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드마스터 살렘과의 격전
밤이 깊었다.
스산한 바람에 간간이 기사들의 코고는 소리가 들려왔다.
잠이 든 줄만 알았던 병규가 몸을 일으켰다. 그의 배를 베고 자던 호랭이가 뒹굴 아래로 굴러갔다.
“으음.”
팔을 꼭 껴안고 자는 퀴니가 작게 뒤척였다.
병규의 입가에 미소가 그려졌다.
깨지 않게 조심조심 몸을 일으켰다.
밤공기를 가르며 걷는데, 루멘의 음성이 들려왔다.
“어딜 가는가?”
불침번을 서고 있었던가 보다.
기사들의 단장인 그도 불침번엔 예외가 없었다.
“잠시 화장실 좀.”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어색하게 웃었다.
“몬스터가 많네. 빨리 돌아오게.”
“네.”
짧게 대답하며 터덜터덜 야영지 밖으로 걸어 나갔다. 어느 정도 거리가 생기자 돌연 그의 움직임이 빨라졌다. 스쳐가는 바람마저 소스라치게 놀랄 정도였다.
달빛 아래 잔잔한 파도처럼 고요하게 잠든 모래밭이 있었다. 사막의 모래와 바람이 그린 그림이다.
쏜살같이 달리던 병규가 거짓말처럼 정지했다.
착 가라앉은 눈으로 주위를 살피던 병규의 시선이 잔잔한 모래 바다 위를 향했다.
“날 부른 게 당신인가?”
“쿠쿠. 용케 찾아내셨군요.”
바람만이 떠돌던 모래바다 위에 흐릿한 인영이 생겼다. 좀 전까진 아무런 존재감도 없었지만 일단 모습을 드러내자, 기척을 못 느낀 것이 이상하게 생각될 정도로 부자연스러움을 구름처럼 풍겨냈다.
병규는 가만히 그를 쳐다보았다.
깊은 잠에 든 시각, 어디에선가 들리는 소곤거리는 목소리에 잠에서 깨었다.
목소리는 말했다.
조용히 혼자 나오라고. 그렇지 않으면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될 거라고.
공공연한 협박이지만, 병규는 느낄 수 있었다.
녀석은 충분히 그럴 만한 능력이 있다는 것을.
호랭이나 샤바는 모르겠지만 다른 사람들은 결코 놈의 손길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렇게 느낀 병규는 화장실에 간다는 핑계를 대며 이곳/까지 은밀히 달려온 것이다.
그곳에서 그를 맞은 자는 길게 기른 콧수염이 돌돌 말려 있는 특이한 인상의 중년사내였다.
하고 있는 모습은 분명 기사였지만, 행동거지나 말투는 서커스의 광대를 연상케 했다.
하지만 무엇보다 병규를 놀라게 한 것은 뭉클뭉클 풍겨오는 그이 기운이 전혀 낯설지 않다는 것이었다.
온몸을 조여 오는 듯한 이 칙칙한 기운. 처음이 아니다.
“당신. 초면이 아니군. 고란산맥에서 봤던가.?”
“흣흣. 이거 놀랍군요. 설마 날 기억하리라고는 생각 못했습니다.”
병규가 디스에게 속아 추적대의 눈을 돌리는 미끼 역할ㅇ르 하게 되었을 때다. 고란산맥의 울창한 숲으로 들어간 병규 일행은 온몸을 옭아매는 것 같은 살기에 도망치듯 숲을 빠져나갔다.
당시 병규는 기척조차 알아낼 수 없는 살기의 정체에 대해 매우 궁금하게 여겼다. 그런데 오늘 그 궁금증이 풀렸다.
바로 눈앞에 있는 자가 그 끔찍한 흉수였던 것이다.
“당신은 누구인가?”
“살렘 이가노프라고 합니다만.”
“소드...... 마스터.”
아이린 왕국이 자랑하는 세 명의 소드마스터.
필립공작, 글로리 후작, 그리고 살렘 후작
모래바다 위에서 살기를 폴폴 날리고 있는 자가 바로 그 세 명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인 것이다.
소드마스터란 단순히 검술이 뛰어난 검의 달인을 뜻하는 말이 아니다. 그야말로 무의 극에 이른 자를 칭송하는 말이다.
‘과연...... 대단한 기운이다.’
단순히 그에게서 솔솔 풍겨오는 기운만으로도 충분히 소드마스터의 위험을 감지할 수 있을 정도다. 지금도 이 정도인데 만약 검을 빼들고 덤벼든다면 과연 얼마나 위험할까.
“쿠쿠.”
