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9화 (42/102)

인간이 아닌 넌 대체 뭐냐?

  

병규가 눈을 떴을 때 처음 본 것은 걱정스레 내려다보는 호랭이와 샤바의 얼굴이었다.

  “좀 괜찮냐?”

  호랭이가 물었다.

  “으······네.”

  병규는 힘없는 목소리로 대답하며 상체를 일으켰다.

  머리가 무거웟다.

  무언가 끔찍한 꿈을 꾼 기분이다.

  “녀석아. 봐라. 내가 누구냐?”

  호랭이가 그의 얼굴 앞에 불쑥 머리를 들이밀며 물었다.

  “그건 ······무슨 장난이죠?” 

  “정상이군.”

  호랭이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녀석이 정신을 차린 것 같다.

  “무슨 일이 있었나요?”

  “몰라서 물어?”

  “ ······모르니까 묻죠.”

  호랭이의 얼굴이 황당하게 변했다.

  “설마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는 거냐?”

  병규는 뻣뻣해진 뒷목을 만지작거렸다.

  “조금은요.”

  “어디까지 기억나는데?”

  “산에서 마멉진 안으로 들어갔는데, 호랭이가 힘을 읽고, 망할 리치가······.”

  두서없이 지껄이던 병규가 갑자기 벌떡 일어났다.

  “마,맞아. 리치! 그놈은 어떻게 됐죠? 머리 둘 달린 오우거는요? 설마 우리 모두 죽은 건가요?”

  “일단 앉아 봐. 우선 기억나는 데까지 말해 봐.”

  호랭이의 담담한 말에 머쓱해진 병규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위험했어요. 트윈헤드 오우거는 엄청 강했어요. 힘은 달리고, 요수의 발톱은 무뎌졌고, 방법이 없었어요. 그래서······.”

  병규의 동공이 확장됐다.

  드디어 떠오른 것이다. 잠시 잊었던 기억의 파편.

  “기억이 다 난 거냐?”

  “·······네.”

  “휴. 왜 그랬냐? 왜 그렇게 미친놈처럼 날뛰었어?”

  “······글쎄요.”

  오우거의 피를 마시고 속에서 뭔가가 부글부글 끓었다.

  더웠다.

  아니 뜨거웠다.

  그 불길은 너무도 거세어 세상 전부를 활활 태워도 부족할 것 같았다.

  무언가 불길을 식힐 것이 필요했다.

  그래서······피를 원했다.

  병규의 인상이 찌그러졌다.

  그땐 왜 그렇게 비린내 나는 피가 먹고 싶던지.

  왜 그렇게 힘을 갈구했던지.

  지금 생각하면 이해할 수 없지만 그때 당시엔 그게 너무도 당연한 것처럼 여겨졌다.

  혼란에 빠진 병규를 호랭이가 위로했다.

  “됐다. 이젠 정상이 되었으니 고민할 필요 없다. 아마도 허용량을 넘어선 힘을 흡수하는 바람에 잠시 뇌가 이상을 일으켰던 모양이구나. 어쨌든 이제는 됐다. 그래도 혹시 내장에 무리가 있을지 모르니 물을 먹어 둬라.”

  “네.”

  병규는 샤바의 수통을 방아 꿀꺽꿀꺽 마셨다.

  별다른 이상은 느껴지지 않았다. 망가진 신체가 재생될 때의 그 싸늘하면서도 화끈거리는 느낌이 없었다.

  몸은 지극히 정상인 것이다.

  아니 오히려 그 어느 때보다 힘이 넘쳤다.

  ‘오우거의 피를 흡수해서 그런가?“

  수통의 물을 반쯤 마신 병규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안젤라.”

  뒤늦게 그녀가 떠올랐다.

  반쯤 미쳐 버린 상황에서 다행히 쇠못을 뽑아낼 수 있었지만 그녀는 워낙에 피를 많이 흘린 데다 극심한 충격을 너무 많이 받았다. 어쩌면 쇼크로······.

  “아니다. 괜찮아.”

  그의 불안한 마음을 읽은 호랭이가 어깨를 토닥였다.

