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화 (65/102)

손님 타신다, 입 벌려라

치열한 공성전이 벌어진 다음 날, 병규는 해가 뜨자마자 드래곤나이트들을 이끌고 트라우마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검은 드래곤나이트들을 본 반란군은 소스라치게 놀랐지만, 정작 블랙나이트들은 트라우마 성을 포위한 반란군은 아랑곳하지 않은 채 북쪽을 향해 열을 지어 날아갔다.

긴장하고 있던 반란군의 지휘부는 이를 이상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직접적인 피해가 없었기 때문에 그냥 무시하고 넘어갔다.

설사 트라우마의 드래곤나이트들이 수도를 직접 공략하는 것이라고 해도 고작 20기다. 겨우 20기의 드래곤나이트로 대체 무슨 일을 도모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러나 지휘부의 그런 안일한 생각 때문에 이 일은 필립 공작에게 보고되지도 않았고, 그 때문에 반란군은 더더욱 어려운 형세에 놓이게 되었다.

블랙나이트들은 수도 유리스 방향으로 시원하게 날았다.

비록 방향을 수도로 잡았지만, 그렇다고 반란군에 점거된 수도를 급습할 생각은 아니었다.

아무리 주력이 빠졌다지만, 수도엔 몇천을 헤아리는 수도방위군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들과 정면 승부를 겨루는 것은 용맹한 블랙나이트들로서도 자살행위와 다름이 없었다.

블랙나이트가 노리는 것은 수도에서 출발한 어떤 무리였다.

"단장님. 저쪽에 보입니다."

동북방향으로 살피던 시즌이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가 지시하는 방향을 바라보니 고란 산맥 자락을 타고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수레들이 꼬리를 길게 늘이며 이동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중요한 물품인 듯, 다수의 병력이 수레 행렬을 보호하고 있었다.

"저것이군."

"네. 반란군의 보급부대입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와이번의 기수를 돌리며 병규는 출정하기 전, 글로리 후작이 했던 말을 떠올렸다.

‘반란군의 지원부대가 고란 산맥을 넘어오고 있다는군. 보급물자가 반란군에게 지급되면, 전세는 급격히 필립 공작 쪽으로 기울게 되네. 자네가 막아주게.’

전장에서 드래곤나이트의 가장 큰 장점은 지형에 구애하지 않는 광범위한 이동능력이다.

성을 둘러싼 반란군의 포위망을 뚫고 고란 산맥까지 갈 수 있는 것은 병규가 지위하는 블랙나이트가 유일했다.

그런 이유로 해가 뜨자마자 병규를 위시한 블랙나이트가 급하게 출동한 것이다.

"필립 공작도 많이 급했던 모양이군."

부산하게 이동하는 적의 보급부대를 보며 병규는 피식하고 웃었다. 그의 말대로 필립 공작에게 식량과 무기의 보급은 절실한 사안이었다.

고란 산맥에서 블랙나이트의 습격으로 식량을 모두 소실한 필립 공작은 즉시 수도로 지원을 요청했다. 이대론 트라우마를 포위하더라도, 성안의 공주일당이 지치기 전에 반란군의 식량이 먼저 떨어질 것이다.

필립 공작의 독촉이 얼마나 심했던지, 식량과 무기를 실은 보급 부대는 10일 밤을 꼬박 새며 강행군을 하는 중이었다.

정보길드인 ‘주시자의 눈’ 을 통해 보급부대에 대한 정보를 입수한 글로리 후작은 블랙나이트에게 출동 명령을 내렸다. 날이 밝자마자 북향한 블랙나이트는 비교적 쉽게 보급부대를 찾아낼 수 있었던 것이다.

"좋아. 단숨에 끝낸다. 쐐기 진형으로 돌격!" 

붕. 부우웅. 부웅.

허공을 가른 드래곤나이트들이 검은 화살처럼 수레 위로 날아들었다. 놀란 병사들이 화살을 날리고, 마법사는 갖은 마법으로 응전했다.

하지만 블랙나이트는 이미 이런 식의 공격에는 충분히 단련이 되어 있었다. 드래곤나이트와 엘프가 한몸이라도 된 듯, 와이번을 조종하고 활을 날리니, 보급부대의 호위군은 속절없이 쓰러져 갔다.

