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화 (69/102)

이제부터 나의 시간이다

글로리 후작과 필립 공작이 경천동지의 대격전을 벌이려는 그 순간, 병규와 살렘은 이미 치열한 공방을 벌이고 있었다.

먼저 손을 쓴 사람은 살렘이었다.

어깨가 흔들리는가 싶은 순간 이미 날카로운 검광이 시야를 가려왔다.

지독하게 빠른 검공이었다.

병규는 단지 고개만을 비스듬히 기울였다.

싸늘한 검광이 귓가를 스쳐 지나갔다.

터벅.

상대의 공격을 피하고 가볍게 한 걸음을 옮겼다.

"윽!"

단지 한 걸음을 옮겼을 뿐이다. 그런데도 살렘은 가슴을 저며 오는 듯한 압박을 느꼈다.

번쩍.

살렘의 검이 빙글 돌 때 예리함이 한층 짙어졌다.

섬전처럼 찔러가던 검광이 꽃봉오리가 만개하듯 사방으로 뻗어 나갔다.

가볍고도 예리하며, 무거우면서도 신랄하다.

도저히 피할 구석이 없어 보였다.

꿈틀.

병규의 눈썹이 역팔자로 크게 휘어졌다.

하지만 그는 물러서지 않았다. 오히려 다시 한 번 성큼 걸음을 크게 앞으로 내딛었다.

순간, 놀라운 변화가 일었다.

쉬이이익!

바람 빠지는 소음과 함께 사바을 휘감던 살렘의 검광이 씻은 듯이 사라진 것이다.

"믿을 수 없군."

살렘은 신음을 흘리듯 중얼거렸다.

기세만으로 자신을 제압할 수 있는 자가 있을 줄이야.

가히 일취월장이란 말이 무색할 정도로 엄청나게 진보된 실력이다.

그때, 태연한 표정으로 병규가 손을 뻗어왔다.

느렸다. 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럽다.

흐느적거리는 움직임인 데도 이상하게 피할 수가 없었다. 아니 피할 마음이 들지 않았다는 것이 더 적절한 말일 것이다.

툭.

병규의 손이 살렘의 어깨 부근을 지나갔다.

후리고 당기고 걸었다.

우득. 

뼈 어긋나는 소음이 일었다.

살렘의 왼쪽 팔이 축 늘어졌다.

더듬는 듯한 엉성한 동작에 어깨 부근의 관절이 몽창 빠져버렸다.

"흥미로운 기술입니다만······."

살렘이 음침하게 말했다.

"제겐 소용없는 것 같군요."

관절이 빠진 그의 왼팔이 다른 극의 자석이 서로를 끌어당기듯, 간단하게 제자리를 찾아갔다.

병규는 실망하지 않았다.

이미 한 번 경험한 재주다.

문제는 어떻게 저런 것이 가능한 것인지를 알아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 해답을 찾지 못하면 오늘의 싸움은 정말로 힘들어질 것이다.

"잘 붙었는지 모르겠군요."

살렘은 장난하듯 팔을 빙글빙글 돌렸다.

관절 부위의 성능을 시험하는 듯했다.

"좋아요. 나쁘진 않군요."

살렘이 빙긋 웃었다.

"다시 갑니다."

살렘이 검을 앞으로 내밀었다.

탕!

무릎을 굽혔다 펴며 도약, 쉭 하는 칼바람 소리가 안면을 찔러 왔다.

부르르 떨리는 검봉의 움직임은 수많은 변화를 내포하고 있었다. 어디로 어떻게 휘어질지 예상할 수 없을 정도다.

병규는 눈을 지그시 내려 깔고 두 귀에 정신을 집중했다. 

안면을 쪼개오는 날카로운 바람소리를 따라 슬쩍 신형을 틀었다.

찍!

검끝이 어깨를 스치고 지나갔다.

옷이 찢어지고 피가 배어 나온다.

‘스친 정도.’

병규는 빠르게 자신의 부상 정도를 파악했다.

슬쩍.

발을 옮겼다. 가볍게 발을 놀린 것뿐이지만 그의 움직임은 이미 환상이라 부를 만한 경지였다.

휘리릭. 

풍경이 무섭게 흘러간다.

어느새 그는 살렘의 등 뒤에 있게 되었다.

손끝으로 요수의 발톱을 뽑아 아래에서 위로 가볍게 그었다.

등뼈에서 뒤통수까지 깨끗하게 난도질 당할 상황. 하지만 살렘은 역시나 녹록치 않았다.

어느새 휘둘러진 검이 등을 가로막았다. 

촤아악!!

요수의 발톱과 검강이 부딪치며 현란한 불꽃을 일으켰다.

병규의 공격을 막아낸 살렘은 고슴도치가 가시를 세우듯 사방으로 검광을 뿌렸다.

그 기세가 자못 매서웠다.

주위 10미터 반경이 그의 검광으로 가득 찼다.

살렘은 한참이나 오러블레이드가 타오르는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아무 느낌도 없었다.

살이 갈라지고 뼈가 쪼개지는 그 특유의 절삭음이 느껴지지 않았다.

살렘은 슬쩍 뒤를 돌아보았다.

등 뒤에 서 있어야 할 병규가 보이지 않았다.

"위!"

살렘은 급히 고개를 들어올렸다.

그곳에 있었다.