  “죽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안심해도 돼.”

  호랭이가 작은 발로 한쪽을 가리켰다.

  안젤라와 소녀들은 작은 바위 그늘 아래 있었다.

  후다닥 뛰어가 보니 다들 안색도 좋아 보였다. 그녀들은 모두 곤히 잠들어 있었는데, 어찌 된 일인지 쇠못이 박혔던 자리가 거의 치료되어 있었다.

  “위험해 보이기에 내가 도술을 좀 사용했다. 아마 관리만 잘하면 흉터도 남지 않을 게야. 너무 피곤해 보여서 재워 두었다.”

  “잘하셨어요. 호랭이.”

  병규는 호랭이에게 고마운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리치는 어떻게 됐죠?”

  “샤바가 우연히 놈의 영혼이 든 항아리를 주워 왔다. 덕분에 깨끗하게 성불시켜 줄 수 있었지.”

  호랭이는 의기양양하게 말했다.

  “······마왕은 강림하지 않았나 보군요.”

  당연한 말이다.

  만약 마왕이 강림했다면 여기 있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살아남지 못했을 것이다.

  “마왕은 소환되지 않았다. 주문이 완성되기 전에 여아들을 구해 냈기 때문이겠지.”

  “천만다행이군요.”

  그때는 반쯤 미쳐 마왕의 강림을 간절히 갈구했었다. 하지만 지금 생각해보면 터무니없는 짓이다. 자칫했으면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을 뻔했다.

  “그럼 모든 게 다 풀린 셈이군요.”

  병규가 명랑한 목소리로 말했다.

  안젤라도 구했고, 마왕의 강림도 막았다.

  골치 아픈 문제는 모두 해결된 것이다.

  “그게 말이다.”

  호랭이가 어색한 표정으로 주위를 턱짓했다.

  무심코 호랭이가 가리킨 방향을 둘러본 병규는 깜짝 놀랐다.

  “몬스타가······.”

  수많은 몬스터가 주위를 포위하고 있었다.

  “리치 녀석의 환상마법은 깨진 게 확실하다. 더 이상 마기(魔氣)가 느껴지지 않아. 그런데도 놈들은 물러나지 않는구나.”

  원래 몬스터들을 인간을 식량으로 여겼다.

  마법이 풀렸다 해도 물러나지 않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다행히 마법진이 그려졌던 곳까지는 접근하진 않앗지만, 만약 마법이 흩어졌다는 것을 알게 되면 곧바로 공격해 올 것이다.

  ‘힘들게 됐군.’

  병규는 잠들어 있는 소녀들을 흘끔 쳐다보았다.

  그와 샤바만이라면 몬스터들이 그리 두렵지 않다. 전력을 다해 달리면 쉽게 달아날 수 있다. 문제는 다수의 몬스터들로부터 열한 명의 소녀들을 지켜 내야 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호랭이. 전에 썼던 도술을 써 봐요. 어쩌면 몬스터들이 겁을 집어먹고 달아날지도 몰라요.”

  “그게······불가능해. 소환징에 같혔을 때, 그동안 모은 오력의 대부분을 상실한 데다, 그나마 남아 있던 도력마저 여아들을 치료하는 데 모두 소모해 버렸다.”

  “낭패에요.”

  마지막 남은 비장의 한 수마저 사라진 셈이다.

  이제는 방법이 없다. 하는 데까지 몬스터들을 막는 수밖에.

  몬스터들이 슬금슬금 다가오기 시작했다.

  드디어 이곳의 마력이 사라졌다는 것을 놈들도 눈치 cos 것이다.

  일촉즉발의 상황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미천한 것들. 썩 물러나거라.”

  하늘에서 호통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 목소리엔 범접하기 힘든 거대한 기운이 갈무리되어 있었다.

  쩌렁쩌렁한 음성에 병규는 두 손으로 귀를 막았다.

  ‘허뜨야. 누군지 몰라도 목소리 한번 기가 막히게 크네.’

  끼엥.

  끄드드득.

  병규들에게 접근하던 몬스터들은 당장 사색이 되어 사방팔방흐로 흩어졌다.

