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랭이, 사람이 되다
트라우마를 떠난 병규와 그 일행은 불과 하루 만에 붉은 대지를 넘어, 국도에 접어들 수 있었다.
보통 상인들이 삼 일 걸리는 길을 단 하루 만에 주파했으니 대단한 속도가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병규와 그 일행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결코 무리라고 볼 수도 없는 일이다.
병규와 호랭이는 그렇다 치고, 드래곤과 호랭이는 그렇다 치고, 드래곤과 바퀴벌레 커플에 대륙최강의 어세신 집단인 사신들. 그야말로 최강의 파티가 아닐 수 없었다.
출발할 때는 기분이 좋았다.
새로운 풍물을 접하는 것은 늘 설레이는 일이다. 물만 있으면 지칠 일도 없으니 피로도 느끼지 못했다. 워낙 빵빵한 실력의 파티라 몬스터나 도적들도 겁나지 않았다.
이런 여행이 즐겁지 않다면 거짓말이다.
하지만 트라우마를 떠난 지 불과 하루 만에 병규는 리더자리에 불안을 느끼게 되었다.
원인은 샤바였다.
파티의 대부분이 그가 아닌 샤바를 따르는 것이 문제였다.
사신들은 ‘마스터~마스터’ 노래를 부르고, 마그네트는 ‘달링’이라 부르며 샤바의 곁을 떠나지 않았다.
남은 건 호랭이뿐인데, 우대하고 지엄하신 신선님께선 병규를 위로하긴커녕 하루 종일 그의 어깨 위에서 잠만 잤다.
따르는 사람이 한 명도 없는 리더는 존재 의미가 없다. 일행의 대다수가 샤바를 따르니 당연히 샤바가 리더가 되어야 할 판이다. 그러나 병규는 이 같은 악재에도 결코 굴하지 않았다.
다행히 그는 상황을 시의 적절하게 이용할 정도의 머리는 되었다.
모두가 쌰바를 따르지만, 그 샤바는 병규를 주인으로 생각한다. 병규는 뭔가 필요할 때 또는 무언가 주장하고 싶을 때, 나직하게 샤바를 부르기만 하면 되는 것이다.
당연히 사신들은 그런 병규를 꺼려했다. 마그네트의 경우는 발작적으로 그를 구박하기도 했다.
하지만 병규의 얼굴 철판은 이미 상상을 불허할 정도로 두꺼워져 있는 상태였다.
여행이 삼 일째에 접어드는 날 오후 무렵.
일행은 ‘란테르’라는 이름의 마을에 도착할 수 있었다.
란테르는 전형적인 전원마을이었다.
여관이라고는 중심가에 있는 ‘란테르의 휴일’하나가 전부였다.
사실 상인들이 이용하는 길은 따로 있었다.
고란산맥을 멀찍이 돌아가는 넓은 도로로, 그쪽으론 마을도 여러 곳 있었고, 여관들도 그럴싸한 게 많았다. 하지만 고든이 알려준 길은 비록 여행자들이 잘 찾지 않는 길이었지만 대신 수도까지 가는 최단거리 코스였다.
가는 도중 위험한 곳이 여러 군데 있기는 하지만 병규 일행 정도의 실력이라면 큰 문제가 없을 것이라는 판단에 이쪽 길을 알려준 것이다.
물론 병규는 고든의 말을 따랐다.
여관, ‘란테르의 휴일’은 이층의 목조가옥으로 다른 여관과 다를 것이 없이 일층은 주점과 식당이었고, 이층은 여행객들을 위한 숙박시설로 운영되고 있었다.
여관 내부로 들어가니 대낮부터 술을 먹는 삶들로 이미 반쯤 차 있엇다. 농사일을 하다 점심 겸해서 반주를 마시러 온 것인지 하나같이 순박한 인상의 시골 영감들 같은 모습이었다.
그들은 낯선 사람들의 방문에도 인색하지 않았다. 오히려 순박하게 웃으며 술이나 같이 하자며 웃는다. 시골의 푸근한 인심에 병규는 오랜만에 맑은 미소를 머금을 수 있었다.
고든이 준 지도엔 란테르 마을에서 식량을 보충하고 휴식을 취하라고 권고되어 있었다. 이 마을을 지나면 앞으로 삼 일간 딱히 쉴 만한 곳을 찾기 힘들기 때문이다.
