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으로 흡족하게 생겼소
꿈.
“당신을 증오해요.”
꿈속에서 아름다운 여자가 앙칼진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억울하다는 듯, 입술을 잘근 씹으며 매서운 눈으로 노려봤다.
‘왜?’
그는 의문을 떠올렸다.
의문을 품자마자 시간은 빠르게 과거로 흘러갔다.
그녀를 만나기 전, 모든 일의 시작으로.
과거 이 땅에 잔혹한 마왕이 있었다. 그는 막대한 능력과 힘으로 마계를 지배했다.
당시 마계엔 마황과 다른 두 마왕이 있었다. 하지만 어느 누구도 그보다 더 잔인하고 독하지는 않았다.
벨로로폰.
절망의 군주라 불리는 자였다.
그는 절망을 즐겼고, 절규를 사랑했다.
어느 날 중간계로 유희를 나선 그는 아주 흥미로운 장난감을 보게 되었다. 아이린 왕국, 정령의 축복을 받은 나라. 그곳에서 그는 한 명의 순수한 인간을 발견했다.
하이엘프의 약속을 증명하는 무녀, 정령왕의 무녀였다.
본시 아이린 왕국은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은 아니었다. 국토의 대부분이 산으로 뒤덮여 있고, 북쪽은 만년설빙의 얼어붙은 땅, 남쪽은 굶주린 몬스터들이 우글거리는 저주받은 사막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하지만 그토록 험한 환경에도 불구하고 아이린 왕국의 백성들은 행복했다. 정령들이 그들을 보호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러한 정령들의 보호는 정령왕의 무녀가 있음으로 인해 가능했다.
벨로로폰. 절망의 군주가 그녀를 만난 것은 그저 우연에 불과했다. 그저 정령왕의 무녀가 어떤 존재인지 궁금했을 뿐이다.
시간은 다시 빠르게 흘러갔다.
그녀를 만난 그 순간으로.
“관리시라고요? 믿기지 않는데요.”
처음 바람의 신전에서 그녀를 봤을 때, 자신을 관리라고 소개하자 그녀는 맑게 웃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당신께 정령의 가호가 함께하길.”
축복을 빌어 주는 그녀는 세상에서 가장 깨끗하고 순결한 여인이었다.
그리고 아름다웠다.
눈이 부실 정도로.
고아한 순결이 뽀얀 피부 위로 자욱하게 묻어났다.
그녀는 너무도 아름답고 순결했다.
타락시키고 싶을 만큼.
“왜 꽃을 키우냐고요? 글쎄요. 왜일까요. 향기가 좋아서인지. 아니면 그냥 보기 좋아서인지. 잘 모르겠네요. 하지만 꽃은 그냥 보는 것만으로도 미소 짓게 만드는 힘이 있는 것 같아요.”
농부의 아낙처럼 수수한 옷을 입은 그녀가 작게 웃었다.
가지고 싶었다.
그 미소를.
그녀의 티 없이 깨끗하고 순결한 마음을.
수많은 말들. 거짓들.
그녀를 옭아매기 위해. 그 순수함을 거머쥐기 위해 수없이 많은 거짓과 불의를 행했다.
거짓 관리 행세를 하기 위해, 진짜 관리를 죽였고, 한 송이의 꽃을 구하기 위해 마을 하나를 깨끗하게 불태웠다.
하지만 그 많은 노력에도 그녀는 언제나 담백하게 웃을 뿐이었다.
찬바람이 휑하게 불어오는 바람의 신전 구석에 앉아 조용히 기도를 읊을 뿐이었다.
“너무 귀한 선물이에요. 그래서 받을 수 없습니다.”
왜냐는 물음에 그녀는 자조적인 웃음을 남겼다.
“당신은 짓궂은 사람이로군요.”
슬픈 눈으로 바라보는 그 눈동자에 맺힌 슬픔.
더 깊은 곳의 순수한 바람.
그것을 쥐어짜 내고 싶었다.
그래서 그는 백 명의 어린 아이들을 미끼로 그녀를 마계로 유인했다. 자진하여 잔인한 어둠 속으로 걸어 들어온 그녀를 그는 반갑게 맞이하였다.
그녀의 머리 위로 핏물을 들이붓고, 하얀 뇌수 속을 걷게 만들었다.
“제발 자비를.......”
굵은 쇠사슬을 목에 찬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호소했다.
하지만 그는 차게 웃을 뿐이었다.
“어떤가? 거추장스런 부조리를 벗어버린 소감이.”
음울한 눈동자. 그녀는 눈물을 흘렀다. 빨간 피눈물이 그녀의 고운 뺨을 타고 흘렀다.
그는 그윽한 미소를 그리며 손가락으로 그녀의 턱을 쓰다듬었다. 그녀의 피눈물이 그의 손가락 끝에 방울졌다. 그는 긴 혀로 짜고 쓴 피눈물을 맛보며 탄성을 질렀다.
“좋군. 훌륭해. 너의 절망이 절절히 느껴지는구나. 으흐흐흐흐.”
그녀는 절망했다.
목을 쥐며 울부짖었다. 어둠의 그늘 속에 주저앚은 채 한없이 흐느꼈다.
