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님의 목숨이 위험하오.
란테르 마을을 출발한 일행은 오후 늦게야 울창한 산림지대에 도착할 수 있었다.
“고란산맥으로 들어가는 길이네요.”
“산맥?”
“네. 아이린 오아국에서 가장 큰 산맥이에요. 이 산맥을 기준으로 아이린 왕국과 바호크 공국의 국경이선이 나뉘어진다고 지도에 씌어 있어요. 그리고...... 이곳에선 산적을 조심하라는데요.”
호랭이에게 고란산맥에 대해 설명한 병규는 울창한 산맥을 올려다보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차라리 산적이 나타나줬으면 좋겠네.”
수도인 유리스까지의 여행은 멀긴 했지만 힘들지는 않았다. 날씨는 더 없이 화창하고, 여정은 별 다른 사건 없이 순탄하기만 했다. 하지만 너무 순조롭다보니 편안하다 못해 지루함까지 느껴졌다. 여행하면 으레 맛보게 되는 가슴 두근거리는 모험이 쏙 빠진 것이다. 새로운 풍물을 보고 재미로 여행을 한다고? 그거야 한가로운 사람에겍나 해당하는 얘기고, 병규처럼 여행에 취미가 없는 사람에게 일 주일 이상이나 걸리는 긴 여로는 따분함과 지루함만이 동반될 뿐이다.
산에서는 해가 더 빨리 저문다. 오후가 조금 지난 것 같은데, 벌써 어둑어둑 어둠이 밀려왔다. 병규 일행은 넓은 공터에 일찌감치 자리를 폈다. 여태 조용히 따르기만 하던 사신들이, 장비를 챙겨들고 수풀이 우거진 숲으로 들어갔다. 잠시 후 그들은 땔감과 짐승 몇 마리를 잡아 가지고 왔다.
“좋아. 내가 맛있는 요리를 해주지.”
호랭이가 손을 비비며 앞으로 나섰다.
“지금까지 병규 녀석의 맛없는 음식을 먹느라 불만이 많았다.”
호랭이의 너스레에 병규는 황당해졌다.
“신선이 고기를 먹어도 되는 거예요?”
“왜 안 돼?”
오히려 그런 질문이 이상하다는 듯 한 반응이었다.
“호랭이는 신선이잖아요. 당연히 풀을 먹어야죠. 고기를 먹으면 그 뭐시냐. 독기인지 화기인지 하는 게 체내에 쌓이는 게 아녜요?”
“지금까지는 매일 먹었잖아. 그런데 왜 이제야 트집이야?”
“그건 그렇지만..... .”
전에는 호랭이가 작은 고양이만 했기 때문에 애완동물처럼 생각되었다. 그래서 고기를 먹든 풀을 먹든 크게 신경이 쓰이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 인간이 되니 신선이라는 호랭이의 신분이 유달리 신경 쓰였다.
“쯧쯧.”
혼란스러워하는 병규를 보고 호랭이는 나직이 혀를 찼다.
“나는 태생이 맹수다. 그런 내가 왜 풀을 먹는단 말이냐. 나 같은 맹수는 자고로 고기를 먹는 것이 가장 자연스러운 거야. 범이 풀을 뜯어먹는다면 그게 오히려 이상한 일이지.”
“...... .”
“네가 가지고 있는 고정관념들은 대부분이 사람의 관점에서 자연을 보았기 때문에 생기는 문제다. 뭐든 있는 그대로를 바라보면 이상할 것이 전혀 없지.”
언뜻 이해가 되는 말이기도 했다. 하지만 마냥 고개를 끄덕이기엔 호랭이의 태도가 너무 자유분방했다.
“설마, 다른 세계에 왔으니 들킬 염려가 없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그래도 신선씩이나 되는 호랭이인데.”
미심쩍은 표정으로 병규는 혼잣말을 중얼거렸다. 그때 잠깐 호랭이의 어깨가 흠칫 굳어졌지만, 다행히 그런 사실을 눈치 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거대한 솥 안에서 잘 다듬어진 고기와 야채들이 부글부글 끓었다. 맛있는 냄새가 주위에 진동했다. 뒤쪽에서 투덜거리던 병규는 벌써부터 코를 벌름거리며 입맛을 다셨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관망만 하고 있던 사신들도 시장기가 도는지 솥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었다.
“어디 잘 익었나 볼까.”