병규는 하루 정도 쉬기로 했다.
상당한 거리를 달려왔지만 일행 중에 지친 사람은 없었다.
하지만 노숙만은 사양하고 싶었다. 푹신한 침대가 그리웠다.
“어서 오세요. 오랜만에 보는 여행자분들이네요.”
여관 ‘란테르의 휴일’의 주인은 포근한 인상의 중년 여자였다.
그녀 역시 여관 주인이라기보다는 농사짓는 시골 아낙 같은 편안한 인상을 주었다.
병규는 방을 네 개 잡았다.
일인실 두 개와 이인실 두 개였다.
하나는 병규와 호랭이가 Tm고, 다른 하나는 여자인 마그네트가 쓴다. 그리고 나머지 이 인실 두 개는 사신들을 위한 것이었다.
병규는 여관 주인에게 식량과 물을 부탁해 놓은 후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이불을 뒤집어쓰고 침대에 누웠는데, 웬일인지 잠이 쉬이 오지 않았다. 뭔가 부족했다.
배를 벅벅 긁던 병규는 곧 호랭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잘 때면 언제나 호랭이가 보이지 않는다는 걸 깨달았다. 잘 때면 언제나 호랭이가 그의 배 위에 똬리를 틀고 앉아 자곤 했다. 매일 그러다 보니 습관이 되어 버린 것이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니 창가에 앉아 있는 호랭이가 보였다.
“오늘도 수련하는 거예요?”
“그래”
호랭이는 고개를 돌리지 않은 채 대답했다.
항상 귀여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지만, 이때만은 은은한 선기가 느껴진다. 그래도 신선이라고 남은 가닥이 있는 모양이다.
“원래의 힘을 찾으려면 얼마나 더 걸리죠?”
호랭이는 대답하지 않았다. 눈을 지그시 감은 채, 도력을 모으는 데 집중하는 것에만 열중했다.
달을 보고 수련하는 모습을 여러 번 봤지만 오늘처럼 깊게 몰입하는 것은 처음 본다.
병규는 더 이상 물어보지 않았다. 방해하면 안 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때, 문 밖에서 작은 실랑이가 들려왔다.
“주인님이랑 잘 거야. 샤바.”
“달링. 안 돼요. 그건 잘못된 행동이에요.”
문을 열고 보니 방으로 들어오려는 샤바와 그의 허리를 붙들고 발버둥치고 잇는 마그네트가 보였다.
“주인님. 샤바.”
병규를 본 샤바가 눈물을 글썽였다. 구세주를 만났다는 듯한 표정이다.
왜 마그네트가 이렇게 엉겨붙는 것인지 샤바는 도저히 이해할 수 없었다.
병규를 본 마그네트는 눈썹을 상큼 치켜떴다.
병규는 안 봐도 이떻게 된 상황인지 대략 짐작이 가고도 남았다.
샤바는 절실하게 병규와 같은 방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마그네트가 원하지 않았다.
“그건, 그건 너무 망측해요.”라는 게 그녀가 한 말이었다. 여행 다음 날 노숙을 하고 새 아침을 맞았을 때, 샤바가 병규의 등뒤에 딱 달라붙어 자는 것을 그녀가 보게 된 것이 화근이었다. 그 뒤로 밤마다 이 기묘한 커플은 한바탕 난리굿을 벌였다.
“샤바야.”
“네. 샤바.”
샤바의 두 눈이 별빛처럼 반짝였다.
‘주인님만 믿어요.’라고 말하는 듯 한 강렬한 눈빛!
그러나 병규에게는 바르르 떨리는 마그네트의 눈썹만이 보일뿐이었다. 법은 멀고 주먹은 가깝다. 비슷한 의미로 정은 멀고 드래곤은 가깝다.
“샤바야. 넌 마그네트와 자.”
“에. 샤, 샤바?”
샤바는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떴다. 버림받은 강아지의 눈빛과 흡사했다.
곧 굵은 눈물이 방울져 떨어졌다.
‘미안하구나. 샤바야. 넌 내 장래를 우해 과감히 희생하렴.’
샤바의 훌쩍이는 서러운 울음이 귓가에 맴돌았다. 그러나 병규는 고개마저 돌리며 그를 외면했다.
