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52/102)

너 이놈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

 희뿌연 안개 속에서 병규은 다시 살렘과 마주서게 되었다.

 여전히 놈은 그를 보고 시시덕거리고 있었다.

 “죽어라.”

 병규는 요수의 발톱으로 사정없이 그를 그러 버렸다.

 쫙쫙.

 책받침에 칼질을 한 것처럼 살렘의 몸뚱이는 잘도 쩍쩍 갈라졌다.

 “죽어!죽어!죽어! 없어져 버려!”

 병규는 그의 몸뚱이를 잘게 쪼갰다. 피투성이가 된 살렘의 몸은 주먹만한 크기로 사방에 흩어져 버렸다.

 “돼,됐다.”

 병규은 소매로 이마의 땀을 닦으며 희열에 찬 탄성을 흘렸다.

 사람을 죽였음에도 일말의 죄책감도 들지 않았다.

 ‘그래. 이 녀석든 원래 괴물이었으니까.’

 가슴을 가득 채우는 희열감에 병규는 저도 모르게 괴소를 불렀다. 그런데..

 "즐거우셨습니까?“

 섬뜩한 미소와 함께 살렘은 부활해 있었다. 주면만한 크기로 잘라진 살점들은 실로 꿰맨 듯 누더기가 되어 있었지만, 놈은 전혀 불편함을 못 느끼는 듯했다.

 “이.. 이놈이!”

 병규의 눈자위가 바르르 떨렸다. 극도로 치솟은 분노는 그를 광분케 했다.

 “죽어! 죽어! 죽어! 제발.. 죽으란 말이다.!!”

 팔을 휘두르다 지친 병규가 철퍼덕 땅 위에 엎어졌다.

 숨을 헐떡이는 그를 살렘이 가만 내려다보며 웃었다.

 “즐거우셨습니까?”

 왈칵 두려움이 솟았다.

 놈의 웃는 얼굴. 정말로 보기 싫다. 그런데도 이 원망스런 눈동자는 살렘의 시시덕거리는 낯짝에 못이라도 박힌 듯 움직일 생각도 않았다.

 쫘악!.

 갑자기 살렘이 자신의 팔을 뜯어다가 다시 붙였다. 전에도 그랬던 것처럼 형체 없는 연기처럼 그의 팔은 잘도 붙었다.

 “나쁘지 않군요.”

 살렘은 팔을 좌우로 펼쳐 보이며 잔혹하게 웃었다.

 쫘악!

 다시 팔이 뜯겨졌다. 이번에 머리 위에 올려진 채 손가락을 움직인다.

 보고 싶지 않다. 눈을 감고만 싶다.

 하지만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살렘은 전과 달리 새로운 변화를 보여 주고 있었다.

 “사실 전 이런 모습이랍니다.”

 쯔 으읍.

 놈의 눈동자가 세로로 갈라졌다.

 동시에 스멀스멀 풍겨 나오던 살기가 몇 배나 폭증했다.

 숨이 막힐 정도로 막대한 기운이 하늘을 뒤덮고, 대지를 휘감는다.

 모든 것이 암흑으로 뒤덮인 듯한 느낌.

 ‘이건 예전에..“

 비슷한 경험을 한 적이 있었다.

 리치가 마왕을 소환하려 했을 때, 그 때의 소환진 안도 이것과 비숫한 환경이었다.

 “쿠쿠쿠. 어떤가요?”

 살렘이 그를 보고 웃었다.

 눈.

 그의 눈동자가 고양이처럼 세로로 갈라져 있었다. 그나마 이 정도는 봐줄 만하다. 하지만 눈자위까지 세로로 갈라진 것은 끔찍해서 맨눈으로 봐줄 수 없을 정도로 공포스러웠다.

 살렘의 눈은 십자 모양으로 쩍 벌어진 눈자위 안에서 시뻘건 안광을 빛내고 있었다.

 하지만 병규의 눈을 가장 잡아끈 것은 그의 이마 위에 돋아난 세 개의 뿔이었다.

 “크후후후. 제 모습이 어떻죠? 말해 봐요. 멋지지 않나요? 아아. 당신이 그렇게 말해줄 줄 알았어요. 저도 알아요. 제 모습이 얼마나 멋있는지. 크후후후후.”

 웃을 때마다 놈의 몸에서 검은 안개가 뭉클뭉클 흘러나왔다. 더 불어 가슴을 죄어오는 압력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좀 전까지의 살렘이 숨이 막힐 듯이 강했다면, 지금은 터무니없다는 소리가 절로 나올 정도였다.

 이건, 마치 신이 도래한 것 같지 않은가.

 “클클클. 설마 네놈 같은 잡스런 녀석 때문에 내 본신을 드러내게 될 줄이야.”

 살렘은 모습뿐만이 아니라 성겨까지도 크게 변한 듯, 이제는 말투마저 달라져 있었다.

 비로소 가면을 벗은 것이다.

 “이렇게 된 이상 질릴 때까지 네놈을 괴롭혀 주마.”

 살렘이 손을 슬쩍 들었다.

 “우선 발.”

 그야마로 슬쩍. 공중에 떠다니는 먼지를 잡듯이 가볍게 손가락을 들어올린 것뿐이다.

 그런데 돌연 멍하니 서 있던 병규의 입에서 비명이 터져 나왔다.

 “으아악.”

 거대한 검은 낫 같은 것이 그의 무릎 밖으로 삐죽 튀어나와 있었다. 비명을 지르며 뒤로 넘어간 병규의 발바닥 역시 주먹만한 구멍이 뚫려 있었다.

 모래 속에서 불쑥 튀어나온 검은 낫이 그의 발바닥을 뚫고 무릎위로 튀어나간 것이다.

 아무런 기척도 낌새도 느낄 수 없었다.

 “끄으윽.”

 병규는 속이 빈 껍질처럼 너덜거리는 오른발을 붙들고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무력이라니.

 공포가 서리처럼 전신에 내려앉았다. 감히 살렘의 눈을 똑바로 쳐다볼 수도 없었다.

 ‘젠장 저 히죽거리는 웃음.’

 절대로 이깃 수 없는 상대라는 것은 절실하게 깨달았다. 하지만 허 히죽거리는 면상만큼은 어떻게든 뭉개놓고 싶었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런 일이 있었지.’

 폭풍의 신을 수호신으로 둔 수사노오와 싸울 때, 그때도 감당할 수 업는 암담함에도 불구하고 딱 한 대만 때리자며 불굴의 투혼을 불살랐었다.

 “그래.. 이대로 쓰러질 순 .. 없지.”

 비틀거리며 병규는 한 발로 몸을 지탱하며 간신히 일어섰다.

 “오오~. 저렇게 가련할 수가. 미친 듯한 고통 속에서도 몸을 일으키는 그대의 분투에 박수를 보내오.”

 짝짝짝.

 살렘은 놀리듯 어깨 위로 두손을 올리며 가볍게 박수를 쳤다.

 “뭐가 그렇게 좋아?”

 병규는 붉게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글쎄. 왜 즐거운 걸까. 아마도 피와 절규가 나를 즐겁게 하기 때문이겠지. 자. 어서 오너라. 나의 손님이여.”

 젠장할.. 자식.“

 병규는 비틀비틀 놈에게 걸어가며 욕을 퍼부었다.

 가슴이 답답했다.

 번개라도 맞은 듯한 통증이 전신을 누볐다.

 하지만 그럼에도 병규는 흐느적거리는 걸음을 멈추지 않았다.

 조금남 더.. 조금만 더...

 놈에게 거의 다가갔다.

 한 방만.

 저 히죽거리는 면상에 단 한 번만 주먹을 날릴 수 있다면...

 조여오던 가슴의 압박이 더욱 심해졌다.

 그리고 눈앞이 점점 하얗게 바래져 왔다.

 “젠장! 한 방만 때리게 해 달란 말이다.”

 그는 하늘을 올려다 보며 비통에 찬 고함을 질러 댔다.

 어둡던 하늘이 돌연 환해졌다.

 그리고 그는 혼수상태에서 깨어났다.

 희미한 눈앞.

