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메라의 별
병규가 베르키스들을 만나고 있는 시각, 중간계의 아이린 왕성에서는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를 거듭하고 있었다.
참석자들은 아이린 왕국의 주요 인물들과 용병왕 제이콥, 그리고 연합군에 소속된 각국의 왕들과 대신들이었다.
한 가지 의외였던 점은, 신성제국의 황제가 이 중요한 회의에 참석하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제국의 황제는 긴요한 사정으로 불참을 선언했다.
제국의 황제는 사실상 연합군을 이끄는 우두머리다. 그런 그가 참석할 수 없게 된 이상 회의의 일정을 뒤로 미루는 것이 일반적인 관례였으나, 워낙에 사안이 중대한지라 오늘만은제국의 황제대신 고위 사제가 참석한 채로 회의가 속행되고 있었다.
회의장의 분위기는 더 없이 침통했다.
특히 아이린 왕국의 관계자들의 표정은 암울하기 그지없었다.
표현하지 못할 뿐이지, 모두들 하늘이 무너진듯한 참담한 심정을 절감하고 있었다.
‘이런 회의가 무슨 소용이란 말인가.’
글로리 공작은 흐트러진 모습으로 한숨을 쉬었다.
절망적인 전황에도 절도 있는 모습을 잃지 않았던 그가 오늘만큼은 피로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사정은 루멘 후작이나 필라이트 역시 마찬가지였다.
며칠 전, 급박하게 돌아가는 전장에서 긴급한 연락을 듣고 부랴부랴 왕성으로 돌아왔을 때, 그들을 맞은 것은 반파된 왕성의 모습과 수많은 죽음뿐이었다.
왕성을 지키던 그 많은 병사들이 모조리 시체가 되어 있었다. 왕실이 자랑하는 소드 익스퍼트급의 근위기사들은 두 눈 뜨고 보지 못할 정도로 참혹한 시신이 되어 있었다.
죽은 것은 병사들만이 아니었다.
시녀에서부터 작은 애완동물까지, 왕성의 모든 생명이 죽어있었다. 살아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새, 전통을 자랑하던 아이린의 왕성은 유령의 성으로 변해 있었다.
글로리 공작들은 가슴이 무너지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지금까지 적지 않은 전쟁을 치렀지만 이렇듯 처참한 살해현장은 처음이었다.
“마족의 짓이군.”
왕실을 피로 물들일 수 있는 실력과 배짱, 그리고 잔혹한 심성.
흉수는 마족이 분명했다.
증거는 여기저기에 널려 있었다. 강력하고 음침한 마력의 잔재가 곳곳에서 감지된 것이다.
처참한 현장과 흉수의 정체를 파악한 글로리 공작들은 마음이 급해졌다.
그들은 서둘러 레종 여왕을 찾아 사방을 수색했다.
하지만 총력을 다해 펼친 수색에도 그녀의 행방은 묘연하기만 했다.
더더구나 그들의 마음을 졸이게 만든 것은, 보고를 받고 남들보다 일찍 떠난 디스마저 어디론가 사라져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었다.
다행히 레종 여왕의 시신은 그 어디에서도 발견되지 않았지만, 수색기간이 길어질수록 사람들의 불안은 커질 수밖에 없었다.
당장 아이린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전선에 투입된 일부 병사들을 불러들여 여왕의 행방을 수소문하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어른에서 아이 할 것 없이 국민들 모두가 나서서 그녀의 행방을 찾았다.
그러나 사건이 있은 지 일주일이 지나도록 여왕의 소식은커녕 병규나 디스의 행방조차 여전히 오리무중 상태였다.
아이린 왕국 관계자 외에도 안절부절 못하는 존재가 하나 더 있었다.
엘프들을 이끌고 있는 하이엘프 카즈엘 또한 두 눈을 지그시 감은 채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그녀가 이렇듯 초조해 하는 이유는 병규의 실종 때문이었다.
아이린 왕국이 레종 여왕을 수소문하듯, 그녀 역시 엘프와 다른 이종족들의 도움을 빌어 병규의 행방을 추적했다. 하지만 그녀 역시 아무런 성과를 얻지 못했다.
정령들조차 그들의 소식을 알지 못했다.
예사롭지 않은 일이다.
정령들은 중간계의 모든 장소에 존재한다. 광활한 대지의 모든 곳에 대지의 정력이 머물고, 공기의 유동이 있는 모든 곳에 바람의 정령이 깃든다. 물과 나무, 심지어 하늘에서 떨어지는 벼락과 어둠 속에도 정령이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정령들이 아이린 왕성에서 벌어진 일대 사건을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 자체가 말도 안 되는 상황인 것이다.
하지만 그 당시 왕성을 공격한 것이 마족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정령들의 공백도 전혀 불가능한 것은 아니다.
마족들이 마력으로 펼치는 암흑마법 중엔 마력장이라는 것이 있다. 일정 공간을 암흑의 기운으로 변화시켜 마계와 비슷한 환경으로 만드는 마법이다.
마족들은 중간계에서 제대로 된 힘을 사용하지 못하기 때문에 이 마력장을 이용하여 힘의 원천인 마력을 마계에서 끌어온다.
특이한 것은 이 마력장이 정령들의 움직임을 제한할 수 있다는 것이다. 정령들이 병규의 소식을 전혀 알지 못하는 것도 바로 이런 이유다.
하여간 믿었던 정령들마저 고개를 내젓는 통에 천하의 하이엘프인 카제엘은 전전긍긍 애가 닳을 수밖에 없었다.
“어떻소? 레종 여왕과 실종된 다른 사람들의 소식은. 조금의 단서라도 발견되었소?”
라파엘국의 하즈 국왕이 회의장 한쪽의 노인에게 질문을 던졌다.
질문을 받은 노인은 각국의 주요 인사들이 모여 있는 회의장에서 유일하게 격에 어울리지 않는 용모를 하고 있었다.
노인은 지독하게 평범하게 생겼다.
어느 나라, 어느 골목에서도 흔히 볼 수 있는 그런 용모의 소유자였다. 차림 또한 소박했다.
만약 용병왕 제이콥의 보증이 없었다면 결코 이 자리에 참석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평범한 용모와 달리 노인의 신분은 결코 범상치 않았다.
주시자의 눈.
대륙 전반의 정보를 다루는 거대 정보길드.
마법사의 탑만큼 오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길드로서 대륙 전반에 끼치는 그 영향력은 지대하다고 할 수 있는 정보통이다.
길드의 구성원은 제국의 고위 관료에서부터 가장 밑바닥의 하층민 노예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방대하다. 거의 모든 계층의 수많은 사람들이 주시자의 눈을 위해 활동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때문에 그들의 정보는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엄청났다.
그렇게 모인 정보는 각국에 퍼진 정보 상인들에 의해 거래되고, 또 은밀한 거래의 대가로 팔린다.
모든 음모와 계략의 배후엔 언제나 주시자의 눈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것이다.
노인의 이름은 카탈로그.
그는 바로 주시자의 눈의 수장이었다.