엘프들의 활과 마법으로 순식간에 궁병들과 마법사가 제거되었다. 일차 목표가 제거되자 병규는 즉시 와이번에서 뛰어내렸다.

"저, 저놈이 드래곤나이트의 대장이다. 놈만 사로잡으면 살 수 있다."

병규의 화려한 갑옷을 본 누군가가 찢어지는 목소리로 외쳤다.

햇살에 번뜩이는 수십의 창끝이 지독한 살기를 머금고 있었다.

하지만 병규는 밀물처럼 밀려드는 병력 앞에서도 태연하기만 했다.

"일보에 들을 넘는다."

병규는 산보를 하듯 가벼운 걸음으로 병사들 사이를 지나갔다. 분명 느린 걸음인데, 막상 움직이기 시작하자 질풍처럼 빨랐다.

병사들을 지나칠 때마다 그의 손이 나비의 날갯짓처럼 가볍게 팔랑거렸다. 그때마다 두세 명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우드득. 투둑.

"아악. 팔이······."

"내, 내 다리!"

무시무시한 관절기였다.

단지 스치는 것만으로도 상대를 전투불능으로 만들었다.

잠깐 사이 병규는 백여 명이 넘는 병사들을 제압했다.

그 사이 와이번에서 내린 블랙나이트들도 힘찬 기합과 함께 병사들에게 달려들었다. 드래곤나이트가 되기 전까지 그들은 아이린 왕국 제일의 기사단이었다.

와이번을 조종하는 것보다 오히려 검을 들고 싸우는 백병전에 능한 것이다.

엘프들의 지원을 받은 드래곤나이트는 잡초를 베듯 병사들을 수없이 베어 넘겼다.

드래곤나이트의 갑작스런 습격에 반란군의 보급부대는 속절없이 당할 수밖에 없었다.

병규와 그의 수하들이 보급부대의 호위병들을 제압하자, 잠시 후 근처 풀숲에서 50여 명의 사람들이 말을 타고 달려왔다.

병규는 앞서 나가며 그들을 마중했다. 그들은 적이 아니었던 것이다.

"돌튼 남작이라고 합니다."

말에서 뛰어내리다시피 하며 병규에게 손을 내미는 이는 금발머리의 젊은 귀족이었다.

"병규 백작입니다."

"트라우마의 흐, 흑기사님이셨군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병규의 신분을 확인한 돌튼은 들뜬 얼굴이 되었다. 흑기사의 혁혁한 무위는 아이린 왕국의 지방에까지 널리 퍼져 있는 상태였다.

자신의 얼굴을 보고 새색시처럼 얼굴을 붉히는 돌튼의 모습에 병규는 씁쓸하게 웃었다.

"인사는 나중에 하고 일단 빨리 이곳을 뜨도록 하죠."

"그,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할슨. 병사들에게 수레를 끌게 하게."

돌튼 남작의 병사들이 수레를 끌자 병규와 블랙나이트는 와이번을 탑승한 채 상공에서 그들을 호위했다.

"이대론 위험합니다. 말들이 지치더라도 최대 속도로 달리도록 하죠."

병규는 일행을 독촉하며 이동에 박차를 가했다.

보급부대가 당한 것을 알면 필립 공작은 길길이 날뛰며 대병력을 파견할 것이다. 필립 공작이 눈치 채기 전에 보급품들을 트라우마까지 운송해야 하는 것이다.

수레 행렬을 호위하며 꼬박 하루 동안 날았다. 실제로 와이번들은 2시간이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지만, 수레의 이동속도가 느렸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긴장된 시간이 지나고 마침내 붉은 대지에 도착했다. 멀리 트라우마 성이 보이고, 그 주위를 감싼 반란군의 진영이 한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정작 트라우마가 잡힐 듯한 거리까지 접근했음에도 더 이상 전진할 수 없었다. 반란군이 트라우마를 포위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떻게 트라우마로 들어갈 생각이죠?"

돌튼이 불안한 눈으로 물었다.

멀리서 보니 트라우마로 들어갈 방법이 전혀 없어 보였다.

성에서 지원군이 나온다 해도 반란군의 포위망을 뚫기는 힘들어 보였다. 와이번으로 조금씩 수송하는 것도 무리였다.

