에 흥건하게 고인 병규의 피를 밟았다. 

  그때 병규의 두 눈이 번쩍 떠졌다.

  “화려하게 가시게. 불나방.”

  딱!

  병규의 손가락이 다시 마주쳤다. 그리고 그 순간!

  쉬쉬쉭! 쉬쉭!

  바닥에 흥건했던 그의 피에서 돌연 예리하기 그지없는 가시들이 솟구쳤다.

  일층의 얼친이 구사하던 기술이었다. 얼친은 전신이 가시로 뒤덮인 혈계였다. 병규는 그의 능력을 그대로 써먹었다.

  얼친은 피부 위로 가시를 돋아나게 했지만, 병규는 한층 더 발전시켜, 바닥에 쏟아진 핏물에서 돋아나게 만든 것이다.

  이 상상도 못할 함정에 휩은 무방비로 방치되었다.

  발바닥을 뚫고 들어온 수십 가닥의 가시가 그의 허리뼈를 부수고, 목구멍을 뚫으며 머리 위로 삐죽 솟았다.

  “컥!”

  휩의 입에서 핏물이 쏟아졌다. 가늘고 여린 그의 전신이 부르르 진저리를 쳤다.

  “과연.......”

  의미 모를 마지막 한마디를 남기며 휩의 몸이 축 늘어졌다. 가시에 박힌 그의 시신은 죽어서도 두 발로 땅을 밝고 서 있을 수 있었다.

  병규는 공허한 시선으로 그를 잠시 쳐다보았다.

  휩이 죽자 3층을 가린 칠흑 같은 어둠이 환영처럼 스르르 사라졌다. 희미하긴 하지만 대강의 사물을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빛이 돌아왔다.

  손끝조차 보이지 않던 이 어둠도 휩의 능력이었다.

  병규는 자신의 몸에 박힌 화살들을 모조리 제거했다.

  화살을 뽑을 때마다 지독한 통증이 엄습해 왔다. 하지만 그는 조금의 표정 변화 없이 묵묵히 화살들을 제거했다.

  찢어진 상처들에서 피가 새어 나왔지만 그는 지혈할 생각도 없었다. 사실 그럴 필요도 없었다.

  천천히. 느리지만 화살에 입은 상처가 저절로 아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과거 그는 스크래그라는 몬스터의 피를 먹은 덕분에 상상을 불허하는 재생력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스크래그의 재생력은실로 눈이 부실 지경이어서, 설사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순식간에 재생될 정도였다. 하지만 이토록 대단한 스크래그의 재생력도 물이 없으면 효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한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래서 그는 절망의 탑에 오기 전, 불가피학 트롤의 피를 마셨다.

  트롤의 재생력은 스크래그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느리지만, 대신 물이 없어도 상처를 치유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었다.

  끈끈한 꿀이 느릿느릿 흘러가듯 진행된 재생에 어느덧 화살에 당한 상처들이 완전히 나았다. 병규는 팔을 붕붕 휘둘러 보았다. 약간의 통증이 느껴지긴 했지만 동작에 큰 무리는 없었다.

  치유가 끝난 그는 천정을 올려다보았다.

  “보아하니 층마다 이런 녀석들이 기다리고 있는 모양이군.”

  그의 입가에 장난스런 미소가 매달렸다.

  기습으로 적의 심장부에 타격을 준다는 생각은 애초에 기대도 않았다. 마족들이 그렇게 허술하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남의 장단에 놀아 주고 싶은 마음은 결코 없었다.

  “귀찮으니 한꺼번에 상대해 주지.”

  병규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매달렸다.

  다음 순간 그의 몸이 허공으로 뛰어올랐다.

  콰콰쾅

  두꺼운 천정이 돌과 모래를 쏟아 내며 무너졌고, 그의 몸은 순식간에 위층으로 올라갔다. 과연 위층에도 그를 기다리는 누군가가 있었다.

  “여!”

  놀라는 그를 향해 손을 흔들어 준 병규는 다시 한번 허공으로 솟구쳤다. 천정이 무너지고, 다시 위층으로 올랐다. 그리고 다시 한번.

  순식간에 6층에 도달했다.

  그곳에서 병규는 더 이상 위로 오를 수 없었다.

  마강한 위압감을 풍기고 있는 존재가 그를 가로막았기 때문이다.

  “마왕 벨로로폰? 의외로군. 이런 보잘것없는 몸이 되다니.”

  덩치가 거대한 녀석은 묵직한 음성으로 병규를 평가했다.

  ‘크군.’

  키만 3미터가 넘었다.

  마치 산을, 거대한 산을 대하는 것 같았다.

  “흐음.”

  병규의 표정이 조금 굳어졌다. 이 녀석은 다르다.

  지금까지 상대한 녀석들보다 월등히 강한 힘을 느낄 수 있었다.

