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를 위해서라면 영혼이라도 팔겠소
“국경선까지 얼마나 남았죠?”
“쉬지 않고 달린다면 하루 정도면 충분할 것이오.”
디스의 대답에 병규는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힘들었지만 목적지에 거의 다다른 것이다. 하지만 국경선이 가까워짐에도 이상하게 가슴을 두근거리게 만드는 불안감은 가라앉지 않앗다.
“과연 바호크 공국이 받아줄까요?”
바호크 공국의 입장에서 보면 엄연히 남의 나라의 일이다. 타국의 내전에 간섭하면 외교적으로 골치 아픈 상황에 직면할 것이 분명한데, 과연 공주 일파를 받아주려고 할까?
병규의 의문에 디스는 고개를 흔들었다.
“바호크 공국은 절대로 우릴 거부하지 못할 것이오.”
디스는 확신했다.
병규는 그렇게 확신할 수 있는 이유가 궁금했다.
“어째서 우리가 외교문제에도 불구하고 바호크 공국으로 피하는 것인지 이유가 궁금한 모양이군요.”
레종이 고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그래요.”
“그건 아이린 왕국과 바호크 공국의 미묘한 관계 때문이에요.”
“...... .”
“바호크 공국이 왜 제국 이상의 방대한 국토를 소유하고 있음에도 공국이라 불리는지 아세요?”
“잘 모르겠습니다.”
“하긴 오래된 일이라 모를 수도 있겠군요. 사실 바호크 공국은 원래 아이린 왕국의 영지였어요.”
“허.”
“물론 그것은 아이린 왕국이 제국의 면모를 과시하던 300년 전까지의 일이에요. 원래 바호크 공국이 위치한 지역은 불모지에 가까운 땅이었죠. 그래서 세력을 잃은 귀족을 중앙에서 좌천시키는 용도로 사용되었어요.
그런데 지금부터 300년 전, 당시 백작이었던 바호크가 지금의 바호크 공국의 땅으로 가면서부터 큰 변화가 생기기 시작했어요. 그는 불모지에서 썩히기엔 너무 뛰어난 인물이었어요. 기발한 아이디어와 자유로운 경영으로 영지를 정비하고, 영지 내의 몬스터를 정벌했죠. 그리고 영지내의 부족들을 통합하는 작업을 했어요.
모두들 불가능한 일이라 생각했습니다. 비슷한 시도가 전에도 몇 번 있었지만 모두 실패로 돌아갔기 때문이에요. 하지만 놀랍게도 바호크 백작은 이 불가능해 보이는 일을 성공적으로 달성해 냈어요. 그래서 당시 아이린 제국에 몇 배에 달하는 대지를 손에 넣게 된 것이지요.
그 공을 높게 치하한 당시 아이린 제국의 황제는 그를 백작에서 공작으로 승격시켰어요. 당연한 일이죠. 영토를 무려 네 배 이상 황장한 영웅이었으니까요. 하지만 그렇게 승승장구하는 바호크 공작을 중앙의 다른 귀족들이 가만 내버려두지 않았어요. 말도 안 되는 이유를 붙여 그의 업적에 먹물을 끼얹고, 터무니없는 유언비어를 유포하여 황제와 바호크 공작 사이를 이간질하려고 노력했어요.
하지만 수많은 방해공작에도 불구하고 바호크 공작에 대한 황제의 신임은 변함이 없었어오. 최후의 수단으로 중앙의 귀족들은 바호크 공작의 영지를 빼앗으려 들었어요. 그러나 바호크 공작은 이미 만반의 준비를 갖춰두고 있었어요. 그는 중앙 귀족들의 간섭을 철저히 배척한 아이린 제국과의 교류를 금했어요.
그렇게 300년이 흘렀어요. 바호크 공국은 한때 아이린의 영지였다는 사실을 대부분의 사람들이 잊을 정도로 강대국이 되었어요. 그에 반해 아이린 왕국은 정령에게 축복받은 대국이라는 영광마저 잊고, 당쟁과 당파에 휩쓸려 조금씩 영토가 줄어들더니 끝내 제국이라는 칭호마저 쓸 수 없는 위치가 되고 말았지요.”
설명을 마친 레종은 억울한 일을 당한 사람처럼 눈물을 끌썽였다.
답답하고 한심스러웠다. 눈앞의 이익에 눈이 멀어 바호크라는 영웅을 떠나보낸 과거의 무지한 귀족들이.
“그런데 바호크는 왜 아직 공국으로 남아 있는 거죠? 신성 제국과 필적할 만한 영토와 힘을 지녔다면 차라리 제국으로 독립하는 것이 여러모로 좋을 텐데.”
“그것 역시 초대 공왕인 바호크 공왕과 관련된 이야기예요. 바호크 공작은 방대한 대지를 정벌할 만큼 용맹한 사람이었지만, 아이러니하게도 그 위대한 용맹만큼이나 아이린 왕국에 대한 충성심 역시 대단한 사람이었어요. 그는 유언을 남겨 후손들에게 아이린 왕가를 절대 배신하지 말라고 당부했죠. 그런 이유로 바호크는 아직 공국으로 남아있을 수밖에 없는 거예요.”
“흠. 복잡한 사정이 있었던 거군요.”
병규는 고개를 주억거렸다.
대충 말을 들어보니 어떻게 된 사정인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이들은 바호크 공국의 아이린 왕가에 대한 한 가닥 충성심에 기대를 걸고 있는 것이다.
바호크 공왕의 유언이 아직까지 유효하다면 틀림없이 바호크는 레종 공주에게 힘을 실어줄 것이다. 하지만 반대로 현 바호크 공국의 공왕이 선대의 유언에 가치를 두지 않는다면?
‘바호크가 누구의 손을 들어줄지는 결국 가 봐야 안다는 소리군.’
다음날 아침, 일행은 멀리 국경선이 보이는 거리까지 닿을 수 있었다. 원래대로라면 이대로 단숨에 국경을 넘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언덕 아래로 보이는 국경선 주변으로 대단위 군의 움직임이 포착된 것이다.
“이미 국경수비대까지 더러운 반역자의 손에 넘어간 것인가.”
루멘은 앓는 듯 한 신음을 흘렸다.
“어떻게 하죠?
국경수비대는 보병들이 주를 이루고 있었지만 그 수가 엄청났다.
아무리 왕정기사단의 실력이 출중하다 해도 숫 적인 열세에는 장사가 없는 법이다.
게다가 모두 같은 조국의 병사들이라 목숨을 걸고 싸우고 싶지 않았다.
“불, 산불을 이용하도록 합시다.”
디스가 의견을 내놓았다. 모두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위험하다.”
“바람의 방향에 따라 자칫 우리까지 위험해질 수 있다.”
기사들은 극히 부정적인 대답을 내놓았다.
산에서 산불보다 무서운 것은 없다.
바람을 타고 무섭게 확산되는 산불은 모든 것을 집어삼켜 버린다. 절대로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기사들의 우려에도 불구하고 디스의 표정은 담담했다. 예상했던 반응이라는 표정이었다.
“불길을 다루기 쉽지 않다는 것은 저도 잘 압니다. 하지만 지금이라면 그다지 불가능한 일도 아닙니다.”
기사들의 눈에 의구심이 일었다.
“무슨 말인가? 설마 바람을 조절할 수 있다는 소리는 아니겠지?”
“얼마 전에 들렀던 트라우마에 이런 말이 있더군요. 붉은 대지에 피 보라가 일면 고란산맥의 나무들이 바호크를 향해 고개를 숙인다.”
“......?”
디스의 말에 기사들은 더더욱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트라우마에 떠도는 속언과 산불 사이에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답답해진 기사단장 루멘이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모르시겠습니까? 바람입니다. 붉은 대지에서 인 모래폭풍이 이곳 고란산맥을 넘어 바호크로 날아간다는 말입니다.”
“아!”
“그렇군.”
기사들은 이제야 이해가 된 듯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그렇다면?”
“네. 얼마 전 공주님과 함께 트라우마에 당도했을 때, 마침 모래폭풍이 불고 있었습니다. 좀 전에 확인해 보니 과연 이곳의 바람이 동쪽으로 흐르고 있더군요. 트라우마에서 들은 말이 사실이라면 이 바람은 적어도 두 달 이상은 현 상태를 유지할 겁니다.”
이쯤 되자 병규도 디스의 말을 이해할 수 있었다.
말인즉슨 일종의 황사다.
사막인 트라우마에서 불어오는 바람이 먼 이곳 산맥에까지 영향을 미치는 것이다. 그리고 디스는 그 바람을 이용해 산에 불을 놓자는 것이다.
“좋은 정보로군.”
“그렇다면 산불을 이용한 전략도 충분히 사용해 볼 만하지.”
신중론을 표하던 기사들도 결국은 디스의 손을 들어주게 되었다.
병규는 잠시 디스의 말끔한 얼굴을 보았다. 그동안 들은 이들의 대화로 유추해본 결과, 디스의 위치가 상당히 애매하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실제로 디스는 일행 중에서 가장 위치가 애매한 사람이었다.
몰락한 귀족 출신으로 지위는 고작해야 남작에 불과하다. 기사들의 대부분이 명문가의 자제임ㅇ르 감안해 볼 때, 그의 신분은 하등의 영향력도 가지고 잇지 않다고 봐야 했다.
그런데도 기사들이 그를 함부로 대하지 못하는 것은 단지 디스가 공주의 친구라는 이유 때문이다.
게다가 그는 머리 회전이 매우 뛰어난 것으로 정평이 나 있었다. 지장으로 소문난 총리 말크스조차 혀를 내둘렀을 정도다.
기사들은 대부분 귀족의 자제들이다.
당연히 신분주의에 물들어 있었다. 만약 지금처럼 어려운 상황이 아니었다면 기사들은 디스를 무시했을 것이다. 어쩌면 공주와 친하다는 이유로 거들먹거리는 그를 멸시했을지도 모르다.
하지만 지금은 왕가의 혈통이 무너지느냐 다시 서느냐 하는 위급한 상황이다. 그리고 어려운 때일수록 인재는 빛을 발하는 법이다.
디스의 지시를 받은 기사들은 국경선에 인접한 골짜기 아래에 불을 놓았다. 한창 건조할 시기라 불은 삽시간에 타올라 온 산을 벌겋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검은 연기가 고란산맥을 뒤덮자 공주 일파의 도주를 막기 위해 국경선 근처에 주둔해 있던 국경수비대는 어쩔 수 없이 자리를 이동할 수밖에 없었다.
공주와 일행들은 삽시간에 번지는 산불을 따라 유유히 국경선을 통과할 수 있었다.
호랭이가 타오르는 불을 작은 목소리로 구시렁거렸지만 그것은 작은 문제에 불과했다.
“산불?”
보고를 받은 버지니아 백작의 미간에 두꺼운 주름이 잡혔다.
바호크와의 국경선 부근에 큰 산불이 일어나 어쩔 수 없이 국경수비대가 이동을 했다는 보고를 들은 후의 반응이다.
