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장에 울려 퍼지는 자명종 군의 노래
고란산맥 내, 미쓰론 강.
이 강을 기점으로 아이린 왕국과 바호크 공국으로 나뉜다.
고작 너비 10미르체 불과한 미쓰론 강을 두고 양 국가의 국경수비대가 두 눈을 부릅뜬 채 대치하는 것이다.
과거 바호크 대공이 생존해 있을 때만 해도, 양국은 제국과 공국의 입장으로 자유로운 교역이 이루어졌었다. 그러나 세월이 흐른 지금, 차가운 국경선을 경계로 두 나라는 정기적으로 오가던 상인들조차 엄중한 통제를 받는 지경에 이르렀다.
디스의 부탁을 받은 병규는 미쓰론 강 주위를 배회하며 강의 깊이를 수색했다. 그러길 30여 분. 마침내 적합한 장소를 찾아낸 그는 초소를 습격해 위병들을 모조리 제압한 후, 소리 없이 강을 넘었다.
은밀히 움직이는 것에 모두 둘째가라면 서러워할 인물들이다. 평범한 아이린 병사들에게 들킬 염려는 애초부터 없다고 봐야 했다.
흔적 없이 강을 건넌 병규 들은 우선 한자리에 모여 앞으로의 일을 논의했다.
자란평야까지 가는 여러 루트를 확인하고, 일행을 두 팀으로 나눴다.
간단히 병규와 호랭이, 그리고 샤바와 마그네트가 한 팀. 그리고 나머지 사신들이 다른 한 팀이 되었다.
팀을 나눈 그들은 두 시간 후 이곳에서 다시 만나는 것을 약속하고 각자 정해진 루트로 이동했다.
노을이 붉게 진 산맥의 모습은 아름답기보다는 음습했다.
수풀이 우거진 산 중을 바람처럼 내달리던 병규는 어느 순간 발을 우뚝 멈췄다.
뭔가 이상했다.
좀 전부터 산짐승소리는 물론, 풀벌레 우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았다. 울창한 숲이 이렇게 적막해질 수 있는 것일까?
불길한 예감이 스멀스멀 등줄기를 타고 기어 올라왔다.
꿀꺽.
침 삼키는 소리가 천둥소리만큼 크게 들리는 것만 같다.
‘잘못됐다. 그것도 뭔가 크게.’
야생수준의 직감이 그렇게 외치고 있었다.
병규는 슬금슬금 뒷걸음질쳤다. 호랭이도 같은 것을 느낀 듯 긴장 가득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병규와 호랭이의 시선이 마주쳤다. 그리고 다음 순간 둘은 동시에 몸을 날렸다.
“꺄악!”
마그네트와 입에서뾰족한 비명이 터져 나왔다. 갑자기 병규가 그녀를 등에 업은 것이다.
“뭐야. 왜 이러는 거야. 놔. 놓으란 말야. 낭군님 앞에서 이게 무슨 짓이야!”
마그네트는 손톱을 세우며 병규의 머리를 쥐어뜯었지만, 병규는 변명도 않은 채 화살처럼 빠르게 달리기 시작했다.
“호랭이.”
달리는 중에 병규가 호랭이를 찾았다.
“그래.”
호랭이는 고개를 끄덕엿다.
그때, 눈빛이 마주친 순간, 둘은 동시에 같은 생각을 떠올렸었다.
온몸을 칭칭 감아오는 불길한 느낌. 그것은 적의라고 불리는 것이었다.
“매복이 있었다.”
“그런데 왜 아무 기척도 잡을 수 없었던 거죠?”
병규는 몇 십 미터 바깥의 나뭇잎 떨어지는 소리도 잡을 수 있을 정도로 예민한 귀를 가졌다. 그런데 방금 전엔 상대의 살기에 온몸에 잔털이 죄다 곤두설 때까지 아무런 기척도 느끼지 못했다.
“모르겠다. 방금 전의 그것은...... 그 이상한 기류는 마법과도 술법과도 틀렸다. 전혀 다른 기운이야.”
사사삭.
병규와 호랭이. 그리고 그들의 그림자 속에 숨어서 따라오고 있는 샤바는 정말이지 놀랄 만한 스피도로 숲을 누볐다.