살렘이 입가를 길게 늘이며 잔혹한 웃음을 보였다.
웃는 모습이 공포스럽다.
조명 없는 서커스를 홀로 배회하는 지옥의 피에로처럼,
가히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로 이질적인 양면성이 아닌가.
가늘게 접혀진 눈가에 번뜩이는 살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것 같았다.
쓱.
살렘 후작이 허리 앞으로 손을 휘두르며 우아하게 인사를 했다.
“필립 공작께서 당신을 뵙고 싶어합니다.”
“...... 왜 그가 나를 보고 싶어하는지 모르겠군.”
“그거야. 가보면 아시게 되겠지요.”
살렘이 히죽 웃는다.
너무나 짙은 웃음.
때로 사람의 웃음은 일그러진 분노보다 무섭게 보일 때가 있다.
살렘의 웃음이 바로 그랬다.
병규는 사요한 기운을 풍기는 살렘을 잠시 쳐다보았다.
대답을 망설이는 걸까.
사실 고민할 필요도 없었다.
“싫어.”
단호한 대답이 떨어졌다.
“쿠쿠쿠.”
살렘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요란하게 웃었다. 무엇이 그리 웃긴지 어깨까지 들썩였다.
그에게서 풍기는 위험한 냄새에 소름이 오싹 돋을 정도다.
이놈은 강하다.
전에 만났던 마계의 오우거들보다 훨씬 더. 아니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암담함이 밀려들 정도다.
“역시 제 말을 따르실 생각은 없으신 모양이군요.”
쿠쿠 하고 웃는다.
오히려 병규가 거부한 것이 기쁜 모양이다.
“잘됐군요. 사실 전 걱정했습니다.”
“뭐가 걱정되었다는 거지?”
침을 삼키며 병규가 물었다.
“쿠쿠. 만약 당신이 정말로 그냥 따라온다고 하면 어쩌나 해서 말이죠.”
스르릉.
살렘이 검을 빼어들었다.
유난히 검은 광택이 도는 검이었다.
츠츠츠츠츠.
무시무시한 기운이 말도 못할 정도로 증폭되었다.
대기가 귀곡성과 같은 비명을 지르고, 붉은 모래가 안개처럼 스멀스멀 밀려나간다.
압도적인 기세.
하지만 병규는 그에게서 또 다른 생소함을 읽었다.
어색하다.
분명 검을 든 살렘의 기세는 더 없이 강렬했다. 과연 소드마스터라는 생각이 들 정도다. 하지만 병규의 육감은 검은 든 그의 모습이 부자연스럽다고 외치고 있었다.
하지만 왜 그런 생각이 드는지는 말로 설명할 수 없었다.
마스터 경지에 이른 소드마스터에게 과연 뭐가 또 있단 말인가.
“즐거운 무대가 되도록 하지요.”
살렘의 미소가 짙어졌다.
팡.
무서울 정도로 가속력과 탄성.
가벼운 발 디딤과 함께 살렘과의 거리가 일순간에 좁혀진다.
살렘과 협상의 여지가 없음을 깨달은 병규는 과감히 선공을 선택했다.
‘허?’
살렘의 얼굴에 놀람의 고개를 든다. 설마 이렇게 빠를 것이라곤 상상도 못한 것이다.
찌그러진 살렘의 미소.
그 짜증나는 면상에 시원스레 한 방 갈기고 싶었다.
하지만 병규는 뜻을 이룰 수 없었다.
호쾌하게 내지른 주먹이 어이없이 빗나간 것이다. 살렘이 보인 반응은 그저 고개를 슬쩍 옆으로 기우는 행동이 전부였다.
“쿠쿠. 놀랍군요. 하지만 부족해요. 이 몸을 쓰러뜨리기엔 말이죠.”
살렘의 두 눈이 초승달처럼 가늘게 여며졌다.
급격히 압축되는 그의 살기.
‘위험.’
병규는 위험하다는 생각이 드는 즉시 허공으로 신형을 띄웠다.
쉭.
차가운 검광이 싸늘한 밤공기를 훑고 지나갔다.
놀랄 만한 점프력을 과시하며 살렘에게서 멀찍이 떨어진 병규는, 펄럭이는 웃옷을 보며 마른 침을 꿀꺽 삼켰다.
번개같이 피했는데도 옷자락이 잘리는 것만은 면할 수 없었다. 그만큼 살렘의 검은 빨랐다.
마음이 한층 더 무거워졌다.
“쿠쿠. 놀라는 그 얼굴. 멋지군요.”
