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화 (55/102)

  이런 사기 같은 녀석

  카즈엘은 혼란스러워하는 병규를 이끌고 공장 요정의 숲으로 향했다. 병규에게 도웅을 받았다는 카즈엘의 설명을 들은 엘프들은 그를 극도로 존대했다. 카즈엘은 전 세계에 유일하게 남은 신의 대리자. 하이엘프다.

  그렇게 소중한 그녀를 구출한 사람이니 당연히 귀햐게 대하는 것이다.

  엘프들은 병규를 하늘을 찌를 듯이 높게 솟은 고목으로 안내했다. 고층 빌딩에 비견될 만큼 거대한 고목은 멀리서도 확연히 느낄수 있을 정도로 범상치 않은 분위기를 풍기고 있었다.

  엘프들은 이 나무를 ‘신의 정원’이라 불렀다.

  병규는 엘프들의 안내를 받아 ‘신의 정원’에 올랐다.

  조금 오르니 동굴저럼 뻥 뚫린 곳이 나타났다. 천연적으로 생긴 공동은 바람이 지날 때마다 나직한 휘파람 소리른 냈다. 그 소리가 마음을 차분히 안정시켜 주는 것 같았다.

  카즈엘은 병규의 손을 잡은 채, 편편한 곳에 앉았다.

  엘프들이 막 따온 싱싱한 과일들을 가져다주었다. 형형색색의 탐스러운 과일들은 놀랄 만큼 향기로웠다. 과일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병규였지만 하나를 맛본 후로는 손이 바쁠 정도로 집어먹었다.

  어느 정도 배가 부르자 이번엔 차가 나왔다.

  접시 모양으로 접은 나뭇잎에 찰랑찰랑 담겨 나온 차는 싱그러운 아침이슬처럼 깔끔했다.

  “배가 고팠나 봐요?”

  병규가 먹는 모습을 가만 지켜보고 있던 카즈엘이 호호 웃으며 물었다. 병규는 조금 부끄러웠다. 손님으로 와선 정신없이 먹어 대기만 했으니.

  병규가 어색한 표정으로 뒷머리를 긁적이자, 카즈엘은 해맑은 미소를 보였다.

  “묻고 싶은 게 많아요.”

  카즈엘이 눈망울을 반짝이며 입을 열었다.

   

  “그 동안 어떻세 지냈어요?  어쩌다 요정의 숲까지 오게 된 거예요? 어깨에 있던 신성한 분이 안 보이시네요. 물룬 샤바 님도 잘 계시겠죠?”  일단 입을 연 카즈엘은 방금까지의 단아한 모습을 과감히 던져 버리고, 잠시도 쉬지 않고 질문을 던졌다.

  얼떨떨한 병규는 짧고 간단하게 그녀의 질문에 대답했다. 하지만 카즈엘은 집요했다. 병규의 설명이 부족하다 싶으면 몇 번을 물어서라도 만족할 만한 대답을 듣고야 말았다.

  많은 이야기가 오고 갔다.

  병규의 신상에 대한 질문이 가장 많았지만, 정작 그녀가 관심을 보인 것은 아이린 왕국의 정세였다.

  “반란이 일어나서 국왕이 죽고 마지막 남은 왕손인 공주는 목숨이 위태로은 상황이라니.”

  카즈엘은 적지 않게 놀랐다.

  병규는 그녀가 왜 이런 반응을 보일까 궁금해 여겼다.

  엘프들은 대체로 인간의 일에 무관심한 편이다. 엄밀히 말해 인간의 일뿐만 아니라 모든 세상사에 초탈했다.

  그런데 카즈엪은 유독 아이린 왕국의 정세에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 것이다. 

  병규의 의문을 눈치 챈 카즈엘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사실 얼마 전에 미네르바 님께서  제 작은 귓가에 은은한 속삭임을 주셨습니다.”

  “미네르바? 혹시 바람의 정령왕?”

  “네. 바람의 인도자시지요.”

  병규는 깜짝 놀랐다.

  하이엘프라는 존재가 다른 엘프들과는 달리 특별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설마 정령왕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나니.

  병규가 알고 있는 정령왕과 대화가 가능할 정도였다니.

  병규가 알고 있는 정령왕은 자연의 흐름을 총괄하는 존재다.

  불,물, 바람처럼 일상적이고 당연한 흐름이 정령왕이란 존재에 의해 정의되어지고, 비로소 의미를 가지게 된다. 

  자연이 존재감과 생명력을 가지고 있다니.

  과학이 눈부시게 발달된 세계에 살았던 병규에게 신과 자연이 살아있은 이드라센은 마냥 신기하기만 했다.

  “정령왕이 뭐라고 했어?”  “바람의 인도자께선 말씀하셨습니다. 왕국의 기운이 쇠하였도다. 축복의 등잔이 메말랐으니, 이제 약속의 때가 임하리라.”  노래를 부르듯 읊어진 카즈엘의 말.

  병규는 대강의 뜻을 짐작할 수 있었다. 왕국의 기운이 쇠하였단 소리는 당연히 아이린 왕국의 현재 상황을 일컫는 것일 것이다.

  다만 이해할 수 없는 것은 그 뒤 구절이었다. 축복의 등잔과 약속의 때라는 것은 대체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병규가 궁금함을 참지 못하고 질문을 던지자 카즈엘은 빙그레 웃으며 입을 열었다.

  “전설에 따르면 과거 아이린 왕국의 초대 국왕은 하이엘프와 사랑에 빠졌었다고 전해져요. 두 사람은 종족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혼인을 하였죠. 아이린 국왕은 하이엘프를 다정히 대해 주었고, 하이엘프는 그와 함께 세상의 모든 부정과 싸웠지요.”

  고요하고 잔잔하게 이어지는 음성.

  병규는 어느새 그녀의 아야기에 빠져들었다.

  “많은 시간이 흐르고,  마침내 아이린 국왕과 하이엘프는 북방의 어둠을 몰아내고 왕국을 건설할 수 있었지요. 하지만 왕국이 세워진 그때가 바로 그들의 슬픈 이별의 순간이기도 했어요.‘

  “왜?”  “마지막 싸움에서 아이린 국왕은 큰 상처를 입었어요. 그것은 영겁의 저주와 같아 그의 몸을 천천히 잠식해 들어갔지요.그 어떤 마법과 의술로도 그를 치료할 수 없었어요, 하이엘프는 그의 곁에 앉아 눈물을 떨구며 사랑하는 사람의 최후를 기다려야 했답니다. 마침내 마지막 순간이 다가왔어요. 그리고 당신을 만나 행복했노라고 말했지요. 하이엘프는 눈물을 흘렸어요. 세 방울의 눈물이었지요. 그리고 그 대가로 하이엘프는 그에게 세 가지 소원을 들어주었어요,”

  병규는 자연스럽게 아이린 국와의 마지막 소원이 무었이었을까 궁금해졌다.

  카즈엘의 말이 이어졌다.  

  “당시 국왕은 세 가지 소원을 들어 달라는 하이엘프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했어요, 그저 허망한 눈동자로 자신의 바람을 읊었을 뿐이죠. 그는 부서지는 목소리로 자신이 죽어 혼만 남으면 북방의 한기가 백성들을 괴롭히는 것이 보기 괴로울 것이라고 말했어요. 또 일찍 죽는 자신 때문에 그들의 어린 딸이 외로울까 걱정이라 했지요. 마지막으로 그는 하이엘프의 뺨을 어르며 긴긴 세월 당신이 혼자 남는 것이 가슴 아프다고 말했어요.”

