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 여자였냐?
귀족들과의 면담이 끝난 후 병규는 퀴니들과 함께 후작의 저택을 나왔다. 글로리 후작의 저택은 공주 일파를 돕기 위해
몰려온 귀족들로 만원이었다.
레종 공주는 무리를 해서라도 병규 일행을 후작의 저택에 머물게 하려 했지만 병규가 사양을 했다.
“마음은 고맙지만 저희는 ‘트라우마의 새벽’이 더 편하답니다.‘
공주는 몇 번 더 귄했지만 거듭된 사양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놓아 주었다.
곧장 여관, ‘트라우마의 새벽’으로 돌아온 병규는 침상에 무너지듯 쓰러졌다.
“후아, 좋다.”
노곤했다.
이대로 잠에 빠져들고만 싶었다.
“그런데...... 프리즘 용병단의 사람들이 보이지 않네요.”
트라우마에 남아 있어야 할 제이콥 일행이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일이 있어 신성제국으로 갔다고 하더구나. 듣기론 그쪽의 용맹 길드에 무슨 문제가 있는 모양이더라.”
“음. 아쉽게 됐네요.”
병규는 쩝쩝 입을 다시며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녀석.”
호랭이가 자애로운 웃음을 흘리며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피곤할 테니 푹 자거라.”
하지만 막상 병규는 쉽게 잠들지 못했다.
눈이 따가울 만큼 피곤했지만 앙금처럼 남아 있는 문제들이 그를 불면의 고통으로 인도하는 것이다.
필립 공작에게 들었던 이야기.
‘마계가 중간계를 노린다.’는 소리가 악마의 숨결처럼 그의 귓전을 계속해서 간질였다.
병규는 결국 잡을 포기했다.
“호랭이.”
자리에서 부스스 일어난 병규는 백발의 신선을 불렀다. 호랭이는 눈을 슬며시 치뜨며 병규에게 시선을 고정했다.
“왜? 잠이 안 오냐?”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진지한 음성으로 말을 건넸다.
“의논하고 싶은 일이 있습니다.”
“마도가 침략한다고?”
병규의 설명을 전해 들은 호랭이의 표정은 전에 없이 심각했다.
단순히 레종의 앞날이 걱정되어 물어보았던 병유로서는 호랭이의 이러한 반응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허어. 큰일이구나.”
한참 고심하던 호랭이의 입에서 나직한 탄식이 흘렀다.
“세상의 균형이 깨지고 혼란스러워지는구나. 어찌한다. 어찌해야 좋을꼬.”
호랭이는 신선이다.
신선인 그가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자연스러움. 그리고 그 자연스러움 균형이다. 그런데 바로 그 균형이 끼지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외부의 세력에 의해서 말이다.
마계는 엄연히 중간계와는 다른 세계다. 이는 타계에 대한 간섭이 되는 것이고, 선도를 걷는 호랭이의 입장에선 혼란 그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다.
만약 이곳이 자신들이 살던 세계였다면 호랭이는 적극적으로 마도를 막으려 들었을 것이다.
“실은 그것 때문에 한 가지 걸리는 문제가 있어요.”
넌지시 말을 꺼낸 병규는 아이린 왕국의 반란과 관련된 의문을 슬며시 꺼내놓았다.
“이번 반란. 아무리 생각해도 이상한 점이 너무 많습니다.”
“무슨 말이냐?”
“일단 반란이 일어날 이유가 없어요. 아이린 왕국의 국왕은 성군이라 부족한 인물일진 몰라도, 뛰어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어요. 이런 시기에 반란이라니. 정말 뜻밖의 일이죠.”
아이린 왕국의 백성들은 아무도 평화로운 이 시기에 반란이 일어날 것이라곤 예상하지 못했다. 그리고 그것은 통치자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로 반란은 어이없을 정도로 간단히 성공할 수 있었다.
“더욱 믿기지 않는 것은 7할이 넘는 귀족과 권세가들이 반란에 동참했다는 겁니다. 역사상 유례가 없는 대규모 반란디죠. 이런 태평한 시기엔 절대로 생각할 수 업는 일입니다.게다가더더욱 이해하기 힘든 것은 대대로 왕가에 충성했던 충신들이갑자기 변절했다는 거예요,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한꺼번에.”
실세라 할 수 있는 귀족들이 죄다 필립 공작에게 붙었기 때문에 현재 왕권수호를 외치며 이곳에 모인 귀족들은 한 마디로 쭉정이 같은 존재들뿐이다.
“네 말은...... 이 일에 마도의 개입이 있다는 것이냐?”
“그럴지도 모른다는 의미죠.”
“흐음.”
호랭이이는 침음성을 흘리며 다시 생각에 잠겼다.
선도를 걷는 신선에게 마도란 적과 다름없는 존재다. 아무리 이계의 일이라지만 세상이 피와 죽음으로 혼란스러워질 상황을 가만히 좌시할 수는 없었다.
마침내 호랭이는 결론을 내릴 수 업었다.
마침내 호랭이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만약, 정말 이번 반란이 마도와 관련된 일이라면, 가만 보고만 있진 않을 거이다.”
호랭이는 사태를 파악할 때까지 레종 곁에 머물 것임을 분명히 했다.
병규의입 꼬리가 좌우로 쭉 늘어났다. 그 모습을 본 호랭이가 눈썹을 꿈틀거렸다.
“너 이 녀석, 설마 공주 곁을 떠나기 싫어서 잔 멀를 굴리는 게냐!”
“아니에요. 절대로 아니에요. 제가 그런 머리가 안 된다는 것쯤은 호랭이도 잘 아시잖아요.”
병규는 두 손을 흔들며 부정했지만 호랭이의 게슴츠레한 시선은 점차 더 짙은 의심을 품는 듯했다.
“경애는 어떻게 하려고 하느냐?”
“사실은 그것 때문이기도 해요. 저번에 바호크 공국에 가 봤잖아요. 이드라센 대륙은 애초에 저가 생각했던 것보다 땅덩어리가 넓어요. 아이린 왕국만 해도 지구에 중국의 절반 정도나 되는 땅덩어리를 가지고 있었어요. 작운 왕국이 이 정도라면 바호크 공국이나 아마스 신성제국은 말할 필요도 없겠죠 인구도 상당해요. 이렇게 넓은 대륙에서 우리의 힘만으로는 경애를 찾는 데는 한계가 있죠.”
“그래서..... 레종 공주의 일을 도와준 후에 나중에 도움을 받겠다?”
호랭이의 말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만약에 그녀가 배신을 하면? 아리린 왕국을 되찾은 다음 우리의 부탁을 거절할 수도 있다”
호랭이의 걱정에 병규는 씩 하고 웃었다.
“호랭이도 봐서 알잖아요. 그녀는 다른 사람들관 달라요.”
“그렇긴 하지.”
호랭이도 병규의 의견에 찬성은 했다. 사실 그녀 말고도 글로리 후작이라던가, 루멘 백작 등 의외로 괜찮은 사람들이 많았다. 디스 역시 지나치게 현실적인 점만 제외한다면 본연의 임무에 충실한 인물이다.
“하지만 너무 그녀만 믿고 있는 것도 좋은 생각은 아닌 듯 싶다.”
