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든 추악한 자들의 왕
아이린 왕국의 수도 유리스.
유리스의 왕성 후원엔 왕족 전용의 거대한 텔레포트 마법진이 있었다. 텔레포트 마법은 원래 마법진의 효력을 빌린다 해도 워낙 막대한 마나를 필요로 했다. 때문에 왕족이라 해도 큰 행사 때가 아니면 좀처럼 사용되지 않았다.
그런데 내전이 한창 혼란한 이때, 둥근 원반과 같은 마법진이 그 그긍 소음을 발하며 움직이기 시작했다.
서서히 움직이던 마법진에서 어느 순간, 찬연한 빛 무리가 쏟아져 나왔다.
눈이 부실 지경이었다.
곧이어 눈부신 광채를 뚫고 한 사람이 걸어 나왔다.
검은 머리카락, 검은 눈동자, 그리고 그림자에서 스산한 기운을 풍기는 자,
좀 전까지 트라우마를 활보하고 있던 병규였다.
“확실히 왕성이군.”
주위를 둘러본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주위의 풍경, 확실히 눈에 익었다.
과거 이곳의 지하 감옥에 갇혀 있다가 천신만고 끝에 탈출한 적이 있었다. 그때 워낙 헤맸던지라 왕성의 구조를 대략 알게 되었다.
“과연 호랭이가 어디에 있을까.”
병규는 지그시 왕성을 바라보았다. 그의 귀가 호랭이의 자취를 쫓아 조금씩 움직였다.
오래지 않아 병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멀지 않군.”
그의 신형이 슥 하고 사라졌다.
텔레포트 마법진에서 빛줄기가 채 사라지기도 전의 일이었다.
한 줄기 바람처럼 몸을 날린 병규는 거침없이 왕성의 으슥한 곳으로 향했다.
내궁의 깊은 곳, 은은한 한약 냄새가 풍기는 곳이 있었다.
나무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문에는 한자로 ‘연단실’이라고 적힌 문패가 붙어 있었다.
병규는 문패를 잠시 쳐다보았다.
“호랭이의 말은 사실이었군.”
이드라센 어디에도 이런 문자는 없다. 적어도 지구에서 온 자라는 것만은 확실해졌다.
삐거억.
병규는 나무문을 천천히 열었다.
한약 냄새가 확 하고 얼굴을 향해 끼쳐왔다.
얼굴을 찡그리며 안으로 들어서자 단아한 실내의 모습이 시야에 잡혔다.
하지만 정작 호랭이는 보이지 않았다. 그 사이 또 다른 장소로 이동한 것이다.
호랭이의 자취가 느껴지던 실내는 초라한 가구들만이 덩그러니 남아 있을 뿐이었다. 이미 이곳을 떠난 것이다.
나가려던 병규는 연단실을 쭈욱 훑었다.
작은 서랍장 하나,
고고학 박물관에서나 볼 수 있음직한 제단.
그리고 나무를 깎아 만든 수수한 침상.
좁은 실내를 채우고 있는 가구는 이것이 전부였다.
사치라고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볼 수가 없었다.
실내의 기물들 중에서 눈에 띄는 것이라고는 큼지막한 단지 2개가 전부였다.
하지만 그 단지들 안에 들어있는 것을 본 순간 수수한 느낌을 주던 연단실은 지옥으로 변해버렸다.
“으으으.”
처절한 신음성이 흘러나오고 있는 붉은 단지 안에서 병규는 팔, 다리가 잘린 필립 공작을 볼 수 있었다. 필립 공작은 부글부글 끓는 단지 안에서 조금씩 생기를 잃어 가고 있었다.
병규는 그의 처참한 모습을 말없이 바라만 보았다.
그의 눈동자엔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무서우리만치 냉정한 표정이었다.
“결국 ... 자네까지 왔군.”
필립 공작이 탁한 음성으로 말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어쩌다 이렇게 된 것인지. 누가 이런 꼴로 만들었는지 묻지도 않았다.
그의 시선이 필립 공작이 들어있는 옆의 단지로 이동했다.
허옇게 떠버린 청년이 알몸으로 단지 속에서 벌벌 떨고 있었다. 그의 몸에는 여러 개의 관이 꼽혀 있었는데, 지독한 약물로 녹아내린 내장이 관을 통해 단지 밖에 놓인 접시로 고이고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런 처참한 상황 속에서도 라이트가 살아 있다는 점이었다. 단지 안의 그는 겁먹은 눈으로 병규를 올려다보며 몸을 벌벌 떨었다.
지은 죄가 있기 때문이다.
지하 감옥에 갇혀 있는 병규를 라이트는 잔인하게 고문했다. 아니 그 전부터 병규와 라이트의 관계는 한 마디로 말해 최악이었다. 지독한 악연이라고 할 만했다.
그런데 이제 지하 감옥 때와는 전혀 반대의 입장에서 서로 만나게 된 것이다.
라이트는 병규의 복수를 두려워했다.
하지만 그를 내려다보는 병규의 눈은 무심하기만 했다.
냉정한 눈으로 힐끔 라이트를 쳐다보더니 다시금 필립 공작을 돌아보았다.
라이트는 이를 악물며 몸을 떨었다. 그의 무시에 지독한 모멸감을 느낀 것이다.
“호랭이는 이미 떠난 것 같군.”
병규는 건조한 음성으로 중얼거렸다.
필립 공작은 탁한 눈동자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백발을 ... 말하는 거라면 이미 죽은 목숨이라고 ... 말해야 겠군.”
병규는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이곳의 주인이 그토록 대단한가?”
그의 눈동자가 묘한 광기로 일렁이고 있었다.
“그는 ... 공포다.”
필립 공작은 눈동자가 정신없이 흔들렸다. 노인을 떠올리자 자연스럽게 신체가 반응하는 것이다.
씨익.
병규의 입가에 미소가 어렸다.
더없이 매력적인 대답을 들었다.
소드마스터인 필립 공작이 이처럼 두려워할 정도라면, 정말로 쓸만한 능력의 소유자란 말이 된다.
텅 빈 뱃속이 꿈틀거렸다.
허기가 몰아쳤다.
“그래야지. 그래야 내가 왕성에 온 의미가 있는 것이지.”
미소를 지은 병규는 미련 없이 돌아섰다.
굳이 호랭이나 매력적인 적의 위치를 물어볼 필요는 없었다. 예민한 그의 귀는 이미 둘의 기척을 감지한 상태였다.
병규가 냉정히 돌아설 때였다.
“그냥 ... 갈 텐가?”
필립 공작이 그를 불렀다.
타는 듯한 갈망이 느껴지는 음성이었다.
병규는 그에게 조용히 물었다.
“무얼 바라나.”
필립 공작의 눈이 번쩍 떠졌다.
“날 ... 죽여 주게.”
간절함이 절절히 녹아있는 음성이었다.
“제발 ... .”
다시 한 번 필립이 애원했다.
병규는 말없이 그를 보았다.
팔다리가 잘린 채 펄펄 끓는 단지 안을 뒹굴고 있는 필립 공작의 몰골. 무엇보다 자식이 처참하게 죽어 가는 모습을 두 눈 벌겋게 뜨고 봐야 한다는 것은 너무 가혹한 현실이었다.
설사 지옥이라도 이처럼 비참하게 만들지는 않을 것이다.
“좋아.”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남을 죽이는 일.
전에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었다. 몬스터를 죽이고도 며칠 동안 손을 떨었다. 그렇게 심성이 약한 병규였다.
하지만 지금은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마음에 검은 장막이 드리워진 지금이라면.
게다가 필립 공작 스스로가 원한다.
고통스러운 삶보다는 죽음을 택하게 해 달라고, 팔 다리가 잘린 필립 공작은 혼자 힘으로는 자살조차 할 수 없었다.
병규는 허공으로 손을 쳐들었다.
취아아아악!
요수의 발톱이 귀기를 번뜩이며 솟구쳐 나왔다.
위에서 아래로, 그저 간단히 손을 휘둘렀다.
서걱!
소름끼치는 소음과 함께 필립 공작의 목이 아래로 떨어졌다.
데구르르.
사람의 머리통이 바닥을 구르는 소리가 그렇게 섬뜩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으 ... .”
잘려진 머리통에서 신음소리가 흘러 나왔다.
놀랍게도 필립 공작은 아직 죽지 않았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다.
노인의 단약에 의해 부활한 존재라 생명력이 남다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목이 잘린 통증만은 그대로 느끼는 듯, 번듯한 얼굴이 흉측하게 일그러져 있었다.
하지만 그는 비명을 지르지 않았다.
오히려 병규를 향해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고, 고맙다.”
필립 공작은 이 한마디를 병규에게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그때야 비로소 잘려진 목에서 피가 쏟아져 나왔다.
쏟아진 피가 병규를 덮었다.
끈끈하게 흘러내린 피가 안면을 뜨뜻하게 달구고 입술을 적시었다.
병규는 혀로 입술을 핥았다. 독한 비린내에 입맛이 달아올랐기 때문이다.
피를 핥은 그의 모습은 묘하게 선정적이었다.
찌릿!
병규의 어깨가 조금 떨렸다.
필립 공작의 피.
그 안에 기이한 힘이 들어 있었다. 전혀 생소한 능력이 꿈틀대고 있었다.
이가 덜덜 떨렸다.
치명적인 냉기가 혈액 속을 울컥울컥 채워 왔다.
그 생소한 느낌이 병규의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짜릿한 흥분으로 유도했다.
