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68/102)

아이린 왕국의 소드마스터들

슈우우우우~ 펑!

바란군의 진영에서 화려하게 솟구친 불꽃이 검은 밤하늘에 색색의 화려한 꽃잎을 뿌려대었다.

펑펑!

파바바바바방!

뚜두둥!

아름답게 산화하는 폭죽을 올려다보던 병규가 혼잣말로 중얼거렸다.

"좋아. 이젠 이곳을 빠져나가기만 하면 되겠군."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그는 폭죽을 올려다보며 여전히 걸음을 옮기지 못했다.

폭죽을 보니 불현듯 지구가 떠올랐던 것이다.

어쩌다 이런 낯선 세상에 떨어져 처참한 전쟁에까지 말려들게 되었는지.

"그래도 넌 참 아름답구나. 지구에서나 이곳 이드라센에서나."

지옥과 같은 전장의 한복판에서 터지는 여러 빛깔의 폭죽은 처연한 마음이 들 정도로 아름다웠다.

물론 이 마법의 폭죽을 터트린 자는 바로 병규였다.

그는 반란군 진영에 있는 대부분의 귀족들에게 백고를 뿌린 후였고, 그 신호로 이 마법의 폭죽을 쏘아 올려 터트린 것이다.

이제는 고독에서 해방된 귀족들이 필립 공작에게 저항하길 바라며 필립 공작과 전면전을 치르고 있는 글로리 후작을 도와줘야 할 때다.

"꽤 소란스러워졌군."

병규는 전장의 소음이 파도처럼 일고 있는 곳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비명, 아우성, 고함소리, 창과 칼이 맞부딪치는 살 떨리는 소음.

그리고 피부를 스치는 쩌릿한 긴장감.

막바지로 이른 전쟁의 살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고, 또 살벌했다.

병규는 그를 기다리고 있는 전장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불과 몇 걸음 옮기지 않아 그는 걸음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칼같이 버려진 살기의 그물이 그의 발목을 잡아 붙들었기 때문이다. 그 예리한 예기는 병규의 손가락 하나, 머리털 하나까지 올올이 구속하였다.

"음."

병규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왓다. 그의 표정은 이미 딱딱하게 굳어있었다.

"쿠쿠쿠."

익숙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이제 대충 볼일이 끝나신 것 같군요."

스산하게 찾아오는 사신처럼, 어둠속에서 조용히 걸어 나온 살기의 주인.

그는 바로 살렘 후작이었다

갑자기 밤공기가 급속하게 냉각되었다.

어둠속에서 가늘게 여민 살렘의 눈자위가 번뜩이고 있었다.

‘기다리고 있었군.’

  병규는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살렘은 일찌감치 그를 감지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곤 몰래 숨은 채 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았을 것이다.

‘언제부터 따라붙은 것일까.’

어쩌면 반란군의 막사에 잠입한 순간부터일는지도 모른다.

부엌을 돌아다니는 쥐를 지켜보는 고양이처럼 어둠속에서 느긋하게 그의 행동을 지켜본 것이다.

한 가지 이상한 것은 그의 작업을 왜 방해하지 않았느냐는 것이었다.

"왜지?"

병규가 조용히 물었다.

밑도 끝도 없는 질문이었지만, 살렘은 마치 영혼을 나눈 연인처럼 병규의 질문을 이해할 수 있었다.

"바쁘신 것 같아서 말이죠. 쿠쿠. 끝날 때까지 기다리고 있었습죠."

"예의가 이렇게 바른 줄은 미처 몰랐군."

병규는 피식하고 실없는 웃음을 흘렸다.

"쿠쿠. 전 당신이 모르는 많은 매력을 가지고 있답니다."

"그런 것 같군."

"오~ 그렇게 실망하실 건 없습니다. 지금부터 차근차근 알아가는 것도 나쁘진 않으니까요."