사지를 쫙 뻗은 병규가 날리는 먼지처럼 허공을 배회하고 있었다. 살렘의 검이 날아든 순간 귀탄에게서 복사한 점프력으로 뛰어오른 것이다.

그 당시에는 그것이 살렘의 검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하지만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허공으로 솟구친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당신이 제 검을 또 이렇게 피하실지 궁금하군요."

살렘의 눈가에 득의의 웃음이 매달렸다.

날개가 없는 것은 떨어지기 마련이다.

유감스럽게도 병규에겐 날개가 없었고, 살렘에겐 5, 6미터는 충분히 뻗어낼 수 있는 검강이 있었다.

"죽음의 세례를."

살렘의 검이 쭉하고 뻗어왔다. 검은 고작 2미터도 되지 않는데, 검끝에서 솟구쳐 오른 검강은 무려 7미터나 가까이나 되었다.

검게 타오르는 오러블레이드의 강맹한 기운에 고막이 찢어질 것 처럼 울려댔다.

"흠."

병규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도무지 피할 길이 없었다.

이대로 꼬챙이 꿰듯 가슴팍이 뚫릴 위기였다.

그런데······ 내려오지 않았다.

"?"

살렘의 미간에 주름이 그어졌다. 둥글게 확장된 그의 동공에 놀라움이 서려 있었다.

위급천만의 상ㅎㅇ, 병규가 보인 재주는 놀랍게도 활공이었다.

두 팔을 쫙 편 채 활공하는 행글라이더처럼 허공에 멈춰서 있었던 것이다.

"오오. 전에 보지 못했던 재주로군요."

그의 음성은 놀람보다는 기쁨이 어려 있는 듯했다.

활공.

와이번의 피를 먹은 후로 병규가 사용할 수 있게 된 재주였다.

하늘을 날 수는 없지만, 벌새처럼 귀를 세차게 펄럭여 허공을 잠시 활공할 수 있게 되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재주로 살렘의 공격을 무마한 병규는 즉시 몸을 뒤집으며 반격을 시도했다.

"중압!"

한 팔을 쭉 내밀자, 무시무시한 압력이 살렘이 전신을 내리눌렀다. 이 불의의 기습에 살렘은 피할 생각도 하지 못했따.

"크윽!"

거친 압력에 등뼈가 비명을 질렀다.

두 발이 무릎까지 땅 속에 처박혔다.

"이, 이건 미디움의 능력?"

살렘의 두 눈에 놀람이 떠올랐다.

중압.

분명 말보로 가문의 차남, 미디움이 구사하던 능력이다.

그런데 어떻게 저 애송이가 이 색다른 기술을 구사할 수 있는 것일까.

그러나 이유를 물어볼 여유가 그에겐 없었다.

병규의 공격이 재차 날아들고 있었다.

허공에서 몸을 뒤집은 병규는 요수의 발톱을 죽장처럼 세우고는 그대로 살렘의 머리 위를 덮쳐갔다.

"크윽"

무릎 아래가 땅 속에 파묻힌 바람에 움직일 수 없었던 살렘은 어쩔수 없이 검을 들어 대항했다.

이대로 요수의 발톱을 퉁겨낼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는 병규의 능력 하나를 잊고 있었다.

오우거의 막대한 힘.

쿠앙!

검과 요수의 발톱이 마주치자 대지를 뒤흔드는 폭음이 터져 나왔다.

"커어억."

폭음 속에 묻혀 비참한 비명성이 새어 나왔다.

구름처럼 일었던 먼지가 가라앉자 허리까지 땅 속에 묻혀 버린 살렘의 몰골이 드러났다.

"쿠후ㅡ 후, 잠시 잊었군요. 그 엄청난 힘을."

병규는 무심한 눈으로 그를 내려다보았다.

움직일 수 없게 된 것이다.

승부는 이미 끝난 것이나 다름없었다.

"쿠쿠. 이제 전 움직일 수 없게 됐군요. 어쩌실 건가요? 전처럼 팔을 날려버릴 겁니까? 아니면 화끈하게 목?"

파랗게 그늘이 진 살렘의 입이 하얗게 웃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지금의 공포를 즐기는 듯한 태도를 보였다.

"글쎄······ 어떻게 해야 할까."

병규는 성스런 의식을 치르듯 두 손을 천천히 머리 위로 들어 올렸다.

"넌 팔 하나쯤 잘려도 아무렇지도 않은 괴물이었지?"

"?"

"내가 사는 곳에도 그런 괴물이 있었다. 이곳의 트롤과 비슷한 녀석이었지. 그런데 놈은 물만 묻으면 무섭게 재생하는 거야. 팔이 떨어지고, 다리가 잘려나가도 놈은 재생했지. 심지어 몸뚱이를 몇 토막 내도 소용이 없었어. 그런 놈을 내가 어떻게 처리했을 것 같아?"

"어떻게 했을까요? 정말로 궁금하군요."

"온몸을 채 썰 듯 썰었지."

"그거······ 굉장히 서늘한 얘기로군요."

"그래. 좋은 말은 아니지. 특히 지금부터 그렇게 될 운명이 된 너로서는 말이야."

살렘의 얼굴이 하얗게 질려버렸다.

"기왕이면 지옥에 떨어져라."

병규의 두 손이 횡으로 종으로 요기를 뿌렸다.

