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64/102)

지옥과 같은 붉은 대지에서의 첫날

아이린 성력, 1022년, 짙은 녹음의 달, 열일곱째 날, 

필립 공작이 이끄는 반란군은 마침내 트라우마와 인접한 붉은 대지에 당도했다.

수도 유리스를 출발한 지 22일째, 당초 예상보다 무려 13일이나 지채된 날짜였다.

"이놈들."

붉은 모래에 휩싸인 트라우마 성을 보며 필립 공작은 이를 박박 갈았다.

치욕 같은 시간이었다.

고작 20여 기의 드래곤나이트에게 2만이 넘는 대병력이 희롱 당했다. 장래 그가 이드라센 대륙을 통일한 뒤에도 두고두고 후회될 치욕스런 기록이 아닐 수 없었다.

지체된 기간 동안 트라우마의 레종 공주는 중도파의 세력을 다수 흡수하고, 성의 방어를 더욱 곤고히 할 수 있었다.

첩자가 알려온 트라우마의 현재 병력은 3천 7백.

며칠 사이 배 가까이 병력이 늘었다.

2만이 넘는 토벌군에 비하면 여전히 미미한 수준이나 상대가 수성의 이점을 살린다면 상당히 피곤한 전투가 될 터였다.

게다가 필립 공작이 이끄는 반란군은 드래곤나이트의 계속된 습격 덕분에 식량 사정이 매우 좋지 못했다. 병사들의 피로도는 심각할 지경이었다.

‘장기간의 전투는 결코 이롭지 못하다.’

이렇게 판단한 필립 공작은 즉시 공성 무기의 조립을 지시했다.

병사들로 하여금 무기를 점검케 하고 지휘관들을 소집하여 작전 회의를 거듭했다.

준비가 끝나는 대로 곧바로 공격을 시작할 생각이었다. 그는 하루라도 빨리 이 지긋지긋한 내전을 끝마치고 싶었다.

이런 척박한 사막에서 지척거릴 틈이 없다.

한시 바삐 내전을 종료하고 국력을 정비한 후 바호크 공국과 아마스 신성제국을 도모해야 한다.

그의 광활한 포부는 이미 이드라센 대륙을 질주하고 있었다.

공격은 밤의 그림자가 어스름하게 세상을 뒤덮자마자 시작되었다.

투웅! 투웅!

트라우마를 감싸듯이 설치된 집채만한 투석기가 거대한 바위를 기운차게 쏘아 올렸다.

쉬쉬쉬쉬~

포물선을 그리고 날아간 바위들은 트라우마 성벽에 온몸을 작렬했다.

쿠웅! 콰콰쾅!

묵직한 폭음이 피어올랐다. 하지만 트라우마의 성벽은 전혀 미동도 않았다. 아무리 돌을 쏘아 보내도 쿵쿵 울리기만 할 뿐, 무너지긴커녕 금도가지 않았다.

수도에서부터 힘들게 공성병기를 끌고 왔던 필립 공작으로서는 황당해서 말도 안 나올 상황이었다.

"징그럽게 튼튼한 성벽이군."

트라우마의 방어력이 대단하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설마 이 정도일 줄은 몰랐다.

"성벽이 힘들다면 성벽 안을 직접 공격해라."

필립 공작의 명에 따라 투석기를 움직이는 기술자들이 바쁘게 돌아다녔다. 기계의 장력을 높이고, 돌을 받쳐 투석기의 앞을 높였다. 한참 부지런을 떤 후에 다시 투석기가 쏘아졌다.

매서운 바람소리를 토하며 날아간 돌들은, 하지만 여전히 트라우마의 성벽을 넘지 못했다. 오히려 무리한 운용으로 몇 개의 투석기가 부서지는 사태만 낳았을 뿐이다.

"어떻게 된 일인가!"

필립 공작은 투석기를 제어하는 장교를 불러 호통을 쳤다. 민메드 남작은 고개를 깊숙이 숙인 채 식은땀을 흘리며 주저주저 대답했다.

"그, 그것이······ 트라우마의 성벽은 너무 높아서 아무리 해도 각도가 안 나옵니다."

"그래서 앞을 높이지 않았던가. 지금보다 더 높이면 되지 않겠는가?"

"그, 그리하면 투석기의 균형이 흐트러지게 됩니다. 방법은 트라우마 성에 더 접근하는 것이 유일합니다. 그리 되면 적들의 공격권에 노출되는 상황인지라······."

"누가 그런 핑계를 득고 싶다 했는가. 방법을 말하란 말이다. 방법을!"

"하, 하지만······."

민메드 남작이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자 필립 공작은 대번에 검을 뽑아 그의 목을 날려버렸다.

촤악!

잘려진 목에서 피가 분수처럼 쏟아졌다. 필립 공작은 머리 잃은 민메드의 몸뚱이를 신경질적으로 걷어찼다.

"전쟁은 소꿉장난이 아니다 또 한 번 어쭙잖은 핑계를 대는 자가 생긴다면 지금처럼 가차 없이 목을 치겠다."