예의 바른 말과는 달리 살렘은 혀로 입술을 핥으며 살기를 차근차근 축적해가고 있었다. 그의 입장에선 정말로 오랫동안 기다린 만찬을 마침내 즐길 시간인 것이다. 

짜릿한 전율과 벅찬 희열로 머릿속이 하얗게 탈색될 지경이었다.

"이곳에서 할 텐가?"

지그시 살렘을 노려보고 있던 병규가 두 팔을 펼치며 물었다.

"쿠쿠. 여긴 너무 소란스럽군요. 자리를 옮기시는 것이 좋을 것같습니다."

"그러지."

반란군의 군영지를 벗어난 두 사람은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예전의 ‘붉은 바디’ 를 찾았다.

넓게 펼쳐진 붉은 색의 모래사장.

이곳에서 두 사람은 처절한 격전을 벌였다. 그리고 병규는 뼈아픈 패배를 맛보아야 했다.

"날이 어둡군."

하늘을 뒤덮은 먹장구름이 더 짙어져 있었다.

이제는 구름 사이로 새어 나오는 달빛도 느낄 수 없었다.

마치 두 사람의 암울한 대결을 암시하는 것만 같았다.

코끝조차 보이지 않는 짙은 어둠이 장막처럼 사위를 뒤덮고 있었다. 하지만 마주 보고 서 있는 두 사람에게 어둠은 별다른 장애가 되지 않았다.

상대에게서 풍기는 예리한 기세, 발소리, 바람에 팔락이는 옷자락 소음, 독특한 체취가 느껴지는 숨소리, 땀 냄새······.

그 모든 정보가 상대의 위치와 움직임을 그린 듯이 상세하게 전해주고 있었다.

"좋근요. 이 밤의 향기는."

살렘은 눈을 꾹 감은 채 두 팔을 좌우로 펼쳤다. 마치 짙게 드리워진 밤의 냄새에 취한 듯한 광경이었다.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다."

병규가 그의 사색을 방해하며 질문을 던졌다."

무엇이 그리 궁금하신지요. 시간이 얼마 없습니다. 빨리 물어보시길."

"넌 내가 무슨 작업을 하는지 알고 있었나?"

"아! 귀족들에게 뿌리던 하얀 것 말인가요? 글쎄요. 잘은 모르지만 추측은 할 수 있을 것 같군요."

"알면서 왜 방해하지 않은 거지?"

"그 편이 더 재미있어질 것 같아서요. 쿠후후."

살렘의 진득한 웃음소리에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번의 질문으로 병규는 살렘이 결코 필립 공작에게 협조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놈은 다만 즐기고 있는 것 뿐이다.

이 전쟁을, 그리고 전장에 뿌려지는 피를. 

방관자의 입자에서 탐욕스럽게 지켜보고 있는 것이다.

"악취미를 가지고 있군."

"그런 말을 가끔 듣긴 합니다. 쿠쿠, 그럴 때마다 이렇게 대답하곤 합니다."

"어떻게?"

"전 아주 즐겁게 즐기고 있답니다. 당신의 흥분과 기쁨을 공유할 수 있어서 저 또한 매우 들떠있지요. 이렇게 말입지요."

살렘의 답변에 병규는 어이가 없었다.

"방금 전의 말은 취소해야겠어. 넌 취미가 이상한 게 아니야. 단순한 변태였던 거지."

"후후. 칭찬으로 여기겠습니다. 그런데······ 바람난 주부들처럼 게속 수다만 떠시렵니까?"

"······ 물론 아니지."

말과 함께 병규는 두 팔을 좌우로 펼쳐 보였다.

손끝으로 요사스런 기운이 갈퀴처럼 솟구쳐 나왔다.

그 광폭한 기운. 모든 것을 산산조각 낼 것 같은 사요한 예기.

살렘은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그리곤 한 팔을 허리에 두르며 우아하게 허리를 숙였다.

마치 오랫동안 헤어졌던 연인과 재히라도 한 듯.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황홀한 나의 원수여."

