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랙나이트의 활약
한편, 병규가 퀴니의 선물에 황당한 표정을 하고 있을 때, 반란군이 점령한 수도 유리스는 침통한 분위기에 빠져있었다.
욱일승천하는 기세로 출진했던 토벌군이 적의 습격에 의해 큰 피해르 입었다는 소식이 전해졌기 때문이다.
피해는 막심했다.
수도를 출발한 토벌군의 병력은 총 2만.
그 중에서 선발대로 5천을 앞서 파견하였다.
그런데 이 5천의 선발병력 중 무려 5백 이상이 전장에서 일어난 산불로 죽거나 다쳤다. 선발병력에 포함된 마법사와 정령술사가 아군의 화살에 모두 희생되었으며, 다수의 기사가 관절에 문제가 생겨 장기간 전장에 투입될 수 업슨 지경이 되었다.
그러나 무엇보다 가장 큰 타격은 말보로 백작가의 쌍둥이 형제가 사망했다는 소식이었다.
말보로 형제는 필립 공작이 숨겨 놓았던 소드미스터였다는 사실이 뒤늦게 밝혀지면서 반란군의 수뇌를 경악케 만들었다.
더욱더 경악스러운 것은 선발군에 이렇듯 막대한 피해를 입힌 것이 고작 단 1인에 의해 자행되었다는 사실이다.
세상에 그 누가 소드마스터 둘을 단신으로 상대하고, 5천의 병력을 혼란에 빠트릴 수 있단 말인가.
계속해서 전해지는 급보에 반란군의 수뇌는 충격에 빠졌다.
반란군의 기세가 처음으로 주춤해진 순간이었다.
하지만 침통한 분위기 속에서도 필립 공작은 발 빠르게 사태를 수습했다.
즉각 급보를 날려 지휘관들을 수도로 송환했다.
그렇게 송환된 버지니아 백작을 비롯한 선발대의 지휘관들에겐 총사령관의 납치와 적의 습격에 대한 대비책 미비 등의 이유를 들어 엄중한 문책이 떨어졌다.
토벌군의 진군은 당분간 중지되었고, 연일 심각한 분위기 속에서 대책 회의가 열렸다.
전왕이 사용하던 내궁의 심처에 3인의 사내가 자리해 있었다.
소드마스터인 필립 공작과 살렘 후작. 그리고 외부로 전혀 알려지지 않은 노인 한 명이었다.
표면상 반란군의 주축은 필립 공작 외 많은 귀족으로 구성되어있었지만, 그들 대부분은 꼭두각시에 불과했다. 실제로 반란군을 좌지우지하는 실력자는 이들 세 사람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지금 그들의 분위기는 그다지 좋지 못했다.
노인이 조용히 지켜보는 가운데, 필립 공작은 거친 말로 살렘 후작을 몰아붙이고 있었다.
“이번 피해에 대해 할 말이 있으면 해 보시오.”
“쿠쿠. 무슨 말씀이신지. 선발대의 피해가 저와 무슨 상관이라도 있단 말씀입니까?”
“뻔뻔한 웃음은 닥치게. 이번 일로 얼마나 많은 피해가 있었는지 아는가?”
“보고는 이미 받았지 않습니까? 지휘관 납치, 병사 5백에 마법사와 정령술사 희생, 그리고 일개 기사단이 전멸에 가까운 타격.”
“그런 자질구레한 것을 따지는 것이 아닐세.”
“호오. 그럼 뭐가 문제일까요?”
살렘이 두 눈을 가늘게 접으며 되묻자 필립 공작은 분통이 터진다는 표정으로 괴성을 질렀다.
“사제들 말일세. 사제들! 허무하게 간 말보로 형제들은 어떻게 책임을 질 것이냔 말인가!”
“쿠쿠. 아시다시피 전 후발대에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선발대에 있던 말보로 형제의 죽음과 제가 무슨 연관이 있다는 것인지 모르겠군요.”
실제로 병규와 말보로 형제의 싸움이 있던 시가, 살렘 후작은 후발대와 함께 이동 중이었다. 도와주고 싶어도 도와줄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필립 공작의 생각은 다른 듯했다.
“흥!”
필립 공작은 싸늘한 표정으로 코웃음을 쳤다.
“관계가 없다? 과연 그럴까? 원래 자네는 선발대를 따라갔어야 했다. 분명 내가 그리 지시했다. 그런데 미숙한 사제들을 지켰어야 할 자네는 대체 어디 있었는가. 선발대에 끼어 있어야 할 자네가 왜 후발대에 머물러 있었느냔 말이다.”
“아~. 그 말씀이군요. 쿠쿠. 사실 그 당시 선발대를 따라가려 했습니다만, 말보로 형제들이 거부의사를 보이더군요. 고작 2천에 불과한 저항군을 상대하는데, 소드마스터가 셋씩이나 갈 필요가 있느냐고 말이죠. 차라리 후발대를 지휘하라더군요. 혹 적의 소드마스터가 후발대를 노릴지도 모른다는 이유였지요. 그래서 남았습니다. 물론~ 그런 제안을 했던 말보로 형제는 이미 죽고 없으니 증거를 댈 수는 없습니다만. 쿠쿠. 안타깝군요.”
쿵!
가증스러운 살렘의 답변에 필립 공작은 주먹으로 탁상을 내리쳤다.
“놈. 네가 트라우마에 몰래 갔다 온 사실을 내가 모르고 있을 줄 알았단 말이냐!”
필립 공작의 호통에 살렘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반란군의 선봉이 출진하기 전, 살렘은 단독으로 트라우마를 찾아갔다. 그곳에서 그는 병규와 재회했다.
아무도 몰랐어야 할 비밀이다.
그런데 필립 공작ㅇ이 이 비밀을 알고 있다.
지금 필립 공작은 고의로 그가 병규를 선발대로 끌어들여 사제들과 싸움을 시킨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살렘은 이내 표정을 느슨하게 풀었다.
그러곤 마치 아무것도 모르는 것처럼 흐트러진 음성으로 말을 이었다.
“쿠쿠. 글쎄요. 무슨 뜻으로 그런 말씀을 하시는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군요. 제가 트라우마에 갔었던 것은 사실입니다. 하지만 그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에서일 뿐입지요. 그런 것은 가지고 말보로 형제의 죽음과 결부시키는 것은 아무래도 지나치게 과장된 상상 같습니다. 제가 볼 때, 말보로 형제의 죽음은 그들의 실력부족을 탓 해야 할 상황인 것 같군요. 쿠쿠.”
“끄으. 네 이놈.”
필립 공작의 음성이 음습해졌다. 더불어 그의 전신에서 으스스한 냉기가 스멀스멀 흘러나왔다. 번뜩 떠진 두 눈에서 차가운 한광이 빛을 발했다.
만약 이 자리에 사부가 함께 있지 않았다면 그는 당장에 살렘의 목을 날려버렸을 것이다.
이번 선발대가 입은 피해는 생각보다 그리 크지 않다. 그깟 허수아비 같은 자일 백작과 몇 백의 병사들이 희생된 것은 얼마든지 보충할 수 있다.
하지만 말보로 형제가 전사한 것은 그에게 크나큰 타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말보로 가의 두 형제, 레드와 미디움은 필립 공작과 더불어 노인에게 검술을 배운 사형제지간이었다.
자질이 뛰어나 일찌감치 소드마스터에 이른 필립 공작과 달리, 평범한 재능밖에 없었던 말보로 형제는 최근에서야 간신히 소드마스터가 될 수 있었다.
그것도 노인이 준 약물에 의존한 것이어싿. 허나 비록 완전하지 못하다 해도 소드마스터 급이다.
설사 완전한 소드마스터인 글로리 후작이 나선다 해도 말보로 형제를 그렇듯 가볍게 제압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렇게 믿었던 두 형제가 싸늘한 시신으로 돌아왔다. 이것은 필립 공작에게 커다란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말보로 형제는 그의 사제들이면서 동시에, 필립 그 자신이 왕위에 올라 대륙통일을 호령할 때, 든든한 수족이 되어 줄 존재들이었던 것이다.
결코 시시한 내전 따위에서 목숨을 잃을 만한 소모품이 아니었다.
말보로 형제의 죽음을 두고 필립 공작이 길길이 날뛴 것엔 이런 이유가 숨어 있었다.
하지만 필립 공작의 분노 어린 일갈에도 살렘은 특유의 매끄러운 미소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자세를 느슨하게 풀며 더욱더 오만 방자한 태도를 취하는 것이었다.
‘역겨운 놈.’
놈의 추악한 웃음소리.
필립 공작은 이를 으드득 갈았다.
‘입양아 같은 자식이.’
살렘은 노인의 정통제자가 아니었다.
기초부터 노인이 직접 가르친 그들과 달리 살렘은 5년 전, 돌연 노인이 데려와 기명제자로 삼은 녀석이다.
이런 상황이 영향을 미친 때문인지, 정통제자인 필립 공작, 말보로 형제들과 기명제자인 살렘 후작 사이엔 미묘한 알력이 존재했다.
겉으론 서로 협조하는 것 같았지만, 뒷구며으론 서로에 대한 견제를 늦추지 않았다.
‘죽으려면 제 놈이 죽을 거시지.’