서슬 퍼런 필립 공작의 엄포에 휘하 제장들은 목을 움츠렷다. 그 냉정하던 공작이 이렇게 흥분하는 모습은 처음 보았다. 은연중에 흘러나온 소드마스터의 막대한 기운에 모두는 껍질 속에 몸을 숨긴 거북이처럼 안절부절 못했다.

극도로 흥분한 필립 공작은 남작의 목을 날렸음에도 화를 가라앉히지 못하고 검을 든 채 한참을 서성였다.

"투석기가 쓸모 없어진 이상 하는 수 없군. 나팔을 불라. 전군돌격이다."

필립 공작은 희생을 각오하고 전군의 돌격을 명했다.

뿌우우우웅!

"우와아아아."

"쳐라!"

긴 나팔소리가 울리자 바둑판 모양으로 밀집해 있던 보병들이 함성을 지르며 뛰어나갔다.

‘필립공작, 애가 많이 달은 모양이군.’

성 밖의 동정을 살피던 글로리 후작은 실소를 금치 못했다.

엄청난 병력이 한꺼번에 달려드는 모습은 분명 위압감이 느껴질 정도로 장관이었지만, 그가 보기엔 떼쓰는 아이의 마지막 발악처럼 가소롭게만 느껴졌다.

"투석기를 준비하라."

그는 느긋하게 명령을 지시했다.

트라우마 성의 남문과 서문 근처 성벽엔 기괴한 모양의 투석기가 여러 대 배치되어 있었다.

이 투석기는 글로리 후작이 필라이트의 협조를 구해 특별히 제작한 투석기로, 앞이 높고 뒤가 극단적으로 낮은 기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또한 장력을 높여서 일반적인 투석기보다 몇 배나 강한 힘을 가지고 있었다.

이러한 독특한 구조와 장력 덕분에 트라우마의 높은 성벽을 가볍게 넘길 수 있었다.

끄그그극.

줄이 당겨지고, 투석기의 몸체가 활처럼 휘어졌다.

"발사!"

투웅 퉁!

투석기의 팔이 풍차처럼 휘들러지며 돌이 성벽을 넘어 유성우처럼 날아갔다. 그렇게 쏘아진 바위들은 괴성을 지르며 달려들던 반란군에겐 가히 죽음의 비와 같았다.

"바, 바위!"

"피해라!"

"미, 밀지 마."

"아악!"

쿠쿠쿵!!

쿠콰쾅!!!

"키엑."

"크아악."

바위가 굴러 떨어지면 어김없이 처참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병사들은 살기 위해 들판의 메뚜기 뛰듯 사방으로 뛰었지만, 바위들은 무심하게도 그들의 몸뚱이를 짓이겼다.

피가 튀었다.

뼈가 부서져 살갗을 뚫고 나와 사방으로 튕겨져 나가는가 하면 뭉개진 내장은 녹은 엿처럼 끈적끈적하게 흘러 내렸다.

성벽을 넘어온 바위들에 의한 피해는 막심했다. 방패를 들고 밀집대형으로 달려오던 병사들은 머리 위를 덮쳐오는 바위들에 의해 처참하게 뭉개지고 말았다.

함성을 지르며 성벽으로 달려들던 반란군의 기세가 주춤했다. 이 기회를 놓칠 글로리 후작이 아니었다.

"궁병부대 앞으로."

투석기로 재미를 톡톡히 본 글로리 후작은 성벽에 배치한 엘프 궁수들에게 명령을 내렸다. 성벽 아래에 숨어 있던 엘프들이 일제히 성벽 위로 고개를 내밀며 활을 당겼다.

"발사!"

피슈슈슈.

은은한 녹색으로 물든 화살들이 허공을 가르기 시작했다. 바람을 찢으며 솟구친 화살들은 하늘을 새카맣게 뒤덮더니, 뒤이어 세찬 바람을 타고 소나기처럼 떨어지기 시작했다.

"으악."

"컥."

"크으윽."

삽시간에 수백의 병사들이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는 그들의 미간과 목덜미에서는 가느다란 엘프들의 화살이 파르르 몸을 떨고 있었다.

엘프들의 화살은 정녕 가공스러웠다.

거리에 제한이 없는 듯 바람을 타고 끔찍하게 먼 곳까지 날아왔다. 또 얼마나 빨리 쏘는지 100여 명의 엘프들이 화살을 쏘아대자 폭우가 쏟아지는 듯 했다.

그보다 더 무서운 것은 전율이 일 정도의 정확도였다. 정확하게 한 발에 한 명씩. 엘프들이 활을 당길 때마다 반드시 한 번의 비명이 터졌다.

멀리 군영에서 엘프들의 화살에 병사들이 학살당하는 모습을 지켜봐야 했던 필립 공작은 이를 악물었다.

"크으. 설마 공주가 숲의 망할 것들을 끌어들일 줄은 몰랐군."

엘프들의 참전은 정말이지 계산 밖의 일이었다. 오히려 중립파 귀족들의 합류보다 훨씬 치명적인 일이었다.