손으로 입를 가린 채 쿡쿡대는 살렘의 두 눈이 요사한 열기를 뿜고 있었다.
그것도 열망과도 같은 살의였다.
“당신이 한 수를 보였으니, 이번엔 내가 뭔가를 보여 줄 차례겠지요?”
말고 함께 살렘의 검이 스르르 모래바다 위를 흐르기 시작했다.
느리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현란하고.. 무섭다.
달빛이 살렘의 검 끝에서 일렁일렁 춤을 추고 있었다.
병규는 쉴새없이 몸을 날려야 했다.
살렘은 검을 무차별고 날리지 않았다.
박자를 맞추듯, 천천히, 그리고 적절하게.
하지만 그 느릿느릿 날아오는 검광에 병규는 앞이 아득해 오는 것만 같았다.
피할 곳이 없다.
전력을 기울여 달려도, 이리저리 휘어져 오는 검광은 그가 어디를 갈자 밀리 알고 있기라도 한 듯, 항상 앞을 가로 막았다.
어디를 어떻게 피해도 도저히 검광의 그물에서 벗어날 수 없었다.
“쿠쿠쿠. 이거 실망이에요. 뭔가 한 가닥을 기대하는 바가 있었는데, 당신은 고작 빠른 움직임뿐인 것 같군요.”
병규에게 실망을 느꼈다. 이 정도라면 굳이 필립 공작에게 데려갈 필요도 없다.
살렘의 눈빛이 예리해졌다.
살기 또한 깊어졌다.
검은 더욱 더 싸늘해지고, 검광은 섬뜩할 정도로 날카롭게 빛났다.
‘피할 수 없다.’
놀랍게도 빛처럼 빠른 그의 발보다 놈의 검은 더 빠르고 영활한 것이다.
암담한 현실을 깨닫는 순간, 병규는 더 이상 달아날 생각을 버렸다.
여유를 두고 싸울 상대가 아니다. 처음부터 최선을 다한다.
‘요수의 발톱.’
촤아악.
그의 양손에서 푸르스름한 요기가 솟아 나왔다.
“호오?”
살렘의 한쪽 눈이 슬며시 커졌다.
“몹쓸 사람이군요. 그런 재미난 기술을 여태 숨기고 있었다니.”
빨간 혓바닥이 입술을 축인다.
스스스슥.
놈이 움직였다.
검을 뽑은 후 처음으로 움직인 것이다.
쉭.
빠르고 짧게, 검이 날아왔다.
검의 움직임이 뻔히 보이는데 이상하게 피하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이번엔 검 끝에서 검은 기운이 뭉클 일어나고 있었다.
병규는 동물과 같은 반사신경으로 상체를 뒤로 젖혔다.
검이 그의 어깨를 스쳤다.
병규는 그대로 뒤로 재주를 넘고는 그 탄력을 이용하여 쏘아진 화살처럼 살렘의 가슴으로 파고 들었다.
치아악.
손끝으로 힘을 쏟자 요수의 발톱이 몇 배나 길어졌다.
엄청난 반사신경에 눈이 부실 정도로 빠른 스피드. 게다가 요수의 발톱에서 쏟아져 나온 요기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을 정도로 요사스러웠다.
하지만 살렘은 히죽 하고 진하게 웃을 뿐이었다.
“쿠쿠. 놀랍군요.”
그는 구태여 몸을 피하지 않았다. 도리어 손목을 한 바퀴 돌리며 채찍처럼 뻗어낸 검을 회수했다.
방어가 아니라 공격을 선택한 것이다.
비스듬히 돌던 칼날이 돌연 비수처럼 병규으 등을 노리고 날아들었다.
이대로 살렘의 가슴을 꿰뚫었다간 자신 또한 뒤에서 날아든 검광에 허리 아래가 썩둑 잘려 나갈 위기.
글 미세한 기척을 읽은 병규는 살렘을 쳐가던 것을 포기하고 빙글 신형을 돌렸다.
치지지직.
검고 요수의 발톱이 마주치자 요란한 소리와 함께 불꽃이 튀었다.
‘역시.’
살렘의 검은 잘라지지 않았다.
케르베로스의 기사단장 파면에 이어 두 번째 맛보는 단단함이다.
무서울 정도로 예리한 요수의 발톱이지만 상급 기사 이상의 검에는 그 예리함이 통하지 않았다.
검을 감싼 마나의 기운이 요수의 절단력을 상쇄시키는 것이다.
하지만 병규는 실망하지 않았다.
애초부터 요수의 발톱으로 무언가를 할 생각은 없었다.
그의 진짜 한 수는 이 다음이었다.
