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제가 되는 방법
바호크 군을 붉은 대지에서 몰아낸 그날 저녁, 글로리 공작의 저택에서 휴식하고 있던 병규에게 급한 연락이 왔다.
“아마스 제국의 황제와 용병왕이 날 찾는다고?”
“네, 그렇습니다.”
전령의 소식에 병규는 의문이 생기지 않을 수 없었다.
이드라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들이 왜 자신을 찾는 것일까.
“알겠네.”
전령을 보낸 후 병규는 곧 의복을 갈아입었다.
“무슨 일인지 모르겠구나.”
침상 위를 뒹굴던 호랭이가 심각하게 말했다. 고개를 끄덕이던 병규는 조용히 입을 열었다.
“같이 가죠. 호랭이도 사람으로 변하세요.”
“쯪쯪, 귀찮은 질문은 내가 대신 대답하라는 의미렸다. 능구렁이 같은 녀석.”
구시렁거리면서도 호랭이는 사람으로 둔갑했다.
빛이 솟구치더니 앙증맞은 아기 호랑이의 모습 대신 눈부신 백발의 미남자가 침상 가에 나타났다.
병규는 사람으로 변한 호랭이와 함께 글로리 공작의 개인 서재로 향했다.
“실례합니다.”
방으로 들어서자 훈훈한 차 향기와 더불어 낯익은 몇 사람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레종 여왕과 글로리 공작, 디스 백작, 루멘 후작.
여기까지는 당연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나머지 사람들은 다소 의외였다.
“변기!”
반갑게 부르며 냉큼 가슴에 안기는 사람은 다름 아닌 퀴니였다.
“안 보이길래 어디로 사라졌나 했더니 여기 있었구나.”
“응.”
간결하게 대답한 퀴니는 오랜만에 만난 병규가 그리도 좋은지 연신 고개를 부벼댔다.
“저도 있어요. 샤바.”
등뒤에서 머리칼을 쫑긋 세우며 샤바가 흥겹게 말을 걸었다.
퀴니가 있는 곳이면 어디서나 녀석이 보였다. 마치 그녀의 그림자처럼.
“하하. 그래. 너도 있었구나.”
병규는 다정하게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그는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샤바와 함께 있어야 할 사람들이 보이지 않아서였다.
마일드이 일곱 사신.
그들이 없었다.
“사신들은 밖에서 기다리고 있어.”
병규의 의문을 눈치 챈 퀴니가 인상을 조금 찡그렸다.
“못 본 사이 많이 마른 것 같아. 밥을 제대로 안 먹은 거야?”
“그런가?”
병규는 담담하게 웃었지만 실제로 그의 피부는 꺼칠해져 있었다.
사실 그는 요즘 마음이 편치 않았다.
마성이 깨어난 이후로 자꾸만 어둠이 그의 육체를 좀먹어 갔기 때문이다. 이번 전쟁에서도 여러 번 각성이 일어날 뻔한 위기가 있었다.
몸이 좋지 않아보인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다.
“참, 퀴니야. 그거 있잖아. 샤바. 주인님에게 주려고 만든 보양식. 샤바샤바.”
“아참.”
샤바의 말에 문득 떠오른 듯 퀴니는 허리춤의 가방을 뒤적였다.
한편 가방을 뒤지는 퀴니의 행동에 병규는 뜨끔한 표정이 되었다.
샤바가 말한 보양식이라는 말이 왠지 모르게 신경 쓰였던 것이다. 지금까지 이 두 꼬맹이가 연관된 일치고 정상적인 것을 거의 보지 못했던 것이 원인이었다.
그때 마침 퀴니가 작은 병을 꺼냈다.
“이거 마셔.”
“?”
얼떨결에 받아든 병 안에는 걸쭉한 죽 같은 것이 들어 있었다.
병을 찰랑찰랑 흔들어 본 병규는, 바쁜 와중에도 자신을 생각해서 보양식을 만들어 놓은 퀴니의 정성에 마음이 훈훈해졌다.
