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극의 정점
"큭."
위기의 상황에서 간신히 수도로 텔레포트 할 수 있었던 필립 공작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비틀비틀 걸음을 옮겼다.
위험한 상황이었다.
한시 바삐 사부를 찾아야 했다.
"꺄아아악."
"고, 공작님."
가슴이 찢겨져 피를 쏟고 있는 그의 모습에 시녀들이 비명을 지르며 자지러졌다. 더러 그를 부축하려는 병사도 있었지만 필립 공작은 그들의 손을 거칠게 뿌리쳤다.
사부에게 가는 길이다.
다른 녀석과 동행할 수는 없었다.
"크윽. 지독한 놈."
글로리 후작을 떠올리며 필립 공작은 치를 떨었다.
설마 팔을 내주면서 달려들 줄이야.
모든 것이 유리한 상황이었다.
그는 단순한 소드마스터가 아니다.
사부의 단약으로 냉기깍지 사용할 수 있는 소드마스터 이상의 능력을 발히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당하고 말았다.
목숨을 돌보지 않는 놈의 독기에 방심하다 그만 당하고 만 것 이다.
"다음엔 꼭 뜨거운 맛을 보여주리라."
이를 부득부득 갈며 복수를 다짐했다.
군대도 잃었고, 귀족들마저 그에게서 등을 돌렸다.
곧 트라우마의 병력들이 미친 듯이 수도로 몰려올 테고, 고독에 중독되었던 귀족들은 제정신을 차리자마자 스스로 결백을 주장하며 자신을 성토할 것이다.
권세와 명예가 땅에 떨어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다.
반란의 주모자로 몰려 도망자 신세가 될 것이다.
하지만 그는 자신이 있었다.
‘사부만 있으면 돼.’
사부만 있다면 얼마든지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바호크 공국이나 아마스 신성제국에서 다른 사람, 다른 이름으로 또 한 번 권력과 야망을 불태울 수 있다.
"사부만 있으면!"
그는 필사적으로 마음으로 내원의 깊숙한 곳에 위치한 방을 찾았다. 나무로 엉성하게 만들어진 방문을 열자 퀴퀴한 냄새가 확 얼굴에 끼쳐왔다.
사부는 언제나처럼 궁의 가장 후미진 방에서 연단에 몰두하고 있었다.
"사부님!"
피립 공작은 반가움과 울분이 뒤섞인 음성으로 노인을 불렀다.
단지에 불을 올리고 있던 노인이 삐죽이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주름진 노인에 더 굵은 주름이 잡혔다.
"쯧쯧. 심장을 당했구나."
"사, 사부님."
필립 공작은 그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죄송합니다. 그만······ 당하고 말았습니다."
사부는 별다른 대꾸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이미 모든 것을 다 알고 있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힘을 빌려 주십시오. 사부님."
그에게 사부는 하늘이었다. 사부가 도와준다면 수만의 병력보다 더 큰 힘을 발휘할 수 있으리라.
노인은 가타부타 말이 없었다
느릿느릿 구석에 놓인 목함을 열더니 작은 단약 하나를 꺼내 보였다.
"우선 네 상처부터 손보는 게 좋을 것 같구나."
필립 공작은 미적거리며 약을 받아들었다.
지금까지 수차례 노인이 준 단약을 먹어 보았다. 그 약들은 모두 일반인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만큼의 효능을 가지고 있었다.
뼈를 강철처럼 튼튼하게 하고, 화염을 쏘게 만들고, 냉기를 품게도 만들었다.
하지만 뛰어난 능력만큼이나 심각한 후유증이 뒤따랐다.
약을 먹고 난 다음엔 전신의 기운이 쭉 빠져버려 며칠 동안 고생해야 했다.
그래서 노인이 주는 약은 상황이 급한 경우가 아니라면 사용을 자제했다.
"이게 무슨 약이온지······."
필립 공작은 조심스럽게 노이에게 물었다.