카탈로그의 정체가 밝혀졌을 때, 회의에 참석한 모든 이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설마 이토록 허름한 사람이 그 신비에 싸인 정보길드의 길드장이었을 줄이야.
그 누구도 상상 못할 일이었다.
사실 노인은 예전에 제이콥이 병규가 훔쳐 온 말을 처분할 때, 트라우마의 비밀통로에서 만났던 바로 그 노인이었다.
그런데 제이콥은 어떻게 카탈로그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일까.
사정은 간단했다.
원래 제이콥은 카탈로그가 아끼는 수제자였다.
주시자의 눈을 이어받을 후계자로 키워지던 그는 어느 날, 자유를 찾는다며 홀연히 여행을 떠났고, 이후 호젤 등과 만나 프리즘 용병단을 구성하게 된 것이다.
제이콥이 스스로를 시험하기 위해 길드를 배신하고 용병의 길로 들어섰지만, 이후로도 카탈로그의 보살핌은 계속되었다.
물론 제이콥이 용병왕이 될 수 있었던 것도 음과 양으로 카탈로그가 손을 썼기에 가능했던 일이다.
“음.”
하즈 국왕의 물음에 카탈로그는 감은 두 눈을 찡그렸다. 마음이 불편할 때 습관적으로 보이는 행동이었다.
이어 그는 고통 어린 음성으로 대답했다.
“전혀. 대륙 어디에서도 그분들을 보았다는 보고는 없었습니다.”
지그시 감겨진 두 눈에 짙은 고뇌의 흔적이 느껴졌다.
“허허. 주시자의 눈조차 손을 쓰지 못하는 일이라니....... 정말로 일이 심상치 않은 것 같구려.”
답답하긴 모두 마찬가지였다.
더러는 수염을 쓰다듬고, 더러는 헛기침을 삼키며 착잡한 마음을 금치 못했다.
아이린 왕국의 관계자가 있는 자리라 차마 말을 못할 뿐, 회의에 참석한 대부분의 사람들은 여왕과 병규가 이미 죽었을 것이라고 짐작하고 있었다.
“어험. 그런데 왕성에서 괴이한 생물을 발견했다지요? 그 괴물은 깨어났는지 궁금하구려.”
지긋한 노신사 같은 외모의 하즈 국왕이 분위기를 환기시키려는 의도로 말꼬리를 슬며시 돌렸다.
“그 하얀 괴물은 여전히 의식불명 상태입니다.”
글로리 공작은 피곤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마족의 습격이 있었던 궁성에서 유일하게 한 명의 생존자가 있었다. 사실 생존자라고 할 수도 없었다. 그는 인간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생전 처음 보는 하얗고 거대한 괴물이 궁성의 안뜰에 기절한 채 누워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대체 그놈의 정체가 뭐요?”
사람들의 시선이 필라이트에게로 옮겨졌다. 아무래도 미지의 생물에 대한 것은 마법사인 그에게 물어보는 것이 적당했다.
“아직 모르오. 지금까지 한 번도 보고된 적이 없는 생물이오.”
필라이트는 덤덤한 목소리로 대꾸했다.
“허허. 보고된 적이 없는 생물이라. 조사해 볼 것도 없소. 놈은 분명 마족일 것이오. 그도 아니라면 사악한 마물이나 마수의 일종일테지. 애써 회복되길 기다릴 것이 아니라 당장 손을 씁시다. 약이든 마법이든 써서, 안 되면 놈의 머리통을 난도질해서라도 왕성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알아내야 하오!”
칸타타국의 타드 국왕은 결연한 태도로 괴물으 처분을 촉구했따. 붉은 머리칼의 그는 생긴 모습만큼이나 성질이 불같았다.
사실 여러 정황으로 보아 내성에서 발견된 짐승은 마계의 존재일 가능성이 높았다. 하지만 필라이트는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그럴 수 없소.”
“허허. 답답하군. 대체 못하겠다는 이유가 뭐요?”
타드 국왕은 가슴을 치며 물었다.
필라이트는 태연히 차를 마시며 답했다. 그는 아이린 왕국의 공작의 신분임과 동시에 7서클의 대마법사라는 존경을 받는 인물이기에 타국의 국왕 앞에서도 결코 꿀리지 않았다.
“난 그 짐승이 마계의 존재가 아니라 생각하오.”
“허? 마계의 짐승이 아니라? 그렇다면 대체 그놈이 어디에서 왔다는 게요?”
타드 국왕의 음성엔 역정이 묻어 있었다. 급박한 상황에서도 미적지근한 대응만을 하는 노마법사의 태도가 마음에 들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질대로라면 필라이트가 아무리 말린다 해도 당장 그 괴이한 짐승의 두개골을 열었을 것이다. 남의 나라 일이라 애써 참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이어진 필라이트의 대답에 그는 경악성을 지를 수밖에 없었다.
“사실 난...... 그 짐승이 신계에서 왔을 것이라 믿고 있소.”
“뭐라?”
“시, 신계?” 사람들의 표정이 한순간에 굳어 버렸다. 그만큼 필라이트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기 때문이다.
신계.
마계와 반대되는 성스러운 세상.
물론 마계가 존재하듯, 신계도 확실히 존재한다.
신성력을 빌리는 신관의 능력이 신계의 존재를 증명한다. 하지만 분명 존재함에도 신계의 중간계 간섭은 극히 미미하기만 했다.
최근 수백 년 동안 신은 고사하고, 신의 대리자라는 천사조차 본 사람이 없었다.
오직 전설에서만 등장하는 미지의 세계인 것이다.
그런데 피로 얼룩진 왕성에서 발견된 하얀 짐승이 그런 신계와 관련 있는 존재라니. 정녕 믿을 수 없는 소리였다.
“그, 그 말이 진정인가?” 하즈 국앙이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필라이트는 천천히, 그러나 확신이 가득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소.”
“허.”
“믿을 수 없군.”
허탈한 한숨을 내수는 사람들의 표정에 불신이 가득했다.
필라이트의 측근인 글로리 공작조차 입을 벌린 채 황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으니, 다른 사람들의 놀라움이 어떠했을지는 말로 설명할 필요가 없을 것이다.
“그 괴물이 신계에서 온 것이라고 추측하는 근거라도 있습니까?”
글로리 공작이 진지한 표정으로 물었다.
찻잔을 만지던 필라이트는 한숨과 함께 자신의 생각을 피력했다.
“그에게서 풍기는 기운이 범상치 않기 때문이지. 괴물의 몸에서 마나와도, 마력과도 전혀 다른 신성한 기운이 감지되었네. 이것이 내가 그 괴물을 신계의 존재라고 확신하는 이유일세.”
“흐음.”
필라이트의 대답을 들은 사람들의 입에서 얕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마법사는 지극히 논리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다. 이러한 성품은 고서클의 마법사일수록 그 정도가 심해진다. 그들의 학문이 꼼꼼하고 정확한 심성을 필요로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고서클의 마법사가 확신하는 일이라면 분명 그만큼의 논리적인 이유가 분명 존재한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대대마법사인 필라이트가 강한 어조로 주장하는 것을 사람들은 반신반의하면서도 믿어 주는 것이다.
