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5화 (75/102)

마계의 준동과 연합군의 결성

  으슥한 밤의 시간이 지나고 몽흔한 새벽이 찾아왔다.

  밤하늘의 별빛이 서서히 기운을 잃어갈 시간, 바호크의 황제 바흐만은 흐릿한 불빛 아래 좀처럼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다.

  바흐만 황제.

  준엄한 인상의 그는 얼마 전 제위식을 치르고 그토록 염원하던 황제의 자리에 올랐다.

  하지만 마음은 그다지 편하지 않았다.

  최근까지 아이린 왕국에 도모하던 계략이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다.

  그가 지원하던 필립 공작의 반란군은 패퇴하고, 미미한 세력의 레종 공주가 끝내 왕권을 수호해냈다.

  향후 정국이 복잡해질 것을 불을 보듯 뻔한 일이다.

  “믿을 수 없는 일이군.”

  설마 전력으론 상대도 안 되던 공주 일파가 필립 공작을 몰아낼줄이야. 더더구나 트라우마의 마지막 결전에선 바호크에서 특파한 드래곤나이트들까지 필립 공작 측으로 참전했었기에 바흐만 황제의 충격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앞으로 아이린 왕국과는 불편한 관계로 남게 되었다.

  “쯧. 필립 그 멍청이가 일만 잘 처리했으면 쉬워질 일이었을 텐데.”

  필립 공작이 아이린 왕국을 차지했다면 순리대로 풀어졌을 문제다. 그런데 성공을 눈앞에 둔 상황에서 고배를 마시고 말았으니 마음이 더 씁쓸했다.

  그때였다.

  “고민이 많으신 것 같군요.”

  음울한 음성이 그의 사색을 방해했다.

  ‘불청객?’

  바흐만 황제의 근엄한 얼굴에 불쾌한 감정이 떠올랐다.

  누가 감히 수십 겹의 호위와 자신의 이목을 속이고 이곳에 숨어 들 수 있단 말인가.

  마법등 아래에서 검은 그림자가 연기처럼 솟구쳤다.

  음울한 검은 그림자.

  쉐이드였다.

  “ ... 손님이 방문하기엔 너무 늦은 시간이군.”

  바흐만 황제는 느긋하게 말했다. 소리 없이 찾아든 불청객으로부터 그다지 위협을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음모를 꾸미기엔 더없이 좋은 때이기도 하지요.”

  쉐이드는 메마른 웃음을 보였다.

  “음모라.”

  바흐만 황제는 천천히 두 손을 깍지 끼며 쉐이드를 바라보았다.

  쉐이드는 키가 크다는 것 말고는 별다른 특징이 없었다. 그림자에 불과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가 끌고 다니는 것은 바흐만 황제의 관심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청년이었다.

  대략 20살쯤 되어 보일까?

  공허함이 느껴지는 얼굴에 제법 번듯한 외관을 지닌 청년이었다. 그런 청년이 치부만 간신히 가린 벌거벗은 모습으로 쉐이드의 발 아래 엎드려 있었다.

  그의 목엔 두터운 목줄이 걸려 있었고, 목줄에 연결된 굵은 쇠사슬이 쉐이드의 손에 들려 있었다.

  “ ... 특이한 취미로군.”

  “그저, 애완동물일 뿐입니다.”

  “애완동물이라.”

  인간을 개처럼 끌고 다니는 모습. 불쾌감이 일 만도 하건만 바흐만 황제의 표정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

  오히려 눈을 번뜩이며 쉐이드의 애완동물 신세가 된 청년에게 시선을 집중했다.

  익숙한 얼굴이다.

  분명 어디서 봤을 것이다.

  그는 황제라는 특성상 하루에도 수십, 수백 명의 사람을 만나게 된다. 다행히 뛰어난 기억력 탓에 그들 대부분을 기억하고 있었다.

  그런데 쉐이드의 애완동물인 청년이 기이하게 신경을 자극하는 것이다.

  바흐만 황제는 곰곰 기억을 더듬었다.

  하지만 기억 어디에도 청년과 비슷한 분위기를 풍기는 자는 없었다.

  붉은 광기가 일렁이는 눈.

  허옇게 뜨고, 검게 변질된 피부.

  짐승이 인간의 탈을 쓰고 있는 것 같은 괴이함.

  바흐만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의 기억 어디에도 저렇게 이상한 녀석은 없었다.

  떠오르는 인물은 있었지만, 분위기 자체가 판이했다.

  바흐만 황제는 설마 눈앞의 이리와 같은 청년이 필립 공작의 아들인 라이트일 거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청년을 살피던 바흐만의 눈동자가 다시금 쉐이드를 향했다.

  “취향이 특이한 걸 보아하니 자넨 인간이 아닌 것이 확실하군. 마족인가?”

  “바로 그렇습니다.”

  “흐음. 마족이 과연 내게 어떤 볼일이 있는지 궁금하군.”

  “좋은 계약건이 하나 있어서지요.”

  “계약?”

  바흐만 황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마계와의 계약.

  예부터 절대적으로 금하는 행위다.

  마계의 생물들은 그야말로 추악한 암흑 그 자체다.

  신화와 전설은 말한다.

  마족과의 모든 계약은 결국 계약자의 파멸로 종말을 맞이한다고. 하지만 바흐만은 믿지 않았다. 대부분의 신화는 성신의 관점에서 쓰여졌다.

  만약 마족의 계약이 일방적으로 불리한 것이라면 어둠의 신전이나 흑마법사 같은 존재는 애초에 이 땅에서 존재할 수조차 없을 것이다.

  인간은 탐욕스런 존재다.

  과연 자신에게 손해가 될 짓을 할까?

  분명 남들이 모르는 이득이 있기 때문에 어둠의 신전 같은 곳이 존재하는 것이다.

  바흐만 황제는 그렇게 생각했다.

  과연 쉐이드는 바흐만 황제의 흥미를 끌 만한 것을 조건으로 내밀었다.

  “이드라센 대륙을 드리겠습니다.”

  “호오. 마치 이드라센 대륙을 호주머니 속의 물건처럼 말하는 군. 그에 대한 대가는?”

  대륙을 정복하게 해 주겠다는 말이다. 분명 그에 상응하는 엄청난 요구가 따를 것이다.

  하지만 정작 쉐이드의 대답은 간단했다.

  “없습니다.”

  “없다?”

  “네. 저희는 단지 ... 전쟁을 원할 뿐입니다.”

  “후후. 과연 그 뿐일까?”

  “잊으셨습니까? 마족은 인간의 고통과 절망에 쾌락을 느낍니다. 저희들에게 전쟁만큼 매혹적인 볼거리도 드물지요. 그리고 ... 덤으로 눈엣가시 같던 정령왕국이 지도에서 사라져 준다면 그보다 반가운 일도 없겠지요.”

  “크흐흐. 아이린 왕국을 제거해 달라는 말이군.”

  바흐만 황제는 진득하게 웃었다.

  마족들이 정령을 싫어하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혼돈을 따르는 마계의 존재는 질서를 노래하는 정령들이 불편할 수밖에 없었다.

  ‘어차피 이제 아이린 왕국과는 적대관계가 되었다.’

  마계의 힘을 빌어 아이린 왕국을 밀어 버릴 수 있다면 바호크로서도 환영할 일이다.

  물론 마계에서 다른 무언가를 노리고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정령 왕국이 무너지면, 정령왕의 입지도 줄어들 것이고, 상대적으로 마계의 입지는 높아질 것이다.

  결국 마계는 중간계에 대한 탐욕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너희들의 수작에 순순히 당할 내가 아니다.’

  영면한 그의 머리는 이미 그에 대한 대비책을 세우고 있었다.

  신성제국.

  성신을 섬기는 신성제국은 결코 마족의 준동을 용납지 않을 것이다.

  마족과 아마스 신성제국이 대립한다면 바호크로서는 그보다 더 좋은 일은 없을 것이다. 피폐해진 신성제국은 타국의 일에 간섭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리 되면 바호크는 손쉽게 다른 나라를 도모할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좋다. 너와의 계약, 하기로 하지.”

  그렇게 마족과 바호크의 계약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바흐만 황제는 모르고 있었다.

  연기처럼 나타난 계약서에 서명을 하는 순간, 쉐이드가 크득거리며 웃고 있음을.

  “바흐만 황제, 당신은 자신의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것이 흠인 것 같습니다.”

  어둠의 그늘을 따라 바흐만 황제의 침실에서 벗어난 쉐이드는 간악한 웃음을 머금었다.

  쉐이드는 품속에서 작은 서류를 한 장 꺼냈다.

  바흐만과 맺은 계약서였다.

  “마계의 계약서는 원래부터 두 장이랍니다.”

  계약서를 흔들자 그 아래에서 그림자처럼 다른 종이가 펄럭 하고 나타났다.

  새롭게 나타난 종이는 바흐만 황제와 계약할 때엔 전혀 보이지 않던 것이었다. 계약서의 이면에는 마족에게 절대적으로 유리한 내용들이 빼곡하게 쓰여 있었다. 그런 내용 중엔 서명한 사람의 영혼에 대한 내용도 있었다.

  “꼭두각시가 하나 더 늘었구나.”

  쉐이드의 음침한 웃음이 짙어졌다.

  마침 살렘이라는 아끼던 인형이 부서져 아쉬워하던 참이다. 이제 바흐만이라는 새로운 인형이 생겼으니 기분이 더욱 좋아졌다.

  적어도 이 새로운 인형은 제국을 한 손에 쥐고 흔드는 절대자인 것이다.

  “이제 전쟁놀이를 즐겨 보도록 하지요.”

  달빛의 어두운 그림자를 따라 쉐이드는 음울한 걸음을 옮겼다. 그의 손에 쥐어진 쇠사슬이 찰랑찰랑 소음을 내며 라이트를 끌었다.

  바흐만 황제와 쉐이드가 계약을 맺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바호크 전역에서 대규모 공사가 이루어졌다.

  대규모 축제 준비를 위한 건설이라는 명목이 붙은 이 공사로 아이린 왕국에 인접한 도시마다 거대한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건축물들은 하나같이 텔레포트 마법진과 유사한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다만 그 규모는 터무니없이 방대하여, 바닥의 조형물의 크기만 해도 대저택의 크기를 방불케 할 정도였다.

  게이트를 연상케 하는 건축물 공사가 마무리 되자, 바흐만 황제는 연토내의 신전들을 박해하기 시작했다.

  가뜩이나 분위기가 좋지 못한 상황에서 신관들이 아이들을 납치하여 신에게 제물로 올린다는 흉흉한 소문까지 돌았다. 황실은 이것을 계기로 신전 추방을 본격적으로 시행했다.

  결국 수많은 신전의 신관들은 타국으로 도주하거나 문을 굳게 닫아걸었다.

  기본적인 준비가 끝나자 바호크는 본격적으로 전쟁준비에 임했다. 병력을 증강하고, 군사훈련에 박차를 가했다.

  이러한 가시적인 현상은 인접한 왕국인 아이린을 긴장하게 만들기에 충분했다.

  본래부터 바호크와는 전력상으로 상대가 되지 않은 데다, 아직 내전의 상처가 채 아물지 않은 때라 긴장은 더할 수밖에 없었다.

  급히 아마스 신성제국에 협조를 요청하는 공문을 보냈으나 무슨 이유에서인지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긴장감은 점점 높아져만 갔다.

