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78/102)

  고향에서의 초대

  마족은 쉽게 말해 마계의 귀족이다.

  귀족이라지만 중간계의 귀족과는 그 의미가 전혀 틀리다.

  마계는 힘의 율법이 모든 것을 통제하는 세상이다.

  힘을 가진 자가 곧 법이고 권력이다.

  설사 부모가 마계의 강력한 통치자라 해도 자식의 힘이 약하면 권력의 가장 밑바닥으로 추락하게 된다.

  디바울은 피의 율법만이 판치는 마계에서도 최상위의 마족이었다.

  당연히 그의 힘은 막강했다.

  병규는 자신의 능력에 한계를 느꼈다.

  적어도 선술과 몬스터의 능력만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것이 확실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그는 망설였다.

  디바울의 손톱이 목구멍을 뚫고 있을 때까지 병규는 고민하고 또 고민했다. 과연 암흑의 힘을 해방시켜도 될까?

  사실 예전 살렘과 싸울 때 각성된 힘은 이 정도가 아니었다.

  훨씬 더 깊고 어두운 능력을 깨우쳤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는 그 깊고 깊은 암흑의 힘을 몸속 깊은 곳에 감춰 두고 있었다.

  이성을 잃을까 두려웠던 것이다.

  틈새로 조금 새어 나온 암흑만으로도 그는 성격이 많이 변해버렸다. 우둔하고 밝던 성격이 영악하고 어두워졌다.

  말수도 현저하게 줄어들었다.

  고작 손톱만큼 해방한 암흑에 그렇게 많은 변화가 생긴 것이다.

  그래서 두려웠다. 그래서 암흑을 꽁꽁 숨겨 두었다.

  다행히 그에겐 선술로 얻은 청정한 기운이 있었다. 그 맑은 기운을 모두 동원하여 폭주하려는 마기를 제어했다.

  그런데 오늘 그 손톱만큼 풀어놓은 마기로는 도저히 감담할 수 없는 적이 나타났다. 그래서 병규는 어쩔 수 없이 해방했다.

  깊이 숨겨 놓았던 암흑의 기운을.

  노괴를 상대하면서도 고작 2할밖에 풀어놓지 않았던 절대의 어둠을. 그는 무려 절반 이상 끌어 올렸다.

  그것은 ... 절망이라 부르는 절대의 권능이었다.

  어둠을 해방한 그는 분노했다.

  그의 분노 앞에 디바울은 벌벌 떨기만 했다.

  절망을 각성한 그에게 디바울은 벌레,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래서 병규가 그의 손톱을 모조리 부러트리고, 발로 면상을 짓밟을 때까지 그 흔한 비명 한 번 지르지 못했다.

  병규는 잔인했다.

  익힌 닭을 해체하듯, 디바울의 발을 통째로 잡아 뜯고, 손가락을 가닥가닥 뽑아내고, 어깻죽지를 구운 오리를 찢듯 거침없이 찢어발겼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이미 갈기갈기 찢어진 몸뚱이를 푸줏간의 고기처럼 몇 토막이나 내 버렸다.

  그 처절한 응징에 결국 디바울은 큰 충격을 받고 한 줄기 연기로 화하여 흩어졌다.

  그렇게 디바울이 사라진 자리에는 흑마법사로 보이는 이름 모를 시신만이 남아 있었다.

  “ ... .”

  묵묵히 그 시신을 내려다보던 병규의 고개가 다른 쪽으로 기울었다. 그곳에는 사신들을 빈사상태로 만들고, 한창 노괴와 치열한 다툼을 벌이던 컨퓨전이 얼어붙은 듯 서 있었다.

  그는 활짝 열려진 눈으로, 암흑의 절대자가 산 채로 그의 동료를 갈기갈기 찢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다.

  악몽과 같은 광경이었다.

  그의 동료 디바울은 터무니없는 존재를 각성시키고 말았다.

  아니, 각성은 불가피한 것이었다.

  다만 문제가 된 것은 각성된 그를 적으로 돌렸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절대로 하지 말아야 할 금기였다.

  죽음의 신을 적으로 돌린 것이기 때문이다.

  공포.

  찌릿찌릿한 공포가 파도처럼 밀려왔다.

  그 큰 덩치가 덜덜 떨렸다.

  그때 병규와 눈이 마주쳤다.

  “흡!”

  컨퓨전은 숨이 턱 하고 막히는 것 같았다.

  실제로 그는 숨을 제대로 쉬지 못했다. 병규의 두 눈에서 쏘아져 나오는 광기에 온몸이 오그라들었다.

  “오라.”

  병규가 그를 향해 한 손을 내밀었다.

  바짝 굳어있던 컨퓨전이 그의 앞으로 쭉 당겨져 왔다.

  괴물 같은 능력을 발휘하던 컨퓨전은 이제는 불쌍할 정도로 떨었다. 병규는 말없이 그의 가슴에 손을 가져갔다.

  찌그윽.

  마치 물에 손가락을 담그듯 자연스럽게 그의 손은 컨퓨전의 가슴속을 파고들었다.

  “가야 할 시간이다.”

  병규는 컨퓨전을 위해 약간의 암흑을 방출했다. 암흑은 병규의 손을 타고 컨퓨전의 육체 안으로 흘러들었다.

  “컥!”

  컨퓨전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의 얼굴이 시커멓게 변하더니 부풀기 시작했다.

  얼굴만이 아니었다.

  팔도, 다리도, 몸도 검게 변색되며 애드벌륜처럼 부풀어 올랐다.

  곧 한계가 왔다.

  지독한 경련이 일었다. 그리고 ... .

  팡! 하는 폭음과 함께 컴퓨전의 육신은 터져 버렸다.

  끼아아아아악!

  유부에서 들려오는 악령의 울부짖음과 함께 산산조각 난 컨퓨전의 육체가 연기로 화해 사라졌다.

  이번에도 흑마법사의 시신이 그 자리에 놓여 있었다. 하지만 이번만은 얼굴을 확인할 수 없었다. 터진 풍선처럼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었다.

  “도망갔군.”

  철판을 긁는 듯한 마른 음성이 병규의 입을 비집고 나왔다.

  본래 마족의 본신은 마계에 있다. 그리고 특별한 방법이 아니고서는 절대로 마계를 벗어날 수 없다.

  그래서 마족들은 계약이라는 특별한 방법을 써서 중간계로 진출하곤 한다. 그들이 말하는 계약이란, 바로 흑마법사를 이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정령들이 정령술사와 맺는 계약과 동일한 것이었다.

  흑마법사들이 힘을 얻기 위해 마계의 존재를 소환하는 것은 흔한 일이다. 영혼을 바치는 대신 소환된 마계의 존재에게서 힘을 얻게 되는 것이다.

  사실 이것은 마계 쪽에서도 결코 손해가 없는 장사다. 흑마법사를 이용해 손쉽게 결계를 넘어 중간계로 빠져나올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흑마법사의 몸을 지배하여 중간계로 나온 마계의 존재는 실은 허상에 불과하다. 본체는 마계에 그대로 있다.

  그래서 타격을 줄 수는 있지만 죽일 수는 없다.

  그들을 죽이려면 마계에 있는 본체를 박살내야 하는 것이다.