“알아요, 그래서 내일 정보길드인 ‘주시자의 눈’에 의뢰를 넣어 볼 생각이에요.”
“허허,나름대로 고민을 많이 한 모양이구나.”
깔끔한 병규의 뒤처리에 호랭이는 너털웃음을 흘렸다.
“많이 성장했어. 믿을 수 없을 정도로.”
호랭이는 병규를 따뜻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날, 정보길드에 의뢰를 넣은 병규는 여관으로 돌아가기에 앞서 글로리 후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이미 저녁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후작의 저택은 그야말로 난장판이었다.
필립 공작의 군대가 언제 들이닥칠지도 모르는 위기상황이라, 지휘관은 지휘관대로, 부하들은 부하들대로 정신없이 뛰어 다니고 있었다.
글로리 후작은 병력을 정비하고, 용병부대에 선을 넣어 용병들을 모집하려 애썼다.
레종 공주와 루멘 백작은 중도를 선언한 귀족들에게 은밀히 접촉을 시도했다. 지금은 어떻게든 세력을 모으는 게 중요했다. 반란군에 비해 공주파의 세력은 너무도 미약했기 때문이다.
디스는 글로리 후작의 지시에 따라 트라우마에 합류한 귀족들 중, 쓸 만한 자들을 추리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레종 공주를 만나 볼까 하던 병규는 포기하고 곧장 글로리 후작을 찾아 갔다.
산더미같이 쌓인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후작은 이 뜻밖의 방문자로 인해 어리둥절해했다.
“무슨 일인가? 설마 공주님르로 부족해서 나까지 와이번의 등에 태워보려고 온 것은 아니겠지?”
후작의 우스갯소리에 병규는 가볍게 웃음으로 화답했다.
“물론 아니죠. 다만 부탁할 게 좀 있어서요.”
‘부탁?“
후작의 반문에 병규는 굳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대련........ 말인가?”
후작은 병규의 돌연한 요구에 허허하고 헛웃음을 흘렸다.
설마 대련을 요구할 줄이야.
“이유를 물어도 되겠나?”
“별 뜻은 없어요. 단순히 제 실력을 테스트하고 싶을 뿐입니다.”
“흠흠.”
후작은 길게 침음성을 흘렸다.
병규가 대련을 청해온 것은 솔직히 의외였다.
“아무래도 자넨 살렘과 날 비교해 보고 싶은 모양이군.”
“아닙니다.”
고개를 좌우로 저은 병규는 차분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제가 알고 싶은 것은 진짜 소드마스터의 실력이에요.”
“살렘은 소드마스터가 아닌가?”
“그는 인간이 아니잖아요. 찢어진 팔을 머리에 붙이는 괴물을 과연 소드마스터라고 부를 수 있을까요?”
‘하하하.거 대답 한번 걸작이군.“ 병규의 태연스런 대답에 글로리 후작은 껄껄 대소를 터트렸다.
“좋네. 자네의 요청, 수락하도록 하지.”
후작은 흔쾌히 허락했다.
안 그래도 병규와 손숙을 겨뤄 볼 생각이었다.
아이린 왕국엔 그를 포햠해 세 명의 소드마스터가 있지만.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소드마스터끼리의 대전을 벌인적이 없었다,
. 지고무상의 경지에 다다른 무인이지만 호승심만은 어쩔 수 없는 모양이다.
병규와 후작은 조용히 저택을 빠져나갔다.
어둠을 뚫고 투라우마의 성문까지 한달음에 달려갔다.
한밤중에 나타난 성주를 보고 성문을 지키던 병사들은 당연히 깜짝 놀랐다. 하지만 후작이 입가에 손은 대며 함구하라 명한 덕분에 별 다른 소요 없이 빠져나갈 수 있었다.
한밤의 붉은 대지. 그야말로 위험천만한 곳이다.
원래 달이 뜨는 밤이 되면 몬스터들의 성지라 불리는 곳이 아니던가.
하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평범한 사람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고, 소드마스터와 능력복제술사인 이 두 사람에게 붉은 대지의 몬스터는 전혀 위협이 되지 못했다.
“여기가 좋겠군,”
후작이 안내한 곳은 붉은 모래가 자욱하게 펼쳐진 곳이었다. 주위를 둘러본 병규는 새삼스런 감상에 젖었다.
낯익은 곳이다.
살렘과 격전을 벌였던 곳이기 때문이다.
“여긴 소드마스터를 끌어들이느 뭔가가 있는 모양이네요.”
“허허, 살렘 후작과 싸운 곳이 이곳인가? 우연도 이런 우연이 없군.”
너털웃을을 흘린 후작은 허리에 찬 검을 뽑아 검끝으로 땅을 찍었다. 대련을 준비하는 후작나름의 준비동작이었다.
“내 능력이 자네에게 혹여나 실망만 안겨주지 않을까 걱정이군,”
“별 말씀을. 지금도 후작님에게서 풍기는 기운에 오금이 저릴 정도입니다.”
“후후후, 과분한 칭찬으로 받아들이겠네.”
고즈넉한 웃음을 띠며 후작은 검을 비스듬히 꺼내 들었다. 검집에서 흘러나온 검신이 싸늘한 달빛을 머금어 갔다.
“오게.”
후작이 병규를 불렀다. 병규는 양보하지 않았다.
엄연히 풍기는 기세만으로도 위축이 될 정도로 후작의 기세는 날카로웠다.
“그럼...... .”
말과 함께 병규과 움직였다.
휘릭.
때 아닌 바람소리?
아니, 그것은 병규가 움직이면서 일어난 파공음이었다. 발을 옮기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주먹이 눈앞을 어른 거렸다.
“헛!”
후작의 입에서 기경이 흘러나왔다. 뛰어난 실력을 가진 줄은 눈치챘지만 설마 이렇게 빠른 움직임이라니.
놀라는 와중에도 글로리 후작은 본능적으로 검을 휘둘렀다. 질풍처럼 달려들던 병규는 후작의 검이 미간을 찔러오자 즉시 신형을 허공으로 띄웠다.
촤락!.
날카로운 검음이 코끝을 스치고 지나갔다.
후작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병규는 손으로 코를 만졌다.
피가 묻어 나왔다. 코끝을 살짝 베인 것이다.
“한 방 먹었네요.”
“허허, 무슨 소리인가. 나야말로 한 방 먹었네. 설마 그렇게 빠를 줄은 상상도 못했어.”
후작은 너털웃음을 보이고 있었지만, 그의 등줄기는 식은땀으로 축축하게 젖은 상태였다.
방금 전, 병규의 그 엄청난 움직임. 전장에서 벼려진 감각이 아니었다면 꼼짝없이 기습에 걸려들어 낭패를 보았을 것이다.
“도저히 얕볼 수 없겠군.”
후작은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병규가 엄청나게 뛰어난 실력자임을. 사정을 봐주며 대련을 할 수 있는 상대가 아닌 것이다.
병규의 자세가 낮아졌다.
“이번엔 진짜로 갑니다.”
“허. 설마 좀 전엔 전력을 다한 것이 아니란 말인가?”
병규는 대답대신 고개를 끄덕였다.
“허허허.”
글로리 후작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넨 오늘 날 여러 번 놀라게 하는군. 좋아, 자네가 또 날 얼마나 놀라게 할 지 기대하겠네.”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팍!