“나쁘지는 않군.”
병규는 하얗게 웃었다.
필립 공작의 힘. 그것은 차가운 냉기였다.
병규가 새로운 능력에 몸을 떨고 있을 때였다.
“아, 안 돼!!”
처절한 비명이 울려 퍼졌다.
단지 밖으로 몰래 고개를 내밀어 본 라이트는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으며 울부짖었다.
데구르르 하고 뭔가가 구르는 소리가 신경을 자극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 보이는 것은 가히 믿기지 않는 현실이었다.
아버지의 잘려진 머리가 구르고, 피를 흠뻑 뒤집어쓴 병규는 빨간 혀로 입술을 핥고 있었다.
“아버지이이이!”
라이트는 절규했다.
장난감처럼 굴러가고 있는 아버지의 머리.
현실감이 없었다. 짖굿은 장난을 보는 것만 같았다. 못된 농담이리라 자위했다.
하지만 아버지의 잘려진 목에서 분수처럼 솟구치는 피는 묘하게 현실적이었다.
“아아아 ... 아아아아악!”
비명 다음엔 까마득한 신음이었다.
이제야 간신히 현실을 인지하게 된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 그에게 아버지란 모든 것이었다.
“안 돼! 왜, 왜 죽인 거야! 이 나쁜 자식아!”
그는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왜 병규가 부친의 목을 날렸는지, 그 이유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에게 중요한 단 한 가지는, 병규가 필립 공작의 목을 잔인하게 날려 버렸다는 것이고, 필립 공작이 바로 자신의 부친이라는 사실 이었다.
라이트는 목이 터져라 병규를 저주했다.
“악독한 놈아! 이 마계의 짐승에게 겁간당하고 사지마저 갈기갈기 찢겨질 간악한 놈아. 죽일 사람이 없어 사지조차 없는 사람을 죽이는 것이냐! 아무리 적이라지만 너무도 잔인하구나! 개자식. 차라리 나도 죽여라. 흐흐흐. 나도 죽이란 말이야. 흐흐. 왜? 왜 못해? 기억 안 나? 내가 네놈을 괴롭혔던 사실 말이야. 흐흐흐흐흐흐.”
“ ... .”
병규의 눈꼬리가 일그러졌다.
분명 필립 공작은 죽음을 원했다.
사실 죽음이 더 현명한 상황이었다.
팔다리가 잘린 채, 벌겋게 달아오른 단지 속에서 끊임없는 고통을 당하느니, 죽는 것이 백번 나으리라.
그런데도 라이트는 그에게 저주를 쏟아내고 있었다.
인상을 찌푸리고 있던 병규는 어두운 목소리로 물었다.
“너도 죽고 싶으냐?”
“크흐흐. 그래. 죽여라. 아버지를 죽였듯. 나도 죽이란 말이다. 살인마! 잔인한 놈아!!”
“잔인한 놈이라 ... 흥.”
병규는 코웃음을 쳤다.
“내가 한 행동은 아무것도 아니야. 지금까지 네가 했던 행동에 비하면 말이야.”
“흐흐. 내가 뭐가 어때서?”
“네 녀석은 공작의 아들이란 지위를 이용해 수많은 사람을 괴롭혔다. 그렇지 않은가?”
“흐흐흐. 설마 아버지를 죽인 너보다 더할 것 같으냐? 자식이 보는 앞에서 아비의 목을 날리는 네놈보다 내가 더 악독한 놈이란 말이냐!!”
“ ... 죽음은 공작이 원한 것이었다.”
“헛소리 마! 네놈이 죽인 거야! 네놈이 죽인 거라고! 이 개자식아!”
병규의 얼굴이 한층 더 험악해졌다.
라이트의 악행은 왕국에 널리 알려져 있었다.
아녀자를 추행하고, 고문을 즐기며, 어려운 처지의 사람 괴롭히는 것을 취미로 여겼다.
병규 역시 지하 감옥에서 얼마나 모진 고문을 당했던가. 만약 그의 신체가 남다르지 않았다면 결코 목숨을 부지하지 못했을 것이다.
“흐흐흐. 흉측한 놈. 그때 네놈을 죽였어야 했어. 지하 감옥에 걸려 있었을 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죽여야 했어. 칼로 네놈의 배를 가르고 내장을 끄집어내야 했다.”
라이트의 흐느낌 어린 발악이 계속되었다.
병규의 눈자위에서 살광이 이글거렸다.
목을 날려 버리고 싶다.
저 허여멀건 목을 부숴 버리고 싶다.
오직 자신만 생각하는 어리석은 녀석.
지금까지 자신의 행동 때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고통을 당하고 괴로웠을 것인가는 전혀 모른다.
놈의 노를 뒤집어 보고 싶다. 도대체 어떤 것이 들어있을까.
“좋아. 너도 죽여 주지.”
마침내 병규가 움직였다.
그의 손끝에서 요수의 발톱이 요기를 터트렸다.
저벅저벅.
병규가 살기를 흘리며 다가서자 악다구니를 쓰던 라이트의 태도가 급변했다.
자신을 지켜줄 사람이 없다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아버지의 죽음으로 잠시 정신이 돌아버렸다. 제정신을 차린 라이트는 지독한 소인배에 불과했다.
“그, 그만둬. 설마 아버지를 그렇게 죽이고도 모자라 나까지 죽이겠다는 것이냐!”
“방금 전까지 죽여 달라고 애걸복걸한 놈이 누구지?”
“그, 그건 아버지의 죽음 때문이었잖아. 네, 네놈이라면 그 상황에서 제정신일 리가 있겠어?”
“ ... 더럽군.”
기분이 엉망이 되었다.
더러운 것을 씹은 것만 같다.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지자 라이트는 오해를 했다. 그는 단지 안으로 고개를 움츠리며 사정했다.
“사, 살려 줘. 날 미워하는 건 알아. 하지만 내 아버지를 죽였으니 됐잖아. 그러니 그만둬.”
벌벌 떨며 두려워하는 모습이 좀 전과는 전혀 다른 사람 같았다. 심한 충격으로 정신 분열을 앓게 된 듯했다.
결국 병규는 요수의 발톱을 거뒀다.
“ ... 넌 죽일 가치도 없구나. 그 단지 안에서 끊임없이 고통 받아라. 그리고 벌레처럼 꿈틀거리며 살아라.”
라이트를 내려다보는 병규의 얼굴엔 경멸이 떠올라 있었다. 라이트 같은 녀석에겐 실망이나 분노마저도 아깝게 느껴졌다.
그 길로 병규는 연단실을 나갔다.
병규가 사라지자 라이트는 자라처럼 단지 위로 고개를 숙 빼 내밀었다.
바닥에 떨어진 필립 공작의 머리가 보였다. 그는 닭똥 같은 눈물을 떨구며 흐느꼈다.
“바보 같은 아버지. 고작 그딴 놈에게 죽을 거면서. 소드마스터면 뭐해요. 대륙을 정벌하겠다던 야망을 키우면 뭐해요. 흑흑.”
그렇게 한참을 울었다.
“분한가?”
갑자기 들려온 음침한 음성에 라이트는 깜짝 놀라 단지 안으로 숨었다. 그때, 단지 안으로 검은 손이 쑥 들어와 그의 목을 잡고 강제로 끄집어냈다.
“컥컥!”
“변함없이 버르장머리 없는 사람이군요. 어른이 애기할 때는 똑바로 얼굴을 봐야 하는 것이랍니다.”
공손한 말이었지만, 말투는 오한이 일 정도로 차가왔다.
라이트는 바짝 얼어붙은 채 그를 쳐다보았다.
“헉!”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의 목을 쥐고 있는 불청객의 모습이 너무도 독특했기 때문이었다.
그림자.
그를 보았을 때 처음 느낀 느낌이었다.
불청객은 정말로 그림자 같았다.
마치 발 아래의 그림자가 땅위로 불쑥 올라온 것과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머리에서 발끝까지 검은 어둠으로 둘러싸여 있었다.
눈도, 코도, 입도 볼 수 없었다.
그러니 당연히 표정도 읽을 수 없었다.
검은 동체에서 기분 나쁜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새어 나오고 있었다. 겁먹은 표정으로 그림자를 올려다보던 라이트는 눈을 끔뻑이더니 더듬거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사, 살렘 후작님?”
“호오~.”
어둠의 머리 부분에서 좌우로 길게 흰줄이 그어졌다. 그것은 하얀 치아와 같은 모양을 하고 있었다.
미소.
그림자는 지금 웃고 있는 것이다.
“역시. 노괴의 말대로 당신은 뭔가 다르군요. 내 정체를 읽다니. 으흠. 아니면 노괴의 실험으로 이상한 뭔가로 변한 것일까요? 하긴 인간이라고 보기엔 조금 무리가 있는 상태로군요.”
“후, 후작님이 맞으시죠? 모습은 다르지만 어쩐지 알 수 있어요.”
“후후. 네. 맞습니다. 하지만 아니기도 하죠.”
“네?”
“전 살렘 후작의 본체입니다. 원래 이름은 쉐이드라고 하죠. 지금까지 당신이 알고 있던 살렘 후작은 사실 제 분신입니다.”
그림자의 말에 라이트는 고개를 갸웃했다.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이해되지 않아도 상관없습니다.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까요.”
“그럼 뭐가 중요하죠?”
라이트의 물음에 어둠의 입이 다시금 하얀 미소를 머금었다. 그러더니 바닥을 뒹굴고 있는 필립 공작의 머리를 주워들었다.