"불안정한 네 신체를 정화하고 상처를 보살필 것이다. 공력증진에도 효과가 있을 터이니 먹어두어도 나쁠 것은 없다."
노인은 별걸 다 궁금해한다는 듯 연단에만 신경을 기울인 채 건성으로 대답했다. 필립 공작은 조금 석연찮은 마음이 들기는 했지만 먹어두어도 손해는 아닐 것 같아 한입에 단약을 꿀꺽 삼켰다.
그때 노인이 손질하고 있는 단지가 눈에 띄었다.
평소와는 달리 오늘 불을 올린 단지의 크기는 상당했다. 제법 큰 짐승을 통째로 넣을 수 있을 정도의 크기는 족히 되었다.
불길한 예감이 순간 뒤통수를 스쳤지만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지금은 상처를 치유하는 것이 우선이다.
체력과 힘을 회복한 후, 사부의 힘을 빌려 다음 일을 도모해야 한다.
‘기필코 레종 공주와 글로리 후작 놈을 쳐 죽이고 말리라. 그래, 내 와이번들을 가져간 그 놈도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다.’
필립 공작은 원수들을 하나씩 곱씹으며 분노에 몸을 떨었다.
사부와 함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그는 안도감이 느꼈다. 또 다른 의욕도 차올랐다.
하지만 그는 미처 눈치 채지 못하고 있었다.
연단에 몰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던 노인의 입가에 차가운 미소가 어리고 있었음을.
"헛!"
따끔거리는 느낌과 함께 필립 공작은 번쩍 눈을 떴다.
언제 잠이 들었던 것일까.
사부가 건네준 약을 삼키고 초조한 마음을 애써 가라앉히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틈에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피곤했던 모양이군.’
진한 한약 냄새가 코를 찔렀다.
‘사부님이 날 위해 약을 달이시는 모양이군.’
무슨 생각을 하는지 감히 짐작할 수도 없는 성격이긴 하지만, 이럴 때만은 고맙게 여겨졌다. 생각해보면 사부 없이는 지금의 자신도 없었었다.
‘그만 일어나야겠군.’
언제 발낙누 녀석들이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이다. 이런 시기에 태연하게 잠이 들었었다니 자신의 나태함에 한숨이 나올 지경이었다.
"응?"
몸을 일으키려던 필립 공작은 이상한 느낌에 인상을 찌푸렸다.
힘을 썼는 데도 하체 쪽으로 전혀 감각이 없었다.
"잠에 취했나?"
목을 움직여 자신의 하반신을 내려다본 그는 눈알이 튀어나올 만큼 기겁을 했다.
단지 안이었다.
성인 남자가 양팔을 벌려 안아야 할 정도의 크기인 단지.
그 속에 자신이 잠겨 있었다.
부글부글 끓고 있는 물이 단지 안을 가득 채우고 있었고, 그의 목 아래의 몸퉁이가 펄펄 끓는 물 속에 푹 잠겨 있었다. 고작 머리통만 단지 밖으로 나와 있었다.
더더욱 충격적인 것은 끓는 물 속에 잠긴 그의 몸뚜잉에 팔다리가 붙어 있지 않다는 것이었다.
"으아아, 으아아아악!!"
필립 공작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꿈이다.
이것은 꿈이다.
불길한 악몽이다.
그러니 제발 깨어라.
하지만 깨지 않았다.
아무런 고통도 느껴지지 않았고, 어떤 감각도 없건만 이 지옥 같은 상황은 깰 수 없는 악몽처럼 계속해서 이어지고 있었다.
그때 사부의 노훼한 음성이 들려왔다.
"후후. 깨었는가?"
필립 공작은 뇌전을 얻어맞은 듯 몸을 떨었다.
이 순간만큼은 저 느긋한 음성이 그렇게 두려울 수 없었다.
"사부님······ 이게 대체 어찌된 일입니까."
