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0화 (43/102)

  떠나는 그를 위한 노래

  어슴푸레 날이 밝아 왔다.

  잠든 소녀들과 함께 길을 떠난 병규는, 몬스터의 피가 작은 연못처럼 고여 있는 곳에서 제이콥들과 재회할 수 있었다.

  “성공했나 보군.”

  병규가 소녀들을 챙겨 오는 것을 보고 제이콥히 환한 미소를 맞이했다.

  “정말이야? 다들 무사한 거야?”

  호젤이 호들갑을 떨었다. 그녀는 정말로 소녀들을 무사히 구출해 냈다는 것이 맏기지 않는 것 같았다.

  하긴 무리도 아니다.

  밤새도록 몸서리나도록 몬스터들과 싸웠다.

  나중엔 칼이 무뎌져 몬스터들의 피부조차 벨 수 없을 지경이었다. 기사들의 출중한 실력과 제이콥의 시기적절한 지시, 그리고 사신들의 지원이 없었다면 아무도 이곳에서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소녀들은 괜찮은가요?”

  레종이 병규에게 다가오며 고운 목소리로 물었다.

  “네. 다행입니다. 그런데 이젠 남자 흉내 내는 건 그만두셨나 보군요.”

  병규의 말에 그녀는 얼굴을 곱게 붉혔다.

  밤사이 격전은 치열했다. 기사들이 그녀를 엄밀히 보호했지만 몇 번이나 위험한 순간이 있었다. 그때마다 뾰족한 비명을 질러댔으니 그녀가 여자라는 사실을 온 사방에 떠들게 된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그런 이유 때문인지 그녀는 더 이상 어설픈 남자 흉내를 내지 않았다.

  여성스러움을 한껏 발산하는 그녀는 남자들이 혹할 만큼 상당한 미녀였다. 몬스터들의 피로 지저분해진 의복과 헝클어진 머릿결 앞에서도 그녀의 미모는 결코 퇴색되지 않았다.

  레종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던 병규는 문득, 그녀의 표정이 좋지 못하다는 것을 느꼈다.

  “무슨 일이 있으신가요?”

  레종은 살짝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미간에 깃든 울적한 기운만은 숨길 수 없었다.

  몬스터와의 치열한 결전 중에 기사 넷이 큰 부상을 당했다. 한 사람도 죽은 사람이 없는 것이 기적이라고 말할 수 있는 상황이었지만 그쪽의 분위기는 숙연하기 이를 데 없었다.

  특히 레종은 고개를 떨어뜨린 채 많이 침울해했다.

  디스가 곁에서 위로했지만 그녀는 기사들이 다친 것이 모두 자신 때문이라며 죄책감에 빠져 괴로워했다.

  “그런데 한 분이 보이지 않는 것 같네요.”

  레종이 사신들에게 시선을 주며 물었다. 귀여운 외모의 은발 머리 소녀가 보이지 않았다.

  병규는 씁쓸하게 웃었다.

  ‘어떻게  핑계를 됀다?’

  그녀는 사실 드래곤인데 위험한 순간, 운 좋게 샤바의 짱골로 기절시켰다. 후환이 두렵지만 차마 죽일 수는 없어서 그냥 저쪽산 정상에 버려두고 왔다.

  이런 식으로 솔직하게 대답해 줄 수도 없는 노릇이다. 결국 핑계라고 둘러댄 말은 어설프기 짝이 없는 소리였다.

  “그게······에, 또 볼일이 있어서 어딜 잠시 갔습니다.”

  병규의 핑예를 들은 레종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그녀는 병규가 뭔가를 숨기고 있다는 것을 어렵지 않게 눈치 챌 수 있었다.

  그가 이렇듯 땀을 뻘뻘 흘리며 핑계를대는 이유가 뭘까.

  떠오르는 것은 암울한 상상뿐이었다.

  “그녀는······ 전사한 건가요?”

  “아,아닙니다. 절대 그런 게 아니에요.”

  병규는 두 손을 내저으며 완강하게 부인했지만 그녀는 믿으려 하지 않았다.

  병규가 적이 당황하고 있을 때였다.

  톡톡.

  샤바가 레종의 어깨를 건드렸다. 고개를 돌린 그녀에게 샤바는 방긋 해맑은 웃음과 함께 기상천외한 말을 던져 주었다.

  “마그네트 여기 있어요. 샤바.”

  우뚝.

  병규를 비롯, 호랭이와 사신들의 몸이 일시에 굳어 버렸다.

  순간 병규와 호랭이의 뇌리에 떠오르는 불긴한 생각. 처음 이드라센 대륙에 떨어졌을 때, 샤바는 뭐든 버려진 것이면 다 들고 왔었다.

  그것이 오우거 허벅다리건, 오크 부족장이건,

  먹을 수 있는 것이면 절대로 가리지 않았다.

  ‘서, 설마.’

  ‘아, 아닐 거야.’

  마음속으로 아니길 기도하며 병규와 호랭이는 샤바에게로 시선을 옮겼다.

  그의 오른손.

  비어 있다.

  “휴.”

  병규는 몰래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그래 아무리 철없는 녀석이라도 드래곤을 비상식량이라고 챙겨 오지는 않았을 거야.’

  그는 그렇게 벌렁거리며 가슴을 쓰다듬었다. 그런데 바로 그 순간!

  “허걱!”

  호랭이가 헛바람을 토했다. 무슨 일이냐며 쳐다보니 ‘왼손! 왼손! 이라는 요상한 말만 한다.

  병규는 뭉클 솟구치는 불안감을 억누르며 샤바의 왼손을 쳐다 보았다.

  “허억!”

  그의 입에서도 격한 헛바람 소리가 새어 나왔다.