“아무래도 공주 일파의 소행인 듯합니다.”
“흠.”
버지니아 백작은 침음성을 흘리며 말고삐를 틀어쥐었다.
“당했군.”
설마 산불을 지르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때마침 바람이 국경선 방향으로 불었다고 합니다. 운이 좋았습니다.”
부관이 조심스럽게 설명을 덧붙였다.
‘운이 좋다라. 단순히 운이 좋은 것일까?’
지금까지 버지니아 백작은 느긋한 태도로 사태를 관망했다.
상대가 안 되는 전력차.
쥐를 모는 고양이처럼. 구석가지 몰아놓은 후 사냥을 하듯 공주 일파를 잡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보잘것없는 녀석들이 전혀 생각지도 못한 기지를 발휘해 포위망을 뚫고 빠져나간 것이다.
“한방 먹었군.”
입 안이 썼다.
부관이 그의 눈치를 보며 주저주저 입을 열었다.
“이제 공주 일파가 국경선을 넘었으니...... 일이 곤란해지게 되었습니다.”
추적대는 절대로 국경선을 넘을 수 없다.
만약 이런 대군을 이끌고 국경을 넘었다가는 단순히 외교문제를 떠나 자칫 강대국인 바호크 공국과의 사이에 전쟁이 발발할 위험마저 안고 있었다.
임무 실패.
부관은 벌써부터 지휘관에게 내려질 문책과 추궁을 걱정했다.
하지만 버지니아 백작의 생각은 달랐다.
“후후후.”
심각하게 굳어 있던 입가에 엷은 조소가 흘렀다.
“이대로 국경선으로 간다.”
“네?”
부관의 얼굴 위로 의아함이 떠올랐다. 국경선으로 가자니. 설마 공주를 쫓아 국경을 넘겠다는 얼토당토않은 발상을 하는 것인가.
“국경은 넘지 않는다. 국경 근처에 주둔한 채로 국경수비대의 연락을 기다린다. 공주는 반드시 이곳으로 다시 돌아오게 될 것이다.”
버지니아 백작의 자신감 넘치는 예언이었다.
부관은 그의 명령을 이해할 수 없었다. 간신히 국경을 넘어간 공주가 미쳤다고 다시 중년기사가 머물고 잇는 이곳으로 다시 돌아온단 말인가. 하지만 버지니아 백작으 얼국은 거의 확신에 차 있었다. 믿을 수 없지만, 그는 정말로 공주가 다시 국경을 넘어올 것이라고 믿고 있는 것이다.
그것도 빠른 시간 내에 말이다.
부관은 못미더웠지만 백작의 명령에 따라 기사들을 통솔했다.
이백이 넘는 대인원이 재만 남아버린 국경선을 행해 말 머리를 틀었다. 그 모습은 정녕 장관이었다.
산불을 이용해 국경을 넘은 공주 일행은 곧장 바호크 군의 수비군에게 포위되었다.
창칼이 주위를 가득 둘러싼 험악한 상황임에도 레종 공주는 당찬 자세로 자신의 신분을 밝히고, 국경수비대의 통솔자와 바호크 공국의 바흐만 대공과의 독대를 청했다.
아이린 왕국 공주의 갑작스런 망명.
국경수비대의 초소를 담당하고 잇던 초소장 커널은 크게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국경수비대가 하는 일은 국경선 너머의 불온한 움직임 감시와 불법으로 국경을 넘는 자국민의 처리다. 그런데 난데없이 이웃나라의 공주가 재를 함빡 뒤집어쓴 채 국경선을 넘어왔으니 비상사태도 이런 비상사태가 없었다.
커널은 급히 공주 일행을 대형막사로 안내한 후, 국경수비대의 본진으로 사람을 보냈다.
“바호크의 국경수비병들이 많이 놀란 것 같네요.”
막사 안을 둘러보며 레종 공주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회의장으로 사용하는 듯, 막사는 상당히 컸다. 50여 명의 기사들과 병규 일행이 모두 들어와도 비좁은 느낌이 없었다. 반면 크기에 비해 시설은 미미했다. 퀴퀴한 냄새에 군데군데 찢어진 곳도 보였다.
물론 아무리 허술하다 해도 일개 초소치곤 지나치게 규모가 큰 느낌도 있었다.
“후후. 이웃나라 공주님이 갑자기 난입했으니 안 놀라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겠지요.”
디스는 삐걱거리는 나무의자에서 앉아 느긋한 태도를 취했다. 여유를 부리는 듯 보였지만 무릎 위에 올려진 손가락이 정신 사납게 움직이고 있었다.
긴장하고 있는 것이다. 어쩔 수 없이 공국으로 들어오게 되었지만 과연 재공이 그들의 의도대로 순순히 따라 줄지 의문이다.
디스는 자신이 있었다.
바호크의 군주 바흐만은 철혈의 군주라는 소문이 자자했지만, 충분히 구워삶을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하는 것이었다.
문제는 반역자들을 처단할 군대를 빌려주는 대가로 과연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가 문제였다.
다소의 출혈은 감수해야 할 터.
하지만 이미 궁지까지 몰린 이쪽 사정으론 바흐만 대공이 설사 국토의 절반을 요구한다 해도 울며 겨자 먹기 식으로 허락해야 할 상황.
디스의 역할은 가장 적은 대가로 바호크 공국을 본국의 내전에 끌어들이는 것이었다.
시간이 꽤 흘렀다.
아직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지루해질 무렵, 초소장 커널이 어색한 표정으로 막사를 찾았다.
“아직, 중앙에서 연락이 오지 않았습니다. 일개 초소까지는 마법사의 지원이 없기 때문에 아무래도 연락을 보내는 데 시간이 걸립니다.”
디스는 속으로 연락을 기다리는 것보다 차라리 직접 찾아가는 것이 빠를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남의 나라에 들어온 입장이라 약간의 불만이 일어도 입을 꾹 다물었다.
송구스럽다는 듯 한 표정을 보인 초소장은 그나마 접대에 소홀함이 없도록 하기 위함인 듯 부하들을 시켜 차를 내왔다.
“변변한 것은 없습니다만.”
초소장이 내온 차는 탁한 냄새가 진하게 풍겼다. 평소라면 거들떠보지도 않았겠지만 먼 길을 달려왔던지라 목이 말랐다. 저질의 차라도 지금은 감지덕지였다.
“그래도 냄새는 괜찮군.”
찻잔에 코를 가져가자 달짝지근한 향기가 풍겨왔다. 시장기도 살짝 도는지라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찻잔을 들었다.
“잠깐.”
웅장한 목소리가 막사 안을 울렸다. 막 찻잔을 입으로 가져가던 사람들의 동작이 일시에 멈췄다. 그와 함께 초조한 심정으로 바라보던 초소장의 얼굴이 흠칫 굳어졌다.
음성을 발한 주인공에게로 사람들의 시선이 모였다.
하얀 백발의 호쾌한 외모의 청년, 호랭이였다.
“무슨 일이요?”
루멘이 기분이 상한 얼굴로 물었다.
공주님께 건방을 떠는 것도 못 봐줄 소행인데, 이제는 감히 차 마시는 것까지 간섭하는 것인가.
하지만 이어진 호랭이의 말에 그는 심장이 턱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독이다. 죽고 싶은 자라면 마셔라.”
딸깡.
기사들의 얼굴이 심각하게 굳었다. 손에 들었던 찻잔이 반사적으로 탁자 위로 떨어졌다.
“왜 독을 탔지?”
호랭이가 서늘한 눈으로 초소장을 몰아붙였다. 비적 마른 몸의 초소장은 땀을 비오듯이 흘리며 몸을 벌벌 떨었다.
“그, 그것이...... .”
눈동자를 요란하게 굴리며 빠져나갈 구색을 찾던 초소장의 눈에 검은 장발의 소년이 들어왔다.
놀랍게도 장발 소년은 독이라는 경고에도 불구하고 차를 벌컥벌컥 들이켜고 있었다. 독이든 차가 마치 맛있는 꿀물이라도 되는 듯, 남이 내려놓은 차까지 죄다 챙겨 마시는 것이 아니가.
“저, 저 사람은 잘 마시지 않소. 그런데 무슨 독이란 말이오. 억울하오. 억울한 누명이오.” 초소장의 외침에 호랭이는 입가를 살짝 들어올리며 선 굵은 미소를 보였다.
“저 녀석은 원래 좀 특별해.”
“샤바가 좋아하면 할수록 먹으면 안 되는 것이지.”
병규가 고개를 끄덕이며 동조했다.
“말도 안 되는 소릴.”
초소장은 말문이 턱 막혀 버렸다. 검은 장발 소년이 잘 먹기 때문에 오히려 먹으면 안 되는 것이라니.
“어쭙잖은 핑계는 듣고 싶지 않다. 말해라. 왜 차에 독을 탄 거지?”
호랭이가 성큼성큼 다가서며 물었다. 그 서슬 퍼런 살기에 초소장은 턱을 덜떨 떨며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때였다.
벌컥 하며 막사 안으로 몇 사람이 들어왔다.
삼엄한 눈초리.
칠흑처럼 검은 갑옷. 그리고 왼쪽 가슴에 그려진 머리 셋 달린 늑대 문양.
“케르베로스 기사단.”
디스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케르베로스 기사단.
레종 공주를 보호하고 있는 미네르바 왕정기사단에 비할 수 있는 바호크의 자랑거리, 최강의 흑기사들.
느닷없이 막사 안으로 들어선 것은 바로 바호크의 왕정기사단인 케르베로스 기사단이었다.
막사 안으로 들어선 흑기사는 모두 다섯.
흑기사들의 등장에 공주를 호위하던 미네르바 기사들이 일제히 자리를 떨치며 검자루에 손을 얹었다. 여차하면 일전도 불사한다. 흑기사들은 노려보는 미네르바 기사단의 두 눈에서 강렬한 투지가 발산하고 있었다.
‘허’
미네르바 기사단의 절도 있는 모습에 흑기사들을 통솔하고 있는 파먼은 속으로 나직이 감탄했다.
‘과연, 옛 제국의 명성은 쇠퇴했어도 기사들의 위명은 변함이 없구나.’
그때 루멘이 당당한 태도로 그의 앞에 나섰다.
“난 미네르바 기사단 제 1기사단장 루멘이라 하오.”
“루멘 백작님이시군요. 케르베로스 제 3기사단장 파먼입니다.”
가볍게 고개를 숙이며 루멘을 응대한 파먼은 곧 레종 공주를 향해 정중히 무릎을 꿇었다.
“공주님을 모셔오라는 명령을 받았습니다.”
레종이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나려 하자 디스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죄송하지만 아직 해결해야 할 일이 있습니다.”
그의 손에는 고소한 향기를 풍기는 찻잔이 들려있었다. 부리부리한 눈으로 디스가 들어 보이는 찻잔을 응시하던 파먼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일이라면 이미 정보를 입수한 참이오.”
무거운 표정으로 말을 꺼낸 파먼은 그를 바라보며 벌벌 떨고 있는 초소장을 향해 돌연 검을 휘둘렀다.