병규는 드래곤인 마그네트가 기억을 되찾는 것을 대비해 갖은 아양을 떨고 있는 중이다. 결국 오늘은 샤바까지 팔아먹은 것이다.
“호호호. 그거 보세요. 샤바님. 자자~ 이쪽이로.”
마그네트가 경직된 눈썹의 힘을 풀며 요사스럽게 웃음을 흘리더니 샤바를 질질 끌었다.
샤바는 망연자실한 얼굴로 눈물만 주르륵 흘렸다. 병규는 마음이 찢어(?)졌지만 과감히 손을 흔들어 주었다.
‘잘 가. 샤바야. 아들딸 잘 낳고 좋은 가정 꾸미렴.’
과연 저 철없는 두 커플이 같이 잔다고 거사(?)가 진행될지도 의문이고, 바퀴벌레와 드래곤 사이에 자식이 생길지도 의문이지만, 병규는 과감히 둘의 행복을 빌어 주었다.
시간은 어느덧 조용한 새벽을 지나고 있었다.
병규의 코고는 소리가 낮게 들리는 작은 여관방.
호랭이가 창가에 그림처럼 앉아 있었다.
별빛이 차갑게 가라앉고, 달로 점차 기울고 있었다.
별빛이 차갑게 가라앉고, 달도 점차 기울고 있었다. 몇 시간 동안이나 이 자리를 지키고 있었는지 모른다.
감겨 잇던 호랭이의 눈이 떠졌다.
호수처럼 고요한 눈빛으로 하늘을 올려다보더니 작고 깜찍한 앞발을 내밀어 창문을 민다.
끼익~
작은 소음이 일었다.
고개를 돌려보니 병규의 귀가 팔락팔락 움직인다. 무섭도록 예민한 귀짝이다.
호랭이는 질린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흔들며 창문을 넘었다.
새벽 공기는 제법 차가웠다.
건물들의 지붕 위를 통통 뛰어다니며 마을 밖으로 빠져나갔다.
작은 숲이 보였다. 마을에 들어설 때부터 눈여겨봐 둔 곳이다.
낮은 풀숲을 헤치던 호랭이는 곧 고목들 사이에서 작은 연못을 발견했다.
연못 물 위에는 달빛이 비스름하게 비치고 있었다.
호랭이는 자박자박 연못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말 그대로 연못 위를 걷고 있는 것이다.
하얀 발이 움직일 때마다 잔잔하던 연못 수면 위에 작은 파문이 일었다.
하늘에 뜬 달이 연못 속에서도 출렁이고 있었다. 호랭이는 흔들리는 연못에 비친 달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중얼중얼거리며 무언가를 읊었다. 어찌 들으면 낮은 목울림 같기도 하고, 어찌 들으면 무슨 노랫가락 같기도 했다.
호랭이의 그 알 수 없는 중얼걸임은 한 시간이 넘게 이어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거짓말처럼 중얼거림이 끊겼다.
호랭이는 그윽한 시선으로 물에 비친 달을 바라보았다.
다음 순간, 고요한 음유에 반응하듯 수명이 고운 파장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호랭이는 파문이 일고 잇는 연못 속을 가만히 들여다보였다. 더없이 깨끗한 연못은 그 내부를 그대로 들여다보이고 있었다. 그 속에서 과연 무엇을 보고 싶었던 것일까.
“입(入)”
호랭이의 작은 몸이 늪으로 빨려들 듯이 서서히 연못 물 속으로 가라앉았다.
발, 몸, 목, 그리고 머리, 마지막으로 쫑긋 선 귀까지 호랭이의 몸이 수면에서 사라져 갔다.
찰랑.
작게 물방울이 튀겼다.
호행이가 사라진 바로 그 자리였다.
찰랑, 찰랑.
수면의 파장이 점점 커졌다.
일정한 리듬으로, 마치 들리지 않는 노랫소리에 박자를 맞추듯, 작은 파도가 일기 시작했다.
휘이이.
연못 바깥쪽으로부터 바람이 불어왔다.
연못 근처를 한 바퀴 휘감는가 싶더니, 달빛이 잠겨든 연못 한가운데서 작은 회오리처럼 춤을 춘다.
뒤이어 작은 불빛들이 모여들었다.
