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법과 같은 압도적인 무력
“그런데 어디로 갈 거죠?”
“우선은 바호크 공국으로 갈 생각이에요.”
레종의 대답에 병규는 의아한 생각이 들었다.
왜 하필 다른 나라로까지 피신을 해야 하는지 의문이 들었기 때문이다.
반란으로 수도가 함락되었다 하더라도 아직 왕을 배신하지 않은 귀족들이 다수 있을 것이다. 그런 귀족들의 세력을 모아 후일을 도모하는 것이 옳은 일이 아닐까?
그의 의문을 눈치 챈 디스가 고개를 돌렸다.
“국내에선 아무리 애를 써도 공작의 상대가 되지 못하오.”
“왜죠?”
“이미 전체 귀족들 가운데 칠할 이상이 필립 공작에게 포섭되었기 때문이지요.”
“음.”
병규의 입에서 침음성이 흘러나왔다.
단순히 반란이라고 생각하기엔 이에 동조한 귀족의 수가 너무 많았다. 이것은 오직 한 가지 사살을 의미한다.
필립 공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오늘의 반란을 획책한 것이다.
“무엇보다 어느 귀족이 필립 공작 측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요. 간신히 우리편으로 끌어들인 귀족이 어쩌면 공작의 첩자일지도 모르기 때문이오.”
“그래도 확신이 드는 귀족도 있을 게 아닙니까?”
“확실히 믿을 수 있는 인물들이 몇 있긴 하오. 하지만 모두들 세력이 극히 약하오. 트라우마의 성주인 글로리 후작을 빼면 모두들 약소 귀족들에게 불과한 형편이니 말이오.”
“우선 트라우마로 가는 게 좋지 않을까요?”
트라우마 성은 대륙에서 일이 위를 다투는 거대한 성이다. 오랜 세월 몬스터와의 격전을 버텨낸 만큼 방어력만큼은 발군이다. 게다가 붉은대지를 옆에 끼고 있다는 것도 이때만큼은 커다란 이점이 될 수 있다. 몬스터들이 침략군의 방패 역할을 해 줄 것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디스의 생각은 달랐다.
“트라우마로 가면 우선 당장은 괜찮을지 모르오. 그러나 결국엔 침략군들에 의해 고립되고 말 테지. 트라우마는 천혜의 방어기지이기도 하지만 한 번 빠지면 결코 빠져나올 수 없는 늪이기도 하오.”
“음.”
디스의 설명에 병규는 고개를 끄덕이며 수긍했다.
시간이 지날수록 수도를 접수한 반란군으 기반이 단단해진다. 유일한 방책은 하루라도 빨리 필립 모리스 공작의 반란을 제압하는 것. 트라우마 성에서 방어전을 펼치는 것은 최악의 선택이 될 것이다.
‘대체 필립 공작은 어떻게 귀족들을 설득할 수 있었을까.“
아무리 사전준비가 철저했다곤 해도 전체 귀족의 칠할 이상이 반란에 가담했다는 것은 언뜻 이해하기 힘들다. 반란에 실패할 경우 가담자의 일가족은 처형되고, 모든 재산이 압류된다. 그리고 살아남은 자손들도 노예나 그 이상의 비참한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런 위험을 감수하고 반란에 가담한다는 것은 전 재산을 가지고 도박을 하는 것만큼이나 엄청난 재산인 것이다.
왕이 역사에 남을 만한 폭군이 아닌 다음에야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왕이 폭군인 걸까?’
트라우마의 성주인 글로리 후작을 보면 꼭 그런 것 같지도 않았다. 공주인 레종도 폭군인 아버지 밑에서 자란 사람치곤 지나치게 도덕적이다.
결국 다른 이유가 있다는 것인데, 그것이 무엇인지 도무지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시간이 없소. 추적자들이 뒤를 쫓아오고 있으니 서둘러야 하오.”
굳은 얼굴의 루멘이 일행을 재촉했다. 병규를 보는 그의 얼굴엔 불만이 가득했다.
“이곳에서 새로운 인물이 합류했습니다. 숫자는 대략 아홉에서 열.”
땅바닥의 흔적을 살피던 어세신이 고개를 위로 올리며 말했다.
“합류라.”
버지니아 백작은 길레 기른 콧수엽을 아래로 잡아당겨 쓸어 내리며 생각에 잠겼다. 바람이 불어오자 숲이 파도처럼 출렁였다.
보기 드물게 깊은 숲이다.
아이린 왕국과 바호크 공국의 국경선이기 때문인지 사람의 손이 전혀 닿지 않은 원시림이 잘 보전되어 있었다. 덕분에 도망가는 공주 일파나 쫓는 자신들이나 이동에 큰 불편을 너꼈다.
“고작 열명이라. 지원군치고는 지독하게 초라하군.”
버지니아 백작을 가볍게 실소했다.
절로 비웃음이 흘러나왓다.
고고한 천년 왕국의 공주가 허둥지둥 숲으로 도망가다니. 게다가 그녀를 수행하고 있는 인원은 공주의 호위치고는 초라하기 짝이 없었다.
원래 공주를 호위하고 있는 미네르바 기사단은 수는 대략 50여명. 이곳에서 10여 명이 합류했다 해도 고작 60여명이다.
기사만 무려 200명이나 되는 추적대에 비하면 초라한 인원이 아닐 수 엇다.
반란에 성공한 필립 공작의 입장에서 보자면 왕가의 마지막 후손인 레종 공주는 영 입맛이 껄끄러운 존재가 아닐 수 없었다.
공주가 살아 있으면 언제고 후환이 될 것이다. 아니 반드시 귀찮은 f일이 발생한다. 예나 지금이나 왕가에 헛된 충성을 바치는 멍청이들은 사방에 넘쳐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필립 공작은 다소 파격적인 규모로 추적대를 파견한 것이다.
“애초 계획대로였다면 왕성에서 왕과 함께 처리되었어야 할 계집인 것을.”
못마땅한지 버지니아 백작은 혀을 끌끌 찼다.
공주가 몰래 성을 빠져나갔다는 급보를 접했을 때엔 이미 반란계획을 뒤로 미를 수 없는 상태까지 진행이 된 상활이었다. 그래서 이런 문제가 생길 줄 뻔히 예상하고서도 하는 수 없이 일을 벌인 것이다.
반란군이 왕성을 점령하던 순간, 왕의 목은 떨어졌다. 하지만 미네르바 기사단은 총력을 다해 반란군의 포위망을 뚫었다.
미네르바 기사단에게 내려진 왕의 마지막 명령은 복귀하는 공주의 보호. 그리고 세력을 모아 반란군을 몰아내고 다시 왕가의 혈통을 이어나가는 것. 반대로 추적대의 지휘자인 버지니아 백작에겐 공주를 곱게 모셔오라는 명령이 내려졌다.
‘곱게 모셔오라니. 필립 공작도 참 이해할 수 없는 사람이군.’
백작의 생각은 달랐다.
공주를 위시한 불순분자들은 말하자면 상한 이빨과 같은 존재다. 눈에 보이지 않게 서서히 썩어 들어가다 언젠가는 턱 전체를 병들게 만들 것이다. 그래서 그는 공주를 생포하지 않고 죽일 생각이다.
‘쉬운 일이지. 너무 쉬운 일이야.’
버지니아 백작은 충분히 자신이 있었다.
기사 이백에 어세신 열, 귀하다는 마법사만도 무려 다섯이다.
마법사 중에서 무력 5서클 유저의 막중한 전략까지 포함되어 있었다. 고작 육십밖에 안 되는 저항군을 처리하는 병력치고는 지나칠 정도로 규모가 크다.
“어센신의 보고로는 이곳을 지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합니다. 서둘러 쫓으면 곧 놈들을 잡을 수 있을 겁니다.