대기가 쪼개지고, 살렘의 몸뚱이가 두부 썰리듯 수십 조각으로 갈라졌다.

살점이 후두둑 떨어지고,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따.

잔혹한 싸구려 삼류 공포 영화의 질척한 참살현장을 보는 것 같은 비현실적인 장면이었다.

바닥을 뒹구는 얼굴 조각은 비현실적인 장면 중에서도 가장 그로 테스크한 공포를 그려내고 있었다.

병규는 말없이 산산 조각난 살렘의 육편 조각을 바라보았다.

상대를 완벽하게 파멸시켰다.

설사 살렘이 부모를 죽인 원수라 해도 이렇게 처참하게 처리하진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병규는 상대를 수백 조각으로 난도질해 놓고도 여전히 안심하지 못했다. 아직 그의 동공엔 긴장이 어려 있었다.

아직이다.

아직 살렘의 기운이 사라지지 않았다.

상체가 난도질되었음에도 여전히 그 칙칙한 기운이 느껴지고 있었다.

꿀꺽.

병규의 목으로 마른침이 넘어갔다.

"쿠쿠쿠."

간악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심장이 덜컥 무너지는 듯한 충격이 머릿속을 엄습해왔다.

고개를 돌렸다.

찢어지고 갈라지고 흩어졌던 놈의 살점이 퍼즐조각처럼 흙 속에 파묻힌 하체 위로 차곡차곡 쌓이고 있었다.

특히 그의 얼굴.

눈이 이마에 달리고, 코가 목에 달렸으며, 뭉개진 입술이 코가 있을 자리에 세로로 길게 늘여진 공포스런 모습으로 붙어 있었다.

그 입.

세로로 늘어진 살렘의 빨간 입술이 제멋대로 근육을 움직이며 웃고 있었다.

"쿠쿠쿠. 이거 제대로 당했군요."

살렘은, 아니 살렘이라 불렸던 괴물이 자조 어린 웃음을 흘렸다.

흩뿌려진 살 조각들이 주르륵 모여들더니 퍼즐이 맞춰지듯 순식간에 제자리를 찾았다.

투드득.

살렘은 자연스런 동작으로 흙 속에 파묻힌 하체를 끄집어냈다.

그리곤 엉성하게 붙은 왼손으로 자신의 뺨을 세차게 때리며 박수를 쳤다.

짝짝짝.

"대단했습니다. 설마 당신에게 그런 광기가 있는 줄은 몰랐군요. 하지만 참으로 아깝게 되었군요. 절 없앨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는데 말이죠."

병규는 대답하지 못했다.

누더기를 기워만든 듯한 살렘의 공포스런 모습을 멍하니 응시하고 있었다.

설마 그렇게까지 당하고도 태연히 재생할 줄이야.

정말 말로는 표현 못할 엄청난 괴물이다.

‘상체엔 핵이 없었던가.’

그는 살렘의 몸 어딘가에 재생능력이 있는 핵이 있을 것이라 생각했다. 그래서 잔인하게 살렘의 상체를 채 썰 듯 썰어버린 것이다.

‘하체일까?’

상체에 없다면 하체에 있을 것이다.

그때 살렘이 서커스 무대의 광대처럼 과장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이런 이런. 절 앞에 두고 딴생각에 빠져 있다니. 외롭군요. 아주 외로워요."

그는 왼팔로 어깨를 감싸며 몸을 부르르 떨었다.

뛰어난 희극배우와 같은 능숙한 연기였지만 병규는 구역질을 느꼈다.

그때, 살렘이 손가락 하나를 번쩍 들어올리며 물었다.

"여기서 질문, 과연 제 오른쪽 팔은 어디에 있을까요?"

"······!"

병규는 정신이 확 들었다.

그러고 보니 그의 오른쪽 팔이 보이지 않았다. 주위로 눈을 돌리는 순간, 발바닥에 화끈한 통증이 느껴졌다.

"큭!"

병규는 반사적으로 제자리에서 펄쩍 뛰었다. 그의 왼발이 있던 곳에 검 하나가 비죽이 튀어나와 있었다.

지면을 뚫고 나온 검의 길이는 상당했다.

무릎 높이 정도.

발바닥을 뚫은 검이 무릎 높이까지 치고 올라온 것이다.

"으으윽."

어마어마한 통증에 병규는 이를 악물었다. 얼마나 통증이 대단했던지 머리가 핑 돌고, 뒤통수까지 시큰거릴 정도였다.

그때 발바닥을 뚫은 검이 불쑥 땅 위로 솟아올랐다.

검은 팔 하나가 피로 물든 검을 붙들고 있었다.

사라졌던 살렘의 오른팔이었다.

"수고했습니다. 어서 돌아오세요."

살렘의 키득거리면서 말하자 오른팔이 벌레처럼 바닥을 기어 그의 오른쪽 어깨에 달라붙었다.

"어떤가요? 저도 꽤 재미있는 재주를 가지고 있죠?"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등허리의 수통을 꺼내 발에 뿌렸다. 화끈한 열기가 느껴지며 통증이 가라앉았다.

혼란스럽던 머리도 차갑게 식었다.

"호오."

살렘의 눈이 가늘게 좁혀졌다.

"후후후. 그런 재주가 있으셨군요. 이제 보니 당신도 저 못지않은 괴물인가 봅니다. 쿠쿠쿠."

