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장님, 정말 사람 맞습니까?
전쟁은 점점 그 정도가 심해지고 있었다.
필립 공작은 총력을 기울여 공성전을 펼치고 있었지만, 수성을 하는 글로리 후작도 결코 만만치 않았다.
전황은 트라우마 측에 많이 불리하게 진행되고 있었지만, 효율적인 전술과 엘프들의 도움으로 그나마 잘 버티고 있었다.
공성전이 길어지자 필립 공작은 안달이 났다.
전쟁 기간이 길어질수록 병력의 소모가 심해졌다.
내전을 끝낸 후, 바호크 공국과 아마스 신성제국까지 도모하려는 야심을 가지고 있는 필립 공작에게 이러한 전황은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내전에 소모된 병력을 보충하려면 적어도 10년 이상의 기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드래곤나이트들에게 대다수의 마법사들을 잃은 것이 뼈저린 실수였다. 만약 마법사들이 모두 남아 있다면, 공성전은 훨씬 쉽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고, 피해도 훨씬 적었다.
현재 주둔지엔 피네스를 제외하곤 하급마법사 몇 명만이 남았을 뿐이다. 그 정도의 전력은 공성전엔 하등 도움이 되지 못했다.
"마법사의 탑이 협조만 해주었어도······."
아이린 왕국의 최대 전력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의 탑이 중립을 선언했다. 높은 서클의 마법사들은 대부분 마탑에 소속되어 있다. 그들은 길드의 뜻에 따라 이번 내번에 참여하지 않았다.
그가 동원할 수 있었던 것은 일반 귀족들의 휘하에 있던 낮은 서클의 마법사들뿐이었다.
그동안 필립 공작은 여러 번 마탑을 회유하려 노력했다. 하지만 마탑의 대답은 한결같았다.
자국민끼리의 상잔인 내전에는 절대로 개입하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하는 수 없지."
필립 공작은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수석마법사를 불러오라."
잠시 후 부관의 안내를 받은 피네스가 막사로 들어왔다.
"바흐만 대공과 대화를 하고 싶다."
필립 공작의 말에 피네스는 눈을 동그랗게 뜨며 놀랐다.
"바호크 공국과 협상을 하실 생각이십니까."
필립 공작은 입을 굳게 다문 채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의 심각한 표정만으로도 충분히 대답을 들은 셈이다.
"준비해 주게."
무거운 음성으로 필립 공작이 다시 말했다. 피네스는 급히 고개를 숙이고는 통신용 마법구를 준비했다.
간단한 주문과 함께 마법 수정구 내부가 출렁이더니 곧 완고한 표정의 중년 마법사의 모습이 나타났다.
"왕실 마법통신원입니다."
"아이린 왕국의 필립 공작가 수석마법사일세. 공작님께서 바흐만 대공님과의 독대를 원하시네."
피네스의 말에 깜짝 놀란 마법사는 다시 한 번 묻더니 당황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자, 잠깐만 기다리십시오."
수정구 안쪽이 돌을 던진 연못에 파문이 일듯이 출렁였다. 잠시 후 용맹한 인상의 중년사내의 모습이 나타났다.
"무슨 일인가."
"상의할 일이 있소."
필립 공작이 굳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대화는 그 후로도 한참 이어졌다.
이번의 협상으로 바흐만 대공은 고란 산맥을 손에 넣게 되었고, 필립 공작은 지원 병력을 얻을 수 있었다.
필립 공작이 바호크와 모종의 음모를 꾸미고 있을 때, 트라우마성의 지하에서도 의외의 사건이 일어나고 있었다.
그가 낮은 음성으로 몇 마디를 중얼거리자 영롱한 구슬 속에 안개가 끼듯 뿌옇게 흐려지더니, 곧 곱게 늙은 백발의 여마도사가 나타났다.
"에잉. 저 쭈그렁바가지가 아직도 죽지않고 삻아있군."
수정구 속의 노파가 필라이트를 보고 농을 걸었다.
"뭐라? 이런 말린 오크 대가리 같은 여편네가 못하는 소리가 없구만. 이봐. 아무리 늙었어도 자넨 여자잖아. 여자가 입이 그렇게 걸어서야 쓰나?"
"키키킥. 내 입이 행주면 네놈의 입구녕은 걸레야. 어따가 입이 걸다는 소릴 해? 쯧쯧. 낯짝을 보아하니 오늘내일 하는 것 같은데, 아직도 횡설수설하는구만."
"헛소리 말고. 내전이 발발된 건 알지? 빨리 와서 한팔 거들어. 나혼자 감당하려니 삭신이 쑤셔서 못 견디겠다."
"쯧. 쭈구렁 바가지 입에서 앓는 소리가 다 나오는군."
"에구. 나도 이제 예전 같지가 않아."
"허이구. 가만 보자 하니 못하는 소리가 없군그래."
"후후후. 자자. 여편네. 그러니 자꾸 딴소리하지 말고 와서 거들게. 기왕 오는 김에 내 어깨도 좀 두들기고."
"시답잖은 소리는······ 못 가!"
"왜?"
"몰라서 하는 소리냐?"
"모르니깐 묻는 게지."
"쯧. 마탑은 외적의 침입에만 힘을 빌리기로 되어 있지 않느냐. 그런데 알다시피 이번 일은 내전이잖아. 마탑에서 나설 명분이 없지."
"어허. 이것봐. 그렇게 딱딱하게 굴지 말라고. 본시 내전이라면 응당 왕실의 골육상쟁을 의미하는 거잖아. 하지만 이번은 다르지. 왕골은커녕 고작 왕실의 은총을 받은 공작 녀석이지. 그런 녀석이 음흉한 계략으로 왕실을 전복했지 않은가. 이래도 도와주지 않을 생각인가?"
"일 없네. 필립 공작도 아이린 왕국의 사람 아닌가? 내가 보기엔 내전이야."
"이런 젠장맞을 오크 대가리를 봤나. 지금 누구 앞에서 그런 고리 타분한 소릴 지껄이는 게야! 아구~ 그냥. 눈파에 있었으면 동태 눈깔 달린 면상을 밀대로 딜딜딜 밀어주겠구먼. 커허. 불난다. 아~ 속타. 내가 네놈 때문에 명이 팍팍 줄어들어! 알간!"
"쯧쯧. 자네는 그 나이가 되어가지고도 아직 목에 핏대 세우며 고함을 지르나? 그러고도 고 서클 마법사가 될 수 있었으니, 참으로 놀랄 일일세."
"지랄 염병하는 소린 그쯤만 해 두고, 어쩔 거냐? 도와줄 테지?"
"이 인간이 귓구녕에 말뚝을 박았나. 내가 지금까지 힘들게 지껄인 소리가 미친 오크 짖는 소리로 들려? 일 없다고 몇 번이나 얘기 했자나. 에잉. 기억력이 떨어지는 걸 보니 이제 쭈구렁바가지도 슬슬 아트란 님의 품이 그리워진 모양이군."
"케엑. 거 고연 놈일세. 이 늙은이가 이렇게 부탁하는 데도 안 들어 줄 생각이냐?"
"쭈구렁 바가지, 네놈이 언제 부탁했냐?"
"지금까지 내내 부탁했잖아."
"그게 부탁이냐? 협박이지. 에잉. 그 부탁 한 번 무섭게 하는 늙은일세. 두 번 부탁했다간 욕설에 떠밀려 난민이 될까 걱정이군."
"고연놈. 뒤지지도 않고 빠득빠득 살더니 마법 연구는 안 하고 입심만 키운 모양이구나."
"키히히. 다 자네라는 훌륭한 친구 덕분이 아니겠나."
"케헴. 헴. 좋아. 끝내 안 도와주겠다는 소리군."
"나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뱃속의 기생충만큼 왕성하지만, 글쎄, 마탑이 나 혼자 운영하는 게 아니라서 말일세."
"헹. 안됐군. 신기한 걸 보여주려고 했는데."
"엥?"
심드렁한 표정이던 노파의 얼굴이 처음으로 흥미로운 표정을 띠었다.
그녀는 필라이트의 대쪽 같은 성격을 잘 알고 있었다.
목에 칼이 들어와도 거짓말을 안 하는 위인이다.
그가 신기한 물건이 있다면 정말로 신기한 물건이 있다는 소리다. 그리고 노파는 고 서클의 마법사답게 탐구심이 지나칠 정도로 넘치는 사람이었다.
"어떤 물건인데 그렇게 거들먹거리는고?"
"커헴. 일없네. 그냥 없던 일로 하세."
"어허. 우리 사이에 뭘 그리 생색을 내는가. 그냥 보여주게."
"아 됐어. 내가 도와달랄 땐 정색을 하더니, 이제 와서 무슨 알랑 방귀야. 일없네 없어."
"허참. 내 입장을 잘 알면서 그러나. 나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지만 사안이 사안인 만큼 나 혼자 설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헹헹. 됐네. 이 사람아."
완고하게 고집을 피우던 필라이트는 끝내 뒤돌아서고 말았다. 하지만 절대 이대로 끝낼 그가 아니었다. 은근슬쩍 노파를 외면하는 척하며 손에 든 플라스크를 슬며시 수정구 가까이로 들이밀었다.
"억!"
플라스크에 든 징그러운 벌레를 본 노파의 입에서 경악이 터져 나왔다.
"그, 그게 뭐야? 무슨 그런 기괴한 생물이 다 있누!"
"엥? 봤냐? 도대체 언제 본 거야?"
필라이트는 모든 게 실수인 양 능청스럽게 연기했다.
"쩝. 허. 아깝다. 아까워. 보여줄 생각이 전혀 없었는데."
자고로 생각이 없더라도 정작 물건을 보면 마음이 동하는 것이 사람의 심리다. 아예 안 봤으면 모르데, 얼렁뚱땅 보게 되니 더더욱 마음이 쏠리는 것이었다.
