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자 체면이 말이 아닌걸
병규가 트라우마로 복귀한 지 이미 2주가 지났다.
그동안 병규는 선술에 공을 들이고, 미네르바 기사들과 함께 와이번을 길들이는 데 총력을 기울였다.
병규가 변한 만큼 트라우마에도 많은 변화가 뒤따랐다.
짧은 기간이었지만, 레종 공주와 디스 남작의 호소가 성과를 얻어 상당한 수의 귀족들이 합류했다. 비록 대부분이 세력이 약한 지방 귀족에 불과했지만, 한 사람의 손이리도 빌려야 할 공주 일파로서는 미약한 힘일망정 감지덕지했다.
그렇게 모일 병력이 오천 정도였다. 그중 기사 급의 인물은 고작 백여 명에 불과했다. 대부분 지방 귀족들을 수행하는 역할을 맡고 있던 사람들이다.
일반적으로 지방 귀족들을 수행하는 기사들은 일선에서 물러난 퇴물들이 많다. 전장에서 활약하기엔 나이가 너무 많은 것이다.
하지만 왕권 수복의 열의에 불타는 그들을 곧주는 차마 내칠 수 없었다.
루멘 백작은 그들을 묶어 새로운 기사단으로 만들었다.
공주는 그들을 대지의 정령와의 이름을 따 트로웰 기사단이라 명명했다.
새로 창설된 트로웰 기사단을 사람들은 노인 기사단이라고 불렀다. 그 정도로 노인들이 많았다.
트로웰 기사단과 다른 귀족들의 사병으로 구성된 병력은 루멘 백작이 직접 지휘하기로 했다. 그는 즉각 병종을 나누고, 병사들을 훈련시키는 작업에 들어갔다.
특히 그가 심혈을 기울인 것은 새로 창설된 트로웰 기사단을 훈련시키는 것이었다.
전장에서 마상 기사단의 위력은 감히 다른 군종에 비할 바가 아니다. 그런데 공주에겐 현재 그렇게 강력한 위력을 발휘할 기사단이 없었다.
현재 왕정 기사단인 미네르바 기사단은 병규와 함께 드래곤나이트로 새로 태어나기 위해 맹훈련 중이다. 그 때문에 마상 기사단에 공백이 생긴 것이다.
루멘 백작은 그 공백을 노인들로 구성된 트로웰 기사단으로 메울 생각인 것이다.
‘근력이 딸리는 대신 이들은 전장에서 몇십 년을 보낸 백전노장이다. 힘은 기교로 보충할 수 있다.’
이런 생각을 품은 그는 허리마저 구부정한 노인들과 함께 매일 연병자을 굴러다녔다.
과연 그의 열과 성을 다한 노력은 조금씩 결실을 맺어, 오합지졸에 불과하던 병사들과 노인 기사단은 차츰 군대의 모습을 갖춰 가기 시작했다.
그렇게 트라우마엔 조금씩, 하지만 거대한 변화가 시작되고 있었다.
그런 거대한 변화들 중에 가장 의외였던 것을 꼽으라면 사람들은 단연코 호랭이와 필라이트의 의기투합을 꼽을 것이다.
둘은 마법에 대한 학문적 탐구심이라는 공통의 관심사를 가지고 힘을 모았다. 호랭이가 무슨 말을 했는지 모르지만, 둘은 서로 말을 놓는 사이까지 발전하였다.
겉으로 보기엔 팔십 노인과 이십대 청년의 모습이 분명하다.
호랭이가 노인인 필라이트를 평대하는 것부터가 불경한 일이다.
하지만 남들이 뭐라 하든 둘의 사이는 무척 좋았다.
둘은 마치 헤어졌던 형제가 다시 재회한 것처럼 죽이 잘 맞았다.
매일같이 술을 마시러 다니고, 도서관에 처박혀 마법에 관한 심도 있는 토의를 나누었다.
나중엔 오히려 필라이트가 물귀신처럼 매달려서 호랭이가 귀찮아할 정도였다.
처음 건방진 호랭의의 태도에 발끈하던 귀족들도 필라이트 공작이 하도 요란스럽게 그르 살갑게 대하는 통에 불만이 있어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했다.
바야흐로 천년 왕국 최초로 걸어 다니는 치외법권적 존재가 탄생한 것이다.
호랭이는 갈수록 거만해졌다.
공주를 어린 아이 대하듯 막대하는 것은 물론이요, 만취한 상태로 글로리 후작의 집무실에서 코를 곰며 자기 일쑤였다.
놀라운 것은 아무도 무례한 그를 해코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한바탕 호통을 칠 줄 알았던 소드마스터인 글로리 후작은 오히려 그를 조심스럽게 대해서 주의를 놀라게 했다.
공주와 디스, 그리고 루멘 백작이 병력의 충당하기 위해 밤낮으로 애쓰고 있을 때, 병규는 미네르바 기사단과 함께 와이번을 길들이는 훈련에 밤낮을 잊고 있었다.
와이번은 각인된 주인밖에는 태우지 않는다.
비록 공주가 직접 확인을 했다지만, 어디로 튈지 모르는 몬스터를 다루는 것인 만큼 어떤 위험이 발생할지 알 수 없었다.
미네르바 기사단은 용감히 나섰다. 그리고 병규의 명령을 받은 와이번들과 함께 훌륭한 성과를 이뤄 냈다.
짧은 기간이라 아직 손발이 맞지 않아 편대비행이나 곡예비행과 같은 고난도의 묘기는 무리였지만, 적어도 마음먹은 대로 움직일 수는 있게 되었다.
드래곤나이트의 훈련이 어느 정도 성과를 이루자 병규는 곧2단계에 돌입했다. 잘 훈련된 드래곤나이트에 마법사나 정령술사를 태우는 것이었다.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필라이트는 반대했다.