걱정하는 그를 보고 병규는 씩 하고 선 굵은 웃음을 보였다.

"미리 준비해 둔 것이 있습니다."

자신 있게 말한 병규는 붉은 모래사막 위를 발로 쿵쿵 밟았다.

"어딨냐? 나와라."

"······?"

돌튼 남작을 비롯한 병사들은 병규의 돌연한 행동에 의문을 떠올렸다. 모래 위를 쿵쿵 밟으며 나오라고 외쳐대는 그의 행동에 정신상태까지 의심하게 되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사람들의 입이 쩍 벌어졌다.

샘물이 솟듯 붉은 모래가 솟구쳐 오르더니 그 속에서 거대한 몬스터가 불쑥 튀어나오는 것이었다.

"새, 샌드 웜."

모래 속을 누비는 이 거대한 몬스터는 지나다니는 행인과 말을 통째로 삼켜버리는 것이 주특기인, 샌드 웜이었다. 그런데 지금 나타난 샌드 웜은 보통의 웜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거대했다.

"으아아아아!"

당황한 돌튼 남작은 검을 빼어들며 비명을 질렀고, 수레를 몰던 병사들은 창을 꼬아든 채 온몸을 벌벌 떨었다.

"아아. 괜찮아요. 이 녀석은 적이 아닙니다."

병규가 두 손을 흔들며 그들을 진정시켰다.

"저, 적이 아니라고요?"

"네. 여러분을 트라우마로 수송해 줄 녀석이죠."

빙그레 웃은 병규는 머리 부분을 비비적거리며 애교를 떨고 있는 샌드웜을 툭툭 가볍게 쳤다.

"녀석은 제가 잘 길들여 놨으니 안심하셔도 됩니다. 걱정 마시고 타세요. 트라우마까지 안전하게 모셔다 드릴 겁니다."

"······?"

돌튼 남작은 병규의 말에 당황했다.

절대로 길들일 수 없다는 샌드웜을 믿으라는 말도 이해하기 힘들었지만, 녀석을 타고 트라우마까지 가자는 말은 더더욱 이해할 수 없었다.

설마 샌드웜의 등 위에 올라탄 채 반란군의 포위망을 뚫자는 말일까?

그때 돌튼 남작의 그런 의문을 해소해 주기라도 하듯, 병규가 샌드웜을 향해 충격적인 한마디를 던졌다.

"손님 타신다. 입 벌려라."

그어어어어어.

길게 울어댄 샌드 웜이 그 큰 입을 쩍 하고 벌렸다. 날카로운 이빨이 숭숭 달려 있는 거대한 동굴이 그들 앞에 떡 하니 나타났다.

"뭐하세요? 타시라니까."

병규는 쩍 하고 벌어진 샌드 웜의 입안을 가리키며 방실방실 웃었다.

샤아아아아악.

돌튼 남작과 병사들의 얼굴에서 일제히 핏기가 가셨다.

자이언트 샌드 웜을 이용한 수송작전은 일간의 우려와는 달리 성공적이었다.

거대한 샌드 웜은 한 번에 몰튼 남작이 옮겨온 식량의 절반 이상을 나르는 엄청난 능력을 발휘했다.

또한 사람을 뱃속에 가득 채우고도 조금의 피해도 입히지 않아 주위를 감탄케 했다.

하지만 정작 자이언트 샌드 웜의 배 속을 통해 트라우마로 입성한 돌튼 남작 일행은 큰 충격을 받은 듯, 하얗게 떠버린 얼굴이 며칠이 지나도록 제정신을 차리지 못했다.

"쩝 역시 지하철과는 좀 다른 느낌이었나 보지?"

실성한 듯 보이는 돌튼 일행을 보며 병규는 멋쩍은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여야 했다.

"뭣이! 보급부대가 당했단 말이냐!"

필립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괴성을 질렀다. 그의 이마에 툭툭 불거진 혈관이 지금 그의 분노가 얼마나 대단한지 보여주고 있는 듯했다.

보급부대에 대해 보고한 부관은 자라처럼 목을 움츠리며 더듬더듬 말을 이었다.

"방금 호위병으로 있던 자들의 보고가 들어왓습니다. 트라우마의 드래곤나이트들의 짓인 듯합니다."

