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74/102)

핏빛 노을이 어울리는 남자

  어둠이 있었다.

  너무도 깊고 깊어 희망의 끝자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혼돈이 폭풍처럼 몰아치고, 절망이 해일처럼 몰아쳤다.

  하늘은 비명과 절규로 뒤덮이고, 들끓는 화염과 분노만이 검게 물든 대지를 들뜨게 달구었다.

  모든 존재들이 어둠의 이름으로 경원하고, 또 두려움 어린 눈으로 탄식하는 타락의 나락.

  스스로를 망각하고 모든 정의를 부정한 존재들만이 어둠 속을 어슬렁거릴 자격이 주어지는 저주받은 자들의 땅.

  타계의 존재들이 저주받은 암흑의 자궁이라고 부르는 마계가 바로 이곳이다.

  그런 마계에 검은 하늘을 꿰뚫듯 우뚝 솟은 절망의 탑이 있었다.

  피의 율법 위에 세워진 지옥의 영광.

  마계엔 추악하고 괴기스러운 온갖 부정한 생물들이 가득 차 있었지만, 그 어떤 존재도 절망의 탑의 지배자와 비교될 수는 없었다.

  피의 지배자.

  황폐라는 이름의 삭막한 검은 신앙.

  절망의 탑은 바로 마계의 지배자가 거하는 곳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절망의 탑 최상층.

  붉은 조명이 병풍처럼 드리워진 차디찬 방에 한 여인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녀는 아름다웠다.

  눈동자가 시릴 정도로.

  그녀의 요사스런 아름다움에 눈을 감는 것이 두려워질 정도였다.

  만약 그녀의 앞에 두 사내가 있다면, 서로 상대의 눈동자를 파기 위해 격렬하게 다툴 것이다. 상대방의 눈동자에 맺힌 그녀의 모습에 터질 듯한 질투가 생길 것이기 때문이다.

  그만큼 그녀는 저항할 수 없는 뇌살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었다.

  비스듬히 누운 그녀의 육감적인 육신을 유혹적인 붉은 천이 휘감고 있었다. 빨간 비단뱀 한 마리가 새벽녘의 싱그런 잎사귀 위를 사르르 스쳐 지나가는 것 같았다.

  그런 그녀의 앞에 그림자 하나가 부복하고 있었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암담한 어둠으로 그리워진 그는 바로 쉐이드였다. 아이린 왕국에 혼란을 일으켰던 살렘 후작을 꼭두각시로 부리던 마계의 어두운 그림자가 바로 그였다.

  하지만 음모의 사악한 그림자인 쉐이드도 그녀 앞에서는 한낱 장난감에 불과했다.

  그녀가 미묘한 움직임을 보일 때마다 부르르 어깨를 떨며 괴로워 했다.

  “그를 보았다고?”

  그녀가 고혹한 입술로 나긋하게 물었다.

  졸린 듯한 음성이었다.

  쉐이드는 크게 고개를 조아리며 공손하게 대답했다.

  “제. 제 분신 중의 하나가 그분으로 보이는 존재와 부딪혔던 모양입니다.”

  그분을 언급할 때, 쉐이드의 목소리가 잘게 떨렸다.

  단지 그를 연상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이 오그라드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가 마계에 군림하고 있을 때, 세상은 오직 공포뿐이었다.

  사실 쉐이드가 그의 정체를 알게 된 것은 방금 전에 불과했다.

  노괴가 심혈을 기울인 라이트를 중간에서 채 가지고 온 그는 마계의 입구에서 생각지도 못한 존재를 만났다.

  살렘.

  바로 그의 꼭두각시였다.

  살렘의 뭉개진 꼴을 본 쉐이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재수 없게 드래곤과 마주친 모양이군.’

  그가 아는 한 중간계에서 살렘을 이 지경으로 만들 수 있는 존재는 드래곤이 유일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아니었다. 부서져 가는 꼭두각시의 입에서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이름이 언급된 것이다.