  카즈엘의 말이 잠시 멈추었다.

  병규는 가만 눈을 감은 그녀에게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물었다.

  “국왕의 소원은 ..... 이루어진 거야?”  카즈엘은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네. 그의 소원에 따라 차가운 한기가 몰아치던 수도 유리스는 땅속에서 흘러나온 온천으로 말미암아 따뜻한 온기를 지닐 수 있게 되었으며, 그의 어린 딸과 후손들은 정령의 축복을 받게 되었지요.”

  온천이 솟은 소도 유리스,.정령의 축복을 받은 후손. 그리고 마나의 품으로 돌아간 하이엘프.

  이로써 아이린 국왕의 세 가지 소원은 모두 이루어졌다.

  “그런데 문제가 생겼어요.”

  이어진 카즈엘의 말은 이러했다.

  아이린 국왕과 하이엘프가 죽자, 이를 가엽게 여긴 미네르바는 아이린과 하이엘프의 소원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바람의 목소리로 전 세계에 알리고, 그 증표로 무녀를 내렸다.

  무녀는 대를 이어 가며 언약을 증명하는 역할을 수행해 나갔다.

  그런데 지금으로부터 300년 전, 12대째의 무녀가 갑자기 사라져 버렸다.

  왕국은 발칵 뒤집혔다.

  병사들을 풀고, 정보길드에 마법사까지 동원하며 무녀를 수소문했다.

  그러나 무녀는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안타까운 것은 무녀의 실종 이후 새로운 무녀가 나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초조해진 아이린 왕국의 국왕은 신전에 거금을 들여 앞으로의 일을 물었다.

  당시에 떨어진 신탁은 이러했다.

  ‘무녀는 오직 한 명. 결코 그보다 많지도, 적지도 않으리라.’

  신탁을 받은 국왕은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사라진 무녀의 행방은 알 수 없으나. 불상사로 죽든 늙어 죽든, 그녀가 죽으면 새로운 무녀가 탄생할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명은 비극적일 정도로 짧기 때문이다.

  국왕과 백성들은 무녀의 부재가 길어야 50년 정도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마치 신탁을 비웃기라도 하듯, 그후로 300년이 흐른 지금까지 새로운 무녀는 나타나지 않았다.

  무녀를 잃은 아이린 왕국은 조금씩 쇠퇴하기 시작했다. 제국의 영광마저 잃어버리고, 이젠 왕위마저 빼앗길 위기가 도래한 것이다.

  “무녀는 왜 나타나지 않은 거지?”  병규의 물음에 카즈엘은 작게 도리질을 했다.

  “알지 못해요. 그 후로 수차례, 왕이바뀔 때마다 신전에 이유를 물었지만 그때마다 대답은 세상에 무녀는 오직 한 사람뿐이라는 신탁이었다고 해요.”

  “흠.”

  병규는 손으로 턱을 감싼 채 생각에 잠겼다.

  무녀는 왜 사라진 것일까. 그렇게 사라진 무녀는 어딜 갔으며, 300년이 지난 지금까지 나탄나지 않는 것일까. 그리고 신탁의 뜻은 무엇일까. 설마 인간에 불과한 무녀가 300년이 넘도록 아직 살아 있다는 것일까?

  “모르겠다.”

  결국 병규는 포기했다. 단서가 있어야 추리라도 할 것인데. 그가 아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무녀에게 관심이 있으세요?”

  “아니. 그런 건 아닌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여서.”

  그랬다.     평소라면 남의 일이라고 대수롭지 않게 넘어갈 것인데, 이상하게 신경이 쓰였다.

  ‘에라,다른 세계의 일인데 나와 무슨 상관이 있을라고.‘

   머릿속을 헤집는 생각들을 털어 버린 병규는 이내 다른 생각에 빠졌다.

  “그런데 왜 정령왕이 인간도 아닌 너에게 그런 얘기를 해 준 거야?”  “하이엘프의 맹약은 영원한 구속력이 있어요, 엘프들은 약속을 지키기 위해 노력할 겁니다.”

  병규의 표정이 환해졌다.

  “그 말은 레종 공주의 편에서 필립 공작을 막겠다는 거야?”  현재 레종 공주의 세력은 필립 공작에 비하면 보잘것없을 정도다. 엘프들이 합류한다면 큰 힘이 될 것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그녀의 고개는 좌우로 흔들렸다.

  “엘프들은 인간들의 전쟁에 간섭할 수 없어요. 저희는 다만 레종 공주의 보호에만 관심이 있을 뿐이에요.”

  “그래.”

  병규는 시무룩한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의 얼굴을 가만 응시하고 있던 카즈엘이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하지만.... .”

  병규의 고개가 번쩍 들려졌다. 그의 검은 눈동자가 기대로 반짝이고 있었다.

  “하지만?”  병규의 눈을 보며 카즈엘은 곱게 웃었다.

  “바람의 인도자께서 전하신 말씀은 왕국의 위기에 대힌 것뿐만이 아니었습니다.”

  “,,,,,, .”  “순수하지 못한 자들이 만물을 어둡게 채색할 것이다. 어둠은 아이린에서 일어나 파도처럼 세상을 뒤엎을 것이다.”

  “!”  병규의 표정이 급격히 굳어졌다.

  카즈엘 역시 심각한 얼굴로 변했다.

  “바람의 인도자께선 자세한 말씀을 전하지 못하십니다. 중간계에 대한 직접적인 관여는 엄격히 금지되어 있습니다. 신탁이 불분명한 시구로 표현되는 것도 그러한 이유 때문입니다.”

  “순수하지 못한 자들이란 대체 누굴 뜻하는 걸까?”  “오랫동안 저희들은 숙의했습니다. 그리고 결론을 내렸지요. 순수하지 못한 것이라는 말과 어둡게 채색한다는 것, 우리는 이것이 마계에 대한 경계로 해석했습니다.”  카즈엘은 눈을 지그시 감았다.

  은은하게 찌푸려진 미간.

  그녀의 고뇌가 느껴졌다.

  “바람의 인도자께선 아이린과 세상이라는 말을 언급했습니다. 만약 바람의 인도자께서 하신 말씀이 마계에 대한 경고라면 분명 마계의 준동은 아이린 왕국에서부터 시작할 것입니다.”

  “음.”

  병규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계. 

  병규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마계. 병규도 이에 대해 알고 있는 말이 있었다.

  “사실 그것에 대해 나도 할 말이 있다.”

  몇 시간 동안 카즈엘과 대화를 나눈 병규는 모종의 약속을 하고 요저의 숲을 떠났다. 그를 기다리고 있는 와이번에 올라탄 병규는 곧장 트라우마로 향했다.

  레종과 글로리 후작들이 그를 반겼다.

  와이번들에게 먹이를 주러 간 사람이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으니 적잖이 거정되었던 모양이다.

  후원에 착륙한 병규는 곧장 레종 공주에게 달려갔다.

  “중요한 손님이 올 겁니다.”

  “네?”  레종은 갑작스런 병규의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 눈만 깜빡였다.

  그날 오후, 트라우마엔 200여 명의 엘프들이 찾아왔다. 

  병규가 말한 귀한 손님들이었다. 레종은 당황했다. 

  갑자기 엘프들이 찾아올 줄은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귀빈이 오셨군요.”

  눈치빠른 디스가 재빠리 나셔며 카즈엘릉 맞았다. 그는 한눈에 나이 어린 카즈엘이 엘프들을 이끌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챘다.

