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망의 군주
“왕이시여.”
이루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몬스터들이 고개를 조아렸다. 병규가 서 있는 구릉은 물론이요, 그 너머의 평원까지 몬스터들로 가득 차 있었다.
그 많은 수가 틈을 찾을 수 없을 만큼 촘촘히 모여 있었다. 아득한 상공에서 내려다보면 여왕개미를 둘러싼 개미떼를 보는 것 같으리라.
병규는 말없이 몬스터들을 내려다보았다.
온갖 추악한 괴물들이 숨을 헐떡인 채 고개를 조아리고 있는 이 불균형한 현실.
보통 사람이라면 심장마비로 쓰러졌을 이 놀라운 순간에도 그는 담담한 신색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모든 것이 당연한 것처럼.
콰르르르릉!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뇌전이 그의 등 뒤를 어둡게 밝혔다.
“일어나라.”
묵직한 음성으로 병규가 말했다.
몬스터들은 일어나지 않았다.
고개를 들면 마치 그의 위엄에 해가 된다고 생각하는 듯, 처음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땅에 박은 채 미동도 않았다.
단지 세 마리의 몬스터만이 몸을 일으키며 그 앞에 당당했다.
가장 강한 기운을 풍기던 세 마리였다.
그들의 기세는 결코 병규의 아래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능가하는 면이 많았다.
적어도 암흑을 완전히 개방하지 않은 병규보다는 훨씬 강한 존재들이었다.
셋 중 중앙에 선 자가 앞으로 나서며, 공손하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은 태도로 그에게 말했다.
“오랜만입니다, 아버지.”
“너희들은 누구냐?”
무심한 얼굴로 그들을 보고 있던 병규가 툭 하니 말을 꺼냈다.
세 몬스터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기억을 잃어버리셨다더니, 사실이군요.”
키가 훤칠하게 큰 몬스터가 그에게 말했다.
그는 마치 전갈과 인간의 형상이 합쳐진 듯한 모습이었는데, 길게 늘어뜨린 굵고 튼튼한 꼬리는 독을 품은 전갈의 그것처럼 흉측하고 위험해 보였다.
“.......”
병규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먼저 질문을 던진 것은 그였다.
“전 베르키스라고 합니다.”
전갈의 몸을 가진 자가 무릎을 굻으며 입을 열었다.
공손하면서도 품격이 흐르는 자태였다.
이어 다른 두 몬스터도 병규 앞에 무릎을 꿇었다.
“알칸테입니다. 아버지.”
알칸테는 사람과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었다. 다만 그의 발만은 특이하게 외인의 시선을 끌었다.
놀랍게도 그의 발은 사람의 손과 같은 모습을 하고 있었다. 그 덕분에 알칸테는 발을 손처럼 자유롭게 쓸 수 있었다.
“아콘입니다.”
마지막으로 고개를 숙인 자는 세 몬스터 중 유일한 여성체였다.
그녀는 머리에서 발끝까지 피부가 투명할 정도로 하얘서 수많은 몬스터들 중에서도 가장 눈에 띄는 존재였다. 실제로 그녀는 안개와 같은 은은한 광채를 풍기고 있었다.
베르키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은 순수한 당신의 피로 만들어진 자식들입니다.”
병규의 얼굴 위로 감정의 파문이 떠올랐다.
복잡했다.
쉐이드를 쫓아 마계로 왔더니 생전 처음 본 몬스터들이 자신을 왕으로 받든다. 그리고 막대한 기운을 풍기는 세 마물이 자신들이 당신의 자식이라고 주장하는 것이다.
병규의 내심을 눈치 챈 베르키스는 재빨리 해명했다.
“물론 저희들은 당신의 씨앗에서 만들어진 것은 아닙니다. 아득한 과거, 당신이 절망이라는 이름으로 마계에 군림할 때, 그 위대한 권능으로 창조된 자식인 것입니다.”
이어 베르키스는 자신과 같은 존재들을 혈계라 부르며, 친족을 일컫는 혈족과는 다른 뜻임을 알렸다.
혈계.
쉽게 말해 마왕의 피의 계약을 통해 다른 마족에게 힘과 권능을 부여하는 것을 말한다. 마왕의 인증을 받은 존재는 마왕의 힘을 공유하며, 전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인한 존재로 거듭난다.
즉, 자신의 힘으로 한 차원 더 높은 존재로 각성시키는 것, 그렇게 만들어진 마왕의 종속자를 혈계라고 부른다.
반면, 혈족들은 혈통관계에 있는 피붙이, 즉 자손들인 것이다.
혈족은 마왕과 독립된 존재이지만, 혈계들은 마왕의 종속자로 마왕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는다.
따라서 마왕의 힘이 강하면 혈계들의 힘도 강해지고, 반면 마왕이 병들고 늙으면 혈계들도 약해진다. 심지어 마왕이 죽게 되면 그 정신적 충격으로 백치가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혈계가 어떤 말인지 대충 이해할 수 있었다.
그는 고개를 들어 마계의 풍경을 살폈다.
낯익었다.
삭막하고 황량한, 어둠과 비명으로 가득 찬, 저주 받은 대지는 굉장히 눈에 익었다.
분명 처음 밟는 땅인데도 말이다.
크드드드드드.
가슴 깊은 곳에 침잠되어 있던 암흑이 꿈틀대며 용틀임을 터트린다.
환호하고 있는 것이다.