  간절한 기도에도 불구하고, 샤바의 왼손엔 빨간 구두를 신은 앙증맞은 발이 쥐어져 있었다.

  끼그극.

  녹이 잔뜩 슨 쇳소리를 내며 병규의 고개가 샤바의 등 뒤로 향했다.

  쩌억.

  그의 입이 찢어질 듯 벌어졌다.

  “맙소사.”

  샤바의 등 뒤, 기절한 마그네트가 장렬한 자태로 엎어져 있었다. 그리고 그녀의 왼발은 샤바의 왼손에 쥐어져 있었다.

  끌고 온 것이다.

  질질.

  왼발의 발목을 잡은 채로.

  아리따운 얼굴을 땅바닥에 살포시 갈아 주면서 말이다.

  뒤늦게 사신들의 입에서도 경악이 터져 나왔다.

  “허억.”

  “마,마스터!”

  “어째서 그녀를 데려오신 겁니까?”

  샤바가 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했다.

  “왜? 버리고 가면 상하잖아.”

  “헛!”

  사람들의 입에서 다시금 비명이 터져 나왔다. 샤바의 대답이 너무도 기상천외했기 때문이다.

  사신들은 생각했다.

  ‘서,설마.’

  ‘드래곤을 먹으려 했단 말인가.’

  놀랍다 못해 숙연한 마음까지 들었다.

  “어멋!”

  레종이 뾰족한 비명을 질렀다.

  그녀는 나는 듯한 걸음으로 샤바가 끌고 온 마그네트를 재빨리 뒤집어 놓았다.

  마그네트는 말도 못 하게 망가져 있었다.

  옷은 군데군데 찢어져 있고, 아름다운 얼굴은 흙먼지를 가득 뒤집어쓰고 있었다.

  ‘화룡의 어금니’ 에서부터 여기까지 다리를 잡고 질질질 끌고 왔으니 이만하길 천만다행이었다.

  “갸녀린 여자을 이렇게 무식하게 끌어 오는 게 어디 있어요. 여가에게 얼굴은 생명이란 말이에요. 흉이라도 생기면 어쩌려고 했어요? 얼굴은 곱게 생긴 사람이 심보는 짐승이야.짐승!”

  “샤바?”

  레종의 타박에 샤바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난 짐승이 아니라,곤충인데요. 샤바.”

  어렵게 항변을 했지만 그의 말은 썰렁한 농담 정도로 치부되고 말았다.

  “휴.”

  “허어어.”

  병규와 호랭이의 입에서 동시에 땅이 꺼질 듯한 한숨이 흘러나왔다.

  간신히 버려두고 왔는데,여봐란 듯이 끌고 오다니.

  ‘하늘도 무심하시지.’

  ‘저승사자는 뭘 하는지 몰라. 저런 놈 안 잡아가고.’

  인생무상이라는 단어가 머릿속에서 뱅뱅 맴돌았다.

  그런데 이 망할 녀석은 남의 타는 마음도 모르고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흔드는 것이 아닌가.

  나 잘했죠 하며 반짝이는  눈망울이란!

  둘은 순간 ‘욱!’ 하고 치미는 살심을 간신히 억눌러야 했다.

  병규와 호랭이가 미처 샤바가 무더기로 안겨 준 정신적 충격에서 채 헤어 나오기도 전이었다.

  “음.”

  “어머. 정신이 드세요?”

  가벼운 신음 소리와 더불어 레종의 밝은 음성이 들렸다.

  순간 병규와 호랭이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필사적으로 도망가려 했지만 체 발을 옮기기도 전에 그들은 굳어 버려야 했다.

  “으으음. 여긴, 여긴 어디죠?”

  마그네트의 음성이 들려왔다.

  ‘이젠 죽었구나.’  

  병규는 원망스헙게 하늘을 올려다보며 기도했다. 제발 고통 없이 죽게 해 달라고.

  호랭이는 벌써부터 마지막 결전을 준비하는 듯, 필사적으로 도력을 모으고 있었다. 죽을 때 죽더라도 한 방 정도는 먹이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스르릉.

  샤바의 주위로 은밀히 이동한 사신들이 손에 무기를 꺼내 들었다. 그들의 표정 역시 한껏 굳어 있었다.

  최후다.

  죽을 때 죽더라도 최후의 발악은 해보고 죽자.

  모두의 마음속에 공통적으로 떠오른 생각이었다.

  그런데·····.

  “여기가 어디죠? 그리고······난 누구?”

  상상도  할 말이 마그네트의 입에서 흘러나왔다.

  “기억상실증이군.”

  마그네트를 진찰한 프리먼이 결론을 내렸다.

  어이없게도 그녀는 기억상실증에 걸리고 만 것이다.

  마그네트의 폴리모프가 완벽했기 때문이지, 마법사인 프리먼조차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아내지 못했다.

  진단을 들은 사신들은 고개를 좌우로 흔들었다.

  드래곤이 기억상실이라니. 믿기지 않았다.

  “뒤통수에 강한 충격을 받은 것 같네. 아마도 그게 원인이었던 것 같아.”

  프리먼의 말에 병규와 사신들은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다른 사람들은 안됐다며 혀를 쯧쯧 찼다. 특히나 레종은 기억을 잃은 그녀를 불쌍히 여겼다.

  시간이 날 때면 마그네트의 손을 붙들고,

  “괜찮아. 곧 기억이 돌아올 거야. 꼭꼭 돌아올 거야.”

  라는 식의 말을 하며 안심시키려 노력했다.

  기억을 잏은 마그네트는 놀랍게도 순진한 소녀가 되어 있었다.

  전에는 하루 종일 싸늘한 얼굴이던 그녀가 지금은 썰렁한 농담에도 입을 가리며 호호 웃곤 했다. 오히려 너무 많이 웃어서 이상할 정도였다.