‘오우거의 힘!’
투웅!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미증유의 힘이 활화산처럼 솟구쳤다. 용솟음치는 괴력은 곧장 그의 팔을 통해 뻗어 나갔다.
“컷!”
살렘의 입에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검고 요수의 발톱이 맞붙은 상황. 돌연 밀어치는 병규의 힘이 폭주하지 시작했다.
투쿵!
묵직한 진동과 함께 모래바람이 일며 살렘의 몸이 허공으로 치솟았다.
병규의 거력에 당황한 듯 그리 팔다리가 나무 위에서 대책 없이 뻗어지는 아기 새처럼 파닥였다.
“핫!”
병규는 무릎을 굽혔다 펴며 터무니없는 탄성으로 허공 높이 솟구쳤다. 날개처럼 좌우로 뻗어낸 두 팔에서 요수의 발톱이 무려 5미터나 뻗어 나왔다.
허공에서 운신이 자유롭지 못한 것을 노린 치명적인 일격.
“끝이다.”
방패연의 꼬리처럼 흔들거리던 요수의 발톱이 빛줄기처럼 쏘아져 나갔다.
사람이 죽을지도 모른다는 걱정은 이미 안중에도 없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안과 압박이 그를 극한의 상황으로까지 내몰고 있었다.
지금 처리하지 못하면 당한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살렘은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치앙!
도저히 움직일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도 검을 휘둘러 요수의 발톱을 막아낸다.
“쿠쿠. 아깝군요.”
병규를 보며 고소를 짓는다.
‘젠장.’
저 조롱기 섞인 듯한 웃음. 은근히 내비치는 살렘의 여유가 병규를 구석까지 내몰고 있는 것이다.
살렘은 한계까지 끌어낸 병규의 능력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으면서도 실실 웃고 있었다.
마치 초식동물의 쓸데 없는 반항을 가소롭다는 듯이 쳐다보며 즐기고 있는 맹수처럼.
“그 웃음... 마음에 안 들어!”
병규는 다시 한 번 오우거의 힘을 아용했다. 아낌없이 쏟아 부은 괴력은 가히 상상을 불허할 정도다. 거대한 유성이 떨어지는 것 같은 충격이 살렘의 전신을 휩쓸었다.
쩌정.
충격고 함께 살렘의 검이 부러질 듯 휘어졌다. 하지만 끝내 부러지지는 않았다.
대신 어거지 같은 힘을 이기지 못하고 날개 잃은 새처럼 아래로 추락했다.
“처박혀!”
병규는 저도 모르게 고함을 쳤다. 상당한 높이. 이곳에서 곤두박질치면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당해낼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의 바람과 달리 살렘은 아지 여유가 있었다.
“쿠쿠쿠. 들어드리고 싶습니다만, 옷이 망가지는 건 싫군요.”
살렘의 검이 빙글 휘돌았다. 검 끝이 푹신한 모래에 박혔다. 원래대로라면 모래에 깊숙이 쑤셔 박혀야 하는데, 무슨 재주를 부린 것인지 태풍 만난 갈대인 양 검신이 휘청 휘어졌다.
그 탄력을 이용해 퉁! 하고 가볍게 튕긴 살렘은 모래 위에 사뿐히 내려설 수 있었다.
“후와. 굉장한 힘인 걸요? 인간의 힘이라곤 믿지 못할 정도군요.”
저만치에 털썩 떨어지는 병규를 향해 살렘은 손을 짤짤 흔들어 보였다. 놀란 듯한 표정
가식이다.
놀란 것처럼 보이지만 실은 병규를 놀리고 있는 것이다.
슬슬 여유를 부리면서도 얼마든지 상대할 수 있다.
초승달처럼 구부러진 살렘의 미소는 그렇게 속삭이고 있었다.
“한 번씩 주고 받았으니 이번에 다시 제 차례겠지요?”
말과 함께 살렘은 검으로 모래를 비질하듯 쓸었다.
촤악!
검에 의해 파해쳐진 모래 알갱이가 비수처럼 병규를 향해 일제히 쏟아졌다.
“억!”
병규의 입에서 신음이 쏟아졌다.
설마 모리를 파도처럼 일으켜 쳐 보낼 줄이야.
워낙 광범위하게 뿌려진 통에 피할 방법이 없었다.
“으다다다.”
병규는 요수의 발톱을 정신없이 휘둘렀다. 하지만 허접한 실력으론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모래 알갱이를 도저히 처리 할 수 없었다.
그의 능력은 번개처럼 빠른 두 발고 경이로운 탄성. 그리고 섬뜩한 요수의 발톱과 기척을 읽어내는 귀다.