땅을 박찬 병규는 돌풍처럼 휘돌며 발을 현란하게 놀렸다.
역시나 빠르다.
아니 그렇게 생각한 순간, 병규는 마치 응축된 힘을 한꺼번에 쭉 하고 간격을 좁혀 왔다.
순식간에 압축되어진 서로간의 간격.
문득 정신을 차렸을 땐, 병규의 발그림자가 소나기처럼 머리 위를 찍어 내리고 있었다.
숨이 턱턱 막히는 압박감.
하지만 후작의 대응은 부드러웠다.
빙글 검을 머리 위로 휘둘렀다.
머리를 보호하는 동시에 병규의 발을 잘라버릴 심산이다.
별 수 없이 병규는 신형을 팽이처럼 회전시키며 검을 피해야 했다.
“지금!”
유연하게 병규의 공격을 막아 낸 후작이 돌연 송곳처럼 날카로운 일격을 날렸다. 빙글 돌던 검광이 황망하게 흩어지고,거칠고 광폭한 섬광이 병규의 허점을 파고 들었다.
인간인 이상 공중에서 몸을 움직일 수는 없는 법,
후작은 바로 그런 약점을 노렸다.하지만 모든 인간에게 예외 없이 적용되는 그 법칙이 병규에게만은 예외였다.
싸늘한 검광이 허리를 찔러오자 병규의 두 발이 스크류처럼 휘저었다.
파파팍. 그의 신형이 맹렬하게 회전했다. 더불어 그 기적적인 탄성을 이용하여 튕기듯 허공으로 치솟을 수 있었다.
쭝!.
허공을 찌른 후작의 검이 공허한 비명을 토해 냈다.
“피했다?”
후작의 눈이 부릅떠졌다.
발 디딜 곳 하나 없는 허공에서 몸을 튕겼다?
가히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불가사의한 움직임. 방금 전 병규가 보인 동작은 묘기라고 말해도 될 만킄 화려하면서도 역동적인 것이었다.
“넋을 놓으시면 곤란합니다.”
머리 위에서 병규의 음성이 들렸다. 급히 고개를 든 후작의 입에서 짧은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허엇.”
화려하게 치솟은 병규가 이번엔 병아리를 채가는 독수리처럼 맹렬한 기세로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 후작의 눈을 잡아끈 것은 그의 움직임이 아니었다.
손.
활공하는 매처럼 좌우로 펼친 그의 양 손 끝에서 푸르스름한 기운이 매섭게 뿜어지고 있었다. 그것은 소드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와 비슷하면서도 전혀 이질적인 광기를 품고 있었다.
후작은 급히 체내의 마나를 검신으로 밀어내며 소름 끼치는 절삭음을 토해 내는 요수의 발톱을 막아냈다.
치아아악.
검과 요수의발톱이 맞부딪치자 현란한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큭.밀린다.’
후작은 속에서 터져 나오는 비명을 억지로 참아냈다. 요수의 발톱과 그의 검이 부딪힌 순간, 말로 표현 못할 요사스런 기운이 그의 몸울 억눌러 왔다.
너무도 차갑다. 그리고 치가 떨릴 만큼 음습한 기운이 서려있다.
검을 통해 흘러드는 요기는 끔찍할 정도로 섬뜩한 느낌을 던져 주었다.
“계속 갑니다.”
한 번 선기를 잡은 병규는 지금의 우위를 놓칠 수 없다는 듯, 정신없이 맹공을 퍼부었다.
그의 손발이 소나기처럼 쏟아졌다.
빙글빙글 후작의 주위를 춤을 추듯 돌면서 요수의 발톱을 휘둘러 댔다.
후작은 한동안 요수의 발톱이 내뿜는 치명적인 요기와 병규의 화려한 공격에 정신을 못 차렸다.
‘이대로는 진다.’
가슴 저 깊숙한 곳에서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위기감. 결국 글로리 후작은 지금껏 숨겨 놓았던 힘을 개방하였다.
촤앙.!
어둠을 밝히는 등불처럼 사방으로 뻗어 나가던 검광이 돌연 녹색의 황홀한 광망으로 압축되었다.
오러블레이드.
그것은 소드마스터를 상징하는 지고무상의 힘이었다.
쩌거걱!
살얼음이 깨지는 듯한 소음이 귓전을 때려왔다.
‘요수의 발톱이 무너진다.’
후작이 오러블레이드를 꺼내놓자, 요수의 발톱은 급격하게 기운이 약해졌다.
‘치잇.’
병규는 즉시 신형을 뒤로 뺐다.
부응.
짙은 바다 빛깔의 검강이 웅장한 소음을 내며 거친 모래위를 달렸다.
너무도 빠른 속도라, 검이 지나가고 한참이 지난 후에야 붉은 먼지가 부옇게 피어올랐다. 그렇게 치솟은 먼지가 십여 미터나 구름처럼 피어올랐다.
감히 인간의 능력이라곤 도저히 생각할 수 없는 위력.
‘당할 뻔했다.’
간신히 후작의 공격을 피해 낸 병규는 서늘해진 가슴을 연신 쓸어내렸다.
그는 요수의 발톱을 내려다보았다.
검강과 단지 한 차례 맞부딪친 것뿐인데도 눈에 띄게 기세가 약해졌다.
‘전에 살렘과 부딪혔을 때도 이랬었지.’
당시에도 살렘이 휘두르는 검강에 요수의 발톱이 맥을 못 추는 바람에 고전에 고전을 거듭했다.
‘천적 같은 것일까.’
자르지 못하는 것이 없던 요수의 발톱에게도 약점이라는 것이 존재하는 듯했다.
‘하지만 이대로 기가 죽을 수는 없지.’
병규의 두 눈이 깊게 가라앉았다.
요수의 발톱이 밀린다고 승부를 포기할 순 없다. 아직 그에겐 몇가지 남은 재주가 있었다.
이때, 글로리 후작의 털털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허허. 놀라게 해 준다더니 정말 할 말 없게 만드는군. 대체 그 손끝에서 나오는 기운은 뭔가?”
글로리 후작이 관심을 가질 만도 했다.
손끝에서 무시무시한 요기가 갈퀴처럼 솟구치는 것도 신기하지만, 그 요기가 오러블레이드를 막아 낼 정도로 예리하기까지 하다니.
오러블레이드는 소드마스터의 총화라고 할 수 있는 것으로 거의 모든 물질을 잘라낼 수 있을 정도로 예리하고 강력했다. 오죽하면 최가의 방어력을 자랑하는 드래곤의 비늘조차 오러블레이드에 상처를 입겠는가.
그런 오러블레이드가 병규의 손에서 섯구쳐 나온 푸르스름한 빛줄기에 막혀버렸다. 이것은 글로리 후작에게 신선한 충격이었다.
“이건.... .”
요수의 발톱에 대해 묻는 후작의 질문에 병규는 길게 말꼬리를 끌었다. 변명거리를 찾는 것이다.
“그냥 특이체질 때문입니다.”
“허허.”
병규의 황당한 답변에 후작은 헛웃음을 터트렸다.
“특이체질 때문이라고? 허. 나도 그런 특이체질 한 번 되어 봤으면 좋겠군.”
치지직, 칭.