  방금 죽은 것처럼 보인 컨퓨전과 디바울도 마찬가지다.

  연기로 화한 것은 죽은 것이 아니라 마계로 강제 소환된 것을 의미했다.

  물론 병규가 워낙 철저하게 찢어발긴 터라 마계에 있을 본체도 상당한 타격을 입었겠지만.

  검은 안개에 뒤덮여 있던 병규는 물끄러미 사신들을 살폈다. 큰 부상을 입고 의식을 잃었지만 죽지는 않을 것 같았다.

  그는 천천히 내성 쪽으로 걸음을 옮겼다.

  두 녀석을 처리했지만 아직 한 녀석이 남았다. 아니, 정확하게는 두 녀석이다. 마족과는 조금 다른 이질적인 기운이 그가 향하는 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그가 움직이자 끙끙거리고 있던 노괴가 쫄랑쫄랑 뒤를 따랐다.

  “일어서도 좋다.”

  병규가 명하자 노괴는 즉시 말을 따랐다. 네 발로 기던 그가 두 발로 벌떡 일어섰다. 단지 두 발로 선 것뿐인데, 짐승에서 사람으로 변한 것처럼 크게 달라져 보였다.

  그렇게 병규는 암흑을 각성한 채로 내성으로 향했다.

  그는 조금 전에 비해 겉으로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실제로는 하늘과 땅만큼이나 커다란 차이가 나 있었다.

  그가 걸음을 옮길 때마다 땅바닥의 흙이  검게 물들고, 풀들이 바짝 말라 버렸다.

  대기는 비명을 지르고, 바람은 숨을 죽였다.

  이 암흑의 절대자는 그 움직임 하나에도 죽음과 고통, 나락을 동반했다.

  그 절대적인 기운 앞에 세상의 모든 것은 미약할 뿐이었다.

  그의 이름은 절망이었다.

  병규가 떠난 얼마 후, 기절해 있던 사신들 중 마그네트가 얕은 신음을 흘리며 몸을 일으켰다.

  부스스 몸을 일으킨 그녀는 좀 전과 뭔가 달라져 있었다.

  가늘게 떠진 눈자위에서 위대한 절대 진리가 흐르고 있었다.

  “이곳은 어디지?”

  그녀는 눈을 찌푸렸다.

  혼란스러웠다.

  쪼개지는 듯한 두통. 그리고 조각난 기억들.

  초월적인 힘을 가진 그녀조차도 일시적으로 어떻게 된 일인지 파악할 수 없었다.

  “분명 그 이상한 녀석들을 응징하려 했는데 ... .”

  그녀의 기억은 수개월 전의 것이었다.

  “그래, 검은 장발 녀석. 그 녀석에게 다시 머리를 맞았지. 하지만 그건 버텨냈어. 그런데 그 망할 금발의 꼬맹이가 ... .”

  마그네는 이를 부득 갈았다.

  퀴니를 떠올리니 이유없이 화가 났다.

  그러다 문득 그녀는 혼재된 기억을 단숨에 정리할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된 것이군.”

  마그네트는 단숨에 안정을 되찾았다.

  더 이상 어떤 혼란도 남아있지 않았다.

  아름다운 그녀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기억을 되찾은 그녀는 곧바로 할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저곳이군.”

  그녀는 불온한 기운이 느껴지는 곳을 바라보았다. 마나가 자연스럽게 일어 그녀의 몸을 띄웠다.

  마그네트가 향한 곳은 왕성의 내성, 깊숙한 곳이었다.

  내성으로 가는 길은 한마디로 말해 혈로였다.

  가는 곳마다 병사들의 시신이 보였고, 걸음을 옮길 때마다 그들의 몸에서 흘러나온 핏물이 신발을 적셨다.

  이곳을 먼저 지나간 마족이 꽤나 요란하게 일을 벌인 것이다.

  시신들의 모양들은 하나같이 요상했다.

  그들은 입을 쩍 벌린 채 손으로 자신의 목을 움켜쥐고 있었다.

  부릅뜬 눈, 확장된 동공, 목구멍에 맺힌 피거품.

  그 모습은 마치 물에 빠져 죽은 사람과 흡사했다.

  발버둥을 친 것인지 벽과 바닥엔 손자국이 요란하게 나 있었다.

  한 가지는 확실했다. 그들의 사인이 질식이라는 것.

  병규는 산처럼 쌓인 시신들 곁을 천천히 지나갔다. 그 많은 죽음에 그는 아무런 감흥도 받지 못했다. 오히려 신발 밑창으로 느껴지는 핏물의 끈적임이 색다르게 느껴질 정도였다.

  어두운 홀을 지나, 정원에 도착했다.

  역시나 많은 시신들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화려하게 피어난 꽃 속에 드러누운 시신들. 그래서 오히려 더 참혹하게 보였다.

  분수대는 핏물을 받아놓은 것처럼 검붉게 물들어 있었다. 실제로 분수에서 솟구치는 물조차 핏물이었다.

  이곳을 지나간 마족이 알 수 없는 재간을 벌인 모양이다.

  “훌륭하군.”

  병규는 피를 뿜어 내는 분수를 보며 입가에 미소를 그렸다.

  그는 만족하며 더 깊은 곳으로 걸었다.

  후원을 지나 아름다운 샹들리에가 눈에 띄는 복도를 통과했다. 그곳에서 다시 복잡한 갈림길과 계단을 지나면 왕의 처소가 나온다. 하지만 병규는 계속 복도를 따라갔다. 복도의 끝에서 건물의 음울한 그림자가 드리워진 작은 공터를 만났다.

  병규는 그곳에서 마지막 마족을 만날 수 있었다.

  “드디어 주인공께서 납시셨군요.”

  사요함까지 느껴지는 미소를 머금은 마족은 병규를 향해 깊숙이 허리를 숙여보였다.

  병규는 무표정한 얼굴로 가만 마족의 생김새를 살폈다.

  특이하면서도 평범하다.

  마족의 전체적인 모습은 단 한 마디로 정의가 가능했다. 

  그림자.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검었다.

  광택 없는 검은 페인트를 뒤집어쓴 것 같았다.

  얼굴은 형상은 있으되 눈, 코, 입의 구별이 없이 모두 검었고, 팔다리는 달려있으되 아무런 생동감이 없었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그의 어두운 모습이 아니었다.

  마족의 팔에 쓰러지듯 안겨 있는 여인. 그녀는 바로 레종이었다.

  기절한 듯 아무런 움직임도 없었다.

  마족과 레종을 번갈아보던 병규는 굴곡 없는 음성으로 물었다.

  “익숙한 기운이군. 살렘의 본체인가?”

  그의 음성은 무겁고 거만했다.

  “과연 대단하시군요. 쉐이드라고 함니다.”

  쉐이드는 공손하게 대답했다. 하지만 병규는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공터엔 쉐이드 말고도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존재감이 하나 더 있었다.

  병규는 그 익숙한 존재감을 쫓아 고개를 돌렸다.

  공터 구석, 거대한 백호가 비스듬히 누워 있었다.

  호랭이였다.

  의식이 없는 듯, 병규가 나타났음에도 고개조차 들지 않았다. 다행히 가슴이 위아래로 출렁이고 있어 숨은 붙어 있는 듯했다.

