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67/102)

전장의 중심에서 폭죽을 터트리다

새벽은 깊어만 갔다.

밤을 환하게 밝혀주던 달과 별들은 서편에서 몰려온 먹구름에 가려져 사방은 캄캄한 암흑으로 뒤덮혔다.

꾸역꾸역 몰려든 어두운 하늘은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보였다.

마치 곧 있을 전쟁의 참혹함을 암시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드래곤나이트들에게 지시를 내린 병규는 모종의 임무를 위해 소리 없이 트라우마를 떠났다.

이번 작전은 보안이 생명이었다. 적뿐만 아니라 아군에게도 그의 움직임이 눈에 띄게 되면 곤란했다.

그래서 그는 성문이 아닌 성벽을 택했다. 성벽 위엔 귀가 밝은 엘프 궁병들이 대기하고 있었지만 한 줄기 바람처럼 움직이는 그를 발견할 순 없었다.

무사히 트라우마를 빠져나간 병규는 성 밖을 둥글게 감싸고 있는 반란군의 진영으로 은밀하게 숨어들었다.

드래곤나이트와 글로리 후작이 총출동하는 본격적인 작전은 30분 후에 시작될 것이다. 그 전에 그가 해야 할 일이 있었다.

반란군의 막사들엔 불이 대낮처럼 환하게 밝혀져 있었고, 외부로 목책이 두껍게 쳐져 있었다.

몬스터들의 습격을 막기 위한 장치들이었다.

내전 초반, 붉은 대지의 특성을 몰랐던 필립 공작은 밤만 되면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 때문에 적지 않은 피해를 보았다. 부랴부랴 목책을 만들고 다수의 병력을 야간 경계로 돌렸지만 그래도 피해는 여전했다.

그나마 최근에 들어서야 간신히 기본적인 방어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병규는 두 눈을 부릅뜨고 있는 병사들을 농락이라도 하듯, 비단에 물방울이 스며들 듯 반란군의 진영으로 스며들었다.

‘녀석들이 어디 있을려나.’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은 병규는 귀를 팔락이며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그가 찾던 소리가 들려왔다. 병규는 횃불의 음영이 드리워진 곳으로만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얼마 후 그는 와이번들이 모여 있는 우리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바호크의 회색 와이번들이었다.

처음 바호크를 출발한 회색 와이번의 수는 300기였다. 그러다 어제의 접전으로 80여기가 죽고 지금은 220기 정도가 남아 있었다.

전력이 3분의 1 정도가 희생되었지만 아직도 회색 와이번들의 수는 많았다.

전날의 전쟁으로 보았듯이 장소에 구애하지 않는 와이번의 광범위한 이동능력은 트라우마의 커다란 걸림돌이 될 것이 분명했다.

그래서 병규는 백고를 뿌리기에 앞서 먼저 이곳을 찾은 것이다.

와이번의 우리는 예상보다 감시가 상당했다.

커다랗게 지어진 목책 주위로 50여 명의 병사들이 삼엄한 눈빛을 빛내고 있었고, 타는 듯한 붉은 갑옷을 입은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도 5명이나 대기하고 있었다.

병사들을 소리 없이 처리하는 것은 쉬웠다. 하지만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은 사정이 달랐다.

그들은 최소 소드익스퍼트 초급의 실력자들이다.

평범한 사람들이 듣지 못하는 미미한 파공음을 들을 수 있고, 느닷없는 기습에도 상당히 강한 모습을 보인다.

만약 기사들이 그의 잠입을 눈치 채게 된다면 작전은 시작해 보기도 전에 실패로 돌아갈 것이다.

‘좋아. 한 번 해 보자.’

주먹을 꾹 움켜쥔 병규는 어둠의 음영을 따라 살금살금 접근했다. 일단 기사들을 먼저 처리해야 했다. 보병들의 처리는 나중의 일이다. 번개처럼 움직인다면 가능성은 있을 것이다.

그때 마침 기사들이 어슬렁거리는 걸음으로 자리를 옮겼다.

주고받는 대화로 미루어 보건대 야참을 먹으러 가는 모양이다.

병사들이 이렇게 많이 경비를 서고 있는데, 설마 무슨 일이 있겠느냐는 소리도 들렸다.

‘좋아.’

병슈는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사실 기사들이 나태한 모습을 보이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긴 공성전 많은 병력이 피해를 입었다고는 하나, 아직 이곳 주둔지엔 1만 5천의 병력이 남아 있었다.

어느 누가 용담호혈과 같은 이곳으로 침입할 수 있을까.

하지만 그런 태만한 마음자세가 돌이킬 수 없는 뼈아픈 실수로 남게 될 줄은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다.

조금 떨어진 천막 안으로 기사들의 모습이 사라지자 병규는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바람처럼 빠르고, 고요하게.

어둠속을 배회하는 죽음의 사신처럼 은밀한 움직임으로 병사들을 하나 둘 씩 쓰러트렸다.

병사들은 무슨 일인지도 파악하지도 못한 채 쓰러져 나갔다.

잠깐 사이 와이번 우리를 지키던 병사들 모두가 기절하고 말았다. 병사들을 제압한 병규는 잰걸음으로 와이번 우리로 뛰어들었다.

낯선 자가 우리로 들어오자 와이번들은 일제히 고개를 들어 올리며 그를 쳐다보았다.

"자. 너희들도 꼬실 수 있는지 한번 진지하게 대화를 해 보도록 하자."