물론 성에서 발견된 하얀 괴물은 호랭이였다.
쉐이드의 간계에 말려 기절한 호랭이는 그대로 필라이트 일행에게 발견되었고, 지금은 깨어날 때를 기다리며 마법사들의 보호를 받고 있었다.
필라이트는 호랭이의 정체를 이미 꿰뚫고 있었다. 비록 그가 알고 있는 호랭이와 모습은 전혀 달랐지만, 선선한 그 기운만은 분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글서 지금 신계를 들먹이면서까지 그를 보호하려는 것이다.
하여간 그의 속을 모르는 사람들은 호랭이를 신계의 신수로 믿게 되었다. 대마법사의 발언은 그만큼의 무게가 있었다.
“허허. 신수가 나타났으니 희소식이 아닐 수 없소. 아무래도 신계에서조차 더 이상 마계의 준동을 좌시할 수 없었던 모양입니다.”
“어쩌면 신계가 직접 마계를 벌하려는지도 모르지요. 드래곤들이 너무 조용해서 이상하다 싶었는데, 이제 보니 신계가 직접 움직일 생각이었나 보오.”
“암. 마계의 탐욕은 도를 넘어서도 한참 넘어섰지요. 감히 중간계를 넘보다니. 분명 신계도 이와 같은 사태를 좌시하지 않을 것이외다.”
사람들은 저마다 목소리를 높이며 마계의 만행을 비난하고 신계의 참전을 환영했다.
하지만 그들의 바람과 달리 신은 철저한 방관자였다.
“그나저나 앞으로의 일을 어찌했으면 좋겠소? 신계의 참전은 분명 환영할 일이지만, 아직 확실히 정해진 일은 아니니, 당분간은 우리의 힘만으로 마계의 야욕을 저지해야만 하오.”
라파엘의 하즈 국왕이 헛기침을 삼키며 말을 꺼냈다.
불길처럼 일어났던 분위기는 한순간 정적을 되찾았다.
“아무래도...... 전력을 전방에 집중시키는 한편, 후방의 안전에도 만전을 기해야겠지요.”
타드 국왕이 입맛을 다시며 평범한 답안을 내놓았다.
분명 옳은 소리였지만, 그의 의견에 찬동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일리는 있지만 형편상 실제로 실행하기엔 불가능한 의견이었기 때문이다.
현재의 전황은 극히 암울했다.
바호크와의 국경지대는 마족이 펼쳐 놓은 어둠의 장막으로 인해 평범한 인간의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는 죽음의 대지가 되었고, 타락한 바호크의 병사들은 피와 살육을 즐기는 살인귀로 변해 버렸다.
사악한 어둠의 세력에 맞서 연합군은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만약 신성제국의 황제인 샤바와 몬스터들을 자유롭게 다루는 퀴니가 없었다면, 전황은 단번에 바호크 진영으로 기울어졌을 것이다. 그런데 엎친 데 덮친 격이랄까. 이제는 후방의 안전마저 위험한 지경이 되었다.
아이린 왕국의 왕성은 전장과는 상당한 거리를 둔 후방이다. 그런데 마족의 침입으로 몰살을 당했다. 이 사건이 시사하는 바는 상상 이상으로 대단했다.
마족이 급습할 당시 아이린 왕국의 방어력은 가히 대륙최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수백의 병사들과 수십의 근위기사가 주둔해 있었고, 소드마스터급의 기사인 병규와 전설의 어세신 집단인 마일드 세븐이 성의 안전을 책임지고 있었다.
이 정도의 전력은 이드라센의 어떠한 나라와 비교해도 손색이 없는 수준이다.
그런데 그런 막강한 전력이 버티고 있는 아이린 왕궁이 마족 몇 마리에게 허무하게 무너졌다.
이것은 대륙의 어느 지역이라도 마조그이 습격에서 안전할 수 없다는 말이 된다.
가령 가장 남쪽에 위치한 칸타타국의 왕성조차 마족의 습격을 받을 수 있는 것이다.
만약 마족이 또 다른 왕국의 왕성이 습격을 받는다면, 또다시 아이린 왕성에서의 일이 재현되지 않으리라고 누가 자신할 수 있을까. 지켜야 할 곳은 한없이 늘어났는데, 그것에 반해 병력은 턱없이 부족했다.
그렇다고 무턱대고 왕실의 경비를 강화할 수도 없는 노릇이다.
왕실의 경비강화는 곧 전장의 전력 약화를 가져오기 때문이다. 물론 왕실의 경비를 강화한다고 해도 과연 마족의 침입을 막을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회의장의 모두가 답답한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다.
돌연 문이 벌컥 열리며 근엄한 음성이 터져 나왔다.
“그래서 내가 그대들을 도울 생각이다.”
활짝 열려진 문밖으로 붉은 노을이 타고 있었다. 실내로 붉은 빛줄기가 흘러들었다. 핏빛을 연상시키는 노을과 함께 일남 일녀가 실내로 들어섰다.
각국의 왕들과 대신들은 이 돌연한 사태에 깜짝 놀라며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고, 글로리 공작을 비롯한 근위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들었다.
“누구냐!”
“무엄한!”
당장 피가 튀고 비명이 터질 듯한 일촉즉발의 상황.
“잠깐만. 모두들 진정해 주십시오.”
먼전 들어선 사내가 두 손으 휘두르며 소리쳤다.
“아니!”
삼엄한 누능로 사내를 노려보던 글로리 공작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디스!”
사내는 다름 아닌 디스였다. 사라졌던 그가 눈부시게 아름다운 미녀와 함께 갑자기 다시 나타난 것이다.
디스를 확인한 근위기사들은 즉시 치든 검으 거두었다.
행방이 묘연하던 디스의 갑작스런 출현에 사람들은 두 눈을 비볐다.
“저, 정말이군.”
“허허. 그동안 대체 어디에 있었는가?”
사람들은 진심으로 그를 반겼다.
디스는 비록 하류 귀족 출신이지만, 방대한 지식과 뛰어난 계략으로 연합군의 참모 역할을 톡톡히 해냄으로써, 여러 국왕들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하지만 디스가 사람들의 관심을 받는 것도 잠시였다.
그와 동행한 여자를 본 순간 중인들은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충격을 받았다.
“노, 놀랍군.”
“이렇게 아름다울 수가.”
왕과 대신들의 입에서 격찬이 쏟아졌다.
그녀는 정말로 아름다웠다.
필설로 도저히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손짓 하나, 움직임 하나에도 기품이 흘러넘쳤고, 냉정하고 도도한 태도는 사람의 애간장을 바짝 달구었다.
마치 신이 심혈을 기울여 만든 하나의 조각상 같은 완벽함을 가진 여인이었다.
꿀꺽.
국왕들은 체면도 잊은 채 마른 침을 삼키기 바빴다.
하지만 유독 필라이트와 글로리 공작의 표정은 심각했다. 특히 필라이트는 여인을 보자마자 사시나무 떨듯 몸을 떨었다.
그녀에게서 풍기는 무지막지한 마나를 감지한 것이다.