고향의 향기와 풍경에 기꺼워하고 있는 것이다.
병규는 날뛰려 하는 암흑의 힘을 진정시키며 조용히 물었다.
“어떻게 날 알아보는 거지?”
분명 지금의 모습은, 과거 절망이란 이름으로 마계에 머무를 때와는 전혀 다르다.
과거엔 어떤 모습이었을는지 몰라도 지금은 다만 인간의 모습일 뿐이다.
그런데도 이들은 단번에 자신을 알아보고 왕이라 부르며 경배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기운은 변함이 없으니까요.”
베르키스는 소리 없이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그때였다.
조용히 고개를 숙이고 있던 아콘이 고개를 들었다. 그녀는 천둥이 치고 있는 서쪽의 평야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불순한 기운이 느껴졌다.
“불청객이 온 것 같군요.”
베르키스가 먼 곳으로 시선을 옮기며 미간에 주름을 그렸다.
“더러운 마족 놈들. 벌써 냄새를 맡았군.”
알칸테가 음침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병규 역시 방금 전부터 미묘한 소음을 들었다.
그를 둥글게 감싸고 있는 몬스터 무리의 바깥쪽. 작은 소음이 들려오고 있었다.
귀를 기울이자 좀 더 확연해졌다.
격한 숨소리. 처절한 비명.
대단한 능력을 지닌 무언가가 이곳으로 돌격해 오고 있었다. 병규를 경배하고 있던 몬스터들은 당연하다는 듯이 그 앞을 막았다.
애초에 상대가 되지 않는 듯, 들려오는 비명은 온통 몬스터들의 것이었다.
스윽.
알칸테가 일어섰다.
그는 병규에게 고개를 한 번 숙이더니 소란이 이는 곳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츠츠츠츠츠츠츠!
그가 걸음을 옮김에 따라 여태 응축해 두었던 능력이 폭풍처럼 일어났다. 피부가 따끔따끔거릴 정도로 막강한 힘이었다.
병규는 새삼스런 눈으로 알칸테를 바라보았다.
한눈에 대단한 존재라는 것은 느꼈지만 이렇게 엄청나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의 힘에 비하면 중간계의 드래곤인 마그네트는 어린아이라고 생각될 지경이었다.
그때, 베르키스가 조심스런 음성으로 병규에게 말했다.
“여긴 너무 번잡한 것 같습니다. 자리를 옮기도록 하죠, 아버지.”
소란을 정리하러 떠난 알칸테는 잠시 후 돌아왔다.
한바탕 격전을 치렀을 것이 분명한데도, 그의 몸 어디에도 그런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미끈한 비늘 위로 단 한 방울의 피도 묻지 않았다.
겉모습만 본다면, 정말 마족들과 피 튀기는 혈전을 벌였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하지만 알칸테는 그 잠깐 사이에 중급 마족 십여명을 잔인하게 해치웠다.
그럼에도 이처럼 멀쩡한 이유는, 그만큼 알칸테의 능력이 마족들에 비해 월등히 뛰어났기 때문이다.
마왕의 피를 이은 직계의 능력은 일반 마족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월등했다.
사실, 마족들을 정리하게 위해 굳이 마물의 왕인 알칸테가 나설 필요도 없었다.
단지 12조장 중 한 명만 나서도 충분할 일이었다.
그럼에도 굳이 알칸테가 직접 나섰다. 위대한 왕의 재림이라는 성스러운 날에 일어난 소란을 조금이라도 빨리 잠재우기 위해서였다.
“마차를 준비하라.”
베르키스가 근엄한 음성으로 외치자 곧 어마어마한 크기의 마차가 나타났다.
마차의 크기가 얼마나 컸던지, 말 대신 마차를 끄는 미노타우르스 12마리가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오르시지요, 아버지.”
한 팔을 허리에 두르며 베르키스가 우아하게 말했다.
병규를 태운 마차는 느릿느릿 이동했다.
마족들이 무서워서 도망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굳이 자리를 옮기는 것은 불청객들의 방해가 귀찮아서이지, 결코 그들이 무서워서가 아니다. 마왕이 강림한 이상 두려울 것이 없는 마물들이다.
마차는 느긋하게 먹구름이 드리워진 서쪽으로 흘러갔다.
가는 도중 병규는 간단하게나마 이들에 대한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마계에서 몬스터들은 마물이라 불린다.
마물은 마계의 짐승인 맛들과는 구별되는 존재들. 오래된 창세의 신화를 보면, 마물들은순수하고 추악한 어둠에서 태어난 자식들이라고 되어 있다.
오크, 트롤, 오우거, 미노타우르스 등 인간계에 널리 알려진 몬슽와 마계에만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들이 이러한 마물에 속한다.
마물들에겐 나라라는 개념이 없다. 대신 부족이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각 종족별로 지도자가 존재하고, 서로의 영역을 확실히 구별한다.
마물의 부족은 모두 12개. 당연히 부족장들도 12명이다.
이들은 12족장이라고 불리며, 순수한 마물들 중에서는 가장 강한 힘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베르키스를 비롯한 삼인은 그런 마물들의 지도자로서, ‘마물의 왕’, 통칭 ‘마물왕’이라 불리는 존재들이다.
마물의 왕은 절망의 마왕이 자신의 피를 매개로 계약한 종속자들로, 다른 존재들과는 차별되는 궁극의 힘을 가지고 있다. 이들은 상위마족을 능가하는 힘과 마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능력으로 모든 마물의 지배자로서 군림한다.
