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전의 결말
짙은 녹음의 달. 열일곱 째 날.
아이린 성력, 1022년. 회색 눈보라의 달, 둘째 날.
트라우마는 처절한 공성전을 승리로 마무리 짓고, 그 여세를 몰아 수도인 유리스로 진격했다.
왕실군은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레종 공주와 글로리 후작의 지휘 아래 반란군의 잔존세력들을 격파하며 보름 만에 수도 유리스에 도착했다.
연전연패한 반란군은 수도에 둥지를 틀고 맹렬히 저항했지만, 레종 공주의 절실한 호소와 왕실군의 압도적인 위용에 이내 백기를 들고 말았다.
고독에 중독된 귀족들은 병규와 호랭이가 뿌린 백고로 인해 치료된 데다, 반란군의 수뇌인 필립 공작이 전사했다는 소식이 전해지면서 반란군은 더 이상 싸울 의지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다만 필립 공작가의 잔당이 미미한 저항을 했을 뿐이다.
그리고 마침내 성력, 1022년. 회색 눈보라의 달, 스무 날. 레종 공주가 수도 유리스에 복귀하는 역사적인 순간을 맞이하게 되었다.
이로써 아이린 왕국의 내전은 막을 내렸다.
하지만 산적한 업무는 산더미 같았다.
내전으로 국민들의 생활은 피폐해질 대로 피폐해지고, 도처에서 도적이 들끓었으며, 나라 업무의 거의 모든 부분이 마비된 상태였다.
레종 공주는 디스로 하여금 귀족회를 구성하여 내전으로 피폐해진 아이린 왕국을 바로잡는 데 최선의 노력을 다했다.
그리고 얼마 후, 흔들리던 왕국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찾아가자 미루고 미루던 왕위즉위식이 있었다.
이날, 레종 공주는 왕실의 마지막 후손으로 왕위에 올랐다.
천년 아이린 역사상 최초의 여왕 즉위였다.
대관식에서 그녀는 자신이 왕의 직함을 대신하는 것은 어디까지나 임시임을 천명했다.
귀족들은 들떴다.
과연 누가 그녀의 옆 자리를 차지할 것인가.
그가 누구건 바로 차기 아이린 왕국의 국왕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귀족들의 입에서 숱한 사람이 거론되었지만, 사실 알 만한 사람들은 다 알고 있었다.
레종이 누굴 마음에 두고 있는지 말이다.
레종 공주의 즉위식 이후 내전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전쟁영웅들에 대한 포상이 이어졌다.
이번 전쟁에서 가장 큰 공을 세운 것으로 평가된 글로리 후작은 공식적으로 공작으로 임명되었다.
잘려진 팔을 신성마법으로 간신히 회복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작위를 받았다.
병규에게는 후작의 작위가 새로 내려졌다.
평민에 불과한 그에게 있어 파격적인 인사라 아니할 수 없었다.
일부 귀족에게서 평민에게 너무 많은 특권을 주는 것이 아니냐는 잡음이 새어 나왔지만 잠시에 불과했다.
누가 뭐래도 그는 트라우마의 영웅이었으며, 내전을 종결시키는 데 가장 큰 역할을 한 사람이었다.
호랭이에게도 백작의 작위가 내려졌지만 호랭이는 정중히 거절했다. 그는 원래부터 공명심과는 거리가 먼 인물이었다.
엘프들에 대한 포상도 잊지 않았다.
특히 하이엘프인 카즈엘은 이종족 최초로 귀족의 작위를 받게 되었다.
물론 카즈엘은 거절했다.
숲의 종족인 엘프에게 귀족이란 인간의 신분은 큰 의미가 없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레종 여왕도 단호했다.
“저는 어려울 때 고난을 함께한 엘프들의 우정을 상징적이나마 남기고 싶습니다. 작위는 그런 우정의 표식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결국 여왕의 고집으로 카즈엘은 어쩔 수 없이 후작의 작위를 받았다.