어둠속에서 병규의 눈이 반짝였다.

병규가 적진에 진입하여 회색 와이번들에게 작업을 하고 있을 즈음, 트라우마에서도 검은 와이번들이 출정 준비에 한창 열을 올리고 있었다.

"다들 준비가 된 모양이군."

검은 기사들이 바쁘게 움직이고 있는 후원에 백발의 청년이 찾아 왔다. 홀랭이였다.

그는 평소와 달리 몸에 착 달라붙는 야행복 차림이었다. 이번 작전엔 그도 참가할 예정이었다.

"오셨군요."

시즌 남작이 정중하게 허리를 숙이며 그를 맞았다. 호랭이는 시즌을 잠시 쳐다보다 웃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병규가 미리 언질을 해 놓은 모양이군."

"오실 거라 했습니다."

부관인 시즌은 예를 다해 호랭이를 대했다.

사실 호랭이의 신분은 어정쩡했다.

귀족은 아니지만 공작인 필라이트와 친구이고, 트라우마의 영웅인 병규의 스승이기도 하다. 공주인 레종마저도 그에겐 말을 함부로 하지 못했다.

그래서 일부 귀족들은 그를 어떻게 대해야 할지 몰라 혼란스러워 했다. 하지만 블랙나이트들은 홀랭이가 병규의 스승이라는 이유만으로도 깍듯한 모습을 보였다.

"오늘 먼 곳까지 날아가야 하니 준비에 만전을 기해주게."

"심려 마십시오."

고개를 끄덕인 호랭이는 느긋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지나가자 엘프들이 고개를 숙였다.

엘프가 사람에게 고개를 숙이다니. 극히 이례적인 일이다.

엘프들은 겉모습으로 사람을 판단하지 않는다.

그들은 호랭이에게서 풍기는 기질을 느끼고 고개를 숙인 것이다.

자신들에 한없이 가까우면서도, 더 높은 차원의 품격을 가진 자.

저절로 고개가 숙여졌던 것이다.

대단히 묘한 분위기가 연출되었다.

기사들은 대장의 스승으로서 호랭이를 경배하고, 엘프들은 신을 대하듯 호랭이에게 찬사를 보냈다.

평민에 불과한 그가 왕족보다 더한 대우를 받고 있는 것이다.

놀라운 것은 호랭이의 태도였다.

어색하지도, 그렇다고 자만하지도 않았다.

그저 담담했다.

그는 이 요상한 분위기가 당연하다는 듯이 행동하고 있었다.

뚜벅뚜벅 걷는 호랭이는 병규가 즐겨 타는 와이번 앞에서 걸음을 멈추었다.

차분한 분위기의 아름다운 엘프 여성이 그를 맞았다.

카즈엘이었다.

"실레하게 되었군. 잘 부탁하네."

호랭이가 말하자 카즈엘은 치마의 좌우를 가볍게 들어올리며 부드럽게 웃었다.

"현자를 모시게 되어 영광입니다."

호랭이는 가타부타 아무 말도 없이 빙그레 웃더니 자연스런 동작으로 와이번에 올라탔다.

끄드드드드.

와이번이 머리를 쳐들며 불쾌하게 울었다.

호랭이가 타는 것이 불만인 듯했다.

평소 병규를 태우던 녀석이라 기질이 사나웠다.

"허. 이런 미물도 사람을 가리는군."

호랭이는 털털하게 웃었다.

그리곤 슬그머니 감춰놓았던 기운을 풀어놓았다.

거친 맹수의 광폭한 기운이 와이번에게 쏟아졌다.

끄응.

와이번은 이내 꼬리를 내렸다.

바닥에 고개를 내린 채 끙끙거렸다.

약자에게 강하고 강자에게 약한 것이 야수들의 세계다. 그런 법칙은 마수들 사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호랭이의 거칠고 광대한 기운을 와이번은 도저히 감당할 수 없었다.

"전원 탑승."

호랭이가 와이번을 압도하자 비로소 기사들은 각자 자신의 와이번에 올라탔다.

"좋아. 필립 공작에게 깜짝 선물을 보내줘야겠지?"

와이번의 목을 쓰다듬으며 호랭이는 장난스런 미소를 띄웠다.

"비상!"

시즌의 외침과 함께 드래곤나이트들과 엘프들을 태운 와이번들이 일제히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반란군을 발칵 뒤집어놓을 선물을 준비해야 할 시간이다.

철퍽!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음이 무거운 밤공기를 뒤흔들었다.

선잠이 들었던 필립 공작은 기묘한 소음에 벌떡 자리에서 일어났다.

"무슨 일인가!"

큰 목소리로 외치니 막사 밖을 지키던 병사가 후다닥 안으로 뛰어 들어왔다.

"뭔가가 하늘에서 떨어진 것 같습니다."

"뭣이?"

좋지 못한 예감을 받은 필립 공작은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밖으로 나갔다.

소음이 들렸던 곳으로 걸어가자 병사들이 모여 있는 것이 보였다.

"비켜라."

짜증스런 음성으로 말하자 홍해가 갈라지듯 병사들이 좌우로 나뉘어 길을 내 주었다.

병사들이 모여 있던 중심에 뭔가 푸른 덩어리가 보였다. 크기는 커다란 바윗덩어리만 했다.