칙칙한 살기가 연기처럼 스멀스멀 피어올랐다.

"폭죽이라니. 대체 어떤 미친 녀석이······."

반란군의 진영 한복판에서 요란하게 펼쳐진 불꽃을 보며 필립 공작은 얼굴을 일그러트렸다.

상황이 점점 심각해지는 상황에서 축제 때나 사용되는 불꽃을 터트리다니.

그는 그 불꽃을 병규가 쏘아 올렸을 거라고는 꿈에도 생각지 못했다. 만약 알았다면 너무 열이 받은 나머지 졸도를 했을지도 모른다.

‘불길하군.’

비록 폭죽이 누구의 소행인지는 전혀 눈치 채지 못하긴 했지만, 뭔가 일이 좋지 않은 방향으로 진행되고 있다는 것만은 얼렴풋이 짐작할 수 있었다.

실제로 그 징후가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었다.

병력들이 제대로 통제가 안 되었다.

무슨 이유에서인지 그가 지시한 명령들이 병사들에게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있었다. 일부의 병사들은 무단으로 전장에서 이탈하는 상황까지 벌어지고 있었던 것이다.

조밀한 진형이 어지럽게 흐트러지고 있었다.

문제는 그러한 문제가 한두 군데에서 보이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일일이 열거할 수 없는 많은 곳에서 심상찮은 기운이 감지되었다.

필립 공작은 즉시 지휘관들을 호출하였다.

"뭣이? 거부?"

그의 면상이 다시 한 번 추악하게 찡그러졌다.

부관이 전해온 답변 때문이었다.

몇몇 귀족들이 그의 호출에 거부 의사를 표해 온 것이다.

아니 몇 명 정도가 아니었다. 상당한 수의 귀족들이 돌연 그의 의견에 분명한 거부를 표하고 나선 것이다.

현재 그의 명을 듣고 달려온 수는 전체의 절반도 되지 않았다.

특히 요직을 맡고 있는 중요 장수들이 대거 그의 소집 명령을 거부한 것이다.

필립 공작의 이맛살이 잘게 찌푸려졌다.

불현듯 피어오르는 불길한 예감.

드래곤나이트들과 글로리 후작이 보인 일련의 이해할 수 없는 도발들이 이 사건과 관련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불길한 생각이 스친 것이다.

그때, 불길한 예감에 쐐기를 박듯, 트라우마에서 마법으로 확대된 레종 공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여러분. 저 레종입니다. 레종 공주입니다. 반란군의 지휘관들께 알려드립니다."

그녀의 음성은 희망과 불안으로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여러분.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속고 있었어요. 필립 공작은 추악한 방법으로 여러분들의 마음을 이용했습니다. 아마 지금쯤은 다들 정신을 차리셨을 겁니다. 지금 상황이 굉장히 혼란스럽게 여겨지리라는 걸 압니다. 

하지만 마음을 바로 하십시오. 지금까지의 모든 일을 묻어두겠어요. 여러분에겐 죄가 없어요. 필립 공작에게 이용당한 것뿐입니다. 이제 정신을 차리세요. 여러분은 지금 누구와 싸우고 있는 건가요. 왜······ 왜······ 같은 민족끼리 미워하고 전쟁을 해야 하는 거죠? 왜······ 어째서!"

흐느끼는 레종 공주의 음성이 이어졌다.

비명과 잔혹한 치찰음으로 소란스럽던 전장은 어느새 숙연한 분위기로 잦아들었다.

병사들은 지금 상황이 이해되지 않는 듯 상관의 눈치만 보고, 귀족들 중 일부는 눈을 감고 있었고, 일부는 고민 가득한 얼굴로 마른 침을 삼켰다.

다시 레종 공주의 음성이 들려왔다.

