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멸의 전주곡이 울리다.
신성제국의 황제, 아이린 왕국의 여왕, 그리고 용맹한 용병왕의 역사적인 만남이 있은 지 며칠 후, 대륙을 깜짝 놀라게 만들 성명이 발표되었다.
바호크 제국에 맞서 아이린 왕국과 신성제국이 연합군을 형성한다는 성명이 바로 그것이었다. 이 성명엔 용병들 역시 연합군을 적극 지지한다는 내용도 포함되어 있었다.
임시 연합군의 대표는 샤바가 맡게 되었다.
신성제국의 황제만큼 연합군의 대표로 어울릴 만한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물론 샤바는 표면적인 대표에 불과했다.
내부적으로는 대륙의 정세에 대해 정통한 여러 관료들이 그를 보좌했다.
이날의 역사적인 성명에서 샤바는 ‘마계의 대륙 침공’ 을 알리고, 그 배경에 바호크 제국이 있음을 만방에 천명했다. 그의 충격적인 선언은 마법과 인편을 통해 각국에 전달되었다.
이 선언은 신성제국의 고위신관들인 ‘신의 제단’의 공인을 받았다. 이미 바호크에 대한 경고가 신탁의 형태로 각 신전에 내려졌던 것이다.
신성제국은 이드라센 대륙의 모든 종파에 직,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그런 신성제국이 아이린 왕국과 공조하며 바호크 제국을 악의 축으로 선언하게 되자, 이드라센의 모든 국가들은 즉시 뜨거운 반응을 보였다.
여태 잠자코 있던 소국들이 군대를 이끌고 연합군의 깃발 아래로 속속 모여들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연합군은 여러 소국과 드워프와 같은 이종족들을 흡수하며 꾸준히 세를 불렸다.
마계 토벌의 기치 아래 하나가 된 연합군은 성난 폭풍과 같은 힘으로 바호크를 몰아쳤다.
뭉쳐진 그들의 힘은 막강했다.
가히 파죽지세로 고란 산맥을 넘어 바호크의 영토로 밀려들었다.
신성제국의 신성기사단의 추진력은 바호크의 심장을 후벼팠고, 엘프들의 화살은 그들의 머리를 꿰뚫었으며, 아이린의 드래곤나이트들은 사악한 그들의 몸뚱이를 통째로 삼켰다.
그렇게 불과 석 달 만에 연합군은 바호크의 영통 중 절반을 차지하게 되었다.
미친 바흐만 황제의 목을 자르고, 마족으로부터 바호크 영토를 해방시키는 것도 그리 멀지 않아 보였다.
드디어 기나긴 전쟁도 끝을 향해 달리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전쟁이 끝나길 바란 것은 아니었다.
특히나 세상의 끝, 참혹한 어둠에서 온 초대받지 못한 손님들은 더더구나 그랬다.
자주색으로 변질된 달빛 아래, 몇 개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그들이 위치한 곳은 전장을 훤히 내려다볼 수 있는 이름 모를 산자락이었다.
전장의 상황은 여전했다.
연합군은 무서운 힘으로 전장을 휩쓸었고, 바호크 군은 겁먹은 강아지처럼 성안에 웅크리고 앉아 간간히 화살을 쏘아 보낼 뿐이었다. 더 이상 전쟁이라고 부를 수 없을 정도로 완전히 기운 전황이었다.
“쿠쿠. 연합군 분들은 아주 신이 났군요.”
전장을 내려다보던 쉐이드는 가는 미소를 그리며 킥킥거렸다.
처음 의도와 달리 상황이 묘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설마 중간계의 모든 종족이 연합을 맺어 대항할 줄이야.
이런 상황은 계략에 뛰어난 쉐이드조차 전혀 예상치 못한 것이었다.
“사실 전쟁에서 어느 쪽이 이기든 별 상관은 없지만 ... . 이래서야 볼거리가 너무 부족하군요.”
아쉬운 듯 쉐이드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원래 이번 전쟁은 오로지 병규를 자극시키기 위한 목적으로 일으킨 것이었다.
처음에는 쉐이드의 예상대로 진행되었다.
많은 사람이 전쟁이라는 소용돌이 속에 죽었고, 그만큼 많은 비명과 절규가 전장을 메아리쳤다.
생각대로 그는 전장에 나섰다.
당연한 일이다.
추악한 어둠을 갈구하고, 질시와 어둠, 공포와 저주를 탐구하는 절망의 지배자가 비명이 넘치는 전장에 모습을 드러내지 않을 까닭이 없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는 전혀 예상치 못한 전개였다.
이상하게도 그는 각성하지 않았다.
수많은 죽음. 아비규환의 처참한 절망 속에서도 그는 자신을 깨닫지 못했다.
오히려 전장의 참혹함이 짙어지자 알 속에 숨은 병아리처럼 아이린의 왕성에 틀어박힌 채 움직이지 않는 것이다.
예상치 못한 이변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설마 사라졌던 그녀를 이곳에서 보게 될 줄이야.”
쉐이드의 입에서 신음과 같은 음성이 새어 나왔다.
금발을 찰랑이던 소녀.
성루에 앉아있던 그녀를 발견한 순간 얼마나 놀랐던가.
퀴니.
그녀가 등장한 순간 이미 그의 계획은 엉클어진 실타래처럼 꼬여 버린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앞으론 마물들을 활용할 수 없겠군.”
그 어떤 대단한 마물들이라도 그녀 앞에선 한낱 귀여운 애완동물이 되어 버린다. 그녀는 바로 그런 능력의 소유자였다.
“비천하지만 쓸모가 많은 놈들이었는데.”
아쉽다는 듯 쉐이드는 입맛을 다셨다.
“할 수 없지. 마족들을 몇 명 불러들일 수밖에.”
쉐이드는 후 하고 한숨을 쉬었다. 마족을 중간계로 불러들이는 일은 그다지 내키지 않았다.
마족이란 존재들은 워낙 개성이 강한 성격들이라 무슨 일을 저지를지 알 수가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달리 생각해 보면 재미없게 흘러가고 있는 전황에 새바람을 불러일으키기에 마족들보다 더 적합한 존재도 없었다.
“모두 당신들이 자초한 일입니다. 나중에 절 원망해도 소용없답니다. 후후후.”
기세등등한 연합군의 진세를 내려다보며 쉐이디는 잔혹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건 그렇고. 그분을 어쩐다?”
그림자를 길게 늘이며 염두를 굴리던 그는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마침내 스스로 움직일 생각을 굳힌 것이다.
하긴 전쟁놀이도 슬슬 지겨워지려던 참이었다.
“자. 가자꾸나. 라이트. 드디어 네가 활약할 시간이 되었구나.”
“크흐흐흐.”
쇠줄을 끌자 짐승처럼 앉아있던 라이트의 입에서 진득한 목울림이 흘러나왔다.
그런 쉐이드의 등뒤, 두 명의 어두운 존재가 있었다.
조용히 쉐이드의 뒤를 따르는 둘의 입가에 잔혹한 미소가 어렸다.