천천히 접근하던 필립 공작은 코를 찔러오는 악취에 고개를 돌렸다. 심한 피비린내가 풍기고 있었다.

"대체 그게 뭔가?"

필립 공작이 묻자 푸른 덩어리를 살피고 있던 병사 한 명이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무래도······ 트롤 같습니다."

"트롤?"

필립 공작은 어이가 없었다.

저 묵사발로 엉겨 붙은 푸른 덩어리가 트롤이라니.

"트롤이 날개라도 달렸다는 것인가? 갑자기 하늘에서 떨어지게?"

"그······ 그것은 저도 잘······."

미적지근한 대답에 불쾌한 마음이 인 필립 공작은 휘적휘적 푸른 살덩이로 걸어갔다.

"트롤이······ 맞군."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거대한 살덩이는 흉측한 몰골의 트롤이었다. 다만 멀리서 확인할 수 없었던 것은 그만큼 트롤의 몰골이 엉망이었기 때문이다.

얼마나 높은 곳에서 떨어졌는지, 사지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할 정도로 박살이 나 있었다.

놀라운 것은 그렇게 처참하게 뭉개졌으면서도 여전히 살아있다는 것이었다. 비단 살아있을 뿐만이 아니라 부러진 뼈가 서서히 원형을 되찾고, 짓이겨진 삼절이 부글부글 끓으며 재생되고 있었다.

"지독한 마물이군."

필립 공작은 손수건을 코를 가리며 치를 떨었다.

"당장 이 더러운 괴물을 내다 버려라."

그가 막 부하들에게 지시를 내렸을 때였다.

철퍽!

다시 한 번 그 끔찍한 소음이 들려왔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이었다. 부산스럽던 병사들의 소음이 바닥으로 확 깔렸다.

이번엔 트롤도, 살덩이가 아니었다.

거대한 오우거였다.

놈은 고함을 지르기도 했고, 몰려든 병사들을 향해 육중한 팔을 휘두르기까지 했다.

크워어어어어어!

"아악."

"켁."

근처에 있던 병사 몇이 오우거의 서슬 퍼런 공격에 가랑잎처럼 뒹굴었다.

"하찮은 미물이 감히."

노호성을 터트린 필립 공작이 검을 빼들었다.

그의 검은 이드라센의 일반적인 검들과 달리 검폭이 매우 가늘고 좁았다.

천천히 걸음을 옮긴 그는 풍차처럼 휘두르는 오우거의 두 팔을 수월하게 피하며 안쪽으로 깊숙하게 파고들었다.

"가라."

검광이 좌에서 우로 좌르르 굴러갔다.

거칠게 움직이던 오우거의 움직임이 뚝 멈춰졌다. 그리곤 가슴의 미세한 선을 따라 상체가 쩌억 하고 뒤로 넘어갔다.

피는 쏟아지지 않았다.

깔끔하게 잘라져 절단된 부분에는 하얀 서리가 끼어 있었다.

스르릉.

자연스런 동작으로 검을 갈무리한 필립 공작은 잔뜩 일그러진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그렇게 된 것이었군."

별빛 하나 보이지 않는 캄캄한 하늘.

무언가가 무리를 이뤄 날고 있었다.

동굴 속을 배회하는 박쥐들처럼 을씨년스러운 기운을 풍기는 그것은 바로 트라우마의 드래곤나이트들이었다.

"망할 몸의 블랙나이트들! 끝끝내 나를 방해하는구나."

간신히 방책을 쳐서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을 막을 수 있게 되자, 저 망할 놈의 검은 드래곤나이트들이 이젠 직접 몬스터들을 공수해서 진영 한가운데 떨어트리고 있는 것이다.

철퍽! 철퍽! 꿍!

곳곳에서 묵직한 무언가가 떨어지는 소음이 들려왔다. 이제는 한 두 개가 아니라 사방에서 연속적으로 터져 나왔다.

그 이후엔 곧바로 광폭한 몬스터의 괴성과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울려 퍼졌다.

"부관, 네르갈 후작을 불러오라. 아니 그럴 것이 아니라 지금 즉시 부하들을 이끌고 저주받을 트라우마의 드래곤나이트들을 당장 격추하라고 전하라."

검의 손잡이를 만지작거리며 치를 떨던 필립 공작이 크게 외쳤다.

드래곤나이트를 상대하는 데엔 역시 같은 드래곤나이트들이 제격이었다.

명령을 받은 부관은 부리나케 바호크의 기사들이 쉬고 있는 막사로 달려갔다. 하지만 그는 채 몇 걸음 가기도 전에 걸음을 멈춰야 했다.

크롸롸롸롸롸!

키그그극!

기묘한 울음소리와 함께 와이번의 우리가 있는 곳에서 수백마리의 회색 와이번들이 일제히 하늘로 날아올랐던 것이다.

"바일 후작이 벌써 손을 썼단 말인가. 생각보다 잽싼 인물이군."

그는 블랙나이트들이 나타나자마자 출동한 회색 와이번들의 행동에 이상함을 느끼면서도 분노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의 출동했으니 트라우마의 드래곤나이트들을 잡는 것은 시간문제일 것이다. 전날의 전투에서도 보았듯이 트라우마의 검은 와이번은 고작 20기. 그나마 몇 기가 추락했으니 이젠 그보다 적게 남게 된 셈이다.

그에 반해 바호크의 회색 와이번은 많은 수가 희생되고도 220마리나 남아 있었다.

수적으로 월등한 우위다.