  바호크와 인접한 국경 지대엔 적군의 대규모 군사 이동을 목격했다는 첩보가 수시로 날아들고, 모든 외교적 노력도 허사로 돌아갔다.

  급기야 바호크의 황실을 방문했던 외교사절들이 국경을 넘기 전 의문의 집단에게 살해되는 극단적인 상황까지 벌어졌다.

  바호크는 즉각 도적들의 소행이라는 성명을 발표했지만, 그 발표를 곧이곧대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고립된 형세가 된 아이린 왕국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전쟁에 대한 불안감을 품은 채 긴장된 하루하루를 보냈다.

  바호크의 무력 시위 소식이 들려오자 병규도 더는 한가롭게 지낼 수 없었다.

  드래곤나이트의 기사단장직은 반납했지만 꾸준히 훈련에 참가하여 기사들의 훈련을 도왔다. 호랭이 또한 수시로 인간의 모습으로 변하며 필라이트와 마탑의 고위 마법사들과 자주 접촉했다.

  그렇게 분주하게 보내고 있던 어느 날 저녁, 레종 여왕이 병규를 찾아왔다.

  “많이 지쳐 보이는군요.”

  레종을 본 병규는 측은한 마음이 들었다. 아닌게아니라 그녀는 정말로 피곤해 보였다. 연일 계속된 관료 회의와 전쟁에 대한 스트레스로 심신이 다 지쳐있는 상태였다.

  이렇게 힘든 상태에서도 자신을 잊지 않고 찾아온 것이 고마웠다.

  김이 피어오르는 차를 호호 불며 마시던 레종은 혀를 대었는지 인상을 찡그렸다.

  “잠깐 줘 봐요.”

  병규는 그녀가 건네주는 찻잔을 들고 가볍게 힘을 쏟았다. 필립 공작에게서 복제해 낸 냉기가 손끝을 타고 찻잔 속에 스며들었다.

  “와. 신기한걸요. 마법인가요?”

  적당하게 식은 차를 홀짝홀짝 마시며 레종은 맑은 목소리로 물었다. 병규는 그저 가벼운 눈웃음으로 대답을 대신했다.

  “경애라는 분에 대한 소식을 알아봤어요.”

  레종이 조심스레 말을 꺼냈다.

  그녀가 이 늦은 시각에 병규를 찾은 이유의 절반은 경애 수색에 대한 경과 보고 때문이었다.

  병규는 그다지 좋은 소식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레종의 표정이 그다지 밝지 않았던 것이다.

  “못 찾았군요.”

  레종은 굳은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왕실 정보기관을 총동원하고, 정보 길드인 주시자의 눈에도 의뢰를 넣어봤어요. 몇몇 기관에서 비슷한 사람을 보았다는 보고가 있었지만, 확인결과 모두 잘못된 정보로 밝혀졌어요.”

  “흐음.”

  병규는 침음성을 흘렸다. 입가에 차를 조금 머금고는 두 눈을 감았다.

  경애는 퀴니와 함께 차원을 넘었다.

  이 과정에서 그녀는 엉뚱한 곳으로 떨어졌다.

  퀴니의 말에 따르면 이 차원으로 온 것은 확실하다.

  그런데 찾을 수 없단다.

  왕국의 정보능력을 총동원했는데도 그녀의 행방은 여전히 묘연하기만 했다.

  병규는 다리를 꼬고 앉은 채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걱정 말아요. 분명 어딘가에 잘 있을 거예요.”

  레종이 그의 손을 잡으며 위로했다.

  병규는 작게 미소지었다.

  그녀의 마음 씀씀이가 고마웠다.

  언제 전쟁이 터질지 모르는 복잡한 정국인데도 자신을 위해 소소한 곳까지 편의를 봐주는 그녀의 정성에 가슴이 뿌듯해졌다.

  “아! 그런데 한 가지 좋은 소식이 있어요.”

  분위기를 전환하려는 듯, 레종이 밝은 얼굴로 말을 꺼냈다.

  병규는 편안한 표정으로 그녀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과연 어떤 소식일지 궁금해하며,

  레종은 히히 하고 장난스런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한 달 후가 바로 제 생일이에요.”

  “음?”

  병규의 고개가 한쪽으로 기울어졌다. 설마하니 자신의 생일을 기쁜 소식이라고 말할 줄이야. 그때 자리에서 일어난 레종이 상체를 숙이며 병규의 귓가에 작게 소곤거렸다.

  “선물 ... 기대할게요.”

  그 말을 끝으로 레종은 도망가듯 방 밖으로 뛰어나갔다.

  “선물이라.”

  그림 같은 자세로 비스듬히 의자에 앉아있던 병규의 입가에 부드러운 미소가 걸렸다.

  가슴이 따뜻했다.

  레종의 모습이 피와 살육에 대한 갈증으로 메말라 가고 있는 그의 마음을 행복으로 가득 채워 주는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에 따라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감 역시 새벽녘의 안개처럼 뭉클뭉클 커져만 갔다.

  그것은 묘한 위화감과 같았다.

  더없이 행복한 순간이었지만 이상하게 거북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안 맞는 옷을 억지로 입은 것처럼.

  마침내 바호크의 공습이 시작되었다.

  바흐만 황제가 지방의 소도시의 자치군까지 동원하며 끌어 모은 병력은 무려 20만에 육박했다. 여기에 비상시에나 동원되던 회색기사단까지 모조리 전선에 투입하며 아이린 왕국에 대한 야욕을 보였다.

  회색 드래곤나이트 기사단의 기습적인 강하와 함께 시작된 바호크의 선제공격으로 고란 산맥에 주둔 중이던 아이린 왕국의 국경 수비대가 절반에 가까운 사망자를 기록하며 무너졌다.

  수도 방위군을 이끌고 급히 고란 산맥으로 출진한 글로리 공작은 퇴각한 국경 수배대와 합세하여 나야크 산맥에 새로운 진지를 구축했다.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아무리 바호크의 병력이 압도적이라 해도 고작 반나절 만에 고란 산맥을 적에게 내주다니!”

  글로리 공작은 국경 수비대의 군단장을 불러 엄한 음성으로 다그쳤다. 국경 수비대 군단장인 타이트 후작은  소드마스터의 엄준한 기운에 혼비백산하며 더듬더듬 항변했다.

  “사실 수비대의 진영을 제일 먼저 기습한 것은 회색기사단이 아니었습니다.”

  “뭣이?”

  놀라운 소식에 글로리 공작은 미간을 좁혔다.

  “바호크의 회색기사단이 닥치기 전, 몬스터들의 습격이 있었습니다.”

  “고작 몬스터들의 습격이 무에 대수라고 ... .”

  “아, 아닙니다. 그 정도가 아닙니다.”

  타이트 후작은 흥분한 목소리로 정신없이 말을 쏟아냈다.

  “놈들은 달랐습니다. 굶주린 맹수처럼 광폭하게 날뛰었습니다. 힘은 또 얼마나 센지 병사 서넛이 오크 한 마리를 감당하기 힘들 지경이었습니다. 놈들은, 놈들은 ... 우리가 평소에 보던 그런 몬스터들과는 무언가 달랐습니다. 그리고 그 썩은 냄새는 도저히 ... .”

  타이트 후작의 얼굴이 공포로 일그러졌다.

  무언가 짓눌린 듯한 공포.

  미간을 찌푸린 글로리 공작은 막사 밖의 부관을 호출했다.

  “이 멍청이를 신관에게 데려가. 그리고 누가 어제의 일을 제대로 설명해 줄 수 있는 녀석을 내 앞으로 데려와라.”

  “마물들이 습격이 있었다는 거군. 그리고 날뛰는 마물들을 간신히 물리치지마자 바호크의 침공이 있었고, 그래서 속수무책으로 당했다는 소리군.”

  하급 장교를 통해 대강의 사정을 들은 글로리 공작의 표정은 그다지 좋지 못했다. 바호크에게 고란 산맥을 허무하게 빼앗긴 것도 충격이지만, 그보다 더 신경 쓰이는 것은 몬스터들의 습격이다.

  보고가 사실이라면 바호크는 몬스터들을 전쟁에 이용한 것이 된다. 게다가 무슨 수를 썼는지 몬스터들은 전에 비할 바 없이 강해져 있었다.

  “썩은 냄새라.”

  글로리 공작과 함께 보고를 전해들은 필라이트의 얼굴은 전에 없이 심각해져 있었다.

  “원래 몬스터들은 냄새가 지독합니다.”

  “악취와 썩은 내는 엄연히 다르지. 아무리 타이트 후작이 바보멍청이 같은 자라 해도 악취와 썩은 내를 구별 못할 정도는 아닐 걸세.”

  글로리 공작은 필라이트의 말에 뭔가를 느꼈다.

  “몬스터들에게서 풍긴 썩은 냄새가 이번 일과 관계가 있다고 보십니까?”

  정확하게는 모르네.“

  필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전에 읽었던 문헌에서 그와 비슷한 내용을 본 기억이 있군.”

  “어떤 내용이었습니까?”

  “마계의 몬스터에 대한 글이었지. 과거 겁도 없이 마계의 문을 열었던 흑마법사가 후에 리치가 되어 중간계로 돌아왔지. 그는 마계에서 보고 들은 것을 기록으로 남겼지.”

  글로리 공작은 진지한 표정으로 귀를 열었다. 필라이트는 헛기침을 하며 잔인한 마물의 시를 읊었다.

  “굶주린 몬스터가 병든 달빛 아래 추악한 가곡을 노래하니, 잔인한 악취가 대지를 신음하게 만드는구나.”

  “ ... 병든 달빛과 잔인한 악취라.”

  글로리 공작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대마법사님께선 이 일이 마계와 연관이 있다고 생각하십니까?”

  “확신할 순 없군.”

  필라이트는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상대는 바호크의 황제인 바흐만이야. 과연 그자가 아무생각 없이 전면전이라는 카드를 꺼내 들었을까?”

  글로리 공작의 눈빛이 한층 강해졌다.

  “실은 ... 얼마 전 주시자의 눈에서 불확실한 정보 하나늘 전해 왔습니다. 바호크 국경 근처에 쓰임을 알 수 없는 거대한 건축물들이 들어섰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모양이 영락없이 거대한 문 같다고 하더군요.”

  “흐음. 가볍게 생각할 문제는 아니군. 마탑의 수좌들과 상의를 해보겠네.”

  글로리 공작과 필라이트의 그날 대화는 그것으로 끝이었다.

  그리고 일주일 후, 글로리 공작 앞으로 마탑에서 보내온 긴급전문에는 ‘바호크가 마계와 밀접한 관련이 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라는 내용이 적혀있었다.

  때는 아이린 성력 1023년, 붉은 이리의 달, 여섯째 날.

  물밀듯이 밀려드는 몬스터와 바호크의 병력 앞에 글로리 공작이 이끄는 저지선이 세 번이나 후방으로 밀려난 후의 일이다.

  트라우마.

  몬스터들의 성지로 일컬어지는 붉은 대지 위에 우뚝 선 아이린 왕국의 상징과도 같은 성.

  그곳의 성루에서 글로리 공작은 멀리 터오는 아침 해를 보며 상념에 젖어 있었다.

  “마지막 결전이 될지도 모를 날인데도. 해는 여전하기만 하군.”