유난히 눈동자가 작은 부관이 백작에서 흥분된 음성으로 말했다.
“굳이 서두를 필요는 없네. 필요한 조치는 이미 취해놨으니 말일세.”
버지니아 백작은 여유를 부렸다.
“조치라면...... .”
“20여 명의 선발대를 이미 보냈지.”
“그 정도 규모로는 너무 부족하지 않을까요? 공주를 호위하고 있는 미네르바 기사단의 실력은...... . 특히나 단장인 루멘은 소드익스퍼트 최상급의 무인입니다.”
부관의 걱정에 버지니아 백작은 짧게 말했다.
“피네스도 같이 보냈네.”
“오!”
부관이 짧게 감탄사를 흘렸다.
피네스는 5서클 마법사다.
공주의 도치를 돕고 있는 기사들은 고작 50여명. 그중 마법사는 포함되어 있지 않았다.
마법사의 지원이 없는 기사들은 한마디로 실속 없는 쭉정이에 불과하다고 말할 수 있다.
아무리 왕정기사단인 미네르바라 할지라도 5서클의 마법사가 지원하는 기사들을 항대로 고전할 수 밖에 없을 것이다. 그만큼 실력 있는 마법사의 지원은 기사단의 전력을 몇 배나 상승시키는 효과가 있는 것이다.
무론 상황이 이렇게 될 수 있었던 것은, 궁정마법사인 필라이트에게 거짓정보를 흘린 필립 공작의 선견지명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만약 대마법사인 필라이트가 그들에게 있었다면 200의 기사들 로서도 결코 승리를 장담할 수 없었을 것이다.
“선발대의 저력이라면 충분히 그들의 발목을 잡을 수 있을 것이다.”
버지니아 백작은 태연하게 중얼거렸다.
병규 일행이 포함된 레종과 기사들은 고란산맥의 중턱을 넘고 있었다.
“음?”
뒤쪽에서 느긋하게 말을 달리고 있던 병규의 귀가 슬쩍 움직였
다.
전방에서 이상한 기척이 느껴졌다.
병규는 말을 채찍질하며 선두의 기사단장 루멘을 찾았다.
“무슨 일인가?”
루멘이 퉁명스럽게 물었다.
그는 여전히 족보도 없는 병규 일행이 합류한 것에 대한 불만을
감추지 않고 있었다.
병규는 뻔히 그리 불쾌함을 읽었음에도 모른 척 입을 열었다.
“숨어 있는 자들이 있습니다.”
루멘의 얼굴이 살짝 변했다.
그는 손을 들어 일행의 진군속도를 늦춘 뒤 기사들로 하여금 주
위를 수색하게 했다. 병규는 고개를 흔들며 앞을 손가락질했다.
“여기가 아닙니다. 전방 500미르 지점입니다.”
“500미르? 그대는 마법사인가?”
500미르 전방의 기척을 감지해 내다니. 평범한 사람으로서는
불가능한 일이다.
“아닙니다. 하지만 누군가가 숲이 끝나는 지점에 매복해 있는
것만은 틀림없습니다.“
루멘의 입가에 비릿한 미소가 서렸다.
“마법사도 아닌데 500미르 밖의 매복을 미리 안다? 흐흐. 아무
래도 그대는 점술사인 모양이군. 나중에 시간이 되면 내 운세도
한 번 점쳐 주게.“
배배 꼬인 말투로 보아하니 병규의 경고를 대수롭지 않게 생각
하는 듯 보였다. 하지만 루멘은 귀족주의에 물들어 잇을 망정, 경
고를 무시할 정도로 경솔한 인물은 아니었다.
“벤자민. 알센. 정찰해라.”
루멘의 호명에 두 명의 기사가 앞으로 달려 나갔다.
“그대의 점이 신묘(?)하길 빌겠다.”
정찰을 보낸 두 기사는 주위를 둘러보고는 머리 위로 손을 흔들
었다.
아무 이상이 없다는 표시였다.
“흐흐. 아무래도 그대의 점은 신통력이 부족한 것 같소. 하하하.”
루멘의 비아냥거림에도 병규는 표정을 풀지 않았다. 오히려 급
한 목소리로 외쳤다.
“빨리 두 사람을 불러들여요.”
“뭐?”
루멘의 반응이 늦자 병규는 즉시 말 위에서 뛰어내렸다. 두 손
으로 입을 모으며 두 기사에게 큰 목소리로 소리쳤다.
“빨리 돌아와요. 빨리”
안타깝게도 정찰을 나간 두 기사는 반응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병규를 손가락질하며 저희들끼리 시시덕거리기만 했다.
“제길.”
병규는 땅을 박차며 달려 나갔다.
얄밉지만 허무하게 죽게 할 수는 없었다.
그 순간, 허공에서 불덩이가 검은 연기를 그리며 두 기사 사이
로 떨어졌다.
콰쾅!
섬광과 함께 비명이 터졌다.
허공으로 솟은 핏덩이가 우수수 우박처람 떨어졌다.
병규는 말을 잃었다. 눈앞에서 사람을 잃었다.
위험한 상황을 충분히 인지 했음에도, 끝내 구해 내지 못했다.
“마, 마법사!”
루멘의 얼굴이 굳어 버렸다. 삽시간에 그의 수하 둘을 앗아간
불덩이. 그것은 마법사가 원거리에서 발사한 마법이었다.
그때, 두두두 하는 소음과 함께 20여 기의 가사들이 으슥한 고
목 사이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프리트 기사단!”
붉은 갑옷을 걸친 기사들은 본 루멘이 심각한 목소리로 중얼거
렸다.
피처럼 붉은 갑옷.
왼쪽 가슴에 그려진 화염의 정영왕.
필립 공작가의 이프리트 기사단임을 나타내는 문양이었다.
“저 위에도 한 사람이 있어요.”
병규가 허공을 가리켰다. 놀랍게도 구름이 둥둥 떠 있는 하늘엔
검은 로브를 걸친 사람 하나가 깃털처럼 표표히 내려오고 있었다.
두 기사를 화염으로 날려버린 마법사였다.
“헛. 저자는.”
루멘은 허공에서 내려오고 있는 마법사를 보자마자 눈에 놀라
움의 빛을 띠었다. 안면이 있는 마법사다.
“피네스.”
필립 공작가의 마법사로 왕국에서 두 번째로 높은 서클의 소유
자였다.
“전속전진! 단숨에 이곳을 벗어난다.”
피네스를 확인한 루멘은 마음이 급해졌다.
기사들의 보호를 받는 마법사는 여간 성가신 존재가 아닐 수 없
다. 게다가 이곳은 좁은 산길. 범위 마법이라도 날아온다면 피할
방법이 전무했다.
루멘의 호령과 함께 말고 마차가 전력으로 돌진했다.
말발굽에 돌이 튀고, 마차가 심하게 출렁였다.
“길을 막아라.”
피네스가 거만한 음성으로 명령을 내렸다.
붉은 갑옷을 입은 스무 명의 기사들이 좁은 산길을 3열종대로
늘어섰다.
좁은 산길. 세 명의 기사가 능히 백 명의 기사를 상대할 수 있는
지형. 레종 공주 쪽에서 보자면 답답한 노릇이 아닐 수 없었다. 뻔
히 붉은 기사들 뒤에서 공격 주문을 외우고 있는 마법사가 보이는
데,놈을 처리할 방법이 없는 것이다.
“어둠 속의 찬연함. 빛보다 정열적인 불꽃의 춤!”
주문을 외운 피네스가 손가락으로 마차를 가리켰다.
그의 목표는 마차, 단숨에 공주를 제거할 생각인 것이다.