지금까지 이런 능력들과 동물적인 감각을 총동원해 적들과 싸워왔다. 한마디로 체계적인 수련을 받은 적이 거의 없다는 소리다.
“제길.”
막을 수 없음을 깨달은 병규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눈만은 보호하자는 생각에서 였다.
파파팍.
모래 알갱이가 살 속으로 박혀들었다.
빠끔따끔한 통증이 전신을 휩쓸었다.
단순히 모래가 살 속에 박혔을 뿐인데, 그 통증이 너무 예리하고 고통스러웠다. 모래의 실린 힘이 그만큼 엄청났던 것이다.
온몸이 욱신 거렸다.
쿨럭.
허리를 접으며 기침을 뱉자 검은 피가 토해져 나왔다.
턱.
끙끙 신음을 흘리는 병규의 머리를 살렘의 발이 꾹 하고 밟았다. 그의 발 아래 깔린 채 병규는 가쁜 숨을 몰아 쉬었다.
“쿠쿠쿡. 결국 이렇게 되었군요.”
허리를 바짝 숙여 병규의 얼굴 앞에 자신의 얼굴을 들이밀며 음층맞게 웃는다.
“시시합니다. 시시해. 물론 당신의 신기한 능력만큼은 연구해 보고 싶을 정도로 흥미롭습니다만.”
빨간 펴를 내밀어 병규의 콧등을 핥았다.
웃음 띤 살렘의 눈가에 조롱이 맺혀 있었다.
“실망스러워?”
병규가 물었다.
살렘은 활짝 웃으며 엄지와 검지 손가락을 살짝 벌려 보였다.
“조금. 아주 조금. 쿠쿠쿠.”
그렇다면...“
병규의 표정이 변했다.
“이건 어때!”
파핫.
모든 힘을 소진한 듯 보였던 병규의 몸이 한차례 거칠게 휘돌았다. 그 서슬에 병규의 머리를 밟고 있던 살렘은 순간 당황해 뒤쪽으로 물러났다.
“힘이 아직 넘치시는...”
웃는 얼굴로 조서를 날리던 살렘은 미처 뒷말을 이을 수 없었다.
촤아악.
모래가 파도처럼 일어나며 그를 덮쳤던 것이다.
살렘은 급히 검을 들고 막을 만들 듯이 맹렬하게 휘둘렀다.
쩌러러러렁.
모래와 검광이 부딪히며 양철지붕 위에 떨어지는 빗소리를 천배 정도 확대시킨 듯한 소음이 일었다. 병규와 달리 살렘의 검술은 이미 극에 다다라 있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모래를 튕겨낼 수 있었다.
‘이 기술’
살렘의 미끈한 이마 위엔 한 줄기 주름이 그려져 있었다.
파도처럼 일어나던 모래바람을 물방울처럼 튕겨 날려 보내는 이 기술
바로 그가 자랑하는 페이탈 드라이브(fatal drive)가 아닌가.
설마 ... 아니겠지.‘
머릿속에서 번뜩이며 이는 생각을 애써 부정했다.
그 어떤 누구도 페이탈 드라이브를 한 번 보고 따라할 수는 없다. 얼핏 보기엔 그냥 모래를 광범위하게 쏘아 보내는 것 같지만, 모래를 연막처럼 뿌리는 것과 암기처럼 쏘아보내는 것은 엄연히 달랐다.
페이탈 드라이브는 응축된 힘과 적절한 기교로 무수한 흙고 모래를 화살처럼 빠르고, 암기처럼 정교하게 날리는 특별한 기술이기 때문이다.
결코 몇 번 본 것만으로 흉내낼 수 있는 잔재주가 아닌 것이다.
한데, 놈이 했다.
믿기지 않게도 거의 완벽하게 말이다.
‘알아볼 필료가 있겠어.’
살렘의 입가에 다시금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신기한 물건을 보면 항상 묘한 감정에 들뜨곤 했다. 그래서 이것을 뜯고 분해하여 그 작동원리와 구조를 알아내야먄 직성이 풀리곤 했다.
이 버릇은 세월이 제법 흐른 지금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그런데 지금 눈앞의 녀석이 바로 그런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었다.
벌컥벌컥.
살렘의 모래기술로 간신히 위기에서 탈출한 병규는 화급히 수통의 물을 마셨다.
박혀든 모래 알갱이 때문에 온몸이 엉망이다.
뱃속이 찢어지게 아프고, 목구멍이 매캐한 걸 보니 내자에까지 손상을 입은 것 같다.