대마법사인 그는 일전에도 이 일의 어려움을 설명한 바가 있었다. 와이번과 같은 마물들은 마법을 천재지변과 같은 재앙으로 생각한다.
만약 등에 태운 마법사가 화염 마법을 사용한다면, 마법을 발동하기도 전에 뜨거운 불길에 놀란 아이번이 마법사를 죽여버릴 것이다.
“설혹 와이번이 마법를 허락한다고 해도, 그 많은 와이번들에게 태울 마법사들을 어디서 구한단 말이냐?”
필라이트의 말에 많은 귀족들이 동의를 표했다.
그렇다.
현재 트라우마엔 마법사가 거의 없었다.
트라우마 성에 고용된 마법사는 고작 두 명, 핖라이트라는 대마법사가 합류하긴 했지만 스무 마리의 와이번에 태우기엔 태부족이었다.
하지만 병규는 씩 하고 웃었다. 그의 미소엔 자신감이 넘쳐 흐르고 있었다.
“왜 마법사가 없습니까,?”
병규가 내민 카드는 엘프였다.
엘프들은 태생적으로 인간보다 마나에 친숙했다. 때문에 그들 모두가 마법과 정령술에 뛰어난 재능을 보였다.
병규는 카즈엘을 따라온 엘프들을 와이번에 태울 생각을 갖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의 계획은 처음부터 난항에 부딪혔다.
엘프들이 거세게 반대했기 때문이다.
신의 축복을 받은 엘프와 마계의 사생아인 마물들은 태생부터가 달랐다. 특히 고결한 엘프들은 마물들을 저주하고, 그들의 존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았다.
마법사 대신 엘프들을 태운다는 병규의 발상은 훌륭했지만, 엘프들의 반발이 너무 심해 결국 와이번에 엘프를 태우는 일은 실패로 돌아가는 듯 보였다.
하지만 병규는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하이엘프인 카즈엘을 직접 찾아갔다.
“ 카피 님은 엘프들이 와이번에 타는 일이 세계의 균형을 유지하는 일에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하십니까?” 카즈엘이 그윽한 눈빛으로 물었다.
가만 그녀의 얼굴을 마주보던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단호함이 서린 그의 얼굴엔 일말의 망설임도 찾아복 수 없었다.
“만약 필립 공작이 마계와 관련된 게 확실하다면, 우리는 절대적으로 약세야. 그런 우리에게 와이번은 부족한 전력을 보충해 줄 결정적인 카드가 될 거라고 확신해.”
병규의 음성엔 그 자신도 이유를 알지 못하는 확신이 가득했다.
병규는 재미로 드래곤나이트를 구상한 것이 아니다. 부족한 전력을 메우기 위해 나름대로 애쓰고 있는 것이다.
카즈엘을 말없이 그의 눈만을 바라보았다. 잠시 후 그녀는 고개를 끄덕였다.
“전 이미 맹세했습니다. 어떠한 상황에서도 당신을 믿겠노라고.”
병규는 맹세라는 그녀의 말이 무슨 의미인지 몰랐다. 하지만 하이엘프의 맹세는그가 느끼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의미를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정작 병규 본인은 전혀 자각하지 못했다.
과거 아이린 국왕을 위해 자신의 영혼까지 신에게 헌납한 하이엘프의 경우처럼.
하이엘프인 카즈엘의 설득은 엘프들의 마음을 돌려놓기에 충분했다. 하지만 엘프 전사들은 한 가지 단서를 달았다.
“우린 인간들의 전쟁에 간섭하지 않습니다. 만약 아이린 왕국의 반란군이 마계와 관련이 없다면 우리는 절대 이 전쟁에 간섭하지 않을 것입니다.”
엘프 전사들의 리더가 의기에 찬 음성으로 말했다. 병규는 그를 똑바로 응시하며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만약 그들의 마계와 관련이 있다는 것이 확인되면?”
“우리는 목숨을 걸고 암흑의 침공에 대항할 것이오.”
병규는 빙그레 미소 지었다. 애초애 엘프들은 마계의 침공을 저지한다는 목적하에 합류한 것이다. 만약 필립 공작이 마계와 직접적인 관련이 없다고 해도 병규로서는 잃을 것이 없는 셈이다.
그렇게 간신히 엘프들을 설득한 병규는 곧장 다음 날부터 훈련에 들어갔다. 와이번에 드래곤나이트 외에 엘프들까지 동승하게 된 것이다.
생각보다 훈련은 힘들었다.
와이번에 두 사람이 타는 일도 처음 있는 일이었고, 와이번에 올라탄 채 마법을 쓰는 일은 더더구나 전무후무한 작업이었다.
과연 필라이트의 경고대로 와이번들은 마법에 강하게 반발했다.
위험한 상황이 몇 번이나 반복되었다.
어쩔 수 없이 훈련은 중단되었다. 안전이 확보되지 않은 훈련은 희생만 낳을 뿐이다.
모두가 불가능한 일이라고 했다.
하지만 병규는 여전히 포기하지 않았다.
그 후로도 몇 차례 병규는 호랭이의 도움을 얻어 와이번을 마법에 적응시키는 훈련을 거듭했다.
허나 아무 소용이 없었다. 아무리 병규가 명령을 내려도, 막상 등에 태운 엘프 마법을 사용하면 와이번은 깜짝깜짝 놀라며 몸을 뒤트는 것이다.
와아번이 마법에 저항하는 것은 본능적인 문제였다.
뚜렷한 해결책이 제시되지 않은채 하루하루 시간이 흘러갔다.
이때 전혀 뜻밖의 사람이 해결책을 제시했다.
퀴니.
그녀위 등장을 그 누구도 예상하지 못했던 일이었다.
