적진에 홀로 뛰어 들다.
다음 날, 하늘은 우중충한 빛깔로 낮게 가라앉았다.
“날씨 한 번 징하게 칙칙하네,”
회색빛 구름을 응시하던 병규는 자신이 탈 와이번에게고 가까이 다가갔다.
불가능에 가까운 임무에 나선 그였지만, 정작 배웅 나온 사람은 퀴니와 호랭이, 하이엘프인 카즈엘과 대마법사인 필라이트가 전부였다.
보안을 위해서였다.
혹시나 필립 공작의 첩자가 병규의 잠입을 눈치 챈다면, 시작도 하기 전에 모든 일이수포로 돌아갈 위험이 있었다. 그래서 공주 일파의 주요 인물들은 병규의 출동을 알면서도 모르는 척 각자의 작업에 몰두했다. 덕분에 병규를 배웅 나온 사람은 고작 넷에 불과했던 것이다.
‘공주라도 볼 수 있었으면 좋았을 텐데.’
못 나온 이유를 있으면서도 병규는 못내 아쉬움을 느꼈다.
“믿겠다.”
호랭이가 와이번의목을 쓰다듬고 있던 병규의 어깨를 두드렸다.
단순히 그 만뿐이었다. 하지만 그것으로 족했다.
진하게 우러나는 호랭이의 진심을 병규는 충분히 느낄 수 있었다.
오히려 말이 많은 것은 필라이트였다. 그는 신선같이 생긴 외모에도 불구하고, 온갖 욕을 다 해대며 무능한 귀족들에 관한 험담을 늘어 놓았다.
“이 멍청한 녀석아. 뭘 얻을 게 있다고 이렇게 위험한 일에 끼어 드는 게냐.”
필라이트는 눈가에 잔잔한 주름을 지으며 고래고래 고함을 질렀다.
“걱정마세요.” 병규는 그저 웃어 주었다.
“괘씸한 녀석. 웃기는 잘도 웃는구나.”
“하하.”
필라이트의 말에 대소를 터트리는데, 누군가 그의 소매를 툭툭 잡아당겼다.
퀴니가 큰 눈동자를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금방 올거지? 또 혼자 어딜 가면 안 돼.”
그녀는 병규가 반드시 돌아온다고 확신했다. 다만 걱정되는 것은 또 어딘가로 사라진는 것은 아닐까 하는 것이다. 그래서 어제 그의 다리에 매달리며 함께 가겠다고 졸라댔다.
하지만 안 될말이다.
아무리 마법에 능한 그녀지만 아직 성인도 된지 못한 그녀를 전장 한복판으로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그녀는 괜찮다고 말했지만, 병규는 허락할 수 없었다.
결국 퀴니는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눈으로 병규를 배웅하는 처지가 되어야만 했다.
“아직도 걱정 돼?”
병규는 빙그레 웃으며 그녀와 시선을 맞췄다. 이젠 꽤 키가 커서 조금 허리를 굽히니 그녀의 금빛 눈동자를 볼 수 있었다. 소녀의 반짝이는 눈망울레 불안이 서려있었다.
“걱정 마. 내가 돌아올 곳은 바로 여기야. 가족이 있는 곳을 두고 내가 어딜 가겠니.”
병규의 말에 퀴니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배웅 나온 사람들과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병규는 곧장 대기하고 있는 와이번에 올랐다.
이 와이번은 처음 왕실에서 와이번들을 강탈할 때, 그와 필라이트가 탔었던 그 녀석이었다. 정이 들어서 기사들과 훈련을 할 때도 그는 유독 이녀석만 탔다.
“너도 고생이구나. 힘내자.” 까르릉.
목을 툭툭 치자 기분이 좋아진 듯, 와이번은 길게 목울대를 울렸다.
“가자.”
병규의 명령과 함께 와이번은 힘차게 날개를 펄럭였다.
그리고 순식간에 트라우마 상공으로 올랐다.
손을 흔드는 사람들이 저 아래 작게 보였다. 병규는 답례하듯, 빙빙 맴을 돌고는 곧장 하늘로 치솟았다.
잿빛 구름 사이로 떠오르자 잊었던 긴당간이 서서히 양어깨를 짓눌러 왔다.