필립 공작이 살렘을 곱게 보지 못하는 것엔 그러한 이유가 있었다. 다만 그가 살렘을 함부로 하지 못하는 것은 그만큼 살렘의 실력이 뛰어나기 때문이다.
어떻게 된 일인지, 고작 5년을 배운 놈이 10여 년을 노인에게 배운 레드와 미디움을 가볍게 누르는 막강한 실력자가 되었다. 그리고 이제는 필립 자신조차 살렘의 정확한 실력을 짐작하지 못한 지경이다.
어떻게 된 일일까.
사부가 특훈이라도 시킨 것일까?
그도 아니다.
오히려 사부는 살렘에게 무관심했다.
지금까지 사부가 살렘에게 무공을 전수하는 모습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을 정도다. 그런데도 살렘은 마치 별나라에서 떨어진 것 같은 막강한 실력을 과시하는 것이다.
“네놈. 사형제가 죽었다는 데도 네 녀석은 아무런 죄책감도 없는 것이냐!”
“호오. 그들이 언제 절 사형제로 받아 주었던가요? 전 그런 기억이 전혀 없습니다만, 이상한 일이로군요.”
“죽고 싶어 환장을 했구나.”
급기야 필립 공작의 분노가 머리끝까지 치밀었다. 그의 손은 어느덧 허리춤의 검에 닿아 있었다.
“그만.”
필립 공작과 살렘 후작 사이의 기세가 심상치 않자, 여태 듣고만있던 노인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지막한 음성이었지만 독기를 피우고 있던 필립 공작은 금세 꼬리를 내렸다.
감겨있던 노인의 눈이 열렸다.
순간 형형한 안광이 물보라처럼 일어나 사위를 휩쓸었다. 노인이 뿌린 무현의 기운에 필립 공작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어깨를 바들바들 떨었다.
두려웠다.
그럴 감싸고 있는 거미줄 같은 노인의 기운이 온몸을 산산조각 낼 것만 같았다.
노인은 잠시 필립 공작을 바라보다 진중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다툼은 그쯤으면 됐다. 이미 지나간 일을 가지고 왈가왈부해 봐야 사형제들 사이에 금만 생길 뿐이니. 살렘을 탓한다고 죽은 사람을 다실 살려낼 수 있는 것도 아닐 터인즉.”
노인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렇게 다독였다. 하지만 필립 공작은 사부라면 족은 사제들을 살려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만큼 노인의 능력은 적대적이었다.
“내 이번 일을 가만 생각해 보았다. 제자들이 죽은 것은 분명 안타까운 일이나, 그 일을 가지고 고민만 해서는 될 일도 안 될 것이다. 대계를 이루려면 한시바삐 달아난 공주를 찾아 제거하고 저항군을 쓰러버려야 한다. 공작. 내 말이 맞는가?”
“오, 옳으신 말씀입니다. 사부님.”
“그렇게 잘 아는 사람이 왜 값싼 입만 놀리고 있는 것인가?”
음성은 부드럽다. 하지만 그 속에 담긴 내용은 가슴이 서늘할 정도로 날카로웠다.
“즉시 처리하겠습니다.”
“그래야겠지.”
느긋한 태도로 고개를 주억거리던 노인은 한 가지 청을 더했다.
“아무래도 제자들을 살해한 그 어린 녀석이 걸리는군. 이번엔 자네가 직접 가는 것이 좋을 듯하네.”
노인의 명령에 항변은 존재할 수 없었다. 필립 공작은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노인의 뜻을 따랐다.
“그렇게 하겠습니다. 사부님.”
“대체 사부님은 무슨 생각이신지 모르겠군.”
내궁을 나선 필립 공작은 주먹을 으스러져라 쥐어짜며 분노를 삭였다.
아무리 진정하려 해도 분이 풀리지 않았다.
살렘 후작.
그 간악한 웃음소리.
사생아 같은 녀석이 자꾸만 그의 심기를 거슬린다. 놈을 생각할 때면 뱀을 만진 것처럼 목구명이 꺼림칙하기까지 했다.
왜 사부는 그런 녀석을 감싸고 도는 것일까.
살렘에 대한 분노가 끓어오를수록 복잡해진 내전에 대한 아쉬움도 커져갔다.
계획대로라면 실타래가 풀리듯 자연스럽게 진행되었어야 할 일이다. 그런데 예기치 못한 일들이 하나 둘 생기면서도 이제는 짜증이 솟을 만큼 꼬여버리고 말았다.
맨 처음 시작은 마왕 소환이 실패하면서부터다.
그는 처음부터 트라우마와 글로리 후작이 문제가 될 것을 예견하고 있었다.
반란이 성공하여 왕성을 점령하면 트라우마의 성주, 글로리 후작이 최대의 걸림돌이 될 것이다.
글로리 후작은 능히 그럴만한 실력과 능력을 겸비하고 있었다. 이에 필립 공작은 그를 견제할 생각으로 흑마법사를 고용했다.
다행히 그가 고용한 흑마법사는 마왕 소환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미치광이였다.
마왕을 소환하는 데는 상상할 수 없는 막대한 자금이 필요했다. 필립 공작은 그 자금을 대주었다. 대신 흑마법사로 항금 트라우마 근처에서 마왕을 소환하라는 조건을 붙였다.
소환이 시패해도 상관없었다.
다만 마계의 뭔가가 소환되기만 하면 되었다.
트라우마 근방에서 소환된 마계의 존재는 당연히 첫 제물로 트라우마를 선택할 것이다.
그것으로 족했다.
글로리 후작은 마계에서 소환된 존재와 싸우느라 아이런 왕국의 내전에 관여할 틈이 없게 될 것이다.
그런데 실패했다.
무슨 잿빛의 용사하는 용병 나부랭이가 그의 계획을 망친 것이다.
그때부터다.
그의 계획이 어긋나기 시직한 것은.
이 사소한 어긋남 때문에 글로리 후작이라는 무시 못할 강적이 그의 배후를 노리게 되었다.
사실 마왕 소환을 막은 것은 잿빛의 용사 아니라 병규였다. 하지만 필립 공작은 그런 것까지는 알지 못했다. 따지고 보면 병규는 알게 모르게 필립 공작의 행사를 여러 번 방해한 셈이다.
“살렘, 잿빛의 용사, 그리고 내 와이번을 가져간 놈까지. 좋아. 얼마든지 반항해라. 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네놈들을 뼈째 갈아버릴 터이니.”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뜯던 필립 공작은 부관을 호출하여 버럭 괴성을 질렀다.
“출정 준비를 하라. 이번엔 내가 직접 가겠다.”
“쿠쿠. 아무래도 공작이 제게 불만이 많은 것 같군요.”
필립 공작이 사라지자 살렘은 키득키득 웃으며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노인은 눈을 반개하고 정좌한 채 건성으로 대답을 했다.
“속이 좁고 옹졸한 자이니, 그럴 만도 하지.”
“눈치가 빠른 것은 아니고요?”
“고대로부터 소심한 자는 욕심이 많고 눈치가 빠른 편이지.”
“쿠쿠쿠. 당신은 제자에게 너무 박한 것 같군요.”
“부족한 자에게 부족하다고 말하는 것은 욕이 아닐세.”
“한데, 요즘 새로운 장난감에 흥미를 느끼시는 것 같으시던데. 공작의 아들에겐 무슨 관심입니까?”
살렘 후작의 물음에 노인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뛰어난 재능을 가지고 있는 아이라 신경을 쓰는 것뿐일세.”
“호오. 재능이라.”
살렘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노인은 결코 평범한 사람이 아니다.
마법과는 전혀 다른 신비한 능력을 자유자재로 구사했다. 소드마스터쯤은 가볍게 요리할 수 있을 정도로 깊은 수양을 쌓았다.
그런 노인의 구미를 당길 만한 재능이라니. 과연 어떤 재능일까.
그때, 문이 살짝 열리면서 한 사람이 슬그머니 안으로 들어섰다. 그를 본 노인의 표정이 인자하게 풀어졌다.
“라이트로구나. 왜 그러고 서 있는 게냐. 어서 들어오지 않고.”
“헤헤. 여기 계셨군요.”
라이트는 미소를 머금은 채 안으로 들어섰다.
“흠.”
라이트를 본 살렘 후작의 두 눈이 반짝였다.
과연 노인이 말한 재능이 무엇인지 궁금했던 것이다. 하지만 눈을 씻고 봐도 라이트의 재질은 평범한 이하였다.
골격이 좋은 편도 아니고, 얼굴 생김은 미남형이긴 하지만 모가졌다. 미간은 넓고 눈동자는 작았다
이런 인상의 사람은 대체로 머리는 좋아도 잡생각이 많아 대성하기 힘들다. 사기꾼들이 대개 이런 얼굴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손님이 계셨네요.”
라이트는 살렘 후작을 보고 꼬리 만 강아지처럼 슬금슬금 눈치를 보았다. 그도 부친인 필립 공작과 살렘 후작의 사이가 좋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눈치를 읽은 노인이 살렘에게 넌지시 축객령을 내렸다
“이번 출정에 자네도 물론 따라가야 할 테지? 준비할 것이 많을 듯하니 그만 나가서 일을 보시게.”
“쿠후후. 그렇게 합지요.”
살렘은 라이트를 향해 의미심장한 눈빛을 던지고는 밖으로 나갔다.
“휴.”
살렘이 나가자 라이트는 가슴을 쓸며 한숨을 내쉬었다.