두려움에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이 단지는 사부의 것이다. 그리고 팔다리가 잘려진 몸뚱이와 함께 단지 안에 가득 채운 물위에 둥둥 떠다니는 것들은 분명 연단에 쓰이는 재료들이다.
무슨 이유에선지 사부는 자신의 몸을 이용해 연단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가 약을 먹고 잠든 사이 팔다리를 잘라낸 채로 자신을 단지 안에 넣은 것이 분명했다.
"왜 이런 짓을 하신 겁니까!"
필립 공작의 목에 두 눈에 핏발을 세우며 괴성을 질렀다.
사부의 심성이 잔혹하다는 것은 예전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설마 자신에게 이런 짓을 하리라곤 상상도 하지 못했다.
그동안 그에게 얼마나 심혈을 기울여 주었던가. 얼마나 많은 정을 주었던가.
그런데 왜 이제와 이런 짓을 하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다.
"후후. 어렵게 생각할 것 없네. 모든 것이 필요에 의한 행동이었지. 자네에게 기울인 모든 정성은 바로 오늘을 위한 것이었지."
"저 역시······ 당신의 제물에 불과했던 것입니까. 단지 고를 완성하기 위한?"
"바로 그렇네."
노인의 태연한 대답에 필립 공작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절망스러웠다.
왜 이런 상황이 된 것일까.
모든 것이 꿈만 같았다.
하지만 아직 아니었다. 노인이 준비한 비극적인 선물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필립 공작이 미처 깨닫지 못하고 있던 충격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으음. 음······."
신음소리가 들려왔다.
귀에 익었다.
필립 공작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흡 떠졌다. 그는 머리를 바둥거리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단약을 먹을 때 보았던 큰 단지가 바로 옆에 놓여 있었다.
큰 단지는 오랜 시간 연단을 한 듯 독한 냄새가 풍겼다.
신음소리는 그 단지 안에서 들려왔다.
필립 공작은 그 신음소리에 머릿속이 하얗게 비는 것만 같았다.
"그래. 그러고 보니 자네가 좋아할 많나 손님이 있었던 것을 깜빡 잊었군."
노인이 느린 동작으로 큰 단지의 뚜껑을 열었다. 단지 안이 얼마나 달아올랐는지 뜨거운 김이 확 하고 피어올랐다. 그런데 불가마나 진배없는 그 속에서 사람 머리하나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 아닌가.
라이트, 필립 공작의 하나뿐인 아들이었다.
"허허, 어허허허허허."
필립 공작의 입에서 허탈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이렇게 비극적일 수가.
아비는 팔다리가 잘린 채 펄펄 끓는 단지 속에 들어 있는데, 아들마저 통째로 다른 단지 속에서 삶아지고 있었니.
단지에는 여러 개의 관이 박혀 있었다.
그 관은 단지 안 라이트의 몸 속 깊은 곳에 연결되어 있어, 그가 고통에 몸을 뒤틀 때마다 검붉은 즙액이 관을 통해 단지 밖에 놓인 접시에 찰랑찰랑 고였다.
가히 목불인견의 참상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게 하나도 없는 처참한 상황인데도 라이트는 아직 목숨이 붙어 있었다. 하지만 고통만은 그대로 느끼는 듯 간간이 신음을 흘렸다.
벌겋게 익어버린 얼굴과 허옇게 탈색된 채 너덜너덜해진 낯가죽을 보니 가슴이 난도질당하는 것처럼 아파왔다.
"아, 아버지!"
신음을 끙끙 흘리던 라이트는 옆 단지에 들어 있는 필립 공작을 보고 반가운 듯 흐리멍덩한 눈으로 외쳤다.
"아버지 아파요. 왜 이렇게 아픈 거죠? 아버지도 이렇게 아픔을 거친 후에 강해진 건가요? 아버지, 아버지. 아파요. 몸이 타 들어가는 것 같아요, 언제까지 참아야 하는 거죠? 아아. 아버지."