그리고 마물의 왕에게 아버지로 숭배 받는 절망의 마왕.
마물들의 신화임과 동시에 피의 통치자. 그것이 바로 벨로로폰, 즉 모든 권력의 정점에 병규가 있는 것이다.
“기억을 잃어버리셨다니, 지금은 혼란스럽기만 하실 겁니다. 자세한 얘기는 궁에 도착한 후에 하겠습니다.”
베르키스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조급해하지는 않았다.
마물왕들이 주위를 지키는 시점부터 그는 더없는 편안함을 느꼈다. 마치 가족의 품으로 돌아온 듯한.
베르키스는 병규를 마물의 숲 으슥한 곳으로 인도했다.
밀림과 같은 숲을 지나자 작은 궁전이 보였다.
흙으로 만들어진 토궁이었다.
아이가 손장난을 한 것처럼 엉성하게 지어진 토궁은 초라한 겉과 다르게 지독한 마력을 품고 있었다.
웬만한 존재는 휘몰아치는 마력의 폭풍 때문에 가까이 접근할 수 조차 없었다. 무리하게 안으로 진입하다간 삽시간에 몸뚱이가 뭉개지고 말 것이다.
그래서 마족들도 감히 가까이 접근하지 못했다.
마물들은 멀찍이 토궁이 보이는 곳에서 더 이상 그를 따르지 못했다. 무릎을 꿇은 채 그의 모습이 보이지 않을 때까지 끊임없이 절을 했다.
그들에게 토궁은 성지다.
절대자가 탄생한 곳이기 때문이다.
토궁은 지상보다 지하가 훨씬 깊고 웅장했다.
광활하게 보일 정도로 넓은 공터였다.
지하임에도 어둡지 않았다.
“많은 것이 궁금하시리라 생각됩니다.”
베르키스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실제로 그랬다.
마계에 온 이후로 병규는 많은 일이 혼란스러웠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이들과 함께하는 것이 편하게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한시바삐 레종을 찾으러 가야 하는 상황임에도 마음을 느긋하게 유지할 수 있었다.
“어디서부터 설명해 드려야 할지 난감하군요. 하지만 얘기를 꺼내기 전에......”
베르키스의 시선이 병규의 다리 아래로 향했다.
크그그그그그.
병규를 보호하듯 그의 발치에 머물러 있던 노괴가 등허리를 솟구치며 으르렁거렸다.
병규가 아공간을 열고 마계로 왔을 때, 노괴 또한 충실히 그의 뒤를 따라왔다. 그리고 이곳 토성까지 따라온 것이다.
당연히 벨로로폰의 자식들은 노괴의 존재가 신경 쓰였다.
“그라면 괜찮다.”
병규는 손을 들어 노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노괴는 고양이처럼 가르릉 목울림 소리를 냈다.
“특이한 존재로군요.”
노괴를 잠시 응시하던 베르키스의 두 눈에 기광이 일었다.
“인간으로 보이는데 내부는 조금 다르군요. 생김새도 어쩐지 중간계의 인간들과 조금 다르고.......”
이드라센의 인간은 대체적으로 골격이 잘 발달되고, 신체의 비율이 시원시원한 편이다. 굳이 비교하자면 지구의 서양인과 비슷하지만, 그보다는 더 야성적인 느낌을 풍겼다.
하지만 노괴는 그런 이드라센의 인간들과는 확연히 다른 골격을 가지고 있었다. 어깨가 좁고, 손발이 작으며, 전체적으로 오밀조밀한 느낌을 주었다. 인상 자체도 이드라센의 인간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아버지의 새로운 육체의 골격과 상당히 유사한 것 같습니다.”
베르키스가 굳이 노괴의 몸뚱이에 주목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노괴와 병규의 골격에 유사한 점이 많았기 때문이다.
사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병규와 노괴는 시대만 다를 뿐 같은 세계의 사람이기 때문이다.
한편, 베르키스의 말을 조용히 듣고 있던 병규는 속으로 감탄을 흘렸다.
단순히 보는 것만으로도 노괴와 자신의 골격까지 살피다니.
이때 잠자코 있던 아콘이 노괴를 보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를 보니, 일전에 절망의 탑에서 쉐이드가 모종의 시험을 했다는 이야기가 문득 생각나네요.”
병규는 말을 계속하라는 뜻으로 그녀에게 시선을 던졌다.
“이계에서 어떤 존재를 강제로 소환하는 실험이었다고 하는데, 실험은 성공했지만 정작 소환된 것은 전혀 엉뚱한 존재였다고 합니다.”
아콘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기울이며 잠시 생각하더니, 노괴에게 물었다.
“너인가? 절망의 탑으로 소환된 것이?”
노괴는 이내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답했다.
“그렇습니다, 주인님.”
짐승처럼 행도하던 노괴가 돌연 사람의 말을 하자 베르키스들의 눈동자 위로 언뜻 이채가 떠올랐다.
병규가 다시 노괴에게 물었다.
“왜 그들이 널 소환한 거지?”
“데이크란이라는 마왕이 말하길, 사라진 마왕을 소환하려 했다는군요. 차원의 문을 강제로 열어 무작정 가장 강한 힘을 지닌 존재를 소환한 것이었습니다만, 시간대에 문제가 생겨 제가 소환된 것입니다.”
노괴는 병규가 살던 세상보다 훨씬 오래전, 과거의 인물이다. 당시 강호라 불리는 세계에서 노괴는 가장 강한 존재였다.