  “뭐야?”

  병규는 어안이 벙벙해졌다.

  하늘에서 들려온 호통 한마디에 수많은 몬스터들이 모두 달아나 버리다니.

  “저기다.”

  호랭이가 하늘을 가리켰다.

  신비한 분위기를 뿜으며 은발의 소녀가 구름을 타듯 부드럽게 하늘에서 내려오고 있었다.

  “마그네트?”

  병규는 깜짝 놀라 저도 므로게 소릴 질렀다.

  “그게 어떻게.”

  마그네트는 샤바를 따르는 사신들 중 하나로 앳된 얼굴의 소녀였다. 그러나 지금 그녀는 과거 그가 알던 그런 모습과 많이 달랐다.

  전신에서 범접할 수 없는 위엄이 풀풀 날리고 있었다.

  게다가 어째를 내리누르는 듯한 이 중압감. 감히 얼굴을 마주 보는 것도 힘겨울 정도였다.

  깃털처럼 가볍게 바닥으로 떨어진 그녀는 주위를 쓱 둘러보았다.

  그녀의 빨간 입술에 미소가 걸렷다.

  “마력이 풀풀 날리고 있군. 미친 마법사가 마왕이라도 소황하려 했던가?”

  말투도 변했다.

  거만함이 줄줄 흐로고 있었다.

  귀여운 외모와 전혀 어울리지 않는 말투인데도, 이상하게 거부감이 들지 않았다.

  ‘그녀가 이렇게 대단한 인물이었던가? 이건 마치 인간이 아닌 것 같았다.’

  그 어떤 인간으 이렇듯 장엄하고 위압적인 기운을 풍길 수는 없을 것이다.

  “당신······인가이 아니었군.”

  호랭이가 굳은 표정으로 말을 꺼냈다.

  “그렇다.”

  마그네트는 순순히 시인했다.

  “혹시, 드래곤이라는 존재인가?”

  “후후. 그렇다면?”

  “······역시.”

  마그네트의 눈동자에 이채가 서렸다. 자신이 드래곤이라는 것을 알았음에도 그들의 태도가 너무 덤덤했다.

  이런 경우는 처음이다.

  마치 무시를 당한 것 같았다.

  “마치 미리 알고 있었다는 듯한 말투로군.”

  호랭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인간이 아니라는 것쯤은 짐작하고 있엇다. 느낌이 전혀 달랐으니까. 다른 사신들도 당신처럼 드래곤인가?”

  “아니다. 그들은 드래곤이 아닏.”

  “흐음. 그건 이상하군.”

  호랭이는 콧잔등을 찡그렸다.

  “그럼 그들은 대체 뭐지?”

  “······뭘 묻는 건지 모르겠군. 왜 그들이 이상하다는 거지?”

  마그네트의 물음에 호랭이는 태연히 대답했다.

  “인간이 아니잖은가. 그들도.”

  “······.”

  “과거엔 그들도 인간이었을 테지만 지금은 아니야. 영혼의 색깍이 달라 인간의 영혼과 다른 무언가가 복잡하게 섞여 있다. 내가 생각하기에 그들이 그렇게 변한 데에는 분명 당신과 무슨 관련이 있을 것 같은데. 아닌가?”

  “그걸 왜 내가 말해 줘야 하지?”

  “당신도 우리에게 물어볼 말이 있을 테니까.”

  “······놀랍군. 넌 대체 뭐지? 기묘한 마법도 자유자제로 사용하는 걸로 봐선 단순한 애완동물은 아닌 모양이군.”

  이상한 것은 그것분만이 아니었다.

  마그네트는 대화 중에 은근히 드래곤 피어를 뿜어냈다.

  살아 있는 생물이라면 누구나 드래곤 피어에 충격을 받는다. 그 어떤 생물도 드래곤 피어에서는 자유롭지 못하다. 

  그런데 이들은 그러한 절대적인 법칙을 깡그리 무시하고 있었다.