흑백의 의식 속에서 현실로 돌아 왔을 때, 병규의 두 눈에 처음 비친 것은 거칠게 채찍질을 하며 욕을 뱉고 있는 금발머리 청년의 흐릿한 모습이었다.

 두 눈을 지그시 모으며 한참 만에 시력을 되찾았을 때, 비로소 멍하니 흐르던 귀가 제 역할을 하기 시작했다.

 “오호라. 네 녀석이 드디어 정신을 차렸구나.”

 어디서 많이 본 녀석이다.

 “제길.”

 놈이 누군지를 깨달았을 때, 병규는 저도 모르게 욕지기를 뱉었다.

 라이트.

 필립 공작의 외동아들이자 붉은 대지서부터 악연으로 이어져온 빌어먹을 자식.

 하필 눈을 뜨고 제일 먼저 본 것이 이 밥맛없는 자식일 줄이야.

 이제야 대충 어떻게 된 일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는 결국 살렘에게 패했다. 그리고 의식을 잃은 그를 살렘이 수도로 끌고 온 것이다.

 주위를 둘러 보았다.

 돌로 단단하게 지어진 어두운 실내. 코를 찌르는 악취. 목이 턱턱 마르는 건조함.

 지하 감옥이었다.

 그는 눅눅한 지하 감옥에 양팔이 묶여 벽에 매달린 신세가 된 것이다.

 병규가 자신의 처지를 깨닫는 동안 라이트는 그가 남긴 한마디에 예민한 반응을 보이고 있었다.

 “뭐? 제기일? 이런 쳐 죽일 자식.”

 다시금 채찍이 쏟아졌다.

 병규가 기절해 있을 때에도 라이트는 쉬지 않고 채찍질을 했다.

 몬스터의 가죽을 꼬아 만든 코아반 채찍은 살갗을 휘감을 때마다 송충이 같은 굵은 족적을 남겼다.

 채찍질은 잠시도 쉬지 않고 계속되었다.

 부어오른 살이 터지고 피가 주륵주륵 흘렀다. 계속 그렇게 망가지던 피부는 결국 오래 입은 청바지처럼 너덜거리다가 끝내 허연 뼈를 밖으로 드러내 보이고 말았다.

 하지만 병규는 아무런 고통도 느끼지 못하는 듯 라이트를 보며 쓸데없는 잔소리를 늘어놓았다.

 “아쉽군. 보통 악몽에서 깨어나면 아리따운 아가씨가 간호하고 있는 푹신한 침상이어야 하는데, 난 지지리 복도 없지. 이런 못생기고 냄새나는 사내자식이 내 몸을 돌보고 있으니.”

 “이 오크 같은 자식이!!”

 흥분한 라이트는 결국 칼을 뽑아들었다.

 쿡쿡쿡쿡!

 칼이 살을 파고들었다.

 잔인한 라이트는 잔뜩 흥분한 상태였음에도 결코 병규를 쉽게 죽일 생각은 않고 있었다.

 발끝에서 종아리를 거쳐 허벅지까지.

 살을 저미듯 차근차근 휘로 칼질을 하며 올라온다.

 그렇게 두 발을 잘게 다진 다음엔, 손을 공략하기 시작했다.

 손가락에서 손목 팔목을 거쳐 어깨까지.

 그렇게 사지를 완전히 다져 놓았다.

 그 사이 병규는 스무 번이 넘게 기절했다가 다시 깨어났다.

 그런데도 죽지 않은 것은 끈질긴 생명력 때문이기도 했지만,그가 기절한 사이 라이트가 성수를 그의 몸에 뿌려대며 회복시켰기 때문이다.

 결국 라이트는 예전의 명세대로 죽지도 못하게 만들며 마음껏 그의 몸뚱이를 유린한 것이다.

 촤악.

 차가운 무언가가 얼굴에 닿았다.

 그것이 물이라는 것을 깨달앗을 때, 병규는 흩어지는 의식을 간신히 집중시킬 수 있었다.

 꼭 서른 번째 혼수상태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눈앞에 새로운 사람이 서 있었다.

 “흠, 이제야 정신을 차린 모양이군.”

 낮은 음성의 주인공은 수염을 짧게 기른 진중한 인상의 중년인 이었다.

 그의 손에 컵이 들려 있었다.

 병규의 정신을 깨우기 위해 물을 끼얹은 것이다.

 “내가 보이는가? 목소리가 들리는가?”

 중년사내는 건조한 음성으로 몇 번 더 물었다.

 병규는 멍한 표정으로 그를 물끄러미 바라만 보았다.

 이 자는 또 누구란 말인가.

 중년사내가 흠 하고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행히 정신이 든 모양이군.”

 딱

 중년사내가 손가락을 튕기자 대기하고 있던 기사들이 의자를 가져왔다.

 사내는 푹신한 의자에 몸을 묻으며 손을 저었다.

 대기 하고 있던 기사들이 물러났다.

 “쯧쯧.”

 병규의 몸을 가만 쳐다보던 사내는 고개를 저으며 혀를 끌끌 찼다.

 “원 도무지 적당히라는 걸 모르는 녀석이군. 사람의 몸뚱이를 걸레로 만들어 놓다니.”

 걸레라는 표현이 결토 무리가 아니었다.

 팔고 다리가 완전히 다져져 형체조차 제대로 남아있지 않았고, 몸통은 채찍에 의해 갈비뼈가 환하게 보일 지경이었다.

 살이 완전히 발라진 채 가죽만 벽에 척 널려 있는 것 같은 꼴이랄까.

 이런 꼴이 되고서도 아직 살아 있는 것이 용했다.

 “내가 누군지 아는가?”

 사내가 점잖은 목소리로 물었다. 

 병규는 한참 그를 물끄러미 바라보다 갈라진 목소리로 간신히 대답했다.

 “빌어먹을...... 필립...... 공작.”

 “호오. 날 알아 보다니 용하군.”

 장단을 맞추긴 했지만 사내는 그다지 대단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공작쯤 되는 위치다 보니 연설할 기회도 많고, 사람을 만날 일도 많다.

 그렇게 스쳐 지나가는 인물의 수는 셀 수 없이 많은 것이다.

 눈앞의 청년이 그런 인물들 중 하나라면 자신을 알아보는 것이 하등 이상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사실 병규는 그를 단 한 번도 만난 적이 없었다.

 그렇다고 누군가에게 그의 생김새에 대해서 언질을 받은 적도 없다.

 다만 주위의 분위기라든가 기사들이 대하는 공손한 태도 등으로 지레짐작한 것뿐이다.

 “좋네. 자네가 날 안다니 대화가 쉽게 풀릴 것 같군.”

 “...... .”

 “물어볼 말이 많네만 우선 몇 가지만 기본적으로 질문하도록 하지.

 공주는 어디 있나?

 그녀의 목적이 뭐지?

 그들의 뒤를 봐주고 있는 조직이 있는가?“

 “...... 뻔히 알고 있을 텐데...... 이러는 이유를 모르겠군.”

 "후후. 역시 그런 식의 대답이군.“

 가벼운 웃음을 흘린 필립 공작은 경직된 자세를 흐트러뜨리며 비스듬히 병규를 올려다 보았다.

 “사실 내가 묻고 싶은 말은 이런 쓸데없는 소리가 아닐세.”

 “...... .”

 병규는 탁한 눈동자로 공작을 힘없이 쳐다만 보았다.

 반대로 그를 올려다보는 공작의 눈은 무서울 정도로 빛을 번뜩이고 있었다.

 “자네의 정체. 그걸 알고 싶군.”

 “...... 평범한 사람...... 그 뿐이야.”

 “하하. 근래 들어봤던 농담 중에서 가장 웃기는 소리군. 대체 어느 구석의 평범한 사람이 바람처럼 달리고 5미르 이상을 점프하며, 손가락에서 오러블레이드를 뿜어낼 수 있단 말인가.”

 “...... 하찮은...... 재주지.”

 “흐음. 하찮은 재주라. 후후후. 그럴 리가. 자네의 능력이 하찮다면 살렘 후작이 그렇게 침이 마르도록 칭찬할 리 없겠지. 사실 이왕 하는 김에 말하는 거지만, 살렘이 자네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했다면 굳이 힘들게 이곳까지 데려오지도 않았을 것이네.”