"대체 지휘관들은 뭘 하고 있는 것인가! 활을 쏘라고 지시하란 말이다. 활을 쏴서 저 망할 엘프들을 치워버리라고 해!"

화가 난 그는 두려운 눈을 하고 있는 지휘관들을 닦달했다.

"하, 하오나 트라우마의 성벽이 너무 높아 궁병들의 활이 엘프들에게까지 닿지 않습니다. 그들을 공략하려면 성벽에 근접해야 하는데, 그리하면 오히려 엘프들의 표적이 될 수······."

부관의 걱정에도 필립 공작의 뜻은 완고했다.

"당장 지시해. 엘프들은 지금 치워버리지 않으면 공성전을 하는 내내 보병들이 희생될 것이다. 궁병들의 희생이 다소 뒤따르더라도 녀석들을 죽이는 것이 훨씬 유리해."

냉정한 필립 공작의 명에 궁병들을 지휘하고 있던 아론 후작은 어쩔 수 없이 수하들의 전진을 명해야 했다.

쉬쉬쉬쉭.

"아아악."

"내 눈. 내 눈."

"방패를, 방패를 가져와."

엘프들의 화살공격으로 인한 피해가 속출하고 있었다.

그때 반란군의 진영에서 수백의 병사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보병과 달리 기본적인 방패조차 들고 있지 않았다. 필립 공작의 명에 의해 쫓기듯이 출동하게 된 궁병들이었다.

궁병들은 보병들에 비해 방어력이 참담할 정도로 약했다. 때문에 엘프들의 화살밥이나 진배없었다.

비처럼 쏟아지는 화살에 궁병들은 제대로 된 저항도 못하고 속속 쓰러졌다.

"방패병들에게 궁병을 철저하게 보호하라고 지시하라. 그리고 성벽을 향해 투석기를 발사하라. 엘프들의 시야를 가린다."

필립 공작의 시의적절한 명령에 우왕좌왕하던 지휘관들이 발 빠르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일방적으로 당하기만 하던 병사들이 진형을 서서히 갖추기 시작하더니, 일반 창병들은 좌우로 부산하게 이동하며 엘프들의 화살을 유인하고, 그 사이를 방패병들의 보호를 받은 궁병들이 성벽을 향해 달렸다.

엘프들이 궁병들의 접근을 눈치 채고 활을 당길 때, 돌연 묵직한 파공음과 함께 거대한 바위들이 날아오기 시작했다.

쿠웅! 쿠드드드!

성벽에 육중하게 부딪힌 바위들은 산산조각 나며 사방으로 돌가루와 먼지를 뿌렸고, 그 때문에 일시적으로 엘프들의 시야가 가려져 궁병들을 견제할 수 없게 되었다.

"제법 머리를 굴렸군."

글로리 후작의 이맛살에 주름이 그려졌다. 설마 투석기까지 이용할 줄이야. 허를 찔린 셈이었다. 하지만 글로리 후작은 당황하지 않았다.

"이쯤에서 신임 기사단의 활약을 보고 싶네만."

글로리 후작이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자 루멘 백작이 가슴이 탕하고 치며 호탕하게 외쳤다.

"트로웰 기사단은 언제라도 출동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믿음직스러운 노기사의 말에 글로리 후작은 빙긋 미소를 지었다.

"좋아. 트로웰 기사단에게 명령을 내리겠네. 성벽 아래의 궁병들을 제거해 주게."

"아이린 왕국에 영원한 영광이."

자신만만하게 외친 루멘 백작은 성벽 아래로 내려갔다. 대기 중이던 기사단이 그를 맞았다.

"많이 기다렸다. 드디어 우리의 힘을 보여줄 때다."

"우와!"

"와아아아!"

두두두두두두두!

트로웰 기사단은 일제히 건틀렛으로 투구를 두드리며 환호했다. 이제나저제나 차례를 기다리며 지루해하던 참이라 출동이라는 기사 단장의 말이 그렇게 반가울 수 없었다.

사기가 충전한 기사들을 쓱 훑어보던 루멘 백작은 말 위에 성큼 오른 후, 투구를 머리에 뒤집어 썻다.

"아이린 왕국에 영원한 영광을!"

그가 선창하며 말을 달리자 기사들이 복창하며 활짝 열려진 성문을 향해 기세 좋게 달려 나갔다.

"아이린 왕국에 영원한 영광을!"

"아이린 왕국에 영원한 영광을!"

"쥐새끼들이 마침매 나서는군."

성문이 열리는 것을 확인한 필립 공작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단순히 엘프들을 제거하려 한 작전에 예상외의 큰 미끼가 걸려들었다.

"엘프들을 잃기는 싫었겠지."

엘프들의 막강한 전력이라면 기사단을 희생시켜서라도 보호할 가치가 있다.

"후후. 하지만 성문을 연 것이 실수다."

실소를 흘린 필립 공작은 곧 나팔을 불어 보병들을 성문쪽으로 이동시키고, 이프리트 기사단을 준비시켰다.