한동안 그녀는 와이번 위에서 굴러떨어지는 병구를 가만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던 어느 날, 난동을 부리는 돠이번들에게로 쩡쩡 걸음으로 접근핶다.
병규는 끙끙 울어대는 와이번들 사이에 대자로 누워 있었다. 많이 지친 모습이었다.
“변기. 뭘 하고 싶은 거야?”
병규는 눈을 감은 채 한숨 섞인 음성으로 대답했다.
“와이번들이 마법에 놀라지 않게 만들고 싶어.”
“으음.”
볼을 긁적이며 잠시 생각하던 퀴니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힘들 거야. 중간계의 와이번들은 겁이 많거든. 마법에 내성이 있는 마계의 와이번들과는 달라.”“알아. 하지만 그래도 꼭 하고 싶어.”
번쩍 눈을 뜬 병규의 눈동자에 투지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는 아직 포가 하지 않은 것이다.
병규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은 채, 그의 머릿결을 만지작거리던 퀴니가 벌떡 일어났다. 그리곤 타박타박 와이번들에게 다가갔다.
훈련에 열중하고 있던 기사들에세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가뜩이나 포악한 와이번이다.
겁을 모르는 미네르바위 기사단조차 병규거 없는 자리에서는 감히 와이번 곁에 접근하지 못할 정도다. 하필 지금은 막 엘프들이 마법을 시연해 보인 후라, 와이번들은 그 어느 때보다 더 흥분해 있었다.
그런데 뽀얀 피부위 귀여운 소녀가 멋도 모르고 와이번에게 접근한 것이다. 이대로 소녀는 미쳐 날뛰는 몬스터들에게 먹히고 말 것 처럼 생각되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소녀를 본 와이번들은 갑자기 얌전해졌다.
고개을 바닥에 깊게 깔며 가르릉 목 울림을 흘렸다.
병규를 대할 때처럼, 아니 그보다 더 조심스러운 행동을 보였다. 지켜보던 사람들은 이 믿기지 않는 사실에 벌린입을 다물지 못했다.
산보하듯 와이번들 사이로 걸어 들어간 퀴니는, 품에서 작은 펜을 꺼냈다. 지구에서 가져온 매직이었다. 그녀는 매직으로 와이번의 이마에 간단한 문양을 그린 후, 나직이 주문을 외웠다.
그것은 너무도 간단한 작업이라, 순식간에 스무 마리의 이마에 문양이 그려졌다. 기적은 그 다음 날부터 일어났다.
여느 날처럼 긴장된 훈련이 시작되었다. 기사와 엘프들을 태운 와이번들이 트라우마의 상공을 날았다. 그리고 병규의 신호에 맞춰 엘프들이 마법을 썼다. 와이번들이 가장 크게 반발하는 화염 마법이었다.
기사들은 고삐를 꽉 움켜쥔 채, 와이번의 난동에 대비했다.
그런데, 아무 일도 벌어지지 않았다.
놀랍게도 하늘을 붉게 태우는 마법의 불길에도 스무 마리의 와이변들은 평온함을 유지했다. 오해려 자신이 내뿜은 불길인 양 화염 마법을 즐기기까지 했다.
이 놀라운 변화에 사람들은 놀라면서도 기뻐했다.
드디어 훈련이 결실을 얻은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면서도 한편으론 와이번들이 갑자기 얌전해진 이유를 몰라 고개를 갸웃거렸다.
다만 병규만은 대략 그 이유를 짐작하고 있었다.
퀴니가 와이번들의 이마에 문양을 그린 후, 와이번들의 피부가 차츰 검게 변했다. 이런 변화를 예전에도 본 적이 있었다. 퀴니를 신처럼 받들던 검은 오크들 역시 이마에 간단한 문양이 그려져 있었다.
“대체 무슨 재주를 부린 거야?”
병규가 환한 표정으로 물었다.
요 조그만 아가씨는 볼 때마다 놀랍다. 앞으로 또 얼마나 그를 놀라게 할 것인가.
“변기. 이젠 기분 좋아?”
“당연하잖아.”
“그럼 됐어.”
퀴니는 그저 배시시 웃기만 했다. 그녀는 병규의 밝아진 표정만으로도 마냥 기쁜 듯했다.
퀴니의 도움으로 와이번들이 안정왼 후로 새로운 드래곤나이트의 훈련은 일사천리고 진행될 수 있었다. 와이번들은 더 이상 마법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엘프들은 와이번을 무시하지 않았다.
와이번과 기사, 그리고 엘프가 합심하여 별치는 화려한 마법공격은 그 어떤 기사단의 돌격보다 화려하고 위협적이었다.
드래곤나이트의 성과도 놀랄 만하지만 무엇보다 큰 실적은 미네르바 기사단이 그를 진심으로 따르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모든 일에 항상 앞장서고, 위기를 두려워하지 않는 그의 모습은 기사들의 마음속에 깊이 각인되었다. 미네르바 기사단의 기사들 중에는 이미 그를 기사의 표본으로 생각하는 맹신자들까지 생겼을 정도였다.
엘프들 또한 신념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그를 차츰 신임하게 되었다. 여전히 엘프들은 인간들을 불신했지만, 그만은 예외로 취급되었다.
비록 작위도 없는 평민이지만 병규를 무시할 수 있는 사람은 적어도 트라우마 안엔 없게 되었다.
드래곤나이트가 놀랄 만한 성과를 나타내는 것과 마찬가지로 루멘의 노력도 어느 정도 결실을 얻어, 트로웰 기사단과 새로 구성한 병사들도 어느 정도 군대의면모를 갖추게 되었다.
그러던 어느 날이다.
필립 공작의 움직임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던 글로리 후작의 정보망에 마침내 반란군이 이동하기 시작했다는 첩보가 입수되었다.
