흰색이군요, 공주님!!
쉬이익!
귓가를 스치는 바람 소리.
차갑다. 그리고 시원하다.
혼자 달릴 때도 그는 빨랐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로 그 속력이 엄청났다.
와이번은 대단한 기세로 날았아.
병규는 구름 위를 노니는 느낌을 받았다.
비행기를 타고 여행하는 것과는 달랐다. 말과 오토바이가 서로 다르듯 와이번을 타는 느낌은 생소하면서도 특별했다.
하늘을 나는 그 느낌 자체를 와이번과 공유하는 것 같았다.
“이얏호!”
두 팔을 쫙 벌리며 기성을 질렀다.
크라라.
와이변이 호응하듯 괴성을 지르더니 화려하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녀석. 내생각을 읽는 것 같구나.”
병규는 크게 웃으며 와이번의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어떻게 하면 지금 타고 있는 이 녀석이 묘기를 부릴까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다렸다는 듯이 와이번이 재주를 부린 것이다.
끄그그그. 와이번은 기분이 좋은 듯, 가늘게 목울대를 울렸다.
병규의 칭찬을 정말로 기쁜 듯 이 받아들였다.
마치 오래된 친구를 만난것처럼.
“이, 이놈아!”
콩하고 노쇠한 주먹이 병규의 머리통을 후려쳐 왔다.
“아쿠야. 왜요?”
고개를 돌려보니 수염을 배꼽께까지 늘어뜨린 대마법사가 골이 잔뜩난 얼굴로 그를 쳐다보고 있었다.
“이 무식한 놈아. 노인네 죽일 일 있더? 살살 가지 못해!”
노인은 어디서 그런 힘이 났는지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버럭 쇠성을 질렀다.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힘드셨어요?”
“메야! 힘들어? 이눔, 이눔아. 다 늙은 노인네를 등에 매달고 공중제비를 돌아? 보가지 부러지는줄 알았다 이눔아! 날 죽이려면 그냥 곱게 죽여라. 똥줄 빠지게 굴리지 말고!!”
빽빽 소릴 지르는 필라이트의 항변에 병규는 뒷머리만 벅벅 긁어댓다. 혼자서 기분을 내느라 위에 탄 필라이트의 존재를 잊은 것이다.
“그러게 다른 와이번을 타시라고 했잖아요.”
“뭐라고 이눔아! 내가 네놈처럼 요상한 놈인줄 아는게냐!”
“제가 왜 이상해요?”
“남이 힘들게 길을여 놓은 와이번을 한 마리도 아니고 때로 꼬셔 가지고는 무단으로 강탈해 가는 놈이 그럼 요상한 놈이지 고상한 놈이냐!”
“접.”
노인의 타박에 병슈는 괜스레 입맛만 다셨다.
필라이트의 말이 사실이라면 와이번이란 놈은 지극히 길들이기 까다로운 놈이다. 그런데 무슨 이유에선지 병규에겐 간이라도 빼줄 것처럼 친근하게 굴었다. 이유를 모르는 지금에선 요상한 놈으로 몰아세우는 노인의 주장에 뭐라고 반박할 말이 없는 게 사실이다.
“흠흠.”
괜히 헛기침을 한 병규는 은근한 맡투로 이야기의 방향을 슬짹 돌렸다.
"저기...... 마법사는. 궁금한 게 있는데요.“
“고연 놈. 다 죽어가는 늙은이에게 정 떨어지게 마법사가 뭐냐. 마법사가..”
“그럼 뭐라고 불러요?”
“그냥 할애비라고 불러.”
병규는 피식 웃었다. 겉으로는 괴팍한 노인네 행세를 하고 있지만 속정은 깊은 양반이 아닌가.
“네. 할아버지. 궁금한 게 있어요.”
“뭐냐?”
병규가 할아버지라고 부르자 딱딱한 필라이트의 음성이 조금 부드러워졌다.
“와이번을 길들이는 일은 굉장히 힘들다고 했잖아요. 그런데 그렇게 힘들게 길들인 와이번이 전장에서 무슨 역할을 하는 거죠?”
“쓰임이야 넘치지. 하늘을 고속으로 이동하는 놈들이니 물건을 나르거나, 소식을 주고받는 데에도 훨씬 용이할 테고.”
"그런 뻔한 대답 말고요. 와이번이 실제로 활용된 사례 같은 걸 얘기해 주세요.“
“ 볼래 드래곤 나이트는 바호크 공국에서 제일 먼저 활용핶다. 바호크 공국이ㅔ선 마법사가 드물고, 지형이 험하여 왕성에서 지방 영지까지 소식을 전하는데 불편한 점이 많았다. 그래서 대안으로 생각한 것이 와이번이었지. 드래곤나이트는 바로 그것이 발전된 형태라고 볼 수 있단다.”
“으흠. 그럼 마법사가 많은 나라에선요? 아이린 왕국의 경우는 마법사가 바호크 공국처럼 부족하지 않잖아요.”
“물론 그렇다.”
필라이트는 거창하게 헛기침을 했다. 그의노쇠한 목소리엔 어느덧 자부심이 어려있었다.
“바호크 공국이 드래곤나이트로 유명하고, 신성제국이 철혈의 신관으로 명성을 떨친다면, 아이린 왕국은 단연코 마법사와 정령술사가 나라를 대표한다고 할 수 있지.. 그런 아이린 왕국에서 드래곤나이트의 용도는 오직하나.”
“전쟁! 전쟁뿐이란 거죠?”
“녀석, 생긴건 멍하게 생겨 가지고선 눈치 하난 빠르구나. 물론 그렇다. 만약 전장에서 쓸모가 없다면 음흉한 필립 놈이 힘들게 와이번들을 길들였을 턱이 없지.”
“호오.”
병규의 눈이 반짝였다.
전쟁
수많은 병사들의 우렁찬 구령과 함께 뿌옇게 일어나는 먼지구름. 엄청난 병력의 치고받는 치열한 전투. 번쩍이는 풀 플레이트 메일을 둘러쓰고,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하는 기사들의 모습, 모두 멋있을 것 같은 장면이다.
하지만 고공을 자유로이 활공하는 드래건나이트와는 비교도 안된다.
마치 육중한 탱크끼리의 결전 중에 유유히 나타난 초고성능 전투기 같다랄까
“음. 그런데 말이에요. 와이번에 탄 기사들은 뭘 하는 거죠?”
“뭘 하긴, 당연히 와이번을 조종하지. 이놈이 히힝하고 울어대는 말처럼 순한 줄 아냐? 까딱 잘못하면 지상으로 추락하고, 재수가 없으면 먹이 대신 와이번에게 잡혀 먹힐수도 있다. 드래곤나이트는 한마디로 목숨을 건 직업이라고 할 수있지.”
말은 가끔 주인을 떨어트리긴 해도 배가 고프다고 제 주인을 잡아먹지는 않는다. 하지만 와이번이란 놈은 배가 고프면 부모와 같은 라이더도 쉽게 잡아먹는 것이다.
“흠. 이놈이 그렇게 포악한 놈이란 말이죠.”
병규는 와이번의 등을 툭툭 두드렀다.
아니라는 항변을 하고 싶은 듯 와이번은 가르릉 하며 길게 울었다.
이상하게 그에겐 재롱을 떨지만 기실 와이번은 몬스터 중에서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정도로 흉악한 놈인게 사실이다. 배가 고프면 트롤까지 채가는 무대포가 바로 와이번인 것이다.
가끔 동물원의 맹수들이 사육사를 죽이는 일이있다.
상당한 시간동안 길들여놓아도 그 밑바탕엔 억제할 수 없는 야성이 잠자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와이번이란 놈은 지구위 맹수들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만큼 크고 위험했다.
머리에서 꼬리까지의 길이가 12미터는 족히 되는 것 같았고, 날개를 펄럭일 때마다 일어나는 파공음은 웅장하다 못해 공포스러울 정도다.
‘흠. 과연’
와이번의 위협적인 외모만으로도 이 녀석을 조종하는 게 까다롭다는 것은 이해할 수 있었다. 실제로 자신의 말은 잘 알아듣지만, 다른 사람에게도 순한 양처럼 굴란 법은 업는 것이다. 하지만 정작병규는 딴생각을 품고 있었다.
“왜 와이번엔 기사만 타는 거죠? 마법사가 타면 안 돼요?”
"마법사?"
필라이트는 눈을 희번득하게 뜨며 반문했다. 그 독특한 억양만으로 그가 병규의 말을 얼마나 황당하게 생각하는지 짐작할 수 있을 정도였다.