“사라진 마왕을 불러들이기 위해서라. 왜 그들이 그런 쓸모없는 일을 벌인 것일까. 이미 마계를 일통한 상황에서 다른 마왕의 존재는 오히려 불안한 요소일 텐데.”
병규가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리자 베르키스들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들은 타락의 군주인 데이크란이 왜 사라진 마왕을 소환하려 했는지 알고 있는 듯했으나 끝내 입을 열어 말하지는 않았다.
잠시 생각에 젖던 병규는 귀찮은 듯 고개를 털며 베르키스에게 말했다.
“좋아. 노괴에 대한 이야기는 대충 알게 된 것 같군. 이제 내 과거 이야기라는 것을 해주겠느냐?”
“아무래도 아주 먼 과거의 일부터 말씀드려야 할 것 같습니다.”
고개를 끄덕인 베르키스는 나직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저희들이 태어나기도 전의 일입니다. 아니, 마계에 1황 3왕이라는 절대자들이 탄생하기도 전의 이야기지요.”
그렇게 아주 오래된 비사가 흘러나왔다.
과거 마계엔 오직 두 가지 부류의 계급만이 존재했다.
하나는 지배자였고, 다른 하나는 노예였다.
지배자는 마족이었고, 마족을 제외한 다른 모든 존재들이 노예라는 비참한 굴레를 진 채, 마계의 바닥을 기었다.
그중에서도 마물들의 위치는 가장 처참했다.
마수와 타락한 자들은 독특한 능력과 생김새로 나름대로의 쓰임을 인정받았지만, 추악한 모습과 흉포한 습성을 가진 마물들은 가축,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취급을 받았다.
힘이 없었기 때문이다.
마계에서 힘은 곧 권력을 의미했고, 무능력은 죽음과 굴욕을 뜻했다.
마족은 태어날 때부터 강력한 마력과 뛰어난 지성을 지니고 있다. 그에 반해 마물은 비대한 육체와 쓸데없이 무지막지한 식용, 그리고 주체하지 못할 번식력만을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애초에 상대가 될 수 없었다.
수로 밀어붙이기엔 마족들의 마력이 너무도 강력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셀 수 없을 만큼 오랜 시간 동안 마물들은 고통과 좌절 속을 허우적거렸다.
그러나 절망의 바닥을 허우적거리는 마물들에게도 한 가닥 희망은 있었다.
전설이 있었다.
어느 날 마계에 마물들을 이끌고 해방시킬 절대자가 등장할 것이라는.
언제, 어디서부터 시작된 것인지 모를 신비한 전설을 믿으며 그렇게 마물들은 마계의 밑바닥을 기어 다녔다.
“그런 저희들을 해방시켜 준 것이 바로 벨로로폰, 아버지 당신입니다.”
마물의 신으로 추앙받는 벨로로폰은 마물 출신이 아니었다.
마족.
그것도 가장 순수한 혈통이었다.
벨로로폰은 마왕의 적통으로 태어났다. 하지만 그는 행복하지 않았다. 유감스럽게도 그와 같은 순위의 후계자들이 수없이 많았기 때문이다.
마족들의 수명은 상상을 초월할 만큼 길다.
그중 절대자인 마왕은 1만 년을 넘는다.
자연 후계들도 많을 수밖에 없었다.
벨로로폰에게 생은 그야말로 치열한 투쟁, 그 자체였다.
그는 마왕이 되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주위의 형제들이 그를 내버려두지 않았다.
불운학도 태어난 이후로 매 순간 죽음을 직면해야 했다. 사는 것 자체가 지옥인 시간들이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보호하지 않았다.
강자만이 살아남는다는 마계의 율법은 아직 어린 그에게는 너무도 냉정한 것이었다.
‘벗어날 수 없다면 무너트리리라.’
그는 성을 나왔다.
스스로 후계자의 자리를 박차고 아버지인 마왕에게 반란을 일으켰다.
그는 마물들을 해방시키고, 스스로 그들의 왕으로 군림하며 절대의 능력을 발휘했다.
처음 마물들은 그를 신임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권능을 보게 된 순간, 일제히 고개를 조아리고 목숨을 바쳐 그를 따르게 되었다.
오랜 세월 기다려 온 마물의 왕이 마침내 강림한 것이다.
권능을 각성하고 마물들을 이끌게 된 벨로로폰은 가히 폭주하는 활화산과 같았다.
가슴 깊이 숨어 있던 분노와 절대의 권능이 미칠 듯이 날뛰었다.
먹구름 가득한 마계가 벨로로폰의 검은 마력으로 부글부글 끓었다.
전장에서의 그는 피의 제왕이었다.
앞을 가로막는 것이면 그 무엇이든 피와 죽음으로 응징했다.
아버지의 신하들을 갈기갈기 찢어죽이고, 형제들의 목을 성루에 걸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의 아버지를 무찌르고 다른 마왕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존재가 되었다.
마침내 마물은 해방되고, 끝없는 향락을 즐기던 마족들은 나락으로 떨어졌다.
마계가 열린 이래 처음으로 마물들은 자유를 만끽할 수 있었다.
그러나 평화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중간계를 도모하던 마황이 돌연 사라졌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절망의 탑에 군림하시던 당신마저 사라지셨지요.”
벨로로폰이 마계의 새로운 강자로 떠오르던 당시, 마계의 다른 지역에서도 그와 비슷한 존재들이 부상하고 있었다.