즉시 비상회의가 소집되었다.
후작의 저택 회의실에서 열린 비상회의엔 레종 공주를 비롯하여, 그녀의 측근이라고 할 수 있는 디스와 루멘 백작, 그리고 다수의 귀족들이 참석했다.
의외인 것은 회의에 참여한 귀족들의 면면이 새롭다는 것이다.
그동안 디스는 새로운 귀족들을 포섭하는 한편, 이미 합류한 귀족들을 능력에 맞게 판별하는 작업을 세밀히 진행했다.
덕분에 지금은 회의를 주도하는 핵심 인사들로 권력에 집착하는 무능한 귀족들을 솎아내고, 대신 개혁의식을 지닌 젊고 유능한 인재들로 빈자리를 채웠다.
이 과정에서 적지 않은 마찰이 있었다.
남작에 불과한 그가 개혁을 진행하니 자연 불만의 소리가 날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디스는 레종 공주와 글로리 후작의 권력을 등에 업고, 과감히 개혁을 메스를 들이댔다.
그리고 그 결과가 지금 눈앞에 보이는 보습 그대로다.
‘나쁘지 않군.’
자리에 착석하고 있는 귀족들의 눈동자를 쭉 홅은 글로리 후작은 만족스런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귀족들의 눈동자에서 열의가 보였던 것이다. 적어도 이 자리에 있는 귀족들 중엔 암울한 현실에 좌절하는 무능력자는 없다고 봐도 무방했다.
‘그만큼 디스의 능력이 뛰어나다고 봐야겠군.’
귀족들의 저항을 무릎쓰고 개혁을 단행하는 일은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단호함과 결단력이 없이는 절대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이다.
회의에 자리한 사람들 중엔 유독 눈에 띄는 존재들이 있었다.
병규와 호랭이, 그리고 하이엘프인 카즈엘이 바로 그들이었다.
아이린 왕국의 입장에서 보자면 외인이리고 할 수 있는 이들이었지만, 귀족들 중에서 그들의 참석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자는 단 한 명도 없었다.
“흠. 관계자들도 다 모인 듯하니 회의를 진행하겠소.”
낮은 헛기침과 함께 회의를 사작한 필립 공작은 곧바로 본론으로 들어갔다.
“필립 공작이 드디어 행동을 개시했습니다. 방금 전 들어온 첩보에 의하면 수도에서 출발한 다수의 병력이 곧장 남쪽으로 향하고 있다고 하오.”
웅성거리던 분위기가 무겁게 가라앉았다.
“적의 병력은 어느 정도죠?”
“첩보에 의하면 보병2만에 기병이 5백, 그리고 마법사11명이 포함되어 있다고 하오.”
“흐음.”
“2만이라.” “어디서 그 많은 병력을 모았단 말인가.”
사람들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경악한 반응이 여실했다.
보병만 무려2만이다. 겨우 2천에 불과한 트라우마의 상황과 비교하면 얼토당토않을 정도의 엄청난 병력이었다.
“지금의 상황은 왕국의 성패가 걸린 참혹한 전쟁이 될것이오. 이 전쟁에서 이긴다면 우린 천년 왕국의 역사를 보전하게 될 것이고, 만약 진다면 반란군의 말발굽 아래 짓이겨질 참혹한 미래가 우리를 기다리게 될것이오.”
글로리 후작은 장중하기 이를 데 없는 발언으로 좌중을 진정시켰다. 전쟁도 하기 전에 지휘부가 두려움을 느끼게 되면, 그 전쟁은 볼 것도 없이 이미 패배한 것이나 다름 없다.
아무리 상황이 암울하다 해도 지휘부만은 냉정해야 한다.
그래야 최악의 상황이 벌어진다고 하더라도 혼란을 막을 수 있다.
그것이 전장에서 호랜 경력을 쌓은 글로리 후작의 변함 없는 생각이었다.
글로리 후작의 일침을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했다.
회의는 진중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었다.
하지만 상당한 시간이 흘렀음에도 별 다른 대안을 찾을 수은 없었다.
적의 대군이 남하하고 있지만, 막상 그들을 막을 마땅한 계책이 없었다. 기껏해야 산발적인 게릴라전으로 적의 발복을 잡자는 소극적인 의견이 전부였다.
“에잉. 답답한 살람들 같으니라고.”
무료한 얼굴로 앉아 있던 필라이트가 급기야 짜증을 드러냈다.
“회의에 나온 사람들 다 어디 갔나. 의견을 말하라는데 왜 이리 조용해?”
그는 탁자를 소리나게 두드리며 역정을 냈다.
글로리 후작은 기다렸다는 듯이 빙그레 웃으며 물었다.
“공작님께선 좋은 수라도 있으십니까?”
“한 가지 있긴 하다.”
필라이트는 수염을 쓰다듬으며 찝찝한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어쩐지 글로리 후작의 수작에 말려든 것 같다는 기분이 들었다.
방법이 있다는 말에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필라이트에게로 쏠렸다.
압도적인 전력차다.
성문을 굳게 걸어 잠근 채 농성 하는 것 외엔 뽀족한 방법이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체 무슨 수가 남아 있을 수 있단 말인가.
“아무리 생각해도 이번 반란은 이상한 점이 너무 많다.” “어떤 점이 이상하다는 것입니까?”
“모두 다. 이번 반란 자체가 이치에 맞지 않아. 필립 공작 녀석이 갑자기 눈이 뒤집혀 반란을 일으킨 것도 이상하고, 귀족의 대부분이 엉뚱한 반란에 동참한 것도 이상하다. 게다가 허무할 정도로 너무 쉽게 반란이 성공했어.”
일리있는 말이다.
수도인 유리스는 반란이 일어난 당일, 벌 다른 저항도 못하고 허무하게 무너졌다.