노파는 수정구에 얼굴을 들이밀며 간절하게 졸랐다.
"이, 이보게. 친구."
"친구? 허. 그게 어느 나라 말이던고. 귀에 익긴 한데 도저히 무슨 뜻인지 모르겠군."
"허허. 이보게 친구. 그 무슨 섭섭한 소린가. 자꾸 딴소리 하지 말고 그 물건 다시 보여주게."
"엥? 내 물건을 보여 달라고? 어이구 이런 망측한 인간을 봤나. 다 늙어 쭈그렁바가지가 된 여시가 무슨 일로 남의 물건을 보여 달라고 졸라? 이거야 원. 남세스러워서."
"이런 미친 할방탱이를 봤나. 누가 비쩍 말라 비틀어진 네놈의 물건을 보재? 헛소리 그만하고 그 뒤에 감춘 플라스크나 내밀어봐."
"커험. 험. 거 단춧구멍만한 눈으로 보기는 용케 봤군."
필라이트는 보여주기 싫은 티를 팍팍 내면서 플라스크를 들어 보였다.
"호오. 괴이하게 생긴 생물이로고. 곤충인가? 아니면 식충식물의 일종? 암튼 신기하게 생겼군. 마물도감에도 올라 있지 않은 전혀 새로운 종이야."
노파는 플라스크에 든 고독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오랜 세월 광범위한 연구로 이드라센 대륙의 생물은 물론, 플라스크 안의 고독만은 전혀 처음 보는 것이었다.
"사실은 이것 때문에 할 말이 있네."
필라이트의 표정이 확 바뀌었다. 여태 장난스런 표정은 온데간데 없고, 더 업이 진지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이번 전쟁이 절대로 내전이 아니라는 걸 증명해 주지. 건너오게."
필라이트의 요청으로 마탑의 지도자인 올센은 텔레포트 마법으로 트라우마 성을 찾아왔다. 이것은 비밀리에 부른 것이라 그녀를 마중한 인물은 고작 두 명에 불과했다.
"이 젊은이는 누군고?"
올센은 필라이트와 나란히 선 백발의 미청년을 턱짓하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물었다. 겉으로는 태연하게 말하고 있지만 기실 속으로 많이 놀라고 있었다.
백발의 청년에게서 은은하게 풍겨오는 기운.
그것은 한 번도 접하지 못한 생소한 것이었다.
어찌 보면 마법사들의 기운과도 닮았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어떤 차이가 있어 그것도 아니었다.
마법사들의 기운보다는 훨씬 자연스럽고 그윽했다.
무심코 은은한 향의 차를 떠올렸다.
신기한 일이다. 사람을 보고 담백한 차를 떠올리게 되다니.
"이리 보면 현자와 비슷한 것 같기도 하고, 저리 보면 또 전혀 다르고. 에잉. 모르겠군. 모르겠어. 쭈그렁바가지. 네놈 주위엔 왜 이런 신기한 것들이 모여 있냐?"
"내가 인덕이 좀 있는 편이지. 자자. 그렇게 인상 찌푸리지 말고 안으로 들어가세. 자네가 궁금해하는 것은 모두 다 얘기해 줄 테니."
필라이트는 올센의 등을 토닥이며 지하연구실로 향했다.
"무슨 이런······."
올센의 작은 눈은 그 어느 때보다도 크게 흡떠져 있었다.
그녀의 주름진 눈동자가 향한 곳 작은 플라스크 안의 생물은 그녀의 놀람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네처럼 많은 발을 꼼지락거리며 징그럽게 움직이고 있었다.
"이계의 생물이란 말인가? 이것이?"
올센의 물음에 필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였다.
벌써 몇 번째 묻는 말이다.
그때마다 필라이트는 고개를 끄덕여주었다. 그녀가 얼마나 놀라고 있을 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기 대문이다.
"어, 어허허허."
올센은 바람 빠지는 소리를 내며 헛웃음을 흘렸다.
"실험 결과는 확실히 그렇지만······ 믿을 수 없구나."
10번도 넘게 실험했다.
마나를 탐색해 보고, 마법을 사용해 내부의 구조를 들여다보았다.
실험의 결과들은 하나같이 고독이 이 세상과 전혀 관계가 없는 생물임을 나타내는 것이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꼬. 더떻게 차원을 넘을 수 있었을고."
처음 필라이트에게서 고독에 대한 얘기를 들을 때만 해도 그녀는 이계라는 말을 불신했다.
이계의 생명이라니. 차원을 넘는 일은 오직 창조주만이 가능한 일이다. 적어도 지금까지 올센은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오늘, 그녀의 그런 생각을 송두리째 뒤엎어버릴 생물을 발견하고야 말았다.
그것이 바로 플라스크 안의 고독이라는 미지의 생물이다.
"쭈그렁바가지. 이것이 필립 공작과 관련이 있다는 말이 사실이냐?"
"망할 할마탱이, 자네 생각엔 지금의 내전이 자연스러워 보이는가? 마탑도 눈이 있고 귀가 있을 테니 잘 알겠군. 왕성을 점령한 귀족들이 어떤 결정을 내렸는지. 망할 필립 녀석에게 모든 권력을 이양하고 있어. 그 녀석들이 단체로 미치지 않고서야 그게 가능한 일인가?"
"으음."
올센은 눈을 감고 가만 침음성을 흘렸다.
확실히 이번 반란군의 준동과 움직임엔 의심스러운 점이 만ㅇㅎ았다.
시간이 흘렀다.
슬며시 눈을 뜬 올센의 눈가에 결단의 빛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확실히 가만 좌시할 일은 아닌 듯하군. 일단 왕성에 남아 있는 귀족들을 조사하겠네. 만약 그 귀족들의 뇌 속에서도 고독이라는 녀석이 발견된다면······. 마탑은 결코 이를 좌시하지만은 않을 것이네."
3일 후, 긴장감이 더해가는 붉은 대지 위로 수많은 와이번들이 나타났다.
무려 300마리에 이르는 와이번들은 시위를 하듯 트라우마 성 상공을 날았다.
회색빛의 와이번들. 그리고 그 위에 탄 것은 피처럼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었다.
"네르갈 드래곤나이트!"
"바호크 공국의 드래곤나이트들이······."
트라우마의 귀족과 병사들은 하늘을 가득 메운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을 보며 사색이 되엇다. 더불어 불안해했다.
바호크의 주력이 붉은 대지에 모습을 나타내다니.
과연 그들의 출현이 전황에 어떤 영향을 미칠 것인가.
트라우마 성의 상공을 돌던 바호크 공국의 드래곤나이트, 네르갈은 열을 지어 반란군의 군영지로 착륙했다. 300마리의 드래곤나이트들이 일제히 내려앉는 모습은 일대 장관이었다.
"어서 오시오."
필립 공작은 네르갈 드래곤나이트의 기사단장인 바일 후작을 반갑게 맞았다.
"처음 뵙겠습니다. 공작님."
바일 후작은 입가에 오만한 미소를 머금은 채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거만한 모습을 보였다.
필립 공작은 불쾌함이 일었지만 애써 분노를 가라앉혔다. 지금은 바호크와 반목할 때가 아니다. 이들을 잘 구슬려 트라우마를 정복해야 한다.
건방진 방리 후작의 처분은 그 이후에 생각할 문제이다.
"저희 네르갈 드래곤나이트가 해드릴 일이 무엇입니까? 트라우마 성을 정복해 드릴까요?"
작전회의실로 자리를 옮기자 바일 후작은 노골적으로 조롱어린 말을 건넸다. 마음만 먹으면 당장이라도 이 지루한 공성전을 끝낼 수 있다는 식의 말투였다.
이쯤 되자 필립 공작의 표정도 싸늘하게 굳어질 수밖에 없었다.
"바흐만 대공과 미리 약속한 대로 네르갈 기사단은 단지 엘프들의 공격만 흐트러뜨려 돟으면 되오."
"흐흐. 엘프들이라. 풀잎만 뜯어먹는 초식동물들이 공장님을 꽤 귀찮게 해 드린 모양이군요. 흐흐흐. 이제 걱정 마시지요. 저희 네르갈 기사단이 공작님으 ㅣ고민거리를 단숨에 날려 버리겠습니다."
입꼬리를 들어올리며 웃는 바일 후작의 얼굴엔 자신감이 팽배해 있었다.
"후작님의 말대로 잘 되었으면 더 바랄 것이 없겠소."
필립 공작의 말투에 가시가 박혀 있었다.
하루 동안 반라군이 제공한 막사에서 피로를 푼 네르갈 기사단은 다음날 날이 밝자마자 와이번을 타고 트라우마 성으로 몰려들었다.
무려 300마리나 되는 와이번을 탄 그들의 기세는 가히 상상을 불허할 만큼 장대했다.
와이번들은 저공비행을 하며 목표를 물색했다.
그 광경만으로도 공포를 느끼기에는 충분했다. 트라우마 성의 주민들은 두려움에 떨며 자신들의 가옥으로 숨어들었다.
"쳐라. 겁대가리를 상실한 초식동물들에게 네르갈 기사단의 위력이 어떤 것인지 똑똑히 보여 주어라."
바일 남작이 빨간 깃발을 펄럭이며 흔들자 트라우마 상공을 배회하던 네르갈 기사단들이 일제히 성벽 위의 엘프들을 향해 날아가기 시작했다.
미리 화살을 메기고 있던 엘프들은 즉각 활을 당기며 응전했다.
공성전이 시작된 지, 반달 가까이 흘렀건만, 그들의 화살은 변함 없는 위력을 과시했다.
하지만 그런 엘프들의 화살도 두터운 와이번의 피부에 닿는 순가 허망하게도 힘을 잃었다.
소나기처럼 촘촘히 쏟아져 가던 화살은 와이번의 피부를 뚫지 못하고 둔탁한 소음을 내며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와이번을 조종하는 기사들은 온 몸에 철갑을 두르고 있어 나무를 깍아 만든 화살로는 어림도 없었다.