  “마왕의 혈계들 사이에도 힘의 차이가 있는 모양이군.”

  “힘의 차이라. 흐음. 그런 것은 잘 모르겠군. 하지만 확실히 수준이 다르기는 하지.”

  거한의 능력은 베르키스들과 비교해도 손색이 없었다.

  “그래? 그렇다면 네 능력은 뭐지?”

  “흐흐흐.”

  괴인이 음침하게 웃는 계단으로 두 마족이 나타났다. 그들은 병규가 지나쳤던 4층과 5층을 지키던 자들이었다.

  “감히 우리를 무시하고 지나가다니.”

  “설마 우리 모두를 한꺼번에 상대하겠다는 발칙한 생각은 아니겠지?”

  병규는 웃기만 했다.

  “이해할 수 없군. 정말 저자가 마왕 벨로로폰이란 말인가?”

  “겉모습도 다르고, 마력도 보잘것없지만, 확실히 그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긴 하는군.”

  유난히 머리가 큰 질로우가 차가운 음성으로 말했다.

  “흥. 난 아직도 믿기지 않아.”

  “믿어라. 적어도 1, 2, 3층을 지키던 형제들이 당한 것은 확실하니까.”

  거한, 쉬버의 묵직한 음성에 질로우와 무기를 주렁주렁 달고 있는 디스트로이의 눈빛이 확 달라졌다.

  “좋아. 잘나신 마왕님. 내가 먼저 그대를 상대해 드리지.”

  디스트로이가 어깨를 으쓱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병규는 팔짱을 낀 채, 지극히 오만한 태도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처음 그를 가로막은 거한에게 신경이 쓰였지만, 이제는 그마저도 시들해졌다. 무감각해졌다고 할까. 어쩌면 그의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한 마왕으로서의 자존심이 그를 이토록 거만하게 만드는 것인지도 몰랐다.

  “무시하는 것인가?”  디스트로이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소름끼치는 살기가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솜털이 곤두서고 피부 위로 찌릿찌릿한 전율이 흘렀다. 그러나 이런 가공할 살기를 정면으로 대하는 병규의 대답은 정말이지 기상천외한 것이었다.

  “귀찮다.”

  “뭐라고?”

  “귀찮다고 말했다. 한꺼번에 덤벼라.”

  병규의 차가운 음성에 셋의 얼굴이 동시에 굳어 버렸다. 설마 이렇게 거만할 줄이야.

  “허허허. 과연 절망의 군주. 보잘것없는 몸뚱이가 되어서도 여전히 거만하군. 하지만 당신은 실수한 거야. 아래층의 녀석들과 우리는 격이 다르거든.”

  한꺼번에 덤비라는 병규의 자만심 가득한 도발에 타락왕들은 흥분하지 않았다.

  “내가 당신의 자만을 박살 내 주겠다.”

  난쟁이 녀석이 슬금슬금 걸어 나왔다.

  “드워프로군.”

  난쟁이는 타락한 드워프였다.

  데이크란의 혈계들은 하나같이 타락한 존재들이다. 물론 마왕의 힘을 받았기에 땅딸보 드워프라 해도 결코 평범하지는 않았다.

  “디스트로이라고 부른다.”

  스스로 디크트로이라고 말한 타락한 드워프는 그 작은 몸뚱이에 수십 개의 무기를 챙기고 있었다.

  “시작은 이것이 좋겠군.”

  디스트로이는 자신의 키만한 철퇴와 장검을 꺼내 들었다.

  그는 병기술의 궁극에 달한 자였다.

  드워프가 만든 물건은 언제나 최고라는 찬사를 받는다. 그런 드워프들 중에서도 디스트로이는 유독 병기에 열중했고, 수백 년의 고련 끝에 최고라고 불릴 만한 병장기들을 만들어 냈다.

  그렇게 만들어 낸 걸작들로 디스트로이는 병기의 훌륭함을 직접 확인하고 싶었다. 결국 열망이 그를 타락시켰다. 그는 자신이 만든 병기의 훌륭함을 시험하고, 장인으로서의 능력을 과시하기 위해 부족을 모조리 도살하고, 마왕의 인장을 얻어 타락의 왕이 되었다.

  “내 무기는 자만심이 없으니, 조심하는 게 좋을 것이다!”

  마족들은 하나같이 성격이 폭급하여 참을성이라곤 눈곱만치도 없다. 디스트로이 역시 이와 마찬가지로 말을 꺼내기 무섭게 득달같이 달려들었다.

  워낙 작은 몸이라 뛰어오는 모습이 꼭 물이 가득 든 가족공이 통통 튀어오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히려 몸이 작아 유리한 점도 많았다. 공격하는 입장에서는 재빠른 움직임의 디스트로이를 잡아내기가 여간 까다로운 것이 아니었다. 게다가 그의 무기들은 너무도 예리해서 정면승부로는 승산이 없었다.