펄펄 끓은 단지 속에서 온몸을 뒹굴며 애타게 아비를 부르짖는 라이트의 음성, 필립 공작은 귀를 틀어막고만 싶었다. 할 수만 있다면 고막을 쥐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두 팔마저 잘려나간 신세다. 그가 자식을 위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하얗게 떠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으흐흐흐흑. 아버지. 아버지. 아파요. 아파요. 온 몸이 부서지는 것 같아. 벌레들이 내 몸을 갉아먹어요. 사각거리는 소리가 너무 무서워요. 으흐흐흐흑."
자식이 울부짖는 비명소리에 필립 공작의 눈에서 피눈물이 흘러 내렸다.
자신의 피붙이가 삶아지고 있는 모습을 두 눈 벌겋게 뜨고 지켜봐야 하는 그의 입장은 세상에 다시없을 형벌과도 같았다.
"강하게 만들어 주겠다고······ 내 아들ㅇ르 유혹한 것인가."
더 이상 노인에 댛나 사부로서의 기대는 찾아볼 수가 없었다.
피를 토할 듯한 음성으로 필립 공작이 노인에게 물었다.
라이트가 든 단지에 불을 키우고 있던 노인이 털털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그랬지. 단순한 아이라 내 말을 곧이곧대로 믿더군."
"지금까지······ 라이트를 잘 대해준 것도 이런 이유 때문이었소?"
다시 한 번 노인은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렇지. 자로고 인고(人蠱)의 재료로 쓰는 것들은 마음이 어둡고 추악할수록 상등의 가치를 갖지."
"인고······ 설마 당신은 내 아들과 나를 고독의 재료로······."
"후후후. 그렇지. 기왕 이렇게 되었으니 자네에게 자세히 설명하겠네. 알다시피 고에는 여러 가지 종류가 있지. 그 중에서도 내가 쓰는 것은 무고(巫蠱)라는 것이지."
무고는 고독 중에서도 가장 악질적인 것이다.
항아리에 독을 품은 독물 수천 마리를 집어넣고, 서로 싸우게 만든다. 여러 날이 지나면 최후의 한마리만이 남게 되는데, 이 독물은 다른 독물의 특성을 모두 가지고 있어 독하기가 이루 말로 다 할 수가 없다.
이놈을 무고라고 부르는데, 독기가 얼마나 강한지 독물이 내뿜는 숨결만으로 수천 명의 사람을 죽일 수 있을 정도다.
무고는 고를 만드는 방법 중 가장 쉬운 방법이지만 다루기가 쉽지 않다는 결점을 가지고 있다.
한데, 이렇게 경천동지할 위력을 가진 무고에도 높고 낮은 우열이 있었다.
제일 낮은 등급은 벌레를 이용한 충고(蟲蠱)라 하고, 개의 몸뚱이를 땅에 파묻고 머리만 밖으로 나오게 한 뒤, 혀만 간신히 닿을 수 있는 위치에 고기를 놔두고 십 일이 지난 뒤 목을 쳐 내고 얻는 견고(犬蠱), 시체를 이용하는 시고(屍蠱) ······.
열거할 수 없을 만큼 많은 무고의 비법이 암암리에 전해져 오고 있었다.
한 가지 특이한 점은 잔인하거나, 가혹한 방법일수록 고의 위력이 높아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이렇나 무고 중에서도 가장 높은 등급이 바로 인간을 이용한 인고(人蠱)다.
독한 심성의 사람을 앞서 설명한 독물들과 함께 항아리에 넣어서 끓이는 것이다.
이렇게 완성된 인고는 모든 고독 중에서도 가장 뛰어난 위력을 발휘하게 되며, 이지를 가지고 있어, 주인의 명에도 충실하게 따른다.
이른바 독기를 마음대로 제어할 수 있는 충실한 무독 종이 생기는 것이다.
인고로 만든 무독은 고독을 다루는 모든 사람이 꿈꾸는 최고의 경지다.
