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6화 (49/102)

물과 불의 관계

 “대체 어떻게 된 거야? 이게.”

 자리를 옮긴 병규는 사정없이 뛰는 가슴을 간신히 진정시키며, 헤실헤실 웃고 있는 소녀에게 물었다.

 중학생쯤 되어 보이는 찬란한 금발의 깜찍한 소녀는 놀랍게도 자신을 퀴니라고 말했다.

 병규와 호랭이는 믿지 못하고 곧바로 확인작업에 돌입했다.

 무작정 믿어 버리기엔 소녀는 그들이 알고 잇는 퀴니와 다른 점이 너무 많앗다.

 우선 결정적으로 나이가 다르다.

 그들이 알고 있던 퀴니는 귀엽게 쫑쫑 걸어 다니던 초등생이다.

 그런데 눈앞의 소녀는 아무리 적게 봐도 중학생 이상. 무엇보다 저쪽 세계에 있을 퀴니가 이곳에 있을 턱이 엇지 않은가.

 그러나 한 시간이 넘게 걸린 질문을 빙자한 취조결과 그들은 금발머리의 깜찍한 그녀가 퀴니가 확실하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되었다.

 “어떻게 여기로 온 거야? 그리고 왜 갑자기 이렇게 훌쩍 커버린 거지? 누님은? 모두들 잘 있는 거야? 이 돼지들은 뭐야?”

 병규는 퀴니의 어깨를 붙든 채 소나기처럼 질문을 퍼부었다. 남들이라면 질릴 만한 기세였지만 퀴니는 얼굴 표정 하나 변하지 않고 차분하게 질문에 대답했다.

 “마법진. 거긴 3년 지났어. 잘 있어. 돼지 내 따까리.”

 “...... 저기, 대답이 너무 간단명료한 것 같지 않냐?”

 “헤에? 그런가?”

 퀴니는 손가락으로 뺨을 찌른 채 고개를 갸웃했다. 그 멍한 모습만은 예전과 다름이 없어 보였다.

 “아무래도 자세한 사정을 들어봐야겠다.”

 “그러니까 몇 년 동안 마법진을 그려서...... .”

 “2년.”

 “그래그래. 2년 동안 그린 고차원 마법진으로 이곳으로 올 수 있었단 거지? 경애와 같이?”

 “응.”

 “그런데 경애는 지금 어디 있는 거지?”

 병규의 물음에 퀴니는 의기소침한 표정으로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몰라. 중간에 사라졌어.”

 “서, 설마. 그대로 아공간에 갇힌 건?”

 “아니야. 분명 이 차원으로 왔어. 다만 지금 어디 있는지는 몰라. 어쩌면 중간계가 아닌 곳에 있을지도.”

 “그런...... .” 병규는 잠시 말을 잇지 못했다. 자신을 찾아 퀴니와 경애가 올 줄이야. 설마 그런 일이 가능할 줄 상상도 못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경애가 아공간을 넘는 도중 사라져 버렷다는 것이다.

 ‘어디로. 어떻게. 어디서 그녀를 찾아야 하지?’

 병규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말로 표현 못할 상실감이 그의 머릿속을, 그리고 가슴을 헤집어 놓았다.

 그때, 가녀린 손길이 그의손을 꼭 잡아왔다.

 “변기. 나 잘못한 거야? 경애 언니와 함께 오면 안 되는 거였어?”

 퀴니는 금방이라도 눈물을 떨어뜨릴 것 같은 얼굴이었다.

 ‘아차차.’

 병규는 속으로 혀를 찼다.

 남들은 상상도 할 수 엇는 먼 곳. 이곳까지 찾아준 퀴니를 눈앞에 두고 충격 먹은 얼굴 따위나 하고 있었다니.

 병규는 퀴니의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아니야. 퀴니. 넌 잘못하지 않았어. 잘못이 있다면 너희들을 이곳까지 오게 만든 나에게 있겠지.”

 “그래도...... 경애 언니는...... .”