  부웅! 붕!

  철퇴와 장검이 기묘한 각도로 동시에 날아들었다.

  하나는 머리를 찍어 누르고, 다른 하나는 비스듬히 심장을 그어온다.

  냉소하던 병규는 슬쩍 한 걸음 다가섰다. 황급히 물러서야 할 상황에서 그는 오히려 적의 공격권 안으로 서슴없이 들어선 것이다.

  “기억을 잃더니 완전히 미쳐 버렸구나!”

  디스트로이는 수다스럽게 외치며 더욱더 무기를 휘둘렀다.

  콰아아악!

  가공할 파공음이 병규의 전신을 휘저었다. 그 순간 웃고만 있던 병규가 손을 슬쩍 뻗었다.

  “여기가 텅 비었잖아.”

  그의 손가락이 디스트로이의 가슴을 짚었다. 양손의 무기를 힘껏 휘두른 순간 생긴 아주 작은 틈이었다.

  “요수의 발톱.”

  촤악!

  짧고 분명한 절삭음이 디스트로이를 찢어발겼다.

  “컥!”

  디스트로이는 짧은 단발마를 쏟아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그의 작은 몸뚱이는 잘 드는 칼로 칼집을 낸 것처럼 좌우로 길게 찢어져있었다.

  즉사였다.

  “자, 다음은 누가 나설 테냐?”

  병규가 으스스한 음성으로 말했다. 하지만 누구도 나서지 않았다. 다른 두 타락왕들은 비딱하게 선 채로 방관자적인 시선으로 그를 바라볼 뿐이었다.

  그들의 이상한 태도에 병규가 의문을 띄운 바로 그 순간이었다.

  끼그그극.

  기이한 소음과 함께 바닥에 널브러진 무기들이 부스스 움직이더니 허공으로 둥둥 떠올랐다.

  무기의 개수는 모두 18개. 제각각 허공에 방위를 잡은 그 무기들은 사전에 합의라도 한 듯, 동시에 무서운 기세로 병규에게 날아들었다.

  창이 가슴을 찔러 오고, 부웅 하는 파공음과 함께 도끼가 머리를 갈라 오는가 하며, 어느새 다가온 검과 도가 가위처럼 그의 허리를 베어 왔다.

  “그렇군.”

  몇 차례의 아슬아슬한 순간을 넘기고서야 병규는 디스트로이의 정체를 깨달았다. 디스트로이는 타락한 드워프가 아니라, 그가 만든 무기들이었다.

  놀랍게도 드워프의 무기들은 모두 자아를 가진 에고웨폰이었던 것이다.

  “끄그그그그.”

  철판을 갈아대는 것 같은 불쾌한 소음.

  허공에 떠오른 에고웨폰들이 딸가락 소리를 내며 비웃음을 날렸다. 웅웅 울어대는 진동이 당장이라도 피를 마시고 싶어하는 눈치다.

  “재미있군.”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한낱 병기가 마왕의 인정을 받았다는 것 자체가 그의 흥미를 자극했다.

  전투의 짜릿함을 느낀 그는 레종을 구한다는 최초의 목적마저 반쯤 잊어버렸다.

  조금씩 커 가던 마족의 심성이 불처럼 일어난 것이다.

  “오라! 내 친히 너희들을 산산조각 내어 불타는 용암 속에 넣어주리라.”

  병규의 전신에서 검은 오오라가 울컥 뿜어져 나왔다.

  내부 깊숙한 곳에 갈무리된 마성이 눈을 뜨며 짐승의 울부짖음과 같은 마력을 폭포수처럼 쏟아 냈다. 그 무지막지한 마력에 타락왕들은 찌릿찌릿한 통증을 느꼈다.

  특히 정면에서 병규의 마력을 감당해야 했던 디스트로이는 병장기에 금이 쩍쩍 가는 충격을 받았다.

  짤짤짤짤. 투드득. 끼그윽.

  에고웨폰들이 일제히 진동하며 괴상한 소음을 발했다. 병규에게서 스멀스멀 새어 나온 어두운 힘에 공포를 느낀 것이다.

  “하아.”

  숨소리와 함께 검은 마력이 증기처럼 뿜어졌다.

  병규의 두 눈에서 섬뜩한 광채가 일렁였다.

  갑작스럽게 배가된 병규의 무지막지한 기운에 디스트로이는 물론이요, 느긋한 표정으로 관전하고 있던 두 타락왕들의 얼굴도 사색으로 변했다.

  그때였다.

  “이런, 못 본 사이 꽤나 늘름해졌군.”

  은근한 음성이 들려왔다.