"또 그놈들이!"

화가 머리끝까지 치솟은 필립 공작은 일격에 책상을 박살내고, 앉고 있던 의자를 집어 던졌다. 폭풍같이 치솟은 그의 기운에 막사는 폭풍이라도 만난 듯이 맹렬하게 펄럭였다.

"내, 내 이놈들이"

꽉 움켜쥔 필립 공작의 주먹이 드드득 하는 무서운 소음을 냈다. 와이번의 기동성을 간과한 것이 실수다.

본부대의 식량은 트라우마의 드래곤나이트들에게 모두 털린 터라 이번 보급부대에 포함된 식량은 정말로 절실한 것이었다.

그런데 당했다.

어떻게 알았는지 드래곤나이트들이 선수를 친 것이다. 이것은 필립 공작에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다.

공성전 첫날에 입은 피해보다도 오늘 차단된 보급이 더 크게 느껴질 정도였다.

적은 수성이라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고 있는 데다, 주위의 지형지물까지 적절히 이용할 줄 아는 현명함을 겸비하고 있다.

그에 반해 그가 지휘하는 토벌군은 상대에 대해 알고 있는 정보가 너무 적었다.

게다가 적은 트라우마 하나뿐만이 아니다. 밤만 되면 미쳐 날뛰는 붉은 대지의 몬스터들도 굉장히 성가신 존재들이었다.

이렇게 가뜩이나 어려운 형편인데, 이제 식량 조달까지 차질이 생기고 말았다.

밤이면 어김없이 흉포한 몬스터들이 군의 주둔지를 습격하고, 병사들은 굶주림과 피곤으로 사기가 극도로 저하되었다.

이런 특수한 상황들이 겹치게 되니 병력 차이가 10배 이상 나는 상황임에도 그다지 유리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휘관들 역시 이번 공성전을 회의적으로 보고 있었다.

"공작님. 식량에 문제가 생긴 상황에서 이 이상의 장기전은 불리 합니다. 일단 지금은 회군하여 전력을 정비한 후에 다시 오는 것이······."

쿨 후작이 조심스럽게 제안했다.

공성전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보급이다. 그런 보급에 차질이 생긴 상황에서 더 이상의 장기전은 위험하다. 설사 적을 포위하고 있는 상황이라고 해도 말이다.

필립 공작은 인상을 찌푸린 채 잠시 말이 없었다. 짧은 시간 동안 그는 분노를 가라앉히고 냉정을 되찾은 상태였다.

"식량공급에 문제가 생긴 이상 지구전은 포기한다. 지금부터 총력을 기울여 트라우마 성을 함락시키고 그들의 식량을 탈취한다."

"네?"

"아니. 무슨."

갑작스런 그의 발언에 지휘관들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일반적인 전술로 봤을 때, 필립 공작의 결정은 터무니 없는 것이었다.

공성전은 특성상 단기간에 승부가 결정되는 경우가 매우 드물다. 그런데 보급물자까지 끊어진 마당에 단판 승부를 외치는 필립 공작의 결정이 언뜻 이해가 되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필립 공작의 생각은 달랐다.

지금 여기서 물러나는 것은 글로리 후작과 레종 공주에게 더 많은 힘을 실어주는 결과를 불러오게 될 것이다. 이번에 함락시키지 못하면 다음 공성전은 더더욱 힘들어진다.

그렇다면 결론은 하나뿐. 희생이 커지더라도 이번에 끝장을 본다. 문제는 식량이 떨어졌다는 것이다.

다시 수도로 지원을 요청한다 해도 식량이 도착하는 데까지 적어도 10일 이상이 소요된다.

약탈로 충당하는 양에도 한계가 있다. 어떻게든 새로운 해결책을 마련해야 하는 것이다.

필립 공작은 기상천외한 방법을 내놓았다.

"굶어죽더라도 후퇴는 없다. 식량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트라우마를 정복하는 길뿐이다. 지금 즉시 병사들에게 알려라. 배고픈 자는 트라우마 성으로 달려가라고. 식량은 바로 그곳에 있다"

필립 공작의 발언은 식량이 부족한 상황을 역이용하자는 것이엇다. 배고픈 병사들은 자연 식량을 찾을 테고, 트라우마를 치면 식량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은 분명 그들을 자극시킬 것이다.