다소 흥분한 음성이었다.
“드디어 절망의 마왕을 만나는군.”
“힘을 잃었다지? 과연 어느 정도일까. 제발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으련만. 흐흐흐.”
키득거리며 쉐이드의 뒤를 따르는 둘의 전신에서 섬뜩한 기운이 배어 나오고 있었다.
연합군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던 전장에 심각한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는 처음 나타날 때만 해도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몇 사람이 전장에 나타난 것뿐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것은 큰 착각이었다.
그들의 힘은 상상을 불허했다.
너무도 파괴적인 힘.
중간계의 마법과는 괘가 다른, 보다 혁신적이고 절대적인 파멸의 능력.
그것은 어둠의 힘이었다.
마족.
드디어 마계가 적극적으로 전쟁에 개입한 것이다.
탐욕스런 그들의 힘은 절대적인 위력을 과시했다.
신관의 축복을 받은 신성기사단은 쏟아지는 검은 뇌전 앞에 병든 짐승처럼 내몰리고, 엘프들의 화살은 안개처럼 뿌려진 어두운 그림자 앞에 힘을 잃고 말았다.
창공은 더 이상 드래곤나이트들의 무대가 아니었다. 그들과 함께 나타난 정체불명의 회색 마물들이 하늘을 누비면서 와이번과 드래곤나이트들은 더 이상 날개를 펼칠 수 없게 되었다.
무적을 자랑하던 샤바의 백성들도 그들의 힘 앞에서는 큰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사람들은 하늘을 올려다보며 외쳤다.
왜 신은 중간계를 외면하는가.
왜 마족들을 징벌하지 않는가.
하지만 끝내 하늘은 대답이 없었다.
마치 파멸의 구렁텅이로 굴러 떨어지는 세상의 모습을 즐기는 것처럼.
신에게 외면 받은 중간계는 결국 마족들의 강렬한 능력 앞에 힘없이 무너져 내리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바호크 땅을 해방시킬 것 같았던 연합군은 다시 패배의 고배를 마시며 고란 산맥까지 후퇴했다.
무기력한 패배를 반복하던 연합군은 총력을 기울여 고란 산맥에 진지를 구축하고, 바호크와 마족에 대항했다.
그 후로 한동안 연합군과 마계의 힘을 빌린 바호크는 피 말리는 대치전선을 계속 이어 나갔다.
바야흐로 전쟁은 장기전이라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 것이다.
연합군과 바호크의 전쟁이 심각한 지경으로 발전하고 있었지만, 정작 아이린이 자랑하는 블랙나이트 단장 병규는 수도 유리스의 시장을 쏘다니고 있었다.
그가 이런 비상시국에 전선이 아닌 수도에 머무르고 있는 이유는, 혹시나 있을지 모르는 자객의 위험으로부터 레종 여왕을 보호하기 위해서였다.
표면적인 이유는 그렇다.
하지만 실상 진짜 이유는 달랐다.
병규가 전장에서 이탈한 데에는 호랭이의 입김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트라우마의 전투에서 병규는 몇 번이나 암흑에 마음을 뺏길 뻔했다. 그런 위기 상황을 몇 번이나 곁에서 지켜보았던 호랭이는 결국 전쟁터가 병규에게 지극히 좋지 못한 영향을 끼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 이유로 병규는 전쟁이 심각해지고 있는 와중에도 여왕 보호라는 핑계를 대며 수도의 거리를 활보할 여유를 누리게 된 것이다.
물론 그를 전장에 붙들어 맬 권한은 그 누구에게도 없었다. 사실 그때만 해도 연합군은 연일 승승장구, 바호크를 몰아붙이고 있는 상태였기 때문이다.
시장의 분위기는 생각보다 어수선했다.
전선에서 멀리 떨어진 곳임에도 전쟁의 잔재가 여기저기 묻어 있었다.
장에 나온 사람들도 거의 생필품을 거래하기 위한 평민들이었다. 하지만 실제로 곡식을 구하기는 하늘의 별 따기였다.
어쩌다 나온 물량도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가격으로 거래되고 있어 사람들의 안색을 더욱 더 어둡게 만들었다.
오히려 시장 한쪽에 쌓인 과일의 향긋한 향기가 이질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생필품을 구하려는 사람들은 어쩐 일인지 과일엔 눈도 두지 않았다.
과일은 오래 보관할 수 없다.
영양에 비해 부피도 많이 차지하고 무겁기까지 하다.
물론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고 먹을 식량마저 떨어지면 상황은 달라지겠지만, 지금으로선 버리기엔 아깝고 가지기엔 부담스러운 계륵과 같은 존재였다.
호랭이를 어깨에 얹은 병규는 차분한 걸음으로 시장의 골목들을 지나쳤다. 어수선한 분위기 때문인지 문을 닫은 점포가 상당수였다.
그가 평소엔 관심도 없던 시장을 찾은 건 물건 하나를 사기 위해서였다.
생각대로 귀금속 가게들은 대부분 문을 닫은 상태였다.
포기하고 막 돌아가려던 찰라, 다행히 한적한 골목길 어귀에 자리한 보석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보석점의 입구엔 험상궂게 생긴 사내 둘이 인상을 찌푸린 채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병규가 접근하자 그들은 반사적으로 무기를 집어 들었다.
허리에 매여진 곡도. 허벅지를 요란하게 장식한 수 개의 단도. 그리고 등뒤로 비껴 맨 작은 가방.
병규는 그들이 용병임을 쉽게 눈치 챘다.
용병들은 병규와 눈이 마주치자 태연한 척하며 슬쩍 무기 위로 손이 움직인다.
“무슨 일인가!” 한쪽 눈에 검은 안대를 찬 애꾸가 굵직한 음성으로 물었다.
병규는 태연히 대꾸했다.
“보석을 사러 왔소.”
“흥. 그걸 어떻게 믿지?”
“다른 볼일로 보석가게를 찾는 사람도 있소?”
병규의 물음에 애꾸눈은 손가락으로 칼등을 퉁퉁 치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전쟁 때문인지 돈 대신 칼을 든 손님이 가끔 찾아오지.”
애꾸의 음성은 잔뜩 비틀어져 있었다.
칼 든 손님을 몇 번 접대했던 모양이다.
병규는 피식 웃었다.
그들의 위협이 가소로워서가 아니다. 단지 그들이 하는 말이 우스워서였다.
“그런데 날 언제까지 못 들어가게 막을 겁니까?”
“네가 위험한 놈이 아니라는 게 확실해질 때까지.”
“보다시피 난 아무런 무기도 가지지 않았소.”
병규는 용병들을 향해 두 팔을 벌려 보였다. 그는 헐렁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 어디에도 무기를 숨길 만한 곳은 없었다.
하지만 용병들은 손수 그의 몸을 세심히 살폈다. 확실하게 위험한 물건이 없다는 것을 확인한 후에야 그들은 문 앞에서 비켜섰다.
“들어가도 좋아.”
“수고가 많으시군요.”