 병규은 자꾸만 가라앉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며 필립 공작의 눈을 보았다.

 “왜...... 내게 관심을 갖는지...... 모르겠다.”

 “하하하하. 쓸데없는 말이 전혀 없군. 원래 과묵한 사람 같군.”

 공작의 천연덕스런 말에 병규는 속으로 화가 치밀었다.

 사실 그는 말을 하기에도 벽찼다.

 온몸은 칼로 난자당한 상태고 입안은 바싹 말라 침조차 돌지 않는다. 말을 할 때마다 목이 심하게 아파오고, 눈동자를 굴릴 때마다 눈자위가 실룩이며 통증을 동반했다.

 당장 죽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그런 사람을 세워놓고 공작이란 자식이 기껏 하는 소리가 과묵한 것 같다고?

 만약 눈앞에 칼 한 자루가 있다면 당장 입에 물고 공작의 머리통을 향해 달려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원독 어린 눈빛을 보고도 공작은 느긋한 표정으로 자신의 말을 이어나갔다.

 “그 눈빛. 맘에 드는군. 좋아. 단도직입적으로 말함세. 난 자네의 능력이 탐나네. 내게 그 힘을 빌려주게.”

 “이렇게...... 망가진 내가...... 과연 쓸모...... 있을까?”

 “하하. 자네의 몸이 어때서 말인가? 물론 좀 망가지긴 했지만 특별히 팔다리 어디 한 군데가 잘려 나간 것도 아니고, 내장의 일부가 없어진 것도 아니지 않는가? 그 정도의 부상쯤은 포션과 실력 좋은 신관의 치료만 있으면 문제 될 게 없지. 그도 안 된다면 살렘 후작에게 도움을 청할 수도 있네.”

 움찔.

 살렘 후작이 언급되자 병규의 어깨가 미세하게 떨렸다. 그 미세한 변화를 필립 공작은 결토 놓치지 않았다.

 “자네도 봤다니 잘 알겠군. 살렘 후작의 그 경이로운 능력을 말일세. 만약 자네가 내게 힘을 빌려준다면 자네에게도 그런 능력을 주지. 어떤가? 절대 손해 보지 않을 조건이라고 생각하네만.”

 필립 공작은 자신 있는 얼굴 표정만큼이나 혀가 매끄러웠다. 말을 함에 있어 조금도 막힘이 없이 술술 자신의 생각을 말하고 있었다.

 “으.”

 신음과 함께 병규의 고개가 아래로 축 늘어졌다.

 힘들다.

 이제는 대화하는 것 조차 어려울 정도다.

 “저런. 고통이 심한 것 같군. 만약 자네가 내 편에 가담한다면 당장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을 것이네. 만약 말을 못한다면 고개라도 끄떡이게. 그럼 당장 자네를 치료해 주지.”

 상대가 이 정도로 힘들어 한다면 불쌍해서라도 치료를 히 줄 것이다. 대화할 상태가 안 되는 상대에게 대답을 종용하는 것은 맨 몸뚱이에 채찍질을 하는 것만큼이나 정신적인 고통을 주었다.

 하지만 비열한 필립 공작은 오히려 상대의 정신이 피폐해진 틈을 파고들었다.

 궁지에 몰린 인간은 독기밖에 남지 않는다고?

 필립 공작은 이런 말이 속설에 불과하다는 것을 잘 아는 사람이다.

 독기는 그나마 힘이 남아있을 때 부리는 투정에 불과하다. 정말로 몸과 마음이 회복될 수 없을 정도로 망가진 자는 머릿속이 텅 비고 생각이 단순해진다. 남는 것은 짐승과 같은 본능 뿐.

 그런 자에겐 독기는커녕 일말의 반항심도 남아있지 않다. 오직 살고자 하는, 조금이라도 고통에서 빨리 벗어나고자 하는 본성만이 활발하게 움직일 뿐이다.

 지금 극한의 궁지까지 몰린 병규에게 자꾸만 대답을 강요하는 것도 바로 그런 이유였다.

 하지만 병규는 그가 지금까지 굴복시켰던 인간들처럼 호락호락 한 사람이 아니었다.

 다 죽어가던 병규가 흔들흔들 고개를 든다. 그리고 숨이 넘어가는 듯한 목소리로 그에게 물었다.

 “그렇게 ...... 힘을 모으는 이유가 뭐냐? 왜 공작씩이나...... 되는 당신이 반란을...... 일으킨 거지? 이 태평한 왕국에...... 대체 뭐가 부족해서...... .”

 병규가 죽을 듯 말 듯 하는 모습이면서도 끝끝내 엉뚱한 질문이나 하자 필립 공작의 얼굴에 실망이 빛이 살짝 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나타나기가 무섭게 사라지고 대신 능수능란한 협작꾼의 표정이 그의 얼굴에 남았다.

 “허. 태평성대? 크허허. 그렇게 보일 수도 있겠군. 지금 당장은 말이야. 하지만 실상은 어떻지. 양 강대국 사이에 낀 채 눈치를 보면 전전긍긍하고 있다. 제국의 기치를 내걸며 대륙을 질타하던 시기는 이미 예전에 끝나고, 이제는 초라한 왕국만이 남았지.”

 그래서...... 공국에게 독립을 준...... 것인가?“

 병규의 힘없는 목소리에 공작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흠. 생각보다 많은 것을 알고 있군.”

 바흐만 대공과의 비밀약정은 철저히 비밀에 부쳐져 왕국 내에서 알고 있는 자는 고작 살렘 후작 하나다. 그런데 이 초라한 녀석이 그 비밀을 알고 있을 줄이야.

 “어떻게 알아냈는지 궁금하군.”

 “질문은...... 내가 먼저.”

 “하하. 아직 기가 살았군. 좋아. 대답해 주지. 사실 알고 보면 그리 대단한 일도 아니야. 난 당연히 할 일을 했을 뿐이었으니까.”

 “...... .”

 “만약 내가 그들의 독립을 보장하지 않았다면 머잖아 전쟁이 터졌을 것이다. 공주 일행과 함께 바호크 공국에 가봤다지? 그렇다면 잘 알겠군. 공국의 힘을 말이야. 이미 바호크 공국은 예전 아이린 왕국에 속해있던 시기와는 전혀 다르다. 아마스 신성제국에 비견될 정도의 대국이지. 그런 대국이 언제까지 바호크 공왕의 유언에 따라 공국의 처지로 남아있을 것 같은가? 그건 너무 안일한 생각이지.”

 “그것은...... 예측에 불과해. 단지 당신 생각일...... 뿐이잖아.”

 “뻔히 일어날 일을 예측이라 부르지 않네. 예언이라 하지. 하지만 지금 고민해야 할 것은 공국의 독립 따위가 아니야.”

 “...... .”

 “곧 이 땅엔 대혼란이 온다. 통일된 마계의 힘에 의해서 말이다.”

 병규의 눈동자에 의문이 맺혔다.

 왜 갑자기 마계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는지 도통 이해할 수 없었던 것이다.

 필립 공작은 병규의 심지가 너무도 깊어 단순한 협박만으로는 그의 마음을 사로잡을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협박으로 안 된다면 회유라도 해야 한다.

 녀석이 납득할 만한 이유로 설득한다면 필시 놈도 넘어오게 될 것이다.

 ‘그런데 이 녀석이 정말로 그렇게 대단한 능력을 가진 것일까?’

 필립 공작은 다시금 젖은 빨래처럼 벽에 축 하고 매달린 병규를 살폈다.

 한마디로 표현하면...... .

 형편없다.

 아무리 죽음 직전의 상태라곤 하지만 녀석의 몸뚱이는 무술을 익히기엔 너무도 빈약했다. 이런 몸뚱이를 끌고 정말로 살렘 후작과 대등하게 싸웠다는 것이 도저히 이해되지 않을 정도다.

 유독 마음에 드는 것은 퀭한 두 눈 속에 담긴 눈동자였는데, 절망만이 가득한 상황에서도 독기를 풀풀 풍기며 삶에 대한 열망을 드러내고 있었다.