“하하하하하하하!”
그는 괴소를 토해냈다.
탑이 쩌렁쩌렁 울렸다.
그녀의 울음과 그의 괴소가 탑을 메아리쳤다.
“울부짖는 귀부의 원한이 너와 영원히 함께하길.”
타락한 그녀를 애무하며 타락한 육신 위에 암흑의 찬사를 뿌렸다.
검은 욕망의 진주.
그는 그녀를 이렇게 칭하며 반겼다.
그렇게 가장 순결했던 그녀는 어둠의 중심에서 붉게 타락해 버렸다.
하지만 정작 그녀가 타락하자 그의 관심은 멀어지고 말았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흥미를 자극하지 못했다.
그녀를 타락시키기 위해, 그녀를 핏물 속에 담그기 위해 수천 명의 인간과 마족을 도살했으면서도. 예전의 활화산 같은 열의는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버렸다.
그에게 있어 그녀는 그저 자신과 같은 어둠이었을 뿐.
“당신을 증오해요.”
그에게 버려졌을 때, 그녀는 다시 피눈물을 흘렸다.
통곡하고, 절규하고, 저주했다.
원망어린 그녀의 눈자위에서 피눈물이 쏟아졌고, 파랗게 질린 입술은 붉은 증오를 쏟아 냈다. 하지만 그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을 뿐이다.
그의 외면 속에 그녀는 철저히 고립되고 말았다.
영원한 어둠 속으로.
“헉헉.”
잠에서 깬 병규는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악몽이다.
정말이지 지독한 악몽이다.
하지만 믿기지 않을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버림받은 그녀의 눈동자. 참혹한 피눈물. 뾰족하게 갈라지고 파랗게 타 버린 그녀의 비명, 절절한 외침, 끓는 저주. 독기 어린 외침.
바닥을 긁은 손이 피로 물들고, 뒤틀린 전신에 흐느낌이 내려앉은 그 처절한 모습들.
그 절망스런 외침들.
눈을 감았건만 그녀의 고통스런 모습이 아프게 눈동자를 찔러 왔다.
몸이 덜덜 떨렸다.
심장이 파열될 것처럼 욱신거렸다.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고 말았다.
“내가...... 내가.......”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 것 같은 충격!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지만 그는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추악한 존재였다. 순결한 존재를 타락시키고 즐기고, 살육을 쫓고, 피와 향락을 탐하는 최악의 마왕.
두근두근.
심장이 급격하게 뛰었다.
피와 타락을 떠올리자 저도 모르게 몸이 후끈 달아올랐다.
머리는 기억을 잃었어도, 몸은 아직 기억하고 있는 것이다.
병규는 가슴을 움켜쥔 채 차분히 숨을 골랐다.
다만 악몽이길. 방금 그것이 과거의 기억이라면, 절대로 잊고 싶다.
“이곳은 정말이지 내게 지옥과 같은 곳이군. 크크크크크.”
그는 참담한 표정으로 키득거렸다.
“크크크크크크크.”
그때 드그긍 소리와 함께 문이 열렸다.
베르키스가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의관을 정제하고 차분히 앉아 있는 그에게 베르킷는 깊게 허리를 숙이며 말했다.
“시간이 됐습니다. 아버지.”
병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마침내 땍 도래했다.
빼앗긴 것을 되찾을 시간이다.
그는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황혼의 계절.
마계의 구름이 붉게 물든 그때, 마물들은 왕의 귀환을 노래하며 절망의 탑으로 진군했다.
어둠이 완전히 암흑으로 채색된 그날.
병규는 마물들을 이끌고 뿔나팔을 불며 마계의 땅을 걸었다. 그는 곧장 서쪽으로 향했다. 황량한 모래 언덕 너머, 절망의 탑이 보이는 곳으로.
마왕의 신물과도 같은 절망의 탑.
탑은 음침한 회색 안개로 뒤덮여 있었다.
“비가 올 것 같군.”
귓가를 스치는 바람이 끈적끈적했다. 곧이어 울릴 피의 향연을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절망의 탑을 지그시 바라보던 병규가 손을 들었다.
산과 계곡을 뒤덮고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두 손을 추켜들었다. 말할 수 있는 마물은 왕을 부르짖고, 말 못하는 자는 괴성을 토해 냈다.
우워어어.
크와아아아.
“왕이시여.”
“우리의 적에게 절망을.”
한차례 격렬한 외침과 함께 마침내 마물들은 절망의 탑으로 진군하기 시작했다. 파도처럼 밀려가는 마물들의 행군은 장대하다 못해 두려울 지경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병규는 굴절 없는 음성으로 조용히 뇌까렸다.
“무질서하군.”
그의 발아래 엎드려 있던 노괴가 고개를 들었다.
노괴는 축적된 지식과 경험으로 군사 역할을 수행했다.
“하급 마물들은 버리는 돌입니다. 적을 놀라게 하고 주력을 유인하는 역할이지요.”
절망의 탑은 모두 네 개의 입구가 있다. 그중 마물들은 서문 하나만을 맡았다.
그리고 나머지 세 개의 문을 베르키스들이 맡는다.