병규는 험상궂은 인상의 용병들 사이를 태연히 걸어 들어갔다.
보석 가게의 내부는 겉보기와 달리 상당히 컸다. 게다가 화려했다.
붉고 푸른 마법등불로 조명을 밝힌 가게의 진열대엔 의외로 값진 물건들이 즐비했다.
싸구려 장신구들만 있을 것이라 생각한 병규에게 번뜩이는 가게의 물건들은 전혀 뜻밖이었다.
전쟁이 벌어지면 생필품 가게와 함께 제일 먼저 털리는 곳이 보석가게다. 대부분의 보석가게는 그런 분위기를 반영하듯, 굳게 문을 걸어 잠궜다.
그런데 이곳은 문을 활짝 열어 놓은 것도 모자라 고급스런 보석들을 점포 내에 그대로 방치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용병 둘이 입구를 지키고 있긴 했지만, 그 정도 방비는 있으나 마나 한 정도였다.
“어서 오십시오.”
부드러운 인상의 중년인이 그를 반갑게 맞았다.
깔끔한 차림에 싹싹한 행동이 목에 힘깨나 주는 다른 가게의 주인들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다른 가게는 모두 문을 닫았던데. 간이 크시네요.”
“모두가 안 한다고 저까지 그럴 수야 없지요. 전쟁 중이라도 보석이 필요한 사람은 있는 법이니까요.”
점주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쟁 중에도 보석은 필요하다.
사랑은 그 어떤 극한 상황도 극복하기 때문이다.
오히려 극적인 상황에서 꽃핀 애정이 훨씬 자극적이고 애절하지 않는가.
병규는 점주를 가만 쳐다보았다.
언제 전쟁의 불길이 수도를 덮칠지 모르는 상황에서 용병 둘에 의지한 채 보석가게 문을 연 그. 머리가 텅 빈 바보이거나 지나치게 통이 큰 사람일 것이다.
병규는 이 훤칠한 점주가 후자 쪽의 인물일 거라고 생각했다.
“무엇이 필요하십니까?”
“ ... 반지를 보여 주십시오.”
“가만 보아하니, 직접 쓰실 것은 아닌 것 같고 ... .”
점주는 그를 향해 한쪽 눈을 찡긋했다. 병규는 가벼운 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연인에게 선물하실 거라면 ... 이게 좋을 듯하군요.”
그가 꺼내 보인 반지는 은색의 얇은 테두리에 영롱한 붉은 보석이 눈동자처럼 박혀 있는 물건이었다.
그리 비싸 보이지도, 그렇다고 세공이 천박하지도 않았다.
점주는 친절하게 반지에 박힌 보석에 대한 설명을 곁들였다.
“붉은 신부라고 불리는 보석입니다. 과거 아이린 초대 국왕이 서거하셨을 때, 그분의 연인인 하이엘프가 흘린 눈물이라고 하죠. 그 때문에 순결한 사랑, 또는 죽음으로도 갈라놓지 못하는 영원한 맹세라는 뜻말을 가진 보석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글쎄요. 아무래도 하이엘프의 눈물이라는 소리는 노래하길 좋아하는 음유시인이 퍼트린 헛소문일 겁니다. 실제로 붉은 신부는 흔하게 채취되는 보석이니까요. 아! 물론 그렇다고 아주 싸구려 보석은 아닙니다.”
점주의 설명에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은백색의 링에 반짝 빛을 발하는 붉은 보석의 빛깔이 마음에 들었다.
“이것으로 하죠.”
값을 치루고 보석가게를 나선 병규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부르며 왕성을 향해 걸었다.
그의 어깨 위에 축 늘어져 있던 호랭이가 게으른 하품을 하며 물었다.
“하~음. 녀석, 기분이 그렇게 좋냐? 왜, 레종에게 반지를 줄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마음이 들떠?”
“후후. 글쎄요.”
반지는 레종에게 선물할 것이었다.
생일 선물로 줄 물건이지만 사실 레종의 생일은 한참 전에 지나 갔다.
불행하게도 그녀의 생일은 바호크가 트라우마를 압박하던 급박한 시기였다. 당연히 생일을 챙겨 줄 여유가 없었다.
레종과 함께 수도로 돌아온 병규는 어제야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달았다. 이미 지난 생일이긴 했지만 그녀에게 뭔가를 선물하고 싶었다.
한동안 뭘 할까 고민하던 병규는 결국 반지를 선물하기로 결심했다. 그래서 시장을 찾은 것이다.
그가 굳이 반지를 선택한 것은 그녀에 대한 자신의 마음을 알리기에 더없이 적당한 패물이었기 때문이다.
다행히 늘상 마음에 걸리던 퀴니는 이곳에 없었다.
그녀는 샤바와 함께 최전방을 지키고 있었다. 샤바는 신성제국의 황제라는 신분 때문에 전선을 벗어나기 힘들었고, 퀴니는 몬스터들을 제어하기 위해 전선에 남았다.
물론 퀴니는 몇 번이고 병규에게 돌아오고 싶었지만, 쉐이드의 지배력에 고통받는 몬스터들의 울부짖음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생이별을 감내해야 했다.
병규는 이 기회를 빌어 레종에게 고백할 생각이었다.
찌릿.
행복한 상상을 하며 흥겹게 걸음을 옮기던 병규의 발걸음이 어느 순간 멈춰졌다.
좋지 않은 느낌.
저 멀리서 오싹한 기운이 솔솔 풍겨왔다.
“뭐냐?”
졸고 있던 호랭이도 고개를 번쩍 치켜들었다.
잠이 확 깰 정도로 지독한 살기였다.
‘노골적이군.’
누군지는 몰라도 상당히 노골적으로 적의를 뿜어내고 있었다. 상당히 떨어진 거리였지만 기운이 확연히 느껴질 정도였다.
그때, 쿵 하는 소음과 함께 내성 근처에서 먼지구름이 솟구쳤다.
“누군지는 몰라도 꽤 요란하군.”
호랭이가 혀를 끌끌 찼다.
왕국의 수도에서 저렇듯 소란스럽게 일을 벌이는 것을 보면 분명 머리 좋은 녀석의 소행은 아닐 것이다.
저거야말로 내가 말썽을 부리니 와서 봐 달라는 격이 아닌가.
“ ... 가 보죠.”
무시하기엔 저쪽의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게다가 말썽이 일어난 장소도 마음에 걸렸다.
병규는 먼지구름이 치솟은 곳을 향해 바람처럼 달려갔다.
수직의 담을 타고, 가옥들의 지붕을 평지처럼, 병규는 폭음이 들려온 곳을 향해 일직선으로 달렸다.
워낙에 빠른 몸놀림이라 순식간에 현장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음.”
먼지구름이 채 걷혀지기도 전에 도착한 현장에서 그를 제일 먼저 반긴 것은 비릿한 피 냄새였다.
그리고 죽음이 있었다.
수십 명의 병사들이 팔다리가 찢겨진 참혹한 모습으로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방금 전에 죽은 시신들은 아직도 피를 뿜어내고 있었다.