“이런 불쌍한 필립 공작님. 소드마스터의 실력을 가지신 영웅께서 어이없게 이런 곳에서 돌아가셨군요. 오오~~가련하기 이를 데 없어라.”
서사시를 읽는 듯한 쉐이드의 말에 라이트는 다시금 슬픔이 복받치는 듯 눈물을 주룩주룩 흘렀다.
“흑흑, 아버지, 아버지.”
“아아~ 슬프도다. 괴롭도다. 허나 슬퍼한들 후회는 언제나 늦으리니. 아무리 괴로워해도 죽은 자는 다시 돌아오지 못하느니라. 이 분노를 어찌할꼬. 이 원한을 어찌해야 할꼬.”
“어허어엉. 아버지. 어허허허허헝.”
라이트의 울음이 통곡으로 변했다. 그는 단지 안에서 두 팔을 허우적거리며 살렘에게 물었다.
“어, 어떻게 하면 되는 거죠? 흑흑, 어떻게 하면 복수할 수 있나요. 알려 줘요. 제발.”
“복수라. 글쎄요. 소드마스터이신 필립 공작님도 끝내 목숨을 잃으셨습니다. 과연 그 자를 누가 당해낼 수 있을까요?”
“아아아.”
라이트의 입에서 탄식이 흘렀다. 그때 쉐이드가 은근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물론 ...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만.”
“그, 그게 뭐죠?”
“당신이 강해지면 되는 겁니다.”
“예? 하, 하지만 ... .”
라이트는 주저했다.
“전 강해질 수 없어요. 그 할아버지에게 속아서 몸이 ... 몸이 이렇게 되어 버렸는걸요.”
라이트는 단지 안에서 익혀졌다.
그의 살은 숯불에 달궈진 가재처럼 하얗게 뜨고, 벌겋게 달아올랐으며, 온몸의 털은 죄다 그을려져 있었다. 또한 독한 약재와 열기로 녹아버린 내장은 관을 통해 단지 밖 접시에 고여 있었다.
한마디로 지금 살아있는 것이 신기한 상태였다.
라이트가 절망적으로 말하자 쉐이드는 은근한 말투로 그를 충동질했다.
“걱정 마시길. 당신은 그저 저와 약속만 하면 됩니다. 그리고 제 말에 따르면 되는 거죠. 그럼 강해지게 됩니다. 그를 없앨 수 있을 정도로."
흠칫!
쉐이드의 간드러진 음성에 라이트는 몸을 떨었다.
두려웠다.
그의 음침한 음성이.
샤갈과도 같은 입술이 토하는 농염한 유혹이.
하지만 곧 라이트의 눈에서 탐욕이 흘렀다.
강해질 수 있다.
단지 그와 계약을 하고, 그의 명령에 따르기만 한다면 ...
“저, 정말로 당신의 말을 따르면 그, 그 녀석을 죽일 수 있게 되는거죠?”
“물론입니다.”
쉐이드의 입가에 희멀건 미소가 번뜩였다.
그는 단지 아래의 그릇을 살며시 들었다. 그것은 라이트의 몸에서 짜낸 진액이 고이던 그릇이었다.
“독하군.”
그릇의 진액을 손가락으로 찍어 본 쉐이드는 인상을 찌푸렸다.
“아무래도 양념이 필요할 것 같군요.”
사뿐사뿐 걸은 쉐이드는 라이트가 들어있는 옆의 단지로 걸음을 옮겼다. 그것은 목 잘린 필립 공작의 몸이 부글부글 끓고 있는 단지였다.
쉐이드는 빈 그릇을 그 단지 안으로 넣어 피와 고름이 끓고 있는 액체를 퍼 올렸다. 그리곤 라이트의 진액과 한데 뒤섞였다.
“자, 드세요. 그리고 마음껏 타락하십시오. 후후후.”
쉐이드의 입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연단실을 나선 병규는 곧장 왕실의 정원으로 향했다.
‘폭음. 타격음. 싸움이 격해지고 있군.’
정원 쪽에서 들려오는 쩌렁쩌렁한 소음에 귀가 아파올 지경이었다. 대체 어떤 싸움이기에 이렇듯 소란한 것일까.
병규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그가 까맣게 타버린 정원에 막 도착했을 때, 엄청난 폭음과 함께 뿌연 먼지구름이 솟구쳤다.
하늘 높은 곳까지 치솟은 먼지로 인해 사위는 짙은 안개로 뒤덮인 것처럼 분간이 어려웠다.
하지만 병규는 어렵지 않게 먼지 속을 꿰뚫어 볼 수 있었다.
정원은 엉망진창이었다.
강진이 휩쓸고 간 자리를 다시 돌풍이 몰아친 것 같은 풍경이랄까. 만발하던 꽃들은 온데간데 없고, 지면은 지옥의 입구인 양 좌우로 찍 하고 갈라져 있었으며,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궁전의 벽면에도 지워질 수 없는 커다란 상흔이 생겼다.
그곳에 호랭이가 있었다.
폐허가 된 정원에서 의연한 자태로 버티고 서 있었다.
하지만 실제 그의 상태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가지런하던 백발은 산발한 채였고, 깔끔한 흰옷은 흙먼지를 잔뜩 뒤집어써서 지저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쿡”
호랭이의 입가로 가는 핏줄기가 흘러내렸다.
비틀비틀거리는 모습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위태로워 보였다.
“호랭이.”
번개같이 달려간 병규는 쓰러지는 호랭이를 부축했다.
“어떻게 온 거냐.”
호랭이는 병규의 갑작스런 출연에 놀란 듯했다. 붉은 대지에 있어야 할 녀석이 갑자기 눈앞에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필라이트 할아버지에게 이곳으로 텔레포트 시켜 달라고 했습니다.”
간단한 설명이었지만 호랭이는 이내 많은 사실을 눈치 챘다.
“그래. 다행히 전쟁은 이긴 모양이구나.”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호랭이의 백고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후후. 당연한 말이지.”
호랭이는 애써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억지 미소와 달리 그의 얼굴은 백지장처럼 창백했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된 거에요?”
호랭이 입가에 묻은 하얀 머리칼을 치우며 병규가 물었다.
“녀석을 만났다. 그리고 보는 바대로 한바탕 했지.”
“고대 중국에서 왔다는 그 ... 말인가요?”
“휴. 녀석의 힘. 이미 인간의 경지를 초월했더구나. 그런 힘을 얻기 위해 과연 얼마나 많은 희생을 밝고 선 것인지.”
“ ... 일단은 쉬세요.”
병규는 호랭이를 앉혔다.
‘대단한 혈투였군.’
호랭이를 앉힌 병규는 차분히 주위를 살폈다.
먼지가 가라앉으며 차츰 주변이 명확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한마디로 풍비박산이었다.
과연 사람의 힘으로 만든 것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지경이었다.
병규는 새삼스러운 눈으로 호랭이를 보았다.
전부터 대단하다고 느꼈지만 이 정도인 줄은 미처 몰랐다.
게다가 호랭이는 정상이 아니었다.
어제의 무리한 술법 운용으로 인한 내상이 채 낫지도 않은 상황이었다. 애써 다 나은 척했던 것은 주위의 걱정을 무마시키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호랭이는 대단했다. 내상이 심한 상황에서도 이렇게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으니 말이다.
궁극의 신력을 모두 개방한 호랭이의 능력은 노괴를 압도했다.
술법과 무공, 힘과 지략.
모든 면에서 노괴를 능가했다.
하지만 노괴보다 강하긴 했지만 그를 제압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근소하게 균형을 유지한 노괴는 기회를 틈타 몸을 빼었고, 결국 내상이 도진 호랭이가 먼저 쓰러지고 말았다.
“고생하셨어요. 호랭이.”
병규는 호랭이의 몸을 보듬으며 위로했다.
“젠장. 모, 몸만 좀 괜찮았으면 ... 쿨럭. 그런 괘씸한 노인네쯤은 단숨에 메다꽂을 수 있었을 텐데. 쿨럭쿨럭.”
호랭이는 안타까운 듯 주먹을 휘둘렀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연달은 내상으로 당분간 요양이 불가피한 상황이었다.
“걱정 말아요. 호랭이의 복수는 제가 할 테니까요.”
“녀석은 잠시 물러났다. 하지만 도망간 것은 아니야. 아마도 다른 수작을 부릴 생각이겠지.”
호랭이는 숨을 씨근덕거리며 걱정했다.
노괴가 가진 힘은 범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 그가 비장의 능력을 발휘한다면 과연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유일하게 막을 수 있는 것은 호랭이. 자신뿐이다.
그런데 그마저도 이렇게 쓰러지고 말았다.
호랭이는 노괴를 떠올리며 암담한 걱정을 토로했지만, 병규는 그 순간에도 딴 생각을 하고 있었다.
‘대단하군.’
노괴라는 자에 대한 흥미가 깊어졌다.
호랭이가 이렇게 염려할 정도라면 필시 심상찮은 능력을 가지고 있을 것이다.
과연 어떤 능력을 숨기고 있을까.
갈증이 생겼다.
목이 바싹 탔다.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잠깐 기다리고 있어요. 그자가 무슨 수작을 하고 있는지 몰래 정탐하고 올게요.”
병규는 타오르는 갈증을 억누르며 호랭이에게 애써 미소를 보였다.
“조심해라.”