만약, 이곳에 누군가 잇어 그들 곁을 지나친다면 그저 한 줄기 바람이 부는 구나라고 생각했을 정도로 엄청난 스피드였다.
하지만 그렇게까지 빠른 속도로 움직이면서도 병규와 호랭이의 얼굴색은 여전히 굳어 있었다.
팔랑팔랑.
병규의 귀가 팔랑이고 있었다.
‘사방에서...... 조여온다.’
다수의 기척이 잡혔다. 이것은 좀 전의 감지되지 않았던 살의와는 또 전혀 다른 종류였지만, 그 엄청난 숫자는 대단한 위협이라 아니 할 수 없었다.
‘이렇게 되면 정면 돌파다.’
병규가 막 결심을 굳혔을 때다. 호랭이가 작은 목소리로 외쳤다.
“오른쪽. 숲이 끝나는 지점이다.”
핏빛 노을이 음습한 숲으로 비스름히 얼굴을 내밀고 있엇다.
병규는 즉시 방향을 틀었다.
숲은 위험하다.
오직 그 생각뿐이었다.
팟!
숲을 벗어나자 넓은 초지가 눈앞에 펼쳐졌다.
자란평야.
붉은 대지와 고란산맥을 잇는 대 초원지대.
“엇.”
공활한 초지로 뛰어들던 병규의 입에서 다급한 경호성이 터져 나왔다.
넓은 초지 한복판엔 몇 사람이 우두커니 서 있었다. 병규는 숨을 헐떡이며 그들에게 달려갔다.
“설마 여러분도 숲에서?”
병규의 물음에 사신들의 리더인 크리티컬이 한숨과 함께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네. 보아하니 자세들도 그런 것 같군.”
“네. 아무래도 이쪽으로 몰린 것 같습니다.”
모두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두두두두두.
사방에서 조여오듯 들려오는 말발굽소리. 그것은 죽기 직전의 급박한 심장소리처럼 일행의 가슴을 강하게 짓눌렀다.
숲과 자란평야를 가득 채우며 기사들이 몰려왓다. 그 수는 무려 200여에 달했다.
“으음.”
누군가의 입에서 신음성이 흘러나왔다.
화염을 부태우듯 숲에서 흘러나온 이프리트 기사단. 그들만으로도 엄청난 위압감이지만 초원의 저쪽에서 먼지를 구름철머 일으키며 엄청난 병력이 다가오는 게 아닌가. 1,000여 명에 이르는듯했다.
‘저 복장. 국경수비대로군.’
초원을 메운 국경수비대의 병력은 병규와 그 일행 주위를 장벽처럼 에워샀다. 어디에도 달아날 구멍은 보이지 않았다.
“이런. 월척을 기대하고 달려왔더니 송사리들이로군.”
붉은 기사들 뒤로 한 남자가 오만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추적대의 대장인 버지니아 백작.
그는 미끼에 걸려든 것이 공주가 아니라는 점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추적대의 대장인 버지니아 백작.
그는 미끼에 걸려든 것이 공주가 아니라는 점에 약간의 실망을 느꼈다.
그때, 기사들 사이에서 포위망에 갇힌 사냥감을 보던 마법사 피네스는 누군가를 확인하고는 소스라치게 놀라고 말았다.
‘저놈.’
어찌 잊을 수 있을까. 기사 20명을 순식간에 무력화시키고, 그의 꿈자리까지 불안하게 만든 천하의 포악한 녀석.
“백작님. 잠시 드릴 말씀이.”
병규를 확인한 피네스는 백작에게 이 사실을 고했다.
“호오. 저 자가?”
버지니아 백작은 두 눈을 가늘게 뜨며 피네스가 지적한 자를 예의 주시했다.
“어리군. 그리고 너무 평범해 보여.”
그가 본 병규는 평범.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사람에게는 누구나 기세라는 것이 있다. 그것은 생김새와 관계없이 상대의 역량을 가늠케 하는 중요한 척도가 된다. 특히나 백작 정도의 실력가는 멀리서도 비교적 정확하게 적을 역량을 짚어 낼 수 있었다. 그런 그가 읽어낸 병규의 모습은 한숨이 나올 정도로 한심한 수준이었다.