가히 마나의 태풍. 그녀를 중심으로 마나가 거칠게 회오리치고 있었다. 인간의 몸으로는 절대로 이렇게 방대한 마나를 품을 수 없다.
이토록 엄청난 마나를 지닐 수 있는 존재는 오로지 한 종족뿐.
“드, 드래곤.”
필라이트는 기겁을 했다.
마법사인 그에겐 죽음의 신을 만난 것만큼의 충격이었다. 설마 여태 아무런 소식도 없던 드래곤이 이렇듯 별안간 모습을 드러낼 줄이야.
더구나 그녀는 지금까지 신성제국의 황제인 샤바를 호위하던 마일드의 일곱 사신 중의 한 명이 아니던가.
분명 마그네트라는 이름으로 불리고 있었다. 항상 샤바 황제에게 착 달라붙어서 온갖 아양을 다 떨던 푼수 같던 여인. 그런데 지금 그녀는 예전에 그가 알던 그녀와는 전혀 다른 인물로 변해 있었다.
이 가공할 기세, 해일처럼 몰아치는 마나의 파문.
겉모습만 똑같고 나머지 모든 것이 달라져 있었다.
필라이트는 이 사태를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한편, 그의 경악성을 들은 사람들은 안색이 창백해지고 말았다.
“대, 대공. 그, 그게 무슨 말이오?”
“지금 저기 저 여인은 인간이 아닙니다.”
“그, 그럼 정말로 드, 드래곤?”
필라이트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히, 힉.”
“맙소사.”
사람들은 전율했다.
몸을 떨고, 식은땀을 흘리고, 비명을 질렀다.
‘최악이군.'
글로리 공작은 검자루가 으스러져라 손을 꽉 움켜쥐었다.
드래곤이 무슨 이유로 이 회의장에 참석한 것일까.
이 회의장엔 인류의 마지막 보루라고 할 수 있는 연합군의 수뇌가 모두 모여 있다. 만약 이들이 모두 제거된다면 머리를 잃은 연합군은 와해되고 말 것이다.
그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해야 했다. 한편, 그러면서도 디스에 대한 의문을 떠올렸다.
‘그녀가 드래곤이 맞다면, 어쩌다 디스와 동행하게 된 것일까? 혹시 드래곤에게 속아 이곳까지 안내를 하게 된 것은 아닐까? 아니야, 저 표정은. 그는 그녀의 정체를 알고 있었어.’
마치 그의 속마음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디스가 작게 미소 지으며 앞으로 나섰다.
“대공님의 말씀대로 이분은 자연의 조율자, 중간계의 수호신이신 마그네트이십니다.”
디스는 우아하게 마그네트를 소개하면서도 은근히 그녀를 중간계의 수호신으로 소개했다. 마그네트가 조금이라도 우쭐함을 느낀다면 이곳의 국왕들을 함부로 해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적어도 마그네트님은 우리에게 적의를 가진 것은 아닙니다. 오히려 도움을 주기 위해서 어려운 걸음을 하셨습니다.”
디스의 말에 사람들은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드래곤이 무슨 도움을 준단 말인가. 그들이 알고 있는 드래곤은 한마디로 절대적인 힘을 가진 난봉꾼에 불과했다.
마음 내키는 대로 날뛰는 폭군.
물론 드래곤의 입장에서 본다면 인간이야말로 중간계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해충일 테지만 말이다.
“할 말이 많습니다. 일단 자리에 앉으시죠.”
디스는 여유로운 음성으로 좌중을 안심시켰다.
사람들은 혼란한 와중에도 그의 말에 따라 자리에 앉았다. 물론 드래곤인 마그네트의 눈치를 보며 불안에 떨긴 했지만 말이다.
디스는 상당한 시간을 들여 아이린 왕성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했다. 그의 이야기를 들은 사람들은 탄식을 금치 못했다.
“과연 마족의 소행이었군.”
“레종 여왕이 납치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오.”
“후작이 마족을 물리치고 여왕을 구하러 마계까지 쫓아갔다니, 그의 용기는 칭송받아 마땅하오.”
그들은 마계에 납치된 레종 여왕의 운명을 안타까이 여기고, 그녀를 구하러 떠난 병규의 용맹을 칭송했다.
디스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모두의 표정은 극히 어두웠다.
연합군을 이끄는 중요 인사였던 레종 여왕과 소드마스터 급의 기사인 병규 후작을 잃은 것은 커다란 손실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아직 죽지 않았을지 모르나, 이미 죽음이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다고 사람들은 생각했다.
마계.
피와 살육을 즐기는 악마와 같은 몬스터들이 날뛰는 암흑의 세계.
그런 지옥에 떨어진 여왕을 구출하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다.
“아직 죽지도 않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것은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죠. 지금은 우선 처리해야 할 사안이 있습니다.”
디스가 큰 목소리로 사람들의 주의를 환기시켰다.
“우선 여러분이 아셔야 할 일은, 자연의 조율자들께서 이번 마족의 침공에 전혀 손을 쓰지 못하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좌중은 잠시 웅성거리는 소음으로 소란스러워졌다.
그러면서도 감히 드래곤인 마그네트에게 직접 이유를 묻는 사람은 없었다. 눈치만 볼 뿐이다.
“그동안 아무 소식이 없어 사정이 있는 줄은 알았네. 그런데 이렇게 직접 들으니 조금 실망스럽기는 하군. 그런데 이런 상황에서 대체 뭘 의논한다는 말인가?”
글로리 공작이 나지막한 음성으로 물었다.
디스에게 물었지만 그의 눈은 마그네트를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회의실에 들어설 때 도와준다고 했던 것을 그는 아직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 대답은 디스가 했다.
“간단합니다. 우리가 강해지면 됩니다. 마족들을 상대할 수 있을 정도로.”
“허허. 그걸 누가 모르는가. 방법이 없으니까 하는 소리지. 설마 수십 년을 수련하자는 소리는 아닐 테지?”
“물론 아닙니다. 자연의 조율자이신 마그네트님께서 제안하신 계획이 설마 그렇게 엉성할 리가 있겠습니까?”
“허어. 말을 빙빙 돌리지 말고 바로 얘기해 보게. 속이 타는구먼.”
“간단하다.”
지금껏 눈을 감고 있던 마그네트가 두 눈을 번쩍 떴다.
흠칫.
그녀의 강력한 눈빛에 사람들은 어깨를 움츠렸다.
무시무시한 위압감이 좌중을 내리눌렀다.
사람들은 감히 그녀를 마주보지 못했다. 글로리 공작만이 인상을 잔뜩 쓰며 그녀의 기운에 대항했다.
마그네트는 그를 이채 어린 눈으로 보았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곧 그녀 특유의 무표정한 얼굴로 돌아왔다.
“내가 위대한 마법의 힘으로 전사들의 능력을 강화시키겠다.”
마그네트의 음성은 묵직함을 넘어 장엄하기까지 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드래곤의 마법이면 혹시나 가능할지도 모르겠다는 착각마저 들었다.
“서, 설마.”