  귀빈실로 모시겠습니다.“  그녀의 말에 사람들은 대응할 방법을 찾지 못해 우왕좌왕했다. 그 누구도 엘프를 접대하는 방법을 제대로 알지 못했다. 엘프와 인간의 유대는 이미 오래전에 끊겼다. 그나마 아이린 왕국의 경우는 나은 편으로, 다른 나라에선 엘프와 아예 적대적인 관계에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성문 앞에 죽치고 있는 것도 그러니 일단 후원으러 얾기지요.”  병규의 제안으로 엘프들은 후원으로 향했다.

  누군가 지시를 한 듯,그새 간단한 천막이 놓여져 있었다.

  카즈엘이 자리에 앉자 맞은편에 레종이 착석했다.

  “저희들을 도와주세요.”  오는 동안 병규에게 대충 이야기를 들은 레종이 단도직입적으로 부탁했다.

 그녀의 말은 간단했지만 절실함만은 충분히 전해졌다.

  카즈엘의 표정이 굳어졌다.

  “대신 무엇을 주실 건가요.”

   “네?”

  레종의 두 눈이 크게 떠졌다.

  신의 아이, 숲의  자녀라고 불리는 성스러은 엘프가 조건을 걸다니.

  “다 인간에게 배운 것입니다.”

  살그머니 웃으며 멀을 건네는 카즈엘의 말에 레종은 가슴이 욱신 아파 왔다.

  “엘프.....  사냥을 금하겠습니다.”  카즈앨의 표정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아직 부족한 듯했다.

  레종은 눈을 감았다.

  엘프들에게 문가를 줘야 한다. 하지만 그녀는 가진 것이 없었다.

  뭔가 대단한 것을 약속할 수는 있다. 디스라면 엘프들에게 영토의 일부분을 넘겨줄지도 모른다. 영원히 침범하지 않겠다는 각서와 함께.하지만 그런 약속을 계속 지켜 나갈 자신은 없었다.

  인간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녀의 약속은 불과 100년도 가지 못할 것이다. 자신이 죽은 뒤, 후손들이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할 수 없다.

  인간을 일컬어 혼돈이라 뜻하는 것도 이런 이유다.

  길게 가야 100년에 불과한 세월.

  인간에겐 한 세대를 넘는 긴 기간이지만, 엘프들에겐 그리 길지 않은 시간이다. 결국 그들은 쉬이 약속을 저버리는 인간에게 분노를 느끼리라.

  눈을 감은 채 염두를 굴리던 레종이 카즈엘을 직시했다.

  “엘프 사냥을 금하겠습니다.”

  여전히 같은 제안이었다. 보는 병규가 답답하게 느낄 정도였다. 하지만 그 뒤로 한 마디가 덧붙여졌다.

  “온 힘을 다해서.”

  비로소 카즈엘의 표정이 밝아졌다.

  그렇게 엘프들이 레종 공주의 진영으로 합류하게 되었다. 엘프들은 부정한 존재들과 싸우는 한, 아낌없이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땅거미가 어스름하게 질 시각, 병규와 호랭이는 날쌘 동작으로 성을 빠져 나왔다.

  성문엔 많은 병사들이 보초를 서고 있었다.

  엘프가 트라우마에  합류한 역사적인 날이라 조금 들뜬 분위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병사들은 여전히 긴장을 늦추지 못하고 있었다. 언제 필립 공작의 토벌군이 몰아닥칠지 모르기 때문이다.

  하지만 병규와 호랭이는 눈을 부릅뜨고 있는 보초들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갔다. 둘의 동작은 너무도 빠르고 은밀하여 보통 사람에겐 한 줄기 바람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성을 빠져나간 둘은 잠시 붉은 대지 위를 달렸다.

  얼마쯤 달렸을까.

  붉게 펼쳐진 모래사장이 나타났다.

  병규에겐 추억이 깃든 곳이었다.

  이곳에서 살렘과 겨루었으며, 글로리 후작과도 겨루었다.

  둘 다 소드마스터였고, 두 번의 대결 모두 패배로 끝났다.

  “준비됐느냐?”

  모래사장 한가운데로 걸음을 옯긴 호랭이가 물었다. 병규는 무거운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너의 부족한 것을 채워 주겠노라고.

  한밤에 몰래 둘만 빠져나온 것은 그 때문이었다.

  스르르.

  미끄러지듯, 붉은 모래 위를 거닐던 호랭이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내가 가르칠 것은 크게 세 가지다. 숨 쉬는 법, 걷고 뛰는 것, 그리고 몸을 쓰는 법.”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걷고 뛰는 것은 오직 세 걸음만 배우면 된다.”

  호랭이는 이같이 말함과 동시에 차분한 걸음으로 붉은 모래 위를 걸었다.

  “일 보에 들을  넘는다.”

  느긋하게 걷던 발걸음이 어느새 수십 미터를 이동해 있었다.

  느린 듯 빠르다는 말이 바로 이런 것이 아닐까.

  짧고 빠르게. 그리고  은밀하게.

  마주 보고 있던 병규는 그 오묘한 변화에 깜짝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일 보는 바로 신묘한 보법에 대한 것이었다.

  호랭이의 말이 이어졌다.

  “이 보에 산하를 굽어본다.”

  호랭이가 돌연 안개처럼 스르르 흩어졌다.

  팔락팔락.

  병규의 귀가 예민하게 움직였다. 그제야 그는 하늘로 시선을 옮겼다.

  호랭이는 그곳에 있었다.

  바람에 나부끼는 낙엽처럼 가볍게 허공을 밟고 있었다. 여전히 느긋하고 표홀했지만 병규의 눈을 속일 정도로 재빨랐다.

  병규는 허공 높이 솟은 호랭이를 보고 이 두 번째 움직임이 몸을 가볍게 하는 재주와 관련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삼 보에 하늘을 그린다.”

  호랭이의 발이 구름을 밟듯 두둥실 가볍게 움직였다. 처음은 그렇듯 느리고 자연스러웠다. 그러다 돌연 변했다.

  우르릉 내리치는 번개처럼 떨어지더니, 활공하는 새처럼 가볍게 날아오른다.

  앞선 두 번의 발걸음이 가볍고 표홀했다면, 이번엔 변화가 복잡하고 화려했다. 짧은 순간 몇 번이나 몸을 뒤집는지 헤아리지도 못할 지경이다.

  모래를 차고, 달빛 속에 몸을 숨긴다.

  때로는 날이 선 죽창처럼 나아가고, 때로는 가벼운 비도처럼 춤을 춘다.

  허허실실(虛虛實實).

  움직임만으로 상대를 속인다. 불리한 상황을유리하게 만든다.

  지형을 이용하여 나를 감춘다.

  좌로 소리치고, 우로 나아간다.

  적을 속여 깊이 끌어들인다. 단점은 내보이고 장점을 발휘한다.

  들판을 깨끗이 거둬들이고,보루를 지킨다. 적이 나아가면 나도 나아간다.

  고수를 상대하는 법, 다수를 당황케 하는 법.

  단지 세 걸음만 보여 준다는 호랭이의 움직엔 병법의 모든 것이 고스란히 녹아 있었다.

  달밤에 녹아드는 호랭이의 아름다운 움직임.

  병규는 홀린 듯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보법과 경신에  이어 호랭이는 선술을 가르쳤다.

  선술이란 도술과 달리 보통 사람들이 체술이라 부르는 것에 가까운 무술이었다.

  다만 움직임에 자연의 이치가 녹아 있다 하여 호랭이는 이를 선술이라 일컬었다.