 “걱정하지 마. 경애가 어디에 있든 우리가 찾으면 돼. 알았지? 경애가 날 찾아왔듯이 이번엔 내가 그녀를 찾도록 할게.”

 병규의 말에 퀴니의 표정이 박아졌다.

 “응.”

 “하하. 그래. 역시 퀴니는 웃는 모습이 귀여워.”

 “응응.”

 “하하하. 그래서 하는 말인데...... .”

 “응?”

 “이 오크들 좀 어떻게 하면 안 될까?”

 병규는 씩씩 콧바람을 내쉬며 그들 주위를 둘러싼 돼지들을 난처한 표정으로 손짓했다.

 “특별히 거북한 것은 아닌데 좀...... 무서워서 말이야.”

 “응. 물러나.”

 퀴니가 낭랑하게 외치자 오크들은 여왕벌을 따르던 벌떼처럼 일제히 멀찍이 물러났다.

 “휴우. 이제 좀 시원해졌다. 아까는 정말 압박이 장난이 아니어서 말이야.”

 병규는 어색하게 웃었다.

 힐끔 돌아보니 사신들도 한시름 놓은 듯한 표정이었다. 아마도 이번 일로 가장 놀란 것은 사신들이었을 것이다.

 엄청난 수의 병력들과 정면 대결을 할 뻔했질 않나, 폭주하는 오크무리 속에 갖히기를 않나.

 자객 일을 하면서 수많은 일을 경험했겠지만 오늘처럼 급박하게 돌아가는 상황은 처음 경험했을 것이다. 하긴 병규나 호랭이라도 생소한 경험이긴 마찬가지였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저 오크들 말인데. 붉은 대지에서 갈색오크 족이라는 돼지들을 부하로 삼았다는 거지?”

 “응. 퀴니 따가리.”

 “따, 따까리.”

 병규는 따까리라는 말에 약간 당황했다.

 ‘도대체 어떤 놈이 순진한 퀴니에게 몹쓸 말을 가르쳐 준 거야?’

 돌아가는 즉시 아작을 내 주겠다는 다짐을 하는 병규였다.

 “흐음. 그런데 저렇게 많은 수를 한꺼번에 부릴 수 있는 줄은 몰랐는걸.”

 퀴니는 원래 괴물이라든가 마물과 같은 존재들을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재주가 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의 신풍이라는 조직의 음오에 휘말리기도 했다. 

 당시에도 퀴니의 재주를 신기하게 생각하긴 했지만 설마 이렇게 엄청난 수를 한 번에 부릴 수 있는 정도였을 줄이야.

 ‘이거 마음만 먹으면 몬스터로 군대를 조직할 수 있는 거 아냐?’

 불길한 예감이 불쑥 고개를 쳐드는 병규였다.

 오크들을 지그시 쳐다보던 병규는 문득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퀴니야. 쟤네도 색깔이 왜 저렇게 된 거지? 전에 봤을 때는 저렇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갈색오크 족.

 예전에 붉은 대지에서 한바탕 일전을 치른 적이 있었던 오크들이다. 특히 샤바가 이 부족의 족장 사이에 애틋한 사연(?)이 있어 기억이 더욱 또렷하게 남았다.

 그때만 해도 분명 건강한 갈색 피부를 하고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먹물이라도 뒤집어쓴 듯 온몸이 검게 변해 버린 것이다.

 “퀴니랑 계약해서 그래.”

 “계약?”

 “응.”

 “그러니까. 네 따까... 가 아니라 부하가 되면 저렇게 변한다는 거야?”

 “응. 퀴니랑 계약하면 힘도 세지고, 색깔도 이뻐져.”

 “이, 이뻐? 저 색깔이?”

 “응.”

 “에효.”

 “휴.”

 병규와 호랭이의 입에서 동시에 한숨이 새어나왔다.

 ‘그 독특한 취향은 전혀 변한 게 없구나.’

