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7화 (50/102)

 우리 힘을 합쳐 세계를 정복하세

이드라센 대륙을 북쪽으로 한참 발길을 옮기면, 차가운 북풍과 따뜻한 온천이 흐르는 이색적인 아름다움으로 가득 찬 도시를 만나게 된다. 

 정령의 도시 유리스.

 아이린 왕국의 수도이자 정령에게 축복받았다고 전해지는 위대한 천년 전설이 숨쉬는 도시.

 살을 에는 추위 속에서 유독 이 도시만은 따뜻한 기류가 흘렀다. 도시를 에워싸고 있는 온천 때문이다.

 80도를 넘는 뜨거운 온천. 만년한설로 뒤덮인 고산준봉.

 이 어울릴 것 같지 않는 상반된 두 가지의 요소가 한데 섞여 있는 유리스는 덕분에 세상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묘한 풍취를 자랑하고 있었다.

 이 극단적인 아름다움을 품고 있는 도시의 풍취에 현자 그리톨마저 이드라센에서 유일하게 정령의 숨결ㅇ르 느낄 수 있는 도시라며 극찬을 아끼지 않았다 한다.

 하지만 그 조화와 아름다움의 도시는 얼마 전부터 그 아름다운 모습에 큰 흉터를 남기고 말았다.

 반란.

 천년간 아이린 왕국에 처음 있는 생소한 일대 사건.

 과거 아이린이 제국에서 왕국으로 격하될 때도, 당시 아이린의 왕이던 오마샤리프 제국의 힘이 다했다는 비통한 선언과 함께, 다시 시작한다는 의미로 스스로 제국의 이름을 버린 것이다.

 그런데 그 위대한 도시가 이제는 반란군이라는 이질적인 폭도의 발굽에 깔린 채 그 끝이 어딘지 알 수 없는 신음을 흘리는 신세가 되었다.

 엉망이었다.

 정령들의 고고한 품격이 그림으로 살아 숨쉬던 멋진 벽은 검은 얼룩으로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었으며, 영광을 노래하던 국기는 찢어진 채 바닥에 널브러져 있었다. 색색의 창은 형체도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망가져 있었다.

 그렇게 일그러지고 부서진 실내의 모습에서 영광과 영화의 모습은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과거 아이린 왕국의 왕과 귀족들이 정치와 민생을 논하던 회의장은 그렇듯 씻을 수 없는 상처를 입은 채 반란군의 손아귀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었다.

 세 사람이 있었다.

 반란군의 주축을 이루던 귀족들.

 한데 무슨 일에선지 그들 모두의 표정이 전에 없이 어두웠다.

 “실패라.”

 버지니아 백작의 보고를 받은 필립 공작의 입에서 이가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이것은 단순히 공주를 놓쳤다는 것으로 끝날 일이 아니다.

 한마디로 치명적인 실패다.

 200이 넘는 기사 가운데 돌아온 자들은 고작 80도 채 되지 않았다. 특히 어렵게 키운 마법사와 어세신들이 전멸한 것은 치명적인 손실을 가져왔다.

 “이래서야 전력에 큰 차질이 빚어질 수밖에 없군.”

 추적대에게 과한 병력을 투입한 것은 희생을 조금이라도 줄여보고자 하는 기대에서였다. 

 압도적인 전력이라면 아무리 미네르바 기사단의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큰 피해 없이 제압할 수 있을 것이란 계산이 깔려있었다.

 하지만 막상 결과는 전혀 엉뚱하게도 공주 생포가 실패한 것은 물론이고, 씻을 수 없는 치명적인 타격까지 입었다.

 믿지 못한 일들이다.

 투득.

 필립 공작의 깍지 낀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동시에 스산한 살기가 그의 전신에서 뿜어져 나왔다.

 부르르.

 버지니아 백작과 피네스의 몸이 동시에 떨렸다.

 두려움.

 각기 소드익스퍼트 상급과 5서클의 마법사인 두 사람이 필립공작이 내뿜는 살기에 숨조차 제대로 쉬지 못했다. 그럴 수밖에 없다. 필립 공작은 아이린이 자랑하는 세 명의 소드마스터 중 한 명이었기 때문이다.

 “몬스터들이 공주를 도왔다는 말인가?”