그 전까지 어떠한 불온한 움직임도 없었다.
반란은 갑작스럽고, 돌연하게 이루어졌다.
왕정 제2가사단인 엘퀘네스 기사단을 비곳하여, 왕국의 주력이라고 할 수 있는 수도 방위군까지 필립 공작의 반란에 동참했기 때문이다.
어제까지 멀쩡하게 웃으며 훈련에 임하던 병사들이 다음 날 돌연 눈이 뒤집혀서 난동을 부리고 국왕을 향해 검을 휘둘렀다.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한 꼴이니, 미처 대처할 틈도 없었다.
태평성대에 이토록 어이없는 전면적인 반란사태는 대륙의 역사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건이다.
“공작님께서 어떤 고견을 가지고 계시는지 궁금하군요.”
“별건 아니다. 며칠 동안 호랭이님과 진지하게 토론을 벌였다. 그리고 한 가지 결론을 얻었지.”
자리에서 일어난 필라이트는 지팡이를 짚으며 호랭이 곁으로 걸음을 옮겼다.
“으음.”
“호랭이.... 님?”
귀족들의 입에서 가볍게 신음이 흘러나왔다.
필라이트는 나이로나 연배로나 단연 아이린 왕국의 최고 어르신이다.그런 그가 새파랗게 어린 청년을 ‘님’이라는 말까지 붙여 가며 존칭으로 부르다니. 귀족들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것도 당연했다.
‘대체 저 자의 정체가 뭘까.’
글로리 후작 역시 눈을 빛내며 호랭이를 주시했다.
보통사람이 아님은 짐작하고 있었다. 병규에게 사사하던 그의 실력은 소드마스터인 자신이 보기에도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듣자하니 마법까지 익혔다지 않은가.
그것도 5서클의 마법사를 간단히 누를 정도의 실력이라 했다.
검과 마법.
둘 증 한나만 일정 경지에 오르는 곳에도 평생을 바쳐야 한다. 한데 호랭이란 청년은 이 두 가지 모두에 놀랄 만한 성취를 보이고 있다.
그가 아는 한, 이 정도의 능력을 가지는 것은 드래곤 하나뿐이다.]
하지만 글로리 후작은 호랭이가 드래곤이 아니라고 믿었다.
풍기는 기운이 다르다.
말로는 설명하긴 어렵지만 호랭이의 기운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드래곤처럼 만물을 지배하는 존재가 아니라 흐름에 따르고 동조한다고나 할까. 그가 볼 때 호랭이는 드래곤보다는 엘프에 무한히 가까웠다.
‘하지만 엘프도 아니지.’
이런 상황이다 보니 호랭이에 대한 의문과 궁금증은 날이 갈수록 커져만 갔다.
하지만 글로리 후작은 서두르지 않았다. 엔젠가 그의 정체를 알 날이 올 것이다. 지금은 차분한 자세로 필라이트 공작의 의견에 귀를 기울여야 할 때다.
마침 필라이트가 목을 가다듬으며 일장 연설을 벌이기 시작했다.
“방금 들은 첩보에 의하면 중앙 귀족들이 필립 공작에게 권력을 실어주는 법안들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더군,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귀족 놈팽이들이 미치지 않고서야 그런 법안을 순순히 통과시켰을 리 없다.”
“귀족들이 대거 필립 공작에게 협조한 것이 수상하기는 합니다.”
“단체로 미치지 않은 한, 그 돈과 권력에 미친 녀석들이 그런 법안을 순순히 통과시켰을 리 없다. 하긴 그러고 보면 원래 미친 녀석들이긴 했군."
사람들 사이에서 큭큭거리는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공주가 자리한 회의장에서 당당하게 귀족들의 욕을 입에 올릴 수 있는 사람이 필라이트 외에 또 누가 있을까. 하지만 통쾌하긴 해도 회의의 논점에서 벗어난 것은 이었다.
필라이트가 귀족들의 못된 성토에 열을 올리자 대신 호랭이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이번 회의 결과로 한 가지는 알 수가 있소. 필립 공작이 무언가 귀족들에게 수를 부렸다는 것 말이오, 약물이든 마법이든, 아니면 사람을 바꿔치기한 것이든. 모종의 방법으로 귀족을 부리고 있는 것만은 분명하오. 만약 우리가 필립 공작의 저열한 수단만 밝혀낼 수 있다면 불리한 정국을 단숨에 뒤집을 수 있을지도 모르오.”
회의장의 모두는 무심결에 고개를 끄덕였다.
만약 귀족들의 변심이 인의적인 것이라면, 그것을 밝혀 내는 순간 왕권을 회복한 다시없는 기회가 도래할 것이다.
“어떻개 알아낸단 말입니까?”
“방법은 한 가지뿐이겠지.”
이번엔 필라이트가 말을 받았다.
“누군가 적진에 침투하여 지도부 중 한 명을 납치해 오는 것이다. 만약 마법이나 약물에 의한 배신이라면 나와 호랭이님이 쉽게 밝혀낼수 있을 것이다.”
대마법사인 필라이트와 신선인 호랭이가 힘을 합쳤다. 이보다 더 듬직한 조합도 드물 것이다.
“솔직하게 말해서 이 일에 우리의 사활이 걸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만약 필립 공작의 부정을 밝혀 내고, 반란에 동참한 귀족들의 정신을 되돌릴 수만 있다면 전황은 순식간에 역전될 것이다.”
회의장은 쥐죽은 듯 조용해졌다.
요는 적위 수뇌를 납치해 오면 된다..
말할 것도 없이 가장 이상적인 것은 필립 공작을 직접 잡아오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적으로 불가능했다.
그 누가 수도의 엄밀한 방어를 뚫고 소드마스터인 필립 공작을 제압할 수 있겠는가.