호랭이가 걸쭉해진 솥 안의 음식을 휘휘 저었다. 달짝지근한 냄새가 한층 짙어졌다.
‘햐아. 냄새 한번 죽이는걸.’
병규는 연신 침을 삼키며 감탄을 금치 못했다. 요리의 천재라며 호랭이가 호언장담할 때는 영 미덥지 않았는데 지금 코끝을 찔러오는 향기는 정말로 장난이 아니었다. 음식 냄새를 맡은 위장이 먹을 것ㄹ 달라며 벌써부터 아우성을 쳐댄다.
“샤바.”
병규 근처를 얼쩡거리며 샤바도 두 눈을 빤짝이며 솥 가까이로 슬금슬그 접근하고 있었다.
그런데, 삐죽. 샤바의 머리카락이 삐죽 솟았다. 더불어 침을 흘리고 있던 병규의 얼굴도 외로 휙 돌아갔다. 멀리, 아주 멀리서 인기척이 들렸다.
“왔구나.”
병규는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비볐다, 이런 깊은 산중에 들려오는 무수한 기척. 십중팔구 산적이다.
‘좋아. 식전 운동 정도는 되겠군. 잘하면 여비 정도를 벌 수도 있겠고.’
남들은 산적들을 만나면 재산과 목숨을 거정하데, 병규는 오히려 그 반대였다.
“귀찮은 파리 떼 때문에 식사는 잠시 미뤄야겠군.”
국을 젓던 호랭이가 푸념을 하며 솥뚜껑을 닫았다.
그때였다.
“어?”
느긋하게 산적나리들을 기다리고 있던 병규의 귀가 슬쩍 움직였다.
“왜 그래?”
“어쩌면 산적이 아닐 수도 있겠는 걸요.”
무슨 소리냐며 고개를 갸웃거리던 호랭이가 두 귀를 쫑긋 세웠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호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잠시 귀를 기울이던 호랭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구나.”
멀리서 들려오는 기척은 다름 아닌 말발굽 소리다. 산적들이 말이라니. 어울리지 않는다. 게다가 말발굽 소리에 바퀴 구르는 소리까지 섞여있다. 수레나 마차가 있다는 소리다.
병규는 김이 빠진 채 다시 자리에 앉았다.
기동성을 우선하는 산적들이 느린 마차를 끌고 다닐 리 없다. 강탈한 물건이 많아 옮기기 나쁘다면 행인들의 수레를 뺏으면 그만, 그것이 바로 산적들의 수법이다.
결국 지금 맹렬히 달려오고 있는 다수의 기척들은 산적과 관계없는 사람들일 가능성이 높다는 결론을 내릴 수 있었다.
드드드드드...... .
말발굽이 울리는 땅의 진동이 한층 가까워졌다.
일행은 담담한 눈으로 몰려오는 무리를 기다렸다. 과연 누가 마차와 말을 타고 이 험한 산맥을 넘어오는 것일까.
잠시 후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맨 먼저 눈에 띈 것은 말 위에 올라탄 갑옷을 입은 기사들의 모습이었다. 그들의 갑옷은 신비로운 녹색을 띠고 있었다. 특수한 도색을 했는지 햇빛이 비칠 때마다 카멜레온처럼 색깔이 요란하게 변했다.
‘미네르바 기사단.’
기사들을 본 사신들의 표정이 가볍게 변했다.
녹색의 현란한 갑옷 왼쪽에 새겨진 정령의 문장.
왼쪽 가슴에 바람의 정령왕이 그려진 녹색 갑옷을 입는 기사들은 이드라센 대륙에서 오직 한 곳, 아이린 왕국의 왕정기사단인 미네르바뿐이다.
‘왕정기사단이 이 먼 곳까지 웬일이지?’
일반적으로 왕정기사단은 특별한 일이 없는 한 왕성을 떠나지 않는 것이 원칙이다. 그런데 그런 왕실기사단이 무려 50여 명이나 외진 숲길을 맹렬한 속도로 달려오고 있는 것이다.
틀림없이 심상치 않은 사건이 터진 것이 분명했다.
그러나 이러한 사정을 전혀 알지 못하는 병규는 김이 빠진 표정으로 기사들을 지켜보고 있었다.
“정지!”