 ‘살렘 후작이 직접 말한 것이니 틀림이 없겠지.’

 소드마스터에 필적하는 능력의 소유자.

 그의 야망을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인재다. 무슨 수를 쓰더라도 손에 넣어야 한다.

 마음을 굳힌 필립 공작은 자뭇 진지한 표정을 가장한 채 지극히 비밀스런 정보들을 하나씩 풀어놓았다.

 “최근 난 은밀한 소식통을 통해서 마계에 대한 소식을 들었다.

 자네는 아는가? 마계가 원래 1황 3왕의 체계였다는 것을?“

 병규는 고개를 흔들었다.

 이곳은 이계다. 마계라는 존재 자체가 혼란스러운데 그곳의 세력 구도가 어떻게 되어 있는지 알 리 만무하다.

 “흠. 그럴 줄 알았다. 사실 이 일은 극히 일부의 흑마법사를 제외하고는 아무도 알지 못하는 일이니까.”

 인심 쓴다는 분위기를 잔뜩 풍기는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뒷말을 이었다.

 “원래 마계엔 절대자인 1황과 그 아래 실제적으로 마계를 통치하는 3왕이 있었다. 하지만 오래전 절대자인 1황이 돌연 사라져 버렸다. 당시 많은 마계인들은 남은 세 마왕들이 절대자의 자리를 차지하기 위해 처절한 전쟁을 벌일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정작 그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지. 세 마왕의 힘이 서로 비등하여 묘하게 균형을 유지했기 때문이지. 그런데 얼마 전 이 균형에 균열이 생겼다. 마황에 이어 3마왕 중의 2명마저 마계에서 모습을 감췄기 때문이지. 남은 마왕 데이크란에 의해 마계가 일통된 것은 당현한 순서겠지. 후후. 그것이 지금으로부터 10년 전의 일이다. 아마 지금쯤 피에 굶주린 마계의 수천만 대군이 모두 그녀의 손아귀에 들어갔겠지.”

 말을 멈춘 그는 잠시 그윽한 시선으로 병규를 응시했다.

 “내전으로 혼란스럽던 마계가 통일되었다. 이제 어떤 일이 생길 것 같은가. 흐흐. 괜한 질문이었던 듯하군. 당연히 중간계 침공이겠지. 그들은 마계가 생겨난 이후로 줄기차게 중간계에 욕심을 부렸으니 말이야.

 지난 세월 동안 마계는 구심점이 없어 여러 마왕의 준동으로 흔들리고 있어 큰 힘을 못 썼지만 이제 데이크란 의해 통일되었다. 새로운 국면을 맞이한 것이지. 과연 사악한 마계의 힘을 연약한 아이린 왕국이 막아낼 수 있을까? 불가능한 일이다.“

 스스로의 말에 취한 듯, 필립 공작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손을 뻗어 병규의 턱을 쥐어 올렸다. 그리고는 그의 귓가에 속삭이듯 말했다.

 장단하지. 곧 마계의 대대적인 침공이 있을 것이다. 바야흐로 대 혼란기가 시작되는 것이다. 이 같은 혼란기에 우매한 백성들에게 필요한 것이 어떤 군주라고 생각하는 가? 죽은 선왕처럼 미련한 자? 흥. 아니면 레종 공주처럼 철없는 계집? 후후후. 아니야. 왕국에 필요한 것은 힘이다. 흩어진 힘을 하나로 모으고, 백성들을 단결시켜 마계의 거대한 힘에 저항하게 만드는 구심점을 마련할 절대적인 카리스마!“

 그는 거만한 얼굴로 병규의 눈동자를 직시하며 근엄한 목소리로 마침표를 찍었다.

 “바로 나, 필립 공작이 필요한 것이다.”

 “...... .”

 “이제 그대는 내 포부를 알게 되었다. 이제 내게 복종할 마음이 생겼는가?”

 필립 공작은 자신이 있었다.

 위대한 의지 앞에 인간은 나약한 심정을 드러내고 결국 굴복하기 마련이다.

 하지만 정작 병규의 바짝 타 들어간 입술 밖으로 흘러나온 대답은 전혀 의외의 것이었다.

 “거짓말...... 하지 마.”

 “뭣?”

 필립 공작의 눈이 휘동그레졌다.

 기대하지 못한 대답이라는 것을 둘째치자. 거짓말이라니. 갑자기 이게 무슨 말이란 말인가.

 “...... 무슨 소리지?”

 “방금 전의 말...... 다 거짓말이지?”

 “이해할 수 없군.”

 “후후. 넌...... 말야. 아니잖아.”

 “?”

 “인간이...... 아니잖아.”

 “!”

 잠시 충격의 시간이 지나갔다.

 필립 공작은 석상이 된 듯 굳어 있었다.

 병규는 잔기침을 하며 갈라진 목소리로 조금씩 뒷말을 이었다.

 “인간이 아닌 에 녀석이...... 무슨 왕국을 위하고, 백성을 위한 다는...... 거냐. 그만둬. 추악해. 네 놈의...... 그 시커먼 속이 훤하게 보이니까 말야.”

 “...... .”

 필립 공작은 한 동안 말이 없었다.

 잠시 후, 돌연 그의 분위기가 변했다.

 칙칙하고 어두운 빛깔로. 일전에 격돌했던 살렘 후작과 비숫한 분위기였다.

 “후후후. 과연 살렘의 말이 사실이었구나. 네놈은 아주 특별한 것 같아.”

 말투마저 살짝 변해 있었다.

 전의 목소리가 사무적이고, 권위적인 말투였다면 지금은 권태로운 분위기를 물씬 풍겼다.

 “어떻게 알았지?”

 “몰라...... 그냥 알 수 있었어.”

 “...... 특이한 녀석이로군. 인간인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특이해.”

 “과분한...... 칭찬이야.”

 “후후. 자부해도 좋아. 내가 필립공작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지 10년이 넘었지만 내 정체를 눈치 챈 것은 네가 처음이니까 말이야. 아. 혹시 살렘도 이런 말을 하던가?”

 병규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후후. 과연 그렇군.”

 “넌..... 뭐냐? 원하는 게 대체...... 뭔지?”

 “나? 오랜 삶에 지친 어두운 영혼이라고 해 두지. 그리고 목적은...... .”

 필립 공작, 아니 필립 공작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그것의 눈동자에 묘한 광기가 흘렀다.

 “지루한 인생의 달궈줄 뜨거운 뭔가가 일어나길 바란다.”

 “직접 공주를...... 치지 않은 것도 그런...... 이유였냐?”

 필립 공작에겐 살렘과 같은 엄청난 실력자가 있다. 미네르바 기사단의 실력이 대단하다고 하지만 살렘이 본실력을 발휘한다면 어렵지 않게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도 굳이 추격대를 파견하는 소란을 피운 것은 역시나 더 많은 피가 필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후후.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지만 굳이 한 가지를 뽑자면 ,저항세력을 한꺼번에 처리하기 위해서지.”

 추적대에게 공주가 쫓긴다는 소문이 돌게 되면 왕실에 충성하는 귀족들은 자연히 그녀의 곁으로 모이게 된다. 그때 한 번에 처리할 생각이었던 것이다.

 “아무래도 자네를 설득하는 일은 시간을 두고 천천히 해야 될 것 같군. 정 안 되면 자네의 영혼을 지워버리는 수도 있고. 후후후. 나중에 또 보지.”

 자리에서 일어난 필립 공작은 아직 병규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한 듯이 말했다.

 하긴 대륙 어디에서 그와 같은 실력자를 구할 수 있을까. 만약 설득이 안 통한다면 최후의 방법으로 그의 영혼을 지워버릴 생각까지 하는 공작이었다.

 “아!”

 지하 감옥을 나서던 필립 공작은 문득 생각난 듯, 고개를 슬쩍 돌리며 한마디를 던졌다.

 “참고로 말하네만. 마계에 대한 이야기는 전부 사실일세.”

 “혹시...... 그대가 마왕...... 데이크란 인가?”

 “후후후. 유감스럽게도 아니야. 마왕은 나 같은 것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존재지. 기대하게. 대혼란의 시대를 말이야.”