“살렘이 무섭더냐?”
“아니오. 그건 아니고.....”
부인하는 라이트였지만 그의 다리는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그것을 눈치 못 챌 노인이 아니었다. 하지만 못 본 척 입가에 미소를 띄웠다.
“그래. 알려준 구결은 외웠느냐?”
“네?네.”
“한 번 외워보도록 해라.”
“그, 그것이.”
라이트는 노인의 눈치를 살살 보며 말끝을 흐렸다.
그의 행동만 봐도 뻔하다. 구결을 외웠다는 말은 거짓말일 것이다. 여자 꽁무니를 따라다니느라 구결을 외워야 한다는 생각까지는 미처 하지 못하고 있었을 테지.
하지만 노인은 역정을 내지 않았다.
“생각이 나지 않느냐? 허허, 할애비 앞이라고 긴장이 된 모양이구나.”
“헤헤. 맞아요. 좀 전까지 확실히 외우고 있었는데, 갑지기 기억이 안 나네요.”
인자하게 웃고 있는 노인이지만 주름진 두 눈엔 알 수 없는 열망이 타오르고 있었다.
라이트의 재능은 보잘것없다.
그를 한마디로 표현하지만 난봉꾼이라고 대답할 수 있을 것이다.
아직 어린 나이에도 불구하고 힘과 권력에 맛이 들려 거만하기 이를 데 없었으며, 가학을 즐기고 색을 밝혔다. 자신의 마음에 들지 않으면 친한 수하에게도 잔인한 행동을 서슴지 않았다.
필립 공작은 여러 번 라이트를 다그쳤다. 장차 군주가 될 녀석이 행동이 이렇게 방종해서 어디에 쓰겠냐고. 하지만 그때마다 노인은 필립 공작을 말렸다.
노인의 비호를 받은 라이트는 갈수록 버릇이 없어졌다.
필립 공작의 시름은 깊어갔지만, 반대로 노인의 음흉한 미소는 깊어졌다.
라이트가 방탕해질수록 오히려 기꺼워하며, 속내를 알 수 없는 괴소를 흘리는 것이었다.
과연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는 하늘과 그 자신만이 알 뿐일 것이다.
다음 날 필립 공작은 1만 5천에 이르는 토벌군을 이끌고 왕성을 출발했다. 그로부터 3일 후, 병규에게 호되게 당한 선발대와 합류하여 트라우마로 진군을 시작했다.
그렇게 병합된 병력은 무려 2만이 넘었다.
게다가 소드마스터인 필립 공작과 살렘 후작이 출정했다는 소식까지 전해지자 트라우마는 초 비상상태가 되었다.
아이린 왕국이 자랑하는 세 명의 소드마스터 중 무려 두 명이나 적이 되어 나타난 것이다.
글로리 후작은 즉시 반란군에 대해 조사를 시작했다. 그리고 루멘 백작은 트로웰 기사단과 여타 병력들을 전비했다.
그러는 와중에 디스는 중립을 선언한 귀족들의 참여를 호소하며 동분서주했다.
반란군의 움식임이 포착된 순간, 트라우마의 핵심인사들은 이에 대한 대처방안을 위해 긴급회의를 열었다.
반란군의 동태를 보고하는 자리에서는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긴장감이 흘렀다.
“필립 공작의 진군속도가 너무 빠릅니다. 이대라면 10일 안으로 작전지역에 당도할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병력 구성은 어떤가?”
“정보길드인 ‘주시자의 눈’에 따르면 보병 2만 2천에 기병이 7백, 그리고 마법사와 정령술사가 도합 1백 정도 된다고 합니다.”
“흠, 전보다 규모가 늘었군.”
“귀족들을 쥐어짠 모양입니다. 그들의 사병들이 대거 참여한 것으로 보입니다.”
귀족들의 얼굴 위로 싸늘한 긴장이 어렸다.
2만 2천의 대병력.
그에 반해 트라우마에 집결한 병력은 2천을 간신히 넘는 수준이다. 열 배가 넘는 엄청난 병력 차를 보인다.
정면으로 맡붙는다면 순식간에 무너질 것이다.
하지만 글로리 후작은 담담한 표정을 유지하고 있었다. 마치 반란군의 병력이 아무리 늘어도 전혀 상관없다는 듯한 태도다.
“좋아. 반란군에 대한 정보는 그쯤 해두고. 이번엔 아군의 준비를 확인해 볼까? 비축하고 있는 식량은 어느 정도인가.”
“대략 20일 정도는 버틸 수 있을 것으로 보입니다. 만약의 사태에 대비해 보존마법이 걸려 있는 지하창고로 옮겨 두었습니다.”
“20일이라. 순수하게 군량만 게산한 것이냐? 공성전이 발발하면 트라우마는 철저히 고립된다. 성의 주민들도 식량을 구할 수 없게 된다는 소리지. 성의 주민까지 포함하면 어떤가?”
“일 주일..... 정도가 한계일 것입니다.”
“맙소사.”
“고작 그 정도밖에 버틸 수 없단 말인가!”
귀족들의 입에서 한탄이 흘러나왔다.
공성전에 있어, 수성측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지루한 지구전을 얼마나 잘 버틸 수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것은 전쟁의 향방을 좌우하는 가장 중요한 요건이 된다.
그런데 고작 일 주일이라니. 싸움도 하기 전에 사기부터 떨어뜨리는 소식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본래 트라우마는 모든 식량을 외부의 상인들을 통해 조달하고 있었다.
붉은 대지는 땅이 너무 척박하고, 몬스터가 들끓어서 도저히 식량을 생산할 여건이 되지 못했다. 그래서 어쩔 수 없이 트라우마를 왕래하는 상인들에게 식량을 구했다.
자급자족할 식량을 생산할 수 없다는 것은 수성측에 있어선 크나큰 약점이었다.
“일 주일이라.”
이번만은 글로리 후작의 안색도 무겁게 가라앉았다.
“식량을 더 구할 방법이 없는가?”
“알카니스 상단에서 목숨을 걸고 식량을 조달하겠다는 의지를 보이고 있습니다만, 아시다시피 신성제국을 출발한 상단이 트라우마에 도착하는 데는 반달 이상의 시간이 소요됩니다.”
“너무 늦는군.”
반란군의 도착은 10일 전후, 식량은 그보다 5일이나 늦게 도착한다.
시간이 더 필요했다.
식량을 외부에서 조달할 시간이 그들에겐 너무나 절실했다.
“좋아. 식량 건은 일단 보류하기로하지. 비축된 무기의 보유사항을 말해보게.”
“네. 현재 제1창고와 제2창고에 기록된 무기는 모두.... .”
간결한 보고가 이어졌다. 하나같이 암울한 소식과 진단이었다.
그나마 간간이 들려오는 희소식은 중립을 선언한 귀족들이합류한다는 정도였다.
“질 백작과 도몬 백작 가문이 합류의사를 밝혀왔습니다. 그 외에도 백닥 가문 세 곳과 남작 가문 여섯이 사병을 이끌고 트라우마로 달려오는 중입니다.”
디스가 반란군에 동참한 귀족들이 고독이라는 정체불명의 괴생물체에게 조종당하고 있다는 사실을 만방에 밝힘으로써, 그간 중립을 표하던 귀족들의 마음을 어느 정도 돌리는 데 성공했다.
그 결과로 불리한 전황임에도 지방귀족들이 속속 트라우마로 합류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의 병력은 어느 정도인가?”
“질 백작이 3백, 도몬 백작이 2백입니다. 이외에도 각지에서 합류할 예정인 귀족들의 병력을 모두 합하면 천 정도는 될 것이라고 정보부는 분석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들이 합류하는 데 최소 12일에서 20일 정도까지는 시간이 필요할 것으로 사료됩니다.”
“흐음.”
글로리 후작응 수염을 쓰다듬으며 곤혹스런 표정을 지었다.
“결국 모든 문제는 시간으로 귀결되는군. 반란군은 이미 10일 거리까지 접근했다. 이대로라면 트라우마 성은 적들에 의해 고립되고, 지원군은 성으로 들어오지도 못한 채 각개격파 당할 것이다. 또한 부족한 식량을 구입하는 데도 시간이 부족해.”
어떻게든 반란군의 진격속도를 늦춰야 했다.
하지만 대체 어떤 방법으로 2만의 병력을 상대로 시간을 벌 수 있단 말인가.
문득 글로리 후작은 따분한 표정으로 귀를 파고 있는 병규에게 시선을 옮겼다.
“신임 흑기사 단장. 자네의 생각은 어떤지 궁금하군.”
병규가 백작의 작위를 받게 되면서, 레종 공주는 아예 그를 드래곤나이트를 통솔하는 정식 기사단장으로 임명하였다.
드래곤나이트 부대를 창설하고 훈련한 공을 높게 평가했기 때문이다. 또한 이 기회를 빌려 드래곤나이트를 정식 기사단으로 승격시키고, ‘피스트 드래곤나이트’라는 공식 기사단명까지 부여했다.
피스트란 폭풍의 상위정령인 ‘피스트론’에서 따온 것으로, 검은 장막처럼 날아다니는 드래곤나이트의 위력이 마치 폭풍과 같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사람들은 그들을 ‘블랙나이트’라 불렀다.
와이번들의 색이 검었기 때문이다.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먹을 뒤집어쓴 것처럼 번들거리는 검은색으로 물들어 있었다.