호랭이의 걱정을 뒤로하고 병규는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산책을 나온 듯 한가롭게 옮기는 걸음이었지만, 주위의 사물은 무서울 정도로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서두르지 않았지만 오히려 과거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빨랐다. 그가 움직이자 구름처럼 일었던 먼지들이, 물결 갈라지듯 좌우로 밀려났다.
마치 그라는 존재에 공포를 느끼며 몸서리를 치는 것 같았다.
병규는 천천히, 그러나 더없이 빠른 속도로 연단실 안으로 들어 갔다.
노인의 생경한 기척이 바로 그곳에서 느껴지고 있었다.
끼이익.
비명을 지르는 나무문을 열고 안으로 비스듬히 들어섰다.
과연 그곳에 노인이 있었다.
마침내 병규는 노괴를 만나게 되었다.
“음.”
침음성이 흘렀다.
노인은 평소와 다름이 없었다.
학처럼 고고한 자태로 서 있는 모습에서 기품이 흘렀다.
하지만 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기도는 좀 전과는 확연히 달라져 있었다.
거칠고 광폭하다.
무자비한 해일을 보는 것 같았다.
지금 노인은 분노하고 있는 것이다.
하얀 수염을 사방으로 펄럭이며 불길같이 성내고 있었다.
노인의 분노에 대기는 몸서리를 치며 아지랑이를 일으켰다.
없다.
없어졌다.
잠시 만에 그의 소중한 것이 없어지고 말았다.
고향별에서 온 적과 잠시 손속을 나누는 동안 그의 단지에 들어있던 라이트가 감쪽같이 없어지고 만 것이다.
싸움의 여파를 우려해 장소를 옮긴 것이 화근이었다.
그 사이 십수 년 동안 공을 들인 것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말았다.
아니, 하나는 있었다.
필립 공작은 목이 잘린 채 여전히 연단실 바닥을 뒹굴고 있었다. 하지만 그뿐, 가장 중요한 재료인 라이트와 그의 진액은 감쪽같이 사라지고 없었다.
수십 년 공들인 결과물이 있어야 할 자리에 없는 것이다.
하필 그때 외인의 목소리가 들려온 것은 참으로 공교로운 일이었다.
“처음 뵙겠소.”
불청객이 조용한 음성으로 그를 불렀다.
노인은 대답 대신 입가에 잔인한 미소를 그렸다.
부드럽게 고개를 돌려보니, 젊은 청년 하나가 어수룩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물론 그는 병규였다.
노인을 본 병규는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노인이라기에 설마 했더니, 이건 언제 죽을지 모르는 쭈구렁 바가지로군. 이래가지고야 힘이나 제대로 쓰겠어?”
노인의 위아래를 번갈아보며 빈정대는 말투로 그렇게 말했다.
“ ... ?”
노인의 눈가에 잔주름이 생겼다.
무의식중에 노인은 자신의 손을 내려다보았다.
어린아이처럼 붉고 팽팽하던 피부가 지금은 주름으로 가득했다. 눈동자 또한 백태가 하얗게 끼어 있었다.
잠깐 사이에 노인은 몇십 년은 늙은 것 같았다.
라이트를 잃어버린 충격으로 인해 노인은 갑자기 늙어버린 것이다.
하지만 노인은 크게 개의치 않았다.
어차피 라이트를 찾으면 모두 해결될 문제다.
“허허, 어느 귀한 손님이 누추한 이곳을 방문했는지 모르겠군.”
기이한 열기가 맺힌 노인의 눈이 병규의 전신을 훑었다.
병규의 기세가 범상치 않음을 느낀 것이다.
“허어, 이상하구나. 분명 껍데기는 인간인데, 속은 그렇지 않구나. 어쩌다 그리 되었누. 보아하니 자네도 살렘과 같은 존재인 듯하군.”
멈칫.
병규의 걸음이 잠시 주춤했다.
그러나 주저도 잠시였다.
멈춰졌던 발이 다시금 움직였다.
노인은 경고하듯 파괴적인 기운을 펼쳐냈다.
스스스스스스!
무시무시한 압력이 사방팔방에서 병규를 억눌러왔다.
하지만 병규는 전혀 거리낄 것이 없다는 듯 자연스럽게 노인의 앞으로 나아갔다. 오히려 노인의 기세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웃으며 한 마디를 던졌다.
“노인네가 궁금한 것도 많군. 하긴 나이가 많으면 쓸데없는 간섭이 많아지기 마련이지.”
“흐음.”
노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렀다.
노인이 다시 입을 연 것은 조금 후였다. 차분하고 살기가 넘치던 잠시전과는 달리 이번엔 묘한 광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긴, 자네가 누군지는 중요한 게 아니지. 마침 잘 오셨네. 내 소중한 물건이 하나 없어졌는데. 혹 그대는 아는가?”
“단지 속에 담겨 있던 녀석 말이야?”
번뜩.
노인의 눈동자에 살광이 어렸다.
“아무래도 그대가 아는 것 같군.”
“후후. 글쎄.”
병규는 노인의 시선을 피하며 실실 웃었다. 그것이 노인의 심기를 더욱 어지럽혔다.
물론 병규는 라이트의 행방을 알지 못했다. 하지만 그의 이런 행동은 노인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흐흐흐. 아무래도 관을 봐야 눈물을 흘릴 놈이로구나.”
노인의 마기가 한층 농밀해졌다.
칭 하는 신랄한 소음과 함께 그의 소매에서 가는 검 한 자루가 흘러나왔다.
“흥. 관에 들어가야 할 사람은 내가 아니라 노인네인 것 같소.”
말을 끝내자마자 병규는 저돌적으로 돌진했다.
살렘과 싸울 때의 여유와 압도적인 모습과는 거리가 먼 단순무식한 공격법이었다.
콰쾅.
강렬한 파괴음이 울렸다.
천장이 풀썩 하고 내려앉는 가운데, 먼지를 뚫고 인영 하나가 살맞은 기러기처럼 한쪽 벽에 처박혔다.
병규였다.
“쿨럭.”
기침에 섞여 핏물이 흘러나왔다.
“쯧쯧. 보기보다 형편없는 실력일세. 차라리 좀 전의 백발이 훨씬 나았던 것 같아.”
노인은 안타까운 듯 혀를 끌끌 찼다.
처음의 기세와 달리 병규의 실력은 너무도 시원찮았다.
움직임은 쓸데없이 크고 허점으로 가득했으며, 초식의 운영은 지나치게 정직했다.
오히려 이런 아이를 보고 왜 긴장을 했는지 의문이 생길 지경이었다.
“보아하니. 네가 필립 공작이 말하던 바로 그 아이인 모양인데. 쯪쯪. 이런 저급한 쓰레기의 어디가 그리 신경 쓰였던고.”
“컥. 쿨럭.”
“저런. 내상이 심한 모양이군. 오래 버티기는 힘들 터.”
노인은 천천히 병규에게 다가갔다.
없어진 라이트의 행방을 물어볼 심산이었다.
“무, 물어볼 말이 있다.”
버러지처럼 뒹굴던 병규가 힘없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허어. 아직 말할 정신은 있었던고? 하지만 자신의 입장을 잘못 알고 있는 듯하네. 질문은 내가 해야 할 상황일세.”
“내. 내 질문에 대답하지 않으면 ... 라이트의 소식을 듣지 못할 것이다.”
“흐음.”
노인의 두 눈이 가늘어졌다.
곧이어 몸서리쳐지는 기운이 병규의 전신을 눌러왔다.
“크윽.”
병규는 몸을 둥글게 말았다.
“벌레처럼 몸을 꿈틀대는구나. 과연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꼬?”
그그극!
압력이 한층 강해졌다.
노인에게서 흘러나온 무형의 기운에 병규의 입이 쩍 하고 벌어졌다.
몸부림을 쳤다.
바닥을 긁은 손가락에서 피가 새어 나왔다.
하지만 끝내 신음을 흘리지는 않았다.
결국 노인은 힘을 거두었다.
더 이상 압력을 가하면 병규가 죽어버릴 것 같았다. 차라리 살살 달래는 것이 유리할 듯 보였다.
“보기보다 기백이 있는 아이로군. 그래, 무엇이 알고 싶은 겐가?”
무시무시한 압력이 씻은 듯이 사라졌다.
병규는 숨을 헐떡이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다, 당신의 제자들 말야. 헉헉, 마, 말보로 가의 쌍둥이와 필립공작. 헉. 그 사람들이 묘한 힘을 쓰던데. 당신이 전수한 힘인가?”
“묘한 힘이라.”
노인은 잠시 수염을 쓰다듬으며 생각했다.
“흐음. 촉발단을 말하는 것인고? 실은 내 것이 아닐세. 살렘이라는 자가 준 것이지. 듣기로 마계의 기생생물이 봉인되어 있는 것이라고 하더군. 제자들에게는 일시적으로 내력을 높여 주는 물건이라고 속였지. 멍청한 자들이지. 마계의 기생체가 몸을 잠식하는 것도 모르고 말이야.”
“ ... 그렇게 된 것이었군.”
궁금증은 풀렸다.
말보로 형제들과 필립 공작에게 왜 그런 기이한 능력이 있었는지 알게 되었다.
몸을 잠식하는 기생체의 힘인 것이다. 마계의 생물이라고 하니 그런 특이한 능력을 가지고 있을 법했다.
부스스.
돌연 병규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방금 전까지 고통스러워한 것이 거짓이었던 듯, 무표정한 얼굴로 툭툭 옷에 묻은 먼지를 털었다.