싸한 물이 목을 타고 전신으로 번졌다. 그것도 잠시, 후두둑 하며 몸에 박혔던 모래들이 피부 바깥으로 밀려나왔다.
이때만큼은 스크래그에게서 카피해 낸 능력이 고맙게 여겨졌다. 재생능력이 없었다면 끙끙 신음하다 내장 깊숙이 파고든 모래 때문에 결국 죽게 되었을 것이다.
“쿠쿠. 너무 쉽게 쓰러지는 것 같아 실망스럽더니. 제법이군요.”
병규가 쏘아낸 모래들을 처리한 살렘이 천천히 다가왔다.
다행히 거리가 있어 그의 몸이 재생되는 것을 보지 못한 상화이다.
이것은 기회다.
병규는 일부러 지친 기색을 띠며 살렘과의 간격을 가늠했다.
스물.. 열다섯.. 열셋..열둘...
둘 사이의 간격이 열 걸음이 되는 순간 뛰어나간다. 그 정도라면 제아무리 소드마스터라도 피할 수 없는 기습을 할 수 있다.
그렇게 간격을 셀 때다.
정확히 열한 발자국 정도의 간격이 되던 때, 살렘의 발이 멈춰졌다.
‘?’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이 채 사라지기도 전,
찡.
그리 귀가 아주 미세한 소음을 잡아냈다. 그것은 검이 검집을 벗어나는 치찰음이었다.
“흡.”
병규는 빙글 신형을 돌렸다. 머리를 노리고 날아들던 검광이 귓불을 스치고 지나갔다. 조금만 늦었어도 그의 머리통은 썩은 수박처럼 쪼개지고 말았을 것이다.
간신히 공격을 피해 낸 병규는 곳으로 헛바람을 삼켰다.
검광이 무려 7, 8미터를 날아왔다는 것도 놀랍다. 하지만 더더욱 놀라운 것은 살렘이 그리 속셈을 휜히 꿰뚫어 보았다는 점이었다.
‘이렇게 된 이상.’
피하지 못할 판이라면 정면으로 부딪힌다.
팟.
병규는 발목까지 푹푹 잠기는 모래 위를 나는 듯이 달렸다. 얼마나 빠른지 바람과 부딪힌 콧등이 다 시큰거릴 지경이었다.
저만치 있던 살렘이 순식간에 손만 뻗으면 닿을 거리까지 가까워졌다.
“받아라.”
촤아악.
요수의 발톱이 밤공기를 길게 찢어 놓았다.
치지직.
살렘의 검이 흐르듯 날아와 요수의 발톱을 막았다. 검은 불꽃이 요란하게 튀었다. 병규은 이번에도 오우거의 힘으로 검을 누르려했다.
기교로는 상대가 안되니 힘과 스피드로 승부를 건다.
“안 되지요. 그수는 이미 통하지 않습니다.”
살렘의 검에서 힘이 빠져나갔다. 덕분에 강하게 쏟아낸 병규의 힘은 검신을 타고 아래로 쿵 하고 떨어지고 말았다.
“허점입니다.”
휜히 드러나 병규의 등을 향해 살렘이 검을 떨어뜨렸다.
위기 일발의 상황.
병규는 손으로 바닥을 탕 하고 치며 몸을 회전시켰다. 회전하는 그의 몸을 따라 요수의 발톱이 나무를 자르는 전기톱처럼 맹렬하게 주위를 휘저었다.
전혀 뜻밖의 일격.
“어헛.”
살렘은 위로 두러 발자국 물러났다. 제법 빠른 대응이었지만 병규의 공격은 그보다 한 수 빨랐다. 쫙 하며 소맷자락이 잘라졌다.
‘떨어지지 않는다.’
팽이처럼 돌며 자세를 바로 잡은 병규은 쉴 틈도 없이 살렘에게 달라붙었다.
촤촤촤촹. 치지지직.
짧은 순간에도 수십 번, 아니 수백 번. 요수의 발톱과 살렘의 검의 부딪히면 요란한 섬광과 귀 따가운 소음을 터트렸다.
한 끝 차이로 오고가는 공방등.
두 사람의 대결은 너무도 살벌했다.
손끝하나 깜박이는 정도의 미세한 틈만으로도 한 사람의 목숨은 그대로 끝장이 날 것이다.
공격하는 병규도 이를 막는 살렘도 무아지경이 된 듯 반사적으로 피하고, 무의식적으로 공격을 퍼부었다.
글 와중에 살렘의 상의는 너덜너덜 걸레 조각처럼 찢겨지고, 병규는 온몸에 상처를 입고 수통마저 박살이 아 버렸다.