팟!
짧고 굵었다. 그리고 빨랐다.
천지를 가르는 뇌전처럼 쏘아져 나간 파먼의 롱소드가 떨고 있는 초소장의 가슴을 반으로 갈라놓았다.
순식간이었다.
파핫!
폭포수처럼 피가 쏟아졌다.
급소를 노린 공격이라 초소장은 두 눈을 뜬 그대로 쓰러졌다. 벌겋게 피가 차 오르는 그의 두 눈에 당황과 불신이 묻어 있었다.
파먼이 초소장을 처리하자 기다렸다는 듯이 다른 흑기사들이 차를 날랐던 병사들을 베어 넘겼다.
눈 깜짝할 사이에 네 명이 쓰러졌다.
너무 갑작스런 일이라 막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을 때는 임 막사 안의 모든 병사가 베어진 다음이었다.
“이, 이게 무슨 짓이오.!”
레종 공주의 앞을 가로 막으며 디스가 항의했다. 타국의 공주가 보는 앞에서 살인이라니.
“결례를 저질렀습니다. 허나 사안이 워낙 중대했던지라.”
양해를 구한 파먼은 목각인형처럼 누워 있는 초소장을 가리키며 엄중한 목소리로 외쳤다.
“이자는 감히 국경선을 지켜야 하는 막중한 임무를 띠었음에도 불구하고, 적국의 첩자와 내통한 혐의가 포착되었습니다. 또 정보에 의하면 부정한 자들과 결탁하여 공주님을 납치할 흉악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잘 아시다시피 간첩행위는 어떤 상황이건 간에 사형입니다. 다소 과격한 처사였지만 급한 상황이라 어쩔 수 없었음을 양해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 그렇군요.”
강력한 항의를 하려던 디스는 파먼의 살기 등등한 태도에 움찔 물러났다. 도움을 구하러 온 처지에 더 이상 추궁하기도 어려웠다.
‘이 녀석들.’
호랭이가 슬쩍 병규를 보며 눈짓을 한다. 병규는 가만 고개를 끄덕였다.
이 흑기사들. 초소장이 차를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소장이 차를 들고 막사 안으로 들어올 때부터 근처에 대기하고 있었다. 그런데 초소장이 막사로 들어와 차를 권하며 한참이나 횡설수설할 때는 가만히 있다가, 막상 문제가 크게 횔 것 같으니 갑자기 뛰어 들어와 초소장을 배신자로 몰아붙이며 목을 친 것이다.
살인멸구. 죽여서 입을 봉한 것이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지만 병규는 특유의 밝은 귀 때문에 그들의 기척을 모조리 파악할 수 있었다.
‘이 녀석들. 뭔가 있다.’
감이 좋지 않다. 뭔가 살짝 뒤틀려 있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그것이 무엇인지는 정확하게 짚어낼 순 없었다.
왜 뒤늦게 나타난 것일까. 왜 이유도 묻지 않고 초소장을 제거한 것일까.
그 모든 의문이 왠지 모를 불안감으로 밀려들며 그의 뒤통수를 엄습해 왔다.
한편, 초소장을 제거한 파먼은 검에 묻은 피를 닦아내자마자 공주 앞에 무릎을 굻으며 정중하게 말했다.
“이미 대공님께 전갈을 넣었습니다. 가시지요.”
레종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막사 밖으로 나가자 피비린내가 진동을 했다. 십여 명의 흑기사들이 마른 천으로 검에 묻은 피를 닦고 있었다. 흑기사들이 모여 있는 한쪽. 석은 부대자루처럼 축 늘어진 병사들의 시신이 보였다.
초소를 지키던 병사들이었다.
파먼이 초소장을 처리할 때, 나머지 기사들이 막사 밖의 병사들을 모조리 제거해 버린 것이다.
이 모든 일이 잘 짜여진 각본처럼 순식간에 착착 진행되었다.
‘대체 바호크 공국은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일까.’
병규의 얼굴이 굳어졌다.
대공이 있는 포른성은 국경선에서 불과 하루거리 떨어진 보른지역에 위치했다. 바호크 공국의 방대한 국토를 생각하면, 아이린 왕국 쪽으로 크게 치우쳐 있는 쳥세를 띠었다.
일반적으로 나라의 수도는 대륙의 중심부에 위치하는 것이 효율적이다. 바호크 공국처럼 한쪽으로 치우쳐 있을 경우 중앙기관에서 결정한 사안이 대륙의 반대편까지 전달되는 데 시간이 걸리는 단점이 있었다.
보른 지역은 대표적인 산악지형의 도시엿다.
도시 자체가 놓은 산 위에 위치하고 있었다. 그리고 포른성은 그런 도시의 성격대로 산허리를 길게 감싸고 있는 듯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산을 둘러싼 보른성은 멀리서 보기에도 상당히 특이한 모양을 하고 있었다.
지형을 최대한 이용한 구조덕분에 트라우마처럼 놓고 단단한 성벽 따윈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적의 공격에 형편없이 무너질 정도로 방어력이 약한 것도 아니었다. 포른성은 높은 성벽대신 칼처럼 직각으로 뻗은 절벽을 양쪽으로 끼고 있어, 정면이 아니면 성을 공략하기 힘든 구조를 띠고 있었다.
트라우마가 높고 단단한 이미지라면, 산허리를 둘러싼 포른성의 모습은 웅장하고 저돌적인 기상을 풍겼다.
“독특한 구조로군. 침투하기는 힘든데, 성에서 빠져나오기는 너무 쉬운 구조야.”
포른성을 본 호랭이가 자뭇 진지한 얼굴로 중얼거렸다. 성은 방어를 위한 주요거점이다. 그런데 산 아래에 방대하게 지어진 바호크의 성은 그런 방어적 이점을 전혀 보이지 않고 있었다. 성벽은 낮고, 성문도 아예 없다.
포른성의 출입구는 무려 다섯 곳이나 되며, 좌우 폭이 굉장히 넓어서 말 탄 기사 20명이 어깨를 나란히 하고 통과할 수 있을 정도였다.
바호크의 자유롭고 저돌적인 기상을 느끼게 해 주는 성의 모습이었다.
“성의 모습이 참 독특하네요.”
레종이 마차 곁으로 나란히 말을 달리고 있는 파먼에게 물었다. 파먼은 자긍심이 가득한 음성으로 대답했다.
“이드라센 대륙의 서부는 원래 수많은 이종족들이 몬스터들과 한데 섞여 사는 혼란의 땅이었습니다. 바호크 대제께선 무작정 이종족들을 정복하려 하지 않으셨습니다. 정복대신 융화를 택하셨지요. 인간의 적은 몬스터지 같은 인간이 아니라는 생각 때문이셨습니다. 포른성이 이처럼 독특한 모양이 된 것도 이민족의 문화를 거부감 없이 받아들인다는 의지의 표현인 것입니다. ”
“참으로 훌륭하신 생각이네요. 바호크 선왕께선 듣던 것보다 훨씬 더 현명한 군주신 듯해요.”
“드문 현군이셨지요.”
순수하게 바호크 공왕에게 감탄한 레종 공주와 달리 디스의 마음은 복잡했다.
이들은 바호크 공왕을 대제라고 불렀다. 비록 겉으로는 공국의 모양을 하고 있지만 속으로는 바호크를 이미 제국으로 생각하고 있다는 것이 아닌가.
앞으로 대공을 마주한 자리에서 왕국과 공국의 입장을 적극 주장해야 하는 디스로는 이들의 자긍심이 적잖은 부담으로 작용했다.
레종 일행은 성의 별관으로 안내되었다.
곧 바호크의 대공과 대면하게 된다. 이후의 일이 대공과는 담판으로 결정되는 것이다.
디스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앉았다 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기사들 역시 엄숙한 분위기였다. 모두들 초조함을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너무 늦는군.”
별관으로 안내된 지 벌써 반나절이 지났다. 그동안 시종들이 몇 번 들어와 차를 내왔을 뿐, 아직 대공에게선 아무런 소식도 없었다.
일국의 공주가 방문했음에도 불구하고, 바호크 공국의 태도는 무관심 그 자체였다.
일행은 속이 부글부글 끓었으나 당장 아쉬운 것은 이쪽이라 불만이 있어도 내색을 못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영원히 열리지 않을 것 같던 별관 문이 열리며, 하얀 수염의 강팍한 인상을 한 노인 한 명이 들어왔다.
“토드란 외무대신.”
디스의 표정이 살짝 변했다.
노인은 대공이 아니라, 능구렁이로 소문난 외무대신이었다.
“허허. 너무 오래 기다리게 했소이다.”
“우린 대공님과의 면담을 청했소만.”
루멘이 싸늘하게 안색을 굳히며 따지듯 물었다. 그러나 토드란은 얼굴 가득 주름진 미소를 머금은 채 부드럽게 대꾸했다.
“대공께선 최근 말리바 지역에 창궐한 전염병 때문에 공주님을 보지 못하시게 되었소. 이 점에 대해 양해 말씀 부탁하더이다.”
“끄응. 바쁘시다니...... 어쩔 수 없구료.”
돌아서는 루멘의 얼굴에 짜증과 불쾌함이 언뜻 스쳤다.
갑자기 전염병이 창궐하다니. 그것도 하필 공주님이 방문한 이 시기에 말이다. 괜한 핑계를 대는 것이 뻔해 보인다. 그럼에도 불쾌함을 대놓고 내색할 수 없는 현실이 괴롭기만 했다. 그렇다. 지금은 참을 수밖에 없다.
당장 아쉬운 것은 이쪽이 아닌가.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토드란 외무대신 각하.”
신물이 난 표정의 루멘을 대신하여 디스가 나섰다. 그는 담담한 미소를 머금은 채 능숙하게 외무대신을 이끌었다.
어색한 레종과 간단한 인사치레를 마친 토드란은 노회한 눈으로 디스 남작을 살폈다.
‘인물이군.’
그는 한순간에 디스에 대해 간파할 수 있었다.
말끔한 얼굴, 가는 입술, 그리고 흔들림 없는 눈동자.
고작 남작의 지위를 가진 자가 대국의 외무대신을 마주 대하고도 전혀 긴장한 기색이 없다.
대개 이런 류의 사람들은 타고난 달변가이거나 머리가 지나치게 좋은 자. 아니면 본심을 숨긴 야심가인 경우가 많다.
디스 남작이 어느 쪽에 속하든 오늘의 자리가 결코 편치 않을 것임을 쉬이 예상할 수 있었다.
“허허허. 아이린 왕국의 공주님이 빼어난 미모의 소유자라는 소문은 익히 들었소만, 설마 이토록 아름다운 분이신 줄은 꿈에도 몰랐소이다.”
너털웃음과 함께 말문을 연 토드란 외무대신은 눈을 가늘게 여미며 대화의 맥을 짚었다.
“헌데, 실례가 안 된다면 귀하신 공주님께서 기사들을 이끌고 저희 공국으로 납신 이유를 알려주지 않겠소?”