시신들 중엔 간간이 근위기사들의 모습도 보였다.
근위기사들은 적어도 소드엑스퍼트 중급의 실력자다. 그런 실력자들이 구겨진 종이 조각처럼 뭉개져 있었다.
바람이 불자 피 냄새와 더불어 피보라가 자욱하게 날렸다.
“어라?”
죽음만이 휭하게 남아있는 그곳에 돌연 컬컬한 음성이 들려왔다. 병규는 음성이 들려온 방향으로 고개를 돌렸다.
기괴한 분위기를 풍기는 녀석이 둘이나 있었다.
하나같이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겼다. 그리고 그들의 생김새는 분위기보다 오히려 더 기괴했다.
그 중, 병사들의 시신 위에 거만한 자세로 앉아 있던 녀석이 인상을 찌그리며 입을 열었다.
“이 녀석은 또 뭐야?”
호리호리한 체격에 창백한 얼굴. 시체처럼 파리한 입술.
방금 무덤에서 일어난 것 같은 모습의 괴인은 놀랍게도 이마에 두 개의 뿔이 나 있었다.
녀석이 병규를 보며 고개를 갸웃했다.
“누구지? 우리 말고 또 중간계로 나온 마족이 있었던가?”
녀석은 병규의 몸속에 내제된 어두운 기운을 느낄 수 있는 듯했다.
머리를 굴리던 녀석은 문득 생각난 듯 눈동자를 번뜩였다.
“클클. 설마 당신이 그 절망의 마왕 벨로로폰이란 말인가? 크흐흐. 이거야 원. 아무리 힘을 잃었다고 해도. 이건 너무도 보잘것 없는 모습이 아닌가. 이봐. 컨퓨전. 설마 저게 벨로로폰은 아니겠지?”
킥킥대는 녀석은 병규의 몸에서 풍기는 미약한 어둠이 가소롭게 느껴지는 모양이었다.
병규는 그를 무시했다. 대신 컨퓨전이라 불린 사내에게 고개를 돌렸다.
“음.”
병규의 입에서 가벼운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그 모습이 너무도 기괴했기 때문이다.
특히나 눈에 띄는 것은 무지개 색으로 번뜩이는 놈의 외피였다. 물고기 비늘과 같은 놈의 피부는 카멜레온처럼 색이 수시로 변했다.
그렇게 화사한 피부를 가진 녀석의 덩치는 또 육중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식하게 굵은 팔뚝은 웬만한 장정의 허리통만 했다.
그런 팔이 무려 다섯이나 있었다. 특이한 것은 오른팔은 셋이고, 왼팔은 둘뿐이라는 점이었다.
얼굴 또한 불균형의 극치였다.
손으로 대충 주물럭주물럭 형태를 잡아 놓은 것처럼 이목구비가 엉성했다.
“마족인가?”
병규는 짧고 간결하게 물었다.
건조한 목소리.
호랭이는 탁해진 그의 음성에 깜짝 놀랐다.
확실히 달라진 분위기. 병규는 좀 전까지 보석점의 점주와 웃으며 농담을 건네던 모습과는 확연한 차이를 보이고 있었다.
과연 같은 사람인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어라?”
시체처럼 파리한 안색의 괴인. 디바울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리곤 웃었다.
징그럽게.
“우리가 사람을 잘못 봤나? 그렇게 자극했는데도 반응이 고작 이정도야?”
어처구니가 없다는 태도다. 그의 말을 컨퓨전이 받았다.
“힘을 잃었다더니. 설마 이 정도인 줄은 몰랐군. 이렇게 무능한자로 전락하다니.”
꿈틀.
병규의 미간이 심하게 휘어졌다.
두 가지 이유 때문이다.
하나는 물론 놈들의 말이 불쾌했기 때문이고, 다른 하나는 자신을 자꾸만 절망의 군주라고 칭했기 때문이다.
놈들은 자신을 안다.
아니, 자신 속에 숨겨진 어둠을 알고 있다.
하지만 병규는 조급해하지 않았다.
궁금한 것은 지금부터 천천히 알아내면 되는 것이다.
“마족이 확실한 것 같군. 그런데 이곳엔 무슨 볼일이지?”
병규의 음성은 여전히 차분했다.
시신을 방석같이 깔고 있는 놈에게 묻는 질문치고는 지나치게 평이했다.
디바울은 피식 웃었다.
그는 손가락으로 엉덩이 밑의 시신들을 가리켰다.
“이런 짓가리가 하고 싶어서 왔다.”
컨퓨전이 다시 그의 말을 받았다.
“그리고 당신을 보고 싶었지.”
병규는 그들의 말에 그다지 신경 쓰지 않았다. 오히려 시선을 그들의 등뒤로 돌리며 인상을 찌푸렸다.
“동료가 더 있었군.”
그의 시선이 머무르는 곳은 내성의 깊은 곳이었다. 그곳에서 이질적인 기운이 풍겨오고 있었다.
“아~ 쉐이드?”
디바울은 손가락으로 귀를 파며 심드렁하게 말했다.
“후~ 글쎄, 그 녀석은 레종인지 뭔지 하는 것을 잡는다고 하던데?”
촤아아악!
그가 레종을 언급하는 순간, 돌연 병규가 움직였다. 그 움직임이 얼마나 빨랐던지 파공음이 귀를 찢는 것처럼 울렸다.
딴청만 하던 디바울과 컨퓨전도 동시에 몸을 움직였다.
쿵!
묵직한 폭음이 울렸다.
가공할 힘의 충돌에 땅이 움푹 파이고, 먼지가 하늘 높이 솟았다. 그 먼지구름 속에서 한 인영이 튕겨 나왔다.
병규였다.
어느새 그의 입가에 피가 배어 나왔다.
“크큭. 안 되지 안 돼. 쉐이드가 당신을 이곳에 묶어 두라고 부탁했거든.”
먼지 안에서 음침한 음성이 흘러나왔다.
디바울이라는 녀석이었다.
녀석은 한 팔을 내민 자세로 병규를 향해 손가락을 흔들어 보였다.
그 비쩍 마른 손 하나가 병규를 막았다.
무섭게 달리는 기세를 팔 하나로 가볍게 막은 것이다.
디바울 뒤에는 컨퓨전이 서 있었다.
만약을 위해 이중으로 방어벽을 세운 것이지만 쓸 일이 없었다.
절망의 군주는 실망스러울 정도로 약해졌다.
병규는 말없이 자리에서 일어섰다.
방금 모욕을 받은 것은 까맣게 잊은 듯, 태연히 옷을 툭툭 털었다. 그의 행동이 이상한지 디바울은 고개를 외로 기울였다.
“갑자기 미친 오크처럼 날뛰더니 이번엔 또 이상하게 조용하네. 미쳤나?”
정말로 이상했다.
한순간 조급해 보이던 병규의 얼굴이 이제는 안정마저 느껴졌다.
“이제는 안심해도 되니까.”
“이해할 수 없는 말이군. 설마 방금 전에 지나간 그 하얀 짐승 때문은 아니겠지?”