  기가 막힌 것은 그녀가 유독 샤바를 잘 따른다는 것이었다.

  샤바가 하는 행동이면 뭐든 따라하려 들었다.

  심지어 샤바의 머리카락 더듬이를 흉내 내려고, 끈으로 머리카락을 삐죽삐죽 묶고 다닐 정도였다.

  나중에 마그네트가 정신을 차리고, 이런 사실을 알게 되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병규는 벌써부터 걱정이 되었다.

  한편, 마그네트가 샤바를 따르는 것에 레종은 심한 거부감을 나타냈다. 그녀는 마그네트를 따로 불러내어 샤바에 대해 경고했다.

  그녀는 차마 샤바가 마그네트를 개 끌 듯 질질 끌고 다녔다는 말은 하지 못했다. 흑시나 여린(?)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 걱정되었기 때문이었다.

  대신 제종은 샤바는 겉보기완 달리 짐승이라며 될 수 있는 한 멀리 하는 게 좋다고 말했다.

  하지만 그녀의 경고는 먹히지 않았다.

  마그네크는 여전히 샤바를 졸졸 따라다녔다.

  “아아. 알 수 없는 것이 여심이고, 사랑이라더니. 이 또 한 마음 약한 여자의 운명이란 말인가.”

  레종은 알 수 없는 소리를 하며 좌절해 버렸다.

  

  몬스터와의 격전으로 피로가 극에 이르렀던 일행은 격전지에서 멀찍이 떨어진 곳에서 야영을 했다. 정신없이 골아 떨어졌던 그들은 다음 날 저녁 늦게야 트라우마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들에 대한 소식이 전해지자 아이들 잃은 부모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기대를 품고 맨발로 용병 길드에 달려왔다.

  그러곤 한 명의 희생도 없이 모든 소녀들이 살아 돌아왔다는 것을 알고는 기쁨의 눈물을 흘렸다.

  “고맙습니다. 영웅님.”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아이를 다시 찾은 부모들은 제이콥과 레종의 손을 꼭 잡고 몇 번이고 감사하다는 말을 전했다.

  “저, 아이들을 구한 건 제가 아니라 이쪽의 이 둘입니다.”

  제이콥은 쑥스러운 얼굴로 병규와 샤바를 소개했다. 하지만 사람들은 오히려 그가 겸허함을 보이는 것이라 생각하고 더더욱 영웅의 의로움과 용맹을 칭송했다.

  사악한 흑마법사와 무시무시한 몬스터들을 해치운 영웅으로 보기엔 병규와 샤바가 너무 약해 보였던 것이다.

  툭툭.

  호랭이가 위로하듯 병규의 어깨를 두드려 주었다.

  “아아. 알아요. 저도 안다고요. 영웅이라 불리기엔 전 너무 평범해요. 다 알고 있다니까요.”

  미안해하는 제이콥을 향해 병규는 어깨를 으쓱해 보였다.

  애초에 사람들의 칭찬을 듣기 위해 한 일도 아니다.

  그리고 사실 죽을 고생을 하며 노력한 보상은 따로 있었다.

  “할아버지.”

  “안젤라. 안젤라. 오오. 나의 안젤라.”

  늙은 음유시인과 작은 소녀가 서로를 부둥켜안은 채 눈물을 흘렸다. 얼마나 둘의 정이 애틋했던지 보는 사람의 코가 다 기큰거릴 정도였다.

  할아버지와 재회의 정을 나눈 안젤라는 노인의 귀에 작은 목소리로 소곤소곤 말을 전했다.

  노인의 주름진 눈이 휘둥그레 떠졌다.

  놀라운 말을 들었기 때문이다.

  안젤라의 등을 토닥이던 노인이 불편한 걸음으로 병규에게 다가왔다.

  “고맙네. 안젤라에게 진실을 들었네. 이 고마움을 어떻게 갚아야 할지 모르겠구먼.”

  노인은 병규의 손을 꼭 잡고 감사의 눈물을 흘렸다.

  당시 다른 소녀들은 마법진이 안겨 주는 고통에 정신이 혼미해서 누가 자신을 구해 주었는지도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호랭이의 도술에 잠든 그녀들이 정신을 차렸을 때 본 것은 피를 뒤집어 쓴 제이콥이 지친 일행들을 독려하며 트라우마로 향하는 장면이었다.

  소녀들이 자신들을 구한 영웅을 제이콥이라고 오해하게 된 것은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안젤라는 달랐다.

  가장 마지막에 제물로 쓰였던 그녀는 의식이 흐릿해지기 전 확실히 병규의 얼굴을 보았던 것이다.

  “은혜를 갚을 필요는 없어요. 안젤라가 무사하고, 또 당신이 이렇게 기뻐하는 모습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 됩니다.”

  병규는 연신 고맙다고 굽실거리는 노인의 양어깨를 두 손으로 꼭 붙들어 주었다.

  “험험.”

  흐릿한 미소로 병규와 노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레종의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험험.”

  흐릿한 미소로 병규와 노인의 말을 경청하고 있던 레종이 주먹으로 입을 가리며 가볍게 헛기침을 했다.

  “아!”

  그제야 잊은 게 있다는 걸 깨달은 병규는 품속에서 수수한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선물이야. 안젤라.”

  목걸이를 소녀의 목에 걸어 주며 병규는 나직이 속삭였다.

 “아······.”

  소녀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그러더니 끝내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으아아앙. 오빠.”

  병규는 엉엉 울어내는 소녀의 등을 부드럽게 토닥여 주었다.

  “너 말이야. 아무래도 여자 복은 더럽게 없는 것 같다.”

  호랭이가 말했다.

  “왜요?”