원래 이프리트 기사단은 물경 7백에 이르는 막강한 전력을 과시했지만, 중도에 병규가 이끄는 드래곤나이트에 의해 군마들이 다수 희생된 때문에 실제로 운용할 수 있는 기사의 수는 4백 정도에 불과 했다.

제대로 싸워보기도 전에 절반에 육박하는 전력이 상실된 셈이지만, 그래도 노인들로 구성된 트로웰 기사단에 비하면 막강한 전력이 아닐 수 없었다.

"궁병을 희생하더라도 성문을 뚫는다."

필립 공작은 승리를 위해 과감히 궁병들을 희생시킬 심산이었다.

냉정한 결단이었지만, 전쟁의 흐름을 제대로 파악하고 내린 판단이기도 했다.

"가서, 글로리 후작의 목을 가져오라!"

"맡겨만 주십시오."

이프리트 기사단을 이끌고 있는 쿨 후작은 냉혹한 미소로 대답했다.

"성벽으로 바싹 붙어서 전진한다. 보병들은 무시하라. 궁병들만을 노려라."

성문을 나선 루멘 백작은 트로웰 기사단의 표적을 적의 궁병들로 철저하게 압축시켰다.

트로웰 기사단은 큰 목소리로 호응하며 힘차게 말을 달렸다. 방패병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말의 돌진력과 함께 한랜스의 무자비한 공격력에 추풍낙엽처럼 휩쓸려 버렸다.

"화살을 날려라!"

트로웰 기사단이 무시무시한 기세로 달려오는 모습을 뒤늦게 확인한 궁병 부대장 아론 후작은 낯빛이 창백해지며 발작적으로 괴성을 질렀다.

성벽 위의 엘프들을 겨누고 있던 궁병들은 허겁지겁 활을 트로웰 기사단으로 돌렸다.

하지만 대응이 너무 늦었다.

이미 트로웰 기사단은 코앞까지 들이닥친 상태였다.

"쳐라!"

렌스를 앞세운 트로웰 기사들이 궁병들의 진형으로 뛰어들었다.

그들의 강력한 돌파력 앞에 궁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기사단이 돌진하자 응집해 있던 궁병들은 비단 폭이 찢어지듯 허무하게 쓰러졌다.

원거리 지원 사격이 전문인 궁병에게 기사단의 돌진력은 두려운 것이었다.

"좋아. 다시 한 번 돌격이다."

한 번의 격돌로 적의 궁병에게 막대한 타격을 입힌 루멘은 흥이 오른 목소리로 기사단을 종용했다. 크게 원을 그리며 선회한 트로웰 기사단은 궁병대를 몇 차례나 잔인하게 유린했다.

말발굽 소리가 지나갈 때마다 하늘을 찌를 듯한 비명소리가 터져 나오고, 찢겨진 궁병들의 살덩이와 핏물이 땅바닥을 붉게 물들였다.

궁병대의 피해가 커질수록 트로웰 기사단의 기세는 높아져만 갔다.

하지만 유리한 상황은 그리 오래가지 않앗다.

필립 공작의 지시를 받은 보병들이 포위하듯 그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더구나 붉은 핏빛 갑옷의 이프리트 가시단이 활짝 열려진 성문을 향해 바람같이 달려가고 있었다.

이대로는 보병들에게 발을 잡히고 만다. 더 큰 문제는 이프리트 기사단을 이대로 방치하면 끝내 성문이 뚫리고 말 것이란 사실이다.

"전원 진형을 정비하라. 포위망을 뚫고 이프리트 기사단의 앞을 막는다."

루멘 백작은 이를 악물며 앞서 달려갔다. 대오를 집결한 기사들이 날카로운 송곳 모양으로 진을 형성하며 그 뒤를 따랐다.

날카로운 창병을 꼬나든 창병들이 기사들의 앞을 막았다. 창병은 원래 기사들을 상대하는 데 효율적이다. 트로웰 기사단은 군마에까지 철갑을 두른 중장갑 기병이었지만, 창병의 맹력한 저항에 주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돌진력을 잃은 기사단은 이빨 빠진 맹수와 같았다.

기사들은 검을 빼들고 창병에 대항했지만, 시커멓게 밀려드는 적병의 물량에 당할 도리가 없었다. 잠시만에 몇 명의 기사가 창병의 창에 꿰뚫린 채 희생되었다.

"아아. 이런 곳에서 허무하게."

루멘 백작의 입에서 탄식의 흘러나왓다.

적의 기동력을 얕보고 있었던 것이 실수다.

그는 주름진 노안으로 한 줄기 화염처럼 돌진하고 있는 이프리트 기사단을 바라보았다. 그 호쾌한 움직임, 창병들에 둘러싸인 채 하나 둘 희생되고 있는 트로웰 기사단을 조롱하는 것 같앗다.

힘겹게 창병들을 뚫고 간다고 해도 이미 이프리트 기사단을 막기엔 무리였다.

바로 그때.

한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트로웰 기사단에게 희망의 빛줄기가 날아들었다.

쉬쉬쉬쉬식!