  고즈넉하게 울리는 음성엔 그의 무거운 심정이 절절히 녹아있었다.

  계속된 패퇴.

  물밀듯이 밀려드는 바호크 군을 맞아 글로리 공작은 그간 이루 말할 수 없는 고초를 겪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용장이라 소문난 그였지만 전력차가 너무도 여실했다.

  물론 글로리 공작도 마냥 후퇴만을 한 것은 아니었다.

  체제를 정비하여 적의 후방을 교란하고, 불랙나이트들을 활용해 보급선을 끊었으며, 불과 기름을 활용해 몬스터들을 물리치려고도 했다.

  하지만 귀신과 같은 전략과 다양한 병종을 이용한 전술도 압도적인 병력 앞에선 무모한 저항에 불과했다. 하물며 병력만으로도 여실한 차이가 있는 터에 몬스터들까지 이유 없이 바호크의 편을 들어 주는 상황이니.

  그렇게 속절없이 후퇴를 거듭하여 마침내 국토의 절반을 침략군에게 빼앗기고 결국 이곳 트라우마에 최후의 진지를 구축했다.

  앞서 벌어진 내전에서도 증명된 사실이지만 트라우마는 수성에 관한한 최강의 성이라 일컬을 만했다.

  하지만 과연 바호크의 거친 군대 앞에서도 그러한 저력이 효과를 발휘할지는 미지수였다.

  글로리 공작은 아이린 왕국의 힘만으로는 도저히 바호크 제국을 당해낼 수 없다는 것을 실감했다. 그래서 공문과 사절을 통해 아마스 신성제국을 비롯한 남반부의 소국들의 참여를 촉구했다.

  하지만 아직 다른 국가들의 참여는 미미하기만 했다.

  몇몇 소국에서 바호크의 침략행위를 규탄하는 공문을 보내왔을 뿐이다. 실제로 병력 상으로는 아무런 도움도 없었다.

  유일하게 바호크 제국을 견제할 수 있는 아마스 신성제국조차 별다른 반응을 모이지 않았다.

  적은 코앞까지 밀어닥쳤는데, 막을 방법은 전혀 없었다.

  오히려 상황은 더욱 악화되어 갔다.

  바호크의 침략 소식을 들은 상인들이 발길을 뚝 끊은 것이다. 제국의 위협을 감수하면서까지 물자를 보급해 줄 상인은 드물었다.

  아이린 왕국은 병력과 물자의 부족에 허덕였다.

  그리고 마침내 바호크 군이 트라우마의 코앞까지 밀어닥쳤다.

  트라우마를 뺏기면 수도인 유리스까지는 순식간에 허물어진다.

  “오늘이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라. 모두 이곳에서 뼈를 묻는다는 각오로 임하라. 조국이 추악한 마족의 발 아래 신음하는 것을 보느니 차라리 이곳에서 적의 창칼 앞에 장렬히 산화하리라! 아이린 왕국의 미래에 영광 있으라!”

  병사들과 엘프들을 앞둔 자리에서 글로리 공작은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병사들의 얼굴에도 긴장이 어렸다.

  트라우마는 아이린 왕국 최후의 보루이자 왕국의 상징과도 같은 곳이다. 왕국의 천년 역사 동안 숱한 외적의 침입을 받았지만, 그 어떤 나라도 트라우마를 넘어서지 못했다.

  그런 비장한 각오가 병사들의 지친 마음에 불길을 당겼다.

  “아이린 왕국의 미래를 위하여!”

  “아들딸들의 미래를 위하여!”

  병장기를 머리 위로 추켜들며 힘찬 함성을 지르는 병사들의 얼굴엔 숙연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긴장한 얼굴로 병사들은 자신의 자리를 찾아갔다.

  활을 든 엘프들은 성벽 위로 오르고, 마법사들은 성루에 올라 먼곳을 주시했다.

  블랙나이트들은 와이번들의 목을 쓰다듬으며 출전의 때를 기다렸다.

  긴장되는 시간은 끈적임이 느껴질 정도로 추적추적 흘러갔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대낮의 볕이 제법 뜨거워졌을 때, 동쪽 성루에 있던 마법사가 확성마법으로 크게 외쳤다.

  “적이다! 몬스터들이 몰려온다.”

  마침내 바호크의 공격이 시작되었다.

  바호크군은 여태 그랬던 것처럼 몬스터들을 앞세웠다.

  붉은 대지를 가득 채운 회색 몬스터들은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였다.

  구성도 가지각색이었다.

  작은 코볼트가 있는가 하면 집채만한 덩치를 자랑하는 오우거의 모습도 보였다.

  그렇듯 각양각색의 몬스터들이 웅장한 발소리를 울리며 트라우마로 몰려왔다.

  구워어어어어어어!

  선두에 선 오우거가 괴성을 지르자 몬스터들은 듣기 거북한 울부짖음을 토했다. 놈들은 필요이상으로 흥분한 상태였다.

  “세상의 균형을 위해!”

  성벽의 엘프들은 숭고한 뜻을 되새기며 활시위를 당겼다.

  하늘을 가득 메울 듯이 솟구친 화살은 파도처럼 우르르 밀려드는 몬스터들의 선두를 칼날바람처럼 쓸어 버렸다.

  후두두두둑!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화살비는 가공 그 자체였다.

  하지만 몬스터의 수는 너무도 많았다.

  특히 오우거나 트롤과 같은 대형 몬스터들은 엘프들의 빗줄기 같은 화살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맙소사. 저 녀석들. 진형을 짜고 있어.”

  누군가 놀란 목소리로 외쳤다.

  사실이었다.

  오크와 같은 중형 이하의 몬스터들이 대형 몬스터들을 방패삼아 서서히 성벽으로 접근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대형 몬스터들이 방패가 되자  촘촘한 엘프들의 화살에도 구멍이 생겼다.

  그때 검은 로브를 둘러쓴 일단의 무리가 성루에 나타났다.

  마법사의 탑에서 파견된 고위 서클의 마법사들이었다.

  “어찌 천년 역사의 유적이 몬스터들에게 무참히 유린당하게 할 수 있겠는가.”

  “위대한 마법의 힘이 검은 욕망을 밀어낼지어다.”

  게걸스럽게 달려드는 몬스터들을 향해 일갈을 던진 마법사들은 마법 지팡이를 하늘로 들어올리며 기적과도 같은 마법을 영창했다.

  “암천을 가르는 순백의 창. 라이트닝!”

  “황혼을 불태우는 불꽃의 축제여. 인센디어리 클라우드.”

  “솟아라. 재앙을 태울 지옥의 불꽃이여. 파이어 월!”

  천재지변과 같은 마법들이 대지를 뒤집고 창공을 갈기갈기 찢어 발겼다.

  가공할 마법의 폭풍 앞에 대형 몬스터들도 대항할 방법이 없었다.

  돌도끼를 휘두르며 달려들던 오우거는 갈라진 땅속으로 하체가 파묻히고, 트롤은 하늘에서 떨어진 벼락에 검은 숯덩이로 화했다.

  마법이 대형 몬스터들을 효과적으로 제거하자 다시금 엘프들의 화살이 위력을 발휘하기 시작했다.

  한때 무거워지던 분위기가 다시금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몬스터들에게 뜨거운 맛을 보여 주자!”

  병사들의 얼굴에 희망이 피어났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하늘을 살피던 보초병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거, 검은 먹구름이 몰려옵니다.”

  서쪽 하늘에서 일어난 검은 먹구름이 빠른 속도로 트라우마에 접근하고 있었다.

  마법사와 엘프들은 즉시 검은 먹구름의 정체를 탐색했다.

  곧 그들의 눈이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가, 가고일!”

  “맙소사.”

  먹구름처럼 보였던 것은 다름 아닌 무수한 가고일 떼였다.

  가고일은 사람과 새를 합쳐 놓은 듯한 모습을 한 몬스터로, 원래 마계에서 수문장 역할을 하는 암흑의 마물이다.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마계에서나 해당하는 애기고, 실제 중간계엔 흑마법사의 던전에서 간혹 볼 수 있을 정도로 희귀했다.

  그런데 그 저주받을 마물들이 하늘을 새까맣게 뒤덮으며 날아온 것이다. 그 수가 얼마나 많았던지 구름이 뭉게뭉게 밀려오는 착각이 들 지경이었다.

  “역시 이 일엔 마계가 관여되어 있구나.”

  글로리 공작의 얼굴이 한층 어두워졌다.

  저렇게 많은 수의 가고일을 동원할 수 있는 흑마법사는 적어도 중간계엔 없다. 바호크가 마계와 연관이 있다는 것이 증명된 순간이다.

  “화, 화살을!”

  “가고일을 떨어트려!”

  엘프들은 활을 허공으로 돌리며 화살세례를 퍼부었다.

  하지만 바람의 가호를 받은 엘프의 화살조차 돌과 같은 신체를 가진 가고일에겐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이럴 수가. 살아있는 가고일의 피부가 어찌 돌과 같단 말인가.”

  엘프들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가고일은 평소엔 석상의 모습으로 자신의 영역을 지키지만 먹이가 다가오면 순식간에 석화를 푼다. 일단 석화를 푼 가고일은 보통의 몬스터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지금 날아오는 가고일들은 석화를 푼 상태에서도 피부가 돌같이 단단해 화살이 통하지 않는 것이었다.

  “아직도 모르겠나요 저 가고일은 보통의 가고일이 아니에요. 마계의 수호를 받은 저주받은 생물이에요. 우리의 적은 결코 중간계의 힘없는 몬스터가 아닙니다.”

  성벽에 오른 카즈엘이 앙칼진 목소리로 외쳤다.

  마계의 저주받은 생물들.

  엘프들의 눈동자에 비장한 결의가 떠올랐다.

  빛의 신을 따르는 엘프들에게 마계의 존재는 결코 양립할 수 없는 적!

  화살을 활에 메기고 두 눈을 감은 채 신성한 주문을 암송했다. 화살촉의 날카로움을 높이고, 냉기와 화염을 입혔다. 그렇게 마법으로 무장한 화살은 전과는 비교할 수도 없는 힘을 가지게 되었다.

  “세상에 빛을!”

  캬즈엘이 힘차게 외치며 화살을 날렸다.

  아름다운 빛 꼬리를 흘리며 날아간 화살은 가고일의 목구멍을 그대로 관통했다.

  “키엑!”

  피와 비명을 쏟아낸 가고일의 몸이 쩍쩍 금이 가며 돌덩이로 화해 지상으로 추락했다.

  하이엘프가 마법화살로 가고일을 격추시키자 이에 고무된 엘프들이 일제히 마법 화살을 쏘아 올리기 시작했다.

  허공으로 쏘아진 마법 화살들이 먹구름과 부딪히며 현란한 폭죽을 터트렸다.

  비명과 절규가 터져 나오고, 부서진 가고일의 돌조각이 우박처럼 지상으로 우수수 떨어졌다. 흥분한 채 그 아래를 지나고 있던 몬스터들에겐 재앙이었다.

  엘프들이 마법 화살로 가고일과 비장한 결전을 벌이고 있을 때, 지상에선 새로운 무리의 몬스터가 붉은 먼지구름을 일으키며 전장에 등장했다.

  미노타우르스!

  걸어 다니는 거대한 소의 모습을 하고 있는 미노타우르스 역시 중간계에서는 흔하게 볼 수 없는 몬스터였다.