"돌아오세요. 우리의······ 우리의 품으로. 아이린 왕국의 적은 결코 여러분이 아닙니다. 우리의 적은 간악한 수단으로 사람의 마음을 우롱한 필립 공작이고, 필립 공작에게 힘을 빌려준 바호크 공국입니다. 돌아오세요. 그래서······ 함께 이겨내요. 우리의 국토를, 그리고 우리의 왕국을! 지켜야 해요. 천년 역사의 왕국의 미래를 위해. 그러니······ 그러니······ 돌아와 줘요. 제발······."

그녀의 간절한 호소는 전장 곳곳으로 파고 들었다.

그때 작은 움직임이 있었다.

귀족 중 한 명이 눈물을 뿌리며 터덜터덜 걸어 나갔다.

"나 아론. 이제야 정신을 차렸소. 비록 제정신이 아니었다 해도 감히 왕실에 칼을 겨눈 죄 백 번 죽어 마땅하오. 하지만 그냥은 죽을 수 없소. 죽는 순간까지 아이린 왕국과 왕실을 위해 이 한 목숨 던지겠소. 그것이야말로 내 가슴에 남은 앙금을 지울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오."

아론 후작은 궁병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그가 트라우마에 투항할 뜻을 보이자 휘하 장교들과 병사들은 어찌할 바를 모르고 어리둥절해 했다. 왜 갑자기 자신의 상관이 필립 공작을 버리고 레종 공주를 택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그런데 그런 귀족들이 더 있었다. 상당한 귀족들이 반란군에 반기를 들고 트라우마로 투항할 뜻을 밝혔다.

호랭이가 만들고 병규가 뿌린 백고의 효과가 드디어 발휘된 것이다.

각처에서 귀족들이 아이린 왕국과 레종 공주를 부르짖으며 자신의 영지 내에서 차출한 병력들을 이끌고 트라우마 방향으로 이동하자 필립 공작은 극도로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가, 감히. 이런 행동이 용납될 거라고 생각들 하였는가!!"

분노를 터트린 필립 공작은 고함을 치며 검을 뽑아 올렸다. 눈이 시릴 듯한 백광이 캄캄한 어둠을 찢어 발겼다.

이대로 두면 전세는 급격히 기운다.

어떤 방법인지는 몰라도 레종 공주는 고독에 중독된 자들을 치료한 것이다.

이것은 고독을 이용해 귀족들을 부리고 있던 필립 공작에게 크나큰 타격이었다.

이번 내전에 그가 동원한 병력들은 대부분 귀족들이 따로 양성하고 있던 사병들을 끌어 모은 것이다. 그런데 고독에 중독되어 무작정 그의 말을 따르던 귀족들이 정신을 차렸다. 그리곤 울고 불며 트라우마로 투항했다.

당연히 귀족을 따라온 병사들도 영주를 따라 엉거주춤 전선을 이탈하게 되는 것이다.

이것은 즉 반란군의 병력이 트라우마로 대거 투항한다는 것과 같았다.

"내가 너무 방심한 모양이군."

뒤통수를 호되게 맞은 셈이다.

한 번 기운 전세를 다시 회복시키는 것은 불가능하다. 기울기 전에 기선을 제압해야 한다.

"날 적대시한 자의 말로가 어떠한 것인지 모두 똑똑히 지켜보라!"

노호성을 터트린 그는 반기를 든 귀족들에게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들었다.

잔혹하고 철저하게 응징하여, 아직 행동을 결정하지 못한 귀족들에게 확실한 전례를 만들어 놓을 생각이었다.

하지만 그의 생각을 눈치 챈 글로리 후작의 발빠른 대응을 보였다. 즉시 진형을 변화시키며 투항하는 귀족과 병사들을 보호했고, 마법사와 궁병들로 하여금 반란군의 병사들을 견제토록 했다.

"마법사들, 앞으로."

글로리 후작의 호령에 따라 여태 부대의 후방에 숨어 있던 마법사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짙은 로브를 얼굴에 뒤집어쓴 마법사들은 이미 만전의 준비를 갖추고 있었다.

마법사들을 지휘하고 있는 올센이 지팡이를 흔들며 장엄한 마법을 쏟아냈다.