마물왕 한 명의 전력이 마물들을 모두 합한 것만큼 강하다는 증거다.
“아버지.”
베르키스가 부르는 소리에 병규는 고개를 돌렸다.
용맹한 마물왕들이 경건한 자세로 그에게 무릎을 꿇었다.
“다녀오겠습니다. 아버지.”
아버지라는 말. 불편할 만도 하건만 병규는 무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베르키스, 알칸테, 아콘.
절을 한 마물왕들은 곧장 혼란한 전장으로 걸어갔다. 숨겨 두었던 마력이 풀리며 막대한 위압감이 눈처럼 풀풀 날렸다.
마물왕들의 출현에 절망의 탑 근방에서 들려오던 비명과 절규가 전보다 훨씬 높아졌다.
자욱하게 이는 먼지구름과 찢어진 육편, 분수처럼 솟구치는 핏물이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확연히 보일 지경이었다.
“좋군.”
차게 웃은 병규는 팔짱을 풀었다.
이제 그가 나설 차례다.
그가 택한 길은 마물들과 타락한 종족들이 한데 뒤섞여 싸우고 있는 가장 처절한 전장.
“좋은 바람이야.”
전장에서 불어오는 피 냄새를 음미하며 병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마치 산보하는 사람처럼 느긋하게.
그 시각, 호랭이와 샤바는 퀴니와 함께 마수의 늪으로 향했다.
마수들은 그들의 군주가 실종된 후, 깊은 늪지대로 숨어들었다.
베르키스는 부족한 전력을 마수들로 보충할 복안을 내놓았다. 그리고 이 계획을 실행할 사람으로 퀴니를 꼽았다 .다른 이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지만 무녀인 그녀라면 가능하다는 것은 그의 생각이었다.
“샤바샤바~ 샤바샤바~ 샤바샤바라~ 샤바샤바~ 샤바샤바라~.”
샤바는 찌를 듯한 살기 속에서도 소풍 나온 아이처럼 마냥 즐거워했다. ‘샤바샤바~’ 라는 정체불명의 노래와 함께 발걸음도 경쾌하게 늪 위를 걷는 것이다.
“저 녀석은 참 재주도 좋네. 질퍽한 늪을 산보하듯 가볍게 걸어가는 걸 보면.”
호랭이는 손가락으로 귀를 후비며 구시렁거렸다.
“그나저나 이거야 원. 신경 쓰여서 숨이나 쉬겠어?”
호랭이는 주위를 휙 둘러보며 불만스레 소리쳤다.
마수의 늪으로 들어선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자욱한 살기가 사방에서 쏘아져 왔다. 그 농밀한 적의는 어느새 그들을 완전히 포위하고 있었다.
저 어둡고 음침한 늪 너머, 정체를 알 수 없는 미지의 무언가들이 잔뜩 몰려 있다. 놈들은 이쪽을 경계하며 사냥할 기회를 노리고 있다.
한 가지 이해되지 않는 것은 퀴니의 태도였다.
그녀는 노골적인 살기 속에서도 비홀더 위에 누운 채 곤하게 졸고 있었다.
“하여간 퀴니나 샤바나 대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단 말야.”
포기한 듯 호랭이 역시 근두운 위로 벌렁 누웠다. 저 두 꼬맹이문제로 고민해 봐야 골치만 아프다.
다행히 늪 건너에 숨어 있는 놈들은 경계만 할 뿐 달려들지는 않았다.
살기로 가득한 늪과 안개를 지나자 짚과 돌로 지어진 마을이 나타났다.
마수들의 마을이었다.
마수들에게 집은 그다지 의미가 없었다.
질펀한 늪지대가 그들이 휴식처이며, 숲이 곧 그들의 안식처이다. 집과 같은 건축물은 권위를 상징하기 위한 상징물에 불과했다.
퀴니와 호랭이, 그리고 샤바가 마수들의 마을에 도착했을 때, 마수들은 마을 중앙의 공터에 모여 있었다. 이미 퀴니의 방문을 보고 받은 듯, 상당한 기세를 뿜어내고 있는 마수들이 자리를 틀고 있었다.
“어서 오시지요. 무녀님.”
마수들이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고, 우두머리로 보이는 마수가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인사를 건넸다.
“오랜만이야. 토란.”
간결하게 고개를 끄덕인 퀴니는 서슴없이 앞으로 나아가 토란이 권한 자리에 앉았다.
“한동안 소식이 뜸하셨는데, 다행히 무사하셨군요.”
“그래. 잠시 볼일이 있었어. 별일은 없었어?”
“저희들에게 별일이야 있었겠습니까. 오히려 별일은 무녀님께 생긴 것 같더군요.”
토란의 말에 퀴니의 귀여운 눈썹이 상큼 올라갔다.
“무슨 소리야?”
“무녀님께서 오래도록 행방불명이자, 마왕 데이크란이 새로운 무녀를 내세웠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거? 얘기는 들었어.”
기대와 달리 퀴니가 시큰둥한 표정이자 토란으 안색이 미미하게 변했다.
“흐음. 그다지 신경 쓰이지 않으신 듯한 표정이시군요.”
