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81/102)

  절망의 이름으로

  어둡고 음침한 마계에서도 가장 외진 구석의 언덕. 이 한적한 곳에 돌연 타계와 통하는 차원의 문이 열렸다.

  츠즈즈즈즈.

  세로로 갈라진 눈동자처럼 벌어졌던 차원의 문은 세 사람을 토해내고는 다시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여기가...... 마계?”

  호랭이와 샤바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색다른 풍경에 넋을 놓았다.

  마계는 지옥과 같은 곳이라고 들었다. 하지만 실제 마계의 모습은 지옥이라기보다는 늪지대와 황무지로 점철된 황폐한 사막과 같은 곳이었다.

  검은 먹구름으로 펼쳐진 하늘, 정보를 교환하듯 지상과 지면을 정신없이 오가는 검은 뇌전들, 찌는 듯한 더위, 뼈골이 시리도록 찬바람.

  척박한 환경이 한데 뒤섞여 있는 것 같은 곳이었다.

  하지만 그래도 듣던 것처럼 심각하지는 않았다. 단지 살기 힘든 땅인 것만은 확실했다.

  “기분이 좋지 않군.”

  숨을 한껏 들이켠 호랭이는 갑갑한 표정을 지었다.

  공기가 혼탁했다.

  아니, 공기 속에 담긴 기가 혼탁하고 부자연스러웠다. 음지에서 자란 곰팡이의 포자가 공기에 섞여 있는 것처럼 호랭이는 불편함을 느꼈다.

  도를 닦던 그인지라 어둠의 속성을 띠는 마력이 불편하게 느껴진 것이다. 그러나 호랭이는 드래곤들처럼 힘의 제약을 느끼지는 않았다.

  그는 마나를 이용하는 것이 아니라 마나 그 자체의 본질적인 기운을 끌어다 쓰기 때문에, 마나의 변종이라고 할 수 있는 마력도 충분히 사용할 수 있었다.

  다만 마력은 마나에 비해 극히 불안정하고 폭발력이 강하여 제어하기 힘든 점은 있었다.

  “흐음. 이상하네. 샤바.”

  호랭이처럼 샤바도 이상함을 느꼈다. 하지만 마력으로 인한 증상은 호랭이와 조금 달랐다. 아니, 전혀 반대였다.

  “희한하네. 샤바.”

  샤바는 손을 쥐락펴락하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왜 그래? 어디 불편한 데라도 있어?”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샤바. 왠지.......”

  “왠지?”

  “이곳에 와서 머리가 상쾌해진 것 같고. 또 강해진 것 같기도 해. 샤바.”

  “뭐?”

  “......?”  샤바의 말에 호랭이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자신은 마계의 탁한 공기에 갑갑함을 느꼈는데, 샤바는 오히려 머리가 맑아진 것 같다고?

  이것은 샤바의 속성 때문에 벌어진 일이다.

  호랭이가 선계의 존재로 빛의 속성이라면, 바퀴벌레인 샤바는 어둠의 속성이다. 그것도 어둠 계열 중에서도 가장 깊은 계열인 환계의 왕자다.

  어둡고 습하며 엉망진창인 곳으로는 모든 차원 중에서 환계가 최강이다. 그런 환계에 비하면 마계는 천국으로 보일 지경이다.

  하여간 이런 이유로 중간계에 비해 마계가 더없이 편하게 느껴지는 샤바였다. 그리고 마계에 널리 퍼진 마력의 존재는 샤바의 힘을 훨씬 강하게 만들어 주었다.

  샤바는 한층 증폭된 힘을 시험하기 위해 바닥의 돌을 집어 들었다. 한눈에 보기에도 꽤 단단한 돌이었다. 그러나 샤바가 힘을 쓰자 찰흙처럼 바스러져 버렸다.

  “엇!”

  호랭이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혹시 돌이 약한 건 아니냐?”

  그는 다른 돌을 쥐고 강도를 시험한 후 샤바에게 주었다. 이번에도 샤바는 간단하게 가루로 만들어 버렸다.

  “허허. 정말로 힘이 강해진 모양이구나.”

  샤바는 이목이 밝고 행동이 민첩하기는 해도 완력이 강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계에 들어서고부터는 전혀 다른 존재가 된 것처럼 힘이 강해진 것이다.

  “어디 보자. 근육엔 별다른 차이가 없는데. 거참, 신기하구나.”