"반란군에게 죽음의 철퇴를! 클라우드킬!"

맹렬한 바람과 함께 불길한 검은 구름이 안개처럼 낮게 깔렸다.

클라우드킬(Cloudkill).

생명체를 질식시켜 죽이는 죽음의 구름. 6서클 마스터인 올센이 구사한 이 죽음의 구름은 지독한 산을 품고 있었다. 멋모르고 먹구름 안으로 뛰어든 반란군 측 병사들은 이내 전신의 살갗이 녹아내리는 끔찍한 광경을 자신의 두 눈으로 지켜봐야만 했다.

"크아아아악."

"내 살. 노, 녹아."

"살려줘. 제발~!"

처절한 비명과 함께 선두의 병사들이 비누처럼 녹아내렸다.

끔찍한 장면이었다.

하지만 비극은 이제 겨우 시작에 불과했다. 올센을 선두로 마탑의 마법사들이 하나 둘, 지옥을 그대로 끌어다 놓은 듯한 가공할 만한 마법들을 쏟아내기 시작한 것이다.

전력을 기울인 마법사들의 마법난사에 반란군은 혼비백산하여 감히 투항하는 배신자들을 처리할 엄두도 내지 못했다.

"겁먹을 필요 없다. 병력으론 상대도 되지 않는다. 엘프들의 팔다리를 끊어내고, 적장의 머리를 베어 오라!"

필립 공작이 힘차게 외치자 한순간 주춤하던 병사들이 일제히 용기를 얻고 죽을 듯한 기세로 달려나갔다.

꽤 많은 수의 병력이 투항했지만, 아직도 반란군에 남아 있는 병력이 많았다.

그런 숫적인 우세가 반란군 병사들에게 힘을 실어 주었다.

글로리 후작은 과감히 마법사들을 물렸다.

이 정도까지 쌍방의 간격이 근접한 상황에서는 마법은 아군을 상하게 할 우려가 있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는 백병전을 치뤄야 하는 것이다.

그의 표정은 암울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볼 만하다는 의기로 충만해 있었다.

전쟁초기, 전혀 상대도 안 되던 병력차였다.

그런데 지금은 다르다.

공성전을 치르는 동안 반란군은 많은 희생을 치뤘고, 또 오늘 호랭이와 병규의 활약으로 상당한 수의 귀족이 휘하의 사병들을 이끌고 투항했다.

대강 추스른 반란군과 트라우마 군의 병력상황은 아직 반란군이 우세.

하지만 이 정도면 해볼 만하다.

아니 병력의 질적인 면을 따지자면 백중지세라 할만 했다.

반란군에는 없는 마법사와 엘프 궁병이 이쪽엔 있었다.

글로리 후작은 타는 듯한 시선으로 보병들을 돌아보았다.

긴 공성전 동안 그는 단 한 번도 보병들을 동원하지 않았다. 이제 드디어 비축해두었던 그들의 전력을 마음껏 활용할 때다.

"전군. 돌격!"

글로리 후작은 검을 높게 빼어들며 그 스스로가 병사들의 선두에 선 채 전군을 진두지휘했다.

병사들의 사기는 높았다.

그들은 검은 드래곤나이트들의 용맹과 글로리 후작의 지략을 칭송하며 창과 검을 들고 반란군의 진영으로 뛰어들었다.

그들 대부분은 오랜 기간 척박한 붉은 대지에서 몬스터들을 상대로 실력을 갈고닦은 자들로 싸움에 있어서 베테랑들이었다. 지휘관의 호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창을 찌르고 방패를 두르고 검을 휘둘렀다.

두려운 것은 없었다.

엘프들의 화살이 그들을 비호하고, 마법사들의 마법이 적들을 산산조각 냈다. 그리고 왕실이라는 명분이 그들에겐 있었다.

무엇을 겁내랴.

오로지 전진하고 또 전진할 뿐이었다.