“흐음. 이런 실망인걸. 저렇게 맥 빠지는 사냥감이라니. 저런 걸 잡아봐야 성취감 따위는 젆 생기지 않는단 말이지.”
“백작님. 이럴 때가 아닙니다. 어세신의 보고에 의하면 공주 일행은 미쓰론 강의 하류 쪽으로 이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필시 놈들은 미끼일 터. 빨리 이곳을 정리한 뒤, 공주를 쫓아야 합니다.
“흠. 역시 겁 많은 쥐새끼들만 나타나서 이상하다 생각했더니, 과연 미끼였군. 그렇다면 쓸데없이 시간을 낭비할 필요는 없겠군.”
말과 함께 버지니아 백작은 왼손은 살짝 저었다.
“전진!”
부관의 우렁찬 음성과 함께 200의 기사와 1,000여 명의 병력들이 범람하는 홍수처럼 서서히 병규와 그 일행들을 감싸기 시작했다.
“들었냐?”
호랭이가 병규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의 얼굴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버지니아 백작과 부관은 포위망의 뒤쪽에 잇엇다.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절대로 그들의 대화를 들을 순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병규와 호랭이의 청각은 이미 상식을 뛰어넘는 범위에 있엇다.
“젠장. 그 녀석. 이럴 작정으로 계약을 한 것이었군.”
“난 처음부터 그 녀석이 마음에 들지 않앗다.”
“저도 마찬가지예요.”
“그런데 뭐 하러 그딴 녀석과 계약을 한 거냐?”
“뭐, 그게 어쩌다 보니...... .”
호랭이의 추궁에 병규는 말을 얼버무렸다.
“후후. 하여간에 넌 여자에게 너무 약한 것 같아.”
“쳇. 뭐 일단은 그렇다고 해 둘 게요. 그나저나 어떻게 하죠? 저놈들이 슬금슬금 다가오는데.”
“으음.”
주위를 둘러본 호랭이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이건 많아도 너무 많다. 아무리 그들 일행이 엄청난 실력을 가졌다지만 200의 기사와 천명의 병력을 상대로 자웅을 결한다는 것은 솔직히 말도 안 되는 소리다.
‘아니야. 병규와 나 정도라면 빠져나갈 수 있을 거야. 하지만...... .’
호랭는 눈동자를 뒤로 돌려 사신들을 보았다.
‘저들은...... .’
드래곤이 만큼 최강의 키메라들. 분명 뛰어난 힘과 능력을 가졌다. 그러나 과연 어세신인 그들이 정규군과 맞붙어 얼마만큼이나 버틸 수 있을까.
병규와 호랭이는 무의적으로 마그네트에게 시선을 던졌다.
‘그녀라면...... .’
‘이 꼬맹이가 기억을 찾는다면...... .’
그때 본 엄청난 능력이라면 충분히 이 정도의 병력은 날려버릴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말도 안 되는 소리지. 기억을 찾자마자 우리부터 작살낼걸.’
‘분노한 용이라면 아마 이 병력을 죄다 몰살시키고도 모자라 고란산맥을 활활 붙태워 버릴 거야. 그럴 수는 없지.’
결국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스스로 해결하는 수밖에 없다.
‘해보는 데까지 하는 n밖에.’
두두두두두두두!
대지를 두흔드는 말발굽소리가 천둥소리처럼 커졋다.
“우와아아아아.”
“와아아아아아!”
병사들의 고함소리가 하늘을 진동시켰다.
두근두근.
병규의 가슴이 세차게 뛰었다.
이 긴장감.
이 긴박한 상황.
어찌된 일인지 싫지 않다. 아니, 오히려 묘하게 끌린다.
‘피를...... 원하는 건가. 나는?’
마계에서 막 기어나온 오우거의 피를 먹은 후로 많은 것이 변했다. 뭔가, 근본적인 뭔가가 송두리째 변한 것 같은 느낌이다. 억지로 아무것도 변한 게 없는 것처럼 행동하고 있지만, 지금과 같은 상황이 되면 충동을 억제하기가 힘들어진다.
두근두근두근두근.
병규의 가슴이 터질 듯이 박동이 심해진다.