“춤추는 지옥의 불꽃. 플레어(Falre)!"
피네스를 중심으로 웅장한 기운이 폭풍처럼 주위를 휩쓸더니,
마차 앞의 땅이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곧 도마뱅의 혓바닥처럼 붉은 화염이 하늘을 삼켜버릴 듯한 기
세로 솟구쳤다.
플레어(Flare).
무려 5서클의 마법이다. 반경 십여 미터를 초토화시키는 불길
의 춤으로 그 강력한 위력은 사람의 몸뚱이쯤은 순식간에 한줌의
재로 만들 정도의 막대한 위력을 자랑했다.
히히힝!
마차를 끌던 말들이 공포에 떨며 술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지
금까지 전속력으로 달려오던 관성 때문에 마차는 화염 속으로 질
질 끌려 들어가고 있었다.
“막아!”
“공주님을 보호하라.”
기사들의 입에서 안타까운 고함이 터졌지만 방법이 없었다. 이
미 마차는 넘실거리는 불꽃이 집어삼키 듯 덮치고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표홀한 움직임으로 달리는 마차 위로 뛰어 올
랐다.
호랭이였다.
눈부신 백발을 찰량이며 마차 위로 뛰어오르는 그는 득의양양
한 표정의 피테스를 향해 싸늘한 호통을 날렸다.
“이깟 허접한 술법으로 감히 어디서 잘난 척이냐! 꺼져라!”
호랭이가 손바받으로 마차 지붕을 퉁 하고 가볍게 내리치자 모
든 것을 집어삼킬 듯한 기세로 맹렬히 타오르던 불꽃이 퍽! 하고
순신간에 사그라져 버렸다.
“뭣!”
피네스의 두 눈이 튀어나올 것처럼 부릅떠졌다.
화염의 불꽃 ‘플레어’는 무려 5서클의 마법이다. 그런데 백발
의 청년이 단순히 손으로 내려치는 간단한 동작으로 없애버린 것
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대 사건이었다.
“마법사였군.”
기사단장 루멘이 탄성을 질렀다.
결정적인 순간 구제주처럼 마법사가 나타난 것이다.
지금까지 백발의 청년이 마법사일 거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
했다. 마법사치고는 차분하지도 않았고, 나이도 그리 많지 않았
다. 그런데 그런 그가 방금 피네스의 마법을 가볍게 눌러 버렸다.
마법사의 마법을 누를 수 있는 것은 그보다 상위의 마법사뿐이
다. 결국 백발의 청년은 최소 5서클 마스터 이상의 마법사라는 소
리가 되는 것이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재의 출연. 그러나 루멘은 마냥 기뻐하고
있지만은 않았다. 당장 급한 것은 이프리트 기사단의 포위망을 벗
어나는 것이다.
“전진 전진. 놈들을 모두 도륙하라!”
왕정기사들은 용기백배하여 말을 달렸다.
이쪽에 훌륭한 마법사가 존재한다는 게 확인된 이상 피네스는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전력을 다해 상대방을 제거하고
포위망을 돌파한다.
하지만 기사들은 복수를 원하는지 몰라도 호랭이는 살육을 원
치 않았다.
마차 위에 올라선 백발의 호랭이가 좁은 산길을 가로박은 이프
리트 기사단을 향해 알 수 없는 웅얼거림을 흘렸다. 그것은 맹수
의 목울림고 비숫한 으르렁거림이었다.
“?”
“저놈이 또 무슨 짓을 하는 거지?”
이프리트 기사단은 불안한 눈으로 호랭이의 행동을 주시했다.
믿었던 피네스가 간단하게 제앞당했다. 이제 남은 방법은 죽을
각오로 미네르바 기사단의 앞을 가로막는 것뿐. 그런데 원수와 같
은 백발의 청년이 돌연 두 눈을 번뜩이며 위압적인 기운을 풍기는
것이다.
이유를 알 수는 없었지만 불안한 마음이 드는 것만은 어쩔 수
없었다. 과연 또 어떤 신비한 힘이 튀어나올 것인가.
하지만 잠시의 시간이 흘렀음에도 호랭이에게선 그 어떤 마법
도 발현되지 않았다. 이프리스 기사단이 고개를 갸웃거리 즈음,
생각지도 못한 변화가 생겼다.
그 변화의 주체는 바로 그들이 타고 있는 말이었다.
사실 호랭이의 목울림은 기사들에겐 그다지 효과가 없었다.도
력을 끌어올린 것도 아니고 기이한 주술을 읊은 것도 아니다. 그저 산하를 호령하는 산신의 기운을 담아 조용히,그리고 나직하게
울부짖은 것에 불과했다.
당연히 기사들은 별 다른 변화를 느끼지 못했다. 하지만 그들이
타고 있는 말들은 달랐다.
맹수의 독기 어린 울음.
정상적인 초식동물이라면 도망가기 위해 사력을 다하는 것이
당연한 일이 아닌가.
히히힝.
말들이 일제히 앞발을 쳐들며 중구난방으로 날뛰기 시작했다.
“엇!”
“말들이 왜 갑자기.”
“워워.”
붉은 기사들은 다황하며 말들을 진정시키려 노력했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결국 길을 막고 섰던 말들이 볼링공에 맞은 핀처럼
사방으로 뛰었고, 공주 일행은 너무도 손쉽게 그 사이를 유유히
빠져나갈 수 있었다.
“이 무슨 해괘한 사태란 말인가.”
간신히 말들을 진정시킨 이프리트의 기사들은 허망한 표정이
되었다. 말이 주인의 명을 무시하고 달려 나가다니. 그것도 모든
말이 한꺼번에. 상상도 해보지 못한 일이었다.
그러나 이들은 자부심 강한 기사였다. 비록 한 번의 실패를 맛
보긴 했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임무를 포기하고 뒤돌아 설 수는 없
었다.
더 큰 공을 세워 실추된 명예를 회복해야 했다.
“추격한다.”
붉은 기사들이 사태를 정리하고 막 도망자들을 쫓으려 할 때였
다. 한 사람이 그들의 앞을 막아섰다.
병규였다.
“미친놈.”
붉은 기사들의 입가에 비아냥거림이 묻은 조소가 흘러나왔다.
다수의 기사들을 상대로 혼자 남다니. 죽으려고 작정한 놈이 아
닌가. 마침 백발의 요술사도 보이지 않았다. 두려울 것이 하등 없
었다.
“놈을 밝고 가라!”
누군가의 외침에 기사들은 일제히 말을 달렸다. 굳이 일일이 상
대할 필요성도 느끼지 못했다. 이대로 말발굽으로 뭉개고 갈 생가
인 것이다.
씩.
병규의 입가에 가는 미소가 그려졌다.
“혼자 남았는데 괜찮을까요?”
레종이 마차 밖으로 얼굴을 내밀며 걱정스레 물었다. 마차 지붕
에 책상다리를 하고 앉아있던 호랭이가 하품을 하며 대답했다.
“괜찮아. 괜찮아. 가뜩이나 심심해하던 녀석이니 오히려 잘된
셈이지. 걱정할 필요 하나도 없다.“
호랭이는 상대가 공주라 해도 말을 높이지 않았다.
그는 신선이다. 인간들이 만들어 놓은 신분이라는 것에는 전혀
구애하지 않았다.
레종 역시 이 백발의 생소한 청년의 반말에 이상하게 반발이 생
기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묘한 친근감이 생겼다.
어디선가 이미 본 것 같은 느낌.
비록 모습이 변했지만, 그녀는 본능적으로 호랭이임을 직감하
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비교적 순탄하게 호랭이를 받아들이는 그녀와 달리 기
사들은 흥분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감히 용병 나부랭이가.”
용병에 불과한 호랭이가 감히 공주에게 반말을 찍찍 날리다니.
