퀴니의 선물
“우리...... 세계에서, 지구에서 넘어온 자란 말입니까?”
한동안 멍하게 서 있던 병규가 호랭이에게 물었다.
“이미 필라이트와 확인한 내용이다. 이드라센에 고독이 없는 것은 확실하다. 게다가......”
호랭이는 고독이 든 플라스크를 흔들어 보였다.
“이 고독에 쓰인 주술은 확실히 고대 중국에서 사용된 방법이야. 현대엔 고독술이 거의 남아 있지 않구나. 문헌으로 전해져 내려오는 것이 고작이지. 그런 점을 고려해 볼 때, 이 주술을 건 것은 고독술이 횡행하던 고대 중국 그 시기의 인물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겠지.”
“그게 가능한가요? 고대 중국이라면 적어도 몇천 년 전 사람이라는 말이 되는데. 사람이 그렇게 오래 살 수는 없잖아요.”
“상식적으로야 불가능하지. 하지만 퀴니의 경우를 봐서 알 수 있듯이 지구와 이드라센 사이의 통로는 시공이 뒤틀려 있다. 시간과 공간이 비틀려 있으니 과거의 사람이 나타났다고 해도 전혀 이상한 게 없을 게야.”
“...... 결국 아이린 왕국은 까마득한 과거에서 온 중국인의 모략에 놀아나고 있는 거군요.”
“그렇다고 볼 수 있지. 그 자의 정체가 뭐 건 간에 좋지 않은 의도를 가지고 있는 건 거의 확실하구나. 이 고독이라는 주술은 까마득한 과거에 이미 그 치명적인 해악이 알려져 봉인된 사술이다. 그런 사술을 사용한다는 것만 봐도 그자의 심성이 얼마나 악독한지 능히 짐작할 수 있구나.”
“고대 중국의 주술사라니. 힘든 상대가 되겠군요.”
“그렇지. 고독을 이 정도까지 부릴 수 있는 자라면 필시 주술에 능할 것이다. 고대의 주술 중에는 상상을 뛰어넘는 악독하고 위험한 것들이 많았다. 만약 그 자가 그런 주술을 무분별하게 사용하기라도 한다면 그 결과는 불을 보듯 뻔하겠지.”
호랭이의 말에 문득 병규는 토벌군의 진영에서 만났던 말보로 형제를 떠올렸다.
소드마스터 급의 기운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무언가 불안정해 보이던 그들의 검술. 넘쳐나는 힘을 주체하지 못하고 있는 게 분명하게 느껴졌었다.
만약 호랭이의 말처럼 주술사가 각종 주술에 능하다면, 무공에 소질이 있는 자들의 기운을 단숨에 팽창시키는 사술을 부릴 수도 있을 것이다.
말보로 형제들의 불안정해 모이던 모습도 그런 주술을 부려 가능했다면 설명이 가능해진다. 병규는 호랭이에게 말보로 형제들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놓으며 의견을 물었다.
“충분히 가능하다.”
호랭이는 심각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내가 읽은 문헌 중에 그런 것을 가능케 하는 단약에 대해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다만 그러한 단약으로 얻어진 능력은 심각한 부작용이 있지.”
“그게 뭐죠?”
“몸을 망친다는 것이지. 과거에 흔하게 쓰이던 촉발단이라는 약은 일시적으로 내공을 증진시키기도 하지만, 대신 단전에 무리를 일으키고 근골을 손상시킨다. 심하면 폐인이 되거나 목숨을 잃은 경우도 다반사지.”
“힘을 얻는 대신 목숨을 담보로 내놓아야 한다는 말이군요.”
“자연스럽지 못한 것은 그만한 대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진중한 얼굴로 말을 잇던 호랭이가 눈을 지그시 감았다 다시 떴다. 말보로 형제가 사용했다는 약물보다 정작 호랭이의 신경을 자극하는 것은 따로 있었던 것이다.
“그런데...... 네가 인간의 능력을 얻었다는 것이 사실이냐?”
“사실이에요.”
병규는 손을 내밀어 가볍게 휘둘렀다.
두두둥!
묵직한 진동이 별을 두드리자 지진이라도 난 듯 지하실 전체가 흔들렸다.
“흐음.”
호랭이의 표정이이 한층 심각해졌다.
“화염과 중압이라. 범상한 재주는 아니군. 과연 그들이 처음부터 그런 능력을 가지고 있었던 것일까?”
호랭이는 귀밑머리를 쓰다듬으며 한참을 골똘히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병규 본인은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오히려 기대하지 않았던 신기한 능력이 늘어 기분이 좋았다.