  “그래도 예전엔 절망의 군주였다. 적어도 이 정도는 돼야 하지 않을까?”  장내엔 새로운 존재가 둘이나 늘어 있었다.

  그들을 본 병규으 두 눈이 분노의 빛을 번득였다.

  눈에 익은 자들이다.

  레종이 납치되기 전날, 왕성을 습격했던 세 마족 중 디바울과 컨퓨전 바로 그 둘이 계단을 내려오고 있었다.

  왕성에서 둘은 분명 병규에게 패했다. 절반쯤 각성한 병규의 힘에 육체마저 소멸해 버렸다. 하지만 병규가 파괴한 것은 껍데기에 불과했다. 마계에 있던 본체는 약간의 타격만을 받았을 뿐이다.

  ‘흐음.’

  병규는 속으로 가볍게 신음을 삼켰다.

  강한 존재감.

  이 방을 지키고 있던 거한, 쉬버조차 둘의 존재감과 비교하면 어른과 아이만큼의 격차가 있었다.

  확실히 중간계에서 본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해졌다.

  중간계에서 보았을 때의 힘이 작은 곤충정도라면 지금은 늑대 정도랄까? 그만큼 마계에서 다시 만난 디바울과 컨퓨전의 존재감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기다리려니 영 지루해서.”

  위층에서 그를 기다리고 있던 그들은 갑작스레 증폭된 벨로로폰의 기운에 결국 참지 못하고 아래로 내려온 것이다.

  “아무래도 쉐이드의 말과 달리 절망의 군주는 자신의 능력을 상당부분 되찾은 것 같군.”

  “상대의 능력을 복제해 낼 수 있었지? 보이지 않는 혈계들은 이미 그에게 흡수되었다고 봐야겠군.”  휘적휘적 걸어온 그들은 반쯤 감은 눈으로 병규의 능력을 저울질했다.

  “방해할 셈인가.”

  디스트로이가 버럭 성을 냈다.

  컨퓨전은 가소로운 듯 피식 웃었다.

  “방해? 덜덜 떨고 있던 녀석이 할 말은 아닌 것 같군. 솔직히 지금의 벨로로폰은 나로서도 이긴다고 장담 못할 수준이라고. 네게 승산이 있을 것 같아?”

  “이... 이......!!”

  컨퓨전의 비아냥거리는 말에 디스트로이들은 짤깍짤깍 소음을 내며 분노를 표했다. 하지만 컨퓨전 옆에 선 디바울이 눈을 부라리자 이내 한쪽으로 물러서고 말았다.

  디바울과 컨퓨전에 비하면 디스트로이는 미미한 존재에 불과할 뿐이다.

  “유감스럽지만 놀이는 여기까지입니다. 절망의 군주님. 지금부터는 저희 모두가 당신을 상대해 드리겠습니다. 조금 거칠더라도 부디 상심마시길.”

    컨퓨전이 정중히 선전포고를 했다.

  하나만으로도 고전을 면치 못할 막강한상대가 무려 다섯이나 한꺼번에 덤비겠다는 소리다. 암담한 상황. 그런데도 병규는 이상하게도 전혀 긴장이 되지 않았다. 오히려 마음이 들뜬다.

  씨익.

  그의 입가에 매력적인 미소가 감돌았다.

  동시에 뭉클뭉클 풍기던 마력도 한층 깊어져싸.

  “그럼 시작하도록 하죠.”

  타락왕들이 자세를 바로 잡았다.

  그들의 살기가 파도처럼 세차게 몰아쳤다.

  일촉즉발의 상황.

  바로 그 순간,

  “멈처라.”

  우렁찬 외침이 터지며, 한쪽 벽이 도미노처럼 우르르 무너졌다.

  “너희들은.......”

  무너진 벽 사이로 슬그머니 나타난 불청객을 보고 컨퓨전이 누런이빨을 보였다.

  베르키스. 알칸테. 아칸.

  절망의 세 혈계들.

  그들이 가장 중요한 순간에 자신들의 왕을 구하기 위해 이곳으로 달려온 것이다.

  컨퓨전과 디바울이 급작스럽게 높아진 병규의 마력을 감지했듯, 전장에 있던 이들 역시 한층 깊어진 병규의 기운을 느꼈다.

  강력한 마력의 기운을 감지한 그들은 미련 없이 전장을 떠나 이곳을 찾아온 것이다.

  “밖의 동정은?”  차가운 표정으로 병규가 물었다.

  한창 전투욕을 고취시키고 있던 때인지라, 베르키스들의 난입이 마냥 기쁘지는 않았다.

  베르키스는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답했다.

  “다행히 무녀님께서 훌륭히 일을 마치셨습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퀴니가 마수들을 동원했다면 타락한 종족들을 제압하는 데 큰 무리는 없으리라. 이로써 마왕 데이크란과의 협상에 쓰일 카드가 하나 생긴 셈이다.