이것은 병규가 살았던 세계의 칭기즈칸이 애용하던 전술이었다.

물론 필립 공작은 이 사실을 알 턱이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런 생각을 할 수 있었던 것은 필립 공작의 스승이 오래 전 칭기스칸의 기발한 전술에 대해 이야기한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필립 공작은 어려운 상황에서 용케 그 기억을 떠올린 것이다.

허나 비록 상황에 적절한 결정이었을지는 몰라도, 이번 결정으로 인해 지루한 대치를 이루던 전황은 순식간에 피비린내를 물씬 풍기는 혈전으로 변질되고 말았다.

곧 2차 공성전이 재개되었다.

필립 공작의 발언은 예상보다 큰 위력을 발휘했다.

식량이 떨어졌다는 소식이 일반병사들에게 전달되면서 위기감이 커지기 시작했다. 이대로 싸움이 며칠만 더 길어져도 영락없이 굶게 될 거란 불길한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옮겨지면서 삽시간에 퍼져 나갔다.

아이린 왕국은 과거부터 군의 기강이 강하기로 유명했다. 탈영한 자는 그 자리에서 즉결심판이고, 후방의 가족들에게까지 그 영향이 미쳤다.

만약 탈영한 자의 부모가 귀족일 경우, 이 사실이 공표됨으로 인해 명예에 큰 타격을 입게 되었다.

가족과 부모까지 버리고 탈영할 수 있는 자는 그리 많지 않다. 적어도 어릴 때부터 창칼을 들고 기사와 군인의 명예에 대해 배우는 아이린 왕국에서는 거의 없다고 봐야 했다.

이러한 사회 분위기가 바호크 공국과 아마스 신성제국이라는 양 강대국 사이에서도 왕국 안녕을 유지할 수 있게 한 밑바탕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용맹한 병사들에게 식량을 차지하려면 트라우마를 정복하라는 필립 공작의 말은 활활 타오른 불길에 기름을 부은 격이었다.

병사들은 이를 악물고 공성전에 임했다.

반란군의 지휘부도 전날의 실패를 교훈 삼아 군의 운용에 심혈을 기울였다.

궁병과 방패수를 한 부대로 조직하여 언제나 함께 행동하도록 했다. 또한 사다리를 이용한 성벽 도모함과 동시에 급조한 투석기로 성문을 직접 공략했다.

이 방법은 확실히 보병들의 피해를 줄이고, 트라우마 성을 공략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충격에 강한 성벽에 비해, 성문의 방어력엔 한계가 있었다. 몇 번이나 성벽이 무너질 뻔한 위기가 있었다.

그때마다 필라이트와 블랙나이트의 활약으로 간신히 위기를 넘길 수 있었지만, 저항군을 지휘하는 글로리 후작은 등줄기가 서늘할 정도로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몇 날 며칠 혈전이 계속되었다.

반란군의 병사들은 악착같이 트라우마 성으로 달려들었지만, 글로리 후작을 비롯한 수성군 역시 필사적으로 그들을 막아냈다.

싸움이 길어질수록 반란군의 피해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났고, 트라우마 역시 많은 사상자가 생겼다.

트라우마 쪽이 압도적으로 유리하게 진행되던 상황은 필립 공작의 기지와 새로운 전략의 도입으로 전혀 새로운 양상으로 진행되고 있었다.

갈수록 트라우마의 폐색이 짙어졌다.

반란군은 막대한 병력을 3개 조로 나누어 1개 조가 공격을 하면 다른 조가 휴식을 취하는 식으로 쉴 수 있었지만, 수성을 해야 하는 입장인 트라우마는 그런 여유가 없었다.

게다가 공격의 시기를 마음대로 택할 수 있다는 것도 공성측의 커다란 이득이었다.

블랙나이트가 광범위한 지역을 날아다니며 활약하고, 가끔 필라이트가 놀라운 마법으로 반란군을 견제하긴 했지만, 전황은 서서히 필립 공작 쪽으로 기울고 있었다.

가뜩이나 반란군 측에 유리하게 돌아가는 상황에 수도를 출발한 새로운 보급부대가 큰 손실 없이 반란군과 합류하게 되는 일까지 터지자 트라우마의 사기는 눈에 보일 정도로 떨어지고 말았다.