“흠.”
노인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속였군. 지금까지 당한 것은 연극이었는가?”
“뭐, 그렇게 된 셈이지.”
“허허, 영악한 아이인지고.”
“후후. 그다지. 당신 시대에서는 어떤지 모르겠지만 내가 살던 시대에선 삼류 드라마에서나 써 먹는 뻔한 수법이지.”
“ ... 고얀 사람이군.”
괘씸하다 말을 하면서도 노인은 웃었다.
본신의 능력을 보이기도 전에 병규가 맥없이 쓰러지자 실망했었다. 그런데 연극이라니. 놀라운 것은 그런 뻔한 연극에 자신이 속아 넘어갔다는 것이다.
노인의 능력으로도 병규의 속을 들여다볼 수 없었던 것이다.
“백발 머리에 대한 것은 잠시 잊어도 될 것 같군.”
어린 녀석의 실력이 꽤 쓸 만하지 않은가.
“그래. 당신의 능력도 꽤 쓸 만한 것 같아.”
병규의 빨간 혀가 입술을 핥았다.
“좋아, 자네에겐 재주를 좀 보여 주어도 되겠군.”
노인은 입을 둥글게 말아 길게 휘파람을 불었다. 내력으로 충만한 휘성은 승천하는 용처럼 길고 멀리 울려 퍼졌다.
병규는 비스듬히 고개를 기운 채 노인을 지켜보기만 했다.
입가에 떠오른 한 줄기 미소는 애완견의 재롱을 보는 관람객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한낱 휘파람 소리로 과연 무슨 재주를 부릴 수 있을까.
시간이 흘렀다.
쫑긋.
주위의 기척을 탐지하던 병규의 귀가 쭈뼛 섰다.
멀리서 발자국 소리가 몰려오고 있었다.
‘아홉.’
정신을 더욱 집중해 보았지만 이곳을 향해 달려오는 발소리는 아홉이 전부였다.
“이제 보니 사람을 불렀던 것이군.”
“허허. 표정을 보아하니 적잖이 실망한 모양이군. 하지만 속단은 이르네. 분명 이들이라면 자네를 충분히 만족시켜 줄 수 있을 게야. 어쩌면 ... 과분할지도 모르지.”
노인의 말이 끝날 즈음. 연단실 안으로 사람들이 들어왔다. 병규가 읽은 대로 모두 아홉 명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번쩍이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걸치고 있었다.
가슴을 장식한 휘황한 문장은 그들이 근위기사들임을 나타내고 있었다.
하지만 병규는 그들의 복장과 신분에는 일절 관심이 없었다. 그가 신경을 쓰고 있는 것은 오직 하나, 그들의 눈이었다.
그들의 눈빛은 다들 정상이 아니었다.
붉게 충혈된 흰자위밖에 보이지 않았다.
근위기사들이 충실한 하인처럼 노인 앞에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이미 자신들이 상대해야 할 적이 누구인지 잘 아는 듯, 병규를 향해 누런 이빨을 드러냈다.
“독인이라는 존재일세. 부디 좋은 시간을 가졌으면 좋겠군.”
노인의 말과 함께 독인들이 흐느적거리며 접근해 왔다.
“끄으르.”
불쾌한 소리를 지르며 발을 질질 끄는 모습이 그렇게 괴기스러울 수 없었다.
“ ... 좀비 같군.”
독인이 걸을 때마다 독한 냄새를 풍겼다. 코를 찔러오는 악취에 절로 인상이 찌푸려졌다.
독인이란 보통 독을 장기로 사용하는 무인을 일컫는 말이다. 허나 노인의 경우는 전혀 달랐다. 특이한 방법으로 사람 자체를 지네나 뱀과 같은 강한 독을 품은 존재로 변화시키는 것이다.
이렇게 변화된 독인의 독성은 상상을 불허했다.
움직일 때마다 불길한 검붉은 가루가 날리는 것은 물론이요, 심지어 숨을 쉴 때에도 검은 입김이 뿜어졌다. 멀리서 주척주척 다가오는 독인의 독기에 병규의 옷이 누렇게 변색될 지경이었다.
“쯧. 나이도 많은 노인네가 실없는 장난질을 너무 좋아하는군.”
독인을 유심히 살펴보던 병규는 비스듬히 한 손을 내밀었다.
조용한, 그러나 진득하기 이를 데 없는 음성이 새어 나왔다. 소곤거리는 듯 작은 음성이었지만 그 안에 담긴 힘은 가공 그 자체였다.
“중압!” 드드등!
무시무시한 압력이 연단실을 강타했다.
끄그그그그그!
엄청난 압력에 흐느적거리며 다가서던 독인들의 허리가 대나무 쪼개지듯 꺾였다. 하지만 이것은 시작에 불과했다.
펼쳐진 병규의 손이 조금씩 오므라들었다. 그에 따라 독인들은 몇십 톤의 무게를 등에 얹은 것처럼 바닥으로 눌렸다.
종래엔 손가락에 눌린 벌레처럼 바닥에 짜부라진 채 손발을 버둥거렸다.
병규는 씩 웃었다.
그의 입 꼬리가 장난스레 올라갔다. 입이 열리며 한마디가 흘러 나왔다.
“빵!”
말과 함께 병규의 손아귀가 꾹 쥐어졌다. 동시에 바닥에 눌린 채 꿈틀대던 독인의 몸뚱이가 폭죽처럼 펑펑 터져 나갔다.
살 조각이 불꽃처럼 사방으로 튀고, 폭포수처럼 쏟아진 피가 벽을 붉게 물들였다.
병규의 단 한 수에 독인들은 모두 창자 터진 개구리 꼴이 되어 버렸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악취가 연단신을 가득 메웠다.
압도적인 위력이 아닐 수 없었다.
설마 이렇게 간단히 독인들이 제압당하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던 노인은 두 눈을 부릅뜬 채 처참한 꼴로 누워있는 독인들을 쳐다보고 있었다.
잠시 정적이 흘렀다.
“하암. 이런 장난질은 이제 그만하지. 지루하니까.”
병규는 늘어지게 하품을 했다.
그 느긋한 모습이 노인의 심기를 자극했다.
“아무래도 내가 직접 자네의 버르장머리를 손봐 줘야 할 것 같군.”
저벅.
마침내 노인이 움직였다.
쿠쿵!
폭발이 일었다.
먼지가 구름처럼 솟구쳤다.
벽이 무너지고, 천장이 허물어졌다.
폭발을 등에 업은 돌풍이 사위를 휩쓸었다.
모든 것이 부서지고 깨졌다.
나무 침상이 허물어지고, 책상이 조각나며 나뭇조각을 토해냈다.
박살 난 재단은 벽 한구석에 처절한 격전의 흔적을 남겼다.
그 농염한 파괴의 중심에서 병규와 노인은 정신없이 공방을 주고 받았다.
두 사람의 그림자가 겹치는 순간 손발이 휘리릭 말리고 섬광이 번뜩였다.
병규는 강하고 빨랐다. 그리고 다양했다.
기기묘묘한 능력들이 끊임없이 쏟아져 나왔다.
반면 노인은 고고하게 휘감고 무겁게 내리눌렀다.
노인의 검은 빠르지 않았다. 하지만 지극히 효과적이었다.
바람에 흔들리는 버들가지처럼 부드럽게 휘청였지만, 한가로운 검광 속에 한 가닥 사이한 독기를 뿌렸다.
쿠쿠쿵!
다시 한 번 무시무시한 충격이 사위를 휩쓸었다. 응축되었던 파괴력이 무섭게 확장되다 다시금 폭발의 진원지를 향해 몰려들었다.
돌풍과 같은 세찬 바람이 몰아쳤다.
기둥이 톱에 쏠린 것처럼 잘려 나가고, 벽이 스폰지처럼 움푹움푹 들어갔다.
지진과 같은 진동이 왕궁을 뒤흔들었다.
왕성에 거주하던 사람들은 이 천재지변과 같은 이변에 비명을 지르며 두려워했다.
퍼펑!
묵직한 타격음 뒤로 득의의 찬 괴소가 울려 퍼졌다.
“흐흐, 드디어 잡았군.”
노인의 머리통을 한 손으로 움켜쥔 병규가 괴이한 미소를 지었다. 광기를 넘어선 희열이 담긴 미소였다.
삼엄한 검광의 해일을 넘어 마침내 노인을 잡아낸 것이다.
“윽. 미리환영보!”
노인의 몸이 흔들리더니 수십 개의 환영을 만들어 냈다. 그 신묘한 보법의 위력을 빌어 간신히 노인은 병규의 손아귀에서 빠져나올 수 있었다.
“헉헉.”
노인의 숨은 턱밑까지 차올라 있었다.
낭패한 기색이 역력했다.
병규의 빠르고 경쾌한 움직임에 말려 그만 자신의 리듬이 깨지고 만 것이다.
번듯한 이마에 손도장까지 찍혀 버렸으니 이미 자존심은 구겨질대로 구겨진 셈이다.
“노인장이 보기에 어떤가. 내 실력이 쓸 만한가?”
병규가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치열한 격전이었음에도 여전히 활기로 가득 찬 음성이었다.
입술을 꾹 다문 채 병규를 노려보던 노인이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 ... 나쁘지는 않다.”
더 이상 노인의 얼굴에서 여유를 찾아볼 수 없었다. 병규를 얕보던 생각이 싹 가셔 버렸다.