  힘과 광폭한 성질은 오우거에 비해 떨어지지만, 상대적으로 지능이 높아 무기를 잘 다루고, 무리를 이루기 때문에 오히려 오우거보다 상대하기 어려운 몬스터가 바로 미노타우르스다.

  그런 미노타우르스들 수백 마리가 붉은 대지를 달려오고 있었다. 먼지를 일으키며 몰려든 미노타우르스 떼는 초원을 질주하는 미친 황소 무리를 연상케 할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마법사들은 준비하라.”

  마탑의 수좌인 올센이 끓는 듯한 음성으로 외쳤다.

  주문을 영창하고 있던 마법사들의 지팡이가 다시 한 번 일제히 허공을 향했다.

  “위대한 마법의 진리 앞에 짐승은 무릎을 꿇으리라!”

  다시금 황홀한 마법의 향연이 지면을 후려갈겼다.

  뇌전이 배고픈 승냥이처럼 대지 위를 달리고, 지하에서 솟구친 화염이 진노한 드래곤처럼 전장을 휩쓸었다.

  “구워에에엑!”

  “꾸드드드드!”

  미노타우르스 수십 마리가 화염과 뇌전에 시뻘건 재가 되어 흩날리고, 절대의 냉기를 품은 돌풍에 몬스터들이 얼음기둥으로 변했다.

  하지만 미노타우르스는 평범한 몬스터가 아니었다.

  힘과 지능을 겸비한 놈들은 마법이 날아들 때마다 밀집과 산개를 거듭하며 어느덧 성문 앞까지 다다랐다.

  쿵쿵!

  강인한 뿔로 성문을 받자 천둥치는 소음이 일며 성벽이 우르르 떨렸다.

  “블랙나이트 돌격!”

  다급해진 글로리 공작은 마침내 숨겨두었던 카드를 꺼내었다.

  키아아아악!

  성난 외침과 함께 와이번 떼들이 트라우마 상공을 날아올랐다. 

  그 수는 무려 300이 넘었다.

  대부분이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에게서 강탈해 온 와이번들이었다. 그리고 회색 와이번들의 선두엔 묵빛 광채를 번뜩이는 검은 와이번들이 바로 트라우마가 자랑하는 무적의 드래곤나이트, 블랙나이트들인 것이다.

  “좋아. 오늘은 소몰이를 하는 날이군.”

  블랙나이트들을 이끌고 있는 병규는 성문을 두드리는 미노타우르스들을 보면서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 외침에 블랙나이트의 기사들은 쾌활하게 웃었다.

  “하하하.”

  “역시 단장님!”

  그들의 밝은 표정 어디에도 긴장감을 찾아볼 수 없었다.

  병규가 이끄는 블랙나이트는 무적이다.

  긴 내전 동안 이미 몇 번이고 입증된 사실이다.

  불가능한 작전을 승리로 이끄는 것을 몇 번이나 보았던가.

  바호크가 국경을 넘어 침공해 왔을 때, 기사들은 긴장했다. 하지만 어젯밤, 단장직을 반납한 병규가 다시 복귀하자, 기사들은 오히려 흥분했다.

  전설이 다시 부활한 것이라 믿어 의심치 않았던 것이다.

  “오랜만이다. 제군들. 오늘도 마음껏 창공을 누비자!”

  “단장님이 앞서신다면 마왕이라 해도 무섭지 않습니다.”

  “하늘은 우리의 것입니다.”

  “푸하하. 바호크 놈들이 놀라 자빠지는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

  기사들은 검을 뽑아들고 검은 머리의 단장을 연호했다.

  단지 병규가 선두를 지키고 있다는 것만으로도 용기가 솟구쳤다.

  “그럼 저 못생긴 석상들부터 처리하도록 하지. 엘프들은 기사들의 갑옷과 무기에 강화 마법을 걸어주도록.”

  병규가 지시하자 드래곤나이트와 합승한 엘프들이 일제히 주문을 암송했다.

  준비가 끝나자 병규는 즉시 블랙나이트들을 기동했다.

  “비상!”

  단장의 외침에 블랙나이트들은 일제히 허공으로 수직 상승했다. 블랙나이트들이 허공으로 솟구치자 회색 와이번들이 꼬리처럼 그 뒤를 따랐다.

  “허리케인 기동!”

  수직이착륙기처럼 호버링을 하던 드래곤나이트들은 병규의 명령이 떨어지는 순간, 바다를 거슬러 오르는 용오름처럼 거칠게 솟구쳤다.

  휘오오오오오!

  소용돌이치며 솟구치는 와이번들의 기세가 얼마나 매서웠던지 광폭한 허리케인을 연상케 했다.

  먹구름처럼 밀려들던 검은 가고일 무리에게 이것은 가히 막을 수 없는 재앙과 같았다.

  “키엑 키엑 키엑!”

  꾸드드드!“

  가고일들은 미친 듯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블랙나이트의 움직임은 너무도 빨랐다.

  “죽어라!”

  “죽음의 철퇴!”

  폭풍처럼 휘몰아친 블랙나이트가 가고일 무리의 중심을 그대로 가르고 지나가자 쩌저저정 하는 시끄러운 소음이 일며 검은 먹구름이 순간 열어졌다.

  뒤이어 우수수 떨어지는 돌가루들.

  가고일들이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무쇠라면 블랙나이트들은 예리한 레이저 절단기와 같았다.

  회오리처럼 휘몰아치는 블랙나이트들의 공격에 가고일들은 보잘 것 없는 먼지덩이처럼 흩뿌려졌다.

  그러나 허둥지둥 도망치는 것도 잠깐이었다.

  나중에는 공포로 몸이 굳어버린 듯 블랙나이트들이 몰려오는데도 도망갈 생각을 못했다.

  단지 떨면서 죽음을 기다렸다.

  가고일이 느낀 공포는 블랙나이트에게서가 아니라 선두에 선 병규 때문이었지만, 정작 병규는 와이번들을 지휘하느라 그런 사실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좋아. 이번엔 지상의 녀석들이다.”

  가고일 무리를 몰아낸 병규는 즉시 와이번들을 불러 모았다.

  “돌격!”

  상공 높은 곳에서 태풍처럼 나선 회전을 하고 있던 와이번들이 용권풍처럼 사정없이 지면을 향해 휘몰아쳤다.

  고오오오!

  바람이 비명을 질렀다.

  “제비기둥!”

  병규가 힘차게 외치며 고삐를 당겼다.

  키롸롸롸롸!

  무서운 기세로 곤두박질치던 와이번들이 지면에 닿을 듯 아슬아슬한 상황에서 꽃이 만개하듯 사방으로 쫙 흩어졌다.

  촤아아아악!

  "그어어엉!“

  “끼루루루루!”

  성난 파도처럼 밀려들던 미노타우르스들의 진형이 삽시간에 뭉개져 버렸다.

  와이번들이 질풍을 일으키며 지면 위를 스쳐 지날 때마다 마치 가위로 비단을 자르듯 미노타우르스의 진세가 쭉쭉 찢겨져 나갔다.

  오직 성벽만 보고 돌진하던 미노타우르스 무리는 하늘에서 떨어진 검은 재앙에 크게 놀란 듯 우왕좌왕하며 정신을 못 차렸다.

  덕분에 마법사와 엘프들은 어느 정도 여유를 찾을 수 있었다.

  잠시 주춤했던 마법과 화살이 성밖을 향해 힘차게 쏘아졌다. 많은 수의 몬스터들이 마법사와 엘프들의 공격에 쓰러졌다.

  하지만 성벽에 달라붙은 미노타우르스는 아직 건재했다. 놈들은 쉬지 않고 무기와 뿔로 성벽을 들이받았다.

  쿵쿵!

  그 튼튼한 성벽도 미노타우르스들의 우직한 공격에 서서히 무너져 갔다.

  “안 되겠군.”

  상공에서 그 모습을 보던 병규는 길게 휘파람을 불렀다.

  드드드드.

  “무에?”

  성벽을 머리로 두드리던 미노타우르스는 발밑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움직임을 멈췄다.

  왜 발밑에서 이런 진동이 느껴지는 것인지 의문이었던 것이다. 그러나 다음 순간, 생각지도 못한 변괴가 생겼다.

  바닥의 모래가 좌우로 찍 갈라지더니 엄청나게 큰 구멍이 생기는 것이었다.

  “무에에에에!”

  “우쿠움. 우쿠움.”

  미노타우르스들은 버둥거리며 빠져나가려 했지만 구덩이는 불랙홀이라도 되는 것처럼 미노타우르스들을 하나 남김없이 모조리 빨아들였다. 그리곤 상처가 아물듯 서서히 구덩이가 움츠러들었다.

  뒤이어 들리는 터무니없는 소음.

  쩝쩝 ... .

  “저 녀석이 식사하는 모습은 언제 봐도 적응이 안 되는군.”

  상공에서 자이언트 샌드웜이 십여 마리의 미노타우르스를 한 번에 꿀꺽 삼키는 모습을 본 경규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그 큰 미노타우르스들을 단숨에 삼키다니.

  대단한 입이 아닐 수 없었다.

  그때, 굳게 닫혀 있던 성벽이 열리며 웅장한 덩치를 자랑하는 트윈헤드 오우거가 나타났다.

  병규의 애완동물인 곰팅이였다.

  휘파람 소리에 곰팅이까지 나선 것이다.

  성밖으로 뛰어나온 곰팅이는 콧바람을 쉭쉭 내뿜으며 다짜고짜 미노타우르스들에게 달려갔다.

  곰팅이는 지상에서 가장 거대한 트윈헤드 중에서도 월등히 큰 덩치를 자랑하는 녀석이다. 미노타우르스들도 상당히 육중한 몸집을 과시했지만 곰팅이 앞에서는 겁에 질린 유치원생 수준에 불과했다.

  크워어어어어어!

  곰팅이가 집채만한 쇠도끼를 휘두르며 맹렬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놀란 미노타우르스들은 혼비백산하여 논밭의 메뚜기처럼 사방으로 달아났다.

  하지만 곰팅이는 그 큰 덩치에도 불구하고 움직임이 상당히 재빨랐다.

  펑펑!

  쇠도끼가 허공을 가를 때마다 귀를 멍멍하게 만드는 파공음과 함께 잘 다져진 미노타우르르 살코기가 하늘을 비행했다.

  전장엔 미노타우르스 외에도 많은 몬스터들이 있었지만 곰팅이가 등장한 후로는 모두 꼬리 만 강아지처럼 몸을 사시나무 떨듯 벌벌 떨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진작 녀석들을 투입할 걸 그랬군.”

  종횡무진 전장을 누비는 곰팅이를 보며 병규는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전장의 몬스터들이 오줌을 지리며 두려워하는 것은 곰팅이가 아니었다. 불안한 듯 흔들리는 몬스터들의 동공은 죽어라 땅만 바라보고 있었다.

  마치 하늘을 올려다보기 두렵다는 듯이.

  하늘엔 병규가 이끄는 블랙나이트들이 있었다.

  모든 추악한 자들의 왕이 하늘에 강림한 것이다.

  “치졸한 녀석들.” 

  트라우마 성 주변을 날던 병규는 전장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모래 언덕을 보며 미간을 찌푸렸다.