돌연 필라이트가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마법사인 그는 마그네트가 말한 ‘강화’라는 의미를 어렴풋이 눈치 챌 수 있었던 것이다.
보조마법으로 신체를 활성화시키는 것에는 엄연히 한계가 있다. 마법의 조종이라는 드래곤이 설마 이런 기초적인 것도 모를 리 없다.
그렇다면 답은 한 가지.
“키메라!”
마법을 이용한 생물융합.
키메라란, 생김새를 규정하기 힘든 추악한 괴물을 일컫는 말이지만, 마법사들에게는 마법으로 생성한 새로운 생명체에 해당한다.
인간의 몸에 사자의 머리, 오크의 팔다리를 합친 생물을 만드는 것이다.
이와 같은 생물융합은 모든 마법사들의 꿈이며, 또한 실현하기 매우 어려운 학문이다. 7서클 마스터인 필라이트조차 기초적인 생물 융합을 실험해 봤을 뿐이다.
“맞다. 키메라를 만들 생각이지.”
과연 드래곤은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마, 말도 안 됩니다. 마족을 막기 위해 파멸을 부르는 괴물을 만들어 낸단 말입니까! 변이된 자가 받게 될 고통은 생각하지 않으시는 겁니까?”
필라이트는 상대가 드래곤이라는 것도 잊은 채 목소리를 높였다. 마그네트의 고운 이마에 주름이 생겼다.
“방자하군. 그럼 네게 다른 대안이라도 있는가?”
“없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괴물을 만들 수는 없습니다. 신이 허락하지 않은 생물인 키메라는 필히 후환을 남길 것입니다.”
필라이트의 태도는 더없이 완고했다.
‘이거 안 좋은걸.’
불안한 표정을 마그네트와 필라이트의 대화를 듣던 디스는 지그시 인상을 찌푸렸다.
마그네트는 레드드래곤치곤 생각보다 포악하지는 않다. 하지만 그렇다고 자상하지도 않다. 그녀에게서 자상한 설명 같은 것을 바라는 것은 애초부터 무리인 것이다.
어쩔 수 없이 디스가 나섰다.
“필라이트님. 잠시 진정해 주십시오. 마그네트님이 말씀하신 키메라는 필라이트님의 생각하시는 것과는 조금 다른 것입니다.”
“다르다고? 생물융합 말고 또 어떤 키메라가 있단 말인가?”
“생물강화입니다.”
“강화?”
필라이트의 하얗게 긴 눈썹이 흔들렸다.
“말로 설명하는 것보다는 직접 보여 드리는 것이 좋겠군요.”
디스는 오른팔의 소매를 걷은 뒤, 테이블 위에 올렸다.
“......?”
사람들은 의문 가득한 눈으로 그의 팔을 쳐다보았다.
디스의 팔은 남자치고는 꽤 가늘었다.
그러나 숨을 고르며 힘을 쓰자, 투두둑 하는 소음과 함께 바람이라도 집어넣은 것처럼 팔이 급격하게 부풀어 올랐다.
“헛!”
“무, 무슨.”
사람들이 놀라는 사이 어느덧 그의 팔은 힘줄이 툭툭 불거진 근육질로 변모했다. 하지만 그의 몸은 여전히 날씬해서, 몸은 가늘고 오른팔만 굵어진 기형적인 모습이 되었다.
기상천외한 변신을 한 디스는 마라톤을 마친 사람처럼, 온몸이 땀에 푹 젖어 버렸다. 그런 상황에서도 스스로 만족한 탓인지 밝은 미소를 보였다.
“하아하아. 바로 이것입니다. 약물과 마법으로 생명력을 강화하는 방법이죠. 마그네트님께서 말씀하신 키메라는 바로 이것입니다.”
그는 능력을 과시하듯, 금속으로 만들어진 컵을 구겨서 작은 공처럼 만드는 묘기까지 선보였다. 과거의 허약한 몸으로는 절대로 불가능한 괴력이었다.
“흐음.” 필라이트는 신음성을 흘렸다.
전혀 상상치도 못한 마법이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다른 사람도 아닌 디스가 이렇게 위험한 마법에 스스로를 희생했다는 사실이었다.
디스처럼 자기관리에 철저한 사람은 장래가 불투명한 이런 실험에 함부로 뛰어들지 않는 법이다.
사실 평소의 디스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다.
그만큼 레종 여왕의 납치가 그의 심성에 큰 영향을 끼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레종 여왕이 마족에게 납치되는 것을 보고만 있어야 했던 디스. 그는 비로소 자신이 그녀를 얼마나 사랑하고 있었는지를 깨닫게 되었다.
그리고 절망했다.
가슴을 쥐어뜯으며 괴로워했다.
무기력한 자신에 대해 환멸이 일었다.
사랑하는 그녀가 납치되는 모습을 멍하니 보고만 있었다는 사실이 그를 몸서리치게 만들었다.
결국 디스는 스스로 키메라가 되기로 결심했다. 마그네트는 흔쾌히 그를 받아들였다. 그리곤 마일드의 사신들에게 그렇듯, 그에게도 ‘발칸’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
물론 다른 사람들이 이러한 사정을 알 리 만무했다. 그들의 탐욕스런 눈은 오직, 용맹스럽게 변한 디스의 오른팔에만 집중되어 있을뿐이었다.
“대단하오. 이런 변신이 가능할 줄이야.”
“이 방법만 있으면 일반 병사들도 충분히 뛰어난 전사로 변신할 수 있겠구려.”
회의장의 왕들과 대신은 디스가 보인 변신에 한껏 고무되었다.
“후유증은...... 부작용은 없는가?”
필라이트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그의 눈엔 디스를 걱정하는 마음이 가득했다. 육체가 저렇게 변했으니 분명 육체에도 무리가 생겼을 것이다.
“없습니다. 다만...... 영원히 보통사람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됩니다.”
디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차마 말하지 못하는 것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감추기라도 하듯, 그는 이내 어두운 표정을 지우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이 방법으로 대량의 키메라를 만들면 마족들을 충분히 상대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의 손으로, 우리의 힘만으로 저 추악한 마계의 놈들을 징벌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좋군. 좋아.”
“우리들의 손이라는 말이 내 마음에 쏙 드는군.”
“하하하하.”
각국의 왕들은 손뼉을 치며 디스의 말에 호응했다.
드래곤이나 신의 힘을 빌리지 않고, 인간의 능력만으로 마족을 몰아낼 수 있다는 말에 구미가 동했다.
이미 왕들의 마음은 사심으로 가득했다.
키메라를 제작할 수 있게 된다면, 만약 그것을 대량으로 만들어 낼 수 있다면 약소국이 하루아침에 강대국으로 급부상하는 것도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그런 기대에 부풀어 국왕들은 마그네트를 신처럼 받들고 칭송했다.
이 오만한 드래곤과 친해질 수 있다면 마족과의 전쟁이 끝난 후, 대륙의 영토분쟁에서 유리한 고지를 점할 수 있으리라.
하지만 모두가 키메라를 인정한 것은 아니었다. 마법사인 필라이트는 아직 불안이 남아 있었다. 막 그가 목숨을 걸고 마그네트에게 이의를 제기하려는 순간이었다.