“그런데 엘프들은 어쩌죠? 아이린 왕국의 내전이 마계와 관련이 없다는 걸 알면 떠난다고 할 텐데.”
“숨긴다고 해결된 물제가 아니다. 차라리 떳떳하게 밝히고 의견을 구하는 게 어떻겠느냐?”
계략에 능한 귀족들이라면 분명 엘프들에게 이 사실을 숨길 것이다. 전쟁이 끝날 때까지 엘프들을 이용해 먹다가 그 후에 갖가지 감언이설로 핑계를 댈 것이다.
하지만 병규와 호랭이는 권모에 능한 귀족들과는 달랐다. 순수한 숲의 종족을 속이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하죠. 귀족들은 소집해서 사실을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병규는 필라이트에게 긴급희의를 열게 해 달라는 부탁을 넣었다. 더불어 희의 진행을 필라이트가 맡아 줄 것까지 청했다.
그가 굳이 필라이트를 내세운 것은 이계인에 대한 발언이 그만큼 중요하면서도 민감한 사항이기 때문이다.
다른 차원의 존재가 시공을 넘어와 왕국을 어지럽히고 있다.
소설 속에서나 등장할 것 같은 이야기다. 아마 병규나 호랭이가 이런 소리를 한다면 대다수의 귀족들은 코웃음을 칠 것이다.
아무리 최근 들어 병규의 입지가 높아졌다 하더라도 아직 귀족들 중엔 그를 불신임하는 자가 다수 남아 있었다.
하지만 같은 말이라도 필라이트가 언급하면 전혀 다르게 반응할 것이다.
필라이트는 아이린 왕국의 공작이면서, 무려 7서클의 대마법사이기도 하다.
그런 그가 이계인에 대한 발언을 할 때는 적잖이 놀라기야 할 테지만, 그래도 병규가 언급하는 것보다는 신빙성이 있는 말이라고 생각하고 믿어 줄 것이다.
게다가 필라이트가 회의를 진행하면, 구태여 병규와 호랭이의 정체를 밝히지 않아도 되는 것이다.
곧 대마법사의 호출을 받은 엘프들과 귀족들이 회의장으로 속속 모여들었다.
“지금부터 이번 반란에 관한 중요한 발표가 있겠소. 그 전에 다들 이것에 주목하기 바라오.”
필라이트가 사람들 앞에 꺼내 보인 것은 고독이 들어 있는 플라스크였다.
다들 투명한 유리병 속에서 꾸물거리는 징그러운 벌레의 움직임에 오만 인상을 찌푸렸다.
“끔찍하군요.”
“괴상하게 생겼군.”
“이런 녀석을 어디서 구해오신 거죠?”
“부정한...... 생물이다.”
사람들은 사람들대로, 엘프들은 엘프들대로 고독을 보며 심란한 반응을 보였다.
“이 징그러운 벌레는 고독이라고 하는 생물이오. 다들 이것을 처음 보았을 줄 아오.”
필라이트의 물음에 모두의 고개가 동시에 끄덕여졌다.
“놀라지들 마시오. 이 고독은 이드라센의 생물이 아니오.”
“그, 그런......”
“서, 설마 마계?!”
귀족들과 사람들의 입에서 거의 동시에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중간계인 이드라센 대륙의 생물이 아니라는 말에 곧바로 마계를 떠올린 것이다. 고독의 추악한 생김새는 충분히 그런 오해를 살 만큼 흉측했다.
“아니오.”
단호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어 보인 필라이트는 고독이 주술이라 불리는 이색적인 마법으로 만들어진 마법생물이라는 설명을 덧붙였다.
그리고 반란군의 배후에 이러한 고독을 만들어낸 이계인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충격적인 발언까지 했다.
이 과정에서 필라이트는 교묘하게 병규와 호랭이 역시 이계인이라는 설명은 생략했다. 만약 이들이 병규와 호랭이가 이계에서 온 존재들이라는 것을 안다면 일이 복잡해질 가능성이 컸다. 엘프들은 몰라도 귀족들은 확실히 태도가 틀려진 것이다.
“맙소사.”
“이계인이라니.”
“그런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계인이 반란군의 배후에 있다는 설명에 다들 크게 놀라는 눈빛이었다. 그들에게 있어 이계인이란 머나먼 별나라에서 온 외계인과도 같은 존재일 수밖에 없었다.
반란의 배후가 이계인이라는 필라이트의 발언에 대한 반응은 두가지로 극명하게 나뉘었다.