말발굽소리가 가까워질수록, 병사들의 적의에 찬 고함소리가 커질수록, 쩌정! 쩌정! 하며 머릿속에 무언가가 조금씩 부서져 나가는 것 같았다.
‘난...... . 대체 뭐가 되는 거지?’
비통한 그의 외침이 암흑빛으로 물들어 가는 마음속에서 공허하게 메아리칠 때다.
긴박감 넘치는 현재의 상황과는 너무도 어울리지 않는 노래가 그의 귓가에 들려왔다.
“꿍짝 쿵짝 쿵짝 쿵짝~ 오빠는 풍각쟁이야~ 오빠는 욕심쟁이야아아
“뭣?”
“어?”
“샤바.”
단순한 박자의 노래가 들려오자마자 동시에 세 사람이 반을을 보였다.
“뭐, 뭐야. 어째서 이 노래가.”
“오헛!”
“샤바!”
병규가 놀라는 가운데, 호랭이와 샤바는 무언가에 홀린 듯 펄쩍 펄쩍 뛰기 시작했다.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데도, 아직 자명종의 마수에서 벗어나지 못한 것이다. 그것은 아기 새의 각인만큼이나 강력한 위력이었다.
하지만 자명종 소리와는 무관하게 번뜩이는 칼을 치켜세운 붉은 기사들의 돌격은 바로 코앞까지 밀려와 있었다.
그런데...... .
드드드드드드.
돌연 고요하던 초원에 기묘한 진동이 울렸다. 멀리서 들려오는 진동. 단순히 들썩이는 소음에 불과한 그것이 놀랍게도 과격하게 돌진하던 기사들의 발걸음을 붙잡아두는 엄청난 마력을 발휘했다.
“마, 말도 안 돼.”
한 기사의 입에서 경악성이 터져 나왔다. 그것은 다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대변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곧이어 병사들의 입에서 비명에 가까운 소리들이 터졌다.
“모, 몬스터다.”
“오크다.”
자욱한 먼지구름과 함께 검은 빛깔의 오크들이 나타났다.
엄청난 수였다.
“어, 어디서 이런 몬스터들이.”
버지니아 백작은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항상 여유가 넘치는 그였지만 이번맡큼은 진심으로 놀란 것이다.
설마 자란평야에서 오크들과 부딪칠 줄이야. 그것도 이렇게 단첼 미쳐버린 오크 떼들과 말이다.
어찌된 이유에선지 오크들은 광분한 상태였다. 괴성을 지르며 발작하듯 인간들에게 달려들었다.
“꾸에에에엑.”
“꾸엑.”
“킁킁. 인간들에게 죽음을!”
“푸푸푸. 죽음. 죽음. 죽음.”
북은 고아기를 내뿜는 오크들이 무차별적으로 기사와 병사들에게 덤비기 시작했다. 닥치는 대로 무기를 휘두르는 모습이 미쳐버린 광인의 그것을 보는 것 같았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과 공포를 전혀 느끼지 못한 듯, 창에 배가 뚫리고, 칼에 팔이 베어져도 거품을 입에 문 채 자신들을 공격하는 인간들의 머리통을 향해 짓쳐들었다.
오크들으 폭주에 병사들은 공포를 느꼇다.
가슴을 갈라도 돌격을 멈추지 않는다. 다리를 동강 잘라 버려도 몸뚱이를 질질 끌며까지 달려든다.
가히 악몽이 아닌가.
“으아아. 사, 살려줘.”
“시, 싫어.”
이탈하는 병사들이 속출했다.
“자리를 지켜라. 목숨을 다해 진형을 유지하라.”
장교들은 도망가는 병사들의 목을 치면서까지 고군분투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시간이 갈수록 병사들의 소요는 커져만 갔다.
“대체 얼마나 더 밀려오는 거지?”
오크들의 숫자는 너무도 많았다. 지금 병사들과 격전을 벌이고 있는 돼지들만도 천 마리가 훨씬 넘을 것 같은데, 계속해서 그 수가 늘고 있었다.
광분한 돼지들이 파도처럼 밀려드는 것을 본 적이 있는가. 바로 지금이 그랬다.
끝도 없이 밀려드는 오크들의 공격에 기사들도 질리지 않을 수 없었다.