여담이지만, 카즈엘의 작위식이 있던 날 레종 여왕은 검으로 그녀의 어깨를 짚은 채 작은 목소리로 ‘이제 당신은 나보다 아랫사람이 되었어요. 여왕으로서 명해요. 얌전히 변기님에게서 손을 떼세요.’라고 소곤거렸다고 한다.
물론 카즈엘도 곱게 물러나지는 않았다.
작위식이 끝난 후 카즈엘은 빙그레 웃으며 레종 여왕의 귓가에 ‘당신은 20년 지나면 주름 가득한 중년이 되지만 전 그 이후로도 항상 팽팽한 피부를 유지할 수 있는걸요? 과연 당신이 제 상대가 될까요?’ 라는 말을 남겨 레종 여왕의 이마에 굵은 혈관이 솟게 만들었다.
병규를 둘러싼 레종과 카즈엘 간의 보이지 않는 암투는 그렇게 치열하게 진행되고 있었다.
물론 병규 본인은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었지만 말이다.
아이린 왕성은 하루 종일 분주했다.
내전의 피해 복구와 반란 가담자에 대한 처벌, 병력 재편성 등, 할 일은 산처럼 산적해 있지만 정작 일할 사람은 부족하여 정신없는 하루하루였다.
하지만 모두가 그런 것은 아니었다.
병규라는 지극히 예외적인 존재도 있었다.
그는 후작이라는 엄청난 직위를 받았지만, 정작 할 일이 없는 아이러니한 상황에 놓여지게 되었다.
전쟁에서는 영웅이었지만, 정치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아무것도 없었다. 아니 설사 아는 것이 있다 하더라도 전혀 간섭할 마음이 없었다.
경애만 찾으면 곧 이드라센 대륙을 떠날 생각인지라 영지나 권력에도 욕심이 없었다.
결국 그는 레종 여왕에게 하사받은 영지를 반납하고, 드래곤나이트의 기사단장직에서도 물러났다.
전쟁이 끝나니 모든 것이 지루해졌다.
아니, 유치하게 느껴진다고 할까?
와이번 타는 것도 이제는 시들해져 버렸다.
변화가 일어난 그의 몸은 보다 큰 자극을 원했다.
그의 몸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검은 의지는 홀로 울부짖었다.
피를 갈구하고, 잔혹한 살육의 희열을 요구했다.
터질 듯한 광기를 발산할 무언가가 필요했다.
다만 그것이 무엇인지를 모를 뿐이다.
결국 그는 가끔 소일 삼아 드래곤나이트들을 찾아가거나, 필라이트를 만나는 일로 시간을 보냈다.
그날도 병규는 왕성의 2층 테라스에 앉아 한가로이 지는 노을을 감상하고 있었다.
붉게 지는 노을을 바라보는 그의 얼굴에 고독과 우수가 묻어있었다.
지나가는 시녀들은 그의 모습에 얼굴을 붉히며 저희들끼리 귓속말을 소곤거렸다.
하지만 병규는 무슨 생각을 하는지 시녀들의 말조차 듣지 않고 있었다.
그저 멍하니 노을을 지켜볼 뿐이었다.
지나가던 호랭이가 마침 그 모습을 보고 질문을 던졌다.
“초저녁부터 무슨 청승이냐?”
“잠시 ... 노을을 보고 있었습니다.”
“노을? 고향이 그립기라도 한 거냐? 아니면 ... 몸에 변화라도 생긴 거야?”
호랭이는 유독 병규의 몸 상태에 관심이 많았다.
병규의 몸속에 들어찬 어두운 과거가 워낙 강대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병규가 지금의 심성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가히 기적에 가까운 일이었다.
하지만 병규의 고민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그냥 ... 노을을 보니 이것저것 잡생각이 떠올라서요.”
붉게 타는 노을을 보면 뭔가 아련하게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흐음. 이것저것이라.”
호랭이는 턱을 만지작거리며 병규의 얼굴을 주시했다. 잠시 후 그의 얼굴에 장난스런 미소가 걸렸다.
“이제 보니 여자문제로구나.”
꿈틀!