 “아, 아닙니다. 저희들이 잡은 것은 공주 일파가 아니라 미끼였습니다. 아마도 추적대의 이목을 돌리기 위해 일행의 일부를 희생시키려 한 것 같은데. 갑자기 망할 오크 놈들이 난입하는 바람에.”

 버지니아 백작은 고개조차 들지 못했다. 자신만만하게 출정했었다. 그런데 이런 굴욕ㅇ르 받게 될 줄이야. 그것도 몬스터들 때문에 말이다.

 씻을 수 없는 치욕이다.

 “이상한 일이군. 왜 오크들이 공격해 왔을까.”

 필립 공작은 턱을 받힌 채 골똘히 생각했다.

 오크가 아무리 미개한 놈들이라지만 기본적인 머리는 된다. 적어도 이드라센에 있는 오크들이라면 기사들과는 절대로 정면대결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덤볐다는 거지. 겁도 없이.’

 결과는 황당하게도 오크들의 승리.

 오크들이 갑자기 뭘 잘못 먹기라도 한 것처럼 막무가내로 달려들었다고 한다. 보통 기사 한 명이 오크 십여 마리는 충분히 상대할 수 있다. 그것도 한 명이 열 마리의 오크를 한꺼번에 상대했을 때의 얘기가. 

 이것은 전술교본에도 실려 있는 일반적인 얘기다.

 그런데 이번의 오크들은 특별했다. 심혈을 기울여 양성한 기사들이 세 마리의 오크에게도 쩔쩔맸다고 한다.

 기이한 점은 그것뿐만이 아니다.

 이번에 추적대를 가로막은 오크들은 그 수가 무려 2,000여 마리가 넘었다.

 오크들은 혈연을 굉장히 중요하게 여겨서, 부족 중심의 군락을 이룬다. 그 수는 100여 마리를 넘지 않는 게 보통이다. 얼마 전 트라우마에서 대규모의 오크마을이 발견되었다는 보고가 있긴 했지만, 그것은 어디까지나 특별한 경우에 해당한다.

 “묘하군.”

 단순히 오크들의 습격으로 일을 망친 것이라고 보기엔 미심쩍은 부분이 많았다.

 그렇게 오크들의 이상한 난입에 신경을 쓰던 그는 문득 마법사인 피네스가 보고한 괴상한 능력의 청년에게까지 관심이 가게 되었다.

 ‘그러고 보니 오크들이 난입했을 때에도 그 청년이 있었다고 했었지.’

 그저 우연일 수도 있다.

 하지만 묘하게 신경이 쓰였다.

 ‘아무래도 조사를 해봐야겠군.’

 어차피 공주파를 제압하기 위해선 그의 존재가 큰 걸림돌이 된다. 기회가 될 때 손ㅇ르 쓰는 것이 바람직하다.

 “보고는 잘 받았네. 돌아가서 쉬게. 이후의 일은 내일 상의하도록 하지.”

 쉬라는 공작의 말에 버지니아 백작과 피네스는 한숨을 쉬며 회의장을 빠져나갔다. 별 다른 문책이 없음을 다행스럽게 생각하고서 말이다.

버지니아 백작과 피네스가 나간 후,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필립 공작의 입이 열렸다. 

 “살렘.”

 놀랍게도 그가 입을 열자마자 아무도 없는 실내에 한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사십대 중반의 미끈한 모습ㅇ르 한 그는 후작의 직위인 살렘 이가노프였다.

 이색적인 이름처럼 그는 아이린 왕국 출신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중용된 것은 오로지 그의 실력 때문이다. 

 “위대하신 공작 저하께서 웬일로 불민한 이 몸을 부르셨는지요?”

 살렘은 아아하게 허리를 접으며 웃음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이죽거림은 그만 두게.”

 “당치도 않습니다. 감히 제가 공작 저하에게 이죽거리다니요. 당장 제 목이 달아날 텐데 어찌 그런 망언을 입에 담겠습니까.”

  “......할일이 있네.”

 공작의 무심한 말에 살렘의 얼굴에 짙은 미소가 그려졌다.

 “꼬맹이를 원하십니까?”

 “이미 한 번 만나 봤으니 잘 알겠군.”

 “글쎄요.”

 살렘의 작은 눈동자가 눈자위를 한 바퀴 빙글 돈다.