귀족들은 경악하면서도 한편으론 대대적인 귀족들의 반란에 그러한 이유가 있었음을 알게 되어 그나마 품었던 의문이 다소 풀린다는 표정이다.
반면 엘프들은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린 채 각자의 생각에 빠져들었다.
회의실 옆 방에서 회의 진행 상황을 엿듣고 있던 병규는 엘프들의 반응에 주목했다.
엘프들은 반란군이 마계와 관련이 있을 것이란 추론 때문에 트라우마에 합류한 것이다. 과연 진실이 밝혀진 지금, 이들은 어떤 경정을 내릴 것이며 또 행동해 옮길 것인가.
뒤늦게 이런 미묘한 상황을 눈치 챈 레종 공주와 글로리 후작도 엘프들의 반응에 촉각을 곤두세웠다.
마침내 엘프들을 대표해 하이엘프인 카즈엘이 자리에서 일어나며 필라이트를 향해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였다.
“먼저 솔직하게 알려주신 대마법사님께 감사의 말을 드립니다.”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이오.”
필라이트는 겸연쩍은 표정으로 인사를 받았다.
‘대마법사님. 당연한 일이 아닙니다. 어찌하여 이렇게 큰 사안을 미리 제게 알려주시지 않은 겁니까.’
둘 사이의 대화를 듣고 있는 디스는 속이 까맣게 탈 지경이었다. 가뜩이나 반란군에 비해 전력이 달리는 상황에서 막강한 전력인 엘프들을 내치게 될 수도 있는 발언을 하고 당연한 일이었다고 대답하는 필라이트의 태도가 한없이 답답하게만 느껴졌다.
카즈엘의 말이 이어졌다.
“분명 대마법사님의 호의는 감사하게 생각합니다. 하지만 한 가지 분명하게 짚고 넘어가야 할 일이 있습니다. 저희 숲의 종족이 이곳에 합류하게 된 것은 마계의 개입이 있을 것이라는 전제가 있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오늘 대마법사님의 진솔한 내용으로 인해 전제되었던 문제가 사라졌다고 할 수 있겠군요. 아이린 왕국의 내전이 마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는 이상 우리 엘프들은 인간들의 전쟁에 함부로 참견할 수 없는 것이 기본입장입니다.“
카즈엘의 단도직입적인 말에 회의장은 숨소리 하나 흘러나오지 않는 긴장으로 가득 찼다. 만약 엘프들이 떠난다면 전쟁의 향방은 반란군 쪽으로 잔뜩 기울게 될 것이다. 레종 공주를 포함한 귀족들은 마른침을 삼키며 간절한 표정으로 카즈엘의 붉은 입술을 주시했다.
그녀의 아름다운 입술에서 쏟아질 선언에 트라우마의 장래가 달려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더러는 벌써부터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의자에 축 늘어져 버린 귀족도 있었다.
그때였다. 카즈엘의 고운 입술이 열리며 지금까지와는 전혀 상반된 말을 쏟아냈다.
“분명 엘프들은 인간의 전쟁에 참가하고 싶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계인이 감히 이 성스러운 땅을 혼란케 하는 것 또한 절대로 죄시할 수 없는 것이 엘프들의 입장입니다. 이계인의 행동은 마계의 추악한 본성과 다를 바 없으니까요.”
“휴우.”
“카즈엘 님.”
글로리 후작과 디스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오고, 레종 공주는 감격의 눈물을 흘리며 카즈엘의 두 손을 정신없이 흔들었다.
“고마워요. 정말 너무 고마워요.”
“아닙니다. 빛의 신 아트란 님의 뜻을 따른 것일 뿐입니다.”
“허허허. 나도 고맙다는 말을 하고 싶군. 이 늙은이는 엘프들이 떠나면 어쩔까 많이 고심했다오.”
“솔직하게 말씀해 주신 필라이트 님 덕분입니다. 덕분에 인간에 대한 실망감을 많이 상쇄할 수 있었습니다.” “허허. 나 역시 마찬가지일세. 그간 엘프들은 도도한 성격의 종족이라 생각했는데, 자넨 예외인 것 같군. 그런데 정말 괜찮은가? 아무리 이계인이 배후에 있다고 해도 인간의 전쟁에 참견하게 되는 것인데.”
필라이트의 걱정에 카즈엘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저는 제게 내려진 정령왕의 경고를 잊지 않고 있습니다. 어둠의 정체가 무엇이건, 신의 영광을 더럽히려는 의도가 있는 한, 숲의 종족은 목숨을 걸고 싸울 것입니다.”