“내 인생 최대의 미션이구나.”
두려움은 없었다.
오히려 잔잔한 흥분이 가슴 깊은 곳에서 끓어올랐다.
반나절쯤 날았다.
고란산맥의 줄기를 따라 날던 병규는 마침내 수도에서 출발한 토벌군을 발견할 수 있었다.
워낙에 병력의 규모가 큰 덕에 헤맬 필요도 없었다. 수도를 향해 직선으로 나아가는 방대한 규모로 쳐진 토벌군의 진지를 만나게 된 것이다.
“엄청난걸,”
야영지를 살펴본 병규는 휘파람을 휙 불었다.
2만이 넘은다는 말을 들었을 때엔 그저 좀 많은 정도가 아니었다. 야트막한 산 능성 하나가 토벌군의 병사들로 가득 차 있는 것이 아니가.
하지만 병규는 몰랐다.
기실 이곳에 주둔하고 있는 병사들은 토벌군의 선발대5천에 불과하다는 사실을. 병규는 쭉 늘어선 천막들만 보고서도 선발대의 병력 규모에 놀란 것이다. 5천의 병력을 보고도 놀랐으니 2만의 군세를 보았다면 너무 놀라 눈이 툭 튀어나왔을 것이다.
애초에 병규의 계획은 간단했다.
돌연 소란스럽게 난입하여 병사들을 혼란에 빠트리고, 그 틈에 적의 사령관을 사로잡는다은 단순한 계획이었다. 그의 가공할 스피드라면 한 번쯤 도박을 해 볼 만했다. 하지만 직접 상공에서 토벌군의 군세를 보게 되니 그런 생각이 싹 가셔 버렸다.
“날이 밝길 기다리는 게 나을 것 같군.”
병규는 와이번을 근처의 숲에서 착륙시켰다.
“조용히 있어야 한다.”
“사람이 있는 곳엔 가지 말고 이 근처에 있거라.”
병규의 말에 와이번은 고개를 끄덕이더니 저편의 수풀 근처로 날아갔다. 그곳에서 사냥을 하며 병규의 부름을 기다릴 것이다.
와이번을 물러나게 한 병규는 근방을 수색했다. 마침 토벌군의주둔지 근처에 하늘을 찌를 듯한 위세의 바위 언덕이 하나 있었다.
그는 바위 언덕 중턱에 조심스럽게 자리를 잡고,주둔지의 움직임을 관찰했다.
“훈련이 잘돼 있구나.”
한참을 면밀히 살펴본 토벌군은 그의 생각과는 달리 군율이 엄하고 움직임에 절도가 있었다.
내전 중에 흔히 볼 수 있는 약탈과 방화 같은 무질서한 모습은 일절 찾아볼 수 없었다.
‘과연 양대 제국을 끼고 있으면서도 천년 동안 버틸 수 있었던 것에는 나름대로 이유가 있었구나.’
아이린 왕국이 양어깨로 대제국을 끼고 있으면서도 천여 년간 버틸 수 있었던 것은 강력한 군사력과 국민들의 결집력 때문이었다.
그러한 면모가 내전 중인 지금에도 유감없이 그 진가를 발휘하고 있었다.
“정상적으론 도저히 파고들 틈이 없군.”
진지한 표정의 병사들이 번뜩이는 눈으로 보초를 서고, 마법사들이 만들어 놓은 트랩과 알람 마법이 주둔지 곳곳에 뿌려져 있다.
일반적인 방법으론 침입하기 불가능한 상황이다. 하지만 병규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토벌군의 진형은 어디까지나 이드라센 대륙의 일반적인 전술이다. 하지만 병규는 이곳 출신이 아니다. 물론 보통사람도 아니다. 그의 독특한 능력이 일반인의 상례를 크게 뛰어먼고 있었다.
소드마스터조차 인정할 수 밖에 없는 다채로운 능력이 그 특기였다.
“끔.”
병규는 편편한 바위 위에 드러누웠다.
건량을 씹으면 날이 어두워지기를 기다렸다.
“오늘 저녁은 유난히 어두울 것 같구나.”
검은 먹장구름이 하늘을 잔뜩 뒤덮고 있었다. 덕분에 대낮인 데도 사위가 어두침침했다.