  하얀 털복숭이 애완동물은 은은하고 부드러운 기운을 풍겨 드래곤 피어에 대항하고 있었다. 구체적으로 그 기운이 어떤 종류인지는 모르겠지만 굉장히 자연스럽다는 느낌이 들었다.

  샤바는 아예 영향 자체를 받지 않는 것 같았다. 아무리 강한 기운을 소아 보내는 손가락을 입에 문 채 주인의 얼굴만 쳐다보았다.

  유일하게 병규만이 미간을 찡그리며 괴로운 표정을 지었는데,그 모슴은 드래곤 피어로 충격을 받았다기보다는 너무 시끄러워서 고막이 울린다는 식의 반응이었다.

  그녀는 적지 않은 세월을 살아왔지만 이렇게 별스런 존재는 처음이었다.

  “질문은 내가 먼저 했다.”

  호랭이는 진지한 목소리로 그녀의 대답을 종용했다.

  마그네트의 고운 이마 위에 주름 몇 가닥이 잡혔다. 지금껏 어디에서도 이런 무시를 당한 적이 없었다. 적어도 그녀가 드래곤이라는 사실이 알려지면 모든 생물은 고개를 조아린다.

  저 고상한 엘프조차도.

  그런데 겨우 쥐방울만 한 하얀 털 뭉치가 고개를 뻣뻣하게 쳐든채 누가 먼저 질문했느냐를 따지고 드는 것이다.

  마그네트의 눈썹 끝이 꿈틀했다. 하지만 치솟던 눈썹은 이내 원래의 자리로 돌아갔다.

  “좋아.너희들의 그 황당한 배포에 경의를 표하는 마음으로 이번 한 번은 내가 참지.”

  그녀는 조용한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사신들이 인간이 아니라는 말은 옳다. 그들은 조금 다른 생물이지. 물론 그 변화엔 내가 밀접하게 관여되어 있다.”

  이어 그녀는 사신들을 처음 만났을 때의 이야기를 꺼냈다.

  “내 레어 긐처에 작은 촌락이 있었다. 겨우 스무 가구 정도가 옹기종기 살고 있었는데, 어느 날 불청객이 방문을 받았다. 몬스터들이었지. 마을은 불타고 사람들은 대부분 죽었다. 아이 넷과 그 아이들을 필사적으로 지키다 불구가 된 사내만이 살아남았다. 하지만 살아남은 녀석들 역시 치명상을 입은 채였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상태였지.

  우연히 유희를 나왔다가 그 사람들을 보게 된 난, 그들의 끈질긴 생명력에 흥미가 생겻다. 그래서 우연히 손에 넣은 고대 문명의 유산을 이용해서 약간의 실험을 자행했다. 그들이 인간이 아니라고 했나? 맞아.키메라지. 그들의 몸은 갖가지 실험으로 변형되어 있다. 하지만 그건 단순히 실험 때문만은 아니다. 녀석들을 살리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지.“

  “그들이 어릴 때의 기억이 없다는 것도 그런 이유인가?”

  “맞아. 그들은 가족을 잃은 슬픔에 너무 괴로워했다.”

  ‘키메라.’

  이상하게 마그네트가 건넨 말에 병규는 심장이 쑤셔왔다. 그의 몸 일부분이 결한 반응을 일으키고 있는 것 같았다. 하지만 왜 이런 반응이 오는지는 알 수 없었다.

  “자. 이제 궁금증이 풀렸으니 네가 말할 차례다.”

  “흠.”

  호랭이는 가벼운 헛기침과 함께 말문을 열었다.

  “우리는 다른 차원에서 왓다. 부득이한 이유로 시간과 공간을 넘어 낯선 세상에 오게 된 것이지.”

  호랭이는 간략하게 아공간에 휘말려 이드라센 대륙에 오게 된 사연을 설명했다.

  “이세계의 존재라.”

  마그네트의 두 눈에서 기광이 일었다.

  그녀의 차가운 눈동자에 무한한 호기심이 가득 차올랐다. 그것은 마치 미지를 탐구하는 학자의 눈빛과 같았다.

  지금까지 그 누구도 이예로의 여행에 성공하지 못했다. 많은 드래곤들이 시도를 했지만 모두 실패에 그쳤다. 그래서 내려진 결론이 차원이동만큼은 신의 능력이라는 것이었다.