퀴니와 계약을 했기 때문에 생긴 변화였다.
병규와 기사들도 ‘피스트 드래곤나이트’라는 정식명칭보다 ‘블랙나이트’란 이름을 선호했다. 그 때문에 갑옷도 아예 검은색으로 새로 주문했을 정도였다.
백작이라는 작위엔 거부감을 표하던 병규도 블랙나이트의 단장자리엔 별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오히려 드래곤나이트들과 함께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쁘게 생각했다. 수도 유리스에서부터 손수 데려오고 훈련시킨 와이번들이라 정이 남달랐다.
사람들이 병규를 흑기사라고 부르는 이유는 간단했다.
이드라센 대륙에 흔치 않은 검은 흑발에 검은 눈동자. 그리고 와이번에 맞춰 검게 도색된 갑옷까지.
온통 검은색인 그를 사람들이 불멸의 흑기사라 칭송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일 것이다.
“자네라면 뭔가 뾰족한 수가 있을 것 같은데. 어떤가?”
글로리 후작의 물음에 병규는 씩 하고 웃었다.
지루한 회의를 참고 기다렸던 것은 바로 이런 말을 기대했기 때문이다.
“마침 드래곤나이트들의 훈련 성과를 확인하고 싶던 차였습니다.”
그의 음성엔 자신감이 철철 흘러 넘치고 있었다.
다음 날 아침, 날이 밝자 마자 병규는 짐을 챙겨들고 후원으로 향했다. 그런 그를 누군가가 막아섰다.
“설마 그냥 가는 건 아니겠죠?”
곱게 눈을 흘기는 여인은 다름 아닌 레종 공주였다.
그녀는 파티 복 차림으로 화려하게 치장하고 있었다. 물론 정말로 파티에 가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가 화려하게 단장한 것은 오로지 병규를 위해서였다.
“이렇게 눈부시게 아름다운 레이디를 앞에 두고 어떻게 그냥 갈수 있겠습니까. 전 그렇게 무심한 남자가 아니랍니다.”
병규는 손을 허리에 두르며 어색하나마 귀족의 예를 흉내 냈다.
레종 공주는 입술을 삐죽 내밀며 뾰로퉁하게 말했다.
“어색해요. 그냥 원래대로 해요.”
“하하.그렇죠?”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머쓱하게 웃었다. 그제야 레종도 맑게 웃었다.
복사꽃처럼 아름다운 얼굴이었다.
하지만 병규의 시선은 자꾸만 그녀의 빨간 입술로 향했다. 그날의 기습 키스가 꿈인 듯 몽롱하기만 했다.
“당신은 너무 바쁜 것 같아요. 아직 전 당신의 모험담을 듣지 못 했어요. 그런데 또 떠나시는 건가요?”
레종이 새치름한 표정으로 말했다.
위험한 임무를 무사히 성공시키고 돌아온 지 며칠이나 됐다고 또 출정이다. 그동안 사무에 바빠 병규를 보지 못한 레종은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미안해요.”
병규는 조용히 미소 지으며 그녀의 손을 잡아끌었다. 설마하니 그가 이렇듯 적극적으로 나올 줄 몰랐던 레종은 그만 쓰러지듯 그에게 안기고 말았다.
“저, 저기....”
레종은 당황하며 어쩔 줄 몰라 했다.
병규는 그런 그녀를 꼭 안았다.
봄바람처럼 포근하면서도, 한 여름의 뙤약볕처럼 뜨겁게.
그의 품에서 꼼지락거리는 그녀의 움직임이 작은 아이의 그것처럼 느껴졌다.
병규는 가만 숨을 들이켰다.
안개꽃의 싱그러운 향기가 풍겼다.
파르라니 떨리는 그녀의 어깨와 콩닥콩닥 쉴새없이 뛰는 심장소리.
당황.
기대.
설레임.
놀라고 기쁜 감정들이 그녀의 혈관 속을 바쁘게 움직이고 있었다. 예민한 청각으로 그녀의 몸이 말하는 갖가지 신호들을 경청한 병규는 작게 미소 지었다. 정말이지 너무도 새롭고 신기한 경험이 아닐 수 없었다.
“이번에도 꼭 돌아올게요. 약속해요.”
감미로운 약속과 함께 병규는 그녀를 놓아 주었다.
레종은 진한 아쉬움을 느꼈다.
빠르게 멀어지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야속하게까지 느껴졌다. 다리에 힘이 Vnffu 벽에 기대고 선 레종은 가쁜 숨을 헐떡였다.
‘왜......왜 이러는 걸까. 왜 이렇게 가슴이 두근거릴까.’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작은 쪽배를 타고 폭풍우 속을 헤맨 것 같았다.
레종 공주는 차분히 숨을 고르며 이제는 까마득히 멀어진 병규의 그림자를 아쉬워했다.
레종과 헤어진 병규는 곧장 후작의 저택 후원으로 달려갔다.
그곳엔 이미 출동 명령을 받은 드래곤나이트들이 모든 준비를 마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장님께 경례.”
기사들은 일제히 검을 뽑아 올리며 인사를 대신했다. 엘프들은 그들 나름대로의 우아한 동작으로 병규를 반겼다.
드래곤나이트와 엘프들은 2인 1조로 와이번에 탑승했다. 그것이 아이린 왕국의 드래곤나이트, 블랙나이트만의 특별함이었다.
“하하. 무안하네요.”
기사들의 과분한 환영에 병규는 뺨을 긁적였다. 아직 그는 이런 환성이 어색하기만 했다.
후원에 드래곤나이트와 엘프들 말고도 귀족들과 성의 주민들이 구름처럼 모여 있었다. 그들은 드래곤나이트들이 처음으로 출정하는 역사적인 날을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위해 하던 일을 내팽게 치고 이곳으로 달려왔다.
특히나 그들은 드래곤나이트를 지휘하는 불멸의 흑기사 ‘변기’에 열광했다.
병규가 나타나자 사람들은 일제히 두 손을 머리 위로 흔들며 열광했다. 터져 나온 환호성에 트라우마가 쩌렁쩌렁 울릴 지경이었다.
그 모든 것이 병규는 아직 어색하기만 했다.
“단장님은 부끄러움이 너무 많으십니다.”
그의 부관인, 시즌 남작이 쾌활하게 웃어 보였다. 시튼은 훤칠한 키에 시원시원한 마스크를 한 인물로 유달리 병규를 따랐다.
실력 또한 뛰어나 병규를 제외한 나머지 블랙나이트 내에서 가장 와이번을 잘 다뤘다.
명실상부한 2인자라 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
서글서글한 인상 때문인지 병규도 그를 스스럼없이 대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하하. 아직까지 존대시로군요. 이젠 작위로나 직위로나 변기님이 저보다 위입니다. 말을 편하게 하셔도 됩니다.”
“차차. 그렇게 할게요. 준비 다 됐으면 출발하죠. 여긴 너무 소란스럽네요.”
장난스럽게 말을 건넨 병규는 먼저 자신의 와이번에 올라탔다.
까마귀로 이름 지어 준 그의 와이번은 목울음을 가늘게 흘리며 반가움을 표했다.
“녀석. 나도 반갑다.”
끄드드드.
그가 와이번의 목을 어루만질 때였다. 그와 짝을 이룰 엘프가 까마귀의 안장에 올라탔다.
“잘 부탁해요.”
“네. 잘 부탁……. 어?”
생소한 목소리에 고개를 돌려본 병규는 깜짝 놀랐다. 그의 안장에 올라탄 것은 평소에 짝을 이루던 엘프가 아니었다.
싱그러운 백합과 같은 향기를 머금은 성스러운 하이엘프.
카즈엘이 아닌가.
“네가 어떻게 여기에?”
“이제부터 제가 변기 님과 동승하게 되었어요. 잘 부탁드려요.”
카즈엘은 귀엽게 웃었지만 병규는 결코 웃을 수 없었다.
“맙소사. 전쟁은 장난이 아니야. 난 절대로 아이를 전쟁터로 내몰 수 없어.”
“자지만 전 변기 님보다 나이가 많은 걸요?”
“헛.”
병규는 일시 말문이 막혔다.
그랬다. 기본적으로 엘프들은 인간보다 훨씬 수명이 길었다. 하이엘프는 그런 엘프들보다도 몇 배나 오래 살았다.
카즈엘도 겉ㅇ드로 보기엔 고작 16, 7세 정도로 보이지만 실제 나이는 병규보다 한참이나 많았던 것이다.
“그, 그래도 태울 수 없어.”
“왜요?”
카즈엘이 뾰로통한 표정으로 따졌다.
“넌 모든 엘프들의 정신적 지주잖니. 만약 네가 다치기라도 하면…….”
“물론 엘프들과 충분히 대화를 했어요. 변기 님께서 걱정해 주지 않으셔도 돼요.”
“죽을 수도 있다.”
병규는 진지한 표정으로 말했다.
“설마 제가 그 정도 각오도 하지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시나요?”
단호하게 말하는 그녀의 얼굴에 절대로 물러설 수 없다는 오기가 서려 있었다.
결국 병규는 설들하는 걸 포기했다.
“에효. 대신 조심해야 한다. 절대로 무리하지 말고. 까마귀의 안장에 꼭 붙어 있어. 알았지?”
“걱정 마세요.”