  병규의 시선이 다시금 쉐이드에게로 향했다.

  정확히는 그에게 잡혀 있는 레종에게로 향했다.

  “ ... 그렇군.”

  대강의 사정을 읽어낼 수 있었다. 아마도 쉐이드는 레종을 인질로 호랭이를 협박했을 것이다. 신선인 호랭이는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하늘을 뒤집어 놓을 만한 신력을 가지고 있었지만, 이런 식의 협박엔 더없이 약한 존재가 호랭이었기 때문이다.

  사실 이런 최악의 시나리오를 만들지 않기 위해 호랭이는 입구의 두 마족을 무시하면서까지 내궁으로 급히 달려간 것이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상황은 최악의 시나리오대로 흐르고 있었다.

  “각성을 축하드립니다. 절망의 군주시여.”

  쉐이드는 얄팍한 미소를 띄운 채 병규에게 말을 걸었다.

  병규는 침묵했다. 가증스런 쉐이드의 말과 행동엔 조금의 관심도 없었다. 그의 관심은 오직 하나.

  그는 레종을 향해 손을 내밀었다.

  “오라.”

  무시무시한 강제력이 레종을 끌었다.

  “아직은 안 됩니다.”

  쉐이드는 급히 등뒤의 건물 속으로 하반신을 집어넣었다. 그의 하반신은 그대로 건물 속에 잠겨 들었다. 마치 건물 속의 그림자가 삐죽 상반신을 드러낸 것 같은 모습이었다.

  그런 기이한 모양으로 쉐이드는 레종을 안은 채, 별관 건물의 상층까지 쭈욱 올랐다.

  병규의 강제력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였다.

  “아직 볼일이 끝나지 않았습니다.”

  병규의 표정이 미미하게 변했다.

  “죽고 싶은가?”

  분노라는 이름의 작은 감정의 조각이 쉐이드의 전신을 압박했다. 암흑을 절반쯤 각성한 병규의 힘은 이미 자연적인 한계를 돌파한 지 오래였다.

  무거운 압력이 그의 공간 안의 모든 것을 강제했다.

  발아래의 땅거죽이 가뭄 논바닥처럼 갈라지고, 쉐이드가 숨어있는 건물 벽이 살얼음 깨지듯 퍼석퍼석 깨져 나갔다.

  “크윽. 대, 대단하시군요. 하지만 아직은 이 여자를 되돌려드릴 수 없습니다.”

  쉐이드는 자신의 동체로 레종의 목을 감쌌다.

  “왜지?”

  증압의 힘을 거둔 병규가 조용히 물었다.

  “당신을 보고 싶어 하는 분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병규의 눈동자에 이채가 떠올랐다.

  “날 보고 싶어 하는 자가 누군가?”

  “타락의 군주. 복수를 열망하는 자들의 여왕. 약탈, 방화, 간음의 지배자. 마계의 왕. 뎅;크란님이십니다.”

  “ ... .”

  병규의 두 눈에 떠올랐던 광채가 사라졌다.

  전혀 알지 못하는 자였기 때문이다.

  쉐이드는 긴 손가락으로 자신의 이마를 긁으며 난감함을 감추지 못했다.

  “설마 ... 아직도 기억을 되찾지 못하셨습니까?”

  “ ... 그녀를 내려놔라.”

  대화는 다시 원점으로 돌아갔다.

  병규는 살기를 자욱하게 피워 냈다.

  쉐이드는 온몸이 짜부라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하지만 죽어도 레종을 내어 줄 마음은 없었다.

  “정말로 아무 기억도 없으신가요? 이거 참 곤란하게 되었군요.

  쉐이드는 난처한 듯, 인상을 찌푸렸다.  절망의 군주는 마성을 각성했음에도 이상하게 기억만은 전혀 되찾지 못했다. 이래서야 원래 의도한 일이 절반밖에 성공하지 못한 셈이다. 그렇다고 저 악몽과 같은 절대자와 드잡이질을 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그건 죽으려고 발악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적어도 이 중간계에서는 그를 이길 방법이 없다.

  “할 수 없군요.”

  한숨을 내쉰 쉐이드는 검은 손을 앞으로 내밀었다. 퍽 하는 소리와 함께 팔이 안개 흩어지듯 퍼지더니 허공에 복잡한 수식을 그려냈다.

  츠아악!

  번개가 치는 소음이 울렸다. 그리고 예리한 검은 줄이 희미해진 수식을 수직으로 가르며 나타났다.

  “열려라. 마계의 문이여.”

  쩌어억!

  허공에 수직으로 그어진 검은 줄이 고양이 눈동자처럼 벌어졌다. 쉐이드는 마계의 문으로 들어가려 했다.

  “내가 순순히 보내줄 것 같은가?”

  병규는 그를 향해 한 발 내딛었다.

  전신에서 풍겨 나오는 위압적인 압력이 한층 짙어졌다.

  “크! 독하시군요. 제가 실수로 이 여자를 죽여 버리기라도 하면 어쩌시려고 그러십니까?

  그의 위협은 확실히 효과가 있었다.

  하늘을 무너뜨릴 것 같던 병규의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쉐이드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휴. 과거나 지금이나 당신의 힘은 무지막지하군요.”

  먼지라도 묻은 듯 몸을 툭툭 털던 쉐이드는 뒤늦게 생각이 난 듯 자신의 머리를 콩 때렸다.

  “아! 잊고 있었습니다. 저 말고도 당신에게 볼일이 있는 자가 한 명 더 있다는 걸 말입니다.”

  쉐이드의 손가락이 가볍게 소리를 냈다.

  으르릉 하는 목울림 소리와 함께 짐승 한 마리가 나타났다.

  짐승이되 인간의 모습을 한 괴이한 생물.

  마치 노괴의 다른 형태를 보는 것 같았다.

  병규는 갑자기 나타난 짐승의 얼굴에 시선을 고정했다.

  왠지 낯이 익은 얼굴.

  “라이트.”

  필립 공작의 방탕한 아들.

  노괴의 사악한 주술에 걸려 발버둥치다 사라졌던 놈이 짐승이 되어 돌아왔다.

  라이트는 완전히 짐승이 되어 버렸다. 목에 목줄까지 달고 있었다. 쇠사슬 줄을 질질 끌고 으르렁거리는 꼴이 투견을 떠올리게 했다.

  병규는 라이트를 지그시 쳐다보았다.

  쉐이드가 그를 보고 킥킥 웃으며 말을 걸었다.

  “쿠쿠. 안 되지요. 안 돼요. 지금 그에겐 통하지 않아요. 내가 약간의 수작을 부렸거든요. 그래서 그는 짐승임에도 당신 말에는 방응하지 않을 겁니다.”

  확실히 그랬다.

  노괴 때와 달리 라이트는 그 탁한 눈동자를 아무리 들여다봐도 전혀 반응이 없었다.

  오히려 갈기를 세우며 으르릉 적의를 드러내는 것이었다.

  “그럼. 제가 무사히 여길 빠져나갈 때까지 그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십시오.”

  쉐이드의 간질거리는 말투에 뱃속이 확 뒤틀리는 것 같았다.

  두 눈을 매섭게 치켜뜨며 나아가는데, 라이트가 으르렁거리며 앞을 가로막았다.