“턱도 없는 소리. 그 속 좁고 겁많은 녀석들이 이 괴물의 등?에 올라탈 것 같으냐?”
필라이트는 그 자신도 마법사이면서 마법사에 대한 비평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마법사들이 와이번을 조종하면 공중에서 마법 같은 걸 쓸 수도 있잖아요.”
“이론상으론 그렇지. 하지만 실제론 그렇지 않아. 일단 마법을 쓰면 와이번들이 놀란다. 파이어 볼 같은 걸 쏘면 놀란 와이번이 등짝의 마법사를 떨어트려 버릴 게야. 와이번이란 녀석들은 그 정도로 성질이 고약한 몬스터다.”
“흐음.”
병슈는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정작 필라이트의 설명에 귀를 기울이진 않았다.
‘기사가 와이번을 조종하고, 같이 동승한 마법사가 마법을 난사 할 수 있다면? 이거야말로 생물로 만든 전투기잖아.’
그는 오직 와이번을 탄 마법사의 공대지 공격에만 정신이 팔려 있었다.
전에서 와이번을 제대로 활용하려면 마법사나 정령술사가 탑승 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떻게 해야 마법사를 태울 수 있을까.’
병규는 진심으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말을 타고 수도인 유리스에서 트라우마?지는 쉬지않고 달린다면 대략 일주일 정도의 시간이 걸린다. 이것은 둥도에 말을 갈아타거나 혹은 쉬지 않고 달렸을떄나 가는한 시간으로 실제론 이버다 훨씬 더 많은 시일이 걸리는 게 정상이다.
하지만 와이번을 탄 병규는 단 하루 만에 붉게 펼쳐진 모래 바다에 닿을 수 있었다.
정말이지 놀랍도록 빠른 속도였다.
“이와호오~”
붉게 펼쳐진 대지 위를 날며 병규는 두 팔을 높이 치켜들었다. 드디어 돌아왔다는 안도감과 하늘을 나는 쾌감이 합쳐져 짜릿한 전율을 선하했다.
하지만 정작 트라우마의 사람들은 머리 위를 날아다니는 와이번 들을 보며 공포에 떨었다.
병사들은 일제히 망루로 뛰어 올라가 활을 겨느고, 주민들은 가옥으로 숨어들어 두
하나만 나타나도 성 전체를 뒤숭숭하게 만드는 몬스터가 바로 와이번이다. 그런데 그런 위험천만한 몬스터가 떼로 나타났으니, 트라우마가 발칵뒤집히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이 녀석아. 와이번들을 멀리 물러나게 해. 사람들이 놀라지 않느냐.”
필라이트가 병규의 머리를 떄렸다.
“ 모두들. 잠시 딴 곳에 가 있어.”
병규가 말하자 와이번들은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괴성을 발하면서 사방으로 흩어 졌다.
“저쪽 공터로 가자.”
카악
병규가 한적한 공터를 손가락으로 가리키자 그를 태운 와이번이 길게 기성을 발하며 날개를 펄럭였다.
병규가 지시한 곳은 후작의 저택 뒤편이었다.
와이번이 웅장한 먼지구름을 피우며 공터에 내리자 일단의 사람들이 달려왔다.
활에 화살을 메긴 병사들이 공터 주위를 포위하듯 감쌌다. 초조한 긴장감이 흐르는 와중에도 화살을 날리지 않는 것으로 보아 누군가 와이번을 타고 있는 병규와 필라이트의 모습을 본 모양이다.
땅에 착지한 와이번은 등에 태운 사람들이 내리기 쉽도록 고개를 아래로 기울였다.
병규는 필라이트를 부축하고 쉽게 와이번에서 내려섰다.
“잘했다. 수고했어.”
병규가 와이번의 머리를 토닥여 줄 때다.
“아니!”
병사들을 헤치고 다가서던 사람들 중, 근엄한 인상의 중년인이 병규를 보고 가벼운 경탄성을 흘렸다.
“자네는.......”
병규 역시 그를 알아보고 반갑게 인사를 건넸다.
“글로리 후작님 그 동안 잘 계셨습니까?”
“그, 그렇네만.”
얼떨떨한 표정으로 병규의 인사에 답을 한 중년인.
그는 바로 트라우마의 성주이자 아이린 왕국이 자랑하는 세명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 글로리 후작이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가.”
와이번이 떼로 나타났다는 말에 초긴장하여 달려나와 봤더니 단순히 먹이를 찾아 나선 와이번들이 아니었다. 등에 인간을 테우고 있었던 것이다.
글로리 후작은 당연하다는 듯이 바호크 공국을 떠올렸다. 예부터 바호크 공국은 부족한 마법능력을 메우기 위해 와이번들을 길들여서 타고 다녔다.
“필시 공주님 때문이겠지?”
얼마 전 가까스로 찾아낸 공주에게서 바호크 공국과의 마찰에 대해서 들은 바 있었다. 그런 정황으로 미루어 본다면 지금 바호크 공국의 드래곤나이트의 출현이 전혀 어색하지 않다.
분명 필립 공작의 사주를 받아 드래곤나이트의 위세를 과시하기 위해 나타난 것일 테지.
‘감히!’
바호크 공국에서 공주가 겪은 고초를 생각하자 그의 두 눈에서 살기가 자욱하게 피어났다
하지만 정작 와이번에서 내린것은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가 아니었다.
하지만 정작 와이번에서 내린 것은 바호크의 드래곤나이트가 아니었다.
예전에 번 적이 있는 청년. 병규였던 것이다.
글로리 후작은 어안이 벙벙할 수밖에 없었다.
병규 에 대해선 얼마 전 트라우마를 찾은 레종 공주 일행을 통해 소식을 들은 참이다.
사막에서 갑자기 사라져서 일행이 많이 걱정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사라졌던 그가 돌연 와이번을 타고 나타날 줄이야.
“대체 어떻게······”
글로리 후작이 막 병규에게 자초지종을 물으려 할 때였다.
“피, 필라이트 님!”
병규 뒤에 숨은 체 우중충한 분의기를 풍기고 있는 노인을 본 루멘 백작이 경악을 질렀다.
“피, 필라이트?”
“맙소사.”
병사들 사이에서 소요가 일었다. 그만큼 필라이트라는 이름이 주는 충격은 가볍지 않은 것이었다.
루멘을 비롯한 공주 일파들은 하나같이 공경어린 태도로 노인을 대했다. 하나같이 조심스런 태도였다.
필라이트은 비단 왕국의 7서클의 대마법사일 뿐만 아니라, 전전대 국왕 때부터 왕국을 위해 헌신안 나라의 큰 어르신이라 할만한 인물이었다.
기사들의 공경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정말로 대마법사인가 보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필라이트는 처음부터 자신을 대마법사라고 주장했다. 하지만 걸출한 입담에 반쯤은 거짓말이 아닐까 의심하던 차였다. 그런데 이렇게 기사들이 반색하는 것으로 봐선 틀림이 없는 모양이다.
“어떻게 된 일입니까?”
루멘이 노인의 손을 잡으며 반갑게 소리쳤다.
반란이 일어나고, 왕성이 함락되는 와중에도 어떻게 된일인지 대마범사의 소식은 들리지 않았다. 그 동안 루멘과 디스는 대마법사의 행방을 찾으려고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감감무소식이었다. 그런 와중에 대마법사가 사라진 병규와 함께 와이번을 타고 나타날 줄이다.
놀랍기도 하고 기쁘기도 했다.
대마법사는 그 존재만으로도 커다란 전력이 되기 떄문이다.
“필립 놈에게 \속아서 이렇게 됐다.”
필라이트는 이를 으드득 갈았다. 필립 공작에게 당한 걸 생각하면 절로 치가 떨릴 지경이다.
미네르바의 기사들이 필라이트를 보고 감격해 마지않을 때, 병규 역시 몇몇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었다.
“이놈. 사람을 그렇게 걱정시키다니/”
호랭이는 다짜고짜 그의 정수리를 쿵 하고 내리쳤다. 병구는 두 손으로 머리를 요란스럽게 비비며 엄살을 떨었다.
“허이구야. 요즘 제 머리통은 동네북이 된 것 같습니다. 이리 터지고, 저리 터지고.”
“내가 또 언제 떄렸다고 엄살이다?”
“오는 내내 맞았다고요!”
병규는 불룩 혹이 솟아난 머리를 들어 보이며 강력하게 항변 했다. 하지만 그는 자신의 억울함을 호랭이에게 호소할 틈이 없었다.