병규의 미간이 찌푸려졌다.

"격이 다르잖아. 다른 사람은 몰라도 네 녀석에게까지 그런 말을 듣고 싶지는 않아."

"쿠쿠. 이제 보니 그런 말을 가끔 듣는 편이신가 보군요. 아! 마침 생각나서 그렇습니다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살렘이 교태로운 미소를 흘리며 슬그머니 물었다.

"당신의 그 능력 말입니다. 하늘에서 쾅 하고 압력으로 절 내리누르던 바로 그 능력 말입니다. 그걸 어떻게 알고 있으신 건지요. 아아, 오해는 마십시오. 전 다만 그 기술이 제 사제의 것과 상당히 비슷하게 느껴져서 물어보는 것뿐입니다."

"······."

"저런······ 대답해 주기 싫은 표정이시로군요. 뭐, 좋습니다. 굳이 대답해 주지 않으셔도. 제가 직접 듣도록 하죠. 사실 그게 제 취향이기도 하고요."

살렘의 챨? 혀가 입술을 축였다.

어찌 보면 이성을 유혹하는 듯한, 원색적인 행동이었다.

사실이었다.

살렘은 병규를 사랑했다.

죽이고 싶을 만큼.

도망치지 못하게 사지를 절단하고, 머리를 잘라 등뼈와 함께 거실 벽을 장식하고 싶었다.

그의 몸으로 풍경화를 그리고 싶었다.

잘게 다져진 살점으로 산과 들을 그리고, 힘줄로 강을 표현하고 두 손 가득 넘치는 피로 바다를 채우고 싶었다. 뼈를 갈아 눈 내린 산을 표현할 수도 있다.

이 얼마나 황홀한 예술인가.

병규의 몸을 해체하고 살점 하나, 힘줄 한 가닥을 끄집어낼 생각을 하면 절로 어깨가 떨려왔다.

그는 정말이지 처절할 정도로 병규를 탐했다.

세상에 태어난 이후로 이렇듯 짜릿한 황홀감을 건네준 자는 아직 없었다.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라 그는 확신했다.

그래서 즐기는 것이다.

삐그덕거리는 육신과 탐욕으로 불타오르는 영혼을 활활 불태우며 병규라는 사상 최대의 희열덩이를 터트려 분해하고, 갈기갈기 찢으며 애절한 사랑을 노래하는 것이다.

"자 이제부터 2회전 돌입입니다. 관객들이 실망하지 않도록 멋진 쇼를 보여주도록 하죠."

황홀한 미소를 머금은 살렘이 사뿐사뿐 붉은 모래 위를 걸어왔다.

스르르.

검이 미끄러지듯 허공으로 그어졌다.

"갑니다."

짧은 말과 함께 그의 검이 움직였다.

츠츠츠츠츠.

새벽 찬바람 속을 소리 없이 내려앚은 안개처럼, 스산한 소음이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병규는 섬뜩한 마음이 들었다.

재빨리 뒤로 물러섰다.

하지만 조금 늦은 듯 짧은 절삭음과 함께 가슴께의 옷이 찢겨져 나갔다. 위아래로 펄럭이는 옷자락 안으로 그의 피부가 벌겋게 물들었다.

당했다.

그것도 꽤 깊숙이.

‘점점 빨라지고 있다.’

처음엔 느렸다.

하품이 나올 정도로. 마치 슬로우 비디오를 보는 것 같았다.

하지만 이젠 검의 움직임이 눈에 보이지도 않을 정도다.

처음의 느림과 대비되는 빠름이라 체감되는 스피드는 실제보다 몇 배나 빠르게 느껴졌다.

귓가를 스치는 바람소리에 소름이 쫙쫙 끼칠 정도였다.

‘하지만······.’

이대로 그냥 당할 수는 없다.

병규는 뭉클뭉클 일어나는 살렘의 검은 검강을 향해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이 움직임은 얼핏 보기엔 엉성했지만 오묘한 무리를 담고 있어. 그물처럼 조밀한 살렘의 공격을 스치듯 피해낼 수 있었다.

슈슈슈슈슈!

검광이 파도처럼 몰아쳐 왔다.

전후좌우 어느 곳에도 피할 구멍이 보이지 않았다.

병규는 입술을 질끈 깨물며 앞으로 성큼 내딛었다.

촤아아아악!

그의 양팔과 어깨가 갈라지며 피가 쏟아졌다.

하지만 병규는 얕은 신음조차 흘리지 않았다. 두 주먹을 불끈 쥔 채 앞으로 걸었다.

다시금 살렘의 검이 몰아쳤다.

파도가 치듯 때때로 밀려났다 힘을 모아 한꺼번에 몰아쳐 왔다.

그렇게 쏟아지는 검기의 다발은 거친 풍랑처럼, 난폭하고 거칠것이 없었다. 치릿치릿하는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병규의 몸은 예술가의 손에 든 나무토막처럼 거침없이 깎여 나갔다.

하지만 신체가 무너져 가는 통증 속에서도 병규는 무던히도 앞으로 걸어나갔다.

그리고 마침내 살렘의 가까이 다가갈 수 있었다.

무거운 표정으로 손을 내밀었다.

답답할 정도로 느린 움직임이었따. 당연히 살렘은 빠르게 뒤로 물러났다.