 퀴니가 아득한 아공간을 넘어 이곳까지 온 사연을 설명한 데 이어, 이번엔 병규가 이곳서의 경험을 그녀에게 얘기해 줬다.

 “헤에. 호랭이와 샤바가 사람 된 거야?”

  퀴니는 멋진 청년이 된 호랭이와 아름다운 소년으로 변한 샤바를 신기한 듯 쳐다보았다.

 “험허. 어떠냐? 멋있냐?”

 “흠. 몰라. 하지만 커져서 좋아.”

 “푸하하. 네가 아직 어려서 모르나본데 이 정도 인물이면 여자들은 간단하게 T르어 담을...... .”

 유감스럽게도 퀴니는 이미 샤바에게로 고개를 effls 후였다.

 “헤에. 샤바. 이상하게 변했다.”

 “오랜만이다. 샤바.”

 샤바가 방긋 미소를 그리며 퀴니를 반겼다.

 그 순간 병규와 오랭이의 안색이 해쓱해졌다.

 ‘헉! 코피다.!’

 ‘저 녀석의 웃음. 초강력 페르몬!’

 두 사내의 노리에 동시에 떠오르는 것은 코피를 분수처럼 뿜어내며 쓰러지는 퀴니의 모습이었다.

 여태까지 모든 여자들이 샤바의 웃음에 그렇게 무너져버린 것이다. 하지만 퀴니는 결코 평범한 여자들과는 달랐다. 아니 다른 정도가 아니라 정반대의 반응을 보였다.

 “아쉬워. 예전의 모습이 훨씬 더 멋있었어.”

 퀴니는 정말로 아쉬운 듯 볼을 뾰로통하게 부풀렸다.

 “샤바?”

 “다시 돌아갈 순 엇어?”

 “몇 번 해 봤는데. 안 돼. 샤바.”

 자연스럽게 대화를 나누는 두 사람, 아니 전혀 의외의 반응을 보이고 있는 퀴니를 보고 병규와 호랭이는 가슴을 쓸었다.

“다행이네.”

 “그래. 독특한 취향이 이번만큼은 다행이야.”

 참고로 지금까지 샤바의 웃음에 넘어간 여자들은 출혈과다로 최소 일 주일 이상을 혼수상태로 보내야 했다. 어렵게 재회하자마자 침대 신세가 된 퀴니를 보고 싶진 않았다.

 한편, 퀴니와 샤바의 다정한 모습에 마그네트는 질투의 불길을 활활 피워 올리고 있엇다.

 “저, 저 불여시 같은 년이!”

 기억을 잃은 그녀지만 아직 드래곤의 습성이 남아 있어서인지 유달리 좋아하는 물건이나 사람에게 집착하는 모습을 보였다.

 결국 화끈 타오르는 질투에 눈이 먼 그녀는 불굴의 투지를 가득 담아 통렬한 킥을 날렸다.

 “꺼져라 불여시.”

 찢어지는 일갈과 함께 치마를 펄럭이며 날아간 번개와 같은 이단 옆차기. 그녀의 발차기에 얼마나 가공할 힘이 실려 있었던지 바닥의 먼지가 구름처럼 일 지경이었다.

 “헉!”

 병규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지고,

 “어헛.”

 호랭이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설마 이렇게 갑자기 발을 날릴 줄이야.

 “안 돼. 죽는다!”

 후폭풍을  동반한 그녀의 강력한 이단 옆차기를 인간이 견뎌낼 수 있는 종류의 것이 절대 아니었다.

 퀴니의 죽음은 이미 확정된 것이나 다름없어 보였다.

 그런데 그 순간, 퀴니가 상상도 할 수 없는 움직임을 보였다.

 휘리리릭!

 퀴니가 돌연 온몸 비틀며 공중 삼회전이라는 놀라운 기술로 마그네트의 이단 옆차기를 가볍게 피해 낸 게 아닌가.

 “억.”

 “쿨럭.”

 병규의 턱이 퉁하고 빠지고, 호랭이의 눈가가 찍 하고 찢어졌다.