반딧불이와 같은 작은 곤충들인 것 같았다. 연못 주변을 떠다니며 환상적인 아름다움을 연출해 냈다.
작은 동물들이 하나 둘, 연못가로 어슬렁 나타나더니, 어느새 연못 주변은 이름 모를 생명들로 가득 차 버렸다. 초식동물과 육식동물이 먹고 먹히는 서로의 관계도 잊은 채 연못에 이는 잔잔한 파문에 시선을 빼앗겼다.
취리리릭.
연못 수면에 일기 시작한 잔잔했던 파문이 회오리처럼 춤추기 시작한 바람과 섞이면서 용오름처럼 허공으로 치솟았다. 반딧불이와 같은 작은 불빛들이 용오름과 어울리며 어두운 밤하늘을 화사하게 수놓았다.
연못가의 동물들 시선이 용오름을 쫓아 일제히 하늘로 향한다.
이유 모를 긴장감이 연못 주위를 휘감고 돌기 시작했다.
파핫!
허공으로 치솟던 용오름이 허공에서 터지면서 사방으로 흩어졌다.
쏴아아~
비처럼 쏟아지는 물줄기 속에서 흐릿한 그림자가 언뜻 비쳤다.
“됐다.”
나지막한, 그러나 환성에 가까운 울림이 들려왔다.
우우우~.
아웅~.
꺄르르릉.
동물들이 환영하듯 일제히 울어대고, 사납게 불던 바람이 온순하게 잦아들었다. 그 순간만큼은 밤하늘의 별빛까지도 따사롭게 빛나는 듯했다.
무거운 느낌에 잠에서 깬 병규는 어이가 없었다.
“뭐야?”
그의 침대는 분명 상당히 큰 편이었는데 지금은 매우 비좁게 느껴졌다. 병규 말고도 두 사람이 더 침대 위에서 뒹굴고 있었기 때문이다.
어느새 숨어들어온 샤바가 왼팔을 베고 고롱고롱 잠을 자고 있는 사태는 그럴 수도 있다고 치자. 하루 이틀 이런 것도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다른 하나는 도저히 용납이 안 되었다.
웬 놈이 그의 배를 베고 자고 있는 게 아닌가.
병규는 천천히 상체를 일으킨 후, 낯선 그 놈의 얼굴을 살폈다.
요모조모 아무리 봐도 처음 보는 얼굴이다.
그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병규의 미간에 굵은 주름이 잡혔다.
잘 생겼다.
사내같이 생겼다고 할까. 아니면 악동같이 생겼다고 할까.
짙은 눈썹과 선이 굵은 얼굴은 굉장히 활동적인 사람임을 짐작케 했다.
그런데 한 가지, 눈에 띄는 것이 있었다.
허리까지 내려오는 청년의 머리칼, 하얀 백발이었다.
백발이라곤 하지만 노인들의 푸석하고 생기를 잃은 하얀 머릿결과는 전혀 다르다. 쭈뼛쭈뼛 뻗은 머리카락에서 넘치는 활력과 힘이 느껴졌다.
‘어라? 그러고 보니 이사람. 내 옷을 입고 있잖아?’
병규의 얼굴에 짜증이 확 스쳤다.
술에 취해서 이러는 거라면 만만찮은 술버릇이고, 술 때문이 아니라면 정말로 한심한 한량인 것이다.
“넌 뭐냐!”
병규는 청년을 덜렁 들어 메쳤다.
청년은 ‘어이쿠’ 하더니 허공에서 몸을 뒤틀며 날렵하게 몸의 중심을 잡고 내려섰다. 마치 고양이와 같은 날렵하고 부드러운 움직임이었다.
“무슨 일이야?”
백발의 청년이 뒷머리를 긁적이며 물었다. 부스스 뜨는 눈자위에 잠이 덕지덕지 매달려 있었다. 그 태연한 모습에 병규는 화가 확 치밀었다.
“당신 누구야!” 도대체 정체가 뭐야? 왜 남의 방에 들어와서 자는거야? 그리고 내 옷은 허락도 없이 언제 입은 거지?“
소나기처럼 쏟아지는 병규의 물음에 백발 청년은 멍한 눈으로 듣기만 했다. 그러더니 입가를 좌우로 쫙 늘리며 빙그레 웃는다.