“주인님!”
돌연 그의 그림자 속에서 샤바가 불쑥 튀어나왔다. 기겁하는 병규를 샤바가 막 끌어안으려는 찰냐! 별안간 퀴니가 그의 가슴을 향해 포옹을 가장한 바디태클을 걸었다.
“변기!!”
퍽!
둔탁한 소음과 함께 샤바는 비질에 쓰린 가랑잎처럼 날려졌고, 병규는 울컥하고 비명을 토해 냈다.
“퀴, 퀴니야. 넌 재회하자마자 살해할 작정이니?”
“많이 아파?”
소녀는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올려다 보았다. 병규는 피식 웃으며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아니야. 농담이야.”
병규의 말에 화사하게 웃던 퀴니는 돌연 입술을 삐죽 내밀더니 조막만 한 손으로 그의 가슴을 마구 두드렸다.
“미워! 미워! 미워!”
“미안해. 퀴니야.‘
병규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그녀를 위로했다.
“날 구고 가지 마.”
퀴니가 그의 허리를 붙들며 습기어린 음성으로 말했다. 병규의 가슴께가 축축해졌다.
“알았더. 다신 두고 가지 않을게.”
"거짓말쟁이.‘
눈물로 얼룩진 얼굴로 퀴니가 눈을 흘겼다.
“벌써 두 번이나 날 버렸으면서.”
병규는 고개를 갸웃했다.
“내가 퀴니를 두 번이나 버렸던가?”
그가 기억하는 것은 한 번뿐.
발칸의 수작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이드라센으로 넘어오게 되었을 때, 그 때 한 번뿐이다.
“다른 한 번은 언제를 말하는 거지?”
기억을 더듬어 봤지만 떠오르는 순간이 없었다.
퀴니가 던진 아리송한 말에 병규가 고개를 갸웃거릴 때다.
“변기님,”
고운 여자의 목소리가 들렸다.
“레종”
기사들을 헤치고 달려온 레종 공주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눈물을 글썽였다.
그녀는 퀴니처럼 과감히 달려들지도 못하고, 조금 거리를 둔 채,기쁨읜 눈물만을 하염없이 쏟았다.
“하하, 잘 있었어요.”
달리 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던 병규는 어색한 표정으로 연신 뒷머리만 긁적였다.
그 모습을 보고 호랭이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허이구, 생기지도 못한 놈이 오늘 여자 여럿 울리는구나.“
후작의 저택으로 자리를 옮긴 후, 병규와 필라이트에게 수많은 질문들이 쏟아졌다.
병규에겐 병규대로, 필라이트에겐 필라이트대로 물어볼 말들이 산더미처럼 많았다.
“시끄러워, 지하감옥에서 간신히 살아 돌아온 사람을 말려 죽일 작정인 거냐!”
견디다 못한 필라이트가 지팡이로 바닥을 찍어대며 고함을 지르자 그제야 들끊었던 분위기가
다소 안정되었다.
“쯧쯧, 못난 놈들.”
필라이트는 무에 그리 못마땅한지 연신 혓바닥만 찼다.
“험험.”
글로리 후작이 낮은 헛기침으로 어색한 분위기를 바꿔 보려 했다.
“공작님, 피곤한 줄은 알지만 궁금한 점이 있습니다. 괞찮으시다면 몇 가지 질문에 대답을 부탁드리겠습니다,”
“내가 괜찮치 않다고 하면 안 할테냐?”
필라이트가 짓궂은 표정으로 눈을 부라렸다. 글로리 후작은 여유있는 미소로 대응햇다.
“물론 그래도 물을 겁니다”
“능글맞은 녀석, 네 녀석의 능글맞은 행동은 여전하구나.”
노한 듯 말하는 필라이트의 입가에 잔잔한미소가 걸려 있었다.
본래부터 글로리 후작과 필라이트는 돈독한 사이였다.
“찬물도 위아래가 있는 법. 그간 쌓인 얘기는 아무래도 노인장이 먼저 하는 것이 좋을 듯하오.”
호랭이가 근엄한 음성으로 의견을 제의했다. 필라이트는 잠시 그를 쳐다보며 아리송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이상하군, 겉모습은 청년인데, 어째 나보다 더 늙은 사람처럼 느껴지니 말이야.”
사람들의 시선이 호랭이에게 쏠렸다. 안 그래도 그의 정체에 대해 다들 궁금해하던 차다.
하지만 호랭이즌 피식 웃기만 할 뿐, 자신의 신상에 관해선 일언반구도 언급하지 않았다.
잠시 묘한 정적이 흐르자 필라이트가 괜한 헛기침을 발했다.
“험험, 만인 원하니 다 죽어가는 늙은이가 먼저 사연을 이야기해야 할 것 같군.”
그렇게 필라이트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반란이 일어나기 며칠 전까지 필라이트는 마법사의 탑에서 평소와 다름없는 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때, 급박한 연락이 왔다.
아마스 제국에서 신비한 고대유적이 발견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연락의 출처는 알 수 없었지만, 필라이트는 이 진귀한 급보를 결코 그냥 넘길 수 없었다.
원래 마법사들은 탐구심이 강한 존재다.
이미 백 세가 한참이나 지난 필라이트 역시 예외일 수 없었다.
그래서 수행원도 없이. 달랑 신성제국에 잠시 다녀온다는 내용의 쪽지만을 남긴 채, 마법사의
탑을 떠났다.
하지만 그것은 공작이 의도적으로 흘맂 거짓 정보였다.
결국 허망하게 신성제국을 헤매던 필라이트는 뒤늦게 반란소식을
접하고 허겁지겁 테레포트 게이트를 통해 왕성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반란군의 기사와 마법사들뿐이었다. 필립공작의
준비가 워낙 꼼꼼했던 탓에 필라이트는 꼼짝없이 잡히고 말았다.
그 후, 지하 감옥에 갗힌 대마법사는 하루하루 이루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고통스런 나날을 보냈다.
필립공작은 그를 회유하려 애썼지만, 필라이트는 사생결단의 의지로 저항했다.
온갖 고문이 가해졌고, 달콤한 유혹들도 잇달았다.
그렇게 인간의 한계를 시험하는 듯한 고통스런 나날 속에 필라이트가 점차 삶의 의지를 잃어갈 즈음이었다.
그는 절망 속에서 한 줄기 구원의 빛을 만났다.
“그게 바로 이 녀석이지.”
필라이트는 콩하고 병규의 머리를 장난스레 쳤다.
“허어.”
“그럴 수가.”
경이에 찬 사람들의 시선이 병규에게로 쏟아졌다.
아이린 왕국의 천년 역사 중 지하 감옥을 탈출한 이는 단 세명에 불과하다, 그만큼 왕성의 지하감옥은
감옥으로써의 완벽함을 자랑했다. 그런데 이 볼품없는 청년이 불가능한 일을 해낸 것이다. 게다가
대마법사라는 엄청난 존재를 업은 채 말이다.
사람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고마워요.”
레종이 병규의 손을 잡은 채 따뜻한 미소를 흘렸다.
“뭘, 별로 한 일도 없는데.”
쑥스러워진 병규는 괜스레 뒷머리만 긁적였다.
“대마법사님께서 돌아오셔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릅니다.”
디스가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진실로 대마법사의 귀환을 기뻐했다.
이로써 일말의 가능성도 없던 일이 털끝만큼이나마 희망이 되었다.
“다 늙은 노인네가 과연 얼마나 공주님께 도움이 될지 모르겠군.
아마 이 몹쓸 늙은이보다는 이 망할 녀석이 더 도움이 될 게야.“
필라이트는 게슴츠레한 눈으로 병규를 슬쩍 흘겨보았다. 병규는
그 뇌살적인 눈초리에 흠칫 어깨를 떨었다.
“고마워요.변기님.”
“아하하. 뭘요.”
거듭되는 레종의 감사에 병규는 몸둘 바를 몰라했다.
“변기?”
글로리 후작의 눈이 반짝였다. 그는 예전에 병규를 만난 적이 있었다.
그런데 당시 들었던 이름과 지금 공주가 부르는 이름은 전혀 다른 것이었다.
“분명, 자네 이름은 카피라고 알고 있는데---.”
병규는 순간 난감해졌다. 그때,레종이 웃는 얼굴로 대강의 사정을 설명했다.
“사실은요,키피님의 본명이 변기래요. 그런데 변기라는 이름을 사람들이 이상하게 오해해서, 부득불 카피라는 예명을
지은 거랍니다.“
“호오, 그렇군. 하지만 그렇다고 이름을 바꾸다니. 흠, 그런데 왜 변기라는 이름을 오해한다는 것인지 모르겠군,내 생각엔 카피보다는 훨씬 좋은 것 같은데.”