 하지만 놀라움은 아직 끝난 것이 아니었다.

 사뿐히 바닥에 착지한 퀴니는 퉁퉁따~ 박자에 맞춰 춤을 추듯 토마스에 이은 숄더스핀을 부드럽기 그지없는 동작으로 연출해냈으며, 이어 나인틴나인티의 화려한 발놀림까지 선보였다.

 빠바바바바바박!

 마그네트는 잔영까지 날리는 퀴니의 빠른 공격에 정신없이 맞아야 했다. 의도적인지 퀴니는 마그네트의 얼굴만 후려갈겼다.

 휘리리리릭!

 절묘하게 이어지던 퀴니의 공격은, 두 발을 마그네트의 얼굴 사이에 끼워 넣은 호쾌한 프랑켄슈타이너 기술로 마무리되었다. 

 “끼에에에에에~”

 퀴니의 초절무비한 연속공격에 마그네트는 얼굴을 땅에 박은 채 스핀 하는 놀라운 재주를 모두에게 선보이며 침몰하는 항공모함처럼 서서히 쓰러져 버렸다.

 휘이이이~

 잠시 삭막한 바람이 지나갔다.

 사람들은 입을 쩍 벌린 채 말을 잇지 못했다.

 “저, 저 공격은...... .”

 춤을 추듯 재치 넘치면서 발랄한 공격. 게다가 공중을 자유롭게 펄펄 나아다는 움직임은 

흡사 과거의 누구를 떠올리게 만들었다.

 “너, 너 방금 전의 그 발차기. 누구에게 배운 거야?”

 기린에게 배웠어.“

 “기린? 이운석 말야?”

 “응.”

 “...... 설마 따까리란 말도?”

  “응. 기린이 알려줬어.”

 “호오. 그래? 아주 고마운 일을 했구나.”

 병규의 표정이 야릇하게 변했다. 그것은 마치 폭풍전야의 고요함과 비슷한 모습이었다.

 한데, 이외의 사태는 여기서 끝이 아니었다.

 “큭. 이게 무슨 일이지.”

 머리를 감싼 채 비틀비틀 일어서는 마그네트. 그녀의 눈빛이 범상치 않았다.

 “여긴 대체...... 분명 이쁘장하게 생긴 녀석의 짱돌을 맞은 것까지는 기억이 나는데...... .”

 병규와 호랭이의 입에서 다시금 억 소리가 튀어나왔다.

 “그래그래. 대충 생각이 나는 것 같군.”

 흙을 툭툭 털며 자리에서 일어난 마그네트의 두 눈에 시뻘건 살기가 감돌았다.

 “맞아. 그 귀여운 녀석에게 짱돌을 맞았지. 이 내가, 이 위대한 내가 말이야.”

 츠츠츠츠츠츠.

 마그네트의 전신에서 막강한 기운이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그 압도적인 기운에 사신들과 병규, 호랭이가 모두 벌벌 떨 수밖에 없었다.

 “꾸엑. 뭐, 뭐냐.”

 “꿀. 무, 무섭다.”

 “꿀꿀. 공주님을 구해야 한다.”

 드래곤의 기운을 느낀 오크들은 대 혼란에 빠졌다. 아무리 퀴니와의 계약으로 강해졌다고 해도 드래곤의 공포만큼은 어떻게 할 수 없는 듯했다.

 “크크크크.”

 마그네트의 입술이 벌어지며 그 아름다운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잔인한 웃음소리가 새어나왔다.

 “그래그래. 그랬었군. 이 내가 그렇게 허무하게 당하다니.” 자조 섞인 목소리. 그리고 그 뒤를 잇는 살벌하고 소름 끼치는 이가는 소름.

 “으드그. 감히 이 나를 가지고 놀았겠다? 네놈들. 모조리 죽여주마. 크하하하하하. 모두들 가오...... .”

 태앵~!