결국 가능한 방법은 필립 공작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귀족 중의 누군가를 납치해 오는 것인데, 문제는 누가 조종당하고 있는 것인지 정확히 알 수 없다는 점이다.
세뇌되었을 것으로 보이는 귀족들은 대부분 방어가 단단한 수도에 머물고 있었다. 이 또한 필립 공작의 주도면밀한 일면을 느끼게 하는 점이었다.
“현재 적진의 지휘는 누가 하고 있나?”
조용히 염두를 굴리고 있던 글로리 후작이 부관에게 물었다.
“반란군의 수뇌는 자일 백작이라는 자입니다. 군관가문 출신이라 상당한 검술실력을 알려져 있으며 과거 벨라 협곡 전투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기록이 있습니다. 목적을 위해서람나 물불을 안 가리는 저돌적이고 안하무인격인 성격으로 실력은 좋아도 권력과는 담을 쌓은 인물로 알려져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부관으로 임명된 자는 버지니아 백작입니다.”
버지니아 백작은 예전에 공주 일행의 뒤를 쫓는 추적대의 지휘관이었다.당시의실패를 이유로 지휘관에서 부관으로 강등된 듯했다.
그나마 경질되지 않고 부관으로라도 참전할 수 있었던 것은, 전장에서 뼈가 굵은 그의 경력을 필립 공작이 인정했기 때문이다.
토벌군의 지휘관인 자일 백작에 대해 글로리 후작도 어느 정도는 알고 있었다.
“자일 백작이라. 실력은 좋지만 꽉 막힌 인간이었지. 하지만 반란군에 가담할 수 정도로 간사한 자는 아니다.”
이 한 마디로 목표는 정해졌다.
문제는 누가 하느냐 하는 것이다.
보병만 무려2만이다. 여기에 다수의 기사와 마법사들이 포진하고 있다.
용담호혈(龍膽虎穴)이라는 말이 있다. 용이 사는 연못과 호랑이가 지키는 동굴이라는 뜻으로 한 마디로 사지 (死地)를 말한다. 그런 엄청나 병력이 지키고 있는 곳에서 적의 사령관을 납치해 오라고?
누가 봐도 불가능한 임무다. 죽으로 가는 거소가 마찬가지다.
뒤숭숭한 분위기속에소 그 누구도 선뜻 나서는 인물이 없었다.
성공 가능성이 전무한 일에 누가 목숨을 버리겠는가.
그때, 한 사람이 손을 들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병규였다.
병규의 돌연한 발언에 회의장은 열화와 같은 충격에휩싸였다.
“허.”
“당신이.”
귀족들 사이에서 놀란 외침이 터져 나왔다.
과거 병규를 무시하던 분위기와는 천양지차였다.
사실 젊은 귀족들 사이에서 병규에 대한 평가는 상당히 좋았다.
위험을 무릅쓰고, 대마법사를 구출했다.
필립공작의 와이번들을 모조리 끌고 왔으며, 엘프들을 설득시켰다.
그리고 대마법사마저 불가능하다고 한 엘프와 와이번의 결합. 그것을 병규는 완벽하게 해 냈다.
신흥 귀족들에게 있어 그의 존재는 살아 있는 신화나 다름없었다. 적어도 평민이라는 이유로 그를 무시할 사람은 이 자리에 아무도 없었다.
“...... 자네가 가 준다면 나도 불만은 없네.”
손을 깍지 낀 채 병규를 응시하고 있던 글로리 후작이 입가를 틀어올리며 웃었다.
“자네가 안 가면 내가 움직일 생각이었네.”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그럴 거라 생각 했습니다.”
두 사내는 서로를 마주보며 진한 미소를 지었다.
병규가 적 군대의 사령관을 데려오는 것으로 회의는 막을 내렸다. 귀족들이 회의장을 나서자 호랭이는 착 가라앉은 음성으로 병규에게 물었다.
“빚을 갚을 생각이냐?”
호랭이는 자칫 죽을 수도 있는 병규의 모험을 말리지 않았다. 그가 왜 이런 결정을 했는지 짐작했기 때문이다.
다른 세계의 사람에 불과한 병규가 아이린 왕국에 충성ㅇ르 바칠 이유가 없다.
그는 놈을 찾아가는 것이다. 절망을 안겨 주었던 숙적.
소드마프터 살렘 후작을.
“네.”
예상대로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위험한 곳으로 몸을 던지는 녀석이 표정만은 더 없이 맑기만 하다.
“녀석. 도대체 머리에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모를 녀석이로구나.”
호랭이는 병규의 머리통을 가볍게 두드렸다.
호승심이 남다르다고 해야 할까.
평소엔 유약한 성격이지만, 이상할 정도로 남에게 지는 것만은 싫어했다. 과거 폭풍의 군조인 수사노오에게 그랬던 것처럼, 이번엔 살렘이라는 정체불명의 목표가 생긴 것이다.
“녀석이 그곳에 있을까?”
“있을 겁니다.”
병규는 확신했다.
며칠 전 밤에 그를 만났다.
다음에 볼때는 전장이라 했다. 그는 틀림없이 그곳에 있을 것이다. 예전엔 살렘이 그를 불러냈지만, 이번엔 그가 살렘을 불러낼 것이다.
호랭이는 말리지 않았다.
오히려 빙그레 미소 지으며 그의 행동ㅇ르 부추겼다.
“녀석. 이제야 사내다운 티가 좀 나는구나, 하지만 잊지 말아라. 일단 시작한 일을 반드시 성공해아 한다는 것을, 실패는 있어도 불가능은 없다. 사내란 모름지기 그래야 한다. 그래야 너에게 선술을 전수한 내 체면도 설 테니 말이다.”