녀석은 위험하다.
끊임없이 쏟아지는 기이한 능력은 무엇 하나 위협적이지 않은 것이 없다. 대체 어떤 기연으로 그런 기술들을 익힐 수 있었는지 의문이 들 정도다.
하지만 무엇보다 노인의 신경을 곤두서게 만드는 것은 병규의 냉철한 이성이었다.
지금도 입가에 떠있는 비스듬한 미소. 마치 상대의 마음속을 훤히 꿰뚫고 있는 것 같았다.
“아무래도 자네를 위해선 최선을 다해야겠군.”
노인은 품에서 작은 호리병을 꺼냈다.
몇 겹의 봉인을 뜯어내자 매캐한 악취를 풍기는 단약이 드러났다.
잠재력을 촉발케 하는 독극물이다.
각종의 고독을 정제하여 만든 물건으로 일시적이나마 능력을 크게 증진시키는 효력이 있었다. 하지만 한번 쓰면 근육이 상하고, 내력이 손실되기 때문에 어지간해서는 사용을 자재했다.
하지만 병규를 상대하기 위해서는 그런 위험을 감수하지 않을 수 없었다.
노인은 생선 비린내처럼 독한 냄새의 단약을 조금의 주저도 없이 삼켰다.
꿀꺽.
단약이 목으로 넘어가는 소리가 유달리 크게 들렸다.
병규는 팔짱을 낀 채 가만 노인을 지켜보기만 했다. 그의 눈동자가 호기심과 광기로 출렁였다.
노인의 변화는 뼈와 근육이 일그러지는 기묘한 소음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드득!
노인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허리가 앞으로 기울어지고, 네 발 달린 짐승처럼 두 손으로 땅을 짚었다.
어깨가 뒤틀리더니 노쇠한 팔꿈치 위로 긴 뿔이 솟았다.
목도 길게 늘어지며 자벌레처럼 기묘한 각도로 꺾였다.
검고 하얀 눈동자가 탁한 황갈색으로 물들고, 턱이 징그럽게 툭 튀어나왔다.
꼬리뼈가 길게 뻗치더니 가닥가닥 떨어지며 척수와 같은 모양의 꼬리가 되었다.
그렇게 노인은 ...
짐승이 되었다.
“으 ... .”
바닥에 주저않은 채 기식을 조절하고 있던 호랭이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어긋나고 뒤틀린 기혈이 미친 맹수처럼 몸 내부를 들쑤시고 있었다.
사력을 다해 들뜨는 내력을 다스리려 했지만 끝내 한계에 봉착하고 말았다.
“할 ... 수 없군.”
인상을 찌푸린 호랭이는 입을 모은 채 가느다란 목울림을 발했다. 잠시 후 청량한 바람이 불어와 그의 몸을 허공으로 들어올리고, 따스한 빛 무리가 피어나 그를 감쌌다.
환상적이고도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누에의 고치를 떠올리게 하는 빛과 바람이 호랭이의 전신에서 벗어났을 때, 더 이상 백발을 휘날리는 아름다움 미남자는 그 자리에 남아있지 않았다.
대신 복슬복슬한 하얀 털을 날리는 귀엽기 짝이 없는 아기 백호 한 마리가 그 자리를 대신하고 있었다.
도력의 폭주를 막지 못한 호랭이는 끝내 사람의 몸마저 포기한 것이다. 둔갑술에 사용된 한줌의 도력을 이용하여 호랭이는 간신히 기식을 잡아낼 수 있었다.
“헉헉.”
가쁜 숨을 삼키던 호랭이는 문득 병규가 걱정되었다.
잠시 노인을 관찰하고 오겠다던 녀석이 꽤 시간이 흘렀는데도 감감 무소식이다.
“이 녀석 혹시 노괴에게 발각된 거 아니야?”
호랭이는 험한 말을 입에 올리며 긴장을 감추지 못했다.
물론 병규의 능력은 출중하다.
인간의 한계를 넘은 육체에 최근엔 도가의 무공마저 익혀 가히 하늘을 찌를 만한 능력을 지니게 되었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도저히 안심이 되지 않았다.
노괴란 작자는 그만큼 움흉하고 사악한 인물이다. 어떤 계략을 꾸며 순진한 병규를 함정에 빠트릴지 알 수 없는 것이다.
호랭이는 힘겹게 걸음을 옮겼다.
박살이 난 정원을 지나 비틀비틀 연단실 안으로 들어섰다.
“흠.”
치밀어오는 악취가 코를 찔러왔다.
호랭이는 급히 작은 앞발로 주둥이들 막았다.
독한 냄새가 확 풍겨 왔기 때문이다.
지독한 썩은 내.
‘독.’
숨을 참은 호랭이는 단전의 밑바닥을 훑으며 미약하게 남은 도력을 쥐어짰다.
묽은 백색 서기가 피어올라 독연을 밀어냈다.
‘이런 지독한 독이라니.’
조금 마신 정도로도 머리가 핑 하고 돈다.
병규가 걱정되었다.
독연으로 가득 찬 실내는 비 맞은 추상화 같았다. 모든 것이 이지러져 있었다.
단단한 벽마저 마른 치즈조각처럼 푸석푸석해 보였다.
발로 건들자 과자처럼 부서졌다.
엄청난 독기였다.
도저히 인간이 견딜 수 있는 환경이 아니었다.
게다가 이유 모를 한기마저 연단실 안을 휘돌고 있었다.
호랭이는 불안한 마음을 애써 차분히 가라앉히며 연단실 안으로 들어갔다.
실내에 가득 찬 독연 속을 헤치니 마치 먹구름 속을 걷는 것처럼 기분이 묘했다.
얼마쯤 들어가자 발에 무언가가 걸렸다.
두근.
긴장되는 마음으로 내려보았다.
사람으로 보이는 시신이 보였다.
‘처참하군.’
강력한 독연으로 인해 살은 녹아내리고, 피부는 끈적끈적한 점액질로 흘러내렸다.
그야말로 뼈와 살만 남은 미이라 꼴이었다. 그나마 목이 잘려져 머리와 몸이 따로 떨어져 있었다.
‘병규가 ... 아니구나.’
뼈만 앙상하게 남은 머리 부분에 질질 녹고 있는 백발 몇 가닥이 보였다.
머리색으로 보건데 스스로 노괴라 자칭한 녀석이 분명했다. 방법은 모르지만 어쨌든 병규는 놈을 처치한 것이다.
‘이 녀석 독인이었군.’
연단실에 가득한 독연에 육신이 녹지 않은 것으로 볼 때, 노괴는 독을 장기로 하는 마인이 분명했다.
이 정도의 독연을 펼칠 정도라면 까마득한 경지일 터, 몸이 온전하다 해도 결코 쉽게 이기지 못할 강자임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허허. 이런 강적을 물리치다니. 병규의 실력이 많이 늘었구나.’
한편으론 기쁘고, 다른 한편으론 걱정이 되었다.
노괴가 이 꼴이 되었는데, 과연 병규는 온전할 수 있을까?
그때 연단실 밖에서 익숙한 음성이 들려왔다.
“호랭이. 거기서 뭐해요?”
병규의 목소리였다.
호랭이는 너무 기뻐 그만 그의 이름을 외쳐 부를 뻔했다.
‘아차차’
지금 입을 열면 간신히 끌어 모은 도력이 흩어진다. 그리 되면 이 지독한 독연이 삽시간에 그의 몸을 삼킬 것이다.
호랭이가 목구멍까지 솟은 말을 간신히 삼켰을 때 다시 병규의 음성이 들려왔다.
“거기 뭐 찾아먹을 게 있다고 들어간 거예요. 빨리 나와요~오.”
병규의 태연한 목소리에 호랭이는 발끈 화가 치밀었다.
‘내가 지금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하고 있는데.’
열불을 삼키며 밖으로 후다닥 뛰어나왔다.
독연에서 한참 벗어난 후에야 호랭이는 참았던 숨을 내쉴 수 있었다.
“휴우. 정말 지독하군.”
몸을 내려다보니 복실한 털이 여러 군데 누렇게 변해 있었다.
도력으로 보호했는데도 이 지경이니, 보통 사람이 들어가면 삽시간에 한줌 독수가 되어 버렸으리라.
연단실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 병규가 천연덕스러운 표정으로 손을 흔들고 있었다.
“좋은 거라도 찾았어요?”
독연을 헤치고 나온 호랭이에게 병규는 아주 능청스러운 태도로 말을 건넨다.
“인석!”
작은 공처럼 통통 튀며 달려간 호랭이는 대뜸 병규의 안면을 향해 몸통박치기를 날렸다.
“내가 누구 때문에 이 고생을 했는데, 이런 고얀 녀석.”
“후후후.”
병규는 투덜거리는 호랭이를 잡아 어깨에 올리고는 낮게 웃었다.
“흐이그. 하여간에 사람 하나 잘못 만나서 내 팔자가 아주 왕창 꼬여버렸구나. 체엣.”
병규가 무사한 모습을 본 호랭이는 적이 안심이 되는 듯 평소처럼 투덜거렸다.
“그런데 노괴는 어떻게 된 거냐?”
호랭이가 슬며시 말머리를 돌리며 물었다.
죽음의 독연이 안개처럼 깔린 곳에서 과연 어떻게 노괴를 상대할 수 있었을까. 그것이 궁금하기 짝이 없었다.
“글쎄요.”