 한참 사기를 풀풀 날리고 있는데 난데없이 상큼한 소음이 일었다. 그와 함께 압도적인 위압감을 자랑하던 마그네트와 풀썩 하고 앞으로 엎어졌다. 

 샤바였다. 그가 다시금 짱돌로 마그네트를 갈긴 것이다. 하지만 맞는 것도 반복되면 내성이 생기는지 이번엔 그녀도 기절까진 하지 않았다.

 “크윽. 네놈이 또...... .”

 부스스 일어난 그녀는 안면을 뒤틀며 독기를 뿜었다.

 “저번에는 허무하게 당했지만 이번엔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것이다. 흐흐흐. 각오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츠츠츠츠츠.

 음침하게 웃는 그녀의 기운이 기하급수적으로 증폭되었다. 예전의 실패를 교훈 삼아 이번엔 곧바로 모든 힘을 개방할 생각인 것이다.

 ‘마음에 안 들어. 샤바!“

 눈살을 찌푸린 샤바가 휘릭 하며 몸을 움직였다.

 가히 섬전과 같은 빠름.

 그러나 단단히 준비하고 잇던 마그네트는 재빨리 블링크를 시전하며 샤바의 짱돌을 피해냈다.

 “흥. 드래곤을 얕보지 마라. 한 번 당한 공격에 또 당할 정도로 바보는 아니...... .”

 탱!

 티미한 금속음이 울렸다.

 끼그드드득.

 마그네트의 목이 고장난 목각 인형처럼 뒤로 돌아갔다. 그녀의 등 뒤엔 퀴니가 예의 찌그러진 자명종을 손에 들고 있었다. 방금 전 그녀의 정수리를 후려친 숭악한 흉기였다.

 “비, 비겁...... 한눈을 판 사이...... .”

 “시끄러. 비만 도마뱀.”

 태엥~!

 짜릿한 금속음이 다시 한 번 초원 위로 울렸다. 이번만은 결딜 수 없었던지 마그네트는 눈동자를 하얗게 뒤집으며 기절했다. 그리고 잠시 후 정신을 차린 그녀는 ‘여긴 어디? 난 누구?’라며 눈을 깜빡였다.

 모든 기억이 리셑(reset)된 모습이었다.

 “저기 말인데요. 호랭이.”

 “왜?”

 “우리 아무래도 너무 위험한 애들과 함께 있는 건 아닐까요?”

 “너도 그런 생각이 들었냐? 나도 방금 그런 생각을 했다.”

 부들부들 떨며 서로를 마주보는 병규와 호랭이의 눈빛에서 묘한 동질감이 흘렀다.

 “그런데 용하게 멀쩡하네. 이 자명종.”

 병규는 퀴니가 휘두른 찌그러진 자명종을 신기한 듯 바라보았다. 드래곤이 기절할 정도로 세게 부딪혔음에도 자명종은 멀쩡히 잘 돌아가고 있었다.

 “그 자명종. 언니가 바꿨어.”

 “어니? 누굴 말하는 거야?”

 “한영 언니.”

 “오? 설마 바꿨다는 말은 누님의 능력으로 이 자명종의 성분이 변했다는 거야?”

  이한영은 금속을 다루는 능력자다.

  그녀는 모든 종류의 금속을 흠수할 수 있었고, 또 마음대로 금속의 성분을 바꿀 수 있었다. 그렇게 터무니없이 강한 금속을 만들어내곤 했다.

 병규는 이한영이 그 특유의 능력으로 자명종을 이루고 있는 금속을 훨씬 강한 것으로 바꾼 게 아닐까 생각했다.

 아니나 다를까 병규의 질문에 퀴니는 고개를 끄덕인다.

 “추억이 깃든 물건이야. 퀴니가 부탁했어.”

 “호오. 분명 말도 못하게 강한 금속으로 변했겠는 걸. 이 자명종.”

 톡톡 자명종을 두드려 본다. 확실히 모양은 예전 그대로지만 무게는 훨신 가벼워졌다. 아마 강도도 강해진 것일 터였다.