얼핏 대등해 보이는 두 사람의 대결. 그러나 병규는 느끼고 있었다. 자신은 도저히 상대가 안 된다는 것을. 그는 최선을 다하고 있지만 살렘에겐 아직 여유가 남아 있었다.
“쿠쿠쿠. 즐겁군요. 하지만 아쉽게도 시간이 얼마 없답니다. 우리들의 유희는 이쯤에서 끝내기로 하죠.”
살렘의 기세가 한순간에 몇 배나 증폭되었다.
검은 기운이 일렁이는 그의 검과 맞부딪힐 때마다 요수의 발톱이 눈에 띄게 약해졌다.
‘너무 강해. 도저히 상대할 수 없다.’
병규의 두 눈에 암울함이 깃들었다.
이대로는 얼마 버티지 못하고 놈에게 당할 것이 뻔했다.
결국 그는 최후의 방법을 동원하기로 했다.
“이야압!”
비명에 가까운 고함을 지른 병규가 미친 듯이 요수의 발톱을 휘둘렀다. 발악에 가까운 공세였지만, 살렘은 너무도 여유 있게 막았다. 나무 젓가락릉 가지고 놀 듯이 가볍게 검을 휘저으며 맹렬히 쏟아지는 병규의 공격을 모조리 걷어냈다.
환히 드러나는 병규의 전면.
살렘은 빨간 혀로 입술을 축이며 감칠맛 나는 목소리로 마지막을 고했다.
“이만 잠들 시간입니다. 못난이 왕자님.”
푸욱
차가운 이질감이 가슴께를 파고들었다. 얼음처럼 차가웠던 그 것은 가슴팍을 헤집고 등 뒤로 삐죽 나갈 때쯤엔 용광로에 달궈진 쇠처럼 뜨겁게 바뀌었다.
쿨럭.
병규의 입에서 멀건 핏물이 토해졌다.
“쿠쿠. 칼을 맞은 소감이 어떠신지?”
살렘은 장난하듯 웃으며 물었다. 턱 아래로 진득한 피를 뚝뚝 떨구던 병규가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움찔.
병규를 보던 살렘의 얼굴이 순간 굳었다.
웃고 있었다.
가슴이 관통된 병규가, 벌어진 입술 사이로 피를 샘물처럼 울컥울컥 토해 내는 그가, 놀랍게도 살렘를 보고 웃고 있는 것이다.
살렘의 머릿속엔 의문이 떠오르는 순간.
텁썩.
병규가 그의 칼을 움켜쥐었다.
“잡았다. 이젠 막을 수 없겠지?”
“...!”
오우거의 힘으로 움켜진 칼은 아무리 용을 써도 움직여지지 않았다.
병규의 웃음은 바로 이런 의미였던 것이다.
촤아악.
음악한 비명을 지르며 요수의 발톱이 날아들었다. 살렘은 어쩔수 없이 검을 놓았다.
검사로서 검을 손에서 놓치는 것은 씻을 수 없는 불명예. 하지만 명예에 손상을 받는 것이 목숨을 잃는 것보다는 백배는 나았다.
하지만 병규의 이번 공격은 목숨을 걸은 필살의 각오였다.
서걱.
날카로운 절삭음과 함께 팔 하나가 허공에 떠올랐다.
“크아악.”
오른팔이 잘려진 살렘은 왼손으로 얼굴을 감싼 채,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단순히 손가락 하나만 잘려 나가도 죽을 듯이 아픈데, 팔 하나가 통째로 잘려 나갔으니 그 고통이 얼마나 클 것 인가.
흐느끼듯 비명을 지르는 그를 보며 병규 역시 철퍼덕 모래 위로 무너졌다.
“헤, 헤헤. 꼬, 꼴좋다.”
병규는 피를 울컥울컥 토해 내면서도 괴성을 지르는 살렘을 보며 만족스러운 듯 웃음을 흘렸다.
사실 부상의 정도로 따지자면 병규가 훨씬 더 치명적이다. 명치 아래가 관통당한 것과 팔 하나가 잘린 것은 비교할 수조차 없는 것이다.
보통사람이 병규와 같은 상처를 입었으면 그대로 즉사를 면치 못했을 것이다.
그나마 죽지 않고, 숨을 헐떡이는 것으로도 불가사의한 생명력이라고 밖에 설명할 길이 없었다.
“제, 젠장. 이번에는 .. 진짜로 죽겠군.”
병규는 힘없이 고개를 떨구었다.
한 모금의 물만 있어도 어떻게 해 볼 텐데.