마황 암천의 군주.
타락의 군주, 마왕 데이크란.
상실의 군주, 마왕 아크데몬
이들은 이전의 마왕들과는 비교도 안 되는 강력한 마력과 통치력으로 마계를 삼등분한 채 미묘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마황이 사라졌다.
마계는 혼란에 빠졌다. 글고 그런 혼란상태가 채 수습되기도 전, 마왕 벨로로폰마저 실종되고 말았다.
“음.”
병규는 짧게 침음성을 흘렸다.
이미 그는 드래곤인 마그네트에게서 마황과 관련된 일을 들었다. 중간계를 도모하다 드래곤들의 총력전에 밀려 차원의 경계를 영원히 떠돌게 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그 이후에 벨로로폰마저 사라졌다는 것이다.
‘왜? 무엇 때문에?’
기억을 더듬어 보지만 떠오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마황과 벨로로폰이 사라진 여파는 결코 작지 않았다.
마왕은 단순히 상징적인 존재만은 아니다.
힘을 숭상하는 마계에서 실질적으로 가장 강한 존재를 뜻한다.
당시 마계는 마물들의 지배자인 베로로폰과 타락한 자들의 왕인 데이크란, 그리고 마수들의 왕인 아크데몬의 세 세력이 팽팽한 균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황이 사라졌을 때만 해도 이러한 균형은 여전히 유지되었다. 세 마왕의 힘이 비등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긴장감 넘치는 균형이 벨로로폰의 실종으로 인해 순식간에 깨어져 버렸다.
마물들은 힘의 근원을 잃어버리고 다시 나락을 떨어졌다.
벨로로폰이 사라지자마자 타락의 군주와 상실의 군주가 마계의 주인 자리를 놓고 자웅을 겨루었다.
타락의 군주를 섬기는 타락한 종족들과 상실의 군주를 섬기는 마수들이 일대 격전을 벌였다.
피로 일그러진 그 위대한 전쟁에 마물들은 어디에도 낄 수 없었다. 그들은 습한 음지로 숨어들어 사라진 왕의 귀환을 가슴 졸이며 기다렸다.
하지만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도 벨로로폰은 돌아오지 않았다.
그사이, 타락의 군주와 상실의 군주 간의 끝날 것 같지 않았던 기나긴 전쟁도 종결을 맺었다.
치열한 전쟁의 끝은 허무했다.
마황이 사라지고, 절망의 군주가 사라졌듯, 상실의 군주마저 어느 날 갑자기 사라져 버린 것이다.
자연 마계는 타락의 군주 데이크란의 지배에 놓이게 되었고, 다크 엘프와 같은 타락한 존재들이 득세하기 시작했다.
마물들에겐 다시 암흑의 시기가 도래한 것이다.
“하지만 이젠 상관없습니다.”
긴긴 이야기를 끝마치며 베르키스는 짙은 미소를 보였다.
“당신께서 돌아오셨으니까요.”
왕이 돌아왔다.
절망의 군주. 모든 추악한 자들의 왕.
마물들만의 전설이 마침내 돌아온 것이다.
“한 가지 묻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아버지.”
아콘이 고개를 조아리며 고운 음색으로 병규에게 물었다.
“왜 마계를 떠나셨습니까? 왜 저희들을 버리셨습니까?”
그녀의 음성엔 작은 원망이 서려 있었다.
“.......”
병규는 아무런 대답도 할 수 없었다.
사실 그 대답은 자신이 듣고 싶었다.
자신이 누구인지.
왜 흉측한 마물들에게 신으로 숭배 받고 있는지.
왜 낯선 땅이 이토록 편안하게 느껴지는지.
자연 그의 침묵은 길 수밖에 없었다.
자식이라 불리는 마물의 왕들은 묵묵히 그의 대답만을 기다렸다.
“내가 분명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두 가지뿐이다.”
병규는 탁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하나는, 내 머릿속엔 마계에 대한 그 어떤 기억도 남아 있지 않다는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난 이 세계의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
어두운 실내엔 한동안 침묵이 감돌았다.
무겁게 깔린 공기는 숨을 턱턱 막히게 만들었다.
베르키스들의 눈이 휘둥그레 떠져 있었다.
왕이 기억을 잃어버렸다는 사실도 놀랍지만, 다른 세계에서 왔다는 뒷말은 더욱 충격적이었다.
대체 사라진 기간 동안 아버지에게 무슨 일이 있었던 것일까.
병규는 그들의 놀라는 모습을 보며 담담히 자신의 이야기를 했다. 지구에서의 일에서부터 발칸이라는 존재에 의해 이드라센이라는 이계에 떨어진 일, 그리고 아이린 왕국의 내전에 대한 이야기로까지.
그는 차분한 어투로 간략하게 자신의 사연을 소개했다.
병규의 이야기를 듣는 내내, 베르키스들의 표정은 혼란 그 자체였다.
“하아. 아버지께서 이계의 인간 몸으로 환생했다니. 노랍군요.”
베르키스는 탄성을 지르며 이렇게 말했다.
“환생?”
병규의 물음에 베르키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엄밀히 말하면 전승이라고 할 수 있겠지요. 금단의 주법으로 다른 그릇에 영혼을 부은 것이니까요.”
“...... 전승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라.”
근엄한 병규의 말에 베르키스는 자세를 고치며 말을 이어 나갔다.