이번엔 살렘 후작이 직접 보급 부대를 마중 나가는 바람에 병규가 이끄는 블랙나이트들이 큰 활약을 하지 못한 것이다.

모든 상황이 트라우마 쪽에 암울하게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필립 공작은 회심의 비밀작전을 진행하고 있었다.

필립 공작은 병사들을 총동원해 대단위 공성전을 벌이면서도, 한편으로는 트라우마 성으로 잠입할 새로운 방법을 시도했다.

트라우마 성에서 멀리 떨어진 구릉에서부터 은밀히 땅굴을 뚫기 시작한 것이다.

공성전에서 공성 측이 땅굴을 사용해 적의 성안으로 침입하는 방법은 고대에서부터 자주 사용되던 전술이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전쟁에 활용된 이후부터는 그다지 애용되지 않았다.

마법사들의 마법에 의해 사전에 땅굴이 파악되는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필립 공작은 과감히 이번 공성전에 땅굴이라는 고전적인 방법을 동원하였다.

마법사 때문에 공성전에서 땅굴이 사용되지 않는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사실이다. 그래서 이제는 어느 누구도 땅굴을 사용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고정관념이 있기 때문에 오히려 기습적인 땅굴이 통할수도 있는 것이다. 이런 필립 공작의 생각은 가히 의식이 허점을 찌르는 것이었고, 확실히 전장에서 뼈가 굵은 글로리 후작조차도 땅굴은 전혀 염두에 두지 않고 있었다.

필립 공작은 땅굴 작업에 심혈을 기울였다.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법사인 피네스까지 동원할 정도였다.

정상적인 방법으론 트라우마 성을 함락하기 힘든 만큼, 땅굴에 필립 공작이 거는 기대는 클 수밖에 없었다.

공병들과 마법사의 협력 아래 땅굴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트라우마 측은 아직까지 땅굴의 존재여부도 모른 채, 밀물처럼 밀어닥치는 반란군의 물량을 막아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간혹 드래곤나이트들이 반란군 진영의 상곡을 날며 정탐을 했지만, 땅굴의 입구는 두터운 천막으로 완벽히 위장되어 있어 발견되지 않을 수 있었다.

그렇게 조심스럽게 진행된 땅굴이 트라우마 성벽에 거의 근접해가던 어느 날, 필립 공작은 해괴한 소식을 듣게 되었다.

"땅굴 작업을 하던 공병들이 실종되었다고?"

"네. 그렇습니다."

"그게 지금 말이 되는 소리라고 생각하는가?"

필립 공작의 얼굴이 팍 찌그러졌다. 연이은 전투의 피로와 수면부족으로 짜증이 일어 곧 폭발할 지경인데, 이게 또 무슨 황당한 소리란 말인가.

"땅굴이 무너져서 매몰된 것은 아닌가?"

"그런 것 같지는 않습니다. 땅굴 속에서 공병들이 사용하던 도구들이 멀쩡하게 발견되었습니다."

"매몰은 아니군."

만약 땅굴이 무너진 거라면 그들의 도구도 파묻혔을 것이다.

"그렇다고 땅속에서 작업하던 병사들이 도망갔을 리도 없지 않은가? 그럼 놈들이 대체 어디로 갔단 말이지?"

날카로운 필립 공작의 추궁에 부관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되었다. 그도 공병들이 어떻게 없어진 것인지 몰라 답답해 죽을 지경이었다.

"해괴한 일이군. 하지만 이런 일로 작업을 늦춰지는 것은 바람직하지 못한 일이다. 새로 공병들을 투입하게."

"네. 그렇게 하겠습니다."

부관은 허리를 깊게 숙인 뒤, 막사 밖으로 물러났다.

곧 새로운 공병부대가 땅굴 안으로 투입되었다.

이번엔 전보다 많은 인원을 투입하여 만약의 사태에 대비하도록 했다.

이러한 우려에도 불구하고 새로 투입된 공병들의 작업은 순조로웠다.

붉은 대지는 땅속 깊은 곳까지 알이 굵은 모래로 이루어져 있어 땅을 파기엔 최적이었다. 다만 모래다 보니 굴이 함몰될 위험이 상당했다.