기사들의 선두에 선 자가 한 손을 들었다. 뒤이어 쫓아오던 기사들과 마차가 조용히 속도를 줄이더니 일행 앞에 정지했다. 많은 수의 인원이 움직이고 있음에도 찬 치의 흐트러짐을 보이지 않는, 놀랍도록 정련된 움직임이었다.
맨 선두의 인물은 건장한 체구에 부리부리한 눈매를 한 사십대 중년인이었다. 그는 삼엄한 눈길로 병규 일행을 한 차례 쓱 훑었다.
“그대들은 어디에서 온 자들인가.”
중년의 기사가 큰 목소리로 물었다.
병규가 앞으로 나섰다.
“트라우마에서 오는 길입니다. 수도로 가고 있습니다.”
수상한 사람으로 낙인찍히면 귀찮아진다고 생각한 그는 최대한 공손히 대답했다.
중년기사의 눈이 사신들을 향했다.
그의 눈가에 잔주름이 잡혔다. 절대로 평범하지 않은 사신들의 생김새가 그의 눈을 잡아끈 것이다.
기사는 눈살을 찌푸리더니 한 손을 들었다. 뒤쪽의 기사 셋이 창을 내밀며 앞으로 나섰다.
“수상한 자들이로군. 신분과 수도로 가는 상세한 이유를 말하라!”
심문하듯 물어오는 기사의 말에 병규는 싱긋 웃었다.
전에는 이런 질문에 뭐라 대답할지 난감했다. 하지만 지금은 이런 상황에서 제대로 써먹을 수 있는 요긴한 물건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품에서 용병패를 꺼내 중년기사에게 내밀었다.
“저희들은 트라우마에서 용병 일을 하던 사람들입니다. 일을 찾아 수도인 유리스로 이동하는 중입니다.”
병규는 무난한 대응을 했지만 기사들의 태도는 오히려 더욱 삼엄해졌다.
명령을 내린 이도 없건만 십여 명의 기사들이 창을 꼬나들고 일행의 주위를 둘러쌌다. 이젠 경계를 넘어 적대심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하필 이 혼란한 시기에 수도로 일자리를 찾아가는 용병이라니. 필시 반역도들에게 매수된 자들이렷다!”
거창하게 외치는 중년인의 시선은 한쪽에 몰려 있는 사신들에게 집중되어 있었다. 이들이 이토록 과민반응을 보이는 것은 역시나 사신들의 평범하지 않은 외모가 한 몫한 듯했다.
‘어라? 이거 또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가는걸.’
기사들이 수도란 말과 용병이란 말에 반응을 보이는 것으로 보아, 수도 유리스에 무슨 일이 생겼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또 한바탕 푸닥거리를 해야 하나?’
병규는 난색을 표했다.
기사들과 싸우는 것은 겁나지 않았다.
사실 말이야 바른 말이지 그들 파티는 세상에 그 짝을 찾기 힘들 정도로 막강한 저력을 자랑했다.
어세신 출신인 사신들은 두말할 것도 없고, 도술을 사용하는 호랭이와 은신술과 짱돌의 달인 샤바, 그리고 드래곤인 마그네트와 뇌전과 같은 빠름을 자랑하는 병규까지.
하나같이 평범한 인물이 없었다.
“이번엔 기사들인 모양이군.”
“마스터와 함께 있으니 재미있는 건수가 끊이질 않는다.”
“흐흐흐. 바인딩. 너도 기쁘냐? 나도 기뻐 죽을 지경이다.”
사신들이 부스스 자리에서 일어나며 기과하게 웃었다.
보통 어세신들이면 기사들과의 정면대결은 절대로 피한다.
하지만 이들은 반대로 실실 웃으며 기뻐한다.
실력이 받쳐주기 때문이다. 이들 사신들은 웬만한 수준의 기사라면 날로 회쳐 먹을 수 있을 정도로 출중한 실력을 갖추고 있는 것이다.
물론 이번 상대는 웬만한 기사정도가 아니다.
미네르바 기사단.
아이린 왕국이 자랑하는 정령의 기사단인 것이다. 하지만 그런 대적을 앞에 두고도 사신 중 그 누구도 두려워하는 인물이 없었다.
“흥! 과연 뒤가 구린 놈들이군.”
사신들의 움직임을 예의 주시하던 중년기사가 코웃음을 쳤다.