칠흑 같은 어둠.
붉은 모래 위를 날듯이 뛰어다니는 두 줄기 바람이 있었다. 눈으로 쫓기엔 너무도 빠른 이 두 줄기 바람은 가히 거센 폭풍과 같은 기세를 담은 채, 상대를 향해 정신없이 몰아쳤다.
촤악, 차그극.
바람이 마주칠 때마다 섬뜩한 불꽃이 폭죽처럼 터져 나왔다.
병규와 글로리 후작. 두 사람이 맞붙은 지 30분이 넘었다.
‘흐음.“
글로리 후작의 눈썹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슬슬 밑천이 보이는 군.’
여태 그는 수동적인 자세로 병규의 움직임을 관찰하는 데 주력했다.
초반엔 놀랍고도 다채로운 공격에 많이도 당황했었다. 하지만 싸움이 길어지자 슬슬 병규의 단점들이 눈에 보이기 시작했다.
‘스피드는 정말 대단해. 그리고 동물적인 감각 또한 상대를 당황스럽게 만들기에 충분하지. 하지만 호점이 너무 많아.’
병규에 대한 그의 결론은 인간을 상대하기 위한 기술들이 아니라는 것이다.
가령 그의 가공할 점프력,
얼핏 봤을 때는 상당히 쓸모가 많을 것 같지만, 실은 효용성이 극도로 떨어지는 움직임이다.
인간들의 키는 그렇게 크지 않다.
로켓처럼 하늘 위로 솟구치는 점프력으론 고작 적의 머리 위를 넘어가는 역할밖에 할 수 없을 것이다. 고수와의 대전에서 그러한 점프력은 기회를 만들긴커녕 치명적인 허점으로 작용하게 될 것이다.
그의 점프력은 오우거나 트롤처럼 덩치가 큰 상대에게 적합한 기술인 것이다.
고수를 상대할 때는 자고로 쓸데없은 움직임을 최대한 배제해야 한다.
짧은 순간에도 수십 번의 공격은 주고받는 것이 고수들의 결투다.
하지만 그의 현란한 움직임이 전혀 쓸모없는 것은 아니다.
가공할 만한 스피드와 기상천외한 움직임은 부러울 정도다. 분명 다수를 상대하는 난전에선 큰 힘을 발휘할 것이다. 다만 움직임이 정제되지 않아 부산스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병규의 능력은 다수를 상대하는 데 적합하다, 하지만 고수를 제압하기엔 너무 엉성하다.
병규에 대한 글로리 후작의 결론이었다.
‘공수의 전환에 빈틈이 너무 많다,’
촤아아앙!
다시 한 번 검과 요수의 발톱이 부딪쳤다.
‘게다가 힘의 완급 조절도 밈숙해.’
글로리 후작의 눈살이 다시 한 번 찌푸려졌다.
싸움의 기교는 놀랄 만큼 화려하고 노련하다. 공격을 피하는 타이밍은 정말이지 경악성이 절로 터질만큼 정확하다. 마치 전쟁터에서 몇십 년 구른 노장을 보는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병규는 넘치는 힘을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고 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글로리 후작은 지금껏 수많은 상대와 결투를 벌였지만, 병규처럼 힘의 완급을 조절하지 못하고 불균형한 상태를 보이는 상대는 처음이었다.
‘꼭 뛰어난 능력의 몬스터와 싸우는 것 같군,’
병규는 제대로 무술을 배운 적이 없었다. 단지 그때그때 번뜩이는 생각과 본능적인 움직임으로 위기상화을 넘겨왔다.
덕분에 싸움에는 노련하면서도 정작 자신의 힘은 제대로 컨트롤 하지 못하는 불균형을 낳게 된 것이다.
글로리 후작은 짧은 시간 동안 병규의 약점을 낱낱이 간파해 낼 수 있었다. 물론 이것은 그가 병규보다 더욱 높은 경지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만약 소드 익스퍼트 상급의 무사가 병규의 상재가 되었더라면,그의 기기묘묘한 움직임과 상식을 뛰어넘는 현란함에 눈 깜짝할 사이에 제압당하고 말았을 것이다.
“이만 끝내지.”
짧게 소리친 글로리 후작은 곧장 검에 흘려보내던 기운을 몇 배나 증가시켰다.
취아아악.
녹색의 검강이 하늘을 찌를 듯이 솟구치고, 후작의 발밑에서 용솟음치듯 터져 나오는 기운에 모래가 치솟았다.
“으윽.!”
병규는 몇 배나 증가한 후작의 기운에 신음을 삼키며 급급히 뒤로 물러났다. 그 순간 비단폭 갈라지는 소음과 함께 붉게 피어오른 모래먼지가 반으로 쪼개지며 녹색 광망이 그의 목을 베어 왔다.
전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빠르기였다.
“익.”
병규는 급히 요수의 발톱으로 후작의 오러블레이드를 막았다.
치아악.
폭발할 듯 터져 나오는 불꽃들.
오러블레이드와 요수의 발톱이 내뿜는 격렬한 반응을 보며 병규는 가슴이 덜컥 무너졌다.
요수의 발톱이,무적을 자랑하던 요기가 충천하는 오러블레이드의 불꽃에 줄줄 녹아내리고 있었다.
삽시간에 요수의 발톱을 날려버린 오러블레이드가 그의 목을 쪼개 왔다.
병규는 눈을 꼭 감았다.
끝이다.
살갗이 화끈거린다.
하지만 목을 찔러오는 그 서늘한 감촉과 소음은 더 이상 들려오지 않았다.
천천히 눈을 떴다.
오러블레이드의 그 현란한 녹색 광망이 목 한 치 앞에서 이글이글 불타고 있었다.
“내가 이긴 것 같군.”
의연한 자세로 후작이 말했다. 병규는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헉헉.”
숨이 목까지 차올랐다.
벌써 한참 전에 체력이 바닥났다. 지금까지 버틴 것은 순전히 지기 싫어 악을 쓴 것에 불과했다.
그가 몬스터들에게서 흡수한 것은 기이한 능력뿐,체력만큼은 본래 그자신의 것 그대로였다.
후작은 대자로 퍼져 있는 병규를 내려다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중반을 넘어선 이후로 병규의 움직임이 현격하게 느려진 이유를 알 것 같았다. 병규에겐 놀라운 능력은 있지만. 그것을 받쳐 줄 만한 체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했다.
무술을 익히는 사람이라면 당연하게 선행되어야 할 기초체력이 턱없이 부족한 것이다.
하지만 후작은 굳이 그가 발견한 단점들을 병규에게 말해 주지 않았다. 병규가 이번 대전으로 인해 자신의 단점들을 모두 깨달았음을 느낀 것이다.
결투에 대한 센스는 가히 천부적이었다.
열망. 아쉬움. 그리고 눈동자 깊은 곳에서 용암처럼 부글부글 끊어오르는 맹렬한 열의.
긴긴 대련 시간 동안 자신의 부족한 면을 뼈저리게 실감한 병규의 두 눈에서 상반된 여러 감정들이 불길처럼 타올랐다.
그 기세가 자못 무서울 정도였다.
이런 자들은 반드시 성장한다. 그것도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빠르기로.
병규의 두 눈을 가만히 응시하던 후작이 한숨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자넨 욕심이 많군.”