그래서 북쪽 지방에 서식하는 짐승의 젖과 꿀, 그리고 몇몇 몬스터의 타액을 섞어서 만든 말피유라는 특별한 액체를 사용함으로써 푸석푸석한 모래를 단단하게 굳힐 수 있었다.

공병들은 땅속으로 쿵쿵 울려오는 전쟁의 소음을 들으며 조금씩 트라우마 성을 향해 굴을 파 갔다.몇 시간 정도 작업을 했을 때다. 선두에서 굴착 작업을 하고 있던 공병이 고개를 갸웃했다.

"이봐. 이쪽에 새로운 굴이 있는데?"

"무슨 소리야?"

그의 말에 다른 공병들이 달려왓다. 직접 보니 처음 말한 공병의 말이 사실이었다. 정말로 막 뚫은 땅굴 너머로 새로운 굴이 훤하게 뚫려 있는 것이었다.

"신기한 일이군. 트라우마의 귀족들이 피신용으로 만들어 놓은 것일까?"

"그럼 다행이군. 이제는 이 지겨운 일을 하지 않아도 될 테니 말이야."

공병들은 시시덕거리며 맞은편의 굴로 진입했다.

새로운 굴은 상당히 길었다.

"어째 온도가 좀 높은 것 같군."

"흙도 달라. 질척거리는 것 같은걸?"

공병들은 이 전혀 새로운 토양(?)에 의아해했다. 그렇게 한참을 걸어 들어갔을 때다.

"이, 이봐. 이 동굴. 좀 이상해."

"움직이는 것 같은데?"

비로소 공병들은 동굴이 크게 이상하다는 것을 느꼈다, 세상 어느 동굴도 이처럼 꿈틀거리지 않는다.

위기감은 느낀 공병들은 뒤돌아가려고 했지만 이미 동굴의 입구는 서서히 닫히고 있었다.

그렇게 땅굴을 파던 두 번째 공병팀도 실종되고 말았다.

글로리 후작의 저택 후원. 막 작전을 마치고 돌아온 병규는 곰팅이의 두터운 어깨 위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두 눈을 지그시 감은 그는 최근 생긴 이상한 일에 대해 혼잣말을 중얼거리고 있었다.

"거참 이상한 일일세. 왜 반란군들이 후작의 저택 정원에 기절해 있는 거지?"

지난 며칠간 트라우마엔 괴이한 일이 발생했다.

아침해가 뜨면 타액에 흠뻑 적셔진 반라군 10여 명이 발견되곤 했던 것이다.

이 사건 덕분에 트라우마는 발칵 뒤집혔다.

대체 이 반란군 병사들이 어디를 통해 들어왔단 말인가.

거칠게 물어도 보고 심문도 해 봤지만 반란군의 공병들은 얼굴이 하얗게 탈색된 채 헛소리만 중얼거릴 뿐이었다.

"거참 귀신이 곡할 노릇이네. 하늘에서 반란군이 떨어질 리도 없고 말이야."

병규는 연신 고개를 갸웃거리며 희한한 일이라는 소리를 연발했다.

그때 땅이 들썩하더니 퀴니가 선물로 두고 간 자이언트 샌드 웜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녀석. 또 어디 갔다 온 거냐?"

병규의 물음에 자이언트 샌드 웜은 덩치에 어울리지 않게 그 거대한 몸을 흔들며 애교를 떨었다. 그러다 성게를 떠올리게 하는 입을 쩍 벌리며 거창하게 트림을 했다.

끄어어어어어어어어~

트림소리가 얼마나 큰지 트라우마 성 전체가 쩌렁쩌렁 울릴 정도였다.

병규는 녀석의 트림에 손으로 코를 막고 버럭 소리 질렀다.

"크~! 녀석 뭘 먹었는데 냄새가 이렇게 고약한 거야!"

그어어어어.

자이언트 샌드 웜은 억울하다는 듯이 길게 울었다.

자신의 활약상을 몰라주는 병규의 말에 서럽기만 했다. 그때 곰팅이가 저벅저겁 걸어가더니 자이언트 샌드 웜의 머리 부분을 툭툭 두드렸다. 

마치 ‘그 심정 나도 이해한다’라는 말을 하고 싶은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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