  샤바의 몸을 이리저리 만져 본 호랭이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특별히 근육이 더 붙거나 한 것은 아니었다.

  “흐음.”

  퀴니는 샤바의 변화를 대략 짐작하는 듯했다.

  마족들에게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변화이기 때문이다.

  샤바의 변화는 마족이 중간계에서 마계로 돌아왔을 때, 능력이 열 배 증폭되는 것과 같았다. 아니, 샤바의 경우엔 증폭되는 능력의 차가 열 배를 훨씬 웃돌고 있었다.

  그리고 아무도 느끼지 못하고 있었지만, 샤바의 그림자 속에 숨어 있는 백성들 또한 그런 변하를 겪고 있었다.

  악착같은 백성들의 생명력은 진화를 거듭해, 이젠 화염방사기조차 두려워하지 않을 경지에 이르러 있었다. 물론 그런 사실을 깨닫고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호랭이와 샤바가 신체의 변화에 적응을 못하고 어색해할 때였다.

  쿵쿵.

  지축을 울리는 발걸음 소리와 함께 언덕 위로 거대한 괴물이 모습으 드러냈다.

  두 발로 걷는 거대한 황소 모습을 한 그 괴물은 다름 아닌 미노타우루스였다.

  하지만 그들이 알고 있는 미노타우르스와는 스케일에서 큰 차이가 있었다. 이 녀석은 키만 5미터가 훨씬 넘고, 덩치 또한 월등히 좋았다. 웬만한 오우거는 오히려 왜소해 보일 지경이었다.

  그 거대한 덩치가 쿵쿵거리며 다가오는 모습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지만 퀴니 일행 중 그 누구도 이 거대한 미노타우르스를 보고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뒷짐을 진 채 태연하게 감탄을 날리는 것이었다.

  “허. 마계라 그런지 스케일이 남다른걸.”

  “박진감 넘친다. 샤바.”

  이들은 이 정도의 괴물에 놀랄 정도로 약하지 않았다.

  스펙타클한 등장에도 불구하고 코딱지만한 것들이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아서일까. 거대한 미노타우르스는 콧김을 뿜어대며 흥분을 하더니, 돌연 도끼를 머리 위로 높이 추켜들었다.

  쿠워어어어어!

  거창한 괴성에 하늘이 뒤흔들리는 것 같았다.

  “시끄러운걸. 샤바.”

  샤바가 인상을 찡그리며 앞을 나섰다. 귀엽게 생겨서 그냥 넘어가려고 했는데, 하는 짓이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런데 샤바보다 먼저 앞으로 나선 사람이 있었다.

  퀴니였다.

  쿠워!

  돌연 미노타우르스가 도끼를 휘돌렀다. 부웅 하고 허공을 가른 거대한 도끼는 퀴니의 몸을 단번에 두 동강이 낼 것처럼 보였다.

  바로 그때.

  “얌전히 있어.”

  퀴니가 손을 내밀며 앙칼지게 말했다.

  도끼를 휘두르던 미노타우르스는 그 작은 목소리에 깜짝 놀랐다. 힘차게 휘둘려진 도끼는 퀴니의 뺨 근처에 멈춰져 있었다.

  킁킁.

  미노타우르스는 코를 벌름거리며 퀴니의 냄새를 맡더니 그 자리에 넙쭉 엎드리며 얌전해졌다. 그리고는 마치 잘못한 아이처럼 벌벌 떨었다.

  “괜찮아. 용서해 줄게.”

  퀴니는 인자한 표정으로 미노타우르스의 뿔을 쓰다듬어 주었다.

  그 후로 퀴니는 미노타우르스와 알아들을 수 없는 말을 주고받았다. 이런 일이 한두 번이 아닌지라 호랭이와 샤바는 담담히 대화가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표정이 밝은걸. 샤바. 좋은 소식이라도 들었어, 샤바샤바?”

  “변기가 이곳에 있어. 우릴 기다리고 있대.”

  “정말, 샤바?”

  샤바는 금세 즐거운 표정이 되었다.

  “주인님도 내가 보고 싶었던 거구나. 샤바. 만나면 꼭 껴안아 드려야지. 샤바.”

  검은 장발을 흔들며 팔짝 팔짝 춤을 추는 모습이 그렇게 깜찍할 수 없었다. 물론 정작 받아들이는 병규도 즐거워할지는 의문일 테지만 말이다.

  “착아 아이. 우리를 변기에게 안내해 줘.”

  그그그긍.