  “여기는 저희에게 맡기시고 아버지께선 어서.......”

  아칸이 아름다운 음성으로 권했다.

  “흥. 우리가 순순히 보내줄 것 같은가!”  컨퓨전이 버럭 고함을 질렀다.

  그의 우렁찬 외침에 탑이 우르르 흔들리며 돌가루가 떨어졌다.

  “너희들은 우리가 상대해 주마.”

  베르키스가 의연히 맞섰다.

  “흐흐. 고작 너희 셋이서? 네놈들의 군주가 전성기였을 때면 모를까. 지금은 어림도 없는 소리다.”

  컨퓨전이 눈을 희번뜩거리며 이죽거렸다.

  마왕이 능력은 지대하여, 피를 나눈 혈계는 물론 미천한 몬스터와 벌레에까지 영향을 미친다. 고로 마왕이 힘이 강하면 그 아래 혈계들의 힘도 강해지는 것이다.

  현재 마계 최강은 데이크란이다.

  다른 마왕이 모두 사라진 시점에서도 그녀는 홀로 마계에 군림했다.

  그 능력은 측정불가의 수준. 반면 벨로로폰은 과거의 기억조차 잃은 상태.

  베르키스들이 본래의 실력을 발휘할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컨퓨전의 비아냥거림이 채 가시기도 전!

  “부족한 힘은 우리가 보충하겠어.”  당돌한 음성과 함께 몇 사람이 새롭게 나타났다.

  놀랍게도 그들은 퀴니와 샤바, 그리고 호랭이였다.

  베르키스들이 병규의 기운을 느끼고 찾아왔듯, 이들 또한 그를 위해 이곳으로 날아온 것이다.

  “나 왔어.”

  병규를 본 퀴니가 쪼르르 그의 품으로 안겼다.

  “음. ”

  그녀를 안은 병규의 표정이 한순간이나마 부드럽게 풀어졌다.

  “주인님, 저도 있어요. 샤바.”

  병규가 퀴니를 안고 있는 작은 틈을 노리고 샤바가 은근슬쩍 병규의 등에 기댔다. 히죽거리는 모습이 그렇게 즐거워 보일 수 없었다.

  “위험한데 왜 왔어?”

  “하지만 걱정되었는걸?”  눈물로 글썽이는 퀴니의 눈동자엔 진심이 회오리치고 있었다.

  병규는 말없이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왈칵 정이 치밀었지만 애써 외면했다.

  한편 다짜고짜 병규에게 안긴 둘과는 달리, 병규를 본 호랭이는 표정을 딱딱하게 굳혔다.

  ‘이럴 수가.’

  잠깐 사이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버렸다. 토성에서 봤을 때에도 적잖이 놀랐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됮 않을 정도로 패도적인 기세를 뿜고 있었다.

  피부를 눌러 보면 즉시 짙은 혈향이 뭉클 뿜어져 나올 것 같았다.

  호랭이는 느낄 수 있었다. 그가 최악로 치닫고 있음을.

  ‘업보야. 업보. 병규야. 병규야. 네 비좁은 어깨에 걸린 그 엄청난 업보를 어떻게 갚을 셈이냐.’

  호랭이는 고개를 저으며 갑갑한 한숨을 쉬었다.

  병규를 막지 못하는 현실이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졌다.

  “이거 대단한 인물들이 죄다 이곳에 모였군.”

  컨퓨전이 입가를 실룩이며 입을 열었다.

  그의 말처럼 이번 전쟁의 핵심인물이라고 할 수 있는 자들이 거의 다 이곳에 모였다. 신기한 것은, 아무도 이런 상황을 의도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병규가 자신의 마성을 한껏 발산하자, 모두가 알아서 이곳으로 모여들었다.

  “차라리 잘되었군. 한꺼번에 처리할 수 있게 되어 수고를 덜게 되었어.”

  컨퓨전의 눈동자에 살기가 어른거렸다. 베르키스가 비장한 기세 나섰다.

  “이미 말했다. 너희는 우리가 상대할 것이라고.”

  설사 목숨을 잃더라도 이 자리에서 비켜나지 않겠다는 뜻이 분명했다. 알칸테와 아칸이 그의 좌우에 날개처럼 펼쳐 섰다. 그렇게 셋이 함께 서 있는 것만으로도 무시무시한 기세가 장벽처럼 펼쳐졌다.

  하지만 컨퓨전과 디바울을 위협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고작 그 정도로.”

  컨퓨전이 킥 하고 비웃음을 흘렸다.

  애써 태연을 가장하고 있지만, 그들이 보기엔 절망왕들의 발악은 너무도 초라했다. 마족에게 비장감이라니. 지나가던 오크가 웃을 일이다.

  “가십시오. 아버지.”