“뭐, 어차피 내가 살아있는 한은 다른 무녀를 내세운다고 해도 마신님의 인정을 받을 수는 없을 테니까. 데이크란이 무슨 짓을 꾸미든 별 상관없어.”
“과연...... 신을 모시는 무녀는 단 한 명뿐, 때문에 가짜가 나타난다고 해도 전혀 걱정되지 않는다는 말씀. 크후후후. 그런데 오늘은 어인 일로 누추한 저희 마을까지 행차하셨는지.......”
“중요한 볼일이 생겼다.”
토란의 말에 퀴니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벨로로폰이 돌아왔다. 그가 절망의 탑을 다시 되찾으려고 해. 마수들이 도와줬으면 해. 도와줄 거지?”
퀴니의 영롱한 음성은 묘한 힘을 싣고 있었다. 그녀가 은근한 음성으로 묻자 마수들은 일제히 몸을 엎드리며 굴복의 뜻을 보였다.
하지만 몇몇 존재들은 여전히 눈을 빛내며 그녀와 정면으로 대치했다.
마수들으 왕.
모두 서른 마리.
그들은 상실의 군주, 아크데몬의 혈계들이다.
비록 아크데몬이 사라져 힘의 근원을 잃기는 했지만, 그래도 여전히 다른 마수들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했다.
퀴니의 말은 마신의 힘과 뜻을 싣고 있어 일반 마족들은 항거할 수 없다. 하지만 마왕의 혈계인 이들 마수왕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퀴니의 언령에 꿋꿋하게 대항했다.
퀴니에게 무릎을 꿇지 않은 서른 마리 중에서도 가장 강한 기세를 풍기는 것은 다름 아닌 토란이었다.
그는 사자와 같이 휘황한 갈기를 가졌는데, 전신이 청동색으로 빛나고 있어 철벽과 같은 단단함을 풍겼고, 얼굴은 교활한 늑대의 형상을 하고 있었다.
하늘로 치솟은 두 눈을 지그시 찌푸리며 토란이 으르렁거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벨로로폰을 따르면 우리가 얻을 수 있는 이득이 무엇입니까?”
퀴니는 간단하게 답했다.
“지금보다 나은 대우.”
토란은 입가를 좌우로 길게 늘이며 비웃음을 흘렸다.
“어떻게 보장할 것입니까?”
“믿어. 난 거짓말을 하지 않아.”
그의 말에 토란을 제외한 나머지 마수왕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확실히 무녀의 말은 믿을 수 있다. 그녀는 마신의 대리자, 결코 거짓을 입에 담지 않는다.
“하지만 난 아직 못 믿겠소.”
“날 못 믿겠다는 거야?” 퀴니가 두 손을 척 하니 허리에 걸치며 앙칼지게 소리쳤다. 당돌한 모습이었지만 그 누구도 그녀를 무시하지 못했다. 그녀의 전신에서 말로 표현 못할 검은 서기가 뭉클 피어올랐기 때문이다.
토란은 그녀에게서 한 걸음 물러섰다. 하지만 여전히 승복하지 못하는 눈빛이었다.
“무녀, 당신을 못 믿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절망의 군주, 벨로로폰은 믿을 수 없지요. 과거의 그를 아는 자라면 내 말뜻을 잘 알 것입니다.”
“으음.”
퀴니는 볼을 부풀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어 보였다. 확실히 벨로로폰을 믿으라고 하는 것은 무리가 있다. 과거 절망의 군주 벨로로폰은 피와 전율, 그리고 공포로 대변되는 참혹한 지배자였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지금의 벨로로폰이 과거와 다르다고 말할 수도 없다. 믿지도 않을 뿐더러 오히려 현재의 벨로로폰을 의심하게 만들 뿐이다.
“그럼. 어떻게 해야 믿을 거지?” 토란은 이런 질문을 기다렸다는 듯이 히죽 웃었다.
“굳이 믿을 필요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입장에서는 마계의 지배자가 타락의 군주가 되든, 절망의 군주가 되든 별 상관이 없으니. 마계의 주인이 바뀌어도 마수들은 여전히 소외되는 무리임에는 변함이 없을 터. 괜한 싸움에 끼어들어 동포들을 죽게 만들고 싶지는 않습니다.”
“데이크란은 가짜 무녀를 내세워 마신의 뜻을 흩트렸다. 벨로로폰을 돕는 길은 곧 마계의 정의를 바로 세우는 길이다.”
“크흐흐. 이 추악한 마계에 정의라니, 희한한 말씀이군요. 크크.”
“푸푸푸푸.”
“크헬헬헬헬.”
마수왕들이 동시에 거친 웃음을 터트렸다.
“진정 절망의 군주가 마계의 정의를 바로 세우려 노력한다면 굳이 우리가 돕지 않더라도 잘 풀릴 터. 마신께서 그를 돌볼 테니까 말이오.”
토란의 유들유들한 태도에 퀴니는 더 이상 대화가 소용없음을 깨달았다. 하지만 실망하지는 않았다. 마수왕들이 순순히 협조하지 않을 것이라는 것은 이미 예상했던 바다. “좋아. 그럼 계획대로 하는 수밖에. 토란, 나와 싸우자.”