“맞아요.. 왠지 친근감이 드는 이름같아요.”
“음음.절로 정감이 드는 친숙한 이름일세.”
“이름이란 자고로 부르기 쉽고 ,기억하기 쉬우면 되는 것인데.
그냥 변기해라.“
“그래그래.”
모두들 병규를 변기라고 부르기로 결정해버렸다. 병규는 얼굴이 해쓱해졌고, 호래이는 배를 잡고 바닥을 굴렀다.
“파하하, 변기야, 축하하한다. 이제 만인의 변기가 되었구나.”
약간의 소란이 있은 후 이번엔 병규의 이야기가 시작되었다.
할 말이 많았지만 병규는 간략하게 설명했다.
붉은 대지에서 살렘 후작과 겨루었던 이야기, 그의 엄청난 실력, 그리고 팔이 뜯겨져도 다시 달라붙던 살렘의
기묘한 신체.
기묘한 이야기들이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람들의 얼굴은 점차 굳어져만 갔다.
도저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들이었기 때문이다.
우선 살렘과 비등한 승부를 펼쳤다는 것 자체가 도저히 납득이 안 되었다.
“자네가 살레 후작의 팔을 잘랐다고? 허허허?”
강팍한 인상의 중년 사내, 칼슨 백작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살렘 후작.
아이린 왕국의 셋뿐인 소드마스터다.
소드마스터란 절대라 불러도 부족할 만큼 무의 정점에 달한 자를 말한다.
보통 제국에 한두 명 정도 밖에 없을 만큼 희귀하지만 그만큼 막강한 존재이기도 했다.
심지어 소드마스터의 숫자를 국력의 척도라고 말하는 사람까지 있을 정도다.
그런 만큼 모든 국가에서는 예산을 아끼지 않고 소드마스터 양성에 총력을 기울인다.
그러나 그렇게 정성 을 기울여도 대륙의 모든 기사들 중에서 소드마스터의 경지에까지 이르는 자는 고작 십여명 남짓.
그만큼 희귀하고 ,또 절대적인 존재가 바로 소드마스터인 것이다.
그런데 그런 소드마스터와의 호각의 결전을 벌였다니.
설사 병규가 엄마 뱃속에서부터 수련을 쌓았다고 하더라도 절대로 불가능한 일인 것이다.
“누가 들으면 소드마스터가 동네 골목대장 정도인 줄 알겠군,”
실내에 착석한 자들 중엔 노골적으로 불신을 드러내는 인물도 있었다.
모두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있을 때,몇몇 사람만은 그의 말을 믿었다.
호랭이와 퀴니. 샤바는 당연히 병규의 말을 믿었고, 글로리 후작 또한 반신반의하는 눈치였다.
일전에 그는 프리즘 용병단을 접견한 자리에서 은밀히 자신의 기운을 뿜어낸 적이 있었다.
그때 반응을 보인 사람 중엔 병규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병규의 말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 것은 살렘 후작과 격전을 벌였다는 병규의 상태가 너무 멀쩡했기 때문이다.
“뭐, 믿지 않으셔도 상관없어요.”
사람들의 부정적인 시선에도 병규는 여유를 잃지 않았다. 오히려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으며 노곤한 표정을 지었다. 사람들이 불신할 것임은 처음부터 예상했던 일이다.
그때 레종이 그윽한 음성으로 병규를 불렀다.
“변기님.”
“-----?”
“그 다음 얘기를 해 주세요. 아직 대마법사님과 와이번에 대한 이야기를 듣지 못했어요.”
“레----아니,공주님. 설마 당신은 제 말을 믿으시는 겁니까?”
병규의 물음에 레종은 차분히 고개를 끄덕였다.
“네”
“허허허.”
호랭이가 헛웃음을 흘렸다.
“인생을 살면서 자신을 믿어주는 지기를 단 한명만 얻어도 성공한 인생이라 했다. 병규야, 넌 적어도 실패한 인생은 아니구나.”
“하하, 그런 것 같네요.”
배시시 웃은 병규는 조용한 음성으로 살렘에게 패한 이후의 이야기를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는 다른 사람들은 모두 무시하고, 오직 공주의 눈만을 바라보며 이야기를 이어 나갔다.
마치 그녀만 들으라는 듯이.
“필립 공작이-- 인간이 아니었다고? 살렘후작 역시?”
병규의 이야기가 끝났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불신을 넘어 경악 그 자체였다. 쩍 벌어진 그들의 입이 충격의 정도를 말해 주는 것 같았다.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찢어지는 고함이 실내를 울렸다.
실내엔 기사들 말고도 뒤늦게 합류한 귀족들이 동석하고 있었는데. 방금 비명처럼 고함을 지른 인물은 좀 전 병규의 말에 냉소를 보이던, 바로 그 강퍅해 보이는 중년인이었다.
“무슨 소리를 하나 가만 듣고 있었더니, 가당치도 않은 말을 나부나불 잘도 지껄이는구나.”
“흥.”
“헛소리. 하등 들을 가치가 없는 잡소리에 불가하오.”
“아이들 동화도 이것보다는 더 현실적이겠군.”
대다수의 사람들이 그의 생각애 동조하는 듯, 목소리를 높였다.
‘쩝. 역시나 안 믿어주는군,‘
다시금 쏟아진 사람들의 냉소, 병규는 씁쓸한 표정으로 입맛만 다셨다.
고작 이 정도에 이런 극렬한 반응이라니, 마계가 곧 침공할지도 모른다는 말은 아예 꺼내지도 못할 상황이다.
그때, 가만 듣고만 있던 필라이트가 지팡이로 바닥을 쿵쿵 내리찍으며 입을 열었다.
“시끄러워, 꼬맹이가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닌데, 다들 왜 이렇게 난리야!”
‘네?“
“어찌 그런 말씀을.”
놀란 사람들이 두 눈을 휘둥그레 떴다. 다른 사람도 아닌 대마법사가 이런 허무맹랑한 말을 지지하다니, 사람들은 대마법사가 치매라도 걸린 것은 아닌 지 의심했다.
쾅.
필라이트가 시원스럽게 지팡이를 바닥에 찍었다. 깜짝 놀라는 사람들을 향해 노인은 짜증 가득한 음성으로 역정은 냈다.
“에잉. 시원찮은 것들. 하나같이 멍청하고 무능해. 마음에 드는 녀석이 하나도 없어. 자고로 머리에 든 게 없으면 잠의 말을 잘 듣기라도 해야지. 쯧쯧쯧.”
요란하게 혀를 찬 필라이트는 아예 귀족들은 보고 싶지도 않은 듯, 레종 공주와 글로리 후작만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꼬맹이 말은 사실이다. 내 이름을 걸어도 좋다.”
“그렇게 믿으시는 이유라도 있으십니까?”
다스가 눈을 빛내며 물었다. 무려 7서클에 이르는 대마법사의 발언, 그만큼의 무게가 실린 것이라면 필시 그럴만한 이유가 있을 것이다.
하지만 기대와 달리 필라이트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어보였다.
“없다.필립 놈이 인간이 아니라는 것은 나도 지금에서야 안 사실이니까.”
“네? 아니 그런데 어떻게 변기......군의 이야기를 믿으실 수 있다는 겁니까?”
눈을 휘둥그레 뜨고 묻는 디스를 향해 필라이트는 쇳소리가 가득섞인 음성으로 소리쳤다.
“보지는 못했다. 하지만 믿는다, 만난 지 오래되지는 않았지만 난 알 수 있다. 이 녀석은 비록 장난꾸러기 같은 녀석이긴 하지만 중요한 자리에서 거짓말을 할 위인은 아니야!”
대마법사의 확신에 찬 외침.
이번엔 귀족들도 감히 수군거리지 못했다.
불만이 있어도 감히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는 것이다.
또다시 회의실 안에 묘한 정적이 감돌았다. 꿈틀거리는 정적을 몰아 낸 것은 의외로 병규였다.
“ 저 공작님.”딱!
조심스럽게 필라이트를 부르는데 돌연 묵직한 주먹이 그의 머리통으로 떨어졌다.
“이눔! 할애비라고 부르라고 했잖느냐!”
“아구야, 네. 할아버지.”