이상한 것은 번개처럼 움직인 살렘이 느릿느릿 날아든 병규의 손을 피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이것은 매우 이상한 일이었다.

툭.

손바닥이 그의 가슴을 쳤다.

마치 어린아이가 밀듯이 슬쩍 민 것이었다.

‘힘이 다 했는가?’

살렘은 크게 생각하지 않았다.

이렇게 약한 힘으로 가슴을 쳐 봐야 무적을 자랑하는 그의 신체엔 멍 하나 생기지 않는다.

그러나 채 두 걸음을 떼기도 전에 이상한 기운을 느꼈다.

물가에 던진 돌로 인해 파문이 일듯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충격이 겹겹이 일어나는 파도처럼 불어나기 시작했다.

쿠구구구궁!

시간이 갈수록 파도는 점점 더 크고 거칠게 일어섰다. 그리고 마침내 감당할 수 없는 해일로까지 발전되었다.

퍼퍼퍼퍽!

그의 등줄기가 터져 나갔다.

풀썩.

살렘 후작의 육신이 힘없이 무너졌다.

엎어진 그의 등은 내부에서 폭탄이 터진 것처럼 뼈와 내장을 훤하게 드러내 보이고 있었다.

그저 가볍게 손으로 짚은 위력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엄청난 참상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단풍으로 붉게 물든 가을바람처럼 병규의 그림자가 살렘의 주위를 오갔다.

서걱서걱.

냉동된 고깃덩이가 썰리는 듯한 처참한 절삭음이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쉬리리릭!

병규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더불어 절삭음도 커져만 갔다.

작업이 끝났을 때, 살렘의 허리 아래부터 발끝까지의 반신은 손가락 하나 정도의 너비로 잘게 썰려 있었다.

핵을 없애기 위해 병규는 철저하게 그의 하체를 공략한 것이다.

"쿠, 쿨럭. 쿠쿠."

허리 아래를 잃어버린 살렘 후작이 모랫바닥에 엎어진 채, 잔기침을 토해냈다.

"자, 잔인하시군요. 으히히히히."

아직 살아있는 것이 신기할 정도인데 살렘은 여전히 웃었다.

그의 손발이 부들부들 경련을 일으켰다.

"헉헉."

병규는 한쪽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그도 온전하지는 않았다.

왼쪽 팔이 어깨 아래에서 잘려나가 저편을 뒹굴고 있었다.

가슴 부위는 살렘 후작의 검강에 의해 참혹하게 찢어져 있었다.

가슴뼈가 좌우로 갈라진 채 벌떡이는 심장과 허파가 그대로 드러나 보였다.

당장 죽어도 이상할 것이 없는 극심한 부상이다. 그런데도 그는 이런 처참한 상황에서도 온힘을 다해 살렘의 하체를 난도질한 것이다.

이것이 그가 할 수 있는 최선이었다.

병규는 손을 뒤로 가져갔다. 물통이 잡혔다.

부상이 극심하지만 물만 있다면 얼마든지 재생할 수 있다. 수통의 물만 믿고 자행한 도박이었다.

하지만 그는 수통의 물을 사용할 수 없었다.

퍽 하는 충격과 함께 그의 몸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쿠쿠. 안 되지요. 이건 반칙입니다."

살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떻게······."

붉게 충혈된 눈을 뒤로 돌렸다.

살렘이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애써 썰어놓은 그의 하체는 검은 연기처럼 뭉클쿵클 허리 아래에 들러붙고 있었다.

"아아."

병규는 절망했다.

살렘의 하체에도 핵은 없었던 것이다.

아니 핵 자체가 없다는 말이 옳을 것이다. 그는 처음부터 살렘의 능력에 대해 잘못 생각하고 있었던 것이다.

뒤이어 더욱 절망적인 소음이 들려왔다.

주르륵!

뒤집어진 수통에서 물이 쏟아졌다. 

살렘이 붉은 모래 위로 수통의 물을 쏟아 버리고 있었던 것이다. 

"과연 이 수통의 액체가 무엇인지 궁금하군요. 하지만 만약을 위해 비워두겠습니다."

살렘은 수통의 물이 병규의 몸을 재생시키는 마법의 물약 같은 것인 줄 착각한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어떻게 오해를 했건 간에 병규가 더 이상 재생할 수 있는 길이 막힌 것은 확실했다.

"어떻······ 게!"

가래가 끓는 듯한 탁한 음성으로 병규가 물었다.

궁금했다.

대체 어떤 방법으로 그렇게 잘게 썰린 육체를 재생할 수 있는 것 일까.

"뭐 별거 아닙니다. 그저 조촐한 재주일 뿐이지요. 하지만 정말로 당신은 지독하게 운이 없으시군요. 하필 이런 날 절 만나시다니."

"······?"

병규의 눈에 의문이 어렸다.

왜, 뭐가 잘못된 것일까.

그의 의문을 해소해 주기라도 하든, 살렘은 피에로처럼 과장되게 두 팔을 펼쳐 보였다.

순간, 그의 몸이 흐릿해졌다. 마치 어둠속으로 스며들 듯 녹아내리는 것 같았다." ······ 그······ 랬군."

마침내 알게 되었다.

무엇이 살렘을 무적으로 군림할 수 있게 했는지.