  나직한 구릉 아래 바호크의 대군이 오밀조밀한 진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절도가 느껴지는 바호크군의 움직임은 몬스터의 처리가 끝나는 즉시 달려나갈 태세였다.

  “노골적이군.”

  지금까지 바호크는 몬스터들이 자신들과 전혀 관련이 없다는 것처럼 행동했다.

  몬스터의 침공이 있을 때면 언제나 후방에서 차분히 전황을 지켜 보기만 했다.

  그들이 본격적으로 전장에 끼어드는 때는, 아이린 왕국군이 몬스터들에게 심하게 시달린 후,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지친 아이린 군은 성난 해일처럼 몰려드는 바호크 군을 막아낼 방법이 없었다.

  이렇듯 영악한 여우짓을 하던 바호크다.

  아니나 다를까. 이번에도 인근 지역에 군을 주둔시킨 채, 트라우마와 몬스터들의 처절한 혈전을 냉정하게 관전하고 있었다.

  트라우마가 힘들게 몬스터들을 처리하고 기진맥진한 순간, 바호크는 비축해 두었던 전력을 단번에 쏟아 부을 것이다.

  지금까지 아이린 왕국에 대한 바호크의 전술은 항상 이랬다.

  워낙에 수에서 밀리는 터라 명장으로 소문난 글로리 공작도 후퇴를 거듭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제는 그런 속셈이 뻔히 보이는데도 달리 응징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었다.

  몬스터들의 처리가 대강 끝나자 마침내 바호크의 대군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뚜우우우우웅!

  진군을 알리는 나팔이 울렸다.

  철갑을 두른 기사단이 먼지를 휘날리며 전진하자, 끝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많은 수의 보병들이 척척 발걸음을 맞추며 웅장하게 진군했다.

  보병들의 뒤에는 이미 조립을 끝낸 투석기가 돌덩이를 얹고 있었다.

  트라우마 성의 견고하고 높은 성벽에 대한 연구가 끝난 듯, 투석기들의 모양새는 더없이 튼튼하고 견고해 보였다.

  투석기들의 주위에는 궁병들이 배치되어 있었다.

  와이번의 습격에 대비한 것이다.

  마법사들도 캐스팅을 마친 채 와이번들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아이린 왕국의 내전에 대한 정보를 모은 듯 보였다.

  더 이상 불의의 습격은 통하지 않을 것이다.

  삼엄한 눈으로 바호크 군을 살피던 병규의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저것은 처음 보는 병기군.’  보병들의 후방, 바퀴 달린 거대한 성냥갑 모양의 병기가 끼극끼극 움직이고 있었다. 신병기는 강철로 만들어진 화살 수십 발을 한꺼번에 쓸 수 있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 물론 화살을 발사하는 동력은 마법이었다.  이러한 신병기는 슈팅스타라고 불리는 바흐만 황제의 비밀무기였다.

  트라우마 성벽의 견고함은 이미 정평이 나있다.

  웬만한 투석기로는 성벽을 공략할 수 없었다.

  물론 최근 공성전의 양상에서는 투석기의 비중이 극히 줄어들었다. 대신 투석기의 자리를 차지하는 것이 바로 마법사라는 존재였다.

  고위급의 마법사가 지진이라도 일으킨다면 제 아무리 튼튼한 트라우마의 성벽도 견딜 수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이린 왕국엔 마법사의 탑이라는 대륙 제일을 자랑하는 마법사 기관이 있었다.

  바로 이것이 문제였다.

  대륙에서 고위 서클의 마법사를 가장 많이 보유하고 있는 곳이 바로 마탑이며, 그런 마탑을 양성한 곳이 바로 아이린 왕국인 것이다.

  결론적으로 아이린 왕국은 마법력에 한해서는 대륙 제일이었다.

  이것은 곧 성벽을 향한 어떠한 마법 공격도 사전에 모두 차단할 수 있음을 의미한다.

  때문에 트라우마는 대륙의 모든 성 중에서도 가장 견고한 성으로 남을 수 있었던 것이다.

  물론 바흐만 황제도 이러한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이번에 개발한 신병기가 바로 이 슈팅스타였다.

  ‘갈까?’

  병규는 야릇한 시선으로 바호크 군의 진군을 내려다보았다.

  몸이 후끈 달았다.

  타는 듯한 갈증이 일었다.

  당장 저 아래로 뛰어내리고 싶다.

  송두리째 날려 버리고 싶다.

  가증스런 놈들을 단숨에 뒤엎어 버리고 싶었다.

  바호크의 병력은 붉은 대지를 뒤덮을 정도로 엄청났지만, 전혀 위축되지 않았다.

  지금이라면 충분히 혼자서도 다 처리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자만이나 호승심과는 다르다.

  자신감.

  병규는 그런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모르는 사이 그의 전신에서 사요한 기운이 피어오르고 있었다.

  끼그그그그그!

  끄득, 끄득.

  병규가 쏟아 낸 기운에 놀란 와이번들이 신음성과 같은 괴성을 흘렸다. 검은 오오라에 숨통이 턱턱 막혔다.

  ‘그래. 잠깐만. 조금만 휘젓고 오자. 조금 정도는 괜찮을 거야.’

  혀로 입술을 축이던 병규는 슬며시 와이번에서 상체를 일으켰다.

  “참아라.”

  어깨에 있던 호랭이가 그의 뺨을 토닥였다.

  들뜨던 마성이 그 한마디에 차갑게 식었다.

  그때 가녀린 팔이 그의 허리를 감아왔다.

  카즈엘이었다.

  그녀는 초초의 출격 이후로도 줄곧 병규의 뒤를 말없이 지켰다.

  그런 카즈엘이 말했다.

  “가지 말아요. 제발.”

  “ ... .”

  병규는 말없이 와이번의 안장에 앉았다. 소름끼치게 피어오르던 살기도 차츰 가라앉았다.

  쉭쉭~

  와이번의 거친 숨소리가 들려왔다.

  비로소 숨통이 트인 모양이다.

  “돌아가자.”

  호랭이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병규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는 큰 목소리로 회군을 지시했다.

  “전원 대열을 정비하라. 트라우마 성으로 돌아간다.”

  병규가 와이번들을 물린 직후, 바호크는 트라우마 성을 공략하기 위한 작업에 착수했다.

  첫 시작은 투석기였다.

  이번 전쟁을 위해 특별히 강화된 투석기들은 멀리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성벽을 강타할 수 있었다.

  튼튼하기로는 둘째가라면 서러울 트라우마의 성벽이 크게 진동하며 휘청였다.

  간혹 멀리서 날아온 바위가 성벽을 넘는 경우도 있었다.

  마법사들과 엘프들이 전력을 다해 날아드는 바위들을 걸러냈지만, 부서진 돌조각이 가옥 위로 쏟아지는 것만을 어쩔 수 없었다.

  쿠두두두두두!

  가옥이 허물어지고, 사람들의 비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글로리 공작은 병사들을 급파해 부상자들을 수송하고, 건물 잔해에 갇힌 사람들을 구조했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피해는 커져만 갔다.

  끝없이 쏟아지던 투석기의 공격도 마침내 끝을 맺었다.

  트라우마의 성벽은 유성비처럼 쏟아진 바위 공격에 너덜너덜해졌지만 끝내 버텨내 주었다.

  믿을 수 없는 견고함이었다. 

  하지만 바호크의 공격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투석기가 잠시 물러나고 신병기가 전진배치 되었다.

  슈팅스타.

  대량의 화살을 한꺼번에 폭사하는 기계였다.

  “마법사들. 제자리에.”

  명에 따라 슈팅스타 하나에 마법사 서넛이 매달렸다.

  포수가 각도를 계산하자 마법사들의 차례가 되었다.

  “마나 주입.”

  각기 3. 4서클에 이르는 마법사들은 슈팅스타에 모든 마나를 쏟아 부었다.

  땅!  땅! 따당!  따다당! 푸쉭! 쉬이이이이이익!

  슈팅스타가 진동하며 구식 증기기관차처럼 수증기를 내뿜었다.

  기관 안에 장착된 화살들이 쇠꼬챙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슈팅스타에 장착된 화살들이 쇠꼬챙이처럼 벌겋게 달아올랐다.

  슈팅스타에 장착된 화살들은 평범한 화살이 아니었다. 화살 전체가 무쇠로 이루어진, 화살이라기보다는 차라리 창이라고 부르는 것이 더 어울릴 무기였다. 게다가 무게는 또 얼마나 무거운지 웬만한 철퇴는 명함도 못 내밀 지경이었다.

  쉬이이이이익! 휘이이이이잉! 휘이이잉!

  슈팅스타가 내뿜는 증기가 절정에 이르렀다.

  “발사!”

  마침내 좌측 첫 번째 슈팅스타부터 차례로 화염을 쏘아내기 시작했다.

  파파파파파팍!

  불꽃이 작렬하듯, 시뻘겋게 달아오른 무쇠 화살이 긴 포물선을 그리며 트라우마를 향해 날아갔다. 화살들은 높은 성벽을 가뿐하게 넘어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갔다.

  슈슈슉! 쿠쿠쿵! 투퉁!

  소나기처럼 성안으로 쏟아져 들어온 무쇠 화살들은 가공할 만한 위력을 품고 건물이건 사람이건 닥치는 대로 꿰뚫었다.

  “으악!”

  “크에에에엑!”

  사방팔방에서 비명 소리가 메아리치고, 지붕이 무너지고, 기둥이 쓰러졌다.

  뒤늦게 엘프와 마법사들이 힘을 합쳐 성의 상공에 쉴드를 쳤지만, 역부족이었다.

  “다, 당했다.”

  검을 바쁘게 휘두르며 무쇠 화살들을 쳐내던 글로리 공작은 낭패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애초에 바호크는 트라우마의 성벽을 공략할 생각이 없었다.

  성벽 안의 아이린 군을 직접 공격할 속셈인 것이다.

  달권진 화살을 쏘는 신병기는 단순하지만, 트라우마처럼 철벽을 자랑하는 성을 공략하는 데는 더없이 적합했다.

  ‘놈들, 준비가 너무도 철저하구나.’

  글로리 공작은 이를 갈았다.

  바호크의 황제는 아이린의 내전을 보고 많은 정보를 얻었다. 때문에 이렇듯 사전준비가 철저할 수 있었다.

  적은 이쪽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데, 이쪽은 적에 대해 아는 것이 전무하다.

  가뜩이나 전력 차가 심한 상황에 암울한 소식만 쌓여 갔다.

  “어쩔 수 없다. 지금은 버티는 수밖에 없다. 날이 저물기만을 참고 견딜 수밖에 없다.”

  성루에서 바호크 군의 진세를 살피던 글로리 공작은 주먹을 꾹 움켜쥐었다.

  검 자루를 움켜쥔 손이 부들부들 떨렸다.

  원통하지만 지금은 참아야만 한다.

  이를 악물고 전력을 보전해야 할 때다.

  그리고 날이 저문 후, 아껴 두었던 전력을 총동원해 적을 교란한다.

  물론 바호크 군에게 그런 저열한 전술이 먹힐지는 미지수다.

  하지만 블랙나이트 단장의 애완 몬스터인 자이언트 샌드 웜을 통해 지하땅굴을 뚫고 적의 후방으로 침투한다면, 어쩌면 일말의 가능성이 생길지도 모른다.