‘여우같은 작자.’
겉으로는 말끔한 표정을 가장하고 있던 디스는 목구멍까지 치밀어오르는 욕을 간신히 참아 넘겼다.
이 작자. 꽤 뻔뻔하다. 분명 이곳에 오기 전에 아이린 왕국의 현재 사정과 공주의 처지를 모두 파악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모르는 척 시침을 뗀다. 이렇게 되면 어쩔 수 없이 이쪽에서는 어려운 사정을 먼저 설명해야 한다. 시작도 하기 전에 고개부터 숙여야 하는 것이다.
디스는 속으로 이를 갈면서도 겉으로는 태연히 미소를 지었다.
“대신께선 귀가 어두우신 모양입니다.”
“무슨 소리인지 모르겠구려.”
“귀가 있어도 듣지 못하니 귀가 어두운 것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뼈가 있는 말이다. 그러나 토드란 외무대신 역시 그리 호락호락한 인물은 아니었다.
“허허. 보다시피 나이가 많다 보니 간혹 남의 말을 듣지 못하는 경우도 있소이다. 답답하더라도 젊은 그대가 참으시게.”
“하하. 그러시군요.”
디스 역시 지지 않고 유쾌하게 웃음을 터트렸다.
역시 나이를 허투루 먹은 자가 아니다. 도저히 비집고 들어갈 틈이 없다.
결국 디스는 약간의 손해를 감수할 수밖에 없었다.
“실은 본국에 약간의 문제가 생겼습니다.”
“흐음. 문제라. 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정령 왕국에 과연 어떤 변괴가 생겼을지. 이 늙은이는 궁금하기 짝이 없구려.”
대신은 여전히 아무것도 모른다는 얼굴로 디스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디스는 뒤집어지는 속을 애써 짓누르며 필립 공작에 의해 왕성이 점령당한 사태에 대해 간략하게 설명하였다.
“허허. 반란군에게 왕성이 점령당했다라. 그거 참 큰일이오.”
토드란 외무대신은 수염을 쓰다듬으며 연신 안타깝다는 소리를 연발했다. 겉으로 풍기는 모습만 보면 이웃나라의 불행을 정말 딱하게 여기는 것 같았다.
그러나 노인의 노란 눈동자는 작은 눈자위를 뒤룩뒤룩 구르며 열심히 주판알을 굴리고 있었다. 이웃 국의 불행이 과연 자국에게 어떤 영향으로 미칠까. 또 이 일을 계기로 어떤 이익을 창출할 수 있을까.
토드란의 머릿속은 그런 생각으로 가득 차 있었다.
현재 자국은 반란군들의 행패과 약탈로 백성들의 신음이 하늘을 찌르고 있습니다. 과거 바호크 공왕님과 저희 왕국의 우정을 생각하여 바호크 대국에서 과감히 지원을 해주실 것을 정식으로 요청하는 바입니다. 물론 우정에 대한 사례는 충분히 치를 용의가 있습니다.“
디스는 과거의 일까지 들먹이며 조심스럽게 바호크 공국의 도움을 요구했다.
“거래라. 양국 모두가 만족할 만한 거래라면 언제라도 환영이오.”
“물론입니다.”
“허허. 과연 어떤 제안인지 궁금하구려.”
“간단합니다. 공국에서 약간의 병력 지원만 해 주시면 됩니다. 왕성을 장악한 반란군을 몰아낼 정도의 군사면 족합니다.”
“병력을 빌려 달라. 쉽고도 어려운 말이오. 분명 양국의 깊은 관계를 감안한다면 병력을 빌려 드리는 것이 마땅한 처사일 것이오, 허나, 근래 본국에 발생한 전염병 때문에 구내의 사정이 그리 좋지 못한데다, 신성제국의 반응 또한 신경 쓰지 않을 수 없는 일이니...... . ”
토드란 외무대신은 의도적으로 뒷말을 흐렸다. 제안은 잘 들었으니 성의를 보이라는 뜻이다.
미끼가 필요했다.
이 능구렁이 같은 노인네가 혹 하고 달려들 만한 매력적인 미끼가. 깍지 낀 두 손에 힘을 주며 디스는 아무도 상상하지 못한 미끼를 던졌다.
“병력을 빌려 주시면 대신 고란산맥을 넘겨드리겠습니다.”
“뭣?”
디스의 말에 기사들이 벌떡벌떡 자리에서 일어난다. 고란산맥은 아이린 왕국과 바호크 공국의 경계선 역할을 하는 거대한 산맥으로 그 크기는 작은 왕국에 필적할 정도로 광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디스가 그런 엄청난 땅을 조건으로 내건 것이다.
외무대신의 주름 가득한 두 눈이 좁혀졌다.
“과연 구미가 당기는 제안이외다.”
‘물었다.’
디스는 속으로 확신했다. 지금까지 전혀 반응을 보이지 않던 토드란이 드디어 흥미를 보인 것이다.
‘이제부터가 중요해.’
디스는 속으로 심호흡을 했다. 이제부터 능구렁이와 피 말리는 설전을 벌여야 하는 것이다.
“좋은 소식 기다리겠습니다.”
“허허. 그대와 같은 총명한 인재가 있으니 분명 왕국의 앞날은 밝은 것이외다.”
토드란 외무대신은 너털웃음을 터트리며 별관을 나섰다. 디스가 밝은 펴정오로 그 문밖까지 배웅했다.
“고란산맥을 내준다니. 너무 과한 대가가 아닌가!”
디스가 문을 닫고 들어오자마자 기사단장 루멘이 굳은 얼굴로 고함을 질렀다.
“절대로 아닙니다.”
디스는 고개를 저었다. 루멘의 미간에 주름이 잡혔다.
“자넨 고란산맥이 얼마나 광활한 지역인지 알고나 하는 소린가? 5분의 1일세. 아이린 왕국의 무려 5분의 1에 해당하는 엄청난 영토란 말일세. 게다가 고란산맥의 쓸모는 단지 넓이로만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야. 험난한 고란산맥은 국경선으로서의 역할도 겸하는 요충지라는 말일세. 만약 고란산맥이 저들 손에 넘어가게 된 다면, 산맥 너머의 영토까지 무력하게 빼앗기게 될 우려가 크네.”
루멘은 얼굴까지 벌겋게 달아오르며 고란산맥을 넘길 수 없다는 뜻을 강력하게 내치쳤다. 다소 냉정한 얼굴로 설명을 듣던 디스는 차가운 음성으로 말을 꺼냈다.
“영토는 지금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뭐라?”
“우리에게 가장 시급한 것은 수도를 점령한 반란군을 제압하는 것입니다. 반란군에게 왕국이 통째로 넘어갔는데, 그런 상황에 군사요충지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그런 문제는 감히 황실에 반역의 깃발을 쳐든 모리스 공작을 처리한 후에 생각해도 늦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고란산백은 너무...... .”
“저로서도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습니다. 고란산맥 정도의 미끼가 아니면 저들은 절대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 테니까요.”
뭐라 대꾸를 하려던 루멘은 끝내 입을 다물었다. 이제야 자신들의 입장이 떠오른 것이다. 사실 자신들로서는 국토의 일부를 떼주고라도 바호크에서 병력을 빌릴 수만 있다면 감지덕지한 상황인 것이다.
디스의 상세한 설명에 얼굴까지 붉히며 항의하던 루멘은 결국 고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누구를 원망하랴. 죄가 있다면 반란군에게 맥없이 수도를 빼앗긴 자신의 무능을 탓할 수밖에.
“지금은 고란산맥을 보전하느냐 넘겨주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디스가 결연한 음성으로 모두의 시선을 모았다.
“바호크의 막강한 전력을 감안할 때, 그들의 힘을 빌려 수도를 되찾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저희는 그 이후의 일. 즉 수도를 되찾은 이후의 일을 준비해야 합니다.”
모두의 두 눈에 의문이 떠올랐다.
지금 코앞에 닥친 위기는 바로 반란군을 몰아내고, 천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왕가의 전통을 바로 세우는 것이다. 그런데 디스는 전혀 엉뚱하게 그 이후의 일을 언급하고 있다.
이상하게 생각되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하지만 디스의 다음말에 모두의 얼굴이 바짝 굳어졌다.
“수도를 되찾은 후, 반란군을 몰아낸 바호크의 병력들이 과연 순순히 물러날까요?”
모든 이의 움직임이 동시에 멎었다. 숨 쉬는 것조차 잊어버린 사람들은 멍하니 디스의 입만 바라볼 뿐이었다.
그렇다. 당장 눈앞의 일에 정신이 팔려 그 이후의 일을 보지 못했다. 내전으로 황폐해진 아이린 왕국은 분명 바호크 공국 입장에서 탐낼 만한 먹잇감으로 보일 것이다.
“앞으로 우리는 두 번 싸워야 합니다. 한 번은 반란군의 수노, 필립 공작과의 골육상쟁 그리고 내정에 간섭해 오는 바호크 공곡과의 피 말리는 외교전. 이 두 번의 싸움, 우리는 단 한 번도 져서는 안 됩니다.”
서늘한 긴장감이 사람들 사이를 오갔다. 사람들의 낯빛은 하나같이 파랗게 질려 있었다. “흠흠.”
루멘이 낮은 헛기침을 하며 주위를 환기시켰다.
“디스 남자. 일러주시오.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말이오.”
디스의 입가에 미소가 어린다. 드디어 이 옹고집 기사들에게서 인정을 받은 것이다.
“앞으로 할 일이 너무도 많습니다. 하나하나 모두의 지혜를 짜내어 이 난관에서 벗어나도록 하죠.”
“좋아요.”
레종이 움직이자 기사들 역시 디스에게로 모였다.
그들은 머리를 맞대며 앞으로의 일들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헛돌던 바퀴들이 드디어 같은 방향을 향해 구르기 시작했다. 작은 변화였지만 최악의 상황으로 몰린 레종 공주 일행에게는 깊은 어둠 속에서 작은 횃불을 만난 것만큼 희망적인 일이었다.
‘이건 아무리 생각해도 수상해.’
디스와 기사들이 작은 테이블에 모여 이후의 일들을 논의하고 있을 때, 조금 떨어진 창가에 턱 하고 걸터앉은 호랭이는 딴생각에 잠겨 있었다.
좀 전까지 디스와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던 바호크의 외무대신 토드란. 호랭이가 보기엔 그 자는 뭔가 꿍꿍이를 숨겨놓은 것 같았다.
‘초소에서의 일도 그렇고. 아무래도 조사를 해 봐야겠다.’
생각을 굳힌 호랭이는 병규에게 시선을 보냈다.
마침 호랭이 쪽을 바라보고 있던 병규가 고개를 끄덕인다. 그리고는 호랭이가 뭐라 말하기도 전에 샤바를 불러들였다.
“샤바야.”
“네. 주인님 샤바.”
“해줄 일이 하나 있다.”
“샤바?”
병규는 샤바에게 귓속말로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알았어요. 샤바.”