   이번에도 호랭이의 가르침은 간단하고 직설적이었다.

   “산들바람처럼 부드럽고.”

   “태풍처럼 격렬하게.”

  “질풍처럼 거침없고.”

  “높바람처럼 도도하게.”

  오직 이 네 구결이 전부였다.

  얼핏 생각하면 간단하고 당연한 소리인 듯하다. 하지만 막상 그러한 구결들이 호랭이의 손과 발에서 펼쳐지는 순간, 병규는 별천지 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전혀 다른 경지, 산 너머의 산, 다시 그위에 펼쳐진 하얀 구름을 경험한 기분이다.

  호랭이의 손이 그림을 그리듯 흐느적 움직일 때마다, 대기는 흥얼흥얼 콧노래를 불렀고, 발그림자가 달빛과 어울릴 때는 대지가 신명난 장단을 터트렸다.

  그가 성은 낼 땐, 바람이 성난 들소가 되어 들판을 가로 질렀고, 그가슬퍼할 땐, 안개가 구름이 되어 구슬픈 비를 뿌렸다.

  호랭이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사물이 울고 웃었다.

  마치 주위의 모든 것이 호랭이와 하나가 된 듯 착각이 될 정도다.

  호랭이는 계속 춤을 추었다.

  연못의 물을 담아 올리듯, 두 손을 모아 느릿느릿 좌우로 펼쳐 냈다. 한 손은 하늘을 담고, 다른 한 손은 땅을 보았다.

  “네 장점을 버릴 생각은마라.”

  두 손을 펼쳐 세상을 담아 가며 그윽하게 말했다.

  “단점은 감추고, 장점은 부각시켜라.”

  달빛을 닮은 호랭이의 서늘한 두 눈이 병규를 향했다.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은 각자 조금씩 다르다. 날 따라할 필요는 없다. 네게는 네게 맞는 것이 있을 테니. 넌 그것을 찾아라. 내가 가르칠 것은 네 것을 찾는 방법이다.”

  마침네 연무가 끝났다.

  하지만 병규는 멍한 눈으로 호랭이를 쳐다만 볼 뿐 입을 열지 못했다.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감동? 감격?

  목까지 차오른 벅찬 희열이 그의 온몸을 부르르 떨리게 만들었다. 마치 생애 최후의  불꽃을 본 사람처럼 가슴이 두근거리고, 머릿속이 텅 비어 버린 듯하다.

  다만.... .

  한가지만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그는 지금 몇 단계나 위의 별천지를 본 것이다.

  ‘내가 할 수 있을까?’

  과연 자신이 다다를 수 있을지 걱정스러울 정도로 그 경지가 높았다.

  불끈!

  병규는 무의식중에 두 주먹을 불끈 쥐었다.

  ‘한다! 반드시!’

  강렬한 열의가 그의 두 눈에서 활활 불타 올랐다.

  그렇게 병규의 수련이 시작되었다.

  

  병규와 호랭이가 한참 수련에 열중하고 있을 무렵, 그리 멀지 않은 곳에서 한 사람이 그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흐음.”

  나직한 침음성이 그의 입술을 비집고 흘러나왔다.

  “아쉽게 되었군.”

  쩝쩝 입맛을 다셨다.

  아쉬운 듯 한숨을 쉬는 이. 그는 다름 아닌 글로리 후작이었다.

  병규의 수련.

  본래는 그가 도와주려 했었다. 그래서 이 오밤중에 병규를 찾아 이 곳까지 나온 것이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병규에겐 이미 사부가 붙어 있었다.

  그것도 끝을 견줄 수 없는 엄청난 실력자가.

  “하지만 어디서 저런 고수가 나타난 것일까.”

  춤추듯 부드럽게 펼쳐지는 생소한 무술. 하지만 한없이 하늘거리는 움직임에서 만물을 포용하는 자연스러움이 배어 있었다. 

  “알 수 없는 일이군.”

  그가 루멘 백작에게 보고를 받기론, 호랭이는 뛰어난 마법사여야했다. 그런데 지금 본 모습은 뛰어난 고수가 분명했다. 그것도 소드마스터를 초월한 그 이상의 경지에 도달한 고수.

  간혹 세상에 마법과 검 양쪽으로 뛰어난 재능을 보이는 자가 있기는 하다.하지만 그런 자들의 수준은 대체로 어정쩡한 경지에 머무르기 마련이다. 

  마검사중 가장 높은 경지를 이루었다고 하는 자조차 고작 4서클의 마법에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검술에 불과했다.

  그런데 지금 그가 본 백발의 청년은 그러한 통속을 산산히 부수는 가공할 경지를 보여 주었다.

  “허허. 세상엔 무수한 고수들이 있는 모양이군.”

  너털웃음을 터트린 글로리 후작은 조용하 자리에서 물러났다. 유감스럽게도 이곳에 그의 자리가 없었다.

  3일이 흘렀다.

  여전히 달빛이 흐르고, 여전히 붉은 모래 바람이 장막처럼 출렁이는 곳에서 호랭이와 병규는 수련에 열중했다.

  그 모습 자체는 첫날과 그다지 변한 것이 없었다.

  하지만 단3일 만에 선술을 가르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 호랭이의 표정은 크게 달라져 있었다.

  “맙소사.”

  호랭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눈부신 백발을 희날리고 선 신선의 눈은 병규의 움직임에 고정되어 있었다.

  마치 잘 만든 연극을 보는 것처럼 부드럽게 이어지는 그의 연무를 취한 듯이 보고 있었다.

  완벽했다. 

  하지만 달랐다.

  지금 펼치고 있는 연무는 분명 호랭이가 전수한 선술이 틀림없을 진대, 동작 하나하나, 손끝에서 발끝까지.

  지르고 펼치고 휘날리는 움직임들 모두가 달랐다.

  호랭이는 자연과 동화되어, 부리고 따르고 본받았다.

  똑같은 선술을 배웠음에도 병규의 기운은 극단적으로 달랐다.

  깨고 부수고 가른다.

  그가 손발을 흔들 때마다. 항거할 수 없는 돌풍이 몰아쳤다.

  바르게 순응하고, 부드럽게 풀어놓는 것이 호랭이의 선술이라면, 병규는 거역하고, 후리고,강제했다.

  호랭이와 전혀 다른 기세와 운용이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첫날은 분명 같았다.

  호랭이가 전수한 대로, 마치 거울을 보듯 그대로 따라 했다.

  이튿 날은 조금 변했다.

  구결을 외우고, 그걸 체득해 가는 과정에서 마치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은 것처럼 부자연스러움이 구석구석에서 발견되었다.

  이유는 간단했다.

  호랭이의 선술은 호랭이를 위한 것이다. 병규에겐 어울리지 않는 것이다. 호랭이도 누누이 이 점을 강조했다.

  “바닥은 똑같이 고르되, 반석 위에 오르는 처마의 모양은 제각각인 법이다. 너와 나는 다르다. 선술의 근본은 취하되, 네게 맞는 것만 취해라. 그리고 잊어라. 갈고 추리고 버려라.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것이 바로 너의 선술인 것이다.”

  3일째, 오늘.

  모든 것이 변해 버렸다.

  연무를 하는 그의 움직임에 더 이상 호랭이의 선술은 남아 있지 않았다. 부드럽고 순응하는 기세는 병규에게 맞지 않았다.

  거칠고 광폭했다.

  황당한 것은 광기마저 흐르는 그의 움직임에 호랭이가 전수한 선술의 진수가 녹아들어 있다는 것이다.