바람을 가르는 소음을 함께 성 위에서 화살들이 날아온 것이다.

놀랍도록 정밀한 화살들은 기사단을 교묘히 피하며 창병들만 처리해 갔다.

"오오. 엘프들이."

투석기 때문에 일어난 먼지가 가라앉자 엘프들이 다시금 활을 날리기 시작한 것이다.

"방패병."

"마, 막아."

갑작스럽게 날아든 화살비에 창병을 비롯한 반란군의 보병들은 속수무책으로 쓰러졌다.

방패병들은 이미 붕괴 상태였고, 유일하게 엘프들을 견제할 수 있는 궁병들도 트로웰 기사단의 활약으로 제 힘을 잃은 상황이었다.

여기에 지휘부까지 혼란에 빠져 제대로 대응을 못하자 반란군의 피해는 급격히 늘 수밖에 없었다.

무릇 전장에선 전술의 확립과 빠른 운용이 필수적이다. 하지만 현재 반란군의 병력은 각지의 귀족들이 거느리고 있던 사병들을 통합한 것으로 명령 체계가 다소 혼란스러웠다.

그런 이유로 지휘부의 결정이 병사들에게 전달되고, 시행되기까지 다소 시간이 걸렸다. 이 잠깐의 머뭇거림이 트로웰 기사단과 엘프들에게 기회를 주고 있는 것이다.

엘프들에 의해 창병들이 죽어 나가자 트로웰 기사단은 비로소 흐트러진 진형을 수습하고 말을 달릴 수 있었다.

"전속력으로! 전력으로 이프리트 기사단을 막는다!"

목이 터져라 외친 그는 눈썹이 휘날릴 정도로 거칠게 말을 달렸다.

기사들이 쐐기 모양의 진형을 그리며 그의 뒤를 따랐고, 엘프들의 화살이 기사들의 앞을 가로막는 보병들을 치워냈다.

하지만 그런 그들의 노력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프리트 기사단의 선봉은 이미 성문 안으로 달려 들어가고 있었다.

"글로리 후작님. 어째서 성문을 열어두신 것입니까!"

루멘은 분노하면서도 한편으론 의아해했다.

적의 기병대가 돌진해 오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성문을 열어두다니. 글로리 후작의 무반응을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이대로 적의 기병대에게 성문을 뺏기면 뒤를 이어 물밀듯이 몰려들 보병들을 감당할 수 없게 될 것이고, 그렇게 되면 병력으로 열세인 트라우마의 함락은 시간문제가 되는 것이다.

전장에서 뼈가 굵은 글로리 후작이 그런 것을 모를 리가 없을 텐데도, 상황은 그렇듯 이상하게 전개되고 있었다.

급한 마음에 루멘 백작은 말에 계속 채찍질을 했다. 하지만 마음과 달리 그의 군마는 느려 터져 더 이상의 속도를 기대하기가 힘들었다.

이미 이프리트 기사단은 성문 안으로 모두 들어간 상태였다. 그런데 바로 그때,

크롸라라라라!

시끄러운 몬스터의 울음소리가 울려 퍼졌다.

"서, 설마!"

루멘 백작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다음 순간, 성문 안쪽에서 검은 돌풍이 맹렬하게 밖으로 쏘아져 나오는 것이었다.

휘아아아아아악!

검은 돌풍을 본 트로웰 기사단은 환성을 질렀다.

"드래곤나이트!"

"블랙나이트들이다."

검은 돌풍들은 병규가 이끄는 드래곤나이트들이었던 것이다.

한 줄기 바람처럼 홀연히 나타난 검은 와이번들은 바닥을 쓸듯이 저공비행을 하며 이프리트 기사단의 진형을 휩쓸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 12미터가 넘는 거대한 동체가 날개를 펄럭이며 머리끝을 스쳐 지나가니, 당황한 말들은 앞발을 높이 들며 땅을 뒹굴었다.

끼히히잉!

낑!

맹렬하게 돌진해 들어간 이프리트 기사단은 파도에 휩쓸린 것처럼 성문 밖으로 흩뿌려졌다.

인마가 한데 뭉쳐 추풍낙엽처럼 구르니 다리가 부러진 군마가 다수였고, 말 아래 깔린 기사들의 비명소리가 고막을 진동시킬 지경이었다.

한 차례 적 기사단을 휩쓴 와이번들은 허공으로 높게 솟구쳤다가 벼락같이 아래로 떨어지며 날카로운 발로 기사와 군마를 동시에 채적 보병이 밀려드는 곳에 가차 없이 투하했다.

퍼억!

끼히히힝!

"크아아악"

"사, 살려."

힘껏 내팽개쳐진 군마는 언덕 아래로 굴러 떨어지는 바위처럼 무서운 파괴력을 발했다. 수십의 병사들이 말에 깔려 다치거나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그렇게 차례로 와이번들이 이프리트 기사단을 던져대니, 검은 물결처럼 밀려오던 병사들의 진형에 큼지막한 구멍이 숭숭 뚫려버렸다.