병규는 눈물을 찔끔거리며 얻어맞은 머리를 긁적였지만 사람들은 신음을 삼키며 경악성을 질렀다..전전 대 국왕부터 필라이트가 왕실에 몸을 담은 지 이미 80년이 넘었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 누구도 필라이트를 편하게 대하지 못했다. 심지어 전대 국왕마저 그에게 말을 높였을 정도다.
필라이트 대마법사는 공작이라는 지고한 직위와 만인의 칭송을 받는 영광된 신분임에도, 그 특유의 도도한 성격 때문에
왕실 내 그 누구와도 어울리려하지않았기 때문이다.
아마도 왕국을 통틀어 그를 할아버지라고 부는 인물은 병규가 유일할 것이다.
“허허, 아무래도 대마법사님께선 자네가 마음에 드신 모양일세.”
글로리 후작의 입에서 헛웃음이 새어 나왔다. 귀족들 역시 놀라기는 매한가지.
모두들 숨을 죽인 채 병규와 필라이트의 관계를 추리하는 데 여념이 없었다.
어쩌면 병규는 장차 왕가의 중요한 인물로 떠오르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고연 놈,그래. 뭐가 궁금해서 이 다 죽어가는 할애비를 부른 게냐?”
“아고야 다른 게 아니라,와이번에 대한 얘기는 할아버지가 직접 해 주시는 게 좋을 게 뻔하잖아요.”
병규는 게슴츠레 바라보는 필라이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필라이트는 에헴 헛기침을 하며 탁한 목소리로 왕성을 헤매다 드래곤나이트를 향해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그도 그렇군.”
고개를 끄덕인 필라이트는 에헴 헛기침을 하며 탁한 목소리로 왕성을 헤매다 드래곤나이트를 양성하기 위해 길들인 것이 분명한 와이번 떼를 만나게 된 사연을 이야기하였다.
과연 병규 때와 달리 사람들은 곧 진지하게 필라이트의 말을 경청하였다. 하지만 정작 와이번을 단숨에 유혹해서 모조리 끌고 왔다는 말에는 모두들 고개를 갸웃했다.
필라이트가 직접 보았다니 믿지 않을 수도 없고, 그냥 고개를 끄덕이며 받아 들이자니 너무 황당한 소리다.
“쯔쯔, 몹쓸 녀석들. 아예 귓구멍에다 말뚝을 박고 살아라. 사람 말을 이렇게 못 믿어서야 원.”
필라이트는 연신 지팡이를 두드리며 역정을 냈다.
“녀석아.”
한참 화를 터트리던 필라이트가 씨근거리며 병규를 불렀다.
“이렇게 멍청한 녀석들을 깨우쳐 주려면 방법은 한 가지뿐이다.”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필라이트가 뭘 말하는 건지 눈치 cos 것이다.
“모두들 나가죠. 제말을 증명해 보이겠습니다.
회의실을 빠져나간 병규는 사람들으 저택의 후원으로 안내했다.
그곳엔 병규가 타고 온 와이번이 웅장힌 자태를 뽐내고 있었다.
캬악.
병규를 본 와이번이 고개를 수그리며 반가운 티를 냈다. 그 우렁찬 외침에 간담이 작은 귀족들은 몸서리를 치며 놀랐다.
“쉿, 조용히.”
병규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놀랍게도 와이번은 즉가 괴성을 멈추었다. 단순히 울부짖음을 멈춘 것 뿐만이 아니라 고개를 수그리며 한껏 조심스런 움직임을 보였다.
“쉿. 조용히.”
병규가 입가에 손가락을 가져가자 놀랍게도 와이번은 즉각 괴성을 멈추었다. 단순히 울부짖음을 멈춘것뿐만이 아니라 고개를 수그리며 한껏 조심스런 움직임을 보였다.
“ 잘했다.”
병규는 발아래 고개를 늘어뜨린 와이번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마치 잘 교육된 강아지를 다루는 듯한 태도였다.
“으음.”
“놀랍군.”
사람들의 입에서 신음 비슷한 것이 흘러나왔다.
“흐흐.”
필라이트의 입에서 득의의 웃음소리가 새어 나왔다. 귀족들이 놀라는 모습을 즐기는 듯한 태도였다.
‘흐흠.“
글로리 후작은 병규가 와이번과 유대를 나누는 모습을 굳은 얼굴로 지켜보았다. 몬스터에 불과한 와이번과 저런 유대감을 나누다니.
“과연, 와이번이 자네를 따른다는 말은 사실인 것 같군.”
“흥.”
차가운 냉소가 튀어놔왔다. 이번에도 칼슨 백작이었다.
“자네가 뭘 보여 줄지 궁금하군. 와이번들이 단체로 춤추는 모습이라도 보여줄텐가?”
“어떻게 아셨어요?” 과장되게 너스레를 떤 병규는 즉시 와이번의 등에 올라탔다.
“자. 올라가자.”
크라라.
대답하듯 괴성을 지른 와이번이 날개를 펄럭이자 먼지가 구름처럼 일었다. 순식간에 트라우마의 상공으로 솟은 병규는 와이번의 목을 두드리며 다시 말했다.
“네 친구들을 부르러 가자.”
카악.
와이번은 길게 울며 트라우마 위를 둥글게 맴을 돌더니 거친 모래바람을 가르며 힘차게 날았다.
“허. 정말 와이번을 애완동물 다루듯 쉽게 다루는군.”
밑에서 병규가 와이번을 다루는 것을 지켜보고 있던 글로리 후작은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도 드래곤나이트에 대한 아야기를 여럿 들어 존 적이 있었다.
그들의 낭만과 고충에 대해서도.
한데 병규는 마치 어린아이를 다루듯 가볍게 와이번을 조종하는 것이다.
믿기 힘든 일이지만. 학실히 와이번이 그를 따르는 것은 사실인듯했다. 눈앞의 현실이 그랬고, 필라이트의 말이 그런 사실을 뒷받침하고 있다.
잠시 후, 와이번을 타고 갔던 병규가 돌아왔다.
“자, 모두 데려왔어요.”
병규는 빙그레 웃으며 하늘을 가리켰다.
검은 그림자들이 트라우마의 상공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병규를 따라 왕성을 빠져나온 와이번들이었다.
. 잠자리처럼 성 위를 떼로 맴돌던 와이번들은 병규가 손가락질을 하자 폭포에서 떨어지는 폭포수처럼 일제히 수직으로 하강했다.
캬아아악.
한껏 입을 벌린 채 머리 위로 떨어지는 와이번들의 가공할 기세에 귀족들은 혼비백산하여 비명을 지르며 사방으로 뿔뿔히 흩어졌다.
이때, 병규가 지휘하듯 손을 휘젖자 우르르 쏟아져 내리던 와이번들이 유려하게 신형을 회전하며 다시 한 번 상공으로 솟구쳤다.
“이젠 믿으시겠어요?”
병규는 가쁜 숨을 헐떡이는 귀족들을 향해 능청스럽게 물었다.
목에 핏대까지 세우며 헛소리라고 부르짓던 귀적들은 꿀 먹은 벙어리가 된 채 병규의 시선을 피하기에 바빴다.
와이번들을 부릴 수 있다는 그의 말은 사실이었다.
그것도 마치 손 안에 든 장남감 다루듯 자유자재로 말이다. 세상어디에 이런 능력의 소유자가 있단 말인가. 귀족들은 눈으로 보고도 믿지 못하겠다는 표정들이다.
“허허허. 좋아. 아주 좋아.”
필라이트는 통쾌하게 웃었다.
오만한 귀족들이 오줌을 지리며 벌벌 떠는 모습은 보니 그렇게 통쾌할 수가 없었다.
그렇다고 모든 귀족이 수긍한 것은 아니었다.
“ 난 인정할 수 없다.”
칼슨 백작이었다.
와이번이 쏱아져 내릴 때, 제일 먼저 비명을 지르며 도망갔던 그는 헝클어진 머리를 정리할 생각도 하지 못한 채 병규룰 노려보며 목소리부터 높였다.
“뭘 인정할 수 없다는 거죠?”
“네,네 녀석이 와이번들을 다룰 수 있다는 것은 분명히 확인했다. 하지만, 아직 모든 걸 믿어 주기엔 이상한 점이 너무 많아. 우리가 알기로 와이번은 드래곤나이트의 말 외에는 절대로 듣지 않는다.
그런데 넌 필립 공작이 공들여 키운 와이번들을 단숨에 부릴 수 있게 됐다.“
“..........”
병규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빙빙 돌려 비꼬는 듯 말하는 귀족의 말이 목에 걸린 가시만큼이나 불쾌한 기분이 들게 했다.