  그의 진실한 정체를 듣는 순간, 쉐이드는 경악을 넘어 전율을 느꼈다. 그만큼 그라는 존재가 주는 무게는 실로 심대한 것이었다.

  “확인하고 싶구나.”

  여인이 손을 내밀었다.

  쉐이드는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다 부서진 인형을 꺼내 들었다.

  살렘 후작의 역할을 하고 있던 꼭두각시였다.

  “오라.”

  여인이 말하자 인형은 빨려들듯 그녀의 손으로 날아왔다.

  여인은 가늘고 긴 손가락으로 인형의 이마를 짚었다.

  붉은 서기가 일고 기적과 같은 힘으로 인형의 기억을 읽었다.

  “음.”

  매혹적인 빨간 입술 사이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형편없군.”

  작은 불만이 토로되었다.

  미미하게 찌푸린 그녀의 얼굴이 안타깝게 느껴졌다.

  인형의 기억 속에 등장한 그로 짐작되는 인물.

  코웃음이 나올 정도로 미미한 힘이다.

  고작 꼭두각시 인형에게 쩔쩔맬 정도의 실력이라니.

  마계라면 하급 마족 하나조차 제대로 감당 못 할 정도로 미천한 힘이다.

  “하지만 그 능력만은 확실히 그를 닮았군.”

  절망의 군주. 모든 추악한 자들의 왕.

  공포로 군림하던 암흑의 절대자.

  마왕 벨로로폰.

  그를 떠올리는 여인의 눈동자가 가볍게 흔들렸다.

  공포와 흥분.

  이질적인 두 감정이 그녀를 들뜨게 만들었다.

  “확인해 볼 필요가 있겠지.”

  비스듬히 상체를 세운 그녀가 조용히 말을 꺼냈다.

  쉐이드는 기다렸다는 듯이 말을 꺼냈다.

  “과거 그분의 심성으로 볼 때, 전쟁을 일으키는 것이 가장 적당할 것으로 보입니다. 아시다시피 비명과 살육의 붉은 향기는 그분이 가장 즐기시던 것이니까요.”

  “전쟁이라. 중간계에 전쟁을 일으킬 만한 상황이던가? 아이린 왕국의 내전도 끝났다고 하던데.”

  “바호크 제국이 남았습니다. 얼마 전 제국이 된 바호크의 황제는 야심이 큰 자입니다. 조금만 부추겨도 전쟁을 일으킬 것입니다.”

  “전쟁이라. 확실히 그는 피와 살육을 즐겼지. 비명과 절망이 있는 곳에는 언제나 그가 있었다. 하지만 지금의 그가 과연 예전과 같을까? 만약을 위해 다른 미끼가 필요할지도 모르겠군.”

  그녀의 말이 끝나자 부복하고 잇던 쉐이드의 입 부위가 초승달모양의 하얀 미소를 그렸다.

  “마침 좋은 것이 생각났습니다. 그분께 여자가 있습니다.”

  꿈틀.

  활처럼 곱게 흰 눈썹이 그늘을 지었다.

  숨막힐 듯한 위엄이 쏟아졌다.

  쉐이드는 급히 고개를 조아렸다. 일부로 그런 것이 아니다. 그녀의 압력에 절로 몸이 내려앉은 것이다.

  “그의 여자라 ... . 꼭 한번 보고 싶군.”

  조용한 음성이었으나 그녀의 음성엔 힘이 실려 있었다.

  쉐이드는 깊이 읍을 했다.

  “왕께서 원하시는 대로.”

  “그를 초대하는 자리다. 만전을 기하도록.”

  “제 목숨을 걸겠습니다.”

  여인은 잔인하게 웃었다.

  “너의 목숨 값은 그에 비하면 싸구려에 불과해.”

  쉐이드의 검은 동체가 부르르 떨렸다.

  모멸감?

  아니다. 마성으로 일그러진 그녀의 힘에 소름이 돋은 것이다.

  그녀의 이름은 데이크란.

  현 마계의 절대자.

  타락의 군주라 불리는 마왕이었다.

  길게 읍을 한 쉐이드가 침실에서 물러났다.