그래서 노인은 이 일을 오랜 시간과 정열을 쏟아 왔다.
그리고 마침내 그 결실을 맺을 때가 된 것이다.
라이트의 몸에 박아 놓은 관에서 검붉은 액이 흘러나올 때마다 노인은 어깨춤이 절로 나올 정도로 기뻤다.
이것이야말로 불로불사의 비약이자 부족한 경지를 메울 수 있는 마도의 환락인 것이다.
"당신이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소!"
필립 공작은 발악적으로 고함을 질렀다.
고작 고독이 되기 위해 살아온 인생이었다니.
그 처참하고 비참한 인생이 너무도 억울했다.
참혹하기 이를 데 없는 삶이다.
끓는 물 속에서 고통의 산물을 쭉쭉 빨리며 죽어가는 아들의 신세가 너무도 참혹했다.
하지만 그의 비명고 ㅏ 같은 외침에 대한 노인의 대답은 너무도 냉정했다.
"어차피 한 번 죽었던 몸이 아닌가."
필립 공작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그렇다.
그는 이미 한 번 죽었던 몸이었다.
과거, 그는 노예였다.
이름도 없는 비천한 존재였다.
어디서 태어났는지 부모가 누구인지 기억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기억이라는 게 존재하던 시절부터 이미 두 손에 수갑이 채워진 채 노예상인들에게 끌려 다니고 있었다.
춥고, 배가 고팠다. 그리고 고통스러웠다.
노예는 가축과 같았다.
아니 가축 이하의 존재였다.
그렇게 비참한 존재로 노예상인들을 따라 세상 이곳저곳을 떠돌았다.
아마스 제국과 바호크 공국을 지났다. 거친 산을 넘고 강팍한 사막을 기었다. 그러다 아이린 왕국에까지 흘러들었다.
아이린 왕국은 원칙적으로 노예를 인정하지 않았다.
하지만 많은 귀족들이 편법으로 노예를 부리고 있었다.
‘필립 공작’도 그런 귀족들 중의 하나였다.
그는 그러한 필립 공작에게 팔렸다.
처음엔 좋았다.
따듯했고, 멀건 죽이지만 먹을 것이 있었고, 기워진 옷을 입을 수 있었다.
고생 끝에 천국에 당도한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커다란 착각이었음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필립 공작은 이중적인 성격을 가진 자였다.
밖에서는 엄하고 고지식한 사람인 듯 행동했지만, 집으로 돌아오면 성격이 돌변했다.
그는 가학을 즐기는 변태성욕자였다.
게다가 변태적인 욕망의 분출구로 남자를 더 선호했다.
그런 필립 공작에게 팔려온 그는 노리개와 마찬가지였다.
차마 입에 담을 수 없는 비참한 나날을 보냈다.
밟히고 바동거리고 기었다.
벌겋게 달궈진 인두 위에서 춤을 추었고, 피 묻은 단검을 들고 같은 노예와 죽음의 사투를 벌여야 했다.
참혹하고 고통스럽고 치욕스러웠다.
자살의 충동이 밤마다 그를 괴롭혔다.
아니, 이미 살아있다고 말할 수도 없는 인생이었다.
벗겨진 살갗을 타고 오르는 미친 듯한 가려움만이 그가 살아있다는 것을 증명해 주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마침내 그는 버려졌다.
눈동자에 생기가 사라지자 흥미를 잃어버린 필립 공작은 그를 가죽 부대에 담아 몬스터가 들끓는 황무지에 내다버렸다.
그는 차라리 기뻤다.
마침내 지옥이나 진배없는 고통과 치욕에서 해방된 것이다.
이제 죽음의 안식만을 기다리면 되었다.
가죽 부대의 입구가 젖혀지고, 성난 오우거가 불쾌한 악취를 풍기는 이빨로 그의 머리를 씹던 순간에도, 그는 하얗게 웃을 수 있었다.
그렇게 그는 죽었다.
하지만 안식은 없었다.