 덜컹 하는 소리와 함께 필립 공작은 지하 감옥을 빠져나갔다.

 비로서 병규는 혼자가 될 수 있었다.

“실수했군.”

 필립 공작이 물러난 뒤,병규는 킥 하고 웃었다.

 정신을 차리게 한답시소 그에게 물을 뿌린 것은 정말이지 엄청난 실수다.

 공작은 병규의 근골이 모두 망가져 더 이상 움직일 수 없다고 생각했지만 약간의 물로도 망가진 몸이 재생된다는 것은 알지 못했다.

 병규는 코끝에 맺힌 물방울을 혀로 핥았다.

 물기가 목구멍으로 넘아가자 타는 듯한 갈증과 함께 후끈한 열기가 몸을 달궜다.

 순식간에 허물어져 가던 신체의 균형이 맞춰졌다.

 하지만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

 몇 방울의 물로 회복하기엔 그의 신체는 너무 많이 망가져 있었다. 다행히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물이 있었다.

 공작이 마시던 컵에 약간의 물이 고여 있었던 것이다.

 병규가 매달린 곳에서 컵까지는 제법 거리가 있었다. 발을 뻗어도 절대 닿지 않을 거리였다. 하지만 병규에겐 손발처럼 자유롭게 움직일 수 있으면서도 훨씬 더 먼 거리까지 뻗칠 수 있는 것이 있었다.

 취릭!

 혀가 채찍처럼 뻗어 나갔다. 조심스럽게 컵을 감싸더니 부드럽게 입 안까지 운반해 왔다.

 꿀꺽.

 물을 마시자 병규의 몸이 바스러질 듯이 후들후들 떨렸다. 미칠 것 같은 간지러움이 전신을 배배 꼬이게 만들었다.

 “윽. 으읍!”

 병규는 이를 꽉 아문 채 개미가 물어뜯는 듯 한 가려움에 애써 참았다. 망가진 몸이 재생될 때의 이 간지러움은 도무지 적응이 되지 않는다.

 간질 환자처럼 부들부들 떨리던 그의 몸은 꽤 시간이 흐른 후에야 안정을 찾을 수 있었다.

 “후우.”

 병규의 입에서 안도의 한숨이 새어 나왔다.

 “간신히 된 것 같군.”

 부스스 고개를 드는 그. 놀랍게도 회색빛으로 죽어가던 그의 눈은 맑은 광채르 되찾은 상태였다.

 엉망진창으로 망가졌던 내장도 거의 다 치료되었다. 다만 팔과 다리는 워낙 험하게 당한 터라 간신히 일부의 힘만을 되돌릴 수 있었다.

 “망할 자식.”

 병규는 라이트를 떠올리며 욕지기를 삼켰다.

 광기에 휩싸여 그의 팔다리에 검을 찍어대던 미친 자식.

 ‘언젠가 내손에 잡히면 아주 처참하게 죽여주마. 반드시.’

 그때는 호랭이가 말려도 아랑곳하지 않고 그를 처치해 버릴 것이다.

 하지만 놈에 대한 복수도 우선 이곳을 빠져나간 후에나 가능한 일이다.

 ‘요수의 발톱’

 모든 기력을 짜내어 힘을 쏟자 손가락 마디 하나 정도의 요기가 간신히 생겼다. 보잘것없는 힘이지만 팔목을 채운 수갑을 풀기엔 충분했다.

 손가락을 굽혀 수갑을 슬쩍 긋자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쇳덩어리가 여린 두부처럼 갈라졌다.

 “좋아.”

 신이 난 병규는 환성을 질렀다.

 최근 좌절이 많긴 했지만 역시나 요수의 발톱은 예리하다. 너무도 간단히 족쇄의 구속에서 벗어난 병규는 살금살금 철문으로 다가가 밖의 동정을 살폈다.

 성질 같아선 확 뛰쳐나가고 싶지만 자칫 살렘이나 필립 같은 자와 맞딱뜨리게 되면 모처럼 얻은 기회를 놓치게 된다.

 억울하긴 하지만 아직 그들에겐 실력이 한참 못 미치는 것이다.

 귀를 기울여 멀리까지 확인했지만 다행히 간수들의 기척뿐이었다. 병규는 요수의 발톱으로 자물쇄를 도려낸 후 조심조심 밖으로 나갔다.

 지하 감옥은 왕성치고는 규모가 작았다. 원래가 특수한 죄인들을 수감하기 위한 시설이었던데다, 최근 몇 년간 이곳에 들어온 죄인은 병규를 포함하여 고작 두 명이 다였기 때문이다.

 간수들을 손쉽게 처리한 병규는 그들이 가진 음식과 물로 체력과 상처를 회복할 수 있었다.

 “으으. 이제야 살 것 같네.”

 길게 기지개를 켠 병규는 간수의 옷까지 빌려 입고 대탈출을 감행했다.

 ‘가만. 혹시 이곳에 나와 같은 처지의 사람들이 더 있지 않을까?’

 불현듯 이런 생각이 든 병규는 발길을 돌려 다시 지하 감옥으로 들어갔다.

 감옥은 텅텅 비어 있었다.

 실망감이 가득 들 무렵, 가장 끝에 위치한 감옥에서 미약한 기척이 잡혔다.

 조심스레 감방으로 접근한 병규는 철창안을 살금살금 살폈다.

 극곳엔 이상적인 신선의 모습을 한 노인 한 명이 벽에 처량하게 걸려 있었다.

 안으로 들어간 병규은 일부로 기침소리를 냈다.

 “어험. 험험.”

 하얀 수염을 허리까지 기른 백발노인이 고개도 들지 않은 채,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공작인가? 날 설득하러 들어온 거라면 돌아가게. 아무리 그대가 날 유혹해도 헛고생일세.”

노인의 음성에 생기가 거의 느껴지지 않았지만 대신 꺾이지 않는 의지가 강하게 묻어 있었다.

 ‘역시.’

 병규는 공작을 언급하는 노인의 말에 그 역시 억울한 처지임을 확신할 수 있었다.

 “험. 전...... 공작이 아닙니다.”

 “으음. 간수인가?”

 노인이 고개를 조금 들었다. 탁한 눈동자가 병규의 얼굴을 한차례 훑는다.

 “어린 사람이군. 아깝도다. 어린 나이에 악에 물들었으니 그 죄를 어찌 다 갚을꼬. 이보게. 내 자네가 손자 같아서 하는 말이니 하루빨리 공작의 그늘에서 벗어나게. 그것이 자네의 장래를 위해 좋을 게야.”

 한차례 훈시를 한 노인은 다시 고개를 떨구었다.

 “전에도 말했다시피...... 난 음식을 먹지 않겠네. 먹을 것을 가져온 것이면 그냥 자네가 먹제나.”

 병규는 노인의 조용한 음성에 가슴이 뭉클했다.

 이렇게 갇힌 처지에 다른 사람의 장래를 걱정하다니. 이야말로 현자의 표본이 아닌가.

 ‘호랭이도 배우면 좋을 텐데.’

 별스런 생각을 떠올리던 병규는 손을 모아 몇 번 헛기침을 한 후,노인에게 다시 말을 걸었다. 당장 풀어주고 싶지만 만약을 위해 신원을 확인하는 것이 좋을 듯했다.

 “흠흠. 저...... 실례지만 노인장은 누구십니까?”

 “뭐라?”

 노인의 고개가 번개같이 들려졌다.

 방금 전까지 죽음의 그림자가 배회하던 탁한 눈동자에 지금은 마주보기 무서울 정도의 생기가 번뜩이고 있었다.

 위아래로 병규를 쓸어보던 노인의 두 눈이 번쩍번쩍 휘황한 빛을 발했다.

 “네 녀석은 누구냐?”

 “네? 에...... 보, 보시다시피 간수입니다만...... .”

 “헛소리 마라. 날 몰라보는 녀석이 어찌 이곳의 간수란 말아냐.