  병규는 조금 귀찮게 느껴졌다.

  지금 그의 신경은 오직 쉐이드에게 잡혀 있는 레종에게 기울어져 있었다.

  다른 일에 신경을 쓰고 싶지 않았다. 신경 쓸 틈도 없었다.

  “버러지 같은.”

  라이트를 향해 손을 쓰러던 병규는 문득 자신이 직접 싸울 필요가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에게도 라이트와 비슷한 짐승이 있었던 것이다.

  짐승은 짐승끼리 놀게 해 두면 된다.

  병규가 부르기도 전에 노괴가 앞으로 나섰다. 그는 라이트를 본 순간부터 눈에 띄게 흥분한 상태였다.

  “기그그극.”

  노괴를 본 라이트는 엉덩이를 들고 상체를 높게 세우며 적의를 한 껏 고양했다.

  쉐이드의 지배를 받게 된 라이트는 파괴적인 육체를 얻은 대신 정신과 기억을 잃었다.

  뇌는 급속히 퇴화되어 짐승 이하의 수준까지 떨어지고 행동 역시 짐승과 다를 바 없게 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녹아내린 뇌 한구석엔 악취 나는 나쁜 추억이 약간이나마 남아 있었다.

  그래서 병규와 노괴에게 적의를 보이는 것이다.

  반면 라이트를 본 노괴는 반색하며 기뻐했다.

  “여기 있었군.”

  놀랍게도 짐승처럼 행동하던 노괴의 입에서 사람의 말이 나왔다. 사실은 예전부터 말을 할 수 있었다. 다만 병규라는 절대자의 지배력에 감염되어 짐승도 인간도 아닌 형태가 되어 버렸을 뿐이다.

  병규는 노괴를 영혼의 그 깊은 곳까지 지배했으나 기억마저 빼앗지는 않았다. 그래서 라이트를 기억할 수 있었다.

  라이트에 대한 그의 관심은 각별한 것이었다.

  자신이 살던 세계를 떠나 낯선 땅을 찾아오면서까지 그가 필생의 노력을 들인 역작.

  인고.

  “이리 오너라. 아가야.”

  노괴는 기괴한 웃음을 지으며 조심스럽게 라이트에게 접근했다. 하지만 라이트는 성난 들고양이처럼 머리털을 죄 곤두세우며 날카롭게 울었다.

  “크앙!”

  노괴를 전제하던 라이트가 돌연 노괴에게 달려들었다.

  깜짝 놀란 노괴는 급히 몸을 굴렀다. 하지만 대응이 조금 늦어 그만 어깨의 살을 한 웅큼이나 뜯기고 말았다.

  “감히 주인을 물다니.”

  노괴는 분노했다.

  사정을 봐주려던 마음이 쌀 달아났다.

  인고의 정을 흡수하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굳이 인고가 살아있을 필요는 없다. 그래서 노괴는 사력을 다해 라이트를 덮쳐 갔다.

  지독한 독기가 사방으로 뿌려지고, 두 짐승의 날카로운 울음소리가 한데 뒤섞인 채 뒹굴고 또 뒹굴었다.

  켕켕!

  다급한 비명성이 터져 나왔다. 놀랍게도 당한 것은 노괴였다.

  과연 천하무적의 인고라더니 남다른 힘이 있었다.

  피부는 칼도 안 들어갈 정도로 탄력적이고, 힘은 산이라도 허물듯이 대단했다.

  슬쩍 휘두르는 손짓에 두꺼운 돌기둥이 허무하게 무너졌다.

  기세 좋게 달려들었던 노괴는 꽁지 빠진 강아지처럼 라이트를 피해 정신없이 도망갔다.

  병규는 기분이 좋지 않았다.

  노괴가 라이트에게 밀리는 것은 별 상관이 없었다.

  어차피 직접 상대하기 귀찮아서 맡긴 것이니까.

  하지만 짐승 두 마리가 짖고 울어대며 소란을 떠는 것은 영 신경이 거슬렸다.

  “귀찮은!”

  병규는 날아다니는 파리를 잡듯, 간단하게 손을 휘둘렀다. 그 손짓에 라이트는 캥 하고 않는 소리를 내며 바닥을 뒹굴었다.

  라이트가 데구르르 구르며 몸을 일으켰을 때, 어느새 다가온 병규가 그의 목을 움켜쥐었다.

  그대로 병규는 필립 공작에게서 흡수한 능력을 발현했다.

  “얼어붙어라.”

  차가운 냉기가 회오리처럼 휘몰아쳤다.

  이미 그의 능력은 과거와 비교할 바가 못 됐다. 작은 도시쯤은 순식간에 얼려버릴 수 있을 정도의 냉기가 라이트의 몸속으로 직접 쏟아졌다.

  “킥!”

  라이트는 발버둥치던 자세 그대로 굳어버렸다.

  “역겨운 놈.”

  병규는 일말의 주저도 없이 라이트를 벽으로 집어던졌다.

  와장창!

  사기로 만든 조각상이 부서지듯 라이트의 몸이 산산조각 났다.

  귀찮게 굴던 라이트를 참혹하게 박살냈지만 병규의 표정은 그다지 밝지 않았다.

  그가 라이트에게 신경을 쓰는 사이 레종을 납치한 쉐이드가 마계의 문 안으로 들어간 것이다.

  “이런. 제 귀한 장난감을 부쉈군요. 하지만 넓은 아량으로 용서해 드리죠. 대신 당신의 장난감을 이렇게 가져가니까요.”

  쉐이드는 혼절한 레종의 머리를 잡고 장난스럽게 좌우로 흔들어 보였다. 그리곤 가늘게 찢어지는 목소리로 동화책에서나 나올 법한 우아한 동작을 연기했다.

  “왕자님. 왕자님. 제발 절 구해주세요. 왕자니~임.”

  기절한 그녀는 쉐이드의 농락에도 비명조차 지르지 못했다. 자는 듯 눈을 꼭 감은 채 그가 움직이는 대로 머리를 흔들어댔다.

  꼭두각시 인형처럼.

  그 모습이 너무도 불쌍해 보였다. 가련해 보였다.

차라리 비명이라도 질렀으면.

  살려 달라고 악이라도 지를 수 있었다면 오히려 이런 무거운 마음이 덜했을지도.

  “쿠쿠. 이 계집을 많이 좋아하셨던 모양이군요. 그럼 혹시 이런 장난도 해보셨습니까?”

  살렘은 마계의 문밖으로 레종의 상체를 쭉 빼 올렸다. 그리곤 고목나무처럼 가늘고 긴 손으로 그녀의 가슴을 주물럭거렸다.

  “생각보다는 꽤 여물었군요. 흥흥흥.”

  마침내 병규는 폭발하고 말았다.

  쿠쿠쿵!

  폭풍처럼 일어난 패도적인 기운에 주변의 모든 것이 박살났다.

  대지는 우르르 뒤집히고, 건물은 성냥개비로 만든 것인 양 힘없이 무너졌다.

  “어이쿠. 이거 화가 나도 단단히 나셨군요. 하지만 분노한다고 상황이 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살렘은 자라처럼 마계의 문 안으로 목을 쑥 집어넣었다. 그렇게 너스레를 떨면서도 여전히 레종의 가늘고 긴 목을 움켜잡고 있었다. 더 이상 접근하면 이 여자를 죽여 버리겠다는 경고였다.