  퀴니가 말하자 미노타우르스는 조심조심 그녀를 자신의 어깨 위에 올렸다. 그리곤 붉게 타오르는 서쪽을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근두운.”

  호랭이가 눈을 감고 부르자 그의 발밑에서 안개가 뭉클 일어났다. 신기루처럼 솟아난 안개는 차츰 형태를 갖추더니 작은 구름 모양이 되었다.

  호랭이는 그 위에 올라탔다.

  “태워 줄까?”

  샤바는 얼른 고개를 끄덕이며 근두운에 탔다. 하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호랭이는 샤바를 근두운에서 던져 버려야 했다.

  샤바가 근두운을 자꾸 뜯어먹었기 때문이다.

  “솜사탕이다. 샤바.”

  이 생각지도 못한 반전에 화들짝 놀란 호랭이는 두 손을 흔들며 극구 말렸지만, 도주의 천재인 샤바를 잡는 것은 어불성설이었다. 결국 근두운은 샤바에게 반이나 뜯겨지고 비행마저 불안정해지고 말았다.

  이쯤 되자 호랭이는 눈물을 머금고 샤바를 근두운에서 밀어 버렸다.

  “구름과 솜사탕은 엄연히 다른 거야!”

  “이상하네. 모양은 비슷한데. 샤바. 할 수 없지. 샤바샤바.”

  불만을 토로한 샤바는 퀴니를 태우고 신나게 달리고 있는 미노타루스의 그림자 속으로 숨어들었다. 그림자 속에서 움직이는 것이면 그 누구보다 빠른 샤바였다.

  그렇게 셋은 미노타우르스의 안내를 받으며 검은 뇌전이 쏟아지는 남쪽 밀림지대로 향했다.

  미노타우르스를 타고 얼마 후, 그들은 같은 방향으로 달리는 마물들을 만나게 되었다.

  트윈헤드 오우거, 가고일, 만티코어, 고블린, 리저드 맨, 거대한 샌드웜, 변종 트롤에, 검은색 오크.......

  그 이에도 중간계에서는 듣도 보도 못한 갖가지 몬스터들이 한 방향으로 달리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상공에서 주위를 살피던 호랭이가 눈을 찌푸리며 의문성을 흘렸다.

  “집회라도 있는 게 아닐까. 샤바?”

  “그럼 반상회. 샤바.”

  “허허허. 됐다.”

  샤바의 말에 허허롭게 웃은 호랭이지만 표정만은 심각했다. 몬스터들이 철새처럼 움직이는 현상, 결코 가볍게 볼 일이 아니다. 마치 크나큰 천재지변을 의미하는 것처럼 불길한 냄새를 풍겼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몬스터들이 그들에게 관심이 없다는 점이었다. 만약 몬스터들이 한꺼번에 달려들었다면 호랭이와 샤바도 꽤나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물론 몬스터들이 얌전했던 것은 퀴니 때문이었다. 몬스터들에게 퀴니는 신이나 다름없었다. 광폭한 몬스터들이 퀴니와 시선만 마주치면 식은땀을 흘리며 주눅이 들었다. 그림자조차 밟지 않으려고 조심했다.

  그동안 퀴니는 미노타우르스에서 오우거 머리 위로, 다시 트윈헤드 오우거로 자리를 옮겼다.

  “왜 그렇게 부산스럽게 움직이는 거야?”

  보다 못한 호랭이가 묻자, 퀴니는 기다렸다는 듯이 눈을 반짝이며 대답했다.

  “험험.”

  호랭이는 헛기침을 하며 못 들은 척했다.

  이미 근두운에 샤바를 태웠다가 호된 경험을 한 호랭이다.

  퀴니는 샤바보다 더하면 더했지, 결코 덜하지 않은 인간이다. 그 넘치는 호기심에 어떤 만행을 저지를지 모르는 것이다.

  어쩌면 근두운으로 우주비행을 시도할지도.

  “치.”

  호랭이가 고개를 돌린 채 모른 척하자, 퀴니는 입술을 쭉 빼물었다. 결국 그녀는 눈이 백 개나 달린 비홀더에게 플라이 마법을 걸어서 타고 다녔다.

  “.......”

  보란 듯이 근두운의 머리 위에서만 날고 있는 그녀를 보며 호랭이는 기분이 복잡해졌다. 그녀의 비홀더가 머리 위를 가려서 하늘을 볼 수가 없었다.