 “그때는 깊은 산중이었던 데다 멀리 떨어져 있었던 관계로 자세히 살펴볼 짬이 없었지요.”

 필립 공작은 이내 살렘의 말이 거짓말임을 파악했다.  살렘의 긴 혀가 빨간 입술을 적시고 있었다.

 탐스런 먹이를 발견했을 때 보이는 특유의 행동.

 분명 살렘은 놈을 유심히 관찰했고, 흥미로운 상대라는 판단까지 마친 것이다.

 “며칠이면 되겠나?”

 “쿠쿠쿠. 하루면 족하지 않을까요?”

 수도에서 고란산맥까지 말을 타고 전력으로 달리면 3일 정도 걸린다. 왕복으로는 무려 6일이나 걸리는 거리다.

 그런데 살렘은 하루 만에 다녀오겠다고 말하는 것이다.

 어이없는 소리임에도 필립 공작은 ‘어떻게?’라고 묻지 않았다. 살렘이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충분히 짐작하고도 남기 때문이다.

 “조심하게. 그놈들은 아직 길이 덜 들었어. 타고 다닐 정도로 말을 잘 듣지는 않네.”

 “쿠쿠. 조심이라고요?”

 살렘의 눈이 희번뜩였다.

 “설마 제게 하는 말은 아니겠지요?”

 필립 공작, 글로리 후작에 이어 아이린 왕국의 삼대 소드마스터가 바로 그였다.

 우여곡절 끝에 고란산맥을 통과한 레종 공주 일행은 이틀 동안 쉬지않고 말을 달렸다.

 언제 또 추적자들이 뒤따라올지도 모른다. 이런 불안감이 그들을 쉬지 않고 달리게 만들었다.

 삼 일째 아침, 간신히 자란평야를 벗어날 수 있었다. 푸른 초원지대 너머 끝도 없이 펼쳐진 붉은 모래사막이 보였다.

 마물들이 성지.

 붉은대지다.

 이제 트라우마까지는 밤새 달리면 하루면 도착할 수 있는 거리였다.

“흠흠.”

 루멘이 불편한 헛기침을 발하며 병규의 시선을 끌었다.

 일전의 사건으로 그는 병규를 조금 불편하게 생각했다.

 “무슨 일입니까?”

 “어험험. 이런 말을 물어서 미안하네만. 저것들과는 어떻게 된 사이인가?”

 루멘은 슬쩍 일행의 뒤를 눈짓했다.

 검은 오크들이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며 일행의 뒤를 쫓아오고 있었다.

 “어쩌다 보니 알게 된 오크들입니다만.”

 “흠흠. 오크들과 찬분이 있다니 놀라운 일이군. 하지만 말일세. 저들을 끌고 다니면 좀 곤란하지 않겠는가? 아무래도 남의 눈에도 잘 띌 테고, 쫓기는 입장에선 썩...... .”

 “음. 확실히 그럴 수도 있겠군요. 알았습니다.”

 병규는 같은 말을 타고 있는 퀴니를 부드럽게 불렀다.

 “들었지 퀴니야?”

 “응”

 “오크들더러 잠깐 어디 다른 곳에 있으라고 하면 안 될까? 싫어하는 사람이 있는데다, 마을에 들어갈 때도 문제가 좀 될 것 같고 말이야.”

 “흐음.”

 손가락으로 볼을 찌른 채 잠시 생각한 퀴니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

 흔들리는 말안장에서 비틀비틀 일어선 그녀는 두 손을 입가에 모으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따까리 대장.”

 그녀의 외침에 횃불을 손에 든 갈색부족의 족장 우르하이가 십여 마리의 오크를 이끌고 그녀에게 달려왔다.

 “킁. 우르하이 대령했다. 킁킁.”

 “응. 잠깐 안 보이는 곳에 가 있어. 나중에 필요하면 부를게.”

 “킁킁. 갈색오크 족은 마스터에게 절대 충성한다. 킁.”

 제법 의연한 태도로 말한 우르하이는 2,000여 마리에 이르는 부족들을 이끌고 사라졌다.

 오크들이 사라지자 잔뜩 긴장하고 있던 기사들은 한시름 덜었다는 표정이 되었다. 아무리 명령에 따르는 오크들이라지만 명백히 몬스터다. 언제 인간에게 달려들지 모르는 일이 아닌가.