병규의 두 눈에 의문이 서렸다.
글로리 후작은 그를 향해 털털한 미소를 보였다.
“내가 자네 나이 때는 겨우 소드 익스퍼트 초급이었네. 그것만으로 천재라는 칭찬을 수도 없이 들었지. 그런데 자넨 같은 나이에 소드마스터인 나와 호각으로 겨루었네. 솔직히 말해 자네 나이가 도저히 믿기지 않을 정도야. 그런데 그렇게 엄청난 능력을 가지고도 만족을 못하다니. 대체 어느 정도가 돼야 만족할 텐가?”
“하하하하.”
병규는 숨을 헐떡이며 유쾌하게 웃었다.
욕심이 많다라. 그런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이 전부는 아니다.
사실 욕심을 부리는 것처럼 보이는 것은 허세에 불과하다. 그는 다만 쫓기고 있을 뿐이다.
지금도 눈을 감으면 살렘의 히죽거리던 그 얄미운 상판이 떠올라 깜짝깜짝 놀라곤 한다.
‘즐거우셨습니까?’
놈의 조롱기 어린 웃음, 가슴을 저며 오던 수렁 같은 절망.
지금까지 그렇게 압도적인 패배는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공포를 느꼈던 적도 처음이었다.
“자, 그럼 이만 돌아가야 할 시간이군.”
후작이 선선한 어조로 말했다.
“다행히 내가 땀내 나는 자네를 데려갈 필요는 없을 것 같군.”
후작은 모래 언덕 너머를 슬며시 눈짓하며 빙그레 웃었다. 병규는 그가 보인 눈짓의 의미를 알아챈 듯,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덕분에 화끈하게 잘 놀았군, 다음에 꼭 한 번 더 시간을 내 주게.”
다음을 기약하며 후작은 그렇게 사라졌다.
병규는 누운 채, 멀어져 가는 후작의 뒷모습을 응시했다.
‘소드마스터’
그 절대자의 그림자가 달빛에 일렁일렁 춤을 추고 있었다.
후작이 사라진 후, 야트막한 언덕에서 몇 사람이 나타났다.
이미 그들의 기척을 느끼고 있던 병규는 누운 채 가만 기다리기만 했다.
모래 언덕에 모습을 나타낸 것은 모두 셋.
그 중 둘이 허겁지겁 병규에게 달려왔다.
“변기!변기!”
“주인님. 샤바.”
두 아이가 병규의 좌우에 쓰러지듯 털썩 앉으며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불렀다.
병규는 힘없는 목소리로 퀴니와 샤바를 진정시켰다.
“나.괞찮아. 죽을 정도는 아니니까, 조용조용히 불러 줘,”
“변기.아파?”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퀴니가 물었다. 슬픔 가득한 그녀의 얼굴, 목구명으로 울컥 하고 무언가가 복받쳣다.
병규는 그녀의 빰을 만져주려다 슬며시 손을 치웠다. 먼지가 잔뜩 묻은 손으로 그녀를 만질 수는 없었다.
“괞찮아.”
그는 애써 웃으며 그렇게 대답했다.
“주인님. 샤바?”
샤바가 불렀다.고개를 돌려보니 흑요석을 박은 듯, 검게 반짝이는 그의 눈동자가 보였다.
샤바가 물었다.
“왜 져 준 거예요.샤바?”
또다시 순진하게 묻는다. 전에도 이런 식으로 물은 적이 있었다.
샤바는 그를 세상에서 가장 강한 사람 정도로 인식하고 있는 모양이다.
“하하. 져 준 게 아니라. 진 거야.”
“샤바?”
샤바는 인상을 찌푸린 채 연신 고개를 까웃거렸다. 이해되지 않는 모양이다.
이때, 뒷짐을 진 채 터덜터덜 걸어온 호랭이가 병규의 머리맡에 쪼그리고 앉았다.
바람이 불어와 호랭이의 신비에 가까운 백발을 찰랑찰랑 파도치게 만들었다.
“이 야심한 밤에 뭐 하러 우르르 몰려왔어요?”
“혹 재미난 일이라도 없을까 싶어 따라와 봤지.”
호랭이는 심드렁한 목소리로 대답했지만.병규는 그 속에 깃들어 있는 걱정을 느낄 수 있었다.
예전에도 그는 소리 없이 사라진 적이 있었다, 이번에도 그렇게 사라질까 봐 모두들 뒤를 쫒아온 것이다.
“분하냐?”
호랭이가 돌연 물었다.
글로리 후작에게 패한 것이 분하냐는 물음이다.
병규는 피식 웃었다.
“조금요.”
졌다,
그것도 깨끗한 패배다.
분하지 않다면 거짓말일 것이다.
하지만 왜인지 기분이 그리 나쁘지만 않았다.오히려 막힌 것이 뻥 뚤린 듯 상쾌했다.
‘그러나...... .’
병규의 입술이 작은 미소를 그렸다.
좀 전 후작과의 대결에서 그는 전력을 쏟지 않았다.
후작에게 보인 능력은 발칸에게서 흡수한 스피드와 요수의 발톱,그리고 귀탄의 점프력이 전부다. 아직 그에겐 오우거의 힘이란 변수가 남아 있었다. 또 재생력 역시 드러내지 않았다.
숨 가뿐 격정 중에 자신의 힘을 숨긴다는 것은 어지간히 노련하지 않으면 불가능한 일디다. 머리로는 각오를 해도 막상 위기상황에 직면하게 되면 무의식중 몸이 먼저 반응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병규가 후작과 같은 고수 앞에서 자신의 능력을 숨길 수 있었던 것은 수많은 격전을 치르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경험 때문이다.
그는 나이에 비해 터무니없을 정도로 수많은 격전을 치렀다.
게다가 그 상대들이 하나같이 엄청난 능력을 가진 자들이었다.
이런 경험들이 그를 평생을 전장에서 보낸 장수와 같은 노련함을 지니게 만들었다.
“하지만 내가 숨겨 놓은 힘을 모두 풀어놓는다고 해도 과연 후작을 이길 수 있을까?”
긍정적인 대답은 떠오르지 않았다. 그가 힘을 숨겨 놓았듯, 후작 또한 힘을 숨기고 있었을 것이다.
가벼운 한숨이 입술을 비집고 새어 나왔다.
이때 호랭이가 다시 질문을 던졌다.
“분했더냐?”
뭐라 대답하려던 병규는 입을 꾹 다물었다.
이번에 호랭이가 물은 것은 글로리 후작과의 승부가 아니었다.
그보다 저의 일. 살렘에게 진 것을 묻는 것이다.
“쯧쯧.”
호랭이는 못마땅한 얼굴로 혀를 찼다.
“쥐방울만 한 놈이 호승심은 차고도 넘치는구나.”
호랭이는 아예 병규 옆에 털썩 자리를 잡고 앉았다.
달이 밝았다.
그윽한 달빛을 감상하던 호랭이가 던지듯 한 마디를 꺼냈다.
“내가 채워 줄까?”
“네?” “네 녀석의 부족한 실력 말이다. 내가 가르쳐 줄까 묻는 것이다.”
“....... . ‘
병규는 멍한 눈으로 말을 잃었다. 설마 호랭이에게서 이런 말을 듣게 되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호랭이는 그런 병규의 마을 모르는 척, 하늘을 올려다보며 말을 이었다.