  병규의 연무가 끝났을 때, 호랭이는 멍한 눈으로 한마디를 내뱉고야 말았다.

  “너 인간이 맞긴 한거냐?”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글쎄요.

  호랭이가 선술을 가르친 지, 이제 겨우 3일.

  보통사람 같으면 신묘한 보법을 따라한답시고 아장아장 모래벌판 위를 뒹굴고 있어야 할 시기다.

  한데 병규는 이미 호랭이가 전수한 세 가지 보법과 네 가지 구결을 거의 모두 섭렵한 상태였다.

  보통사람이 기초만 10년 가까이 걸리는 일을 병규는 단 한 번에 해 냈다.

  단지 한 번 본 것뿐인다, 그것으로 끝이었다. 

  호랭이는 첫날에 단 한 번 선술을 시전했을 뿐, 그 이후로 다시는 그의 앞에서 시범을 보일 필요가 없었다.

  그 한 번으로 족했기 때문이다.

  병규는 복잡하기 이를 데 없는 호랭이의 움직임을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모조리 외워 버린 것이다.

    불과 몇 시간 후, 병규는 호랭이가 보였던 움직임을 그대로 따라 해 보였다.

  “미치겠군.”

  그날 부르짖었던 호랭이의 경악성이었다.

  몇 시간 만에 선술의 모양이 잡혔다. 남은 것은 구결의 운용과 조화. 그리고 깨달음.

  이틀째에 부조화를 깨달았다.

  그리고 3일째, 불편한 것을 버리고, 자신의 것을 찾았다.

  단 3일 만의 변화였다.

  이쯤 되면 제아무리 담담한 호랭이라도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이런 사기 같은 녀석!!”

  “허허.”

  호랭이가 병규의 놀라운 성장을 질투하고 있을 때, 밤공기를 흔들며 낮은 헛웃음 소리가 들려왔다.

  어둠 속을 헤치며 불청객이 나타났다.

  “오늘은 웬일로 모습을 나타내십니까?”

  병규는 놀라기는 커녕 오히려 불청객을 향해 빙긋 웃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글로리 후작은 속으로 헛바람을 삼켰다.

  “내가 숨어서 보고 있는 것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로군.”

  병규는 가만 웃기만 했다. 기이한 눈으로 잠시 그를 보던 글로리 후작은 호랭이에게로 슬쩍 시선을 옮겼다.

  쏟아지는 달빛, 븕은 모래사장,그리고 그 위에 그림처럼 우두커니 서 있는 백발의 청년.

  그는 오히려 병규보다 더 태연했다.

  “허허.”

  후작은 다시금 헛웃음을 삼켰다.

  스릉. 

  붉은 모래 위로 걸음을 옯긴 글로리 후작은 돌연 검을 뽑았다. 달빛을 받은 싸늘한 검광이 밤공기를 더욱 차갑게 만들었다.

  “어떤가?”  대련을 해 보자는 의미였다.

  병규는 빙그레 웃으며 그의 앞으로 나섰다. 안 그래도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보고 싶었다. 과연 얼마나 늘었을까.

  모래를 머금은 찬바람이 일렁일렁 두 사람 사이를 지나갔다.

   검을 빼든 글로리 후작은 착 가라앉은 눈으로 병규를 응시하고만 있었다.

  불과 3일이다.

  달라졌대 봐야 얼마나 큰 성과가 있었겠는가. 속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글로리 후작은 감히 병규를 태만히 대하지 못했다.

  기세부터가 달랐다.

  전에는 조급증이 느껴졌다. 어떻게든 수를 짜내려고 안달하는 모습이 역력했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두 팔을 축 늘어트린 채, 기다린다. 입가에 머금은 미소엔 여유까지 보인다.

   검을 빼들고 잠시 대치햐던 후작의 눈가에 살짝 주름이 그려졌다. 

  스르릉.

  후작은 검을 빼낼 때와 마찬가지로 돌연 검을 검집으로 수습했다. 병규의 눈에 이채가 스쳤다.

  “왜 검을 다시 넣으시는 거죠?”

  “아무래도 소용없는 일인 것 같아서 말일세. 허허허.”

  한바탕 시원한 너털웃음을 터트린 후작은 미련 없이 뒤돌아 사라져 갔다.

  그의 뒷모습을 지켜보던 병규는 호랭이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가 왜 그냥 가는지 모르겠어요.”

  “왜? 붙어 보고 싶었냐?”  “솔직히 그래요.”

  병규는 자신의 실력을 확인해 보고 싶었다. 그런 상대로 글로리 후작으니 훌륭하다 못해 넘쳤다.

  호랭이는 고래를 설레설레 저었다.

  “쓸데없는 짓이다. 진정한 고수는 굳이 손속을 겨루지 않고도 상대의 실력을 가늠할 수 있는 법이지.”

  호랭이는 재차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병규의 성장은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너무 많았다. 가르치는 사람이 허탈할 정도니, 숨어서 지켜보던 글로리 후작은 얼마나 놀랐을까.

  하지만 병규는 여전히 만족하지 못하고 있었다.

  눈을 감고 생각해 본다.

  확실히 선술은 소드마스터와 같은 고수를 상대하기에 적합하다.

  그러나 지금 이대로 살렘을 상대할 수 있는 것일까?

  살렘이 평범한 인간아라면 가능하다. 하지만 그는 인간이 아니다. 떨어진 팔을 아무렇지도 않게 머리 위에 붙이는 괴물인 것이다.

  과연 어떤 힘을 숨기고 있는 것일까.

  문득 갈증이 일었다.

  목이 탈 만큼,

  그것은 보다 높은 수준에 대한 갈망이자 욕망이었다.

  허나 방법이 없었다.

  호랭이의 선술은 이미 익혔고, 소드마스터인 글로리 후작의 검술은 지금 상황에선 그다지 도움이 안 될 것이다.

  그렇다고 마법이나 도술을 배울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이번에 확실히 알게 된 것이자만, 깨달음이 필요한 공부는 능력복제술사인 그로서도 많은 시간을 필요로 한다.

    마법이나 도술을 처음부터 차근차근 일히기엔 시간이 촉박했다.

  그리고 왜인지 복잡한 공부를 하고 싶지 않기도 했다. 무언가 다른 길이 있을 것 같은, 그런 기분이다.

  모든 수단은 막혔다. 이대로 기초 수련이나 하면서 때를 기다려야 할까?

  ‘아니.’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방법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다.

  그만이 할 수 있는 것,

  남들은 전혀 상상도 못할 수단이 아직 남아 있기는 했다.

  ‘해볼 수밖에 없겠지.’

  병규는 그 동안 스스로 금기했던 일에 과감히 도전하기로 마음먹었다.

  호랭이와 함께 성으로 복귀한 병규는 여관 ‘트라우마의 새벽’에서 생각지도 못한 인물과 맞닥뜨리게 되었다.

  공주 일파의 사령탑 역할을 하고 있는 디스 백작이 어깨를 축 늘어트린 채. 여관 문은 나서는 것이었다.

  “디스.”  “아, 변기 군.”  병규가 부르자 디스는 멋쩍은 표정을 보였다. 이곳에서 그를 만난 것이 당황스러운 것이다.

  “이 늦은 시간에 웬일에요?”  디스는 유난히도 깔끔한 것을 좋아하는 사람이다. 평소 같았으면 뒷골목의 후줄근한 여관 따위는 절대로 찾지 않을 것이다.