쿠쿠쿵!
강한 충격파가 밀려왔다. 지진이라도 난 듯 왕성이 상하로 흔들렸다.
“이것은!”
마그네트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막대한 마나의 흐름이 감지된 것이었다. 그 양은 드래곤인 그녀조차도 놀랄 정도로 엄청났다.
“이런 터무니없는 마나라니.”
마그네트는 즉시 충격파의 진원지를 향해 텔레포트 했다.
뒤늦게 이상함을 느낀 필라이트와 글로리 공작 등도 그녀의 뒤를 따라 바쁘게 움직였다.
충격파의 진원지는 기절한 호랭이가 발견되었던 후원의 뒤뜰이었다.
마족의 침입으로 반파된 그곳에 세 사람이 있었다.
“너희들은?”
텔레포트 마법으로 정원에 도착한 마그네트는 눈자위를 일그러트렸다. 그들은 그녀가 익히 아는 사람들이었다. 아니, 그들로 인해 치욕적인 수모를 당했다.
왈칵 솟구치는 분노.
“이놈들!!”
증오가 가득 묻어난 음성으로 마그네트는 으르렁거렸다.
“어라? 다른 애들은 어디가고 너 혼자 있는 거야. 샤바?” 검은 장발의 귀여운 소년이 그녀를 향해 눈을 깜빡였다. 마일드의 일곱 사신은 언제나 함께 다녔다. 그런 마일드의 사신들이 모두 사라지고 그녀 혼자 모습을 드러냈으니 이상하게 생각된 것이다.
마그네트를 지그시 보던 금발의 소녀가 고개를 흔들며 말했다.
“상태가 조금 이상한걸. 아무래도 그녀는 기억을 되찾은 것 같아.”
“에? 또 머리가 이상해진 거야, 샤바?” 기억상실에서 깨어났으니 오히려 지금이 정상일 테지만, 샤바가 보기엔 미친개처럼 으르렁거리는 지금의 모습이 결코 정상으로 보이지 않았다. 그러 수밖에. 그녀는 애초에 사람이 아닌 드래곤이기 때문이다.
“할 수 없지. 샤바.”
뺨을 긁적이던 소년은 돌연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뭘 찾는 거야?”
“음. 짱돌. 샤바.”
“헛!”
짱돌이라는 소리에 마그네트는 저도 모르게 움찔 어꺠를 떨었다.
아픈 기억이 떠올랐던 것이다. 그의 짱돌 덕분에 그녀는 두 번이나 큰 충격을 받았다.
주위를 뒤적거린 소년은 자신의 손에 딱 알맞은 짱돌을 주워 들고는 빙빙 휘둘러 보였다.
“좋다. 손에 착착 붙는다. 샤바.”
마그네트는 창백해진 안색으로 주춤주춤 물러섰다.
반사적 행동이었다.
천하의 드래곤이 바퀴벌레에게 공포를 느끼는 것이다.
물론 마그네트를 놀라게 만든 사람은 바퀴벌레 행성의 왕자인 샤바였다. 그와 함께인 두 명은 당연히 퀴니와 호랭이였다.
두려움에 떨던 마그네트는 문득 제정신을 차렸다. 드래곤이 한낱 인간에게 겁을 집어먹다니.
‘이런 추태가 있나. 내 당장 저놈을 없애버릴 테다.’
마그네트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두려웠던 만큼 분노가 일었다.
번쩍 추켜든 손에서 뇌전이 일렁였다. 손가락을 슬쩍 휘두르는 것만으로도 가공할 벼락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질 것이다.
하지만 그녀는 끝내 그러지 못했다.
맘 같아서는 저 꼴같잖게 반짝반짝거리고, 조금은 귀여운 것 같고, 아주 미세하게 잘생긴 것 같기도 한 녀석을 단숨에 날려 버리고 싶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럴 수 없었다.
소년을 본 순간 마그네트의 드래곤하트가 울컥 요동쳤기 때문이다.
숨이 가빠오고, 가슴이 진탕되었다. 몽롱하던 머리가 예리한 칼로 베인 듯 아파왔다.
그것은 드래곤인 그녀에게는 너무도 생소한 감정의 충격이었다.
‘서, 설마 내가, 고작 저런 애송이 녀석에게?’
마그네트는 생소한 감정의 변동에 어쩔 줄 몰라했다.
그렇다.
사랑.
마그네트는 샤바를 사랑한 것이다.
비록 그것이 기억을 잃은 순간의 단편적인 것이라 해도, 기억을 되찾은 지금도 그녀의 마음은 샤바에 대한 애틋한 감정을 아직 간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라? 뭘 잘못 먹었나. 샤바? 손을 들면서 뭘 할 것 같더니 몸만 배배 꼬고 있네. 피뢰침 놀이라도 하는 걸까? 샤바. 확실히 머리가 잘못된 것 같아. 샤바샤바.”
마그네트의 정신상태가 갈수록 심각해지는 것 같자 샤바는 짱돌을 들어 올리며 포지션을 취했다. 두 손으로 짱돌을 살포시 쥐고 한쪽 다리를 슬며시 들어올렸다. 쫓아가서 패는 게 귀찮은지 아예 원거리 공격을 시도할 참이다.
그때, 퀴니가 그의 어깨를 잦ㅂ으며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내버려둬. 어차피 당분간은 볼일이 없을 테니까.”
“우움. 괜찮을려나. 샤바.”
샤바는 불만스레 입술을 내밀었지만, 퀴니가 눈을 찡그리자마자 불에라도 덴 듯이 짱돌을 얼른 버렸다. 드래곤인 마그네트에게는 한없이 강한 샤바였지만 퀴니에게는 또 한없이 약했다.
주인인 병규가 퀴니에게 꼼짝도 못하기 때문이다.
샤바가 나름대로 심혈을 기울여 작성한 샤바네 집 먹이피라미드에 따르면, 호랭이는 샤바와 같고, 주인은 자신보다 위며, 퀴니는 주인보다도 위였다.
결국 병규네 식구 중 최강자는 퀴니인 것이다.
물론 순진한 샤바는 이 먹이 피라미드에 퀴니의 배경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 병규는 퀴니가 무서워서가 아니라 그녀의 배경에 있는 가스펠과 특재대의 선배들을 두려워한 것이다. 하지만 이런 세세한 상황을 전혀 모르는 샤바는 퀴니가 가장 강하기 때문에 병규가 그녀의 말에 쩔쩔매는 것이라고 순진하게 믿고 있는 것이다.
“폐, 폐하.”
“이곳에 계셨군요.”
마그네트를 따라온 사람들이 뒤늦게 샤바를 발견하고 경악성을 날렸다. 급한 볼일이 있다며 사라진 제국의 황제가 설마 뒤뜰에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자, 자네. 정신을 차렸는가?”
필라이트가 샤바, 퀴니와 함께 있는 호랭이를 보고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각국의 정상이 자리하는 회의에 불참하면서까지 퀴니와 샤바가 간 곳은 바로 호랭이가 갇혀 있는 후원이었다.