 “휴우. 그나저나 정말 대단한 재주로군. 한두 마리도 아니고 저렇게 엄청난 몬스터들을 끌고 다닌다니. 저건 완전히 군대가 아닌가.”

 “그렇군요.”

 루멘의 혼잣말에 건성으로 대답하는 디스의 두 눈이 반짝 빛을 발했다.

 밤이 되었다.

 일행은 불을 피우고 야영을 했다.

 아무리 목적지가 지척이라지만 더는 무리할 수 없다.

 붉은대지는 광폭한 몬스터들이 떼로 우글거리는 곳이다. 지친 상태로 이곳을 지나간다는 것은 그야말로 목검을 들고 오우거에게 덤비는 것만큼 무모한 짓이다.

 말도 쉬어야 했다. 이대로라면 사람도 말도 지쳐 쓰러질 판이다. 

 한적한 곳까지 걸어 나온 레종은 쓸쓸히 놓여 있는 바위 위에 걸터앉았다.

 사막이라 그런지 제법 쌀쌀했다. 옷깃을 여민 그녀는 울적한 눈으로 하늘을 올려다보았다.

 구름 한 점 없는 밤하늘엔 보석ㅇ르 뿌려놓은 듯 별이 한가득이었다. 그 아래를 흘러가는 은은한 달빛. 손 안에 넣고 갖고 싶을 정도로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휴.” 

공주의 입술에서 한숨이 새어나왔다.

 아름다운 별들. 은은한 달빛.

 모두 밤에만 빛날 수 있는 존재들이다.

 낮이 되면 찬란한 태양에 가려 빛을 잃어버리는 처량한 신세들.

 별이 가득한 밤하늘은 저토록 고고하고 아름다운데, 왜 달은 어둔 밤에만 빛을 발하는가.

 음모 속에서만 싹을 틔울 수 있는 권력이라는 놈과 비슷하게 느껴져 차가운 달빛이 그렇게 음울해 보일 수 없었다.

 “좀 춥네요.”

 어색한 말과 함께 그녀의 어깨너머로 작은 컵 하나가 보였다. 나무로 깍은 투박한 컵이었다. 레종은 고개를 돌리지 않고도 컵을 건네주는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었다.

 “고마워요.”

 레종은 두 손으로 컵을 쥔 채 그 따뜻한 온기를 느꼈다. 컵 위로 모락모락 오르는 김.

 훅훅 불던 그녀는 문득 궁전에서의 일이 떠올랐다. 예전, 왕성에선 음식은 항상 누군가가 먼저 먹은 후에야 먹을 수 있었다. 

언제나 그랬다.

 그래서 여태 그녀는 당연하게만 생각했다. 그런데 이제 보니 그런 것이 바로 화려한 궁정생활의 어두운 단면이 아닌가.

 그녀의 얼굴이 더욱 어두워졌다.

 “향이...... 좋네요.”

 병규가 건넨 차는 담백한 맛이 있었다.

 달지는 않았지만 은은한 향이 질리지 않는 여운으로 남았다.

 “호랭이가 만든 겁니다. 다른 건 잘 못하는데 음식 만드는 것과 차 끓이는 것은 잘하죠.”

 “네”

 레종의 고개가 가볍게 끄덕여졌다.

 처름 맛보는 향이지만 마치 오랫동안 즐겨왔던 것처럼 친숙하고 낯설지 않았다.

 다시 한 번 차를 음미하던 그녀는 문득 생각난 듯 병규에게 물었다.

 “그런데 백발의 그분. 이름이 호랭이라고 했죠?”

 “맞아요.”

 “예전에 카피 님의 애완동물과 같은 이름이네요.”

 병규는 대답하지 않앗다.

 그저 소리 엇이 웃기만 했다.

 “그리고 당신을 모두 변기라고 불러요. 난 당신 이름을 카피라고 알고 있는데. 왜 그런 거죠?”

 오늘따라 공주는 그에게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듯했다. 사실 그동안은 묻고 싶어도 그럴 수 없엇다. 그럴 여유도 기분도 아니었다.