"쿠쿠쿠. 이제야 눈치 채신 것 같군요. 맞습니다. 어둠이죠. 이렇게 어두운 밤은······. 칙칙한 어둠의 향기는 바로 저의 시간이랍니다. 이 안에선 저는 절.대.무.적.입니다."

피로 얼룩진 병규의 안면이 일그러졌따.

절대무적이라는 살렘의 말에 가슴이 아파왔다. 당장이라도 죽을 듯 숨 가쁘게 헐떡이고 있는 심장이 미친 듯이 울부짖었다.

"그 좌절감 어린 표정. 정말 좋군요. 약속하지요. 당신의 목을 잘라 제 저택의 벽을 장식하겠습니다. 당신은 죽지만 당신의 머리만은 영원히 남을 겁니다. 제 마음과 제 저택의 장식장에 말이죠. 쿠쿠쿠."

좌절이 엄습해왔다.

절망이 수렁처럼 온몸을 잠식해 들어갔다.

눈앞이 가물가물해 왔다.

사지의 힘이 모조리 빠져나가는 게 느껴졌다.

이제 마지막이라는 것을 실감할 수 있었다.

"쿠쿠쿠쿠쿠."

살렘의 웃음소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병규는 꿈틀꿈틀 사지를 비틀었다.

억울했다.

이대로 죽기는 너무 억울했다.

충혈된 그의 동공이 검게 내려앉은 밤하늘을 노려보고 있었다.

그렇게 비탄과 절망의 그림자가 병규의 전신에 드리운 순간이었다.

후두둑.

먹구름으로 가득 찬 하늘에서 비가 보슬보슬 내리기 시작했다.

빗방울은 삽시간에 굵어지더니 이내 소나기가 되었다.

쏴아아아아아아아!

소란스럽기 그지없는 빗소리.

그것은 부활의 때를 알리는 화려한 신호탄이었다.

"쿠후후. 정말로 시원한 비로군요. 마치 당신의 마지막을 아쉬워하는 것 같습니다. 쿠쿠쿠쿠."

살렘은 비가 쏟아지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미친 듯이 웃어 재꼈다. 그의 음성에 자만심이 진득하게 배어 있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잠깐이었다.

곧이어 들려온 거북한 소음에 그는 입을 꾹 닫아야 했다.

뚜두둑.

우둑.

뼈마디가 서로 어긋나는 듯한 시끄러운 소리. 살렘은 고개를 갸웃하며 신형을 돌렸다.

"흡!"

그의 눈동자가 찢어질 듯 부릅떠졌다.

장대비가 쏟아지는 어둠속.

줄 끊어진 인형처럼 늘어져 있던 병규가 스르르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폭포수처럼 쏟아지는 빗속에서 다 죽어가던 그의 몸뚱이가 놀라운 변화를 일으키고 있었다.

좌우로 벌려져 있던 그의 갈비뼈가 으드득 소음을 토하며 다시 들러붙고, 뜯어진 힘줄이 무언가의 촉수처럼 흐느적거리며 본래의 자리로 기어들어갔다. 찢겨져 나간 살 조각들은 엿가락처럼 늘어지며 이글이글 타오르는 열기와 함께 재생되었다.

무엇보다 충격적인 것은 축축한 모래 위를 달팽이처럼 슬슬 기면서 병규의 어깨에 들러붙는 팔이었다.

이것은 살렘이 보여준 악몽과 같은 재생의 순간과는 확연히 틀린 것이었다.

살렘의 재생이 꿈처럼 모호한 것이라면, 병규의 그것은 지독할 정도로 현실적이었다.

살렘은 좀 전에 병규가 그랬듯 멍한 눈으로 그의 놀라운 재생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수통에 든 것······ 마법의 물약이 아니었군요. 그저······ 보통의 물이었군요."

홀린 듯한 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지금 그가 느낀 충격은 병규가 느낀 충격, 그 이상이었다.

찌그그극.

불쾌한 소음과 함께 마침내 지루한 재생과정이 끝났다.

비스듬히 모을 일으킨 병규는 놀란 얼굴의 살렘을 향해 빙긋 웃음을 보였다.

무섭게도 차가운 냉기가 흐르는 미소였다.

"어둠이 너의 시간이라고 했던가?"

조용히 들려오는 병규의 목소리가 그렇게 음침하게 느껴질 수 없었다.

"이제부터는 바로 나의 시간이다."

쏟아지는 빗속에서 그의 두 눈이 광기로 번뜩이고 있었다.

"헉!"

병규의 전신에서 밀려나오는 그 압도적인 광기와 공포의 기운에 살렘은 거친 숨을 몰아쉬었다.

변했다.

모든 것이 변해버렸다.

비를 맞은 후의 병규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버렸다.

마주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덜컥 무너질 정도로 두렵다. 아니 감히 시선을 마주칠 수조차 없었다.

"흐, 흐흐흐."

엉성한 웃음을 흘리던 살렘은 돌연 검을 날렸다.

급습이었다.

무지막지하게 변한 병규의 기운에 겁을 먹고 선수를 날린 것이다. 그만큼 병규에게서 풍겨오는 기운은 위험한 냄새를 함껏 머금고 있었다.

찍!

날카로운 소음과 함께 날아든 검은 무시무시한 예기를 품고 있었다.

병규는 피하지 않았다.

태연하게 손을 쓱하고 내밀더니 아이들의 손에서 장난감 칼을 빼듯이 살렘의 검을 뺏어 들었다.