“대신 조건이 있다.”
병규는 초조한 심정으로 뒷말을 기다렸다.
과연 무슨 조건일까.
그가 아는 호랭이라면 용왕에게 건네줄 간을 요구할지도 모른다.
장기를 꺼네고 어떻게 살겠느냐고 향변하면 사뿐하게 웃으며 물 한 잔을 내밀 것이다.
그것이 지금까지 그가 느낀 호랭이의 실체다.
하지만 오늘은 달랐다.
백발을 찰랑이고 있는 호랭이는 전에 없이 고고한 품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병규에게 요구하는 조건도 여느 때완 달랐다.
“지금의 네 순수한 마음. 절대 잃지 않을 자신이 있느냐?”
“네?”
병규의 눈이 화등잔만해졌다. 달을 보던 호랭이의 눈동자가 병규를 향했다.
병규는 가만 숨을 죽였다.
달빛이 호랭이의 눈동자 속에 머물러 있었다.
“설사 감당할 수 없는 변화가 오더라도, 넌 지금의 순수함을 잃지말아라. 이것이 선술을 가르쳐 주는 조건이다.”
“.... .”
병규는 잠시 말을 잃었다.
왜 호랭이가 이런 말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싫으냐?”
호랭이가 다시 물었다.
병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오.”
호랭이가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는 모른다. 하지만 단순히 지금의 마음을 지키는 것이라면 자신 있었다.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말이다.
병규와 호랭이가 고요한 달빛 아래서 미래를 계획하고 있을 때, 샤바는 심각한 얼굴로 딴생각에 잠겼다. 조각상 같은 그의 얼굴은 병규에 대한 의문으로 살짝 일그러져 가고 있었다.
‘왜 주인님은 허접한 인간에게 자꾸 져 주는 걸까, 샤바?’
아무리 생각해도 주인의 깊은 뜻을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성격이 너무 좋아서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승부에 이기면 상대가 슬퍼할까 봐 일부러 져 주는 것일지도.
‘안 되겠어, 계획을 서둘러야겠다. 샤바.“
주인님의 품격을 위해서도 이 세계를 접수할 필요성이 있다.
적어도 그의 주인이라면, 환계의 왕자인 자신의 주인이라면 이 좁은 세상 정도에서는 떵떵거리며 살아야 한다.
세계 정복.
모르는 사람들이 들으면 턱없는 소리랴며 코웃음을 치겠지만, 샤바는 자신이 있었다. 물론 그것을 위해 퀴니의 도움이 필수적으로 뒤따라야겠지만 말이다.
샤바는 슬쩍 자신의 그림자에 시선을 던졌다.
작은 생물들이 꼼지락거리며 뭔가에 열중하고 있었다.
자명종 속에 담아 온 그의 백성이었다.
처음 암수 한 쌍이던 그의 백성은 짧은 시간 동안 천 배나 불어 있었다, 지구에서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속도의 번식 능력이었다.
그러나 그마저도 샤바에겐 한없이 느리게만 느껴졌다.
‘좋아. 지금부터 출산 장려 일주일 계획 실시다.’
샤바는 생산력(?)증진에 총력을 기울이기로 결심했다. 그 모두가 주인인 병규를 위한 노력이었다.
글로리 후작과 치열한 대련을 벌인 다음 날 새벽.
해가 채 뜨기도 전에 루멘 백작이 보낸 전려이 병규를 찾아왔다.
그느 매우 급한 표정으로 아직 눈도 뜨지 못한 병규를 두고 호들갑을 떨었다.
“와이번들이.......와이번들이..... . ”
병사의 말에 병규는 잠이 확 달아나 버렸다.
대충 옷을 갈아입고 후작의 저택으로 향했다.
멀리서부터 와이번들의 괴성이 들려왔다.
병규는 바람처럼 내달리며 저택의 후원을 찾았다. 넓은 공터엔 그가 데려온 와이번들이 떼로 모여 있었다.
불상사를 방지하기 위해 쇠줄을 목에 매고 있던 와이번들이 하늘이 무너져라 괴성을 지르면 난동을 부렸다.
와이번에 타기로 결정된 미네르바의 기사들이 소란을 피우는 와이번들 주위에서 갈팡질팡 어쩔 줄 몰라 했다.
“멈춰!”
장중으로 뛰어든 병규가 일갈하자 미친 듯이 날뛰던 와이번들은 언제 그랬냐 싶게 얌전해졌다.
“얘들이 왜 이러는 거죠?” “모,모르겠네. 어젯밤부터 낌새가 이상하더니 오늘은 새벽부터 이 난리로군,”
루멘 백작이 식은땀을 흘리며 대답했다.
이마에 가득한 땀을 보니 와이번의 난동으로 많이 놀란 모양이다.
“흠.”
병규는 끙끙거리며 그의 손에 머리를 비벼 오는 와이번들을 쳐다 보았다.
와이번들은 긴 혀로 병규의 손을 자꾸만 핥았다.
문득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와이번에게 먹을 것을 줬나요?“
“무,물론이지.”
대답하는루멘 백작의 표정이 좋지 못했다.
“뭘 주셨죠?”
“이것저것 섞은 고기를 좀 주긴 했네만.”
“그게 문제군요.”
병규는 심각한 표정으로 고개를 주억거렸다.
수차례 언급된 것처럼 와이번들은 길들이기가 무척이나 까다로운 몬스터다. 둥지를 만들어 주고,먹이를 공급하는 것까지 어느 것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특히 먹이는 가장 큰 문제다.
인간에게 길들여진 와이번은 식성이 극도로 까다로워 상등품의 고기가 아니면 먹으려 들지 않았다. 그런 이유로 보통 와이번에겐 살아 있는 말을 먹이로 주었다.
필라이트에게 와이번의 특성을 들은 병규는 오늘의 난동이 먹이 문제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하지만 문제를 파악해도 해결할 방법이 없었다.
트라우마엔 말이 부족했다.
속속 합류하는 지방귀족의 기사들에게 지급할 말도 빠듯할 지경이었다. 상황이 이러하니 그 귀한 말을 와이번의 먹이로 주기는 사실상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전쟁 준비가 한창이라 이곳은 물자가 턱없이 부족했다.
지금은 그나마 외부의 상인들을 통해 식량을 조달할 수 있지만. 필립 공작의 토벌군이 몰려오면, 트라우마는 외부와 고립될 것이다. 그때는 식량을 구하려 해도 구할 수 없게 된다.
“배가 고파서 그런 거라면 큰일이군. 앞으로 사정은 점점 더 안 좋아질 텐데.”
루멘 백작은 근심 가득한 얼굴로 혀를 찼다. 아무리 쓸모가 많은 와이번이라도 이 정도의 굶주림에 난동을 부릴 정도라면, 트라우마에선 도저히 활용할 방법이 없다.
와이번의 식량문제는 드래곤나이트의 존폐위기를 가늠하는 중대한 사안이라 할 만했다.
“정말 큰일이군.”
뒤늦게 현장에 도착한 글로리 후작 역시 심각한 표정이 되었다.
하지만 의외로 병규의 표정은 밝았다. 이미 이런 사태에 대한 대안을 생각해 두었기 때문이다.