병규는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는 비록 디바울에게 막혔지만 그 소란 중에 어깨에 있던 호랭이는 포위를 뚫고 안으로 들어갔다.
그것으로 되었다.
호랭이라면 충분히 레종을 지킬 수 있을 것이다.
지금부터는 마음 편하게 이 두 마리의 괴물을 상대해야 한다.
그런데 그것이 그닥 쉽지가 않았다.
방금 전의 격돌로 느꼈지만 놈들의 힘과 기세는 지금까지 상대한 그 어떤 존재들보다 막강했다.
다행히 그 혼자 놈들을 상대할 필요는 없을 듯했다.
몇 개의 기척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곧 일곱 사람이 현장에 도착했다.
각기 늙고, 크고, 작고, 기괴하고, 냉정하고, 수상하고, 보이지 않는 기색을 풍기는 그들.
바로 마일드의 일곱 사신들이었다.
그들은 병규가 전장을 떠날 때, 샤바가 호위로 붙여준 사람들이었다. 자신이 함께 가지 못하는 대신이라는 이유였다.
물론 병규는 그들을 원치 않았다. 하나같이 기괴한 그들이 뭐가 좋아 달고 다니겠는가. 하지만 신성제국의 황제가 하사한(?) 사람들을 거부할 명분도 없는 터라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끌고 아이린 왕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막상 이곳에서도 그들을 쓸데가 없었다.
아니, 오히려 방해만 되었다.
마그네트가 매일 그에게 찾아와 제발 샤바에게 돌아가게 해달라고 사정사정했던 것이다. 그녀는 걱정은 샤바 곁에 퀴니가 있다는 것에 기인했다.
이 습관성 기억상실증 드래곤은 자기 정체성을 잃어버린 채 죽어라고 바퀴벌레 왕자만을 그리워했다.
하지만 병규라고 뾰족한 수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가고 싶으면 가라고 말했지만 마그네트는 샤바의 허락이 없으면 안 된다면서 펑펑 울기만 했다.
병규로서는 참으로 난감하기 그지없는 사태였다.
그런데 그렇듯 난감하던 사신들이 막상 오늘과 같은 일이 터지자 더없이 든든한 아군이 되는 것이다.
본시 사신들의 직업은 어세신. 그것도 대륙 제일을 호가하던 유명인들이다. 한마디로 적을 제거하는 데는 최고의 능력을 가진 자들이라는 의미다.
“어두운 기운!”
“마계 놈들이군.”
눈썰미가 예리한 사신들은 컨퓨전과 디바울의 정체를 단숨에 꿰뚫어 보았다.
“날파리들이 또 날아들었군.”
컨퓨전은 철판을 긁는 듯한 거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귀찮은 듯한 태도였다.
마일드의 사신들을 이처럼 대할 수 있는 이는 전 대륙을 뒤져도 결코 흔치 않았다. 고작 병규나 샤바 정도에 불과했다.
그때, 뚫어져라 병규를 쳐다보고 있던 디바울이 컨퓨전에게 말을 걸었다.
“과연 저자가 정말로 절망의 군주일까?”
컨퓨전은 미련한 음성으로 되물었다.
“그건 왜?”
“너무 형편없잖아.”
“그래도 쉐이드는 그가 그분일 거라고 말했잖아. 아마 맞을 거야.”
“그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잖아.”
“아직까지 쉐이드는 한 번도 틀린 말을 하지 않았어. 내가 그를 만난 천년 동안 한 번도 말이지.”
“흥. 그동안 옳았다고, 앞으로도 옳으리라는 보장은 결코 없지.”
투덜거리는 디바울의 태도에 컨퓨전은 다섯 개나 되는 팔을 펼쳐 보이며 귀찮은 듯 물었다. 그는 이런 식의 긴 대화가 싫었다. 귀찮았기 때문이다.
“무슨 생각인거지?”
“그를 시험하고 싶어져서 말이지.”
컨퓨전은 한 팔로 턱을 쓰다듬고, 다른 한 팔로는 머리를 긁적였다. 그리고 또 다른 두 팔은 허리에 척 걸치고 마지막 남은 팔로는 엉덩이를 긁적였다.
그런 복잡한 행동을 하면서 정작 하는 말은 간단했다.
“만약 진짜라면?”
물어보는 컨퓨전을 향해 디바울은 흉측하게 웃었다.
“절망의 군주를 처리한 마족으로 마계에 명성을 떨치겠지.”
“좋아. 결정했다.”
끝내 디바울은 병규를 시험해 보기로 결정했다.
사실 말이 시험이지 할 수만 있다면 죽일 작정이었다.
절망의 마왕이란 명성은 듣는 것만으로도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가공하지만, 그런 그를 쳐죽였을 때의 짜릿한 쾌감을 생각하니 도저히 가만있을 수가 없었다.
디바울이 이런 과감한 결단을 내린 건 병규의 기세가 너무도 보잘것 없었기 때문이다.
정말 눈에 보이는 이 정도가 다라면 벌레를 밟듯이 간단히 죽여 버릴 수 있을 것이다.
“부디 날 실망시키지 않았으면 좋겠군.”
되살아난 시체처럼 비릿한 웃음을 풍기며 디바울은 병규를 향해 성큼성큼 걸었다.
“이런, 그럼 난 고작 이런 피라미들을 상대해야 하는 거야?”
컨퓨전은 불만스레 중얼거렸다.
그러면서도 기우뚱거리는 불편한 걸음으로 사신들을 찾았다. 하지만 사신들은 이미 제자리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어라? 다들 어디 갔지?”
컨퓨전은 미련하게 보이는 모양새로 머리를 긁적였다. 그러다 둔한 움직임으로 한 팔을 땅속에 집어넣었다.
“여긴가? 마치 물을 참방거리듯, 땅을 헤집자 손끝에 뭐가 걸려들었다. 슬그머니 들어보니 작은 사람 하나가 걸려 올라왔다.
나이프였다.
은밀히 땅속에 숨어들었던 나이프는 허무하게 적의 손에 붙들린 작금의 현실이 믿기지 않는 듯 두 눈을 부릅 뜨고 있었다.
설마 오우거처럼 미련해 보이던 녀석의 눈썰미가 이토록 뛰어날줄이야.
하지만 비록 그렇게 깜짝 놀랄 상황이라 해도, 나이프는 사신의 일원이다. 넋 놓고 당할 위인이 결코 아닌 것이다.
“죽어라!”
그가 두 손을 펼치자 수십 개의 단도가 쏘아졌다.
제각각 날아간 단도들은 컨퓨전의 눈과 귀, 턱 아래, 그리고 명치와 같은 치명적인 급소를 노렸다.
다급히 뿌려낸 것임에도 놀랄 정도로 정교하고 예리한 수법이었다. 하지만 컨퓨전은 느린 대신 팔이 여러 개였다.
나이프를 잡은 손을 제외한 네 개의 팔을 풍차처럼 휘두르며 단도들을 모조리 치워 버렸다.