전혀 의외의 말이었다. 두 눈을 치켜떴던 토란이 눈자위를 가늘게 여미며 은근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흐흐. 아무래도 무녀님께선 과거보다 적극적으로 변하신 것 같소.”
“흥. 나도 마계인이야. 율법 정도는 꿰고 있다고.”
퀴니는 당당하게 앞으로 나섰다. 토란은 히죽 웃었다.
“율법이라. 설마 나와 내 형제들에게 도전한다는 뜻은 아니시겠지요?”
토란이 손을 펴들자 손끝에서 날카로운 손톱들이 가시처럼 솟구쳤다.
마수왕과 퀴니의 싸움.
가당치도 않은 일이다.
마수들은 이미 언급했듯 마계의 짐승들로, 그 폭급한 성격과 전투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그에 반해 퀴니는 마법에 뛰어난 인간에 불과하다.
마계의 무녀가 마계에서 무적을 군림할 수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마신의 수호 때문이다. 하지만 이 무적이라는 말은 그녀를 마계내에서 해칠 수 없다는 것을 뜻하는 것이지, 결코 그녀가 마계에서 가장 강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만약 중간계에서 마주친다면 그녀는 마법에 능한 연약한 소녀에 불과한 것이다.
‘크흐. 무녀의 정신이 어떻게 된 것 같군.’
토란이 알고 있는 그녀의 능력은 기껏해야 중급 마족 정도. 상위 마족조차 능가하는 토란 등과는 절대로 비교할 수 없었다.
하지만 퀴니는 당당했다.
“흥. 내가 너희에게 도전하는 것은 맞아. 왕들을 쓰러트리면 그 아래 부족들은 모두 승리자에게 귀속되는 것이 율법. 하지만 마수의 왕들과 싸우기 위해 내가 직접 나설 필요는 없지.”
“크흐흐. 대리자를 내세우시겠다는 생각이로군. 설마 당신 뒤의 그 비리비리한 두 녀석들이? 흐흐. 그냥 포기하시지요. 비참하게 될 뿐이니.”
토란의 입에서 음침한 괴성이 흘렀다. 두 눈에서 언뜻 언뜻 비치는 붉은 흉광은 먹이를 노리는 맹수의 그것과 같았다.
“흥. 그거야 붙어 봐야 아는 거지.”
통쾌하게 소리친 퀴니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멀뚱하게 서 있던 호랭이와 샤바는 그녀의 삼엄한 눈초리에 괜히 찔끔한 표정이 되었다. 돌아가는 사태로 보건대 아무래도 그녀를 대신해서 저 험악하게 생긴 놈들과 한판 거하게 붙어야 할 모양이다.
“에효. 할 수 없지.”
호랭이가 투덜거리며 앞으로 나섰다.
‘보아하니 퀴니는 처음부터 이럴 생각으로 동행하자고 졸랐던 게군.’
원래 호랭이는 병규와 함께 행동하고 싶었다. 그가 과연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하고 싶었던 것이다. 그런데 퀴니가 찰싹 달라붙어서 그와 샤바를 강제로 자신의 임무에 끌어들였다.
어떻게 연약한 소녀를 험악한 짐승들이 우글거리는 숲에 홀로 보낼 수 있냐는 것이 이유였다.
그런데 알고 보니 이런 사정이 있었던 것이다.
퀴니는 처음부터 힘으로 마수들을 제압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흐흐. 이런 비리비리한 녀석이 상대라니. 한 입 거리도 안 되겠군.”
호랭이가 슬그머니 나서자 마수들 전체가 크득거리며 웃었다.
인간으로 둔갑한 호랭이는 은발의 호리호리한 체격이라, 우람한 체구의 마수들이 비웃을 만했다.
하지만 정작 호랭이는 전혀 긴장감을 느끼지 못한 듯, 손가락으로 귀를 후벼대기만 했다.
“어디서 개가 짖나?”
“......”
시끄러운 소음이 싹 가셨다.
호랭이의 말을 알아듣지는 못했지만, 대략 그 뜻은 짐작할 수 있었다.
“크흐흐. 아무래도 네놈의 모가지를 뒤로 꺾어 줘야 좀 공손해지겠구나.”
“할 수만 있다면 해보시게.”
호랭이는 느긋하게 말했다.
“끼놈!”
토란이 달려들었따.
숨어 있던 늑대가 먹이를 덮치듯, 뒷발로 힘껏 발돋움을 하며 호랭이를 향해 뛰어올랐다.
거대한 체구에도 불구하고 잽싸기 그지없는 동작!
호랭이의 전신에 토란의 그림자로 가득 뒤덮였다.
“끼놈. 객쩍은 소리 말고 저쪽에 찌그러져 있거라.”
호랭이는 뒷짐을 진 채 가볍게 발을 휘둘렀다.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거친 말투.
불량신선, 또는 건달선인이라고 불리던 호랭이의 진면모였다.
느린 듯 휘둘러진 발은 절묘하게도 거칠게 덮쳐 오는 토란의 턱을 강타했다.
쿠앙!