아쉽게도 격전 중에 수통이 박살나 버렸다.
호랭이도 없으니 이번엔 꼼짝없이 죽음을 면치 못할 것이 분명했다.
“그, 그래도 녀석의 팔이라도 한쪽 날렸으니...”
가슴은 찟어지는 고통으로 욱씬욱씬 했지만 마음만은 통쾌하고 시원했다.
‘피곤하네.’
병규는 자꾸 내려앉는 눈꺼풀을 껌뻑이면 흐릿해지는 의식을 놓치고 있었다.
그때였다.
문득 병규은 하늘이 어두워졌다고 느꼈다.
눈동자를 데굴데굴 굴렸다.
구름이 달을 가리는 것이 아니었다.
검은 그림자가 그를 내려다보고 있었던 것이다.
“즐거우셨습니까?”
히죽 웃는 얼굴.
가슴 저 밑에서 쩌릿쩌릿한 충격이 울컥 치솟았다.
살렘이었다.
좀 전까지 비명을 지르던 놈이 병규를 내려다보며 히죽이죽 웃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 목숨까지 바치며 마지막 일격을 날린 용사는 차가운 모래바다 위에 누워 싸늘한 주검이 되어가건만, 용사의 일격을 받은 악당은 천연덕스럽게 부활하여 용사마저 사라진 이땅을 암흑으로 물들이는구나. 오오~ 숭고한 희생이여. ,그것은 덧없는 반항에 불과 하였으니. 이 어찌 통탄하지 않을 수 있으리오.”
그는 벌레처럼 발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병규를 보면 비극적인 연극의 배우처럼 팔을 펼치며 안타까운 듯 대사를 날렸다.
“....”
병규는 입을 벌린 채 허망한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어떻게...“
분명 좀 전만 해도 팔을 잃은 고통에 절규를 쏟아내던 드였는데. 지금은 어떻게 이렇게 멀쩡할 수 있을까. 설마 고통을 잊는 약물이라도 섭취한 것일까?
“쿠쿠. 제가 너무 멀쩡해서 놀랐나요? 아나. 굳이 대답하지 않아도 됩니다. 당신의 그 겁먹은 눈동자만으로도 충분히 짐작할 수 있군요. 뭐, 일일리 말로 설명하려면 복잡하지만.. 간단히 행동으로 보여드린다면.”
장황설을 늘어놓던 살렘이 사뿐사뿐 걸아가 왼팔로 끊어진 오른팔을 들고는, 속임수를 준비하는 마술사처럼 한껏 포즈를 취하며 끊어진 팔을 어깨에 슬며시 가져갔다.
잘린 팔이 검은 물감이 서로 뒤섞이듯 간단하게 붙었다.
“나쁘지 낳군요.”
휘휘 팔을 돌려본 살렘은 만족한 듯 힙가를 좌우로 쭉 늘리며 웃었다.
“!”
살렘은 웃지만 병규는 눈앞이 까마득해지는 충격을 받았다.
“혹시난 궁금하실까 봐서 그러는데 사실 이런 것도 가능합니다.”
살렘은 방금 붙였던 오른팔을 쭉 잡아 뽑더니 머리 위에다 슬며시 올려 놓았다.
“엄지, 검지, 약지, 소지, 이런 .. 이번엔 틀렸군요. 다시 엄지, 검지...”
놀랍게도 그의 구령에 맞춰 머리 위에 올려놓은 오른손의 손가락이 피아노를 연주하듯 차례차례 움직였다.
“너.. 인간이.. 아니었군.”
“유감스럽게도.. 바로 그렇습니다. 쿠쿠.”
천연덕스러운 살렘의 대꾸에 욱씬하고 가슴이 쑤셔왔다.
처음부터 끝까지 조롱만 당한 느낌이다.
“아아. 그렇게 슬픈 표정은 말아요. 당신은 자긍심을 가져도 좋은 사람입니다. 제 몸에 이헐게 큰 상처를 입힌 것은 제가 이 몸뚱이를 차지한 이후로 처음 있는 일이거든요.
인간 중에서도 당신이 처음이죠. 그 정도면 훌륭해요. 혹시 필요하면 증명서라도 발급해 드릴까요? 아! 참, 당신에겐 필요 없겠군요. 지금부터 영원한 나락으로 떨어질 테니까요. 쿠쿠쿠.“
끝도 없이 계속되는 살렘의 주절거림. 병규은 그의 간악한 웃음소리를 자장자로 들으며 서서히 흐려지던 의식을 놓아 버렸다.
피를 너무 많이 흘렸다.
“젠..엔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