  그런데 지금 그녀의 눈앞에 차원이동의 산물이 셋이나 서 있는 것이다. 게다가 그들은 절대 신 같은 존재가 아니었다.

  “좋아. 아주 흥미로운 얘기로군.”

  “자. 이제 궁금한 것은 모두 풀렸는가? 그럼 이만 가도 되겠군.”

  “잠깐.”

  돌아서려고 하는 호랭이를 마그네트가 불렀다.

  호랭이는 왜냐는 눈빛을 그녀에게 보냈다.

  “아직 궁금한 것이 잇다.”

  “뭐가 또 남았다는 거지?”

  호랭이가 물었지만 정작 마그네트의 눈동자는 다른 곳으로 향하고 있었다. 그녀가 병규에[게 물었다.

  “넌 대체 뭐냐?”

  “엥?”

  병규의 두 눈이 휘둘그레졌다.

  놀란 병규를 향해 마그네트는 무심한 얼굴로 말을 이어 나갔다.

  “넌 아무리 봐도 인간 같지가 않다. 그렇다고 다른 무언가가 폴리모프한 것 같지도 않고. 대체 정체가 뭐지?”

  그녀의 말에 병규는 적이 당황했으나 곧 자신의 특이한 능력을 보고 그러는 것이라 판단했다.

  그래서 능력자라는 것에 대해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호호. 수호신이라는 존재에게서 힘을 빌려 쓴다니. 독특한 세상이군.”

  과연 명석한 드래곤. 병규의 설명을 이내 이해했다. 그러나 그녀는 여전히 병규에 대한 d의문을 풀지 않앗다.

  “능력자라는 것에 대해서는 잘 알겠다. 하지만 넌 다르지 않는가?”

  “난 분명 능력자다.”

  “아니 달라. 그럼 묻겠다. 능력자라는 존재는 분명 수호신에게서 힘을 빌려 쓴다고 했다. 그러면 이곳에도 네가 말하는 수호신이라는 존재가 있는가? 없지. 그렇다면 과연 네가 있던 세계의 수호신들이 이곳에까지 힘을 줄 수 있는가 하는 의문이 남는군. 시간과 공간을 넘어서 말이야.”

  병규는 일순 말문이 막혔다.

  “네가 볼 때 넌 몸 자체가 변화된 것 같다. 키메라와 유사하지만 달라. 묘하게 신체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어. 다시 묻겠다. 넌 뭐지? 인간은 확실히 아닌 것 같은데.”

  쿵.

  병규는 가슴이 무너지는 소리를 들었다.

  뭐라고 대답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이때, 호랭이가 앞으로 나섰다.

  “너무 꼬치꼬치 캐묻ㄷ는군. 우린 너의 질문에 대답할 이유가 없어.”

  말을 마친 호랭이는 병규의 귀에 그만 가자고 속삭였다. 하지만 그럴 수 없었다. 마그네트가 입꼬리를 들어 올리며 차갑게 한마디를 뱉었기 때문이다.

  “누구 마음대로.”

  우뚝.

  소녀들을 챙기려던 병규의 걸음이 멈춰졌다. 그는 인상을 쓰며 그녀를 돌아보았다.

  “우리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하지?”

  “협조해라.”

  “협조?”

  그녀의 미소가 짙어졌다.

  “그래. 난 네 몸에 무한한 궁금증이 생겼다. 그런 궁금함이 풀릴 때까지 네 몸을 내게 바쳐라. 물론 희생만을 바라는 건 아니야. 원한다면 네 몸의 비밀을 캐낸 다음 사신들처럼 새로운 능력을 넣어 주마.”

  “싫어.”

  병규는 그녀의 제안을 일언지하에 거절했다.

  마그네트의 아름다운 얼굴에 몊 가닥 주름이 잡혔다.

  설마 드래곤인 자신의 제안을 이렇게 과감히 거절하다니. 적어도 이번 제안은 그녀로선 최대한 신경을 써 준 것이다. 세상의 어떤 드래곤도 인간에게 이런 제안을 하지는 않는다.