"허억."

살렘은 헛바람을 삼켰다.

검을 빼앗기다니. 그것도 이렇게 허무하게. 

꿈에서도 상상치 못한 괴변이다.

그런데 막상 그런 기적과 같은 일을 일으킨 병규는 심드렁한 표정이었다.

실증난 장난감을 버리듯 휙 하고 검을 뒤로 던져버렸다.

그리곤 섬뜩한 광기를 머금은 눈으로 살렘을 위아래로 쭉 훑었다. 물건의 가치를 평가하는 듯한 눈초리였다.

"불사력인가?"

두 눈을 좁히며 살렘을 탐욕스럽게 바라보던 그의 얼굴이 다음순간 흉하게 찡그러졌다.

"아니군. 저열한 꼭두각시로군."

실망스런 감정이 덕지덕지 묻어 있는 음성이었다.

덜덜덜.

살렘은 어깨를 떨었다.

모든 것을 꿰뚫어 보고 있는 듯한 그의 시선에 머릿속이 휭 하니 비어 버렸따.

턱이 딱딱거리며 부딪히고, 손발은 간질 들린 듯 부들부들 떨렸다.

병규에게서 불어오는 이 막막한 기운.

공포, 바로 압도적인 암흑의 공포였다.

그리고 그것은 절대적으로 잊고 싶었던 추악한 어둠의 제왕.

칠흑의 공포로 군린하던 마수들의 지배자.

떠올리기도 싫은 절대자의 것이었다.

완벽한 악의 화신 앞에서 살렘의 할 수 있는 일은 몸을 부들부들 떠는 일, 하나뿐이었다.

하지만 병규는 더 이상 살렘에게 있어서 호기심을 잃어버렸다.

시시해졌다고나 할까.

왜 지금까지 이런 하찮은 존재에게 그토록 신경을 썼는지 의아한 생각이 들 정도였다.

갑자기 짜증이 일었다.

"쓸모없는 녀석."

살렘의 어깨를 잡고 신경질 적으로 휘둘렀다.

부욱 하는 소음과 함께 살렘의 몸뚱이가 종이인형처럼 찢어졌다. 반 토막난 몸뚱이 사이로 피와 내장이 후두둑 쏟아졌다.

"썩은 내가 진동하는군."

인상을 찌푸린 병규는 먼지를 털 듯 손을 휘둘렀다.

막대한 기운이 번뜩 하고 일어나 핏물과 내장 찌꺼기들을 저 멀리로 퉁겨냈다.

간단하게 살렘을 처리한 그는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서편 저 너머, 심상찮은 기세가 느껴졌다.

둘 다 익숙한 기운이었다.

"글로리 후작님과 필립 공작이군. 그래 필립 공작. 녀석에게도 빚이 있었지."

사요한 웃음을 지은 병규는 뒷짐을 진 채 느긋한 걸음으로 트라우마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파편에 불과한 살렘의 몸뚱이가 꾸물럭꾸물럭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는 눈길 하나 주지 않았다.

"아, 알려야."

병규긔 그림자가 살아지자 살렘은 걸쭉한 죽처럼 녹아내린 몸을 이끌며 어딘가로 이동했다.

"그, 그 분이 돌아오셨다. 추악한 어둠, 질시, 반목, 공포, 저주, 절망, 모든 어둡고, 더럽고, 추악한 자들의 왕. 벨로로폰 님이······."

그는 질척이는 육신을 흐느적거리며 절망 어린 탄식을 흘렸다.

살렘을 버려두고 걸음을 옮기는 병규는 기분이 좋았다.

저도 모르게 콧노래를 흥얼거렷다.

왜 이렇게 기분이 좋은가 생각해봤지만 딱히 이유를 찾을 순 없었다.

그냥 자신의 모든 것이 변한 것 같았다.

비가 내리기 전, 그는 잠시 숨이 끊겼었다.

그 깊은 어둠속에서 많은 것을 보았다.

아니 많은 것을 보았던 것 같다.

정작 비로 인해 신체가 완전히 재생된 지금은 그때의 기억이 아무것도 떠오르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기억은 없어도 느낄 수는 있었다.

죽음이라는 어둠 저편에서 그가 보았던 것.

그것은 잃어버린 능력이었다.

아니 잊고 있었던 감각이라고나 할까.

말로 설명할 수는 없는 거대한 존재감.

어둠이 자신 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래서 받아들였다. 그리고 깨달았다. 자신이 보통 사람과 무엇이 다른지를. 

그는 근본적으로 인간과는 달랐던 것이다.

그걸 깨닫고 인정하게 되니 기분이 좋아졌다.

물론 그렇다고 그의 모든 것이 변한 것은 아니었다.

여전히 남아 잇는 인성이 마음속의 어둠과 대치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검게 물들이고 싶은 욕망이 들끓었지만 선술을 익히며 쌓인 선도가 폭주하려는 이성을 부드럽게 감싸주고 있었다.

인성과 마성이 절묘한 균형을 이루고 있는 지금의 이 긴장감. 

그것이 병규를 묘하게 들뜨게 만들었다.

천천히 걸었다 싶었는데, 어느새 트라우마가 보이는 전장의 한복판에 도착해 있었다.

소강상태를 이루고, 전장은 한마디로 난장판이었다.