이 혼란은 삽시간에 정리될 것이다.

필립 공작은 그렇게 믿었다.

하지만 이것이 그의 커다란 착각이라는 것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전영에 떨어진 몬스터들과 사투를 벌이고 있는 병사들 사이로 바일 후작을 비롯한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이 와이번도 없이 맨몸으로 달려왔던 것이다.

필립 공작의 두 눈이 휘둥그레진 것은 당연한 일.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입니까!"

먼지를 일으키며 달려온 바일 후작은 필립 공작을 향해 대뜸 언성을 높였다. 필립 공작은 어이가 없었다. 오히려 묻고 싶은 것은 그였던 것이다.

회색 와이번들이 일제히 출동했는데, 정작 그 와이번들에 타고 있어야 할 기사들이 왜 여기 남아 있단 말인가.

"헛!"

필립 공작의 머릿속에 불현듯 좋지 않은 추억이 떠올랐다.

"설마 또 그 놈이······."

과거 이것과 똑 같은 일이 있었던 적이 있다. 놈은 그때도 필립 공작이 심혈을 기울여 기른 와이번들을 모조리 끌고 가 버렸다. 지금 트라우마의 상징처럼 여겨지고 있는 검은 와이번들은 모두 그가 키운 와이번들인 것이다.

"공작님은 이게 어떻게 된 일인지 알고 계시오?"

바일 후작이 초조한 음성으로 물었다.

드래곤나이트가 타고 다닐 와이번을 잃었다는 것은 마법사가 마법을 잃은 것만큼이나 치명적이었다.

본시 와이번은 사납기 이를 데 없는 몬스터인 데다 주인 외에는 그 누구에게도 굴하지 않는 성정을 가지고 잇어, 오히려 말보다도 도난에 안전한 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한두 마리도 아니고 200마리가 넘는 와이번들이 일제히 하늘로 사라져 버렸으니, 바일 후작이 이렇게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필립 공작은 입을 꾹 다문 채 대답을 회피했다.

대신 검병을 으스라져라 움켜쥐었다.

으득.

손아귀에서 거북한 소음이 비집고 나왔다.

그 소름 끼치는 기운.

바일 후작을 비롯한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은 필립 공작의 전신에서 솟구쳐 나오는 차가운 기운에 어깨를 부르르 떨었다.

‘과, 과연 소드마스터.’

‘놀······ 랍군.’

필립 공작이 이 정도의 힘을 감추고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던 그들이라 놀라움은 극에 달할 수밖에 없었다.

바호크에도 소드마스터는 있었다.

하지만 지금 눈앞의 필립 공작처럼 독특하고 차가운 기운을 풍기는 자는 아무도 없다. 마치 거대한 빙하지대를 대하고 있는 것 같지 않은가.

"부관."

분노를 간신히 억누른 듯한 격한 음성이 필립 공작의 앙 다문 이빨 사이로 흘러나왔다.

보고를 위해 달려오던 하급 귀족 한 명이 배짤리 그의 앞에 고개를 조아렸다.

"주둔지 안에 침입자가 있다. 살렘 후작에게 알려라. 무슨 일이 있어도 놈을 잡아야 한다."

"네. 헌데······."

명을 받은 하급 귀족이 뒷말을 흐렸다.

"달리 할 말이 있나?"

"트라우마에서······."

"트라우마?"

필립 공작의 눈썹 끝이 위로 치켜 올라갔다. 하급 귀족은 치솟는 그의 기도에 손발을 벌벌 떨면서도 보고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굳게 닫혀 있던 트라우마의 성문이 열렸습니다. 그리고 상당한 수의 병력이 본군의 주둔지를 향해 달려오고 있습니다."

"뭣이?"

의문성을 터트린 필립 공작은 대답조차 듣지 않고 몸을 날렸다.

소드마스터의 실력인 그가 전력을 기울여 달리자, 눈 깜짝할 사이에 방책에 도착했다.

"으음."

방책 너머를 본 필립 공작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과연 보고대로 트라우마의 성문은 활짝 열려 있었다.

짙은 어둠에 휩싸인 밤이지만, 트라우마 역시 성문 근처에 횃불을 피워놓았기에 대략의 주변 정황을 파악할 수 있었다.

그리고 어둠속에서 꾸물꾸물 이동하는 무리가 있음도 감지되었다. 상당한 수로 짐작되는 바 공성전 내내 단 한 번도 사용되지 않은 보병들까지 동원한 듯싶었다.

‘능구렁이 글로리 녀석이 또 무슨 짓을 꾸미는 것지?"

필립 공작은 부쩍 강한 의심이 들었다.

병력차가 여실한 상황이다.

정면승부론 절대로 트라우마의 병력이 반란군을 제압할 수 없다.

오히려 평지에서 정면 대결을 벌인다면 순식간에 당하고 말 것이다.

그런데도 미련한 개미 떼처럼 성 밖으로 기어 나왔다.

설마 어두운 밤을 이용한 기습일까?

야만족을 상대하는 것이라면 모를까, 횃불과 마법구로 사방을 환히 밝혀놓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기습을 생각했다면 보다 소수의 인원을 동원했을 것이다.

‘워낙 능구렁이 같은 녀석이라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가 없군. 하지만 무슨 상관이랴. 놈이 무엇을 노리건 스스로 성 밖으로 기어 나왔으니 오히려 더 잘된 일이지.’