  “원하는 게 뭐냐?”

  병규는 끓는 듯한 음성으로 물었다.

  분노로 가득한 목소리를 토하면서도 오히려 그의 표정은 냉막할 정도로 무표정했다. 하지만 그것이 오히려 더 무서웠다.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처럼.

  “간단합니다.”

  쉐이드는 손가락을 하나 펴 보이며 큭큭대고 웃었다.

  “이 여자를 되찾고 싶으면 절 쫓아오십시오. 고향으로 말이지요. 쿠쿠.”

  말과 함께 쉐이드는 레종을 끌고 마계의 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졌다.

  문이 닫히기 전 그의 마지막 말이 들렸다.

  “그럼 그리운 고향에서 다시 뵙겠습니다. 절망의 군주님.”

  쿠르릉.

  폭음과 함께 고양이 눈동자처럼 벌어진 공간이 닫혔다.

  “안 돼!”

  레종과 쉐이드가 마계의 문 안으로 완전히 사라지던 그 순간, 생각지도 못한 인물이 무너진 성벽 아래에서 뛰어나왔다.

  디스였다.

  최전방에서 근무하던 그는 왕성에 침입자가 있다는 급보를 받고 급히 텔레포트 마법으로 이곳에 돌아왔다.

  그리고 본 것이다.

  레종이 탐욕스런 마계의 어둠 속으로 사라지는 모습을.

  “어, 어떻게 이런 일이.”

  디스는 그 자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이럴 수는 없는 것이다. 이럴 수는 ... .”

  디스는 땅을 치며 울부짖었다.

  레종을 왕성으로 보낸 것이 바로 디스다. 심각해지는 전황에 혹시나 그녀가 다칠까 저어한 것이다.

  그러나 오늘 그가 본 것은 숱한 죽음이었다.

  철벽이라 생각했던 왕성의 삼엄한 경계가 고작 몇 명의 마족에 의해 송두리째 무너져 버렸다. 수많은 자들이 죽었다. 하지만 그 무엇도 레종 여왕의 납치와 비교될 순 없었다.

  허탈함과 상실감은 곧 분노로 변질되었다.

  그는 대뜸 병규에게 달려들어 주먹과 발을 날렸다.

  “왜 ... 그녀를 뺐겼느냐! 어째서 그녀를 보호하지 못한 거지” 네가 할 일이 그것이 아니었느냐! 왜! 왜! 그랬냔 말이다!“

  병규는 그의 주먹질을 잠자코 맞기만 했다.

  레종이 사라진 그 순간, 장엄한 오오라처럼 뿜어지던 그 절대의 지배력조차 눈 녹듯 사라져 버렸다.

  여전히 표정은 차가웠지만 눈빛에는 혼란스러움이 다득 담겨 있었다.

  “그에겐 아무 잘못도 없다.”

  웅혼한 음성과 함께 장내로 마그네트가 날아 내렸다.

  그녀는 여전히 귀여운 외모였으나 풍기는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절대라고 일컬을 만한 막대한 기운이 그녀의 전신에서 우러나왔다.

  그 강대한 존재감에 디스는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하지만 그럼에도 숨을 헐떡이며 이유를 물었다.

  “그. 그게 무슨 말이오?”

  “말 그대로다. 그는 너의 여왕을 구하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심지어 동족인 마족들을 둘이나 죽이기까지 했지.”

  그녀의 말에 디스는 경악했다.

  “너, 너 마족이었냐?”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그는 아직 자신에 대해 잘 모른다. 어렴풋이 마계와 관련이 있다는 것만 알 뿐이다.

  마그네트는 뭔가 알고 있는 듯했지만 더 이상 언급하지 않았다. 쓸데없는 일로 시끄럽게 되는 것이 싫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방금의 발언만으로도 충분히 일이 시끄럽게 되었다. 디스가 돌연 병규의 멱살을 잡고 버럭 고함을 지른 것이다.

  “마족이라고? 그럼 당연히 마계로 가는 방법을 알겠구나. 어서 문을 열어라. 한시라도 빨리 여왕님을 구해야 해. 어서 빨리!”

  흥분한 그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는 듯했다. 병규가 그 무시무시한 마족을 둘이나 죽였고, 그 자신도 마계와 관련이 있는 어두운 존재라는 것도 전혀 인식하지 못했다.

  오로지 레종을 구해야 된다는 생각만으로 머릿속이 꽉 차 버린 듯했다.

  마그네트가 혀를 끌끌 찼다.

  “소용없는 짓이다. 마계로 끌려간 이상 그녀에 대해서는 잊는 것이 좋겠지.”

  “그, 그런.”

  디스는 힘없이 쓰러졌다.

  그제야 그녀가 납치된 곳이 어디인지를 깨달은 것이다.

  절대적인 공포로 군림하는 지옥.

  인육을 즐기는 괴물들이 우글거리는 불타는 대지.

  그곳으로 납치된 레종을 구출해 낸다는 것은 이미 불가능한 애기다. 그때 여태 무심한 표정으로 서 있던 병규가 상상치도 못한 대답을 했다.

  “내가 ... 마계로 가겠다.”

  “뭐?”

  “뭣이?”

  디스와 마그네트 둘 모두에게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특히 마그네트는 터무니없다는 표정으로 쏘듯이 그를 몰아붙였다.

  “방금 한 말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소리인지 알고나 있느냐? 마계다. 악마 같은 종자들이 우글거리는 지옥이란 말이다. 설마 마족의 힘이 입구의 그 두 녀석과 같은 정도라고 착각하는 것은 아니겠지?”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그는 행동했다.

  손을 들어 가볍게 흔들었다.

  냉기가 풀썩 일어나더니 대기 중의 수분을 동결시키며 허공에 복잡한 수식을 그려 냈다.

  그 수식은 쉐이드가 만들었던 그것과 동일했다.

  다만 쉐이드가 자신의 그림자로 행한 일을 그는 대기 중의 수분을 얼려서 행했다는 차치점이 있을 뿐이었다.

  츠즈즈즈즈

  삭막한 소음과 함께 일그러진 마계의 문이 열렸다.

  병규는 쉐이드의 초대에 응할 뜻을 분명히 한 것이다.

  함정임을 뻔히 알면서도.

  마그네트는 근엄한 표정으로 다시 말했다.

  “아느냐? 중간계에서 마족은 본래 힘의 10분의 1도 사용하지 못한다. 네가 마계로 가면 지금보다 10배 이상 강해진 마족들을 상대해야 한다는 소리다. 돼지 같은 오크도 그곳에서는 오우거와 같은 힘을 발휘하게 된다. 그런 놈들과 정말로 싸울 생각이냐?”

  이번만은 병규도 침묵하지 않았다.

  “물론.”

  확고한 대답이었다.

  말없이 그를 바라보던 마그네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의미심장한 말투였다.

  병규는 그녀의 말에서 확실한 느낌을 받았다.

  ‘그녀는 나에 대해 알고 있다.’

  전에도 두 번 각성한 그녀와 머주선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때만 해도 그녀는 자신에 대해 알지 못했다. 다만 인간이 아니라는 것만 알아냈을 뿐이다.