  “고작 어린 꼬맹이에게 목걸이 하나 주려고 그 고생을 했으니 하는 말이다. 나중에 혹 사랑하는 여자에게 혼인 반지라도 하나 건네주려면 아주 목숨을 걸어야 할 것 같구나. 안 그러냐?”

  병규는 호랭이의 말에 피식하고 웃고 말았다.

  이때만 해도 그는 머지않은 장래에 이 농담이 현실로 나타나리라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소녀들이 무사히 구출되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트라우마는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다.

  한낱 영웅심에 전멸했으리라 여겼던 용병들이 살아 돌아온 것이다. 게다가 희생됐을 줄 알았던 소녀들까지 모두 구출해 내고서 말이야.

  사람들은 프리즘 용병단을 칭송했고, 그들의 리더인 제인콥의 용맹에 열광했다.

  또한 생면부지의 소녀들을 구하기 위해 어마어마한 금약을 선뜻 의뢰비로 내놓고, 그 자신도 기사들을 이끌고 소녀 구출대에 참가했던 레종의 의로움도 찬양했다.

  트라우마가 몬스터들에게 당했다는 소릴 듣고 급히 복귀한 성주도 손수 여관으로 찾아와 고마움을 표했을 정도로 그들의 인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리고 이 일을 계기로 제이콥은 트라우마 일대의 잿빛의 용사라는 명성을 떨치게 되었다.

  프리즘 용병단과 제이콥이 대륙의 새로운 영웅으로 떠오르고 있을 때, 병규와 호랭이는 좁은 여관방 구석에 쳐박혀 한숨남 푹푹 쉬고 있었다.

  그들을 이렇게 한숨짓게 만드는 것은 다름 아닌 침대에서 뒹굴거리는 샤바를 진지하게 따라하고 있는 마그네트 때문이었다.

  그냐는 아직 기억을 되찾지 못했다.

  병규와 호랭이 입장에서는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 아닐 수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이대로 곁에 두는 건 절대로 사양이었다.

  언제 그녀가 제정신을 차릴지 모르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정신을 차리게 된다면·······.’

  병규는 몸을 부르르 떨었다.

  지금도 ‘화룡의 송곳니’에서  보였던 그녀의 박력을 떠올릴라치면 절로 이가 악물려지곤 한다.

  그런데 그때의 힘이 원래 마그네트가 가진 힘이 고작10분의 1이란다. 폴리모프 한 드래곤이란 그만큼 힘이 많은 제약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만약 기억을 되찾은 그녀가 그들에게 적의를 드러낼 경우, 그들은 죽은목숨이나 다름없는 것이다.

  “저걸 대체 어떻게 하죠?”

  “그걸 내가 어떻게 알아?”

  “어떻게 버릴 방법 없을까요?”

  “그렇게 실해하고도 그런 소릴 해?”

  사실 병규와 호랭이는 마그네트를 떼 놓으려고 몇 번이나 노력했다. 하지만 그 어떤 노력도 소용이 없었다.

  그녀는 정말이지 귀신같이 찾아왔다.

  비록 기억은 잃었어도 드래곤의 능력 모두가 사라진 건 아닌 모양이다.

  “휴우.”

  병규는 다 늙은 노인네처럼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정말이지 마그네트를 볼 때마다 10년씩 늙는 것 같았다.

  그녀에 대한 걱정은, 이 일의 원흉에 대한 분노로 자연스럽게 흘러갔다.

  ‘저 골칫덩이!’

  가뜩이나 예민한 샤바다.

  병규가 째려보자 마그네트와 뒹굴거리며 놀던 샤바는 흠칫 놀라더니 쪼르르 침대 밑으로 도망간다.

  인간의 몸이 되었으면서도 아직 예전의 본성을 버리지 못한 것이다.

  샤바가 구석으로 피신하자마자. 때를 같이 하여 소리 없이 나타난 사신들이 샤바의 앞을 가리고 섰다.

  츠르르릉.

  처척.

  일제히 무기를 꺼내 들고 병규를 경계한다.

  나타나자마자 적의를 드러내는 걸 보니, 이미 병규를 마스터의 적으로 낙인찍은 모양이다.

  보는 앞에서 몇 번 샤바를 구박했더니 자동으로 저렇게 되어 버렸다.

  샤바가 구박당하는 걸 싫어하는 것은 사신들만이 아니었다.

  “잌. 달링을 괴롭히지 말란 말이야.”

  눈썹을 치켜뜬 막네트가 병규의 두 볼을 좌우로 찍 늘리며 협박한다.

  정신 나간 마그네트는 이젠 샤바를 아예 달링이라고 부른다. 최근엔 샤바와의 아름다운 결혼 생활을 위해 인생 설계에 매달리고 있는 듯하다.

  잘못하다간 바퀴벌레와 드레곤이란 참으로 엄청난 커흘이 탄생하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샤바는 전혀 관심도 없었지만.

  “달링을 침대 밑에서 나오게 하란 말이야. 흑흑. 빠알리이. 얼른!”

  병규의 볼을 찍찍 늘리던 마그네트가 훌쩍거리며 막무가내로 조른다.

  병규의 볼을 찍찍 늘리던 마그네트가 훌쩍거리며 막무가내로 조른다.

  병규는 마그네트의 머리를 통 하고 때려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 이렇게 크다간 한없이 버릇없는 아이가 될 것 같다.

  하지만 안 될 말이다.

  만의 하나 잘못 때려서 그녀의 기억이라도 돌아오면?

  그거야말로 초난감한 사태가 아닌가.

  오히려 그녀가 샤바와 놀다 실수로라도 넘어질라치면, 부리나케 달려가서 붙들어 줘야 할 판이다.

  ‘그러고 보니 예전에도 이 비슷한 일이······.’