“전승이란, 육체가 회생 불능의 상태까지 무너졌을 때 사용하는 금단의 주법입니다. 한마디로 자신의 영혼을 다른 그릇에 대치하는 것이지요. 사실 금단의 주법이라 불릴 정도로 전승은 굉장히 위험한 주법입니다. 자칫 이동할 그릇의 영혼과 섞여 버릴 수도 있고, 영혼자체에 큰 손상을 입거나 영혼 그 자체가 완전히 파괴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
“아무래도 차원의 벽을 넘는 동안 아버지의 육체는 큰 손상을 입은 것 같습니다. 어쩌면 육체 자체가 소멸되었는지도 모르지요. 차원의 문을 열고 신이 설치한 결계를 넘는다는 것은 마왕의 권능으로도 벅찬 일이었을 테니까요.”
차원의 장벽을 거론하는 베리키스의 음성은 다소 격앙되어 있었다.
사실 실제로 병규의 설명을 기초로 얻어 낸 결론이긴 하지만, 벨로로폰이 차원의 장벽을 넘었다는 사실 자체가 믿기 힘든 베르키스였다. 너무도 어마어마한 사건이었기 때문이다.
오랜 마계의 역사상 여러 마왕들이 타계에 흥미를 보였다. 하지만 정작 신의 장벽을 넘었던 경우는 단 한 차례도 없었다.
그런데 돌아온 왕이 그 장벽을 넘어 타계로 갔다 다시 돌아온 것이다. 바로 눈앞의 아버지가 말이다.
사실 벨로로폰과 퀴니가 차원의 결계를 넘을 수 있었던 것에는 아무도 모르는 비밀이 숨어 있었다.
과거 중간계를 도모하려던 마황은 총력을 기울인 드래곤들의 공격에 의해 차원의 틈새에 갇히게 되었다.
지옥 같은 고통과 육체를 붕괴시키는 절대의 장벽 사이에 끼이게 된 마황이지만, 그는 드래곤들의 생각처럼 쉽사리 소멸되지 않았다. 그대로 없어지기엔, 너무도 강력한 힘을 품고 있는 그였다.
마황의 권능은 단절과 검은 번개였다.
이 중 단절은 공간 자체를 절단하는 희대의 힘을 지니고 있었다. 마황은 이 단절의 권능으로 차원의 장벽을 쪼개고 짤라 버렸다. 그렇게 붕괴된 차원의 벽은 신의 힘으로도 복구할 수 없었다. 공간 자체가 갈라져 버렸기 때문이다.
마황은 그 갈라진 틈사이로 사라졌다.
문제는 그 다음부터였다.
모종의 이유로 벨로로폰이 이 갈라진 틈새를 이용해 비교적 수월하게 차원의 벽을 넘어 이계로 간 것이다.
물론 그렇게 쉬운 일은 아니었다.
차원의 결계의 압력은 상상을 초월하여 반쯤 허물어진 상태에서도 벨로로폰의 육체를 산산조각 내 버렸으니 말이다.
베르키스는 이와 같은 사실을 단지 병규의 과거 이야기만으로 당장 유추해 내었다. 그것은 그가 벨로로폰의 피로 만들어져 두뇌가 비상하게 좋았기 때문이다.
물론 아무리 그라도 벨로로폰에 앞서 암천의 군주라 불리는 마황이 차원의 결계를 붕괴했다는 것만은 알지 못했다. 단지 벨로로폰 혼자만의 힘으로 차원을 넘은 것으로 판단하고 흥분하는 것이다.
착 가라앉은 눈으로 베르키스의 설명을 듣던 병규가 잔잔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전승이라. 믿기 힘든 이야기군.”
“가능합니다. 당신의 모든 권능을 쏟아 부어 금단의 주법을 발동시킨다면...... 전혀 불가능한 것만은 아닙니다. 물론 주법이 실패할 위험은 매우 큽니다만, 아버지는 결국 성공했습니다. 이렇게 저희 눈앞에 다시 나타나신 것이 바로 그 증거입니다. 하지만 전혀 피해가없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아마도 기억을 잃어버리신 것은 주법의 부작용 때문이겠지요.”
“흠.”
병규는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했다.
호랭이에게서 들었던 이야기와 베르키스가 유추한 내용을 비교하자 대략 모든 사건의 가닥이 잡혔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마계를 삼등분하고 있던 벨로로폰은 이계로 떠났다. 하지만 차원으 장벽은 결코 만만치 않아 육체에 문제가 생겼다. 그래서 하는 수 없이 금단의 주법을 사용하여 인간으로 환생하였다. 비록 주법은 완성되었지만 그 후유증으로 기억과 힘을 잃어버렸다.
의문투성이였던 과거를 냉정하게 정리한 병규는 새로운 의문에 빠졌다.
‘왜 벨로로폰은 마계를 버리고 이계로 갔을까?’
권력의 정점에 선 그가 육체까지 망쳐 가면서 굳이 이계로 갈 필요가 있었을까?
뭐가 부족해서. 무엇 때문에.
분명 과거의 자신이 했던 결정일 텐데도, 전혀 그 의도를 짐작할 수 없었다.
잠시 고민하던 그는 곧 잡생각을 떨쳐 내듯 고개를 흔들었다.
억지로 쥐어짠다고 잃어버린 기억이 돌아오는 것은 아니다. 게다가 지금은 잃어버린 과거를 되찾는 것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 있다.