급한 용무가 있는 그들로서는 이곳에서 괜한 싸움에 말려들 여유가 없었다. 하지만 수상한 자들에게 자신들의 행적이 드러나는 것은 더더욱 좋지 않은 일이다.
껄끄러운 것은 제거한다.
그것이 미네르바 기사단을 지휘하고 있는 기사단장 루멘 백작의 생각이었다.
그때였다.
기사 한 명이 앞으로 나와 중년기사의 귀에 몇 마디 말을 소곤거렸다.
“어?”
귀를 씰룩이며 기사의 말을 엿듣던 병규가 깜짝 놀란다.
지금 중년기사에게 귓속말을 건네는 자.
눈에 익었다.
게다가 그가 중년기사에게 건넨 말은 더욱 놀라운 것이었다.
“뭣이?”
루멘이 크게 대갈하며 눈을 부라렸다.
흘끔 병규를 보는 눈길에 못마땅한 빛이 역력했다.
“확인해 보게.”
루멘의 명령에 귓속말을 전한 기사가 후미의 마차로 달려갔다.
기사가 몇 마디 말을 전하자 돌연 덜컹하며 마차 문이 열렸다. 그리고 안에서 두 사람이 뛰어나왔다.
한 사람은 금발의 아름다운 숙녀였고, 다른 한 명은 싸늘한 표정의 청년이었다.
“카피 님!”
금방 여자가 병규를 발견하고 빠른 걸음으로 달려왔다.
“레종?”
병규의 두 눈이 휘둥그레졌다.
금발의 아름다운 여자, 그녀는 바로 레종이었다.
레종은 병규 앞에 발을 멈추었다.
그녀의 누가에 맑은 미소가 그려져 있었다.
의외의 장소에서 만나게 된 것이 많이 반가운 모양이다. 병규 또한 헤벌쭉 웃으며 그녀를 반겼다.
“레종. 이게 어떻게 된 거예요?”
병규가 기쁨을 감추지 못하고 그녀에게 다가갈 때였다.
“예의를 차려라!”
말에서 내린 루멘이 강압적인 목소리로 외쳤다.
“에? 왜요?”
병규는 루멘의 갑작스런 적대를 이해할 수 없었다. 반가운 친구와 재회를 하는데, 이 수염 덥수룩한 아저씨가 왜 난리를 치느냔 말이다.
“이 녀석이.”
한바탕 호통을 쳤음에도 병규가 여전히 어정쩡하게 서 있자, 루멘은 참지 못하고 허리춤에서 검을 뽑았다. 그때, 눈물을 글썽이고 섰던 레종이 고개를 홱 돌리며 뾰족한 목소리로 소리쳤다.
“잠깐. 루멘 백작님. 지금 뭐 하시는 거죠?”
그녀의 서슬 퍼런 물음에 백작은 움찔 놀랐다. 평소엔 한없이 부드럽기만 한 그녀다. 그런데 지금은 독기 오른 살쾡이처럼 표독스럽기 그지없었다.
“전 다만 저 버릇없는 꼬맹이에게 예의를...... .”
백작의 궁색한 변명에 레종은 눈을 지그시 내리깔며 고개를 저었다.
“필요 없어요. 그는...... 그는 굳이 제게 그럴 필요가 없는 사람입니다.”
“네?”
루멘의 눈이 휘등그레졌다. 레종은 입을 쩍 하고 벌린 백작에게 희미한 미소를 보였다.
“그는, 그는...... 제 친구예요.”
말을 마친 그녀는 조금 불안한 표정으로 병규를 돌아보았다. 그녀는 그를 친구로 생각하고 있지만, 그 역시 그녀를 친구로 생각할지는 의문이다.
“그렇죠? 카피 님?”
“물론이죠.”
병규는 생각해볼 것도 없다는 듯이 즉시 대답했다. 오히려 물어오는 그녀가 이상하다는 듯한 태도였다.
“다행이네요.”
비로소 레종은 예전의 맑은 미소를 되찾을 수 있었다. 한편 병규와 레종이 묘한 분위기 속에서 재회를 나누고 있을 때, 레종과 함께 마차에서 내린 디스는 두 눈을 가늘게 뜨며 병규와 그 일행들을 둘러보고 있었다.
‘이들을 여기서 다시 보게 될 중이야. 그야말로 하늘이 돌보심이로군.’
“수도로 간다더니 왜 다시 내려오는 거죠?”