  머리를 굴리던 병규는 어렵지 않게 기억을 떠울릴 수 있었다.

  퀴니.

  그녀를 만났을 때도 이런 식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그런 생각을 그 혼자만 한 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병규야.”

  호랭이가 목소리를 착 깔며 그를 불렀다.

  “왜요?”

  “아무래도 말이야······.”

  “?”  “넌 평생 얼라들 돌보며 살아야 되는 팔자인가 보다.”

  “!!!”

  

  “호행이.”

  팔베개를 하고 누운 병규가 호랭이를 불렀다.

  “왜?”

  그의 배 위에 몸을 또르르 말고 낮잠을 즐기던 호랭이가 한쪽 눈만 살짝 뜨며 물었다.

  “집으로 돌아갈 방법······있을까요?”

  “왜? 갑자기 돌아가고 싶냐?”

  “······그냥요.”

  “흐음.”

  호랭이는 눈을 감고 잠시 침묵했다.

  신선님은 병규가 왜 갑자기 이런 얘기를 꺼내는지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퀴니가 생각났기 때문이겠지.’

  가족처럼 옹기종기 살다가, 갑자기 이산가족처럼 찢어져 버렸으니.

  시간이 지났다 하여 보고 싶은 마음이 덜해지는 것은 아니다.

  사실 돌아가고픈 마음은 호랭이도 마찬가지였다.

  입을 꾹 다물고 있던 한참 만에 호랭이가 다시 입을 열었다.

  “어쩌면······가능할 것 같기도 하다.”

  “정말요?”

  병규가 벌떡 몸을 일으키며 되물었다. 그 바람에 배 위에서 졸고 있던 호랭이가 데굴데굴 침대 아래로 굴러 떨어지고 말았다.

  “아이쿠. 신선 죽네. 이놈아, 너 설마 나까지 기억상실로 만들고 싶은 게냐?”

  병규는 앓는 소리를 읊은 호랭이를 두 손으로 번쩍 들어 올렸다. 그리곤 급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이에요? 호랭이. 정말로 집으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낸 거에요?”

  “아직 확실한 것은 아니지만······.”

  병규의 표정이 시무룩해졌다.

  하지만 호랭이의 뒷말에 곧바로 두 눈에 생기를 띄워 올렸다.

  “길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닌 것 같다.”

  “어떤 길이요?”

  “이놈아. 확실하지 않다고 했잖느냐. 그렇게 잔뜩 기대를 하면 불안해서 어디 입술 한번 뻥긋해 보겠냐?”

  “기대 안 할 테니까. 어서 말해 보세요.”

  “쳇. 그 얼굴을 하고 기대를 안 하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겠다.”

  호랭이는 고개를 돌리며 빈정거렸지만, 진지한 병규의 태도에 결국 입고 열고 말았다.

  “어쩌면 마법으로 가능할지도 모른다.”

  “마법이요?”

  “그래.”

  호랭이는 차분한 목소리로 그동안 알아낸 사실을 풀어놓기 시작했다,

  그들은 이 낯선 세계로 오게 된 것은 아공간이라는 암흑의 통로를 통해서였다.

  다시 돌아가기 위해선 그 아공간을 여는 방법을 알아내야 한다. 그 단서를 호랭이는 이 세계의 마법에서 찾았다다.

  그동안 프리먼이 샤바에게 마법을 가르칠 때마다, 오히려 호랭이가 더 집중해서 들었던 것도 다 이런 짐작 때문이었다.

  마법은 호랭이가 익힌 도술과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었다. 그래서인지 이해도 빨랐다.

  솔직히 샤바는 듣기만 했을 뿐, 관심이 없어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하지만 호랭이는 이미 마법 체계에 대해 상당한 지식을 쌓은 참이다.

  하지만 아직 정보가 턱없이 부족했다.

  더 많은 자료가 필요했다.

  “어디에 가야 그 자료라는 것을 얻을 수 있죠?”

  “수도에 가면 바법사의 탑이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다. 마법사의 탑은 마법사드의 길드 같은 곳으로 마법에 대한 자료와 정보가 넘쳐 나는 곳이라고 한다.”

  “흠.”

  병규는 손바닥으로 턱을 받친 채 생각에 잠겼다. 잠시 후,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서며 소리쳤다.

  “좋아요. 우리 가 보도록 해요.”

  “엥?”

  호랭이가 뭐라 묻기도 전에 병규는 방 밖으로 후다닥 달려 나갔다. 조금 있자 제이콥의 놀란 목소리가 들려왔다.

  “뭐? 수도인 유리스로 가자고?”

  호랭이에게 말을 듣자마자 대뜸 제이콥을 조르러 달려간 것이다.

  ‘녀석 어지간히 기쁜 모양이군.’

  호랭이는 흐뭇하게 웃었다.

  이제 목표가 생겼다.

  그 목표가 과연 그들을 집으로 돌려보내 줄지 확실하지는 않지만, 열심히 노력한다면 분명 좋은 결과가 있을 것이다.

  그것이 세상의 이치라는 것이다.

  ‘하지만 그 전에 도력을 회복하는 게 먼저겠지’

  호랭이는 창가에 앉아 비스듬히 떠오르는 달을 응시했다.

  리치의 일에 휘말리면서 그동안 모아 두었던 도력을 너무 많이 잃어버렸다.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게 된 셈이지만 이곳은 워낙에 기가 풍성한 곳이라 머지 않아 좋은 성과가 있을 것이다.

  본신의 힘을 되찾기만 하면, 혹 앞으로 펼쳐질지도 모를 험난한 여정에 큰 도움이 될 터.

  쉴새없이 떠오르는 상념을 차분히 갈무리하며, 그윽한 시선으로 달을 올려다보는 호랭이였다.