“도대체 하고 싶은 말이 뭡니까?”
병규의 물음에 칼슨 백작의 얼굴 위로 특유의 얄미운 미소가 다시 번졌다.
“흐흐. 네 정체가 의심스럽다는 것이다. 미천한 자여. 네가 혹 필립 공작이 심어놓은 첩자인지 아닌지 어떻게 알겠느냐?”
비아냥 섞인 음성으로 뇌까린 그는 다른 귀족들을 향해 연설을 하듯 힘차게 소리쳤다.
“존귀한 여러분. 부디 평정을 잃지 마십시오. 저기 서 있는 저 녀석. 저 보잘것없는 놈의 정체에 대해 우리는 냉정하게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요즘 같은 혼란한 정세엔 누가 동료고 누가 첩자인지 구별해 내기 어럽습니다.하지만 우리는 반드시 적아를 구분해 내야 합니다. 그래야 어려운 국면을 타파할 수 있습니다.
고고하신 여러분. 저 자, 몬스터를 마음대로 부리는 수상한 저자는 어쩌면 반란군의 간세인지도 모릅니다. 의심을 거두기엔 와이번을 부리는 그의 능력이 너무도 의심스럽습니다. 모두들 아실 것입니다. 와이번을 길들이는 일이 얼마나 어려운지. 여기서 여러분들은 당연한 의문을 한 가지씩 갖게 될 것입니다. 어떻게 저자는 와이번들을 저토록 잘 다룰수 있는 것일까.“
그가 팔을 좌우로 펼치며 힘차게 연설하자 귀족들 사이에 가볍지 않은 반향이 일었다.
“그렇군.”
“확실히 이상해.”
칼슨 백작의 입가로 득의의 미소가 떠올랐다. 어리석은 귀족들이 미끼를 물었다. 이제는 느긋하게 낚시를 즐기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어쩌면 말입니다. 저 자는 필립 공작이 심어놓은 간세가 분명할지도 모릅니다. 처음부터 와이번을 다룰 수 있는 드래곤나이트로 키워졌을 것입니다. 그 때문에 와이번을 자연스럽게 다루는 것이겠지요. 왕성에 몰래 숨겨진 와이번들을 탈취하여 어려운 국면의 반란군에 합류한다. 반람군측에선 쌍수를 들고 환영할 일입니다.
하지만 속지 마십시오. 저 자는 와이번이란 미끼로 모두의 눈을 흐리게 만든 후, 우리의 정보를 빼내 간악한 필립 공작의 코앞에 갖다 바칠 것입다, 여러분, 잊지 마십시오. 녀석은 천한 용병입니다. 돈이라면 무슨 짓이라도 하는 돈벌레 같은 녀석이란 말입니다.“
처음 그의 말은 병규가 첩자일지도 모른다고 했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수록 병규를 아예 첩자로 낙인찍는 듯한 어조가 강하게 풍겼다.
그의 연설 아닌 연설이 끝나자 귀족들 가운데 동조하는 자들이 하나 둘 나타났다. 언뜻 생각하기엔 나름대로 일리가 있어 보였기 때문이다.
실제로 병규의 정체은 아무것도 밝혀진 것이 없었고, 그의 직업 역시 대외적으로는 용병인 것이 분명했다.
귀족들이 경계하는 것도 당연한 일이다.
하지만 막상 경계의 대상이 되는 병규로서는 기분이 더러울 수밖에 없었다.
“쩝, 오합지졸들만 모아 놓았구나. 이런 놈들을 지휘해서 전쟁을 벌이는 것이라면 설사 이쪽의 병력이 적보다 몇 배가 많다 하더라도 결국 지고 말 겨야.”
어리석은 자의 선동에 쉽게 넘어가는 귀족 놈들을 보니 속에서 천불이 끓었다.
한편으론 이런 자들을 이끌 공주가 불쌍하게 여겨지기까지 했다.
‘아무래도 오래 있을 곳은 못 되는 것 같다. 호랭이 들과 함께 떠나는 것이......“
병규가 트라우마를 떠나야겠다고 마음을 굳히려는 순간이었다.
“당치도 않아요.”
레종 공주의 고함이 어수선한 분위기를 단숨에 내리눌렀다.
수군거리느라 나불거리던 귀족들의 입이 한순간에 닫혔다.
“그는, 그는 절대로 반란군의 첩자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레종 공주는 눈살을 찌푸린 귀족들을 향해 간절한 어조로 항변했다. 마치 자신이 억울한 일을 당한 것처럼 눈물까지 글썽였다.
정말로 억울했다.
단지 출신을 알 수 없다는 것 하나만으로,이렇게 사람을 매도할 수 있다니.
혐오감이 일었다.
귀족들의 더러운 심성에 구역질이 났다.
병규의 억울함을 생각하니 손이 부들부들 떨릴 지경이다.
그녀가 생각했던 아름다운 왕국의 모습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자신이 다스리던 사람들이 이토록 무능하고, 타인을 인정할 줄 모르는데, 그들이 다스리는 백성들은 또 얼마나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마음 같아선 지금 눈앞의 귀족들을 모조리 숙청해 버리고 싶은 심정이다.
“공주님, 지금은 사사로은 정에 이끌릴 때가 아닙니다. 모름지기 지도자는...... .”
강퍅한 인상의 귀족이 다시금 유려한 말솜씨로 공주를 자극했다.
그러나 그의 말은 강철과 같은 의지를 품은 목소리에 의해 산산이 부서지고 말았다.
“나도 공주님과 같은 생각이다.”
무거운 음성으로 한순간 좌중을 휘어잡은 이는 다름 아닌 루멘 백작이었다. 미네르바 기사단의 단장이기도 한 그는 귀족들 사이에서도 상당히 영향력 있는 인물이었다.
느릿느릿 걸음을 떼며 앞으로 나아간 그는 칼슨을 보며 두 눈을 무섭게 빛냈다.
“칼슨 백작. 그대의 말을 틀렸소.”
근엄한 루멘의 말에 움찔한 칼슨이지만 그 정도로 기가 죽지는 않았다.
“허허. 그렇다면 당신은 저 녀석의 정체를 알고 있기라도 한단 말이오?”
루멘은 고개를 저었다.
“모르오.”
“큭.”
칼슨의 입가에 비릿한 비웃음이 떠올랐다. 그러나 루멘의 말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하지만!”
그의 불타는 듯한 눈이 좌중을 쓸었다. 귀족들은 그의 강렬한 눈빛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렸다.
“나. 루멘의 명예를 걸고 맹세할 수 있소. 그는 절대로 첩자 따위가 아니오.”
무거운 음성. 그리고 그보다 더 무게있는 선언이었다.
“허.”
사람들의 입에서 가벼운 탄성이 흘렀다.
기사가 명예를 건다는 것. 그것은 목숨보다 더한 가치를 가졌다.
이때, 공주를 호위하고 있던 미네르바의 가사들이 일제히 칼을 뽑아들었다.
치치칭.
햇빛이 번뜩이는 서른 개 남짓의 섬광은 밤하늘을 밝히는 횃불처럼 사람들의 시야를 눈부시게 했다.
“우리들의 명예도 걸겠소.”
한 사람의 기사가 웅헌한 음성으로 외치자 나머지 기사들이 복창하듯 따라했다.
“나의 명예를 걸겠소.”
“나의 명예를 걸겠소.”
미네르바의 기사들 모두가 검을 빼든 채 병규를 지지했다.
검 끝을 아래로 향해 내린 자세. 그것은 상대를 위협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기사들의 검은 곧 생명,또한 명예의 상징이다.
지금 이 순간 미네르바의 기사들은 병규를 위해 자신들의 생명과 명예 모두를 건 것이다. 아래로 비스듬히 내린 검은 곧 그러한 맹세를 뜻하는 것이다.
“이런...... .”
한참 귀족들을 선동하고 있던 칼슨은 당황하지 않을 수 없었다.
설마 왕정기사단 모두가 이 정체 모를 녀석을 지지하고 나설 줄이야.
이것은 전혀 계산 밖의 일이다.
그가 병규를 몰아세운 것은 왕국의 혼란한 틈을 타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려는 데 있었다.
이번 반란엔 영향력있는 귀족들이 대거 참가했다. 그런 이유로 현재 공주 편애 선 귀족들은 중앙에서 밀려난, 한마디로 세력이 미미한 자들뿐이다. 만약 이곳에서 자신의 입지를 공고히 하고, 나아가 반란군을 제압한다면 이후의 출세는 보장된 것이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그런데 그런 장밋빛 계획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곳에서 비틀어져 버리고 말았으니.