간단하게 인사를 나눈 뒤 병규가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었다. 분명 그녀는 급한 볼 일이 생겼다며 서둘러 트라우마를 떠났다. 지금쯤 수도에 도착했어야 할 그녀가 웬일인지 이 깊은 산중을 헤매고 있는 것이다.
“음. 그게 어쩌다 보니...... .”
레종은 어색하게 웃으며 대답을 얼버무렸다. 너무 뻔한 표정이라 좋지 않은 일이 있었음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병규가 다시 뭐라 말을 꺼내려 하자 레종이 먼저 빠른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는 카피 님이야말로 이곳엔 무슨 볼일이시죠?”
“수도에 볼일이 좀 생겨서요.”
수도라는 말에 레종의 얼굴이 어두워졌다.
“지금은 가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요.”
“...... 무슨 일이 있는 모양이군요.”
좀 전에 중년기사도 유독 수도로 간다는 말에 과민 반응을 보였다. 레종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분위기가 어두워지자 그녀는 슬그머니 말을 돌렸다.
“그런데 몇 분이 안 보이시네요.”
“재이콥들과는 잠시 헤어졌어요. 그들은 당분간 트라우마에 있고 싶다고 하더군요. 한데 레종은 어딜 가
는 거죠? 설마 다시 트라우마로 가는 건?”
헤종은 고개를 설레설레 저었다.
“정확희 어디로 갈지는 아직...... .”
그 말을 끝으로 둘 사이의 대화가 잠시 끊겼다. 어색해진 병규는 뒷머리를 긁적이며 다른 이야기를 꺼
냈다.
“그런데 레종, 당신 정체가 대체 뭐예요?”
기사들이 무려 50여 명이나 호위를 서고 있다. 이것 하나만 봐도 충분히 그녕의 신분이 얼마나 대단한지 대충 짐작이 갈 정도다.
만약 병규가 기사들의 신분이 완정기사단이라는 것을 알았다면 어렵지 않게 그녀의 신분을 눈치 책 수 있었을 테지만, 유감스럽게도 아직 낯선 세계에 대한 경험은 일천하기만 했다.
레종은 눈을 아래로 내리깔았다.
말하고 싶지 않았다. 만약 그가 자신의 신분을 알게 된다면 예전처럼 편하게 대하지 않을 것 같았다. 그것이 레종은 싫었다.
“저. 카피 님.”
레종이 대답을 주저하자 끼어들 틈만을 노리고 있던 디스가 슬그머니 앞으로 나섰다.
“잠시 좀...... .”
그는 병규를 이끌고 일행과 조금 떨어진 곳으로 자리를 옮겼다. 조용히 할 말이 있어서였다.
‘불안해.’
레종은 근심 어린 눈으로 병규와 디스의 등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방금 전 병규를 부를 때 디스가 보였던
얄팍한 웃음. 무언가 좋지 않은 계략을 꾸밀 때 보이는 표정이었다.
“당신은 분명 용병이었죠?”
한적한 곳까지 이동한 디스가 낮은 음성으로 물었다. 병규는 고개를 끄덕였다.
“나와 계약을 하지 않으시겠소?”
“계약요?”
디스의 난데없는 제안에 병규는 어리둥절한 표정이 되었다.
“무슨 계약을 하자는 거죠?”
“그 말 그대로요. 다신, 정확하게는 당신과 그 일행 모두를 고용하고 싶소. 그것도 지금 당장.”
병규는 그의 말에 흥미가 생겼다.
이 냉막한 청년과는 잠깐 동행한 적이 있었다. 리치에게 납치된 소녀들을 구하러 갈 때였는데, 많은
말을 나눈 것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기억으론 냉철하고 계산적인 사람임이 분명했다.
화장실을 갈 때도 가장 적게 움직일 수 있는 방법을 생각하고, 또 그대로 실행하는 사람이랄까?
그런 계산적인 사람이 갑작스레 계약을 권해왔다.
틀림없이 어떤 꿍꿍이가 있을 것이다.
“지금 레종을 수행하고 있는 기사들도 절대 평범한 사람들이 아닌데, 수행인인원을 더 필요로 하는 이
유가 무엇일까?
“어떤 의뢰죠?”
디스의 얼굴을 응시하며 병규가 느긋한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나 그의 표정에서 무언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에서 였다. 그러나 디스의 얼굴엔 어떠한 기미도 엿보이지 않았다. 지극히 사무적인 표정이었다.