 어쩔 수 엇이 병규는 입을 열었다. 삐죽거리는 그녀의 입술을 보니 도저히 대답을 안 할 수가 없었다.

 “음. 어떻게 설명해야 할지 모르겠지만, 전에 제 어깨에 있던 애완견은 지금 호랭이의 분신과 같은 존재라고 할 수 있어요. 그때의 애완견과 호랭이는 다르면서 같은 존재죠.”

 “그렇군요.”

 자신이 말해 놓고도 이해가 안 되는 설명이다. 그런데 그녀는 무작정 믿었다.

 “그런데 카피 님의 이름은...... .”

 그녀가 진짜로 알고 싶었던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에...... 원래 제 이름은 병.규.가 맞아요. 다만 이곳 사람들이 제대로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라 어쩔 수 없이 별명인 ‘카피’를 이름대신 쓰는 거죠.”

 “아. 그렇게 된 거군요.”

 공주는 이해가 된 듯 고개를 주억거렸다.

 병규.

 확실히 발음하기 힘든 이름이다. 하지만 설명하기 어려운 친근감이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다.

 “저도...... 당신을 변기라고 불러도 될까요?”

 망설이던 그녀가 간신히 용기를 짜내어 물었다.

 병규는 씁쓸하게 웃었다.

 그녀는 지금 친구만이 자신을 ‘변기’라고 부를 수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하필이면 변기라니.’

 한숨과 함께 괜스레 웃음이 난다.

 “안 되나요?”

 레종 공주가 걱정스레 물어왔다.

 “아니에요. 당신이 부르고 싶다면 그렇게 불러도 돼요.”

 “고마워요. 변기.”

 그녀는 환하게 웃었지만, 병규는 억장이 무너지는 심정으로 끝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추락해야 했다.

 ‘젠장. 이런 미녀에게 변기라고 불려야 하다니.’

 울고만 싶었다.

 그때, 그녀의 떨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요즘. 자신이 없어졌어요.”

 무슨 소리일까.

 병규는 가만 듣기만 했다.

 “전에는 몰랐어요. 제가 얼마나 버거운 책임을 어깨에 지고 있는지. 이제야...... 간신히 알게 된 것 같아요.”

 그녀는 고뇌하고 있었다.

 많은 사람 위에 성립되는 것이 왕권이다. 과연 수많은 피를 대가로 굳이 잃어버린 왕권을 되찾아야 할까.

 독해지기엔 그녀의 마음은 너무도 순수하고 여렸다.

 가만 그녀의 말을 듣고만 있던 병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면 조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모르겠어요.”

 병규는 솔직하게 대답했다.

 아는 척 어려운 말을 지껄일 수도, 피 끓는 목소리로 그녀의 여린 마음을 질책할 수도 있다. 그러나 하기 싫었다. 아니 할 수 없었다.

 공주의 심정.

 이해는 간다.

 하지만 얼마만큼이나 그 절박한 마음을 공감할 수 있는 것일까.

 그는 어려서부터 많은 고생을 했다.

 평범하지 못한 아이. 그게 병규였다.

 힘이 없어 항상 당해야 했고, 따돌림을 받았다.

 그래서 안다. 아무도 이해할 수 없는 당사자만의 고통이 있음을. 당사자가 되기 전에는 아무도 모르는 아픔과 고독함이 있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고뇌하는 그녀에게 아무 말도 해줄 수 없었다.

 “너무해요.”

 공주가 삐죽 입술을 내밀며 투덜거렸다.

 “이럴 때는 위로라도 해줘야 하잖아요.”

 곱게 눈을 흘기며 작게 투정을 부린다.

 병규는 머리를 긁적이며 웃기만 했다. 이럴 땐 무슨 말을 해줘야 할지 난감했다.

 “뭐라도 한마디 해 줘요.”

 그녀가 맑게 웃으며 부탁한다. 그 잔잔한 눈망울 속에 절실함이 소용돌이치고 있었다. 애써 웃고 있지만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심정이리라.

 병규는 한숨을 쉬며 자신의 얘기를 하기 시작했다.

 달리 해줄 말이 없었던 것이다.