그는 밝은 표정으로 퀴니에게 물었다.
“이게 뭐니?”
병규의 물음에 퀴니는 해맑은 표정으로 대답했다.
“갈아 만든 몬스터 쥬스~!”
“ ... !!!”
병규의 표정이 단숨에 해쓱해졌다.
샤바와 퀴니라는 당황스런 2인조의 계략에 몰려 살아있는 석상이 되었던 병규가 정신을 차린 것은 그로부터 한참이 흐른 뒤였다.
마성에 눈을 뜬 병규였지만 엽기적일 정도로 착하고 순진한 이 둘에게는 도무지 제정신을 차릴 수가 없었다.
“고, 고맙다. 시간 날 때 꼭 먹을게.”
딱딱하게 굳은 미소로 퀴니의 보양식을 챙겨 든 병규는 한숨을 포옥 내쉬며 서재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그곳에는 앞서 열거한 많은 사람들이 그와 마찬가지로 석상이 된 채 멍하니 앉아 있었다.
“흠흠.”
헛기침으로 주위를 환기시킨 병규는 밝은 표정으로 서재의 안쪽을 바라보았다.
사실 퀴니와 샤바가 이곳에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그보다 더 의외였던 사람들이 그곳에서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얼굴을 보아하니 잘 지낸 것 같군.”
느긋한 표정으로 소파에 앉아있던 사내는 빙그레 미소를 지었다.
“제이콥!”
“하하. 다행히 내 이름은 잊지 않은 모양이군.”
제이콥이라 불린 사내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병규를 덥석 안았다.
“어? 제이콥만 보이고, 우리는 보이지도 않는 거야?”
새초롬한 음성이 들려왔다.
병규는 따뜻한 표정으로 음성이 들려온 곳으로 시선을 돌렸다.
“머리가 많이 길어졌네요. 호젤.”
“호호. 넌 능청맞아진 것 같구나.”
호젤이 곱게 웃었다.
그녀는 여전히 발랄했다. 다만 길어진 머리카락 때문인지 전보다는 성숙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어라? 키가 많이 컸는걸?”
병규 가까이 다가온 호젤은 두 눈을 동그랗게 떴다.
처음 붉은 대지에서 만났을 때만 해도 호젤의 키가 더 컸다. 그런데 불과 몇 개월 사이에 만나 병규는 오히려 그녀가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성장해 있었다.
“네 나이 때는 하루가 다르게 쑥쑥 큰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넌 좀 심한걸. 전보다 10센티미르 정도는 큰 것 같아. 흐음. 분위기도 생긴 것 같고 말야. 전에는 소년 같았는데. 이젠 제법 어른 티가 난다. 좋아! 꽤 괜찮은 남자가 되어 가는 것 같군.”
뭐가 그리 즐거운지 호젤은 병규의 등을 팡팡 두드리며 좋아했다. 그녀를 향해 말없이 웃던 병규는 다른 두 사람에게도 시선을 던졌다.
“고든, 프리먼.”
건장한 덩치를 자랑하는 거한과 주름이 꽤 깊어진 중년 마법사가 흡족한 미소를 보였다.
제이콥, 호젤, 호든, 프리먼.
차원을 넘어 이드라센에 도착했을 때, 제일 처음 만난 사람들이다. 트라우마의 새벽에 머무르다 홀연히 사라진 그들이 다시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좋아. 마침내 프리즘 용병단이 모두 만났구나.”
큰 목소리로 외치는 제이콥의 음성에 기쁨이 묻어났다.
“뭣이? 제이콥이 용병왕이라고?”
호랭이의 경악성이 서재를 왕왕 울렸다.
방금 제이콥에게서 들은 말이었다.
서재에 자리한 모든 사람들이 그 말에 놀랐지만, 누구보다도 놀란 것은 다름 아닌 호랭이였다.