쉬이이익!
"컥."
"으앗."
화살비를 뚫은 와이번들이 성벽을 쭉 훓고 지나가자 엘프들이 우르르 떨어졌다. 수일간에 공성전에도 거의 피해가 없엇던 엘프들이 와이번의 공격에 순식간에 20여 명아니 희생되었다.
"화살은 통하지 않는다. 마법을 사용하라."
와이번의 두터운 피부에 화살이 먹히지 않는 것을 깨달은 엘프들은 즉각 마법을 시동했다. 인간과 달리 엘프들은 천성적으로 마나의 흐름에 익숙했다. 그래서 대부분이 마법을 사용할 수 있었다.
"매직 미사일."
"파이어 볼."
"블라인드."
화려한 공격마법과 보조마법이 허공을 무지갯빛으로 수놓으며 와이번들에게 날아갔다.
드래곤나이트의 유일한 천적이 바로 마법공격이었다.
하지만 몇백 년 동안 와이번을 이용한 전술을 갈고 닦은 바호크 공국의 네르갈 기사단에게 급하게 시전한 마법은 별 다른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네르갈 기사단의 기사들은 소드익스퍼트 초급에서 중급 사이의 실력자들이었다.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기사들은 마법에 어느 정도 내성을 가지게 된다.
블라인드처럼 시야를 어둡게 하는 보조마법들은 마나를 다룰 수 있게 된 기사에게는 여간해선 통하지 않는다.
그렇다고 공격마법이 통하는 것도 아니었다.
매직미사일과 같은 공격마법들은 기사들의 검에 의해 일도양단 되ㅏ었고, 파이어 볼과 같이 육중한 파괴력을 가진 마법은 와이번의 기동성을 따라가지 못했다.
엘프들의 마법에 몇 마리의 와이번이 추락하긴 했지만, 대부분은 갑벼게 피할 수 있었다.
능숙하게 와이번을 다루는 그들에게 엘프의 고지식한 공격은 큰 위협이 안 되었다.
"크흐흐. 풀이나 뜯어먹는 초식동물에게 네르갈 기사단의 힘을 보여주어라!"
바일 후작이 명을 내리자 회색 와이번들은 둘씩 짝을 지어 성벽 위를 종횡무진, 휩쓸기 시작했다.
와이번들이 날개를 퍼덕이며 엘프들의 시야를 방해하자, 그 사이 와이번에 타고 있던 드래곤나이트가 성벽 위로 뛰어 내렸다.
그들은 일제히 검에 마나를 끌어올리며 엘프들을 양단하기 시작했다.
성벽을 가득 채우던 엘프들도 검을 빼들고 대항했지만, 숙련된 기사들의 공격엔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네르갈 기사단이 엘프들을 공격하는 사이, 필립 공작은 전군 돌격을 외쳤다. 피네스의 화려한 화염마법을 시작으로 병사들이 파도처럼 트라우마를 향해 돌진했다.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를 이용한 이러한 양동작전은 비교적 간단한 전술임에도 상당한 위력을 과시했다.
엘프들이 네르갈 기사단에게 정신이 팔려 있는 바람에 반란군의 보병들은 성벽까지 쉽게 접근할 수 있었다.
성벽에 사다리가 설치된 데다,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엘프들이 바호크의 회색 와이번들에게 고전하고 있는 터여서 모든 적을 막아내기엔 무리가 있었다.
급기야 반란군이 성벽의 일부를 점거하고 말았다. 거점을 확보하자 성안으로 침투하는 반란군의 수가 기하급수적으로 증가했다. 이대로는 트라우마가 함락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때, 성벽이 열리며 일단의 기사들이 맹렬한 기세로 달려 나왔다.
루멘 백작이 이끄는 트로웰 기사단이었다.
비장한 각오로 나선 그들은 검과 창에 아지랑이 같은 기운을 뿜어내며, 성벽에 새카맣게 달라붙은 반란군을 칼로 물을 베듯 반으로 가르며 지나갔다.
마상 기사단의 위력은 출중했다.
기사단이 밀집해 있는 병력의 한가운데를 지나가자, 찢어질 듯한 비명이 터지고, 사방으로 피가 난무했다. 렌스에 찔리고 검에 당한 시신은 그나마 양호했다.
말발굽에 으스러진 시신은 전신이 걸레처럼 처참하게 뭉개져 차마 눈을 뜨고 볼 수 없을 지경이었다.
트로웰 기사단의 활약으로 성벽을 오르던 반란군의 기세가 잠시 주춤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글로리 후작은 즉시 다수의 병력과 함께 성벽으로 뛰어 올라갔다.
"이놈들. 감히 공국의 기사가 본국에 검을 들이댄단 말이냐. 네놈들의 부덕함을 내 검으로 산산이 쪼개 놓으리라."
글로리 후작이 일갈하며 검을 뽑아 올리자 무시무시한 오러블레이드가 무려 4, 5미터나 일어났다.
소드마스터가 검을 빼내들자 네르갈 기사들은 사시나무 떨듯이 벌벌 떨었다. 모두들 소드익스퍼트의 실력자들이지만 감히 소드마스터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글로리 후작이 검강을 뿌릴 때마다 3, 4명의 네르갈 기사들이 피를 뿌리며 쓰러졌다.
목숨을 도외시한 트로웰 기사단과 소드마스터인 글로리 후작의 활약으로 반란군의 기세가 주춤해졌다.
유리했던 전황이 일순간 휘청거리자 필립 공작은 즉시 행동을 개시했다.
트라우마에서 트로웰 기사단이 나서자 그는 즉시 이프리트 기사단을 출동시켰다. 블랙나이트에게 상당한 피해를 입었지만, 아직 이프리트 기사단의 전력은 트로웰 기사단을 능가했다.
먼지를 부옇게 일으키며 말을 달린 이프리트 기사단은 보병들을 거침없이 베어 넘기고 있는 트로웰 기사단의 배후를 덮쳤다.
"노인들에게 전장의 주인이 누구인지 확실히 보여 주어라."
"우와아아아아아!"
지금까지 별 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던 이프리트 기사단은 들끓는 소음을 내며 벌떼처럼 달려들었다.
"커헉."
"윽."
삽시간에 트로웰 기사단의 후미가 무너졌다.
급조한 트로웰 기사단에 비해 이프리트 기사단의 전력이 원래부터 크게 높았다. 거기다 수까지 많은 상황이 되니 트로웰 기사단은 전혀 상대가 되지 않았다.
붉은 기사들이 가위로 천을 가르듯 지나가자 트로웰 기사단의 진형은 그대로 무너지고 말았다.
당황한 루멘 백작은 급선회하며 맞서려 했지만, 상황이 좋지 못했다. 어느새 이프리트 기사단에게 포위되고 말았다
"흐흐흐. 후멘 백작. 쥐새끼처럼 굴속에 숨어 있더니 드디어 만났구료."
이프리트 기사단장의 쿨 후작이 괴소를 흘렸다. 루멘 백작은 분노로 붉게 변한 얼굴로 호통을 쳤다.
"네 이놈. 감히 후작이란 놈이 왕실을 전복하고 반역을 꽤하려 하는 것이냐!"
"허. 후작에게 백작이 그런 막말을 해도 되는가? 상하관계가 어지러운 것은 자네도 마찬가지로군."
루멘 백작은 분통이 터져 입 밖으로 심장이 쏟아져 나올 지경이 었지만, 아무리 악을 써도 이프리트 기사단의 포위를 벗어날 수 없었다.
격전의 시간이 더할수록 트로웰 기사단의 힘은 약해져만 갔다.
다들 전장에서 뼈가 굵은 백전노장이지만, 아무래도 체력이 딸렸다. 그에 반해 이프리트 기사단은 시간이 갈수록 힘이 솟는 듯, 고양이가 쥐를 가지고 놀 듯 여유롭게 트로웰 기사단을 농락했다.
트로웰 기사단이 이프리트 기사단에 발목을 잡히자, 잠시 주춤했던 보병들이 다시금 활발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사다리에 새카맣게 달라붙어 성벽을 오르고, 일부의 병사들은 성문을 무너트리기 위한 공작을 벌였다.
글로리 후작의 선전으로 어느 정도 전력을 회복한 엘프들이 뒤늦게 화살을 날리며 분전했지만, 이미 전세는 반란군 쪽으로 많이 기운 상황이었다.
게다가 압도적인 무위로 반란군고 ㅏ드래곤나이트들을 베어 넘기던 글로리 후작마저 의외의 복병 때문에 주춤하게 되었다.
까마득한 성벽 위를 평지를 밟듯 쉽게 오른 그 자는 거친 숨을 가다듬는 글로리 후작을 향해 얄팍한 웃음을 보였다.
"쿠쿠. 이거 오랜만입니다. 후작님."
"살렘!"
글로리 후작의 앞을 가로막은 것은 아이린 왕국의 또 다른 소드마스터, 살렘이었다.
"쿠후후. 아무래도 후작님은 사람을 학대하는 걸 즐기시는가 봅니다. 모자란 사람들과는 이제 그만 놀고 수준에 맞는 사람끼리 놀아보는 게 어떻겠습니까. 쿠쿠."
"그것도 나쁘지 않겠군."
나지막한 음성으로 대답한 글로리 후작은 천천히 검을 비껴들었다.
글로리 후작과 살렘 후작이 성벽 위에서 검을 맞댄 그 순간, 우장한 펄럭임과 함께 한 떼의 검은 무리가 트라우마 상공을 수작으로 날아올랐다.
병규가 지휘하는 블랙나이트였다.
회색 구름 사이로 힘차게 솟구친 검은 드래곤나이트들은 벌통을 급습한 말벌 떼처럼 네르갈 드래곤나이트들을 가차없이 몰아쳤다.