  피가 끓는 듯한 음성으로 베르키스가 외쳤다. 알칸테와 아칸 역시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복잡한 표정으로 그들을 바라보던 병규는 천천히 뒤돌아섰다. 몇 발자국 옮기던 그의 눈에 퀴니가 보였다.

  그녀는 웃고 있었다.

  레종을 찾으러 가는 그가 서운할 텐데도.

  마왕 데이크란을 만나려 하는 그가 불안하게만 느껴질 텐데도, 그녀는 애서 미소를 보였다.

  병규는 억지로 미소 짓는 그녀의 표정에 가슴이 칼로 도려지는 듯한 아픔을 느꼈다.

  매캐한 감정이 가슴을 진탕시키고, 목구멍을 알싸하게 만들었다.

  항상 아이같이 인식되던 그녀인데. 어째서.

  마음이 뒤숭숭했다.

  “다녀오마.”

  병규는 혼란스런 감정을 뿌리치듯 일부러 무뚝뚝한 음성으로 말하고는 곧장 뻥 뚫린 밖으로 몸을 날렸다.

  “크흐흐. 기뻐하지 말라고. 그가 만나려고 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잊었나? 데이크란님이시다. 마계의 지배자. 타락의 군주란 말이다. 크하하하하.”

  병규가 떠나자, 못 본 척 의뭉을 떨던 컨퓨전이 뒤늦게 비웃음을 터트렸다. 놓친 것이 아니라 놓아줬다는 소리다.

  가히 틀린 말도 아니었다.

  컨퓨전의 관점에서 보자면 베리키스와 같은 벨로로폰의 혈계들도 그다지 힘들 게 없는 상대였다. 하물며 무녀가 데려온 인간들쯤이야.

  과연 베르키스들은 잔뜩 긴장한 기색이 역력했다.

  온전한 마왕의 힘을 받는 타락왕들은 강한 존재다. 그래서 더 아쉬울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께서 본신의 능력만 되찾았어도.’

  만약 그렇게만 되었다면 지금과 정반대의 상황이 연출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현실은 그렇게 못했다.

  ‘아버지를 위해 화려하게 산화하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베르키스가 진한 미소를 흘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알칸테와 아칸도 그와 같은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멋진 녀석들.’

  새삼 베르키스는 감탄했다. 이기적인 욕망으로 가득한 마계에서 이런 녀석들과 함께할 수 있었던 것은 정말이지 행운이다.

  그것도 벨로로폰과 같은 사악한인물 아래에서라면 가히 기적과 같은 일이 아닐 수 없다.

  괜히 흥이 오른 베르키스는 비장함을 담아 힘껏 소리쳤다.

  “형제들아! 혹여 죽더라도 난 너희들을 절대 잊지 않을 것이다! 절대로!”

  그의 말에 호응하듯 알칸테와 아칸이 크게 답했다.

  “절대로!”

  “저도 잊지 않겠어요.”

  웃음이 전염된다. 이미 두려움은 잊었다.

  남은 것은 오로지 끈끈한 정과 의리뿐.

  그 앞에 죽음은 한낱 무의미한 생의 마침표일 뿐이다.

  비록 피를 나눈 친형제간은 아니지만, 절망이라는 이름의 울타리 안에서 그들은 이로써 하나가 되었다.

  “우습군.”

  컨퓨전을 비롯한 타락왕들은 맘껏 그들을 비웃었다. 다른 곳도 안ㄴ 마계에서 삼류 시인이나 읊을 만한 형제애라니. 코웃음이 터져 나올 상황이다.

  베르키스들이 아무리 힘을 단결하여 성난 기세를 뿜어내도 그들은 냉소할 뿐이었다.

  한편, 비장한 베르키스들과 달리 퀴니와 그 일행들은 여전히 여유만만이었다.

  “재미있는 녀석들이 많다. 샤바.”

  타락왕들을 눈여겨본 샤바는 즐거운지 콧노래마저 흥얼거렸다. 그런 태연자약한 태도에 베르키스들은 어이가 없었다.

  ‘너무 무서워서 겁을 상실한 것인가. 아니면 상대의 기세를 느끼지 못할 정도로 약한 것인가.’

  천 년을 넘게 살아오며 적지 않은 인간들을 만나봤지만, 무녀와 함께 온 검은 머리 소년은 도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이해하기 힘든 인간(?)이 또 하나 있었다.

  검은 머리 소년과 대비되는 백발의 미청년. 그는 오히려 검은 머리 소년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았다.

  “녀석은 없군.”

  타락왕들을 쓱 훑어본 호랭이가 이마에 지그시 주름을 잡았다.

  찾고 있던 녀석이 없었기 때문이다.