 그렇게 자명종과 재회한 병규는 퀴니를 사신들에게 소개했다. 어차피 같은 행동할 사람들이다. 기왕이면 알고 지내는 것이 좋을 것이란 생각에서였다.

 “허허허. 이렇게 아름다운 아가씨라니. 영광일세.”

 크리티컬이 푸근한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그녀에게 손을 내밀었다. 하지만 그녀는 멀뚱 멀뚱 바라보기만 했다.

 “허허허.”

 크리티컬은 난감한 듯 웃음만 흘렸다. 하지만 그다지 기분이 나쁘지는 않은 것 같았다. 워낙 퀴니의 모습이 귀여워 투정 부리는 손녀딸을 보는 것 같다랄까.

 “오!”

  말없이 사신들을 쭉 훑던 퀴니의 두 눈에 순간 생기가 돌았다.

  다시 없는 보물을 발견한 것이다.

  터벅터벅 사신들 사이로 걸어간 그녀는 입을 실로 꿰맨 사일런스의 어깨를 턱 짚더니 엄지손가락을 예~이 하고 내밀었다.

 “화끈한 센스. 맘에 든다.”

 “...... .”

 병규가 퀴니의 변하지 않는 취미에 어색한 미소만 머금고 있을 때다. 멀리서 말발굽소리가 들려왔다.

 ‘설마 오크들에게 그렇게 혼나고도 아직 포기하지 않은 기사들이 잇는 것인가.’

 굳어졌던 병규의 얼굴은 이내 풀어졌다. 먼 곳에서 가까워지는 말발굽소리. 단 한 필의 말뿐이다.

 ‘누굴까.’

 병규는 조용히 기다렸다.

 잠시 후, 밤공기를 가르며 백의의 아름다운 여인이 나타났다.

 “레종?”

 그녀의 얼굴을 본 병규는 깜짝 놀랐다.

 그들을 미끼로 쓰고 다른 곳으로 달아났다던 그녀가 어째서 이곳에 나타났단 말인가.

 “카피 님! 무사하셨군요.”

 말에서 뛰어내린 그녀는 병규의 두 손을 꼭 잡으며 눈물을 글썽였다. 반짝이는 그녀의 눈망울 속에 단순히 반갑다는 의미 이상의 것이 담겨져 있었다.

 죽었을 줄 알았던 그가 이렇게 멀쩡히 살아 있는 것이다. 기쁨을 넘어 가슴 벅찬 희열이 느껴졌다.

 “다행이에요.”

 땀에 흠뻑 젖은 그녀의 모습. 병규는 가슴이 뭉클했지만 이내 낯빛을 차갑게 굳혔다. 

 “흥. 우릴 미끼로 버릴 때는 언제고, 이건 또 무슨 짓이죠?”

 “아.”

 싸늘한 병규의 음성에 레종은 충격을 받앗다.

 “트, 틀려요. 저는...... 전 전혀 몰랐단 말이에요.”

  주르륵.

 눈물이 그녀으 뺨을 타고 흘렀다. 병규는 그녀의 차마 눈을 볼 수 없어 고개를 돌렸다. 그 행동에 레종은 서운함을 느꼈다. 외면당하는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만둬요. 일이 이 지경이 될 때까지 공주인 당신이 전혀 몰랐다는 게 말이 되는 소립니까. 어설픈 핑계는 그만두시죠.“

 “아니에요. 아니란 말이에요.”

  두 손으로 귀를 막은 채 악을 질러대던 레종은 힘없이 주저않았다. 서러운 듯 그녀의 빨간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난 몰랐어요. 병규 님과 동료 분들이 그렇게 버려진 줄은. 정말로 몰랐단 말이에요.“

  병규가 디스에게 속아 일행을 이끌고 정찰 나간 후, 돌연 기사들이 짐을 꾸렸다. 이때만 해도 공주는 그다지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다.

 합류 지점에서 만나기로 했다는 디스의 말을 철썩같이 믿었다. 