“걱정하지 마세요.”
병규의 미소가 짙어졌다. 마냥 어린아이로만 보이던 그가 오늘은 어쩐지 듬직하게만 느껴졌다.
그렇게 병규의 다음 행동이 결정되었다.
시간은 순간순간 느린 듯 생각되지만, 지난 뒤에 되돌아 보면 한없이 빠르게 흘러가 있다.
내일 당장 적진으로 날아가야 하는 병규에겐 시간의 흐름이 더 빠르게 느껴질 수밖에 없었다. 임무에 필요한 도구 준비는 필립 공작이 알아서 해 주기로 했다지만, 토벌군의 진행방향, 그리고 야영시 군영의 형세와 보초의 간격등은 오늘 중으로 모두 알아두어야 했다.
글로리 후작은 작전 참모들과 머리를 맞대고 이 불가능한 임무의 가능성으로 조금이라도 높이기 위해 노력했다. 병규 역시 두 눈을 지그시 오므린 채, 복잡한 선으로 도배되다시피 한 지도를 뚫어져라 노려봤다.
많은 전술이 제시되었다. 하지만 쓸모 있는 것은 거의 없었다. 그만큼 상황은 암담했다. 회의가 진행될수록, 글로리 후작을 비롯한 귀족들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하지만 병규는 여전히 웃기만 했다.
시간은 물처럼 흘렸다.
어느새 밤이 되었다. 병규는 휴식을 취하고 싶다는 핑계를 대고서야 회의장을 빠져나왔다.
“변기군.”
저택을 벗어나는 그를 후작이 불러 세웠다.
“지금이라도 그만 둬도 되네. 아무도 자넬 탓하지 않을 것이네.”
회의를 진행한 결과 귀족들은 이번 임무의 성공 가능성이 극히 희박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탓하긴커녕, 어째서 이런 말도 안 되는 임무에게 자원한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글쎄요.”
병규는 무안할 때면 안 되는 임무에 자원한 것인지 의아하게 생각할 정도였다.
“글쎄요.”
병규는 무안할 때면 으레 그랬듯 뒷머리를 긁적였다.
“하지만 어쩐지 꼭 성공할 것 같습니다...”
왜 이런 확신이 드는지는 모른다. 하지만 병규는 이 영문을 알 수 없는 확신을 믿었다.
“말도 안 되는군.”
멋없는 그의 대답에 글로리 후작은 피식 웃었다.
“하지만 왜인지 자네 말처럼 될 것 같은 생각이 드네. 꼭 돌아오게.”
“네.”
저택을 벗어난 병균는 여관으로 돌아가지 않았다.
이 시간이면 항상 그는 성을 빠져나갔다. 호랭이에게 전수받은 선술을 수련하기 위함이다.
붉은 대지의 밤은 위험하다. 하지만 병규는 전혀 개의치 않았다.
바람이 찼다.
언제나처럼 붉은 모랠바다로 향한 병규는 자리를 잡고 선술의 기본동작을 연마했다.
호랭이는 더 이상 수련에 동참하지 않았다. 더 이상 가르칠 것이 없다는 것이 이유였다. 그래서 며칠 전부터 병규는 혼자서 이곳을 찾았다. 물론 그렇다고 호랭이가 노는 것은 아니었다. 필라이트와 마법에 관한 토론에 빠져 있었다.
차올리고, 휘말고, 누르고, 당겨서 가둔다.
손발이 움직일 때마다 대지와 대기가 그의 품안을 노닐었다.
선술의 기본동작을 행하는 중에는 마음이 평온했다.
작은 파문조차 없는 호수처럼, 착 가라앉았다.
모두들 내일의 임무가 불가능하다 했다. 하지만 병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분명 머릿속으로 힘들 것 같다는 생각이 드는 건 사실이다. 그럼에도 그의 가슴은 총분히 할 만하다고 외치고 있었다.
병규는 가슴의 외침을 믿었다.
선술을 함으로써 일말의 불안마저 털어 버릴 수 있었다.
어느새 몇 시간이 흘렀다.
가만 숨을 고른 병규는 붉은 모래바다를 떠났다.
바람같이 내달리며 땀을 식혔다.
몇몇 몬스터가 병규의 그림자를 보았지만 따라오지는 않았다. 최근 들어 이상하게 몬스터들이 그에게 덤벼들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몬스터들이 갑자기 순해진 것은 절대 아니다. 여전히 상인단을 습격했으며, 보름달이 뜨는 밤이면, 트라우마 성까지 무작정 몰려올 정도로 흉폭했다.
병규에게만 순했다.
놈들은 꼬리를 만 강아지처럼 병규를 볼 때마다 슬금슬금 물러났다. 피한다기보다는 두려워하는 것 같았다.
왜 그런지는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어느 시점부터 덤벼들지 않았는지는 안다.
예전 마계에서 소환된 오우거의 피를 먹었을 때다.
그때 이후로 몬스터들이 그를 두려워하기 시작했다. 검은 오우거에게서 복제한 어떤 능력 때문에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 수 없었다.
순식간에 트라우마 성에 도착했다.
“어?” 성문으로 걸어가던 병규는 성루에서 익숙한 그림자를 발견했다.
긴 머리칼을 흩날리고 있는 그녀는 바로 레종 공주였다.
문득 장난기가 발동한 변규는 성벽을 따라 한산한 곳으로 이동했다. 그리곤 하늘을 찌를 듯이 서 있는 성벽을 맨땅을 달리듯 뛰어올랐다.
손쉽게 성벽에 오른 병규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성루로 올라갔다.
레종은 두 손을 꼭 모은 채 성 아래를 초조한 심정으로 내려다 보고 있었다.
살금 다가간 병규는 그녀의 귓가에 조용히 속삭였다.