빙그레 웃은 샤바가 스르륵 바닥으로 사라졌다.
“이러면 되는 거죠?”
샤바를 보낸 병규가 눈웃음을 치며 호랭이에게 묻는다. 호랭이는 입 꼬리를 쭉 늘리며 웃어 보였다.
“녀석. 눈치가 꽤 빨라졌구나.”
호랭이는 병규를 흐뭇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예전에는 기억력도 형편없었고, 좀 멍청한 구석도 없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서는 전혀 딴 사람이라도 된 것처럼 듬직해졌다.
‘부쩍 큰 것 같군. 그동안 겪은 많은 사건들 덕분에 녀석도 조금은 어른이 된 것 같아.’
병규의 변화를 마냥 흡족하게 생각하는 호랭이였다.
하지만 신선인 그는 미처 한 가지 사실을 간과하고 있었다. 병규의 변화가 오우거의 피를 흡수한 다음부터 시작되었다는 시실 말이다.
창밖을 내다보는 병규의 두 눈이 유독 어둡게 느껴졌다.
별관을 나선 토드란 외무대신은 곧장 중앙의 내실을 찾았다.
수수한 방이었다.
삼십 명이 뒹굴고도 남을 법한 거대한 침상.
그윽한 자태를 뽐내고 있는 각종 장식들.
멀리 아프칸에서만 생산된다는 값비싼 양모로 만들어진 푹신한 양탄자. 실내를 채우고 있는 가구와 장식들은 모두 진귀하고 값비싼 물건들이긴 했지만, 주인의 엄청난 신분을 고려해 보면 평범하다 못해 수수하게까지 느껴질 정도다.
주름진 눈으로 실내를 훑어본 토드란 외무대신은 양탄자 위에 무릎을 꿇었다.
“신. 토드란. 지금 돌아왔나이다.”
떨리는 목소리로 절을 하는 그의 모습은 좀 전까지의 오만했던 태도와는 극히 대조적으로 공손하기 짝이 없었다.
“어서 오게.”
창가로 흘러 들어온 햇살이 뽀얀 무지개를 그리고 있는 실내의 한 중앙에서 한창 사무에 열중하던 장대한 체구의 사내가 고개를 들어 그를 맞았다.
장대한 체구의 중년인.
그가 바로 현 바호크 공국의 지배자인 바흐만 대공이었다.
‘고연 제왕의 피를 이으신 분이로고.’
바흐만의 진중한 풍채에 토드란은 절로 고개가 숙여졌다.
현 바호크의 공왕인 바흐만은 성품과 인품에서 바호크 공왕을 꼭 닮은 것으로 평가되고 있었다. 단 한 가지 차이가 있다면 소탈한 바호크 공왕과 달리 그에겐 야망이 있다는 점이었다.
그러나 토드란은 바흐만의 그런 점이 더욱 마음에 들었다.
바호크는 과거 바호크 대공이 지배하던 시대와는 많이 달아졌다.
지금은 힘이 있다. 아니 넘쳐서 주체를 못할 지경이다.
이 넘치는 국력을 가지고, 평화를 부르짖는 것은 오히려 국력낭비다. 지금은 세상을 향해 바호크의 우대한 혼을 쏟아 부어야 할 때인 것이다.
“어떻게 되었는가.”
잠시 사념에 빠졌을 때 바흐만이 무거운 목소리로 물어왔다.
토드란은 고개를 깊게 조아리며 떨리는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예상대로 공주 일파는 바호크의 병력을 빌려 달라는 제안을 해 왔습니다.”
“흠. 그들이 대가로 무엇을 내놓았는지 궁금하군.”
“고란산맥이옵니다.”
“허.”
바흐만의 입에서 작은 감탄성이 흘러나왔다.
“생각보다 공주의 배포가 큰 것 같군.”
“...... 공주가 아니라 디스란 자의 생각인 것 같습니다.”
“흐음. 보좌관쯤 되는 자인가. 그런 자가 배짱 좋게 고란산맥을 걸었군.”
“제법 머리가 되는 자인 듯싶었습니다.”
“아깝군.”
바흐만은 가볍게 혀를 찼다.
그는 진실로 인재를 아낄 줄 아는 군주다. 토트란이 칭찬할 정도면 상당한 인재라는 의미. 그런데 하필 그런 재목이 역사 속으로 사라질 난파선에 승선하고 있으니.
선책을 잘못해도 크게 잘못한 셈이다.
“후후후. 그런데 토드란 외무대신은 좀 짓궂은 성격 같소. 들어주지도 않을 거면서 이렇게 오랜 시간 협상을 하다니 말이오.”
“허허. 무슨 계략을 꾸미는지 알고 싶어서였습니다만, 생각보다 디스란 자가 진지해서 저도 모르게 집중하고 말았습니다. 아마도 지금 그들은 수도를 되찾은 이후에 이 바호크 공국이 어떻게 나올지 한창 고민하고 있겠지요.”
“안타가운 일이군.”
바흐만은 고개를 좌우로 가볍게 저었다.
공주의 암울한 운명에 애도를 표한다.
고란산맥이라는 초유의 조건을 내세우면서까지 비호크를 끌어 들이려 한 공주의 노력은 대견하다고 말할 수 있다. 하지만 그녀는 한 발 늦고 말았다.
그녀 이전에 이미 바호크는 필립 공작과 모종의 거래를 끝낸 탓이다.
육 개월 전, 한 사람이 바흐만을 찾았다.
시종조차 대동하지 않은 그는 자신을 아이린 왕국의 필립 공작이라 소개하며 바흐만과의 독대를 청했다.
은밀한 곳에서 이루어진 바흐만 대공과의 독대. 그는 위세 좋게 곧 반란을 일으킬 것이라고 선언했다.
바흐만은 놀라지 않았다. 다만 왜 자신에게 이런 얘기를 하는지 궁금해했을 뿐이다. 만약 병력을 요청할 생각이라면 냉정하게 사양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이어진 필립의 말은 정녕 의외였다.
필립 공작은 바호크의 병력을 원하지 않았다. 다만 한 가지, 내전이 일어나는 동안 자국의 일에 간섭하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했을 뿐이다.
마치 그는 오늘 공주가 바흐만을 찾아올 것을 미리 예견한 듯 그 같은 요구를 했던 것이다.
당시 바흐만은 필립 공작을 별스런 자라고 생각하고 대수롭지 않게 여겼었다.
반란에 성공할지 못할지도 확신할 수 없는 상황에서, 타국의 간섭을 걱정하다니. 어처구니없는 작자가 아닐 수 없엇다.
하지만 필립 공작의 말이 현실로 나타난 지금은 그에 대한 생각이 많이 변할 수밖에 없었다.
‘무서운 작자로군.’
대세를 읽을 줄 아는 자다.
대륙 전체를 무대로 판을 짜고, 계획한 바를 실행해 옮길 수 있는 능력과 배포가 있는 것이다.
어쩌면 훗날 그의 가장 큰 적은 아마스 신성제국의 아르케엘 대제가 이니라 필립 공작이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지금 돌이켜 생각해보면 필립 공작은 참으로 놀라운 사람인 것 같소.”
“그렇군요. 만약 그때 그와 계약을 하지 않았다면 우리는 더 큰 것을 얻었을테니 말입니다.”
당신 필립 공작이 내건 조건은 바호크 공국의 완전한 독립. 그리고 바호크가 제국으로 거듭나는 것을 적극적으로 돕겠다는 것이다.
바흐만 대공으로서는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가뜩이나 아이린 왕국에 충성하라는 선조의 유언에 갑갑함을 느끼던 차다.
만약 필립 공작이 이런 제안을 하지 않았다면 아이린 왕국을 침공해서라도 바호크의 위상을 만천하에 알렸을 것이다.
그런데 지금 와서 생각하면 참으로 억울할 노릇이다.
그때 필립 공작의 제의를 거부했다면, 독립은 물론 고란산맥이라는 덤까지 얻을 수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깝다고 쌍방 총수의 서인이 들어간 계약서까지 주고 받은 차에, 다시 공주 파의 손을 들어줄 수도 없는 노릇.
아깝긴 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다.
“그나저나 초소의 병사들은 딱하게 됐습니다.”
“차에 탄 수면제가 들켰다지?”
“일행 중에 뛰어난 마법사가 있었던 모양입니다. 어쩔 수 없이 초소의 병사들을 처리했노라고 파먼 기사단장이 앓는 소리를 하더군요.”
“귀찮게 되었군. 수면제로 안 된다면 무슨 수로 그들은 사로잡는다? 마법은 어떨까?”
“버지니아 백작이 알려온 바에 의하면 공주에게 꽤 뛰어난 마법사가 있는 모양입니다.”
“저런. 그래서야 마법도 힘들겠군. 쯧쯧. 결국 힘으로 누르는 수밖에 없는가.”
“이미 지시해 놓았습니다. 파먼 백작이 케르베로스 기사단을 이끌고 별관밖에 대기하고 있습니다.”
“필립 공작은 살아 있는 공주를 원했으니, 무슨 일이 있어도 공주만은 다쳐서는 아니 되네.”
“명심하겠습니다.”
“쯧쯧.”
혀를 차던 바흐만 대공의 표정이 한순간 변했다.
동시에 허리춤의 검으로 손이 반사적으로 움직였다.
“무슨 일이옵니까”
토드란이 놀란 눈으로 물었다.
말없이 실내 한 구석을 노려보던 바흐만은 잠시 후 표정을 풀며 고개를 기울였다.
“이상하군.”
“수상한 기색이라도 있었습니까?”
“아니오. 아무래도 요즘 신경이 과했던 모양이오.”
토드란의 걱정에 바흐만은 고개를 흔들었다.
아주 미세한, 불길한 기운 같은 것이 잠깐 감지되었지만 아무리 집중해도 다른 이상한 것은 잡히지 않았다.
검에서 손을 놓은 바흐만은 다시금 토드란과 공주를 사로잡은 이후의 일을 논의하기 시작했다. 그때 실내의 음영을 타고 그림자 하나가 은밀하게 움직였지만 두 사람은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역시.”
샤바를 통해 바흐만 대공의 흉계를 전해들은 병규와 호랭이는 그럴 줄 알았다는 표정을 지었다.
초소에서의 일도 그렇고 수상한 점이 너무 많았다.
병규는 즉각 샤바가 정탐해온 내용을 기사들에게 가 밝혔다. 기사들은 믿을 수 없다는 반응이었다. 방금 전 토드란의 지극히 호의적은 모습을 본 그들로서는 바흐만 대공이 사악한 흉계를 꾸미고 있다는 걸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특히 디스가 받은 충격은 더했다.
“그, 그럴 수는 없소!”
한참 희망의 불꽃을 활활 태우고 있던 판에 이 무슨 거짓말 같은 소식이란 말인가.
“바흐만 대공은 소드마스터요. 그런 실력자의 눈을 속이고, 정탐을 해 왔다는 것을 어떻게 믿는단 말이오. 설사 대륙 제일의 어세신이라는 마일드의 일곱 사신들이라 할지라도 불가능한 일이오.”