 하지만 흐르고, 병규들이 정찰 나간 방향과 전혀 다른 강의  하류를 따라 이동하는 것을 보며, 그녀의 마음속에 의심이 싹트기 시작했다.

 그녀는 직감적으로 이일이 디스와 관련 있음을 눈치 챘다.

 허나 그녀의 추궁에도 디스는 단호하게 부인했다.

 결국 레종은 루멘을 설득했다. 기사의 명예를 들먹인 끝에 비로소 진실을 들을 수 있었다.

 그녀는 큰 충격에 빠졌다.

 동료를 버리다니.

 그렇게 밝은 사람들을 사지로 밀어넣다니.

 참을 수 없었다.

 그녀는 기사에게서 빼앗아 든 검으로 디스를 겨누었다.

 디스는 검이 목에 닿는 상황에서도 담담한 표정을 잃지 않았다.

 “내 결정은 모두 공주님. 당신을 위해서였소. 원한다면 베시오. 당신이 원한다면 기꺼이 죽어드리리다.”

 그 조용한 눈동자.

 레종은 디스를 벨 수 없었다. 대신 그녀는 말리는 기사들을 뿌리치고, 말을 타고 병규의 뒤를 쫓아온 것이다.

 죽음을 무릅쓰고.

 그런데...... .

 “흑흑.”

 레종 공주는 무릎을 꿇은 채 눈물을 흘렸다.

 참담했다.

 일이 이렇게 되어 버릴 줄이야.

 왕성이 필립 공작에게 넘어가고, 시시각각 조여 오는 포위망 속에서 초조함이 극에 달했을 때에도 이렇게 괴롭지는 않았다.

 이렇게 해서 왕권을 되찾은들 무슨 의미란 말인가.

 사람들의 희생으로 얻어지는 권력에 대체 무슨 뜻이 있단 말인가.

 돌아선 병규의 등과 싸늘한 사람들의 얼굴들을 볼 때마다 가슴이 쿡쿡 쑤셨다. 

 그래서 결국 공주는 울음보를 터트렸다.

 “휴우.”

 병규의 입엣 한숨이 새어나왔다.

 “당신은 정말...... .”

 무언가 말하려던 병규의 입술이 멀리서 들려오는 새로운 기척에 닫히고 말았다.

 말발굽소리. 이번엔 한 마리가 아니었다.

 ‘그 녀석들이군.“

 사신들이 차가운 얼굴로 빈정거린다.

 과연 우거진 수풀 속에서 일단의 기사들이 달려 나왔다.

 푸른빛의 아름다운 갑옷.

 미네르바 기사단이었다.

 “공주님.”

 레종을 발견한 루멘이 말 등에서 뛰어내렸다. 검에 손을 짚은 채 흐느끼는 그녀의 앞을 가로막았다.

 ‘공주님에겐 아무런 잘못도 없다. 화풀이를 하려거든 내게 하라.“

 그는 살기를 풀풀 날리는 이들을 향해 준엄한 목소리로 외쳤다.

 ‘배신에 대한 대가는 달게 받겠다. 하지만 공주만은 안 된다.’

 루멘의 눈동자는 그런 의지를 활활 불태우고 있었다.

 “공주.”

 뒤늦게 디스가 도착했다.

 승마에 익숙하지 않아 늦은 것이다.

 그르듯 말에서 내린 그는 허겁지겁 공주를 찾았다. 하지만 미처 공주에게 가기도 전, 병규가 한 팔로 그의 멱살을 잡고 들어올렸다.

 “네놈.”

 병규의 두 눈이 이글이글 불타 올랐다.

 “이미 모든 걸 다 알게 된 것 같은 눈이군.”

 디스는 체념하듯 고개를 돌리며 외면했다.

 “마음대로 하게. 공주가 무사한 것을 봤으니 난 죽어도 상관없네. 다만 이 손으로 필립 공작을 처단하지 못하고 떠나는 것이 아쉬울 뿐이군.”