  “볼일이 있어 잠시 들렀네,”  디스는 병규의 시선을 외면하며 쓸데없는 말로 둘러댔다. 그러더니 허둥지둥 서둘러 돌아갔다.

  “무슨 일이지?”  병규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여관으로 들어갔다.

  그와 호랭이가 방으로 들어가자, 여느 때처럼 퀴니와 샤바가 뒹굴고 있었다.

  ‘한 사람이 더 있어야 하는데.’

  샤바가 있는데, 그녀가 없는 건 말이 안 된다.

  병규는 쓰윽 방 안을 살폈다.

  역시나 한쪽 구석에 무릎을 모은 채 앉아 있는 마그네트가 보였다. 그녀는 옷소매를 잘근잘근 씹으며 퀴니를 노려보고 있었다. 

샤바와 재미있게 놀고 있는 퀴니에게 질투가 나는데, 복수할 방법이 없다는 표정이다.

  병규는 속으로 쿡쿡 웃었다.

 천하의 드래곤이 저런 꼬락서니라니.

  새삼 퀴니와 샤바가 대단하다는 생가가이 들었다. 세상에 누가 드래곤을 저렇게 농락할 수 있을까.

  “주인님,샤바.”

  “변기!”

  샤바와 퀴니가 눈을 반짝이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잠깐 나갓다 온 것뿐인데, 다들 몇십 년 만에 본 것처럼 얼룩을 비비고 난리도 아니었다.

  “쯧쯧. 넌 어째 장가도 안 간 녀석이, 애는 벌써 둘이나 달고 있냐? 그래가지고 나중에 장가나 갈 수 있겠어?”

  샤바와 퀴니에게 둘러싸인 병규를 보고 호랭이는 쯧쯧 혀를 찼다.

  “흐음.”

  병규의 얼굴이 심각해졌다.

  생각해보니 정말로 애 들 딸린 홀애비 신세가 아닌 가. 그때 퀴니가 그의 소매를 톡톡 당겼다.

  “걱정 마 변기는 내거니까 내가 책임질게”

  “하하. 그거 기쁜걸?”  병규는 퀴니를 두 손으로 덜렁 들어올려 뺨을 비볐다. 그 모습을 감 지켜보던 호랭이가 다시금 혀를 쯧쯧 찼다.

  “아서라. 어린아이가 농담을 한 것 가지곤 헤실거리기는. 원조교제로 잡혀가고 싶냐?”  “에이, 저도 농담인건 알아요.”

  병규는 피식하고 실없이 웃었다. 하지만 그는 몰랐다. 순산 퀴니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어 가던 것을.

  그녀는 진심이었던 것이다.

  “주인님. 주인님. 샤바.”

  샤바가 그의 소매를 잡아당기며 불렀다.

  “왜?”

  “방금 전에 디스가 왔었어여. 샤바.”

  “여기 왓었어?”  “네. 샤바. 퀴니를 보러 왔어요. 샤바샤바.”

  병규는 퀴니를 돌아보았다. 퀴니는 뭐가 불만인지 볼을 부풀린 채 뚱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그의 소매를 꼭 붙들고 있는 모습이 여간 귀여울 수 없었다.

  “그가 뭐라고 하던?”  병규가 퀴니에게 물었다.

  “내 능력을 빌려 달래.”

  “무슨 능력?”  “왕국을 위해서 몬스터들을 부려 달래.”  “음. 역시.”  철저하게 계산적인 디스가 퀴니에게 찾아왔다는 말을 듣는 순간부터 능히 짐작하고도 남은 일이다.

  문득 퀴니의 대답이 궁금해졌다.

  디스라면 아마 거절하기 힘든 제안을 해 왔을 것이다. 필요한 것이 있다면 공주까지 놀라고도 남을 정도로 과감해지는 사람이 바로 그였다.

  “그래서 뭐라고 대답했니?” 

  병규의 물음에 퀴니는 뿌~~ 하고 볼을 부풀렸다. 상당한 불만이 쌓인 모양이다. 그녀 대신 샤바가 대답했다.

  “퀴니는 싫어.메롱~~이라고 했어요, 샤바.”

  “뭐?”

  “푸하하하.”

  기상천외한 답변에 병규는 멍한 얼굴이 되었고, 호랭이는 침대위에서 굴러 떨어졌다.

  설마 진지로 똘똘 뭉진 디스에게 ‘메롱’이라고 대답했을 줄이야.

  지극히 퀴니다운 엉뚱함이었다.

   “후후, 왜 그렇게 대답했는지 이유가 궁금한 걸?”

  “나 그사람 싫어.”

  퀴니는 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왜  싫어?” 

  병규는 의아했다. 퀴니는 디스와 만난 적도 거의 없다, 그런데 왜 싫어하는 것일까.

  디스는 꽤 준수한 편이라 괜히 미움 받을 얼굴도 아니었다.

  이유를 물으니 퀴니는 짧게 대답했다.

  “그 사람 변기를 속이고 괴롭혔잖아.”

  “...... .녀석.”

  병규는 피식 웃으며 퀴니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허망하군.”

  달아나듯 ‘트라우마의 새벽’을 벗어난 디스는 눅눅한 뒷골목에 등을 기대고 한숨을 내쉬었다.

  허탈했다.

  어깨가 축 쳐지고 반듯하게 서 있을 기력도 없었다.

  요즘 들어 뜻대로 되는 일이 아무것도 없는 것 같았다. 깔끔한 것을 즐기는 그가 굳이 뒷골목의 여관을 찾은 이유는   단 하나, 퀴니를 만나기 위해서 였다.

  수많은 오크들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그녀의 능력, 병력이 부족한 레종 공주에겐 꼭 필요한 인재다.

  결국 디스가 나섰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꽤 그럴듯한 조건을 제시했다.  하지만 보기좋게 거절당했다. 능력을 빌려달라는 말에 퀴니는 베~~ 하고 혀를 내밀었다.

  “싫어.”

  그녀는 디스를 미워했다. 전에 병규가 그에게 배신당했었다는 얘기를 샤바에게 들었기 때문이다.

  깨끗하게 거절당한 디스는 참담함에 무릎을 꿇었다.

  아무리 노력해도 자신은 공주에게 힘을 실어 줄 수 없는 게 절망스러웠다.

  갑갑함이 일었다.

  힘이, 조금만 더 능력이 있다면...... .

  한때는 스스로를 뛰어나다고 생각한 적도 있었지만, 연이은 좌절에 의지가 많이 꺽였다.

  좌절하던 그는 잠시 후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비록 지금 힘이 없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가진 게 없는 것은 아니다. 힘이 없으면,머리로 승부한다.

  계략을 꾸미면 된다.

  빛이 있으면 어둠도 필요한 법.

  그는 스스로 공주의 어둠이 되기로 다짐했다.

  트라우마의 뒷골목으로 총총히 사라지는 디스의 그림자가 음울한 달빛을 받아 길게 늘어졌다.

  토마스는 트라우마 소속으로 와이번들의 관리를 맡은 병사다.

  원래 그는 성문을 지키는 보직이었으나, 최근 검은 머리의 청년이 반란군의 비밀병기인 와이번들을 한꺼번에 강탈해 오는 바람에 지금의 일을 맡게 되었다.

  와이번들을  처음 맡게 되었을 때의 심정은 공포 그 자체였다.

  하긴 그렇개 느낀 게 무리도 아니었다.

  그가 기억하는 와이번은 짐수레에 매달린 말을 통째로 낚아채는 공포스런 몬스터에 대한 기억뿐이었다.