  “그런데 퀴니야. 샤바. 넌 몬스터들이 떼 지어 달리는 이유를 알고 있어, 샤바?”

  비홀더의 그림자 속에서 샤바가 고개를 쏙 내밀며 물었다. 물론 퀴니는 알고 있었다.

  “왕이 부르고 있어.”

  “왕, 샤바?”

  퀴니는 고개를 끄덕였다.

  “마물의 왕, 절망의 군주가 이들을 부르고 있는 거야.”

  “절망의 군주, 샤바?”

  샤바는 그녀의 말을 이해하지 못하고 고개만 갸웃거렸다.

  ‘벨로로폰. 정말로 그녀와 싸우려는 거야?’

  먼 곳을 바라보는 퀴니의 눈빛이 우울해 보였다.

  “어. 마물들이 걸음을 멈췄어. 샤바.”

  샤바의 말에 퀴니와 호랭이는 앞을 살폈다. 사막과 같은 척박한 대지가 끝나고, 음울한 안개가 펼쳐진 밀림이 보였다.

  그곳에서 마물들은 더 이상 움직이지 않았다.

  마치 보이지 않는 벽에 가로막힌 듯, 숲의 경계선에 쭉 늘어서 있었다.

  “저기야. 저기에 그가 있어.”

  퀴니가 숲 한복판에 삐죽 튀어 올라온 토성을 손으로 가리켰다.

  “왠지 음울해 보이는 성이군.”

  호랭이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가자. 그가 기다리고 있을 거야.”

  비홀더에서 내린 퀴니가 걷자 양편으로 나눠선 마물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공손하게. 신을 경배하듯 경건한 자세로.

  끝없이 펼쳐진 마물들의 마중행렬. 그 끝에 흉측한 토성이 있었다. 하늘을 찌를 듯이 치솟은 검은 토성 끝으로 검은 뇌전이 끊임없이 내리쳤다.

  마물들의 행렬은 그곳에서 끝이 났다.

  마물들에게 토성은 범접하지 못하는 성지였다.

  대신 거대한 세 존재가 그들을 마중 나왔다.

  베르키스, 알칸테, 아콘.

  절망의 세 자식들.

  그들이 강렬한 존재감을 과시하며 그녀 앞에 한쪽 무릎을 꿇었다.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무녀님.”

  “오랜만이야. 모두들.”

  퀴니는 점잖은 표정으로 답례했다.

  “그는?”

  퀴니의 짧은 물음에 베르키스는 몸을 일으키며 우아한 자세로 토성 안을 가리켰다.

  “안으로. 당신을 손꼽아 기다리고 계십니다.”

  토성 안은 어두웠다.

  어두운 마계에서도 가장 어두운 곳이었다. 칙칙한 어둠이 짙게 뿌리를 내리고 있엇다.

  “휴, 지독하군.”

  궁을 감싸고 있는 꺼림칙한 기운에 호랭이는 고개를 흔들었다.

  절로 몸서리가 쳐졌다.

  총력을 기울여 마기에 대항하고 있지만 서서히 스며드는 음침한 기운은 신선인 그의 정신을 괴롭혔다. 악독하고 사악한 기운들 중에서도 가장 아래에 고여 있는, 농축된 마력이 이곳에 있었다.

  “과연 이곳에 어울리지 않는 분이시군요.”

  호랭이가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아콘이 희미하게 빛을 발하며 웃었다.

  “나에 대해 뭔가 들은 거라도 있소?”

  목을 쓰다듬던 호랭이가 넌지시 물었다.

  아콘은 고개를 끄덕였다.

  “세 분에 대해선 일찍이 아버지께서 말씀하셨습니다.”

  호랭이는 호기심이 일었다.

  “나에 대해 뭐라 했소?”

  “이곳과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라 하셨습니다.”

  “맞소. 솔직히 난 이곳의 모든 것이 그다지 달갑지 않구려.”

  아콘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건 처음 보는 순간 알 수 있었습니다. 당신에게서 이질감이 느껴졌으니까요. 마치 신족과 같은......”

  호랭이는 쓰게 웃었다.

  “신과 비교될 정도로 대단한 존재는 아니오.”

  대화하는 사이 어느새 긴 회랑의 끝에 도달했다.

  “이곳입니다.”

  베르키스들이 허리를 접으며 말했다. 더 이상 안내를 할 수 없다는 뜻이었다.