비명을 토하며 정신을 차렸을 때, 그는 지금처럼 거대한 항아리 안에 잠겨 있었다. 오우거에게 씹힌 얼굴은 걸레조각처럼 너덜너덜했고, 한쪽 눈은 뭉개져 있었으며, 코는 얼굴에 붙어 있지도 않았다.
미칠 것 같은 고통이 엄습해왔다.
그때 탁한 음성이 들려왔다.
"복수하고 싶으냐?"
그 한마디에 여태 잊고 있었던 울분이 한꺼번에 솟구쳤다. 그는 목이 터져라 괴성을 질렀다.
"복수하고 싶다. 필립 그 개자식을 죽일 수 있다면 내 영혼을 팔아도 좋다! 내 팔을 가져가라. 내 두 다리를 가져가라. 설사 악마에게 내 모든 것을 주는 한이 있어도 난 필립 놈에게 복수하고 싶다."
얼마나 괴성을 질렀던지 목구멍에서 피가 토해져 나왔다. 하지만 그는 괴성을 멈추지 않았다.
비명이 울음이 되고, 피마저 마른 목구멍은 쇳소리만 흘렸다.
더 이상 그의 입에서 새어 나오는 소리는 사람의 것이 아니었다.
울분에 찬 호소에 불과했다.
그런 상황에서도 그는 간절하게 외치고 있었다.
"좋아."
노인의 음성이 들려왔다.
표정엔 변화가 없었지만 왠지 노인이 흡족해하는 것 같다고 그는 생각했다.
다음 날, 그는 필립 공작을 가질 수 있었다.
땅바닥에 패대기쳐진 공작은 벌레처럼 벌벌 떨었다.
"크흐흐흐흐흐."
그는 태어나 처음으로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그때 알았어야 했다.
광기에 젖어 필립 공작을 갈기갈기 찢어발겼을 때, 노인의 얼굴에 가득하던 희열 어린 웃음의 의미를.
그는 필립 공작을 찢었다. 뼈와 살을 갈라놓고, 피를 마셨다. 흘러내리는 뇌수를 찍어 몸에 발랐다.
하지만 그의 머리통만큼은 건들지 않았다.
노인은 필립 공작을 그에게 던져 주었지만, 필립 공작의 머리통만은 허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는 실망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기뻤다.
장식장 너머에 매달려 있는 놈의 머리통을 바라보며 그이 몸뚱이를 해체했다. 공포에 질려 있는 놈의 마지막 표정을 볼 수 있어 즐거웠다.
그때, 소름이 끼칠 만큼 담담한 음성을 ㅗ다시 노인이 물었다.
"마침내 복수를 했구나. 이제 또 무엇이 하고 싶으냐."
그에게 노인은 신이었다.
그는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한 맺힌 목소리로 외쳤다.
"저에게 권력을 주십시오. 힘을 주십시오. 세상을 주십시오."
지금까지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었다.
다시 태어난 인생도 그렇게 처절하게 살기는 싫었다.
차라리 죽음을 택하리라.
그래서 그는 노인의 발에 입을 맞추며 간절하게 빌었다.
당시, 노인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그리고 며칠 후, 그는 신기하게도 필립 공작이 되어 있었다.
권력이 손아귀에 들어온 것이다.
하지만 한동안은 불안했다.
사람들이 수군거렸다.
필립 공작이 변했다는 것이었다.
알고 난 뒤로 백치가 되었는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어린아이처럼 굴었고, 개중엔 그런 필립 공작의 정체성마저 의심하는 자가 나타나기도 했다.
그는 두려웠다.
누군가 자신의 정체를 눈치 챌까 봐 겁이 났다.
그래서 잔인해졌다. 살인을 했다.
수상한 소문이 나돌 때마다 소문의 진원을 찾아 잔인하게 처영했다.
낮으로는 기억을 잃은 병자 행세를 하고, 밤으로는 방구석에 매달아 놓은 필립 공작의 부인을 통해 귀족들의 생활을 배웠다.