“먹이라면 도처에 널려 있습니다.”
수단을 골몰하던 글로리 후작과 루멘 백작은 돌연한 병규의 말에 두 눈 가득 의문의 빛을 띠었다.
먹이가 도처에 널려 있다니. 설마 상인들에게서 사들이자는 말인가.
그건 말도 안 되는 소리다. 병기를 사들일 자금도 부족한 형편이다. 물론 병규도 그런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어떻게 해결한다는 건지 궁금해요.”
조용히 걸어온 레종 공주가 입가에 미소를 머금은 채 물었다.
그녀는 신비한 분위기를 풍기고 있는 병규를 유심히 살폇다.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는 사람이다.
아직 어린 나이에 소드마스터와 호각의 승부를 펼치지 않나, 남이 심혈을 기울여 길들인 와이번들을 모조리 끌고 오질 않나. 병규의 행동 하나하나가 그녀에겐 신비스러움으로 느껴졌다.
대체 또 어떤 기상천외한 방법을 쓸까.
잔뜩 기대를 하게 만든 병규는 대답을 미룬 채 의뭉스럽게 웃기만 했다.
“잘되면 주변 청소도 할 수 있을 겁니다.”
“자, 가자.”
와이번에 올라탄 병규가 조용히 말하자 와이번은 거창한 울을을 토하며 허공으로 솟았다. 그가 탄 와이번이 트라우마 상공을 빙글 돌자, 다른 와이번들이 그 뒤를 쫓아 하늘로 날아올랐다.
“장관이군.”
와이번들이 일제히 날아오르는 웅장한 모습에 글로리 후작은 나직한 감탄성을 흘렸다.
감탄한 것은 그 혼자뿐만이 아니었다.
미네르바의 기사들 역시 부러운 눈초리를 하고 있었다.
드래곤나이트가 되는 것은 거의 모든 기사들의 꿈이다. 말을 타고 달리는 것과 와이번은 타고 하늘을 나는 것에는 감히 비교할 수 조차 없는 커다란 차이가 존재했다.
하늘 높이 솟구친 와이번을 올려다보는 기사들의 눈동자에 열망이 어려 있었다.
와이번들을 이끌고 트라우마를 벗어난 병규는 잠시 대기를 가르는 느낌을 만끽했다.
휘이힝 하고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가 기분 좋게 느껴졌다.
크롸롸롸.
와이번의 울음소리가 길게 이어졌다. 그 소리에 정신을 차린 병규는 피식하고 웃었다.
“알았다. 배고파 죽겠다는 거지?”
크롸롸롸.
와이번은 병규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신기하게 대꾸했다.
“저쪽으로 가 보자.”
크게 크라우마 상공을 선회하고 있던 와이번들이 그의 명령을 따라 철새들 처럼 일렬로 방향을 틀었다.
병규는 와이번의 등에 올라탄 채, 붉은 대지를 관찰했다.
그가 와이번의 먹이 대용으로 생각한 것은 바로 몬스터들이었다.
와이번은 원래 야생에서도 다른 몬스터들을 잡아먹고 사는 포식자다. 아무리 새끼 때부터 인간에 의해 길들여진 녀석들이라고 해도 맹수로서의 야성만은 살아 있을 터.
병규는 먹이의 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먹이의 상태가 더 중요하도고 생각했다.말이 아니면 안 먹는 것이 아니라 죽은 고기라 거들떠보지도 않는 것이다.
마침 좋은 것이 눈에 띄었다.
한 무리의 코볼트들이 모여 있는 곳이었다.
과거 붉은대지엔 대형육식 몬스터만이 넘쳤다. 그런데 최근엔 무슨 이유에서지 코볼트나 오크와 같은 같은 소, 중형 몬스터가 무리를 이루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오늘은 저걸 먹자.”
병규의 명령에 와이번은 기다렸다는 듯이 날개른 펼쳐 활공을 하며 코볼트 머리위로 날아들었다.
키기긱! 키긱!
코볼트들은 머리 위를 가려 오는 거대한 존재감에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흩어졌다.하지만 쏜살같이 떨어지는 와이번들을 피하기엔 역부족이었다.
바람을 가르며 수직 하강한 와이번들은 한 무더기의 제비들처럼 이내 코볼트들을 쓸어버렷다.
휘이이익!
스치듯 붉은 대지 위를 휘젓고 다시 하늘로 올랐을 때, 와이번들의 발에는 한두 마리씩의 코볼트들이 잡힌 상태였다.
“좋아.”
병규는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와이번들의 움직임에흡족한 미소를 지었다. 잘하면 먹이 문제를 해결함과 동시에 와이번들을 훈련시킬 수도 있을 것 같았다.
크롸롸롸.
코볼트를 사냥한 와이번들은 길게 기성을 질렀다.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빙글빙글 상공을 돌던 와이번들은 적당한 자리를 물색했다.
아무 곳에나 착륙할 수는 없었다. 재수가 없으면 트롤이나 오우거의 습격을 받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꽤 먼 거리를 날아간 병규는 형형색색의 숲을 발견할 수 있었다.
숲은 붉은 대지 한복판에 자리하고 있었는데, 그 규모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거대했다.
잠시 숲을 내려다 보던 병규는 이곳 지리가 상당히 눈에 익다는 것을 기억했다.
“요정의 숲.” 처음 이드라센에 떨어졌던 곳이다.
“참 멋진 숲이었지.”
잠시 감상에 젖어 있던 병규는 와이번들의 울음소리에 정신을 차렸다.
“알았다. 알았어. 배가 고픈 거지?
저 아래에 가서 먹자꾸나.“
병규는 쾌활하게 웃으며 와이번들을 숲으로 몰았다.
그때였다.
그의 귀가 쫑긋 솟더니 미세한 파공음을 잡아냈다. 그것은 뾰족한 무언가가 공기를 가를 때 나는 소음이었다.
“화살!”
요정의 숲에서 수십 가닥의 화살이 쏘아져 올라왔다.
느닷없는 기습에 당황할 만도 하건만 병규는 침착하게 와이번들을 흩어지게 했다.
기척을 잡아낸 직후 그가 보인 대응도 놀라웠지만. 와이번들의 행동 또한 신속하기 그지없었다. 밀집해 있던 와이번들이 물방울 튀기듯 순식간에 산개했다.
피피핏!
화살들은 허무하게 와이번들을 스치고 지나갔다.
간신히 피했다며 한숨은 내쉬는 순간, 다시금 귀가 펄럭였다.
“헉!”
위를 올려다본 병규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 나왔다.
와이번들을 스쳐 지나간 화살들이 허공에서 긴 호선을 그리며 다시 날아오고 있었다.
“여, 열 주적 미사일이냐!”
화들짝 놀란 병규가 어이없다는 반응 보였다. 화살에 눈이라도 달린 것처럼 빙글 회전하다니.
급히 와이번들을 움직였지만 이번마큼은 화살을 피할 수 없었다.
파파팍!
와이번의 몸통을 때린 화살들이 둔탁한 소음을 토해 냈다.
꾸에엑!
큰 충격에 와이번들은 휘청하여 비명을 질렀다. 다행히 와이번들의 피부는 질기고 단단하여 화살이 박히지는 않았다. 하지만 살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르르릉.