  하지만 그는 현재 자신의 맡은 바 일에 대해 흡족해하고 있었다.

  와이번들은 생각 외로 얌전했다.

  오히려 말보다 다루기가 쉬울 정도였다.

  만약 이런 그의 생각을 바호크 공국의 드래곤나이트시종들이 읽기라도 한다면 택도 없는 소리라며 방방 뛰었을 것이다. 그만큼 와이번은 난폭하기로 소문이 난 몬스터이기 때문이다.

  부모처멀 돌봐 주던 주인을 잡아먹는 일도 비일비재하다.

  하지만 유독 트라우마의 와이번들만은 그런 소문이 무색할 정도로 얌전했다.

  검은 머리의 청년 덕분이다.

  ‘이름이 아마 변기라고 했었지?’

  그가 몇 마디 하면, 와이번들은 길들여진 강아지처럼 금세 순해졌다.

  와이번을 마음대로 다루는 그의 신비한 능력에 대해 병사들 사이에선 이러저러한 말들이 많이 돌았다.

  더러는 그가 잊혀진 대륙의 현자라고도 하고, 더러는 사악한 음모를 꾸미는 네크로멘서라고도 했다. 심지어 포리모프한 드래곤이나 유희 나온 신이라는 소문까지 더해졌을 정도다.

  진실이 무엇이건 간에 덕분에 토마스처럼 와이번들의 뒤치다꺼리를 하는 병사들은 다른 보직보다 훨씬 편하게 근무할 수 있게 된 것만은 사실이다.

  “날이 밝는구먼.”

  하늘이 파랗게 물들고 있었다.

  해 뜨는 광경을 지켜보던 토마스는 터덜터덜 다시 걸음을 옮겼다. 발을 조금 서둘러 놀렸다.

  날이 완전히 밝기 전에 와이번의 우리를 청소해야 한다. 부지런히 해야 미네르바 기사단의 훈련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와이번의 우리에 거의 도착했을 즈음, 토마스는 기이한 소리를 들었다.

  끙끙~~길고 낮게 우는 짐승의 울음소리.

  그것은 와이번의 울음이었다.

  “무슨 일이 있는 건가?”  토마스의 발걸음이 빨라졌다.

  성주의  저택 후원에 당도했을 때, 십여 명의 병사들이 한 와이번의 우리에 몰려 있는 것이 보였다. 병사들은 모두 토마스처럼 와이번의 관리를 맡은 병사들이었다.

  “무슨 일이야?”

  토마스가 몰려 있는 병사들 중 한 명에게 물었다.

  “와이번 한 마리의 상태가 이상한 것 같아.”

  “그거 큰일이군.”

  와이번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당연히 관리하는 관리병에게 책임을 묻게 된다. 그래서 다들 이렇게 모여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다.

  토마스도 걱정이 되었다.

  “어디가 잘못된 거야? 뭐라도 잘못 먹은 거 아냐?”  “모르겠네. 특별히 먹이 때문인 것 같지는 않은데. 아까부터 목을 잡고 끙끙거리더라는구먼.”

  “목?”

  토마스는 눈을 지그시 내려 감았다 다시 치껴뜨며 끙끙거리는 와이번을 살렸다. 와이번은 고개를 축 늘어뜨린 채, 날게로 목 부위를 가리고 있었다.

  “대체 뭣 때문에 저러는 거야?”

  답답해진 토마스는 대담하게도 끙끙거리고 있는 와이번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병사들이 화들짝 놀라며 말렸지만, 간이 커질 대로 커진 근 와이번의 품속으로 쓱 고개를 밀어 넣었다. 

   그리고 잠시 후, 그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아닛! 어떤 미친 자식이 와이번의 목을 문 거얐!!!”

   놀랍게도 와이번의 목엔 사람의 이빨 자국이 선명하게 나 있었다.

  용감한 병사 토마스에 의해 밝혀진 ‘와이번의 목을 물어뜯은 미친 놈팽이 사건’은 곧 상부에 보고되었다. 하지만 심의를 거칠 것도 없이 흐지부지되고 말았다.

  도대체 말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상부에서 하달된 대답이었다.

  강철보다 더 단단하여, 화살로도 뚫기 어렵다는 와이번의 표피를 사람이 물어뜯었다는 것도 말이 안 되자만, 세상에 어떤 미친 작자가 와이번의 목을물었겠는가. 또 물리는 동안 와이번이 가만히 있었을 리도 만무하다.

   결국 한 여름밤의 괴담처럼 병사들 사이를 횡행하던 ‘와이번의 목을 물어뜯은 미친 놈팽이’사건은 헛소리로 치부되어 잊혀지고 말았으며, 와이번의 목에 난 인간의 이빨 자국과 같은 상처는 단순한 피부병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사건이 일어나기 전날 밤, 병규가 와이번들의 우리에 잠시 들렀었다는 의문이 제기되긴 했지만, 유야무야 묻혀 버리고 말았다.

  과연 와이번의 목에 난 사람의 이빨 자국은 단순한 피부병일까?  진실은 오직 하늘과 ‘트라우마의 새벽’ 뒷골목에서 꺼억 하고 트림을 토하는 병규만이 알 뿐이다.

  “꺼억!”

  밤길을 걷던 병규는 거하게 트림을 했다.

   “거 달짝지근하네.”

  비린내가 많이 날 것 같았던 와이번의 피는 예상과 달리 달았다.

  “너무 많이 먹었나? 기분이 묘하네.”  긴장이 풀어지고, 기분이 왠지 들떴다. 

  자신도 모르게 팔을 과장되게 흔들며 콧노래를 흥얼거렸다.

  병규는 몰랐지만 그가 느끼고 있는 증상들은 술을 먹었을 때의 반응과 비슷했다.

  “와이번은 어떤 능력을 줄까.”

  병규는 잔뜩 기대되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강해지기 위해 와이번의 피를 먹었다.

  몬스터의 피를 찾다니, 예전이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다. 괴물의 피를 먹고 변하는 자신의 신체를 혐오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이번엔 그가 직접 몬스터의 피를 찾은 것이다.

   이런 심경 변화는 마계의 오우거 피를 마셨을 때부터다.

  그 이후로 병규는 많은 것이 변했다. 비록 겉으론 드러나지 않았지만 머리도 좋아졌고, 성격도 적극적으로 바뀌었다.

  하지만  무엇보다 그에게 큰 영향을 미친 변화는 자신의 능력에 대한 믿음이었다.

  몬스터의 피를 먹어도 신체는 변하지 않는다.

  내부적으로는 어떠한 변화가 있더라도, 겉으로는 본래듸 모습을 그대로 유지한다. 길게 늘어나는혓바닥처럼예외인 것도 있지만, 그마저도 스스로 제어할 수 있으니 상관이 없다.

  왜 이런 믿음이 생긴 것인지는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추측에 불과한 믿음을 그는 확신했다.

  그리고 이런 믿음이 병규를 더욱더 적극적으로 만들었다.

  와이번의 피를 마실 수 있었던 것도 이런 믿음이 큰 작용을 했다.

  그래서 몬스터의 피를 먹었음에도 두려움보다는 새로운 능력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기대가 생기는 것이다.

  많이 늦은 밤이다.

  구름마저 많아 더더욱 어두웠다.

  흠짓. 

  흥얼흥얼 노래를 부르며 여관으로 돌아가던 병규는 무언가에 놀란 듯, 발을 멈추었다.

  피부를 찌르는 이 날카로운 느낌.

  ‘살기다.’