그는 병규와 함께 프리즘 용병단을 붉은 대지에서 만났다. 비록 하얗고 작은 아기 호랑이의 모습이었지만, 결코 제이콥이 용병왕과 같은 거창한 위치가 아님은 충분히 알고 있는 것이다.
“저 사람은 누구지?”
제이콥들은 호랭이에게 삼엄한 눈길을 주었다.
제이콥 일행은 인간으로 둔갑한 호랭이를 처음 보았다. 그런데 처음 본 그가 제이콥을 아는 듯 말하니 신경이 쓰였던 것이다.
“그는 전부터 알고 지내던 동료에요. 사정상 헤어졌다 다시 만난거죠.”
설명하기 귀찮았던 병규는 간단한 말로 변명을 대신했다.
“흐음. 네가 그렇게까지 말하는 걸 보니 믿을 수 있는 사람인 것 같군.”
병규의 설명을 듣고서야 제이콥은 호랭이에게 향하던 의심의 눈길을 풀었다.
“그런데 어떻게 용병왕이 된 거에요?”
“그다지 신기한 일도 아니야.”
제이콥 대신 호젤이 입을 열었다.
“이곳 여관에서 할 일 없이 뒹굴던 우리에게 어느 날 긴급한 연락이 왔어. 아마스 신성제국에 위치한 한 용병길드에 문제가 생겼다는 것이었지. 그쪽 길드장과 친분이 있었던 우리는 서둘러 짐을 챙겨서 신성제국으로 향했다.”
그녀의 말을 제이콥이 받았다.
“목적지에 도착한 우리는 전혀 예상치 못한 놀라운 상황을 접하게 되었다. 제국 내 용병길드가 패를 나눠 세력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지.”
“곡 건달들의 애기 같군요.”
“그래. 마치 건달들이 구역을 두고 싸우는 것처럼, 칸자키라는 녀석이 스스로 용병왕을 자처하며 제국 내의 용병길드를 흡수, 통합하고 있었던 거야. 원래 용병들은 자유로운 몸으로 절대 특정 집단이나 국가에 메이지 않는다. 단 하나 예외가 있다면 용병길드 뿐이지. 그런데 칸자키라는 녀석이 바로 그 용병길드를 손아귀에 넣으려는 야망을 품은 것이다. 우리가 제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상당히 일이 진행되어. 절반 이상의 길드가 놈의 수중에 들어간 후였지.”
“용병들이 반발하지는 않았나요?”
“당연히 반발했지. 하지만 칸자키와 그의 수하들은 야망만큼이나 실력이 대단해서 무력으로 그런 불만을 꾹 눌러 버렸지. 알다시피 용병들은 개개의 실력은 뛰어날지 몰라도, 협동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없는 녀석들. 사정이 이렇다 보니 허무할 정도로 쉽게 제국 내 용병길드가 놈의 손아귀에 넘어가게 되었다.”
“흐음. 물론 제이콥은 그에게 대항했던 거겠죠?”
“당연하지. 난 남아있는 세력과 함께 칸자키에게 대항했다. 다행히 뜻이 있는 친구들이 힘을 합해 주었지.”
“흐음. 그래서요?”
병규의 물음에 제이콥은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뭐. 압축해서 말하자면, 여차저차 고생 끝에 간신히 칸자키를 물리쳤고, 용병들은 별로 한 일도 없는 나에게 용병왕이라는 얼토당토 않는 직함을 주었다는 이야기지.”
“흐음. 그게 그런 식으로 간단히 압축될 내용인가요?”
“후후. 자세한 설명은 한가로울 때 천천히 해주마.”
제이콥의 의뭉스러운 말투에 병규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제이콥을 처음 보았을 때부터 그새 많은 일이 있었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었다.
그의 기세가 남달라져 있었던 것이다.
물론 변한 것은 제이콥 하나만이 아니었다.
모두의 실력이 놀랍도록 늘어 있었다.
하지만 그중에서도 제이콥의 성장은 발군이었다.
그의 몸속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글로리 공작에 비견될 정도였다. 글로리 공작이 소드마스터니, 제이콥 역시 소드마스터급의 검사가 되었다는 말이 된다.