  퀴니는 잠시 사요한 기운을 풍기는 문을 바라보았다. 결연한 표정이 그녀의 얼굴에 맺혔다. 그녀가 문을 향해 걸어가자 끄드드 하는 녹슨 철문 소음과 함께 문이 저절로 열렸다.

  문 안쪽엔 거대한 홀이 있었다.

  황량하게 느껴질 정도로 거대한 홀의 중앙엔 피처럼 붉은 카펫이 깔려 있었다. 시원하게 뻗어나간 붉은 카펫은 복잡한 문양이 음각된 계단을 부드럽게 타오르며 마침내 정점에 이르렀다.

  계단 위, 홀 전부를 내려다볼 수 있는 피처럼 붉은 옥좌가 있었다. 그리고 그 옥좌에 그가 있었다.

  “변기!”

  퀴니가 후다닥 달려갔다. 그녀는 무표정한 얼굴로 비스듬히 앉아있는 병규를 와락 껴안았다.

  “걱정했어. 괜찮아?”

  계속되는 질문에 병규는 조용히 그녀의 머리만을 쓰다듬었다.

  ‘저 사람이 과연 내가 아는 그 병규란 말인가?’

  호랭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그는 달라져 있었다.

  두 눈은 사요한 기운으로 가득했고, 그의 몸에선 먹구름 같은 마기가 풀풀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사위를 짓누르는 듯한 이 존재감. 미칠 듯한 위압감이 어깨를 강제로 내리누르는 것 같았다.

  겉모습은 그가 기억하는 병규가 맞으나, 분위기와 속은 완전히 다른 자가 되어 있었다.

  헤어진 지 불과 며칠간의 변화였다. 

  “어서 오세요.”

  병규가 호랭이를 보고 부드럽게 웃었다. 호랭이는 그의 웃음이 어색하다고 느꼈다. 과거의 그 순진하고 편안하던 그것과는 전혀 달랐다. 차가운 분위기가 절절히 느껴진다.

  호랭이는 지금의 병규가 인간보다 마족에 더 가깝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어떻게 된 거냐?”

  호랭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병규는 차게 웃으며 차분하게 물었다.

  “나에 대해 알고 싶으신가요? 아니면 레종 여왕에 대한 것을 알고 싶으신가요?”

  “둘 다.”

  병규는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간략하게, 베르키스들에게 들은 자신의 과거와 마계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병규는 비교적 짧고 무감정한 어조로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중간에 몇 번 호랭이가 질문을 던진 것을 빼고는, 줄곧 그가 이야기를 주도해 나갔다.

  그는 복잡한 사정을 일일이 설명하지는 않았지만, 그렇다고 특별히 무언가를 숨기지도 않았다. 심지어 자신이 마계의 군주이었다는 사실조차 조금의 가감 없이 그대로 전해 주었다.

  “흐음.”

  병규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호랭이는 경악성을 참아야 했다.

  머릿속이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복잡했다.

  과연 병규가 해준 이야기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병규는 마계의 군주였다. 마물들의 왕으로 군림했고, 지금도 마물들은 그를 신으로 받들고 있다.

  레종 여왕은 쉐이드에 의해 이곳에 납치되어 있다. 그녀를 구하기 위해서는 마왕 데이크란과의 일전이 불가피하다.

  퀴니.

  아아. 그녀는 놀랍게도 마계의 무녀였다. 몬스터들이 그녀를 따른 것은 그 때문이다. 이 절대암흑의 공간에서 그녀는 한 줄기 성스러운 빛이었다. 하지만 그 빛은 결코 아름답지도, 성스럽지도 않았다.

  마신.

  절대의 악마가 그녀의 신이었던 것이다.

  병규가 알려 준사실들 중 어느 것 하나 범상한 일이 없었다.

  여기까지만 해도 호랭이는 놀라 자빠질 판인데, 더더욱 놀라운 소식이 아직 하나 더 남아 있었다.

  “경애가 여기 있단 말이냐? 그것도 마계의 무녀로?”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미 확인된 일입니다.”

  “그런...... 터무니없는 일이.”

  정말로 말도 안 되는 소리다.

  퀴니는 어쩔 수 없었다고 칠 수 있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이미 마신의 무녀로 내정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경애는, 그 순진하다 못해 엉뚱하기까지 한 그녀가 어쩌다가 이 흉악한 마계의 무녀가 되었을까.

  “아마도.......”

  아픈 표정으로 병규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던 퀴니가 입을 열었다.