 솔직히 말해봐. 네 녀석의 정체가 뭐지? 공작이 보낸 암살자이더냐?“

 버럭 고함을 지르는 노인의 모습엔 더 이상 젊은 간수의 미래를 걱정하던 현자의 모습은 없었다. 남은 것은 악과 깡만 남은 강팍한 노인네뿐이었다.

 병규는 고래고래 소릴 지르는 노인의 입을 재빨리 막았다.

 자칫했다간 이곳의 노인의 목소리가 밖까지 들릴 위험이 있다.

 “안심하세요. 전 공작의 사람이 아닙니다. 오히려 그 반대입니다.”

 노인의 눈이 놀람이 떠올랐다.

 “읍읍!”

 “입을 막은 손을 떼 드리겠습니다. 대신 조용히 말씀해 주십시오. 아시겠습니까?”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병규가 손을 떼자마자 언제 그랬냐 싶게 다시 버럭 고함을 질렀다.

 “설마 네가 공주님이 보내 자란 말아냐! 절대로 믿을 수 없다!

 이곳은...... 읍!“

 병규는 다시 노인의 입을 틀어 막고는 조심스럽게 주위의 기척을 살폈다. 다행히 별 다른 이상은 잡히지 않았다.

 ‘하이고야. 무슨 놈의 노인네가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냐. 목소리 한번 대차네.’

 병규는 노인의 입을 다시 자유롭게 해줘야 하나 말아야 하나른 진지하게 고민했다.

 일단은 설득하는 게 먼저라고 느낀 그는 노인의 입을 막은 채 나직한 음성으로 자신에 대해 설명하기 시작했다.

 “할아버지가 절 믿지 못하는 이유가 혹시 이곳에 외인이 침입하기 불가능하기 때문입니까?”

 노인의 고개가 위아래로 끄덕여졌다.

 “그렇다면 안심하셔도 됩니다. 전 밖에서 들어온 사람이 아니라 할아버지처럼 이곳에 갇혀 있던 사람이니까요. 운이 좋아 빠져나온 것입니다.” 노인의 눈동자에 다시 불신이 떠올랐다. 감방에서 탈출했다는 것을 전혀 믿지 못하는 듯했다.

 “할아버지가 믿든 안 믿든, 그것은 자유입니다. 다만 전 얼마 전까지 레종 공주와 함께 있던 사람이라는 것만은 믿어 주십시오.”

 병규의 말에 노인은 잠시 병규의 눈을 쳐다보았다. 노인이 이렇게 조심하는 것은 혹시나 지금 상황이 필립 공작이 지시한 연극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병규의 눈을 가만 들여다보던 노인은 가만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비록 수정같이 맑은 눈은 아니지만 적어도 거짓을 고하는 눈빛은 아니다.

 “다시 입을 열어 드리겠습니다. 이번엔 부디 조용히 말해 주십시오.”

 노인은 고개를 끄덕였고, 병규은 손을 풀어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노인은 목청껏 소릴 질렀다.

 “망할 놈아. 힘없는 노인네의 입을 그렇게 무식하게 처막다니. 너 노인 공경이라는 말도 못 들어보았느냐”

 병규는 노인의 귀를 막느니 차라리 자신의 귀를 막는 편이 낫다는 결론을 얻었다.

 “이그. 좀 조용히 하시라니까요.”

 “시끄럽다. 이놈아. 그나저나 네 녀석은 어렵게 감방을 나왔으면, 어여 탈출이나 할 것이지 이 초라한 늙은이는 왜 찾아왔느냐? 설마 날 구하려는 생각은 아니겠지? 아서라 불가능한 일이야. 이 주변엔 마나를 봉쇄하는 특별한 마법진이...... .”

 서걱

 퉁퉁

 병규가 손을 쓱 휘젓자 노인의 두 팔을 매고 있는 수갑들이 몽창 잘려져 나갔다. 주절주절 불가능한 이유를 떠들어대던 노인의 눈이 퉁방울만큼 튀어나왔다.

 수갑의 재질이 미쓰릴(Mithril)인 줄 알고 있는 노인으로서는 경악할 수 밖에 없었다.

 “미, 믿일 수 없다. 미쓰릴은 소드 마스터의 오러블레이드 정도가 아니면 절대로 자를 수 없는데. 하지만 이곳엔 대 마나 마법진 때문에 마법은 물론 오러블레이드조차 사용할 수 없다. 그런데 대체 어떻게...... ”

 “자자. 수다는 나중에 떨기로 하고 일단 여기서 나가죠.”

 “이유를 알려줘. 그러기 전엔 이곳에서 한 발짝도 나가지 않겠다.”

 “그럼 할 수 없죠. 안녕히 계세요.”

 노인을 향해 넙죽 절을 한 병규는 굴루굴루 신나는 걸음으로 감옥 밖으로 나갔다. 입을 쩍 벌린 채 그 모습을 보고 있던 노인이 뒤늦게 악다구니를 썼다.

 “야. 이놈의 자식아. 넌 힘없는 노인네를 이곳에다 버리고 갈 작정이냐! 네 에미 애비가 그렇게 가르치던? 앙!”

 악을 쓰다보니 도도도 하고 나갔던 병규가 철창 안으로 고개만 빠꼼히 들이민다.

 “이제 가실 생각이 드신 거예요.”

 보아하니 처음부터 혼자 나갈 생각은 없었던 모양으로, 단순히 노인을 놀리기 위해 장난을 친 것이다.

 “망할 놈의 자식. 왔으면 퍼뜩 업지 않고 뭘 하는 거냐! 설마 다 죽어가는 노인네보고 직접 걸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네네. 여부가 있겠사옵니까.”

 병규는 못이기는 척 노인을 등에 업었다.

 “못난 녀석아. 무겁냐?”

 그래도 조금 미안하긴 한 모양이다. 병규는 히죽 웃었다.

 “고기 좀 드셔야겠어요.”

 “망할 놈의 자식. 씨부리는 소리하고는...... .”

 병규는 참 괴팍한 노인네라고 속으로 생각했다.

지하 감옥을 떠나 빙글빙글 끝없이 이어지는 돌계단을 오르며 병규는 노인의 정체를 들을 수 있었다.

 “에엣? 피라이트 대마법사님이시라고요?”

 놀랍게도 노인은 아이린 왕국의 대마법사였다.

 반란이 일어난 당시 거짓 정보에 속아 신성제국으로 고적탐사를 떠났다는 그가 어떻게 지하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다.

 “대마법사라면서요. 너무 쉽게 잡히신 거 아니에요?”

 “내가 잡히고 싶어서 잡힌 줄 알아?”

 “그럼요?”

 “속았다는 것을 알고 왕국 내부의 마법진으로 허둥지둥 돌아왔다가 기다리고 있는 반란군 녀석들의 합공에 이 꼬라지가 된 거야. 망할 놈의 자식들 같으니라고. 힘없는 노인네하고 싸우는 데 비겁하게 쪽수로 밀어붙이다니. 퉤.”

 불만스럽게 침을 뱉는 노인의 행동에 병규은 속으로 웃음을 참느라 혼났다.

 골골 하는 노인네 같지만 기실 필라이트는 무려 7서클 마스터다. 그런 강자를 사로잡는 데 기습과 인해전술이 무슨 치졸한 방법이란 말안가.

 실제로 필립 공작은 이 힘 넘치는 노인네를 잡기 위해 왕성의 절반이 날아갈 각오를 했었다. 다행히 필라이트가 왕성에 손상이 가는 것을 원치 않아 수월하게 잡았지 그렇지 않았다면 막대한 피해를 입었을 것이다.

 정신없이 뛰다 보니 어느새 출입문이 모였다. 병규는 귀를 기울여 문밖의 동정을 살폈다.

 다섯 명이나 되는 인원이 입구를 지키고 있었다.

 발소리가 가벼운 것으로 보아 중급 이상의 기사인 것 같았다.

 ‘이쪽으론 곤란하겠는걸.’

 문밖의 기사들을 처리하는 것은 어렵지 않다. 하지만 그 와중에 탈출사실이 필립 공작이나 살렘 후작에게 알려지는 것이 두려웠다.

 결국 병규는 다른 출입구로 나가기로 했다.