  이제 그는 전쟁을 불러올 음모를 위해 바쁘게 움직일 것이다. 그것은 절망의 군주를 유인할 미끼가 될 것이다.

  검은 그림자가 사라지자 데이크란은 핏물의 욕조처럼 찰랑이는 붉은 비단천을 치워 냈다.

  비스듬히 앉은 그녀의 아름다운 얼굴 위로 앞머리가 좌르르 흘러 내렸다.

  신경질적으로 머리칼을 치워 재고 술잔을 들었다.

  “여자라. 그에게 여자라.”

  잔 속에 찰랑이는 붉은 빛깔의 술.“

  술잔에 그녀의 얼굴이 비치고 있었다.

  요사스런 얼굴.

  짜증이 일었다.

  그녀의 손에서 유리잔이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유리잔이 좌르르 깨져 나가며 상처에서 배어 나오는 피처럼 술이 따르르 흘렀다.

  차박 차박.

  그녀는 맨발로 차가운 대리석 바닥을 걸었다.

  대리석의 냉기가 발바닥을 타고 올랐다. 하지만 그 차가움마저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식혀 주진 못했다.

  침상가를 서성이던 데이크란은 결국 침실을 나섰다.

  콰콰쾅!

  복도로 나서자 웅장한 벼락 소리가 그녀를 반겼다. 검은 구름 사이를 명멸하는 은빛 뇌전이 그녀의 심란한 마음을 대변한 것 같았다.

  차박차박.

  어두운 동굴을 연상케 하는 으리으리한 홀을 지나 서편의 작은 방을 찾았다.

  쪽문을 열자 환한 불이 새어 나왔다.

  절망의 탑에서 유일하게 빛이 허락된 장소였다.

  데이크란은 비단자락을 끌며 안으로 들어섰다.

  작은 쪽방 안엔 검은 머리칼의 소녀 하나가 작업에 열중하고 있었다. 음침한 조명 아래 무얼 하는지 부산하기 짝이 없었다.

  그 순진한 모습에 데이크란은 작게 미소를 그렸다. 무미건조한 그녀가 정말로 오랜만에 짓는 따뜻한 표정이었다.

  검은 머리칼의 그녀. 시공을 뚫고 나타난 그녀는 메마른 마왕의 가슴에 한 가닥 파문을 던져 주었다.

  “경애님.”

  데이크란이 조용히 물었다.

  “어마?”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놀란 듯 경애는 팔짝 뛰었다. 그러나 곧 데이크란을 보고는 배시시 웃음을 보였다.

  “아. 데이크란님이시군요.”

  “후후. 뭘 하느라 그리 몰두하고 계신 거예요?”

  데이크란의 물음에 경애는 밝은 표정으로 대꾸했다.

  “초를 만들고 있어요.”

  “초? 초를 왜 만들고 있나요?”

  “헤헤. 마계는 너무 어둡잖아요. 초만 있으면 훨씬 밝게 살 수 있을 거예요.”

  코밑을 훑으며 재잘거리는 그녀의 천진난만한 대답에 데이크란은 깔깔 소리 내어 웃었다.

  “호호. 아무래도 그 발명품은 그다지 쓸모가 없을 것 같군요.”

  “네?”

  “마계인들은 빛을 싫어하고 어둠을 즐긴답니다. 아마도 불빛을 보면 다들 싫어할 거예요.”

  “저, 정말요?”

  “심한 경우엔 죽기도 한답니다.”

  “아아.”

  경애는 신음을 흘리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번엔 자신 있었는데. 히힝.”

  어두운 마계의 밤을 보며 그녀는 초를 만들어 팔겠다는 기발한(?) 생각을 떠올렸다. 에디슨처럼 전구를 발명할 수 있으면 일확천금을 벌 수 있겠지만, 지금 그녀로서는 무리였다. 그래서 전구의 대안으로 양초를 생각해 낸 것이다.

  그런데 고생고생해서 간신히 실험작을 성공시켰더니, 필요 없는 물건이란다. 오히려 죽을 수도 있단다.