  그런데 이번엔 확실한 뭔가를 알게 된 모양이다.

  뭐가 달라졌을까.

  암흑.

  병규는 자신의 내부에 숨겨져 있던 암흑을 깨달았다. 그리고 그것을 끄집어 냈다. 마그네트는 바로 그 암흑의 본질을 꿰뚫어 본 것이다.

  과연 중간계의 절대자 드래곤이었다.

  그때 디스가 헛기침을 두어 번 했다. 그는 잠깐 사이에 다소 냉정을 찾은 듯 조심스런 음성으로 마그네트에게 물었다.

  “당신은 기억을 되찾으셨습니까?”

  “넌 내 정체를 알고 있는 것 같군.”

  “얼마 전 신성제국의 황제로부터 당신에 대한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현 신성제국의 황제는 샤바였다.

  그 말을 들은 마그네트는 당장 얼굴을 굳히며 호통을 쳤다.

  “감히! 내가 누구인지 알면서도 이런 무례를 범하는가.”

  디스는 즉시 한쪽 무릎을 땅바닥에 대었다.

  “위대한 분이시여. 분노를 푸십시오. 다만 이 미천한 자는 당신과 당신의 종족에 대해 궁금한 것이 있을 따름이옵니다.”

  공손하지만 결코 비굴하지 않은 음성이었다.

  마그네트는 새삼스런 눈으로 그를 보았다.

  자신이 드래곤인 것을 알면서도 굴하지 않는 인간을 정말이지 오랜만에 본 것이다.

  그에게 흥미가 인 그녀는 다소 누그러진 음성으로 물었다.

  “뭐가 궁금한 거지?”

  “마족들이 중간계를 넘어왔습니다. 검은 욕망이 중간계를 뒤덮고 있습니다. 많은 선량한 자들이 죽었습니다. 모든 종족이 힘을 합쳐 대항하고 있지만 전황은 매우 어렵습니다. 자연계의 균형이 깨졌습니다. 그런데 왜 이런 상황에서도 드래곤들은 나서지 않는 것입니까? 신의 대리자인 드래곤들은 왜 침묵하고 있는 것입니까?”

  디스는 드래곤들이 마왕과 전쟁을 벌였다는 옛 문헌의 기록을 애써 기억해 내고 이렇게 물은 것이다.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할 수 없는 것이다.”

  마그네트는 작게 한숨을 쉬었다.

  그녀의 대답에 디스는 궁금한 것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지만 잠자코 귀를 기울기만 했다. 과연 그녀는 우매한 인간을 위해 다시 한번 쉽게 말을 풀어놓았다.

  “드래곤들은 모두 수면 중이다. 기약할 수 없는 긴긴 잠을 자고 있는 중이지.”

  디스는 해연이 놀랐다.

  “아니, 어떻게 그런 일이.”

  드래곤들은 원래 게으르고 잠이 많은 존재다. 몇백 년씩 자는 경우도 드물지 않았다. 하지만 모든 드래곤이 잠들어 깨지 않는다는 것은 이해하기 힘든 일이었다.

  “너희들은 잘 모르겠지만 수백 년 전 마황이라는 자가 마계를 정벌하고 중간계마저 넘본 적이 있었다. 마황은 사상 유례가 없을 정도로 막강한 힘을 지니고 있었지. 마신조차 능가하는 그런 힘이었다. 당시 수면기에 들었던 날 제외한 모든 드래곤들이 힘을 합쳐 마황에 저항했다. 결국 많은 희생 끝에 마황을 공간의 틈 밖으로 밀어내는 데 성공했지.

  마황은 영원히 차원의 결계 속에서 방황하게 되었다. 하지만 간신히 마황을 물리친 드래곤들의 피해도 막대했다. 고룡들은 모두 죽음을 당했고, 성룡들도 대부분 죽고 말았지. 간신히 살아남은 드래곤조차 마황의 지독한 저주를 받은 탓에 기약 없는 수면에 빠진 것이다.“

  ‘마황이 갑자기 사라졌다고 하더니.’

  병규는 예전에 들었던 마계의 이야기를 떠올렸다.

  본래 마계에는 마황이라는 절대자와 그보다 조금 못한 세 명의 마왕이 있었다.

  이 지배자들은 서로를 견제하는 처지였다. 왜 그런 일이 발생했는지 궁금해 하는 자들이 많았는데, 마그네트의 말로 전말이 확실해졌다.

  마황이 사라진 마계. 그리고 그 아래 셋이나 되던 마왕들.

  권력이 중심이 사라졌으니, 누군가 그 빈자리에 욕심을 낼 만도 했다.

  아마도 마왕들은 유일무이한 절대권력을 위해 전쟁을 벌였을 것이다. 그리고 최후의 승자는 데이크란인 것이 분명했다.

  현재 마계에 남아있는 마왕은 오직 데이크란 하나뿐인 것이 그 증거다.

  “그럼 수면기에 든 분들을 깨울 방법은 없습니까?”

  심각한 표정으로 디스가 다시 물었다. 마그네트는 고개를 저었다.

  “할 수 있었다면 이미 내가 했을 것이다.”

  마황의 저주가 무엇인지는 모르지만 드래곤조차 벗어날 수 없는 강력한 이능력인 것만은 분명했다.

  디스의 물음에 대답한 마그네트는 다시 병규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다시 묻겠다. 너는 그래도 마계로 가겠느냐?”

  병규의 표정이 조금 일그러졌다.

  대답이 곤란한 것이 아니다. 그는 이미 마음을 정했다.

  그가 불쾌하게 생각한 것은 마그네트의 거만한 태도였다.

  드래곤으로 각성한 그녀는 한없이 오만해졌다.

  만약 납치된 레종을 구출해야 된다는 목적이 없었다면, 마족들과 한바탕 치열한 격전을 벌여야 한다는 예정만 없다면 그는 절망의 권능을 불러일으키며 그녀와 싸움을 벌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없는 상황이었기에 그는 침묵했다.

  한편 병규의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인 마그네트는 알 수 없는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그녀는 병규의 현재 힘이 너무도 미약하다고 판단했다.

  물론 인간의 기준으로는 강력하다.

  성 하나는 한순간에 날려 버릴 수 있을 정도로, 하지만 마계엔 그런 존재들이 득시글했다.

  만약 병규가 자신을 완전히 각성한다면 모르지만 지금 상태로는 아무것도 이루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마그네트로서도 곤란했다. 그녀는 병규가 마계로 간다고 말한 순간 그 현명한 두뇌로 색다른 계획을 세웠다.

  잘만 된다면 마계를 혼란에 빠트릴 수 있는 계획을.

  하지만 그 계획이 완성되기 위해선 병규가 강해져야 했다. 적어도 예전 전성기 때의 절반 정도만이라도,

  고민하던 마그네트는 결심을 굳혔다.

  자신이 그에게 힘을 더 실어 주기로.

  그녀는 병규에게 팔을 내밀며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난 후회할 짓을 하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네가 마계에 약간이나마 혼란을 초래할 수 있다면, 그래서 중간계에 대한 마계의 공격이 잠시라도 주춤할 수 있다면 ... . 그럴 수 있다면 약간의 모험을 감수할 각오가 되어 있다.”

  그녀는 손톱으로 자신의 손목을 그었다.