  호랭이에게 마법사의 탑에 대한 얘기를 듣자마자 병규는 수도로 가자며 제이콥을 닦달 했지만, 끝내 그는 고개를 저어 버렸다.

  그들은 아직 트라우마에 더 머물길 원했다.

  몇 번을 더 요청했지만 제이콥과 프리즘 용병단 일행은 끝내 거절했다.

  표면적으로는 성주가 그들에게 맡긴 일이 있다는 이유에서였다. 실제로 성주가 그들에게 멋진 제안을 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이 병규와 함께 수도로 가지 못한다고 말한 진실된 이유는 드래곤인 샤바와 동행하는 것이 부담스러웠기 때문이다.

  그들의 이런 속마음을 모르는 병규는 서운할 수밖에 없었다.

  프리즘 용병단은 이드라센에 온 후, 처음으로 생긴 동료다. 그간 적지 않은 모험을 함께했고, 정도 많이 들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언제까지고 이곳에 쳐박혀 있을 수는 없었다. 그들과 헤어지는 한이 있더라도 지금은 수도로 가야 할 때였다.

  병규는 그들에게 자신의 결심을 말했다.

  “언제 떠날 거냐?”

  “내일 당장 갈 겁니다.”

  “그렇게······급하게 갈 건 없지 않나? 꽤 먼 여정이 될 텐데. 필요한 물품도 구입하고, 아는 사람들과 작별 인사도 하는 것이······.

  프리먼의 제안에 병규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이왕 가기로 결심한 것. 빠르면 빠를수록 좋다고 봐요.”

  “······그래. 알았다. 네 결심이 그렇다면 어쩔 수 없지.”

  고개를 끄덕인 제이콥은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피치 못할 사정으로 헤어지게 되었지만, 고난을 함께한 동료들이다. 수도인 유리스까지는 쉬지 않고 말을 달려도 일주일 이상 걸리는 먼 거리다.

  필요한 물품이 한두 가지가 아닐 터.

  제이콥은 그 물품들을 자신이 손수 구해다 줄 생각이었다.

  “잠깐 기다려라.”

  제이콥이 나가자 고든이 병규 앞에 지도를 펼쳐 보였다.

  평소 말이 거의 없는 그가, 오늘만은 파격적으로 병규ㅇ에게 많을 말을 하며 수도까지 가는 길을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가는 길에 꼭 들러서 식량을 보급받아야 하는 마을이라든지, 몬스터가 많이 출몰하는 숲. 그밖에도 알아 두어야 할 여러 가지 것들을 일일이 지도 위에 글을 써 가며 상세하게 알려 주었다.

  고든이 글로 빼곡히 들어찬 지도를 건네주자 이번엔 프리먼이 그의 앞에 앉았다.

  중년의 그는 병규를 보며 주저주저하더니 왼손에 끼어져 있던 반지를 하나 꺼내 주었다.

  “이걸······샤바······군에게 전해 주게. 그에겐 필요 없는 물건이겠지만, 내 성의니.”

  “프리먼 그건·······.”

‘  프리먼이 건네준 반지를 본 고든과 호젤이 가볍게 놀란다.

  그 반지는 프리먼이 가장 아끼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설마 반지를 건네줄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다.

  병규는 프리먼이 건네주는 반지를 두 손으로 받아 들었다.

  반지의 온기가 그의 따뜻한 배려처럼 느껴졌다.

  “기뻐할 거에요.”

  병규가 희미하게 웃으며 말했다.

  “틀림없이 샤바는 기뻐할 거에요.”

  

  다음 날 오후, 성문 앞에서 여섯 명의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병규 일행을 마중 나온 사람들이었다.

  프리즘 용병단 네 명을 제외하면 안젤라와 그녀의 조부가 전부였다.

  오히려 떠나는 사람이 많았다.

  병규, 호랭이, 샤바, 사신들, 그리고 마그네트. 

  마그네트의 처우에 대해 병규와 호랭이는 떠나기 직전까지 고민했다.

  그러나 결론은 역시 데려가자라는 것이었다.

  놔두고 간다고 해도 반드시 찾아올 것이 뻔한데다,혹 못 찾아온다 해도 그녀가 트라우마에서 정신을 찾으면 그 분노를 엉뚱한 사람들에게 쏟아 낼 가능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울며 겨자 먹기로 그녀를 데려가기로, 아니 모시기로 결심했다.

  대신 병규는 원대한 계획을 하나 세웠다.

  여행 동안 온잦 정성을 들여 그녀를 잘 대해 주어서, 기억을 되찾아도 차마 자신을 죽이지 못하게 만든다는 것이 그 원대한 계획의 주요 골자였다.

  호랭이는 참으로 치졸한 계획이라며 비웃었지만 병규는 이것을 지상 최대의 과제라며 성실히 임할 것을 천명하였다.

  “오빠.”

  안젤라는 병규의 소매를 붙들며 울먹거렸다.

  당장이라도 눈물을 쏟아 내고 싶은 걸 간신히 참고 있는 모양이었다.

  병규는 그녀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잘 있어. 안젤라. 다시 볼 때까지 할아버지 말씀 잘 듣고.”

  “오빠. 돌아올 거죠? 안젤라 보러 다시 올 거죠?”

  그녀의 간절한 물음에 병규는 무릎을 꿇고 소녀와 시선을 맞추었다.

  “그래. 꼭 올께.”

  “꼭?”

  “그래. 꼭!”

  굳게 다짐한 병규는 안젤라의 목에 걸린 목걸이에 시선을 옮겼다. 얼마나 애지중지했는지 광이 번쩍거린다.

  “ 목걸이 정말 잘 어울려.”

  병규는 마지막으로 그렇게 칭찬해 주었다.