병규의 안면근육이 살짝 굳었다.
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호랭이를 흘겨보았다. 남은 심각한데 쓸데없는 소리나 한다는 의미였다. 하지만 호랭이는 그런 병규의 표정을 보고 히죽이죽 웃으며 오히려 오해를 더 증폭시키는 것이었다.
“녀석. 복에 겨운 한숨이었구나. 누구냐? 역시 레종이지?”
호랭이는 툭툭 병규의 어깨에 두드렸다.
“에효.”
“젊은 놈이 한숨은. 그런 고민할 때가 좋은 게야. 됐다. 됐어. 일단 여기 앉아 봐라.”
폴짝폴짝 뛰어간 호랭이는 테라스 곁에 놓인 의자를 두드렸다.
노괴와의 격전 후, 호랭이는 작은 아기 호랑이의 모습을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미 도력은 충분히 돌아왔지만 지금의 상태가 오히려 더 편한 모양이다.
그도 그럴 것이 인간의 모습을 하고 있으면, 필라이트가 자꾸만 귀찮게 굴기 때문이다.
내전 당시 호랭이가 보였던 엄청난 술법이 필라이트의 호기심을 자극한 모양이다.
“에효요.”
병규가 털썩 하고 의자에 앉자 호랭이는 자연스럽게 그의 무릎위로 올랐다.
병규가 호랭이를 쓰다듬자 가르릉 기분 좋은 목울림이 흘러나왔다.
오랜만의 다정한 한때였다.
하지만 평화로운 두 사람과 달리 주위의 분위기는 심각 그 자체였다.
지나가던 관료들이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하고, 시녀들은 얼굴을 붉히며 꺄아아 비명을 흘렸다.
왕국의 영웅이 작은 짐승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있는 모습은 여자들의 방심을 두근거리게 만들기에는 충분하지만, 영웅이란 자고로 대중을 영도하는 역할이라고 믿는 귀족들에겐 불만스러울 따름이었다.
병규의 손길에 나른한 게으름을 만끽하던 호랭이가 불쑥 물었다.
“레종 여왕과는 어떻게 할 생각이냐?”
“글쎄요.”
막상 호랭이의 말을 들으니 레종 여왕의 일로 생각이 쏠렸다. 가만 생각해 보니 문제는 문제였다. 그녀와의 감정은 어느새 단순한 친분 이상이 되었다.
“돌아갈 때를 생각하니 어려운가 보구나.”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전 언젠가 지구로 돌아가야 하니까요.”
“그래. 아무래도 부담이 되겠지. 마음은 있는데, 언젠가는 이별을 해야겠고 말이야. 그렇다고 그녀를 데려갈 수도 없고.”
레종은 아이린 왕국의 여왕이다.
그런 그녀를 지구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녀는 너무 많은 것을 책임지고 있었다.
“차라리 네가 남는 것은 어떠냐? 굳이 지구에 돌아가지 않아도 되지 않을까?”
“ ... .”
병규는 입을 꾹 다문 채 한동안 말이 없었다.
고민이 이어졌다.
잠시 후 그는 느린 목소리로 대답했다.
“이곳에 정도 많이 들고 좋은 사람도 많이 알게 되었습니다. 귀한 경험도 많이 했고요. 하지만 ... 지구에 놓고 온 것이 너무도 많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있어야 할 곳은 지구인 것 같습니다.”
병규의 말에 호랭이는 벌떡 몸을 일으켰다. 그리곤 병규의 팔과 어깨를 타고 머리위로 올랐다.
“녀석. 그래, 말 한번 잘했다. 사내라면 그렇게 화끈하게 결정을 내려야지. 하하하.”
그 작고 앙증맞은 앞발로 병규의 머리를 톡톡 치며 파안대소를 흘렸다. 아기 호랑이가 껄껄 웃는 모습은 그렇게 귀여울 수 없었다.
크게 웃은 호랭이는 병규의 머리 위에서 길게 늘어지며 사뭇 근엄한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상황이 중요한 것이 아니다. 너의 마음이 어떤가가 중요한 것이지.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거라. 그것으로 족하다. 난 그렇게 생각한다.”