  그저 무조건적인 강압만이 있을 뿐이다.

  인간이 벌레들에게 예의를 지키지 않는 것처럼.

  그만큼 드래곤과 인간 사이의 벽은 높았다.

  “날 못 믿는 것인가? 드래곤은 한번 내뱉은 말은 반드시 지킨다. 맹세하지. 널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마그네트의 거만한 말투에 병규의 안색이 싸늘하게 굳었다.

  원래 소심하기 그지없던 성격이었지만, 지금은 그 어느 때보다 흥분한 상태였다.

  상대는 드래곤이다.

  사상 최악의 맞수인 셈이다.

  그런데도 이상하게 겁이 나지 않았다.

  그녀의 강압에 묘한 반발심마저 일었다.

  그래서 마그네트의 살레에 전신의 털이란 털이 모두 치솟는 것같은 상황에서도 냉정하게 대답할 수 있었다.

  “당신의 실험을 위해 날 희생하긴 싫어.”

  “······할 수 없군.”

  잠시 말없이 병규를 바라보던 마그네트가 빨간 입술 끝을 들어 올리며 말했다.

  “곱게 말을 안 듣겠다면 강제로 할 수밖에.”

  천천히, 그리고 아주 느긋하게 내리감았던 그녀의 두 눈이 떠졌다.

  츠츠츠츠츠.

  끔찍한 살기가 그녀의 전신에서 배어 나왔다. 그것은 너무도 가공스러운 것이었다.

  화가 난 드래곤의 본모습은 정녕 두려웠다.

  그때였다.

  “마,마그네트.”

  경악 어린 음성이 들려왔다. 동시에 5인의 남자들이 빠른 속도로 그녀의 전면에 나타났다.

  그들을 본 마그네트의 표정이 얼음처럼 차가워졌다.

  “이 끔찍한 살기는 뭐야?”

  사신들은 마그네트의 전신에서 흘러나온 살기에 움츠려들면서도 어리둥절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다.

  그들은 샤바의 명을 받들어 지금까지 제이콥과 그 일행들을 보호하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몬스터들이 흩어졌다. 소환진이 무너졌기 때문이었다.

  비로소 여유가 생긴 그들은 마스터와 격전 중에 사라진 마그네트를 찾아 이곳까지 달려왔다.

  그런데 마스터와 마그네트를 보고 반가운 마음에 달려왔던 그들에게 지금 그녀에게서 쏟아져 나오고 있는 살기는 너무도 생소하고 의아한 것이었다.

  마그네트는 은빛 눈동자를 천천히 굴려 사신들을 훓어보았다.

  파랗게 변해 버린 그녀의 입술이 조금 열렸다.

  “생각보다 일찍 왔군. 상관없겠지. 일이 끝난 후 기억을 삭제해 버리면 되니까.”

  그녀의 목소리는 너무도 냉정했다.

  이미 마그네트는 병규를 사로잡기로 결심을 굳혔다. 그냥 놓아 주기엔 너무도 매력적인 실험체였기 때문이다.

  츠츠츠츠츠.

  마그네트의 전신에서 흘러나오는 살기가 점차 강해졌다. 사신들이 이미 안색이 대변한 채 무릎을 부들부들 떨었고, 병규의 인상 역시 잔뜩 일그러졌다.

  “서, 설마 이 엄청난 기운.”

  “마그네트는 ·····드레곤······이었던가.”

  사신들은 비로소 지금의 상황을 어느 정도 인지 할 수 있었다. 다만 수십 년을 함께한 그녀가 드래곤이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는 게 힘든 모양이었다. 하지만 눈앞에 펼쳐진 현실을 언제까지 부정하고만 있을 수 없었다.

  털썩.털썩.

  사신들이 하나 둘씩 무릎을 꿇었다. 병규는 숨을 헐떡였다.

  “꽤 잘 버티는구나. 과연 네가 내 본신을 보고도 그렇게 버틸 수 없는지 두고 보겠다.”

  츠츠츠츠츠.