이런 날씨가 밤까지 계속된다면 오늘 밤은 전에 없이 칠흑같이 어두울 것이다.
군대의 주둔지에 침투하려는 그에겐 더 없이 좋은 조건이었다.
잠시 잠이 들었던가 보다.
병규는 눈을 떴을 때는 이미 사위가 어두워져 있었다.
당장 적진에 쳐들어가야 하는 사람이 긴장을 하긴커녕 태연스럽게 잠은 자다니.
어쩌다 이렇게 굵은 신경을 소유하게 되었는지. 스스로의 변화에 병규는 씁쓸한 미소를 베어 물었다.
“달님도 잠이 드셨나 보구나.”
주위는 온통 칠흑같니 어두웠다. 달은 물론이고,별조차 보이지 않았다.
병규는 조심조심 몸을 낮추며 토벌군의 주둔지를 살폈다.
예상과 달리 군영은 그다지 어둡지 않았다.
기름과 송진을 태워 만든 횃불과 마법사들의 마법구가 둔영을 환하게 밝혀져 있었다.
하지만 역시 인공적인 빛이 주는 밝기는 자연적인 밝기와 달랐다. 드문드문 불꽃의 그림자가 만드는 음영이 불길한 장막처럼 곳곳에 드리워져 있었다.
병규에겐 차라리 완전한 어둠보다 지금이 나았다.
암흑은 인간의 눈을 멀게 하지만 대신 청력과 감각을 예민하게 반응하게 한다. 모두가 잠든 밤이면 평소 듣지 못했던 미세한 소음을 듣게 되는 것을 누구나 한 번쯤 경험했을 것이다. 그만큼 암흑은 인간의 감각을 한층 더 민감하게 만든다.
하지만 지금처럼 적당히 불이 밝혀져 있으면 오히려 긴장감이 풀어지게 된다. 눈이 보이는 만큼 감각은 둔해지고, 경계심 또한 급격하게 줄어든다.
그곳에 허점이 생긴다.
대충 상황을 파악한 병규는 우선 와이번을 불러들였다. 와이번은 그의 명령을 충실히 따랐다. 부르자 기다렸다는 듯이 날아왔다.
병규는 기쁜 듯이 가릉가릉 울부짖는 와이번의 목을 쓰다듬으며 작은 목소리로 무언가 명령을 내렸다.
와이번은 크악 소리를 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이제 가 볼까.”
자신의 명령에 따라 어두운 밤하늘로 육중한 몸을 날리는 와이번을 보며 병규는 살짝 미소를 지었다.
이제부터 시작이다. 느슨해졌던 긴장감이 서서히 밀려들기 시작했다.
병규는 조심스럽게 군영으로 접근했다.
어느 정도 군영에 접근한 그는 주머니에서 작은 종이를 꺼냈다.
호랭이가 준 부적이었다.
부적으로 눈을 가리자, 희미하게 보이지 않던 흔적들이 잡혔다.마법사들이 설치한 알람 마법과트랩들이었다.
“좋아.”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 작전에서 가장 큰 걸림돌은 바로 마법사들이었다. 보초의 눈을 피해 둔영으로 숨어든다고 해도,마법사들이 설치한 보이지 않은 트랩에 걸릴 가능성이 크다.
다행히 호랭이가 적절한 것을 주어서 쉽게 일을 처리할 수 있었다.
‘일단을 사령관의 천막이 어디 있는지 찾아야 해.’
이 곳에 숨어든 목적은 어디까지나 토벌군의 사령관 납치다. 쓸데 없는 충돌은 되도록 피해야 한다. 문제는 표적인 사령관이 과연 어디에 있는가 하는 것이다.
다행히 주둔지에 숨어들기 전 눈여겨보아 둔 천막이 하나 있었다.
여타의 천막들보다 열 배 이상 큰 대형 천막. 경계 또한 다른 천막에 비해 삼엄하기 그지없다.
병규는 때론 바람처럼 달리고, 때론 도둑고양이처럼 살금살금 걸으며 토벌군의 주둔지로 숨어들었다.
보초들의 경계는 꽤 삼엄했지만 그 누구도 병규의 존재를 눈치채지는 못했다.