이미 드래곤나이트에게 질리도록 당했던 반란군들은 검은 와이번들을 보자마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전의를 상실했다. 그들에게 있어 블랙나이트는 말 그대로 날개 달린 검은 사신이었다.

성으로 뛰어든 이프리트 기사단을 단숨에 쓸어낸 병규는 루멘을 보며 성문을 손짓했다. 루멘은 이내 그의 뜻을 눈치 채고는 큰 목소리로 외쳤다.

"전원 성으로 복귀한다. 진형을 유지하라."

트로웰 기사단이 무사히 성문 안으로 퇴각하자, 병규는 즉각 사방에서 반란군을 유린하고 있는 드래곤나이트들을 불러들였다. 그들이 출동한 것은 어디까지나 트로웰 기사단을 보호하고자는 목적에서였는지, 학살을 자행하려는 데 뜻이 있었던 게 아니다.

트로웰 기사단에 이어 블랙나이트까지 성으로 복귀하자 필립 공작은 즉시 혼란에 빠진 병사들을 수습하고, 흐트러진 진형을 재구성하여 공성에 집중했다.

투석기의 무지막지한 공세와 엘프들의 화살비를 뚫고 들어간 반란군은 그제야 간신히 공성전다운 전략을 구사할 수 있었다.

방패병들의 희생으로 자리가 만들어지자, 급히 사다리가 동원되었다.

트라우마 성벽은 다른 성들보다 훨씬 높다. 그 때문에 일반적인 사다리로는 도저히 성벽 위에 오를 수 없었다. 때문에 공병들은 공성용 사다리를 두 개를 이어서 사용해야 했다.

그런데 이렇듯 급조한 사다리이다 보니 아무래도 안전성에 문제가 많았다.

중간쯤 올라가다 보면 사다리가 파도처럼 휘청였고, 무게를 이기지 못한 사다리가 부서지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성벽에 오르기도 전에 추락사하는 병사들이 속출했고, 막상 성벽에 오른 몇몇 병사들도 미리 대기하고 있던 창병에 의해 비명횡사하기 일쑤였다.

시간이 갈수록 희생은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만 갔고, 트라우마 성의 방어는 오히려 더욱 견고해졌다.

결국 필립 공작은 분노를 곱씹으며 후퇴를 명해야 했다.

다섯 시간에 걸친 공성전, 반란군의 피해는 막심했다.

1030여 명의 병사가 죽고, 그 2배 가량이 다쳤다.

3부대나 되는 궁병은 절반이나 줄었고, 기사단의 피해도 만만치 않았다.

단 한 차례의 접전으로 입게 된 피해라고 하기엔 참담하기 이를 데 없었다.

필립 공박은 새삼 트라우마 성을 함락시키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절감해야 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일차 공성전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비록 필립 공작은 병사들을 물렸지만, 글로리 후작은 이대로 순순히 끝낼 생각이 없었다.

"트라우마를 건든 것이 얼마나 잘못된 행동인지 처절하게 깨닫게 해주지. 공작님. 이제 실력 발휘를 하실 시간입니다."

"신이 창조한 마법으로 신의 피조물을 죽이게 되다니, 이런 비극적인 상황이라니."

참담한 심정으로 뇌까린 필라이트는 낡은 지팡이를 두 손에 감아 쥔 채 나지막이 주문을 영창했다.

"뜨거운 열정의 불꽃이여. 타락한 어둠을 불사르고, 저열한 암흑을 거둘지니······. 대지를 불사르는 화염의 폭풍, 파이어 스톰(Fire Storm)!"

쿠쿠쿵!

뇌성벽력과 같은 웅장한 폭음이 터지더니 지팡이가 가리킨 하늘에서 적색의 불기둥이 피어올랐다. 동시에 폭풍과 같은 바람이 불기둥을 휘말아 올리며 노을과 같은 장엄한 불길을 적진 위에 우박처럼 뿌려댔다.

무섭게 일어난 불길은 투석기와 공병들을 안개처럼 뒤덮었다.

후드드득.

"으아악."

"크악."

처참한 비명과 함께 투석기와 공병들이 한 줌 재가 되어 날렸다. 한순간에 공성병기를 재로 만들어 버린 화마는 바람을 타고 반란군의 막사를 덮쳤다.

"부, 불이다."

"물을 가져와."

"으아아악. 내 몸이, 내 몸이. 불을 꺼줘. 크아아아."

시뻘건 불길이 출렁이고,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바쁘게 뛰어다녔다. 빌어먹을 붉은 대지는 사막이라 물을 구하기도 어려웠다. 결국 귀한 식수를 불을 끄는 데 뿌려대야 했다.

하급 마법사 몇이 마법을 동원하며 불길을 잡아보려 했지만 대마법사의 7서클 마법을 제어하기엔 그들의 힘은 너무도 미약했다.

화륵화륵 타오르는 불길, 사방에 가득한 비명소리.

가히 아비규환의 지옥이었다.

털썩.

필립 공작은 힘없이 의자 위에 쓰러져 내렸다.