그러나 그가 팔을 모두 사용해 단도를 치워 버리는 사이, 등뒤까지 소리 없이 다가온 노인은 지팡이를 사용할 기회를 얻을 수 있었다.
크리티컬.
치명적인 암살을 전문으로 하는 그였다.
비록 마족들의 급소가 어딘지는 알지 못하지만 머리통이 깨지면 누구도 살 수 없다는 것을 잘 아는 바였다. 하지만 그의 단순하고 빠른 공격은 어이없게도 빗나가고 말았다.
분명 그의 지팡이는 컨퓨전의 머리통을 찔렀다.
그러나 그렇게 확신한 순간, 컨퓨전의 그 찰흙 같은 머리통이 꾸물텅 어깨 쪽으로 이동하는 것이었다.
“뭣이!”
눈이 튀어나올 만큼 놀랐다.
설마 머리통이 제 맘대로 위치를 바꿀 줄이야. 가히 상식이 뒤집혀지는 순간이었다. 그런 놀라운 일이 연속적으로 벌어졌다.
갑자기 컨퓨전의 등뒤에서 팔이 쑥 하고 튀어나온 것이다.
여섯 번째 팔이었다.
너무도 급작스럽고, 어이없는 일이라 크리티컬은 일격을 허용하고 말았다.
말린 휴지조각처럼 날아간 크리티컬은 육중한 철문에 쾅 몸을 부딪쳤다. 바닥에 널브러진 그의 왼쪽 팔과 다리가 기묘한 각도로 꺽여 있었다.
부러진 것이다.
그나마 바인딩이 급하게 붕대로 컨퓨전의 팔을 봉쇄하지 않았다면 단순히 팔, 다리가 부러지는 정도로 끝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건 또 뭐야.”
컨퓨전은 팔을 휘감은 붕대를 반쯤 감은 눈으로 쳐다봤다. 그러다 붕대를 따라 쭉 시선을 이동했다.
전신에 붕대를 감은 바인딩은 이때를 놓치지 않았다.
“봉쇄!”
그의 전신에서 붕대가 뻗어나갔다.
컨퓨전은 여러 개의 팔을 내밀어 붕대를 쳐내려 했지만, 바인딩의 붕대는 하늘하늘 휘어지며 순식간에 컨퓨전의 전신을 감쌌다.
“사일런스!”
컨퓨전을 봉쇄한 바인딩이 급히 이 괴인을 불렀다.
크리티컬 주위에 나타난 바인딩은 손으로 입을 꿰멘 실을 뜯어내더니 흉측한 입술을 한껏 벌리며 늑대처럼 울었다.
“우워어어어어어.”
낮고 길게 이어진 음파는 기이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귀를 자극하는 그의 울부짖음은 귀 안의 신경을 자극하여 균형을 잃게 만들었다.
철벽과 같던 컨퓨전도 그 울음에는 당할 수 없는 지 휘청 균형을 잃었다.
그때 차가운 한기를 이끌며 서릿발 같은 두 줄기 섬광이 컨퓨전을 쳐 갔다.
카리오스였다.
그가 휘두른 에고소드 ‘혼란’은 정확히 컨퓨전의 한 팔을 잘라내고, 디시 컨퓨전의 목을 절반이나 갈랐다.
“켁켁.”
팔과 함께 떨어진 나이프는 간신히 숨통이 트였는지, 기침을 해댔다. 카리오스는 재빨리 나이프를 질질 끌며 뒤쪽으로 자리를 옮겼다.
팔을 자르고 목을 반으로 갈랐지만 아직 컨퓨전에게서 흘러나오는 기세는 줄어들지 않았다.
‘퇘퇘! 더러워. 더러워. 지독한 맛이군.’
카리오스의 에고소드 ‘혼란’은 컨퓨전의 피 맛이 영 마음이 들지 않는 듯했다.
“어라?”
컨퓨전은 팔과 목이 잘린 상황이 믿기지 않은 듯, 머리를 갸웃거렸다. 그때마다 갈라진 목구멍에서 피 대신 멀건 액체가 울컥 울컥 솟았다.
그 액체에선 지독한 악취가 풍겼다.
“어라 ... 어라? 이거 팔 하나가 떨어졌는걸?”
바닥에 꿈틀대는 자신의 팔을 내려다보던 컨퓨전의 얼굴 위로 굵은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감히 이 버러지 같은 녀석들이.”
성난 분노를 토한 컨퓨전이 돌연 쿵쾅거리며 사신들에게 달려들었다. 마치 고릴라가 걷듯 웅크린 채 팔과 다리를 동시에 써서 움직였다.
무지막지한 힘에 지금까지 그를 봉쇄하고 있던 붕대들은 허무하게 찢어져 버렸다.
컨퓨전이 붕대를 한 손에 감고 휘두르자 바인딩이 허무하게 딸려왔다.
“귀찮은 벌레!”
부웅 하고 휘둘러진 컨퓨전의 거대한 팔이 바인딩의 멸치 대가리 같은 얼굴을 덮쳤다. 그 순간 마그네트의 앙칼진 목소리가 울렸다.
“어딜!”
그녀의 능력은 상대의 신체 일부를 강력한 자석으로 만드는 것이었다. 마그네트는 빠르게 손가락으로 컨퓨전의 심장과 다섯 개의 팔을 가리켰다.
그것으로 모든 준비는 끝이었다.
그녀의 힘은 즉각적으로 위력을 발휘했다.
컨퓨전의 심장과 팔은 각기 다른 극의 자성을 띠게 되었다. 응당 그 많은 팔이 주인의 심장을 향해 달려들어야 정상이었다.
하지만 그녀가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이 하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컨퓨전의 힘.
무지막지한 그의 거력은 마그네트의 자력을 깡그리 무시했다. 물론 바인딩을 향해 휘둘러진 팔도 그 위세 그대로 펼쳐졌다.
빵!
고무풍선 터지는 소음이 터졌다. 소리보다 더 빨리 터진 것은 바인딩의 몸뚱이였다.
그는 한쪽 어깻죽지가 완전히 터져 버린 몰골로 바닥에 쑤셔 박혔다. 대리석이 깊게 깔린 바닥이었다. 그 바닥에 그는 쭈그러진 풍선과 같은 몰골로 허리 아래가 파묻혀 버렸다.
입가에서 피거품이 부글부글 일었다.
허무하게 바인딩이 당하자 사신들 모두는 확연히 놀랐다. 하지만 비명을 지른다거나 분노하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들을 각자의 무기를 꺼내 들고 컨퓨전을 포위하듯 감쌌다. 모든 힘을 총동원하여 소리 없이 컨퓨전을 해체하려 들었다.
분노 대신 복수!
비명 대신 급소를 노린 한 번의 칼질.
하지만 모두 소용없었다.
한바탕 시끄러운 소음이 연속적으로 터진 후, 바인딩을 제외한 사신들은 각기 컨퓨전의 굵은 팔에 목을 잡힌 신세가 되었다.