 “전에...... 조금 힘든 때가 있었어요. 친인들이 나를 버렸고, 주위 사람들은 날 멀리했어요. 난 내안의 세계에 갇혀 살았고, 그러면 그럴수록 현실과는 점점 동떨어진 존재가 되어갔죠. 지금 생각하면 한심하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심각했어요. 난 노력했지만 상황은 점점 악화되어 갔죠. 그러던 어느 날 위험한 살인자를 만나 죽기까지 했어요.”

 그녀의 눈이 크게 떠졌다.

 죽기까지 했었다니. 설마 이렇게 평범하게 생긴 사람의 입에서 그렇게 극한의 경험담이 나올 줄은 몰랐다.

 “그때, 호랭이를 만났어요. 지금은 저렇게 개구쟁이 같은 모습이지만, 그때는 꽤 위엄이 넘쳤죠. 그는 내게 새 삶을 주었고, 목적 없이 떠도는 내 처량한 모습을 질타했어요. 그리곤 강제로 세상 속으로 날 끌고 나갔어요. 많은 일이 있었어요. 험악한 일도 몇 번 겪었고, 아픈 경험도 있었죠. 하지만 그 과정 속에서 가족이라고 부를 수 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었어요.”

 병규는 고개를 돌려 작은 모닥불ㅇ르 피워놓은 야영지를 바라보았다. 퀴니와 호랭이, 그리고 샤바가 보였다.

 그의 가족들이다.

 “난 이렇게 생각해요. 사람은 누구나 한 부분이 부족하다. 그래서 부족한 그 부분 때문에 항상 외로워한다. 사람마다 부족한 부분이 달라요. 때로는 어렵게 만난 두 사람이 이가 잘 맞는 톱니바퀴처럼 서로의 부족한 부분을 감싸주며 어루만져 줄 수 있는 관계가 될 수도 잇지만, 반대로 부조화를 이루며 오히려 고통을 느낄 수 있을 때도 있죠. 하지만 서로가 안 맞는다고 해서, 힘들다고 해서, 함께 가는 것을 포기하기엔 너무 아깝잖아요. 얼만 어렵게 만났는데. 많은 사람들 속에서 우연히 만났다는 것. 정말 놀랍지 않나요. 만남이란 정말 환상적인 마법인 것 같아요.”

 병규는 두 팔을 쫙 벌렸다. 펼쳐진 그의 가슴으로 밤하늘이 담기는 것 같았다.

 “미안해요. 사실 나 자신도 지금 내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몰라요. 다만 함께 가고 있다는 것만 생각할 뿐이죠. 난 레종, 당신이 얼마나 힘든지도 몰라요. 이해는 하지만 공감하기는 힘들어요. 사람은 누구나 다르고, 마음속의 생각은 더더욱 다르죠. 하지만 기억해요. 당신에겐 내 가족만큼이나 당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지금은 오직 그것만 생각해 봐요. 그러면...... 안 될까요?”

 병규의 물음을 끝으로 두 사람에게선 한동안 말이 없었다. 어렵게 그녀가 떨리는 입술을    열었다.

 “그거 알아요?”

 그녀가 갑자기 물었다.

 “내가 지금 얼마나 혼란스러운지.”

 무작정 따라가라는 말인가. 아니면 주위를 믿으라는 말일까. 그도 아니면 내 부족한 부분만 취하라는 소리일까.

 머릿속이 어지럽다.

 하지만 그럼에도 왠지 가슴이 따뜻해졌다.

 “난 당신이 부러워요.” 공주의 말에 병규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공주가 자신을 보고 부럽단다. 기쁘다고 해야 할지, 왜냐고 물어야 할지. 하지만 굳이 묻지는 않았다.

 부드럽게 웃고 있는 그녀는 왜냐고 물어도 대답을 해줄 것 같지 않았다.

 후후~ 불며 그녀는 마셨다.

 “이 차...... 향이 너무 좋은 것 같아요. 맛은 조금 쓴데 말이죠.”

 엉뚱한 그녀의 말에 병규는 빙그레 웃었다.

 문득 떠오르는 말이 있었기 때문이다.

 호랭이가 어디서 주워온 것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풀로 차를 끓일 때, 병규는 차가 너무 쓰다고 투정을 부렸었다. 그때 호랭이는 피식 웃으며 한마디를 던졌다.

 “짜사 이게 바로 인생의 맛이야.”

  인생의 맛이라.

 왠지 그 의미를 아주 조금 알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밤이 깊어졌다.