가벼운 발놀림임에도 제법 묵직한 폭음이 터졌다.
“꾸엑!”
토란은 날아오던 기세 그대로 처량한 비명을 지르며 땅바닥에 구겨진 휴지조각처럼 처박혔다.
“엥? 뭐냐? 설마 이거 한 방에 끝이야?”
호랭이는 한쪽 발을 쳐든 자세 그대로 황당해했다.
“쯧쯧. 하여간 꼭 허접하고 못난 녀석들이 주둥아리만 살아서 나불나불거린다니깐. 쯧쯧쯧.”
하도 자만심 가득한 목소리로 떠들기에 실력 좀 있나 했더니 영 허접한 것이다. 설마 장난삼아 추켜든 발길질에 소금절인 배추마냥 축 늘어질 줄이야.
“이봐, 일어나 봐. 설마 이게 끝이야? 에잉. 뭐가 이리 시시해. 너 설마 토끼냐? 첫날밤에 잔뜩 기대 부풀게 해놓고 정작 시합 개시하자마자 풀썩 쓰러지는 그 토끼냐고! 이런 고연 토끼 같은 놈을 봤나. 어서 일어나서 자세 잡지 못해? 제대로 한 판 뜨잔 말이다. 이 토깽이놈아! 당근이라도 줘야 일어날 테냐! 고연 놈!!”
그때, 문득 휭 하는 바람소리와 함께 불현듯 다가온 샤바가 그의 손에 팔뚝만한 대형 당근을 건네주었다.
“에엥? 이건 또 어디서 난 당근이야. 이걸 나더러 어쩌라고?”
호랭이가 당황하여 묻자 샤바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토깽이 줘. 샤바.”
“뭐. 뭐?”
호랭이는 혼란에 빠졌다. 그 사이 샤바는 품에서 다른 당근을 꺼내고선 엉거주춤 엎어진 토란의 엉덩이를 오묘한 표정으로 바라보았다.
“이렇게 주면 된다. 샤바.”
푸욱!
잠시 후마수들은 토란이 엉덩이로 당근을 먹어치우는 공포스런 장면을 목격해야 했다.
‘무서운 놈.’
호랭이는 해쓱한 표정으로 샤바를 쳐다보았다.
‘설마 당근을 나사(피스볼트)처럼 박아 넣을 줄이야.’
좀 전까지 목에 힘을 주며 으스대던 토란, 그는 지금 엉덩이에 당근 이파리를 꽃 피운 채, 땅속에 고개를 처박고 기절해 있었다.
엉덩이에 당근 이파리라니.
정말로 참혹한 못브이 아닐 수 없었다.
호랭이는 샤바가 적이 아닌 것이 천만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녀석과 적으로 만나게 된다면 이기든 지든 끔찍한 꼴을 당하게 될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한편, 적의 수장에게 당근을 먹이(?)로 준 샤바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퀴니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거 재미있다. 샤바. 기술명을 알려줘. 샤바?”
샤바의 물음에 퀴니는 엄지손가락을 불쑥 들어 보이며 친절하게 설명했다.
“스크류 당근이라고 해.”
“오~! 스크류 당근. 샤바. 뭔가 심오하면서도 패도적인 이름일세. 샤바샤바.”
샤바는 당근을 든 채 눈을 현란하게 반짝였다.
“서, 설마. 방금 이거 네가 샤바에게 시킨 거냐?”
창백한 표정으로 호랭이가 묻자 퀴니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가 토란보고 토깽이라고 불렀잖아. 그래서 기왕이면 토깽이 먹이로 끝을 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말야. 말 안듣는 애들에게 약간의 충격이 필요할 것 같았는데 잘됐어. 그런데 왜? 하나로는 부족해?”
그녀는 천진난만한 표정으로 품속에서 당근 서너 개를 꺼내 보였다. 모두 팔뚝만한 당근들이었다.
호랭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 버렸다.
저걸 다 집어넣었다간, 맨 처음 들어간 당근이 입으로 나올지도 모르는 일이다.
그나저나 도대체 짧은 반팔 재킷 안에 그 큼지막한 당근들이 어떻게 들어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크으. 특재대와 가스펠 놈들. 순진한 아이에게 대체 뭘 가르친거냐아!”
호랭이는 그녀에게 위험한 사상을 전수한 지구의 능력자들을 떠올리며 이를 부득부득 갈았다.
한편 호랭이가 좌절하는 사이 퀴니는 두 손을 허리에 척 올리고선 당돌한 표정으로 마수들에게 외쳤다.
“자. 보다시피 토란은 내 대리자에게 쓰러졌다. 마계의 율법에 따라 모두들 내 말에 따라라.”
“그럴 순 없습니다.”
토란과 함께 반기를 들었던 마수들이 눈을 희번뜩거렸다.
그들은 여전히 수긍하지 못하는 눈치였다.
“토란이 졌는데도 반항이야?”
“그건... 실수가 분명합니다.”
“그렇지 않고서야. 저렇게 허무하게 당할 리가 없소.”
마수들의 눈에 불신이 가득했다.
마수왕인 토란이 너무 허무하게 쓰러졌기 때문이다.
“그으래?”