  마그네크의 기운이 기하급수적으로 강해졌다. 그녀는 마침내 폴리모프를 풀고 본신의 능력을 마음껏 해방시키려 했다.

  “그런 것 같네요.”

  샤바는 사상 초유, 사상 최강의 바퀴벌레 왕자님이었다.

  병규와 사신들으 기절한 마그네트를 내려다보며 고민에 빠졌다.

  “어쩌죠?”

  “글쎄.”

  그들은 정말로 심각하게 고민했다.

  드래곤이 짱돌이 맞아 기절한 초유의 사건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한단 말인가. 머릿속이 다 복잡해질 지경이었다.

  물론 드래곤인 그녀가 이렇게 쉽개 당한 것은 인간의 몸으로 폴리모프 했기 때문이다. 만약 그녀가 드래곤 본체로 돌아갔더라면 샤바는 절대 이길 수 없었던 것이다.

  “그냥, 깔끔하게 처리할까요?”

  기절한 그녀를 어떻게 처리하냐를 두고 한참을 심각하게 고민하던 중, 나이프가 병규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마그네트를 기절시킬 때, 샤바가 외친 말 때문인지 사신들은 병규를 깍듯하게 대했다.

  병규는 물끄러미 사신들을 살펴보다 피식하고 웃었다.

  “정말로 그녀를 죽일 생각입니까?”

  “······.”

  사신들에게선 대답이 없었다.

  이대로 마그네트가 깨어남다면 필시 후환이 있을 것이다.

  죽여버리는 r성이 상책이다.

  아무리 드래곤이라도 폴리모프 한 상태로 기절해 있다면 충분히 제거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녀와 수십 년을 함께해 온 사신들로서는 도무지 그녀를 해할 수가 없었다.

  그저 귀여운 막내라고만 생각했던 그녀다.

  이제와 갑자기 드래곤이었다고 믿으라고 해도 도저히 방다들일 수 없었다. 이성이 받아들여도 가슴이 거부했다.

  사신들은 어세신의 최정상에 있는 존재들이다. 살인을 밥 먹듯 했고, 손에서 피 냄새가 마를 날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그들은 잃어버린 인성만큼이나 돌료애가 깊었다.

  카리오스가 떠나겠다는 말에 사신들이 한꺼번에 샤바에게 도전장을 내밀었던 것도 그런 이유에서였다.

  어쩌면 그것 모두가 드래곤인 마그네트가 그들의 몸과 마음을 조작할 때 심어 놓은 감정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렇다 해도 그들 간의 정이 덜할 리는 없을 것이다.

  병규와 호랭이는 사신들에게 마그네트와 관련된 얘기를 하지 않았다. 사신들은 아직 자신들이 마그네트에 의해 만들어진 키메라라는 사실을 전혀 알지 못했다.

  조용히 사신들의 얼굴을 살피던 병규가 씩 하고 웃었다.

  “그냥 가죠.”

  이들은 절대로 마그네트를 죽이지 못할 것이다.

  병규가 잠든 소녀들을 등에 업고 어깨에 얹자, 머뭇거리던 사신들이 하나 둘 그를 도와 소녀들을 챙겼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남은 사일런스는 마그네트를 편편한 바위 위에 조심스럽게 올려놓았다. 어린 동생을 보는 오라버니의 그윽한 시선으로 그녀를 내려다보던 사일런스는 눈을 감으며 축복을 빌어 준 후 자리를 떴다.

  “배가 많이 고프세요. 어서 가죠.”

  병규는 사신들을 지휘하며 ‘화룡의 어금니’를 걸어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 뒤를 소녀들을 업은 사신들이 조용히 따랐다.

  

 오늘 뒤집어쓴 코피가 더 많소이다

  누굴 죽여주길 원하오?

  샤바와 사신들의 격돌!

  그라면 해낼 수 있을 것이다

  사상 초유의 매직미사일

  그곳에서 넌 영원히 고통받을 것이다 

  오우거의 힘, 그리고 핏빛 각성

  마왕을 먹겠다?

  인간이 아닌 넌 대체 뭐냐?

  떠나는 그를 위한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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