여유가 느껴지는 멋스런 웃음이었다.
“난 또 무슨 일이라고, ...... 하암~”
늘어지게 한품을 한 백발 청년은 병규의 서슬 퍼런 위협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씩 웃으며 대뜸 질문을 던졌다.
“나 몰라?”
“당신이 누군지 내가 어떻게 알아?‘
“이상하다. 알 텐데.”
“알긴 뭘 알아!”
병규는 버럭 고함을 질렀다. 청년의 느긋한 태도가 괘씸할 정도로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의 생각을 읽은 듯, 빙그레 웃기만 하던 청년이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그러더니 두 팔을 허리에 올린 채 걸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봐. 나 호랭이야.”
“???????? 엥?”
병규는 입을 쩍 벌린 채 얼어붙은 듯 굳어 버렸다.
“호랭이......라고요?”
병규가 떨리는 음성으로 물었다. 벌써 몇 번째 던지는 질문이었다. 매번 같은 대답을 들었지만 여전히 믿기 힘들었다.
“하. 녀석. 귓구멍에 마늘쪽을 박았나. 사람 말을 왜 그리 못 알아들어? 전에 사람 모습으로 변할 거라고 했잖아.”
병규의 고개가 외로 기울어졌다.
거친 말투에 방탕한 태도는 영락없는 호랭이다. 하지만 막상 눈앞의 미청년을 호랭이로 인정하려고만 하면 영속이 배배 뒤틀리는 것이다.
“차라리 호랑이의 모습으로 다시 변해 봐요. 그렇게 하면 확실해지잖아요.”
“귀찮아. 둔갑술이 얼마나 피곤한 술법인지 알아? 차라리 너와 인연을 끊는 게 낫지, 그렇게 귀찮은 일은 더 못하겠다.”
병규의 머리가 다시금 갸웃했다.
‘게으른 모습은 역시 호랭이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보이는 반응으로 봐서는 영락없는 호랭이다.
“아직도 못 믿겠냐?”
“호랭이가 맞긴 한 것 같은데, 너무 갑작스러워서 .......”
병규가 뒷말을 흐리는데, 소란 통에 잠에서 깬 샤바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호랭이를 살폈다. 코를 킁킁거리더니 머리카락을 안테나처럼 삐쭉 세운다.
“호랭이. 샤바?”
“그래.”
“호랭이.”
샤바는 금방 호랭이를 알아보고 그의 목에 매달리며 즐거워했다. 단순한 샤바는 인간이 된 호랭이를 보고도 전혀 어색해하지 않았다.
괜히 혼자 끙끙거리던 병규만 바보가 된 꼴이었다.
“어떻게 된거에요? 저번에 리치와 싸울 때 도력을 다 써버렸다고 했잖아요.”
병규가 묻자 호랭이가 클클하며 웃었다.
“그게 전화위복이 되었다.”
“전화위복요?”
“그때 고력을 모두 소비해 버리는 바람에 새로 기운을 받을 수 있었다. 사실 이곳의 기는 우리 세계의 기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다. 비슷해 보이는 물과 기름이 서로 섞이지 않는 것처럼 서로에 반발했지. 그동안 난 이 섞이지 않는 두 기운을 합일시키려 무던히도 애를 썼다. 하지만 잘 되지 않아 애를 먹는 중이었다. 그런데 그 리치 녀석과 싸우느라 도력을 모두 소비해 버리는 바람에 저쪽 세상에서 쌓았던 도력을 모두 잃게 된 거야. 덕분에 텅 빈 몸뚱이를 이곳의 기로만 다시 몸을 채울 수 밖에 없게 된 거지. 그런데 화가 복이 되듯, 몸을 비우고 텅 빈 몸뚱이를 새로운 기로 채우자 놀랍게도 지지부진하던 도력이 순식간에 채워지는 것이 아니겠느냐?”
“아항. 성질이 다른 기가 서로 반발하던 현상이 없어져 버렸다는 말이군요. 그래서 도력도 쉽게 회복할 수 있었다는 말이고요.”
“그렇게 된 셈이지.”
“.......”