결코 용납할 수 없는 일이다.
기사들 중 일부가 호랭이의 반말을 듣자마자 당장 노기를 터트
리며 검을 뽑아들었다. 느닷없는 행동이라 디스가 말릴 틈도 없었
다.
하품을 하고 있던 호랭이의 눈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사들을 향했다. 안 정황하게는 기사들의 말을 슬쩍 쳐다본 것이었다.
멈칫!
맹수의 기세를 느낀 말들의 발이 순간 멈칫했다. 달리던 말이 갑자기 멈춰 섰으니 그 위에 탄 기사들이 어찌 되었을까. 작은 반동이지만 막 검을 빼들고 있던 기사들ㅇ겐 치명적이었다. 휙하며 기사들이 말 머리를 넘어 날더니 곧 땅바닥에 처박혔다.
갑자기 선두의 기사들이 말에서 굴러 떨어지자 뒤따라오던 기사들은 크게 당황하며 급히 말 머리를 돌렸다. 자칫 방심했다간 동료를 밟을 뻔했다.
“워워.”
“뭐야. 무슨 일이야.”
호랭이의 눈빛 공격 때문에 말에서 떨어진 기사는 무려 다섯이나 되었다. 시골 목동들도 아니고 숙련된 기사들이 일제히 말 위에서 떨어졌으니, 다른 기사들이 놀라는 것도 무리가 아니었다.
말엣 떨어진 기사들은 얼굴을 벌겋게 붉혔다. 말에서 떨어지다니 보통 창피한 일이 아니었다. 호랭이가 원수같이 미웠지만 감히 더는 덤빌 생각을 못해싿.
“흘흘흘. 가소로운 녀석들 같으니.”
호랭이는 아예 마차 위에 드러누웠다.
마차 위에 누운 채 하늘을 올려다보니 그렇게 좋은 수 없엇다.
‘날씨 참 좋구나. 쩝. 이럴 때는 녀석의 어깨에서 자는 게 좋았는데.’
몸이 커져서 꼭 좋은 일만 있는 것은 아니었다. 때때로 게으름을 피울 때면 병규의 어깨가 그리워지곤 했다.
하지만 당장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추적들의 발을 효율적으로 잡아놓을 수 있는 것은 그 누구보다 병규가 제격이기 때문이다.
‘녀석이 손을 쓰면 적어도 죽는 자는 없겠지.’
사실 병규가 추적자들을 막아서게 된 것은 호랭이가 시킨 일이었다. 기사들끼리 접촉하면 어쩔 수 없이 사상자가 발생한다. 신선인 호랭이 입장에서는 영 껄끄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병규를 남겨 놓았다.
녀석의 실력이라면 굳이 피를 보지 않고도 깔끔하게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이다.
굳이 호랭이가 그를 따라가지 않은 것은, 혹시나 또 마법사와 같은 존재가 마차 안의 공주를 노릴까 걱정이 되어서였다.
‘뭐, 녀석이라면 웬만큼 다쳐서는 꿈쩍도 안 할 테니 걱정할 필요 없겠지.’
물만 있으면 설사 팔다리가 잘려 나가도 재생할 아메바 같은 녀석이다. 오히려 그런 괴물 같은 녀석과 상대하게 된 기사들일 불쌍하게 생각될 지경이다.
“에고, 불편해라. 녀석이 빨리 돌아와야 할 텐데.”
팔베개를 하고 누운 호랭이는 끙끙거리며 앓는 소리를 냈다. 덜커덩거리는 마차 위는 생각보다 불편했다. 따뜻하고 폭신한 병규의 배가 그렇게 그리울 수 없었다.
병규는 두 손을 축 늘어뜨린 채 기사들을 기다렸다.
붉은 갑옷을 입은 이프리트의 기사들이 일제히 검을 빼들었다. 단숨에 뭉개버릴 생각이었다.
“죽어라.”
선두에 선 기사가 치켜 든 검에 시린 검광이 뿜어져 나왔다.
병규는 멍하니 선 채 그 모습을 바라보기만 했다. 검이 목젖을 찔러오는 데도 졸린 듯한 눈은 당최 또렷해지지 않았다.
쉭!
날카로운 소성과 함께 검광이 그의 목젖을 찌르며 들어왔다.
‘엇?’
회심의 미소를 짓던 기사의 얼굴이 일순간 놀람으로 일그러졌다. 분명 놈의 목젖을 찔렀다. 그런데 손 끝에 아무런 느낌도 전해지지 않았다.
놀란 기사는 급히 말을 멈춰 세우려 했다. 하지만 고삐를 잡아채려던 그의 팔은 이미 정상이 아니었다.
우득 득 투득.
관절이 빠지는 소음과 함께, 팔꿈치를 이어 어깨관절가지 일순간에 차레로 무너지는 도미노처럼 우르르 빠져 버리는 것이다.
“으아악.”
온몸이 갈기갈기 찢어지는 듯한 극심한 통증에 기사는 고개를 뒤로 젖치며 미친듯이 비명을 질렀다.
그때서야 보엿다.
그의 팔 관절을 수수깡처럼 뽑으며 팽이처럼 허공으로 몸을 띄우고 있는 소년의 모습이.
질풍처럼 날아올라 돌풍처럼 휘돌던 소년이 산들바람처럼 가볍게 발을 뻗엇다.
퍽!
슬쩍 내뻗은 발길질이 등을 치고 들어왔다. 드득 하는 기성과 함께 말안장에서 튀어오른 기사의 몸뚱이가 허공으로 붕 떠올랐다.
무서운 바람소리와 함께 쏜살같이 던져진 기사의 몸뚱이는 무려 10여 미터 밖의 나무등치에 퍽 하고 날아가 처박혔다. 다행이라면 발길질에 격중되었을 때, 이미 의식을 잃었다는 것이었다. 나무에 처박힌 고통은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너무 세군.’
병규는 속을 혀를 찼다. 그저 슬쩍 내지른 발길질에 건장하나 가사가 종이뭉치처럼 날아가 버렸다.
‘......오우거 피 때문인가.’
힘이 강해졌다는 것은 익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힘을 써보니 이것은 어렴풋이 느끼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막강하기 그지없는 괴력이 아닌가.
주체하지 못해 폭발한다고 할까.
만약 방금 기사의 등을 때릴 때, 두려운 마음에 힘을 줄이지 않았다면 그의 등짝은 생으로 쪼개졌을 것이고 병규는 공포스러운 광경을 제 눈으로 보게 되었을 것이다.
쉬익.
날카로운 기성이 병규를 휘몰아왔다.
모두 함해 둘. 하나는 목을, 다른 하나는 배꼽 아래를 노린다. 그래도 기사들이라 긍지는 잃지 않은 듯, 등 쉬를 노리지는 않았다.
갑작스럽게 날아든 공격이지만 병규는 당황하지 않았다. 잠시 딴생각ㅇㄹ 했지만 그의 귀는 정확하게 주위의 정황을 파악하고 있었다.
고개를 뒤로 젖혔다. 순간 새파란 검광이 코끝을 스쳤다.
동시에 병규는 두 다리를 모르며 몸을 팔랑개비처럼 회전시켰다.
츠츳!
배꼽 아래를 놀리고 날아든 검이 나풀거리는 바짓단을 베었다.
“헉!”
“무슨!”
헛손질을 한 기사 두 명이 경악성을 터트렸다.
순식간에 동료가 당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복수가 먼저다.
다행히 놈은 허공에 떠 있었다. 사람에게 날개가 없는 이상 움직임이 자연스럽지 못함ㅇ느 당연한 일.
설사 플라이 마법을 사용한 마법사라 할지라도 지금 순간ㅇ느 피할 수 없을 것이다.