그런 보병들의 선두엔 무시무시한 원군이 있었다.

머리가 두 개나 달린 거대한.

그어어어어어어!

곰팅이가 하늘을 올려다보며 괴성을 지르자 물밀듯이 밀려들던 반란군들의 움직임이 동시에 멈춰졌다.

높다.

곰팅이의 얼굴을 보려면 한참이나 고개를 들어 올려야 했다. 팔은 또 얼마나 굵은지 장정 서넛을 한데 묶어서 둘둘 말아놓은 것 같다.

병사들의 얼굴이 다들 하얗게 질려버렸다.

"히, 히익."

"괴물이다!"

누군가의 괴성이 튀어나오자마자 반란군의 보병들은 죽어라 뒤로 도망쳤다. 지휘관 중 그 누구도 저런 괴물과 싸워야 한다는 말을 미리 해 주지 않았다.

그들의 임무는 어디까지나 트라우마의 병사들을 상대하는 것이다.

절대로 지옥에서 막 기어나온 것 같은 흉악한 몬스터와 쎄쎄쎄를 해야 할 의무는 없는 것이다.

크드드드드!

병사들이 메뚜기 떼처럼 사방으로 흩어지자 거대한 덩치를 자랑하는 트윈헤드 오우거, 일명 곰팅이는 기고만장하여 쿵쿵 지축을 울리며 적진에 뛰어들었다.

사전에 병규가 언질을 주었던 듯, 곰팅이는 사람들을 밟아 죽이거나 개미처럼 손가락으로 짓눌러 죽이거나 하는 잔인한 짓은 저지르지 않았다.

그저 병력이 모여 있는 곳을 먼지 털 듯 손바닥으로 슬슬 털어내는 정도였다.

하지만 그 정도로도 효과는 만점이었다.

아니 오히려 과하다 싶을 만큼의 효과가 나타났다.

곰팅이의 압도적인 전투력에 반란군뿐만 아니라 같은 편인 트라우마의 병사들가지 전의를 상실해 버렸으니 말이다.

곰팅이가 쿵쾅거리며 달려가는 곳에는 적아를 불문하고 사방으로 도망가느라 난리였다.

모두가 자신을 무시하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곰팅이는 포기하지 않았다.

아무리 썰렁한 상황이 닥치더라도 곰팅이는 충실하게 병규의 지시를 이행했다.

병규가 내린 명령은 간단했다.

빨간 옷을 입은 인간을 보면 따뜻하게 보듬어주고, 따스하게 감싸주고,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라고. 

그래서 곰팅이는 열심히 붉은 군복을 입은 반란군 사이를 누비며 아낌없는 애정을 쏟고 있었다.

너무 애정이 지나쳐서는 절대 안 된다는 병규의 말이 있었기에 힘 조절에 매우 신경을 썼다.

인간이란 너무도 약한 존재라 조금만 손에 힘을 줘도 빵! 하고 터져 버리니 말이다.

물론 그것은 어디까지나 곰팅이만의 생각이었다.

곰팅이의 애정 대상이 되는 병사들은 그 압도적인 힘으로 인해 기절할 지경이었다.

따뜻하게 보듬어주면 저 하늘의 별이 되고, 따스하게 감싸주며 허파꽈리가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다정하게 쓰다듬어주면 아예 땅 속에 파묻혀 버린다.

곰팅이가 쿵쿵 걸어올 때마다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달아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전장에서의 곰팅이는 그야말로 공포 그 자체였다.

곰팅이가 방긋(?) 웃으며 모습을 드러낼 때마다 병사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질러댔다.

하지만 사람들이 공포에 떨며 두려워함에도 곰팅이는 지치지도 않고 반란군들과 놀아주기 위해(?) 바쁘게 전장을 누볐다.

필립 공작의 눈두덩에 경련이 일었다.

사방이 비명소리로 가득했다.