퀴니의 눈이 서늘한 빛을 발했다.
마수들의 반항에도 그녀는 전혀 서운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했다는 듯이 입가에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따르지 않을 녀석들은 모조리 다 덤벼. 한꺼번에 상대해주지.”
“... 후회하지 마시오.”
서른 마리 가량의 마수들이 일제히 전투의욕을 고취시키며 나섰다. ‘상실의 군주’ 아크데몬은 유독 혈계가 많기로 유명했다. 그런 아크데몬의 모든 혈계가 일제히 퀴니의 뜻을 거역한 것이다.
“좋아. 샤바야. 이번엔 네 차례다.”
“알았다. 샤바.”
이번엔 샤바가 나섰다.
원래 다수를 상대하는 것은 선술에 능한 호랭이가 더 적합했다. 하지만 마계에 와서는 그런 사정이 반대가 되어 버렸다. 마력의 영향 때문이다.
“흐흐. 이번엔 이 꼬맹이인가?”
“백발 녀석보다 훨씬 작고 비리비리하잖아.”
“손가락으로 퉁겨도 죽겠군.”
“무녀님은 우릴 너무 과소평가하는 것 같군.”
샤발르 본 마수들은 코웃음을 쳤다.
하지만 이내 그들의 표정은 경악으로 변하고 말았다.
딱!
샤바가 손가락을 마주친 순간, 그의 그림자에서 검은 파도가 회오리처럼 솟구쳤다.
그 거대한 일렁임과 폭풍과 같은 거침없는 파괴력. 그리고 귀를 자극하는 괴이한 소음.
사각사각사각사각.
“뭐, 뭐야.”
“작은 벌레 같은 것들이... 한꺼번에.”
거칠 것 없던 마수왕들의 입에 동시에 쩍 벌어졌다. 마계엔 숱한 마족들이 있다. 그들은 각기 독창적인 마력을 사용한다. 개중엔 좀비나 패밀리어와 같은 다수의 종속물을 부릴 수는 없다.
“수백, 아니 수천만!! 마, 말도 안 돼. 어떻게 저 많은 종속군을 한꺽번에 부릴 수 있는 거지?”
“터, 터무니없는.”
마수들은 경악했다. 하지만 그들의 놀람도 잠시였다.
샤바가 생긋 웃는 순간, 그들은 지옥을 경허해야 했다.
“쓸어버려. 샤바.”
촤아아아아아아악!
허리케인처럼 일어난 검은 백성들은 샤바의 명령 한마디에 해일로 변하여 마수들을 덮쳤다.
그것은 재앙! 그 자체였다.
“히, 히익!”
마수들은 비명을 지르며 사방팔방으로 뛰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백성들의 파도에서 빠져나갈 수 없었다.
“꾸에엑.”
“키롸라라.”
“푸푸푸푸푸푸!”
콰르릉 하고 일어난 백성의 파도는 삽시간에 마수왕들을 휩쓸었고, 그리고도 여력이 남아 주위의 마수들까지 깡그리 청소해 버렸다.
마수들은 샤바에게 손도 못 내밀어 보고 패할 수밖에 없었다.
이렇게 마수왕과 무녀의 싸움은 허무하게 끝나고 말았다. 하지만 퀴니는 곧바로 마수들을 부릴 수 없었다. 쓸려 나간 마수들이 돌아오기까지 상당한 시간이 필요했기 때문이다.
한참을 기다려서야 마수들이 돌아왔다.
그들은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퀴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좀 전까지의 살기등등했던 모습은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었다.
퀴니는 마수왕들이 모두 돌아올 때까지 차분히 기다렸다.
“졌소.”
토란이 모두를 대표해 퀴니 앞에 무릎을 꿇었다.
퀴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계의 율법은 알고 있겠지?”
“알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알고 있겠군.”
“무, 물론입니다.”
마계의 율법.
강한 자를 숭상하는 이 율법에 따르면 패자가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단 두 가지. 죽음과 복종뿐이다.
마수왕들이 패한 이상 마수들에게는 더 이상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어떻게 할 테냐?” “......”
토란은 고개를 조아린 채 머뭇거렸다. 퀴니가 눈을 부라리자 뒤늦게 절을 하며 급히 말을 했다.
“보, 복종입니다. 마수들은 무녀님의 말씀을 따르겠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하, 한 가지 청이 있습니다.”
“청? 또 뭐가 아쉬운 거야?”
퀴니가 게슴츠레한 눈으로 물었다.
승부에선 진 녀석들이 쓸데없이 변명이 많았다. 사실 마계의 율법에 따르면 패자는 무조건 승자의 말에 따를 의무가 있었다.
퀴니가 토란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것은 굉장히 예외적인 일이라 할 수 있었다.
“그것을...... 한 쌍만 분양해 주십시오.”
“......?”
모두의 시선이 토란의 손끝이 향한 곳으로 돌아갔다.
“샤바? 샤바를 달라고?”
호랭이의 표정이 험상궃게 일그러졌다. 하얗게 번뜩이는 눈초리가 그렇게 매서울 수 없었다.
토란은 두 손을 팔랑개비처럼 휘두르며 극구 부인했다.