카즈엘은 해맑은 표정으로 배시시 웃어 보였다. 병규는 한숨을 쉬며 출발을 명하려고 했다. 그런데 키득거리는 소리가 들려오는 것이 아닌가. 고개를 돌려보니 수하들이 히죽거리며 웃고 있었다.
“휘익~! 부럽습니다. 단장님.”
“그런 미인을 대체 언제 꼬신 겁니까? 보기보다 재주가 많으시군요.”
“오~ 맙소사. 우린 전부 남자 엘프인데, 단장님만 여자 엘프인 거야? 그것도 저렇게 귀옆고 아름다운 미인이라고? 아아~ 단장님 제발 파트너 교환해 줘요.”
“나중에 술 사드릴 테니. 엘프 꼬시는 법 좀 가르쳐 주십시오.”
짓궂은 그들의 농담에 병규의 얼굴이 붉게 물들었다.
“시, 시끄러. 다들 출발!”
병규의 명과 함께 드래곤나이트들은 일제히 트라우마 상공으로 날아올랐다.
등에 두 사람이나 태웠음에도 와이번은 기운이 넘쳤다. 웅장한 파공음이 들리는 가 싶더니 어느새 까마득한 상공이었다.
퀴니와 계약한 후의 와이번들은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이 강해졌다.
“우와아아아아아!”
“블랙나이트 만세!”
“흑기사에게 영광이. 레종 공주님께 축복이. 아이린 왕국이여 영원하라.”
열광하는 시민들의 환호성이 하늘 꼭대기까지 닿을 듯 울려 퍼졌다.
블랙나이트들의 첫 출정은 그렇듯 트라우마 시민들의 환호와 함께 시작되었다.
블랙나이트들은 무리를 이뤄 나는 철새들처럼 북으로 날았다.
와이번의 스피드는 놀랄 만큼 빨랐다.
반나절쯤 나아가자, 반란군의 거대한 진영을 볼 수 있었다.
“좋아. 반란군을 깜짝 놀라게 해 줄까?”
기성을 지른 병규가 구름을 뚫고 검은 뇌전처럼 아래로 수직 하강했다. 이에 질세라 다른 드래곤나이트들이 그가 탄 와이번의 꼬리를 따라 일렬로 우수수 떨어져 내리니 그 기세가 험하기 이를 데 없었다.
무시무시한 속도로 하강하던 와이번들은 지면에 닿을 만큼 아슬아슬한 순간 돌연 물 찬 제비처럼 반란군의 머리 위를 스치듯 지나갔다.
쉬아아아악!
거친 돌개바람이 일며 천막과 사람들이 가을바람에 낙엽 날리듯 휩쓸렸다.
“으힉!”
“뭐, 뭐야!”
“몬스터다.”
“드, 드, 드레곤 나이트!!”
혼비백산한 병사들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경악성을 내질렸다.
일대 혼란이었다.
아무런 경보도 없이 드래곤 나이트가 종횡무진 머리 위를 휩쓰니 공포를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좋아. 한 번 더.”
병규는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다시금 적진을 몰아쳤다.
쉬이이익.
귓가를 수치는 칼바람소리가 무서울 정도다.
타고 있는 사람이 두려움을 느낄 지경인데, 정작 와이번들의 공격을 맨몸으로 받아야 하는 반란군 병사들의 심정은 어떨까.
괴성을 지르며 날아오는 와이번의 공포스러운 모습에 입에 거품을 물고 쓰러지는 자들이 속출했다.
“말들을 노려라.”
병구가 큰 목소리로 지시했다.
아무리 그의 목소리가 크다 해도 맹렬히 달리고 ldT는 기사들에겐 전달되기 힘들었다. 하지만 동승한 엘프들은 달랐다. 그들은 청각이 유난히 발달되어, 병규의 외침을 어렵지 않게들을 수 있었다.
엘프들 덕분에 드래곤나이트의 지휘가 한결 편하고 자유스러울 수 있었다.
“크롸롸롸라!”
병규의 지시를 받은 드래곤나이트들은 두 눈을 휘번덕거리며 말들을 찾아 다녔다. 특히 그들은 기사들이 타고 다니는 군마를 노렸다.
반란군의 임시 군영엔 숱하게 많은 천막들이 즐비하게 늘어서 있어서 어느 곳에 말이 있는지 쉽게 찾을 수 없었다.
하지만 와이번은 달랐다. 야생의 몬스터로 사냥을 해온 덕분에 와이번들의 감각은 극도로 단련되어 있었다. 이내 군마들의 냄새를 맡고 먹이를 발견한 박쥐처럼 스산하게 목표를 향해 날아들었다.
날개를 펄럭이며 천막을 날려버리자 그 아래로 우완좌완하는 군마들이 보였다.
크롸롸라.
환성을 지른 와이번들이 군마들에게 달려들었다.
군마들의 무게는 육중했지만, 와이번들은 매가 병아리를 채듯 가볍게 채 올리며 하늘로 치솟았다.
히히힝, 끼힝!
말들은 비명을 지르며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갈고리와 같은 와이번의 발톱이 등에 단단하게 박혀 있어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20마리 모두 어김없이 말을 채서 하늘로 날아올랐다.
뒤늦게 화살이 날아왔지만 이미 와이번들은 허공 높이까지 솟아 버린 후였다.
“떨어트려.”
병규의 명에 따라 와이번들은 힘들게 끌고 올라온 말들을 상공 높은 곳에서 떨어트렸다.
퍽퍽! 철퍽!
반란군들의 야영지 머리 위로 말들이 우박처럼 떨어져 내렸다. 소름 끼치는 파공음과 함께 말의 몸통들이 폭죽처럼 터지며 사방으로 피와 살점이 튀었다.
더러는 막사 위로 떨어져 말과 함께 희생되는 병사도 생겼다.
“히, 히이이익!”
폭발하듯 터져 버린 말의 육편을 뒤집어쓴 어느 병사는 이성을 상실한 듯, 미친 듯이 비명을 질러댔다.
적의 말을 이용한 우박세례에 반란군은 삽시간에 아비규환의 상황에 빠졌다. 병사들은 혼란스러워했고, 지휘체계는 진창에 빠진 것처럼 허우적대기 시작했다.
갑작스런 기습이 제대로 먹혀든 것이다.
“우리의 기세에 적들은 혼비백산했다. 이 기회를 놓치지 마라. 질풍처럼 몰아친다. 폭풍처럼 아수라장을 만들어 주자!”
“질풍처럼 세차게, 폭풍처럼 웅장하게!”
“반란군에게 정의의 벼락을.”
병규의 구호를 따라 외친 드래곤 나이트는 수직으로 허공에 치솟았다가 그 기세 그대로 반란군의 머리 위로 쏟아져 내렸다.
꼬리에 꼬리를 문 와이번들의 형세는 가히 고대 중국이 숭상하던 신성한 신수, 용의 모습을 닮아 있었다. 그렇게 성난 폭풍처럼 쏟아져 내리던 드래곤나이트가 병규의 일갈성에 부채가 펼쳐지듯 사방으로 쫙 펼쳐졌다.
파파파팍!
와이번들의 기찬 움직임에 회오리가 일며 병사들과 그들의 막사를 비질하듯 쓸어버렸다.
“마, 막아.”
“으악.”
“궁병. 궁병.”
“젠장 마법사들은 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병사들은 비명을 지르며 우왕좌왕할 뿐 어찌 대처할 방법을 찾지 못했다.
50여 채의 천막이 해일에 쓸려 간 해변처럼 순식간에 쓸려 갔다.
병규는 머리 드래곤나이트들에게 지시를 내려 비교적 감시가 심한 천막만을 집중적으로 노리게 했다.
아이린 왕국의 군영지는 보안을 위해, 하급 병사나 상급 지휘관이나 모두 같은 모양의 천막을 쓴다. 이는 야음을 틈탄 불의의 습격에 대비하기 위한 묘책이었다.
대개 그런 천막들에 저의 지휘관들이 숨어 있었다.
일전에 선발대에 홀로 침투했을 때 알아낸 중요한 정보를 병규는 지금과 같은 상황에 제대로 써먹고 있는 것이다.
병규의 지시는 정확했다.
정비가 심한 막사를 뒤집을 때마다 화려한 군복을 입은 장교가 굴러 떨어졌다. 뒤처리는 엘프들의 화살이 맡았다. 그들의 화살이 바람을 가를 때마다 장교 한명씩이 고꾸라졌다.
피피피피핑.
드래곤나이트들이 난폭하게 군영을 휩쓰는 와중에, 그나마 침착한 지휘자가 궁병들을 정렬시키고 화살을 날려댔다.
하지만 바람처럼 나는 와이번을 격추시키기엔 역부족이었다.
“매직 미사일!”
“파이어 볼!”
붉은 화염을 내뿜는 파이어 볼은 피하면 그만이지만, 빛줄기를 늘어뜨리며 끈질게게 따라붙는 매직 미사일은 현대저의 열 추적 미사일만큼이나 성가신 것이었다.
게다가 매직미사일은 와이번을 직접 노리는 대신 와이번을 조종하는 기사들을 겨냥했다.
분명 보통의 드래곤나이트였다면 꽤 곤혹을 치렀을 것이다.
하지만 병규가 지휘하는 블ㄹ랙나이트들은 달랐다.