순식간에 대형 천막까지 다가간 병규는 보초병들의 눈을 피해 천막 안의 동태를 살피기에 이르렀다.
천막 안에선 두 사람의 목소리가 새어 나오고 있었는대, 한 명은 약간 화가 난 듯 언성이 높았고, 다른 한 명은 술에 취한 듯했다.
이 대형 천막의 용도는 작전회의실이다.
원래 사령관의 숙소는 따로 있었다. 적의 예기치 않은 기습에 대비해 장교들도 일반 병사들과 똑같은 천막을 사용하도록 군율로 정해 놓은 상황이었다.
그럼에도 토벌군의 사령관인 자일 백작은 작전회의실을 떠나려 하지 않았다.
본래 토벌군의 사령관인 자일 백작은 자신감이 과한 사람이었다.
사령관씩이나 되는 자가 조심성 없게 선발데에 합류해 있다는 것부터가 그의 과한 자신감을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만약 그가 이렇듯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이 아니었다면 병규는 헛걸음을 했을지도 모를 일이다.
“사령관님. 밤이 깊었습니다. 그만 자리를 옮기시지요.”
부관인 버지니아 백작은 좀 전부터 사령관에게 군율을 들먹이며 자리를 옮기길 종용했다. 하지만 계속되는 부관의 요청에도 자일 백작은 고개만 흔들었다.
크고 넓은 작전회의실을 비워두고, 좁은 천막으로 옮기기 싫다는 것이 이유였다.
토벌군이 유리스를 떠나온 후로 사령관과 부사령관인 두 사람은 사사건건 부딪혔다.
파격적인 인사에 군법 따위는 아예 안중에도 없는 지휘관과 평생을 군에서 보낸 장교의 충돌은 애초부터 예견된 바였다.
“버지니아 백작님. 대체 뭐가 그렇게 두려우신겁니까.”
계속되는 부관의 청에 답답했던지 자일 백작이 물었다.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오. 다만 기왕이면 원칙에 따르자는 것이오. 작전회의실은 아무래도 적의 눈에 띄기 쉽.... .”
“허어. 원칙, 원칙.어찌 그리 고리타분하십니까.”
자일은 원칙을 따지는 버지니아의 태도가 불만이었다.
“공주파의 병력에 대해 이미 보고받지 않았습니까? 고작 2천입니다. 열 배나 되는 병력 차이입니다. 무엇이 두렵단 말입니까. 설사 야음을 틈타 공주파의 전 병력이 기습을 해 온다 해도 여기 주둔한 5천의 선발대만으로도 충분히 쟁압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적들의 수괴 중엔 소드마스터인 글로리 후작과 필라이트 대마법사가 있소.”
“그쪽에 그들이 있다면 이쪽엔 나와 당신이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또 필립 공작님이 보내준 말보로 백작가의 두 청년도 보통실력이아니라고 하더군요. 자자, 너무 팍팍하게 굴지 마시고, 버지나아 백작님도 한 잔 드시지요.”
“작전수행 중에는 술을 먹지 않습니다.”
계속되는 자일 백작의 청에도 버지니아 백작은 완고한 모습을 지켰다. 그는 천생 군인이다. 평생을 전장에서 보냈다.
그런 그에게 이 젊은 사령관을 스스로에 대한 절제력이 너무도 형편없었다. 그리고 자신감이 지나치다. 이런 방종은 항상 실수를 낳게 마련이다.
하지만 사령관의 고집을 꺽기엔 역부족이었다.
“끄응, 사령관님의 생각이 정히 그러시다면 굳이 저도 말리지는 않겠소.”
바람 소리가 휙 들릴 정도로 거칠게 뒤돌아선 버지니아 백작은 곧장 천막 밖으로 나갔다.
“흥. 소심한 늙은이 같으니.”
홀로 남은 자일 백작은 술잔을 입가에 가져가며 비웃음을 흘렸다. 그의 입장에서 보자면 버지니아 백작은 매사에 원칙을 앞세우는 답답한 인물일 뿐이다.
“과거엔 당신의 명성이 아이린 왕국 전역을 뒤흔들고도 남았지만, 이제는 나의시대야.후후후.”