“ ... ”
병규는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후회가 없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말만 곱씹었다.
‘과연 나는 그녀를 얼마나 좋아하는 걸까.’
단순한 호의일까. 아니면 ... .
한 가지 이상한 것은 레종에 대해 생각할수록, 퀴니의 영상이 떠오른다는 것이었다.
‘왜일까.’
그에게 퀴니는 단순히 동생과 같은 존재다.
가족이다.
지금도 그녀를 떠올릴 때면 금발을 휘날리며 아장아장 걷던 소녀의 이미지가 떠오른다.
하지만 이상하게 레종을 생각하면 마음속 한구석이 무거워지곤 했다.
병규는 부스스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일단 레종을 찾아가 봐야겠어요. 경애 문제도 있고 하니까요.”
안 그래도 그녀에게 볼일이 있던 참이다.
긴 내전 동안 아이린 왕국의 일에 깊숙이 개입했지만 사실 그의 목적은 경애를 찾아 원래의 땅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그렇구나. 경애를 찾아야지.”
고개를 끄덕인 호랭이는 병규의 어깨에 축 늘어졌다. 그 모습을 본 병규가 조용히 물었다.
“따라오실 겁니까?”
“험험.”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어험. 난 네가 레종과 무슨 대화를 할 것인가가 궁금한 것이 아니다. 다만 경애의 일이 궁금한 것뿐이지. 아아~ 그런 눈으로 볼 필요 없다. 알다시피 난 신선이 아니더냐. 이미 그런 세속적인 일에는 관심이 없어졌다. 아~! 날 믿으라니깐. 난 종족도 틀리잖아. 어허. 왜 그런 게슴츠레한 눈으로 날 보는 게야? 그렇게 내가 못 믿겨져?”
“ ... 네.”
“그, 그래? 어험. 거~ 참 이상하네. 왜 안 믿을까?”
병규의 삼엄한 눈빛에도 호랭이는 끝내 그의 어깨에서 내려오지 않았다. 결국 병규는 흥미진진한 표정의 호랭이를 달고 레종 여왕을 찾았다.
그녀는 측근들과 어수선한 정국을 안정시키느라 정신없는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다.
그렇게 바쁜 와중에도 병규의 독대 요청에 산처럼 쌓인 업무를 미뤄 두고 따로 자리를 마련했다.
그녀가 얼마나 병규를 중요하게 생각하는지 잘 알 수 있는 일화였다.
“너무 오랜만에 뵙는 것 같아요.”
레종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입을 열었다.
전쟁이 끝난 이후로 단 한 번도 사적인 자리를 마련하지 못했다. 따로 시간을 내지 못한 것이 미안하기만 했다.
쏟아지는 사무에 지친 레종 여왕은 피곤한 얼굴이었지만, 여전히 아름다웠다.
“그런데 오늘은 달이 참 곱네요.”
병규가 찻잔을 만지작거리며 좀처럼 말을 꺼내지 않자 레종은 작은 미소와 함께 말을 꺼냈다.
“그렇군요.”
찻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병규는 짧게 대답했다.
살포시 들어 올린 입가에 맺힌 작은 미소.
두근.
곁눈질로 병규를 몰래 훔쳐보고 있던 레종은 가슴이 진탕되는 듯한 충격을 받았다.
‘왜, 왜 이러지?’
괜히 쑥스러워진 레종은 찻잔을 두 손으로 감싸 쥔 채 고개를 푹 숙였다. 빨갛게 달아오른 얼굴을 숨기기 위해서였다.
병규가 조금 달라진 것 같았다.
진지해졌다랄까.
전에는 수수하고 어색한 웃음을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은 우수와 고독이 어린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것이다. 농촌 총각이 하루아침에 도시 생활이 몸에 밴 세련된 배우로 변해버린 것 같았다.
“사실 ... 부탁할 것이 있어 왔습니다.”
병규는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네, 네.”