블랙나이트엔 와이번을 조종하는 드래곤 나이트 외에도 마법과 정령술에 능한 엘픅라 동승하고 있는 것이다.
“실드!”
파팡!
가볍게 마멉을 막아낸 엘프들은 눈부신 동작으로 화살을 쏘며 역습을 가했다.
그들의 화살은 바람의 정령을 타고 백발백중, 목표물을 명중시켰다.
프윳!
“크악.”
비명과 함께 마법을 난사하던 젊은 마법사가 이마에 화살을 박은 채 널브러졌다.
크롸롸롸라.
비명소리에 자극을 받은 와이번들이 날개를 펼치며 허공으로 솟구쳤다.
하늘 높이 솟구치자, 엘프들의 화살은 더 큰 위력을 발휘했다.
적의 화살은 이쪽에 닿지 않는데, 엘프들의 화살은 귀신같이 적을 쳐가기 시작했다.
피피피피핏
엘프들은 가히 궁술의 대가라 할 만했다.
눈 깜빡할 사이에 십여 발의 화살을 날리는 속사가 있는가 하면, 활시위를 당길 때마다 서너 벌의 화살을 동시에 날리는, 멀티샷을 과시하는 엘프도 있었다.
더더욱 무서운 것을 그들의 화살이 무조건 목표에 명중한다는 것이다. 바람의 정령이 화살을 인도하기 때문이다.
국지적으로 퍼붓는 호우처럼 화살들은 마법사들만 집요하게 학살했다.
퍼퍼퍽!
“크악.”
쉬익!
“컥.”
바람을 가르는 파공음이 들리면 어김없이 단발마가 터졌다.
순식간에 마법사 10명이 숨졌다.
놀란 마법사들이 실드를 치며 도주했다. 하지만 엘프들에게 화살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그들 역시 마법을 익혔다. 아니 원래부터 엘프들은 마나에 능했다. 웬만한 마법사들보다 훨씬 서클이 높았다.
“디스펠!”
차가운 음성과 함께 마법사들의 몸을 가리던 마법의 방패가 지워졌다. 실드가 사라지고, 그 속에서 마법사들의 경악 어린 얼굴이 드러났다.
핑!
화살이 날아갔다.
“크악!”
비명이 터져 나왔다.
엘프들의 마법으로 마법사들의 방어마법은 허무하게 하나 둘 지워졌다. 신들린 엘프의 화살이 바람을 갈랐고, 마법사들의 목구멍에서 절규에 가까운 소리들이 토해져 나왔다.
그렇게 벌레를 죽이듯, 엘프들의 학살이 자행되고 있을 때였다.
“감히!”
촤아아악!
섬뜩한 빛줄기가 터져 나오더니 마법사들의 미간을 노리던 엘프들의 화살을 단숨에 거두어 냈다.
빛줄기의 무시무시한 기세에 멀리 하늘에서 지켜보던 드래곤나이트들의 심장은 순식간에 무너져 내렸다.
저 창연한 기운.
그것은 기사라면 누구나 꿈꾸는 환상의 기술이었다.
“오러블레이드!”
마침내 소드마스터가 나타난 것이다.
병규는 굳은 표정을 찬연한 섬광을 쏟아내는 소드마스트를 노려보았다.
길게 기른 콧부염에 오만한 인상을 한 중년사내.
“필립 공작!”
으드득.
병규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지하 감옥에서의 처절했던 순간이 떠올랐다.
한편 필립 공작 또한 허공을 배회하고 있는 와이버들을 보며 노기를 터트렸다.
“감히. 내 와이번을!”
비록 색이 검게 변하긴 했지만 그는 한순간 알아볼 수 있었다.
허공을 배회하고 있는 검은 와이번들이 바로 병규가 탈취해 간 자신의 와이번들이라는 사실을.
어찌 모를 수 있을까.
알아서 깨어날 때부터 손수 키운 마물들이다. 꼬리의 하늘거리는 움직임만으로도 충분히 구별할 수 있을 만큼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제대로 되었다면 지금쯤 공주일파를 토벌하는 선봉에 서 있어야 할 몬스터들이, 아이러니하게도 주인인 자신에게 날카로운 이빨을 들이대고 있는 것이다.
“놈.”
분노로 일그러진 눈으로 와이번들을 노려보던 필립 공작은 어렵지 않게 병규를 찾을 수 있었다. 소드마스터의 극도로 단련된 시각은 까마득히 높은 곳에 있는 병규를 충분히 식별할 수 있게 했다.
“네놈만은 반드시 죽여주겠다.!”
분노가 충천할 필립 공작은 땅에 떨어진 화살을 검으로 쓸어 올렸다.
그의 마나를 머금은 화살들은 끔찍한 파공음을 토하며 번개와 같이 병규에게 쏘아졌다.
“윈드커터! 쉴드!”
병규와 합석한 카즈엘이 즉각 마법을 시동했다.
화살들의 기운이 심상치 않음을 느낀 그녀는 두 가지 마법을 거의 동시에 시전했다.
바람의 칼날이 화살들을 후려치고, 다시 투명한 방어막이 와이번의 아래를 감쌋다.
하지만 하이엘프인 그녀의 마법으로도 소드마스터가 쏘아 보낸 화살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화살들은 그녀가 필사적으로 시전한마법들을 바늘이 천을 뚫고 지나가듯 가볍게 꿰뚫었다.
"아아······."
카즈엘은 절망 어린 눈으로 신음성을 흘렸다.
바로 그 순간,
"요수의 발톱!"
손끝으로 요사스런 기운을 뿜어낸 병규가 곡예를 부리듯 와이번의 목을 타고빙글 한 바퀴 휘돌았다.
파파팍.
막강한 위력을 과시하던 화살들이그의 요기 앞에서 대나무가 쪼개지듯 서슴없이 갈라져 나갔다.
"저, 저놈이."
분노로 필립공작의 눈두덩이 실룩였다.
"그때 죽여버렸어야 했는데."
저 어린놈이 이렇게 성가신 적이 될 줄은 상상도 못했다.
사로잡았을 때 죽이지 못한 것이 통한의 실수로 뼛속까지 후회가 밀려왔다.
"모두 상승하라."
필립 공작의 또 다른 공격을 걱정한 병규는 블랙나이트들에게 고도를 높일 것을 지시했다.
필립공작은 분통을 터트리며 발을 굴렀지만 하늘을 나는 재주가 없는 이상더는 손쓸 방도가 없었다.
"휘이~."
뒤늦게 느긋한 걸음으로 나타난 살렘은 허공을 배회하는 와이번들을 보며 입술을 둥글게 말아 휘파람을 불었다.
그는 도끼눈을 하고 자신을 노려보는 필립 공작의 시선을 외면한 채, 게슴츠레한 눈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뭉개진 막사들.
잔해 위를 뒹굴며 신음하는 병사들.
처참하게 뭉개진 군마들의 사체.
천둥번개를 동반한 초강력 허리케인이 군영 한가운데를 관통한 듯 난장판이 되어 있었다.
고작 20여 기의 드래곤나이트가 벌인 일이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막대한 타격이었다.
"쿠쿠쿠. 하여간 당신이란 사람은······."
살렘의 입술에서 고혹정인 미소가 흘러나왔다.
단신으로 군의 야영지를 습격해 적의 사령관을 납치하질 않나, 와이번이란 흉포한 몬스터를 제 수족처럼 부리며 2만이 넘는 병력을 바보로 만들지 않나.
하나같이 듣도 보도 못한 기상천외한 사건들만 몰고 다니고있다.
다음에는 또 어떤 말썽을 부릴는지 절로 가슴이 떨려온다.
지겨울 정도로 살아온 그였지만, 병규처럼 흥미로운 존재는 정녕 처음이었다.
"쿠쿠쿠."
웃음과 함께 시커먼 살의가 스멀스멀 목구멍을 치고 올라왔다.
번뜩이는 두 눈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사요한 기운을 뿜어냈다.
하지만 그는 서두르지 않았다.
아직 이르다. 설익은 냄새가 풋풋하게 묻어난다.
그는 익지도 않은 과일에 손을 대는 멍청이가 아니었다.
"더 유명해지고, 더 강해져라. 네가 최고에 오른 순간, 내 입술이 너의 피를 마시고, 내 검이 너의 내장을 훑어 낼 것이다."
살렘은 병규를 올려다보며 마른침을 연신 삼켰다.
스멀스멀 피어오르는 살기는 어느새 지독한 비린내로 변질되었다. 그것은 먹이를 노리는 독사가 풍기는 위험한 냄새였다.
그 후로도 드래곤나이트들의 습격은 계속되었다.
잠깐이라도 방심하면 어김없이 나타나 군영을 엉망으로 휩쓸었다. 기습의 강도는 날이 갈수록 강해져, 급기야 식량으로 쓸 것마저 엉망으로 만들고 말았다.
2만의 병력이 먹을 식량은 결코 적은 양이 아니었다. 그래서 필립 공작은 몇 군데에 짐을 나눠서 따로 보관했고, 안전에도 만전을 기했다.
하지만 그렇듯 철통같이 숨겨놔도 블랙나이트들은 귀신같이 찾아와 식량을 약탈하고 불을 질렀다. 몇 번에 걸친 기습으로 모든 식량이 소실되어 버렸고, 급한 대로 필립 공작은 어쩔 수 없이 근방의 마을을 약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사건으로 반란군에 대한 왕국민의 신임이 바닥에 떨어지게 되었다.