병규는 굳이 설명해 줄 필요를 못 느꼈다.
대신 그는 샤바에게 눈짓을 했다.
“샤바.”
방긋 웃는 샤바의 신형이 스르르 바람에 날리는 모래처럼 사라졌다. 사람들이 멀쩡하게 쳐다보고 있는 앞에서 말이다.
“헛.”
“무, 무슨.”
사람들의 입에서 헛바람이 새어나왔다.
미네르바 기사단의 실력은 대륙에서도 알아줄 만큼 출중하다.
평균적인 수준은 대략 소드익스퍼느 중급. 그런데 그런 실력자들이 무려 오십 명이나 모여 잇는 곳에서 기척도 없이 사라지다니. 놀라운 것은 기사들이 빤히 보고 있는 중에 사라졌다는 것이다.
사람들의 표정이 경악으로 일그러졌다.
감상하듯 느긋하게 사람들의 일그러진 얼굴들을 바라보던 병규가 조용히 입을 열었다.
“여러분들 중에서 샤바의 기척을 느끼실 수 있는 분이 계십니까?”
병규의 낭랑한 음성에 대답한 기사는 단 한 명도 없었다.
당연한 결과다. 샤바의 은신술은 호랭이나 병규조차 제대로 파악할 수 엇을 정도로 대단하기 때문이다.
“이제 샤바가 가져온 정보에 대해 어느 정도 신뢰감이 드셨을 것으로 압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일제히 병규에게 몰렸다. 병규는 담담한 얼굴로 말을 이었다.
“대충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는 이제 모두가 알게 되었습니다. 선택은 두 가지입니다. 죽음을 무릅쓰고 탈출하느냐. 아니면 여기서 순순히 포박당해 필립 공작의 선처를 바랄 것이냐.”
사람들의 표정이 굳어졌다.
두 가지 선택이라고? 기사들이 보기엔 오직 한 가지 결단만이 남았을 뿐이다.
“우리는 명예로운 기사다. 절대로 반란군 따위에게 고개를 숙이는 짓은 할 수 엇다.”
루멘의 우렁찬 음성에 기사들은 자신들의 가슴을 쿵쿵 두드리며 동조했다.
“이 목숨이 다하는 날까지 왕국에 충성한다.”
“위대한 왕실에 찬란한 영광이! 명예로운 미네르바 기사단에 축복이!”
바호크에서 빠져나가는 것으로 합의를 본 공주와 일행들은 머리를 맞댄 채 방법을 의논했다.
“구석구석 기사들이 숨어 있소. 구형의 갑옷으로 변장하고 있지만 날랜 움직임으로 복 때, 케르베로스 기사단이 확실한 것 같소.”
창밖을 살핀 루멘이 침중한 음성으로 말했다.
“포위당했군. 역시 바호크 공국이 필립 공작과 계략을 꾸미고 있다는 말이 사실인 것 같군요.”
디스는 실의에 빠진 사람처럼 의자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온몸에 힘이 하나도 없었다.
토드란 외무대신과 치열한 설전을 주고받을 때만 해도 바호크 공국을 끌어들여 빼앗긴 수도와 조국을 되찾을 수 있을 것이란 희망에 부풀어 있었다. 그런데 이제 그런 희망마저 꺾여 버린 것이다.
끝도 알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 절망감이 엄습해 왔다.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병규가 루멘에게 물었다.
무시만 당하던 그와 호랭이는 최근 보여준 놀라운 일처리 능력 덕분에 기사들 사이에서의 입지가 상당히 높아졌다. 지금처럼 작전회의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이 많은 인원을 데리고 소리 없이 빠져나가는 것은 불가능하다. 정면 돌파. 한순간에 포위망을 흐트러뜨리고 국경선을 넘는다. 모두들 각오는 되어 있나?”
루멘의 말에 기사들은 저마다 주먹으로 가슴을 두드렸다.
우렁찬 함성은 없었지만 불굴의 투지만큼은 충분히 전달되었다.
“그건 그다지 좋지 않을 계획인 것 같다.”
호랭이가 혀를 차며 대화에 끼어들었다.
루멘의 얼굴이 한 겹 얼음이라도 두른 것처럼 차가워졌다.
이 백발 녀석. 사사건건 자신들의 행사를 걸고넘어진다.
아무리 한 번 도움을 받았다지만 간섭이 너무 심하다. 건들거리는 태도만큼이나 버르장머리없는 말투도 귀에 거슬린다.
“만약 쓸데없는 소릴 지껄인다면 당장 네놈의 목을 베어 버리겠다.”
기사는 다른 무엇보다 명예를 중시한다. 자존심에 상처를 입으면 먹이를 눈앞에 둔 맹수처럼 사나워진다. 하지만 루멘의 서슬퍼런 위협도 호랭이에겐 별 다른 영향을 주지 못했다.
“정면 돌파라는 생각은 좋아. 하지만 그 이후엔 어쩔 거지? 성밖에 말과 마차라도 준비해 두었나?”
바흐만 공왕이 레종 공주 일행을 잡아두려고 마음먹은 이상, 올 때 타고 왔던 말과 마차는 이미 치워졌을 것이다.
“..... 적의 것을 탈취한다.”
“어림없는 소지. 상대도 숙련된 기사다. 그런 자들이 과연 엉성하게 말을 뺏길까? 자고로 차후의 일 결정함에 있어 생각은 깊고, 행동을 신속하게 하는 것이 기본 수칙이다. 무작정 정면 돌파만 고집하는 건 어리석은 행동이지.”
“그렇다면 넌 좋은 방법이라도 있다는 건가?”
호랭이는 대답대신 병규를 비스름히 쳐다보았다.
“이미 보냈어요.”
“좋아.”
호랭이는 흡족한 표정으로 웃었다.
요즘 들어 병규의 재빠른 행동에 가슴까지 뻥 뚫어지는 것 같았다.
병규와 호랭이가 주고받은 암호와 같은 대화에 기사들의 얼굴은 어리둥절해졌다. 대체 뭘 보냈다는 것인가.
“으음. 그들이...... .”
번득 떠오르는 생각에 주위를 둘러본 루멘은 몇 사람이 실내에서 사라진 것을 알게 되었다.
험악한 인상에 기괴한 분위기를 연출하던 사내들.
그들이 몽땅 사라지고 없는 것이다. 더불어 샤바라는 소년의 모습 또한 보이지 않았다.
‘대체 언제.’
실내엔 상급의 기사가 무려 48명이나 된다. 그런데 한꺼번에 몇 사람이 사라졌는데도, 아무도 그 기척을 느끼지 못한 것이다.
‘대체 그들의 정체가 뭐란 말인가.’
그는 과거 몇 차례인가 어세신들과 싸운 경험이 있었다. 당시 그를 습격해온 어세신들은 상당히 뛰어난 실력자들이었지만, 그래도 지금 실내에서 사라진 자들과는 비교조차 되지 않았다.
특히 장발의 귀여운 소년은 뻔히 눈앞에 있는데도 기척을 전혀 느낄 수 없는 놀라운 실력의 소유자였다.
루멘이 샤바의 정체에 대해 골몰할 때다.
병규의 그림자에서 더듬이 같은 것 삐죽 솟았다.
샤바의 그림자이었다.
허깨비처럼 그림자 속에서 기어나온 샤바는 놀라는 기사들의 표정에도 아랑곳없이 병규의 귓가에 다정하게 속삭였다.
“부하들이 준비 다 했다고 전해 달래요. 샤바.”
“좋아. 잘했다.”
샤바의 머리를 쓰다듬은 병규는 차분하게 문가로 걸음을 옮겼다. 슥 하고 문고리를 잡은 그가 뒤쪽을 돌아보았다.
“모두 준비 되셨습니까?”
어리둥절해하던 기사들의 두 눈에 번뜩 생기가 일었다.
스르릉. 스르릉.
검집에서 흘러나오는 검이 금속성 울음을 토했다.
“자. 그럼 갑시다.”
호쾌한 외침과 함께 병규는 벌컥 방문을 열었다.
방문 밖에는 예상대로 삼십여 명의 흑기사들이 대기하고 있었다. 막 실내로 진입하려던 그들은 갑자기 문이 열리며 푸른색 갑옷을 입은 기사들이 쏟아져 나오자 당황해 어쩔 줄을 몰라 했다.
몰래 습격을 하려다 오히려 뒤통수를 맞은 격이다.
흑기사들은 급히 태세를 정비하고 반격을 도모했지만, 초반의 기세 싸움에서 몰린 대가는 너무도 컸다. 게다가 기사들의 선두를 달리는 어린 청년의 공격은 감당이 안 될 정도로 막강했다.
삽시간에 십여 명의 흑기사가 바닥을 굴렀다. 나머지 이십의 흑기사가 오십에 가까운 청기사들을 막기엔 역부족이었다. 애초에 실력의 차가 어느 정도 있는데다 포위망을 뚫으려는 미네르바 기사단의 필사적인 마음가짐에 비해 흑기사들의 정신상태는 상대적으로 무딜 수밖에 없었다.
“다른 놈들이 몰려오기 전에 어서!”
병규는 샤바를 앞장세운 채, 흑기사들을 무차별로 쓰러뜨리며 앞으로 전진했다.
기사들은 레종을 몇 겹으로 호위하고 그 뒤를 따랐다.
“저 녀석. 제법이잖아.”
기사단장 루멘은 병규를 보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문을 열자마자 뛰어나간 그 가공할 스피드. 흑기사들을 때려눕히던 신비한 무술. 설마 낸손으로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실력자가 있으리라곤 상상도 못했다.
그것도 가장 빈약해 보이던 자가 말이다.
하지만 그는 방금 전 봤던 병규의 실력이 극도로 힘을 자제한 것임을 알지 못했다.
“어디로 갈지 정해졌소?”
디스가 숨을 헐떡이며 병규에게 물었다.
지금 이곳 주변에는 두터운 포위망이 구축되어 있다. 이곳에서 빠져나가려면 일대 격전은 불가피한 상황. 그런 혼란 속에서 과연 활로를 뚫을 수 있을까 걱정이었다.
적의 포위망 속으로 더 깊숙이 파고들자는 말과 같았다.
:가 보면 압니다.“
병규는 뒤도 돌아보지 않은 채 다급히 말했다. 솔직히 그도 아는 바가 없었다. 이일은 전적으로 사신들에 맡긴 바, 지금은 샤바의 말만 믿고 무작정 돌진할 뿐이다.
별관에 나서자 잘 정돈된 정원이 보였다. 색색의 꽃들이 아름답게 만개한 정원에는 아이러니하게도 시퍼런 검을 든 흑기사들이 사나운 기세를 품으며 대기하고 있었다.
“멈추시오.”
기친 인상의 중년사내가 우렁찬 목소리로 일행의 앞을 가로막았다.
눈에 익은 얼굴. 초소에서부터 이곳 성까지 안내한 케르베로스 제삼기사단장 파먼이었다.
“이 무슨 소란이요!”