두 기사는 회심의 미소를 지으며 검을 날렸다. 촉망 중에도 각기 다른 급소를 노린 것은 거듭된 훈련이 낳은 훌륭한 결과였다.
그러나 절 대 피할 수 없을 것 같은 상황에서 소년이 보인 대응은 실로 가공스럽기 그지없엇다.
허공에서의 움직임에 한계가 있을 것이란 기사들의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놀라운 탄력으로 몸을 두 번이나 뒤틀며, 급소를 노리고 날린 두 자루의 검을 쉽게 피해낸 것이다.
눈으로 보고도 믿을 수 없는 일이다.
그 화려하면서도 유려한 동작에 두 기사는 눈앞이 아득해지는 것만 같았다.
한순간 몸을 휘저은 병규가 병아리를 노리는 독수리처럼 활짝 열려진 그들의 가슴으로 파고들었다.
병규는 잠시 고민했다.
너무나 커 보이는 이들의 빈틈. 관절을 뺄 것인가 아니면 힘을 밀어붙일 것인가.
병규는 관절기를 선택했다.
오우거에게서 얻어낸 힘은 아직 통제하기가 힘들었다.
두드득 드득.
뼈마디가 어긋나는 소름 끼치는 소리와 함께 경악에 찬 표정의 두 기사의 양어깨가 볼썽사납게 늘어뜨려졌다.
비명을 질러 대는 기사들의 어깨를 살짝 밟으며 그 반동을 병규는 다시 허공으로 솟았다.
휘이잉!
시원스럽게 바람을 가른 그가 다음 표적을 노렸다.
“당황하지 말라. 적은 하나다.”
“정렬을 흐트러트리지 마라.”
순식간에 세 명의 동료들이 나동그라졌음에도 나머지 기사들은 동요하지 않았다. 오히려 태세를 정비하며 진형을 활처럼 길게 유지했다. 선두의 다섯이 창을 꺼내들고, 후위의 다섯이 석궁을 꺼내들었다.
나머지 기사들은 말을 좌울 움직이며 병규의 시야를 혼란스럽게 하기 위해 애썼다. 그리고 그런 소란스러움을 틈타 뒤편에서 피네스가 은밀히 마나를 모았다.
조직적인 움직임이 예사롭지 않았다.
‘이제야 제대로 할 마음이 든 모양이군.’
병규는 긴장감을 높였다.
“쳐라.”
큰 호령에 주위를 휘젓던 기사들이 일제히 말을 타고 달려들었다. 하지만 이것은 미기에 불과하다.
피핑!
사납게 밀어닥치는 기사들 사이로 예리한 화살이 날아들었다. 부옇게 피어오른 먼지 때문에 화살이 제대로 보이지 않았다.
부산스럽게 움직였던 게 바로 이런 상황을 연출하기 위한 작업이었던 것이다. 물론 갑작스럽게 기사들이 달려든 것도 표적의 시선을 끌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병규는 앞이 보이지 않아도 주위의 기척을 예민하게 잡아챌 수 있는 능력이 있었다.
팔랑팔랑.
귀가 팔락이며 경고를 보냈다.
‘요수의 발톱!’
양손을 좌우로 펼치며 힘을 쏟았다. 손가락 끝에서 시퍼런 요기가 용솟음쳤다. 힘 조절을 했기 때문인지 손톱 끝에서 불과 한 치 정도만 나왔다.
너무도 짧은 길이지만 화살들을 처리하기엔 충분했다.
키킹 킹.
매섭게 날아들던 화살들은 가볍게 휘두른 왼손에 의해 모조리 절단이 나 버렸다. 화살은 그렇게 처리했다. 이제 거칠게 달려드는 기사들을 처리할 차례다.
창을 뻗으며 달려드는 기사들의 기세는 범람하는 홍수처럼 흉악하기 그지없었다. 전력으로 달리는 말 위에서 내리꽂히는 장창은 숨이 턱턱 말힐 정도의 박력을 구사했다.
휙.
이번엔 병규의 오른손이 펄쳐졌다. 역시나 손끝에서 미세하게 솟아나온 요수의 발톱. 제법 요사스런 기운을 뿜어내고 있었지만, 한참 돌진 중인 기사들은 그런 변화를 눈치채지 못했다.
두두두.
기사들의 장창이 병규의 몸을 꿰뚫었다.
아니 그렇게 보인 것뿐이다.
가벼운 미풍과 함께 병규의 몸이 아지랑이처럼 사라진 것이다. 쏟아지는 장창의 공격을 탄성이 절로 나올 만큼 화려한 동작으로 피해 낸 병규는, 양손을 정밀하게 움직이며 기사들이 탄 말 옆을 스치듯 지나갔다.
서거걱.
예리한 절삭음과 함께 말과 안장을 연결한 가죽끈이 모조리 잘려져 나갔다. 출렁이는 말 등엣 안장이 벌렁 벗겨지자 그 위에 탄 기사들은 당연히 떨어져 땅으로 꼬꾸라졌다.
‘어이쿠’하고 떨어진 기사의 배를 밟고 병규가 재주를 넘으며 스쳐 지나갔다.
드득.
“아아악. 내 발.”
가각.
“컥.”
순식간에 두 명의 기사가 전투불능이 되었다.
“이놈!”
분노한 기사들이 눈에 불을 키며 병규에게 달려들었다. 맹수처럼 날뛰는 기사들 사이를 병규는 종황무진으로 날뛰었다.
혼전의 상황.
병규는 다분히 이런 상황을 기다렸다. 마력을 모으고 있는 마법사를 견제하기 위해서였다.
“이런. 그렇게 한데 뭉쳐 있으면 마법을 사용할 수 없잖아.”
주문을 암송하고 있던 피네스의 얼굴이 일순간 난감함으로 일그러졌다.
기사들과 표적이 정신없이 얽혀 있는데다, 말들의 난동으로 먼지마저 자욱하게 일어 도저히 적아의 식별이 불가능했다. 게다가 놈의 움직임은 또 얼마나 재빠른지, 성난 기사들이 폭풍처럼 몰려드는 난장판 속을 미꾸라지처럼 자유자재로 움직이는 것이 아닌가.
파이어 복 같은 마법은 엄두도 낼 수 없고, 보조 마법 또한 누구에게 걸어줘야 할 지 막막하기만 했다.
하지만 피네스는 제법 현명했다. 불확실한 상황에서도 가장 효율적인 공격마법을 찾아내었다.
“매직 미사일!”
찬란하게 빛나는 마법의 미사일은 유려한 빛의 꼬리를 흔들며 기사들 사이의 목표를 좇았다.
매직 미사일은 1서클의 공격 마법에 불과하다. 저 서클의 마법인 만큼 그 위력은 파이어 볼 따위는 상위 마법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약하다.
하지만 그렇게 약한 위력에도 불구하고 많은 마법사들이 매직미사일을 즐겨 사용하는 이유는 특유의 절묘한 추적기능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매직 미사일도 상대를 잘못 만났다.
병규의 스피드는 상상 이상으로 빨랐다.
고작 화살 정도의 속도로는 도저히 따라잡을 수 없는 것이다.
정신없이 병규의 뒤를 쫓던 매직 미사일을 결국 표적을 잃고 근처에서 서성이던 말 머리에 날아가 박히고 말았다.
“허억.”
긴 울음과 말이 쓰러지자 그 위에 올라타고 잇던 기사가 경악성을 지른다. 급히 몸을 날려 땅바닥에 나동그라지는 망신은 면했지만. 소리 없이 다가온 그림자에게 두 무릎을 허용하고 말았다.
덜컥.
생소한 소음과 함께 그의 두 다리가 탈골되었다.
“크윽!”