필립 공작은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자고로 변칙을 누르는 것은 정공법이다.

쓸데없는 유인과 교란전술보다 대규모의 병력으로 상대를 확실히 압도하는 것이 전장을 지배하는 자의 배포 큰 전술인 것이다.

필립 공작은 즉시 명령을 내렸다.

"이프리트 기사단을 집결시키라. 부관들에게 즉시 병력을 소집하여 중앙 무대로 집결하라 이르라."

전령들이 바쁘게 뛰어다니기 시작했다.

필립 공작은 전 병력을 동원하여 확실하게 글로리 후작의 콧대를 눌러줄 심산이었다. 하지만 그는 막상 자신의 진영에서 일어나고 있는 변화를 전혀 감지하지 못하고 있었다.

"후와. 멋진걸?"

회색 와이번들이 일제히 허공으로 솟구치는 모습을 본 병규는 만족스런 웃음을 흘렸다.

200기가 넘는 와이번들이 한꺼번에 날아오르는 모습은 장관이었다.

"설마 저 많은 녀석들이 전부 다 내 말을 들어줄 거라곤 생각 못했는걸."

병규는 어리둥절하면서도 기뻤다.

기대했던 것보다 훨씬 좋은 결과를 얻은 것이다.

처음 와이번의 우리에 숨어들었을 때만 해도 반신반의하였다.

과연 아이린 왕성에서 했던 것처럼 와이번들을 잘 꼬셔질지 걱정이 들기도 했다. 하지만 걱정은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를 본 와이번들은 끄득끄득 하며 울더니 잠시 후 고개를 바닥에 조아리며 일순간 얌전해졌던 것이다.

와이번들이 자신에게 반응을 보이는 것이 기뻤던 병규는 즐거운 목소리로 명령을 내렸다.

"모두 지금 즉시 하늘로 떠올라 줄래? 하늘에 올라가면 머리가 하얀 사람이 있을 거야. 그 사람의 말을 들어줘."

놀랍게도 와이번들은 그의 말을 정확하게 알아듣고 곧바로 이행했다.

하늘을 올려다보며 큰소리로 울더니 일제히 날개를 퍼덕이며 허공으로 치솟아 오른 것이다.

그 광경을 지켜본 병규는 뿌듯한 기분을 만끽하였다.

잘 되면 다행이고, 그나마 뜻되로 되지 않는다 하더라도 어쩔 수 없다는 생각으로 온 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그런데 결과는 그의 기대를 뛰어넘었다.

와이번들이 모두 그의 말에 순순히 따라준 것이다.

감격스런 표정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던 병규는 저 멀리서 들려오는 소음에 문뜩 정신을 차렸다.

예민한 그의 귀는 트라우마 쪽에서 다가오는 다수의 발걸음 소리를 잡아낼 수 있었다.

"글로리 후작님이 드디어 움직이셨구나."

그렇다면 더는 지체할 여유가 없다.

글로리 후작이 전 병력을 이끌고 무리를 하면서까지 필립 공작을 충동질하는 이유는 오직 한가지.

바로 그의 작전을 위해서 필립 공작의 이목을 흐트려 놓을 목적인 것이다.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움직여 보자."

병규의 신형이 어둠속에 녹아들듯 사라졌다. 그가 사라진 지얼마 후, 와이번들의 갑작스런 출동에 놀란 병사들이 달려왔다.

하지만 그들이 발견한 것은 기절한 채 누워 있는 50여 명의 보초병들이 다였다.

와이번의 우리를 벗어난 병규는 야행성 들짐승처럼 어두운 곳만을 짚어 이동하며 표적을 찾아다녔다.

그가 찾는 표적은 다름 아닌 귀족들. 그것도 병사들을 통솔할 수 있을 정도의 권세를 가진 상류층 귀족들이다.

고독을 연구한 호랭이는, 고독의 생산이 어렵고, 사용은 더더욱 어렵다는 사실을 알아내었다. 개체를 늘리기 위해 애를 쓴다 해도 1년에 얻을 수 있는 양은 고작해야 몇십 마리가 전부라고 했다.

게다가 고독이 모든 인간에게 다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높은 서클의 마법사나 상승검객에게는 전혀 통하지 않았다.

그 때문에 전원 상승 검사로 구성된 미네르바 기사단은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사실은 고독을 많은 사람에게 무작정 살포할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한다.

틀림없이 필립 공작은 정세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일부 귀족들에게만 고독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것이 호랭이와 필라이트의 공통된 의견이었다.

그런 결론들을 토대로 병규는 철저하게 상류층으로 보이는 귀족들만을 찾아다녔다. 만약 필립 공작이 누군가를 선별해서 고독을 썼다면 틀림없이 상위 귀족들에게 사용했을 것이다.

막사 주변은 온통 아수라장이었다.

공중에선 몬스터들이 끊임없이 떨어지고, 트라우마 성 쪽에선 대단위 군사들의 움직임이 감지되었다.

사방에 가득한 것이 몬스터의 괴성과 찢어지는 비명소리였고, 병사들은 정신없이 이어지는 몬스터들의 습격과 지휘관들의 악다구니 속에서 갈피를 잡지 못하고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덕분에 병규는 수월하게 반란군의 주둔지 내부를 돌아다닐 수 있었다.

이 모두가 블랙나이트들과 글로리 후작의 지원 때문에 가능했다.