파먼이 큰 목소리로 항의했다.
“우리는 그대들을 외국의 귀빈으로 정성을 다해 대우했소. 헌데 이것이 그 대가요? 다짜고짜 기물을 파괴하고 사람을 다치게 하다니. 정당한 핑계가 없다면 혹독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오.”
“흥. 어차피 사로잡을 생각이었잖아. 오히려 우리가 날뛰어 주니 잘됐다는 심정이겠지. 잡소리 그만하고 덤벼.”
호랭이의 이죽거림에 파먼은 두 눈에 잠시 기광이 스쳤다. 공주 일파를 사로잡으라는 명령은 극히 비밀스럽게 내려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실을 별관에 갇혀 있던 이들이 어떻게 알게 된 것일까.
“귀가 밝으신 손님들이군. 모든 걸 알았다니 귀찮게 말싸움을 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
“그래. 차라리 그게 편하지.”
“하하. 자신이 넘치는 것 같군. 하지만 과연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까?”
껄껄 웃은 파먼이 슬쩍 물러나자 그의 등 뒤에 숨어 있던 두 사람이 일행을 향해 완드를 향했다.
검은 로브, 빛을 번쩍이는 완드.
“조심해! 마법사다.”
루멘이 소리쳤다. 그 순간 휘익 하고 흐릿한 그림자가 질풍처럼 앞으로 향했다.
병규였다.
마법사들을 제지하기 위해 나선 것이다.
하지만 그는 마법사들을 코앞에 두고 생각지도 못한 저항을 받았다.
눈앞이 번쩍 하더니 날카로운 검광이 미간을 쪼개왔다. 마법사들을 처리하려다간 어김없이 머리통이 반으로 갈릴 판이다.
병규는 어쩔 수 없이 요수의 발톱으로 검을 막았다.
치아앙!
검과 요수의 발톱이 부딪치자 불꽃이 사방으로 튀었다.
‘자르지 못했다.’
처음으로 사람에게 자신의 공격이 막혔다.
단순히 쇠로 된 검이라면 결코 요수의 발톱을 막을 수 엇다. 하지만 방금 전 부딪친 검은 푸르스름한 기운으로 뒤덮여 있었다.
그 기운이 요수의 발톱이 내뿜는 날카로운 요기를 상쇄시킨 것이다.
병규는 한층 무거워진 눈으로 자신을 막은 적장에게 시선을 주었다.
‘뭐였지?’
순간적으로 검을 빼내어 병규의 공격을 막은 파먼은 가슴이 서늘해졌다. 뭔가가 휘릭 날아들었다. 그가 검을 빼들고 휘두른 것은 거의 무의식적인 대응이었다.
실제로 병규의 움직임을 제대로 본 것은 아니었다.
파먼은 병규를 살폈다.
평범한 얼굴. 관심 있게 살피지 않는다면 금방 잊어먹고 말 정도로 평이한 얼굴이다. 그런데 이런 놀라운 실력을 감추고 있었다니.
‘처음 보는 자다. 아이린 왕국에는 소드마스터가 오직 셋 뿐인 줄 알았는데, 이런 자가 또 있었을 줄이야. 비밀병기라도 되는 것인가.’
파먼은 오늘 일이 생각보다 어려울 것이라는 것을 직감했다. 물론 그의 실력은 케르베로스 기사단 내에서도 발군이다. 하지만 아직 마스터 급 인물을 감당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번엔 요행히 놈의 선제공격을 막았다. 아마도 한 번 정도는 더 막을 수 있을 것이다.
그 정도면 충분하다. 마법사들이 마법을 준비하는 데 걸리는 시간은 말이다.
하지만 그의 예상은 어김없이 빗나갔다.
삐걱! 팍!
둔탁한 소음과 함께 막 주문의 막바지에 다다른 마법사들이 혼 없는 허수아비처럼 앞으로 쓰러졌다. 그들의 등 뒤,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소년이 짱돌을 손에 든 채 배시시 웃고 있었다.
“샤바.”
병규는 환호성을 질렀다. 대체 어느 틈에 적들 속에 파고들었는지. 덕분에 마법사에 대한 걱정은 덜었다. 하지만 흑기사들의 공세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수풀이 들썩하더니 십여 명의 궁수들이 몸을 일으켰다.
“쏴라!”
파먼의 외침에 궁수들은 일제히 활을 당겼다. 아무런 광택도 없는 검은 화살이 매서운 기세로 쏘아졌다.
지금 궁을 쏜 것은 다름 아닌 흑기사들. 화살 또한 평범한 것은 아니다. 특수하게 제련된 강철 화살로 상급 기사들을 잡을 수 있도록 특별히 고안된 물건이었다.
“못된 물건이로고.”
호랭이가 나섰다.
두 팔을 어지럽게 휘두르더니, 왼손으로는 땅을, 오른손으로는 하늘을 가리켰다.
“대지여. 그 자애로운 온정으로 내 앞을 가릴지니. 바람이여. 자유로운 날개가 되어 창공을 부비나니.”
드드득.
화단이 솟구쳐 오르고,
휘아아앙.
회오리바람이 용솟음쳤다.
먹이를 노리는 매처럼 날아들던 화살들은 회오리바람에 고개가 틀어지더니, 끝내 호랭이가 일으켜 세운 흙담에 모조리 처박혔다.
“...... 엄청난 마법이군.”
파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호랭이는 화살이 쏘아지고 난 다음에야 술법을 전개했다. 그런데 놀랍게도 고작 10미르 거리에서 쏘아진 화살이 채 표적에 닿기도 전에 뛰어난 술법으로 화살을 모조리 거둬낸 것이다.
파먼이 아는 한, 이렇게 빠른 속도로 마법을 구현할 수 있는 마법사는 이드라센 대륙 내에 존재하지 않았다.
“에잇. 이렇게 된 이상. 전력을 기울여 놈들을 막는다.”
파먼이 먼저 검을 빼어들며 앞으로 나서자 흑기사들이 고함을 지르며 뒤를 따랐다.
미네르바 기사단의 단장 루멘이 지지 않고 용맹하게 나섰다.
“긍지조차 잃은 흑기사들에게 정의의 철퇴를!”
“오오!”
“탐욕스런 바호크의 종자들을 무찌르자.”
병규와 호랭이의 선전에 힘을 얻은 청기사들이 용기백배하여 뛰쳐나갔다.
치칭.
쩡.
콰직.
두 기사단이 부딪히자 꽃이 만발한 화단을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과연 미네르바 기사단.’
루멘 백작과 두어 차례 검을 나눈 파먼은 속으로 감탄했다. 상당한 나이에도 불구하고 루멘 백작의 검에는 용솟음치는 힘이 있었다. 뛰어난 기교는 어떠한가. 그 또한 케르베로스 기사단의 단장 직을 맡고 있지만 감히 루멘에게는 한 수 뒤진다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런 사정은 다른 부하들 역시 마찬가지였다.
숫자상으로는 월등히 많은 인원임에도 불구하고 전혀 밀리는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한 두 명씩 생기는 사상자는 모두 케르베로스 기사단이었다.
‘정령에게 축복받은 천년 왕국의 기사단은 과연 다르군. 이것이 천년을 이어온 기사단의 저력인가.’
하지만 시간은 그들 편이다.
곧 소란을 들은 병사들이 몰려들 것이다. 숫자에는 장사가 없다. 결국 공주를 위시한 미네르바 기사단은 무릎 꿇고 굴복하게 될 것이다.
등 뒤에서 비명소리가 산발적으로 터져 나온 것은 바로 그때였다.
“끄아악.”
“컥.”
“흐악!”
듣기에도 끔찍한 비명소리와 함께 흑기사들의 일각이 무너져 내렸다.
“무슨?”
놀란 파먼은 루멘을 상대하고 있다는 것조차 잊은 채 고개를 돌렸다. 무시하기엔 비명소리가 소름 끼치도록 자극적이었다.
하지만 루멘과 같은 고수 앞에서 잠시 잠깐 한눈을 판 것은 치명적인 실수였다.
섬전같이 날아든 루멘의 검술에 파먼은 허벅지에 치명상을 입었다. 때마침 수하들이 그의 앞을 가로막지 않았다면 목숨을 부지하기도 힘들었을 것이다.
“흥. 아무래도 파먼 경은 내가 눈에도 안 차는 모양이오:”
루멘은 결투 중에 딴 짓을 한 파먼의 행동을 냉랭한 음성에 조소를 섞어 말했다.
“흐흐. 과연 미네르바 기사단의 단장이ㅛ.”
흐르는 피를 막을 생각도 않은 채, 파먼을 뒤를 돌아보았다..
좀 전에 들린 비명. 이상하게도 그의 신경을 자극하는 무언가가 있었다.
마침 흑기사들을 덮친 흉수 하나가 다음 표적의 목을 날리고 있었다.
파학!
은빛 섬광이 날아들자 쩍 벌어진 기사의 목구멍에서 붉은 피가 폭포수처럼 쏟아졌다. 뒤로 뻣뻣하게 굳은 채 쓰러지는 흑기사의 목엔 손받만한 길이의 단도가 을씨년스럽게 박혀 있었다.
“파하하. 케르베로스 기사단도 별거 아니구나. 고작 이 정도 실력이라니. 덤벼라. 낸 단도가 네놈들의 피를 원한다.”
나이프의 대소를 터트리자, 붕대를 그물처럼 휘날리던 바인딩이 음험하게 소리쳤다.
“흐흐. 시끄럽구나. 난쟁아. 빌빌거리는 기사 몇 놈 잡았다고 너무 으스대는 거 아니냐?‘
“헹. 네놈이야말로 꼴랑 붕대로 몇 놈 낚지도 못하고 게으름이구나. 나에게 수작 걸 시간이 있으면 눈 먼 흑기사 놈들이나 잡아들여!”
“망할 붕대인간!”
서로를 노려보며 툭탁거리는 나이프와 바인딩이었지만, 그 와중에도 흑기사들을 쓰러뜨리는 것만은 잊지 않았다. 오히려 경쟁이라도 하듯 손을 쓰다보니 그들의 발 밑은 흑기사들의 시신으로 가득 찼다.
툭탁거리면서도 열심히 몸을 움직이고 있는 나이프와 바인딩과 달리, 카리오스는 묵묵히 자신의 일에 열중했다.
한 번에 한 명.
그가 에고소드 ‘혼돈’을 휘두를 때마다 정확히 한 명의 기사 가슴에서 피가 쏟아졌다.
무서울 정도로 냉정하고 정확한 공격이었다.
반면, 크리티컬은 조용히, 그리고 확실하게 표적을 처리하는 타입이었다.
그는 잔잔한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산책 나온 노인처럼 한가롭게 움직였지만, 멋모르고 달려든 흑기사들 모두 싸늘한 고혼 신세로 만들어 주었다.
사신들 중 가장 실적이 없는 것은 사일런스였다.
공포스런 얼굴의 그는 오로지 마법사들을 봉쇄하는 일에만 집중했다. 일정 고악ㄴ의 소리를 완벽하게 차단할 수 있는 그의 농력 앞에서 마법사들은 고양이 앞의 쥐 신세와 같았다.