척추를 찔러오는 예리한 통증에 기사는 이를 악물었다.
“이놈. 죽어라!”
발악적으로 검을 휘둘렀지만 그림자는 이미 다른 희생자를 향해 몸을 날린 지 오래였다.
“으으.”
피네스의 입에서 당확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도와주려고 날린 매직 미사일이 아군에게 적중되어 버린 것이다. 기사들의 따가운 눈길이 쏟아졌다.
‘제길.’
피네스는 속으로 욕을 주워 삼켰다.
‘뭔가 다른 마법이 없을까.’
저렇게 빠른 상대를 제압할 절묘한 마법.
다행스럽게도 몇 가지 떠오르는 것이 있었다.
메모라이즈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다소 시간이 걸리기는 하지만 발통시킬 수만 있다면 충분히 놈을 제압할 수 있을 것이다.
덜컥!
“윽.”
또 한 명의 희생자가 생겼다.
이번엔 발목이다. 덜렁거리는 한쪽 바로는 더 이상 날뛰지 못할 것이다.
병규가 훔쳐 배운 관절기는 정녕 오묘한 기술이다.
단순히 관절을 뽑는 것이 근골에 직접적인 영향을 끼쳐, 설사 관절을 끼워 맞출 수 있는 자가 떨어진 다리뼈를 맞춰 넣는다 할지라도 지금 당장 걸어 다닐 수는 없는 것이다.
발목을 뽑은 기사까지 도합 열한 명의 기사를 쓰러뜨렸다.
남은 것은 아홉.
그리고 마법사 하나.
두두득.
병규는 두 손을 가볍게 풀었다.
기사들의 표정이 심각해졌다.
쉽게 생각한 상대다.
다수의 기사들에게 혈혈단신으로 덤벼들었으니 코웃음이 나올 법도 했다. 하지만 그런 비웃음에도 불구하고 녀석은 순식간에 기사 열한 명을 쓰러뜨렸다. 그것도 검도 잡지 않은 맨손으로.
믿을 순 없지만 눈앞에 초라한 소년이 상급의 익스퍼트, 아니 그 이상으 실력자란 소리가 되는 것이다.
서로 눈빛을 교환하던 기사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동시에 말에서 내렸다. 더 이상 얕보는 마음이 없어졌다. 스릉하고 검을 빼드는 그들의 표정은 진중하기 짝이 없었다.
철컹철컹.
서로의 검을 합창하듯 부딪치더니 아홉이 한 몸이라도 되듯, 일시에 달려들었다.
그들의 손에 들린 검이 서슬 퍼런 살기를 사방으로 퍼트렸다.
‘단순해. 하지만 강하다.’
병규는 급급히 뒤로 물러섰다.
기사들의 검술은 움직임이 단순한 반면, 돌진력이 강했다.
압도적인 힘은 어설픈 기교를 단숨에 눌러버린다.
그들의 검술에서 느낄 수 있는 철학이었다.
싸한 긴장감이 전신에 감돌았다.
예전엔 싸움을 싫어했다. 아니 폭력 자체를 증오했다.
그는 언제나 약자였고, 언제나 당하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괴물들의 피로 그는 다시 태어났다. 이젠 자신의 것을 지킬 만한 힘이 생긴 것이다.
몸 구석구석, 감춰진 근육에서 짜릿한 쾌감이 느껴졌다.
목이 바짝 말랐다.
일전에 오우거의 피를 마셨을 때 보였던 그때의 갈증. 그리고 그때의 묘한 흥분이 그의 전신을 감쌋다.
‘위험한걸. 이러다 진짜로 괴상망측한 괴물이 되어 버리는 건 아니겠지.’
불안한 생각이 슬며시 고개를 쳐든다. 하지만 그런 불안에도 불구하고 그의 몸은 짜릿짜릿한 폭력을 원했다.
휙.
병규는 자신도 모르는 사이 득달같이 달려드는 기사들의 틈 속으로 파고들고 있었다. 그것은 본능과도 같은 반응이었다.
파파팍.
기다렸다는 듯이 검들이 날아들었다.
병규는 예의 화려하기 작이 없는 움직임으로 치명적인 공격들을 가볍게 피해 냈다.
기사들의 움직임은 말을 타고 있을 때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치밀했다. 하지만 아직 병규를 잡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무뎌.’
검을 맞대며 한꺼번에 달려들던 기세에 비해 기사들의 공격은 통일성도 정교한 맛도 찾아볼 수 없었다. 과거 프리즘 용병단이 보여주었던 조밀한 연합공격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조악하고 어설펐다.
사실 기사들은 철저하게 일대일 대응의 전투훈련을 받는다.
난전을 위한 전술훈련을 전혀 안 받은 것도 아니지만, 그들의 실력이 가장 잘 드러나는 것은 다수의 돌진력을 자랑하는 기마전과 일대일의 검투였다.
한마디로 여러 명이서 한 명을 공격하는 방식엔 전혀 익숙하지 않다는 소리다.
뚜둑.
“큭.”
눈썹이 유난히 짙은 기사의 입에서 신음이 흘러나왔다. 동시에 그의 오른손에 들려있던 검이 땅으로 떨어졌다. 비처럼 쏟아지는 기사들의 공격을 피하던 병규가 그의 오른 쪽 손목 관절을 뽑아 버린 것이다.
무서울 정도의 집중력이었다.
“할튼. 뒤로 물러서게.”
“크윽. 부탁한다.”
할튼이 물러난 자리를 딸기코의 기사가 대신했다.
한순간 사람이 교체되는 틈. 병규는 결코 놓치지 않았다.
발밑을 쓸어오는 검광을 피하며 휘리릭 팽이처럼 몸을 회전시켰다. 쭉 뻗은 그의 손은 딸기코의 어깨를 더듬어오고 있었다.
“헛!”
딸기코 기사의 입에서 헛바람이 터져 나왔다.
잠깐 눈을 깜빡이는 사이, 회오리처럼 휘도는 놈의 손이 어깨 관절을 빼다니. 상상조차 하지 못한 기예다.
위기의 순간, 기회만을 노리고 있던 피네스가 드디어 마법을 터트렸다.
“쉴드(Shield)!"
방패 모양의 반투명한 보호막이 딸기코 기사의 전면을 가렸다.
1서클의 방어 마법에 불과한 쉴드.
하지만 5서클린 그의 구현한 만큼 그 방어력은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로 놓았다. 게다가 그의 쉴드는 단순히 기사들을 보호하기 위해 펼친 것만은 아니다.
반탄력을 이용한 공격.
쇠로 만든 방패에 나무창을 던지면 오히려 그 반탄력을 창이 부서지고 만다. 격파에 실패하면 손을 다치게 되는 것과 같은 이치다.
그렇게 단단하기 이를 데 없는 쉴드에 손을 들이민 저놈은 어쩔 수 없이 치명적인 부상을 입고 말 것이다.
피네스는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그는 병규에 대해 몰라도 너무 몰랐다.
강력한 방어력을 개기 위해선 그보다 더한 힘으로 두드리면 된다. 병규는 여태 잠재워 두었던 오우거의 힘 깨웠다.
펑!
병규는 몸 속에서 뭔가가 터지는 듯한 소리를 들었다. 동시에 배꼽 아래에서 미증유의 힘이 활화산처럼 치솟았다.
그것은 억제할 수 없는 분노처럼 팔을 타고 손끝으로 뿜어졋다.
쩌겅!
쉴드가 부서졌다.
한순간이었다.
병규의 손끝이 쉴드의 투명한 막에 닿자마자 마치 살얼음이 깨지듯 쉴드가 부서졌다.
너무 허무하게 깨진 것이다.