“다행이네요.”
병규는 한숨과 함께 가슴을 쓸어 내렸다. 카즈엘의 한 마디 한 마디에 심장이 철렁거렸다.
엘프들을 이곳으로 데려온 사람이 바로 그다. 당연히 엘프들의 행보에 신경이 쓰일 수밖에 없었다. 만약 엘프들이 떠나 버렸다면 그는 레종 공주에게 죄책감이 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엘프들은 끝내 등을 돌리지 않았다. 그런 사실이 그를 뿌듯하게 만들었다.
“결론이 좋게 내려졌구나.”
호랭이도 흐뭇하게 웃었다.
“그래요. 반목하던 두 종족이 이계의 존재에 대항해 힘을 합치기로 했어요. 우리도 결코 빠질 수 없겠죠?”
“물론이지. 우리 세계에서 넘어언 골칫덩이니, 당연히 우리 손으로 처리를 해야겠지. 감히 타계의 균형을 어지럽히려 하다니.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악행이다.”
호랭이는 주술사가 벌인 만행에 책임감을 느꼈다.
“한 가지 물어볼 것이 있어요.”
“뭐냐?”
“그 고독이라는 거 말이에요. 사람의 뇌 속으로 파고들어 그 사람의 인성을 지배한다고 했잖아요? 그 고독을 제거할 방법이 있긴 한 건가요?”
고독을 제거하는 문제는 엘프 문제에 비견될 정도로 중요한 논점이다. 물론 고독만 안전하게 제거하고 사람은 무사해야 한다. 그렇게 되어야만 기울어진 전황을 바로잡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가능할 것 같구나. 하지만 시간이 많이 필요해.”
“치료할 수 있다니 다행이군요.”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방법이 있다니 다행이다.
문제는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 언제 토벌군이 트라우마로 쳐들어올지 모르는 상황인지라 더더욱 긴장이 될 수밖에 없었다.
‘요는 시간 싸움이라는 것이군.’
교독의 치료제가 완성될 때까지 트라우마와 공주를 사수해 낸다면 승리, 치료제가 개발될 때까지 중의 하나라도 잃으면 실패라는 소리다.
‘가만 생각해보니 항상 난 지키는 역할이군.’
병규는 속으로 쿡쿡 웃음을 터트렸다. 이놈의 인생은 어떻게 된 것이 만날 애 돌보는 일 아니면 집 지키기다.
“그런데 퀴니가 안 보이네요?”
문득 생각난 듯이 병규가 물었다. 그가 떠날 때 그렇게 애절하게 굴던 퀴니가 막상 돌아와 보니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었다.
“그 녀석 신성제국에 갔다.”
“에에?”
병규의 두 눈이 화등잔만하게 커졌다.
“퀴니가 신성제국에 갔다고요?”
“그래, 왜냐고 물으니 샤바가 불러서라고 대답하더구나. 한 달 후에나 올 거라는데, 휴우. 이제 겨우 아장아장 걸어 다니는 어린애가 참 부산스럽기도 하구나.”
퀴니가 걱정되는지 호랭이는 나직하게 한숨을 쉬었지만, 사실 키니는 그렇게 어리지 않았다. 16살. 정상적이라면 중학교 3학년에 다닐 나이다.
하지만 호랭이는 아직 그녀를 13살 철없는 소녀로만 생각하고 있었다.
“샤바가 불렀다면, 샤바도 신성제국에 있다는 말이 되네요. 그런데 걔네들 신성제국에 뭐 하러 간 거죠?”
“내가 어떻게 알겠냐? 물어도 비밀이라며 고개만 절레절레 흔드는데.”
“후후. 호랭이도 퀴니는 마음대로 못하네요.”
“녀석의 똥고집이 어디 보통고집이야?”
“하하하. 퀴니가 고집이 좀 세긴 하죠.”
퀴니와 샤바가 신성제국으로 갔다는 소리를 들었지만 병규는 그닥 걱정이 되지 않았다.
수많은 오크들이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 바로 퀴니다. 웬만한 군대는 명함도 못 내밀 것이다. 마일드의 일곱 사신과 드래곤이 졸졸 따라다니는 샤바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걸어 다니는 핵병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참. 잊을 뻔했군. 뮈니가 널 위해서 설물을 남겨뒀다고 했단다.”
“선물요?”
호랭이는 병규를 저택의 후원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와이번들의 우리가 있었는데, 병규가 나타나자 환영한다는 듯이 와이번들이 일제히 하늘을 보고 울었다.