“사실 지금까지 지루한 이야기를 두서없이 꺼낸 것도, 바로 칸자키라는 녀석의 정체를 알리고 싶어서였습니다.”
부드럽게 말 자락을 꺼내던 제이콥은 돌연 정색을 했다.
묵묵히 그의 이야기를 경청하던 사람들은 그의 다음 말에 주의를 기울였다. 다른 사람도 아닌 용병왕의 말이다. 결코 가볍게 흘려버릴 수 없었다.
“신성제국의 용병들을 한 손에 쥐려 했던 칸자키의 정체는 사실 ... .”
“바호크의 기사였겠죠?”
여태 조용히 있던 디스가 돌연 그의 말을 받았다.
제이콥은 눈을 빛내며 그를 주시했다.
디스는 이곳에 모인 사람들 중 가장 눈에 띄지 않던 인물이다. 그런데 놀랍게도 자신이 할 말을 미리 읽어 내었다.
물론 그는 디스를 알고 있었다.
흑마법사의 일로 레종과 함께 동행한 적이 있기 때문이다.
“어떻게 아셨습니까?”
제이콥이 놀란 듯한 얼굴로 디스에게 물었다.
“헛!”
“사실이란 말인가!”
그의 말에 서재에 자리한 많은 사람들이 신음성을 흘렸다. 설마 용병들 간의 다툼이 바호크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것이다.
하지만 디스의 표정은 무덤덤했다.
“아마도 마계의 힘을 빌린 바흐만 황제도 신성제국만큼은 영 껄끄러웠던 모양이군요.”
“무슨 말이죠?”
이해가 되지 않은 레종 여왕이 그를 보며 물었다.
“간단한 애기입니다. 아이린 왕국을 취하고 싶은데, 신성제국이 신경 쓰인다. 만약 공주님이 바호크의 왕이라면 이런 상황에서 어떤 방법을 강구하시겠습니까?”
“음. 일반적으로 그런 경우엔 신성제국과 모종의 계약을 하거나, 아니면 신성제국에 이 일에 개입할 여유가 없도록 만들겠어요. 아!”
돌연 레종의 입에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렇군요. 용병들! 바호크는 용병들을 이용해서 말썽을 일으킬 생각이었던 거예요. 아주 큰 말썽을요. 가령 반란과 같은 ... . 신성제국이 아이린 왕국의 일에 신경을 쓰지 못할 정도로 말이죠. 남의 나라의 용병들을 이용해 분란을 일으킨다. 만에 하나 일이 실패해도 바호크 제국으로서는 손해 볼 일이 하나도 없으니, 이거야 말로 절묘한 계략이군요.”
“바로 맞추셨습니다.”
가볍게 박수를 친 디스는 넌지시 제이콥에게 묻는 듯한 시선을 던졌다.
“어떤가요?”
제이콥은 어깨를 으쓱했다.
“귀신같군요.”
디스의 짐작은 옳았다.
이드라센 대륙에서 유일하게 바호크 제국을 견제할 수 있는 곳이 바로 신성제국이다.
당연히 바흐만 황제는 신성제국의 개입이 신경 쓰였다. 그래서 몰래 얼굴이 드러나지 않은 기사들을 파견하여 신성제국의 용병들을 규합하도록 지시한 것이다.
물론 그의 암계는 엉뚱하게 나타난 제이콥과 그 일행들의 활약으로 사전에 진압될 수 있었다.
“하하. 이거 또 신세를 지게 되었군요. 당신이 아니었으면 신성제국이 참전하지 못했을 것이고, 그렇게 되었다면 저희도 꽤 고전했을 테니 말입니다.”
글로리 공작은 제이콥의 손을 잡으며 껄껄 웃었다.
레종 여왕도 프리즘 용병단의 공을 치하하고, 용병왕에게 감사의 말을 전했다.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이어졌다.
그때, 모호한 표정으로 장내를 살피던 호랭이가 슬며시 말 자락을 풀어 놓았다.