좀 더 대단한 강도를 예상한 병규에게 이것은 예상치 못한 상황이었다. 부서진 쉴드 너머로 경악으로 일그러진 딸기코 기사의 얼굴이 보인다. 넘치는 힘을 주체 못한 그의 팔이 기사의 머리를 후려쳐 가고 있었다.
‘안 돼!’
병규는 급히 팔을 거두려 하였다. 하지만 미처 모든 힘을 회수하지 못하고 그만 손가락 끝이 기사의 어깨에 닿고 말았다.
“크악.”
부글부글 끓는 듯 한 가공할 힘에 딸기코는 폭풍에 휩쓸린 가랑잎처럼 튕겨져 날아가 버렸다.
지면을 맹렬히 구르는 그의 입에서 붉은 핏물이 울컥 쏟아져 나왔다. 부들부들 손발을 떠는 모습이 얼마나 큰 충격을 받았는지 짐작하게 했다.
단지 스친 것만으로 이 정도다.
제대로 맞았더라면 형체조차 찾아보기 힘들었을 것이다.
“마, 맙소사.”
피네스는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
맨손으로 5서클 마법사가 펼친 쉴드를 산산조각 내다니. 믿기 든, 안 믿고 싶지 않은 현실적인 사건이 자신의 눈앞에 펼쳐진 것이다.
“뭐, 뭐냐. 저 녀석은. 저 녀석의 정체가 대체 뭐냐고!”
기사들 사이를 누비는 병규를 손가락질하며 피네스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처럼 고함을 질렀다.
휘리리리리릭!
병규의 몸이 풍차처럼 휘돌았다.
기사들은 정말이지 사력을 다해 검을 휘둘렀다. 하지만 병규는 마치 꽃바람에 떠다니는 솜뭉치처럼 여유롭게 그 사이를 피해 다녔다.
드득.
기묘한 소음과 함께 이번에도 멀쩡한 기사의 팔다리 관절이 뽑혀 버렸다.
뒤를 잇는 진득한 신음소리.
그렇게 병규가 세네 번 기사들 사이를 휘돌았을 때, 더 이상 자신의 두발로 몸을 지탱하고 서 있을 수 있는 기사는 남아있지 않게 되었다.
“으윽!”
“다, 다리가.”
“어깨. 내 어깨.”
모두들 팔이나 다리 관절이 빠진 채 땅을 구르고 있었다. 그리고 신음소리로 점철된 중앙, 후줄근한 모습의 병규가 의연한 자태로 서 있었다.
단신으로 기사 20명을 압도하고,5서클 마법사를 무력화 시킨 자. 가히 공포라고 말할 만한 무위의 실력자였던 것이다.
“히힉.”
마법사인 피네스는 땅을 벌벌 기었다.
질풍.
아니 번개라고 할까.
그는 너무도 빨랐다.
불고 눈 몇 번 깜박이는 사이 용맹한 기사들이 모조리 땅바닥에 나동그라져 버린 것이다. 그야말로 순식간에 스무 명의 기사들이 전투불능 상태가 되어 버렸다.
그것은 진정 마법과 같았다.
“테, 텔레포트!”
피네스는 당황한 중에도 메모라이즈 된 마법으로 탈출을 시도 했다.
임무 실패로 문책을 받게 되겠지만 적어도 저 인간 같지도 않은 놈과 대면하는 것보다는 백배는 나을 것이다.
부웅!
마법 구현과 함께 그의 발밑에서 밝은 빛이 피어올랐다.
마법으로 도망가려는 그를 병규가 스산한 눈으로 노려 보았다.
그 차가운 눈빛에 피네스는 심장이 텅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병규와 대적하고 싶은 마음은 이미 말끔히 사라진 상태였다. 지금 그의 머릿속에 남은 것은 오직 공포뿐. 고양이를 만난 쥐처럼 그는 도망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었다.
“바, 발동!”
스슥.
마법사의 모습이 흐릿해지더니 곧 사라졌다.
병규는 그 모습을 가만 지켜보기만 했다. 도망가도록 방조한 것이다.
이제 이쪽에 뛰어난 실력자가 있다는 것이 추적자들에게도 알려질 것이다. 그렇다면 조금쯤은 더 신중해질 테지. 쓸데없이 선발대를 희생시키는 일도 없을 테고 말이다.
마법사가 사라진 곳을 잠시 지켜보던 병규는 앞서간 일행들을 뒤따르기 위해 몸을 날렸다.
병규의 생각대로 마법사는 허겁지겁 돌아가자마자 급히 공주일파를 돕는 강력한 조력자에 대해 침을 튀겨가며 보고했다. 하지만 추적대의 대장인 버지니아 백작은 낮게 코웃음만 쳤다.
“흥. 소드마스터 급의 무투가라고?”
백작의 음성은 그 어느 때보다 싸늘했다.
마스터 급의 무투가라니. 들어본 적도 없는 말이다.
무를 숭상하는 바호크 공국조차 아직 마스터 급에 이른 무투가가 없다. 하물며 이런 외진 산꼴짝에서 합류한 촌놈이라면야.
“필시 속임수나 마법무구의 도움을 받았을 것입니다.”
부관도 백작과 같은 생각이었다.
‘젠장. 나는 눈을 폼으로 달고 다니는 줄 아냐. 마법사인 내가 설마 그런 것도 구분 못할 것 같아?’
고리 타분한 두 지휘관의 대응에 피네스는 불만이 잔뜩 일었다.
하지만 끝내 이의를 재기하지는 못하고 속으로만 삼켰다.
이런 때엔 모르는 척 입을 다물고 있는 것이 좋다. 그것이 조금이라도 책임을 덜 지게 되는 방법이라는 것을 그는 너무도 잘 알고 있었다.
불만을 표하는 대신 그는 다른 방향으로 대화의 맥을 돌렸다.
“곧 바호크 공국의 국경선입니다. 서둘러 그들의 진로를 막아야 합니다.”
공주 일파가 국경을 넘으면 골치 아파진다.
하지만 심각해질 줄 알았던 백작은 오히려 교만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한껏 여유 있는 모습이라 피네스는 의아한 생각마저 들었다.
“놈들이 바호크 국경선에 들어간다고 해도 상관없다.”
“네?”
피네스의 반문에 백작은 영문 모를 미소만 지을 뿐이었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것 같긴 한데 말을 안 하니 궁금해 미칠 지경이었다.
“차라리 잘되었군. 느긋하게 양떼를 몰면 될 테니 말이야. 하지만 국경수비대에게 연락을 해두는 게 좋을 듯 하군. 잘하면 번거롭지 않게 우리 선에서 끝낼 수도 있을 테니 말이야.”
“돌아오지 않는군.”
루멘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바쁘게 달리는 와중에도 그는 이따금씩 뒤를 돌아보았다.
추적자들의 발을 묶기 위해 남은 병규가 혹시나 돌아오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하긴 돌아올 수 없겠지.’
스무 명이 넘는 기사단이다. 거기에 상급의 마법사까지.
그런 무리에게 단신으로 뛰어들다니. 자살행위나 마찬가지가 아닌가.
마약 그가 살아 돌아온다면 그것이야말로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아깝게 되었군. 생각보다 기백이 있는 자였는데.’
지금까지 병규를 무시했었던 것이 사실이다. 겉보기에 그는 전혀 쓸모가 없어 보였고, 또 무례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은 처음에 가졌던 그런 불쾌한 감정이 많이 희석된 상태였다.
공주를 위해 아낌없이 목숨을 내놓았다고 생각하니 장한 청년이란 생각마저 들었다.
“단장님.”
기사 한 명이 불렀다.
고개를 돌려보니 그를 부른 기사가 앞을 가리킨다.
저만치 한 사람이 서 있었다.
그런데 그의 모습이 어딘가 눈에 익었다.