병규는 피식 웃으며 뒷말을 흐렸다. 그런 행동이 묘하게 사람을 궁금하게 만들었다.
“이 녀석이, 어르신이 말하라면 싸게싸게 말을 할 것이지 ... 응?”
뒷발로 선 채 고양이처럼 앞발로 병규의 뺨을 콕콕 찌르던 호랭이는 순간 이질적인 기운을 느꼈다.
도력을 많이 잃어버린 터라 그렇게 확실하게 느낄 수는 없었지만, 정신을 집중하니 꺼림칙한 냄새가 솔솔 풍기는 것이었다. 놀랍게도 그 주체는 병규였다.
“넌 ... !”
호랭이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병규의 내부에 뭔가 큰 변화가 생겼다는 것을 이제야 눈치 챈 것이다. 아니, 변화는 비단 내부만이 아니었다.
겉모습도 미묘하게나마 달라졌다.
평범하기 그지없던 얼굴에 미소가 맺혀 있었다.
차갑고 냉소적이면서도 부드럽다.
그런 이질적인 감정이 그의 미소 하나에 모두 녹아 있었다.
고작 모래 한줌의 차이에 불과했지만 그 작은 변화에 의해 그의 인상이 전혀 달라진 듯 느껴졌다.
묘하게 끌린다랄까.
매력적인. 아니 매혹이라는 단어가 더 잘 어울리는 미소였다.
아름다운 크리스탈 잔 속에 찰랑이는 진홍빛 와인의 붉은 유혹과 같았다.
호랭이는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넌, 넌 ... 내가 아는 병규가 맞는 거냐?”
“물론이죠.”
병규는 자신감 있게 웃었다.
“단지 아주 조금 제 자신에 대해 깨달은 것뿐입니다.”
“그, 그렇다면 다행이구나.”
호랭이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지금까지 누구에게도 말하지 못했지만 호랭이는 지금과 같은 사태를 가장 우려했다.
병규가 숨겨진 자아를 깨닫고 자칫 이성을 잃을까 두려웠다.
다행스럽게도 최악의 상황은 일어나지 않은 모양이다.
그때 병규가 물었다.
“호랭이죠? 내 몸에 자물쇠를 걸어 놓은 것이.”
병규의 돌연한 물음에 호랭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생각지도 못했던, 아니 오래전의 일이라 잊고 있었던 일을 병규가 갑자기 물어온 것이다.
병규의 말이 이어졌다.
“이번에 살렘과 마주쳤을 때 잠깐이지만 죽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제 몸속에 잠자고 있던 무언가가 깨어났죠. 그런데 참 이상한 것은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던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는 거예요. 기억에는 없지만 말이죠.”
호랭이는 말없이 병규를 올려다보기만 했다.
“곰곰 생각해 봤는데, 아무래도 원래부터 제 몸속엔 이상한 것이 있었던 것 같아요. 아니, 어쩌면 제 자신이 본래 그런 존재인 것인지도 모르죠. 그리고 만약 그것이 예전에 한번 깨어난 적이 있었다면 아마도 그건 ... 처음 발칸 녀석에게 죽었을 때였을 거예요.”
아주 오래전에 병규는 발칸이라고 부르는 희대의 살인마에게 살해당한 적이 있었다.
그때 마침, 지나가던 신선인 호랭이가 그를 살렸고, 그 인연으로 인해 지금까지 함께 지내게 되었다.
“당시 호랭이는 모든 도력을 소모해서 죽어가는 날 살렸다고 했어요. 하지만 그게 아닌 거죠? 그때 호랭이는 내 몸속에서 무언가가 깨어나려는 것을 알고 모든 힘을 쏟아 봉인해 버린 거예요. 그죠?”
“ ... .”
호랭이는 침묵했다.
병규는 잠자코 그의 말을 기다렸다.
한참이 지난 후, 영원히 열릴 것 같지 않던 호랭이의 입이 느리게 열렸다.
“그때 ... 내가 널 살린 것만은 ... 사실이다.”
호랭이의 조용한 음성이 이어졌다.
이야기는 과거로 돌아간다.
모든 일의 시작.
병규와 호랭이가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
발칸에게 병규가 심장을 관통당하고 숨이 끊어질 찰나, 그곳에 때마침 호랭이가 나타났다.
입가에 피를 쏟으며 죽어가고 있는 병규를 내려다보며 호랭이는 고민했다.
“넌 확실히 죽어가고 있었으니까. 본래대로라면 천리에 어긋나는 너의 죽음에 그냥 좌시할 수는 없는 일이지. 하지만 함부로 결정할 수 없었다. 죽어가는 제 속에서 전혀 다른 기운이 서서히 일어나고 있었기 때문이지.”
“ ... ”
“네가 죽고 칠흑 같은 암흑이 부활하려 했다. 이대로 암흑이 부활하면 세상엔 커다란 혼란이 일 것이 분명했다. 난 고민했다. 널 죽여 발본색원 할 것인가. 아니면 네 몸속의 마성을 봉인하고 말 것인가.”
“ ... 결국 호랭이는 날 죽이지 않았군요.”
“그래, 죽어가는 인간을 살리고 내 모든 힘을 쏟아 부어 네 몸속의 암흑을 봉인했다.”
당시 호랭이는 죽어가는 병규를 살리느라 도력을 모두 소모했다고 말했다. 하지만 진짜 호랭이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병규의 몸속에서 차츰 되살아나고 있는 암흑을 잠재우는 일이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호랭이의 말을 듣고 있던 병규가 물었다.
“만약 되살아난 제가 인간이 아니었다면 어떻게 하시려고 한 거죠?”
“ ... 아마도 다른 선인들의 도움을 빌어 널 없애려 했겠지.”
침묵이 흘렀다.
병규의 눈에서 기이한 광채가 슬금슬금 새어 나왔다.
“물어 볼 것이 하나 더 있어요.”
호랭이는 처연한 표정으로 그의 질문을 기다렸다.
“솔직해 말해줘요. 호랭이는 그때 정말로 그냥 지나가던 길이었나요?”
“ ... 사실 난 널 감시하고 있었다.”
“태어난 이후로 쭉?”
호랭이는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아주 옛적. 시공이 열린 적이 있었다. 선계는 발칵 뒤집히고 말았다. 시공을 넘는 존재라니. 있을 수 없는 일이지. 모든 차원은 완벽하게 독립되어 있다. 절대신이 아닌 한 독립된 다른 차원으로 넘어가는 것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지. 그런데 그 불가능한 일이 벌어지고 만 것이다. 신선들의 촉각이 곤두선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옛날이야기를 하듯 이어지는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두 귀를 열어 두었다.
그는 무의식중에 호랭이의 이야기가 자신의 비밀과 크게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호랭이의 말이 이어졌다.
“헌데 불길하게도 이계를 넘어온 존재는 너무 강한 힘을 품고 있었다. 선인들은 고민했다. 과연 이 이계의 존재를 어찌해야 할까. 시공을 넘어온 존재이기는 하나 분명 살아있는 생명이다. 함부로 죽일 수는 없었다. 그러나 존재가 품고 있는 힘은 절대적으로 위험했다. 만약 그가 악한 마음을 품으면 세상은 끝없는 혼란으로 치달을 위험이 있었지. 선인들은 이 문제로 많은 격론과 함께 고민하게 되었다. 그런데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갑자기 인간계에서 신비한 능력을 가진 자들이 생겨나기 시작한 것이다.”
“설마 소울임팩트?”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소울임팩트. 일시에 특정지역의 능력자들이 한꺼번에 각성하는 신비한 현상을 일컫는 말이지. 이 변화를 통찰한 선인들은 감탄하고 놀라워했다. 마치 이계에서 온 강력한 존재에 맞서기 위해 인류가 새롭게 진화한 것 같았기 때문이다. 능력자라는 존재들을 통해 인류 스스로가 이계인과의 균형을 맞춘다고 할까? 참으로 오묘한 세상의 이치지.”
호랭이의 말을 듣던 병규는 문득 예전 발칸에게 들었던 ‘가이아 이론’을 떠올렸다.
자연계와 지구 자체를 하나의 유기적인 생명체로 보는 것이 가이아 이론이다. 어쩌면 지구는 자신의 품안에서 자라고 있는 자식들을 보호하기 위해 능력자라는 새로운 힘을 인간들에게 부여한 것은 아닐까?
병규가 잠시 딴 생각을 하는 동안, 호랭이의 침중한 말이 이어졌다.
“능력자들의 각성. 이른바 첫 번째 소울임팩트가 일어난 지 10년, 다시 한 번 시공의 문이 열리며 이계인이 지구에 떨어졌다. 이번 역시 처음과 마찬가지로 아이의 몸을 빌어 이계인이 태어났지. 그리고 이번에도 능력자들의 각성이 있었다. 그리고 그런 현상은 이후 두 번이나 더 있었지.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처음 두 명과 달리 뒤의 두명은 산모의 몸을 빌어 태어나지 않고 원래의 신체 그대로 이 세상에 스며들었다는 점이다.”
“ ... 으음.”
“하여간 계속되는 이계인의 진입에 고심하던 선인들은 이 짐을 인간들에게만 맡길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지. 그리하여 싸움에 능한 선인들을 선발하여 이계인들을 감시하게 했다.”
병규는 호랭이의 말에서 어렴풋이 느껴지는 바가 있었다.
“그렇다면 절 감시하는 역으로 파견된 것이 바로 호랭이군요.”
호랭이는 무거운 표정으로 답했다.