  그녀는 좌절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야. 내가 삽질한 게 어디 한두 번이었어? 다음에 또 좋은 걸 생각해 내면 되지.”

  그녀는 이내 부활했다.

  반짝이는 눈동자엔 다시금 열의가 불타오르고 있었다.

  그녀의 모습에 잘게 미소를 뿌리던 데이크란은 문득 궁금해졌다.

  “그런데. 어떻게 초 만드는 법을 알아냈나요?”

  경애는 거칠게 산 마계인과는 달랐다. 고생을 많이 한 흔적은 보이지만, 그녀는 문명인의 향기를 머금고 있었다.

  그런 그녀가 양초 같은 고리타분한 물건을 어떻게 만들 수 있었던 것일까.

  “그게요 ... .”

  경애는 의뭉스럽게 말을 길게 늘였다.

  “그냥 알게 되었어요.”

  “네?”

  “후후. 그냥 초가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더니, 머릿속으로 만드는 법이 떠올랐어요. 마치 ... 옛날에 해 봤던 것처럼요.”

  몽롱한 눈빛으로 대답을 한 경애는 문득 자신의 말이 부끄러웠는지 혀를 내밀며 얼굴을 붉혔다.

  “헤헤. 제가 이런 말 하는 게 이상하죠? 옛날부터 그런 말 많이 들었어요. 이상하다고.”

  “호호. 이상하긴요. 괜찮아요.”

  웃으며 위로하긴 했지만 데이크란은 그녀에 대한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과거의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녀의 능력은 그 때문인가.’

  그녀의 신비한 능력과 관련이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녀가 처음 마계에 나타났을 때 불었던 피바람을 생각한다면 절대로 가볍게 볼 일은 아니었다.

  마계에 나타난 인간.

  당연히 마족들과 마물들은 게걸스럽게 그녀에게 달려들었다.

  경애는 무지막지한 마족들에게 대항할 힘이 없었다.

  산채로 찢겨 죽임을 당할 위기였다.

  그러나 그 순간, 그녀가 비명을 지른 바로 그 순간!

  느닷없이 희뿌연 안개가 피어났다. 그리고 그녀를 습격하던 마족과 마물들은 처절한 비명과 함께 쓰러졌다.

  안개가 겉혔을 때, 그녀 외에 살아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온통 회색빛 죽음만이 가득했다.

  그 소식을 접한 타락의 마왕 데이크란은 그녀를 절망의 탑으로 불러들였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 경애는 마계의 새로운 무녀가 되었다.

  이렇게 된 데에는 데이크란의 철저한 계산이 배경에 깔려 있었다.

  마계의 무녀는 마신과 교신하는 어렵고도 신성한 위치다.

  그 자리에 경애가 앉게 된 것이다.

  사실 마계의 무녀 자리는 한동안 공백상태였다.

  마황과 두 마왕이 사라졌듯, 무녀도 소리 소문 없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소문엔 데이크란이 잔혹한 술수로 마왕들과 함께 무녀까지 모두 제거해 버렸다고 하기도 하고, 두 마왕과 무녀가 힘을 합쳐 마황에게 반란을 꾸몄다가 양패구상 했다고도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전해지지 않았다.

  하여간 그렇게 원인을 알 수 없는 이유로 마계엔 한동안 무녀가 존재하지 않았다.

  이것은 마계의 존립에까지 영향을 미칠 만한 큰 문제였다.

  마계의 무녀는 단순히 마신의 명을 전하고 마성의 노예를 세상에 퍼트리는 역할만을 수행하는 것이 아니다.

  그녀는 실질적인 마신의 대리자로 마계를 지배하고 마계를 중재하는 역할을 했다.

  지난 수천 년 동안 1황 3왕의 마왕이 지배하는 혼란한 상황에서도 마계가 조용할 수 있었던 것은 이러한 무녀의 역할이 지대한 영향을 미쳤기 때문이었다.

  그런데 그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던 무녀가 사라졌다.

  이것은 마왕의 실종과는 비교할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마계는 발칵 뒤집혔다.