  블랙나이트들이 상공에서 원호해 준다면 가능성을 더더욱 높아질 것이다.

  “우습군. 트라우마에 주둔할 때만 해도 몬스터가 가장 큰 골칫거리였는데, 지금은 오히려 몬스터에게 희망을 걸어야 하는 상황이라니.”

  글로리 공작의 입가에 씁쓸한 미소가 맺혔다.

  불과 1년 전만 해도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과 처절한 혈투를 벌였던 그다. 그런데 지금은 적이던 몬스터들의 힘을 빌리게 되었으니 그의 마음이 얼마나 참담할까.

  슈슈슈슉! 쉬잉! 쉬쉬쉬쉭!

  슈팅스타에서 발사된 무쇠 화살은 한여름의 소나기처럼 마구잡이로 쏟아졌다.

  시간이 지날수록 트라우마에는 절망이라는 단어가 깊게 새겨졌다.

  “흥. 쥐새끼 같은 놈들.”

  후방에서 전장의 흐름을 지켜보고 있던 바흐만 황제는 의자의 손잡이를 두드리며 짜증을 연발했다.

  그토록 공격을 퍼부었는데도 저 빌어먹을 성은 꿈쩍도 않는 것이 아닌가.

  신병기 슈팅스타의 위력은 기대 이상이었다.

  벌겋게 달궈진 무쇠 화살이 비처럼 쏘아져 나갈 때의 그 쾌감은 말로 설명할 수 없을 지경이었다.

  그때만 해도 단숨에 트라우마를 제압할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슈팅스타의 공격을 견디다 못한 글로리 공작은 최악의 발악으로 병사들을 이끌고 성밖으로 뛰쳐나온다. 그 순간. 아껴 두었던 병력을 동원하여 단숨에 놈과 놈의 병사들을 제압한다.

  이것이 바흐만 황제가 구상한 작전이었다.

  그런데 생각과 달리 글로리 공작은 성밖으로 뛰쳐나오지 않았다.

  오히려 검먹은 거북이처럼 트라우마라는 껍질 속에 숨은 채 미동도 않는 것이다.

  “용기라고는 쥐뿔도 없는 소인배들 같으니.”

  짜증을 부리면서도 바흐만 황제는 내심 글로리 공작에 대해 감탄을 금치 못했다.

  애초에 전력 차가 여실했던 아이린 왕국이다. 설사 내전이라는 악재가 없었다고 해도 상대가 안 되는 병력이다. 

  하지만 생각보다 아이린의 저력은 대단했다.

  특히 글로리 공작이 전장에 나타나면서부터는 전쟁이 힘들어졌다. 아이린 왕국의 영토로 일보 전진할 때마다 귀중한 병력을 숱하게 잃어야 했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용장이라더니, 정말로 그 실력이 녹록치 않았다.

  “블랙나이트의 단장인가 뭔가 하는 녀석도 불쾌하긴 마찬가지지.”

  검은 머리의 검은 눈동자를 한 족보도 알 수 없는 젊은 녀석은 와이번들을 귀신같이 부렸다. 무적을 자랑하는 그의 군대였지만 녀석에게 꽤 골탕을 먹었다.

  게다가 녀석이 부리는 회색 와이번은 바호크가 자랑하는 드래곤 나이트들의 용마들이 아닌가.

  전장의 하늘을 휩쓰는 회색 와이번 무리를 볼 때마다 바흐만 황제는 피가 거꾸로 솟는 것 같았다.

  그럴 때면 보좌관이나 호위병들에게 날벼락이 떨어지곤 했다.

  바흐만 황제는 이미 예전의 그가 아니었다.

  쉐도우와 이중 계약을 맺은 지 불과 몇 개월.

  황제는 완전히 변해버렸다.

  초대공왕의 화신이라고까지 일컬어지던 진취적인 기상이 넘치던 황제는 머리가 텅 빈 폭군으로 변하였다. 걸핏하면 시녀를 죽이고, 충성스런 신하를 명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참형에 처했다.

  그렇게 목이 걸린 자들 중엔 토드란 외무대신과 케르베로스 제3기사단장인 파먼 백작도 포함되어 있었다.

  마족과의 계약 때문이었다.

  정기를 빼앗기고 총기를 잃어버린 황제는 늙고 사나와진 폭군에  불과했다.

  황제의 광폭화와 더불어 바호크의 영토 역시 급속하게 마계화의 양상을 띠기 시작했다.

  마물이 버젓이 돌아다니고, 땅이 검게 변색되었다. 어둠에 영향을 받은 사람들은 심성이 약해져 살인을 비롯한 온갖 악행을 대수롭지 않게 저지르는 지경이 되었다.

  법은 사라지고, 무질서가 팽배했다.

  일부 신앙이 남은 신관과 귀족들이 목숨을 걸고 바호크를 탈출하여 지옥과 같은 참상을 증언했다.

  그렇게 바호크는 저주받은 땅이 되었다. 

  그럼에도 바흐만 황제는 그런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아니, 알려 하지 않았다.

  차분한 성격으로 대계를 읽어 내던 현왕 역시 썩어 가는 바호크의 영토처럼 강팍하게 말라버렸다.

  정기를 잃은 몸은 수분이 빠지고 살이 늘어져, 부패한 미이라를 연상케 했다. 심신이 상한 그의 모습 어디에도 과거의 풍채를 찾아 볼 수 없었다.

  “크크크. 지겨운 녀석들. 하지만 오늘로 이 맥 빠지는 전쟁도 끝이다.

  광기어린 웃음을 뱉어낸 바흐만은 바싹 굳어있는 부관에게 손가락을 퉁겼다.

  “전군을 진군시켜라. 오늘 해가 지기 전에 저 꼴 보기 싫은 트라우마를 지도상에서 영원히 사라지게 만들어라.”

  “명대로 따르겠사옵니다. 폐하.”

  그때부터 바호크의 대 진격이 시작되었다.

  

  뚜우~ 뚜우~

  나팔 소리가 길게 울렸다.

  슈팅스타의 화려한 불꽃쇼를 구경하고 있던 바호크의 보병들은 호들짝 놀랐다.

  짧고 길게 두 번 울리는 나팔 소리.

  이것은 전군 돌격을 알리는 명령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보병들은 지휘하고 있던 기수들이 일제히 깃발을 치켜 올리며 진군을 외쳤다.

  “돌격! 돌격! 비겁한 아이린 놈들에게 죽음의 철퇴를 가하라!”

  “전군 돌격!”

  “우와아아아아아!”

  슈팅스타의 엄호를 받으며 사다리를 든 바호크의 보병들이 죽을 각오로 성벽을 향해 뛰었다.

  당연하게 트라우마의 응전이 이어졌다.

  “궁수들 제자리에! 발사!”

  촤아악!

  엘프들의 화살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퍼퍽.

  슈슈슈숫

  피핑.

  “아악.”

  “크윽.”

  “눈, 내 눈!!”

  “컥!”

  격한 신음과 비명이 피와 살육으로 얼룩진 전장에 참혹한 색을 더했다.

  “보병들을 지원하라.”

  슈팅스타가 불꽃을 토해냈다.

  화약대신 마법을 매개로 쏘아진 강철화살들은 피도 눈물도 없는 무자비한 살인귀처럼 트라우마 상공을 뒤덮었다.

  쿠쿠쿵!

  투드드드드드드!

  지진과 같은 폭음이 귓가를 진동했다.

  “으악.”

  “흐윽!”

  성벽 위에서 화살을 날리던 엘프들이 다수 희생되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엘프들은 자리를 떠나지 않았다. 팔이 날아가고, 다리가 떨어지고, 동료들이 쓰러지는데도, 엘프들은 눈물을 흘리는 채로 꿋꿋하게 화살을 날렸다.

  그 장엄한 광경에 마법사들마저 합세했다. 그들의 일부는 마나의 방패로 엘프들을 보호하고, 다른 일부는 진노의 신이 되어 광풍과 화염을 쏘아 보냈다.

  하지만 안전한 곳에서 모습을 드러낸 마법사들은 슈팅스타의 좋은 먹이가 되었다.

  달궈진 무쇠 화살에 꿰뚫린 마법사들이 성벽에 하나둘 걸렸다.

  처참했다.

  그리고 참담했다.

  트라우마는 건립 이래 가장 처참한 역사를 기록하고 있었다.

  몸서리쳐지는 사람들의 비명 소리에 철벽과 같던 트라우마는 신음이라도 하듯 휘청였다.

  보다 못한 블랙나이트들이 위험을 무릅쓰고, 하늘로 솟구쳤다.

  슈슈슈슛! 피핑!

  키에에엑!

  꽈아아아악!

  많은 수의 와이번이 슈팅스타의 화살공격에 살 맞은 기러기처럼 떨어졌다.

  “고도를 높여라. 저 빌어먹을 화살이 미치지 않는 곳까지! 다들 힘을 내!”

  블랙나이트들을 지휘하는 병규의 음성에서 은은한 분노가 풍겨났다.

  그는 진실로 분노하고 있었다.

  오늘 너무 많은 죽음을 보았다.

  이해하지 못할. 이해되지 않는 죽음들.

  저들 중 자신의 죽음을 바란 이가 단 한 명이라도 있을까?

  두개골이 함몰되고, 뇌수를 터트리며 처참하게 죽길 고대한 이가 과연 있었을까.

  타의에 의해 전장에 내몰려져 덧없이 죽어 나가는 것이다.

  가슴이 답답했다.

  피가 끓었다.

  응어리 진 무언가가 목구멍을 타고 입 밖으로 터져 나올 것만 같았다.

  차갑게 냉각되어 가던 그의 마음에 전장의 참상은 한 가닥 뜨거운 불씨를 던져 넣었다. 한번 불이 붙은 열기는 걷잡을 수 없이 번져 갔다.

  그리고 그것은 모든 것을 허물어트릴 절망의 힘이 되어 폭발하기 직전까지 부풀어올랐다.

  암흑이 증폭되었다.

  어둠이 확장되었다.

  선술의 기운은 말라비틀어진 나무처럼 쇄하고, 검은 욕망은 끝없는 탐욕을 향해 꿈틀꿈틀 약동했다.

  간신히 균형을 유지하던 선과 마의 균형은 서서히 붕괴되었다.

  그렇게 병규는 쉐이드가 바란 대로 잃어버린 파괴적 본능을 각성해 나가기 시작했다.

  절망의 군주.

  모든 추악한 자들의 왕.

  마왕 벨로로폰이 부활하려 하는 순간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 아아~”

  잔혹한 전장 한복판에 평화롭다 못해 괴이하기까지 한 음악이 염치없이 울려 퍼졌다.

  그 한가로운 음악은 절망이 회오리치던 전장에 전혀 뜻하지 않은 새로운 바람을 불러일으켰다.

  “헉헉.”

  거친 숨결을 토하며 마의 구렁텅이로 곤두박질치던 병규는 때마침 들려온 그리운 노래에 간신히 의식을 회복할 수 있었다.

  “병규야. 이제 정신이 드느냐?”

  호랭이가 그의 얼굴을 부여잡은 채 긴장한 표정으로 물었다.

  병규가 절망으로 향하는 동안 호랭이는 필사적으로 그를 되돌리기 위해 노력했다.

  “ ... 네.”

  병규는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시선을 아래로 돌렸다.