절대적으로 불리한 형세였다.
어쩔 수 없이 버지니아 백작은 중대한 결정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끄, 끄응. 후퇴다. 전군을 이모셜 지역까지 후퇴시킨다.”
해일처럼 몰려오는 오크들을 피해 버지니아 백작의 추적대는 말 머리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꾸워어어.”
“인간들이 도망쳤다. 킁킁.”
“이겼다. 킁. 승리했다. 킁킁.”
“위대한 갈색오크의 승리다. 킁킁킁.”
기사들이 도주하자 오크들은 두 팔을 높이 치켜들며 승리를 자축했다. 꿀꿀거리며 돌아다니는 꼴이 그렇게 소란스러울 수 없었다.
그런데 흥분한 오크 떼 중앙. 전혀 어울리지 않은 무리가 섞여 있었다.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야?”
병규는 망연자실한 표정으로 주위를 둘러보았다. 온통 오크들밖에 보이지 않는다.
“돼지들 투성이군.”
호랭이가 콧등에 잔뜩 주름을 만들었다.
그들 주위에 거대한 파도처럼 넘실거리는 검은 오크들의 모습에 놀람을 넘어 아연실색을 금치 못했다.
마치 돼지들로 가득 찬 바다를 표류하는 기분이랄까.
“그런데 좀 이상하지 않냐? 이 녀석들, 마치 우리를 아예 못 보는 것처럼 행동한다.”
“그러게요.”
병사들을 상대로 그토록 광분하던 오크들이 정작 그들 무리 한 가운데 갇혀버린 병규 일행에겐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다고 호랭이의 말처럼 그들을 못 보는 것 같지는 않았다. 간혹 눈이 마주치는 오크들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급히 시선을 피하기도 했기 때문이다.
“도무지 알 수 없는 일투성이네.”
병규가 신경질적으로 뒷머리를 벅벅 긁을 때다. 무질서하게 날뛰던 오크들에게서 큰 소요가 일었다.
“킁킁. 공주님이시다.”
“공주님. 킁. 공주님이 오신다.”
“모두 길을 킁. 비켜라!”
웅성거리던 오크 떼가 일순간 차분해지더니, 마치 홍해의 물이 갈라지듯 좌우로 갈리기 시작했다.
“이건 또 뭐야?”
병규 일행은 갑작스런 오크들의 행동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하고 술렁였다.
“뭐가 나타나는 모양인데?”
“오크의 공주님이라니. 으...... 상상하는 것만도 겁이나.”
간을 졸이는 듯 한 순간을 넘기는데 오크들이 만들어낸 통로로 검은 색의 가마 하나가 나타났다.
무려 30마리의 오크들이 끄는 그 가마 위에는 놀랍게도 오크가 아닌 인간 소녀 한 명이 귀여운 얼굴로 앉아 있었다.
“꿀꿀. 공주님.”
“꿀. 우리 공주님. 꿀.”
“공주님께 영원한 축복이.”
돼지들이 일제히 무릎을 꿇었다. 물경 2,000에 이르는 검은 돼지들이 동시에 절을 하는 장관이 펼쳐졌다.
“이게 대체 어떻게 돌아가는 거야?”
“왜 돼지들이 인간을 메고 다니는 거지?”
병규와 호랭이가 혼란에 빠진 사이, 충격적인 등장을 한 소녀가 돌연 마차 위에서 벌떡 몸을 일으켰다.
병규와 그 일행들은 잔뜩 긴장했다. 과연 이후에 무슨 일이 벌어질 것인가. 그러나 그녀의 다음 행동은 모두의 허를 찌를 만한 전혀 뜻밖의 행동이었다.
돌연 두 팔을 활짝 펼쳐진 채 점프, 그대로 병규의 품으로 뛰어든 것이다.
“변기!”
“엥? 벼, 변기?”
병규의 두 눈이 찢어질 듯이 홉떠졌다.
변기라니. 이 그리운 이름으로 자신을 부르는 여자애는, 그가 알기로 분명 한 사람뿐이다.
“설, 설마 퀴니?”
병규의 물음에 소녀는 귀여운 가득 반짝이는 미소를 머금은 채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응. 변기. 나야. 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