  누군가 자신을 노리고 있다.

  그런데 이 기세, 굉장히 익숙한 것이었다.

  하지만 결코 좋은 추억은 아니다.

  기억하고 싶지 않지만 뼛속 깊이 각인되어 잊혀지지 않는 차가운 냉기, 서러울 정도로 분한 감정이 치솟았다.

  병규는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

  으슥한 이층 건물 사이로 한 사내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차가운 안광이 어둠 속에서도 냉소 어린 한광을 발산하고 있었다.

  “오랜만입니다.”

  어둠을 즐기듯 천천히 걸어 나오는 그.

  사내를 본 병규의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살렘!”

  병규의 목구멍에서 음습한 음성이 새어 나왔다.

  쿵.

  망치로라도 얻어맞은 듯, 둔한 충격이 뇌리를 흔들었다.

  두근두근.

  심장은 당장이라도 터질 듯이 방망이질 쳤다.

  살렘을 보자마자 병규의 신체는 과민한 반응을 보였다.

  “......... 잠이 확 깨는군.”

  살렘은 굳어 있는 병규의 표정에  히죽 웃었다. 그리곤 연극배우가 장황한 대사를 떠들 듯 과장되게 주절거렸다.

  “쿠쿠, 안타까운 일이군요. 자고로 밤은 안락과 평안의 시간입니다만. 제가 불면의 고통을 당신께 선사한 꼴이 되고 말았군요. 쿠쿠쿠.”

  “..... .”

  병규는 대답대신 슬며시 요수의 발톱을 꺼냈다.

  가슴이 타는 것만 같다.

  살렘과의 재회는 그 동안 애써 잠재워 둔 전의를 당장 일깨웠다.

  한 번 눈을 뜨자 뿜어지는 화화산처럼 무섭게 터져 나왔다.

  “당신과 다시 만날 날을 손꼽아 기다렸다. 설마 이곳까지 행차할줄은 몰랐군.”

  저벅저벅.

  천천히. 그리고 조심스럽게 살렘에게 다가가는 병규의 발소리가 더 없이 무거웠다.

  “호오. 눈빛이 달라지셨군요. 좋은 약이라도 드셨습니까? 아니면 기연이라도?”  멈칫.

  살기를 피워 올리며 다가가던 병규의 발이 불현듯 멈춰졌다.

  살렘의 대사 중 한 단어가 유독 마음에 걸렸다.

  ‘기연.’

  기이한 인연이라는 뜻이지만, 보통 뜻하지 않게 만남 스승이나 영약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또는 불현듯 찾아온 상승의 깨달음도 이에 해당한다고 볼 수 있다.

   문제는 이 ‘기연’이라는 단어가 이드라센 대륙엔 없는 용어라는 점이다.

   이유를 알 수는 없지만, 병규는 이드라센의 거의 모든 언어를 모국어 수준으로 자유몹게 구사할 수 있었다.

심지어 엘프어나 몬스터들의 말까지 알아들었다. 그런데 병규의 뇌리에 잠들어 있는 이드라센의 수많은 언어들 중 기연이란 단어는 어디에도 들어 있지 않았다.

  그것은 그의 세상에서만 사용되는 말이었던 것이다.

  ‘이상하군.’

  사실 가볍게 넘기면 별일 아닌 일일 수도 있다.

  그러나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꼭 목에 걸린 가시처럼.

  한편, 살렘은 병규의 찌푸려진 표정을 보고 엉뚱한 오해를 했다.

  “아! 기연이란 말을 모르시겠군요. 죄송합니다. 스승님이 가끔 쓰시는 말이라 저도 모르게 사용했군요, 쿠쿠. 별뜻 아니니 잊으셔도 됩니다.”

  그의 장황한 말에 병규는 정신을 차렸다. 지금은 필생의 숙적을 눈앞에 둔 상황이다. 사소한 말 한 마디에 정신을 팔 때가 아닌 것이다.

  저벅저벅.

  다시 걸음을 떼었다.

  천천히 걷는 것임에도 둘 사이의 간격은 급격하게 좁아졌다.

  “공작께선 당신이 저지른 일 때문에 속이 매우 불편해하십니다. 쿠쿠, 하지만 전 당신의 행동을 탓하지 않아요. 오히려 즐거웠습니다. 공작님의 일그러진 얼굴도 흥미로웠고, 무엇보다 당신과 같은 실력자와 다시 대결을 할 수 있다는 것이 기뻤지요.”

  스르릉.

  차가운 치찰음과 함께 살렘의 허리에 매어져 있던 검이 모습을 드러냈다. 어두운 밤임에도 그의 검은 한 점의 결점도 찾을 수 없는 매끈함을 자랑했다.

  그때가 떠오른다. 

  서늘한 검신에 맺혀진 소름 끼치는 검강. 요수의 발톱은 무참하게 짓누르던 거대한 힘.

   으슬으슬한 한기가 느껴졌다.

  하지만 병규의 표정엔 일점의  변화도 없었다.

  걸음걸이 역시 시계추인 양 일정한 간격을 유지했다.

  십 보 앞.

  병규는 마침내 적의 공격권 내로 진입했다. 하지만 아직 공격하는쪽은 없었다. 여전히 간격은 빠르게 좁혀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치아아앙.

  어느 새 요수의 발톱과 살렘의 검이 맞부딪친 채 요란한 소음을 토해 내고 있었다. 파파팍 튀는 불꽃은 현란하다 못해 요사스런 느낌마저 주었다.

  둘은 서로의 무기를 맞부딪친 채로 잠시 멈춰 있었다.

  영원과 같은 찰나의 시간이 지나갔다.

  쩡!

  검과 요수의 발톱이 떨어졌다. 순간 둘은  처음 마주쳤던 간격만큼 다시 벌어졌다.

  “후.”

  갑자기 살렘이 한숨을 쉬었다.

  그는 이마에 손가락을 가져가며 다소 과장된 행동으로 불만을 토했다.

  “한번 제대로 붙어보고 싶습니다만, 아쉽게도 사정이 좋지않군요.”

  병규도 알고 있었다.

  멀리서 들려오는 부산한 발소리들.

  병사들이다.

  누군가 살렘을 신고한 것이다. 그도 아니면 검을 빼들고 대치한 두 사람의 심상찮은 기세에 놀란 행인 신고를 한 것인지도 모른다.

  어찌되었건 병규에게나 원하지 않던 불청객이 난입하게 된 것만은 사실이었다.

  “쿠쿠. 자리가 좋지 않군요.”

  스르릉.

  살렘은 검을 다시금 회수했다.

  “다음에 볼 때는 전장입니다.”

  그 한 마디를 남겨 놓은 채 살렘을 어두운 골목으로 사라져 갔다.

  병규는 그를 잡지 않았다. 달려들어 잡을 수 있을지도 의문이지만, 잡고 싶지도 않았다.

  ‘다음에 볼때는 전장인가.’

  살렘의 한 마디가 마음을 무겁게 짓눌러 왔다. 그럼에도 서서히 흥분이 일었다.

  알 수 없다.

  다음에 만나면 누군가는 죽을 것이다. 자신이 죽을 수도 있다.

  그런데 입가에 미소가 그려지는 이유는 무엇일까.

  “좋은 밤이로군.”

  병규는 다시금 흐느적흐느적 술 취한 사람처럼 걸음을 옮겼다.

  살렘과의 뜻하지 않은 재회.

  이 사건은 병규로 하여금 아이린 왕국의 내정네 더욱더 깊이 관여하게 만든는 빌미가 되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