 “이 개자식.”

 퍽!

 분노를 담은 병규의 주먹이 디스의 면상에 작렬했다.

 쿨럭.

 바닥에 나동그라진 디스는 거친 기침을 토했다. 퉤 하고 뱉어진 침에 피와 함께 부서진 이빨 조각이 섞여 나왔다.

 “잘난 척 입만 나불대는 자식.”

 병규는 잔뜩 화가 난 얼굴로 그를 노려보며 소리쳤다.

 “한 번만 더 이따위 짓을 하면 네놈의 얼굴을 뭉개버리겠다.”

 그는 진심이었다.

 “만약....... .”

 입가에 묻은 피를 닦으며 일어선 디스가 병규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만약 다시 한 번 이런 상황이 된다면, 그때도 난 당신을 배신할 것이오.”

 “...... 마음대로 해. 하지만 다음번엔 배신의 대가를 확실히 치르게 해주겠어.”

 불과 얼음.

 병규가 불길처럼 타오르는 데 반해 디스는 얼음처럼 차갑게 식고 있었다.

 전혀 다른 두 사람.

 과연 둘의 만남이 득이 될지 독이 될지는 시간이 지난 후에야 알 수 있을 것이다.

 대충 혼란스런 상황이 수습되고, 기사들과 병규 일행은 다시금 길을 떠났다.

 “어떻게 할 생각인 거냐?”

 호랭이가 불만스런 얼굴로 물었다. 왜 다시 레종 일행과 동행해야 하는지 불만인 모양이다.

 “레종을 안전한 곳까지 호위할 생각입니다.”

 “어째서? 이미 배신한 놈들이다. 그런 녀석들에게 의리를 보일 필요가 있을까.”

 “그들의 일을 도와주지는 않겠어요. 다만 그녀를 안전한 곳까지 배웅은 해 줄 생각입니다.”

 “엥. 저쪽에서 먼저 신의를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굳이 약속을 지킨다고. 속도 좋구나. 참 속도 좋아.”

 “...... 디스의 행실이 마음에 안 드는 건 사실이에요. 하지만 레종은, 그녀는 달랐잖아요.”

 지금도 눈을 감으면 서럽게 울던 그녀의 모습이 떠오른다. 눈물이 가득 한 그녀의 눈동자에 거짓은 없었다. 그녀는 정말로 디스의 배신을 몰랐던 것이다.

 “디스와의 계약은 이미 파기된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제가 지금 여기 남아 있는 것은 레종과의 의리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녀가 보여 준 성의에 대한 작은 보답이에요.”

 “쯧쯧. 하여간에 정 많은 녀석이라니까.”

 병규는 힘없이 웃었다.

 사실 병규의 머릿속엔 지금 다른 생각이 가득했다.

 한시라도 빨리 레종과의 약속을 이행한 후, 잃어버린 경애를 찾아야 한다.

 ‘퀴니는 경애에게 숨겨진 힘이 있는 것 같다고 말했지만.’

 어디에선가 홀로 떨어진 채 울고 있을 것 같은 그녀를 떠올리자 마음이 급해졌다.

 이곳은 지구와는 많은 면에 차이가 있다.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괴물들이 무리를 지어 다니고, 믿기지 않는 마법들이 난무하며, 사람들의 문명은 고작 중세시대에 불과하다. 이렇게 낯선 세상에 떨어진 그녀가 과연 무사할 수 있을까?

 병규는 그게 걱정이었다.

 그때 퀴니가 그의 어깨를 톡 짚었다.

 “병규 레종이 좋아해?”

 “엥?” 이게 무슨 농담인가 했는데 의외로 퀴니의 표정은 진지했다.

 ‘요 녀석이 벌서 사춘기인가?’

 처음 만났을 때엔 쫑쫑 걸어 다니는 아이였는데, 이젠 제법 성숙한 티가 난다.

 병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아니야. 그녀는 단지 좋은 친구일 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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