물론 컨퓨전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온몸에 성한 곳이 없을 정도로 심한 부상을 입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전혀 아파하지도 괴로워하지도 않았다.
고통을 전혀 모르는 듯했다.
“이제야 다 잡았군.”
컨퓨전은 흡족하게 웃었다.
그때, 마지막까지 가장 심한 반항을 하던 카리오스가 빙긋 미소를 지었다. 돌연 바닥에 떨어졌던 그의 검. 에고소드 혼돈이 유령처럼 솟구치며 컨퓨전의 가슴에 틀어박혔다.
마지막 한 수였다.
서걱!
소름끼치는 소음이 일었다.
가슴을 파고든 검긑이 컨퓨전의 두터운 등뒤로 삐죽 고개를 내밀었다.
하지만 컨퓨전은 미동도 않았다.
오히려 멀뚱히 자신의 가슴에 박힌 혼돈을 내려다보는 것이었다.
“신기한 칼이다.”
공연히 입맛을 다시던 혼돈이 입을 아래로 내렸다.
말 그대로 그의 입이 턱 아래로 줄줄 흘러내리더니 목을 타고 가슴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혼돈을 덥석 물었다.
으직! 으직! 까득.
혼돈은 그렇게 컨퓨전에게 먹혔다.
“큭! 이익!”
산 채로 부서지는 혼돈의 모습에 카리오스는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목을 잡고 있는 컨퓨전의 손은 무쇠로 만든 기둥처럼 꿈쩍도 않았다.
그제야 모두는 절감할 수 있었다.
컨퓨전이라는 마족이 얼마나 강한 자인가를.
“자~ 그럼 이번엔 또 누굴 먹어 볼까?”
컨퓨전의 눈이 희번득거리며 빛났다.
암담한 절망이 그들을 엄습했다.
그때였다.
차박차박 하는 발소리와 함께 괴이한 생물이 컨퓨전의 전면에 나타났다.
그 괴이한 모습은 천하의 컨퓨전조차 눈을 떼지 못할 정도로 기이했다.
“저건 뭐지? 사람 같기도 하고, 짐승 같기도 하고, 요상하군.”
생긴 모양은 꼭 사람이다.
그런데 네 발로 걷는다.
사람은 꼬리가 없다.
그런데 놈은 마치 척수를 길게 잡아 뽑은 것 같은 꼬리가 있었다.
사람은 말을 한다.
그런데 놈은 짐승처럼 갸릉갸릉 하면서 우는 것이다.
인간이되 짐승의 모습을 한 괴이한 생물, 그것은 바로 노괴였다.
디바울은 느긋하게 움직였다.
여유로움마저 느껴지는 걸음이었다.
그는 마치 맛있는 먹잇감을 앞에 두고 즐기듯, 천천히 병규에게 접근했다.
휘파람 소리로 노괴를 호출한 병규는 비로소 디바울을 보며 팔을 좌우로 비스듬히 펼쳐냈다.
차아아악!
그의 손끝에서 요수의 발톱이 요사스런 빛줄기를 뿜어냈다.
“나도 비슷한 재주를 가지고 있지.”
디바울이 양손을 들어 올리자 검은 손톱이 쭉 뻗어 나왔다.
그 길이는 요수의 발톱과 정확히 일치했다.
병규의 힘을 보고 일부로 그대로 흉내낸 것이다.
마치 고양이가 쥐를 농락하듯이.
“당신이 정말로 절망의 군주인지 이제부터 천천히 확인해 보도록 하지.”
하지만 느긋한 말과는 달리 디바울은 번개같이 움직였다.
팡!
하는 기쾌한 파공음이 들리더니 어느새 병규의 코앞에서 손톱을 휘두르고 있었다.
병규는 급히 상체를 뒤로 기울이며 손톱을 쳐냈다.
치앙!
불꽃이 현란하게 튀었다. 그러나 간신히 디바울의 손톱을 쳐낸 병규는 이미 그 자리에 없었다.
그는 바람과 같은 스피드로 디바울의 등뒤로 돌아갔다.
그리곤 그대로 요수의 발톱을 그었다.
촤아아악!
요수의 발톱이 비명을 지르며 요기를 뿌렸다. 그대로 디바울의 등이 갈라졌다. 하지만 그것은 착각이었다. 이미 디바울은 그 자리에서 이동한 후였다.
결국 병규가 가른 것은 디바울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나도 꽤 빠르지.”
속삭이는 듯한 그의 음성이 등뒤에서 들렸다.
병규는 뒤를 돌아볼 틈도 없이 펑그르르 신형을 돌렸다.
검은 손톱이 병규가 있던 자리를 거칠게 그었다.
풍차처럼 휘둘던 병규는 훤하게 드러난 디바울의 상체를 향해 손을 쫙 뻗어냈다.
“증압!”
드드등!
묵직한 압력이 디바울의 전신을 내리눌렀다.
“끅?”
뼈와 거죽만 남은 디바울의 몸뚱이가 바닥에 바짝 짜부라졌다.
튕기듯 신형을 바로잡은 병규는 즉각 팽이처럼 회전하며 다시금 디바울을 덮쳤다.
촤악!
요수의 발톱이 땅바닥에 갈고리로 후벼 판 듯한 흔적을 남겼다. 하지만 이번에도 디바울은 그 자리에 없었다.
“느려.”
속삭이는 음성과 함께 뜨거운 기운이 병규의 어깨를 스쳤다.
재빨리 몸을 움직였는데도 디바울의 손톱을 미처 피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병규는 상처를 돌볼 새도 없이 즉각 반격을 날렸다.
촹!
디바울은 가볍게 병규의 공격을 막아냈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병규는 이번 공격에 오우거의 힘을 실어 넣었던 것이다.
“큭?”
디바울의 훤칠한 몸뚱이가 막강한 힘에 밀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다.
휘릭 하고 달려간 병규는 공처럼 바닥에서 튕긴 디바울의 몸을 팔꿈치로 사정없이 갈겼다.
빠가각!
바닥으로 추락한 디바울의 몸에서 부서지는 소리가 터졌다.
“갈라져라!”
병규는 팽이처럼 회전하며 요수의 발톱으로 디바울의 몸뚱이를 사정없이 난자했다.
이번에는 느낌이 있었다.
서서서서걱!
섬뜩한 소음과 함께 피가 튀었다.
“헉헉.”
요수의 발톱으로 디바울의 배가 가슴을 수십 조각으로 찢어놓은 병규는 거친 숨을 헐떡였다.
오우거의 힘으로 디바울을 메치고, 팔꿈치와 요수의 발톱을 비틀어 넣을 때까지 걸린 시간은 찰나라고 표현할 수 있는 잠깐의 순간에 불과했다.
그 짧은 시간 동안 병규는 극한의 힘을 짜낸 것이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마침내 거만한 마족 놈을 사정없이 난도질했다는 사실. 가만 숨을 고른 병규는 살아있는 다른 마족을 향해 신형을 돌렸다.
그러나 그는 단 한 걸음도 옮기지 못했다.
갑자기 들려온 괴기한 음성이 그의 발을 붙들었기 때문이다.