  데이크란의 지시를 받은 마인들은 모든 계를 누비며 무녀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결국 그 어디에도 무녀는 발견되지 않았다.

  마계는 안정을 잃었고, 피와 살육이 끊이지 않는 대 혼란기를 맞게 되었다.

  그러던 마계가 경애라는 새로운 무녀를 들이게 되면서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되었다.

  데이크란은 경애를 정식 무녀로 공인하는 자리를 빌어 반대하는 마족들에게 그녀의 권능에 도전할 기회를 주었다.

  마계의 무녀는 마신의 비호를 받는 존재이다.

  만약 경애가 무녀가 맞다면 그 누구도 그를 해할 수 없을 것이다.

  이러한 율법에 따라 데이크란은 그녀를 마계의 흉악한 마물들 앞에 던져 준 것이다.

  경애의 능력에 의심을 품은 여러 마족들이 그녀에게 도전했고, 모두 회색 안개에 갇혀 영혼을 잃게 되었다.

  물론 경애는 자신의 능력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녀가 한 것이라고는 공포스런 마족의 도전에 비명을 지르며 도망친 것이 전부였다.

  하지만 게걸스럽게 덤비던 마족과 마물은 결코 그녀를 해할 수 없었다.

  마족들의 영혼을 갈취한 경애의 회색 안개는 전보다 월등히 강해져 있었다. 상급의 마족들조차 감당할 수 없을 정도였다.

  회색 안개에 휩싸인 마물들은 비명과 함께 메마른 미이라 신세가 되어 쓰러졌고, 마족들은 절규를 흘리며 피눈물을 흘려야 했다.

  그렇게 수많은 희생자가 나왔다.

  그리고 더는 그녀에게 도전하는 마족들은 없게 되었다.

  경애는 한쪽 구석에서 울기만 했다.

  너무도 불쌍한 모습으로 ... .

  하지만 더 이상 그녀를 연약하게 생각하는 아둔한 존재는 없었다. 적어도 마계에서는 말이다.

  결국 그녀는 마계의 무녀가 되었다.

  물론 실제로 경애에게 마신과 교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마신은커녕 데이크란의 마력이 아니라면 다른 마족들과 대화도 할 수 없는 사람이었다.

  그녀는 데이크란의 필요에 의해 무녀가 되었고, 그 이상한 능력으로 마족들을 공포에 빠트릴 수 있었다.

  하지만 그런 사실을 모르는 경애는 오늘도 절망의 탑, 작은 쪽방에 앉아 엉뚱한 일에 몰두하고 있었다.

  “힝힝. 양초가 실패했으니 이젠 또 뭘 하지?”

  쓸데없는 생각에 몰두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것이 있는 듯, 데이크란에게 물었다.

  “참, 데이크란님은 옛 연인을 찾았나요?”

  그녀의 물음에 마왕 데이크란의 아름다운 얼굴에 수심이 떠올랐다.

  “ ... 글쎄요. 비슷한 사람을 찾긴 했는데, 성격이 전혀 다르다고 하네요.”

  “음. 많이 보고 싶어 하시는 것 같던데. 걱정 마세요. 꼭 다시 볼 수 있을 거예요.”

  그 자신도 일행과 헤어진 신세이면서도 경애는 명랑하게 말했다.

  “그런데 ... 벨로로폰이라는 분은 어떤 남자였어요? 데이크란님이 그렇게 애타게 기다리시는 분이라면 정말 멋진 분일 것 같은데.”

  데이크란은 눈을 가늘게 접으며 웃었다.

  “멋있는 사람이었죠. 붉게 타오르는 석양과 잘 어울리는 매력적인 남자였답니다.”

  “와. 석양과 어울리는 남자라. 왠지 낭만이 느껴져요.”

  “후후. 낭만이라. 사실 그는 좀 다른 의미로 석양과 어울렸답니다.”

  ‘언제나 그는 붉은 피를 뒤집어쓰고 있었으니까요.’

  그녀의 마지막 말은 조용히 가슴속에서 울려 퍼졌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