  그가 안젤라와 작별인사를 마치자 제이콥이 말고삐를 그에게 넘겼다. 그가 건네준 말에는 짐이 가득 실려 있었다.

  그가 병규를 위해 준비한 물건들이었다.

  “먼 여행길이야. 하지만 너라면 틀림없이 잘 해낼 거라 믿느다.”

  “고마워요. 제이콥. 그동안 많이 배웠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날 하나하나 가르쳐 주느라 고생 많았어요.”

  병규는 진심을 담아 허리를 꾸벅 숙였다.

  “참. 그리고 보니 레종도 수도 쪽으로 간다고 그랬었죠?”

  “그래. 그렇게 들었다.”

  “아깝게 됐네요. 조금만 늦게 갔으면 같이 갈 수 있었을 텐데.”

  트라우마로 돌아온 다음 날, 레종과 디스는 급한 볼일이 생겼다며 기사들을 이끌고 황급히 길을 떠났다.

  급한 볼일이 무엇인지는 말해 주지 않았지만, 두 사람의 표정이 좋지 못했던 것으로 보아 무언가 안 좋은 일이 생긴 것만은 틀림없어 보였다.

  “수도에 도착해서 시간이 나면 한번 그녀를 찾아봐야겠어요.”

  병규의 말에 제이콥의 표정이 이상하게 변했다. 무언가 할 말이 있는데 애써 자제하는 모습이었다.

  제이콥이 물러나자 호젤이 불만 가득한 표정으로 앞으로 나섰다. 그녀는 묵직한 가죽 주머니 하나를 그에게 툭 던져 주었다.

  “이거. 제이콥이 주라고 한 거야.”

  열어 보니 금화가 잔뜩 들어 있었다.

  “참나. 아직 어린 녀석에게 돈을 이렇게 잔뜩 줘서 뭘 어쩌겠다는 건지 모르겠어. 정말 리더는 바보야.”

  호젤은 병규와 시선 맞추는 걸 피하며 연신 투덜거렸다.

  병규는 마냥 웃기만 했다.

  그는 알 수 있었다.

  이것이 석별의 정을 나누는 그녀 나름대로의 방법이라는 것을.

  “잘 있어요. 호젤. 제이콥과 잘되길 빌겠어요.”

  “무, 무슨 망측한 소리야?”

  병규의 말에 호젤은 볼을 벌겋게 붉히며 버럭 고함을 질렀다. 도망치듯 뒤로 빠지는 그녀의 모습에 사람들은 박장대소를 터트렸다.

  호젤에 이어 병규는 고든을 봤다.

  고든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게 이 말없는 사내의 이별법이었다.

  병규는 그와 딱 어울리늠 멋진 이별이라 생각했다.

  한편, 프리먼은 고개를 쭉 빼내어 샤바를 살폈다. 불안한 표정이던 그는 샤바의 손가락에 그가 준 반지가 끼어져 있자 마냥 행복한 얼굴이 되었다.

  이때, 병규가 샤바에게 눈짖을 했다.

  마그네트와 놀고 있던 샤바가 프리먼에게 쪼르르 달려가 그를 꼭 안아 주었다.

  “선물 고마워요. 샤바. 절대 잊지 않을게요. 샤바샤바.”

  샤바의 말에 프리먼은 끝내 감격의 눈물을 떨어뜨렸다.

  중년의 나이가 되도록 자식이 없던 그에게 붉은 대지에서 만난 샤바는 자식과 같은 존재였을 것이다. 샤바가 드래곤만 아니라면 아마 제이콥과 헤어지는 한이 있어도 샤바를 따라갔을지도 모른다.

  그만큼 그는 샤바에게 정을 많이 쏟았던 것이다.

  모인 사람과 인사를 마친 병규는 즉시 말에 올랐다.

  “그럼. 이만 가 볼게요.”

  간단하게 말을 마친 그는 도망치듯 말을 타고 달렸다. 샤바와 사신들이 바쁘게 그의 뒤를 쫓았다.

  사람들은 그가 떠난 후에도 한동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어? 병규가 다시 돌아온다.”

  초젤이 성문을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과연 병규가 부리나케 먼지를 날리며 말을 달려 돌아오고 있었디.

  재주를 넘듯 달리는 말 위에서 뚜어내린 병규는 제이콥과 호젤을 양손으로 붙들고 조용한 목소리로 물었다.

  “지금까지 샤바를 드래곤이라고 생각했죠?”

  제이콥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아. 알고 있었니?”

  병규눈 대답 대신 빙그레 웃었다. 그러고는 그의 귀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사실······샤바는 드래곤이 아니에요.”

  제이콥의 입이 쩍 벌어졌다.

  그의 표정이 재미있었던지 하하하 웃는 병규는 세워둔 말 위에 가볍게 올라타며 큰 목소리로 외쳤다.

  “그러니까 다음에 만나면 편하게 대하셔도 돼요. 샤바는 정말로 순진한 녀석이거든요,”

  병규는 그렇게 손을 흔들며 가 버렸다.

  “저 녀석.”

  제이콥은 손으로 코를 훑었다. 왠지 코끝이 찡해져서였다

  “그래. 다음에 만나면 정말로 편하게······사귀어 보자.”

  병규 일행이 떠나가고 시간이 한참이나 더 흘렀다.

  프리즘 용병단은 이미 여관으로 돌아갔지만 안젤라와 그녀의 조부는 여전히 그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정말로 가 버렸네요.”

  멍한 눈으로 성 밖을 보며 안젤라가 말했다. 노인은 누물을 뚝뚝 흘리는 안젤라의 머리를 부드럽게 어루만져 주었다.

  “그래. 갔구나. 정말로 가 버렸구나. 허허. 안타깝구나. 그의 은혜는 하늘처럼 높은데, 내가 줄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으니.”