  “마셔라. 드래곤의 힘이다. 네가 내가 생각하는 그 존재가 맞다면 이것으로 큰 힘을 얻을 테지.”

  그녀의 계획이란 이런 것이었다.

  자신의 힘을 그에게 준다.

  강해진 병규는 마계에서 한바탕 큰 소란을 일으킬 것이다.

  어쩌면 잃어버린 세력을 되찾아서 마왕 데이크란에게 큰 타격을 줄 수도 있다.

  물론 가능성은 미미하지만 이 도박과 같은 일에 마그네트는 희망을 걸기로 했다.

  자칫 최악의 마왕을 각성시킬지도 모르는 도박에.

  마그네트의 하얀 팔을 타고 떨어지는 핏방울.

  병규는 사양하지 않았다.

  손가락으로 그녀의 피를 찍어 입가에 가져갔다.

  그리곤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이 이글거리는 마계의 문으로 걸어갔다.

  “구해 주게. 그녀를.”

  떠나는 병규를 디스가 힘없이 불렀다. 그는 자조 섞인 음성으로 힘없이 뒷말을 이었다.

  “네가 마왕이든 마족이든, 그 어떤 괴물이든 상관없다. 분하지만 ... 지금 그녀를 구할 수 있는 존재는 너뿐이다. 그녀를 구할 수 있는 것이 내가 아닌 게 가슴 아프고 원통하지만, 신은 너를 택했다. 믿겠다. 그녀를 꼭 구해 줘.”

  진심을 느낄 수 있는 말이었다.

  애써 평정을 가장하고 있지만 흔들리는 목소리가 그가 지금 얼마나 괴로워하고 있는지 알려 주고 있었다.

  지금껏 디스는 레종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숨기고 있었다.

  뜨거운 마음을 애써 우정일 것이라 자위했다.

  하지만 아니었다.

  그녀를 잃고서야 깨달았다.

  자신이 얼마나 그녀를 사랑하는지.

  얼음벽처럼 단단하던 감정에 균열이 생겼다. 갈라진 틈새로 감정이 쏟아졌다. 그렇게 한번 터진 감정의 봇물은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불어나 그의 마음을 송두리째 흔들었다.

  평소에 감정을 숨기고 있었던 만큼 그 반동은 훨씬 더 격렬했다.

  그래서 그는 자신의 분한 마음을 담아 눈물을 흘렸다.

  병규는 그를 위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조용히, 소리 없이 그의 곁을 스치듯 지나쳤다.

  하지만 디스는 병규에게 대답을 들은 것이라 확신했다.

  촤아아아아!

  마계의 문은 거친 비명을 토하며 이글이글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그 안으로 한 발을 들여놓은 병규의 시선이 잠시나마 호랭이에게 머물렀다.

  “ ... .”

  무표정한 그의 눈동자에 복잡한 상념이 떠올랐다 사라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거침없이 마계의 문 안으로 걸어 들어 갔다.

  쿠르릉.

  거칠게 펼쳐진 마계의 문이 닫혔다. 그렇게 병규는 사라졌다.

  병규가 마계로 떠난 직후, 마그네트는 마계의 야욕을 막기 위한 새로운 계획을 세웠다.

  그녀의 새 계획을 위해선 오랜 인간 친구들의 도움이 필요했다.

  마그네트는 기절한 사신들을 텔레포트 마법으로 불러들였다.

  “너희들이 도와줘야겠다.”

  마그네트가 손짓하자 사신들의 상의가 벗겨지며 죽음의 낫을 든 사신의 문신, ‘맹세의 낙인’이 드러났다.

  스승인 마일드가 남겨 놓은 계약.

  사신들을 교육시킨 마일드는 그들에게 한 가지 약속을 강제했다. 후에 누군가 그들 모두를 굴복시키는 자가 나타나면 그를 마스터로 믿고 무조건 따르라는 맹세가 바로 그것이었다.

  그 맹세에 따라 사신들은 샤바를 주인으로 삼고 충심으로 따랐다. 하지만 사실 이 맹세의 낙인은 마그네트가 남긴 것이다.

  좀 더 정확하게 설명하면 마일드로 변신한 마그네트가 사신들에게 남긴 것이다. 사신들의 스승인 마일드는 실은 그녀의 분신이었던 것이다.

  맹세 또한 나중에 써먹을 일이 있을까 싶어 장난삼아 만들어 놓은 것에 불과했다.

  하지만 이제 그 약속을 이행할 때가 되었다.

  그녀의 장고한 계획을 위해서.

  마족들의 힘은 강하다.

  다른 드래곤들이 모두 깨어있다면 별 문제 없겠지만 지금은 오직 그녀 혼자뿐이다.

  그녀 혼자서는 상급의 마족 몇 마리를 상대하는 것도 벅차다.

  그렇다고 인간이나 다른 종족의 힘을 빌릴 수도 없었다. 그들의 힘은 너무도 미약하다. 쓸모없는 희생이 될 뿐이다.

  그래서 그녀는 마족에 맞설 새로운 힘을 창조하기로 했다.

  고대유산의 힘으로 장난삼아 만들었던 키메라들.

  사신들의 몸속에 숨겨진 그 힘을 한데 뭉쳐 마계에 대항할 수 있는 새로운 키메라들을 만들 생각이었다.

  마침 흥미 있는 재료도 손에 넣었다.

  라이트의 부서진 몸뚱이.

  노괴가 심혈을 기울여 만든 인고라는 존재가 그녀의 흥미를 당겼다.

  부서진 인고의 육신 안에서 약동하는 새로운 힘이 느껴졌다. 어쩌면 사신들의 능력과 합하면 새로운 무언가가 창조될지도 모른다.

  물론 고대의 유산과 이 새로 발견한 힘을 합일하여 전혀 새로운 키메라를 창조한다는 것은 결코 쉬운 작업이 아니다.

  혼자 하기엔 너무도 방대한 작업이다. 그래서 그녀는 인간들의 힘을 빌리기로 했다.

  인간 마법사들은 마법력도 약한 미천한 존재이긴 하지만 수가 많으니 여러 귀찮은 실험들을 대신 해줄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는 마계에 대항하기 위한 계획들을 차분하게 정리하고 있었다. 그런데 잠시 잊고 있었던 미천한 존재가 그녀의 명상을 방해하는 것이었다.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병규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던 디스가 그녀를 불렀다. 마그네트가 삼엄한 눈초리를 그에게 돌렸다.

  “흡.”

  엄청난 압력.

  하지만 디스는 이를 악물며 억지로 말을 이었다.

  “저도, 저도 ... 돕고 싶습니다.”

  그는 마그네트의 발 아래 엎드려 절하며 간절하게 외쳤다.

  “제발 도울 수 있게 해 주십시오.”

  눈앞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잃었다. 그는 자신의 무능력을 뼈에 사무치게 깨달았다.

  마그네트는 무심한 음성으로 물었다.

  “미천한 자여. 네게 무슨 능력이 있는가?”

  “예전에 잠시 마법을 공부한 적이 있습니다.”

  “그런 하찮은 능력은 저 강대한 마족들에겐 아무런 소용도 없다. 벌레 같은 목숨이라도 간수하고 싶다면 먼 곳으로 도망이라도 가라. 차라리 그것이 너의 안녕에 도움이 될 것이다.”