 물론 지하 감옥에서 밖으로 나가는 출구는 오직 기사들이 지키는 이곳 하나뿐이다. 아지만 요수의 발톱이 있는 한 그가 원하는 곳이라면 어는 곳이라도 자유롭게 출구를 만들 수 있었다.

 ‘뒤쪽이 좋겠군.’

 빠져나갈 위치를 정한 병규는 필라이트에게 잠시 조용히 있으라는 당부를 하고는 두텁기 그지없는 석벽을 향해 손을 쓱 하고 휘둘렀다.

 너무도 날카로운 요수의 발톱은 오랜 세월 굳혀져 무쇠와 같은 단단함을 지니게 된 석벽을 썩은 무 자르듯 깨끗하게 도려내었다.

 “억.”

 필라이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병규는 급히 노인의 입을 손으로 막았다.

 아니나 다를까.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노인의 외침이 필사적인 그의 노력으로 간신히 진화될 수 있었다.

 “질문은 나중에 받을 께요. 지금은 제발 좀 조용히 있어주세요.”

 당부에 다시 당부를 한 병규는 잘라낸 석벽을 조심조심 안쪽으로 들어내고는 훤하게 뚫린 구멍으로 몸을 날렸다.

 지하 감옥은 황성의 후원 아래에 위치하고 있었다.

 다행이 후원엔 듬성듬성 나무가 있어 몸을 숨기며 이동할 수 있었다.

 “허허. 그 아름답던 꽃밭이 이렇게 처참하게 변하다니.”

 재가 되어 버린 후원의 모습에 필라이트는 참담한 흐느낌을 흘렸다.

 ‘하이구야. 이 할아버지 때문에 돌아버리겠다.’

 병규는 시도 때도 없이 떠들어대는 필라이트 때문에 간이 조마조마해서 죽을 지경이었다.

 “혹시 비밀통로 같은 곳은 없나요?”

 타버린 고목 위에 자리를 잡은 병규은 노인에게 방향을 물었다.

 큰 성에는 거의 반드시 왕족의 탈출을 위한 비밀통로 같은 것이 마련되어 있다.

 궁정마법사씩이나 되는 사람이니 혹시나 그 비밀통로 같은 것을 알지 않을까 하는 기대했다.

 “음.”

 필라이트는 눈을 지그시 뜨며 골똘히 생각했다. 잠시 후 그의 고개가 좌우로 흔들렸다.

 “모르겠다. 비밀통로 같은 건 본 적이 없어.”

 병규는 실망했다. 하지만 아직 희망을 버리진 않았다.

 “그럼 한적한 출구 같은 건요? 하녀들이 출입하는 뒷문 같은 것도 좋아요.”

 이번에도 필라이트는 끙끙거리며 골몰했지만 결국 나온 대답은 모른다는 것이었다.

 “아니 궁정마법사나 되시는 분이 길눈이 왜 그렇게 어두운 거예요. 설마? 대마법사란 소리. 거짓말인 건 아니겠조?”

 “고연 놈. 거짓말이라니! 노인을 공경하지는 못할망정 그게 무슨 오크 풀 뜯어먹는 소리냐. 에라이 고연 놈아!”

 “아얏! 머리 때리지 말아요. 하지만 이상하잖아요. 왕실에서 내내 사셨다는 분이 정작 기로 제대로 모르고.”

 “이놈아. 마법사가 할일 없는 정원사로 보이냐. 쓸데없이 궁을 떠돌게? 난 항상 마법사의 탑에서 생활했기 때문에 궁성의 일은 원래 잘 모르는 게 당연한 게야.”

 “쳇. 그럼 마법이라도 써 봐요. 그 뭐냐. 텔레포트인가 뭔가 하는 걸로 궁성 밖까지 순간 이동하면 되잖아요.”

 “일 없다. 내가 어느 곳에 갇혀 있었는지 잊었냐? 흡혈귀 같은 마법진에 마나를 쪽쪽 빨려버려서 당분간은 마법을 쓰고 싶어도 못 쓰게 됐다.”

 “에이. 그게 뭐예요. 그럼 할 줄 아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요.”

 “이놈아. 내가 왜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어. 지금처럼 네놈의 말 동무가 되어 주잖냐. 망할 놈아. 넌 영광인 줄 알아야 돼. 네 녀석이 어딜 가서 7서클 대마법사와 이렇게 오랫동안 대화를 해 보겠냐?”

 “네네. 영광입니다요.”

 못이기는 척 대답을 하면서도 병규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했다.

 ‘내가 대체 전생에 무슨 죄를 지었기에 가는 곳마다 이런 골칫덩이들을 만나게 되는 걸까.’

 요즘 부쩍 삶에 대한 회의를 하게 되는 병규였다.

자칭 7서클 대마법사라는 필라이트를 업은 병규는 비교적 사람이 적은 곳을 골라 열심히 몸을 움직였다. 물론 그의 움직임은 비할 데 없이 빨랐지만 문제는 지구력이 떨어진다는 것이다.

 게다가 지금처럼 노인을 등에 업은 상태로는 아무리 빠르다 해도 그리 멀리까지는 도망갈 수 없었다.

 만양 이런 상황에서 살렘이나 필립 공작이 쫓아온다면 꼼짝없이 다시 철창신세를 져야 된다.

 그러 이유로 병규는 노인을 등에 업은 채 궁성 이곳저곳을 기웃 거리며 남아도는 말을 찾고 있었다.

 그렇게 헤매다 보니 으슥한 외궁의 내부까지 들어가게 되었다.

 “윽. 냄새.”

 둥근 아치형으로 생긴 거대한 홀에 발을 디딘 병규는 대번에 눈살을 찌푸렸다. 짐승 특유의 퀴퀴한 냄새가 코를 찔러왔기 때문이다.

 ‘혹시 이곳에 말이 있는 것은 아닐까?“

 한 가닥 기대를 품고 병규는 안쪽 깊숙한 곳까지 발을 옮겼다.

 그러나 막상 그가 발견한 것은 말이 아니라 거대한 몬스터, 이십여 마리의 와이번이었다.

 “우와아아!”

 작은 드래곤이라고 불러도 부족함이 없는 거대한 날짐승의 위용에 병규은 탄성을 참지 못했다.

 “여긴 동물원쯤 되는 곳인가 보죠?”

 병규는 목이 매여져 있는 와이번들을 보고 흥미진진한 얼굴로 필라이트에게 물었다.

 “썩을 놈. 헛소리는 제발 혼자 있을 때 지껄여라. 이놈아.”

 필라이트는 대번에 요부터 했다. 그런데 눈알을 부라리며 거칠게 소리치던 좀 전과 달리 이번에 소곤거리는 목소리로 작게 욕을 나불거리는 게 아닌가.

 병규는 스리슬쩍 웃었다.

 “할아버지. 설마 얘네들이 무서워서 그러는 거예요?”

 “무섭긴 개뿔이 무서워? 다만 걱정이 되는 것뿐이다.”

 “걱정이 되다니요. 무슨 걱정요?”

 “쯧쯧. 칠칠맞은 놈. 넌 이렇게 많은 와이번을 보고도 아무 생각도 안 드는 게냐?”

 “음. 멋있다는 거요?”

 “어이구 속 터져라. 이놈아. 얼라도 아닌 놈이 어찌 그리 멍청하누. 와이번이 궁성에 떼로 몰려 있으면 당연히 드레곤나이트를 떠올려야 할 거 아니냐!”

 “에에? 드레곤나이트요? 설마 드래곤을 타고 다니는 기사를 말하는 거예요?”

 “헹. 당현히 아니지. 세상천지 어느 나라 기사다 감히 드래곤을 타고 다니겠어?”

 “에? 그러면요?”

 “당연히 와이번을 타는 기사를 말하는 거지.”

 “에에에? 그럼 와이번나이트라고 불러야지. 왜 드래곤나이트라고 불러요?”

 “원래 기사란 놈들이 그렇다. 조금이라도 자신을 멋지게 보이려고 과대포장을 하는 게야. 왜 아이린 왕국의 기사들도 미네르바의 기사단이라고 부르지 않느냐. 그렇다고 미네르바의 기사단이 실제로 바람의 정령 왕을 부리는 것은 아니지. 단지 멋지게 보이려고 그렇게 부르는 것뿐이다. 이제 무슨 이야기인지 알겠느냐?”