병규가 실종되었다는 소리를 듣자마자 퀴니는 곧바로 호랭이를 떠올렸다.
병규의 실종에 유일한단서를 줄 수 있는 것이 바로 호랭이라고 생각한 것이다.
신관과 마법사들의 온갖 축복에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던 호랭이. 그는 퀴니가 자명종을 올리자마자 화들짝 깨어나는 신기한 기행을 보였다.
그를 감시하고 있던 마법사들은 이 해괴한 장면에 허거덕 놀랐다. 급하게 필라이트에게 보고하려 했지만 샤바가 빠른 움직임으로 그들을 모조리 기절시켜 버렸다. 사람들이 몰려오면 귀찮아지기 때문에 미리 손을 쓴 것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말해 줘.”
퀴니는 진지한 표정으로 호랭이에게 물었다.
호랭이는 기절하기 전까지의 모든 일을 설명했다.
마족들이 왕성을 급습하고, 레종 여왕이 납치되었다. 호랭이는 최선을 다해 저지하려고 했지만, 쉐이드가 여왕을 볼모로 협박하는 바람에 그만 당하고 말았다.
그 이후로는 기절한 상태라 기억이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 정도만으로도 퀴니는 이후의 일을 충분히 유추할 수 있었다.
“마계로 가야겠어.”
“왜, 샤바?”
“변기는 그곳에 있어.”
“주인님이 왜 거길 간 거야, 샤바?”
샤바의 물음에 퀴니의 표정이 뚱해졌다. 레종 때문이라는 말을 하고 싶지 않아서였다.
“몰라. 하지만 마족이 왜 레종을 납치했는지는 알겠어.”
“왜지?”
호랭이가 심각한 표정으로 물었다.
“마왕 데이크란. 바로 그녀가 변기를 원하고 있기 때문이야.”
퀴니의 말에 호랭이는 상체를 벌떡 일으켰다.
“어째서 마왕이 변기를 노린다는 것인가?”
“그건...... 나중에 설명해 줄게.”
대답을 망설이던 퀴니는 고개를 좌우로 저었다.
변기와 마왕 데이크란의 관계를 말하자면 어쩔 수 없이 과거의 이야기까지 시시콜콜 털어놔야 하기 때문이다.
“지금은 변기가 있는 곳으로 가는 것이 더 급해. 이럴 게 아니라 빨리 가자.”
퀴니와 샤바는 곧장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지체할 시간이 없었다. 마족의 사악한 계략에 마린 병규가 어떤 위험에 처했을지 모르기 때문이다.
“잠깐 기다려.”
호랭이가 돌연 둔갑술을 사용했다. 거대한 백호는 사라지고, 백발의 매력적인 남자가 나타났다.
“나도 함께한다.”
“좋아.”
“물론이다. 샤바.”
퀴니와 샤바는 당연하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들은 언제나 함께였다.
이제 부족한 한 명을 찾기 위해 먼 여행을 떠나야 할 때다.
마계의 무녀인 퀴니는 마계로 통하는 마법진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호랭이가 갇혀 있던 방은 너무 작고 통풍도 좋지 못했다. 마계의 문을 열기 위해선 넓고 확 트인 공간이 필요했다.
그래서 퀴니는 일행을 이끌고 후원으로 온 것이다.
“시간이 없어. 그만 가자.”
퀴니가 재촉했다.
그녀는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한시라도 빨리 그가 있는 곳으로 가고 싶었다.
마법진은 어느새 완성되어 있었다.
“아라스톨 임페르. 차원에 얽힌 구구한 시간의 발검음이여.”
그녀가 고아한 목소리로 주문을 영창하자 복잡하게 그려진 마법진에서 서서히 빛이 피어올랐다.
“다, 다차원 마법진?”
퀴니가 그린 마법진을 본 필라이트는 혼이 빠진듯 정신없이 소리를 질렀다.
마법진의 복잡도는 상상을 초월했다.
드래곤인 마그네트마저 마법진이 끌어들인 막대한 마나에 놀랄지경이다.
마법진에 관한한 퀴니는 중간계와 마계를 통틀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것은 텔레포트 마법진 따위가 아니다. 대, 대체 어디로 가기에 이렇듯 복잡한 마법진이 필요하단 말인가?”
마법진의 운용을 본 필라이트는 그것이 놀랍도록 정밀하게 짜여진 공간이동 마법임을 알고 기성을 토했다.
“폐하. 대체 어디로 가시는 것입니까?”
신성제국의 대신관이 끓는 음성으로 샤바에게 물었다. 그동안 이나이 지긋한 대신관은 엉뚱한 황제를 맞아 갖은 고초를 다 겪었다. 도무지 신임 황제는 품위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하지만 신임 황제는 역사상 그 어떤 황제보다도 인간적이었다. 황제를 바라보는 대신관의 눈엔 걱정이 가득했다.
“주인님을 찾아가는 거야. 샤바.”
“주, 주인님이라고요?”
대신관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호들갑을 떨었다.
신성제국의 황제나 되는 사람이 ‘주인님’ 운운하고 있으니, 위엄에 손상이 가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정작 샤바는 그런 것을 전혀 개의치 않았다.
위엄이니 준엄이니 하는 것은 환계의 왕자인 그에게는 전혀 쓸데없는 겉치레에 불과했다.
샤바와 대신고나이 설왕설래하는 동안 마법진의 빛은 한층 더 강해졌다. 이제는 똑바로 바라보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그렇게 마법진에서 새어 나오는 빛이 정점에 이르렀을 때, 퀴니는 두 팔을 펼치며 낭랑한 음성으로 외쳤다.
“암흑신의 이름으로 명한다. 열려라. 문이여!”
쯔아아악!
허공이 세로로 쩍 갈라졌다. 괴물의 눈동자처럼 열린 마계의 문은 음침하면서도 괴기로운 분위기를 한껏 풍기고 있었다.
“가자.”
퀴니가 먼저 걸어 들어갔다. 샤바가 그 뒤를 따르자 제국의 대신관이 허겁지겁 달려들었다.
“아, 아니 되옵니다. 전하, 제국은 어쩌라고. 당신이 가시면 수많은 백성들은 누가 다스린단 말입니까?”
그는 피를 토할 듯 고함을 질렀다. 샤바는 대신관을 향해 방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네가 해. 샤바.”
“네?”
대신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내가 올 때까지 대신관이 통치하고 있으라고. 샤바. 대신관이라면 분명 잘 해낼 거야. 샤바샤바.”
“무, 무슨.”
대신관이 당황하여 어쩔 줄 몰라하는 사이 샤바는 손을 팔랑팔랑 흔들며 마계의 문으로 쏙 들어가 버렸다. 무책임하면서도 돌연한 행동에 대신관을 비롯한 모두의 얼굴이 멍해져 버렸다.
설마 제국의 황제 자리를 저렇듯 헌신짝 버리듯 하는 사람이 있을 줄이야. 신화 속에서나 등장할 일대 사건이 아닐 수 없었다.
퀴니와 샤바가 마법진 안으로 사라졌다. 그리고 마침내 호랭이 차례가 되었다.