레종은 밝은 표정으로 상체를 그에게로 숙였다.
부탁할 것이 있다는 병규의 말이 그렇게 기쁠 수 없었다. 무언가 해줄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하게만 느껴졌다.
“찾을 사람이 있습니다.”
“여자인가요?”
레종이 눈동자에 기이한 열기를 피워 올리며 물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경애라고 ... . 같은 고향의 사람이었습니다.”
이어 병규는 아이린 왕국의 내전에 참가한 이유를 솔직하게 말했다. 내전이 끝난 후 왕국의 힘을 빌어 사람을 찾기 위함이었다고. 권력이나 명예엔 별 관심이 없다고.
그 말을 들은 레종은 심각해졌다.
그녀는 경애에 대해 꼬치꼬치 물었다.
얼굴은 이쁘냐. 성격은 무난하냐, 키는 어떠냐. 집안은 어떻냐 ... . 심지어 그녀는 병규의 여성관까지 집요하게 물어봤다.
병규는 담담한 얼굴로 끊임없이 쏟아지는 그녀의 질문에 무덤덤하고 간결한 대답으로 일관했다.
결국 레종은 경애가 단순한 식객에 불과하다는 말을 들은 후에야 만족하며 질문 공세를 멈추었다.
“걱정 말아요.”
레종은 따뜻한 표정으로 말했다. 그녀는 은근슬쩍 병규의 손을 잡았다.
“그분은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찾아볼게요.”
“고맙습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갑자기 레종 공주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당신이 미워요.”
욱씬.
새초롬한 그녀의 말에 병규는 가슴이 송곳으로 쑤시는 듯 아파왔다. 단지 그녀의 표정 변화 하나만으로도 괴로울 수 있다는 것이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직도 모르나요?”
그녀는 입술을 뾰족이 내밀며 퉁명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였다.
병규는 급격하게 변화하는 그녀의 표정에 어리둥절해졌다. 그 모습을 보고 레종은 곱게 호호 하고 웃었다.
그리곤 두 손으로 병규의 손을 꼭 잡으며 부드럽게 입을 열었다.
“어려워하지 말아요. 당신의 일은 이미 제 일인걸요.”
“ ... ”
의미심장한 그녀의 말에 병규는 부드러운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쳇! 고작 그거야?”
레종과의 독대가 끝나고 다시 예의 그 테라스로 돌아왔을 때, 호랭이는 뭐가 불만인지 철없는 강아지처럼 방정맞게 툴툴거렸다.
“뭘 바란 거에요?”
호랭이를 지그시 바라보며 병규가 물었다.
“흠흠. 아니 뭐 꼭 뭘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불편한 헛기침을 연발했다.
“ ... .”
“어허. 그 못 믿겠다는 눈빛은 뭐냐? 설마 이 어르신이 야리꼬리한 것을 기대하기라도 한 것 같으냐. 뭐? 그런 것 같다고? 어허! 고얀 녀석. 무, 물론 약간의 달짝지근한 로맨스가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 . 험험. 그 ...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너도 참 답답하다. 여자가 그 정도까지 분위기를 보이는데 담담하게 웃기만 하다니 말야. 젊은 남녀가 야심한 밤에 만났는데 아무일도 없는 건 결코 좋은 일이 아닌 게야. 정신적으로나 신체적으로 문제가 없다면야, 그 ... 좀 약간의 해프닝 정도는 있어야 할 게 아니냐. 무, 물론 내가 그런 걸 바란 것은 아니지만 말이야. 험험. 어허~ 거 참, 오늘은 달이 참 밝구나.”
가만 호랭이를 쳐다보던 병규는 그 황당한 너스레에 미소를 짓고 말았다.
호랭이는 까마득한 세월을 산 선인이지만 여전히 무슨 생각을 하는지 쉽게 알 수 있어 좋았다.
그렇게 병규는 호랭이와 한가로운 한때를 보냈다. 그리고 레종 여왕의 명을 받은 왕국의 첩보부는 ‘경애’라는 특이한 이름의 사람을 찾기 위해 분주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