사실 병규가 유난히 눈에 거슬린 것이 사실이다.
어디서 나타난 것인지 족보도 없는 놈이 감히 공주에 이어 필라이트 대마법사와도 친분을 맺었으니 말이다.
지위향상의 기회를 노리고 있는 칼슨 백작에겐 그의 존재가 만만찮은 위협으로 느껴지고 있었다. 그래서 다소 거짓을 섞어 그를 모함한 것인데. 설마 기사단 전체가 그의 편을 들 줄이야.
과연 기사단의 결정은 귀족들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다.
은근슬쩍 그에게 동참하던 귀족들이 돌연 등을 돌려버린 것이다.
“미네르바 기사단이 저렇게까지 말한다면야...... .”
“어쩌면 믿을 수 있는 사람일지도.”
“전에 들으니 바호크 공국에서 공주님을 탈출시키는 데 혁혁한 전과를 세운 적이 있다고 하지 않았나. 만약 그가 필립 공작의 첩자였다면 공연히 그런 번거러움을 자처하지는 않았겠지.”
여론은 급격하게 병규를 옹호하는 쪽으로 기울었다. 결국 칼슨 백작으 얼굴을 붉히며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공주님 앞이다. 전원 검을 거두어라.”
루멘이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수하들이 당당하게 자신의 포부를 밝힌 것은 자랑스런운 일이나, 왕족 앞에서 검을 빼든 것은 큰 무례를 범하는 행동이다.
기사들은 검을 뽑을 때 그랬듯이 루멘의 지시하에 일제히 검을 회수했다.
어깨를 쫙 편 채 당당한 자세로 돌아간 그들은 병규와 시선이 마주칠 때마다 씩 하고 의미심장한 미소를 보였다.
병규도 그들을 향해 마주 웃어 보였다.
“생각보다 정말 멋있는 사람들인걸.”
고란산맥에서 만난 이후로 병규 일행과 기사들은 시간만 나면 툭탁거리며 싸웠다. 한때는 정말 위험한 상황까지 치닫기도 했다.
한데 생사고락을 함께한 전우애 때문일까. 앙숙처럼 으르렁거리던 기사들이 정작 위기상황에서는 오히려 병규의 손을 들어준 것이다.
솔직히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며 그를 옹호해 줄 때는 살짝 감동스럽기도 했다.
상황이 대충 정리되는 듯하자 여태 느긋한 태도로 사태를 관망하던 글로리 후작이 앞으노 나섰다.
“서로간의 오해도 풀린 것 같으니, 오늘의 회의는 이만 마무리 짓도록 합시다.”
귀족들을 해산시킨 글로리 후작은 기사들로 하여금 핖라이트 공작을 저택의 방까지 수행토록 명령했다.
‘피곤해 보이십니다. 좀 쉬십시오. 대화는 내일 마저 하도록 하죠.“
아닌 게 아니라 필라이트는 많이 피곤했다.
지하감옥에서 그런 고초를 당하고, 왕성에서 트라우마로 오는 하루 동안 잠도 제대로 자지 못햇다. 언제 죽을지도 모른 나이인 노인에겐 무리도 이런 무리가 없었다.
필라이트가 사라지자 공주의 눈치를 보던 귀족들도 하나 둘씩 자기자리로 돌아갔다.
결국 후원에 남은 것은 병규 일행과 몇몇 사람들뿐이었다.
“이대로 안 되겠군.”
흩어지는 귀족들을 노려보고 있던 글로리 후작이 한숨을 내쉬었다.
가히 모래와 같은 녀석들이다.
공주를 돕겠다고 멀리 트라우마까지 와 준 것은 고마운 일이나. 무능한 자들은 절대로 도움이 되지 못한다. 어려운 국면을 더욱 혼란스럽게 할 뿐이다.
저들 중에 진실로 공주를 위해 나설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아마 대부분은 왕권 회복 후의 권력 상승을 노린 간사한 자들이 분명할 것이다.
그는 새삼 개혁이 필요하다는 것을 절감했다.
이 상태로는 결코 필릷 공작의 상대가 될 수 없다.
‘어쩌면 이것은 기회일 수도 있다.’
무능한 녀석들을 내치고, 젊고 유능한 자들을 현역으로 내세울 다시없는 기회 말이다.
물론 일을 진행시키기 위해선 공주의 도움이 절실하다. 그러나 그는 확신했다. 그 동안 보고 격은 공주의 품성이라면, 틀림없이 쌍수를 들고 환영할 것이라고.
귀족들에 대한 생각을 굳힌 그는 밝은 얼굴로 병규를 돌아보았다.
“한 가지 궁금한 것이 있는 데 , 대답해 줄 수 있겠나?”
“대답해 드릴 수 있는 것이라면 얼마든지요.”
“도대체 와이번들이 왜 자네를 따르는 것인가?”
지금까지 어느 누구도 그처럼 와이번을 떼로 조종하지 못했다.
“그것이........ 저도 잘 모르겠어요.”
병규는 머쓱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뭔가 대단한 대답을 기대하던 사람들을 한 순간 호탈하게 만들고 남을 만큼 맥 빠지는 대답이었다.
사실 와이번에 관한 것만큼은 병규 자신이 제일 궁금해하는 문제다.
와이번들이 왜 자신을 따르는 지 그 또한 모르기 때문이다.
“흠.”
글로리 후작은 심각한 표정으로 턱을 두드리며 잠시 생각에 빠졌다. 그는 병규가 와이번들을 마음대로 부릴 때부터 희망에 불과할지도 모를 계획을 가슴에 품었다.
‘어떻게 하면 이 와이번을 활용할 수 있을까.“
만약 기사들을 와이번에 태울 수만 있다면 그야말로 무궁무진한 활약을 기대할 수 있을 것이다.
문제는 이와이번들이 병규의 말만을 듣는다는 것이고, 더욱 큰 문제은 현재 트라우마에 상주하고 있는 기사들 가운데 드래곤나이트로서의 교육을 받은 이가 전무하다는 것이다.
결국 눈앞에 이렇듯 훌륭한 전술적 무기가 있음에도 제대로 활용할 방법이 없다는 것이다.
“하아, 정말 아쉽게 됐군.”
글로리 후작은 정말로 안타까운 듯 미간을 은은하게 찌푸렸다.
“저...... .”
글로리 후작이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병규가 조심스럽게 말을 건넸다.
“혹시 후작님께서 생각하시는 것이 드래곤나이트라면 어쩌면 방법이 있을지도 모릅니다.”
“뭣?”
병규의 대답에 후작의 눈이 휘둥그래졌다.
“자세히 말해 보게. 설마 자네 말은 이 와이번들에게 우리 기사들을 태울 수 있다는 것인가?” “아마도...... 가능할 것 같습니다.”
“가능할 것 같다? 확실한 것은 아니군.”
병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한 번도 실험해 본 적은 없으니까요.”
“흐음, 흥미가 생기는군, 그래, 어떻게 와이번들에게 기사를 태울 생각이지? 알다시피 와이번들은 각인된 자 이외엔 등을 허락하지 않네.”
심각한 표정으로 묻는 글로리 후작이었지만, 병규의 대답은 지극히 간단했다.
“그냥 태울 생각입니다.”
“그냥?”
고개를 끄덕인 병규는 자못 심각한 표정으로 뒷말을 이었다.
“왕성에서 트라우마까지 날아오는 동안 전 와이번들에게 이런저런 명령을 내려 봤어요. 신기할 정도로 잘 알아듣더군요.”
설명을 하면서 병규는 손가락을 가볍게 저어 보였다. 좀 전에 와이번을 부릴 때 보였던 바로 그 동작이었다.
글로리 후작은 이내 그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흠, 자네가 명령하면 와이번이 드래곤나이트가아닌 기사들을 등에 태울지도 모른다든 말인가?”
“아마도요.”
“확신은 아니군.”
“해 본 적은 없으니까요.”
“결국 누군가 실험을 해 봐야 한다는 말이네요?”
고운 음성과 함께 가녀린 인영이 다가섰다.
레종 공주였다.
“공주님....... 설마, 직접 타 보실 생각이십니까?”
글로리 후작이 놀란 듯이 물었다. 공주가 나설 줄은 꿈에도 몰랐던 것이다.
“누군가 시험해 봐야 한다면서요? 그 영광된 자리,제가 차지하고 싶어요.”
그녀는 밝은 음성으로 말했지만, 글로리 후작의 안색은 한층 어두워졌다.
‘죽을 수도 있습니다.“
“알아요.”