퀴니에 의해 강화된 검은 와이번들은 바호크의 회색 와이번들보다 월등히 크고 기운도 훨씬 강했다. 질풍처럼 현란하게 휘돌며 활공중인 회색 와이번의 몸통을 부딪히면, 쿠웅 하는 묵직한 소음과 함께 회색 와이번은 구슬픈 괴성을 지르며 지면으로 떨어졌다.
같은 드래곤나이트였지만 와이번의 힘과 능력만으로는 비교가 되지 않았다. 또한 와이번에 동승한 엘프들은 화살과 마법으로 네르갈 드래곤나이트들을 괴롭게 했다.
하지만 네르갈 드래곤나이트들도 결코 만만한 적은 아니었다. 그들은 수적인 우위와 함께 100년 이상의 전통을 자랑하는 와이번 조종술로 블랙나이트의 맹공을 효과적으로 막아냈다.
오히려 편대를 이뤄 비행하며 소수에 불과한 블랙나이트들은 조직적으로 상대했다.
병규가 홀로 10여 기의 회색 와이번을 추락시키는 눈부신 전적을 보엿지만, 그 사이 블랙나이트들도 5기나 추락하고 말았다.
더 이상 와이번을 추가할 수 없는 입장인 트라우마로서는 5기의 와이번이 추락한 것은 치명적인 것이었다.
병규는 이를 악 물었다.
상황은 암울하기만 했다.
트로웰 기사단은 이프리트 기사단에게 야금야금 무너지고 있었고, 성벽 위의 엘프들은 반란군의 보병들과 치열한 혈전을 벌이고 있었다.
워낙 다급한 상황이라 더 이상 엘프들의 화살 지원은 바랄 수 없는 상태다.
더구나 불가능한 임무를 매번 성공으로 이끌던 그의 드래곤나이트들조차 갑작스럽게 난입한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에 의해 사면초가의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은 포기한다.’
그들을 잡고 있어 봤자 희생만 커질 뿐이다.
원래부터 공중전은 저들이 강했다.
100년 역사의 바호크의 저력에 비해 이쪽은 몇 개월 만에 급조된 어설픈 존재일 뿐이다.
‘그럼 뭘 공격하지?’
병규는 상공으로 높이 오르며 전장을 쭉 훑었다.
성벽 쪽은 적아가 한데 뒤섞여 처절한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덩치가 큰 와이번으로 쓸면 적과 함께 아군까지 피해를 입을 것이다.
어지러운 전장을 살피던 그의 눈이 현묘한 빛을 발했다.
마침내 적당한 표적을 발견한 것이다.
"목표를 바꾼다. 개별 전투를 삼가고 모두 밀집대형으로. 제비비행으로 전환하여 적의 이프리트 기사단을 밀어버린다. 비상!"
병규의 명령은 엘프들을 통해 즉시 모든 드래곤나이트들에게 전달되었다. 산개한 채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을 상대하던 검은 와이번들이 일제히 고도를 높이며 전장을 빠져나갔다.
네르갈 드래곤나이트들이 기성을 지르며 쫓아왔다.
높은 상공에서 네르갈의 드래곤나이트가 솟구치는 모습을 내정하게 바라보던 병규가 힘차게 외쳤다.
"작렬!"
15기의 블랙나이트가 날개를 반쯤 접은 채 일제히 수직으로 떨어졌다.
쉬이이이익!
잘 갈린 칼처럼 수십 기의 검은 와이번들이 지면으로 내리꽂히자 거친 돌풍과 몸서리쳐지는 파공음이 장막처럼 일었다.
그것은 검은 구름 사이를 명멸하던 검은 뇌전이 지상으로 작렬하는 것처럼 장엄한 광경이었다.
검은 와이번들의 수직하강으로 생긴 돌풍은, 날개를 퍼덕거리며 고도를 높이던 회색 와이번들에게 직격탄이 되었다. 바람에 휩쓸린 와이번들은 균형을 잃고 살 맞은 기러기처럼 지면으로 곤두박질쳤다.
"제비기동!"
수직으로 떨어지던 와이번들이 병규의 명령에 따라 물 찬 제비처럼 지면에 납작 붙어 초고속 비행을 했다.
이것이 최근 기사단이 훈련한 제비 활공이다.
와이번의 표피가 화살로도 뚫리지 않는다는 것에 착안하여 만든 활공 기술로 돌진하는 기사단을 헤집거나 촘촘하게 짜여진 병단의 진형을 무너뜨리는 데 큰 효과를 발휘했다.
실제로 제비 기동은 준비동작 이외의 모든 행동을 병규가 직접 제어했다. 이처럼 급작스런 선회는 인간의 능력으론 컨트롤이 불가능했다. 그래서 병규는 자신이 직접 와이번에게 명령을 내리는 방법을 고안했고, 몇 번의 준비과정을 통해 실전에서 써먹을 수 있게 되었다.
눈부신 동작으로 날아간 와이번들은 잡초를 베듯 이프리트 기사단의 머리 위를 스치며 지나갔다.
말들이 뒤집히고, 붉은 갑옷을 입은 기사들은 허공을 날아지면에 곤두박질쳤다. 순서대로 한 마리씩 이프리트 기사단 위를 지나가니 거센 바람과 함께 모래가 구름처럼 일어나며 폭풍이 몰아쳐 왔을 때와 같은 위력을 떨쳤다.
여유롭게 트로웰 기사단을 몰아쳐 가던 이프리트 기사단은 혼란에 빠졌다. 그 사이 트로웰 기사단은 포위망을 뚫을 수 있었다.
"또 신세를 졌군."
루멘 백작은 허공을 가르는 검은 와이번들을 올려보며 진한 미소를 보였다.
"좋아. 드래곤나이트들에게 구원받은 이 목숨, 왕국의 미래를 위해 한껏 불살라 주겠다.
호탕하게 웃는 그는 랜스를 옆구리에 낀 채, 성벽을 오르는 반란군을 향해 말을 다렸다. 살아남은 트로웰 기사단이 그 뒤를 따르자, 물밀듯이 밀려들던 보병의 흐름이 흐트러졌다.
"좋았어."
트로웰 기사단의 거침없는 돌격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가 네르갈 드레곤나이트를 포기하고 이프리트 기사단을 노린 것은 트로웰 기사단을 자유롭게 풀어주기 위해서였다. 자고로 보병의 천적은 궁병과 기마병이라고 할 수 있다. 궁병인 엘프들이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에게 손발이 묶인 이상 유일하게 보병들을 벨수 있는 것은 마상 기사단뿐이다.
물론 압도적인 숫자를 자랑하는 반란군의 보병군에 비해 트로웰 기사단의 전력은 보잘것없었다. 하지만 적어도 사다리를 통해 성벽으로 기어오르는 것만은 저지할 수 있었다.
이렇게 되자 성벽에는 고전을 면치 못하던 엘프들도 어느 정도 안정을 되찾고 화살을 날릴 수 있게 되었다.
"재빠른 놈들."
바일 후작은 검은 와이번을 지휘하는 병규의 빠른 움직임에 이를 갈았다. 설마 불리한 상황에서 그런 판단을 내릴 줄이야.
확실히 검은 드래곤나이트의 움직임은 효과적이다. 만약 그때, 이프리트 기사단을 급습하지 않고 공중전만을 고집했다면 결국 자멸하고 말았을 것이다.
무릇 전쟁이란 강한 상성을 가진 부대끼리 교전을 붙어야 이득을 챙길 수 있다.
보병보다는 창병이 기마병을 대적하기 편하고, 방패병이 궁병을 상대하기 수월한 것은 이미 이드라센에 널리 알려진 전술로 기본이라 할 수 있엇다.
"흥. 하지만 우리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를 너무 얕본 것 같군."
바일 후작은 휘하의 드래곤나이트 부대를 2부대로 나눠서 한쪽은 블랙나이트들을 상대하게 하고, 나머지 한 부대로는 성벽의 엘프들을 공격하게 했다.
아직 많은 수의 드래곤나이트가 남아 있었음으로, 병력을 두 개 부대로 나눈다 해도 전력에는 큰 차질이 없었다. 하지만 드래곤나이트들이 무리를 지으며 좌우로 흩어지기도 전, 후작의 저택 깊숙한 곳에서 무시무시한 저력을 간직한 인물들이 텔레포트 마법진을 통해서 트라우마로 이동하고 있었다.
푸른 로브를 뒤집어쓴 그들은 왼쪽 가슴에 빛에 휩싸인 탑의 그림이 그려져 있었다.
중립을 고집하던 마탑이 드디어 움직인 것이다.
"늦었다. 망할 할망구."
텔레포트 마법진 앞에서 초조한 기색으로 서 있던 필라이트는 올센을 보자마자 냅다 언성을 높였다. 근엄한 표정으로 마탑의 제자들을 이끌던 올센은 그의 욕지기에 대뜸 인상을 구기고 말았다.
"미친 쭈구렁바가지 같으니라고. 이 몸이 노구를 이끌고 손수 찾아왔으면 만세를 부르며 환영하지는 못할망정······."
"아 됐어. 지금은 할마탱이와 말씨름할 때가 아니야. 빨리 올라가세. 상황이 급하게 됐어."
"그렇게 심각한가?"
필라이트의 급한 표정을 읽은 올센이 걱정스레 한마디 물었다.
"망할 필립 녀석이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를 끌어들였네."
"감히 그 망종 녀석이 왕국의 땅에 버러지 같은 공국 녀석들을 불러왔단 말이냐!"
올센의 얼굴에 노기가 어렸다.
마탑이 지금까지 내전에 관여하지 않은 것은 같은 민족간의 상잔이라는 이유에서 였다. 하지만 필립 공작이 공국의 드래곤나이트를 끌어들이 이상 상황은 급변해 버렸다.
"고독 때문이 아니라도 녀석을 용서할 수 없게 되엇군."