이미 그의 병사들은 사기를 잃고 허둥대고 있었고, 엘프들과 마법사들의 비호를 받는 트라우마의 병사들은 뇌신의 번개와 같은 기세로 반란군을 도륙하고 있었다.

"이런 죽일 놈들을 보았나!"

분노한 필립 공작은 시리도록 푸른 검강을 끝없이 쏟아내며 트라우마 병사들을 도륙했다. 그의 압도적인 냉기 앞에선 그 누구도 상대가 되지 못했다.

화살을 귀신같이 다루는 엘프나 고 서클의 마법사나 매한가지로 동강동강 잘려져 붉은 대지 위에 널브러졌다.

그가 지나가는 곳은 길이 되었고, 쌓이는 시신은 동산을 이루고 흐르는 피는 내가 되었다.

피를 흠뻑 뒤집어쓴 그는 지옥에서 막 기어나온 야차와 같은 흉악한 모습으로 적을 베고 또 베었다.

하지만 결국 그도 적수를 만나게 되었다.

글로리 후작이 차분한 걸음으로 나타난 것이다.

머리를 산발한 채 피를 전신에 뒤집어쓴 필립 공작과는 달리 글로리 후작은 먼지 하나 묻지 않은 깔끔한 모습이었다.

"드디어 당신을 만났구려."

글로리 후작이 입가에 미소를 띄우며 말을 건넸다.

"그래. 마침내 만났구나."

필립 공작의 입 꼬리가 바르르 떨렸다.

분노와 증오가 한데 뒤섞여 있는 듯한 복잡한 표정이었다.

글로리 후작은 빙그레 웃었다. 그리곤 웃는 얼굴로 말없이 검을 빼들었다.

스르릉.

검이 검집을 빠져 나오는 소리가 섬뜩했다.

시큰한 검광이 눈을 찔러왔다.

필립 공작의 두 눈이 찌푸려졌다.

"글로리 후작. 자네가 과연 내 상대가 될까?"

"글쎄."

글로리 후작은 스스로에게 묻는 듯한 말투로 조용히 내뱉었다.

"자신은 없네. 하지만 적어도 인간 같지도 않은 살렘 같은 자보다는 당신이 낫겠지."

부드러운 미소로 말을 이어가던 글로리 후작은 문득 생각난 듯 관자놀이를 손가락으로 쿡쿡 짚었다.

"아! 잊었군. 사실 자네도 인간이 아니라고 했었지? 내 그 사실을 깜빡 잊었군."

으드득.

필립 공작은 이를 갈았다.

"병규······ 그 놈이군."

인간이 아니라는 말을 할 만한 자는 오직 병규, 그 하나뿐이다. 사실 지금까지 그의 비밀을 눈치 챈 자는 병규가 유일했다.

"놈!!"

병규를 떠올리자 냉정이 깨지고 분노가 홍수처럼 불어났다.

"그래. 놈을 쳐 죽이기 전에 자네를 찢어발기는 것도 나쁘진 않겠지."

그는 품에서 검은 알약 하나를 꺼냈다.

아주 예전 노인이 그에게 준 단약이다.

이것을 먹으면 순간적으로 몇 배나 강한 힘을 낼 수 있다. 그러나 부작용이 심해서 평소엔 사용하길 꺼려했다.

하지만 이젠 주저할 여유가 없어졌다.

한시바삐 글로리 후작을 쳐내고 기울어가는 전황을 바로잡아야 하는 것이다.

"지독한 맛이군."

단약을 입안에 털어 넣은 필립 공작은 인상을 잔뜩 찌푸렸다.

츠즈즈즈즈.

필립 공작의 검집이 검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당장이라도 눈보라가 몰아칠 듯한 사나운 기세였다.

"이거······ 생각보다 힘든 싸움이 되겠군."

글로리 후작은 혀를 끌끌 차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비스듬히 들고 있는 그의 검에는 은은한 광채가 일었다.

바야흐로 아이린 왕국이 자랑하는 두 명의 소드마스터가 격돌하는 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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