준비 없이 전쟁에 임한 대가는 너무도 컸다. 압도적인 병력만 믿고 진군한 그들에 비해 글로리 후작은 불리한 상황에서도 갖은 계책을 짜낸 것이다.

그런 차이가 놀랄 만한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

"흐흐. 후작. 한 방······ 제대로 먹었군. 하지만 기다리게. 이 빚은 천 배 만 배로 되갚아 줄 테니."

저 멀리 가물가물 보이는 트라우마의 성루를 올려다보며 필립 공작은 안면 근육을 실룩였다.

절규하는 반란군에 반해, 훌륭히 성을 방어해 낸 트라우마는 축제 분위기에 싸여 있었다. 반란군의 시신은 작은 동산을 이룰 지경인 반면, 이쪽의 피해는 극히 미미한 수준이었다.

수성의 이득을 감안하다고 해도 역사에 드문 대승이었다.

하지만 귀족회의에 들어간 글로리 후작은 차가운 말로 들뜬 분위기를 가라앉혔다.

"오늘의 승리는 축하할 일이오. 하지만 적의 공격은 이제 겨우 시작일 뿐이오."

"······."

"비록 오늘은 승리했지만, 여전히 우리가 압도적으로 불리한 상황이라는 것에는 변함이 없소. 이 점을 잊지 않아야 할 것이오."

싸늘한 목소리로 일침을 놓자 언제 그랬냐는 듯이 금방 분위기는 가라앉았다.

전쟁은 이제부터 시작인 것이다.

사기 고양도 좋지만 적을 얕보는 행동은 절대 금물이다.

"오늘은 전투에서 승리할 수 있었던 것은 우리가 수성이라는,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이오. 필라이트 공작님께서 고안하신 투석기도 제 힘을 발휘하였소. 그리고 블랙나이트가 사전에 적의 마법사들을 제거한 것도 큰 힘이 되었소."

보통의 공성전에서는 투석기 같은 공성병기보다 마법사의 마법이 더 큰 위력을 발휘한다. 고 서클의 폭발형 마법 앞에선 성벽의 방어력이 버티지 못하는 것이다.

블랙나이트들이 마법사들을 대부분 제거한 때문에 필립 공작은 어쩔 수 없이 투석기 같은 원시적인 방법을 동원할 수밖에 없었다.

만약 필립 공박 측에 마법사가 그대로 살아 있었다면, 오늘의 전투는 결코 이렇게 좋은 결과를 이끌어낼 수 없었을 것이다.

"이번 전투로 투석기에 사용될 바위가 거의 소진되었소. 주민들이 바위대신 자갈을 모으고 있지만, 앞으로 몇 차례 가지 않아 한계에 부딪힐 것이오. 그나마 화살은 비축분이 있어 당분간은 문제가 없지만, 그것도 얼마나 버틸 수 있을지 장담할 수 없는 일이오."

분위기기 숙연해졌다.

기쁨에 들떴던 귀족들의 표정이 더 없이 심각해졌다. 오늘의 승리가 거짓말인 것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공성전이 벌어지면 단순히 식량만 문제되는 게 아니다. 오히려 식량보다 더 큰 문제는 바로 화살과 같은 소모성 병기들이다. 식량은 아끼고 절약하면 당분간은 버틸 수 있지만, 병기는 그럴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나치게 분위기가 가라앉았다고 느낀 것일까.

내내 굳은 표정이던 글로리 후작의 얼굴에 훈훈한 기운이 감돌았다.

"물론 우리만 고립된 것은 아니오. 반란군도 우리 이상으로 고립된 상황의 절박함을 몸소 느끼게 될 것이오."

귀족들이 눈을 휘둥그레 떴다. 글로리 후작의 말이 무슨 뜻인지 의아했던 것이다.

반란군은 성 주위를 철저히 포위하고 있다. 이 말은 트라우마 성의 병력은 갇힌 채 외부로 나갈 수 없지만, 반란군은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 있다는 의미다. 병력과 보급물자도 수월하게 조달 받을 수 있다.

그런데 그런 반란군이 고립되었다니.

글로리 후작의 정신에 문제가 있는 게 아닌지 의심이 들 정도였다.

다만 병규를 비롯한 몇몇 귀족들만이 글로리 후작의 말을 알아듣고 입가에 미소를 띄었을 뿐이다.

그들은 원래부터 붉은 대지 출신이거나, 아니면 붉은 대지에 대해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오늘밤은 필립 공작과 반란군에게 아주 긴긴 밤이 될 것이오."

트라우마의 귀족들이 대승의 기쁨을 누른채 숙연한 분위기 속에서 작전회의를 진행해 나가고 있을 때, 필립 공작 또한 휘하 사령관들을 소집하여 내일 진행될 공성전에 대한 논의를 거론하고 있었다.

수시간의 격론 끝에 내려진 작전 목표는 트라우마의 철저한 고립.

성의 방어력이 의외로 견고하니 무리하게 공략할 것이 아니라, 주위를 포위한 채 적이 지치기를 기다리자는 계략이었다.