그들이 반란군의 지휘관들과 병사들의 혼을 쏙 빼놓은 덕분에 보다 쉽게 일의 진척을 볼 수 있었던 것이다.

얼마쯤 헤맨 그는 마침내 상위층으로 보이는 귀족을 발견하게 되었다. 보병들을 관리하는 지위인 것으로 보이는 그 귀족은 머리칼을 짧게 기른 완고한 인상의 중년사내였다.

병규는 어둠속에 몸을 숨긴 채, 품속을 더듬었다.

나무로 만들어진 작은 함이 잡혔다.

이 목함 속엔 호랑이가 심혈을 기울여 완성한 백고가 들어 있었다.

장갑을 낀 손으로 조심스럽게 목함의 안쪽을 슬쩍 찍었다. 장갑 끝으로 하얀 가루 같은 것이 묻어 나왓다. 

자세히 보니 꼬물거리는 미세한 움직임이 보였다.

병규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징그러워라.’

그는 더러운 것을 버리듯, 표적을 향해 손가락을 튕겼다. 오우거의 힘을 동원하여 튕긴 것이라 기세가 자못 대단했다.

바람을 타고 날아간 백고는 여지없이 표적에게 안착했다.

백고가 무사히 표적에 닿은 것을 확인한 병규는 그 다음 경과는 지켜보지도 않고 무작정 다음 목표를 향해 몸을 날렸다.

누가 고독에 중독된 자이고, 누가 변절자인지 가려낼 방법이 없었다. 그래서 그는 귀족이 눈이 띌 때마다 무턱대고 백고를 살포했다.

백고를 뿌린 귀족들은 처음엔 멀쩡했다.

간혹 따끔거리는 미미한 통증에 팔등이나 목을 긁는 이도 있었지만 별다른 증상을 보이지는 않았다.

하지만 1분을 조금 넘겼을 때, 일부 상위 귀족들에게서 반응이 나타났다.

졸린 사람처럼 눈동자의 동공이 확 풀리면서 두 팔을 축 늘어트리는 것이 아닌가. 개중엔 기절이라도 한 것처럼 바닥에 풀썩 쓰러지는 사람까지 있었다.

심장에서 뿜어진 혈액이 사람의 몸을 한 바퀴 도는 데 걸리는 시간은 고작 1분이다.

피부를 뚫고 침투한 백고가 심장으로 흘러 들어가 뇌에 처박힌 고독을 만나기까지 길게 잡아 채 2분도 걸리지 않는 것이다.

혈관을 둘다 사람의 뇌에서 고독을 발견한 백고는 순식간에 고독의 몸속으로 침투해 들어간다. 그리곤 무서운 속도로 숙주의 몸을 갉아먹는 것이다.

단 몇 분 안에 고독은 죽게 되고, 고독에 의해 정신을 지배당한 사람은 곧이어 제정신을 차리게 된다.

호랭이가 만든 백고는 양이 적은 대신 효과가 확실하고 빨랐다.

다만 백고의 효능은 어디까지나 고독을 제거하는 용도 하나뿐이다.

제정신을 차린 귀족이 이후로 어떤 결정을 내릴지는 순수하게 그 자신의 몫인 것이다.

정신을 차린 그들이 필립 공작을 버리고 공주 편으로 돌아서길 기대하며 병규는 정신없이 반란군의 진영 내를 돌아다녔다.

병규가 반란군의 진영을 누비며 귀족들에게 백고를 뿌리는 동안, 병력을 모은 필립 공작은 서서히 글로리 후작을 압박해 나가기 시작했다.

글로리 후작이 동원한 병력은 총 3천. 그것도 여태 아끼고 아끼던 보병들까지 총동원한 수였다.

그에 반해 필립 공작이 이끄는 병력은 1만이 넘었다.

애초부터 상대가 안 되는 병력차였다. 물론 트라우마엔 드래곤나이트들이 있었다.

바호크의 회색 와이번들까지 가세한 형편이라, 하늘에서 떨어지는 몬스터 공격은 상당히 난감한 편이었다.

하지만 전쟁은 어디까지나 전면전으로 승패가 갈리기 마련이다.

아무리 좋은 무기와 전략을 가지고 있다 하더라도 결국 승부를 결하는 것은 전면전이다. 

"조촐한 병력이군."

횃불과 마법구로 트라우마의 병력을 살핀 필립 공작은 입가로 새어 나오는 조소를 참을 수가 없었다.

단숨에 밀어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글로리 후작 놈이 어떤 함정을 꾸며 놓았는지 살펴보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

필립 공작은 부관을 향해 가볍게 고갯짓을 했다. 깊게 읍을 한 부관은 나팔을 입에 가져다 대고 길게 불었다.

두우웅~ 두우우우웅~

나팔소리가 무겁게 울리자 반란군의 진영 한쪽이 열리며 시뻘건 갑옷으로 무장한 기사단이 모습을 나타냈다.

이프리트 기사단.

필립 공작이 손수 키운 화염의 기사단이 출동한 것이다.

마상 기사단은 말을 타고 이동하는 만큼 일반 보병에 비해 월등히 빠른 기동력과 전술적 유연성을 가지고 있었다.

만약 글로리 후작이 함정을 설치했다면, 빠른 기동성으로 충분히 피할 수 있으리라. 이런 판단하에 기사단을 출동시킨 것이다.

전쟁 내내 별다른 활약을 펼치지 못했던 터라 이프리트 기사단의 의욕은 하늘을 찌를 듯했다.