공주는 혀를 내밀며 귀엽게 웃었다.
이상한 일이었다.
그녀는 분명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데, 지켜보는 사람들은 그녀가 더없이 진지하게만 느껴졌다.
“안 됩니다!.”
부리나케 달려온 디스가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절대로, 절대로 안 됩니다.”
그는 두 팔로 그녀의 앞을 가린 채 완고한 태도로 소리쳤다.
“번기 군의 말읃 듣지 못했습니까? 와이번이 정말로 다른 사람을 태울지는 누구도 확신할 수 없습니다.
자칫하면 죽을 수도 있단 말입니다.“
“알아요.”
‘자신의 목숨을 소중히 여기셔야 합니다. 공주님이 죽으면 우리 모두를 재탱하고 있는 구심점이 사라지게 됩니다. 책임을 떠올리소서. 왕가를 보전하실 수 있는 분은 공주님뿐입니다.“
“그것도 알아요.”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디스의 말에 레종공주는 계속해서 고개를 끄덕였다. 디스의 완고한 표정이 조금 풀어졌다. 공주가 말귀를 알아듣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어찌 이리도 생명을 가벼이 여기신단 말입니까. 와이번에 대한 실험은 다른 기사들에게 맡기시면 됩니다. 쓸데없는 고집은 그만 두시고 이쪽으로 물러서십시오.”
“그건 싫어요.”
이번만은 레종도 물러서지 않았다. 디스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반란군을 물리치고, 왕가를 바로 세워야 하는 책임감도,유일한 왕손으로서의 의무도 모두 안다 했다. 그런데 어찌 이런 터무니없는 고집을 부린단 말인가. 디스는 답답해서 가슴이라도 쥐어뜯고 싶었다.
하지만 레종에게는 나름대로 물러설 수 없는 이유가 있었다.
그녀는 불같이 일렁이는 디스의 눈을 보며 단호한 태도로 입을 열었다.
“반란군에게 맞설 결심을 한 이상, 여기 있는 모두는 이미 목숨을 건 거예요. 모두가 저만 믿고 있다고 했나요? 맞아요. 틀림없는 말이에요. 하지만 그런 그들에게 저의 의미는 뭐죠? 단순히 왕가를 의미하는 상징? 싫어요.그런 존재로 남고 싶지 않아요. 기왕에 시작된 일. 확실히 책임지고 싶어요, 저도 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싶어요,”
“책임지는 것과 와이번을 타는 것이 무슨 상관이 있단 말입니까!”
“고작 이런 일도 못해서야 누가 절 따르겠어요?”
레종 공주는 울분을 토해 내듯 크게 외쳤다.
사분오열한 채 자신들의 목소리만 높이던 귀족들의 모습.
극히 어렵고 혼란스런 정세임에도 자신의 밥그릇만을 탐하던 그들의 교만한 모습은 그녀에게 적잖은 실망감과 큰 충격을 주었다.
이곳에 모인 귀족들이 모래와 같다고 느낀 것은 글로리 후작뿐만이 아닌 것이다.
두 주먹을 꾹 움켜쥔 채, 부들부들 떨고 있는 그녀의 단호한 모습에 디스는 결국 물러설 수 밖에 없었다.
그가 생각하고 있던 것보다 훨씬 더, 공주는 책임감을 느끼고 있었다. 단호한 그녀의 결심을 디스는 결코 꺾을 수 없었다. 디스를 물러나게 한 레종은 숨을 가다듬으며 병규를 찾았다.
“제가...... 하게 해 주세요.”
빨갛게 상기된 그녀의 얼굴을 보던 병규는 한 손을 휘두르며 우아하게 인사했다.
“환영합니다, 최초의 드래곤프린세스시여.”
크드드등.
레종 공주가 다가가자 와이번은 이를 드러내며 적의를 보였다.
소름이 쫙 끼칠 정도로 공포스런 그 모습. 병규에게 한껏 재롱을 떨던 그 와이번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다.
병규는 공주를 향해 이를 드러내고 있는 와이번에게 다가갔다.
머리를 쓰다듬자 와이번은 끄응 하고 얕은 소리를 냈다. 레종은 과연 병규가 무슨 행동을 할까 온 신경을 곤두세웠다.
곧 그녀는 어이없는 웃음을 흘려야 했다.
와이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병규가 진지한 표정으로 한 말은 ‘공주님을 잘 부탁한다’가 고작이었기 때문이다.
“너무 간단해요.”
레종이 원망스럽다는 듯 한마디 뱉었다.
“그래서 불안하신가요?”
병규가 유쾌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의 얼굴을 가만히 보던 레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아니오.”
너무도 쉽게 고개를 흔드는 그녀. 괜히 농을 걸던 병규가 무안해 질 정도였다.
‘이 아가씨가 순진한 건지, 아니면 날 정말로 믿는 건지."
레종의 태도에 병규눈 혼란을 느꼈다. 지금까지 한 번도 느껴보지 못한 생소한 느낌이었다.
호랭이가 터벅거리는 걸음으로 레종에게 다가왔다.
“걱정마라. 떨어지면 도술로 내가 잡아주마.”
“도술?”
“내가 쓰는 마법 말이다.” 호랭이가 부리던 신기한 마법을 떠올린 레종은 조금 안심이 되는 듯, 표정이 밝아졌다.
“그럼 믿을 게요.”
그녀는 병규의 인도에 따라 와이번 위에 올랐다.
푸쉭.
와이번이 길게 숨을 내쉬더니 상체를 불쑥 일으켰다. 말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높이였다.
“어마.”
레종 공주는 짧게 비명을 흘렸다.
쥐어 짜듯 꼭 쥔 안장으로 그등그등 와이번의 거친 숨결이 느껴졌다.
“정말 괜찮을까?” 후작이 확인하듯 병규에게 물었다.
병규는 대답하지 않았다.
확신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와이번들은그의 말을 무척 잘 따라 주었다.
과연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을 태우고서도 본인의 명령을 들을 것인가.“
걱정스러운 것은 병규도 마찬가지였다.
사실 이 자리에서 레종 공주의 안위를 가장 많이 걱정하고 있는 사람이 바로 병규 자신이었다.
초조한 시간이 흘렀다.
파도치듯 오르는 와이번, 그리고 눈을 꼭 감은 채 와이번의 목을 꽉 끌어안은 공주.
지켜보는 사람들의 손바닥이 축축한 땀으로 젖어들었다.
크롸롸.
성벽 위로 수직 이륙한 와이번이 길게 괴음을 터트리더니 돌연 쏘아진 화살처럼 날아가기 시작했다.
“헛.”
“고, 공주님.”
와이번이 순식간에 시야에서 사라지자 사람들의 입에서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그러나 다음 순간, 마치 사람들이 놀라는 모습을 즐기기라도 하는 듯이, 사라졌던 와이번이 구름을 뚫고 성 위를 멋지게 활공했다.
“까아아아악.”
비명과 환성이 뒤섞인 공주의 목소리가 보슬비처럼 쏟아져 내렸다. 와이번을 타는 것을 두려워하던 공주는 어느새 하늘을 나는 것을 즐기고 있었다.
와이번 또한 그런 공주의 마음을 읽은 듯, 단순히 나는 것으로 모자라 화려하게 공중제비를 돌았다.
“야. 아아. 이얏호.”
공주의 입에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하늘을 난다는 쾌감에 이미 반쯤 겁을 상실한 상태였다.
하지만 밑에서 보고 있는 사람들은 민망하여 감히 고개를 들지 못했다.
“공주님...... 치마가..... .”
글로리 후작은 한숨을 포옥 내쉬었다.
와이번이 공중제비를 돌 때마다 공주의 넓은 치마가 뒤집혀져서, 그녀의 하얗고 늘씬한 다리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던 것이다.
“용기 있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천방지축인 건지.”
사람들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하지만 그들은 몰랐다.
공주가 치마를 펄럭이며 하늘을 나는 지금 이 때가, 아이린 왕국 최초의 드래곤나이트의 탄생을 알리는 영광의 순간임을,
“하하하. 멋진걸.”
병규는 느긋한 자세로 하늘을 나는 공주님을 올려다보았다. 잠시 후, 그의 얼굴이 발그레 붉어졌다.
“흰색......이시군요. 공주님.”
한편 레종 공주의 펄럭이는 치맛자락에 묘한 감동과 감격을 느끼고 있는 병규를 쀼루퉁헌 얼굴로 퀴니가 노려보고 있었지만, 병규는 전혀 이를 눈치 채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