“간단한 일이오. 단지, 우리 일행과 함께 모처에 도착할 때까지만 동행해 주면 되오.”
“이유는?”
“그저 급한 일 때문이라고만 알면 되오.”
디스는 여전히 무표정했다. 도무지 무슨 생각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사례는 충분히 하겠소.”
병규는 생각할 가치도 없다는 듯, 곧바로 고개를 저었다.
“싫습니다.”
“...... 이유를 물어봐도 되겠소?”
디스의 얼굴에 미묘하나마 감정의 편린이 떠올랐다. 그것은 당혹감, 그리고 조급한 감정이었다.
“이유 같은 것 없습니다. 그냥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병규 입장에서는 하등 이들을 따라나설 이유가 없었다. 어차피 용병이 된 것도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된 것일 뿐.
하루라도 빨리 지구로 돌아가고 싶었다. 쓸데없는 일에 시간을 낭비하고 싶지 않았다.
“아무래도 거해는 이것으로 끝일 것 같군요. 그럼...... .”
병규는 고개를 까닥이며 디스를 스쳐 지나갔다. 그때 디스가 낮은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만약 공주님의 목숨이 위험하다고 해도 거절할 것이오?”
“공주님?”
병규의 두 눈이 휘등그레 떠졌다.
수수하게 웃던 열혈 순딩이 그녀가 공주라니.
병규는 속으로 뇌까렸다.
“이 무슨 고리타분하고 뻔한 전개냐?”
“레종이 공주님이었다니, 설마 아이린 왕국의?”
병규의 물음에 디스는 무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일한 왕위 계승권자요.”
“그런 공주의 목숨이 위험하다니 대체 무슨 소립니까? 혹시 반란이라도.”
디스는 대답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무거운 표정만으로도 대답은 충분했다.
사실 그의 침묵 말고도 증거는 여러 가지가 있었다. 공주를 수행하는 왕정기사단 미네르바. 분명 겉으로는 멋있어 보인다.
위풍당당한 위용에 햇빛을 받아 찬란하게 빛을 발하는 갑옷까지. 기사를 한 번도 본 적이 없는 촌무지렁이라면 당장 고개를 조아리며 절을 했을 것이다.
하지만 자세히 기사들의 면면을 살펴보년 실제와는 많이 달랐다. 그들은 처참한 작전을 치른 기색이 역력했다.
광택으로 번쩍거려야 할 갑옷은 온통 흠집투성이에, 기사들 중 몇 명은 가벼운 부상을 입어 붕대를 감기도 했다. 피를 뒤집어쓴 기사도 있었다.
“음.”
병규는 미간을 좁힌 채 잠시 고민했다.
이번에는 거절하기 힘든 부탁이다. 만약 디스가 돈이나 명성을 걸고 그를 유혹했다면 결코 응하지 않았을 것이다. 문제는 디스가 정에 호소했다는 것이다.
병규의 약점을 제대로 짚은 것이다.
잠시 후 병규의 입이 열렸다.
“우리가 뭘 해 주면 되는 거죠?”
“카피 님께서 동행하시겠다고요?”
동행하겠다는 병규의 말을 들은 레종의 표정이 한순간 환해졌다.
그러나 그너의 화사한 미소는 곧바로 시든 꽃처럼 어두워졌다.
“안 돼요. 그럴 순 없어요.”
너무 위험했다. 그리고 그들을 추악한 권력다툼에 끌어들이고 싶지 않았다.
그녀의 생각을 읽은 디스가 은근한 말투로 그녀를 설득했다.
“공주님. 지금은 여유를 부릴 때가 아닙니다. 한 사람이라도 더 동류를 모아야 합니다.”
특히 그는 병규 일행의 실력이 현실적으로 얼마나 필요한 것인지 설명하려 애썼다.
병규 일행의 실력은 예전에 이미 검증되었다. 특히 사신들의 존재는 웬만한 기사들보다 오히려 더 뛰어나다.
당시 레종과 디스는 병규와 샤바의 능력을 제대로 확인할 길이 없었다. 병규와 샤바는 리치를 막으러 앞서 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디스와 레종은 같이 있었던 사신들만의 실력만 확인했을 뿐어었다.