"돌진!"

기사단장인 쿨 후작의 외침에 따라 이프리트 기사단이 암천을 가르는 불화살처럼 적진을 향해 달려들었다.

"이랴!"

"쥐새끼들을 처단하라."

"오늘 부로 저항군의 씨를 말리고 말리라!"

이프리트 기사단이 함성을 지르며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기세는, 가히 산허리를 타고 내려오는 붉은 용암처럼 거침이 없었다.

"전군 후퇴."

이프리트 기사단을 확인한 글로리 후작은 즉시 전군을 뒤로 이동시켰다.

트라우마의 기사단이 트로웰 기사단은 전남의 전투 여파로 희생 불능의 타격을 입었다. 그리고 지금 병력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보병들은 기사단의 상대가 아니었다.

"크흐흐. 쥐새끼들이 꽁지를 마는구나."

"또 거북이처럼 트라우마에 숨을 작정인가. 겁쟁이 녀석들."

이프리트 기사단은 슬슬 물러나는 저항군의 모습에 기고만장하였다. 그들은 달리는 말에 채찍질을 하며 더더욱 속력을 높였다.

물러나는 트라우마 병력에게 조금이라도 더 피해를 입히려는 심산이었다.

하지만 글로리 후작은 무작정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에겐 병규가 남기고 간 아주 특별한 수가 숨겨져 있었던 것이다.

쿠구구구궁.

돌연 굉음과 함께 지진이라도 난 듯 이프리트 기사단과 저항군 사이의 쌍이 가로로 길게 푹 꺼지기 시작했다.

무서운 속도로 달리던 이프리트 기사단은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이 대재앙 앞에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끼히히히힝!

갈라진 대지 사이로 말들이 비명을 지르며 고꾸라져 들어갔다.

푹 하고 꺼진 구덩이의 길이와 깊이는 상당해서 일단 아래로 떨어진 말들 중에 성한 다리로 다시 일어서거나 뛰어 올라온 말은 단 한 마리도 없었다.

갑자기 땅이 꺼지자 기병들은 급히 말을 멈춰 세우려 하였다. 하지만 달려오던 관성 때문에 곧바로 서지 못하고 수십 필의 말이 한꺼번에 몰려 또 구덩이로 미끄러져 들어갔다.

드세게 달리던 터라 피해는 클 수밖에 없었다.

"무슨 이런 일이!"

이프리트 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던 쿨 후작은 경악했다.

설마 땅이 꺼질 줄이야. 상상도 못했던 일이다.

만약 이곳이 트라우마 성의 근방이었다면 일견 이해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엄연한 자신들의 진영 근처가 아닌가. 대체 어느 틈에 이런 함정을 준비했는지 도저히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기사단의 선두에 서 있던 자들 전부가 좌우로 길게 파여진 구덩이 속으로 떨어져 버렸다. 피해가 어느 정도인지 파악조차 되지 않고 있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일이······."

후위에서 글로리 후작의 대응을 살피고 있던 필립 공작은 이 생각지도 못한 함정에 놀라고 또 분노했다."

트라우마에서 이런 함정을 꾸미는 동안 우리 군의 보초들은 대체 무엇을 했단 말인가!"

당장 보초병장이 호출되었다.

그에겐 항거의 여지도 없었다.

필립 공작은 가차 없이 손을 썼고, 어김없이 파랗게 질린 머리통 하나가 하늘로 떠올랐다.

직무태만에 관해서는 사정이 없는 필립 공작이었다. 하지만 이것은 보초병장의 잘못이 아니었다.

인간의 능력으로는 어쩔 수 없는 거대한 몬스터의 소행이기 때문이다.

자이언트 샌드 웜

땅 속을 기어다니는 이 거대한 몬스터의 소행이니 인간으로서는 어찌 대응할 만한 여지가 없었던 것이다.

병규는 적진에 침투하기 전 이 무지막지하게 거대한 지렁이에게 한 가지 지시를 내렸다. 그것이 바로 땅굴이었다.

자이언트 샌드 웜은 반란군의 진영 바로 앞쪽의 땅 속을 거침없이 파고 다녔다.

자이언트 샌드 웜의 덩치가 워낙에 컸기 때문에 땅속을 지나가면 천연의 땅굴이 자연스럽게 생겼던 것이다.

멀쩡하던 땅 속에 터널이 생겨 버렸으니, 지반이 대책 없이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일. 게다가 자이언트 샌드 웜이 만들어 놓은 땅굴은 지지기반이 하나도 없는 부실공사.

그 위로 이프리트 기사단이 말을 타고 죽어라 돌진했다. 무너지는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뭔가 준비해 둔 것이 있다더니. 이런 것이었나. 과연 그로군.’

맹렬하게 진격하던 이프리트 기사단의 선두가 갑작스런 지반 붕괴로 자취를 감추는 전무후무한 사태에 필립 공작 뿐만이 아니라 글로리 후작도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이런 함정을 준비해 뒀을 줄이야. 알면 알수록 대단한 사람이군.’

새삼 병규라는 존재에 대해 경이를 느끼는 글로리 후작이었다.

"좋아. 나도 질 수 없지."

글로리 후작은 힘차게 손을 들었다.

밀집 대형을 유지하던 보병들 사이에서 늘씬한 엘프들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들은 모두 풀과 나무를 이어 만든 기이한 활을 어깨에 메고 있었다.