  호랭이는 아이린 왕성에서 마족에게 치욕을 당한 적이 있었다. 비록 레종이 인질로 잡혀 있는 상황이라 어쩔 수 없긴 했지만, 어쨌든 상대에게 기절까지 당하는 수모를 겪었다.

  보통의 신선은 과거를 마음에 담아 두지 않지만, 속 좁고 옹졸한 불량신선 호랭이는 오히려 이를 바득바득 갈며 복수의 칼날을 갈았다. 

  “검은 그림자를 뒤집어쓴 놈!”  호랭이의 입에서 짐승 같은 목울림이 흘러나왔다. 놈을 생각하면 화가 머리끝까지 치밀어 오른다. 도저히 참을 수 없었던 호랭이는 중대한 결단을 내렸다.

  “아무래도 난 잠시 어딜 다녀와야겠군. 내가 자리를 비워도 괜찮겠지?”  호랭이가 묻자 퀴니와 샤바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맡겨 둬.”

  “알았다. 샤바.”

  둘의 확신에 찬 대답을 들으며 호랭이는 편안한 얼굴로 걸음을 옮겼다. 그런데 하필이면 멍한 표정으로 서 있는 타락왕들 사이로 걸어갈 건 또 뭐란 말인가.

  물론 그들 뒤쪽으로 계단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호랭이의 능력이라면 충분히 탑의 외벽을 걸어 다닐 수도 있고, 근두운을 타고 다닐 수도 있었다. 그런데도 굳이 으르르렁거리는 녀석들 사이로 터덜터덜 걸어 들어가는 것은 대체 무슨 심보란 말인가.

  “허.”

  오만방자가 하늘을 찌르는 호랭이를 보고 타락왕들은 어이가 없어졌다.

  “이놈이 우릴 뭘로 보고!”  컨퓨전의 입에서 분노의 일갈이 터진 그 순간, 맨 앞에 위치해 있던 에고웨폰 디스트로이가 즉시 18개의 병기를 일제히 쏘아 냈다.

  벨로로폰과 상대할 절호의 기회를 놓친 디스트로이는 이 허무맹랑한 백발머리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울분을 풀어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서둘렀다. 자칫하면 디바울과 컨퓨전에 밀려 자신의 차례는 아예 오지도 않을 가능성이 컸기 때문이다.

  찌이이이이잉!

  검음을 흘리며 날아드는 디스트로이의 기세는 광야에 이는 허리케인처럼 악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호랭이를 긴장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이 동네는 주인도 없이 무기 혼자 제멋대로 날아다니는군. 하여간 완전히 엉망진창인 세상이야.”

  인상을 찡그린 호랭이는 혀를 쯧쯧 차며 발을 휙 하니 돌렸다.

  마수왕 토란을 한 방에 묵사발로 만든 발길질이다. 가볍게 휘둘렀다곤 하나 예사로울 턱이 없었다.

  그의 발길질에 일어난 기운이 표표히 날리는가 싶더니, 어느새 발그림자가 사방을 뒤덮었다.

  끼그그그그!

  디스트로이는 워낙 급하기 달려들었던 터라, 위험한 기색을 눈치채고는 미처 피할 틈이 없었다. 그만 호랭이의 발그림자 속에 말려들고 말았다.

  발그림자로 이루어진 소용돌이는 끝이 없는 수렁처럼 병기들을 빨아들이고, 솥에 담긴 찌개국물을 휘젓듯 가차 없이 공간을 일그러트렸다.

  따다다다당!

  요란한 쇳소리가 귀를 따갑게 만들더니 부서진 무기의 파편이 가을 낙엽 떨어지듯 후두둑 날렸다. 

  단 한 번의 발길질에 마수들의 왕 토란에 이어, 타락왕 디스트로이까지 폐기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허. 거참. 이 동네 녀석들은 하나같이 입만 살았군. 실력도 형편없는 것들이 입만 살아서 나불거리는 꼴이라니. 에헹. 한심하다. 한심해. 답답한 중생 같으니. 어험험.”

  거창하게 헛기침을 한 호랭이는 입을 쩍 벌리고 서 있는 타락왕들 사이를 느긋하게 빠져나갔다.

  “뭐, 뭐야?”  베르키스들은 혼이 쏙 빠진 표정으로 멀어지는 호랭이의 둣모습을 정신없이 바라보았다.

  워낙 순간의 일이라 제대로 보지 못했다. 설마 마왕 데이크란의 혈계인 디스트로이가 고작 단 한 번의 발길질에 파괴될 줄이야.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들을 더더욱 놀라게 할 만한 음성이 바로 곁에서 들려왔다.

  “호랭이 나쁘다. 샤바.”  샤바는 불만스레 입술을 뾰족 내밀었다.

  “그냥 간다고 해 놓고 은근슬쩍 하나를 없애 버렸다. 샤바.”

  “!!”