병규는 호랭이의 말에 기뻐해야 할지 슬퍼해야 할지 끙끙 고민했다. 호랭이가 도력을 되찾은 것은 분명 기뻐할 일이지만, 사람이 된 것, 그것도 잘생긴 청년이 된 것은 불만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이러다 샤바와 호랭이 사이에서 존재감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닐까?’
병규는 불안한 표정으로 샤바와 호랭이를 번갈아 보았다.
그때 쾅! 하는 소리와 함께 방문이 벌컥 열렸다.
깜짝 놀라 고개를 돌려보니 마그네트가 갈기를 세운 고양이처럼, 표독스러운 표정으로 거친 숨을 쉭쉭~ 내쉬며 서 있는 것이 아닌가.
분명 잠자리에 들 때는 샤바를 끌고 들어갔는데, 일어나 눈을 떠보니 없었다. 그래서 마그네트는 당장 병규의 방을 찾아왔다. 지금까지 매번 그랬다. 아무리 수갑을 채우고, 끈으로 묶어 두고 해도 아침이 되면 샤바는 사라지고 없었다.
그렇게 사라진 달링은 항상 병규에게 들러붙어 있었다. 그래서 오늘도 이렇게 잠옷바람으로 달려온 것이다.
“.......”
도끼눈을 하고 방안을 둘러보던 마그네트의 입이 쩍 벌어졌다.
예상대로 샤바는 병규의 방에 있었다.
그런데 사랑하는 달링이 이번엔 난생처음 보는 남자의 등에 매달려 있는 것이 아닌가.
“아아아.”
털썩!
마그네트는 괴이한 신음을 흘리며, 순정소설의 비극적인 여주인공처럼 희극적인 자태로 풀썩 주저앉아 버렸다.
“아아. 달링, 이젠 다른 남자와 바람까지. 정녕 저 하나론 만족 할 수 없는 건가요?”
쿵.
가슴 무너지는 소리와 함께 호랭이의 안색이 하얗게 변해 버렸다. 졸지에 샤바와 금단의 사랑을 나ㄴ눈 파렴치한이 되어 버린 것이다.
아침, 사신들이 모인 자리에서 병규는 호랭이를 소개했다.
“원래 같은 일행이던 사람인데, 볼일이 있어 잠시 헤어졌다 어젯밤 늦게야 돌아왔습니다.”
어설픈 설명이었지만 사신들 중 그 누구도 의문을 가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마스터 하나뿐이다. 나머지 일행이야 어찌되든 관심이 없었다.
정작 문제는 짐을 챙기고 여관을 떠날 때 생겼다.
‘어라? 좀 가벼워진 것 같다.’
배낭을 든 병규는 무게가 전에 없이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찝찝한 마음에 짐을 하나 하나 풀어보니 가장 중요한 것이 사라지고 보이지 않는 것이 아닌가.
“금, 금궤가 없어졌다!!”
병규의 눈이 당장 뒤집혔다.
고생해서 강탈한 금궤가 사라지고 없었던 것이다. 발광을 하던 그는 문득 호랭이가 휘파람을 불며 시선을 외면한다는 사실을 눈치챘다.
버쩍.
병규는 두 눈을 희번덕이며 호랭이를 유심히 살폈다.
‘오호라.’
호랭이의 등엔 처음 보는 물건이 매달려 있었다.
세 자루의 도끼.
하나는 녹이 슨 쇠도끼였고, 다른 하나는 거울처럼 말끔한 은도끼였다. 그리고 허리춤에 비스름하게 맨 마지맏 도끼는 한눈에도 수상쩍어 보이는 누런 빛깔을 띠고 있었다.
“후후후. 호랭이?”
“따,딸꾹. 왜, 왜 그러느냐?” 게슴츠레한 눈으로 병규가 묻자 호랭이는 죄짓다 들킨 아이처럼 요란스럽게 달꾹질을 했다.
“후후후후후후. 혹시 저에게 뭐 할 말 없으세요?”
병규의 노곤한 음성.
호랭이는 휘파람을 불며 필사적으로 병규의 시선을 외면하려 애썼다.
“이건 어디서 났죠?”
병규는 호랭이 허리춤에 매진 금도끼를 손가락을 통통 두드렸다.
“험험.”
백발의 열혈 청년이 된 호랭이는 불편한 헛기침만 연발했다.
“어떻게 된 일이죠?”