"식량 떨어지면 그들은 결국 항복을 선언할 것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가급적 전면전을 피하고, 치고 빠지는 식으로 농성을 계속 하며 적이 지칠 때까지 기다리는 것입니다."

"텔레포트 마법으로 식량을 옮길 수도 있지 않을까?"

의자에 비스듬히 앉은 필립 공작이 묻자, 작전 설명을 하고 있던 쿨 후작 대신 마법사인 피네스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불가능합니다. 텔레포트 마법으로 옮길 수 있는 양에는 한도가 있습니다. 마법진을 이용하여 증폭한다고 해도 그 양은 그리 많지 않습니다. 마법사 한 명이 하루에 옮길 수 있는 양은 고작 몇 사람 분에 해당하는 양이 고작입니다."

"하지만 트라우마엔 대마법사인 필라이트가 있지 않은가. 그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대단위 텔레포트가 가능하지 않겠나?"

"불가능하지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한 가지 유념해야 할 것은 텔레포트 마법에 소요되는 마나의 양이 생각보다 막대하다는 것입니다. 설사 7서클 대마법사인 필라이트가 마법진의 효용을 빌린다 할지라도 하루에 옮길 수 있는 식량의 양은 기껏 작은 방 하나를 채울 만큼밖에 되지 않습니다. 그 정도 가지고는 성에 주둔한 병사들을 다 먹이기란 불가능합니다. 게다가 주민들의 입까지 감안한다면 텔레포트를 이용하는 방법이 얼마나 터무니 없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와이번은 어떨까? 마법사가 귀한 바호크 공국에서는 전부터 와이번을 이용해서 물자를 수송했다고 하던데."

이번엔 쿨이 정색을 하며 대답했다.

"와이번이 한 번에 수송할 수 있는 양은 극히 제한되어 있습니다. 바호크가 와이번을 물자 수송에 이용할 수 있는 것은 그만큼 드래곤나이트의 수가 많기 때문입니다. 고작 20여 기의 와이번을 가진 트라우마로선 절대 불가능합니다."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필립 공작의 입가에 만족스런 미소가 떠올랐다. 결국 트라우마는 식량을 구할 방법이 없다는 뜻이다. 고작 생각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 밖에서 농성 중인 병력을 정면 돌파하는 것밖에 없다.

"이제 기다리기만 하면 되겠군."

필립 공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의자에 푹 기댔다. 패전으로 인한 짜증은 일순간에 사라져 버리고 금세 얼굴에는 생기가 돌고 있었다.

그런데 오랜만의 즐거움을 방해하는 소음이 가늘게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인상을 지그시 찌푸리고 있는데, 하급 장교 하나가 막사 안으로 급히 뛰어 들어왔다.

"무슨일인가?"

"오크 몇 마리가 군영에 잠입했습니다. 다행이 지금은 수습이 되었다는 보고입니다."

"미친 돼지들이군."

군대가 주둔한 곳에 뛰어들다니. 죽으려고 환장을 한 게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필립 공작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고 다시금 회의에 집중했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금 막사 안으로 하급 장교가 허겁지겁 달려 들어왔다.

"공작님."

"또 무슨 일이야!"

필립 공작의 음성엔 짜증이 배었다.

"몬스터가, 몬스터가······."

숨을 헐떡였다.

"또 눈 먼 오크들의 난입인가? 그딴 일은 그냥 처리하면 될 것을 뭣 하러 일일이 보고를 해."

"그, 그게 아닙니다. 지금 사방이 몬스터들의 공격으로······."

"뭣이?"

놀란 필립 공작은 급히 막사 밖으로 뛰쳐나갔다.

온통 난리였다.

사방에 몬스터들의 울음소리와 병사들의 비명이 가득했다.

오크뿐만이 아니었다.

리저드맨에 미노타우르스, 트롤, 오우거까지.

오히려 중형 몬스터인 오크와 리저드맨보다 대형 몬스터인 트롤과 오우거가 더 낳은 상황이었다. 그런 몬스터들이 시커멓게 우르르 몰려들고 있었다.

휴식을 취하고 있던 병사들은 때 아닌 날벼락에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 움직이고 있었지만, 몬스터들의 난입의 여파는 시간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활을 쏴대고, 창을 찔러도 몬스터들은 두려워하지 않았다. 아니 단체로 미쳐버린 것처럼 입가에 거품을 문 채 광폭하게 달려들었다. 오우거가 그 큰 팔을 휘두를 때마다 서너 명의 병사가 허공으로 튀어 오르고, 트롤의 경악스런 재생력에 기겁하는 병사들도 있엇다.

휘황하게 보름달이 떠오른 깊은 밤.

달은 밝기만 하건만, 지상은 지옥이었다.

화광이 넘실거리고, 몬스터들의 씩씩거리는 숨소리, 병사들의 비명소리가 천지를 뒤덮었다.

"무슨 이런······."

그제야 필립 공작은 말로만 듣던 붉은 대지의 밤을 실감할 수 있었다.

몬스터들의 성지인 붉은 대지에서 맞은 첫날밤은 말 그대로 악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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