“ ... 그런 것이지.”
“얼마 전에 선술을 가르친 것도 봉인이 풀어졌을 때를 대비한 보험 같은 것이었겠죠?”
“그런 셈이지.”
선술을 전수하기 전, 호랭이는 병규에게 한 가지 조건을 걸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지금의 순수한 마음을 잃지 말라는 것이었다. 지금 생각하니 다 이유가 있는 약속이었다.
“난 ... 몇 번째였습니까?”
“넌 두 번째 이계인이었다.”
“퀴니 역시 ... 이계인인가요?”
“그래. 너도 어렴풋이 느끼고 있겠지만 퀴니는 널 찾아 지구로 온 것이다.”
“흐음 ... . 그럼 첫 번째, 네 번째 이계인은 누구죠?”
“첫 번째는 너와 깊숙이 관련이 있는 사람이다. 그리고 네 번째 이계인은 바로 ... 발칸이다.”
“음.”
한숨과도 같은 침음성이 흘렀다.
밝혀진 진실은 가히 충격 그 자체였다.
자신은 지구인이 아니다. 시공을 넘어온 이계인인 것이다.
그리고 퀴니와 발칸에 대한 이야기도 놀랄 만한 것이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놀라운 것은 호랭이가 자신에게 접근한 것이 모두 계획된 행동이었다는 점이다.
가족같이 생각했던 호랭이가 실은 자신을 감시하고 있었다니. 심성이 악독해지면 과감히 죽여 버릴 생각이었다니.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래요. 그렇게 된 것이군요.”
병규는 자리에 앉아 조용히 혼잣말을 되뇌었다.
마침내 그는 자신에 대한 모든 비밀을 알게 되었다.
과연 어떤 반응을 보일 것인가.
미쳐 날뛸까?
아니면 실의에 젖을까.
호랭이는 판결을 기다리는 죄인처럼 병규의 결단을 기다렸다.
파멸? 절규? 아니면 ... .
힘겨운 침묵이 흘렀다.
잠깐에 불과한 시간이었지만 호랭이에게는 더없이 더디게만 느껴졌다.
“좋아요. 이제야 머릿속이 깔끔해졌어요.”
고개를 외로 기울이며 생각을 정리하던 병규는 의외로 담담한 반응을 보였다. 호랭이가 전혀 생각하지 못한 색다른 반응이었다.
“하. 그 표정 재미있네요. 설마 제가 그 정도 일에 폭주라도 할 줄 알았어요? 후후. 아쉽지만 전 어린애가 아니랍니다.”
만약 그가 예전의 연약한 심성을 가지고 있었다면 밝혀진 비밀에 적잖은 상처를 받았을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내부의 암흑이 깨어난 이후 그는 무서울 정도로 냉철한 두뇌와 차가운 이성을 지니게 되었다.
병규는 손으로 턱을 쓰다듬으며 자신에 대해 하나하나 분석하기 시작했다.
“흐음. 꽤 복잡한 사연이군요. 제가 이계의 존재였더라. 어쩌면 전 이곳에서 넘어온 것일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이곳에서 넘어간 것이 확실한 것 같아요. 묘한 친근감도 그렇고, 이곳의 언어를 순식간에 배운 것도 그렇고요. 확실한 것 같아요. 그리고 호랭이에 대한 것은 ... .”
꿀꺽.
가만 듣고 있던 호랭이는 마른침을 삼켰다.
긴장을 해서인지 목이 바싹바싹 말랐다.
병규는 히죽 웃었다.
“뭐, 이유야 어떻든 호랭이가 제 생명의 은인인 것만은 변함이 없네요. 호랭이의 입장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고요. 하지만 제 몸에 대해 애기해 주지 않은 것은 좀 너무했다는 생각이 들어요.”
"우려와 달리 넌 지극히 평범하게 자랐다. 물론 가족 간의 불화로 태씨 문중에서 쫓겨나오다시피 했지만, 그래도 넌 보통의 아이들과 다르지 않았다. 그런 너에게 진실을 알려 주었으면 과연 어떠했겠느냐.“
“으흠. 아마 많이 괴로워했겠지요. 체. 인정하지 않을 수 없네요.
호랭이의 선택은 옳아요.“
“휴.”
호랭이는 한숨을 쉬었다.
다행히 병규는 자신을 이해해 주었다.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말이다.
마음이 따뜻해졌다.
자신의 진심이 병규에게 제대로 전해진 것 같았다.
물론 앞서 말했다시피 호랭이는 병규를 감시하기 위해 선계에서 파견된 선인이다. 만남도, 지금까지 함께 있었던 것도 모두 다분히 계산적이고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만약 그런 관계뿐이었다면 그를 따라 이 엉뚱한 세계로 넘어오지 않았을 것이다. 병규가 호랭이를 믿고 있는 만큼, 호랭이 역시 병규를 아끼는 것이다.
그렇게 병규의 진실에 대한 일은 일단락되었다.
그러나 아직 호랭이의 볼일이 남아있었다.
“너에게 묻고 싶은 것이 있다.”
호랭이는 잔잔한 눈으로 병규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봉인된 어둠은 어느 정도 깨어났느냐? 기억마저 되돌아 왔느냐?”
호랭이의 입에서 흘러나온 음성은 근엄하기 이를 데 없었다. 은은한 위압감마저 들었다.
“이 정도죠.”
호랭이에게 시선을 맞추던 병규는 검지와 엄지를 작게 벌려 보였다.
“고작 이 정도만 깨어났어요. 그리고 기억은 전혀 돌아오지 않았어요. 하지만 왠지 어렴풋이 알 것 같아요.”
“그렇구나.”
호랭이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직 모든 위험이 끝난 것은 아니다. 병규 안에 봉인된 어둠은 아직 완전히 해방된 것이 아니다. 지금은 그가 전수한 선기와 착한 심성이 폭주하려는 마성을 제어하고 있지만, 만약 봉인된 어둠이 완전히 해방된다면 병규가 어떻게 변할지 장담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호랭이의 걱정을 눈치 챈 병규가 자리에서 일어서며 낮은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걱정 말아요. 호랭이. 아직까지 전 인간입니다. 그리고 앞으로도 인간으로 남을 겁니다.
병규는 작게 미소 지으며 그렇게 말했다.
“그런데 노괴와의 싸움은 어떻게 되었냐?”
호랭이는 불안한 마음을 털어버릴 겸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사실 궁금하기도 했다. 사악한 심성과 무공이 하늘에 닿은 천고의 독인을 과연 어떻게 제압했을까.
그런데 병규의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이기지 않았어요.”
“엥?”
호랭이의 눈이 동그랗게 떠졌다. 그 모습을 보고 빙그레 웃던 병규는 돌연 손가락을 마주쳤다.
딱!
건물의 뒤편 으슥한 그늘에서 네발 달린 짐슴이 차박차박 걸어 나왔다.
“헉!”
호랭이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 짐승은 다름 아닌 노괴였던 것이다.
끄드드.
괴이무비한 모습으로 나타난 노괴는 병규의 발 아래 얌전히 엎드렸다. 척수뼈를 잡아 빼 놓은 듯한 징그러운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며 병규에게 애교를 부렸다.
병규는 노괴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천연덕스럽게 말했다.
“짐승이 된 순간 마음대로 다룰 수 있게 되었지요.”
일전에 살렘의 꼭두각시는 병규를 일컬어 이렇게 말했다.
절망의 군주.
모든 추악한 자들의 왕.
노괴가 인성을 버리고 추악한 짐승이 된 순간 이미 병규의 노예가 된 것이다.
왜, 어째서 그렇게 된 것인지는 의문이었지만 병규는 이런 기이한 현상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였다.
호랭이는 경악한 얼굴로 병규와 노괴를 번갈아 쳐다보았다.
노괴는 완전히 병규에게 매료된 듯 보였다.
주름 가득한 얼굴을 병규의 손바닥에 부비고, 즐겁게 꼬리를 흔들었다. 그 모습 어디에도 가식이라곤 보이지 않았다.
짐승이 된 노괴는 완전히 병규에게 매료된 것이다.
“하, 하지만 난 분명 연단실에서 노괴의 시체를 봤는걸?”
“그건 필립 공작의 시신입니다.”
“허, 허허, 이거 정말로 놀랄 일이군.”
호랭이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설마 이런 식의 결론이 맺어질 줄이야.
왜 노괴가 이런 모습으로 변해버렸는지는 충분히 예상할 수 있다. 병규와의 대결에서 힘이 부침을 느낀 노괴는 최악의 선택을 했다.
내력을 폭발하여 일부러 주화입마를 유발하였다.
이성을 희생하고 마성에 육체를 맡기면 평상시보다 몇 배의 힘을 발휘할 수 있다.
미친 사람이 괴력을 발휘하는 것과 같은 이치다.
하지만 그것이 실수였다.
이성을 잃고 짐승이 된 그는 병규를 이기기는커녕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그렇게 노괴는 모든 것을 잃었고, 병규는 생각지도 못한 큰 힘을 얻게 되었다.
노괴의 목을 쓰다듬던 병규는 문득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검은 와이번들이 왕성의 상공을 날아다니고 있었다.
트라우마의 블랙나이트들이었다.
“전쟁, 이제 거의 다 끝났군요.”
호랭이도 그를 따라 하늘을 올려다 보았다. 근심으로 가득하던 얼굴에 한 줄기 편안한 미소가 어렸다.
“그래. 그런 것 같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