그렇게 5년, 마침내 그는 완벽하게 필립 공작이 될 수 있었다.
그때, 한동안 보이지 않던 노인이 다시 찾아왔다.
그리곤 무공을 전수하였다.
10년 후, 그는 소드마스터가 되어 있었다.
힘을 얻은 것이다.
권려과 힘을 가진 그는 서서히 욕망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이제 세상을 오시할 때가 된 것이다.
돌아보면 그것은 집착에 가까운 것이었다.
저주받은 전생에 대한 보상심리.
하지만 알지 못했다.
그가 욕망을 키워나갈 때마다 노인의 어두운 미소가 점차 짙어지고 있었음을.
노인은 신이 아니였다.
마귀였다. 그것도 최고로 추악한.
그의 욕망과 탐욕이 커질 때마다 노인은 즐거워 했고 기뻐했다. 그리고 그 절정에서 열매를 따듯 팔다리를 자르고 그를 절망의 단지 안으로 밀어 넣은 것이다.
"으흐흐흐흐흑."
필립 공작은 피끓는 음성으로 흐느꼈다.
"크크크. 그래 더욱 더 절망하거라."
노인은 사갈과 같은 미소를 흘렸다.
"그냥 죽여라. 날 그냥 죽여줘!"
필립 공작은 비명을 질렀다. 발악을 했다.
하지만 노인은 들어주지 않았다.
오히려 담담한 미소로 그를 더욱 참혹하게 만들었다.
"약속하지 않았던가? 복수를 할 수 있다면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바치겠다고. 팔다리를 주고 모든 것을 잃게 되는 한이 있어도 복수하겠다고. 난 그때의 약소을 지켰다."
필립 공작은 말을 잃었다.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눈동자는 초점을 잃었다.
"잃었구나. 속았구나. 모든 게 허상이었구나. 나는······ 나의 삶은 시작부터 끝까지 모두 지옥에서 보낸 것이구나."
한때는 금방이라도 세상의 모든 것을 거머쥘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는 우매한 자였다. 자식의 불행까지 모두 자신의 입으로 결정 지은 최악의 인간에 불과했다.
"아파요. 온 몸이 타 들어가요. 벌레들이 내 몸을 먹어요. 아버지 아버지. 도와줘요."
라이트의 비명소리가 여운처럼 아련하게만 들려왔다.
그렇게 필립 공작은 천천히 의식을 잃어갔다.
필립 공작의 고개가 축 늘어졌을 때였다.
연속된 정신적인 충격을 더 이상 버티지 못한 것이다.
필립 공작이 의식을 잃은 지 얼마 후, 삐걱 소리와 함께 방문이 열렸다.
노인은 스윽 고개를 돌렸다.
하얀 백발의 청년이 굳은 표정으로 실내로 들어서고 있었다.
그를 본 노인의 두 눈에 주름살이 가득 잡혔다.
"허, 이거 귀하신 손님이 오셨군."
정말로 귀한 손님이었다.
이드라센에 온 이후로는 단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광대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가진 자였다.
"······."
"기운이 많이······ 익군. 그립기도 하고."
백발의 청년, 홀랭이는 노인의 물음에도 입을 꾹 다문 채 차분하게 실내를 둘러보았다.
붉은 천으로 장식된 제단, 그 위에 올려진 두 개의 단지. 그리고 그 속에 비참한 신세로 끓여지고 있는 부자의 모습.
"틀림없군."
나직하게 흘러나온 호랭이의 음성엔 은은한 분노가 깔려 있었다.
반란군과 트라우마 군의 전쟁이 서서히 트라우마의 승리로 기울어가자 호랭이는 즉시 와이번의 기수를 돌려 수도 유리스를 향해 날아왔다.
고독을 만든 자가 이곳에 있을 것이라는 걸 알았기 때문이다.