  갑자기 들려온 자명종 소리. 그것은 필연적으로 누군가의 출현을 알리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 아아~”

  여전히 자명종 소리는 우렁차게 울리고 있었다.

  증폭마법이라도 걸린 듯, 그 소란스런 전장 구석구석까지 노랫소리는 유쾌할 정도로 깨끗하게 울려 퍼졌다.

  자명종 소리는 마법과 같은 힘을 지니고 있었다.

  정신없이 싸우던 아이린과 바호크의 병사들은 방근 전까지의 참혹한 상황도 잊은 채,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자명종 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상당한 시간이 흘렀다.

  스스스스.

  자명종의 노랫소리가 점점 희미해지더니 이번엔 괴이한 소음이 귀를 자극하기 시작했다. 전장의 병사들은 긴장하며 소리가 들려오는 방향을 살폈다.

  “저, 저기!”

  “엇?”

  “저게 뭐야!”

  홀린 듯 서 있던 바호크 군의 일각이 술렁였다.

  모래바람이 몰아치고 있는 전장의 남쪽, 검은 무언가가 스르르 밀려오고 있었다.

  “물인가?”

  “검은 강? 마, 말도 안 돼.”

  모두들 작금의 상황도 잊은 채 멍하니 넘실넘실 밀려드는 검은 물결에 주목했다.

  “뭣들 하는 것이냐. 어서 저 버러지 같은 놈들을 쓸어 버리지 않고!”

  전장의 참혹한 광경을 관전하며 고기와 술을 들던 바흐만 황제는 자리에서 분통을 터트렸다.

  하지만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심지어 소심한 그의 부관조차 이 순간만큼은 검은 물결에 시선을 집중하고 있었다.

  바닥에 착 붙은 채 꾸물꾸물 밀려오는 그것은 멀리서 보기엔 영락없는 강의 모습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강이 아니었다.

  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사각.

  파도 소리 대신 기묘한 소음이 소름끼치게 밀려왔다.

  으스스한 기분에 사람들은 저도 모르게 몸을 부르르 떨었다.

  마치 징그러운 벌레가 몸을 타고 올라오는 것 같았다.

  “으, 으아아아 ... .”

  검은 물결에 왈칵 두려움을 느낀 병사들이 슬슬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한번 일어난 공포는 무섭게 확산되고 증폭되었다.

  “시, 싫어!”

  “우아아아아아!”

  어느새 병사들은 공포에 떨며 달아나기 시작했다.

  츠츠츠츠츠츠츠츠.

  기묘한 소음은 갈수록 높아졌다. 검은 물결 또한 전장에 깊숙이 밀려들었다.

  자명종의 노랫소리를 들은 병규와 호랭이는 즉시 트라우마 성으로 복귀했다. 높이 솟은 성루에 오른 둘은 곧 전장에 나타난 검은 물결을 보며 경악성을 내질렀다.

  “엇?”

  “저건.”

  저 물결. 저 소리. 보는 것만으로도 으슬으슬 돋는 소름.

  결코 잊을 수 없는 것이었다.

  “서, 설마 아니겠지?”

  호랭이가 병규를 올려다보며 어색하게 웃었다.

  부정하고 싶었다.

  설마 저 검은 강이 자신이 아는 그것들이 아니길.

  병규는 굳은 표정으로 입을 다물고 대답하지 않았다.

  다만 심각한 표정으로 검은 강을 응시했을 뿐이다. 그러다 어느 순간 고개를 돌렸다. 계단을 가쁘게 오르는 발소리가 들렸기 때문이다.

  “주인님. 샤바!”

  검은 머리칼을 촐랑이며 날들이 달려온 아름다운 소년이 병규의 허리에 매달렸다.

  “샤, 샤바?”

  호랭이의 표정이 해쓱해졌다.

  “그, 그럼 역시. 저 검은 강은 ... .”

  샤바가 등장함으로 더욱 확실해졌다.

  저 검은 강은 그것이 분명했다.

  절대로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악몽과 같은 샤바의 백성들인 것이다.

  “하, 하지만 이드라센에는 분명 바퀴가 없을 텐데.”

  호랭이의 안색이 하얗게 뜨고 있을 때, 샤바는 병규의 주위를 폴짝폴짝 뛰면서 촐랑댔다.

  “보고 싶었어요. 샤바. 잘 계셧어요. 샤바? 저 없는 동안 심심하지는 않았어요. 샤바?”

  끊임없이 질문이 쏟아졌다.

  전 같으면 귀찮아했을 병규는 피식 실없이 웃으며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래. 별일 없었다. 그런데 퀴나는?”

  “저기 있어요. 샤바.”

  즐거운 듯 흥얼거리던 샤바가 머리칼을 더듬이처럼 뻗으며 한쪽을 가리켰다.

  하늘을 찌를 듯한 기세로 솟은 성루 위, 한 소녀가 한가로운 자태로 앉아있었다. 조금만 발을 삐끗해도 위험할 장소건만 소녀는 소풍이라도 나온 듯 편안해 보였다.

  인형 대용인 자명종을 꼭 안은 채 소녀는 불어오는 바람을 즐겼다.

  아이번들이 날아와 그녀 주위를 호위하듯 감쌌다.

  말할 것도 없이 소녀의 정체는 퀴니였다.

  “다녀왔어.”

  병규의 시선을 느낀 퀴니가 시선을 그에게 향하며 배시시 웃었다. 상당한 거리가 있었음에도 바로 옆에서 속삭이는 것처럼 분명하게 들렸다.

  “잠시만, 여기 정리하고 갈게.”

  가볍게 손을 흔든 그녀는 앙증맞은 표정으로 샤바에게 눈짓했다.

  “알았다. 샤바.”

  머리칼을 번개모양으로 삐죽 세운 샤바가 결연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그는 성밖을 향해 손을 쭉 뻗었다.

  “때가 되었다. 샤바.”

  삼엄하고 진중한 표정이 깔끔한 샤바의 얼굴과 묘하게 어울렸다.

  “사랑하는 백성들아. 샤바! 지저분한 성밖을 깨끗하게 청소해 주어라. 샤바!!”

  콰아아!

  샤바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잔잔하게 흐르던 검은 강물이 돌연 해일처럼 일어났다.

  그리고 삽시간에 바호크 군의 일각이 말끔하게 쓸려나가 버렸다. 웅장하고 처절한 광경을 연출하던 좀 전과 비교하면 허무할 정도로 간단한 최후였다.

  “헉!”

  호랭이의 입에서 신음이 터졌다.

  그는 샤바를 본 후에도 혹시나 하는 일말의 희망을 품고 있었다. 하지만 검은 강물에 쓸리며 ‘흡흡흡흡’ 하는 괴상한 비명을 지르는 수많은 병사들의 모습을 본 순간, 그 한 가닥 기대는 송두리째 무너지고 말았다.

  “맙소사. 이제 이드라센 대륙은 바퀴 천국이 되고 마는 거야?”

  신음과 같은 호랭이의 말이 왜인지 농담처럼 들리지 않았다.

  “뭐, 뭐시냐! 저것이!”

  바흐만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얼마나 놀랐던지 그의 두 눈이 당장이라도 튀어나올 것처럼 부풀어 있었다.

  “저, 저것이 대체 무슨 마법이란 말인가!”

  뜬금없이 나타나 바호크의 자랑인 드발 보병단을 순식간에 쓸어버린 검은 물결.

  단순히 샤바가 백성들을 부려서 만든 조화였지만, 멀리서 관전하고 있던 바흐만의 눈에는 엄청난 위력의 색다른 마법으로 보였다.

  그 검은 파도에 무려 10분의 1이 넘는 병사들이 전장에서 쓸려나갔다.

  너무도 터무니없는 사태에 바흐만은 턱을 덜덜 떨었다.

  설사 8서클의 헬파이어 마법이라 해도 이렇게 쿠식한 위력은 없었다.

  “이건 마치 ... 드래곤의 브레스 같잖아.”

  막대한 검은 물결의 위력은 가히 최강이라고 일컬어지는 드래곤의 브레스에 비견될 만했다.

  게다가 검은 물결에서 풍겨오는 소름끼치는 소음과 꺼림칙한 분위기는 바호크 쪽으로 완전히 기울었던 전세를 단숨에 역전시켰다.

  출렁이는 검은 물결은 정확히 바호크 군과 트라우마 성의 중간에 자리를 잡았다.

  이미 보병의 일각이 깔끔하게 쓸려 나가는 장면을 본 터라 바호크 군은 감히 함부로 검은 물결에 덤벼들지 못했다.

  하지만 놀랄 일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다시금 전장에 노래가 울려 퍼지기 시작했다.

  그것은 검은 물결이 나타나기 직전 들렸던 바로 그 괴이한 음악이었다.

  “쿵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 아아~”

  증폭마법을 사용한 관계로 멀리까지 울려 퍼진 노랫소리.

  바흐만 황제를 비롯한 바호크의 병사들은 긴장하기 시작했다.

  또 어떤 변괴가 일어날 것인가.

  그런 불안을 증명하기라도 하듯. 전장에서 멀리 떨어진 모래 언덕에서 먼지 구름이 부옇게 일어나기 시작했다.

  바호크군과 트라우마 양측 모두 긴장된 눈으로 먼지 구름을 주시했다. 먼지 구름의 정체를 맨 먼저 확인한 것은 트라우마 성벽위의 엘프들이었다.

  “모, 몬스터!”

  먼지 구름을 피워내며 달려오고 있는 것은 바로 수를 헤아릴 수 없이 많은 몬스터들이었다.

  종족도 각양각색이었다.

  오크, 고블린, 리저드맨, 미노타우르스, 트롤, 오우거 ... . 심지어 하늘에서는 가고일과 하피, 와이번들까지 몰려들었다.

  붉은 대지의 모든 몬스터들이 군대라도 조직한 것처럼 일제히 달려오는 것이다.

  몬스터들을 확인한 트라우마와 바호크 군의 안색은 삽시간에 반전되었다.

  긴장으로 가득했던 바호크 군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반면 트라우마는 절망의 탄식을 터트렸다.

  특히 바호크군은 환성을 지르며 몬스터들을 반겼다.

  “와아! 몬스터들이다.”

  “하하하. 그럼 그렇지.”

  지금까지 바호크군은 몬스터들의 지원을 받았다. 공격이 있기 전날엔 언제나 한발 앞서 광분한 몬스터들이 적진을 습격했다.

  항상, 매번, 이런 행운은 계속되었다.

  덕분에 바호크는 지금까지 희생을 최소화하며 아이린 왕국의 깊숙한 곳까지 진출할 수 있었다.

  처음엔 꺼림칙하게 생각하던 병사들도 이제는 수호신이라도 되는 것처럼 몬스터들을 반겼다.

  하지만 그들의 표정이 급변하는 데에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몬스터들의 방향이 이상하다.”

  몬스터들은 트라우마가 아니라 바호크의 본진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처음엔 조금 이상하다 생각하던 바호크의 병사들도 몬스터들이 점점 가까이 다가옴에 따라 표정이 시시각각 변하게 되었다.

  그리고 마침내 우려하던 상황이 벌어졌다.

  밀물처럼 몰려들던 몬스터들이 다짜고짜 바호크 군을 덮친 것이다. 몬스터들을 수호신으로 철석같이 믿고 있던 바호크 군에게 이것은 청천벽력, 그야말로 마른하늘의 날벼락이었다.