약탈은 병사들의 사기를 꺾는 데도 일조했다. 자국민의 마을을 급습하여 식량과 여자를 약탈하는 행위는 도덕적으로 많은 문제를 양산했다.
식량은 부족하고 끊임없는 습격에 제대로 휴식을 취하지 못해 반란군의 사기는 최악이었다.
자연 진군 속도도 느려질 수박에 없었다.
필립 공작은 드래곤나이트의 목적이 시간 벌기에 있음을 뻔히 알면서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다.
그렇다고 그 동안 손 놓고 구경만 한 것도 아니었다.
병력을 갈라 서로 다른 방향으로 진군시켜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러한 작전은 와이번들의 신출귀몰한 이동능력에 좌절을 맛 봐야 했다. 오히려 병력이 갈리자 와이번들은 더더욱 극심하게 날뛰기 시작했다.
병규가 인솔하는 드래곤나이트들이 두려워하는 존재는 오직 소드마스터뿐이다.
현재 반란군에 필립 공작과 살렘 후작, 두 명만이 소드마스터다. 병력을 나누면 자연 두 명뿐인 소드마스터도 양쪽으로 분산되어야 하는 것이다. 즉, 이것은 와이번을 상대할 수 있는 전력의 약화를 의미했다.
채 하루도 못 가서 필립 공작은 나눳던 병력을 다시 합류시켜야 했다.
함정을 생각해 보기도 했다.
필립 공작과 살렘 후작은 위장한 채 병사들 틈에 끼어 와이번들이 나타나기만을 기다렸다. 드래곤나이트들이 병사들의 막사를 뒤집으며 득의양양해 할 때, 그 뒤를 몰래 덮치겠다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영악하게도 그럴 때면 망할 블랙나이트들이 코빼기도 비치지 않았다. 마치 함정이 있다는 것을 미리 알고나 있었던 것처럼말이다.
결국 필립 공작은 함정마저도 포기해야 했다.
그 외에도 많은 수단이 강구되었다. 그물이 사용되기도 하고, 함정마법을 건 위장 막사를 설치해 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역시 모두 실패였다.
병규가 지휘하는 블랙나이트들은 마치 모든 것을 꿰뚫어보기라도 하는 것처럼 함정을 요리조리 피해 다니며 반란군의 아픈 곳을 집요하게 물고 늘어졌다.
결국 필립 공작도 두 손을 들고 말았다.
부득부득 이를 갈면서 와이번들에 의한 피해를 감수하며 병사들의 발걸음을 독촉했다. 이 괴로움에서 벗어나는 길은 한시라도 빨리 트라우마를 함락하고 공주를 볼모르 잡는 것뿐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굶주리고 피로한 병사들은 좀처럼 속도를 내지 못했다.
높은 언덕 위에서 반란군의 힘없는 진군을 내려다보고 있던 병규가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작전은 성공이었다. 아니 대성공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을 정도 였다.
글로리 후작이 블랙나이트에게 요구한 것은 반란군의 발을 5일만 붙들어달라는 것이었다.
트라우마를 출동한 지 오늘로 10일째다.
원래 목표의 2배 이상을 달성한 것이다.
하지만 블랙나이트들은 반란군의 발을 붙드는 것만으론 결코 만족할 수 없었다.
그래서 그들은 반란군의 식량을 불태웠고, 적의 지휘관과 마법사들을 효율적으로 사살했으며, 군마들을 추락사 시켜 기사단의 전투력을 크게 떨어트려 놓았다.
불과 20여 기의 드래곤나이트부대로 2만 대군의 앞을 가로막고, 그들의 자존심에 상처를 입힌 것이다.
이 기적과 같은 일이 가능했던 것은 엘프들의 역할이 크게 힘을 실었던 때문이다. 그들은 드래곤나이트의 천적이라고 할 수 있는 마법사들을 효과적으로 견제하고 제거했다.
또 엘프들의 정령술은 적진의 함정을 파악하는 데 주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정령들의 첩보로 인해 병규는 안전한 곳에서도 적진의 상황을 눈으로 보는 것처럼 파악할 수 있었다.
이처럼 와이번과 엘프들의 시너지 효과는 애초의 예상을 훨씬 뛰어넘는 결과를 불러왓다.
이 생소한 조합의 위력 앞에 반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병규도 그동안 놀고 있지만은 않았다.
사실 블랙나이트가 놀라운 실적을 이뤄내는 데 가장 큰 역할을 담당한 것이 그였다.
블랙나이트가 이렇게 무모한 작전을 오래도록 진행하면서도 별다른 피해가 없었던 것은 간간이 날아오는 소드마스터들의 공격을 병규가 효과적으로 제거했기 때문이다.
만약 병규가 없었다면, 필립 공작과 살렘 후작의 오러블레이드에 블랙나이트 중 적어도 반수 이상이 희생되었을 것이다.
‘다행이군.’
병규는 작전이 성공한 것보다도 블랙나이트에서 단 한 명의 사망자도 나오지 않았다는 것을 더 뿌듯하게 생각했다.
두 명의 기사와 엘프 하나가 다치긴 했지만, 그다지 깊은 상처가 아니라 카즈엘의 마법으로 간단히 치료될 수 있었다.
"이곳에서 트라우마까지 얼마나 걸리는가?"
병규가 묻자 부관인 시즌이 공손하게 대답했다. 10여 일간의 작전이 끝난 후로 드래곤나이트들은 병규를 더욱 극진하게 대했다.
전장에서의 병규는 그야말로 전투의 화신이자 자애의 신이었다.
와이번들을 수족같이 부리며 적진을 걸레 조각처럼 유린하면서도, 귀신 같은 전략으로 적의 맥을 끊고 전혀 생각지도 못한 허점을 짚어 정확하게 찔러 들어갔다.
또한 두 명의 소드마스터를 상대로 믿기지 않은 활약을 펼쳤다.
특히나 자국의 국민도 아닌데 수하 하나하나의 목숨을 필사적으로 챙기는 모습에서 기사들마저 감동했다. 출신이 다르다는 생각을 버린 지는 이미 오래, 이제는 충심으로 그를 따랐다.
"전력으로 말을 달린다면 트라우마까지 이틀 정도 걸릴 것입니다."
시즌의 대답에 병규는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보니 꽤 많은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너무 정신없이 날아다니느라 시간이 얼마나 지났는지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이제는 그만 돌아가야 할 때다.
반란군에게 막대한 피해를 입혔지만, 그만큼 드래곤나이트들의 피로도 극심해지고 있었다.
작은 실수로도 목숨이 오가는 곳이 전장이다.
특히나 와이번들의 과격한 움직임을 정묘한 조종능력으로 컨트롤 해야 하는 드래곤나이트들에게 피로는 죽음과 직결되는 것이기도 했다.
반란군의 지친 행군을 내려다보던 병규가 수하들을 돌아보았다.
와이번에 올라탄 드래곤나이트들과 엘프들이 진지한 눈빛으로 그의 명을 기다리고 있었다.
병규는 씩 하고 짙은 웃음을 보였다.
"모두들 고생했다. 이제 집으로 귀환한다."
"우와!"
"그 말을 얼마나 기다렸는지 모릅니다. 단장님."
모두들 두 손을 높이 치켜올리며 환호성을 질렀다. 그동안 말은 안 했지만 다들 돌아가고 싶었던 것이다. 하긴 10일간 제대로 씻지도 먹지도 못하고 적진을 휘젓고 다녔으니 힘들만도 했다.
임무를 성공적으로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검은 파도처럼 하늘을 가르며 날아간 드래곤나이트들은 몇 시간 만에 트라우마에 도착할 수 있었다.
와이번들이 우렁찬 기성을 토하며 후작의 저택후원에 착륙하자 숨을 헐떡이며 달려나온 글로리 후작과 레종 공주가 그들을 반갑게 맞았다.
"임무 마치고 전원 무사히 복귀했습니다."
"훌륭하네. 최고야."
글로리 후작은 병규를 향해 대뜸 엄지손가락을 추켜세웠다. 단순히 말뿐만이 아니다.
그는 정말로 블랙나이트의 활약에 놀라움을 넘어 경악했다.
설마 2만의 대군을 상대로 이렇게 놀라운 활약을 할 줄이야.
솔직히 블랙나이트들의 출동을 명한 글로리 후작도 그들이 이 정도까지 해낼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 사실이다.
"하하. 행운의 신이란 참으로 불공평하군. 어느 한 사람만 편애하는 것 같으니 말이야."
지금은 드래곤나이트가 된 미네르바 기사단의 단장에서 새로 트로웰 기사단의 기사단장이 된 루멘 백작은 병규를 보며 고개를 휙휙 저었다.
이드라센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짧은 기간 동안 저렇게 혁혁한 공을 세우고, 더불어 국민들의 관심과 사랑을 받은 사람은 없다.
굳이 비교하자면 아이린 왕국의 초대 국왕 정도가 그와 비견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고 보니 아이린 국왕도 하이엘프가 도와주었지."
아이린 국와에게 애절한 사랑의 하이엘프가 있었다면 병규에겐 카즈엘이라는 청초한 하이엘프가 있었다.
루멘은 새삼스러운 눈으로 병규를 보았다. 처음 대면했을 때의 촌스럽던 모습은 어디 가고, 이제는 영웅의 풍토가 물씬 풍기고 있었다.