  늙은 음유시인은 한탄했다.

  그때 안젤라가 노인의 소매를 당기며 말했다.

  “있어요. 할아버지.”

  노인이 소녀를 바라보며 물었다.

  “꼬마 안젤라야. 다 늙은 할야비가 뭘 해 줄 수 있을꼬? 그가 원한다면 썩어 가는 내 뼈를 갈아서라도 은혜를 갚고 싶구나.”

  “할아버지의 뼈를 갈아 낼 필요는 없어요.”

  소녀는 밝은 음성으로 말했다.

  “단지 할아버지가 할 수 있는 일을 하시면 돼요.”

  “내가 할 수 있는 일?”

  노인이 못 알아듣는 듯하자 안젤라는 노인의 하프를 가볍게 드르릉 튕겼다.

  비로소 손녀의 뜻을 깨달은 노인의 입가에 미소가 흘렀다.

  “그래. 내가 할 수 있는 알아 있구나. 하나 있었어. 노래를, 그를 위한 아주 멋진 노래를 만들어야겠구나. 허허허허.”

  병규가 그 일행이 트라우마를 떠난 직후, 성주의 집무실은 비밀리에 입수된 정보로 인해서 발칵 뒤집혀 버렸다.

  “모리스 공작이 반란을?”

  부관이 전해 온 소식에 성주인 글로리 후작은 아연실색했다.

  “네. 이미 황성은 반란 세력에게 완전히 점렬당했고, 근위대장과 왕립기사단장들을 비롯, 황실의 주축들은 모두 공작의 손에 붙잡힌 듯합니다. 그리고 들려온 보고에 의하면 국왕 폐하께선······.”

  차마 부관은 말을 잇지 못했다.

  털썩.

  글로리 후작은 넘어지듯 의자에 쓰러졌다.

  “허허허.”

  허탈한 웃음만 나왔다.

  모리스 공작의 야망이 크다는 것이 일찌감치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러나 반란이라니.

  이렇게 엄청난 이를 저지를 것이라손 상상도 하지 못했다.

  순식간에 황성이 점령당한 것으로 보아, 이번 사건은 오래전부터 계획된 일임이 틀리없다.

  그런 의심을 확신하게 만들어 주는 증거가 부관의 입을 통해 하나씩 거론되었다.

  “반군이 황성을 접수하자마자 기다렸다는 듯이 각처의 귀족들과 영주들이 황제의 무능을 규탄하며 모르스 공작의 정당성을 백성들에게 강조했다고 합니다. 반란군에 대해 반발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니나 그 정도는 미미하다고 봐도 될 듯합니다. 이러한 정황으로 미루어 보아 공작은 이미 오래전부터 정계의 귀족들을 자신의 편으로 끌어들였음이 분명합니다

  더불어 유언비어와 정보 교란이라는 고단위의 술수도 동시에 사용했습니다.

  지금 수도는 반란군들이 퍼트린 흑색선전이 황행하고 있다고 합니다. 이는 몇 년 전부터 민간에 퍼지기 시작한 왕가 모독 노래와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입니다.

  그 내용의 골자는 황제 폐하의 무능함과 공주의 사생활에 대한 음담패설로······.“

  “터무니없는 소리.”

  글로리 후작은 책상을 쾅 하고 내려쳤다.

  현임 황제가 다소 온화한 성격인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그 때문에 아리스 왕국은 그 어느 때보다 태평한 시기를 맞이했다. 세금을 줄이고 병사들의 복무 기한도 조금씩 줄여 나갔다. 그런데 그렇게 생긴 보안상의 허점을 간악한 공작 녀석이 파고들 줄이야.

  “공주님은? 공주님은 어떻게 되셨나?”

  분노에 떨던 글로리 후작이 문득 생겨난 듯, 부관에게 소리쳐 물었다.

  “그, 그것이·······. 공주님은 사건 당시 수행 병사들을 이끌고 여행 중이었던 것으로 보고되고 있습니다. 공작가의 사병들이 아직 공주님의 행방을 수소문하고 있는 것으로 보아 아직까지······.”

  “됐어!.”

  후작의 표정이 밝아졌다.

  아직 희망이 모두 꺼져 버린 것은 아니다.

  “지금 즉시 병력을 모은다. 병력이 모이는 대로 우리는 공주님을 찾으러 출동한다. 그리고 오늘부터 트라우마는 전시체제 상태로 돌입한다. 출입하는 사람들을 통제하고, 성내에 거주하는 성민들 가운데 젊은 사람들을 모아 민병대를 조직하시오.”

  “알겠습니다..”

  글로리 후작의 명령에 부관은 허리를 깊숙이 숙였다.

  명을 받은 부관이 나가자 후작은 자리에서 일어나 벽에 걸린 검과 투구를 꺼내 들었다.

  투구를 내려다보는 후작의 눈길에 음울함이 맺혔다.

  수도가 반란군에게 함락되고 거의 모든 귀족들이 공작의 편에 선 상황이다. 이제 와 공주를 구출해 내고, 왕권을 수호하는 것은 자살 행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명예를 아는 기사다.

  군주를 위해, 그리고 정의를 위해 목숨을 거는 기사인 것이다.

  턱.

  은빛 광채가 흐르는 투구를 머리에 덮어썼다. 이어 후작은 장검을 손에 들었다.

  더 이상 그의 눈동자에 암울함은 없었다.

  오직 용솟음치는 투기와 활화산 같은 정열만이 남아 있을 뿐이었다.

  그는 힘차게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그를 기다리는 전장으로.

  필립 가문의 반란.

  이 사건을 계기로 느릿느릿하게 흐리던 이드라센 대륙의 시간은 갑자기 숨 가쁘게 달리기 시작했다.

   

[5권 끝,6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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