“이 야심한 밤에 뭐 하는 거예요?” “어머.” 갑자기 들려온 음성에 레종 공주는 어깨를 움찔하며 깜짝 놀랐다. 하지만 곧 병규임을 알아보고 그의 어깨를 가볍게 치며 방긋 웃었다.
“놀랐잖아요.”
“늦은 시각에 여기서 뭘 하고 있었어요?” “그냥.... 달빛이 고와서... ..”
레종 공주는 차마 병규를 보러 왔다는 말을 할 수 없어 얼굴을 붉히며 뒷말을 흐렸다.
마침 구름 사이로 달이 빠꼼히 드러나면서 고운 달빛이 그녀의 빰에 부서져 영롱한 빛을 뿌렸다.
황홀한 그녀의 모습에 병규는 괜스레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일........ 가시는군요.”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 미안해요괜히 저 때문에.”
레종은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당신 때문이 아니에요. 날 위한 일이죠.”
“네?” 레종 공주는 동그랗게 떠진 눈으로 병규를 돌아봤다. 토벌군의 사령관을 납치하는 무리한 작전이 그와 무슨 관련이 있단 말일까.
“빚을 갚을게 있거든요.“
비로소 레종 공주는 고개를 끄덕였다. 병규가 말하는 빚이 무엇인지 감을 잡은 것이다. 그녀도 병규와 살렘의 일을 들어 알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병규의 행동을 설명하기엔 다소 무리가 있었다.
“하지만...... .”
병규는 손을 가만히 내밀어 그녀의 입을 막았다.
“걱정 안 하셔도 됩니다. 전 충분히 강하니까요.”
그다지 큰 목소리는 아니었지만 자신감이 충만했다. 그녀는 절로 위안이 됨을 느꼈다.
단순히 말 몇 마디로 사람을 안심시킬 수 있다니. 병규의 새로운 면을 본 것 같았다.
미소를 되찾은 그녀는 다시금 성 밖으로 시선을 돌리며 너지시 말을 꺼냈다.
“ 처음 봤어요. 글로리 후작님이 그렇게 전폭적으로 누근가를 믿는 모습은요. 대체 어떻게 그분에게 인정받은 거죠?”
“샤바를 후작님의 침실로 보냈습니다.”
“네?”
병규의 장난스런 대답에 레종은 눈을 동그랗게 치떴다. 지금 그녀는 나름대로 심각했다. 병규가 돌아오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설마 병규가 이렇게 엉뚱한 대답을 할 줄이야. 하지만 기분은 좋았다.
그녀는 입을 가린 채 소리 내어 웃었다.
“정말로 샤바 님이라면 후작님의 마음을 돌려놓을 수 있을 거예요.”
샤바의 엄청난 미모는 이미 트라우마는 물론 인근 마을에까지 소문이 파다했다. 소문이 얼마나 장황하게 퍼졌느지, 혼란한 내전 정국임에도 샤바를 보기 위해 트라우마을 찾는 사람들이 매일 줄을 이을 정도였다.
“그러고 보니 요 며칠 안 보이시네요. 샤바님을 따르는 그 무섭게 생긴 분들도 그렇고요.”
"볼일이 있다면서 어딜 갔어요.“ 병규는 콧잔등에 주름을 만들며 대답했다.
샤바가 없어진 것은 삼일 전, 볼일이 생겼다면서 나가고는 여태 소식이 없다. 퀴니가 뭔가를 알고 있는 것 같아서 물었으나 아주아주 중요한 볼일이 있다는 대답만 들을 수 있었다.
“녀석도 독립한 나이인가?”
항상 그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않았던 샤바가 사라지니 왠지 시원섭섭했다.
“저랑 약속하나만 해주세요.”
병규를 빤히 바라보던 레종 공주가 돌연 말했다.
“....... 네?” “꼭....... .꼭! 무사히 돌아오겠다고.”
그녀의 눈동자가 뿌옇게 흐려졌다.
그제야 병규는 알 수 있었다.
레종 공주가 이 늦은 시각에 성루에 나와 있었던 이유를,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사실을.
그녀는 단지 이 한 마디를 하고 싶었던 것이리라.
공주의 마음이 느껴지자 병규는 가슴이 따뜻해졌다.
“물론입니다.”
“꼭이죠?”
“네.” 그녀의 빨간 입술에 감미로운 미소가 돌았다. 순수하고 맑은 미소에 병규는 저도 모르게 웃음을 그렸다. 그순간...... .
그녀가 사고를 저질렀다.
부드러운 입술로 병규의 입을 막은 것이다.
따뜻하고, 달콤한 그 느낌에 병규는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리는 것 같았다.
비단 천이 솜털 위를 자르르 스쳐 지나가는 듯한 짜릿함.
감미로운 시간은 순식간에 지나가 버리고 말았다.
“꼭 다시 돌아와야 해요.꼭! 꼭!”
수줍은 그녀의 목소리.
빨갛게 상기된 얼굴. 그리고 빠르게 멀어지는 그녀의 발소리와 함께 가슴을 뒤흔들던 향긋한 향기도 차츰 옅어졌다.
병규는 석상이라도 된 듯 한참이나 멍하니 서 있었다.
아직도 가쁜 그녀의 숨결이 코끝을 훑는 것 같건만, 모든 게 꿈인 것처럼 희미하기만 하다.
가만 만져본 입술에 촉촉한 따스함이 없었다면, 잠시 환각에 빠진 것이라고 생각했을 정도다.
놀라움. 짜릿함. 그리고 부드러운 감촉을 전해주던 그 느낌이 이젠 아쉬움만 남긴 채 저만치서 감돌고 있었다.
“이거....... 남자 체면이 말이 아니로군.”
무심코 올려다본 밤하늘의 달빛이 그렇게 고와 보일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