"돌아왔군요."
레종 공주는 맑은 미소를 머금은 채 병규에게 말을 건넸다.
"네."
병규는 짧게 대답했다. 레종 공주는 그윽한 시선으로 병규를 바라보았다.
피곤 때문인지 얼굴이 까칠했다. 하지만 공주에겐 푸석푸석한 그 얼굴이 더 없이 믿음직스럽게만 보였다.
"이번엔 꼭 어떤 일이 있었는지 이야기해 줘요."
"물론입니다. 공주님."
병규는 팔을 허리에 두르며 과장되게 인사했다. 레종 공주는 호호 웃으며 두 손으로 치맛자락을 잡으며 역시 궁중의 예법으로 답례를 했다.
마주보는 둘의 분위기는 따사로운 햇살만큼이나 좋았다.
병규는 자신을 보며 눈을 반짝이는 레종을 보며 일생 느껴보지 못한 종류의 독특한 행복을 느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이라는 이름의 행복이었다.
그런데 바로 그때······, 으스스한 목소리가 그를 불렀다.
"변.기.니.임!"
몸이 부르르 떨릴 정도로 차가운 목소리였다.
‘어라? 그녀의 목소리가 왜 저렇게 싸늘하지?"
목소리의 주인이 카즈엘임을 눈치 챈 병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카즈엘의 음성은 언제나 따뜻한 봄바람처럼 부드럽고, 낙엽에 맺힌 아침이슬처럼 싱그러웠다. 하지만 지금 들리는 그녀의 음성엔 날카로운 가시가 돋아 있었다.
고개를 돌려보자 카즈엘이 얼굴에 한 겹 얼음을 두른 표정으로 그와 레종 공주를 번갈아 보고 있었다. 병규는 그녀의 서슬 퍼런 눈빛에 반사적으로 고개를 움츠렸다.
머리보다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하하. 왜, 왜그러니?"
병규는 카즈엘이 갑자기 이러는 이유를 몰라 식은땀을 흘리며 당황했다.
항상 자애로운 웃음을 머금고 있던 그녀가 돌연 차가운 얼음공주로 변해버렸으니, 그가 당황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반면 레종 공주는 직감으로 카즈엘의 마음을 읽어냈다.
‘이제 보니 이 하이엘프 아가씨가 변기 님에게 흑심을 품고 있었구나.’
안 그래도 엘프들의 갑작스런 협조를 수상하게 생각하던 그녀였다. 카즈엘의 눈빛을 보니 비로소 그간의 미심쩍었던 사태가 명확해지는 것이다.
순간 따뜻하던 그녀의 두 눈이 매섭게 여며졌다.
파파팍!
두 여자 사이에서 불꽃이 튀었다.
놀란 병규는 엄마야 하며 뒤로 펄쩍 뛰었다.
‘대체 이 여자들이 왜 이러는 거야?’
정말이지 그는 무던히도 눈치가 없었다.
아니 설마 엘프인 카즈엘이 자신에게 마음이 있을 줄은 전혀 예상도 못했다는 것이 맞는 말일 것이다.
엘프와 인간은 유사종족이라 결혼도 할 수 있고, 아이도 낳을 수 있다. 하지만 병규는 그런 것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그는 엘프와 인간은 종족이 다르니 사랑할 수 없다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눈이 부신 미모의 카즈엘과 10여 일을 꼭 붙어 다니고도 아무렇지도 않았던 것에는 이런 이유가 숨어 있었던 것이다.
이드라센 대륙에서 유일하게 유사종족과 교류를 갖고 있는 국가가 바로 아이린 왕국이다.
초대 국왕과 하이엘프의 사랑이 인연이 되어 그 관계가 지금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그런 아이린 왕국에서조차 엘프와 인간의 결합은 매우 드문 일이었으니, 병규가 그런 오해를 하는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그렇게 병규가 두 여자 사이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을 때, 멀리 후작의 자택 2층 창가에서 그를 바라보고 있던 백발의 청년은 혀를 쯧쯧 차고 있었다.
"나중에 퀴니까지 가세하면 정말 볼 만하겠군."
병규는 퀴니가 샤바를 좋아하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지만, 사실 그녀가 진정으로 좋아하는 것은 병규였다. 오히려 샤바는 아끼는 수집품 정도로 생각하고 있었다.
"퀴니가 돌아오면 한 바탕 피바람이 불겠구나."
둘만으로도 저렇게 혼란스러워하는 녀석이, 퀴니까지 뛰어들어 삼파전의 양상이 되면 어떻게 될까?
어떻게 보면 복에 겨운 고민일지도 모르나, 우유부단한 병규는 오히려 머리를 쥐어뜯으며 고민할지 모른다.
"하여간 여자들의 마음은 알다가도 모르겠단 말이야. 저 얼빵한 녀석 어디가 그렇게 좋은 거지?"
오래도록 수행한 호랭이로서도 복잡한 구조의 여심만은 여전히 해석 불능이었다.
치지지지직!
꽤 시간이 흘렀음에도 레종과 카즈엘 사이의 불꽃튀는 눈싸움은 그칠 줄 몰랐다.
두 여자의 기세 싸움의 이유를 알지 못하고 당황하던 병규에게 글로리 후작이 호탕한 웃음과 함께 말을 걸었다.
"하하. 자네 복도 많은 남자구만."
"예?"
"흘흘. 그렇게 안 봤는데, 이제보니 꽤 능력이 있는 것 같아."
"그, 그런가요?"
병규는 후작이 말하는 능력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어색하게 웃기만 했다.
"참. 그나저나 그간 트라우마의 상황은 어떻게 되었는지 궁금하네요. 중립 귀족들의 합류 상황은 어떤가요?"
"대부분 성으로 합류했네. 아직 도착하지 못한 인원은 미미한 정도야. 그들에겐 따로 지시를 내려두었네."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트라우마 성내를 둘러보았다.
불과 며칠 사이 많은 변화가 있었다.
군데군데 성벽을 보강한 흔적이 보였고, 투석기 비슷한 물건도 여럿 보였다. 주민들의 건물도 공성무기에 버틸 수 있도록 보수가 한창이었다.
무엇보다 사람들의 눈빛이 달랐다.
긴장과 흥분으로 그들의 눈은 그 어느 때보다 날카로웠다.
"피곤하겠군. 가지."
글로리 후작이 앞서 걸었다. 병규가 그와 나란히 걸었다.
"흑기사님이다."
"변기 님."
후작의 저택으로 걸어가는 도중 그를 본 주민들이 선망의 눈빛을 던졋다.
"손이라도 흔들어 주지 그러나."
글로리 후작이 넌지시 말했다. 병규는 쑥스러운 얼굴로 손을 들어주었다.
와 하는 함성이 터졌다. 함성을 들은 시민들이 골목어귀에서 쏟아져 나오더니 어느새 그의 주위를 가득 메웠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흑기사를 연호했다.
"하하. 대단한 인기군."
글로리 후작이 병규의 어깨를 툭툭 치며 웃었다.
혜성과 같이 나타난 영웅.
어느새 병규는 명실상부한 아이린 왕국의 전설이 되어 있었다. 비단 그의 인기는 시민들에게만이 아니었다.
드래곤나이트 부대의 대장으로서 다시 한 번 기적을 일궈낸 사나이. 창공을 가르는 그의 용맹은 이미 트라우마뿐만이 아니라 인접한 모든 도시에까지 두루 퍼졌을 정도였다.
그 용맹무쌍한 모습은 모든 기사 지망생의 선망의 대상이 되기에 충분했다.
물론 이렇게까지 그에 대한 과장된 소문이 파다하게 퍼질 수 있었던 것은 디스의 공작 덕분이기도 했다.
와이번들의 우리에서 후작의 저택까지는 그리 멀지 않았다. 하지만 끊임없이 몰려드는 주민들 때문에 잠깐이면 도착할 거리를 한참이나 걸려서 간신히 당도했다.
인파에 휩쓸린 병규는 파김치가 되었다.
반란군을 상대로 전투를 벌이는 것보다 오히려 더 피곤한 것 같았다.
"일단 오늘은 푹 쉬게."
편안한 침대가 있는 방으로 그를 안내한 후작은 혼자 쉴 수 있도록 배려했다.
원래 임무를 마치고 온 장교는 우선 상급자에게 경과를 보고하고, 자세한 내용의 보고서를 작성해야 했다. 휴식은 나중의 일이다.
하지만 후작은 그런 절차를 과감히 무시했다. 그 나름대로 병규를 챙겨주고 있는 것이었다.
후작이 나가고, 방안에 홀로 남게 된 병규는 쓰러지듯 침상에 누웠다.
"이제 진짜 전쟁이 시작되는구나."
많은 사람이 죽을 것이다.
병규는 눈을 감은 채 잠시 생각했다.
전쟁이 발발하면 그가 할 일은 하나뿐이다.
온갖 수단을 강구하여 최대한 빨리 적의 지휘부를 무너트린다.
그래야 전쟁도 빨리 끝나고 희생자도 줄일 수 있다.
하지만 이상하게 흥분된다.
두쿵 두쿵.
두근거리는 심장소리가 천둥처럼 고막을 자극했다.
그것은 그의 마음과는 전혀 상반된 본능의 애타는 갈망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