“이봐. 설마 지금 날 두고 가려는 건 아니겠지?”
병규의 고개가 천천히 뒤로 돌아갔다.
부스스 일어서고 있는 디바울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잘려진 내장이 후두둑 떨어지는 배를 보며 구시렁거렸다.
“젠장. 꼴이 말이 아니군. 썰어도 아주 제대로 썰었군.”
보통 사람이면 죽어도 골백번은 더 죽었을 상처를 입고도 디바울은 고작 정육점의 고기 신세가 되었다며 투덜거리는 게 다였다.
그제야 병규는 다 잊고 있었던 한 가지를 기억해 낼 수 있었다.
마족.
놈은 인간이 아닌 것이다.
“자. 2차전을 시작해 볼까?”
디바울이 싱긋 웃었다.
그는 이 싸움을 즐기고 있는 것이다.
둘은 누가 먼저랄 것이 없이 동시에 몸을 날렸다.
두 줄기 바람처럼 마주친 둘은 물갈래가 만나 소용돌이를 일으키듯 맹렬한 접전을 벌였다.
치지지지징! 치잉! 찡찡!
요수의 발톱과 손톱이 정신없이 마주쳤다.
눈동자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빠른 공방이었다.
이번만은 오우거의 힘도 통하지 않았다. 놀랍게도 디바울은 괴력이 실린 병규의 공격을 간단하게 막아냈다.
“아까 전에는 네가 그런 힘이 있는 줄 몰랐다. 있다고 진작 얘기했으면 뱃가죽이 이렇게 망가지도록 멍청하게 당하지는 않았지.”
스피드에는 스피드, 힘에는 힘.
디바울은 그 어떤 방면으로도 병규에게 밀리지 않았다.
승패는 보나마나 뻔했다.
병규는 최선을 다했지만, 디바울은 아직 여유가 있었다.
병규의 공격을 모조리 거둬내면서도 한바탕 요란하게 하품을 흘릴 정도로.
“하음. 느리다. 느려. 하품이 나와서 참을 수 없군.”
차아앙!
날카로운 치찰음과 함께 병규의 몸이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디바울의 무력에 밀린 것이다.
“이번엔 네가 당할 차례다.”
먹구름에서 쏟아진 벼락처럼 디바울이 병규에게 바싹 다가붙었다. 팔꿈치가 날아들었다.
촉망 중에도 병규는 팔을 들어 막았다. 하지만 디바울의 엄청난 괴력에 밀려 그만 땅으로 추락했다.
쿵!
둔중한 울림과 함께 바닥에 떨어진 병규는 격렬한 통증에 몸을 벌벌 떨었다.
“이 다음이 아마 손톱이었지?”
디바울이 검은 손톱을 세우며 병규의 몸을 사선으로 그었다.
하지만 병규는 결코 호락호락 당해 줄 생각이 없었다.
그는 급히 몸을 구르며 숨겨 놓았던 비장의 한 수를 펼쳤다.
필립 공작에게서 빼앗은 힘.
절대 극한의 냉기.
병규가 손을 휘두르자 지독한 냉기가 별 가루처럼 뿌려졌다.
그 냉기가 얼마나 차가운지 주위의 대기가 급속히 냉각되며 풀썩 서리가 내렸다.
과연 이 돌연한 공격은 효과가 있었다.
일시적이나마 디바울의 움직임을 둔하게 만들었다.
그 잠깐의 틈을 이용하여 병규는 디바울에게서 몸을 뺄 수 있었다.
“큭! 이번엔 냉기인가? 참으로 다양하군. 하지만 너무 경박스러워.”
디바울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우둑 우둑 거북한 소리가 났다.
가뜩이나 파랗던 그의 몸이 몸속까지 침투한 극한의 냉기로 시퍼렇게 죽었다.
그가 몸을 움직일 때마다 피부 조각들이 얼음 조각처럼 날렸다.
하지만 그럼에도 디바울은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는 것 같았다.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울인 채 불만스레 병규를 쳐다보았다.
여태까지 전혀 보이지 않던 살기가 물보라처럼 일어났다.
“아무래도 넌 그분이 아닌 것 같아. 그분이라면 차라리 죽으면 죽었지 바닥을 구르는 짓 따위는 절대 하지 않을 테니까.”
그는 더 이상 병규를 절망의 군주로 보지 않았다.
그래서 불쾌했다.
녀석을 쓰러트려도 아무런 명성도 얻지 못할 테니까.
그런 불만은 곧 찌를 듯한 분노로 변질되었다.
“지겨운 녀석. 그만 누워라.”
디바울의 신형이 쭉 늘어나는가 싶더니 어느새 병규의 눈앞에 있었다.
퍽!
어디를 어떻게 맞았는지도 모르게 병규는 바닥에 엎어졌다.
키익.
누운 그의 등을 디바울의 손톱이 파고들었다.
병규도 빨랐지만 디바울은 차원이 달랐다. 아니, 이건 이미 빠르다고 할 만한 성질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크큭. 넌 대체 정체가 뭐지? 뭘까? 뭔데 쉐도우가 그런 착각을 한 걸까? 앙? 말해보란 말이야.”
디바울은 마치 철없는 아이가 잠자리 날개를 하나씩 뜯어내듯, 칼과 같이 날카로운 손톱으로 병규의 몸을 푹푹 찔렀다.
그때마다 병규는 움찔 움찔 몸을 떨었다.
“뭐라고? 안 들려. 이런 입 구멍 하나로는 말을 제대로 못하는 가 보지? 좋아. 내가 선심을 쓰지. 목에 새로운 구멍을 뚫어 줄게. 그러면 제대로 지껄일 수 있을 테지?”
병규의 팔꿈치를 유린하던 손톱이 어깨를 타고 목으로 이동했다.
찌극.
손톱이 피부를 뚫자 붉은 피가 뭉클 솟아 나왔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검게 물든 손톱이 병규의 목을 파고 들었다.
그때 이상한 일이 벌어졌다.
살살 파고들어 가던 손톱이 어느 순간 전혀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다.
디바울의 미간에 깊은 골이 생겼다.
“이제 와서 웬 반항이야? 쓸데없는 짓거리지.”
손에 힘을 주었다.
하지만 여전히 손톱은 더 이상 들어가지 못했다.
그제야 디바울은 뭔가가 잘못 되었음을 느꼈다.
이상한 것은 그뿐이 아니었다.
웃고 있었다.
지금까지 피를 토하며 괴로워하던 병규가 소리 없는 미소를 그리고 있었다.
그 미소가 그렇게 섬뜩할 수 없었다.
디바울은 전신의 피가 모조리 차갑게 식는 것만 같았다.
그리고 변화가 찾아왔다.
“헉!”
격한 신음성과 디바울의 표정이 급변했다.
질식할 듯한 기운이 그를 옭아매고 있었다.
그 기운의 발현지는 놀랍게도 지금까지 벌레처럼 버둥거리던 바로 그, 병규였다.
드디어 파멸의 전주곡이 울리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