탐스럽고 긴 백발을 출렁이고 서 있던 호랭이는 필라이트에게 마지막 인사를 던졌다.
“다녀오겠네.”
“대체...... 어딜 가겠다는 말인가?”
“녀석을 데려와야 하지 않겠나.”
“...... 그렇군.”
필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들이 끈끈한 정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그를 데려오기 위해서라면 지옥이라도 갈 사람들이다.
“잘 다녀오게.”
손을 흔들며 게이트로 들어서던 호랭이는 문득 생각난 듯, 다시 필라이트에게 말을 건넸다.
“잊을 뻔했군. 날 감시하던 마법사들은 잠시 재워 두었네. 자네가 나 대신 미안하다는 말을 전해 주게.”
“허허. 물론일세. 무사히 다녀오기나 하게.”
호랭이는 대답 대신 씩 웃어 보였다.
그리고 그의 모습은 이내 마계의 문 안으로 사라지고 말았다.
츠즈즈즈즈.
눈꺼풀이 닫히듯이, 사요한 어둠과 함께 마계의 문이 닫혔다.
멀건 눈으로 지켜보던 사람들은 말을 잃은 채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어쩌면 중간계의 운명은 키메라가 아니라, 저들의 손에 달렸는지도 모르겠구나.”
한숨과 함께 낮게 읊조리는 필라이트의 음성만이 공터를 휘돌 뿐이었다.
그날을 기점으로 아이린 왕국엔 새로운 건축물이 들어섰다.
키메라의 별.
바로 이곳에서 마그네트를 정점으로 하는 마법사들에 의해 인간의 신체를 강화할 갖가지 실험이 행해졌다.
처음 인체강화 실험에 대한 발표가 있었을 때, 많은 마법사들이 반대했다. 인체실험이 어떤 부작용을 야기할지 알 수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하지만 이러한 반대는 드래곤인 마그네트가 키메라와 관련된 마법들을 공개함으로써 간단히 해소되었다.
인륜보다 마법에 대한 집착이 더 강한 존재가 바로 마법사들이기 때문이다.
마그네트가 공개한 새로운 마법들은 마법사들을 흥분시켰다. 그들은 모든 것을 잊고 키메라 연구에 몰두했다.
마법사들이 키메라 연구에 열의를 보일 즈음, 각국의 왕들은 키메라 연구에 자원할 신청자들을 모았다.
예상과 달리 많은 지원자들이 몰려들었다.
그들 대부분이 타락한 바호크와 마족들에게 가족과 형제를 잃은 이들이었다. 복수심에 불타 키메라의 신전을 찾아온 것이다.
특히 전쟁으로 남편을 잃은 젊은 과부들이 많았다는 사실에 마법사들은 통한의 눈물을 흘렸다.
얼마 후 키메라 초기작들이 나왔다.
모두 스무 명가량의 초기작들은 마일드의 사신들과 비등한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전장에 투입된 초기작들은 뛰어난 전투성과로 세인들의 갈채를 받았다. 하지만 곧 한계에 부딪혔다.
사신들의 능력 정도로는 결코 마족들을 상대할 수 없었던 것이다.
현재 중간계에 모습을 드러낸 마족들은 마계에서 지위를 상실한 마족들과 마왕을 잃은 마수들이 대다수였다.
한때 권력의 정점에 서 있던 마족들은 새로운 마황의 등극으로 마계의 밑바닥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이들은 마왕 데이크란의 압력에 밀려 마계의 외지로 유배된 신세였지만, 그 능력만큼은 막강했다. 단지 이끌어 줄 마왕이 없는 것일 뿐.
오랜 세월 분노를 삼키며 때를 기다렸기에 이들의 행동은 거칠면서도 계획적이었다.
마족들은 결코 서두르지 않았다.
중간계에서 마족의 힘이 제한된다는 것은 누구나 알고 있는 사실. 때문에 이들은 타락한 땅인 바호크의 구석에서부터 천천히 마력장을 구축하기 시작했다.
마력장은 일종의 인위적인 공간으로서, 일정영역을 마계와 비슷한 환경으로 변화시키는 고위마법이다. 이곳에선 마력의 밀도가 마나보다 높기 때문에 마족들도 아쉬운 대로 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그렇게 조금씩 넓어지던 마족의 영토가 어느새 바호크를 거의 다 덮을 지경이 되었다.
중간계의 제국 하나가 마족의 땅으로 변한 것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드래곤인 마그네트조차 마족을 함부로 상대할 수없는 지경이 되었다.
기대를 걸 수 있는 것은 오직 키메라뿐.
초기작의 성능은 뛰어났지만 마족을 누르기엔 역부족. 어쩔 수 없이 개량이 시작됐다.
신체를 강화할수록 후유증 역시 기하급수적으로 심해졌다.
기억상실과 무기력증, 성격이 흉포해지거나 인격 다중의 정신적인 문제가 발생했다. 더군다나 신체의 이상은 더욱 심각했다.
기형적인 모습이 되거나, 뼈가 모두 녹아 흐물흐물해지는 심각한 증상도 보고되었다.
이젠 생명윤리를 내세울 여유마저 잃어버렸다. 마계의 침공은 중간계 전체의 존명을 위협하고 있었다.
급기야 키메라 실험은 생명 융합이라는 금단의 영역에까지 이르게 되었다.
오우거의 몸에 사람의 머리가 달리고, 트롤의 팔다리를 접붙인 괴물들이 탄생하게 되었다. 이런 괴물들은 모습은 추악했지만 전투력만은 막강했다. 변종 키메라 한 마리가 하위마족 여러 마리를 상대할 수 있을 정도였다. 하지만 강해진 만큼 부작용도 만만치 않았다.
가장 심한 것은 정신적인 문제였다.
인간과 달리 몬스터들은 지극히 호전적이다. 폭력적이고 즉흥적이며 욕망에 순응한다.
키메라들은 항상 피에 대한 욕망에 시달렸다. 피에 대한 갈망은 인간이 외로움을 견디기 힘든 것처럼 몬스터에게 치명적인 마약과도 같았다.
결국 전장에 투입된 키메라들 중 일부가 폭주하기 시작했다. 적아를 가리지 않고 닥치는 대로 공격하고 파괴했다. 그렇게 미쳐 버린 키메라는 더 이상 인간의 이성이 남아 있지 않았다.
시간이 지날수록 폭주하는 키메라들이 늘어만 갔다.
전투력만을 위해 금단의 기술에 손을 댄 대가였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몇몇 성공적인 키메라들이 완성되었다.
그들은 중급 마족들과도 대등하게 싸울 수 있는 놀라운 힘과 냉철한 이성으로 전장을 주도했다.
모두 열 명.
그들 특수한 키메라들은 하나같이 마그네트가 직접 제조에 참여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학살자’라는 별명으로 불리며 전장에서 마족만을 전문적으로 상대했다.
학살자.
마족 사냥꾼.
그렇게 학살자라고 불리는 키메라 중엔 발칸이라는 이름을 수여받은 디스 역시 포함되어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