납치된 레종을 한시라도 빨리 구해내야 하는 것이다.
그녀가 어떤 위험에 처했는지를 생각하자 차갑게 식은 가슴이 불꽃처럼 달아올랐다.
그는 타오르는 눈빛으로 베르키스에게 물었다.
“쉐이드라는 녀석을 만나려면 어디로 가면 되느냐?”
자욱하게 깔리는 그의 음성은 음산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쉐이드를 찾는다는 말에 베르키스들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놈은 절망의 탑에 있습니다. 하지만......”
알칸테가 컬컬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병규는 그의 음성에서 미묘한 기색을 느꼈다.
“하지만?”
“지금 당장 놈을 찾는 것은 좋은 생각이 아닌 것 같습니다. 아버지.”
“.......”
병규는 말없이 그를 내려다 보았다.
납치된 레종을 구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쉐이드를 잡아야 한다.
이미 병규는 그런 사실을 이들에게 충분히 설명했다.
지금 이 순간에도 레종이 어떤 고통과 수모를 당할지 모른다. 자연 병규는 마음이 급할 수박에 없었다. 그런데 이런 사정을 뻔히 알고 있을 알칸테가 반대의사를 보이는 것이다.
츠츠츠츠.
병규가 알칸테를 쏘아보자 삼엄한 기세가 주위 공기를 찢어발길듯 용솟음쳤다.
엄청난 압력이 알칸테를 내리눌렀다.
하지만 알칸테는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았다. 진중한 자세로 앉은 채, 당당하게 병규의 시선을 마주 대했다.
마왕의 혈계답게 범상치 않은 기세였다.
병규는 이들에 대한 평가를 새삼 다시 했다.
베르키스들이 강하다는 것은 짐작했던 일이다. 하지만 이들은 그의 생각보다 훨씬 더 강했다. 소름이 오싹 돋을 만큼.
그럼에도 여태 그들의 힘이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것은, 아버지의 위엄을 위해 애써 자신들의 기운을 감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쉐이드는 마왕 데이크란의 수좌입니다.”
병규를 응시하던 알칸테가 느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저희들이 아버지의 힘을 이어받았듯, 그 또한 마왕 데이크란에게 각성된 자로, 마왕 아래 가장 큰 힘을 지니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베르키스에 버금가는 실력자라는 소리다. 아니, 현 마계를 지배하고 있는 마왕의 직계니 오히려 베르키스들보다 더 강할 수도 있다.
병규는 잠시 마물의 왕들을 내려다보았다.
그들의 내부에 회오리치고 있는 막강한 기운이 느껴졌다. 자신의 앞이라 대부분의 힘을 내부 깊숙이 갈무리하고 있지만 그 기세만큼은 확실하게 느껴졌다.
‘강하군.’
숨기고 있는 능력을 모두 개방한다면 지금까지 만난 그 어떤 존재보다도 훨씬 강할 것이다. 어쩌면 지금의 병규보다도.
하물며 쉐이드는 이런 실력자들과 최소한 대등한 실력의 소유자.
아이린의 왕궁에서 보았던 마족들의 능력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을 뿐이다. 마계의 종족은 중간계에서 능력에 큰 제한을 받는다. 하지만 마계라면 얘기가 다르다.
병규에게 허무하게 당했던 디바울과 컨퓨전도 이곳에서는 드래곤마저 압도할 정도로 막강한 실력자이다.
반면 과거, 이곳의 마왕이었다는 병규의 능력은 중간계와 비교해 별반 차이가 없었다. 이것은 그가 마력을 전혀 제어하지 못함으로 인해 생기는 현상이었다.
중간계에 마나가 있다면, 마계엔 마력이 있다.
마법사들이 마나를 이용해 마법을 구사하듯, 마계의 존재들은 마력을 활용하여 궁극의 능력을 구사한다.
사실 마력은 마나의 또 다른 모습이다.
마나는 세상의 근원임과 동시에 세상 그 자체이기도 하다. 이것은 마나가 그만큼 변하기 쉬운 구조로 이루어졌다는 말과 같은 것이다.
그런 이유로 마나는 각각의 세계에 맞게 변화되었고, 오랜 시간이 흐른 지금에 와서는 크게 세 가지 형태로 변형되었다.
가장 순수한 형태라 할 수 있는 중간계와 정령계의 마나는 천지 생물창조의 혼돈한 기운 그 자체 그대로 유지하고 있으며, 신의 영향이 큰 신계는 중후하고 안정적인 성력의 형태로 변화했다. 반면 마계의 어두운 영향을 받은 마나는 마력이라는 불안정하고 충동적인 형태로 변질되었다.
이처럼 오묘한 마나의 변질은 각각의 시계에서 타계의 존재들의 힘을 제한하는 역할을 수행한다.
마나를 다루는 데 익숙한 드래곤들은 마력이 넘치는 마계에서 제대로 힘을 못 쓰고, 반대로 마력을 수족같이 다루는 마족들은 중간계에서 제 힘의 10분의 1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수도 없이 중간계를 넘보던 마계가 한 번도 뜻을 제대로 펼치지 못했던 것은, 바로 이러한 마나의 성질 때문이었다.
그런데 이러한 마나의 성질이 병규에겐 악재로 작용하고 있었다.
그는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물론 마력을 제어하는 방법 또한 잊었다. 마족이라면 숨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게 구사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한 것이다. 때문에 병규는 마왕의 힘을 절반쯤 각성한 상태에서도 제대로 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이런 사실을 전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지금까지 순수하게 육체의 힘에 의존했기에 마력의 존재에 대해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이다.