병규가 호랭이의 귓가에 입을 가까이 대고 소곤소곤 물었다. 으스스한 목소리였다. 호랭이는 어깨를 움츠리더니 험험하는 소리와 함께 대답했다.
“어험. 사실 내가 배운 무공을 시전하기 위해선 한 가지 필요한 물건이 있어야 하느니라.”
“호오. 호랭이가 무공을요? 도술만 하시는 줄 알았더니, 의외로 재주가 많으시네요.”
“흠흠. 초보신선 때 도술과 함께 조금 익혔느니라.”
“그런데 그 무공이란 것이 어째 금궤를 써서 수련해야 하는 건가 보죠?”
집요한 병규의 물음에 호랭이는 속으로 사갈 같은 놈이라고 욕을 해 대며 말을 이었다.
“험험. 당시 내게 무공을 가르쳐 주신 삼부도인께서는 이름 그대로 세 개의 도끼를 주무기로 사용하셨지. 당연히 그분께 무공을 전수받은 나 역시 스승님처럼 도끼 세 개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호랭이의 자세한 설명에 ‘호오~’하는 묘한 어투로 장단을 맞추고 있던 병규는 문득 고개를 갸웃했다. 세 개의 도끼.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혹시 삼부도인이라는 그분, 금도끼 은도끼에 등장했던 신선님과 무슨 관련이 있는 것 아닌가요?”
“호오. 무식한 네가 그걸 아는구나. 그 이야기에 등장하는 신선이 바로 스승님인 삼부도인이시다.”
호랭이는 가슴을 쭉 펴며 자랑스럽게 말했다.
“좋아요. 스승님께 전수받은 무공 때문에 세 개의 도끼가 필요하다는 것은 충분히 이해하겠어요. 그런데 왜 제 금궤가 허락도 없이 사용된 거죠?”
“험험.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옛날이야기에서도 등장하지만 세 개의 도끼란, 쇠도끼, 은도끼, 그리고 금도끼 이렇게 세 자루다. 이것은 절대로 변할 수 없는 삼부도문의 전통이지. 그 때문에 네 금궤를 잠시 빌린......게야.”
“....... 왜요? 그냥 아무 도끼나 세 자루만 들고 휘두르면 되는 거 아닌가요?”
“안 될 말씀. 도끼마다 각각의 쓰임이 다르기 때문에 절대로 불가한 일이다.”
호랭이는 신이 난 듯이 말을 이었다.
“쇠도끼는 물론 공격을 위해 필요한 물건이다. 험한 일에 쓰는 물건이니 단단하면서도 구하기 쉬운 쇠가 적합하지.”
“거울대용이다. 자 이 녀석을 보거라. 파리가 낙상할 정도로 표면이 반질반질하지 않느냐? 도낏자루에서부터 날까지 흐르는 이 은은한 곳선. 이런 미려한 광택에 어찌 얼굴을 비추지 않을 수 있
겠느냐.“·
“...... 그럼 금도끼는요?”
“그건 ...... .”
금도끼에 대해 언급할 차례가 되자 호랭이의 목소리가 작아졌다.
“그것이 ...... 재테크의 일환으로...... 어험험 .”
“재~테~크~으?”
병규의 말에 비아냥이 섞인 채 길게 늘어졌다.
“호랭이의 재산증식을 위해서 제 금고가 비어야 하죠? 왜 제가 거지가 되어야 하냔 말이에요.
“어허! 모르는 소리. 자고로 금이란 모양이 바뀌어도 가치가 변하지 않는 것으로...... .”
“가치는 안 변하지만 주인은 바뀌었잖아요.”
버럭 소릴 지른 병규는 호랭이에게 한 손을 내밀었다.
“도끼 내 놔요.”
“하, 하지만 이건 아까도 말했다시피 내게 꼭 필요한 물건이라,”
“재테크 용이라면서요. 당장 필요 없는 물건일 테니까 이리 내놔요.”
“저, 정말? 지금 당장?”
호랭이가 애처로운 눈빛을 띠며 물었다. 병규는 눈썹을 역팔자로 찌푸리며 눈을 사납게 부릅떴다.
“당장요!”
호랭이는 주저주저하며 허리춤에 매어진 금도끼를 풀었다. 잠시 노랗게 빛나는 도끼날에 자신의 얼굴을 비추던 호랭이는 입가를
쭉 틀며 반항을 표시해싿.