“더디서 저런 자들이...... .”
파먼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사신들이 나선 지 얼마 되지도 않았건만, 기괴한 기술에 죽어버린 흑기사의 수가 30명을 훌쩍 넘어서고 있었다.
만약 사신들이 평범한 어세신들이라면 결코 기사들의 상대가 될 수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들은 특수한 능력을 가진 능력자. 그것도 드래곤이 직접 만든 키메라인 것이다.
신체능력의 우수성은 일반 사람들과 비교할 바가 못 되었고, 신기하다 못해 기괴하기까지 한 그들의 기술은 정통 검술을 익힌 기사들을 당황하게 하기에 충분했다.
“빨리 이쪽으로!”
사신들로 인해 흑기사들의 진형 한족이 흐트러지자 병규는 목청을 돋우며 혼전 중인 미네르바의 기사들을 불러모았다. 과연 미네르바 기사단의 명성은 헛것이 아닌 듯, 피가 튀고 비명이 난무하는 상황에서도 귀신같이 그의 목소리를 듣고 달려왔다.
“공주님ㅇ르 보호하라. 전력으로 이곳을 빠져나간다.”
기사들을 종용한 루멘은 가장 후위에 서서 흑기사들의 추격을 막았다. 놀라운 무력으로 흑기사들의 진형을 흔들어 놓은 사신들이 그와 함께 배후를 지켰다.
“이쪽으로. 샤바.”
샤바가 안내하는 곳으로 무작정 달렸다.
흑기사들이 고함을 치며 쫓아오고, 때때로 중무장한 병사들이 앞을 가로막았다. 그러나 선두의 병규와 후위의 루멘이 그때그때 기지를 발휘해, 위기를 극복했다.
그렇게 왕성을 가로질러 최종적으로 도착한 곳은 마구간이었다. 그곳에서 일행은 자신들의 말과 마차를 찾을 수 있었다.
“그 짧은 시간동안 마구간을 찾아내다니. 정말 대단하오.”
루멘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사실 운이 하늘에 닿은 사람이 아니라면 절대로 불가능한 일이다. 다만 냄새를 기가 막히게 잘 맡는 샤바라는 충실한 부하가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일행은 급히 말을 타고 달렸다.
뒤늦게 쫓아온 흑기사들이 앞을 가로막았지만, 바인딩이 붕대를 채찍처럼 휘두르자 소스라치게 놀라며 길에서 비켜서고 말았다. 그 틈으로 일행은 유유히 성을 빠져나갔다.
“포른성에 성문이 없는 것이 정말이지 다행이군.”
훤하게 뚫린 성문을 지나치며 루멘을 통쾌한 웃음을 터트렸다.
만약 이곳에 성문이 존재했다면 한바탕 곤욕을 치렀을 것이다.
“서두르죠. 국경의 병력이 움직이기라도 하면 일이 어려워집니다.”
디스가 진지한 음성으로 말했다.
그는 바호크 공국의 배신으로 인한 충격에서 다소 벗어난 듯 보였다.
하루 종일 말을 달린 일행은 다음 날 정오 무렵, 국경 근방에 다다를 수 있었다.
다행히 바호크 군에선 별 다른 움직임이 느껴지지 않았다.
“의외로군. 필시 마법사를 통해 병력을 움직였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어쩌면 우리가 곧장 이곳으로 달려올 줄 예상 못한 건지도 모르죠.”
“그럴 수도 있겠군. 하지만 또 무슨 꿍꿍이가 숨어 있는지도 모르네. 조심해서 나쁠 건 없겠지.”
포른성에서의 일 이후로 루멘을 비롯한 미네르바 기사들은 많이 조심스러워졌다.
바호크의 왕성을 탈출하여 이곳까지 도달한 기사는 모두 37명. 피네스에게 2명. 포른성에서 11명의 기사를 잃었다. 슬픈 일이긴 하지만 살벌했던 격전을 떠올리면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사망자가 적은 편이다. 사망자가 적은 반면 의외로 부상자의 수가 상당히 많아서 남은 기사들의 절반 가까운 인원이 몸을 가누는 데 불편해하고 있었다.
막약 호랭이가 도술로 부상자들을 치료하지 않았다면 적어도 열 명 정도는 더 목숨을 잃었을 것이다.
으슥한 곳에 자리를 잡은 일행은 사방으로 정찰을 보내 국경선 근방의 정보를 모았다.
오후 늦은 시각, 정찰을 나갔던 한 기사가 놀랄 만한 소식을 전해왔다.
“버지니아 백작의 추적대가 국경선 근방에 포진하고 있단 말인가?”
루멘의 물음에 기사는 고개를 깊숙이 숙였다.
“우리를 기다리고 있는 듯한 인상을 받았습니다.”
“허어. 어쩐지 바호크 공국의 병사들이 별 다른 움직임을 보이지 않아 이상하게 생각했더니 이런 함정이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군.”
도망가기에 급급해 국경선을 타 넘었다면 곧바로 버지니아 백작의 추적대에 사로잡히는 신세가 되었을 것이다.
심각한 상황이다. 궁지에 궁지까지 몰린 것이다.
이대로 남의 나라인 바호크에 머무를 수도 없고, 그렇다고 추적대가 기다리는 국경선 너머로 갈 수도 없다. 멀리 우회하여 추적대의 눈을 잠시 피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되면 필시 바흐만 대공이 손을 쓸 것이다.
한마디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할 최악의 상황.
“혹, 좋은 생각이라도 있소?”
근심 가득한 얼굴로 루멘이 디스에게 물었다. 이번 일로 그는 이 젊은 청년의 머리가 비상하다는 사실을 속으로 인정하게 되었다.
디스는 침중한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물었다.
그로서도 난감하긴 마찬가지. 그러나 방법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었다.
“한 가지 ...... 저열한 수가 있긴 합니다.”
한참이 지난 후 디스가 어렵사리 입을 열었다.
루멘이 반색을 하며 재촉했다.
“어떤 방법이오. 어서 말해보시오.”
“꼬리를...... 잘라버리는 겁니다.”
“꼬리를 잘라낸다?”
루멘의 반문에 디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오우거를 만난 리저드맨이 꼬리를 떼고 달아나듯, 버지니아 백작의 주의를 끌어줄 미끼가 필요합니다.”
“설마......경은 동료를 버리자는 말인가!”
“마음은 아프지만......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이대로는 공주님이 저 추악한 공작 놈의 손으로 떨어지게 됩니다.”
피를 토하는 듯한 디스의 말에 루멘은 입을 닫았다.
잠시 후, 모종의 결단을 내린 듯 그는 무거운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내가 가겠다. 버지니아 놈의 이목을 끌려면 나 정도는 돼야 할 테지.”
“안 됩니다.”
디스는 머리를 좌우로 세차게 저었다.
“백작님께선 미네르바 기사단의 지휘자입니다. 백작님이 없으면 감히 누가 미네르바 기사단을 지휘할 nt 있단 말입니까. 후일 필립 공작에게 복수할 때를 위해서라도 지금은 참으셔야 합니다.”
“하지만 내가 안 가면 대체 누가 간단 말이오. 그럴만한 사람이 또 누가......설마.”
루멘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설마 그들을 말하는 것은 아니겠지?”
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루멘의 분위기가 한층 험악해졌다.
“그럴 수는 없다. 그들은 공주님의 소중한 친우다.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흔쾌히 힘을 보태준 의리있는 자들이란 말이다. 그런 소중한 사람을 어찌 그렇게 내칠 수 있단 말인가.”
루멘은 진정으로 분노했다.
처음에는 그도 그들을 싫어했다.
초라한 모습에 꼴불견이 행태. 건방진 행동과 말투까지.
하나에서 열까지 마음에 드는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지금은 그러한 생각이 많이 달라졌다. 뛰어난 무위와 목숨을 아끼지 않는 용맹. 그리고 치밀한 결단력까지.
그는 한 사람의 무인으로서 진심으로 병규와 그 일행에게 탄복했다.
그런데 이제와 그들을 버리자고?
기사의 긍지와 자존심이 용납지 않았다.
“냉정하게 생각하셔야 합니다. 지금은 정에 매달리기보다 후일을 도모하는 냉철함이 필요합니다. 진지하게 생각해 주십시오. 안약 누군가를 버려야 한다면 그 대상으로 누가 좋을지. 그들은 용병입니다. 피의 서약으로 맺어진 기사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릅니다. 언제고 더 많은 돈을 주는 자가 나타나면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우리에게서 등을 돌릴 겁니다.”
“...... 설마 경은 처음부터 이렇게 할 목적으로 그들을 끌어들인 것은 아니겠지?”
디스는 고개를 돌리며 루멘의 부리부리한 시선을 외면했다.
“공주님과 왕실의 안녕을 위해서라면 전 악마에게 영혼이라도 팔 수 있습니다.”
정찰을 나갔다. 병규와 호랭이는 복귀하자마자 디스의 호출을 받았다.
“기다리고 있었소.”
굳은 얼굴로 그들을 맞은 디스는 정찰의 성과에 대해 건성으로 묻고는 이내 본론을 꺼냈다.
“국경선 너머 괄ㄴ산맥을 정찰해 달란 말입니까. 그것도 지금 당장?”
“그렇소. 곧 국경을 통과해 아이린 왕국으로 돌아갈 생각이요, 그러다 보니 고란산맥 쪽의 동태가 영 신경이 쓰이는구려.”
“하지만 좀 전에 기사들을 그쪽으로 보내 정찰을 시키지 않았는가. 그런데 굳이 또 우리가 가야할 이유가 있을까?‘
호랭이는 강한 불만을 나타냈다.
신선인 그는 본능적으로 좋지 않은 기운을 느꼈다. 다만 지금 느껴지는 불쾌한 기분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라 이처럼 짜증 섞인 불만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하지만 디스는 지독할 정도로 냉정하고 치밀한 자였다.
“분명 기사들을 정찰 보낸 적이 있소. 하지만 그들의 실력으로는 국경 너머 깊숙한 곳까지 침투하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오. 알다시피 이 일엔 전문가의 도움이 꼭 필요하오.”
“...... 어디까지 정찰하면 되죠?”
“가능한 깊숙이. 될 수 있으면 고란산맥 너머 자란평야까지 살펴봐 줬으면 하네.”
“알았어요. 그렇게 하죠.”
조금 이상한 점이 있긴 하지만 병규는 디스의 부탁을 들어주기로 했다. 고란산맥 너머까지 은밀히 수색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자신들뿐이라는 말을 옳았다. 자부심이 아니라 실제로 그들 일행은 그러한 일에 제격이었다.
그렇게 병규는 쉴 틈도 없이 곧바로 다시 정찰 임무에 나섰다. 두 사람이 움직이자 당연하다는 듯이 샤바와 사신들이 따라붙었다.
‘행운이 함께하길.’
떠나는 그들을 루멘과 기사들이 경건한 자세로 배웅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