때문에 디스는 사신들의 뛰어나 실력은 제대로 뚫고 있으면서도 정작 병규와 샤바의 능력에 대해서는 의구심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디스는 사신들의 능력을 거듭 그녀에게 부각시킨 것이다. 하지만 fp종은 끝내 일행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거부했다.
“후.”
디스는 한숨을 쉬다 말고 병규에게 눈짓을 했다. 자신으로서는 이 고집불통 공주님을 설득할 방법이 없었다.
“공주님.”
병규가 예의를 갖춰 말했다. 레종은 뭐라 말하려다 말고 입을 닫았다. 공주라는 호칭. 아득한 거리감이
느껴졌다.
“함께하면 안 되겠습니까?”
병규가 조용한 음성으로 물었다.
“안 돼요. 너무 위험해요. 게다가...... .”
일이 잘될 것이란 확신이 없었다. 어쩌면 계속 쫓기기만 하다 비참한 결말을 맞이해야 할지도 모른다.
레종은 병규와 그 일행들이 너무 마음에 들었다.
험한 세사이다. 왕성을 떠난 그녀에세 세상은 이야기책 속에 나오는 것처럼 아름다운 곳이 아니었다.
신물이 날 정도로 현실적인 곳. 레종에게 세상에 대한 더 이상의 신비한 동경 같은 것은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상에 대한 회의를 느낄 때, 병규 일행을 만났다. 그들은 놀라울 만큼 순수했다. 그리고 자유로워 보였다.
공주인 자신이 누릴 수 없는 자유라 그렇게 느껴졌을까. 그들이 한없이 부러우면서도 좋아 보였다.
만약 이들 중에 누가 죽기라도 한다면 가슴이 너무 아파 견딜 수 없을 것이다.
병규는 홀로 괴로워하는 레종을 한껏 가라앉은 눈으로 바라보았다.
갑자기 병규가 그녀를 불렀다.
“레종”
깜짝 놀란 레종이 뒤를 돌아보았다.
놀라는 한편 반가운 미소가 그녀의 입가에 걸려 있었다.
그녀가 원한 것이 이런 것이다.
편하게 자신을 대해주는 친구.
그녀는 공주라는 신분 때문에 언제나 특별한 존재야야만 했다. 그렇기 때문에 충성을 맹세하는 기사는 있었을망정 진심을 나눌만한 친구는 없었다.
그래서 일전에 병규 들과 만났을 때, 굳이 공주라는 신분을 드러내지 않은 것이다.
“무엄한!”
기사들이 눈을 부릅뜨며 검을 잡았다.
감히 공주에게 평어를 사용하다니. 도저히 참고 넘길 수 없었다.
사실 병규가 이처럼 공주를 편하게 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신분주의와 거리가 먼 이계인이기 때문이다.
만약 그가 이드라센에서 태어나고 자란 사람이라면 감히 뻣뻣하게 허리를 편 채 공주의 이름을 부르는 경솔한 짓은 벌이지 않았을 것이다.
“왕족에 대한 모독은 즉결심판감이다.”
광분한 기사들은 당장 검을 빼어들고 병규에게 접근했다.
“기다리시죠.”
냉막한 표정의 디스가 그들을 막았다.
“설마 이번에도 가만히 보고만 있으라는 소리는 아니겠지!”
기사단장 루멘이 호통을 쳤다.
디스는 남작이다. 반면 루멘은 백작이었다. 지금까지는 공주와의 친분을 생각해서 참고 넘어갔지만 더 이상은 용납할 수 없었다.
“잠깐만 참아 주십시오. 그도 생각이 있어 그러는 것일 테니.”
디스는 흥분한 기사들을 진정시키려 애를 썼다.
어떻게든 기사들을 막아야 했다.
지금으로선 공주의 고집을 꺾을 만한 사람은 병규뿐이기 때문이다. 디스가 기사들을 막는 동안 병규는 진지한 눈빛으로 레종을 바라보았다.
“레종. 당신은 우리가 위험에 처하면 그냥 모른 체할 겁니까?”
“아니요. 절대!”
반박하듯 레종이 큰소리로 외쳤다.
모른 척하다니 말도 안 된다.
“그것 봐요.”
병규는 씩하고 웃어 보였다.
“당신은 못하는 일을 우리보고 하라고요? 못해요. 못합니다. 잊었어요? 우린 동료잖아요.”
“...... .”
레종은 병규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눈물을 떨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