“설마.”
기적이 일어났다.
병규.
기습한 기사들을 막기 위해 홀로 남았던 그가 죽지 않고 살아 돌아온 것이다.
“하하. 무사했군.”
루멘이 껄껄 웃음을 터트렸다. 기사들은 얼굴 가득 놀람을 감추지 못했다. 루멘이 그랬듯, 기사들도 그가 살아 돌아올 것이라는 생각은 추호도 못했던 것이다.
“여. 이제 왔냐?”
마차 위의 호랭이가 고개만 살짝 쳐드는 방탕한 자세로 병규의 귀환을 환영했다.
심드렁한 목소리. 그다지 반갑지 않은, 아니 살아 돌아온 게 당연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루멘은 다소 의외라고 생각했다. 동료가 죽다 살아 돌아왔는데, 저런 반응은 뭐란 말인가.
‘알 수 없는 자들이군.’
백발 청년의 신비한 마법과 동물들을 마음대로 부리는 재주 역시 처음 보는 신기한 것이다. 하지만 추적대를 막기 위해 홀로 남았던 병규의 귀환은 더더욱 놀라운 일이 아닐 수 없었다.
‘대체 이런 대단한 자들이 어디 숨어 있다 이제야 나타난 것일까.’
세상에 실력을 드러내지 않은 뛰어난 실력자들이 구름처럼 많다는 격언을 이번 일로 새삼 되새기게 된 루멘이었다.
“올라와.”
호랭이가 부르자 병규는 구름을 밟듯 가벼운 동작으로 마차 위에 올라갔다.
“않아.”
호랭이가 옆자리를 두드렸다. 병규는 털썩하고 앉자 호랭이가 비스름히 그의 무릎을 베고 누웠다. 병규는 자연스럽게 호랭이의 흰머리를 쓸었다.
가르릉 하며 호랭이가 기분 좋은 목울음을 흘렸다.
아무리 사람의 모습이 되었어도 호랭이는 아직 짐승의 버릇을 다 버리지 못했다.
“호랭이.”
병규가 가만히 그를 불렀다.
“왜?”
“우리 말예요. 이렇게 다른 세계의 일에 마음대로 간섭해도 되는 걸까요?”
조심스런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한쪽 눈을 슬그머니 떴다. 병규의 얼굴이 보였다. 처음 만났을 땐 아직 어린 소년 같더니 지금은 제법 어른 티가 흐른다.
‘하지만 그래봐야 아직 고2지.’
병규를 만나고 적지 않은 일들을 겪었다. 그래서 신선인 호랭이도 가끔 그의 나이를 잊곤 했다.
“불안하냐?”
“글쎄요.”
병규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불안한지 어떤지는 잘 모르겠어요. 하지만 왠지 다른 세계의 일들에 나서면 안 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요. 이계인인 내가 이곳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 수는 없는 거잖아요.”
“허. 쓸데없는 걱정이구나.”
호랭이가 다시 눈을 감으며 심드렁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왜 이계인이냐? 이 세계에 존재하고 이 세계에서 살아가고 있으니 넌 지금 이 세계의 사람인 것이다. 만약 이계의 사람이라 이곳의 일에 절대 간섭해서는 안 되는 법칙이 있다고 하자. 그때는 네가 이곳에 존재하는 것 자체가 이미 모순이 되는 것이다. 네가 숨쉬고, 걷고, 타인과 말하고, 웃고 우는 것. 그 모든 것이 이 세계에 영향을 미치는 행동이기 때문이지. 네 행동이 이계의 역사에 영향을 미칠까 두려우냐? 아서라. 모두 쓸데없는 기우야.”
호랭이의 긴 설명을 들은 병규는 혼란스러운지 가만 눈을 감았다. 잠시 후 입을 연 그의 얼굴엔 엷은 미소가 깔려 있었다.
“호랭이는 정말 신선 같지 않아요.”
“또 뭐가 이상한 게냐?”
“호랭이는 신선이잖아요. 보통 이런 경우엔 호랭이가 나서서 다른 세계의 역사에 영향을 미쳐서는 안 된다며 바득바득 말려야하는 거 아녜요?”
“파하. 하여간에 그놈의 미디어가 문제야. 어린 새싹들에게 쓸데없는 선입관이나 심어주고 말이야. 그저 신선이라면 길쭉한 곰방대에 한약 도포 입고 석기시대에나 씨부렸을 법한 장황한 대사를 나불거려야 한다고 생각하니. 원. 쯧쯧쯧.”
무에 불만인지 머리를 병규의 허벅지에 벅벅 비벼댄다.
“이럴 땐 그저 한 대 탁! 하고 피워야 하는 것인데. 제길.”
“하하하.”
호랭이의 너스레에 병규는 환하게 웃을 수 있었다. 자애로운 표정으로 그를 올려다보던 호랭이가 진중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잊지 말아라. 마음이 가장 중요하다는 것을. 죽인다가 아니라 구한다란 마음가짐이면 된다. 아까 네가 나서지 않았다면 분명 기사들끼리 충돌이 있었을 테지. 그러면 당연히 죽는 사람도 생겼을 것이다. 네가 막은 게야. 살인을 말이다. 긍지를 가져도 된다.”
“...... 네.”
호랭이와 병규가 그렇게 도란도란 대화를 주고 받을 때다. 검은 그림자 하나가 기척도 없이 마차 위로 올랐다.
샤바였다.
주인이 호랭이와 친근하게 놀고 있으니 샘이 난 것이다. 볼을 부풀리며 몰래 접근한 그는 병규의 그림자 아래 쪼그리고 앉았다.
“아닛!”
샤바가 병규에게 들러붙으니 마그네트는 대번에 쌍심지를 추켜세웠다.
“이 변태야. 당장 낭군님을 내놔!”
치마를 펄럭이며 화려한 이단 옆차기를 날렸다. 작은 덩치의 마그네트였지만 드래곤의 힘이 내재된 때문인지 스친 발길질에 마차가 뒤집힐 듯이 기우뚱거렸다.
“에? 난 아무 짓도 안 했다고.”
“변태. 저질. 아아~ 낭군님은 어쩌다 금단의 길에 발을 들이셨는지.”
폭력모드 다음엔 순정모드였다.
마그네트는 마차 한 구석에 푹 주저앉은 채 치마로 눈물을 닦아냈다. 물론 지극히 의도적인 행동이었다. 이러면 샤바가 위로해 주겠지라는 꿍꿍이가 숨어 있었다.
하지만 샤바는 병규의 등에 매달린 채 눈만 깜빡일 뿐이었다.
애초에 남 녀간의 일에는 전혀 무관심했던 것이다.
“낭군님. 너무해. 어떻게 이렇게 무정할 수가.”
마그네트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궁상맞게 펑펑 울었다. 이렇게 냉정한 사람에게 마음을 빼앗기다니. 자신의 처지가 너무 불쌍하고 서러웠다.
“이보. 위로해 줘야 하는 거 아냐?”
눈을 게슴츠레 뜨며 병규가 마그네트를 눈짓하자 샤바는 고개만 갸웃거렸다. 왜 그래야 하냐고 묻는 것 같았다.
“에효.”
병규는 하늘을 올려다보며 한숨을 쉬었다. 이놈의 커플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눈앞이 까마득했다.
“참 재미있게 사는 것 같아.”
창밖으로 고개를 쏙 내밀고 있던 레종이 반짝이는 눈으로 그들을 바라보았다.
그녀는 병규 일행이 부러웠다.
아니 그들만의 따뜻한 유대가 좋아 보였다.
툭탁거리고 소란스럽지만 인간적인 냄새가 물씬 풍기지 않은가.
그녀가 유독 병규에게 관심을 가지는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