그들은 자연스런 대형을 그리며 활에 화살을 메겼다. 그리곤 글로리 후작의 신호에 따라 일제히 활시위를 당겼다.

피피피피피핏!

낮은 각도로 날아간 화살들은 돌풍을 동반한 태풍처럼 이프리트 기사단을 휩쓸었다. 막 대형을 유지하려던 기사들에게 엘프들의 화살은 그야말로 지옥불이나 다름없었다.

"크억!"

"컥!"

신음소리와 함께 20여 명의 기사들이 말 위에서 떨어졌다.

생각보다 피해는 적었다.

갑옷으로 온몸을 두른 데다 워낙 실력이 출중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글로리 후작은 이 정도의 성과만으로도 크게 만족했다. 

지금은 얼마나 죽였는가 하는 것보다, 적의 선봉을 꺾었다는 사실이 더 중요하였다.

엘프들의 화살은 놀라울 정도로 정확하지만 기사들 역시 대부분 마나를 다룰 수 있는 실력자여서 웬만한 공격을 검과 방패로 퉁겨낼 수 있었다.

지금이 기사단의 선두가 곤두박질친 혼란한 상황만 아니었다면 피해는 더더욱 작았을 것이다.

만약 엘프들이 기사들이 아니라 말을 노렸다면 더 큰 피해를 입혔을 것이나, 자연과 동물을 사랑하는 엘프들은 오직 기사들만을 노렸다.

"좋다. 2격 준비. "M!"

다시금 엘프들의 화살이 날아갔다. 그들은 놀라울 정도로 활 쏘는 속도가 빨랐다.

슈슈슈슈슈.

화살이 바람을 가르는 매서운 소음이 간담을 서늘하게 만들었다.

다시 몇몇 기사들이 낙마했다. 워낙 날아오는 화살이 많은 데다 근접한 상태여서 검으로 모든 화살을 쳐 내기는 불가능한 상황이었다.

이프리트 기사단의 피해가 커지자 필립 공작도 마냥 지켜보고만 있지는 않았다. 즉시 궁병대로 하여금 응사를 명하고, 방패병들을 급파하여 기사들을 보호하게 했다.

"궁병대 앞으로. 방패병 돌격!"

미리 준비하고 있던 궁병들이 기사들을 위해 응사를 감행했다. 화살들이 새카맣게 하늘을 뒤덮었다. 그 사이 방패병들이 우르르 달려나가 이프리트 기사단을 감쌌다.

후두두둑!

화살들이 방패에 부딪히는 소음이 한여름철의 소나기를 연상케 했다. 그렇게 간신히 돌아온 기사들의 수는 백 명도 채 되지 않앗다.

엘프들에게 50여 명 정도가 희생되었다.

그리고 자이언트 샌드 웜이 파 놓은 함정에 무려 150여 명이나 굴러 떨어졌다.

함정 속에 떨어진 기사들은 비록 죽진 않았다 해도 당장 전력으로 쓸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부상을 입고 말았다.

이것으로 이프리트 기사단의 전투력은 치명적인 타격을 입게 되었다. 더 이상 단독으로 적진을 지르는 용맹을 떨치기엔 무리가 따랐다.

필립 공작의 이마 위로 굵은 주름이 잡혔다.

생각지도 못한 타격이다.

글로리 후작이 뭔가를 감춰두고 있을 줄은 예상했지만, 설마 200이나 당하게 될 줄이야.

기사단이 큰 피해를 입은 것은 전체적인 전력에 막대한 타격을 주었다.

훈련기간이 짧은 보병들에 비해 기사들은 양성하기가 극히 까다로웠다. 물론 비용도 많이 들었다.

그가 수도에서 이끌고 온 기사단의 총 수는 700이 넘었다. 그런데 지금 남아 있는 수는 고작 150명. 잃어버린 수를 보충하기 위해 선 긴 시간과 많은 비용이 투자되어야 할 것이었다.

"내 기필코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들의 사지를 으깨고 말리라."

병규와 글로리 후작을 떠올리며 필립 공작은 이를 으득으득 갈았다.

더는 망설일 필요가 없었다.

그는 즉시 병력을 운용했다.

기사단의 희생으로 적이 숨겨 놓은 카드를 알 수 있게 되었다.

큰 대가를 치렀지만 이젠 더 이상 망설일 필요가 없어졌다. 적이 트라우마 성으로 후퇴하기 전에 압도적인 병력을 이용해서 몰살시켜 버려야 한다. 하지만 그도 마음먹은 대로 되지 않았다.

이상하게도 지휘체계에 혼선이 온 것이다.

그로 인해 병력 운용이 뜻하는 대로 움직여 주지 않았다. 일부의 부대가 지시한 것과는 다른 움직임을 보이고 있었다.

"이런 멍청한 녀석들. 이번엔 또 무슨 문제란 말인가!"

필립 공작은 울화통이 터져 미칠 지경이었다.

이제 눈앞의 적을 밀어버리기만 하면 끝이다. 그런데 승리를 목전에 두고 우왕좌왕 갈피를 못 잡고 있는 상황이라니. 

갈팡질팡하는 병력을 보고 필립 공작이 이를 바득바득 갈고 있을 때였다.

반란군의 진영에서 화려한 폭죽이 검은 한늘로 쏘아져 올라왔다.

그것은 분명 화려한 색깔의 폭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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