만취한 자일 백작은 득의의 미소를 지었다. 천막 밖에서 그의 혼잣말을 듣고 있던 병규도 덩달아 웃음을 흘렸다.
‘너의 광오한이 나의 일을 돕는구나.’
병규는 요수의 발톱으로 천막을 소리 없이 찢고 작은 구슬을 안으로 집어넣었다.필라이트가 준 마법구슬이다. 수면 가스가 들어있는 구슬로 발동 주문을 외운 후, 땅에 던지면 무색무취의 수면 가스가 방출된다.
구슬의 크기가 워낙에 작다 보니 수면 가스의 효과를 볼 수 있는 범위는 협소할 수 밖에 없다. 하지만 밀폐된 천막이라면 이렇게 작은 구슬이라도 충분히 작당한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병규의 예민한 귀에 풀썩 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살금살금 천막 안으로 들어가 보니 자일 백작이 술잔을 움켜쥔 채 쓰러져 있었다.
‘쯧쯧.’
병규는 혀를 찼다.
지휘관의 방탕한 모습이 병사들의 일사불란한 행동들과 크게 대비되었다.
‘한심하군,’
병규는 쌀부대처럼 축 늘어진 자일 백작을 어깨에 들쳐 멘 채 천막 밖으로 나갔다. 이제 이대로 와이번을 타고 트라우마로 귀환하면 작적은 끝난다.예상과 달리 싱겁게 끝나는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조용했다.
천막 밖은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고요했다. 비단 이곳뿐만이 아니라 군영 전체이 기이한 적막이 흐르고 있었다.
‘좋지 않다.’
맞지 않은 옷을 입은 것처럼 부자연스럽다.
숨을 멈추고 귀를 기울였다.
여전히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의 예민한 귀에 잡히는 것은 타닥타닥 햇불 타는 소리뿐.
천막이 이렇게 많은대 숨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다니.
뭉클 불안이 일었다.
자세를 낮춘 채 모든 신경을 양쪽 귀에 집중했다.
드디어 잡혔다.
사람들이 숨소리가 들려온다. 한둘이 아니다.
십......... 백? 아니 그보다 훨씬 많다. 수천을 헤아리는 사람들의 숨소리가 그의 주위를 둥글게 에워싸고 있었다.
병규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것만 같았다.
‘함정.’
병사들이 지휘관 막사를 중심으로 둥글게 포진하고 있다. 아니 포진이 아니라 그를 에워싸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도망치지 못하게.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기 위함이다.
이것은 오직 한 가지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함정에 빠진 것이다.
화아악.
그를 중심으로 반경50미터 정도가 환하게 밝아졌다. 일제히 밝혀지는 횃불 아래 시위를 당기 궁병들의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났다.
그리고 그 뒤에 검과 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삼엄한 눈으로 그를 노려보고 있었다.
‘대체 언제.’
병사들의 감시는 확실히 피했다. 그건 확신할 수 있다.
일반인은 눈을 부릅뜨고 봐도 그의 움직임을 볼 수 없다.
마법 트랩도 아니다.
호랭이의 부적은 완벽하다.
이는 대마법사인 필라이트에게 검증받은 것으로 믿을 만한 것이다.
뛰어난 부적의 효능에 필라이트가 얼마나 놀랐던가.
‘그럼 또 뭐가 있는 거지?’
병규는 자신이 놓친 것이 뭘까 곰곰 생각했다. 답은 으외로 가까운 곳에 있었다. 시력에 집중하자 그의 주위를 맴돌고 있던 투명한 어떤 존재가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정령!’
그는 정령술사의 존재를 간과한 것이다.
아이린 왕국은 하이엘프의 축복을 받은 탓인지 이드라센에 산재한 다른 나라에 비해 유독 정령술사가 많았다. 토벌군에 정령술사가 포함되어 있는 것도 무리가 아니다.
아차! 하는 생각이 머릿속을 쳤지만 이미 늦은 일이다.
“감히 이곳에 침입한 자가 누국가 했더니 아직 새파랗게 어린 애송이였군.”
낭랑한 음성과 함께 병사들 틈을 헤치고 세 사람이 걸어 나왔다.
부사령관인 버지니아 백작과 필립 공작이 특파한 말보로 가문의 쌍둥이 형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