은은한 분노를 토하며 올센은 필라이트가 안내하는 계단을 따라 지상을 올랐다. 로브를 뒤집어쓴 자들이 그녀의 뒤를 소리 없이 따랐다.
지상에 올라간 올센을 처음으로 맞은 것은 거친 함성과 찢어질 듯한 비명소리였다.
하늘은 온통 잿빛 드래곤나이트로 뒤덮여 있었고, 성벽엔 엘프와 반란군의 병사들이 뒤섞인 채, 난전을 벌이고 있었다.
생지옥의 일면을 들여다본 것만 같은 참혹한 광경이었다.
멍한 눈으로 하늘을 날고 있는 회색 드래곤나이트들을 바라보던 올센은 두 손을 지팡이 위로 올리며 몸을 떨었다. 그것은 분노만큼이나 가슴 아픈 우울함이었다.
같은 동족끼리 상잔하는 비극적인 풍경, 그리고 그 잔인한 광경 속을 유유히 날고 있는 바호크 공국의 드래곤나이트들.
"감히 공국의 부정한 종자들이 성스러운 아이린 왕국을 더럽히다니"
극도로 노한 올센은 파리한 안색으로 지팡이를 높게 들어올렸다.
"나도 한 손 거들지."
필라이트가 그녀의 옆에 서며 두 눈을 감았다.
올센을 따라오 자들이 병풍처럼 그녀를 둘러싼 채 일제히 주문을 암송했다. 나지막한 주문이 흘러나오더니 칙칙한 빛깔의 로브가 풍선처럼 부풀어 올랐다.
시작은 올센이었다.
그녀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며 천공을 불태울 죽음의 구름을 불러일으켰다.
"황혼을 불태우는 불꽃의 축제여."
맑던 하늘에 뭉게뭉게 먹구름이 일어나더니 이내 지옥의 업화와 같은 시뻘건 불꽃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그와 함께 푸른 로브를 뒤집어쓴 마법사들이 일제히 불과 얼음등의 화려한 마법들을 토해 내기 시작했다. 파문처럼 일어난 화염과 냉기의 기운은 색색으로 하늘을 뒤집어 놓았다.
거만한 기세로 날고 있던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에게 이것은 재앙이었다.
"피, 피해라!"
바일 후작은 발악적으로 고함을 토해 냈다. 하지만 기수를 돌리기엔 지상에서 쏘아낸 마법들의 위력이 너무도 엄청났다.
키에에에엑!
쿠웨웩
와이번들은 통째로 통구이가 되어 버렸고, 그 위에 탄 드래곤나이트들은 비명도 지르지 못한 채 장렬하게 산화되었다.
눈 깜작할 사이에 바호크가 자랑하는 드래곤나이트 50여 기가 마탑의 마법병단에 의해 재가 되어 버렸다.
마지막 마무리는 하얀 수염을 펄럭이는 대마법사 필라이트였다.
필라이트는 지팡이를 하늘로 향해 들어 올리며 창연한 목소리로 주문을 암송했다.
"천 공 을 가 르 는 푸 른 번 개 여. 체 인 라 이 트 닝 (Chain Lightning)!"
촤아아아악!
지팡이 끝에서 눈부신 섬광이 뻗쳐 나가 허공에 산개해 있던 드래곤나이트를 강타했다. 유감스럽게도 드래곤나이트의 갑옷은 금속이었고, 섬뜩한 섬광을 토하는 뇌전이 가장 좋아하는 먹이였다.
뇌전은 먹이를 본 이리 떼처럼 회색 와이번들 사이를 정신없이 오갔다.
크웨에엑!
키에에에에에에!
"크악!"
"으악!"
6서클의 뇌전을 맞은 와이번들과 드래곤나이트가 비명과 함께 숯덩이가 되어 지상으로 추락했다.
단 한 번의 마법으로 5기의 드래곤나이트의 즉사했고, 10여 기의 와이번과 드래곤나이트가 감전이 되어 균형을 잃는 등 엄청난 파급효과를 낳았다.
아무리 드래곤나이트들이 마법에 내성을 가지고 있다 해도 높은 서클의 마법에까지 무적인 것은 아니었다.
게다가 무거운 중장갑을 착용한 벼락은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놀란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은 급히 고도를 높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
마법사들의 일제 공격으로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은 일시 몰아낼 수 있었다. 하지만 반란군의 보병들은 여전히 줄기차게 성벽으로 기어오르고 있었다.
엘프 궁병들은 검을 빼어들며 저항했지만, 아직 부족한 점이 많았다.
성난 파도처럼 밀려드는 반란군의 2만 병력은 끝이 보이지 않는 대해인 양 끊임없이 밀려들었다.
그때, 홀연히 한 사람이 성벽 위로 올랐다.
눈부시게 하얀 백발을 찰랑이며 성벽에 오른 그는 하늘을 받치듯 두 손을 펼쳤다.
"대지여 두려워하라. 풍신께서 분노하셨으니 어찌 이를 감당하리오. 풍신의분노(風神之忿怒)!"
하늘을 받치던 그의 두 손이 분노한 신장처럼 대지를 찍어누르자 바람 한 점 없던 하늘에서 돌풍이 일며 바호크의 회색 와이번들을 날려보내고, 성벽을 오르던 병사들을 폭포처럼 쓸어 내렸다.
트라우마 성을 향해 물밀듯이 밀려들던 수많은 병사가 그 한 번의 술법에 출렁이며 파도치듯 넘어갔다.
"퇴, 퇴각! 고 서클의 마법사가 잠복하고 있다!"
소용돌이에 말려들었다가 간신히 균형을 잡은 바일 후작은 드래곤나이트의 퇴각을 외쳤다. 설마 저항군에 이렇게 높은 서클의 마법사가 있을 줄은 상상도 못했다.
처음의 체인 라이트닝도 대단했지만, 방금 전의 폭풍 마법은 상상을 초월할 지경이었다. 설마 바람만으로 수많은 병력을 날려버릴 수 있을 줄이야. 이런 엄청난 마법은 듣도 보도 못했다.
분하지만 지금은 돌아가서 전력을 보존할 때다.
‘젠장할. 필립 공작 녀석. 분명 마탑은 이번 내전에 참전하지 않는다고 장담해 놓고!’
마탑이 참전한 것을 알았다면 이렇게 무모하게 달려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거야 말로 적이 파 놓은 함정 위에서 한바탕 신나게 춤을 춘 격이 아닌가.
매서운 눈길로 성벽에 홀로 우뚝 선 백발의 청년을 노려본 바일 후작은 위태위태 수습한 드래곤나이트들ㅇ르 이끌고 반란군의 군영으로 기수를 돌렸다.
"아무래도 우리의 승부는 다음으로 미뤄야겠군요. 쿠후후."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가 요란스럽게 돌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던 살렘이 입가를 뒤틀며 글로리 후작에게 말했다.
그 사악한 미소.
정신없이 공방을 펼쳤음에도 살렘은 숨결 하나 흐트러지지 않았다. 반면 글로리 후작ㅇ느 쌕쌕 거친 숨을 토해 내고 있었다.
‘이 자, 정말로 강하구나.’
가히 인간이라곤 생각할 수 없는 무위다. 같은 소드마스터끼리의 대결임에도 수준 차가 크게 느껴졌다.
게다가 살렘은 아직 모든 힘을 드러내지도 않았따. 과연 그가 진심을 드러낼 경우 얼마나 더 강해질 것인가.
소름이 오싹 돋았다.
이런 자를 어떻게 상대해야 한단 말인가.
2만이 넘는 반란군을 눈앞에 두고도 눈 하나 깜빡이지 않고 태연했던 글로리 후작이다.
하지만 살렘, 그 한 명에게만은 온몸에 전율이 일 정도의 큰 충격을 받았다.
그러나 정작 살렘의 시선은 다른 곳을 향하고 있었다.
성벽의 저만치, 하얀 백발을 흩날리며 미려한 청년이 서 있었다.
"대단한 마법이군. 아니, 마법이 아닌가? 오히려 성력에 가까운 힘이군. 그와도 한 번 겨뤄봐야겠군."
살렘은 탐욕스런 눈빛으로 호랭이를 훑었다.
그때, 그의 시선을 느낀 것인지 백발의 청년이 살렘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한동안 탐색하는 눈빛으로 보더니 창백한 입술로 매혹적인 미소를 그려냈다.
그리고 속삭이듯 열린 입술, 전장엔 적아를 막론하고 함성과 비명이 난무하고 있어 바로 옆에서 소리를 지른다 해도 듣기 어려울 정도로 시끄러웠다.
그런데 저만치 떨어진 백발의 청년이 속삭이는 소리가 놀랍게도 그의 고막에 그대로 전해지는 것이었다.
"강하구나. 하지만 넌 결코 애송이를 이기지 못할 것이다."
"······!"
살렘의 몸이 떨렸다.
푸드드 진저리를 쳤다.
그것은 꿈에도 바라던 연인을 만난 것과 같은 희열이었다.
"아, 아주 좋아. 너무 매력적이야. 쿠쿠쿠."
혀가 빨간 입술을 훑었다.
표표히 불어오는 바람에 휘날리는 백발, 너무도 고혹적이다.
저렇게 탐스러울 수가.
최고조로 오른 흥분에 살렘은 비틀비틀 발을 옮겼다.
]스릉!
검을 빼들었다.
이미 주변의 상황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오직 백발의 그만이 보일 뿐이었다.
성큼성큼 걸어오는 그를 보면서도 냉정한 표정으로 쌀쌀한 한마디를 날릴 뿐이었다.
"쯧쯧. 성급하구나. 너의 상대는 애송이가 아니었던가. 순서가 엉망인 녀석이로다."