“싫다!”
병규의 얼굴이 일그러졌다.
“남의 물건을 가져가 놓고, 돌려주기 싫다니요. 그건 도둑질이에요. 신선이 그런 파렴치한 행동을 해도 되는거예요?
“gpd. 무슨 소릴. 애초에 이 금궤가 어떻게 생긴 물건이냐? 샤바가 가져왔잖아 그런데 왜 네 물건이 되는 거지?”
호랭이의 정곡을 찌르는 반문에 병규는 말문이 턱하고 막혔다. 생각해보니 그렇다. 당시 금궤는 샤바가 챙겨 가지고 온 것이다. 샤
바가 금에 관심이 없는데다, 일행의 자금은 모두 병규가 관리하고 있다 보니 자연스럽게 병규가 가지고 있게 된 것뿐이다.
“굳이 주인을 따지자면 샤바가 주인이다. 그러니 샤바에게 이 물건의 주인을 결정하게 하는 게 옳다.”
단호한 표정으로 일갈한 호랭이는 허리춤에서 푼 금도끼를 들고 샤바에게 걸어갔다.
‘에고, 샤바 녀석 어제 저녁의 일로 삐쳤을 텐데.’
손으로 이미를 짚으며 병규는 포옥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평소라면 샤바엑 물어본다는 말이 이렇게 두렵지는 않았을 것이다. 물
어보나마나 샤바는 병규의 편을 들었 테니까 말이다. 하지만 어제 일로 샤바는 병규에게 시무룩한 상태였다. 주인님에게 배신당한 것의 충격이 생각보다 컸다. 호랭이도 그걸 알기 때문에 과감히 샤바를 끌어들인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마그네트에게 질질 끌려다
니고 있는 샤바는 의기소침한 모습이었다. 호랭이는 벌써부터 샤바의 곁에서 온갖 감언이설을 쏟아내고 있었다. 금도끼를 가지기 위한 노랭이의 노력이 눈물겨웠다.
“됐다. 이제 샤바에게 누가 이 도끼의 주인인지 물어보자.”
호랭이가 자신만만한 표정으로 말했다. 한참 동안 샤바를 꾀어 놓은 것이다.
“휴.”
병규는 한숨을 쉬었다.
“샤바야.”
샤바가 동그란 눈을 치떴다. 당장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은 누이었다. 쿵하고 가슴이 무너지는 것 같았다. 슬며시 죄책감이란 놈이 고개를 들었다. 병규는 두 눈을 지그시 감았다. 눈 꼬리가 바르르 떨리는 것으로 보아 큰 경정을 내린 듯 했다.
“앞으론 내 옆에서 자도 된다.”
호랭이의 입이 쩍 버러졌다. 설마 병규가 저런 말을 하리라곤 상상도 못했던 것이다. 드래곤의 위협을 뿌리치고 금궤를 선택하다니. 절로 무서운 놈이라는 말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지경이다.
“샤바!”
샤바의 표정이 순식간에 화사하게 밝아졌다. 그 미소가 얼마나 휘황찬란했던지 멍하니 보고 있던 마그네트와 여관주인이 코피를 흘리며 뒤로 넘어갔을 정도였다. 옆에서 자도 된다는 말. 그 한마디로 이미 모든 것은 결정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주인님 거예요. 샤바.”
우여곡절 끝에 금도끼는 병규에 손에 돌아오게 되었다. 하지만...... .
금도끼로 인한 작은 소란을 겪은 후 마을을 출발한 병규였지만. 채 반나절도 지나지 않아 금도끼를 도로 호랭이에게 돌려줘야 했다. 호랭이의 구시렁거림을 도저히 참고 들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세상 다 산 노인네처럼 푹푹 내쉬는 한숨에 금당이라도 숨이 넘어갈 듯이 중얼거리는 넋두리. 게다가 입술 한쪽이 슬쩍 말려 있는 그 뾰로통한 표정이란. 얼굴은 20대인데, 주절주절 내뱉는 소리는 80먹은 노인네다.
끊임없이 주절거리는 푸념이란, 결국 병규는 지구로 돌아가면 다시 돌려받는다는 조건하에 금도끼를 호랭이에게 넘겨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