사방에 시신들이 넘쳐나고 비명소리와 지친 외침, 피곤에 찌든 고함소리가 무겁게 가라앉은 밤공기를 쩌렁쩌렁 울리고 있었다.

"흐음."

병규는 복잡한 심정으로 손가락으로 코밑을 훔쳤다.

귀를 아득하게 만드는 비명소리, 코끝을 찔러오는 피 냄새, 아수라장이 된 전장, 그런 처참한 풍경 속에 간간이 들려오는 만세소리.

모든 것이 마음에 들었다.

그래서 오히려 기분이 엉클어졌다.

원래 그는 이런 것을 싫어했다. 잔혹하고 비참한 광경이 마음이 들다니.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마음속의 경고 등에 불이 들어온 것 같은 느낌이다.

그는 족므 가라앉은 심정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따.

소강상태인 것처럼 보이던 전장의 풍경은 사실 전쟁의 끝이었다.

한쪽이 승리하고 나머지 한쪽이 패배한 것이다.

전장의 복잡한 상황과 함성, 비명 등이 어우러진 기이한 분위기는 바로 그것 때문이었다.

다행스럽게도 전쟁의 여신은 트라우마의 손을 들어주었다.

곳곳에서 붉은 병사들이 트라우마의 병사들에게 무장해제를 당하는 모습이 보였다.

"좋군."

기분 좋게 웃는 병규는 지나가는 귀족을 불러 글로리 후작의 위치를 물었다. 귀족은 병규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향기에 감히 고개도 들지 못한 채 더듬더듬 묻는 말에 대답했다.

"그, 그 분은 저택에······."

병규는 벌벌 떠는 귀족을 놔주곤, 즉시 발길을 후작의 저택으로 돌렸다.

후작의 저택엔 경비가 삼엄했다.

하지만 병규를 본 병사들은 즉시 길을 비켜주었다.

트라우마의 영웅인 병규의 명성은 일개 병사들에게도 널리 퍼져있는 상황이었다.

"이겼습니다. 흑기사님."

"모두가 흑기사님의 활약 때문입니다."

병사들은 들뜬 목소리로 병규에게 말했다.

"그래. 이겼군."

병규는 피식 웃고는 저택 안으로 들어갔다.

후작은 서재에서 치료를 받고 있었다.

생각한 것보다 부상의 정도가 심했다.

오른쪽 허벅지에 피로 물든 붕대를 감고 있었고, 뺨에도 길게 자상을 입었다. 그리고 그의 왼팔이 있어야 할 곳엔 빈 소매가 덜렁거리고 있었다.

"과연 필립 공작은 인간이 아니더군."

병규를 본 그로리 후작은 피곤한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다른 생각에 정신이 팔려 있는 듯 그는 병규의 기세가 변한 것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글로리 후작의 말이 이어졌다.

"그는 죽지 않았네. 이 검이 놈의 심장을 관통했는데도 말일세."

필립 공작과 글로리 후작의 대결은 치열했다.

그들의 검에서 뻗어 나온 기운으로 인해 사방이 페허로 변해버렸을 지경이었다.

한 치 앞도 대다볼 수 없는 치열한 혈전.

하지만 역사에 드문 명승부도 끝내 승부는 가려졌다.

마지막 순간, 글로리 후작은 자신의 왼팔을 희생하며 필립 공작의 심장에 검을 박았다.

그런데 죽지 않았다.

필립 공작ㅇ느 죽을 것처럼 비명을 지르고 미친 듯이 발악을 했지만 끝내 죽지 않고 벌레처럼 꿈틀거렸다.

"대가 당황하는 사이 반란군의 마법사가 그를 텔레포트 시켰네. 아마도 수도 유리스로 간 것이겠지."

"죽지 않았다더라."

건성으로 듣던 병규의 두 눈에 반짝 생기가 돌았다.

심장을 관통당하고도 죽지 않은 것이 분명 특이한 능력이다. 그것이 병규 안의 검음 어둠을 자극시켰다.

문뜩 생각난 병규가 글로리 후작에게 물었다.

"아! 호랭이는 어디있죠? 계획대로 움직인 것인가요?"

글로리 후작은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일세. 수도 유리스에 중독되어 잇을 귀족들을 치료하기 위해 드래곤나이트들과 북으로 날아갔지. 아마 지금쯤은 거의 도착했을 듯싶군."

"그렇군요."

병규가 빙그레 웃었다.

뭔가를 감춘 듯한 그런 미소였다.

후작의 방을 나선 병규는 이번엔 지하 작업실로 향했다.

작업실 문 앞에서 그는 우선 가벼운 심호흡으로 안개처럼 스며 나오는 어둠의 기운을 자신의 깊은 곳으로 갈무리했다.

마법사는 민감한 존재다.

어쩌면 자신의 이질적인 기운을 눈치 챌지도 모른다. 

삐그덕 거리는 문을 열고 들어가자 필라이트가 지친 표정으로 그를 맞았다.

"어서 오거라. 고생 많았구나. 네가 백고를 잘 사용해 준 덕분에 어려운 전쟁에서 이길 수 있었구다. 장하구나."

"과한 칭찬입니다. 그나저나 제가 할아버지를 찾은 이유는 한 가지 부탁을 하기 위해서입니다."

"부탁?"

의문 어린 필라이트의 물음에 병규는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네. 절 수도 유리스로 텔레포트 시켜 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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