아픔을 맛본 와이번들은 성난 목 울림을 토해 냈다. 날개를 펄럭이며 아래를 내려다보더니 무언가를 발견한 듯, 요정의 숲을 향해 번개같이 내려꽂혔다.
슈슈슉,
다시 화살들이 쏘아져 올라왔다.
조밀한 그물처럼 날아드는 화살들. 하지만 와이번의 피부는 마치 금속으로 되어 있는 것처럼 화살들을 모조리 통겨 냈다.
“대체 어떤 놈들이.”
인상을 찌푸린 채 요정의 숲을 내려다보던 그의 눈에 작은 움직임들이 잡혔다. 기가 막힌 은신술이라 병규처럼 예민한 눈을 가진 자가 아니면 절대로 발견하지 못할 정도였다.
“사람?” 화살을 날리는 자들을 발견한 병규의 얼굴이 가볍게 일그러졌다.
멀리서 확인한 모습은 분명 사람이었다.
“엘프였군.”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간 후에야 그들의 귀가 뽀족하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아무래도 오해가 있는 모양이다. 얘들아 잠깐 멈춰 봐.”
엘프들을 향해 섬전처럼 내려꽂히던 와이번들이 급히 날개를 퍼덕이며 움직임을 멈췄다. 난폭한 와이번들이 일사불란하게 행동하자 엘프들도 이상한 점은 느끼고 더 이상 화살을 날리지 않았다. 병규는 타고 있던 와이번을 요정의 숲에서 어느 정도 떨어진 곳에 착륙시켰다. 그가 안장에서 내리자 엘프 한 명이 조심조심 그에게 접근해 왔다.
“안녕하세요.”
병규는 미끈한 얼굴의 엘프 청년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인간이군.”
엘프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대뜸 그는 단도를 꺼내 들었다.
“또 노예가 필요한 거냐!”
이를 으드득 가는 모습에서 명백한 적의가 느껴졌다.
“아니에요. 그게 아닙니다.”
병규는 두 손을 화급히 내저으며 완강히 부인했다.
엘프도 병규의 행동에서 이상한 점을 느꼈는지 더 이상 윽박지르진 않았다.
보통 엘프 사냥꾼들은 십여명 이상의 무리를 이룬다. 그런데 눈앞의 청년은 단지 혼자뿐, 혼자서 엘프들을 사냥하기는 무리일 것이다.
“그대가 길들인 것인가?” 엘프 청년이 와이번들을 턱짓하며 물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엘프 청년의 눈가에 놀라운 빛이 잠시 흘렀다.
“드래곤나이트로군,”
와이번을 길들여서 전쟁에 이요하는 인간들의 이야기를 엘프 청년도 일찍이 들어 본 적이 있었다.
마물을 길들이다니.
엘프의 입장에서는 도저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다. 모든 종족중에 오직인간만이 이런 엉뚱한 짓을 벌인다.
잠시 병규를 이모저모 살피던 그는 무겁기 그지없는 음성으로 조언했다.
“몬스터는 이성이 없다. 피를 갈구한다. 어둠의 자식들이기 때문이지. 그대가 어떻게 와이번들을 길들였는지 모르지만, 하루바삐 없애버리는 것이 좋을 것이다.”
엘프 청년은 순수한 마음으로 충고했다.
빛의 자식인 엘프들은 어둠의 산물인 마물들을 증오했다.아무리 길들인 것이라지만 마물들과 가까이 하는 것이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요정의 숲엔 무슨 일이지?”
“아, 그게 와이번들이 안전하게 먹이를 먹을 수 있는 장소를 물색하다 보니.”
엘프 청년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와이번들은 사냥한 코볼트들을 먹고 있었다.
“오해였군. 미안하게 됐다. 하지만 요정의 숲은 신성한 곳이다. 부정한 존재들은 절대 들어올 수 없다.”
엘프 청년은 정식으로 사과의 말을 했다. 그의 진심어린 말에 병규도 뒷머리을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앞으로는 조심하기 바란다.”
마지막 충고를 던지며 엘프 청년이 고개를 돌렸을 때였다.
“잠시만요.”
조용한 음성과 함께 요정의 숲에서 한 명의 소녀가 걸어 나왔다.
소녀를 본 청년은 깜짝 놀라더니 급히 고개를 숙였다. 병규를 대할 때와 달리 소녀에 대한 그의 태도는 극히 조심스러웠다.
“숲의 향기가 그애와 함께 하길. 무슨 일이십니까?
“와이번들이 몰려왔다는 소리에 걱정이 되어 와 봤습니다.”
방긋 웃으며 대답한 카즈엘을 무심한 눈으로 와이번과 병규를 살폈다.
“아!”
병규를 본 그녀의 눈동자가 크게 확장되었다.
“카피 님!”
병규를 부르는 그녀의 음성에 놀람과 반가움이 가득했다. 반면 소녀의 반응에 병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어디서 봤더라?’
분명 눈에 익은 모습인데 도무지 기억이 나지 않았다. 저렇게 아름다운 미모의 소녀라면 어디서 봤더라도 절대 잊어 먹지 않았을 텐데.
‘그 노예 상인의 저택에서 본 엘프들 중의 하나인가?’
그가 만난 엘프라고 해 봐야 한 손에 꼽힐 정도. 엘프 소년의 일을 도와 주다 우연찮게 노예 상인에게서 구출하게 된몇몇 엘프들이 전부였다.
“어라?” 가만 기억을 더듬던 병규가 다시 카즈엘의 얼굴을 살폈다.
저 단아한 생김새. 그가 아는 어느 엘프와 유사했다. 아니 성별만 달리 놓고 본다면 똑같았다.
“설마.... .너 그 때의 그 꼬맹이?” 병규의 자신없는 물음에 카즈엘의 표정이 눈에 띄게 밝아졌다.
“기억하고 계시는군요.”
“헉!”
병규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가 아는 카즈엘은 작고 귀여운 소년이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그녀는, 놀랍도록 아름다운 외모의 소녀, 아니 소녀라고 부르기도 미안할 정도로 성숙함을 풍기는 여인이 아니가.
허리까지 내려오는 긴 머리칼과 아나 주고 싶을 만큼 가녀린 몸, 그리고 한 점의 오점도 찾을 수 없는 하얀 피부.
쫙 빠지다 못해 미끄러질 것만 같은 몸의 굴곡까지.
그야말로 조각 같은 미모였다.
천상 카즈엘을 남자라고 생각하고 있던 병규에게, 지금 그녀의 모습은 황홀하다 못해 경악스러울 정도였다.
‘이럴 수가.’
믿을 수 없는 사태네 병규는 다시금 카즈엘을 확인했다. 여자가 확실했다.
무엇보다 봉긋하게 솟은 가슴이 그 사실을 증명하고 있었다.
그의 얼굴이 묘하게 일그러졌다.
이건 마치 사기를 당한 느낌이다.
“이렇게 만나 뵙게 되어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당황하고 있는 병규의 두 손을 꼭 잡으며 카즈엘을 따뜻한 미소를 보였다. 눈이 부실 듯한 미소에 병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탄식했다.
‘이런 미인을 남자로 착가하다니. 병규야 병규야. 넌 눈이 삐어도 단단히 삐었구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