치명적일 정도로 솟구쳐 살렘의 온몸을 휘돌던 흥분이 싸늘하게 식었다. 피마저 딱딱하게 굳어버리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살렘은 살모사를 연상케 하는 눈으로 백발의 그를 쏘아보더니, 가벼운 움직임으로 성벽을 날아 내렸다.
"좋아. 당신 말대로 지금은 잠시 물러나 주지. 맛있는 요리는 애피타이저부터 천천히 즐기는 것이 좋으니 말이야."
살렘의 입가로 번들번들한 살기가 아렸다.
그대로 살렘은 물러났다. 미련이 남는지, 이따금씩 고개를 돌리는 모습에 독기가 서려 있었다.
"지독한 자로군."
오연한 표정으로 서 있던 호랭이는 살렘이 보이지 않는 곳까지 물러나자 그때서야 옅은 신음을 흘렸다.
별안간 안색이 백지장처럼 하얗게 탈색되었다.
참고 있던 숨이 한꺼번에 터지며 심장이 격하게 뛰었다.
비 오듯 흘러내린 땀이 등을 흠뻑 적셨다.
성벽에 올라선 채 고고한 풍취를 흘리던 모습은 가식이었다.
상식을 뛰어넘는 그 강인한 도술은 사실, 육체의 한계를 뛰어넘은 것이었다. 아무리 신선의 도를 얻은 그라지만 천재지변을 일으키는 것은 상당한 무리가 따랐다.
이드라센에 ‘기’가 넘쳐나지 않았다면 도술을 펼친 즉시 쓰러져버리고 말았을 것이다.
"괜찮은가?"
플라이 마법으로 날아온 필라이트가 걱정스럽게 물었다. 그의 눈동자에 놀람과 경이가 서려 있었다.
방금 전 호랭이가 펼친 신비한 마법, 필라이트는 꿈에도 바라 마지않던 8서클을 넘어 궁극의 그 무언가를 본 기분이었다.
설마 이 친구가 이렇듯 장구한 힘을 숨기고 있었을 줄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안색이 좋지 못하군. 일어날 수 잇겠나?"
필라이트가 다시 물었다.
호랭이는 힘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자꾸만 눈이 감겼다.
하지만 이대로 누울 수는 없었다. 아직 할 일이 남아 있기 때문이다. 오늘 내로 하지 않으면 내일은 더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갈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 일을 오늘 중으로 끝내야만 했다.
‘잔혹한 전쟁도 내일이면 끝이겠구나.’
핏빛 노을을 바라보며 호랭이는 예언과 같은 말을 조용히 뇌까렸다.
"멍청한 녀석들. 고작 그 정도 피해에 꼬리를 말다니."
집 떠난 철새들처럼 주둔지로 돌아오는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을 보며 필립 공작은 분통을 곱씹었다.
그대로 밀었어야 했다.
비록 생각지도 못한 마탑의 등장으로 드래곤나이트들의 피해가 커질 것은 자명한 상황이긴 했지만, 이 기세를 그대로 살리기만 했어도 오늘 내로 트라우마 성을 무너뜨릴 수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제는 이미 늦어 버렸다.
드래곤나이트의 갑작스런 난입에 당황하던 트라우마도 이젠 체제를 정비하며 본격적으로 대항하기 시작했다.
"마탑이 이렇게 갑자기 트라우마의 손을 들어 줄 줄이야."
중립을 선언한 마탑이 이렇게 중욯나 시점에서 전장에 나타날 줄은 예상하지 못하고 있었다.
분하긴 하지만 따질 만한 상황이 아니다.
마탑은 이번 전쟁을 내전이라는 이유로 참전하지 않았다. 하지만 오늘 필립 공작은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를 사용했다.
이것으로 인해 마탑이 이번 내전에 참전할 명분을 얻게 된 셈이다.
"망할 마법사 놈들. 내가 그렇게 부탁할 때는 들은 척도 않더니. 결국 네놈들도 아이린 왕가에 빌붙어 사는 말종들에 불과하구나. 오늘의 빚은 내 잊지 않고 몇 배로 갚아주마."
필립 공작은 이를 갈며 병력을 철수시켰다.
트라우마 공성전 이래, 가장 많은 희생자가 생겼던 ‘회색 드래곤나이트 난입전’은 이렇게 막을 내렸다.
거뭇하게 내려앉은 트라우마 성의 모습은 참혹 그 자체였다.
성 주위로 수를 헤아릴 수 없는 시신들이 산을 이루었고, 흐르는 피는 내가 되어 붉은 모래를 피로 물들였다.
양측의 군대는 그 처참한 광경을 불안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아무도 말을 하지는 않았지만, 모두는 알수 있었다.
내일의 전투에서 모든 것이 결정될 것임을.
피를 말리던 공성전도 이제 얼마 남지 않은 것이다.
"간신히 버텼군."
반란군이 후퇴하자 글로리 후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위험했던 순간들을 떠올리면 지금도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흘러내린다. 하지만 이렇게 쉬고 있을 여유가 없었다.
그는 검에 기대어 몸을 일으키며 지휘관들에게 어수선한 성내를 수습하게 했다.
수많은 사상자가 있었다.
트라우마가 건립된 이래 가장 많은 사람이 죽었다.
특히 엘프들과 트로웰 기사단의 피해는 가히 치명적이라 말할 수 있을 정도였다.
성벽에 배치되어 있던 엘프들의 절반 가까이가 살렘과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에게 희생되었으며, 트로웰 기사단 역시 혼전 중에 병의 3분의 2 이상을 잃어 더 이상 기사단으로 존립할 수 없게 되었다.
단 하루 만에 트라우마의 전력이 절반 가까이 줄어든 것이다.
글로리 후작은 참담한 심정이었다.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가 참전할 줄이야.
전혀 생각지도 못한 일격을 얻어맞은 셈이다.
발 빠른 필립 공작의 면모에 감탄과 함께 탄식이 흘러나왔다. 하지만 그보다 더 그의 마음을 무겁게 하는 것은 살렘 후작의 엄청난 실력이었다.
그의 검에서 피 끓듯이 흘러나오던 광기의 오러블레이드. 그 오러블레이드 앞에선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만약 그가 처음부터 전면에 나섰다면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달라졌을 것이다.
"휴."
한숨이 새어 나왔다.
"정말이지 골치가 아프군."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한숨 뒤에 그의 입가로 찾아든 것은 의미를 알 수 없는 미소였다.
머리가 터질 것처럼 복잡했지만 어찌된 이유에선지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불가능한 일에 도전하는 것이야말로 사나이의 로망이 아니던가.
"이래서 전쟁터는 싫어. 괜히 남자의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들거든. 후후후."
자조 어린 웃음을 흘린 글로리 후작은 우왕좌왕 어쩔 줄 몰라 하는 지휘부를 다그쳐 상황을 정리하게 하였다. 오늘의 전쟁은 끝났지만, 곧 내일의 전쟁이 닥쳐올 것이다.
밤늦은 시각.
다친 기사 대원들을 돌본 병규가 저택의 지하에 있는 마법연구실을 찾았다.
"밖의 일은 대충 수습이 된 게냐?"
한참 연구에 몰두하고 있던 필라이트가 고개를 비스듬히 들며 물었다.
"워낙에 피해가 커서 아직 부산합니다. 후작님께서 정신없이 뛰어다니고 계시니 곧 정리가 되겠죠."
"쯧쯧. 글로리 녀석도 참 고지식해.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들이 그렇게 날뛰는 데도 연락을 않고 있다니. 진작에 날 불렀으면 그렇게 고생하지도 않았을 것을."
안타까운 마음에 필라이트는 나직하게 혀를 찼다.
"연구에 방해가 될까 봐 그랬겠죠. 게다가 할아버지가 마법사의 탑을 끌어들일 줄은 상상도 못했잖아요. 할아버지야말로 그런 좋은 소식이 있었으면 진작에 알려주시지 그러셨어요."
"마탑의 일은 어떻게 진행될지 확신할 수 없는 사항이었다. 괜히 헛된 바람을 주었다가 나중에 일이 틀어지면 곤란하지 않겠느냐. 그건 그렇고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가 반란군의 뒤를 봐주고 있다니. 걱정스러운 일이구나."
"전에 레종 공주와 바호크를 찾아갔을 때도 바흐만 대공은 우릴 필립 공작에게 넘길 음모를 꾸몄죠. 아무래도 필립 공작과 바흐만 대공 사이에 모종의 계약이 있는 모양입니다."
"후에 왕국을 되찾아도 바호크와 대립하게 될 수도 있다는 뜻이군."
"어쩔 수 없는 일이죠. 그나저나 고독의 해독약은 진전이 좀 있었어요?"
"다행히 준비가 끝난 모양이구나."
필라이트는 꽤 큼직한 플라스크 2개를 들어 보였다.
"호오."
병규는 흥미 가득한 눈을 플라스크 안을 들여다보았다.
플라스크 들 안에는 하얀 액체가 가득 들어 있었다. 그런데 자세히 보니 그것은 액체가 아니었다. 흔들지도 않았는데도 하얀 덩어리들이 스멀스멀 움직였던 것이다.
병규는 안력을 집중했다.
"곤충 같은 것들이군요. 굉장히 작은데요? 머리카락보다 훨씬 가늘고 이상하게 생겼어요."
"일종의 기생충 같은 것이라고 하더구나. 이 녀석들은 사람의 피부를 뚫고 들어가서 혈관을 타고 몸 속을 돌아다닐 수 있다더구나."
"으스스한 얘기네요. 그런데 이 녀석이 고독과 무슨 상관이죠?"
"이 녀석은 사람에게 기생하는 게 아니야. 고독에 기생하도록 특별히 제조된 것들이지. 혈관을 타고 돌아다니다가 뇌 속에 있는 고독의 몸을 파고들지. 고독이 없는 경우도 상관없어. 이 기생충의 수명은 3일뿐이라 그 이후엔 부스러기처럼 가루가 되어 죽어버린다. 나중에 불순물과 함께 소변으로 배출된다더군."