  냉정하게 일갈한 마그네트는 미련 없이 뒤돌아섰다. 디스는 구르듯이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절 마음대로 하셔도 좋습니다. 차라리 무기로 쓰십시오. 마족을 응징하기 위한 무기로.”

  마그네트는 인상을 찌푸린 채 그를 돌아보았다.

  디스는 활활 불타는 듯한 눈으로 그녀를 올려다보았다.

  “네가 그렇게까지 하려는 이유가 뭐지? 마계로 끌려간 그녀 때문인가?”

  디스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할 수 없는 놈이군.”

  마그네트는 지그시 그의 눈을 보았다. 이 미천한 생물이 무슨 생각으로 지엄한 드래곤을 귀찮게 하는지 궁금했다.

  그녀는 그의 눈동자 속에서 실의와 절망을 읽었다.

  마그네트는 곤혹스런 표정으로 그에게 말했다.

  “네 육신이 망가질 것이다.”

  “그, 그래도 좋습니다. 그녀를 구할 힘만 얻을 수 있다면.”

  “기억을 잃을 수도 있다. 미쳐 버릴지도 모른다.”

  키메라를 만드는 작업은 고도의 정밀함이 요구되는 어려운 실험이다.

  실제로 미쳐 버리거나 죽어 버리는 사고가 숱하게 터질 수 있다. 드래곤인 그녀조차도 완벽한 성공을 장담할 수 없을 정도다.

  하지만 디스는 완고했다.

  “상관없습니다. 그녀를 구할 수 있다면.”

  마그네트는 디스의 막무가내적인 태도에 눈살을 찌푸렸다.

  이 얼마나 불합리한 존재인가.

  그녀를 위해 인간임을 포기하겠다고?

  그렇게 얻은 힘으로 그녀를 구한다 해도 결국 그 자신은 다시는 인간으로 돌아갈 수 없게 된다.

  과연 자신을 버리고, 인간성을 버리면서까지 사랑을 지킬 필요가 있을까? 한낱 화학반응에 불과한 감정의 작용을 위해?

  그녀는 이해할 수 없었다.

  하지만 그 간절한 마음만은 충분히 읽을 수 있었다.

  “네가 그리 원한다면 네 목숨을 거두겠다. 지금 이 순간부터 넌 사신의 일원이다. 이름은 ... 발칸이라고 해두지.”

  그렇게 디스는 발칸이 되었다.

  쿠쿠쿵!

  마계의 문을 통과한 병규를 제일 처음 맞은 것은 웅장하게 내리 꽃히는 검은 뇌전이었다.

  검은 뇌전.

  특이하게도 이곳의 번개는 타락의 검은 빛을 띠고 있었다.

  츠즈즈즈즈.

  병규를 목적지로 안내한 마계의 문은 나타날 때처럼 요란한 소음을 내며 사라졌다.

  “ ... .”

  병규는 잠시 주위를 둘러보았다.

  삭막한 환경이 보였다.

  높은 산이 천지로 깔렸는데, 이상하게도 숲은 보이지 않았다. 아니, 나무 자체가 드물었다. 간혹 하나씩 보이는 것도 죄다 죽어가는 고목처럼 말라비틀어져 있었다.

  땅은 바짝 말라 가벼운 움직임에도 흙이 먼지처럼 일었고, 하늘은 끝을 알 수 없는 검은 구름으로 뒤덮여 간간히 검은 벼락을 지상에 떨구었다.

  맑은 강이 흘러야 할 계곡엔 시뻘건 용암이 꾸역꾸역 밀려가고 있었다.

  바람은 뼈가 시릴 정도로 차갑고, 반대로 땅에서 올라오는 지열은 숨이 턱턱 막힐 정도로 뜨거웠다.

  이 험악한 자연환경을 본 병규는 그제야 자신이 마계에 온 것임을 실감할 수 있었다.

  정말이지 절규를 터트리고 싶을 정도로 가혹한 환경이다.

  그런데 이상한 것은 이런 참혹한 주위 풍경을 보니 도리어 마음이 편해진다는 것이었다.

  마치 고향의 전원을 보는 것처럼.

  문득 병규는 자신을 유인한 쉐이드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기억해 냈다.

  ‘고향이라.’

  병규는 자신의 출발이 이곳이었음을 확신하게 되었다.

  ‘이럴 때가 아니지.’

  감상에 빠질 여유가 없었다.

  한시바삐 납치된 레종을 찾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막상 그녀를 찾으려니 난감함이 먼저 밀려왔다.

  레종을 찾으려면 쉐이드를 먼저 만나야 한다. 문제는 쉐이드가 이 넓은 마계 어디에 있는지 전혀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러려면 우선 쉐이드를 찾아야 한다.

  그런데 이 쉐이드란 놈을 찾을 방법이 없는 것이다.

  하지만 병규는 고민하지 않았다.

  찾을 수 없다면 오게 만들면 된다.

  한바탕 요란하게 일을 벌여 자신이 왔음을 알리면 되는 것이다. 

  그는 그렇게 생각했다.

  안 그래도 주위의 기운이 심상치 않았다.

  눈에 보이지 않는 수상한 기척이 다수 잡혔다.

  병규는 차라리 잘 되었다고 생각했다.

  찾으러 다닐 수고를 덜었으니 말이다.

  그런 그의 생각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괴이한 뿔고동 소리가 울려 퍼졌다.

  뚜우~

  가만 고동 소리를 듣던 병규는 차갑게 웃었다.

  “그런 것인가.”

  고동 소리가 울리자마자 엄청나게 많은 기척들이 동시에 움직이기 시작했다. 목표는 병규가 서 있는 바로 이곳.

  ‘함정이군.’

  예상하고 있었던 일이라 병규는 전혀 긴장하지 않았다.

  오히려 알 수 없는 이유로 약간의 흥분 상태가 되었다.

  그는 아직 자신의 힘이 어느 정도인지 실감하지 못했다. 게다가 방금 전 드래곤의 힘마저 얻었다.

  자신의 한계를 시험하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다.

  곧 수많은 무리가 나타났다.

  개미 떼처럼 몰려온 놈들로 작은 봉우리 하나가 그득 찼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사방 대지 위는 몬스터들로 시커멓게 뒤덮였다.

  하나같이 꿈에 볼까 두려울 정도로 추악한 몬스터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정면에 나타난 세 마리가 가장 추악했다.

  그리고 가장 강했다.

  암흑을 각성한 병규가 오싹한 한기를 느낄 지경이었다.

  병규는 놀라기보다는 전의를 불태웠다.

  “거창한 환영인사로군. 마음에 들어.”

  입가에 걸린 하얀 미소는 더없이 매력적이었다.

  수많은 적에게 둘러싸인 상태임에도 병규는 거침이 없었다.

  그는 자연스러운 걸음으로 선두의 세 마리에게 접근했다. 온몸에서 뿜어져 나오는 가공할 마기에 주위의 대기가 비틀리며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그 가공할 권능이 막 폭발하려는 찰나. 바로 그 순간이었다.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마물들이 일제히 병규를 향해 고개를 조아렸다. 땅에 머리를 대고, 감격에 찬 일성을 토해냈다.

  “왕이시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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