  쿠와아아아아!

  키득키득!

  “크악.”

  “아아아아아악”

  크드드드드!

  쿠쿵!

  “케에에엑”

  “히, 히익!”

  진득한 괴음과 함께 비명 소리가 사방에서 동시다발적으로 터져왔다. 별다른 견제 없이 바호크 군 진영 깊숙이 침입한 몬스터들은 양 떼 속에 뛰어든 맹수들처럼 날뛰었다.

  가고일과 하피들은 토끼를 채듯 병사들을 채갔고, 광분한 오크들은 칼과 방패를 휘두르며 궁병들을 덮쳤다. 몸뚱이에 창과 칼이 박힌 트롤은 아픈 줄도 모르고 날뛰었고, 오우거가 양 손에 대여섯 명의 병사들을 쥐어짜며 하늘이 무너져라 울부짖었다.

  “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란 말인가!”

  바흐만 황제는 자리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아이린 왕국을 이드라센 대륙의 지도에서 지울 때까지 몬스터들은 무조건 바호크를 도울 것이다.

  쉐이드와 맺은 계약이었다.

  그 계약은 지금까지 충실히 이행되었다.

  그런데 그런 몬스터들이 돌변한 것이다.

  바흐만 황제는 몬스터들의 갑작스런 이상 행동에 머릿속이 혼란스러웠다. 하지만 만약 이런 변괴의 원인이 고작 한 사람의 출현 때문인 것을 그가 알게 된다면 모르긴 몰라도 당장 눈이 뒤집힐 것이다.

  전장에 그녀가 나타남에 따라 몬스터들은 쉐이드의 지배력에서 벗어났다. 그녀의 강력한 지배력은 단숨에 몬스터들을 휘어잡았다.

  적어도 몬스터들의 부리는 능력에 있어서만큼은 마계의 쉐이드조차 그녀 앞에 감히 명함을 못 내밀 정도로 그녀는 지배력은 막강했다.

  그렇게 쉐이드의 명령에 따라 트라우마를 적으로 간주하던 몬스터들은 자명종 소리를 이용한 퀴니의 은밀한 전언에 곧바로 변심하고 말았다.

  덕분에 몬스터들을 굳게 믿고 있던 바호크 군은 막대한 희생을 치러야 했다.

  “황제 폐하. 몬스터들의 공격이 너무 드셉니다. 빨리 결단을 내리셔야 ... .”

  “젠장할. 뭘 그리 허둥대는 것이냐! 상대는 고작 몬스터다. 용맹한 바호크의 병사들이 몬스터 따위에 당황한데서야 말이 되느냐!”

  “하. 하지만 병사들과 몬스터가 한데 섞여 있는지라. 마법도 화살도 함부로 쓸 수 없는 상황입니다. 그러니 ... .”

  말을 이어가던 부관은 순간 얼굴이 굳어버렸다.

  바흐만 황제의 표정이 기괴하게 변해버렸기 때문이다.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군.”

  너무도 차가운 음성으로 황제가 명했다.

  “여봐라. 당장 마법사들에게 명령을 내려라. 슈팅스타다. 슈팅스타를 몬스터에게 사용하라.”

  갑작스런 황제의 명령에 부관은 식은땀을 흘렸다.

  “허. 허나 황제 폐하. 그리하면 몬스터와 싸우고 있는 병사들도 희생될 수 있습니다.”

  “그게 무슨 상관이란 말이냐? 이곳은 전장이 아니더냐. 언제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전쟁터다. 바호크의 영광을 위해 목숨 하나 버리지 못할 이유가 무엇이란 말이냐?”

  비정함까지 느껴지는 황제의 말에 부관은 으스스한 한기를 느꼈다.

  “뭘 어물쩍거리는 게냐! 당장 명을 전하지 않고! 네놈 목이 잘려야 비로소 움직일 생각인 게냐!”

  “아, 아닙니다.”

  황제의 살기어린 엄포에 부관은 화들짝 놀라며 막사 밖으로 뛰어나갔다. 그러다 그는 급히 안으로 들어서는 다른 귀족과 쿵 하고 부딪히고 말았다.

  “어이쿠.”

  그가 머리를 움켜쥐고 신음을 삼키고 있을 때, 그와 머리를 부딪친 귀족은 허둥대는 음성으로 보고를 올리고 있었다. 그만큼 중요한 보고였다.

  “크, 큰일났습니다. 시, 신성제국이 ... 신성제국이 나타났습니다.”

  “뭐라?!”

  바흐만은 다시금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야 했다. 어찌 된 일인지 그는 오늘 하루 종일 놀라기만 하는 것 같았다.

  신성제국의 기사단이 전장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바호크가 검은 파도(?)와 갑자기 변심한 몬스터들로 인해 한창 혼란을 겪고 있을 바로 그때였다.

  남쪽에서 불어오는 뜨거운 바람을 타고 올라온 신성제국의 기사단은 아무런 선전표고도 없이 돌연 바호크의 후방으로 돌격해 들어왔다.

  장엄한 신성력을 온몸에 두른 신성기사단 앞에 어수선한 군진은 단숨에 무너졌다. 성신이 찔러낸 빛의 창처럼 바호크의 일각을 발기발기 찢겨나갔다.

  바호크 군의 후방엔 투석기와 슈팅스타 등의 중병기, 그리고 마법사들이 포진해 있었다.

  느닷없는 기습에 전혀 대비하지 못했던 만큼 피해는 엄청날 수밖에 없었다.

  중병기를 운용하던 공병들은 대부분 신성기사단의 첫 번째 돌격에 희생되었고, 궁병들의 호위를 받던 마법사들도 상당수가 죽고 말았다.

  이 한 번의 기습으로 인해, 바호크는 트라우마를 공략할 전력을 상당부분 상실하게 되었다.

  “크윽. 후, 후퇴하라.”

  결국 바흐만 황제는 후퇴를 명할 수밖에 없었다.

  트라우마를 거의 제압한 상황이었으나, 지금은 오히려 반대가 되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검은 벌레 무리와 돌연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 그리고 신력을 앞세운 아마스 신성제국의 출현.

  생각지도 못한 악재가 셋이나 겹쳤다.

  그 하나하나가 모두 필승을 장담할 수 없는 강적인데, 그런 적이 셋이나 한꺼번에 덤벼드는 상황이니, 절대로 승산이 없는 전투라 할 수 있었다.

  바흐만은 비록 정기를 잃고 이지가 흐려지긴 했지만, 질 게 뻔한 싸움을 무리하게 밀어붙일 정도의 바보는 아니었다.

  “전열을 가다듬고 마법사와 정령술사들의 안전을 확보하라. 기사들로 하여금 후퇴하는 병사들의 퇴로를 확보토록 하라. 투석기와 같은 중병기는 포기한다. 전원 후퇴!”

  바흐만 황제의 명은 전군으로 빠르게 전달되었다.

  몬스터와 신성제국군 사이에서 갈팡질팡하던 바호크 군은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며 전장에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들의 퇴로엔 또 다른 복병이 숨어 있었다.

  “타락한 바호크 군에게 자유의 철퇴를!”

  사막의 모래 아래 위장한 채 숨어 있던 자들이 일제히 나타나며 바호크 군의 퇴로를 막았다.

  터빈을 둘러쓰고, 곡도를 휘두르며 바호크 군의 퇴로를 가로막은 이들은 다름 아닌 용병들이었다.

  전장에서 용병을 만나는 흔하다.

  돈을 대가로 무슨 일이든 대신 해주는 용병들에게 전장은 중요한 수입원이기 때문이다.

  헌데, 이번만은 심상치 않았다.

  용병들의 수가 황당할 정도로 많았기 때문이다.

  무려 1만이 넘는 대 인원이었다.

  이드라센 대륙의 역사상 이렇듯 많은 용병들이 뜻을 함께한 경우는 한 손에 꼽을 정도로 적었다.

  “쳐라! 감히 마계와 손을 잡은 대가를 확실히 보여 줘라!”

  우렁찬 외침과 함께 2미터가 넘는 그레이트 소드를 자유자재로 휘두르는 남자는 불타는 카리스마로 용병들을 선도했다.

  그가 선두로 나서자 용병들은 용기백배하여 성난 들소처럼 전장을 누볐다.

  “용병왕을 따르라!”

  “잿빛의 용사가 우리의 길을 열리라!”

  용병들은 쓸데없는 움직임이 전혀 없었다.

  지독할 정도로 효율적인 동작으로 적을 살상했다.

  명령과 지시에 길들여진 병사들은 지금과 같은 혼란한 상황에서는 제 실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그에 반해 용병들은 바로 이런 난전이 특기였다.

  아비규환의 전장을 마치 제 앞마당인 것처럼 거침없이 날뛰었다.

  “우와아아아!”

  잿빛의 용사라 일컬어진 용병왕이 고함을 지르며 그레이트 소드를 휘둘렀다.

  겁 없이 덤벼들던 바호크의 병사들이 푸줏간의 고깃덩이처럼 잘려 나갔다. 그가 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어김없이 두세 명의 병사들이 싸늘한 고혼이 되어 전장에 몸을 뉘였다.

  그와 함께 움직이고 있는 몇 사람 또한 보통 실력이 아니었다.

  거대한 배틀 엑스를 마른 장작처럼 휘두르는 거한은 이성을 잃은 광전사처럼 날뛰었다.

  그가 나타난 곳엔 언제나 비명과 선혈이 튀었다.

  포니테일의 여자 또한 결코 거한에 뒤지지 않았다. 단검 두 자루를 손에 든 그녀는 복잡하게 얽히고 설키는 전장을 다람쥐처럼 날쎄게 뛰어다녔다.

  빠른 몸놀림을 최대한 이용하여 위기에 빠진 동료를 돕고, 틈을 보인 적에겐 매서운 일격을 날렸다.

  갈색 망토를 휘두르며 나타난 중년 사내는 휘황찬란한 마법으로 적을 한순간에 압도했다.

  그의 지팡이가 하늘을 가리킬 때마다 천둥이 치고, 불벼락이 떨어졌다.

  그들 네 명이 지휘하는 용병들은 혼란한 전장의 사신이 되어 닥치는 대로 바호크 군을 도살했다.

  “용병 나부랭이들이 감히!”

  바흐만 황제는 하찮게 보던 용병들에게 당하게 된 현실에 부아가 치밀었지만, 할 수 있는 대응이라고는 고작 후퇴를 독촉하는 것이 전부였다.

  “오늘의 굴욕은 내 무슨 일이었어도 꼭 보답하고야 말리라.”

  복수를 다짐하며 병사들을 추스르는 바흐만 황제의 두 눈에서 독기가 흘러내렸다.

  하지만 오늘이 그의 날이 아닌 것만은 확실했다.

  오히려 새로운 위협이 바호크의 목줄을 쥐게 되었다.

  신성제국의 출현과 용병왕의 출전.

  이 두 세력의 참전이 바호크에게 어떠한 악재로 작용될지는 불을 보듯 뻔한 상황이었다.

  트라우마와 아마스 신성제국, 그리고 용병들이 합세한 이번 전투에서 바호크는 크나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이날 연합군에게 밀린 바호크는 전선에서 크게 후퇴할 수밖에 없었고, 아이린 왕국은 빼앗겼던 고란 산맥을 되찾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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