 모두가 잠든 시각, 잠든 줄 알았던 퀴니가 몰래 샤바를 불러냈다.

 “왜. 샤바?”

 샤바는 이 오랜 친구의 부름에 의아함과 일말의 기대를 동시에 느꼈다. 혹시 숨겨둔 먹을 거라도 줄지 모른다. 정말로 그런 거라면 주인님과 나눠먹어야지.

 그런 생각을 하니 한없이 뿌듯하고 즐거워졌다.

 하지만 꽤 멀리까지 걸어 나온 퀴니가 그에게 불쑥 내민 것은 볼품없는 자명종이었다.

 “오오. 자명종 군. 샤바!”

 샤바는 자명종을 품에 꼭 껴안고 뛸 듯이 기뻐했다.

 헤어진 동지를 다시 만난 것 같은 반가움이 그의 얼굴에 선명하게 어렸다.

 하지만 정작 퀴니의 선물은 자명종이 아니었다.

 “샤바?”

 삐쭉하고 샤바의 머리칼이 안테나처럼 솟았다.

 자명종 안에서 요상한 소음이 잡혔다.

 그것은 꿈에서도 잊은 적이 없는 그리운 것이었다.

 딸깍.

 자명종의 뒤판을 열었다.

 원래 개폐구조로 되어 있는지라 쉽게 열렸다.

 “샤바아아아앙!”

 샤바의 입에서 환성이 쏟아졌다.

 전혀 상상도 못한 것이 자명종 안에 있었다. 그것은...... .

 “백성들아. 샤바.”

 샤바의 백성 한 쌍이었다.

 “으흐흐흐. 샤아~바.”

 갑자기 샤바의 웃음이 음침해졌다.

 “이제 백성도 생겼으니 그걸 할 수 있겠다. 샤바샤바.”

 샤바는 자명종을 들고 벌떡 일어섰다. 그의 두 눈이 무서울 정도로 번뜩이고 있었다.

 “자명종 군. 샤바. 백성도 생겼으니 드디어 우리의 위대한 과업을 실행에 옮길 수 있게 되었네. 샤바샤바.”

 자명종을 옆에 끼고 선언하듯 말하는 샤바의 표정은 진지하기 이를 데 없었다.

 레종 일행과 함께하는 동안 샤바는 공주에게 충성을 다하는 기사들의 모습에 가슴깊이 탄복했다. 저것이야말로 주인과 충군 사이의 가장 바람직한 모습이 아닌가.

 기사들의 모습에 감탄했다면 디스와 루멘이 외치는 왕권 회복은 삶의 목표를 일깨워줬다고 할 수 있었다.

 마침 백성도 갖춰졌다. 오랜 친구도 만났다.

 준비는 완벽해진 셈이다.

 이제 차근차근 계획을 실행하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샤바는 두 손으로 자명종을 받쳐들고 엄숙한 표정으로 선언하듯 외쳤다.

 “우리 힘을 합쳐 세계를 정복하세. 샤바. 그리하여 주인님을 세계의 왕으로 만드는 거실세. 어떤가. 샤바샤바.”

 순간 콰콰쾅 하고 마른 하늘에서 날벼락이 떨어졌다. 마치 그의 선언에 하늘이 바짝 놀라는 것 같았다.

 “호오라. 세계 정복? 그거 좋은데.”

 “오오. 퀴니 양. 그대도 동참하려는가. 샤바?”

 오빠가 세계의 왕이 된다면 대 찬성이야.“

 탁!

 마주보던 퀴니와 샤바의 두 손이 마주쳐졌다.

 뜻이 하나로 모였다.

 하나는 측정불가의 요상한 능력을 가진 환수계 왕자고, 다른 한 명은 무지막지한 몬스터를 마음대로 부리는 아리송한 정체의 소녀였다.

 둘의 만남이 과연 어떤 결과를 낳을지는 하늘도 예측하지 못할 것이다. 

 퀴니를 세계 정복의 길로 끌어들인 샤바는 가장 먼저 한 쌍의 백성들에게 무한 자손증식을 지시 했다.

 여담이지만 그때, 병규의 배를 베고 자던 호랭이는 밤새 끙끙거리는 병규의 신음소리에 잠을 못 이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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