"기생충으로 고독을 잡다니 호랭이다운 생각이네요."
병규는 마법연구실의 구석으로 고개를 돌렸다.
지하 연구실은 으슥하여 햇볕도 거의 들어오지 않았는데, 유일하게 그곳만은 천장에 작은 창이 달려 있었다.
그곳에 호랭이가 있엇다.
정좌한 채 창으로 흘러 들어오는 달빛을 받고 있었다.
"아직도 많이 안 좋아 보이네요."
"전투가 끝난 후로 계속이구나. 내가 봐준다고 해도 막무가내야. 저렇게 정신을 모으면 저절로 치유된다고 고집을 부리는구나."
필라이트는 혀를 쯧쯧 차며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불만스런 음성이었지만 그 속엔 호랭이에 대한 걱정이 하나 가득 묻어 있었다.
"사실일 거예요."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호랭이가 뭘 하고 있는 것인지 병규는 알고 있었다. 도가의 비전 심법으로 몸을 회복시키고 고갈된 기를 보충하고 있는 것이다.
이럴 때는 방해하지 않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이 해약을 어떻게 사용하면 되는 거죠?"
"그건 나도 잘 모르겠구나. 나중에 그가 깨어나거든 물어보도록 하자."
잠시 동안 병규는 필라이트와 잡담을 하며 시간을 보냈다.
창가에 달빛이 비스듬히 기울어질 때, 호랭이가 비로소 감은 눈을 뜨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괜찮으세요?"
병규가 밝은 표정으로 묻자 호랭이는 피식 웃으며 대답했다.
"녀석. 걱정했냐?"
병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아무렴요. 키우던 애완견이 아파도 주인은 슬퍼하는데, 하물며 호랭이가 아픈데 제가 걱정을 안 하겠어요?"
"어쭈. 잠자코 들어보니 내가 애완견이 된 기분인걸."
"후후. 뭐 말이 그렇다는 거죠."
"그나저나 네 녀석의 얼굴을 보니 궁금해 미칠 것 같다는 표정이구나."
"다 듣고 계셨네요."
병규는 하얀 벌레들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를 가리켰다.
"이건 어떻게 사용하는 거죠?"
"백고(白蠱) 말이구나. 사용법은 간단해. 그냥 고독에 중독괸 사람에게 뿌리면 된다. 필라이트에게 들었다시피 백고는 피부를 통해 침투하는 것이라서 말이다."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손으로 턱을 감싸며 잠시 생각했다.
"흠 농약처럼 살포하면 된다는 거네요. 그런데 만약 이 백고가 고독에 중독되지 않은 사람에게 침투하면 어떻게 되는 거죠?"
"괜찮다. 백고는 오직 고독에게만 반응하도록 되어 있으니, 3일이 지나면 몸 밖으로 배출 될 게야."
"그럼 됐네요."
병규의 표정이 밝아졌다. 하지만 호랭이의 설명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살포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 하지만 백고의 양이 많지 않다는 것이 말썽이야."
홀랭이는 심각한 표정으로 플라스크를 들어 보였다.
"이 정도의 양을 만드는 데 일 주일이 넘게 걸렸다. 고독은 확실하게 제압할 수 있지만 증식 속도가 빠르지 않구나. 마음껏 살포할 수 있는 양이 되려면 2주 이상이 더 필요할 텐데, 아무래도 그렇게 여유 있는 상황은 아닌 것 같구나."
"글로리 후작님의 말을 들으니 내일이 고비인 것 같던데요. 어쩔 수 없네요. 오늘밤에 쓰도록 하죠."
병규는 탁상에 걸터앉은 채 잠시 생각했다.
"한 가지 방법뿐이군요."
여러 모로 생각해 본 병규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그에 동참하듯 호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한 가지 방법뿐이다."
백고의 양은 턱없이 부족한데, 고독에 중독된 귀족들은 사방에 퍼져 있다. 농약처럼 살포할 수 있는 상황이니 방법은 하나뿐이다.
일일이 귀족들에게 뿌리는 수밖에 없다.
"네가 할 테냐?"
호랭이가 물었다.
"제가 더 빠르잖아요. 귀도 밝고요."
"그렇구나."
호랭이는 고개를 끄덕이며 그의 말을 인정했다. 하지만 마음만은 그다지 편치 않은 듯했다. 무리를 해서라도 자신이 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이 일엔 병규가 더 적합한 데다 그에겐 다른 볼일이 있었다.
"샤바가 있었다면 좀 더 수월했을 것을······."
안타까운 듯 호랭이는 혀를 끌끌 찼다.
백고를 이용한 이번 작전엔 은밀한 기동력이 필수였다.
그런 능력으로 단연코 샤바를 따라갈 위인이 없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샤바는 모종의 일로 퀴니와 함께 아마스 신성제국으로 떠난 상황이다.
사실 아쉬운 것은 그 뿐만이 아니었다.
샤바를 따라간 마일드의 일곱 사신과 퀴니를 신처럼 받드는 오크들. 만약 그들이 남아 있었다면 지금의 피말리는 전황은 좀더 수월하게 진행될 수 있었을 것이다.
"뭐, 어쩔 수 없죠. 없으면 없는 대로 할 수밖에요. 그럼 전 이 일을 후작님과 상의하러 가 볼게요."
"그래라. 난 이 친구와 따로 할 일이 있구나."
병규는 필라이트와 호랭이의 배웅을 받으며 지하 연구실을 나섰다.
백고가 든 플라스크를 들고 지하를 빠져나온 병규는 곧장 후작의 저택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한참 귀족들과 내일 있을 전투의 향방을 점치고 있던 글로리 후작은 바쁜 와중에도 그를 반갑게 맞았다.
"어서 오게."
"드릴 말씀이 있습니다."
병규는 단도직입적으로 용무를 밝혔다.
"네"
"알겠네."
짧게 말한 글로리 후작은 회의를 진행하고 있는 부관에게 간단한 지시를 내렸다.
"잠시 다녀오겠네. 회의는 계속 진행하도록 하고, 기록을 남겨 서재로 보고해 주게."
회의실을 나선 글로리 후작은 병규를 데리고 서재로 향했다. 드래곤나이트의 단장이 독대를 원하는 것이면 틀림없이 가벼운 사안이 아닐 것이라 판단한 것이다.
후작의 사무실엔 온몸에 붕대를 감고 있는 루멘 백작과 디스 남작, 그리고 아름다운 레종 공주가 자리하고 있었다.
"마침 다들 모여 계셨군요. 잘됐습니다."
어차피 불러 모을 사람들이었다. 이곳에 모여 있으니 수고로움을 던 셈이다.
"하하. 그래. 과연 드래곤나이트 기사단장이 무슨 볼일로 우리를 불렀는지 궁금하군."
글로리 후작은 너털웃음으로 분위기를 편하게 풀어냈다.
자리를 잡은 병규는 그들에게 호랭이가 만든 백고를 보여 주었다. 이어 부족한 백고를 이용한 작전에 대해 설명했다.
그의 말이 계속될수록 사람들의 얼굴에 감탄성과 경악이 터져 나왔다.
"모험이군."
글로리 후작은 짧은 말로 이번 작전에 대한 평을 내렸다.
병규의 작전이라는 것은 분명 도박에 가까운 성질의 것이었다.
특히 병규가 맡은 역할이 너무도 위험해 보였다.
하지만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금 단계에선 그의 방법이 최선이라는 것을.
간단하게 작전의 개요를 설명하면 ‘기상천외한 작전으로 적의 본진을 혼란케 하고 그 틈에 적진으로 잠입한다’ 라는 것이었다.
기발한 것은 와이번들을 이용해 적의 시선을 빼앗는 방법이었다.
오직 붉은 대지에서만 통할 수 있는 방법. 정말이지 엉뚱하고 놀라운 방식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문제는 그 이후였다.
적진에 홀로 침투하는 병규에게 지워진 짐이 너무 무거웠다.
글로리 후작의 우려에 병규는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언제 우리의 일들 중에 모험 아닌 것이 있었던가요?"
"하하. 하긴 자네의 영웅담은 언제나 위험천만한 모험들이었지."
너털웃음을 지은 글로리 후작은 병규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걱정스러운 말을 이었다.
"어쩌다 보니 항상 굳은 일은 자네가 맡게 되는군. 미안하네."
후작의 음성에서 진심이 묻어 나왔다.
아이린 왕국의 백성도 아닌 병규가 지금까지 너무 많은 일을 해주었다. 그리고 이제 다시 위험천만한 임무를 또 한 번 스스로 떠안으려 하고 있는 것이다.
"조심해요. 그래고 꼭 돌아와요."
병규의 손을 꼭 잡으며 레종 공주가 흐느끼는 듯 간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언제나 이 말밖엔 못하는군요."
하지 말라고 하고 싶었다.
가지말라고, 다른 사람에게 맡기자고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그가 아니면 할 수 없는 일.
보낼 수밖에 없기에, 그래서 더 괴로웠다.
전장으로 향하는 사람을 배웅하는 여인의 슬픔을 그녀는 이번 내전을 통해 뼈저리게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의 슬픈 음성에 병규는 일시 대답할 말을 못 찾고 당황했다.
어렵게 한마디 던진 것이라는 것이 고작 ‘괜찮아요.’ 라는 속삼임 정도였다.
솔직히 아이린 왕국의 내전은 그와 전혀 무관한 일이 아니었다. 내전의 이면에는 고독이 있었고, 그 고독은 지구에서 흘러 들어온 고대 중국의 주술사가 숨어 있다는 것을 말해 주고 있었기 때문이다.
호랭이가 책임감을 느끼듯이, 병규 역시 어느 정도 부담을 가지고 있었다.
능력이 없으면 모르지만, 그에겐 힘이 있다.
그것도 아주 독특한.
호랭이는 말했다.