  “데이크란은 진정한 마계의 지배자가 되고 싶었을 거야. 그러기 위해선 마신의 인증이 필요해. 하지만 그렇게 하기엔 무녀가 꼭 필요했지. 하지만 마계엔 무녀가 없었어. 진짜 무녀는...... 엉뚱한 곳에 있었거든.”

  모두의 시선이 퀴니에게 몰렸다. 사라진 진짜 무녀는 바로 퀴니, 그녀 자신이었기 때문이다.

  “신을 섬기는 무녀는 세상에 오직 한 명 뿐이야. 내가 죽기 전에는 다른 무녀가 생기지 않는다는 거지. 그래서 데이크란은 사라지고 없는 날 대신할 사람이 필요했어. 진짜는 아니지만 마족들에게 내세울 가짜가 필요했던 거지.”

  “그게 경애였다는 말이군.”

  호랭이가 무거운 음성으로 말했다.

  “맞아.”

  “흠. 결국 경애는 군주 데이크란에게 이용당하고 있는 것인가?”

  대충 경애에 대한 것은 결론이 내려졌다. 하지만 이해되지 않는 것은 대체 그녀가 어떻게 마계의 무녀로 인정받을 수 있었는가 하는 점이었다.

  조용히 듣기만 하던 병규가 입을 열었다.

  “신비한 능력이 있었다고 들었습니다. 무적의 안개를 가졌다고 하더군요.”

  “안개?”

  “설마 경애 언니도 능력자였던 거야?”

  퀴니의 물음에 호랭이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그럴 리 없다. 능력자의 힘은 신적 존재에게 권능을 빌려다 쓰는 것에 불과해. 하지만 신의 힘은 어디까지나 그 차원에 한정된다. 다른 차원에까지 힘을 빌려줄 수 있는 신은 없다고 봐도 무방하다. 설혹 그런 능력을 가진 신이 있다고 해도 타계의 일에 함부로 간섭하지는 못할 것이다.”

  “그럼 어떻게 그런 능력을 쓰는 거야. 샤바?”

  호랭이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의 화신일지도 모르겠다.”

  “네?”

  “화신이라니. 그게 뭐야. 샤바? 응. 응. 가르쳐 줘. 샤바.”

  호랭이는 턱을 쓰다듬으며 잠시 생각했다.

  “어쩌면 그녀는...... 누군가의 화신일지도 모르겠다.”

  “네?”

  “화신이라니. 그게 뭐야. 샤바? 응. 응. 가르쳐 줘. 샤바.”

  호랭이는 샤바의 집요한 질문에 손사래를 쳤다.

  “확실한 것은 아니야. 나중에 확실해지면 알려주마.”

  간신히 샤바를 떨궈 낸 호랭이가 병규를 찾았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된 것인지는 알겠다. 일단 경애와 레종부터 마왕의 손아귀에서 구해야 되겠지. 어떻게 할 생각이냐?”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의 입술이 불길한 미소를 그렸다.

병규의 결론은 간단했다.

  뺏긴 것은 찾아오면 된다.

  다만 어떤 방법을 동원하느냐가 문제다. 하지만 그 문제도 그다지 고민하지 않았다.

  이쪽이 절대적으로 불리한 상황. 데이크란은 모든 유리한 조건을 손에 쥐고 그를 협상 테이블로 유인하고 있다. 하지만 그는 결코 응할 생각이 없었다.

  오히려 그는 방심하고 있을 데이크란을 깜짝 놀라게 해준 생각이었다.

  인질이 두 명이나 적에게 잡혀 있는 상황이다. 현명한 자라면 절대 적을 충동질하지 않을 것이다. 인질은 두 명. 본보기로 한 명을 죽일 수도 있다. 그나마 한 가지 다행인 점은, 마왕 데이크란이 경애와 병규의 관계를 전혀 모르고 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병규는 대대적인 깜짝쇼를 준비했다.

  그것은 모두가 원하는 것이었다.

  마물들이 원하고, 그의 피가 원하고 있었다.

  전쟁.

  그가 자신의 뜻을 밝히자 베르키스들은 굵은 미소를 지었다.

  반가웠다.

  아버지의 이 광기 어린 모습이.

  전율스럽던 과거의 그때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모든 것은 아버지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의 군사가 모여들고 있었다.

  누구도 그들을 부르지 않았건만, 붉게 물든 핏빛 노을을 쫓아 성지를 향해.

  절망의 이름으로.

  마물이라 불리는 피의 병사들이 모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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