 “흠. 한마디로 좀 있어 보이려고 그렇게 부른다는 거군요.”

 “그런게지.”

 병규를 향해 고개를 끄덕이던 필라이트는 문득 와이번들을 돌아보며 짙은 한숨을 쉬었다.

 “설마 모리스 공작이 이런 마물들을 길들였을 줄이야. 그는 정말로 오래전부터 준비를 했구나. 이런데도 아무도 그의 반역을 눈치 채지 못했으니. 무능한 신하들의 잘못이 크다. 잘못이 너무커.”

 그는 이미 떠나고 없는 왕을 부르며 탄식에 탄식을 거듭했다.

 한편 병규는 와이번을 바라보며 눈빛을 심상치 않게 반짝였다.

 “호오. 그러니까 이걸 타고 다닌다는 거지? 그 드래곤나이트라는 사람들이.”

 이렇게 거대한 놈을 타고 하늘을 난다니. 정말 멋진 일이 아닌가.

 탁.

 병규는 손바닥을 치며 큰소리로 외쳤다.

 “결정했습니다. 이걸 타고 탈출하죠.”

 “소용없는 짓이다.”

 필라이트는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와이번을 타는 것이 얼마나 힘든 일인지 모르는 게냐?”

 “그렇게 힘든가요?”

 “힘들지. 우선 자연 상의 외이번은 절대로 길을 들일 수 없어.”

 “길들일 수 없으면 어떻게 타고 다녀요.”

 “알 상태로 가져오는 거지. 그리고 새끼가 태어날 때, 와이번을 탈 기사가 각인을 시키는 게야. 그렇게 되면 새끼 와이번은 알을 깨고 처음 본 기사를 부모로 인식을 하지. 그 후에 정성을 다해 키우는 거야. 하지만 그렇게 갖은 정성을 기울여도 정작 기사를 태우는 와이번은 얼마 되지 않는다. 열에 둘 셋 정도뿐이야. 그러니 와이번을 타고 가는 건...... .”

 와이번을 길들이는 것이 얼마나 힘든가에 대해 열심히 설명하던 필라이트의 얼굴이 한순간에 굳어버렸다.

 “이 녀석들이 그렇게 길들이기 어려운 거예요?”

 와이번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병규가 천연덕스럽게 물었다.

 끄그그그

 병규가 머리를 쓰다듬자 무슨 이유에선지 잔뜩 주눅이 들어있던 와이번이 낮게 목울림 소리를 냈다.

 아양을 떠는 것 같은 반응이었다.

 순간 필라이트의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랐다.

 “너 이놈자식! 대체 정체가 뭐야. 왜 터무니없는 이로 심장 약한 노인네를 자꾸 놀라게 만드는 거야? 앙?!”

 조용히 빠져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잊은 채 7서클의 대마법사는 침을 튀겨가며 흥분하고 있었다. 

“도망 갔다고?”

 필립 공작의 얼굴에 잔경련이 일었다.

 마범사인 피네스에게서 병규와 필라이트의 탈주 소식을 접한 직후의 반응이다.

 “어떻게 도망간 거지?”

 “그들의 팔다리를 묶고 있던 수갑을 끊었습니다. 아마도 예리한 무엇으로 잘라버린 것으로 추측됩니다.”

 “추측?”

 모리스 공작의 치솟은 눈썹이 꿈틀했다.

 “추측이라니. 분명 둘의 감방엔 감시 마법을 설정해 두었을 텐데.”

 “그것이...... .”

 보고하는 피네스의 얼굴에 난감한 기색이 어렸다.

 “대지의 기억 마법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았습니다.”

 “그게 말이 되는 가?”

 대지의 기억이란 일종의 감시카메라와 비슷한 기능을 하는 마법이었다. 혹시나 이런 일이 생길까 봐 병규를 잡아 가둘 때, 마법사에게 미리 설치를 명령해 놓았다.

 “이상한 일입니다. 방금 확인한 바로는 대지의 기억 마법은 틀림없이 잘 작동했습니다. 그런데도 그 소년이 잡힌 순간부터 대지의 기억에 아무것도 저장된 것이 없습니다.”

 “깡그리 지워졌다? 아니면 아예 기억조차 못했을 수도 있겠군. 필라이트가 갇혀 있던 곳도 그런가?”

 마법사는 깊숙이 조아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마찬가지 입니다. 소년이 감옥에 잠입한 시간과 때를 맞춰 대지의 기억이 깨끗하게 지워져 있습니다.”

 “흐음.”

 필립 공작은 침음성을 삼켰다.

 피네스가 당황하는 것으로 보아 이런 일이 흔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대마법사 필라이트가 뒤처리를 한 것은 아닐까?’

 곧 그는 고개를 저었다. 필라이트는 특수 감방에 갇혀 있었다.

 그렇게 단시간에 마법력이 보충되었을 리 없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대지의 기억마법이 아니다.

 놈들이 탈출했다는 점이다.

 “이이잇. 놈들을 이대로 놓칠 순 없다. 당장 드레곤나이트들을 몽땅 출동시켜. 마법사와 정령술사를 대동해서 놈들을 잡아오라고 일러라.”

 “그, 그것이...... .”

 서릿발과 같은 공작의 명령에 피네스는 난감한 얼굴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의 표정에서 공작은 뭔가 사단이 일어났음을 감지했다.

 “무슨 일이 있나?”

 차가운 공작의 물음.

 피네스는 얼음 동굴에 굴러 떨어진 것 같은 한기를 느꼈다. 이럴 때 대답을 주저했다가는 그대로 목이 달아나는 수가 있었다.

 그는 떨리는 음성으로 더듬더듬 믿기지 않는 사태를 공작에게 설명해 나갔다.

 “노, 놈들이 와, 와이번을 타고 달아났습니다.”

 “뭐라?”

 공작은 너무 놀란 나머지 체통도 잊은 채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게 말이 되는 소리야!”

 쾅 하고 주먹을 내려치자 돌로 만든 책상이 썩은 나무판자나 되는 듯 힘없이 쪼개져 버렸다.

 와이번이 얼마나 길들이기 어려운 몬스터인가는 따로 설명이 필요 없을 정도다. 오죽하면 각인된 기사가 죽으면 다른 사람이 탈 수 없어 와이번을 죽여 버려야 하겠는가.

 그러데 그런 와이번을 타고 달아났다고? 차라리 오크가 크래곤을 낳았다는 말이 훨씬 설득력 있데 들릴 지경이다.

 공작의 분노에 피네스는 사시나무 떨 듯 떨며 화급히 설명을 덧 붙였다.

 “불가능합니다. 절대로 불가능 합니다. 그런데도...... 그런데도 놈들은 와이번을 타고 달아났습니다. 그것은 성벽에 있던 다수의 병사들이 확인한 것이라 틀림이 없는 사실이옵니다.”

 “끄응.”

 필립 공작은 의자에 쓰러지듯 앉았다.

 계속되는 어이없는 소식에 골이 핑핑 돌고 머리가 아파왔다.

 “좋아. 네 보고를 믿기로 하지. 하지만 그 말이 사실이라면 놈들을 더더욱 그냥 놓아줄 순 없다. 즉시 다른 드래곤나이트들로 하여금 놈들을 쫓도록 해라.”

 간신히 화를 수습한 필립 공작이 새로운 명령을 내렸다. 그러나 황당하게도 이번에도 피네스는 명령을 그대로 시행할 수 없었다.

 “그, 그것이...... .”

 “또 뭐가 문제야!”

 거듭되는 피네스의 미적지근한 대답에 공작은 짜증이 치솟았다. 하지만 뒤이어진 피네스의 대답에 그는 다시 한 번 자리에서 벌떡 일어날 수 밖에 없었다.

 “노, 놈들이 드래곤나이트의 와이번들을 모두, 모조리 끌고 가 버렸습니다.”

 “뭐얏?”

 필립 공작의 입에 찢어질 듯이 쩍 하고 벌어졌다.

[6권 끝. 7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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