할 수 있는데, 하지 않는 것은 죄라고.
그래서 병규는 아이린 왕국의 내전에 이토록 깊숙이 관여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살렘 후작에 대한 복수나 경애에 대한 수색도 어느 정도 이번 내전에 참여하게 된 동기가 된 것도 사실이다.
한편 다정한 모습을 보이고 있는 병규와 레종 공주를 보고 디스는 가볍지 않은 충격을 받았다.
펜을 쥔 손등에 힘줄이 툭툭 불거졌다.
하지만 그는 끝내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난 오직 아이린 왕국을 위한다는 상객뿐이다. 공주는 어릴 적 친구일 뿐이다. 그녀에겐 아무런 흑심도 없다. 단지······ 왕국을 위해서······ 그녀를 도울 뿐이다’
디스는 눈을 꾹 감은 채 암시를 걸 듯 속으로 같은 말만을 되뇌었다.
하지만 그의 얼굴 표정은 암울함이 느껴질 정도로 어둡게 가라앉아 있었다.
공주를 비롯한 측근들에게 백고를 이용한 작전을 이해시킨 병규는 곧장 저택의 후원으로 향했다.
그곳엔 그를 따르는 못느터들의 우리가 있었다.
크롸롸롸롸롸.
카드드드드.
멀리서 병규의 냄새를 맡은 와이번들이 시끄럽게 울어댔다.
그드드등.
끄어어어어.
후원이 가까워지자 새로운 소리들이 들렸다.
병규를 만나 졸지에 곰팅이가 된 트윈헤드 오우거와 지하철로 이용된 바 있는 자이언트 샌드 웜이었다.
그들의 울음소리에 병규는 작게 미소 지었다.
이상하게도 이 흉측한 마물들과 함께할 때면 언제나 마음이 따뜻해졌다.
머나먼 타국에서 고향사람을 만나 것 같은 편안함이었다.
"좋아. 마침 모두 모여 있었구나."
정신없이 울어대는 몬스터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 병규는 무릎을 꿇고 기다리고 있는 곰팅이의 어깨 위로 폴짝 뛰어올랐다.
곰팅이가 접었던 무릎을 폈다.
앉은 자리가 몇 미터나 높아졌다.
갑자기 몬스터들이 조용해졌다.
숙연히 고개마저 조아린 그 모습은 왕을 경배하는 광경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병규도 왠지 모르게 어깨가 으쓱해졌다. 목소리마저 나직하게 깔렸다. 어색할 것 같았지만 의외로 웅장한 분위기를 연출했다.
"내일 너희들이 해줘야 할 게 있다."
병규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밤은 깊어만 갔고, 그의 잔잔한 음성 역시 깊어만 갔다.
새벽 별이 떠오를 시각
잠깐 눈을 붙였던 병규는 기사들의 숙소로 향했다.
거침없이 숙소를 열고 들어간 그는 부관인 시즌 남작을 흔들어 깨웠다.
"다, 단장님?"
단잠을 깨운 불청객을 확인한 시즌은 급히 상체를 일으켰다. 병규는 그의 가슴을 밀며 나직한 음성으로 속삭였다.
"지금 즉시 기사들을 전원 후원으로 소집해줘."
시즌은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에 단호함이 어렸다. 병규가 부를 줄 이미 알고 있었다는 것 같았다.
병규의 소집 명령에 따라 저택의 후원으로 드래곤나이트들이 모였다. 모두들 내일 있을 마지막 전투에 대한 초조함 때문인지 눈동자에 긴장이 어려 있었다.
곰팅이의 어깨 위에서 느긋하게 기다리던 병규는 기사들이 다 모이자 편안한 자세로 작전 내용을 설명했다.
"아."
"그럴 수가."
설명을 들은 기사들과 엘프들 사이로 작은 술렁임이 일었다.
병규의 작전이란 것이 터무니없을 정도로 파격적이었기 때문이다.
"과연 와이번들이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요?"
시즌이 걱정스런 얼굴로 물었다.
그의 걱정도 무리가 아니었다.
병규는 너무도 엄청난 것을 와이번을 이용해 실어 나르란 주문을 했던 것이다.
"예전에 사냥 훈련을 시키면서 실험해 본 적이 있었다. 무리하지만 않는다면 괜찮을 거야."
병규는 자신만만하게 대답했다. 그의 태연한 태도에 불안해하던 기사들도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그때, 하이엘프인 카즈엘이 근심 가득한 얼굴로 그에게 물었다.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이번 임무는 너무 위험해요."
그녀의 걱정은 병규에 대한 것이었다.
이번 작전은 드래곤나이트들보다 기사단장인 병규의 책임이 막중했다. 모든 위험을 혼자 떠안으려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물론 괜찮지. 넌 아직까지 내가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전혀 모르는 것 같아. 이번 기회에 확실하게 보여줄게."
병규는 가슴을 내밀며 호탕하게 말했다. 물론 그녀를 안심시키기 위한 연극이었다.
그의 과장된 행동에 카즈엘은 더더욱 불안을 느꼈다.
결국 그는 무언가를 결심한 듯, 입술을 꼬옥 깨물었다.
"제가······ 함께하겠어요."
"안 돼!"
병규는 딱 잘라 거절했다.
물론 카즈엘은 반드시 같이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병규도 양보할 생각이 없었다.
"이번 작전이 위험한 것은 알아. 그럼에도 내가 하는 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야."
"저도 빨라요. 분명 도움이 될 거예요."
여러 번 설득했지만, 카즈엘의 고집은 완고했다.
결국 병규의 실력으로 그녀를 이해시키는 방법을 택했다.
그는 나뭇가지로 땅에 원 하나를 그렸다.
반경 3미터 정도의 작은 크기였다.
병규는 카즈엘의 손을 잡아끌며 그 원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저 달이 구름을 가릴 때까지 날 한번이라도 잡는다면 너와 함께 가겠어."
"정말이죠?"
"물론. 믿어도 돼. 단 마법이나 다른 꼼수를 쓰면 안 돼. 오직 빠른 몸놀림만으로 날 잡아야 해."
"물론이에요."
쉭!
말도 채 끝나기도 전에 카즈엘은 그를 향해 몸을 날렸다.
엘프들은 인간보다 몸놀림이 훨씬 빠른 편이다. 게다가 그녀는 엘프 종족 중에서도 가장 고귀하고 뛰어난 능력을 가진 하이엘프였다.
카즈엘이 전력을 기울여 몸을 날리자 들풀을 스치고 지나가는 산들바람처럼 가볍고 날렵하기 그지없었다.
"제법이네."
병규는 감탄했다.
하지만 생각보다 재빠른 그녀의 움직임에 조금 놀랐을 뿐이다. 잡힌다 싶은 순간 그는 슬쩍 발을 옮겼다.
쉬쉬쉭!
병규의 몸이 쭉 늘어나는 것처럼 보인 순간 이미 그는 카즈엘의 등 뒤에 서 있게 되었다.
"앗!"
돌연 병규가 사라지자 카즈엘은 순간적으로 중심을 잃었다.
"조심해야지."
병규가 그녀의 어깨를 잡아 주었다. 간신히 균형을 잡은 카즈엘은 숨을 헐떡였다. 큰 눈동자가 더욱 커져 순진한 사슴의 그것을 연상케 했다.
"저, 정말 빠르시군요."
"이미 말했잖아. 난 빠르다고."
"하지만 절대로 잡고야 말겠어요."
그녀는 두손을 꼭 쥐며 오기를 부렸다. 병규는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
"알고 있어요. 그럼 갑니다."
재차 몸을 날린 카즈엘은 병규의 빠른 움직임을 염두에 두고 무차별로 손을 뻗어왔다. 좁은 원이라는 상황을 적극 활용한 것이다. 하지만 병규는 아직 여유가 있었다.
그는 이번에도 그녀의 손이 가까이 다가올 때마다 기다렸다가 뒤늦게 슬그머니 발을 움직였다.
쉬쉬쉬쉭!
짧은 순간 그의 신형은 무려 7번의 변화를 보이며 그녀의 빠른 손놀림을 모조리 피해 냈다.
졸지에 헛손질을 한 셈이 되어 버렸지만 카즈엘은 포기하지 않았다.
계속해서 몸을 움직이며 손을 펼쳤다. 하지만 역시나 병규를 잡기엔 역부족이었다.
그는 신기루와 같았다.
잡힐 듯 잡힐 듯하지만 결코 잡히지 않았다.
고작 반경 3미터 정도에 불과한 작은 원안에서 병규와 카즈엘은 쫓고 쫓기며 정신없이 달렸다.
그리고 마침내 구름이 달을 가렸다.
"어때? 이젠 포기할 거지?"
무릎을 꿇은 채 거친 숨을 헐떡이는 카즈엘에게 병규가 물었다. 카즈엘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녀는 보통의 인간 여자들처럼 실없이 눈물을 흘리지는 않았다. 하지만 눈썹을 길게 내리깔며 실망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것은 자신에 대한 자책에 가까운 것이었다.
병규는 조심스레 그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실망하지 마. 날 위해서 네가 해줄 수 있는 일도 있잖니?"
기운을 잃고 주저앉았던 카즈엘이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신비한 눈으로 가만 병규를 바라보던 그녀는 고개를 끄덕여 보였다.
간신히 카즈엘을 위로하고 기사들을 돌보았을 때, 병규는 움찔 놀라야했다.
믿음직스럽던 그의 기사들이 어벙한 표정으로 입을 쩍 벌리고 있었던 것이다.
방금 전 보인 병규의 움직임에 다들 넋이 나간 것이다.
"단장님."
모두들 대신해 시즌 남작이 입을 열었다.
"인간이 맞습니까? 혹시 유령이나 뭐 그런 거 아니세요?"
엉뚱한 질문이었지만 모두의 생각을 대변한 말이었다.
"하하."
병규는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