  그의 말을 들은 베르키스들은 화들짝 놀라고 말았다. 이 긴장감없는 두 녀석의 정체가 대체 뭐란 말인가. 새삼 이런 어처구니없는 작자들과 함께 있는 퀴니가 위대해 보이기까지 했다.

  “무, 무슨 일이!”

  뒤늦게 타락왕들 사이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디스트로이가 파괴된 것이 워낙 순식간의 일이라 모두들 얼이 빠져 있었다. 정신을 차렸을 때엔 이미 호랭이는 사라지고 없었다.

  “감히!”

  타락왕들은 불같이 분노했다.

  왕이 무려 다섯이나 있었으면서 이렇게 쉽게 당하다니. 이것은 모욕이다.

  그들은 즉시 호랭이의 뒤를 쫓으려 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입구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

  타락앙들의 얼굴에 의문이 서렸다. 멀쩡히 있던 문이 어디로 사라져 버렸단 말인가.

  “헉! 버, 벌레가.”

  세심하게 벽을 관찰하던 질로우가 비명을 질렀다.

  그렇다. 애초에 문은 사라진 것이 아니었다.

  문이 있어야 할 자리를 생전 처음 보는 벌레들이 가득 메우고 있어 봉지 않았던 것뿐이다.

  벌레가 있는 곳은 비단 문뿐이 아니었다.

  천정에도 벽에도, 그리고 바닥까지.

  실내의 모든 기물은 검은색 광택이 흐르는 이름 모를 벌레들로 가득 뒤덮여 있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벌레들이 그렇게 사방을 뒤덮고 있을 때까지 이를 눈치 챈 자가 아무도 없었다는 점이다.

  “도망갈 수 없다. 샤바.”

  샤바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가뜩이나 호랭이 때문에 하나가 줄어서 억울한 판이라 다른 사람에게 선공을 뺏기고 싶지 않았다.

  “!”

  “!!”

  그때서야 컨퓨전을 비롯한 타락왕들은 상대가 심상치 않다는 것을 느꼈다. 뭔가 이상한, 말로 표현 못할 이질감이 솔솔 풍기는 것이었다.

  그것은 마치 아무런 전조 없이 찾아드는 불행과도 같은 것이었다.

  “만나서 반갑다. 샤바. 모쪼록 내 백성들과 즐거운 시간 보내길 바란다. 샤바.”  환계의 왕자, 샤바가 맑게 웃었다.

  사각사각사각.

  바닥과 지붕, 그리고 벽을 까맣게 덮고 있던 벌레들이 샤바의 웃음에 호응하듯 날개짓 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탑의 외벽을 평지처럼 타고 오른 병규는 쉽사리 꼭대기 층에 다다를 수 있었다.

  마계의 하늘을 가린 음울한 먹구름과 가장 가까운 그곳,

  의외로 유채색으 정열적인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운동장만큼 넓은 실내에 붉은 양탄자가 잔디처럼 깔려 있고, 황금빛 수실로 치장된 침대가 언덕 위의 소나무처럼 외롭게 자리하고 있었다.

  핏물처럼 보이는 붉은 양탄자 위에 놓인 작고 투명한 테이블은 이 부자연스러운 공간에 한 줄기 신비로움을 더했고, 그 위에 소담스럽게 자리한 레드 와인과 두 개의 크리스탈 잔은 지극히 몽혼적이었다.

  전체적으로 붉은 색감이 많은 것을 제외하고는 양탄자 위에 쓰러져 잠이 들고 싶을 정도로 포근하고, 고요한 분위기.

  잠시 동안 병규는 자신이 장소를 잘못 찾아온 것은 아닌가 하는 착각이 들었다.

  “음.”

  가벼운 신음소리.

  흐트러진 자세로 테이블에 엎드려 있던 검은 머리의 여인이 기척을 느끼고 고개를 들었다. 검은 머리칼이 폭포수처럼 일어나고, 신비로울 정도로 하얗고 고운 얼굴이 부스스 모습을 드러냈다.

  매끄럽고 고아한 이마를 지내 보슬보슬하게 뻗은 황홀한 아미.

  빨려들 것만 같은 검은 눈동자.

  급하게 오르다 부드럽게 내려앉은 콧잔등.

  목을 타게 만드는 정열적인 붉은 입술.

  쿵!

  그녀의 얼굴을 본 병규는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을 받았다.

  ‘꿈이 아니었군.’

  어젯밤의 꿈은 악몽이 아니었다. 잊을 수 없는 과거의 기억이었다. 그것을 증명이라도 하듯, 그를 향해 절규와 저주를 퍼붓던 그 가련한 여인이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뇌살적인 아름다움을 뽐내는 그녀, 마계의 지배자 데이크란이 그를 향해 황홀한 음성으로말했다.

  “어서 와요. 나의 벨로로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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