“그건 그렇고 말야 ... .”
병규에게 바싹 붙어 있는 퀴니와 샤바를 바라보는 호랭이의 두 눈이 게슴츠레해졌다. 특히 샤바를 보는 그의 눈빛은 호기심을 넘어 이상야릇한 빛을 뿜고 있었다.
호랭이가 슬그머니 샤바에게 물었다.
“넌 어쩌다 신성 제국의 황제가 된 거냐?”
“ ... !”
돌연 떠들썩하던 실내가 조용해졌다.
모두의 시선이 샤바에게로 몰렸다.
사실 호랭이의 질문은 서재에 있던 모두가 궁금하게 여기던 것이었다.
분명 샤바는 얼마 전까지 병규의 뒤를 졸졸 따라다니던 평범한 소년(?)이었다. 그런데 다시 나타난 그는 놀랍게도 신성제국의 황제가 되어 있었다.
믿을 수 없는 소식에 글로리 공작과 레종 여왕은 몇 번이나 제국에 연락을 넣어 확인했지만 틀림없는 사실이었다.
이 천진난만한 검은 머리의 소년은 성스러운 신서제국의 신임 황제였다.
대체 어떤 조화를 부려 이 믿기지 않는 기적을 일으켰단 말인가. 모두의 호기심이 극에 달했다.
하지만 정작 샤바는 이 일을 별스럽지 않게 생각했다.
“그냥 황제가 됐다. 샤바.”
“그냥?”
“그. 그게 다야?”
호랭이의 거듭된 질문에 샤바는 고개를 갸웃하며 곰곰 생각했다. 그때, 잠자코 보고 있던 퀴니가 자신의 배를 쓰다듬으며 헛기침을 했다.
그걸 본 샤바가 손바닥을 두드리며 밝게 외쳤다.
“아, 샤바!”
“그래. 뭐가 떠오른 모양이지?”
호랭이가 반색하며 다시 물었다.
드디어 중요한 힌트가 떠오른 모양이다. 하지만 이어진 샤바의 말에 그는 뜨억 하고 비명을 질러야 했다.
“황성에서 가장 뚱뚱한 사람을 찾아 백성들과 면담을 시켰다. 샤바.”
“??”
사람들은 대혼란에 빠져버렸다.
오랜만에 만난 사람들의 대화는 밤이 새도록 계속되었다.
대화의 소재는 바호크와 마계에 대한 것이었다.
실재로 마계의 준동은 이드라센 대륙에 심각한 영향을 끼쳤다.
지금까지 역사상 마계의 움직임이 이렇듯 활발했던 경우는 단 한번도 없었다.
마왕이 중간계에 직접 헌신한 적도 있었지만, 그런 경우조차 고작 작은 소국 하나가 오염되는 정도였다.
하지만 이번엔 그 정도가 심각하게 달랐다.
무려 제국이 통째로 검은 욕망에 물들고 있는 것이다.
사태가 이렇게까지 된 데에는 드래곤들의 방관이 큰 비중을 차지했다.
패악한 성격의 드래곤들은 실제로 음으로 양으로 마계의 중간계 진입을 차단하는 역할을 수행해 왔다.
그런데 이번엔 어찌 된 일인지 드래곤들의 활동이 전혀 보고되지 않았다.
마족들은 버젓이 이를 저지하고 방해했던 드래곤들은 남의 일인 듯 수수방관만 하고 있으니 점점 사태가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된 것이다.
“이대로는 결코 미래를 장담할 수 없습니다.”
아이린의 여왕, 레종의 말에 모두는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철혈의 제국, 바호크가 넘어간 이상, 상황이 또 어떻게 악화될지 알 수 없는 상황이다.
“그래서 전 감히 범국가적인 연합군의 창설을 제안하는 바입니다.”
훗날 마계의 침략에 맞서, 치열한 투쟁을 벌이게 될 연합군 주축들의 만남은 이렇듯 조용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 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