“아니오. 아니오. 그게 아니오.”
“그럼 뭘 달라는 거야?”
“그것이...... 저 아래의.......”
“아래?” 토란의 손을 자세히 보니, 확실히 샤바가 아니라 그의 그림자를 가리키고 있었다. 곰곰 생각해 보던 퀴니는 문득 뭔가가 떠오른 듯 손가락을 마주쳤다.
“아! 샤바의 백성을 한 쌍만 달라는 거야?”
“바로 그겁니다.”
토란은 환성을 질렀다.
호랭이와 퀴니의 표정이 동시에 일그러졌다. 하지만 불쾌해하는 이유는 각기 달랐다.
“저 녀석이 한 대 맞더니 머리가 이상해졌나. 하고많은 것 중에서 왜 하필 샤바 백성이야?”
“이렇게 귀엽고 깜찍한 것을 한 마리도 아니고 한쌍이나 달라고? 못해. 샤바 백성은 다 내꺼야.”
“......”
단호한 퀴니의 말에 토란은 식은땀만 삐질삐질 흘렸다.
샤바는 생글생글 웃으며 토란의 어깨를 짚었다.
“내 백성이 그렇게 좋아. 샤바?”
“그, 그렇소. 정말이지 이렇게 흡족하게 생긴 생물은 태어나서 처음 봤소.”
토란의 말에 마수들은 일제히 고개를 끄덕였다.
“맞습니다.”
“황홀합니다.”
“제발 한 번만 더 보게 해주시오.”
지구에선 혐오의 대상이던 샤바의 백성이 어떻게 된 이유에서인지 마계에서는 대호평이었다.
“좋아. 샤바.”
샤바는 인심을 쓴다는 듯, 백성 한 마리를 그림자 속에서 꺼내보였다. 마수들은 즉각 박수를 치며 환호성을 질렀다.
“오오오오!”
“저 미려한 동체를 보게.”
“아아. 윤기 넘치는 각질, 더듬이. 이건, 이건 정말이지~ 딱 내 취향일세!!”
“가슴이 뭉클하군.”
“아주 그냥 매력덩어리일세. 매력덩어리.”
어쩔 줄 몰라서 몸부림을 쳐 댄다.
“헤에. 샤바.”
샤바는 환성을 질러 대는 마수들을 보며 흡족해졌다.
“퀴니야. 이렇게 좋아하는데, 백성 한 쌍 정도 분양해도 좋지 않을까?”
“으으음.”
퀴니는 턱을 감싸 쥐며 진지하게 고민했다.
샤바의 백성은 엄청나게 많다.
중간계에 있을 때, 이미 10만 마리를 돌파했으니 지금은 그 수십배로 번식해 있을 것이다. 한 쌍 정도 마수들에게 넘겨준다고 해도 티도 안 날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백성을 마수들에게 넘겨주게 되면 가치가 떨어진다는 것이다. 귀한 물건(?)은 독점하고 있을 때에야 비로소 가치가 빛나는 것이 아닌가.
퀴니는 취향도 독특했지만, 수집가적인 집착도 상당했다.
“흐음. 어쩐다. 주자니 아깝고, 안 주자니 마수들을 꼬시기 힘들것 같고.”
마수들은 주위를 서성이는 퀴니를 피가 마르는 심정으로 지켜봐야 했다.
“할 수 없지.”
마침내 결론이 내려졌다.
“좋아. 분양해. 대신 딱 한 쌍만이야.”
퀴니의 호쾌한 결정에 마수들은 감복했다.
“오오오오!”
“감사합니다.”
“역시 무녀님.”
눈물을 뿌리며 절을 하는 마수들을 흡족한 표정으로 내려다보던 퀴니가 샤바에게 턱짓을 했다. 병규가 기다리니까 빨리 일을 처리하라는 뜻이다.
“알았다. 샤바.”
샤바가 밝은 표정으로 백성 한 쌍을 토란에게 건네주었다. 백성 한 쌍을 인계받은 토란은 눈물을 흘리며 목숨을 걸고 잘 보살피겠노라고 마신의 이름을 걸고 맹세했다.
마신까지 들먹이는 걸 보니 어지간히도 샤바의 백성이 마음에 든 모양이다.
“좋아. 계약도 성립되었으니 더 지체하지 말고 당장 출발하자.”
퀴니는 비홀더에 올라탄 채 두 손을 번쩍 치켜들었다.
샤바의 백성을 인계받은 것으로 사기가 한층 높아진 마수들은 일제히 괴성을 터트리며 그녀를 따랐다.
“쿠오오오!”
“진격이다.”
“절망의 탑을 무너트리자.”
마수들의 괴성이 얼마나 우렁찼던지 숲 전체가 함성을 지르는 것 같았다.
“휴. 뭐가 뭔지. 하여간 덕분에 병규의 일이 조금 더 수월해질 수 있겠군.”
서쪽 하늘로 고개를 돌린 호랭이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음침한 먹구름 아래로 마계의 상징인 절망의 탑이 눈에 들어왔다. 워낙 멀리 떨어져 있어 제대로 보이지는 않으나 지금 그곳은 처절한 전쟁이 한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