만약 그가 마력을 제어하는 방법을 깨달아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발휘하게 된다면 베르키스들은 절대로 그의 앞을 막지 않았을 것이다. 오히려 왕의 귀환을 반기며 누구보다도 더 광폭하고 열렬하게 마계 탈환을 부르짖었을 것이다.
그만큼 마물의 왕들은 벨로로폰을 고대하고 있었다.
“저 또한 지금 당장 쉐이드를 찾는 것에는 반대의 입장입니다.”
병규가 잠시 생각에 잠긴 사이, 아콘이 신비로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단순히 쉐이드 하나만을 제거하는 것이라면 아무런 문제도 없습니다. 설사 쉐이드가 실질적인 마계의 2인자라 해도 말입니다. 문제는 그의 배경입니다. 쉐이드는 타락의 그림자라고 불리고 있습니다. 극히 은밀한 임무수행을 제외하고는 항상 마왕 데이크란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습니다.”
“.......”
병규의 안광이 한층 깊게 침잠되었다.
상황은 한마디로 최악이다.
쉐이드를 잡기 위해선, 어쩌면 마왕 데이크란과의 일전도 피할수 없게 될지 모른다. 아니, 애초에 이 모든 것이 데이크란의 술수였을 가능성도 있다.
레종을 납치할 때 보였던 쉐이드의 행동들을 생각해 보면 이러한 가정은 더더욱 분명해진다. 마왕 데이크란은 문제의 싹이 될지도 모를 벨로로폰을 확실히 제거하고 싶었을 것이다.
“단도직입적으로 말씀드려서, 지금으로서는 무리입니다.”
베리키스는 단정적으로 말했다.
지금의 병규 능력으로는 무모한 도전에 불과하다. 자식된 입장으로 뻔히 죽을 줄 알면서도 아버지를 보낼 수는 없다.
“......?”
병규는 그의 말에서 묘한 억양을 느꼈다. 차분한 눈으로 그를 본 병규가 한기가 느껴지는 음성으로 물었다.
“지금이라....... 만일 내가 과거의 힘을 되찾게 된다면 어떻겠느냐?”
그의 물음에 베르키스는 선 굵은 미소를 보였다.
“설사 마왕 데이크란이 한 명이 아니라 열 명일지라도 아버지를 감당하지는 못할 것입니다.”
베르키스의 음성엔 확신, 그 이상의 것이 서려 있었다.
“...... 그럼 이제부터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침묵하던 병규가 조용히 물었다.
베르키스는 즉시 고개를 조아리며 차분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지금은 기다릴 때입니다.”
병규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그려졌다.
“언제까지?”
“아버지의 기억이 돌아올 때를. 그리고 사라진 마계의 무녀가 돌아올 때를 말입니다.”
“마계의 무녀?”
병규는 의자 깊숙이 상체를 파묻었다. 마계의 무녀는 또 누군가. 누구이기에 그녀를 기다려야 한다는 것인가.
“그녀는 누구이고, 또 무슨 힘을 지녔기에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것이지?”
“마계의 무녀는 마계의 신과 통하는 유일한 인물입니다. 한마디로 신의 말을 전하는 매개이지요. 그녀의 말을 어기는 것은, 곧 마신의 뜻을 어기는 것과 같습니다. 물론 마계의 모든존재가 마신을 받드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적어도 지위를 잃은 마족들과 왕을 잃은 마수들은 그녀의 말에 절대적으로 따를 것입니다. 이들을 규합한다면 마왕 데이크란이 이끄는 타락한 존재들을 손쉽게 꺾을 수 있을 것입니다.”
“흐음. 그렇다면 지금 마계엔 무녀가 없다는 말인가?”
“마왕 데이크란 곁에는 무녀라 불리는 인간 여자가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녀는 가짜입니다. 왜냐면 진짜 무녀는 얼마 전까지 아버지 곁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
병규는 베르키스의 말에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사라진 무녀가 내 곁에 있었다? 그럼 혹시......”
병규의 말에 베르키스는 크게 고개를 끄덕엿다.
“그분이라면 반드시 아버지 곁으로 돌아올 겁니다. 당신을 위해 차원의 결계까지 넘어갔던 분이니까요.”
베리키스의 야릇한 미소가 한결 짙어졌다.
병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다시금 생각에 잠겼다. 그는 이미 베리키스가 말하는 인물이 누구인지 깨달았다.
자신을 찾아 차원의 경계를 넘은 여자는 오직 한 명뿐이다.
퀴니.
‘설마 그녀가 무녀였을 줄이야.’
놀라지는 않았다.
퀴니가 평범한 인물이라곤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의 신분이 마계의 무녀인 줄은 꿈에도 몰랐다. 그 순수한 소녀가 이처럼 추악한 마계의 무녀였을 줄이야. 아니, 어쩌면 너무도 추악한 세상이기 때문에 그녀가 그토록 순수하게 존재할 수 있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그래서 마물들을 자유자재로 부릴 수 있었군.’
퀴니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다.
하지만 또 다른 의문이 남아 있었다.
베르키스의 말에서 굉장히 부자연스러운 내용을 들었던 것이다. 그는 두 눈을 빛내며 베르키스에게 입을 열었다.
“마왕 곁에 있다는 인간 무녀에 대해 자세히 말해 봐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