“너 혹시 나 몰래 퀴니의 목이라도 문 거냐?”
호랭이가 의심스런 눈으로 물었다. 갑자기 몬스터들을 자유롭게 다루는 그의 능력이 의심스러웠던 것이다. 전에는 없던 능력이니 충분히 그런 오해가 생길 만했다.
“제가 뱀파이어라도 되나요? 목을 물게.”
“말이 그렇다는 소리다. 몬스터들이 왜 널 저렇게 따르는 거야?”
“글쎄요. 아마도 사람들이 못 알아보는 매력을 녀석들은 볼 수 있는 모양이죠.”
그때, 쿵쿵 지축이 울리더니 거대한 트윈헤드 오우거가 쓰윽 모습을 드러냈다.
쿠워어어.
“오. 곰팅이. 잘 있었냐?”
병규는 그릉그릉 거친 숨을 내귀는 괴물의 몸을 토닥였다. 워낙에 곰팅이의 덩치가 거대하여 손을 높데 올렸는데도 고작 무릎 아래에 닿았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가 괴이하게 웃었다.
“파하하. 과연 못갱긴 녀석들만 알아보는 매력이 있는 모양이구나.”
“윽.”
호랭이의 놀림에 병규의 얼굴이 단숨에 일그러졌다.
“그런데 퀴니가 남긴 선물이라는 게 뭐예요?”
“글세.”
“호랭이도 몰라요?”
“나도 뭔지 몰라. 퀴니가 널 이곳에 데려오기만 하면 알게 될 거라고 했다.”
“그래요?”
병규는 곰팅이의 어깨 위로 뛰어 올라갔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퀴니가 남긴 선물이 뭘까 찾았다. 하지만 별 다른 것은 보이지 않았다.
“장난이라도 친 건가?”
병규가 뒷머리를 긁적일 때였다.
예민한 그의 귀에 작은 소음이 잡혔다.
드드드드드드.
귀를 팔락이며 소음에 집중하던 병규는 땅으로 시선응 옮겼다.
소음은 땅속에서 들려오는 것이었다.
“응? 이게 뭔 소리냐?”
뒤늦게 소음을 눈치챈 호랑이가 곰팅이의 어깨 위로 뛰어오르며 물었다.
“뭔가가 이쪽으로 오고 있는 것 같아요. 소리로 보면 굉장히...... 굉장히 큰놈 같아요.”
대답하는 병규의 표정이 바싹 굳어 있었다.
두리 대화하는 사이, 땅속에서 들려오는 소음은 더더욱 가까워졌다. 마침내 땅이 들썩이더니 꿈에 볼까 두려운 존재가 고개를 치켜 들었다.
끄그그그그그.
“으헉.”
우는 소리가 마치 천둥이 치는 것처럼 하늘이 찌렁찌렁 울릴 지경이다.
“이, 이게 뭐예요?”
병규는 기겁을 하며 소리쳤다. 집채만한 거대한 놈이 땅속을 헤치며 불쑥 나타났으니 놀랄 만도 했다.
“웜인 것 같구나.”
“웜요?”
“한 마디로 거대한 지렁이다.”
“지렁이치고는 지나치게 크네요.”
얼마나 큰지 덩치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곰팅이가 초라해 보일 지경이었다.
웜에는 몇 가지 종류가 있다.
고작 십 센티 정도밖에 되지 않는 블러드 웜에서 사막에 사는 샌드 웜, 수십 미터에까지 이르는 자이언트 웜까지.
그런데 지금 눈앞에 나타난 몬스터는 샌드 웜의 일종이었다. 하지만 그 크기는 일반적인 자이언트 웜을 가볍게 뛰어넘었다.
지표면으로 드러난 길이만도 10미터다. 땅속에서 드러나지 않은 길이는 그보다 더 길어 30미터 정도나 되었다. 총 길이 40미터.
동체는 또 얼마나 굵은지 오우거 사상 최대의 덩치를 자랑하는 곰팅이를 이쑤시개로 써도 될 지경이었다.
“서, 설마 이게 선물?”
“아하하하. 새, 색이 까만 걸 보니 그런 것 같구나.”
병규와 호랭이는 살짝 맛이 간 표정으로 어색하게 웃었다. 설마 이런 엄청난 녀석을 남기고 갈 줄이야.
“고맙다고 해야 할지, 너무했다고 해야할지.”
“지나치게 퀴니답구나.”
“하하하.그, 그러네요.”
둘은 거대한 몸을 비비적거리며 애고(?)를 떨 고 있는 자이언트 웜을 보며 어색하게 웃어야만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