신선이 그에게 죽음과 절망이 넘치는 전장은 있을 자릭 아니었다. 그래서 차라리 이 모든 불행의 시작점을 찾아온 것이다.
동향인의 잘못을 스스로 처리하기 위해서 말이다.
"어쩌다 이 세계로 오게 되었는가?"
노인을 담담히 쳐다보던 호랭이가 뒷짐을 진 자세로 물었다. 노인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편안하게 답했다.
"글쎄. 우연과 필연이 겹쳐서라고 말할 수 있겠군."
호랭이는 그의 대답으로부터 여러 가지를 알 수 있었다.
그는 혼자만의 힘으로 이드라센으로 오게 된 것이 아니다. 분명 이곳에서 누군가가 힘을 빌려주었다.
"굳이 다른 세계에 와서도 이런 악행을 저질러야 했는가?"
호랭이는 필립 부자가 들어 있는 단지를 턱짓하며 물었다.
"추구하는 바가 있으면 그에 맞는 행동을 하는 것이 인간이 아닌가. 유감스럽게도 본좌는 아직 인간의 터울을 버리지 못하였네."
"하늘이 두렵지 않은 모양이군."
노인은 입가에 추악한 미소를 그렸다.
"하늘을 못 본 지 이미 오래일세. 그나저나 안타깝게 되었군. 멀리 타관에서 고향 사람을 만났는데 이렇게 금방 헤어지게 생겼으니."
노인이 손을 슬쩍 흔들자 방 한 구석을 굴러다니던 건이 노인의 소매로 빨려 들어갔다.
노인은 검 끝을 손가락을 퉁퉁 퉁기며 노래하듯 말을 이었다.
"예전부터 도인들은 고리타분했지. 도술에 정신이 팔려 무공을 등한시 했지. 그 무슨 헛된 사상에 정신이 팔려 쓸모없는 풍월이나 읊어댔지. 부실한 몸을 보아하니 자네 역시 그런 부류인 것 같군."
"······ 글쎄."
미진한 대답과 함께 호랭이는 등 뒤에서 도끼 한 자루를 꺼내들었다.
노인의 두 눈이 가늘게 여며졌다.
"특이한 무기군. 자네에겐 어울리지 않아."
호랭이는 여유있게 받아넘겼다.
"가끔 듣는 소리지. 하지만 내가 이놈을 쓰면 다들 생각이 바뀌더군."
"흥. 그래도 역시 내 생각은 변하지 않았네. 자네가 도인이라면 결코 날 이길 수 없어."
"······ 자넨 애초에 두 가지 실수를 했네."
"?"
"첫째, 난 도인이 아니야."
노인의 두 눈이 좌우로 길게 찢어졌다. 믿을 수 없다는 눈빛이었다.
호랭이의 말이 이어졌다.
"둘째, 난 인간이 아니야."
좁혀지던 노인의 눈이 흡 떠졌다. 하지만 다음 순간 음침한 미소를 흘렸다.
잔혹함이 느껴지는 그런 웃음소리였다.
"클클클. 하긴 사람 치곤 다소 기도가 거칠긴 했지."
"······."
"재미있군, 중원에선 날 이길 자가 없었다. 그대가 과연 날 막을 수 있을까?"
"······ 기대해도 좋을 걸세. 그런데 내가 자네를 뭐라고 불러야 할지 모르겠군."
"그저 노괴라 부르면 되네."
"늙은 괴물이라. 자네에게 딱 어울리는 이름이군."
"크흘흘. 재미있는 양반이로군."
말로는 의연하게 대꾸하고 있었지만, 실상 노인의 속마음은 결코 편치 않았다.
으스스한 기운이 노인의 발 아래로 안개처럼 깔렸다.
그것은 감히 소드마스터와 비견할 수 없는 장엄하고도 독한 기운이었다.
호랭이의 표정이 굳어졌다.
"아무래도 오늘 힘 좀 써야 할 것 같군."
그의 쇠도끼가 푸르스름한 예기를 뿜어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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